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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자 ㅣ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다니엘 J. 옮김 / 오픈하우스 / 2026년 3월
평점 :
리 차일드를 읽으면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문학을 '미'의 한 종류로 생각한다면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쉽게 말해 문학은 무언가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심지어 독자조차 필요 없다. 문학이 아름다운 건 건 당신이 그걸 읽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자기 자신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문학사에는 이런 유미주의적 사조가 존재했다. 아쿠타카와 류노스케가 그랬고, 미시마 유키오가 그랬다. 한국에는 친일 반민족행위자 김동인이 있다.
당연하겠지만 그 반대의 생각도 있다. 소비에트 연합 시절 동유럽의 문학들은 혁명에 봉사할 의무를 가졌다. 인민의 혁명 의식을 고취시켜 조국을 위해 몸을 바치게 만들 책임. 이 시절 유미주의는 똥통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쓰레기였다. 미 따위를 논하다간 반동 세력으로 잡혀 7.62mm 풀 메탈 쟈켓을 두개골에 박아 넣거나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물론 이런 종류의 봉사만 있는 건 아니다. 민주 사회에서는 대부분 문학이 시민을 위해 봉사한다. 과거에는 시민을 무지에서 일깨우기 위해 노력했던 적도 있다. 이것이 이른바 계몽이라는 것이다. 요즘 계몽은 좀 더 세련됐다. 독자를 정치적으로 무장시키기 위해 빈부의 격차나 자본의 횡포를 정교한 이야기로 구현한다.
그럼 진짜 봉사는? 읽는 사람 위에 서거나 다른 무언가로 바꾸려는 목적 없이 그저 독자를 위해 존재하는 문학. 이런 종류에는 두 개의 방향이 있다. 하나는 독자를 문학을 완성할 하나의 구성 요소로 간주하는 것이다. 포스트 모던 계열의 일부 작가들은 이것을 문학적 형식으로 이야기 안에 직접 구현할 때도 있다. 상상이 안 된다면 공연 도중 관객이 직접 참여하는 연극을 떠올려보라.
다른 하나는 이 모든 복잡 괴상한 헛소리 없이 그냥 독자를 즐겁게 해주는 문학이다. 경험적으로 볼 때 전자는 대개 순수 문학으로 인정받는 반면 후자는 장르 문학으로 격하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가끔은 화가 난다.
리 차일드를 그냥 장르 소설 작가라고 볼 수 있을까?
나는 인류를 위해 이 정도로 봉사하는 작가를 본 적이 없다. 리 차일드의 소설은 빨리 다음 페이지를 읽고 싶게 만드는 것 말고는 아무 기능도 갖지 않는다. 리 차일드는 실패가 없다. 따라서 개별 소설에 대한 감상 따위는 필요치 않다. 나는 앞으로 이 작가의 소설에 대한 모든 감상에 이 글을 복사, 붙여 넣기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