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정치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18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지음, 김호경 옮김 / 책세상 / 200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이 미래를 볼 수 있었다면, 그래서 불안을 떨쳐낼 수 있었다면, 종교는 결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종교도 존재한다. 이것은 바꿀 수 없는 운명이다. 


초기의 종교는 언제나 소박하고 진실하다. 나쁘게 말해, 덜 체계적이다. 지도자들은 부족한 체계에 언제나 불안을 느끼기에 각종 형식이 더해진다. 형식이 체계적이고 화려할수록 종교에 권위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위는 언제나 억압적이다. 지도자들은 성전의 해석과 형식을 만들 권리를 독점한다. 반론은 불신으로 여겨지고 파문이라는 무시무시한 형벌이 등장한다. 이제 사람들은 거룩한 신의 말씀을 믿는 게 아니라 종교의 형식을 숭배한다. 형식을 숭배하는 한 종교는 배타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할 수 밖에 없다. 말씀은 이웃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심판하지 말라고 가르치지만 종교는 전쟁과 심판의 구실이 된다.


자유를 찾아 네덜란드에 온 사람답게 스피노자는 천부인권으로서의 자유를 옹호한다. 이 자유는 물론 종교에도 적용된다. 생각해보라, 인간의 성향은 다양하므로 각자에게 맞는 다양한 입장이 존재할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판단에 근거해 믿음의 원칙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오직 그럴 때만이 자유로운 의지로 신에게 순종할 수 있을 것이고, 모든 사람이 정의와 사랑을 존중할 것이기 때문이다."(p.24)


이제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반론은 모든 사람들이 제각각 종교를 해석하는 데 그 중 옳고 그른 것을 어떻게 판단하느냐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개인의 믿음은 오직 그의 행위에 따라서만 평가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행위의 옳고 그름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도덕이다. 쉽게 말해 믿음의 해석이 도덕적 행동으로 귀결된다면 그의 자유는 보장되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행동이 아무리 도덕적이라 하더라도 믿음의 해석이 성경 자체에서(신학-정치론은 기독교를 주제로 한다) 도출된 게 아니라면 그것은 옳지 않다. 예컨대 '윤회'를 믿는 사람이 그 믿음으로 인해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을 갖고 평생 도덕적으로 살았다 하더라도 성경은 그 어디에서도 '윤회'를 가르치지 않기에 그의 신앙은 잘못된 것이다.


성경의 해석이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므로 스피노자의 논의는 자연스럽게 성경의 해석법으로 옮겨 간다.  스피노자 이전의 교리 해석은 그리스 철학이 중심이었다. 그 유명한 토마스 아퀴나스, 교부 철학의 아버지는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를 기반으로 한 사상가였다. 그런데 성경의 해석을 위해 왜 외부의 권위가 필요한 걸까? 이 같은 의문에 스피노자는 그 어떤 근본주의자 보다도 근본적인 대답을 내놓는다. 성서는 오직 성서 자체로만 증명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한 방법은 그 어떤 급진주의자 보다도 급진적이었다. 


스피노자 이전의 해석은 이미 씌어진 것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성서는 절대 오류가 없는 거룩한 문서였기에 교부 철학의 목표는 모순된 성서의 내용을 철학을 이용해 이리저리 끼워 맞추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성서를 씌여진 언어의 문법을 고려하고 역사적으로 검증하고 그래서 새로운 의미를 도출할 수 있는 텍스트로 간주했다. 


이 정도만 가지고도 당시 사람들은 스피노자를 무신론자로 비난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한술 더 떠 신학을 정치에 귀속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어도 말이다. 스피노자는 기독교의 모든 문제가 특정인에게 성서 해석의 권위가 집중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성서를 텍스트로 만들고 그 해석의 권한을 만민에게 부여하려 노력한 것이다. 그러나 종교가 정치보다 우위에 있는 한 이 같은 자유를 보장하는 건 불가능하다. 따라서 종교는 정치에 귀속되야 한다. 오로지 정치만이 특정 신앙보다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우위에 둘 수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신학은 매우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다. 그는 신학도 결국엔 인간의 삶을 평화롭게 만드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인간이 평화롭지 않다면 아무리 거룩한 뜻을 가졌다 한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스피노자의 신학은 신을 빙자한 사회학으로까지 느껴질 정도다. 이 새로운 신학 안에선 신조차 초월적 실체가 아닌 지고의 도덕 선생님으로 존재한다. 


종교가 도그마였던 시대에 이보다 더한 신성모독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는 종교의 권위가 급속이 무너져내리던 과도기이기도 했다. 중세의 신학과 근대의 철학이 격전을 벌였다. 싸우려는 욕구가 충만한 시대엔 어느 쪽이든 확실하게 선택해야 명성을 얻는 법이다.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는 불리한 입장이었다. 신학에서 벗어난 듯 보이면서도 신학으로 돌아가고 신학인듯 하면서도 기존의 신학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평생 렌즈를 깎으며 생계를 유지했던 은둔 철학자의 운명이, 바로 여기서 결정됐다. 


그러나 선각자의 앞선 사상은 결국 역사가 보증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오늘날 지구를 멸망시킬 수 있는 유일한 위험 요소가 있다면 바로 종교가 아닐까? 은둔자의 이해 받지 못한 신학이 비로소 빛을 발할 시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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