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웃의 식탁 오늘의 젊은 작가 19
구병모 지음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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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는 내내 가족, 이웃, 자연, 공동체 같은 따스하고 풍요로운 단어들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것이 진짜 현실임을 나는 알고 있다. 아내는 가사에 육아에 경제 활동에 며느리 노릇까지 떠맡아 휘청이는데 남편은 다른 여자에게 지분대는, 여기는 정말 스위트 홈입니까? 지금 남의 일인 듯 웃는 당신의 홈은 정말 스위트합니까?"


'추천의 말'이라는 제목을 달았으되, 도무지 이게 어떠한 의미에서 추천의 말이 되는지를 알 수 없던 나로서는 추천의 말을 쓴 작가의 "가족, 이웃, 자연, 공동체 같은 따스하고 풍요로운 단어들"이라는 표현(물론 따스함과 서늘함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을 테지만)이 너무나도 순진하거나 무지하게만 느껴졌다. 이 나라에 성인으로 살면서, 그것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육아를 하는 사람들 중에 가족, 이웃, 자연, 공동체라는 말을 떠올리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이며, 이 실체는 있으되 현실에서 도무지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공허한 단어들로부터 따스함과 풍요로움을 느끼는 사람은 얼마나 될 것인가. 굳이 장소의 공유라는 '실험적' 설정이 없더라도, 인간관계라는 것은 끊임없이 비교당하고 불필요한 인내와 감수를 강요당하는 다분히 피로하고 소모적인 관계임을 모르지는 않을 터인데.


3명 이상 아이를 낳는 조건을 달아 각서까지 써야 입주 우선권을 부여하면서, 부모를 아이 낳은 동물로, 국민을 노동의 수단으로 전제하는 국가(정부)와 이러한 제도를 면밀히 검토해 현실적인 유/불리와 경제성을 고려하여 그곳에 입성한 각 가족들. 이 구성요소만 보더라도 무책임한 제도의 틀 안에 묶여진 개인들의 삶이 공동체라는 이름 하에서 얼마나 불편해지면서 다시 피폐화될 지는 굳이 넘치는 상상력이 없더라도 추측해볼 수 있다. 개개인의 사생활을 폭넓게 존중하고 존중받으며, 현실에 허덕대지 않는 자유로움과 속세와는 어느 정도 유리된 대안적 삶을 추구하는 삶, 과연 이런 것들이 공동체라는 인위적 조합을 통해 추구하고 달성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럴 줄은 몰랐다는 듯 '소설을 읽으며 공동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는 소감을 남기는 것이 오히려 무색하다. 

세상 어느 살갗에 앉은 티눈도 어떤 버려진 선반에 쌓인 먼지도, 그것이 모이고 쌓였을 대 고작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 29

불안을 위안으로 포장하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눈꺼풀을 감아 버리면 되는 일이었고, 어쩌면 눈꺼풀을 감기보다 간단할지도 몰랐다. - 43

핵심은 시간을 보내는 데 있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면서 체세포의 수를 착실히 불리는 거야말로 어린이의 일이었다. 그 어린이를 바라보는 어른의 일은, 주로 시간을 견디는 데 있었다. 시간을 견디어서 흘려보내고 다음 페이지로 넘기는 일. 그곳에 펼쳐진 백면에 어린이가 또다시 새로운 형태 모를 선을 긋고 예기치 못한 색을 칠하도록 독려하기. 그러는 동안 자신의 존재는 날마다 조금씩 밑그림으로 위치 지어지고 끝내는 지우개로 지워지더라도. - 67

어른이 된다는 것은 수치심을 모르는 인간, 모르지 않는다면 그것을 엉성한 뚜껑으로 덮어 두거나 나일론사로 봉합하는 인간이 된다는 뜻이었다. 산부인과의 검사대에 올라가는 여자라면 누구라도, 자신의 몸이 어떤 자극이나 모욕에도 반응하지 않는, 동요나 서글픔 따위를 제거한 무생물에 가까운 오브제라는 사실을 철저히 인식하지 않고 지나갈 수 없었다. 그 과정을 흔히 정상 내지는 보편이라고 간주되는 경로를 거쳐 통과한 이는, 타인과의 어지간한 신체적 접촉 정도로는 눈을 부라리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일일이 그래 봤자 성격 까다롭다는 조소를 감당하고 비참함을 곱씹는 쪽은 자신이라는, 차라리 스스로를 오브제로 간주했을 때 피로의 역치가 그나마 높아진다는 사실을 몇 번이나 확인한 자로서의 체념, 그 끝에 마침내 일말의 안식처럼 찾아드는 무감각 같은 것이었다. - 82, 83

자신의 마음은 어딘가 용납되지 않는데 이미 형성된 분위기가 그 용납되지 않음을 용납하지 않을 때, 이럴 때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일은 화제 전환 정도였다. -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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