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 지니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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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정유정 작가의 작품 스타일을 기대하며 읽는다면 실망할 것이다. '이 작가도 이런 소설을 쓰네?'라는 다른 시선을 기꺼이 즐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사실주의 작가의 판타지는 새로운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신작'을 기다려왔던 내 기대와는 많이 다른 방향이었다. 


프롤로그와 교통사고라는 전개까지는 흡입력이 있게 진행되었지만, 과하다 싶은 유인원과 밀렵에 대한 설명, 유인원의 시선으로 바라보게되는 지난 일에 대한 몽환적 묘사는 "생에 가장 치열했던 사흘에 대한 이야기"라는 표현이 무색하게 이야기로의 몰입을 오히려 방해했다. 


인간과 유인원의 공감, 이어서 벌어지는 다른 두 종의 사이에서의 허물어지는 경계, 그 둘이 다시 분리되는 과정에서 일상에서 소외되고 상처입은 이들이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서로를 치유하는 과정은 나무랄 데가 없다. 그러나 진이와 민주의 관점을 교차하는 편집, 빠른 전개를 방해하는 군더더기 설명과 묘사들은 뭔가 많이 아쉽다. 

막다른 곳에 불시착하는 때가 있다.

시험에 떨어졌다는 건 결과일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근거는 아니었다. 빈둥대는 걸로 보여도 묵묵히 내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뭘 해야 할까’에 대한 고민이 할 일의 대부분을 차지하긴 했지만.
고민의 핵심은 하고 싶은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되고 싶은 것도 없었다. 하다못해 넋 나갈 만큼 좋아하는 것조차 없었다. 대신 어떻게 해야 아버지가 좋아할지에 대해선 잘 알고 있었다. - 37

인생에서 최악의 사건은 죽음이 아니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나는 지쳤고, 피곤했다. 삶에 대한 미련도 없었다. - 48

화구가 닫힌 후, 나는 아주 단순한 진실을 깨달았다. 죽은 다음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진실. 무슨 짓을 하든, 얼마나 후회를 하든, 해병대 노인의 부름을 듣던 순간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뭔가를 하려면 그때 했어야 했다. 뭔가를 할 수 있었던 그때 그 순간에. - 91

삶은 살아있는 자의 것이며, 살아 있는 동안 전력으로 살아야 한다고. 삶아 있는 한, 삶을 선택하는 것이 옳다고 – 293

죽음은 살아 있는 사람의 문제라고 했던 엘리아스의 말은 옳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 나를 맞는 것은 언제나 정적이었다. 밥 먹고, 일하고, 숨 쉬는 매 순간순간 정적의 급류가 나를 휘감고 흔들었다. 어머니와 살던 집에서 기숙사로 거처를 옮겨봤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정적을 잊고 사람을 소리로 채웠다. 저 앞에 놓인 모퉁이를 향해서 온 힘을 다해 달려가는 내 발소리로. 잠시라도 발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불안하고 초조했다. 행여 틈을 비집고 정적이 끼어들까봐 두려왔다. 그 결과, 멈춰 사는 법을 잊어버렸다. - 296

누군가 그 숨소리에 이름을 붙이라고 한다면 나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두려움’이라 부르겠다. 그녀는 나와 함께 있었으나 완벽하게 혼자였다. - 326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토록 잔인한 일인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 - 328

나는 운명도 어느 지점에선 공평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살아남고자 안간힘을 다해온 자에게 비수를 꽂아서는 안 된다. 그런데 비수를 꽂고도 모자라 숨통마저 끊으려 들고 있었다. 다른 꼴은 다 봐도 너 사는 꼴은 못봐주겠다는 것처럼. - 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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