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내가 그 이후를 어떻게 지나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이후, 내가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누군가가 내 몸을 보고 흥분하고 발기하는 일을 선물처럼 여기게 되었다. ‘첫‘이 아닌 것들의의미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되었다. 사랑에서 애걸로 되는 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자를좋아하는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 조금은 덜 실패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도 영화도 내가 선택한 잘못 찾아들어간 길이란 걸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그건 과연 유의미한 변화인 것일까? 무의미한변화는 없었던 것인가? 돌이킬 수 없는 변화만이 유의미한 것인가? 아는 것과 변하는 것은 얼마나 어떻게 다른가? 기억의 열람만이 가능할 뿐이라면 무엇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겠는가? - P86

풍경과 동경이 만들어낸 정경은 아름답기만 하고, 그가 이곳에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나는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져 상상 속의 그처럼 웃어버렸다. - P128

그래,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은 이제 줄었을지도 몰라. 어쩌면 함께하는 시간보다 생각하는 시간이 더 많을지도모르지. 근데 내 마음이, 그애를 생각하는 내 사려의 깊이와 농도가 달라. 이건 물리적인 시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새로운 차원의 시간을 획득하는 거라고. - P188

온몸에 힘이 빠진 채 서로를마주 보고 누워 있을 때면, 그리고 그를 안을 때면, 나는H를 안고 있는 것이었지만 너무나 두터워진 시간을 끌어안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 P212

그럼에도, 우리에게 또 한번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이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을까? - P210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하나하나 기억할 수 없을 만큼의수많은 첫들, 첫이 아니게 되어 좋았던 것들, 반복되는 것들, 익숙해진 것들과 질린 것들 사이, 우리는 그저 그다음이 궁금했던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다른 사람이 필요했던것이 아니라 서로가 아닌 것이 필요하고 궁금했다고. 그럼에도 우리는 처음으로 헤어져야 했기에 유려하지 못했고, 이별 아닌 다른 방법을 몰랐던 것이라고도 나는 생각한다. - P215

오래된 연인은 이별에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렇기에H와의 이별이 급작스러운 것이 아님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 P262

유한한 운명을 지닌사랑은 곁을 흐르다 사라지지만, 그 사랑이 남겨놓은 흔적들은 계절이 돌아오듯 시간 속에서 강렬하게 기억을 환기한다. 그래서 이별과 함께 시작되는 김봉곤의 글쓰기는날씨가 아니라 계절의 글쓰기이며, 사랑의 환희와 희열을이어가는 내밀한 몸짓이다. - P336

진정한 사랑이란 상대를 포용하고상처를 넘어서는 것임을 머리로는 모두 알지만, 상대에게이미 마음의 일부를 주었을 때 점점 더 자기파괴적이고불안정하고 위태로워지는 사랑은 자신을 버리는 일처럼뿌리치기 어려운 것이다. - P340

다시 태어날 것을 다짐하고 있지만, 김봉곤은 더이상 그 강렬한 밀도가 담보하는 파괴성에 홀리는 것 같지 않다. 인생의 모든 변화 앞에서 매번몸을 해체하며 다시 태어나는 극적인 탈피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때로는 수면의 위아래를 오가는 미약한 부력으로 살아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이제 그는 안다. 그렇게그의 글쓰기는 몸을 바꿨다. 일상의 소용돌이가 그친 후부서지는 강렬한 슬픔 속에서 비로소 글쓰기의 활동이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나른하게 이어지는 일상의 건조하고 옅은 슬픔들 사이로 글쓰기가 끊이지 않고 흐르며 ‘문장- 풍경‘을 만들어간다. - P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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