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우연한 시선 - 최영미의 서양미술 감상
최영미 지음 / 돌베개 / 2002년 11월
구판절판


깨어진 그릇과 껍질이 벗겨진 레몬은 바로크 시대의 문학과 미술에 유행한 바니타스(vanitas: 인생무상을 뜻하는 라틴어)를 암시하는 주제이지요. 쾌락의 쓰디쓴 뒤끝을 폭로하기 위해 탐스러운 레몬의 껍질을 벗기어 그 시큼한 속을 보여준 겁니다. 헤다(Willem Clasez. Heda, 1594-1680)를 비롯한 17세기 네덜란드의 정물화가들은 그림을 통해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할 뿐 아니라 영혼도 고양시키고 싶었지요. 인간과의 접촉에 의해 망가진 물상들을 통해 "삶은 끝나고 죽음이 항상 우리 곁에 있음"을 환기시키려 애썼지요.-90쪽

그런데 언젠가는 시들 레몬이 왜 이리 탐스러운지 언젠가는 산산이 부서질 유리잔이 왜 이리 단단하게 빛나는지?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시지와 딴판으로 매끈한 표면에서 오히려 삶의 기쁨이 반짝입니다. 바로 그 이중성에서 17세기 네덜란드 시민사회의 단면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호화로운 은제식기와 수정잔으로 부를 과시하는 한편, 금욕적인 교훈을 담은 그림을 자신의 거실에 걸고 싶었던 부르주아들의 이율배반적인 욕망에서 매우 사실적이며 동시에 상징적인 정물화가 탄생했지요. 현실지향적인 가치와 칼뱅교의 윤리가 충돌해 레몬이 벗겨지고, 유리잔이 넘어졌지요.
삶을 통해 죽음을 환기시킨다? 참으로 유럽적인 발상입니다. 인생무상을 표현하기 위해 왜 하필이면 식탁의 정물들을 골랐을까. 일용할 양식과 그 양식을 담는 그릇들. '허무'조차도 눈에 보이는 사물들로 증명해야 했던 서양인들. 헤다의 <정물>에서 죽음의 냄새를 맡으며 저는 감각적인 서양문화의 본질을 이해하게 되었지요.-90-92쪽

무릇 인상이란 주관적인 겁니다. 우리는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합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이미지의 과장이나 왜곡이 일어나지요. 모네는 시각적 인상에 충실한다는 인상파의 원칙을 가장 끝까지 밀고 간 화가입니다. 그러나 그의 희망과 달리 모네는 시각적 인상에 충실한 완벽하게 객관적인 그림만을 그릴 수는 없었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높은 하늘의 구름이 인간 여자의 얼굴에 스치듯 걸릴 수는 없지요. 그 순간에 모네가 본, 모네가 느낀 자기만의 인상을 표현한 겁니다. 여기에 그의 딜레마가 있었고 그 모순에서 현대미술이 싹트게 됩니다. 자신의 눈에만 집착하다 그는 현대회화를 주관주의로 이끌었습니다.-140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