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내가 없는 세월
박진규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쌀을 씻는 동안 시간은 어김없이 흐르고, 어느덧 인생은 황혼에 이른다. 명옥, 신혜, 윤희 그녀들의 이야기의 중심에는 언제나 미령이 있다. 가족이지만 오롯이 가족으로 살아갈 수 없었던 미령은 그녀들의 이야기는 물론 자신의 이야기조차 타인에게 무덤덤하게 들려줄 정도로 큰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지 못했다. 엄마가 죽고 명옥에게 오빠 태호가 아닌 자신이 선택 된 순간부터 미령의 이야기는 시작되고 TV프로 <눈물 젖은 에이프런>에서 자신이 살아온 세월을 모두 뱉어내지만 그마저도 힘들었던 지난 날들에 무게를 더할 뿐 소소한 행복을 느끼게 해주진 못했다.
"내가 없는 세월"에는 바구미 여사, 명옥, 신혜, 윤희, 미령, 태호 등의 이야기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지진으로 인해 가족을 잃고 캠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비록 미령이 바구미 여사가 준 쌀알에 소원을 빌어 생긴 일 같지만 이는 모두 우연일 뿐,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현실의 모습은 그랬다. 아주 끔찍하고 잔인한 일들이 사람들을 할퀴고 지나가지만 그래도 시간은 흐르고 삶을 계속된다.
"수상한 식모들"에서 작가 박진규는 현실과 동떨어진 호랑아낙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들에게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삶의 중심에 서 있는 우리들에게 전혀 새로운 주제를 보여주며 헛웃음이라고 터뜨릴 수 있는 여유로움을 주었다. "내가 없는 세월"의 바구미 여사의 존재 또한 현실감을 떨어뜨려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볼 때의 가슴 답답함을 조금은 덜어주고 있다.
마지막 남은 쌀알을 씹으며 바구미 여사를 보고 싶어했던 미령은 결국 그 소원을 이룬다. 사람들은 TV 전파를 통해 바구미 여사가 미령의 몸을 통과하는 모습을 보게 되지만 어디까지나 조작된, 비현실적인 일이라 일축하고 외면해 버린다. 이것이 우리들이 바라보는, 바라는 삶의 모습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을 누가 잘못되었다 말할 것인가.
정녕 '미령'의 삶은 없었던 것일까. 누구나 내가 살아온 세월을 더듬어 보면서 오롯이 그 삶이 나의 것이었다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내가 없는 세월"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속에 분명 미령은 존재했다. 하찮은 삶을 살았어도 곳곳에 사람들은 존재했다. 나의 모습도 있고, 타인의 모습도 있다. 명옥이 신혜에게 들려줄 남아있는 이야기들은 과거의 시간일지언정, 그 속에 살아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담겨 있는 것이다. 쌀을 씻는 동안 어김없이 흘러간 세월은, 그렇게 누구에게나 혹독하지만 살아갈만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