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그림의 아름다움
이동주 지음 / 시공사 / 199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젠가 지인의 서재에서 단원 김홍도의 '씨름도'를 명쾌하게 읽어주는 책을 본 적 있다. 반드시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생각과 행동은 언제나 다른 법이라 몇 년이 흘렀다. 분명히 기억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잘못 산 책이다. 내가 봤던 그 책이 아니란 말이다. 다행히 잘못된 책은 아니었다.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 조선 말의 회화까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도판을, 그것도 컬러로 볼 수 있는 책이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이다. 누구 말마따나 있어야할 건 다 있고 없을 건 없는 그런 책이다.


이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종이 한 장, 끽해야 비단 한 필에 불과한 얇은 조각들이 수 많은 세월을 어떻게 견뎌왔나 아득해질 때가 있다. 생각할수록, 살아낸 세상이 몇 개고, 겪어낸 전쟁이 몇 갠데. 게다가 그림은 천한 환쟁이의 영역 아니었던가. 천출이 그린 천물을 누군가는 고이고이 간직해 수 백년을 물려 왔던 거다. 그림 앞에 서면 그 누군가의 마음이 아련하다. 


그러나 조선 시대만 놓고 봤을 때(이 책은 조선 시대에 70%를 할애한다) 그림과 화가의 지위는 완전히 천한 것도 아니었다. 모호했다. 우선 화원이 있다. 국가에 고용된 기술직 공무원으로 왕의 초상화나 왕조의 각종 행사를 그림으로 옮겼다. 500년 실록의 국가답게 다양한 방식으로 역사를 기록했던 것이리라. 지금으로 따지만 일종의 일러스트레이터가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이 중엔 일러스트레이션을 능가하는 대작을 그린 이들도 있다. 그 유명한 <몽유도원도>의 안견이나 최고의 금강산 그림을 그린 겸재 정선 등이 그 주인공이다. 이런 대가들은 왕족(안견-안평대군) 또는 왕의(정선-영조) 직접적인 후원을 받아 예술 활동을 했다. 문재(文才)를 겸비한 이들은 높은 벼슬을 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문제의 왕족과 사대부들이 있다. 선비, 양반, 왕족 출신의 화가들인데 앞서 소개한 화원의 그림이 호구지책 이었다면 이들의 그림은 그야말로 취미, 높여 말해 내면의 수양으로 여겨졌다. 여기가 바로 모호한 점이다. 스스로 천기라 치부하는 것이 어째서 내면의 수양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는 걸까? 동일한 행위라도 행위자가 다르면 다른 일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그러나 지배층들의 그림에 대한 태도는 원칙이 없었다. 그들은 놀라울 만큼 이중적이었다. 이와 관련해 아주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하나는 사대부 출신의 세 명화가라 하여 겸재, 현재와 더불어 삼재로 불린 관아재 조영석의 일화다. 영조 재위 시 관아재가 그림을 잘 그린다 하여 임금의 초상화를 그리라는 명을 받았다. 이 때 관아재는 "내가 어디 환쟁이냐"며 당차게 거절을 한다. 다시 한 번 조정에서, 그러면 감독관을 시킬테나 맡아라 했는데 이마저도 거부해 관아재는 옥에 갇히고 만다. 그리고 나서도 끝까지 그림을 그리지 않아 사대부로서의 '자부심'을 지킬 수 있었다고 한다. 


더 재미있는 건 관아재가 자신의 그림을 손수 모아 <사제첩麝臍帖>이라는 화첩까지 만들어 놓고 거기다 "물시인범자비오자손勿示人犯者非吾子孫" 즉, "사람에게 보이지 말라, 만약에 범한다면 내 자손이 아니다"고 까지 써놨다는 것이다. 보이고 싶지 않다면 자기 손으로 찢어 버리거나 애초에 그리지 않으면 될 것을 굳이 화첩까지 만들어 놓고 흉흉한 위협까지 적어 놓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두 번째는 표암 강세황의 일화다. 이것도 영조 재위 시의 일이다. 누군가 영조에게 표암이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하자 그 누구보다 그림을 좋아하고 식견이 높았던(영조는 겸재에게 직접 그림을 배웠다) 대왕은 이렇게 대꾸한다. "그런 천기를 잘 한다는 말을 들으면 그 사람에게 오히려 누가 되니 자중토록 하라". 강표암은 감격했다. 얼마나 감격했냐면, 


그림을 끊었다. 


그는 말년에 이르러서야 다시 붓을 들었다 한다.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지만 자기 손으로 화첩을 지었던 관아재나 십수년을 끊었음에도 결국엔 다시 붓을 들고 만 강세황이나, 결국엔 사대부라는 자부심마저도 이들의 예술혼을 꺽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예술은 그 어떤 억압에도 살아 남는다.


<우리 옛그림의 아름다움>은 많은 것을 담았지만 썩 재미있는 책은 아니다. 강의를 옮긴 책이라 읽기는 쉽지만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훌훌 흘러가는 기분이다. 언급하는 화가, 그림이 너무 많은 탓이기도 하다. 또 이 그림은 이러이러해서 좋고 이 그림은 이러이러해서 나쁘다라는 설명이 적다. 모든 걸 직접 보고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동양화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림에서 무엇을 봐야 할 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의 고전 미술사를 개괄하고 싶은 사람, 특히 조선의 미술사를 간략히 훑어 보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이 중에 마음에 드는 화가, 그림을 골라 심층 탐구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