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그레고리 펙
'기억하는 천재보다 메모하는 둔재가 성공 한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절대 메모라곤 하지 않는 남자와 살다보니 나는 웬만한 건 다 메모를 한다.
내가 툴툴대면 우리 서방님은
“형수님이 메모하시니까 형님은 그걸 믿고 그러지요” 한다.
내 탓이라는 거다.
근데 고민은 메모를 분명히 하긴 했는데 그걸 어디 해 두었는지 모른다는 거다.
물론 메모수첩이 따로 있긴 하지만 요즘 들어서 그것도 자주 빠뜨리고 다니니...
새벽기도 마치고 찾아볼 게 있어서 몇 년 전 다이어리를 뒤지다가 건진 몇 장면.
2003년 여름의 단편이다. 
그동안 써온 다이어리
가끔씩 단편처럼 써놓은 이런 메모들을 오늘처럼 봄비 오시는 날, 찾아서 읽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래서 나는 문방구 가기를 즐긴다.
시가지를 걷다가도 자투리 시간이 조금이라도 남으면 문방구로 간다.
어린 학생들 틈에 섞여서 작은 노트 사기를 즐긴다.
그렇게 사 모은 수첩, 노트들이 즐비하다.

마음의 색깔
마음은 하나라구요? 천만에요.
마음을 열 개, 스무 개, 아니 천 개도 더 될 걸요?
그런데 우리는 마음은 하나라고 착각을 하며 살지요.
방법은 있어요. 한 가지 색깔로 칠하는 거죠. 다른 색들이 들어와 자리잡기 전에 말이죠.
문제는 내 마음이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남의 마음을 내 마음대로 칠할 수는 없는 거죠.
울타리 밖의 남이라면 그냥 넘어가겠어요.
그러나 울타리 안의 남은 어떻하지요?
나는 나와 같은 색으로 칠하고 싶은데,
아니 나랑 같은 색으로 이십년이나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보니까 나는 빨강색인데 울타리 안의 남은 녹색이라는 것 아니겠어요?
살다보니 이런 일도 있더라구요.
그래서 가금은 색깔놀이를 하면서 색깔을 살펴봐야겠더라구요.
단, 틀린 색이 나오더라도 모른 척 넘어가기.
그게 인생이니까...
그레고리 팩 죽다
나는 서양 남자 배우 중에 그레고리 팩을 좋아한다.
절제되고 단정한 모습이 마음에 든다.
난 아줌마이지만 어쩐지 욕망의 흔적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듯한 기름기 많은 아저씨는 좋아하지 않는다. 리처드 기어 같은, 섹스어필 덩어리.
그레고리 팩 하면 오스카 상을 안겨준 <앵무새 죽이기> 라는 영화가 떠오르지만,
그래도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로마의 휴일>이다.
절제된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는 신문기자 역은 압권이다.
사랑은 그런 게 아닐까.
안타깝고 가슴 아픈 것,
손 끝 떨리는 아픔을 참아내는 것,
마음은 두고 몸은 돌아서는 것...
그런 게 아닐까.
이 나이에 너무 환상적인 소린가.
몸과 마음이 다 허물어지는 사랑의 의미를 이미 알아버렸지만,
사랑은 모든 것을 다 갖는 것 아닐 것이다.
끝장을 보는 건 집착이고 탐욕이다.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을 두고 걸어나오는 그레고리 팩의 모습...
그게 사랑이다.
그 그레고리 팩이 죽었다.
6월 11일, 87세
아내 크리스틴은 남았다. 2003. 6. 11

봄 비 내리는 삼월,
시간은 빨리 가는 듯 하면서도 느리게 가기도 한다. 모처럼 휑하니 비워놓은 날.
그레고리 펙이나 원없이 보아야겠다.
<로마의 휴일> <앵무새 죽이기> <나바론 요새> <마켄나의 황금> < 빅 컨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