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는 늘 거짓이 그림자처럼 드리우기 마련인 듯했다. 아니, 어쩌면 거짓은 조명일지도 몰랐다. 행복이라는마네킹을 비추는 밝고 좁은 조명. - P148

수영이어느 때보다 고맙고 사랑스러웠지만 똑똑히 마주 보게 된자신의 무력은 혐오스럽고 무서웠다. 경계는 불분명했고그래서 경계가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 P149

종현은 자신의 무력이 수영에게까지 번지는 것을 볼 수밖에 없었다. 고맙다는 말조차 할 수 없는처지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이내 미안하다는 말조차 할 수없는 처지가 돼 있었다. 시험도 더 좋아지고 행복해지기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파탄 나 더 굴러떨어지지 않기 위해 반드시 합격해야 하는것이었다.  - P151

물 위에 뜬 이파리 한 조각, 자신의 처지였다. 불안은 자신을 매일 규칙적으로 움직이게 했지만 조금씩 부식시키기도 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버티고 견뎌 내야했다. - P152

가능성의 높낮음과 무관하게 엄습해 오는 불안과 근심은 자신의 것이고 반드시 자신의 것이어야 했다. 수영이 자신을 사랑해기 때문에 공유할 수 없었다. 동시에 더는 수영을 힘들게하지 않기 위해서, 그런 자신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공유할 수 없기도 했다. 모호한 경계였다. 모든 경계가 그렇게모호해지고 있었고 그것이 함께 산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 P156

어쩔 수없었다. 두 사람이 함께 살게 된 것은 분명 사랑 때문이지만, 사랑만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기울어 있었다. 아마 사랑일 것이라고, 그렇게 믿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 이상을 바라는 것도, 더 깊게 생각하는 것도 지금의 자신에게는 모두 사치였다. 어쩔 수 없는 일 같았다. 빠르게 달릴수록 가까운 풍경은 흐릿해져 흘러가니까. 그렇게 흘려 지나치도록 달려야만 목표에 가까워질수 있으니까. - P159

종현과 주고받은며칠 간의 문자들을 훑어봤다. 별 내용 없는 짧은 말들, 무미건조한 생활에서 떨어져 나온 각질들.
행복은 싸구려 인화지에 뽑은 사진. 좁은 계도의 색상속에서 엇비슷하게 웃는 얼굴들과 위치만 다른 브이 자손가락만 보이고, 그나마도 쉬 퇴색해서 쭈글쭈글해진다. 모르지 않았다. 생활을 반짝거리게 해 주던 기쁨이 사라지고 시험이 가까워 올수록 더 그렇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고 각오도 하고 있었다.  - P187

"터널 속에 갇힌 것 같아. 나갈 수 있을 거라고, 나가야한다고 혼자 걷고 계속 걸었는데, 걷고 있었는데 눈앞에서 앞도 뒤도 다 무너져 내리는 걸 보고 있는 것 같아. 모르겠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겠어. 힘들다는 느낌마저 안 들어. 끝인데, 끝이 안 나는 끝에 나 혼자만 감금당해 있는 것 같아."  - P286

미경과 헤어지고 나서도 종종 배가 고팠다. 처음 몇 번만났을 때는 아니었다. 두어 번쯤 자고 난 뒤, 관계의 안정감을 확인한 뒤부터였다. 금방 먹고 나왔는데도 시야에서 미경이 사라지면 허기가 밀려왔다. 빈 집에 혼자 들어가 라면이라도 하나씩 끓여 먹어야 했다. 오래가지는 않았다. 이내 배고픔과 다른 허전함이 생겼다. 공허라고 할만한, 추상적이고 모호한 감각. 지금의 허기는 달랐다. 수영과는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육체적 접촉도 전혀없었다. 추상적이고 모호한 관계였다. 하지만 감각은 사무치도록 사실적이고 명징했다. - P304

부서지는 모든 관계가 그렇듯, 자신이 망친 것이었다. 모든 것을 자신이 망쳤다고 할수는 없지만 자신이 망칠 수 있는 것은 모두, 스스로 망쳐버린 것이었다.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사치와 자유로, 유혹하고 유혹당할 수 있는 그 힘과 권리로. - P328

상수는 창문에 비치는 수영의 얼굴을 물끄러미 봤다. 담담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예전 같은 떨림도 아니었다. 어딘지 쓸쓸했다. 모두 지나갔다는 감각만, 미경은 잃어버렸고 수영은 지워졌다는 사실만 남아 있었다. - P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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