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과 떨림
아멜리 노통브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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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 노통의 대표작은 <살인자의 건강법>이나 <적의 화장법>이 아니라 <이토록 아름다운 세살>, <사랑의 파괴>, 그리고 이 책 <두려움과 떨림>이라고 누차 얘기해 왔다.


25세에 데뷔. 이후 1년에 한 권씩 미친듯이 책을 써내는 노통은, 그러나 그 열망과는 달리 작품의 질이 고른 편이 아니다. 어쩔 땐 자기와의 약속(1년에 한 권)을 지키기 위해 억지로 책을 쓰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엉망인 작품도 많다. 그래서 노통의 책을 고를 땐 이 한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그 소설이 노통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했는가 그렇지 않은가. 전자는 대개 '두려움과 떨림'을 안겨줄 만큼 압도적 재미를 선사한다. 후자는, 나 같은 나부랭이가 이런 위대한 작가에게 할 수 있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쓰레기다.


<두려움과 떨림>은 1990년대 초 일본의 '유미모토'라는 회사에 근무하게 된 노통의 이야기를 다룬다. 나는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다. 최강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고 싶다면 1990년대 초의 일본을 보라고. '텐노 헤이카 반자이(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며 적의 항공 모함으로 달려들던 상명하복의 후예 답게 일본 국민은 국가 주도의 경제 개발에 묵묵히 따랐다. 아무런 의문도 갖지 말 것. 이 개미 군단의 질주가 패전의 핏물이 가득한 땅 위에 세계 최강의 경제를 일으켰다. 


그러나 상명하복, 무조건 적인 복종, 경직된 조직 구조로 대표되는 일본 경제의 핵심은 자유와 자유와 자유의 가치를 누려온 백인 여자에게 개미 지옥과 마찬가지였다. 노통은 그곳을 지옥이라 말하지만 택도 없는 소리! 쇠락한 서구 사회의 백인 여자가 어찌 감히 최강의 일본을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패배자가 숨겨온 복수의 칼날은 새디스트의 채찍이 되어 어리석은 백인 여자에게 태형을 선고한다.


노통은 이 수치스런 형벌을 받아들인다. 왜? 일본을 사랑했으니까.


일본 사람들에게 근대화의 역사는 서양 침략사와 일치한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패배의 추억. 일본은 이 트라우마를 '텐노 헤이카 반자이'(2차 세계 대전)로 치유하려 했으나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떨어진 거대한 성기에 강간을 당함으로써 다시 한 번 무릎을 꿇는다. 수 십년간 부들부들 치욕에 떨었던 패배자들, 그들이 경제를 통해 비로소 세계 정복을 완수했으니 그 복수심이 얼마나 대단했겠는가.


반면 노통은 1967년 생. 승자의 기억을 단 한톨도 공유하지 않은 전후 세대다. 그녀는 일본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평생 기억하며 그 곳에서 매료된 압도적 미의식을 평생의 자양분으로 삼는다.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고통을 받아야 하는 운명. 고통을 받을 걸 알면서도 사랑을 할 수 밖에 없는 자의 아이러니.


후부키는 이런 아이러니가 그대로 형상화된 캐릭터다.


180cm가 넘는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 우아한 곡선이 아름다운 일본의 고대활을 닮은, 눈부실 정도로 예쁜 여자. 유미모토 사의 유일한 간부급 여직원 후부키는 처음엔 이 낯선 외국인에게 관심과 애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비극의 씨앗이 뿌리를 내린다. 건방진 백인 여자가 유제품 부서의 '덴시'씨를 위해 기가막힌 보고서를 써준 것이다.


입사한지 한 달도 안된 햇병아리가 감히 수 년에 걸쳐 쌓아올린 나의 커리어를 단번에 앞질러 가겠다고?


'눈보라'라는 이름의 후부키는 양눈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품고 이 건방진 백인 여자를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이쯤에서 나는 '두려움과 떨림'이라는 제목이 갖는 다의성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1980년대와 90년대를 경험한 보통의 서양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떨림'은 할미꽃 사이에 핀 해바라키 만큼이나 명확하다. 그것은 일본에 대한 두려움. 한 때는 보잘 것 없던 패배자가 어느새 거대하게 자라 과거의 승자를 잔인하게 짓밟으러 다가올 때마다 지표를 울리는 떨림이다.


그러나 노통에게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이상 행동에는 대개 어린 시절의 기억이 연루되어 있다. 노통은 일본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일본의 미에 완전히 매료됐다. 결코 드러내려 하지 않지만 불가항력으로 뿜어져 나오는 우아함. 한 겨울 대나무 위로 소복히 쌓이는 눈 소리 같은 미. 그토록 필사적으로 '모던'을 추구했던 서구 문명이 결코 흉내낼 수 조차 없는 간결함의 정수들. 자라지 못한 정신에 새겨진 미의 얼룩은 아무리 문질러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무늬를 남겼다. 이 무늬가 지긋지긋할 정도로 답답하고 끔찍할 만큼 잔인한 나라에 몇 번이고 돌아오게 만든다.


노통은 결국 일본을 떠난다. 아픔을 잊으려 소설에 몰두했고 성공을 거뒀다. 다시 승자가 된 노통은 이제 모든 걸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옛 사랑의 이름을 듣는 순간 철렁, 가슴이 내려앉는다.


1992년, 내 첫 소설이 출간되었다.

1993년, 나는 도쿄로부터 편지 한 장을 받았다. 편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아멜리 상,

축하해요.


모리 후부키


이 말은 내가 기뻐할 만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어떤 점 때문에 내 심장이 멎었다.


이 말은 일본어로 씌어 있었다. (p147~148)


이것은 상처 투성이 사랑을 닮았다. 이 사랑은 두려울 정도로 아픈 상처를 주지만 그 사랑이 살갗에 닿는 순간 전율이 일 정도의 떨림을 느낄 수 있다. 이 압도적 아름다움은, 두려움이자 떨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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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15-01-04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읽은 아멜리 노통브의 책이 <살인자의 건강법>이었는데 딱 손을 놓았어요. 아 이 작가는 내 취향이 아니구나...
이후에도 계속 책이 나오고 많은 사람이 찾는걸 보고 참 사람들은 나랑 다르네 했는데, 다른 책은 또 다르단 말이군요.
다시 한 번 노통브에 도전해볼까 하고 살짝 보관함에 책 담아갑니다.

한깨짱 2015-01-06 13:38   좋아요 0 | URL
헉! 그럼 사실 이 책도 그렇게 마음에 들진 않으실텐데요... 굳이 노통에 입문하시겠다면 이 책 보다는 <이토록 아름다운 세살>을 추천합니다.
 
코핀 댄서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2-2 링컨 라임 시리즈 2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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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순수하게 재미만을 쫓고 싶다. 사고를 정지시킨 채 그저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 정해진 곳에 도착하기. 그 아무리 고귀한 문학도, 철학도 무용지물로 느껴지는 순간.


잘 만들어진 장르 소설을 찾기 위해 노력해온 건 꽤 오래된 일이다. 대부분의 주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는 달리, 사실 나는 '헐리웃 블록 버스터'의 광팬이다. 특히 개성 있는 캐릭터들을 좋아하고 그 캐릭터들이 초능력이라도 쓰는 날엔 거의 환장할 수준에 이른다. 이런 점에서 제프리 디버의 <코핀 댄서>는 나의 선택을 받기에 충분한 작품이었다.


전 FBI 소속의 천재 범죄학자 '링컨 라임'과 역시 그 바닥에선 천재라 불리는 암살자 '코핀 댄서'의 두뇌 싸움. 슈퍼 히어로와는 좀 다른 느낌 아니냐고 물을 수 있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슈퍼 히어로를 '현실'이라는 체에 거른 뒤 유니폼을 벗기고 일상의 옷을 입히면 '링컨 라임'과 '코핀 댄서'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들은 거의 초자연적 힘에 가까운 능력을 발휘해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군계일학. 닭장 속의 여우. 쉽게 말해 사기캐.


추리 소설하면 응당 매력 만점의 탐정이 등장하는 게 당연하지만 그 중에서도 '링컨 라임'은 아주 독특한 존재다. 우선 그는 척추를 다쳐 팔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장애인이다. 오로지 약간의 고갯짓과 대화만 가능. 말 그대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어 입으로 바람을 불어 전동 휠체어를 몰고 다니는 남자. 불행히도 범죄 현장을 직접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그는 증거물에 집착한다. 그것도 먼지, 종이 부스러기, 모래 따위의 미량 증거물을.


미량 증거물은 상당히 많은 연결고리를 거쳐야만 그것이 지시하는 실체에 닿을 수 있다. 긴 시간 동안 깊은 사유가 필요한 일이다. 팔다리가 멀쩡해, 그래서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보통 사람들에게 이는 커다란 장벽이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게 '생각' 밖에 없는 라임에게는? 이것이 과연 장벽이 될 수 있을까? 이 순간 링컨 라임의 치명적 장애는 궁극의 장점으로 변태한다. 가만히 누워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범인을 향해 미량 증거물이라는 빛타래를 엮어 나가는 링컨 라임. 그는 마치 미시 입자의 운동 상태를 확인해 우주라는 궁극의 어둠을 파악하려는 물리학자를 닮았다.


<코핀 댄서>를 읽으며 왜 사람들이 추리 소설에 열광하는지 알 수 있었다. 문장에는 수 없이 많은 암시와 단서 복선이 존재한다. 독자는 이 부스러기들을 긁어 모아 짧게는 두 세 문장, 길게는 몇 백 쪽 뒤에 제시될 '해답'에 앞서 추리를 해야 한다. 정답을 맞췄을 때 주어지는 보상은 '링컨 라임'과 '독자'의 동일시다. 이 동일시는 '추리-정답 확인'이라는 피드백 과정을 더 빠른 속도로 회전 시키고 회전을 통해 생성된 구심력이 독자를 소설의 핵심으로 끌어당긴다. 이 힘에 빠져든 사람은 두 번 다시 밖으로 빠져나올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추리 소설은 책이라는 매체의 한계를 뛰어 넘은 거의 유일한 장르가 아닐까 싶다. 문제가 제시되면 독자는 그것을 풀어야 한다. 마음 같아선 다 풀었을 때만 책장을 넘기고 싶지만 궁금해 못 참겠으면 뒷 장을 훔쳐본다(치팅). 정답을 확인해도 이해가 안될 땐 앞 장을 들춰 단서를 다시 수집해야 한다. 수집된 단서를 들고 새로운 문제에 맞선다. 이건 완전히 아이템을 얻고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다 최종 보스를 무찌르는 RPG 게임을 닮아 있지 않은가? 더 놀라운 건 이런 상호 작용이 다른 매체의 도움 없이 오로지 '종이'와 '문장'이라는 책의 본질만을 이용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그런데 여기 명탐정의 딜레마가 있다.


반전은 그 누구도 맞출 수 없을 때가 아니라 누구나 맞출 수 있지만 그렇지 못했을 때 발생한다. 아마도 추리 소설 작가들은 그 어떤 독자도 자기가 만든 탐정보다 뛰어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그리하여 그들은 오로지 탐정에게만 중요한 단서를 귀뜸해 준다.


그래서 나에겐 갑자기 '짠'하고 나오는 탐정의 결정적 추리가 명탕점의 뛰어난 재능이라기 보단 작가가 탐정에게 드러내는 편애의(독자보다 탐정을 사랑하는) 결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의심은 추리 소설 전체에 던지는 중대한 의문을 잉태한다.


탐정은 사건을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사건이 탐정을 위해 존재하는가?


우리는 <코핀 댄서>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링컨 라임이 사건을 해결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오히려 링컨 라임이 해결할 수 있도록 사건이 벌어진 건 아닐까? 이런 의문이 드는 순간 독자-범인의 싸움은 독자-작가의 싸움으로 변질되고 만다. 문제는 이 변질이, 단단하게 묶였던 몰입의 끈을 허무하게, 너무나 허무하게 풀어버린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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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의 전설
데이비드 밴 지음, 조영학 옮김 / arte(아르테)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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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아자크 섬에서 나를 낳았다(p.9)." 그리고 나는 이 책을 샀다.


<자살의 전설>은 다섯 편의 단편과 한 편의 중편으로 엮인 선집이다. 여섯 편의 소설은 모두 저자 데이비드 밴의 실화를 바탕으로 지어졌다. 특이한 점은 여섯 편의 소설이 모두 한 개의 경험을 재구성 했다는 점이다. 더 특이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섯 개의 이야기가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1966년 아다크 섬에서 태어난 데이비드 밴은 알래스카 케치칸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평범한 치과 의사처럼 보였으나 실은 마음이 공허한 남자였다. 외도를 했고, 치과를 팔아 어선을 샀다. 만선의 꿈은 한 번도 이루지 못했다.


데이비드 밴은 이혼한 엄마를 따라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갔다. 어느날 그는 알래스카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밴에게 자기와 함께 지내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밴은 거절했다. 그가 거절한 직후 "아버지는 44구경 매그넘을 꺼내들고 선미에 섰다. 그러고는 연어 내장 위로 자신의 몸을 뿌렸다." (어류학, p. 21)


이 죄의식이 10년 동안 여섯 편의 소설을 만들어 냈고 2년 간의 퇴고를 거쳐 <자살의 전설>로 묶였다.


여섯 편의 소설 중 핵심은 역시 중편 <수콴 섬>이다. 데이비드 밴의 고백처럼 글쓰기에는 확실히 치유 효과가 있다. <수콴 섬>은 어른이 된 아들이 아버지에게 보내는 속죄의 편지다.


<수콴 섬>에서 아들은 아버지의 요청을 받아들여 알래스카로 간다. 부자는 외딴 섬에서 일 년을 지내기로 마음 먹고 사냥을 하고 훈제실을 짓고 식량 창고를 만들었다.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자신의 상실감을 메워줄 거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 문제는 아들도 자신이 아버지를 치유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외딴 섬의 외딴 오두막엔 두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사실 한 사람 뿐이라는 것을, 아버지도 아들도 알았다.


속죄를 위해 데이비드 밴은 <수콴 섬>의 아들에게 피스톨을 건넨다. 아들은 피스톨의 공이를 젖힌 뒤 총구를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긴다. 이로써 수 십 년 간 아들을 괴롭힌 죄책감이 구원의 기회를 얻는다. 


아버지는 머리가 박살난 아들의 시체를 침낭에 싸들고 눈 덮인 섬을 헤매며 죽음을 구걸하지만 행운은 그렇게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아버지가 구원을 얻은 건 멕시코로 가는 밀항선에서였다. 아들을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조사를 받은 뒤 도망을 가는 길이었다. 아버지에게 돈을 받고 밀항을 도운 두 명의 선원은 잠든 아버지의 목에 밧줄을 걸고 질질 끌고 가더니 버둥거리는 발을 몽둥이로 내려치고는 그대로 바다 속에 쳐넣었다. 물은 차가웠고 젖은 옷의 무게가 아버지를 깊은 바다 속으로 끌고갔다. 아버지는 차가운 물을 마시며 "아들이 자신을 사랑했음을, 그리고 그 사랑으로 충분했음을 깨닫는다" (p. 163).


그 순간 <수콴 섬>의 아버지와 데이비드 밴이 구원을 얻는다.


<자살의 전설>을 재미 있다고 말하기엔 솔직히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이야기는 특별한 사건이 없고 그저 지루한 일상을 담담히 늘어 놓는다.


그런데 죽음이 있다.


혹한의 겨울 마저 꽁꽁 얼려버릴 듯 차갑고 담백한 죽음의 묘사.


고요한 밤, 불현듯 현관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는 확실히 요란한 낮 시간에 울리는 소리와는 충격의 질이 다르다. 절정의 순간을 지극히 담담히 그려 독자를 방심케 한 뒤 뜩, 강펀치를 날리는 '전형적 하드보일드'. 그러나 여기선 '전형적'이라고 비하하기가 무색할 만큼 깊은 맛이 난다. 이 맛에 빠진 사람은 울고 불고 쥐어짜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모두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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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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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관조의 대상이다. 물끄러미, 한참을 바라볼 때야 비로소 보지 못했던 것들이 드러난다. 그래서 나는 떼지어 줄줄이 관람하는 미술관을 이해 못 한다. 강렬한 색채와 조명 효과가 시각을 사로잡는 서양화라면 그나마 괜찮지. 동양화의 경우라면, 그 텅빈 백색 여백이 머리 속에 공백을 남길 뿐이다.


'여백의 미'란 우리 옛 그림의 허술함을 맹목적으로 찬양하기 위해 지어낸 허울이 아니다. 우리 선조들은 여백을 채울 방법이 없었던 게 아니다. 그것은 치밀히 계산된 것이었다. 고색창연한 사상 속에 그런 얄팍한 계산이 존재할리 없다고 믿어도 소용 없다. 우리 옛 그림에서 '텅 빔'은 명백히 의도된 것이다.


여백을 쓸모 없음으로 치부하는 사람은 침묵의 정보량이 '0'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누구나 이런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이거 먹을래? 상대방의 침묵. 여기서 침묵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침묵은 도리어 수 많은 말을 한다. 그래 아무거나 상관 없어. 먹고 싶지 않아. 먹고 싶지만 너랑은 아니야. 다른 건 없을까?


침묵이 하는 말을 듣게 됐을 때에야 우리 옛 그림은 오롯이 마음에 담긴다.




김홍도(1745~1806?), <주상관매도>



그림이란 본질적으로 객체와 그 구도(배열)가 만들어내는 총체적 표현이다. 우리 옛 그림이 혁신적인 이유는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은 여백을 하나의 객체로서 사용했다는 점이다. 눈을 그리는 방법 중 하나인 유백법은 이러한 생각의 정수를 담는다.





김유성의(1725~?) <설경산수도>는 우리가 흔히 보아왔던 옛 그림과는 다르게 여백을 가득 채운다. 채움이 멈춘 곳은 나뭇가지 주변이다. 멈춰선 자리에서 무가(無, 여백) 생겨나고 무는 곧장 유를(有, 눈) 낳는다. 비로소 침묵이 입을 여는 순간이다.


우리 옛 그림의 치밀함은 여백을 다루는 방식에서만 드러나는 게 아니다. 김홍도의 <씨름>은 완벽히 계산된 구도를 논하기에 제격이다.





<씨름>은 곳곳에 놓인 신발과 갓에서 빙 둘러 앉은 관중, 중앙의 씨름꾼, 홀로 다른 곳을 쳐다보는 엿장수, 오른쪽으로 터진 여백 등 어느 것 하나 의도하지 않은 게 없다. 더욱 놀라운 점은 중앙의 씨름꾼과(아래서 위를 바라본 시점) 관객을(위에서 아래를 바라본 시점) 그리는 시점이 다르다는 점이다. 뿐만아니라 원근도 미묘하게 틀어져 있다. 씨름꾼 보다 가까이에 앉은 관객들이(작품 하단) 도리어 씨름꾼 보다 '작게' 그려진 것을 보라. 서양에서는 피카소에(20세기) 이르러서야 등장한 다시점 구성이다. 김홍도가 왜 천재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나는 '선(線)'이야 말로 우리 옛 그림에서 가장 독특한 구성 요소라고 생각한다. 서양화의 경우 선은 면을 구성하기 위한 부속에 지나지 않는다. 부속인 선은 발언권이 없다. 김명국의 <달마상>을 보자. 






그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나아갔다, 머물렀다, 다시 솟구쳐 오르는 선이 보이는가? 선이 달마의 옷을 그리고 그려진 옷을 입은 달마가 얘기하는 게 아니다. 


선 자체가 말을 한다. 


답답한 이론 중심의 교종 일색이던 6세기의 중국을, 그야말로 일필휘지로 뚫고 나간 달마의 기상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이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는 나무와 집을 그리는 선의 대비가 화가의 마음을 대변하는 경우다. 이 그림은 유배 시절 자기를 잊지 않고 챙기던 제자의 마음에 감동을 받은 김정희가 그려 보낸 그림이다. '해 세'자에 '찰 한'. 이른바 추운 시절의 그림.





위태위태 얇은 선으로 지은 집 안엔 분명 김정희가 앉아 있을 것이다. 그럼 해마다 잊지 않고 안부를 묻는 제자는 어디 있는가? 


힘차게 줄기를 뻗은 두 그루 소나무가 무너져 가는 집을 지킨다.


유백법과 김홍도의 구도는 설명을 듣고 나서야 '아, 그렇구나'하며 감탄하게 되지만 <달마상>이나 <세한도>는 설명 없이도 전해지는 감정이 있다. 전자가 머리를 통하는 그림이라면 후자는 마음에 직접 말하는 그림일 것이다. 


모두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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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14-12-15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제일 좋아하는 그림이 김홍도의 <주상관매도>인데요. 아침에 WiredHusky 님 덕분에 기분좋은 출발을 합니다. ^^

한깨짱 2014-12-15 12:58   좋아요 0 | URL
제 글이 누군가의 기분 좋은 출발을 만들어 줄 수 있다니 정말 행복하네요. <주상관매도>는 진짜 진짜 명작입니다.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토드 부크홀츠 지음, 류현 옮김, 한순구 감수 / 김영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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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분야에 입문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 분야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다. 철학을 배우고 싶으면 철학사를, 미학을 배우고 싶으면 우선 미학사를 들여다 보라는 말이다. 


역사는 개괄이고 종합이다. 훑어볼 수 있다. 그저 코를 대고 쓱 냄새만 한 번 맡아보라. 분명 구미가 당기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끝이다. 한 번 구미가 당기고 나면 먹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게 당신과 나, 우리 '지식 포식자'들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경제사다. 애덤 스미스의 고전 경제학에서 최신의 대세로 떠오른 행동 경제학(분량이 코딱지 만큼이긴 하지만)까지 300년에 다다르는 방대한 경제사를 역시 600쪽이라는 방대한 분량으로 엮어냈다. 어쩔 수 없지 뭐, 300년 짜리를 60쪽으로 묶을 수는 없잖아.


나는 이 책을 두 번이나 읽었다. 아무리 경제에 관심이 많아도 비전공자는 비전공자. 마셜의 '한계 효용 이론'이나 프리드먼의 '통화주의'를 단 한 번의 독해로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럼 두 번을 연거푸 읽은 지금은 완전히 이해했나? 그렇지 않다. 내가 이 책을 반드시 소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기본'이라는 건 반복의 횟수에 비례해 그 강도가 결정된다. 물론 잘못된 기본이라면 단단함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지만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는 구성이 탄탄하다. 경제학의 핵심만을 골라 촘촘히 짜 넣었다. 365일 책상 위에 올려 놓고 시간이 날 때마다 읽어야 할 책이라는 말이다.


게다가 이 책은 재미있다.


당연한 걸까? 세상에는 중요한 것일 수록 배우기 어렵고 힘든 경우가 많다. 경제학이 그렇다. 이런 분야일 수록 더욱 재미를 고려해야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 심지어 어떤 대가들은 자기 학문이 난해할 수록 만족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 높고 굳건한 진입 장벽을 세워야 자신이 더 위대해진다고 생각하는 것일 테지. 아무도 이해 못하는 걸 나 혼자 알고 있다!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저자는 지루하고 어려운 경제학 이야기를 최대한 쉽게 설명하기 위해 문장 곳곳에 재치와 위트를 풀어 넣었다. 고명한 학자가 유머를 갖추기란, 독수리가 근시가 되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법이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는 게 또 세상의 이치다. 이 책에도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첫째, 조지 부시(아버지 부시)의 경제 담당 비서관 이라는 약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자유주의 진영의 경제학자다. 물론 600 페이지의 책을 써 내려가는 동안 저자는 단 한 번도 일방적인 편들기나 자기와 반대편에 선 주장에 노골적인 적대심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래도 뉘앙스가 있다. 


은근한 편들기. 따라서 균형 잡힌 경제사 지식을 쌓고 싶은 사람이라면 토드 부크홀츠와는 완전히 반대 쪽에 서 있는 '장하준 류'의 경제사를 읽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둘째,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빠져 있다. 이 책의 개정판이 나온게 2007년 이니까 2008년에 터진 금융 위기를(07년에 시작해 08년이 본격화 된) 설명하려면 웜홀과 중력자 별을 이용한 시간 여행이 필요했을테니 결코 저자를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그 동안의 경제학 이론을 뿌리 부터 재고해 봐야 할 만큼 대단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저자는 일본 경제의 몰락과 미국의 부흥을 비교하면서 '금융 서비스를 고도화 시키지 못한 일본인'과 '복잡한 파생 금융 상품을 개발해 낸 창의적 미국인'이라는 도식을 제시한다. 내 알기로 그 '창의적 파생 상품'이 2008년에 미국을 강타한 역사상 최대의 금융 위기의 주범이었다.


개정판이 나온다면 저자는 이 금융 위기를 어떻게 설명할까?


벌써 3판이 나왔으니 4판을 기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적어도 한 명이 독자는 확보한 셈이니 고민하지 말고 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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