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은모든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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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죽음에 가까이 맞닥들일 날이 오면, 그 시기와 방법은 내가 선택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한다. 법과 제도와 정치는 체감되지 않는 추상적인 언어로서의 '생명의 존엄'과 '인권'을 말하며 낙태를 부정하고 존엄사를 허용하고 있지 않지만, 할 수만 있다면 보다 유연한 제도를 갖춘 곳으로 이동을 해서라도 말년의 내 존엄을 지키며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내 인생의 마지막 장면은 영화 <안녕, 헤이즐(The Fault in Our Stars)>에서 처럼, 지인 몇 명에게 내 죽음을 예고하며 인사하는 정도면 족하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해 슬퍼해주기를 바라지 않으며, 자식들에게 내 죽음과 동반된 수고스러움을 남겨주고 싶지 않다. 


<안락>은 존엄사에 관한 내용을 다룬 소설이다. 지금이 아닌 20, 30년쯤 후의 미래의 한국을 그리고 있는 것 같지만, 그때가 되어서야 존엄사가 제도적으로 허용된다는 - 그리 파격적이지도 발칙하지도 않은 상상력이 깃든 - 설정을 한 것을 본다면, 소설 속의 미래는 다분히 현실적이다. 생명에 대한 막연한 고집은 그렇게 더디고 천천히 바뀔 것이라는 작가의 예상이 반영된 것일까. 존엄사법이라고 칭해지는 '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이후에도 20년이 훌쩍 지나서야 환자가 아닌 일반인에게도 존엄사가 가능해지는 미래라니...


어쩌면 거대한 담론이 될 수도 있는 이야기들을, 작가는 한 가족에 초점을 맞추어 풀어나간다. 거기에는 격한 갈등이나 과도한 감정의 이입이 없다. 조금이라도 멀쩡한 모습으로 생을 마감하고 싶은 할머니와 그런 할머니를 반대하며 놓아주지 못하는 자식들의 크고 작은 대립이 있을 뿐이다. 안락사에 대한 강한 긍정도 부정도 없이 그것을 원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의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나간다는 점에서, 접근하기 어려울 수 있는 주제를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덜 무겁게 접근하고 구성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거부감을 줄이고 읽어볼 수 있는 기회이긴 하지만, 안락사에 대한 보다 긍정적인 목소리를 원했던 나로서는 아쉬운 면이 많았다.

삶의 종착점 같은 먼 미래에만 집중해도 안 되고, 당장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에만 신경 쓰는 것도 바보 같은 짓이라고 규철은 말했다. - 8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냐고 되물었더니, 자신은 딱 잘라 말하는 것에 대해 저항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 역시 가정형이었다. - 34

"한마디로, 지금까지는 그야말로 오늘내일하는 사람만 해당됐던 거야. 숨넘어간다고 막 전기로 지지고 어쩌고 하는 거 있잖아. 그게 정 싫다면 안 해도 됐다고. 법이 딱 거기까지만 허락을 해줬단 말이야."
"예, 그렇죠."
"이제부터는 여기저기 아프고 힘들어서 나 죽겠다. 못 살겠다, 하는 사람도 차분하게 자기가 딱딱 계획 세워서 저세상 갈 수 있도록 허락을 해준다는 얘기야. 얼마나 좋아그래." - 47, 48

그나마 어렸을 때는 최소한 행선지를 모른 채 병원 앞에 당도한 뒤에야 공포를 느겼다면, 지금은 병원으로 향하기 전부터 언젠가는 가야 한다는 부담감과 스트레스가 쌓이고 비용도 스스로 부담해야 하니 상황은 더 나빠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나이가 듦에 따라 자연히 쉽고 편해지는 것은 생각보다 많지 않은 것 같다. - 63, 64

"자식이라는 게 이렇다. 가는 날까지 이렇게 눈치 볼 일이 생기는 거야. 하기사 너는 결혼 생각도 애 생각도 없다니 이런 고민은 안 해도 되겠다마는." - 74, 75

"앞으로 어떻게 사나, 하는 거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죽어야 되나, 그 생각하느라 바빴어" - 136

"너 지금도 기도를 하는구나. 몰랐어."
"가끔은 하지. 도저히 내 손이 닿지 않는 일이 있으면, 가끔은."
"그래. 나는 기도하는 방법을 모르니까. 부탁 좀 하자." -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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