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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 슈필라움의 심리학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5월
평점 :
사적인 상황이나 배경은 알 수 없지만, 이처럼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또 있을까. 김정운 작가의 새로운 책을 접할 때마다 느끼는 생각이다. 초창기부터 주장했던 휴식(노는 만큼 성공한다), 스스로에 대한 대면(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사회적 지위에 구속받지 않는 자신(남자의 물건), 문화과 관점에 대한 새로운 창조(에디톨로지)에 이어 이번에 그는 '공간'을 화두로 들고 나왔다. 그는 자신의 작업실(미역창고)을 예로 들면서 '슈필라움'이라고 하는 심리적 여유 공간의 개념과 필요성에 대해 역설한다.
나이가 들면서 나 스스로도 점점 공간에 대한 필요와 이해를 달리하게 된다. 나만을 위한 공간, 진솔하게 나를 대면할 수 있는 공간, 타인을 의식하지 않으며 괜한 허세를 부리지 않아도 되는 공간의 필요성을 실감한다. 지금껏 충분히 '보이기 위해' 살아왔다. 이제 점차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볼 줄 아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자기만의 공간에서 자기 본연의 모습에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한참을 달리다가 갑자기 사회적 지위를 잃게 되는 이들이 느끼는 박탈, 좌절, 허무가 그들을 어떻게 망치는지 충분히 보고 있지 않은가.
그의 솔직하고 맛깔나는 화법은 이번 책에서도 여지없이 그 진가를 발휘한다. 마치 작가와 대면하듯 유쾌하게 독서를 하면서 공간에 대한 고민의 시간도 갖게 하는 주제이다. 그의 말대로 이런 전문적인 이야기를 아무나 이렇게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닐터.
‘공간’을 뜻하는 독일어는 ‘라움(Raum)’이다.
개념이 없다면 그 개념에 해당하는 현상은 존재해지 않는다. ‘슈필라움’에 해당하는 우리말이 없다는 것은 그러한 공간이 아예 없거나 그러한 공간의 필요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다는 이야기다.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압축 성장’을 경험한 대한민국의 사회심리학적 문제는 대부분 이 ‘슈필라움’의 부재와 아주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심리적 여유 공간’은 물론 성찰을 위한 최소한의 ‘물리적 여유 공간’도 부재하기 때문이라는 거다. - 6, 7
타인에 대한 ‘믿음’은 타인의 ‘다른 생각’에 대한 ‘이해’를 전제한다. - 28
시선은 곧 마음이다. 내 시선이 내 생각과 관심을 보여준다는 이야기다. 다른 동물들에 비해 인간 눈의 흰자위가 그토록 큰 이유는 시선의 방향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흰자위와 대비되어 시선의 방향이 명확해지는 검은 눈동자를 통해 인간은 타인과 대상을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함께 보기(joint-attention)’다. 인간의 의사소통은 바로 이 ‘함께 보기’에 기초한다. - 34
후회는 ‘한 일에 대한 후회(regret of action)’와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regret of inaction)’로 구분해야 한다고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 심리학과의 닐 로스(Neal J. Roese) 교수는 주장한다. ‘한 일에 대한 후회’는 오래가지 않는다. 이미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 결과가 잘못되었더라도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얼마든지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는 쉽게 정당화되지 않는다. ‘한 일에 대한 후회’는 내가 한 행동, 그 단 한 가지 변인만 생각하면 되지만,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는 ‘그 일을 했다면’ 일어날 수 있는 변인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 60, 61
‘담론적’이어야 할 학문적 개념을 ‘단언’하는 사회는 아주 ‘후진 사회’다. - 68, 69
간단한 덧셈과 뺄셈은 암산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복잡한 계산은 노트에 수식을 적어가며 풀어야 한다. 마찬가지다. 다양한 경로로 축적된 ‘공연한 불안’ 역시 ‘개념화’라는 인지적 수식 계산을 통해 처리해야 한다. 생각이 복잡할 때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이유는 바로 이 ‘개념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 82
‘좋은 삶’을 사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좋아하는 것을 많이 하고, 싫어하는 것을 줄이면 된다. 제발 ‘좋은 것’과 ‘비싼 것’을 혼동하지 말자! 자신의 ‘좋은 것’이 명확하지 않으니 ‘비싼 것’만 찾는 거다. - 110, 111
미니멀리즘이란 무조건 줄이는 게 아니다. ‘나쁜 것’을 줄이는 거다! 행복 혹은 ‘좋은 삶’에 좀 더 실천 가능한 방식으로 접근하자는 이야기다. ‘싫은 것’, ‘나쁜 것’, ‘불편한 것’을 분명하고도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하나씩 제거해나가면 삶은 어느 순간 좋아져 있다. ‘나쁜 것’이 막연하니 그저 참고 견디는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 참고 견딘다고 저절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내 스스로 아주 구체적으로 애쓰지 않으면 ‘좋은 삶’은 결코 오지 않는다. 아무도 내 행복이나 기분 따위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 115
내 책장을 가득 채운 책들을 보면, 열이면 아홉이 꼭 물어봅니다. "이 책들을 다 읽으셨어요?" 아, 말문이 콱 막히는 질문입니다. 그런 질문은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 하는 겁니다. 단언컨대, 책은 다 읽고 책장에 꽂아두는 게 아닙니다. 앞으로 읽으려고 책장에 꽂는 겁니다! 책장에 책이 그렇게 많은 이유는 내가 알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는 뜻입니다. - 273
세상에서 어리석은 일이 ‘외로움을 피해 관계로 도피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고통은 ‘불필요한 관계’에서 나옵니다. 차라리 ‘외로움’을 견디며 내 스스로에게 진실한 것이 옳습니다. 진짜 외로워야 내 스스로에게 충실해지고, 내 자신에 대해 진실해야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의 관계가 더욱 소중해집니다. -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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