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은유 지음 / 서해문집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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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변덕스러운 마음이 교차했던 책읽기였다.


지만 본다면, 그다지 사서 읽어보고 싶지 않은 책이었다. 디자인이 꽤 촌스럽기 때문이다. 표지가 내용의 충실함을 담보하지는 않지만, 표지가 내용을 깎아내릴 수는 있다. 그럼에도 제목이 주는 느낌이 괜찮아 책을 집었다. 프로필을 통해 '수유너머'에서 공부하였다는 정보를 접하고, 책을 읽어나가면서 저자의 녹록치 않은 내공을 느꼈다. 그러나 많이 읽고 공부한 티를 너무 내는 것인지 불필요하게 자주 등장하는 인용구(플라톤이 말했듯이, 그것은 니체의 말인데...)는 몰입을 방해했다. 자기의 생각은 없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들 때쯤이면 한번씩 자신만의 경험을 등장시켜 내 불만을 상쇄시켜주었다. 그런데 그나마도 어디서 들었음직한 아포리즘의 변형(질문은 욕망을 내포하고, 삶은 명사가 아닌 동사라는...)이다. 여자, 삶, 사랑, 일이라는 주제별로 경험과 생각을 모아놓은 글을 읽으면서, 그의 생각에 많은 밑줄을 치며 공감 했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허탈하다. 에세이를 읽은 것인지, 잠언집을 읽은 것인지. 

나는 싸움하는 사람으로 변했다. 공격 대상이 모호했다. 날마다 가슴에서 전쟁이 벌어졌고 혼자 치르는 전투에서 나는 매일 전사했고 꿈처럼 깨어나 오늘을 살았다. 시(詩)가 무기였다. - 6

결혼도 이혼도 인연을 쓰는 한 방편일 뿐이다. 플라톤의 말대로 무엇이든 그 자체 단독으로 아름답거나 추하지는 않다. 그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실천의 미이고, 그것을 추하게 만드는 것은 실천의 비열함이다. 이혼도 그런 것 같다. 비열한 이혼도 아름다운 이혼도 있다. 그러니 권장할 일도 배척할 일도 아니다. 삶 전체를 위한 합리적인 골격을 짜는 하나의 과정으로 아픈 선택일 뿐이다. 삶의 어느 국면에서 생을 담은 물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 단지 그것뿐이다. - 24

나에게 엄마로 사는 건 인격의 물오르는 경험이 아니었다. 외려 내 안의 야만과 마주하는 기회였다. 태아가 물컹한 분비물과 함께 나오는 출산의 아수라장을 경험하는 것부터 그랬다. 그 생명체가 제 앞가림할 때까지 나는 혼자 있을 권리, 차분히 먹을 권리, 푹 잘 권리, 느리게 걸을 권리 같은 기본권을 몽땅 빼앗겼다. 그런 전면적이고 장기적인 실존의 침해를 감내하다 보면 피폐해진다. 성격 삐뚤어지고 교양 허물어진다. 육아의 보람과 기쁨을 위안으로 삼기엔 그것과 맞바꿀 대가가 너무 크고 길다. 그 사실을 경험하기 전에는 모른다. - 31

인간적 성숙은 낯선 대상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혼란과 갈등을 겪으며 자기와 세상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때 일어나는 것이다. 엄마라는 생태적 지위는 성숙에 이르는 여러 기회 가운데 하나일 뿐, 저절로 성불하는 코스가 아니다. 그나마 출산과 육아로 인한 고통의 자산화가 가능하려면 어느 정도 문화적 자원이 있어야 한다. - 32

모든 물음은 질문자의 입장과 욕망을 내포하는 법이다. 나의 물음은 그간 얼마나 진화했는가. - 35

왜 엄마들에게 행복은 늘 충족 유예 상태로만 존재해야 하는가. 내일을 위해 오늘을 인내하는 삶. 자식을 위해 당신은 포기하는 삶... 워낙 가난한 시대에 태어나서 그러신 줄은 안다. 그래도 난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았는데, 엄마가 호강 한번 제대로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결심이 더 확고해졌다. 나의 일신의 호강은 주체적으로 ‘지금 여기서’ 챙겨야 한다는 것. 그 엄정한 사실 말이다. - 101

힘든 일 포기하고 떠난다고 자유롭지 않다. 그건 자유에 대한 환영이고 망상이다. 넘지 못할 것 같은 산도 한 걸음 내디디면서 다리 힘이 길러지고 그러면 다음 봉우리는 더 쉽게 건널 수 있다. 근육이 튼튼해지고 체력이 길러지면 삶의 어느 고비에서도 성큼성큼 문제 안으로 들어가는 궁극적으로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런데 문제를 회피하고 도망가면 걸린 데서 또 걸린다. 살아보니 그랬다. 아무런 상처도 주지 않고 좋기만 한 관계는 가짜이고, 아무런 사건도 생기지 않은 무탈한 일상이 행복은 아니었다. - 102

삶은 명사로 고정하는 게 아니라 동사로 구성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생을 오해받을지라도 순간의 진실을 추구하고 주어진 과업을 수행하며 살아갈 때만 아주 미미하게 조금씩, 삶은 변한다. - 118, 119

술 없는 친교 활동은 불가능해보였다. 그걸 보면서 남자에게 술은 해방 기제가 아닌 억압 기제가 아닐까 의구심이 들었다. 사회적 개인들의 결속의 장, 술자리가 아니라면 이 세상에서 자기 위치 측정이 안 되는 거다. 내가 누구이고 어디에서 누구와 무얼 하며 살고 어디로 가는지. 술은 인생 마라톤을 위해 고용한 페이스메이커. 무리에서 낙오되지 않고 목표를 향해 달리기 위해, 고단한 그 길이 외롭지 않기 위해 마시는 듯도 보였다. 가엾고 얄궂다. - 133

생의 빈틈이나 존재의 허전함을 사람으로 채우려는 건 무리한 욕심이다. 그래서 음악이 필요하고 책이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 말 없는 그것들이 품은 살 같은 말에 기대어 살아가는 나를 본다. - 154

한 움큼 부끄러움을 삼키며 나는 배웠다. 동정이든 차별이든 그 아래 깔린 근본 생각은 다르지 않다는 걸. 어떤 대상을 자기 삶의 반경에 없는 분리된 존재로 취급하는 것(고아들이 불쌍하다), 한 존재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 특정한 면만 부각시켜 인격화하는 것(장애인은 무능하다), 자신은 결코 되지 않을 이질적 대상으로 상대를 보는 것(공부 안 하면 노숙인 된다). 하나같이 타자화하는 말들이다. - 169

<마담 보바리>는 출간 당시에 미풍양속을 해치는 악덕 소설이란 평을 들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단순한 불륜 예찬 작품이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세상 여자들이 엠마처럼 살면 위험하다고 말하지만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엠마처럼 살 수 있다는 가정 자체가 커다란 착각이다. 사랑에 투신하는 용기, 삶을 지탱시키는 열기는 아무나 갖고 있지 못하다. 계산적으로 사느라 용쓰는 동안 본래적 열정은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 194

왜 우리는 생생한 아픔보다 시든 행복을 택하는가. - 195

"난 그렇게 이성이 판단하기 이전에 몸이 저지르는 사건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데. 의지나 결심마저 무화시키는 소용돌이. 어떤 격정." "그런 거 없더. 다 자기의 판단과 선택이야." - 207

니체가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라고 가르쳐주었듯이, 속물 대마왕 홍상수가 사랑의 사이비 신도였던 나를 일깨운다. 사랑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 - 209

"이제 연세가 있는데 좀 쉬시라고 했더니, 어머니가 그러더라. 가만히 있으면 뭐하느냐고, 사람은 ‘나쁜 짓’이라도 해야 한다고, 그래야 하나라도 배울 게 있다고." - 231

원래 돈은 속삭인다. 나를 줄 테니 너의 모든 것을 달라고. 그래서 특히 젊은 나이에 첫 직장에서 고액 연봉을 받는 것은 위험하다. 마라톤에서 페이스 조절에 실패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돈의 쓰임이 곧 삶의 자세이다. 젊을 때부터 나를 던져 돈과 삶을 ‘거래’하기 시작하면 인생이 돈의 흐름에 따라 허겁지겁 쫓아가게 된다. 내 정신으로 살아가기가 점점 힘들다. - 237

황지우 시인의 말대로 "삶을 한 번쯤 되물릴 수 있는 그곳"에 간다면 난 얼마나 다르게 살 것인가. 아파하고 아파하는 이를 알아보면서 이 아픔의 전승 구조에 몸을 싣고 아마 지금처럼 살고 있을 것 같다. 그것밖에 힘이 없다. 누구나 지금이 존재의 최선이다. - 262

장르는 갈래다. 장르 자체가 작품의 고귀함을 보장하지 않는다. 직업이 인격을 담보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 266

나는 밥벌이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거기에 붙들릴까 염려한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거주하는 이 세계의 일상성이 무너질까 두려워할 때 발생하는 것이 ‘불안’이라고 했는데, 나는 내가 거주하는 이 세계의 일상성이 강고해질까봐 두렵다. 김수영의 시구대로 "거리에 나와서 집을 보고, 집에 앉아서 거리를 그리던" 그런 어리석음을 동력으로 굴러가는 인생이다. - 269

타자를 변화시키는 힘은 계몽이 아니라 전염이다. - 275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배울 때 기쁨을 느끼지 않는 자는 가르쳐서는 안 된다. 무언가 다른 것에 열중하는 것, 사랑하는 것, 배우는 것, 그것은 같은 것이다." - 276

사회적 약자는 가진 게 없는 사람이 아니라 무지한 질문에 답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몸으로 겪었다. -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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