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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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 한 켠에 노란 빛을 발하고 있는 표지가 눈에 띄었다. 그런데 막상 가까이에서 보니 멀리서 볼 때와는 달리, 레몬이 선명하게 찍혀있는 표지가 아니었다. 상당히 흐릿하게 다소 몽환적인 느낌의 레몬이 검은색과 대비되어 그 빛을 발하고 있었다. 소설에서 레몬이라는 노란색은 더이상 애도의 색이 아닌 복수의 색임을 다언을 통해 밝히고 있다. 하지만 그가 의도했던 복수란 결국 가까이에서 볼 수록 희미해져 알 수 없는 무엇이었는지도 모른다. 


언니(혜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쫓기 위한 과정은, 그 죽음을 둘러싼 다언, 태림, 상희 등 각자의 상념으로 재구성된다. 그러나 이런 상념들이 죽음 이면의 진실에 대한 단초는 되지만, 진실 그 자체는 되지 않는다. 결국 책을 다 읽어서도 혜언이 누구에 의해 왜 살해되었는지에 대한 실체적 진실은 파악되지 않는다. 자동차 옆에서 나란히 대기하고 있던 한만우의 스쿠터, 한만우 뒤에 앉아 차 안을 살펴보던 윤태림의 속삭임. 그것은 이미 끝나버린 혜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악마의 교묘한 속삭임이었을까.


결과의 원인을 파악하여 그 원인을 야기한 자를 징벌하는 스토리에서 느낄 수 있는 쾌감 같은 것은 없다. 오히려 암시가 아닌 분명한 확인이었으면 하고 바라던 기대를 얻을 수 없어 답답한 마음이 더 컸다. 한 사람의 생은 마감되었고,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주변인들의 삶은 차례차례 파괴되기 시작한다. 범인으로 지목된 자는 범인이 아닌 것 같고, 범인일 수도 있을 것 같은 이들은 다른 방식의 고통을 받으며 피폐한 삶을 살아간다. 결국 진실은 알 수 없는 추측으로 남게되고, 인과응보의 순리가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모를 현실만이 계속 된다.

나는 오래전 어느 경찰서 조사실에서 있었던 장면을 상상한다.

상상도 실제만큼이나 고통스럽다. 아니, 실제보다 더 고통스럽기도 하다. 그것에는 한계도 기한도 없다. - 9, 10

그의 삶의 갈피갈피에도 의미 같은 것이 있었을까. 아니, 없었겠지. 없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삶에도 특별한 의미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삶에도, 언니의 삶에도, 내 삶에도. 아무리 찾으려 해도, 지어내려 해도 없는 건 없는 거라고. 무턱대고 시작되었다 무턱대고 끝나는 게 삶이라고. - 12

하지만, 내가 이 삶을 원한 적은 없지만 그러나, 선택한 적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 35

나는 점점 어리둥절해졌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내가 언니를 별로 사랑하지 않았던 게 아닌가 하는 의혹에 빠졌다. 그건 무척 슬프고 괴로운 의혹이었다.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하지 않았던 게 아닌가 하는 것. 과거형이라 이제는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것. 그대로 결정돼버린 것. - 71, 72

나는 우리가 현실로 돌아오지 못했음을 알았다. 비틀린 경로로 우회하지 않고는 다시는 현실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자기 자신을 놓칠까봐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머리를 흔들거나 눈을 깜빡이는 불안증 환자들처럼 끊임없이 무언가를 행하고 취소하고 반복하는 경련의 삶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 88

어떤 삶은 이유 없이 가혹한데, 그 속에서 우리는 가련한 벌레처럼 가혹한 줄도 모르고 살아간다. - 145

끔직한 무엇을 멈출 수 없다는 것, 그게 한 인간의 삶에서 어떤 무게일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 190

그들은 죽었고, 나는 살아 있다. 살아 있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면 그밖의 것은 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살아 있고 하루하루 살아간다. 엄마와 어린 혜은, 아무도 모를 죄책감과 기나긴 고독이 내 곁에 있다. -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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