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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북하우스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긴장했던 마음이 마지막 책장을 덮을때에야 조금 느슨해진다. 마지막 단편인 "여우님 이야기"는 그 결말이 끔찍하기도 했지만 여우에 씌인 '가나'라는 소녀때문에 슬픈 마음이 도저히 풀어지진 않는다. 이 책의 일곱가지의 신비로운 이야기들을 읽으며 정말 제목대로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느낌을 받았다. 단편들을 읽으며 뒷 내용이 궁금하여 조바심을 낸 것은 아마 이 책이 처음일 것이다.
온통 붉은 빛이 도는 공포나 스릴러 장르의 책보다 더 섬뜩한 느낌, 단편들이 끝나도 그들의 이야기가 가슴속에 오래 머물다 가는 아사다 지로의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어째서 밤에 읽기가 이토록 망설여졌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내 손끝에 잡히지 않은 몽환적이고 그리운 느낌에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게 되어 강한 빛속에서라도 나 자신이 누구인지 인식하며 읽고 싶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다.
'인연의 붉은 끈'은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아 죽음을 택한 남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물론 죽음을 다루고 있기에 유쾌한 내용은 아니지만 쥐약을 함께 먹었으나 남자는 죽고 여자는 살아남아 며칠을 죽은 사람으로 취급되어 사랑하는 사람과의 인연의 붉은 끈마저 끊어진채 죽어가는 모습은 끔찍하기 보다 마음이 아프다. 직접 이 여인을 곁에서 지켜본다면 평생을 기억하며 두려워할지도 모르지만 의사조차 그녀가 선택한 삶에 관여하지 않고 그대로 죽기를 기다리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았나.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이런 행동은 오히려 그녀를 존중해주고 있는 듯 하지만 이 여자와는 어떤 인연의 끈도 가지고 있지 않기에 비정하지만 그래도 그녀의 죽음을 기다릴 뿐이었다.
이 세상에는 나를 닮은 사람이 세 명은 있다고 하는데 모두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힘들고 외로울때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꼭 하나쯤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좀처럼 만나기 쉽지 않다. 하지만 단편 '벌레잡이 화톳불'에서처럼 행복했던 자신의 모습이 나타난다면 쓰야마처럼 나도 지금의 나를 희생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사라져버릴 것이니. 고맙소, 참말로 죄송허요"라고 자신을 향해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너무도 쉽게 가족들을 행복한 모습을 한 예전의 나에게 보내 버린게 아닌가. 오롯이 자신을 희생한 쓰야마를 보며 내 마음까지 쓸쓸해진다.
단편 "뼈의 내력"과 "손님"은 약간의 호러 느낌이 가미되어 있지만 그 끝을 알 수 있었고 "옛날 남자"는 세월을 거듭하며 내려오는 간호부의 희생, 사명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지만 과연 다카라베 의원의 명맥을 계속 이어나갈 필요가 있었냐고 반문하고 싶어진다.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이 책에서 나의 마음을 울리고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 슬프고 아련한 느낌이 드는 단편은 "원별리"였다. 나이 들어 허리가 굽은 요리코가 남편 야노가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것을 알고 꽃다발을 들고 찾아오는 장면에서 야노가 죽기전 얼마나 많이 "요리코"라는 이름을 불렀었는지, 남편의 목소리가 육십 년이 넘도록 들려서 행복했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기어이 가슴속에서 뭔가가 울컥하고 치밀어 오른다. 어서 전쟁이 끝나 아내와 아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길 바랬건만 그 모든 것이 헛된 희망이었다니, 은행나무 둥치에 있던 백합 꽃다발을 안은 다이키가 이유도 모른채 웬 덩어리가 가슴에 쿡 치미는 것을 느꼈듯이 나도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야노에게 외쳐주고 싶다. 정말 묘하게 내 가슴속을 파고드는 슬픔때문에 한동안 뻥 뚫린 가슴에 찬바람이 지나가는 듯 온몸이 떨리는 것 같다.
이 책은 끔찍한 핏빛 장면의 스릴러가 아닌 이 같은 내용의 이야기들로도 무섭고 슬프고 아련한 느낌을 가질 수 있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들은 아니지만 이 괴이한 일들이 어디선가 꼭 있었던 일들인 것 같아 더 마음이 아팠던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