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통의 물
나희덕 지음 / 창비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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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을 사유함
- 나희덕의 「반통의 물」을 다시 읽으며 -

「반통의 물」은 사유의 책이다. 숨가쁜 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들에게 걸음을 잠시 멈추고 ‘생각’이라는 것을 하라고 한다.

좋아하는 사진을 공부하면서 좀 천천히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얼마 전 신간을 몇 권을 샀다. 책을 읽고 있는 중에 법정 스님이 입적을 하셨고 그때 나는 <혼⦁창⦁통>을 읽고 있었다. 잠시 이 책을 접어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무소유를 평생의 화두로 삼으셨던 스님이셨는데 ‘소유’에 매진하는 이런저런 기사들을 보면서 왜 이 책이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내가 바로 ‘반통의 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 역시 작가의 고백처럼 ‘반쯤 모자라 출렁거리고 사는 어리석음이 나는 그다지 싫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다.

나희덕은 시인이다.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반통의 물」은 시적인 어휘와 상상력이 많이 드러나는 산문집이다. 순간들, 나무들, 사람들, 질문들이라는 큰 주제로 나누어 모두 32편의 산문이 실려 있다.

<일몰 무렵>에서 끊임없이 시간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는 작가의 시각, 그것은 시간으로부터의 ‘도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시간에 대한 ‘수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속도의 시대에, 보여지고 확실하게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최선인 양 치부되고 있는 시대를 살면서 작가가 사람을 향해 ‘일몰 무렵’, ‘멈춘 것 같은 정적이 찾아오는 시간’에 ‘소멸을 향해 걸어가는 시간의 발소리를 듣’는다던가 ‘시간의 ‘밖’에서 시간을 바라’보라고 한다.

나는 오래 전부터 저녁식사 준비를 마쳐놓고 어깨 위에 어둠이 내려오기 시작하는 저녁 어스름 무렵, 산책하기를 즐긴다. 생활에서 잠시 벗어져 나와 시간 위에 온전히 나를 내려놓곤 한다. 시간 밖에서 시간을 바라보는 시간이다. 속도의 어지럼증에서 잠시 유예되는 시간이다.

<반통의 물>은 작가가 집 근처의 자그마한 밭을 구해서 농사를 짓는 이야기이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종래엔 수확을 거둔다는 말이다. 그러나 작가는 ‘지금 내 손은 여전히 비어 있다’ 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빈 손을 ‘얻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우리의 삶이 얼마나 움켜쥐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가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한다. ‘농사를 배운다는 것은 바로 그들의 적절한 ‘거리’를 익히는 과정이 아닐까’하는 작가의 말에도 깊은 공감이 간다. 제자리에 있어야 ‘제 존재의 빛’이 나타나는 것은 식물 뿐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뒷부분에 등장하는, 몸의 반쪽이 마비되어 걷는 것이 자유롭지 못한 할아버지를 통해서 작가는 절뚝거리는 것은 할아버지가 아니라 자신의 ‘영혼의 발소리’임을 고백한다.

서양 속담에 ‘시냇물에서 돌을 치우지 말라. 냇물은 노래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라는 말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나는 그 말을 생각하였다. 작가는 일상의 생활을 영위하면서 시간의 흐름에 자기 자신을 맡기고 그냥 흘러가 버리기를 바라지 않고, 크고 작은 돌에 걸려서 끊임없이 물소리를 내면서 크고 작은 상처들을 어루만지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돌이 있으면 냇물이 흐르는데 다소 방해가 되겠지만 돌 때문에 물이 흐르지 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돌 때문에 물은 부서지고, 그렇게 해서 산소를 공급하고, 시냇물은 노래를 하게 된다. 건강한 시냇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돌이 없으면 물이야 빨리 흐르겠지만 시내는 소리를 잃고, 산소가 부족한 죽은 물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의 삶도 바로 이런 이치가 아닐까. 삶의 굽이굽이에서 부딪히는 ‘고통의 돌’들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내곤 했었는데, 그 모든 것이 지나고 보니 내 마음의 지경을 넓혀가기 위한 테스트였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책의 전면을 통해서 작가는 크고 작은 일상사 뒤에 숨어 있는 상처들로 인해 우리의 영혼이 더욱 맑아지고 단순해지고 사려 깊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산문을 읽는다는 것은 작가의 시선을 통해서 나를 돌아보게 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속도에 떠밀려 앞만 보고 흘러가 버릴 것이 아니라 인생의 흐름의 굽이굽이에서 ‘느림’ 내지는 ‘머무름’의 미학을 배웠으면 한다.

좋은 책을 읽고 두고두고 그 의미를 음미하는 일은 언제나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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