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발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오늘은 좀 분주했습니다.
지난 11월, 12월 바빠서 개인적인 만남의 자리를 되도록 줄였더니
새해가 되자 여기저기에서 얼굴을 보자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점심 때 손님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연탄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당연히 안도현 시인의 시가 떠올랐지요.
시인은 이래서 존경받을 만합니다.
단 세 줄로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점령할 수 있다니요.
시를 떠올리며 몇 장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새해을 열면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한 번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몇 년 전 신문이나 방송에서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떠들었습니다.
IT 산업, 항공, 조선으로 외화를 벌어들이는 마당이니 인문학이 무슨 대수냐는 것이었습니다.
대학교에서는 강의를 축소시키거나 폐강을 한다고 난리였습니다.
그 때 저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결론을 말하자면 사람은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빵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인격과 자존심으로 사는 것이지요.
인문학의 위기는 바로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진정성을 황폐화 시킵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근간을 흔들어 놓은 것이지요.
그렇게 메스컴에서 떠들어 댈 때는 방법이 없습니다. 기다려야지요.
그런데 얼마가 지난 후 노숙자에게 밥과 잠자리를 제공하기보다 인문학 강좌를 수료하게 했더니 다시 노숙자의 삶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적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자신을 자각하고, 자신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의식을 일깨워준 것이지요.
수돗물은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벽 뒤에 그리고 땅 속에 묻혀있는 수도관을 통해서 나옵니다.
인문학이 바로 땅 속에, 벽 속에 묻혀있는 수도관입니다.
인문학은 바로 '사람학'입니다.

그전에 한글을 모르시는 할머니들을 가르친 적이 있었습니다.
자주 잊어버리고 빨리 따라오지 못해서 저에게 늘 미안해 하셨지요.
그 때 드린 말씀입니다.
콩나물을 키우느라 물을 주면 물은 아래로 다 빠진다. 그래도 콩나물을 자란다.
마찬가지로 저의 작은 글들이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고,
더불어 사는 공동체인 교회에서 자신이 어떤 역할로 살아가고 있는 지
한 번씩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능력을 발휘할려면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많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은 주변언저리에서 나오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나 감상이나 느낌으로 예수님을 안다고 말하지는 마십시오
학생들이 시험을 잘 치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시험을 잘 치지.'라는 사실을 안다고
시험을 잘 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범위를 찾아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지요.

인문학이 우리의 배를 부르게 하지는 못해도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근원으로서의 힘을 제공하듯이
'나 자신'이 예수님 피값으로 산 '예수님짜리'라면
하나님 만드신 세상에서 '나 자신'이 한 번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뜨거운 사람이기를 소망해 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나 자신'의 값어치를 하고 살아가는 삶이겠지요.

***저는 예수쟁이입니다.  그래서 글에도 자주 쟁이의 흔적이 남습니다.  그러려니 해주시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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