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인생은 이해할 수 없어서 불쌍한 것이다. 문제를 푸는 사람 자신이 문제의 구성 성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풀수가 없는데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풀어야 하니까 더 불쌍한 것이다. - P6
내가 조금은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시를 읽는 일에는 이론의 넓이보다 경험의 깊이가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어떤 일을 겪으면서, 알던 시도 다시 겪는다. - P8
브레히트가 주로 사용한 말은 ‘필요하다 brauchen‘였던 모양이다.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적어 보내면 ‘당신이 필요해요‘라는 답장을 받게 되던 한 사람을 생각하는 일은 마음을 쓸쓸하게 한다. 베를라우가 쓴 것으로 짐작되는 다른 짧은 시 한 편에는 ‘약점‘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고 거기엔 이런 구절이 적혀 있다. "당신에겐한 가지도 없었지만 내겐 한 가지 있었지. 그건 내가 사랑했다는 것."(1951.1.28.) 이 말이 사실이라면 베를라우는 끝내 브레히트를 온전히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상호의존적인 약점이 있을 때 사랑은 성립된다. 상대를 사랑하는 사람과 상대가 필요한 사람은대등하게 약하지 않다. 전자는 내가 상대방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지만, 후자는 상대방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할 것이다. - P21
브레히트의 이 시를 받아 보고 베를라우는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 재확인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 했다. 브레히트가 나를 원하기 때문이고, 또 그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내 것이 아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자기가 아니라 타인을 위한 일이 됐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의무‘가 되면 자신을 망가뜨릴 ‘권리‘를 박탈당하게 된다. 그렇게 늘 정신을 차려야 했고 빗방울까지 두려워해야 했다면 그 사람은 행복했을까. 이 시를 읽으면 알 수 있다. 베를라우가 브레히트를 사랑했다는 것을. 그러나 브레히트가 베를라우를 사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브레히트가 베를라우를 사랑했다 하더라도, 적어도 베를라우가 브레히트를 사랑한 방식과는 달랐을 것이다. 여하튼 이런 식으로 읽으면 이 시는 우리가 알던 그 시가 아니게 된다. 후반부에 감동하는 것이 아니라 전반부에 상처받는 독법이다. 그것은 ‘당신을 사랑해요‘와 ‘당신이 필요해요‘가 다르다는 진실이주는 상처다. - P23
시인에게서 내가 배운 것은 ‘나‘에 대한 조심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는 (아이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새처럼 다뤄야 한다. 새를 손으로 쥐는 일은, 내 손으로 새를 보호하는 일이면서, 내 손으로부터 새를 보호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내 삶을 지켜야 하고 나로부터도 내 삶을 지켜야 한다. 이것은 결국 아이의 삶을 보호하는 일이다. 아이를 보호할 사람을 보호하는 일이므로 자신을 사랑하지않는 부모는 아이에게 가해자가 되고 말 것이다. - P26
요컨대 이 노래는 간절한 ‘무‘를 냉혹한 ‘경‘이 무너뜨리는 구조로 돼 있다. 인생에는 막으려는 힘과 일어나려는 힘이 있다는 것. 아무리 막아도, 일어날 어떤 일은 일어난다는 것. - P34
‘나는 내 뜻대로 안 된다. 너도 내 뜻대로 안 된다. 그러므로 인생은 우리 뜻대로 안 된다.‘이런 생각을 할 때 나는 수천 년 전의그들과 별로 다르지 않아서 들어본 적 없는 그 먼 노래가 환청처럼 들린다. - P36
죄 없는 인간에게 저주를 내리고 이에 저항하는 인간을 굴복시켜 결국 다시 자신을 인정하게 만드는 이 가학적인 신의 잔인한 게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슬라보예 지젝은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 신의 일방적인 발언을 이렇게 냉소한다. "쩌렁쩌렁 울리는 신의 말 때문에 욥의 침묵, 욥의 묵묵부답이 더욱 잘 들린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평결한다. "신은 정의롭지도 불의하지도않다. 다만 무능할 뿐이다." 그는 『욥기』가 욥의 질문에 대답하는데 실패했다고, 그러므로 『욥기』로부터 욥의 위대한 질문을 분리해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이지 않는가. 그는 그저 신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고 그리되었으니 됐다는 듯이 행동한다. 왜일까. 나는 신학자가 아니어서 신학적 정답을알지 못하며 다만 침묵할 때의 욥의 마음을 겨우 짐작해볼 따름이다. 욥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 때문에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그 불행의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럽다. 인간은 자신의불행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견디느니 차라리 어떻게든의미를 찾으려 헤매는 길을 택하기도 한다. - P43
신은 그때 비로소 탄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력히 입증하는 증거 앞에서 오히려 신이 발명되고야 마는 역설. 가장 끔찍한 고통을 겪은 인간이 오히려 신 앞에 무릎을 꿇기를 선택하는 아이러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마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나는 이유도 모른 채 아이를 잃은 부모가 갑자기 독실한 신앙인이 된다 해도 놀라지 않을 것 같다. 무신론자에게 신을 받아들이는 일이란 곧 사유와 의지의 패배를 뜻할 뿐이지만, 고통의 무의미를 견딜 수 없어 신을 발명한 이들을 누가 감히 ‘패배한‘ 사람들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이 신을 발명하기 전에먼저 인간이 인간을 구원할 생각이 없다면 말이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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