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내 모든 것 안녕, 내 모든 것
정이현 지음 / 창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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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의 프롤로그 때문이다.

"어느 추운 겨울날, 학회 뒷정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다가 문득 정이현의 소설 <안녕 내 모든 것>이 떠올라, 펑펑 울었다. 읽은 지 오래되어 주인공의 이름이 세희인지 세미인지도 어렴풋한 그 책의 짧은 제목이 너무나 아프게 가슴을 헤집었다. '교수', '연구자'라는 알량하고 모호한 이 한 단어의 인간이 되기 위해 무엇과 작별하며 살아왔는가, 생각하니 비로소 한없이 부끄러웠다." - 10

듣고 보니 그랬다. 나는 항상 예전과 같이 그대로인 것 같은 착각 속에 빠져 살고는 하는데, 나도 많은 것을 포기하거나 잃은 채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이 책은 90년대 청소년기를 그린 소설이다. 아마도 작가가 겪었을 법한, 혹은 견뎌냈을 법한 시기의 사건들 - 김일성의 죽음, 외환위기, 삼풍백화점 붕괴 등 - 이 세미, 준모, 지혜라는 세 명의 친구들에 의해 그려진다. 이야기의 많은 부분은 세미의 이야기로 할애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기억을 독자들에게 끌어내는 존재는 세미가 아닌 지혜인듯 하다. 그는 "한번 듣거나 본 것은 잊어버리지 않는" 특별한 기억력의 소유자이기도 하고,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세미와 조우하는 화자의 역할을 하는 것도 지혜이다. 그 외의 에피소드들은 세미나 준모가 스스로를 '나'로 칭하는 1인칭으로 전개되지만, 나는 어째 이러한 이야기들이 모두 지혜의  기억이 이들로 변모되어 재구성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할머니의 죽음, 대학진학이라는 그 시기에 이들에게 닥친 큰 사건을 시점으로 이들은 뿔뿔히 흩어져 각자의 삶을 살게 된다. 학창시절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혹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친구와의 헤어짐과 사회인으로의 삶이 시작되고 익숙해지면서, 우리와 같이 이들도 아마 잊은 것 같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무언가와 점차 이별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이런 상황에서 잊고 있던 것이 드러난다. 바로 지혜의 갑작스런 방문이다. 세미는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하고, 중형차를 몰고, 차 뒤에 놓인 카시트에 앉힐만한 애를 키우고 있는 모습으로 지혜를 찾아온다. 그리고 그가 세미에게 요청한 것은, 그들이 죽을 때까지 비밀에 부쳐야 했던 사건(할머니의 죽음)에 관한 기억이었다. 


지혜의 그 '특별한 기억력'에 의해서도 찾을 수 없었던 할머니의 무덤, 그 무덤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결코 훼손될 것 같지 않았던 친구들과의 우정(이 사건에서만큼은 '의리')과 비밀은 아니었을까. 성장과 함께 잊은 채 살고 있었던 그들이 회상하게 된 유년시절은 더이상 예전과 같지 않은 느낌의, 혹은 이미 잃어버린 기억의 부스러기였던 것은 아닐까. 지혜와 세미가 찾을 수 없었던 것은, 어찌보면 더이상 지금과 같지 않은 예전의 그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요새는 가끔 내 인생의 목표가 오로지 하나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용히 닳아가는 것. - 8

어른들은 원래 그런 일을 할 때 애들이 있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런 일이 어떤 일인지 애들은 당연히 모르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믿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애들은 그럴 때는 서로서로 짐짓 모르는 척해주어야 한다는 삶의 지혜를 자연스레 습득하게 된다. - 42

시간이 초 단위로 줄어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일초보다 더 정밀한 시간의 단위에 대해 생각했다. 5, 4, 3, 2, 1…… 0. 줄어든다는 것은 결국 사라지고 만다는 의미였다. 사라진다는 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 151

우리는 각각 삼각형의 다른 끝에 매달려 대롱거리고 있었다. - 164

서툰 희망이 생 전체를 서서히 좀먹어가게 놔둘 수는 없었다. 단호하게 체념하는 법을 배우기에 적절한 밤이었다. - 168

불행은 틈을 주지 않고 들이닥친다. 해석하거나 납득하려 들 필요는 없다. 해석되지도 납득되지도 않는 것, 그것이 불행이 가진 본성이니까. 이상한 낌새를 채고 어, 어, 어쩌지, 하는 순간에 불행은 토네이도처럼 사정없이 휘몰아친다. 정신을 차려보면 움푹 꺼진 구덩이와 그 주변에 어지러이 널린 일상의 잔해뿐이다. 잔뜩 물때가 끼어 있는 불투명 욕실 슬리퍼 한쪽. 그런 것만이 우리가 간신히 목격할 수 있는 불행의 실체이다. - 174

조금씩 방치된 부주의는 곧 더는 숨길 수 없게 된다. - 202

바늘만한 구멍이 뚫려 점점 허룩해져가는 설탕 자루를 질질 끌며 돌아오는 가난한 가장처럼 나는 자구만 헛헛했다. - 203

부모가 자식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한다는 명제는 참이며, 그렇다고 해서 그게 꼭 부모가 행복하다는 뜻은 아님을 나는 알게 되었다. - 213

당분간이란 잠깐과 얼마나 비슷한 단어이고 또 다른 단어일가. 얼마의 틈을 당분간이라고 하는 걸까. 그 당분간이 지나간 뒤에 우리가 다시 모인대도 우리가 하나의 선으로 이어진 길 위를 나란히, 서로의 등을 밀려 걷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 215

내가 끔찍이도 두려워했던 것은 혼자 남겨지는 게 아니었다. 이 세상에 혼자인 사람이 오직 나 혼자뿐인 거였다. 준모도 지혜도 어딘가에 혼자 있을 거라 생각하면 아무리 우스운 영화를 봐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어른들은, 어른이 되면 원래 다 그런거라고들 말했다.
‘너의 아이가 살고 있는 아침의 집에 너는 꿈에도 들어가지 못하리라.’
서른을 며칠 앞둔 어느날,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다. 나는 나직하게 중얼거려보았다. 안녕, 아침의 집. 안녕, 내 모든 것. - 228, 229

진심이라는 단어에 영원성이 내포되어 있지 않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그때의 나에게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와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건, 혼자만 배제되는 것이었다. 비겁하다고 낙인찍히는 것이었다. - 233

내 안의 구덩이에 뒤죽박죽으로 저장되어 있다가 별안간 용솟음쳐오르는 기억의 파편들. 그 파편들을 되는대로 잡아채 줄줄 써내려갔다. 튀어나오는 대로 다 붙잡고 싶은데, 손의 속도가 기억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손의 속도는, 기억의 속도보다도 말의 속도보다도 느렸다. 그 틈새에 깃든 고요함에 대해 나는 아주 천천히 인식하기 시작했다. - 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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