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적으로 출발한 박물관들이 제국주의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고는 있지만, 구성부터가 역사와 문명의 일그러진 부분을 그대로 담고 있어 불편해질 때가 있다. 아시아의 박물관에 서양 유물이 풍부한 경우는 잘 없다. 반면 서구에선 어딜 가나 아시아 유물이 풍부하다. 이런 포함 불포함의 관계들을 생각하면 입맛이 쓸 수밖에 없다. 동양이 근대화의 정신없는 급물살에 휩쓸려 있던 시기에 서양은 상대를 끊임없이 연구했다. 모으고, 분류하고, 정리했다. 세계는 그런 식으로 만난 것이다. 한쪽이 다른 한쪽에 일방적으로 포함당하며 이 마음속의 요철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계속 쓸 수밖에 없을 듯싶다. - P69
마음속의 저울이 잘 작동하는 사람들과만 가까이 지낼 수 있는 것 같다. 마음속의 저울은 옳고 그름, 유해함과 무해함, 폭력과 존중을 가늠한다. 그것이 망가진 사람들은 끝없이 다른 사람들을 상처 입힌다. 사실 이미 고장 난 타인의 저울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일들은 별로 없는 듯하다. 그저 내 저울의 눈금 위로 바늘이잘 작동하는지 공들여 점검할 수밖에. - P107
조심스럽게 다음 발짝을 확인하고 내딛는 성격이고 크게 바뀌지 않겠지만, 그래도 가끔 어떤 무모함을 열망할 때가 있다. 갑자기 여행을 시작했던 그해가, 활동 영역을 바꿔보겠다고 마음먹었던 여러 순간들이 나에겐 다이빙이었다. 다이빙에 가장 가까운 행위였다. 나무 발판을 겁내며 건너던 그때의 나는 몰랐지만. - P113
먼지 한 톨 내려앉지 않도록 닦는 사람은 사실 먼지보다 말각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제대로 기억하지 않으면 나아가지 못한다. 공동체가 죽음을 똑바로 애도하고 기억하고 전하지 않으면..... 죽은 자들을 모욕하지 않는 방향으로 기억을 단단히 굳히지 못하는 공동체는 결국 망가지고 만다. 역사교육을 전공하며 공부한 자세한 내용들은 많이 잊었지만 그것 하나는 배운 것 같다. 배운 것을 자꾸현실과 비교해보며 다급함에 종종거릴 때가 있다. - P116
어느 정도까지 공격적으로 말해도 될 것인가가 오래 하고 있는 고민이다. ‘조신하게 예쁘게 말해‘ 하는 식의 강요는 지긋지긋해서 굴절 없이 똑바로 말하고 싶은데 또 어느 선을 지나치면 따가운 공격성밖에 남지 않는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대로 하면서도 부정적 감정의 발산으로 그치지 않도록 적정 수준을 찾는 것...... 고민은 하는데 매번 실패하는 느낌이다. 언어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정교함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면 깎아낸 부분이 남긴 부분보다 많아 심지 없는 완곡어법을 쓰게 되고, 세게 밀어붙이는 글을 쓰다 보면 꼭 엉뚱한 사람이 다치게 되어 후회스럽다. 일단은 조롱과 비아냥, 일반화를 피하려고 노력한다. 복잡하게얽힌 세계에서 한 사람을 덩어리로부터 떼어내 개별적으로 보고 싶다. - P119
사회적 맥락과 개인을 동시에 온전히 이해하는 것, 내가 쓰는 언어의 요철을 없애면서도 예각을 잃지 않는 것. 그 지난한 두 가지가 포기할 수 없는 목표인 것 같다. 실패하면 그다음 번에 다이얼을 더 잘 돌릴 수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계속한다. - P120
필수적인 휴식이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고 일부에게만 주어지고 있는 것 같다. 누구나 당연히 인간적인 휴식을 누릴 수 있는 사회는 요원해 보이고, 혹사와 착취는 종종 근면과 편의의 표면을 하고 있어 구분을 하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듯하다. 모두가 쉴 때 쉴 수 있게, 일하다 병들거나 죽지 않게 조금씩 불편해지는 것도 감수하고 싶은데 변화는 편리 쪽으로만 빠르고 정의 쪽으로는 더뎌서 슬프다. - P150
죽고 없는 사람들이 한때 머물렀던 장소에 찾아가는 마음이란 지도 위를 투명한 점선으로 뒤덮는 것과 비슷하지 않나 싶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쌓여서 천천히 그려지는 것들이 있다는 것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완벽하지 않은, 지나간 사람들의 바통을 건네받아 나도 쓰고 싶다고 중얼거렸던 듯도 하다. - P156
인간의 몸이 아주 복잡한 유기체라는 점을 종종 곱씹는다. 하나의 통일된, 완벽한 시스템이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온갖 부분과 요소들이 저 나름의 목표를 가지고 있고 그 목표는 가끔 서로 상충하거나 갈등 관계에 놓이기까지 한다는 것에 대해서. 뇌가 원하는것과 위가 원하는 것이 다르고, 이 호르몬의 목표와 저 호르몬의 목표가 다른 식인데 성(性)과 관계된 파트들이 유난히 저 혼자 가지런할 리 없다. 끝없이 업데이트되는 과학과 의학의 연구 결과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 몸이 이토록 복잡하고 다층적일 때, 이분법적 정체성과 모두에게 똑같은 사랑의 방식은 실제에 대한 지나치게거친 요약일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안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의 한사람인 어슐러 르 귄은 ‘안다‘고 말해야 할 자리에 ‘믿는다‘는 말이 끼어드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했고, 이에 깊이 동의한다. 과학의 자리에 과학이 아닌 것이 들어와서는 곤란하다.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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