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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보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1984년, 그때 나는 아홉 살이었다. 동전이 하수구에 빠지면 세상에서 가장 슬펐던 철 없던 시절이었다. 어떻게 하면 동전을 꺼낼 수 있을까 어리석은 생각만 했던 내가 살아간 그때 그 시절은 모든 사람들이 외로워하고 슬퍼하고 아파했던 시절이었다. 나의 가족들이 살아간, 내가 살아간 그시절이 지금 이곳에 모두 담겨 있다. 우리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그 시간은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여전히 그때 그모습 그대로 선명하게 살아 있었다.
재진 아저씨의 표현대로 바보의 방식으로 본 '원더보이'는 힘이 센 소년? 악당으로부터 지구를 구하는 정의의 소년? 정도였다. 그런데 모범생의 방식으로 바라보니 "원더보이"의 의미는 "슬픔"과 "외로움"이었다. 원더보이 김정훈의 이야기는 숟가락을 구부리는 이만기의 이야기가 해학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현실적이었고 그의 이야기에 따라 머나먼 우주를 상상하다 고독해지다가도 별이 쏟아내는 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기도 했다.
원더보이의 아버지의 차가 간첩이 탄 차와 충돌했는지의 여부는 짐작이 가능하지만 권대령에게 포상금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것이 원더보이, 그의 삶에 외로움과 슬픔을 하나 더하지 않는 일이 될 것이다. 원더보이라는 단어는 1980년대 그 시절, 그때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단어로 대중매체에서 지겨울 정도로 단물, 쓴물 다 빼먹고 내던져 버렸지만 정작 김정훈은 자신을 원더보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그는 밤하늘의 별을 향해 '하이! 내 이름은 김정훈입니다. 나는 한국 소년입니다. 나는 열일곱 살입니다.'라고 주저하지 않고 거침없이 쏟아낸다. 이젠 강토 형과 재진 아저씨, 무공 아저씨, 선재 형, 권대령, 이만기, 쌍둥이 남매의 기억속에만 그가 '원더보이'라고 기억되는 듯 세상은 원더보이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잊어가는 듯 하다.
희선씨와 김정훈의 관계는 서로의 슬픔과 슬픔이 모여 위로가 되어주는 관계지만 살아온 환경도 살아갈 미래도 다르다. 모든 것을 다 가져도 외로울 수 밖에 없는 고아 '정훈', 그는 엄마가 보내는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고독을 떨쳐낼 수 없었지만 무공 아저씨가 가르쳐 준 호흡법, 말도 되지 않는 문장을 늘어 놓는 선재 형, 가끔 불쑥 나타나 그의 토사물을 덮어 쓰는 이만기로 인해 외로울 시간이 조금 줄어든다. 군복무 시간이 줄어든다며 말도 되지 않는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냈던 선재 형의 인생관을 그를 만났을 땐 알지 못했으나 그시절 이렇게 하는 것만이 그 시절을 살아낼 수 있는, 살아남을 수 있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지막 책장을 덮은 후에 깨닫게 되었지만 '미친'이라는 단어를 즐겨 쓴 이만기도 혹 그 자신만의 생존방법이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니 그가 그리 우습게 생각되지 않는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의 몸짓을 떠올려 보기도 전에 엄마, 아빠가 밀렵꾼이었다니 하며 한숨짓는 정훈을 바라보며 풋, 하고 웃음이 터져 버린다. 바보의 방식으로 읽은 아빠의 일기장은 그가 해석해낼 수 없이 온통 암호 투성이었지만 우연일까, 운명일까 엄마를 기억하는 재진 아저씨로 인해 엄마에게 가는 문이 조금 열리게 된다. 아빠에게 마지막으로 잘 가라는 인사도 하지 못하고 숟가락 구부리는 데만 정신이 팔렸던 그에게 이제 살아가고 싶은 의미가 생긴 것이다. 열다섯 살 처음 환한 빛에 둘러싸였을 때 아버지를 떠나보내야 했던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슬픔이 차오르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자신만을 위해 눈물을 흘리게 된 그는 이제 소원을 말하지 않는다.
언제부터였을까. 아마도 우주에서 보내주는 별빛들보다 가까이에 있는 불빛들이 더 빛나게 느껴질 때부터 우리들은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을까. 이것이 '우주에 그토록 별이 많다면, 우리의 밤은 왜 이다지도 어두울까요?'란 질문에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뭐, 이것으로 부족하다면 "다음 시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