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
대니얼 길버트 지음, 서은국 외 옮김 / 김영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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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고 그런 책이 아니다. 신간도 아니다. 2006년에 나왔다. 2009년 처음 봤고 그때의 충격을 잊지 못해 6년 만에 다시 읽었다.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는 행복에 관한 책이라기 보다는 미래에 대한 인간의 인지 특성과 심리에 대한 책이다. 수 많은 심리 실험이 나오는데,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남는 장사다. 세상에 남는 장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니 이 책을 읽는다는 건 아주 손쉬운 방법으로 특별한 소수가 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인간은 미래를 대비하는 몇 안되는 동물 중 하나다. 인간은 언제나 미래를 상상하고 거기에 대비한다. 이유가 뭘까? 허무하지만 그게 바로 뇌의 취향이다. 인간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고 싶어한다.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사실 통제는 그 자체로 엄청난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권력의 맛'이 바로 '통제의 맛'이다. 권력을 잃은 사람이 시름시름 앓다 죽어가는 것처럼 통제 하지 못하는 뇌는 불안에 빠진다. 그래서 뇌는 끊임없이 미래를 떠올린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오류를 범한다는게 이 통제중독자의 문제지만.



보이지 않는 것 상상하기


우리의 뇌는 보이는 것을 상상하는 데는 유능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떠올리는 데는 정말로 무능하다. 잠시 부자의 삶을 상상해 보자. 아마도 거대한 요트, 멋진 부동산, 잘 빠진 자동차, 화려한 파티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하루에도 돈을 꿔달라고 찾아오는 수 백 명의 사람들, 옆 집 수영장보다 우리 집 수영장이 작아서 오는 자괴감, 내 돈만 바라보는 자식과 친척들은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부자가 더 낫지! 나 같은 거지의 입장에선 이런 생각을 할 법도 하다. 그러나 행복은 주관적이다. 돈 걱정 때문에 꼬박 한 달을 지새우는 나의 슬픔이 옆 집 수영장 보다 우리 집 수영장이 작아서 오는 자괴감 보다 절대적으로 크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들의 자괴감은 돈 걱정으로 인한 내 불행보다 훨씬 클 수 있다. 말도 안된다고? 그러면 더러운 물 속에 먹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고 생각해보자. 이 먹물은 그저 수 많은 오물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반대로 깨끗한 물 속에 빠뜨렸을 땐? 얘기가 달라도 한참 다를 것이다. 


우리는 부자가 되면 어떨지 갖가지 상상을 하며 즐거워한다. 그러나 부자들은 우리가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불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현재를 기반으로 미래를 상상하기


나는 뷔페를 아주 좋아한다. 그러나 뷔페를 갔다 올 때마다 항상 이렇게 말한다. '너무 돼지 같이 먹었어. 내가 다시는 뷔페를 오나 봐라'. 이렇게 다짐한 뒤 나는 또 다시 뷔페를 간다!


바로 이 순간 벌어진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을 '느낌', 상상하며 느낀 정서를 '미리 느껴봄'이라고 하자. 우리의 뇌는 미래를 상상할 때 언제나 '느낌'을 우선하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이 사실을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막 음식을 먹고 난후 다음 주에 먹을 음식을 구매할 때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 식욕을 과소평가하고 조금밖에 사지 않는다(p171)! 한편 이런 심리 실험도 있다. 한 연구진이 참가자들에게 지리에 관한 문제를 제시했다. 그리고 그들이 각각의 문제에 답하고 나면 정답과 초콜릿바 가운데 하나를 보상으로 주겠다고 알려주었다. 몇몇은 문제를 풀기 전에 어떤 보상을 받을지 선택했고 나머지는 문제를 풀고 난 뒤에 보상을 택했다. 그러자 먼저 보상을 선택한 집단에서는 초콜릿을 선호하는 경향이 두드러졌지만 반대의 경우 정답을 더 알고 싶어했다. 문제를 풀기 전에는 자신이 지리 같은 따분한 분야의 정보를 알기 위해 초콜릿을 포기할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현재와 미래를 비교하기


다시 부자가 되보자. 잘 빠진 스포츠카가 떠오른다. 그런데 이 스포츠카가 좋아보이는 이유가 뭘까? 간단하다. 그 스포츠카를 현재의 내 똥차와 비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스포츠카를 사고 나면 우리의 똥차는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더 이상 비교할 게 사라진 스포츠카에 대한 열정 또한 시들시들해 진다. 차근차근 돈을 모아 꿈에 그리던 물건을 샀지만 예상보다 쉽게 시들해졌던 경험을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어쩌면 인간은 이 시들해짐을 견디지 못해 또 다시 더 비싸고 화려한 물건들을 갈망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비싸고 가장 성능이 좋고 가장 멋진 스포츠카를 산다 하더라도 똑같은 경험이 되풀이 될 뿐이다. 궁극의 경험은 존재할 수도 없지만, 설령 존재한다 하더라도 비교할 게 사라진 순간 평범함으로 퇴색되고 만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인간은 천국에서도 영원한 만족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



조언을 얻으세요, 결국엔 마음대로 하겠지만


이처럼 미래를 상상하는 일에는 엄청난 오류가 도사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 오류를 피해 그나마 객관적인 미래를 도출해 내는 방법이 없을까? 그건 바로 기경험자들의 말을 들어보는 것이다. 우리가 상상했던 미래를 현실로 살고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그래서 고시를 패스한, 삼성전자에 입사한, 떼 돈을 번 선배들의 강연이 비온 뒤 독버섯처럼 무수히 열리는 게 아닌가.


그런데 강의에 나온 선배의 말이 요상하다. 그토록 원하던 회사에, 시험에, 사업에 성공했는데 생각만큼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는 곧 이 일을 그만두고 낙향해 농사를 짓겠다고 말한다. 여러분들도 결국엔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될 테니 지금 이런 일에 목숨을 걸지 말고 좀 더 가치있고 행복한 일을 스스로 찾아보라고 덧붙이면서.


도통 이해가 되질 않는다. 선배는 미친게 틀림없다. 저 사람은 성공을 너무 쉽게 얻었다. 그래서 이렇게 쉽게 버리려는 것이다. 선배는 요령있게 설득해 보지만 한 가지 간과하는 사실이 있다. '나'는 선배가 아니다. 나는 당신과 다른 사람인 것이다. 내 인생에선 이게 전부다. 나는 이것만 이루고 나면 더이상 아무것도 바랄 게 없다. 저 사람은 지금 내 갈망이 얼마나 대단한지, 얼마나 '특별'한지 모른다. 내 갈망은 누구보다도 강하다. 나는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하라! 우리는 정말 평범한 사람들이다. 당신의 갈망은 결코 '특별'하지도 '누구보다 강하지'도 않다. 우리는 모두 정규분포 곡선의 불룩 튀어나온 정상에 서서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는 보통의 존재일 뿐이다.


이렇게 재미있는 책을 읽고도 이런 비관적 결론을 내릴 수 있다니, 역시 나에겐 좀 특별한 면이 있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나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네가 정말로 특별한 사람이었다면, 너는 이 책을 읽고 리뷰를 쓰는 대신 이 책 자체를 써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을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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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모던 클래식 52
뮈리엘 바르베리 지음, 홍서연 옮김 / 민음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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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습니다.


위의 사진을 보라. 당신과 눈을 마주치는 젖소의 두 눈이 순진무구해 보인다 해서 이 젖소의 의도를 순수하게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이 젖소는 쿠키다. 만든 사람이 있다.


모든 창작물에는 의도가 있다. "그냥 머리 속에 떠오른 걸 만들었을 뿐이에요"라고 하는 사람의 작품조차 의도를 갖는다. 단지 의식 하지 못할 뿐이다. 


이 경우 젖소의 두 눈은 책을 사달라는 의미가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저 눈은 순진무구한 게 아니라 뭔가를 들켜 깜짝 놀란듯 동그랗게 치켜 뜬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숨겨야 할 의도를 들켰을 때 만큼 바보 같은 게 없다. 그것은 인간이나 동물이나 쿠키나 마찬가지다.


이 책은 전세계 10개 국으로 번역되어 저자 뮈리엘 바르베리에게 그럭저럭 명성을 안겨줬다고 한다. 이후 그녀가 출간한 <고슴도치의 우아함>은 113주 연속 프랑스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며 그녀를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어 줬다. 그러나 한국에는 113주 연속 프랑스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무시무시한 책 대신 전세계 10개 국으로 번역되어 그럭저럭 명성을 안겨준 <맛>만이 번역되어 있다.


나는 꿩대신 닭을 먹으며 닭에서 난 맛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이 책은 음식에 관한 소설이다. 뿡야!


소설의 제목을 단 한 단어로 지을 수 있는 작가는 비범하다. 주저하지 않는다. 망설임이 없다. 자기 작품에 확신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작품에 확신을 갖는 작가의 문장이 온갖 장황한 수사로 채워지는 건 이상한 일이다. <맛>의 화려한 문장은 풍부함일 수도 있고 빈약한 알맹이를 감추려는 위장일 수도 있다. 아니면 프랑스인 고유의 종특(인종 특성)이거나.


프랑스 요리는 화려하다. 성게, 어린 토끼의 등심과 콩팥과 간, 메밀, 대구, 아그리아(감자의 한 품종), 남프랑스 산 보라색 마코, 굴, 거위의 간, 고등어, 파, 푸른 오이, 코미스 배, 육두구, 비둘기, 건과, 통카 콩을 재료로 사용하는가 하면 이를 산초로 양념하고, 으깨서 굽고, 향료를 넣어 삶고, 늘어붙은 즙을 버터, 크림, 술, 물, 식초 등으로 녹여 소스를 만들고, 베샤멜 소스와 달걀 노른자 또는 래디시, 마들렌을 곁들인다. 프랑스 요리는 까다롭다. 알리오 올리오라거나 고르곤졸라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다. 저 장사꾼들의 거리에 이탈리아 레스토랑은 넘쳐나도 프랑스 요리 전문점은 없는 이유를 알겠는가.


프랑스 요리는 모두 허세다.


난 허세를 사랑한다.


<맛>은 텍스트로 '맛'을 전달하려는 불가능한 과제를 완벽한 전략으로 농락한다. 


고소하니 달콤하니 짭쪼름하니 부드러우니 쫀득하니, 맛 자체를 묘사하는 건 유치하고 멍청하고 비효율적이다. 익숙한 요리를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맛을 전달할 수 있다. 소스를 자작하게 끓여 바싹 튀긴 탕수육,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삼겹살과 생마늘, 기름장에 찍어 깻잎쌈 위에 올린 차돌박이, 초고추장과 골뱅이를 넣고 비빈 국수, 크게크게 문어를 썰어 넣어 부친 파전, 양파와 청양 고추에 초간장을 넣고 절인 장아찌, 얼음 송송 시원한 동치미를 말은 막국수. 내 말이 맞지?


완성된 요리의 외형을 묘사하는 방법도 있다. '사과 타르트. 얇고 바삭거리는 타르트 판과 노르스름하게 구워진, 수정 같은 설탕 캐러멜이 살짝 얹힌 도도한 과일'(p.86). 


요리 과정을 설명할 것도 좋은 방법이다. '태국산 쌀을 조심스레 헹구고 작은 은빛 체로 물을 뺐다. 냄비에 넣고 소금 탄 물을 한 배 반 부은 다음 뚜껑을 덮고 끓게 놓아두었다. 세심하게 새우 껍질을 벗겼다. 주철 프라이팬을 불 위에 얹고 올리브유를 한 가닥 부은 다음 달구어진 팬에 벌거벗은 새우들을 흩뿌려 던졌다. 그다음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은 카레. 이 관능적인 가루가 이국적인 황금빛으로 갑각류들의 분홍 구릿빛을 장식했다. 소금, 후추를 치고 프라이팬 위에서 고수 한 줄기를 가위로 잘게 잘랐다'(p.66).


프랑스 대혁명 시절 플롱 드 두에는 굶주린 민중을 향해 "빵이 없으면 건초를 먹으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봐, 프랑스 요리가 아무리 위대해도 동물의 건초를 맛있는 음식으로 요리해낼 정도는 아니잖아. 프랑스 시민은 플롱 드 두에의 머리를 잘라 장대에 꽂았다. 그의 입에는 건초가 물려 있었다. 그런데 건초를 입에 물리고 머리를 잘랐을까, 머리를 자르고 건초를 물렸을까?


뿡야!


줄거리 얘기를 좀 해주면, '나'는 위대한 요리 비평가다. 말 한 마디로 유명한 레스토랑을 망하게도 별 볼이 없는 음식점을 세계 최고로 만들 수도 있다. 그런데 온갖 좋은 음식만 다 먹고 다녔음에도 70세도 되지 않아 심장에 이상이 생겨 죽게 된다. 남은 건 48시간이다. 이 48시간 안에 그 동안 먹었던 음식을 떠올리며 최고를 찾고자 한다.


"범인은 심은하다"라거나 "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이다"라거나 혹은 "절름발이를 믿지마"라고 외치는 사악한 스포일러가 되 온갖 비난과 경멸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이 소설의 결말을 말하고자 한다.


이런 류의 이야기들은 항상 동일한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경향이 있다. 그 패턴은 성경의 '돌아온 탕자' 비슷해 보이지만 가장 흡사한 이야기는 역시 '파랑새를 찾아서'일 것이다. 새 한 마리를 찾아 별의 별 고초를 겪으며 세계를 돌아다녔는데 사실은 우리 집 앞에 앉아 있었다는 식의 더럽게 허무한 이야기나는 이런 식의 결말을 오늘부터 '파랑새 증후군'이라 부를 것이다.

특히 '맛'의 세계에서 '파랑새 증후군'은 맹위를 떨쳐왔다. 칼, 냉장고, 솥, 냄비 등 8가지 전설의 요리 도구를 찾아 떠나는 '요리왕 비룡' 1편에서 주인공은 사천 지방의 화려한 음식 대신 엄마가 해주던 계란 볶음밥으로 대결 상대를 꺽었고 '심야식당' 시즌1 5화는 일본 최고의 미식가가 결국 공산품 버터를 넣고 비빈 간장밥에 눈물을 흘린다는 이야기를 그린 바 있다.


죽기 직전 '나'가 찾은 최고의 음식은 슈케트 였다. 그것은 최고급 제과점에서 반죽하고 굽고 크림을 채워 넣은 딱딱하지도 물렁하지도 쫀득하지도 탄력이 없지도 건조하지도 않은 완벽한 슈케트가 아니라 봉지면에 눅눅하게 설탕이 늘어붙은 슈퍼마켓 슈케트였다.


'나'는 커녕 심지어 저자 조차 모르는 것 같길래 말해주면, '나'는 심장 때문에 죽는 게 아니다. '나'는 굴과 푸아그라와 콩과 오이와 파와 고등어와 식초와 물과 양배추와 밀가루와 카다멈과 고수와 호로파와 온갖 종류의 생선, 고기, 와인의 저주를 받아 죽는 것이다. 평생을 질펀한 식도락에 빠져 흥청망청 살아온 네가 무자비한 어금니 사이에서 온 몸이 으깨지고 날카로운 송곳니에 잘리고 음탕한 혀에 농락당한 음식들을 제쳐놓고 슈퍼마켓 슈케트에게 최고의 영예를 안겨 주다니. 너는 은혜를 모르는 놈이다. 죽어 마땅한 놈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너는 저주를 받아 죽는 것이다. 그 중 팔할은 나의 저주라 해도 부인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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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치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18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지음, 김호경 옮김 / 책세상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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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미래를 볼 수 있었다면, 그래서 불안을 떨쳐낼 수 있었다면, 종교는 결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종교도 존재한다. 이것은 바꿀 수 없는 운명이다. 


초기의 종교는 언제나 소박하고 진실하다. 나쁘게 말해, 덜 체계적이다. 지도자들은 부족한 체계에 언제나 불안을 느끼기에 각종 형식이 더해진다. 형식이 체계적이고 화려할수록 종교에 권위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위는 언제나 억압적이다. 지도자들은 성전의 해석과 형식을 만들 권리를 독점한다. 반론은 불신으로 여겨지고 파문이라는 무시무시한 형벌이 등장한다. 이제 사람들은 거룩한 신의 말씀을 믿는 게 아니라 종교의 형식을 숭배한다. 형식을 숭배하는 한 종교는 배타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할 수 밖에 없다. 말씀은 이웃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심판하지 말라고 가르치지만 종교는 전쟁과 심판의 구실이 된다.


자유를 찾아 네덜란드에 온 사람답게 스피노자는 천부인권으로서의 자유를 옹호한다. 이 자유는 물론 종교에도 적용된다. 생각해보라, 인간의 성향은 다양하므로 각자에게 맞는 다양한 입장이 존재할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판단에 근거해 믿음의 원칙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오직 그럴 때만이 자유로운 의지로 신에게 순종할 수 있을 것이고, 모든 사람이 정의와 사랑을 존중할 것이기 때문이다."(p.24)


이제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반론은 모든 사람들이 제각각 종교를 해석하는 데 그 중 옳고 그른 것을 어떻게 판단하느냐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개인의 믿음은 오직 그의 행위에 따라서만 평가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행위의 옳고 그름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도덕이다. 쉽게 말해 믿음의 해석이 도덕적 행동으로 귀결된다면 그의 자유는 보장되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행동이 아무리 도덕적이라 하더라도 믿음의 해석이 성경 자체에서(신학-정치론은 기독교를 주제로 한다) 도출된 게 아니라면 그것은 옳지 않다. 예컨대 '윤회'를 믿는 사람이 그 믿음으로 인해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을 갖고 평생 도덕적으로 살았다 하더라도 성경은 그 어디에서도 '윤회'를 가르치지 않기에 그의 신앙은 잘못된 것이다.


성경의 해석이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므로 스피노자의 논의는 자연스럽게 성경의 해석법으로 옮겨 간다.  스피노자 이전의 교리 해석은 그리스 철학이 중심이었다. 그 유명한 토마스 아퀴나스, 교부 철학의 아버지는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를 기반으로 한 사상가였다. 그런데 성경의 해석을 위해 왜 외부의 권위가 필요한 걸까? 이 같은 의문에 스피노자는 그 어떤 근본주의자 보다도 근본적인 대답을 내놓는다. 성서는 오직 성서 자체로만 증명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한 방법은 그 어떤 급진주의자 보다도 급진적이었다. 


스피노자 이전의 해석은 이미 씌어진 것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성서는 절대 오류가 없는 거룩한 문서였기에 교부 철학의 목표는 모순된 성서의 내용을 철학을 이용해 이리저리 끼워 맞추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성서를 씌여진 언어의 문법을 고려하고 역사적으로 검증하고 그래서 새로운 의미를 도출할 수 있는 텍스트로 간주했다. 


이 정도만 가지고도 당시 사람들은 스피노자를 무신론자로 비난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한술 더 떠 신학을 정치에 귀속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어도 말이다. 스피노자는 기독교의 모든 문제가 특정인에게 성서 해석의 권위가 집중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성서를 텍스트로 만들고 그 해석의 권한을 만민에게 부여하려 노력한 것이다. 그러나 종교가 정치보다 우위에 있는 한 이 같은 자유를 보장하는 건 불가능하다. 따라서 종교는 정치에 귀속되야 한다. 오로지 정치만이 특정 신앙보다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우위에 둘 수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신학은 매우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다. 그는 신학도 결국엔 인간의 삶을 평화롭게 만드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인간이 평화롭지 않다면 아무리 거룩한 뜻을 가졌다 한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스피노자의 신학은 신을 빙자한 사회학으로까지 느껴질 정도다. 이 새로운 신학 안에선 신조차 초월적 실체가 아닌 지고의 도덕 선생님으로 존재한다. 


종교가 도그마였던 시대에 이보다 더한 신성모독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는 종교의 권위가 급속이 무너져내리던 과도기이기도 했다. 중세의 신학과 근대의 철학이 격전을 벌였다. 싸우려는 욕구가 충만한 시대엔 어느 쪽이든 확실하게 선택해야 명성을 얻는 법이다.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는 불리한 입장이었다. 신학에서 벗어난 듯 보이면서도 신학으로 돌아가고 신학인듯 하면서도 기존의 신학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평생 렌즈를 깎으며 생계를 유지했던 은둔 철학자의 운명이, 바로 여기서 결정됐다. 


그러나 선각자의 앞선 사상은 결국 역사가 보증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오늘날 지구를 멸망시킬 수 있는 유일한 위험 요소가 있다면 바로 종교가 아닐까? 은둔자의 이해 받지 못한 신학이 비로소 빛을 발할 시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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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마지막 밤 민음사 모던 클래식 33
로랑 고데 지음, 이현희 옮김 / 민음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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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한바가지에요



죽음에 대처하는 법


사랑하는 사람과 목숨을 바꾸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봤거나 잃어본 상상을 해본 사람은 안다. 


압도적 고통의 무게를. 


사랑하는 사람 대신 내가 죽겠다는 건 평생 내가 살면서 지고 가야 할 슬픔의 무게를 상대방에게 전가하겠다는 얘기다. 따지보고면, 이기적인거야.


어려운 건 복수다.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자를 내 손으로 죽이는 것. 여기엔 인생을 걸어야 한다. 실패할지도 몰라, 불안과 초조가 홍수처럼 밀려온다. 


오르페우스의 경우도 있다. 이 남자는 우아하다. 자기 능력에 대한 대단한 믿음이 있었다. 사랑하는 연인을 죽인자를 찾아 복수하기 보다는 연인을 되살리고자 마음 먹었다. 지옥문을 지키는 켈베로스를 자신의 뛰어난 연주로 잠재우고 지옥으로 갔다. 지옥의 왕과 왕녀 하데스와 페르세포를 만나 또 하나의 음악을 연주했다. 왕과 왕녀는 감동 받았다.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고 하자 연인의 삶을 되돌려 달라고 한다. 욕심을 너무 부렸다. 연인 대신 자기가 죽겠다고 했어야지. 하데스와 페르세포네도 '어쭈 이것 봐라?'라는 생각을 가졌을지 모른다. 그래서 마지막 시련을 더한다. 지옥을 나설 때까지 절대 뒤돌아 보지 말 것. 지상을 두어 걸음 앞둔 오르페우스는 방심했고 뒤를 돌아봤다. 연인은 다시 끝모를 지옥으로 끌려 갔다.


<세상의 마지막 밤>에는 마테오와 피포가 나온다. 피포가 주인공이다. 마테오는 피포의 아버지다. 여느때와 다름 없는 어느 평범한 아침 마테오는 피포의 손을 잡고 등교길에 나선다. 약간 늦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재촉해 빨리 걷는다. 상기된 아버지의 얼굴에 손이 아프다는 말도 못한채, 질질 끌리듯 따라간다. 어느 골목에 들어섰을 때 마피아의 총격을 받았다. 아들이 죽었다.


아내는 아들의 복수를 원했다. 마테오가 그 더러운 마피아 놈의 심장에 차가운 총알을 꽂아 넣길 원했다. 아버지는 해내지 못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떠났다. 어려운 건 복수라니까.


택시 운전수 였던 마테오는 일은 하지 않고 도시를 배회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평생 동안 지옥을 연구한 교수를 만난다. 교수는 지옥의 문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오르페우스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지옥에 내려간 피포를 찾은 마테오는 아들을 안고 경계에 선다. 두어 걸음 앞에 세상이 있다. 마테오는 비겁한 아버지였다. 그러나 자기 능력의 한계를 명확히 아는 남자였다. 


죽음 하나에 삶 하나. 


마테오는 지옥의 문 밖으로 피포를 던져 삶과 죽음의 거래를 끝마친다. 20년 뒤 피포는 마피아를 찾아 배를 가르고 20년 전 그 날 방아쇠를 당긴 손가락을 모두 자른다. 비겁한 아버지가 용감한 아들을 낳은 것이다.



복고의 아이러니


문학에서 서사가 사라지고 있다. 너무 오래됐으니 오히려 사라지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와 만화, 드라마는 여전히 강력한 서사의 힘을 뽐내며 끝없이 반복되는걸? 문학은 그 반복이 싫었던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영화와 만화, 드라마가 2,000년 넘게 계속된 건 아니니까, 질림의 수준은 다를 수 있는 거다. 다른 가능성은 타 매체가 보여주는 서사의 천박함에 화가난 경우다. 내가 어떻게 만들어왔는데 그걸 이 따위로!


<세상의 마지막 밤>은 프랑스인이 로랑 고데가 그린 고전적 서사의 전형이다. 어느 곳 보다 빠르게 서사가 멸종한 프랑스. 그런 프랑스에서, 마치 고대의 부활을 외치듯(르네상스!), 저자는 그리스 신화의(서사의 기원!) 모티브를 보란듯이 차용한다. 


지옥 여행자 오르페우스.


로랑 고데는 오르페우스가 가져온 삶과 죽음의 빵 사이에 부성애를 끼워 2,000년도 더 된 평범한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이 옛날 식 샌드위치가 오히려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다고 하니, 정말로 역사의 아이러니는 지독하다세상에 새로운 일은 없고 오직 옛것이 돌고 돌며 되풀이 된다는 말은 과연 진실의 반열에 오를만 하다. 


그러나 이 서사가 현대적 프랑스와 거리를 둔 신선한 반향일지는 몰라도 현대적 대중성을 내재한 흥미진진한 지옥 여행은 아니라는 점은 알아뒀으면 한다. 프랑스인은 죽었다 깨나도 <해리 포터> 같은 건 쓸 수 없거나 그런 걸 쓰기엔 너무나 우아한 민족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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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옛그림의 아름다움
이동주 지음 / 시공사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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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지인의 서재에서 단원 김홍도의 '씨름도'를 명쾌하게 읽어주는 책을 본 적 있다. 반드시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생각과 행동은 언제나 다른 법이라 몇 년이 흘렀다. 분명히 기억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잘못 산 책이다. 내가 봤던 그 책이 아니란 말이다. 다행히 잘못된 책은 아니었다.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 조선 말의 회화까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도판을, 그것도 컬러로 볼 수 있는 책이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이다. 누구 말마따나 있어야할 건 다 있고 없을 건 없는 그런 책이다.


이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종이 한 장, 끽해야 비단 한 필에 불과한 얇은 조각들이 수 많은 세월을 어떻게 견뎌왔나 아득해질 때가 있다. 생각할수록, 살아낸 세상이 몇 개고, 겪어낸 전쟁이 몇 갠데. 게다가 그림은 천한 환쟁이의 영역 아니었던가. 천출이 그린 천물을 누군가는 고이고이 간직해 수 백년을 물려 왔던 거다. 그림 앞에 서면 그 누군가의 마음이 아련하다. 


그러나 조선 시대만 놓고 봤을 때(이 책은 조선 시대에 70%를 할애한다) 그림과 화가의 지위는 완전히 천한 것도 아니었다. 모호했다. 우선 화원이 있다. 국가에 고용된 기술직 공무원으로 왕의 초상화나 왕조의 각종 행사를 그림으로 옮겼다. 500년 실록의 국가답게 다양한 방식으로 역사를 기록했던 것이리라. 지금으로 따지만 일종의 일러스트레이터가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이 중엔 일러스트레이션을 능가하는 대작을 그린 이들도 있다. 그 유명한 <몽유도원도>의 안견이나 최고의 금강산 그림을 그린 겸재 정선 등이 그 주인공이다. 이런 대가들은 왕족(안견-안평대군) 또는 왕의(정선-영조) 직접적인 후원을 받아 예술 활동을 했다. 문재(文才)를 겸비한 이들은 높은 벼슬을 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문제의 왕족과 사대부들이 있다. 선비, 양반, 왕족 출신의 화가들인데 앞서 소개한 화원의 그림이 호구지책 이었다면 이들의 그림은 그야말로 취미, 높여 말해 내면의 수양으로 여겨졌다. 여기가 바로 모호한 점이다. 스스로 천기라 치부하는 것이 어째서 내면의 수양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는 걸까? 동일한 행위라도 행위자가 다르면 다른 일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그러나 지배층들의 그림에 대한 태도는 원칙이 없었다. 그들은 놀라울 만큼 이중적이었다. 이와 관련해 아주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하나는 사대부 출신의 세 명화가라 하여 겸재, 현재와 더불어 삼재로 불린 관아재 조영석의 일화다. 영조 재위 시 관아재가 그림을 잘 그린다 하여 임금의 초상화를 그리라는 명을 받았다. 이 때 관아재는 "내가 어디 환쟁이냐"며 당차게 거절을 한다. 다시 한 번 조정에서, 그러면 감독관을 시킬테나 맡아라 했는데 이마저도 거부해 관아재는 옥에 갇히고 만다. 그리고 나서도 끝까지 그림을 그리지 않아 사대부로서의 '자부심'을 지킬 수 있었다고 한다. 


더 재미있는 건 관아재가 자신의 그림을 손수 모아 <사제첩麝臍帖>이라는 화첩까지 만들어 놓고 거기다 "물시인범자비오자손勿示人犯者非吾子孫" 즉, "사람에게 보이지 말라, 만약에 범한다면 내 자손이 아니다"고 까지 써놨다는 것이다. 보이고 싶지 않다면 자기 손으로 찢어 버리거나 애초에 그리지 않으면 될 것을 굳이 화첩까지 만들어 놓고 흉흉한 위협까지 적어 놓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두 번째는 표암 강세황의 일화다. 이것도 영조 재위 시의 일이다. 누군가 영조에게 표암이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하자 그 누구보다 그림을 좋아하고 식견이 높았던(영조는 겸재에게 직접 그림을 배웠다) 대왕은 이렇게 대꾸한다. "그런 천기를 잘 한다는 말을 들으면 그 사람에게 오히려 누가 되니 자중토록 하라". 강표암은 감격했다. 얼마나 감격했냐면, 


그림을 끊었다. 


그는 말년에 이르러서야 다시 붓을 들었다 한다.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지만 자기 손으로 화첩을 지었던 관아재나 십수년을 끊었음에도 결국엔 다시 붓을 들고 만 강세황이나, 결국엔 사대부라는 자부심마저도 이들의 예술혼을 꺽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예술은 그 어떤 억압에도 살아 남는다.


<우리 옛그림의 아름다움>은 많은 것을 담았지만 썩 재미있는 책은 아니다. 강의를 옮긴 책이라 읽기는 쉽지만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훌훌 흘러가는 기분이다. 언급하는 화가, 그림이 너무 많은 탓이기도 하다. 또 이 그림은 이러이러해서 좋고 이 그림은 이러이러해서 나쁘다라는 설명이 적다. 모든 걸 직접 보고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동양화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림에서 무엇을 봐야 할 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의 고전 미술사를 개괄하고 싶은 사람, 특히 조선의 미술사를 간략히 훑어 보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이 중에 마음에 드는 화가, 그림을 골라 심층 탐구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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