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는 장미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황대권 지음 / 열림원 / 2006년 10월
구판절판


민들레가 장미를 부러워하지 않는 것은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야생초가 만발한 들판이 아름다운 이유도 자신을 온전히 사랑할 줄 아는 온갖 꽃과 풀들이 서로 어울려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 사회도 야생초 화단처럼 평화롭고 아름답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타고난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그 사랑의 힘으로 남을 사랑해야 합니다. 민들레는 결코 장미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작가의 말쪽

생태위기의 시대에 생명의 소중함과 환경보전을 설파하는 지식인만큼 괴로운 존재가 있을까? 차라리 모르면 편안하다. 알고 있으니 괴롭고 그것을 실천으로 보여주지 못해 더욱 괴롭다. 상처 난 곳에 소금 뿌린다고 비판적 지식인의 형태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삐딱한 보수주의자들은 스스로 지키지도 못하는 것을 입으로만 떠들어댄다고 비아냥대니 더더욱 괴롭다.
산업문명의 소산이면서 어떻게 보면 산업문명의 기득권자이기도 한 지식인의 비판적인 말과 행동은 자기모순으로 보이기도 한다. 매일 자동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석유문명의 폐해를 설파하고, 슈퍼마켓에서 농약에 찌든 농산물을 사먹으면서 농약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하루종일 자신을 돌아볼 틈도 없이 바쁘게 나다니면서 느림의 미덕을 찬양하는가 하면, 정보통신의 발달로 인해 엄청나게 늘어난 업무량에 시달리면서 단순 소박한 삶을 권장한다. -98쪽

확실히 현대의 조건 속에서 안다는 것과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하는 것과의 괴리는 날이 갈수록 커지는 듯만 하다. 그 이유는 현대 산업문명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인 '개인의 파현화' 현상 때문이다. 개인은 단지 시스템을 유지하는 부속품일 뿐 개인에게 자율적인 삶의 공간은 좀처럼 허용되지 않는다. 자유세계라고 흔히들 이야기하지만 자유라는 말이야 말로 산업화된 문명사회가 만들어낸 가장 큰 사기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슈퍼마켓에 들어가서 진열대 위에 놓인 여러가지 상품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자유이지 슈퍼마켓 그 자체를 거부할 수 있는 자유는 아니다.-99쪽

현실 속에서 깨어 있는 상태를 '중도'라고 한다. 중도는 겉보기에 적당한 타협과 비슷해 보이나 내면을 들여다보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중도는 진리로 나아가는 치열한 물음의 과정이다. 나의 몸이 비록 현실에 갇혀 있을지라도 순간순간 자신의 행위가 생명의 요구에 옳게 반응하고 있는 것인지 되물어보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어찌 할지 몰라 고뇌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일종의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자동차를 타고다니는 사실 자체만으로 곤혹스러워할 것이 아니라 자동차를 타고 있는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생태적으로 각성이 되어 있는지를 늘 물어보자는 것이다. 이것은 생태적이고 저것은 생태적이 아니다라고 하는 이분법에 사로잡혀 자신의 행위를 통제하려다가는 어느 날엔가 (반反이 아니라) '비(非)생태적인 반대자'로 남아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102쪽

생명은 잠시도 쉬지 않고 흘러가면서 무한한 다양성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분법으로는 생명의 이 변화무쌍함에 대응할 수가 없다. 늘 깨어 있는 상태에서 똑바로 바라보는 수밖에 없다. 개인의 깨달음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표현되는가는 그 누가 간섭할 일이 아니다.-102-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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