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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의 매그놀리아 ㅣ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1
안도 미키에 지음, 현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어린시절 이후 눈에 보이는 것만 믿게 되었다. 이 얼마나 현실적인 감각인가. 그러나 부정하고 싶어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건 아니다"라고 알고 있지 않았을까. 현실과 초자연의 경계가 맞닿는 해질녘의 시간, 도코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손님들을 만나게 된다. 물론 홀로 이 현상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니고 그 때 함께 있는 친구와 같이 보게 된다. 나도 학창시절을 도코처럼 보냈었다면 인생이 좀 더 의미있다고 생각했을텐데, 일본소설의 성장소설을 읽으면서 늘 하는 생각은 그들의 자유로움과 여유가 부럽다는 것이었다. 공부만 해야한다고 누가 등 떠민적은 없지만 마음의 여유조차 없이 살아온 내 학창시절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마음에 밟힌다.
다섯 살 도코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겪으면서 빛과 어둠이 뒤섞이는 시간,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저녁놀이 질 무렵, 신비한 세상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갑작스럽게 죽은 할아버지와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레인보 빌딩에 가는 미호와 함께 가는 도코, 유리창 너머로 다가오는 용궁의 사자, 분명 미호의 할아버지가 온 것이다. "정말이냐?"라고 누가 묻는다면 명확하게 답해줄 수 없긴 하지만 그냥 느낌으로 미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할아버지가 찾아왔다고 말해줄 수 있다. 왜냐하면 미호가 할아버지가 지키지 못한 약속을 가슴에 묻고 평생을 살아가길 바라지 않으니까.
도코 옆에 있으면 이런 신비로운 일들이 일상사가 되어 버린다. 따돌림 당하는 친구 린의 우는 모습을 보고 린을 위해 용감하게 버스정류장에 함께 내려 집으로 가기도 하고, '구로모리의 축제' 때 사자와 등나무 무용수가 도코의 눈앞에서 그들만의 몸짓으로 춤을 추는 것을 보며 그들이 예전에 죽은 구로모리 산 근처에 살던 처녀와 총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죽은 사람들이 나타난다고 해서 무섭다기 보다는 도코가 느꼈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어 마음이 아파온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소중히 할 수 있다는 것, 자기 자신보다도 사랑스럽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처녀와 함께 살기 위해 죽음으로써 둑을 지켜내고자 했던 총각의 마음을 알아버렸으니까. 그들의 춤은 그래서 슬픔이 되어 버린다.
활짝 핀 목련꽃 아래에서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시절 함께 사진을 찍었던 외삼촌, 이웃집에 의해 목련나무가 베어지는 것이 못내 슬펐던 도코는 이 나무를 살려내기 위해 이웃집 아이에게 무서운 이야기를 한다. 이 아이도 도코가 보았던 목련꽃이 피어 떨어지던 광경을 보았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껴 외숙모와 외삼촌이 아끼던 목련나무를 지켜낼 수 있게 된다. 해질녘의 정원, 매그놀리아 아래서 활짝 웃고 있는 외삼촌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죽어서도 사랑하는 이를 지켜주고자 하는 마음, 외숙모가 외로워도 언젠가 만날 두 사람이기에 몽환적인 분위기의 이 정원마저 무섭다기 보다는 꽃향기에 취해 잠이 들것만 같다.
아마 어른이 되어서는 도코에게도 신비로운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겠지. 무엇을 말해도 받아들일 수 있는 그 나이에만 겪을 수 있는 사건이라 특별하게 보낸 도코의 어린시절이 참 부럽다. 세월이 흘러 도코는 이때의 사건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안락의자에 앉아 꽃잎이 흩날리는 계절에 추억에 잠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를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