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우스에 관한 단상

마음의 말은 몸이 듣고 몸의 말은 마음이 듣는다.
이제 잔가지들을 쳐내고
몇 개의 나무 줄기로 서고 싶다는 마음의 말을
몸이 들은 것일까.

몇 해 전부터
디자인이 같은 옷을 두벌씩 사는 습관이 생겼다.
'나' 하면 정형화된 모습을 떠올릴 수 있도록.
그 디자인, 그 분위기 이런 것 말이다.

계절이 바뀌니 또 해야할 숙제가 있다.
학교 다닐 때는 숙제를 미뤄본 적이 별로 없는데
늘 같은 생활의 반복이 게으름을 피우게 하고
이 핑계, 저핑계 꾀를 내게 한다.
옷장에 잔뜩 걸려 있는 입지 않는 옷 정리.

색깔만 다른,
색깔도 다른 것이 섞이지 않는
똑같은 디자인의 블라우스를 샀다.
맞춰둔 선글라스 찾으러 가는 길에.
충동구매다.

숙제는 아직 언제할 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새로 산 블라우스는 언제까지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옷장 손잡이에 걸려 있어야 할 지 모르겠다.

'단순한 삶'에 대한 희망은
아직 갈 길이 멀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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