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 - 개정판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북스토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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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 사람들은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지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모든 것을 버렸을때조차 또 다른 해답과 희망을 볼 수 있어 내가 느끼는 "최악"이 그리 끔찍한 상태가 아님을 알게 된다. 이 책속에 등장하는 가와타니 신지로, 미도리, 가즈야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미도리가 근무하는 "갈매기은행"에서 모두 만나게 된다. 가즈야와 미도리의 여동생 메구미가 이 은행을 털기 위해 모조총을 가지고 와서 사건이 시작되지만 신지로는 자신이 인출한 돈을 은행직원이 은행털이범 가즈야에게 주려는 것을 보고 감정이 폭발하여 이 일에 가담하게 된다. 메구미가 가지고 있는 가방에 손수 돈을 넣어주는 신지로, 이후에 일어날 상황은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여동생 메구미를 보고 스스로 인질이 되어 이들과 함께 하는 미도리. 도대체 이 사람들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들이 한 자리에 모이기까지 각자의 생활을 그려내느라 이 책의 전개는 느리다. 지점장에게 성폭행을 당할뻔한 미도리, 그러나 사회는 냉정하고 피해자인 자신을 아무도 동정하지 않는다. 하루살이처럼 강도행위로 먹고 사는 가즈야, 동네의 작은 공장의 사장 신지로. 이들 모두는 가진 것의 유무를 떠나 모두 가슴에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물론 공장 옆에 주택들이 들어서서 소음으로 인한 피해로 주민들과 대립하게 되는 신지로는 주민들과의 일은 물론이고 공장에 기계를 들이는 일조차 사람들에게 휘둘리며 아주 소극적으로 대처한다. 저자는 자신이 의도한대로 "최악"의 상황을 만들기 위해 이렇듯 주인공 한 사람 한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지만 오히려 이런 상황은 독자들의 가슴만 답답하게 만들뿐이다.

 

미도리의 여동생 메구미의 일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새엄마가 들어와서 힘든 사람은 미도리인데 왜 메구미가 반항을 하며 가출까지 하는가. 메구미가 가즈야를 유혹해 '갈매기은행'을 털게 하기 위해서는 이 같은 상황이 필요했겠지만 솔직히 이런 상황은 이 책에 몰입하는데 방해만 될 뿐이다. 야쿠자에게 목숨마저 위협받는 가즈야는 오히려 은행털이범으로 감옥에 간 후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오쿠다 히데오의 '유쾌, 상쾌, 통쾌'의 3쾌는 이렇게 마지막에 가서야 가슴이 뻥 뚫린 듯 가슴이 시원해지는 것이다. 같은 은행털이범이라도 "명랑한 갱이 지구를 돌린다"의 책과 너무도 대조적인 "최악", 주인공들의 삶이 바닥까지 떨어질수록 왜 나는 이들의 인생에 고개를 돌리고 싶어지는 것일까. 정확한 수순을 밟듯 사람들에게 휘둘리고 자신의 인생을 위해 정당한 요구조차 하지 못하는 그들이 너무 바보같아 보여서일까.  

 

막다른 골목에 몰린 그들이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범죄는 이들에게 또 다른 삶을 주게 되지만 이전의 삶보다 낫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나를 덮쳐오는 인생의 방향을 달리해 보려는 노력이 충분하지 않았으니까. 똑같은 상황에 처해도 모두 똑같은 선택을 하진 않는다. 공감할 수 없는 내용의 "최악", 그러나 이 세상의 사람들은 이렇게 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만들어진 인생이 아닌 오늘도 하루 하루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최악"의 상태에 몰리게 되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곰곰히 생각해 봐야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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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북하우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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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했던 마음이 마지막 책장을 덮을때에야 조금 느슨해진다. 마지막 단편인 "여우님 이야기"는 그 결말이 끔찍하기도 했지만 여우에 씌인 '가나'라는 소녀때문에 슬픈 마음이 도저히 풀어지진 않는다. 이 책의 일곱가지의 신비로운 이야기들을 읽으며 정말 제목대로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느낌을 받았다. 단편들을 읽으며 뒷 내용이 궁금하여 조바심을 낸 것은 아마 이 책이 처음일 것이다.

 

온통 붉은 빛이 도는 공포나 스릴러 장르의 책보다 더 섬뜩한 느낌, 단편들이 끝나도 그들의 이야기가 가슴속에 오래 머물다 가는 아사다 지로의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어째서 밤에 읽기가 이토록 망설여졌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내 손끝에 잡히지 않은 몽환적이고 그리운 느낌에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게 되어 강한 빛속에서라도 나 자신이 누구인지 인식하며 읽고 싶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다.

 

'인연의 붉은 끈'은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아 죽음을 택한 남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물론 죽음을 다루고 있기에 유쾌한 내용은 아니지만 쥐약을 함께 먹었으나 남자는 죽고 여자는 살아남아 며칠을 죽은 사람으로 취급되어 사랑하는 사람과의 인연의 붉은 끈마저 끊어진채 죽어가는 모습은 끔찍하기 보다 마음이 아프다. 직접 이 여인을 곁에서 지켜본다면 평생을 기억하며 두려워할지도 모르지만 의사조차 그녀가 선택한 삶에 관여하지 않고 그대로 죽기를 기다리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았나.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이런 행동은 오히려 그녀를 존중해주고 있는 듯 하지만 이 여자와는 어떤 인연의 끈도 가지고 있지 않기에 비정하지만 그래도 그녀의 죽음을 기다릴 뿐이었다.

 

이 세상에는 나를 닮은 사람이 세 명은 있다고 하는데 모두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힘들고 외로울때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꼭 하나쯤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좀처럼 만나기 쉽지 않다. 하지만 단편 '벌레잡이 화톳불'에서처럼 행복했던 자신의 모습이 나타난다면 쓰야마처럼 나도 지금의 나를 희생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사라져버릴 것이니. 고맙소, 참말로 죄송허요"라고 자신을 향해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너무도 쉽게 가족들을 행복한 모습을 한 예전의 나에게 보내 버린게 아닌가. 오롯이 자신을 희생한 쓰야마를 보며 내 마음까지 쓸쓸해진다.

 

단편 "뼈의 내력"과 "손님"은 약간의 호러 느낌이 가미되어 있지만 그 끝을 알 수 있었고 "옛날 남자"는 세월을 거듭하며 내려오는 간호부의 희생, 사명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지만 과연 다카라베 의원의 명맥을 계속 이어나갈 필요가 있었냐고 반문하고 싶어진다.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이 책에서 나의 마음을 울리고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 슬프고 아련한 느낌이 드는 단편은 "원별리"였다. 나이 들어 허리가 굽은 요리코가 남편 야노가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것을 알고 꽃다발을 들고 찾아오는 장면에서 야노가 죽기전 얼마나 많이 "요리코"라는 이름을 불렀었는지, 남편의 목소리가 육십 년이 넘도록 들려서 행복했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기어이 가슴속에서 뭔가가 울컥하고 치밀어 오른다. 어서 전쟁이 끝나 아내와 아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길 바랬건만 그 모든 것이 헛된 희망이었다니, 은행나무 둥치에 있던 백합 꽃다발을 안은 다이키가 이유도 모른채 웬 덩어리가 가슴에 쿡 치미는 것을 느꼈듯이 나도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야노에게 외쳐주고 싶다. 정말 묘하게 내 가슴속을 파고드는 슬픔때문에 한동안 뻥 뚫린 가슴에 찬바람이 지나가는 듯 온몸이 떨리는 것 같다. 

 

이 책은 끔찍한 핏빛 장면의 스릴러가 아닌 이 같은 내용의 이야기들로도 무섭고 슬프고 아련한 느낌을 가질 수 있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들은 아니지만 이 괴이한 일들이 어디선가 꼭 있었던 일들인 것 같아 더 마음이 아팠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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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후르츠 캔디
이근미 지음 / 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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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어쩌면 후르츠 캔디"처럼. 책 제목이 사랑에 관한 것이었나? 일로 성공하는 조안나에게 해당되는 제목인줄 알았는데 좀 의외다. 조안나, 나는 외국사람 이름인줄 알았다. 조안나가 태어났을 때 '조진연'으로 짓지 않은 것을 정말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자이언트 기획의 면접 때 '되고송'을 불러 순발력과 참신함으로 입사하게 된 조안나, 짝퉁으로 온몸을 휘감고 회사에 출근했을때만 해도 꿈에 부풀어 있었다. 로열패밀리인 조 전무의 여동생 조안나로 오해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 책은 대부분의 내용이 광고공주 대접을 받는 조안나의 자신을 제대로 알리기 위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룬다.

 

학벌이 낮은 그녀가 이 곳에 입사하여 실력으로 성공하는 모습을 좀 더 담아냈다면 좋았을텐데, 조안나는 자신에게 잘해주는 정경호에게 호감을 느끼고 정경호마저 자신이 로열패밀리라 접근한 것을 알고는 그 마음 주체할길 없이 나빈우로 향하게 된다. 물론 처음 자이언트 기획에 합격 소식을 보기 위해 찾아갔을 때 나빈우와 조안나의 만남을 보고 이 둘의 관계가 어떻게 될 것인지 대충 예상은 했었지만 어쩜 이렇게 나빈우에게만 시선과 마음을 빼앗기는지, 실력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켜내지만 그런 조안나의 모습에 조금 실망이 되기도 한다.

 

나빈우가 사랑한 여자 '조리나'와 닮은 '조안나'. 이런 설정이 나빈우에게 조안나를 친숙하게 느낄 수 있는 조건이 되지만 이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해서는 "정말 사랑하는 사이였나?"라고 인정하기 힘들다. 조안나를 위로하고 일을 함께 하면서 호감을 느꼈다고 하지만 이 둘이 함께 한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고 사랑이 싹틀만큼 거리를 좁힐만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기에 조리나와 정리하고 조안나에게 돌아온 나빈우의 행동이 생뚱맞게 느껴진다.

 

대부분의 내용이 자이언트 기획에서의 자신찾기를 보여준 조안나. 계속 자이언트 기획에 남게 되는지, 나빈우와의 관계는 어떻게 진행되는지 뚜렷한 결말이 없이 끝나 무척이나 아쉽다. 성 차장에게 혹독한 교육을 받고 그토록 열망하는 전국민이 기억해주는 카피를 쓰는 조안나로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주든지, 나빈우와 함께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든지 하며 끝을 맺어야 하는거 아닌가. 생뚱맞게 번지점프를 하는 나빈우의 모습을 아래에서 바라본 뒤 택시를 타고 떠나는 조안나,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의 성취감을 대신 느끼며 이것이 행복이라고 자위하며 살고 싶지는 않다는 결심을 보여주는 건가. 후르츠 캔디 한 알로 헛헛한 마음이 채워지진 않겠지만 일과 사랑 모두 잡을 수 있다면 그녀 스스로 얻은 성취감에 행복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신분을 오해하고 있다고 당당히 밝히지 못하고 더 오해하게 내버려둔 조안나를 위로한 사람이 나빈우라는 건 알지만 그래서 더 마음이 가는건 알겠지만, 그녀가 당당하게 사회의 일원으로 성공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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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의 매그놀리아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1
안도 미키에 지음, 현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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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이후 눈에 보이는 것만 믿게 되었다. 이 얼마나 현실적인 감각인가. 그러나 부정하고 싶어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건 아니다"라고 알고 있지 않았을까. 현실과 초자연의 경계가 맞닿는 해질녘의 시간, 도코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손님들을 만나게 된다. 물론 홀로 이 현상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니고 그 때 함께 있는 친구와 같이 보게 된다. 나도 학창시절을 도코처럼 보냈었다면 인생이 좀 더 의미있다고 생각했을텐데, 일본소설의 성장소설을 읽으면서 늘 하는 생각은 그들의 자유로움과 여유가 부럽다는 것이었다. 공부만 해야한다고 누가 등 떠민적은 없지만 마음의 여유조차 없이 살아온 내 학창시절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마음에 밟힌다.

 

다섯 살 도코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겪으면서 빛과 어둠이 뒤섞이는 시간,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저녁놀이 질 무렵, 신비한 세상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갑작스럽게 죽은 할아버지와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레인보 빌딩에 가는 미호와 함께 가는 도코, 유리창 너머로 다가오는 용궁의 사자, 분명 미호의 할아버지가 온 것이다. "정말이냐?"라고 누가 묻는다면 명확하게 답해줄 수 없긴 하지만 그냥 느낌으로 미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할아버지가 찾아왔다고 말해줄 수 있다. 왜냐하면 미호가 할아버지가 지키지 못한 약속을 가슴에 묻고 평생을 살아가길 바라지 않으니까.

 

도코 옆에 있으면 이런 신비로운 일들이 일상사가 되어 버린다. 따돌림 당하는 친구 린의 우는 모습을 보고 린을 위해 용감하게 버스정류장에 함께 내려 집으로 가기도 하고, '구로모리의 축제' 때 사자와 등나무 무용수가 도코의 눈앞에서 그들만의 몸짓으로 춤을 추는 것을 보며 그들이 예전에 죽은 구로모리 산 근처에 살던 처녀와 총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죽은 사람들이 나타난다고 해서 무섭다기 보다는 도코가 느꼈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어 마음이 아파온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소중히 할 수 있다는 것, 자기 자신보다도 사랑스럽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처녀와 함께 살기 위해 죽음으로써 둑을 지켜내고자 했던 총각의 마음을 알아버렸으니까. 그들의 춤은 그래서 슬픔이 되어 버린다.

 

활짝 핀 목련꽃 아래에서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시절 함께 사진을 찍었던 외삼촌, 이웃집에 의해 목련나무가 베어지는 것이 못내 슬펐던 도코는 이 나무를 살려내기 위해 이웃집 아이에게 무서운 이야기를 한다. 이 아이도 도코가 보았던 목련꽃이 피어 떨어지던 광경을 보았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껴 외숙모와 외삼촌이 아끼던 목련나무를 지켜낼 수 있게 된다. 해질녘의 정원, 매그놀리아 아래서 활짝 웃고 있는 외삼촌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죽어서도 사랑하는 이를 지켜주고자 하는 마음, 외숙모가 외로워도 언젠가 만날 두 사람이기에 몽환적인 분위기의 이 정원마저 무섭다기 보다는 꽃향기에 취해 잠이 들것만 같다.

 

아마 어른이 되어서는 도코에게도 신비로운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겠지. 무엇을 말해도 받아들일 수 있는 그 나이에만 겪을 수 있는 사건이라 특별하게 보낸 도코의 어린시절이 참 부럽다. 세월이 흘러 도코는 이때의 사건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안락의자에 앉아 꽃잎이 흩날리는 계절에 추억에 잠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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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중력 증후군 - 제1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윤고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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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가진단을 해 보니 '무중력증후군'이 아닌게 확실하다. 안그래도 골골거리는 몸인데 노시보처럼 '무중력증후군'까지 앓으면 곤란하다. 달이 자꾸 번식하여 여섯번째 달이 탄생하고 사람들은 종말이 왔다며, 무중력파, 중력파 파벌을 형성하며 달이 여러개인 세상에 적응해 나간다. 실제로 달이 여러개라면? 아마 이런 가설 아래 이 세상에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일을 이 책에서 서술해 놓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완전히 부정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유쾌하게 책장을 넘겼으리라.

 

만년필 펜촉만 가지고 있어도 범죄자로 의심받는 사회, 사람들은 계속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고, 무중력 공간을 이용한 사업이 큰 붐을 일으키는 곳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지구다. 부동산 회사를 다니는 노시보 과장은 두부처럼 생긴 22층 건물의 11층을 드나든다. 땅 한번 팔아보지 못한 노시보는 원조 '무중력증후군' 환자다. 분명 퓰리처에 의해 지금 시대를 겨냥해 만들어진 환자이지만 이미 자신이 그 병을 크게 앓고 있다는 생각에 약까지 챙겨 먹는다. "나는 무중력자"라고 커밍아웃하는 많은 사람들. 노시보의 엄마조차 달 구경 다녀온다고 한달간 집을 비우니 누구하나 이 달에 영향을 받지 않는 이가 없는 것 같다.

 

'외로움은 최고의 비아그라다'

첫 대면부터 나를 맞이하는 문장치고는 꽤 강렬하다. 비아그라란 말이 이렇게 절묘하게 쓰일 줄이야. 이 문장이 나의 마음 어디 폐쇄된 곳을 터뜨린 모양이다. 책 곳곳에 '우주적 섹스'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지만 전혀 불편하지 않다. 단지 '성'에 대한 이야기로 인한 마음의 불편함보다 이 책에서 여섯번째 달까지 나타나기까지 계속 이어지는 '무중력증후군'의 상태가 지루하다. 나의 몸속에 남아있는 기운까지 다 빠져나가는 것 같다.

 

일곱번째 달이 나타나지 않고 이 같은 일들이 없었던 일마냥 갑자기 "지금까지 하늘에는 달이 하나였다"는 말로 세상은 제자리를 찾는다. '무중력'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단지 망상일 뿐이었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예전의 자리를 찾는 사람들과 세상을 보며 나는 꼭 꿈을 꾼 듯 멍하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세상이 뒤집어지고 또 한번 뒤집어지면 제자리를 찾게 되는 것일까. 그렇게나 많은 이들이 죽어가고 달의 영향으로 범죄가 늘고 달에 이주해서 살려고 했던 사람들은 모두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을까. 사기꾼에게 속았다는 기분으로 이젠 달의 환락이 끝났다는 것을 도저히 믿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도 일곱번째 달이 뜨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중력에 영향을 받으며 살고 있는 우리들이 무중력 상태로 살아갈 꿈을 꾸었다는 것이 바보같은 일이라니,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중력 상태에서는 나의 몸무게는 물론 내가 가지고 있는 고독, 슬픔, 아픔들조차 가볍게 느껴질 것 같다. 그 무게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겠지만 새로운 세상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기분을 누려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붕붕 날아다니는 세상보다 이 땅에 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날들이 좋다. 잠깐이지만 이 책을 통해 내가 겪어보지 못할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늘에 달이 몇개가 되다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전혀 상상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대응할까, 따로 생각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이 책은 사람들의 마음속을 깨끗이 파헤쳐 놓았다.

 

두번째 달이 나타났을 때 나는 어떤 생각을 할까? 세상이 몰락한다고 할테지. 세번째 달이 나타난다면? 달이 계속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불안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네번째 달이 나타난다면? 나의 관심은 시들해질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간사하다. 달이 늘어날수록 이것도 일상이 되어 버리기에 아무렇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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