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자들 - 장강명 연작소설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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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는 살인이다.”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도장 공장 옥상에 걸렸다. 해소는 살인이었으므로 그들은 ‘죽은 자’들이었고, 해고자 명단에 오르지 않은 사람은 ‘산 자’가 되었다. - 90, 91


이 대목이 이 연작소설의 전체적인 흐름을 관통하는 내용이다. 이 책은 '자르기, 싸우기, 버티기'라는 3부의 목차로 각각 3-4편의 단편을 모아 놓은 연작소설이다. 사람을 자르는 것과 그에 맞서서 버티고 싸우는 것이 엄밀하게 구분되지는 않기 때문에 자르기라는 목차에 구성이 되어 있더라도 싸우기나 버티기에 가까운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공장 밖에서'라는 제목의 단편은(쌍용자동차에서의 분쟁을 각색한 것 같다) '자르기'에 속해 있지만 그 안에는 잘리기를 거부하고 버티고, 버티는 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싸우는 이들이 공존한다. 작가가 생각하기에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노동 분쟁 사례를 구성한 것일 지도 모르겠다.


제목에 맞춰보자면, 이 단편들은 산 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반대로 죽은 자들은 노동현장에서 자기의 위치를 끝까지 확보하지 못한 채 밀려나가는 이들이 될 것이다. 불성실한 알바생을 잘라야 하는, 대기발령 중인 사람들 틈에서 혼자라도 살아 남아야 하는, 공장을 돌려 임금을 받기 위해서 공장을 점거하고 버티고 있는 이들을 몰아내야 하는, 프렌차이즈 빵집의 출혈 경쟁 속에서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버텨야 하는, 그다지 높이 평가받지 못하는 학교 졸업자들 중에서 유독 홀로 대기업에 입사해야 하는...


다 읽고 나니 소설이라기보다는 르포같다는 느낌이 책을 펴서 읽기 시작할 때보다 더 강하게 들었다. 이 책은 소설인가, 르포인가, 아니면, 한국의 노동현실이야말로 이처럼 소설같은 현실이라는 것인가? 



사징이 혜미에게 처음 관심을 보인 것은 태국 바이어들을 접대한 회식 때였다.

"자존심이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니잖아."
"자존심이 밥 먹여 주는 거 아니지. 그런데 그때는 사람이 밥만 먹고 사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 - 63

연아는 전화를 끊고 누구에게 보내는 건지 모를 반성문을 썼다. 그 순간 가장 도움이 됐던 것은 중훈이 전에 술에 취해 했던 말이었다. 내가 굴욕이라고 생각하면 굴욕이지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게 굴욕이라고. - 74, 75

진짜 구호도 있었다.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도장 공장 옥상에 걸렸다. 해소는 살인이었으므로 그들은 ‘죽은 자’들이었고, 해고자 명단에 오르지 않은 사람은 ‘산 자’가 되었다. - 90, 91

장사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주영이 이해한 것은 조금 더 나중이었다. 장사는, 돈을 쓰려는 사람을 섬기는 일이었다. 그러려면 그들의 마음을 이해해야 했다. - 135

주영은 동굴에서 사는 물고기들을 상상했다. 빛이 없고 먹을 것이 모자란 좁은 공간에 오래 살면서 눈이 퇴화하고 피부도 투명해진 작고 불쾌한 생물들. 불필요한 기관은 모두 버리고 오직 생존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존재들. 주영은 하중동 사거리와 구수동 사거리가 그런 동굴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 맑고 깜깜한 물속에 갇혀 있었다. - 137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될 수 없을 것 같은 열패감과 무력감.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듯한 소외감과 고립감. 자신이 그런 감정들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돌이켜 보자 금방 답이 나왔다. 거는 대외 활동을 다시 해야 했다. 그를 반겨 주고 인정해 주는 곳에 가야 했다. 설사 그들이 자신을 환영하는 이유가 값싼 노동력 때문이라 해도. - 263

악을 쓴다고 다리에 힘이 솟거나, 갈증이 해소되거나, 더위가 가시지는 않는다. 그것은 각성제도 스테로이드도 아니고, 인센티브도 페널티도 아니다. 육체적으로는 더 힘이 들고 더 고통스러워질 따름이다. 그럼에도 신은 대원들이 악을 쓰는 이유를 이해했다. (...)
몇 시간 동안 거울로 제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과 대화도 없이 땡볕과 아스팔트 열기 속에서 고행을 하다 보면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 감각이 희미해진다. 그럴 때에는 악을 써서 제 목소리를 귀로 들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현실감을 되찾아야 한다. 그렇게 악을 쓰는 건 일종의 대화이기도 했다. 나 죽을 것 같지만 조금 더 버틸게, 그러니까 너도 버텨 하는. - 264, 265

신은 자신이 어떤 역할극을 수행하는 중이고, 그 자리에서 너무 순도 높은 진실은 피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 267

경제학에서는 인간을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내리는 주체, 이콘이라고 가정한다. 경제학 밖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비판한다. 진실은 언제나 꼬여 있다. 인간은 이콘이 아니다. 하지만 완전히 아닌 것도 아니다. 소설을 쓸 때마다 내 안의 이콘이 그렇게 공들일 필요 있느냐며 딴죽을 걸었다. - 311

이미 세계의 질서가 정해졌는데 거기에 맞서는 기획이 얼마나 가망이 있을까. 질서는 시스템이고 기획은 이벤트다. 이벤트는 시스템을 결코 이길 수 없다. 성 평등 운동, 소수자 인권 운동, 환경 운동, 동물권 운동, 그런 기획들은 정말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거대한 질서가 새로 생길 때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 변화를 잘 타고 미끄러지는 것 정도가 아닐까? - 323

법규가 많아지면 도둑이 늘어날 뿐입니다.(法令滋彰, 盜賊多有) - 329

많은 새들이 날 수 있는 힘이 있지만, 실제로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때는 한정되어 있다. 놓칠 수도 있었던 잠재력을 깨닫고 목적에 맞게 쓴다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 아닐까?
행정실장이 된 옛 교무 교감이나, 유체 이탈 화법을 쓴 학생 교감을 보며 내가 왜 이마를 찌푸렸는지, 이제는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람의 잠재력과 관련이 있다. 사람은 대부분 옳고 그름을 분간하고, 그른 것을 옳게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능력을 실제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행정실장과 학생 교감은 날지 않는 새들 같았다. 마지막으로 날아 본 게 언제인지도 모를 비둘기들이었다. - 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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