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물리학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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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 물리학에 따르면 이 세계를 존재하게 만드는 건 관측이다. 관측을 '보다'로만 한정하면 쓸데없는 형이상학이 끼어들 여지가 있으니 각자의 상상력을 총 동원해 그 범위를 넓혀보기 바란다.


관측하기 전까지 세계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한다. 우리가 만지고 느끼는, 이른바 물질세계는 관측하는 순간 그 모습으로 나타난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조각에 대해 그저 대리석이 갖고 있는 형상을 끄집어낸 것뿐이라고 말했다. 대리석이라는 가능성의 덩어리가 피렌체인의 관측을 통해 피에타가 된 것이다.


새로운 책을 사서 손에 올려놓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미켈란젤로처럼, 내가 이 책이 가질 수 있는 이야기 중 하나를 꺼내준 건 아닐까? 첫 장을 펼치기 전까지 이야기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나는 책장에 손을 올리고 그 책이 들려줄 수 있는 모든 이야기를 귀담아듣는다. 이야기 앞에서 설레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첫 문장을 읽는 순간 이야기의 파동 함수는 붕괴한다. 무한의 가짓수는 맹렬히 잘려나가고 두 번째 문장이 붙는 순간 붕괴는 가속도를 얻는다. 평범한 이야기는 한 단락을 넘기도 전에 결말이 좁혀진다. 뛰어난 이야기는 마지막 문장을 읽는 그 순간까지도 여러 가능성을 내놓는다.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문학도 양자적이다. 그런 관점에서 나는 책을 읽었다는 정의도 달라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 책을 읽었다고 얘기하는 건 미친 소리일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책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에 존재했을, 존재할 모든 책들을 단 한 페이지도 넘기지 않고 읽을 수 있다.


생각이 여기까지 나아가면 책장 맨 앞에 쓰여 있는, 무슨 수를 써도 끌어내릴 수 없는 최고 존엄, 이른바 저자의 존재도 위태로워진다. 내가 읽은 <슬픔의 물리학>은 정말로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가 쓴 게 맞을까? 이야기를 좀 더 작은 단위로 지속해서 환원하다 보면 결국 무의미한 소리, 자음과 모음의 조합에 가닿는다. 우리는 '우리'라는 단어에 우리의 존재를 담을 수 없다. 그것은 그저 약속일 뿐이고, 그 무의미한 자음과 모음의 조합에서 의미를 만들어낸 건 독자인 우리다.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가 도움을 준 것은 부인하지 않겠다. 우리가 뭔가를 캐낼 수 있도록 일련의 규칙에 따라 글자를 배열한 건 맞으니까. 하지만 마침표를 찍는 건 결국 우리다.


<슬픔의 물리학>을 읽으면 이 책의 줄거리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이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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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딸들의 미친년의 역사
이랑 지음 / 이야기장수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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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족이라는 불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잘 모른다. 가족은 선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바꿀 수도 없고 혁명도 불가하다. 책임자를 색출해 단죄하기도 어렵다. 이 비극의 원인제공자를 찾아 시간을 거슬러 가다 보면 말도 통하지 않는 단세포 하나를 만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친구, 동료, 동지 같은 유사 가족에 더 마음을 쓴다.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유전자로 이어진 진짜 가족보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 가짜들에 더 가닿는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이 사실이 극도로 비정상적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질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족이라는 비극은 우울의 막을 연다. 가족은 비극 중의 비극, 그 어떤 작가도 쓸 수 없는 마스터피스다.


비극이 영원한 이유는 가족이 세대를 거쳐 자신의 이야기를 물려주기 때문이다. 부모의 관계를 파괴하는 능력과 육체적 폭력, 가혹한 통제, 잦은 외도, 방탕함, 우울 등은 후성유전되는 것이 확실하다. 저자 이랑의 형제들이 재생산을 멈추기로 결의한 이유도 이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유전자에 후천적으로 새겨진 비극의 배역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기로 했다. 이들은 자기 자식들이 무대에 오를 기회를 제거함으로써 이야기의 막을 내렸다. 그 마음은, 눈물이 날 정도로 숭고하다.


유전자에 쓰인 이야기가 어떻든 내 삶은 내가 다시 쓰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는 매 순간 자신을 돌아보며 부단히 행동을 수정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알코올중독자 부모가 죽도록 싫었던 사람이 알코올중독에 빠지고, 툭하면 주먹을 휘두르는 부모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혐오했던 사람이 아내와 자식을 두들겨 패는 장면을 연출하는 건 클리셰라고 말하기도 민망하다.


저자의 불안하고 예민한 정신은 가족이 길러낸 것이 분명하다. 자살한 첫째 언니는 두 명의 동생을 사랑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가족이어서가 아니다. 그 폭력을 함께 겪은 피해자 동지이기 때문이다. 이 비극이 아이러니한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족을 사랑한다는 점이다. 언니는 자살하기 전 마지막으로 이 말을 남겼다.


성한이 사랑해.

엄마 아빠 사랑해.

완이 랑이 사랑해.

이게 내 진심.

(p. 111)


정말 정말 우울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힘이 되는 수필. <엄마와 딸들의 미친년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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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 X - 트위터를 둘러싼 440억 달러의 싸움
커트 와그너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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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는 좀 복잡했다. 트윗이 있고, 리트윗이 있고, 멘션이 있고, DM이 있고. 글을 올리고 좋아요를 누르는 페이스북과는 확실히 달랐다. 어떤 사람들은 트위터가 인류의 의사소통 방식을 완전히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그 핵심은 실시간성이었다. '지금 마포대교 많이 막혀요?'라고 트윗을 올리면 '네, 많이 막혀요'라고 답이 왔다. 트위터는 검색을 대체할 수도 있었다. 당시 네이버에서는 생활 정보가 많이 검색됐는데 어떤 면에서는 트위터가 훨씬 나았다. '여의도 역 근처의 맛집이 어디예요?'라는 질문에 그 지역의 토박이나 거기를 잘 아는 지인으로부터 멘션이 왔기 때문이다. 인간을 신뢰할 수 있는 동물종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은 트위터를 의사소통의 혁신이라 부를 만했다.


그리고 트럼프가 나타났다.


트위터가 트럼프 때문에 이상해졌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트럼프 같은 사람이 맹목적 추종자를 모집하고, 그들의 정신을 왜곡된 정보로 절여 폭력과 혐오를 조장하기에 최적의 도구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트럼프가 출마 선언을 했을 때부터 높은 지지율을 얻은 것은 아니다. 그는 주류 언론의 왕따를 당했다. 그게 기회였다. 트럼프는 순식간에 트윗을 장악했다. 언론의 자유를 신봉하는 트위터의 창업자 잭 도시는 트럼프의 활약을 보며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을 것이다. 트위터는 이 세상이 절대 보장할 수 없는 언론의 자유를 제공한다. 그것은 자기 서비스의 승리였으며, 자기 신념의 승리였다.


잭 도시가 트럼프를 인간적으로 좋아했을 거라고, 그의 생각에 동조해서 그를 가만히 놔둔 건 아니라고 확신한다. 잭 도시는 실리콘 밸리 대부분의 기술자가 그렇듯 좌측으로 더 기울어진 남자였다. 그런데 이런 기술자들 중에는 기술을 오직 가치중립적인 도구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트위터든 페이스북이든 유튜브든 원하면 언제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팔로우하고 구독하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 하나도 틀린 게 없는 이 말이 우스운 건 나뿐인가?


트위터는 어느 순간 똥통에 처박혀 제자리를 맴돌았다. 트위터의 주요 수익은 브랜드 광고였는데 광고주들은 인종차별주의자, 성폭행범, 총기 난사를 계획하는 사람, 사이비 종료 신봉론자,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의 트윗과 함께 자신의 광고가 노출되는 걸 원치 않았다. 트위터는 좀 더 빡세게 이용자의 계정을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잭 도시는 이런 일에 전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언론의 자유를 뼛속 깊이 새긴 히피였으며 트위터에서 쫓겨난 뒤 스퀘어라는 결제 서비스를 창업해 운영하다 트위터 이사진의 복귀 요청에 스퀘어와 공동 운영을 허용하지 않으면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고 우겨 결국은 원하는 걸 쟁취한 남자였다. 잭 도시는 트위터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가장 필요로 하는 역량을 갖추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스퀘어라는 취미 생활 때문에 그 일에 전념할 수도 없었다. 이 우유부단한 겁쟁이는 이 시점에서 기이한 탈출구를 모색하기 시작한다.


트위터를 매각하는 것이다.


잭 도시는 일론 머스크야 말로 트위터의 구세주라고 생각했다. 잭 도시는 트위터가 상장 기업으로 남아있는 한 주주와 광고주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광고로 연명하고 실적으로 보상하는 회사가 어떻게 중립을 지킬 수 있겠는가. 이 점에선 일론 머스크도 생각이 같았던 것 같다. 그는 트위터의 주식을 사모으면서도 경영에는 간섭하지 않겠다고 말했다가 트위터를 인수하겠다고 말했다가 안 사겠다고 말했다가 법정에서 트위터가 얼마나 사기를 쳤는지 말했다가, 다시 트위터를 사겠다고 말했다. 그가 트위터를 인수하겠다고 다짐한 계기는 전처의 문자 메시지였다.


"트위터를 사서, 없애줄 수 있어!?" (p.229)


일론은 답했다.


"트위터를 사서 언론의 자유를 제대로 지지하게 바꿀 수도 있지."(p.229)


일론은 트위터를 인수해 이름을 X로 바꿨다. 한국 사람이라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X 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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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의 맛 - 『도문대작』, 조선 미식선비의 음식 노트
김풍기 지음 / 글항아리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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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의 맛>은 <도문대작>에서 기원한다. 도문대작이란 푸줏간 앞을 지나며 입맛을 크게 다신다는 뜻이다. 한나라 환담의 <신론>에 나오는 말로, 먹고 싶은 걸 먹을 수 없는 처지에 음식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마음의 표현이다. 나도 이 짓을 꽤 많이 했다. 출퇴근할 차비가 없어 회사에서 숙식을 하던 시절. 일하는 내내 나는 동료와 함께 먹고 싶은 음식을 '말'로 주고받았다. 그러면 정말로, 기분이 나아졌다.


허균은 1610년 10월 19일 과거 시험을 관리하는 시관으로 발령을 받는다. 정시는 아니고 별시였다. 광해군이 선조의 3년상을 무사히 치르고 세자를 책봉한 데다 그 세자의 입학 및 관례 등 경사가 이어져 특별히 치러진 시험이었다. 이 과거의 급제자 명단을 사람들은 '자제서질지방' 또는 '자서제질사돈방'이라고 물렀다. 아들, 동생, 사위, 조카, 사돈을 위한 명단이라 비꼰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인들은 다를 게 없었다.


허균은 이 시험의 총책임자는 아니었으나 가장 크게 당한 관리였다. 그는 함열로 귀향을 간다. <도문대작>은 그 시절 제대로 먹지 못한 허균이 좋아하는 음식을 상상하며 글로 옮긴 책이다. 허균은 중앙 정치를 하기 전 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며 여러 음식을 먹어본 것 같다. 태어난 곳이 강릉 바닷가니 그 옛날 내륙에서는 엄두를 내지 못하는 식재료도 많이 접해봤을 것이다. 당대의 천재로 불린 사람이라 차이에도 민감했을 것이고 글쓰기에 특출 난 재능을 지녔으니 표현도 범상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허균의 맛>을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도문대작>은 감상평이라기보다는 메모에 가까운 글 모음집이다. <허균의 맛>은 그 짧은 글들을 저자의 해설로 엄청나게 불려놓은 책이다. 애초에 원재료가 진한 맛이 아닌데 물까지 많이 탔으니 어찌 간이 맞겠는가? 슴슴하다면 최고의 칭찬이 될 것이다. 그거보다는 싱겁다는 쪽이 더 가깝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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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자 ㅣ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다니엘 J. 옮김 / 오픈하우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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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차일드를 읽으면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문학을 '미'의 한 종류로 생각한다면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쉽게 말해 문학은 무언가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심지어 독자조차 필요 없다. 문학이 아름다운 건 건 당신이 그걸 읽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자기 자신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문학사에는 이런 유미주의적 사조가 존재했다. 아쿠타카와 류노스케가 그랬고, 미시마 유키오가 그랬다. 한국에는 친일 반민족행위자 김동인이 있다.


당연하겠지만 그 반대의 생각도 있다. 소비에트 연합 시절 동유럽의 문학들은 혁명에 봉사할 의무를 가졌다. 인민의 혁명 의식을 고취시켜 조국을 위해 몸을 바치게 만들 책임. 이 시절 유미주의는 똥통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쓰레기였다. 미 따위를 논하다간 반동 세력으로 잡혀 7.62mm 풀 메탈 쟈켓을 두개골에 박아 넣거나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물론 이런 종류의 봉사만 있는 건 아니다. 민주 사회에서는 대부분 문학이 시민을 위해 봉사한다. 과거에는 시민을 무지에서 일깨우기 위해 노력했던 적도 있다. 이것이 이른바 계몽이라는 것이다. 요즘 계몽은 좀 더 세련됐다. 독자를 정치적으로 무장시키기 위해 빈부의 격차나 자본의 횡포를 정교한 이야기로 구현한다.


그럼 진짜 봉사는? 읽는 사람 위에 서거나 다른 무언가로 바꾸려는 목적 없이 그저 독자를 위해 존재하는 문학. 이런 종류에는 두 개의 방향이 있다. 하나는 독자를 문학을 완성할 하나의 구성 요소로 간주하는 것이다. 포스트 모던 계열의 일부 작가들은 이것을 문학적 형식으로 이야기 안에 직접 구현할 때도 있다. 상상이 안 된다면 공연 도중 관객이 직접 참여하는 연극을 떠올려보라.


다른 하나는 이 모든 복잡 괴상한 헛소리 없이 그냥 독자를 즐겁게 해주는 문학이다. 경험적으로 볼 때 전자는 대개 순수 문학으로 인정받는 반면 후자는 장르 문학으로 격하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가끔은 화가 난다.


리 차일드를 그냥 장르 소설 작가라고 볼 수 있을까?


나는 인류를 위해 이 정도로 봉사하는 작가를 본 적이 없다. 리 차일드의 소설은 빨리 다음 페이지를 읽고 싶게 만드는 것 말고는 아무 기능도 갖지 않는다. 리 차일드는 실패가 없다. 따라서 개별 소설에 대한 감상 따위는 필요치 않다. 나는 앞으로 이 작가의 소설에 대한 모든 감상에 이 글을 복사, 붙여 넣기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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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6-04-12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지금 이 책 읽기 시작했는데 엄청 통쾌한 리뷰입니다. ^^ 리 차일드의 소설은 빨리 다음 페이지를 읽고 싶게 만드는 것 말고는 아무 기능도 갖지 않는다라니 그냥 저 문장만 떼놓고 보면 욕인듯도 하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책이 독자를 놔주지 않는다는 그래서 읽고 읽고 또 읽을 수 밖에 없다는 엄청난 칭찬 맞죠? ^^ 저도 그래서 리 차일드의 책은 나올 때마다 빼놓을 수가 없네요. 저는 이미 앞에 나온 책들을 다 읽어서 이렇게 쓰고 복붙할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막.... ^^

한깨짱 2026-04-19 08:33   좋아요 0 | URL
영화 <잭 리쳐>를 보고 리 차일드에 엄청난 편견을 가졌었는데 소설은 다르더라구요. 그 위대한 마이클 코넬리도 작품 사이에 편차가 있는데, 비록 바람돌이님만큼 많이 읽어본 건 아니지만 아직까지 실패는 없었습니다. 재미있는 소설을 읽고싶다, 하면 반드시 찾기로 다짐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