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대한민국 1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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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국민이 언제나 자국민에 대해 깊은 이해를 보이는 건 아니다. 때로는 그것과 전혀 상관없는, 아무런 이해 관계가 없는 머나먼 3자가 더 날카롭게 그들을 꿰뚫어 보곤한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당사자는 감정이 앞서기 마련이다. 감정은 놀이 공원에 있는 요상 망측한 거울처럼 대상을 왜곡하기 때문에 그것의 참모습을 바라보기 어렵게 만든다. 둘째, 무관심이다. 자국민에게 자국민의 모습은 일상일 가능성이 높다. 끊임없이 숨을 쉬면서도 공기의 존재를 잊고 사는 것처럼 습관화된 일상은 특별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게 할 기회를 거의 주지 않는다. 그래서 <곤충기>를 곤충이 아니라 파브르가 쓴 것이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에 나오는 박노자의 생각에 모두 찬성하는 건 아니지만, 박노자가 한국에 대해 한국인 보다 훨씬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점 만큼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는 단순히 이 땅에 놀러온 외국인이 아니다. 어학원을 몇 년 다니며 한국인 친구 몇 명을 사귀고 원어민 교사를 하다 주말에 화려한 클럽 파티를 즐기는 그렇고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는 무려 '한국학' 전공자다. 박노자는 한국의 역사, 경제, 정치 뿐만 아니라 종교, 교육에 있어서까지 아주 내밀한 경험과 그를 토대로 형성된 막대한 지식을 갖고 있다. 한 마디로 그는 한국에 빠삭하다. 게다가 자기 입장이라는 게 거의 개입할 여지가 없기 때문에 상당히 균형잡힌 시각을 갖는다. 그는 우리가 서구인의 인종차별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우리가 동남아 노동자와 조선족에게 보이는 노골적인 경멸을, 식민지 시대 및 해방기에 일본과 미국이 저지른 각종 양민 학살에 핏대를 올리면서도 용감한 한국 해병대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 모순을 날카롭게 집어낸다.


이렇듯 이해 당사자가 아니라는 점은 뭔가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선 어마어마한 혜택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 연구 결과를 이해 당사자에게 납득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당사자에 대한 외부의 비판은 오히려 당사자들을 오만과 편견, 왜곡과 아집으로 똘똘 뭉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니가 뭔데 이래러 저래라냐, 당해보지도 않은 놈이 뭘 안다고 큰 소리 치냐, 니가 진짜 우리 아픔을 아냐, 그러는 너네 나라는 더러운 게 없냐? 이쯤되면 내용에 대한 이성적 비판이 설 자리가 없다. 거의 신앙에 가까운 불신. 이성에 대한 학살. 어디 옹호라도 할라치면 더러운 매국노로 찍혀 생매장 될 각오를 해야 한다.


미즈노 교수라 불리던 한 일본인은 오히려 이를 이용해 고국으로 돌아가 상당한 이득을 취했다. 혐한 분위기를 타고 오른 그의 원색적인 한국 비판은 한국인이 흥분할 수록 더 가치있게 팔려나갔다. 이런 면에서 박노자는 확실히 선비에 가까운 것 같다. 아니 어떤 면에선 진짜 베팅을 할 줄 아는 무서운 겜블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1999년 박노자는 한국인으로 귀화한다. 머리는 제 3자로 가슴은 당사자로 남을 수 있는 완벽한 조건을 갖춘 것이다. 이제 한국에 대한 박노자의 비판은 모두 자기 반성이 됐다. 진실은 얻으려면 누워서 침뱉기를 두려워해선 안 된다. 그의 침뱉기는 때로 섬뜩할 정도로 날카롭고 냉정하지만 그 밑에 인간 자체에 대한 박애와 존중이 깔려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그의 글을 차분한 마음으로 읽어 나갈 수 있게 된다. 진정한 애국이란 이런 게 아닌가 싶다. 대한민국 만세는 진짜 만세할 나라를 만들고 나서 외쳐도 상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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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2 -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개정판 한국 현대사 산책 2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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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현대사를 지켜보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일은 친일파들이 그대로 살아 남아 나라의 권력을 차지했다는 점이다. 그 때 살아남은 친일파들은 오늘날 유력 정치인, 기업인, 교육인이 되어 잘 먹고 잘 산다. 생각할 수록 어이가 없고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는 일이다. 이들은 어떻게 대한민국의 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을까?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정치엔 돈이 필요하다. 이승만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김구까지 친일파 제거에 소극적이었던 이유는 그들에게 정치 자금을 대줄 수 있는 게 친일파였기 때문이다. 식민지 하에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던 독립 투사들? 상해를 거쳐 중경으로 쫓겨난 임시정부 요인들? 택도 없는 소리다. 당시의 보수 우익 정치인들은 대개 친일파의 자금을 받았고 이 돈으로 정당을 운영하거나 각종 청년단을 만들어 정적 제거, 좌익 테러에 앞장 섰고 때로는 타 정당을 지지하는 민간인을 죽이거나 고문하거나 약탈하거나 강간했다. 그 중 최악의 청년 단체였던 '서북청년회'가 얼마전 서울 시내 한 복판에서 재건위원회의 모습으로 나타나 세월호 추모 리본을 회수한 사건은 우리의 과거 청산이 얼마나 부실한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다. 친일파와 극우 테러 집단은 유명 정치인에게 빌 붙어 돈과 폭력을 제공함으로써 생존을 보장받았다. 생존을 마친 그들은 오늘날 대한민국 자체를 두 손에 넣고 주무른다.


둘째, 반탁은 애국이다. "1945년 12월 28일에 발표된 모스크바 결정은 먼저 임시 정부를 수립하게 되어 있었고 신탁통치의 방안은 결정하지 않았다. 임시 정부가 강력히 반대하면 신탁 통치를 받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던 것이다(p145)." 그런데 동아일보(친일 지주들이 설립한 한민당의 기관지)가 일련의 오보를 내보냄으로써(소련은 친탁, 미국은 반탁) 대한민국은 반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동아일보가 왜 이런 오보를 냈을까? 태생적으로 친일파라는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이들에겐 그 과오를 가려줄 타이틀이 절실하게 필요했고 그것이 바로 '반탁=애국'이라는 프레임이었다. 겨우 독립을 했는데 다시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니? 이런 감정의 폭발은 신탁통치에 대한 이성적 논의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메세지는 단순할 수록 강하다. '반탁=애국'이라는 공식은 그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았고 친일파와 그들의 정당은 애국자로서 완벽한 세탁에 성공한다. 이는 또한 소련과 연결될 수 밖에 없는 좌익 계열 지지자들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프레임이기도 했다. 친일 경력으로 인해 대중적 지지가 전무했던 이들에겐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던 좌익 계열 정당을 두려워했다. '소련=친탁=좌익=매국노'. 오늘날 보수 정당이 위기의 순간마다 말도 안 되는 '색깔론'을 들고 나오는 이유는 이때 거둔 승리의 유산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단적으로 증명해준다.


셋째, 멍청한 양키놈들이다. 이미 일본 점령으로 원하는 바를 이룬 미국은 대한민국의 미래에 큰 관심이 없었다. 주둔 이후 그들이 벌인 첫 번째 만행은 독립 후 겁을 먹고 도망친 친일 조선인 경찰을 다시 경찰직으로 불러 모은 것이다. 왜? 경찰질을 하려면 경험이 있어야 한다. 경험이 전무한 사람들을 데려다 장기간 교육시켜 경찰을 만들겠다고? 미국의 머리 속엔 민중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저 행정의 효율화만이 있었던 것이다. 일반 행정도 마찬가지였다. 미군은 당연히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선호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건 유학생, 유학을 가는 건 친일파. 물론 당시의 '통역 정치'가 비단 친일파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떠돌아 다니며 주워 배운 몇 마디 영어로 미군에게 붙어 적산(일본인이 남기고 간 재산)을 차지한 사람도 많았고 이를 본 많은 지식인들이 통역관 자리를 얻어 미군정에 빌붙게 된다. 그 유명한 '사바사바'가 바로 여기서 나온 말이다사바사바로 자기 목구멍을 채운 인간들이 미군정의 친일파 등용을 반대할 이유가 있을까? 이로인해 대한민국 행정부는 친일파 또는 그들의 득세를 방조하는 사람들로 가득차게 된다.


먹고 살기 힘든 요즘을 곰곰히 들여다보면 언뜻 그 시대와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방법이야 뭐가 됐든 잘 먹고 잘 사는게 최고인 세상아닌가. 도덕과 정의를 지키려는 사람을 '씹선비'로 매도하는 세상. 취업이 확정 됐는데 사주가 친일파였다는 이유로 입사를 거부할 사람이 있을까? 친일 언론과 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을 '통역 정치' 시대의 사바사바인들과 매끈하게 구분할 수 있을까? 나조차도 결백을 자신할 수는 없다.


그런 면에서 현대 한국인들의 특성인 극단적 이기주의, 보신주의, 한탕주의 등의 습성은 세상이 자본화됨에 따라 생긴 새로운 부작용이 아니라 해방 이후부터 줄곧 간직해온 오래된 전통이 아닌가 한다. 돌연변이 같은 현재는 없다. 현재는 과거의 축적일 뿐이다.


시작부터 얽힌 실타래는 70년 동안 도저히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됐다. 어느 쪽으로 당겨야 할까? 마음이 무겁다. 고민을 거듭할 수록 더더욱 복잡해지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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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5-08-30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막장국가 대한민국은 답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훌륭한 글을 읽었지만, 저도 암담한 생각밖에 안 듭니다.
이 나라는 희망을 티끌만큼도 볼 수 없습니다.
이런 말씀밖에 드릴 것이 없다니, 정말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한깨짱 2015-08-31 12:53   좋아요 0 | URL
보기 힘들고 어렵더라도 직면해야하는 게 우리의 숙제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고개를 돌리면, 그들의 득세는 영원해지지 않을까요.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개정판 한국 현대사 산책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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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현대사 책을 만나는 건 쉽지 않다. 아니 현대사 자체를 만나는 게 어려운 일이다. 이유야 여럿이겠지만 우선 '현대'는 아직 '사'가 될 수 없는 시간적 한계가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한다. 역사는 어디까지나 사후 판단. 일어난 일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에 현대는 너무 가깝고 대부분 현재 진행 중일 확률이 높다.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 산책>은 1940년대에서 시작한다. 해방 정국. 식민 시대의 종말. 저자는 70년 전의 이야기라면 충분히 역사가 될 만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책을 읽어보니 그 생각에 충분히 공감이 간다.


아니 이 책은 굳이 '현대사'라는 타이틀을 달지 않더라도 반드시 나왔어야 할 책이다. 고작 70년 전의 한국이다. 그런데 왜 내가 배워왔고 알고 있던 역사와 이렇게 다른 것인가? 나는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는 사실을 이처럼 뼈저리게 느껴본 적이 없다.


승자의 기록은 그 동안 숱하게 들어왔을 테니 이제는 당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시간이 필요하다. 저자 강준만은 이 책에서 거의 논평하지 않는다. 책이 상당히 지루해질 것을 감수하면서도 수집한 방대한 자료를 건조하게 늘어 놓는 전략을 택한다. 이 시대의 뜨거움을 전달하려면 그와 같은 차가운 마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1940년대 편은 1945년 부터 1950년 사이를 무려 2권으로 풀어내기에 그 내용을 압축해서 말해주기가 쉽지 않다. 한편 5년을 위해 2권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이 시대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를 역설적으로 설명해준다.


우선 인물이 폭발한다. 여운형, 박헌영, 김일성, 이승만, 김규식, 김구 등등 해방 정국의 유력한 정치인으로 떠오른 사람만 꼽아도 열 손가락이 모자라다. 내용을 따라가기 어려운 이유도 이 폭발하는 인물 때문인데 이 사람들의 배경과 경력 인물평을 하나 하나 내놓고 가기엔 지면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강준만은 인물이 아닌 사건들에 초점을 맞춘다. 나는 적어도 위에 언급한 6명에 대한 책을 따로 따로 읽은 뒤 다시 이 책을 손에 들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 인물이 당시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다른 선택은 불가능 했는지에 대한 개인적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솔직히 고백하면 이 책을 읽고 난 뒤 '아 1940년대를 이제 좀 알게 됐구나'라고 생각하기 보단 어마어마한 숙제를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고작 2권으로 끝내기에 이 시대는 너무나 복잡하다. 읽고 챙겨야 할 것들이 한 두 개가 아니다.


강준만은 이 시대가 좌우 투쟁의 시대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이승만도 김구도 박헌영도 김일성도 인간의 평등과 자유를 위해 싸워온 사람이 아니다. 그들의 계급 의식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체성은 권력욕에 비해 한 없이 흐릿하고 약한 것이었다. 이승만은 우파가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에게 권력을 뺏기고 싶지 않은 욕망의 화신이었고 김구는 이도 저도 아닌 채 방황하다 대세가 이미 넘어갔을 때에야 정신을 차리고 애국 통일을 부르짖은 허술한 우파였으며 김일성은 말할 필요도 없는 사이비 좌파였다. 당시의 진정한 좌파와 우파 온건 중도주의자들은 모두 이 사람들의 손에 죽었다(김구는 공공연히 테러 집단을 만들어 정적을 제거했다). 나는 여기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역사는 언제나 악이 승리하고 정의가 도륙됐음을 증언한다. 그렇다면 우선 살아남아야 하는 게 아닐까? 마키아벨리가 말했듯 정의를 지키고 싶으면 때로 그 정의를 완전히 저버릴 각오가 되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아닐까? 선은 언제나 승리에 대한 열망으로 충만하나 승리하는 방법에 대해선 늘 외면해 왔다. 어쩌면 선은 더러운 진흙탕 속에 뿌리를 내리고 마침내 수면 위로 피어오르는 연꽃 같은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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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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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시간 서점에 들렀다 우연히 <7년의 밤>을 만났다. 짧은 세 쪽의 프롤로그였다. 나는 그대로 서서 세 쪽의 문장을 베껴쓰고 싶었다. 펜과 종이만 있었다면 결단코 실행에 옮겼으리라. 


소설을 쓰려면 이렇게 시작해야 한다.


<7년의 밤>은 이야기의 시작이 이야기의 중간이어야 한다는 장르의 규칙을 이상적으로 수행한다. 시작을 중간에서 하다니? 당연한 얘기다. 전후 맥락없이 뜩 하고 튀어나온 이야기는 독자의 뇌를 간질일 수 밖에 없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작가와 독자의 밀당은 독자의 머리 속에 이 의문이 등장하는 순간 작가의 압승으로 끝난다. 궁금하면 어쩔 수 없어. 책장을 넘길 수 밖에. <7년의 밤>이 68쇄를 찍은 건 모두 이 프롤로그 덕분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두 번 읽지 않을 것이다. 우주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지구의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지상으로 빨려 들어온다. 거대한 빛꼬리를 그리며 대기권을 통과하는 모습이 아름답지만 그 빛은 찰나에 불과하다. 그대로 수직 추락한 이야기는 땅 위에 닿기도 전에 먼지가 되어 사라진다.


이 소설은 스릴러 치고는 긴장감이 부족하고 미스테리라고 하기엔 사건의 전말이 너무 뻔하다. 프롤로그는 잘 만든 예고편이었다. 극장에 앉아 전부를 확인하고 나니 치즈 소스에 나초를 찍어 먹은 것 보다 강렬한 경험을 기억하기 어려웠다. 150~200 페이지 정도 분량을 줄였다면 더 괜찮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가기엔 캐릭터들이 너무 일상적이다. 일상적이기에 상세한 배경 설명 없이는 이야기가 비어보였을 것이다. <7년의 밤>의 살인마는 안톤 쉬거가 아니니까. 빔 자체가 오히려 캐릭터를 형성해 버리는 미지의 사나이가 아니니까.


그런 면에서 <7년의 밤>이 일으키는 사건들은 <7년의 밤>의 캐릭터들이 감당하기에 너무 컸던 게 아닌가 싶다. 도저히 그런 일을 벌일 수 없을 것 같은 인물들이 그런 일을 벌인다. 서사가 캐릭터의 멱살을 쥐고 끌고간다. 옷깃이 뜯어지고 신발이 벗겨진다. 퉁퉁 부은 발에서 철철 피가 흐른다. 이 균열이, 이 폭력이 나를 긴장의 진공 속으로 빠뜨린다. 역사 소설이었다면 어땠을까? 역사는 불가항력의 면모를 지녔으니까. 캐릭터가 질질 끌려간대도 그 자체가 하나의 상징이 됐을지 모른다.


어쨌든 각자가 벌이는 일에 필연성이 보이지 않는다. 남자는 왜 자기가 차로 친 소녀의 목을 비틀어 죽여야만 했을까? 남자의 부하 직원은 왜 남자의 아들을 데려다 키웠을까? 그리고 소녀의 아버지는 왜 복수를 위해 7년을 기다렸을까? <7년의 밤>은 내가 던진 질문에 답을 주지 않는다. 책에서 손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건 독자의 질문 뒤에 작가의 답이 이어지는 것이다. 엉뚱한 대답이 나오면, 대답을 회피하면 나는 한 두 번 더 기다려 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시종일관 지속되어 책장을 덮는 순간까지 이어진다면 나는 그 책을 책장에 쳐박아 70년을 썩힐 수 밖에 없다.


누군가에게 읽힌다는 건 책에게 있어 모진 시험이다. 이제 그 시험은 끝났다. 부디 책장에 누워 편안히, 70년을 보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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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센트
이언 매큐언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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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매큐언이라는 생소한 이름 덕분에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부응하듯 소설은 정말 재미가 없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의 베를린이 배경이다. 독일은 동서로 분리됐고 서쪽엔 미국이 동쪽엔 소련이 각각 주둔했다. 아시다시피 세계 대전 이후의 세계는 이데올로기 싸움의 장이었고 모든 국가가 소련편과 미국편으로 나뉘어 Cold War, 냉전이라는 것을 치뤘다. 


그런데 냉전은 눈에 보이는 싸움보다 물 밑에서의 암투가 훨씬 치열한 전쟁이었다. 각국의 정보 조직이 서로를 엿 먹이기 위해 엄청난 돈과 인력을 쏟아 부었다. CIA의 솔트도 MI6의 더블오세븐도 다 거기서 생겨난 놈들.


<이노센트>의 주인공 레너드 마넘은 영국 체신국의 엔지니어다. 그가 MI6의 부름을 받아 비밀 취급 인가를 얻고 스파이 활동에 가담한 이유는 MI6가 CIA와 손을 잡고 땅굴을 팠기 때문이다. 미국 쪽 본부에서 동독 놈들의 정보부 건물까지. 그 밑엔 각종 전화선이 있었고 레너드 마넘은 놈들이 소련 놈들과 교신을 할 때 마다 신호를 포착해 자동으로 녹음하는 역할을 맡는다. 


동독 경찰 포포스는 미국 놈들의 건물에 드나드는 모든 인물을 쌍안경으로 감시하지만 자기 발 밑에 그런 음침한 터널이 깔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미국 놈들은 특유의 긍정과 개척 정신으로 그 무모한 계획을 성공시킨다.


이 짜릿한 성공을 타고 레너드 마넘의 인생도 부드럽게 활강한다. 여기서 잠깐, 한 가지 충고를 하고 넘어가자. 인생이 잘 나갈 땐 최대한 변수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 변수가 많을 수록 예측이 불가능해지니까. 특히 비밀을 취급하는 스파이한테는. 외국에 나온 독신남에겐 뭐가 제일 큰 변수겠는가? 물어보나마나지.


마리아는 놓칠 수 없는 미모의 여자였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멍청한 남자와 결혼한 전력이 있는 농염한 여자였다. 체신부 엔지니어 레너드 마넘은 아직 여자와 자본 적도 없는 숫총각. 마리아는 남자가 여자를 어떻게 만족시켜야 하는지 하나씩 하나씩 가르쳐주고 마넘은 이 농염한 여자의 나체에 정신을 잃는다. 베를린의 살벌한 겨울도, 온수가 나오지 않는 아파트도 그들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파멸의 시간은 정사를 나누는 침대 옆 옷장에 마리아의 전 남편 오토가 잠들어 있는 걸 발견했을 때였다. 그들은 황급히 옷을 입고 옷장을 열었고 오토를 끄집어냈고 자기도 이 집에서 살 권리가 있다는 오토의 주장에 반발했고 반발에 반발한 오토가 마넘의 귀와 부랄을 가격하고 가격당한 마넘이 오토의 볼을 물어 물어 뜯고 입 속에서 그 붉은 살덩이를 뱉어내자 마리아가 마넘에게 구두 한 짝을 건넸고 그 구두발이 오토의 머리에 박혀 그의 두개골을 아작내는 순간 이 지루했던 소설은 걷잡을 수 없이 재미의 핵심으로 빨려들어간다.


진정한 사랑은 시련이 왔을 때 증명된다. 두 사람은 사후 경직이 끝난 오토를 부엌 식탁에 올려 놓고 새로 산 최신형 공구로 그 시체를 잘라 가방에 담는다. 마리아는 마넘에게 줄곧 남자답게 행동해 주기를 바랐고 마넘은 누구의 전남편 때문에 자기가 살인자가 됐는지만을 떠올렸다. 마넘은 마리아가 꾹꾹 눌러 담은 케이스를 들고 그 음흉한 사무실로 간다. 도대체 왜? 이유는 직접 책을 통해 확인하시라.


뜨거웠던 사랑은 토막난 시체처럼 산산조각났다.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읽지 못했다. 마넘이 영국으로 돌아가게 됐을 때 마리아는 곧 따라가기로 약속하고 부모님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길 원하지만 마넘은 얼버무린다. 그는 이 아름다운 여자가 얼마나 끔찍한 짓을 벌였는지 잘 안다. 마리아는 그저 이 사태에서 도망치기만을 바라는 나약하고 멍청한 남자에게 신물이 난다. 마넘은 그 태도에서 다른 남자의 냄새를 맡는다. 마리아는 오토가 채워주지 못한 것을 찾아 자기에게 왔다. 그리고 이제는 자기가 채워주지 못한 것을 찾아 다른 남자에게 가려 한다. 한 번 태어난 오해는 관계를 박살내기 전까진 절대 죽지 않는다.


그 누구도 사건의 전말을 파악할 수 없는 비밀의 구덩이에서 그저 해야할 일을 할 뿐인 인간들, 그리고 그게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일임이 밝혀지는 이야기는 카프카의 부조리를 연상케 한다. 그렇다면 <이노센트>란 제목은 그저 반어법에 불과한 걸까? <이노센트>는 마지막 책장을 덮기 전까지 이 소설이 왜 이노센트인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그걸 확인하는 방법은 직접 읽는 것 뿐이다. 부디 겹겹이 쌓인 비밀을 뚫고 진실에 닿을 수 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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