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낸 가장 긴 밤
이석원 지음 / 달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책을 읽다보면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난다. 책장이 넘어가는 것이 아까워 한 장 한 장 아껴 읽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단숨에 읽어버린다. 책의 내용이나 작가의 글 자체가 재미가 있어서 그럴수도 있고, 빨리 읽고 치워버리고 싶어서 일 수도 있고, 기대했던 부분을 아직 발견하지 못해 허겁지겁 숨겨져 있을 법한 대목을 찾느라 그럴 수도 있다. 이석원의 에세이는 출간 즉시 사 보는 편인데, 이번에는 - 어떤 이유에서인지 - 책을 빠르게 읽어 버렸다.


지난 두 권의 에세이에서는 어찌보면 나약하고 감성적인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동질감이나 사랑과 이별에 관한 아련한 감정의 공유, 또는 나보다 한층 더 깊고 섬세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 책을 읽으니, 이석원도 늙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픈 것은 그가 늙어가는 만큼 그가 쓴 책의 독자인 나도 늙어간다는 점이었다. 세월의 지남이나 나이 듦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의 글의 분위기와 소재, 그가 - 굳이 -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려는 바가 예전처럼 신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40대 중반에 철없는 사랑이야기만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독자인 내게 저자에게 바랐던 것은, 언제고 그대로 일 것 같은 그의 서툰 감정과 그것을 반추함으로써 깊어지는 사색이었다. 


제목 '우리가 보낸 가장 긴 밤'은 역시나 이석원스러웠다. 그러나 정작 그 제목에 딸린 글, 목차에서도 일부로 흐리게 표시한 그 대목, 책을 읽으며 앞부분의 부족함을 만회할 한방처럼 찾아 헤맸던 그 부분은, 제목 이상의 무언가를 주지 못했다. 안타까웠다. 이제 그의 시선과 생각이 머무르는 곳이 더는 예전과 같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책 중간중간에 다른 포인트(마지막 한 부를 남기고 작가의 말)를 주고 한 면을 한 줄 또는 단 몇 줄의 문장으로 채우고자 한 대목에서는 특별한 임팩트가 없다는 점에서(<무릎팍도사> 종영은 도대체...).


사랑과 이별에 대한 추억, 택시, 풍경, 관계, 건강, 엄마, 아빠, 크리스마스, 여행, 친구, 암, 글쓰기, 인정... 많은 소재를 제목로 한 짧은 글에 밑줄 치고 싶은 부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좋았던 것은 - 정작 내가 밑줄은 하나도 긋지 않은 - '단어들'이라는 부록이었다. 책의 끝부분에서 정작 본문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그의 향취를 잠시 맡고 책을 덮는다.   


이 책에서도 서너번 언급된 <보통의 존재>만한 역작을 앞으로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후의 글들은 모두 그 책의 주석일 수밖에 없을지도...

나로 인해 상처 입은 사람의 모습을 보는 일은
그 자체로 상처가 되어 내게 다시 돌아온다.

그러므로 상처 입은 나는
한편으로 그 상처를 되돌려받았을 너를 걱정하고 있다.

나는 지금
누구의 상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걸까.

우리 둘의 상처가 다르지 않다면
그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 16

대화란, 내 말이 맞음을 일방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이 아니라, 어느 때는 일치의 쾌감을 얻기도 하고 어떨 때는 다름의 묘미를 깨닫기도 하는 , 말로 가능한 최고의 성찬이다. 서로를 신뢰하기에 의견이 달라도 기분이 상하지 않고, 오히려 말의 부딪침 속에서 대화의 재미를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게 바로 통하는 사이가 아닐까? - 33

항시 나를 가장 오해하기 쉬운 존재는 오히려 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다. 그들은 나를 ‘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가 아닌 다른 이를 안다는 그 확신에 찬 전제가 늘 속단과 오해를 부른다는 걸 알기에, 나는 누굴 안다는 생각을 잘 하지 않으려 한다. 당연히 상대도 그러지 않기를 가까울수록 더 바라고. 그건 내가 복잡하거나 대단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든 몇 마디 말이나 경험으로 판단되고, 규정도리 수 있을 만큼 단순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 34

어쩌면 삶 전체를 통틀어 좋게좋게 웃음과 예의로서만 대해야 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 이 공허한 인간관계에서, 나로 하여금 솔직함을 이끌어 내줄 수 있는 사람, 거짓말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끔 만들어주는 이를 만난다는 게 얼마나 큰 복이고 행운인지를. - 39

욕망의 실현이 아닌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한 자유, 그것을 누릴 소중한 권리를 획득하는 것. - 61

살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더 중요하다. - 64

사람이 책임을 질 수 없는 대상에게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책임감은 애초부터 그걸 소유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한다. - 68

삶이 나에게, 이미 작은 것에 충분히 만족하고 거듭 감사를 표해왔는데도 만족 못하고 더 감사의 기도를 원한다면 더더 낮데 엎드리며 순응하는 수밖에. -88

나이를 먹는다는 건, 단지 숫자가 늘어나고 얼굴에 주름 몇 개가 늘어가는 일이 아니었음을, 그래서 노력하고 씩씩해지지 않으면 그 무게에 언제고 잠식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는 일임을. - 89

엄마가 바쁘지 않으면 다른 가족들이 살 수가 없으니까
엄마들은 항상 바쁠 수밖엔 없는 거다. - 100

우리들의 아늑한 보금자리는 어째서
다른 가족들이 떠민 일을 누군가 떠안는 희생과 수고로 지탱되어올 수밖엔 없었던 걸까. - 101

왜냐하면 생활 습관과 가치관의 차이란 가족이라 해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란 걸 슬프지만 인정할 때가 누구나 오기 때문이다. 그걸 늦게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린 해결되지 않는 일에 너무 많은 에너지는 쏟았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 116

빠져나갈 출구를 마련해놓고
하는 사랑은 사랑도 아니다.
사랑을 예감하게 되었을 때
네가 해야 하는 것은 오직 하나.
상처투성이가 될 각오
그거면 되는 것이야. - 133

내가 만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서 나에게나 스스로에게나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고 그런 자세를 변함없이 오래 유지한다면 어찌 사랑의 묘약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 139

책은 왜 읽지? 좋아서 읽는다. 그게 내게 뭘 주기 때무이 아니라 그냥 좋아서. 여행도 마찬가지다. 그게 내게 뭘 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떠나고 싶어서 떠난다. 지르는 건 아무리 해도 좋은 일. 움츠리고 망설이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일. 그래서 나는 떠난다. 돌아올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 168

너를 아파하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는 법을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 171

만약 내가, 인생의 끝자락에, 시간적으로 돌이킬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도 없는 시기에, 저렇게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후회를 하게 된다면. 난 견딘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후회라는 걸 잘 하지 않는 이유가 두려움 때문이었다는 걸 그제서야 알았다.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하며 내 잘못을 인정하는 일이. 그래서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싫고 두려웠던 것이다. 그것이 내 지나온 생애가 후회로 결론지어지는 문제라면 더더욱. - 184

대체로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거나 미워하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은 때로 평생이라는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어떨 땐 한쪽이 죽고 나서야 겨우 이뤄지는 수도 있다. 이해라는 건 그만큼 하기도 받기도 어려운, 그래서 더 귀한 것이다. - 195

상대가 원하는 것을 주기보다 자신이 주고 싶은 것을 주는, 그래서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실망하고 때로는 화를 내기도 하는, 그런. - 202

세상의 어떤 명서도 내 그릇만큼 읽힌다. 여행도 마찬가지이다. 오랜만에 집을 떠나면서 나는 외롭지 않고 불편하지 않으려 조바심치다 그 모든 것들이 여행이 아닌 구격이 되어버렸다. - 228

나는 활자를 찬양하며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의 사랑을 믿지 않는다. 활자를 사랑하면 그 마음을 글로 표현하면 되는 것이지 굳이 입에 그 말을 담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때로는 말로 해줄 필요도 있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구나 하고 상대가 믿게끔 행동하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 244

행복이 크고 거창한 것이 아닌 대체로 작고 일상적인 것들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은 진즉에 알았다. 그러나 그 모든 사소하고 평범한 듯 보이는 것들의 가치를 알고 지켜가기가 쉽지 않으니 결국 행복이란 가치 앞에서 세상의 모든 작은 것들은 작은 게 아니더라. 일상은, 일상의 평화라는 건, 노력과 대가를 필요로 할 만큼 힘겹게 지켜가야 하는 만만치 않은 것이더라. - 251

이제 나는
간절함보다는
그리움이 많은
사람이 된 것일까.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의 하늘은 이렇구나.

가끔은
생각나는 사람이 있으면
생각나는 대로 두는 것도 좋겠다. - 265

참 열심히 게을렀고
꾸준히도 무책임했으며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사랑했던

한 번뿐인 것으로 충분했던 시절. - 291

하지만 너무 슬퍼하지 말자.
희망과 절망은 해와 달 같은 것이어서
하나가 뜨면 하나가 지고 하나가 지면 또하나가 뜨는 법이니까.

우리는 그저
비바람이 치는 이 순간을 영원할 거라고
믿지만 않으면 된다. - 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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