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마지막 밤 민음사 모던 클래식 33
로랑 고데 지음, 이현희 옮김 / 민음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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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스포일러 한바가지에요



죽음에 대처하는 법


사랑하는 사람과 목숨을 바꾸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봤거나 잃어본 상상을 해본 사람은 안다. 


압도적 고통의 무게를. 


사랑하는 사람 대신 내가 죽겠다는 건 평생 내가 살면서 지고 가야 할 슬픔의 무게를 상대방에게 전가하겠다는 얘기다. 따지보고면, 이기적인거야.


어려운 건 복수다.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자를 내 손으로 죽이는 것. 여기엔 인생을 걸어야 한다. 실패할지도 몰라, 불안과 초조가 홍수처럼 밀려온다. 


오르페우스의 경우도 있다. 이 남자는 우아하다. 자기 능력에 대한 대단한 믿음이 있었다. 사랑하는 연인을 죽인자를 찾아 복수하기 보다는 연인을 되살리고자 마음 먹었다. 지옥문을 지키는 켈베로스를 자신의 뛰어난 연주로 잠재우고 지옥으로 갔다. 지옥의 왕과 왕녀 하데스와 페르세포를 만나 또 하나의 음악을 연주했다. 왕과 왕녀는 감동 받았다.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고 하자 연인의 삶을 되돌려 달라고 한다. 욕심을 너무 부렸다. 연인 대신 자기가 죽겠다고 했어야지. 하데스와 페르세포네도 '어쭈 이것 봐라?'라는 생각을 가졌을지 모른다. 그래서 마지막 시련을 더한다. 지옥을 나설 때까지 절대 뒤돌아 보지 말 것. 지상을 두어 걸음 앞둔 오르페우스는 방심했고 뒤를 돌아봤다. 연인은 다시 끝모를 지옥으로 끌려 갔다.


<세상의 마지막 밤>에는 마테오와 피포가 나온다. 피포가 주인공이다. 마테오는 피포의 아버지다. 여느때와 다름 없는 어느 평범한 아침 마테오는 피포의 손을 잡고 등교길에 나선다. 약간 늦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재촉해 빨리 걷는다. 상기된 아버지의 얼굴에 손이 아프다는 말도 못한채, 질질 끌리듯 따라간다. 어느 골목에 들어섰을 때 마피아의 총격을 받았다. 아들이 죽었다.


아내는 아들의 복수를 원했다. 마테오가 그 더러운 마피아 놈의 심장에 차가운 총알을 꽂아 넣길 원했다. 아버지는 해내지 못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떠났다. 어려운 건 복수라니까.


택시 운전수 였던 마테오는 일은 하지 않고 도시를 배회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평생 동안 지옥을 연구한 교수를 만난다. 교수는 지옥의 문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오르페우스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지옥에 내려간 피포를 찾은 마테오는 아들을 안고 경계에 선다. 두어 걸음 앞에 세상이 있다. 마테오는 비겁한 아버지였다. 그러나 자기 능력의 한계를 명확히 아는 남자였다. 


죽음 하나에 삶 하나. 


마테오는 지옥의 문 밖으로 피포를 던져 삶과 죽음의 거래를 끝마친다. 20년 뒤 피포는 마피아를 찾아 배를 가르고 20년 전 그 날 방아쇠를 당긴 손가락을 모두 자른다. 비겁한 아버지가 용감한 아들을 낳은 것이다.



복고의 아이러니


문학에서 서사가 사라지고 있다. 너무 오래됐으니 오히려 사라지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와 만화, 드라마는 여전히 강력한 서사의 힘을 뽐내며 끝없이 반복되는걸? 문학은 그 반복이 싫었던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영화와 만화, 드라마가 2,000년 넘게 계속된 건 아니니까, 질림의 수준은 다를 수 있는 거다. 다른 가능성은 타 매체가 보여주는 서사의 천박함에 화가난 경우다. 내가 어떻게 만들어왔는데 그걸 이 따위로!


<세상의 마지막 밤>은 프랑스인이 로랑 고데가 그린 고전적 서사의 전형이다. 어느 곳 보다 빠르게 서사가 멸종한 프랑스. 그런 프랑스에서, 마치 고대의 부활을 외치듯(르네상스!), 저자는 그리스 신화의(서사의 기원!) 모티브를 보란듯이 차용한다. 


지옥 여행자 오르페우스.


로랑 고데는 오르페우스가 가져온 삶과 죽음의 빵 사이에 부성애를 끼워 2,000년도 더 된 평범한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이 옛날 식 샌드위치가 오히려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다고 하니, 정말로 역사의 아이러니는 지독하다세상에 새로운 일은 없고 오직 옛것이 돌고 돌며 되풀이 된다는 말은 과연 진실의 반열에 오를만 하다. 


그러나 이 서사가 현대적 프랑스와 거리를 둔 신선한 반향일지는 몰라도 현대적 대중성을 내재한 흥미진진한 지옥 여행은 아니라는 점은 알아뒀으면 한다. 프랑스인은 죽었다 깨나도 <해리 포터> 같은 건 쓸 수 없거나 그런 걸 쓰기엔 너무나 우아한 민족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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