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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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머리는 반백이 되고
나의 배는 복통처럼 불러지고
나의 기침은 그칠 새 없다
이제는 이제는 이제는
젊었을 때는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참말로
해를 쪼이고 있는 도마뱀처럼
나의 발가락이 물가에서
갈색이 되어 가는 것을 쳐다보며
나의 발이
그 머리를 갸우뚱 거리는 걸 바라보았었다
세월 가는 줄도 모르고서

- J. 프레베르, '늙는다'에서-103-104쪽

너와 나 사이 그 가파른 시간의 단층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단 말인가. 별빛처럼 단번에 네 눈, 머리, 가슴에 나의 열일곱 시절을 박아넣어, 너의 온 정신을 적실 길이 있다면 좋으련만.

내가 제일 예뻤을 때
나의 머리는 텅 비고
나의 마음은 무디었고
손발만이 밤색으로 빛났다
내가 제일 예뻤을 때
나의 나라는 전쟁에서 졌다
그런 엉터리 같은 일이 어디 있느냐고
블라우스 팔을 걷어올리고 비굴한 거리를 쏘다녔다

- 이바라기 노리코, '내가 제일 예뻤을 때'에서-109-110쪽

섹스는 자연이라고 나는 믿었다. 그것은 본래 자연이 만든 순환의 한 과정에 불과하다. 특히 남자들에게 섹스는 환상이 아니라 현실 문제이다. 여자들이 종종 섹스를 통해 환상에 근접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남자들은 섹스를 통해 환상을 현실로 만든다.-119-120쪽

육체는 다만, 풀과 같은가.-139쪽

"죽음은 삶의 한 가지 에피소드처럼, 끝내 멈추지 않고 다가오고 있다는 인식에, 나는 하루하루 가까이 다가갔다"라고 톨스토이는 썼다. 나는 친애하는 톨스토이에게 기꺼이 동의했다. 멸망은 필연이다. 받아들여 그것을 친구로 삼는다면 최상의 죽음을 얻을 것이다.-194쪽

"연애가 주는 최대의 행복은 사랑하는 여자의 손을 처음 쥐는 것이다."-200쪽

여성에게 있어 연애는 영혼으로부터 감각으로 옮겨가는지 모르지만,

남자에게 연애는 감각으로부터 영혼으로 옮겨간다,

라고 그 순간 생각했다. 그것은 내가 관념적으로 연애를 상상할 때와 너무도 다른 결론이었다.-202쪽

늙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노인은 '기형'이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따라서 노인의 욕망도 범죄가 아니고 기형도 아니다, 라고 또 나는 말했다. 노인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젊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

라고, 소리없이 소리쳐, 나는 말했다.-250-251쪽

은교를 만나면서 나는 보다 젊어지고 싶었다. 그게 죄인가. 그 애를 통해 아직도 생피처럼 더운 나의 욕망을 확인했을 뿐, 나는 아무런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다. 나의 은닉된 욕망에게 형벌을 선고할 수 있는 자는 그러므로 나뿐이다. -281쪽

사랑받는 것은 타버리는 것
사랑하는 것은 어둔 밤에만 켠 램프의 아름다운 불빛
사랑받는 것은 꺼지는 것
그러나 사랑하는 것은 긴 긴 지속

- R. M. 릴케, '말테의 수기'에서-348-3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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