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 / 난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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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정세랑 작가의 소설을 꾸준히 탐독하고 있는 중이다. 이전 단편들은 각각의 스토리와 설정, 인물의 특성이 달라 독서 후 짧은 소감을 남기기가 어려웠지만, 이번 책은 그나마 장편이어서 조금은 쓸 말이 있다. '작가의 말'에서 이르기를 스물여섯에 쓴 소설을 서른여섯 살에 고쳐썼다고 하니, 10년을 넘나든 책인 셈이다. SF적 요소를 담고 있기 때문에 다소 촌스럽거나 모던하지 않은 부분은 고쳐썼을테지만, 소설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사랑에 대한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얼마전 읽은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과 유사한 면모도 보이는데, 두 작가 모두 SF를 무한한 기술의 상상으로만 접근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진보와 발전으로 점철된 미래에도 남아 있을 인간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한아의 성향, 즉 무엇에 대단히 적극적으로 도전하기보다는 변하지 않는 무엇가를 지키려 하는 삶, 인간도 결국 자연의 일부임을 깨닫고 보다 생태적으로 살기 위한 노력, 크고 화려하기보다는 소소한 배려와 지속적인 관심에 따른 사랑의 추구 등이 그러하다. <옥상에서 만나요>에서 보여주었던 현실적인 사랑에 대한 회의와는 전혀 다른 관점이다.


느림과 생태적 삶에 대한 작가의 예찬은 외계의 눈을 통해 한아를 사랑받기에 충분한 존재로 부각시키지만, 유사한 성향이 있는 많은 사람이 있을텐데도 왜 유독 한아에게만 집중되었느냐는 의문이 명확히 해소되지는 않는다(뭐, 사랑에 빠진다는 게 애초에 설명할 수도, 설명한다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서도).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전혀 다른 대상에게 사랑을 받게 된 한아가 예전과 달라도 너무 달라 의심스러웠던 경민의 정체를 알게 되었음에도 큰 저항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대목 또한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지만, 내가 사랑하던 사람이 똑같은 외모에 더 나은 성품이 되어 돌아왔다면 그를 거부하기도 쉽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대체된 사랑도 사랑인걸까? 외면은 같지면 본질이 달라진 사람을 예전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러면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 맞나? 내가 사랑을 느끼면 되는 것이지 상대의 본질에 대한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걸까? 많은 질문이 남는다. 더욱이 사랑이라는 감정은 활활 타오른 이후에 겨우겨우 유지되거나 서서히 감퇴되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데, 작가는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에 따른 인스턴트적 감정의 소비가 아니라 우주적 시각과 시간 속에서도 사랑을 꾸준히 키워나가며 유지할 수도 있다는 것을 하나와 경민을 통해 보여주려 하는 것 같다. 그것도 SF적 요소를 가미한 소설을 통해서 말이다. 


어쨌거나 간만에 사랑스러운 소설을 읽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일은 결코 한아의 외모 때문에 벌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왜 너 자신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느냐고 묻는다. 끝내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건전한 절대 명제, ‘누구나 하나의 세계를 이룰 수 있다’는 역사상 가장 오래 되풀이된 거짓말 중 하나일 거라고 주영은 생각했다. 세계를 만들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탁월하고 독창적인 사람들이 만든 세계에 기생할 수밖에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똑같이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거인이 휘저어 만든 큰 흐름에 멍한 얼굴로 휩쓸리다가 길지 않은 수명을 다 보내는 게 대개의 인생이란 걸 주영은 어째선지 아주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 36, 37

"바보 같다고 생각 안 해. 한 번도 너 바보 같다고 생각한 적 없어. 넌 같은 자리에 있는 걸 지키고 싶어하는 거잖아. 사람들이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들을." - 81

"나는 안 될까. 처음부터 자기소개를 제대로 했으면 좋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더 나은 방법일 것 같았어. 그래도 나는 안 될까. 너를 직접 만나려고 2만 광년을 왔어. 내 별과 모두와 모든 것과 자유 여행권을 버리고. 그걸 너에게 이해해달라거나 보상해달라고 요구하는 건 아냐. 그냥 고려해달라는 거야. 너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그냥 내 바람을 말하는 거야. 필요한 만큼 생각해봐도 좋아. 기다릴게. 사실 지금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난 괜찮은 것 같아. 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직접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야기들이 있으니까. 이거면 됐어." - 95

땅 위의 작은 생물과 물속의 커다란 생물까지 너와 이어지지 않은 개체가 없다는 걸, 넌 우주를 모르고 지구 위에서도 아주 좁은 곳에 머물고 있었는데도 이해하고 있었어. 나는 너의 그 선험적 이해를 이해할 수 없었어. 인간이 인간과 인간 아닌 모든 것들을 끊임없이 죽이고 또 죽이는 이 끔찍한 행성에서. 어떻게 전체의 특성을 닮지 않는 걸까. 너는 우주를 전혀 모르는데, 어떻게 우주를 넘어서는 걸까. 너는 너무 멀리 있는데, 나는 왜 널 가깝게 느낄까. - 102

"백날을 생각해봤자 답은 똑같을걸요. 어떤 특별한 사람은 행성 하나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질 때가 있어요. 그걸 이해하는 사람이 있고 못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저한텐 엄청 분명한 문제에요." - 118

"네가 내 여행이잖아. 잊지 마." - 137

그렇지만 뭔가 달랐다. 원래의 경민을 보냈을 때의 그런 몸이 간질간질하고 신경이 쏠리고 불안해지는 보고 싶음이 아니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심해를 헤매고 있어도 이어져 있는 보고 싶음이었다. - 151

"너의 사랑할 수 있는 능력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해 사랑해준 거 알아. 고맙게 생각해." - 205

"돌아올 거라고 믿었는데 그걸 믿는 날 믿을 수가 없었어. 믿으면서도 전혀 믿을 수가 없었어." -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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