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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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정 수립 : 
기원전 509년 로마 귀족들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했다. 왕정의 몰락은 소수 토착 혈통 귀족에게 권력이 넘어갔음을 의미했다. 2명의 집정관은 켄투리아 회에서 선출되고 임기는 1년이었다. 이들은 최고 통수권을 갖고, 재판관 역할을 했으며, 민회를 소집하고 안건을 제출할 수 있었다. 또 군대 지휘권과 국정 운영 권한을 가졌으며, 재임 중 민회나 원로원의 견제를 받지 않았다.

한 왕 대신 두 집정관을 택하다.
왕정이 몰락하면서 소수의 혈통 귀족들에게 권력이 넘어갔다. 한때 왕이 지니고있던 군대 지휘권은 이제 민회(켄투리아 회)에서 1년 임기로 선출된 2명의 집정관에게 돌아갔다. 2명의 집정관은 공동으로 군 통수권‘ 또는 최고 명령권‘을 의미하는 임페리움을 가지고 있었고, 1인의 집정관에 의한 권력 남용을 방지할 목적으로 집정관 각자는 상대방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각각의 집정관은 어디를 가든지 항상 처벌권을 상징하는 파스케스를 든 12명의 호위병을 동반했다.
- P241

집정관의 강력한 권한

로마의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로마 공화정은 왕정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집정관은 2명이고 선출직이며 임기가 있다는 점에서 왕과 달랐지만, 그들에게 보장된 권한은 왕의 권한만큼 강력했기 때문이다. 집정관들은 군 통수권자로서 전쟁 준비와 작전 수행에서 절대적인 권한을 가졌으며, 군 지휘관을 임명하고 징병 명부를 작성하고,
시민을 징병했다. 또한 집정관에게는 전쟁에서 명령에 불복종한 자를 처벌할 수있는 권한이 있었다. 그들은 민회를 소집하고 정책이나 법률에 관한 안건을 제안했으며, 재판관의 역할을 수행했고, 민회의 결정 사항이나 재판 결과를 집행했다.
집정관들은 내부적으로 국정을 책임진 최고 지배자로서 로마 국가를 대표했다.
이론적으로만 볼 때 집정관들은 민회나 원로원의 견제를 받지 않고 1년의 임기 동안 능률적으로 국정을 이끌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 P243

원로원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원로원은 재정 통제권을 지니고 있오서 전쟁이나 공공사업 등에 대한 국고의 지출을 결정했다. 이것은 원로원이 행정에 대해 사실상의 통제권을 장악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원로원이 가진  권한은 궁극적으로
정무관들이 민회에 제출하는 모든 법안에 대에 원로원이 공식적으로 충고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공화정 시대 내내 이 권한을 상실하지않았다. 따라서 로마의 진정한 통치자는 원로원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집정관을 비롯한 여타정무관들은 원로원의 조언을 집행하기 위한 조직에 불과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집정관의 임기가
1년밖에 되지 않은 반면 원로원 의원은 종신직이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모든 사람이 원로원 의원의 타이틀을 열망하고 있었으므로 집정관까지도 자신의 운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원로원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원로원은 비록 법적으로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여러 제도와 장치를 이용해 모든 일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즉 원로원의 권력은 법에 기초하고 있었다기보다는 오히려 특권적인 지위로부터 유래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집정관은 개인적으로 원로원에 반대할 수 없었으며, 그것은 그 자신에게 유리하지도 않았다. 요컨대 집정관이 원로원의 심복과 같은 기능을 수행했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 P246

공화정의 역사는 신분 투쟁의 역사

기원전 509년 로마 귀족들이 에트루리아 왕들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수립했다. 이미 왕정기에도 있던 원로원은 유지되었다. 왕을 대체하기 위해 원로원은 매년 집정관 2명을 선출했다. 원래는 귀족 출신만이 집정관에 오를 수 있었다. 공화정 수립 이후 귀족과 평민 사이에 전개된 신분 투쟁의 결과 평민들에게도 집정관이 되는 길이 열렸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평민들이 집정관이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집정관은 전쟁과 법률에서 왕이 가졌던 권력을 소유했다. 임페리움으로 불린 이러한 최고 권력은 직무에 따라 점차 다른 정무관들에게 분산되었지만, 공화정말까지 행정적 권한을 보유했다.
로마 사회는 귀족과 평민의 두 계급으로 나뉘었다. 귀족은 관직을 가질 수 있었고, 원로원 의원, 사제, 집정관 등이 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평민은 군대에 복무할 수 있지만 복무 대가로 급료가 지급되지 않았으므로 언제든지 채무자로 전락할 수 있는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평민들은 전투 중간에 귀족들을 위해 계약 노동자로 일해서 채무를 변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채무를 변제하지 못한 평민들은 땅과 자유를 잃었다. - P248


평민들의 권리를 지켜 줄 호민관의 탄생

신분 투쟁 초기에 호민관직은 재산과 야심있는 평민들이 보유하게 되었다. 호민관은 평민들 만의 민회인 트리부스 평민회에서 1년 임기로 선출되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정무관이 아니고집정관이 가지고 있던 임페리움도 없었다. 하지만 집정관조차도 갖지 못한 신체 불가침이라는특별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호민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평민의 생명과재산, 이익 그리고 권리를 수호하는 것이었으므로 호민관은 민회에서 통과된 법.평민
원로원의 칙령, 정무관의 행정 등이 평민의 이익에 배치된다고 생각하면 거부할수 있는 권한을 지녔다. 이 밖에도 호민관에게는 법안에 대한 발의권이 부여되었으며, 필요에 따라 김정관과 여타 정무관들에 대한 체포권이 주어졌다. 관습적으로 인정된 호민관의 거부권은 나중에 원로원이 야심만만한 집정관들에게 대처하는 적절한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평민들은 호민관을 통해 법안을 제출함으로써 자신들의 이익을 제도권 내에서 주장할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호민관은 단순히 평민의 선두에 서서 귀족과 대결하는 것만이 아니라 귀족과 평민 사이에 다리를 놓는 중개 역할도 맡았다. 만약 평민들이 호민관을 내세워 원로원과 사사건건 대립했다면 신분 투쟁의 격화로 로마 공화정이 무너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호민관을 지낸 사람은 자동적으로 원로원 의석을 부여해서 평민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극단적 주장을 하는 것은 막았다.
- P255

12 표법, 드디어 법률이 문자로 기록되다.

성산 사건이 일어난 지 40여 년이 흐른 기원전 451년 입으로만 전해지던 기본적인 법률들을 문자로 기록해 포룸(광장)의 나무 서판(나중에는 동판으로 바뀜)에 공포하는 권한이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를 위원장으로 한 법률 제정 10인 위원회에 주어졌다. 이곳에서 만든 안이 켄투리아 회를 통과해 로마의 국법이 되었다. 이법을 영구히 보존하고 모든 사람 앞에 공포한다는 뜻으로 12개의 표에 새겨 광장에 세웠기 때문에 12표법‘이라고 한다.
12표법이 공포되기 전 법률은 법적·종교적 전승의 문제였으며, 이러한 전승은 귀족들에 의해 공포되었다.
- P257

로마는 어떻게 이탈리아를 정복했는가

공화정 초기 로마는 모든 이웃과 분쟁을 겪었다. 로마가 새로운 정치적•사회적 질서를 모색하는 사이 에트루리아 인, 갈리아 인.
그리고 여타 이웃 부족들이 로마 영토를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수차례 넘겼다. 종종 패배 또는 내부 붕괴 직전에 결연한 의지로 사력을 다해 내부와 외부의 위협을 모두 극복했다. 이렇게 로마는 중부 이탈리아의 주요 세력으로 자리 잡았을 뿐 아니라 대제국을 위한 기초를 닦았다. 위기를 넘긴 로마는 본격적으로 이탈리아 반도 정복에 나선다. 로마의 적극적인 공세는 로마보다 앞서 남부 이탈리아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그리스, 카르타고와 충돌하는 원인이 되었다.
- P566

로마 발전의 발판이 된 라틴 통맹

로마는 당정 시대부터 이미 이웃 부족들과 동맹 관계를 맺고 있었다. 로마의 주도권이 강했다고는 하지만 라틴  동맹에 속해 있던 여러 부족 사이의 역학 관계는 것의 대등했다. 기원전 509년에 로마가 왕에서 공화정으로 체제를 바꾸자 동맹국들이 대거 로마와 결별을 선언했다. 동맹국들은 로마가 아닌 로마를 다스리는 왕과 동맹을 맺었다고 생각했다. 로마가 왕정을 무너뜨리자 이를 동맹 관계의 폐지로  생각한 것이다. 이는 당시 라틴 동맹의 결속력이 얼마나 허약해는 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에트루리아 인들의 패배로 얻은 로마의 평화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로마는 강력한 도시가 되었고 그런 상태가 지속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라틴 부족들은 새로운 지배 질서 아래에서 로마에 주도권을 넘기출 마음이 전혀 없다. 결국 로마와 나머지 라틴 부족들은 전쟁을 돌입했다. 이미 나머지 라틴 부족들을 능가하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로마는 이들을 제압하고 기원전 493년에 카시우스 조약을 맺었다. 위기를 맞을 때 서로 도와준다는 내용의 조약이었다. 이 조약으로 로마 공화정 수립으로 인해 해체된 라틴 동맹이 재건되었다. 로마와 라틴동맹은 공동방어에 동등하게 기여했고, 일부 시민권을 공유했으며, 정복으로 얻은 전리품을 절반은 로마에, 나머지는 다른 동맹국에 동등하게 분배하였다.
라틴 동맹은 공식적으로는 동등자 사이의 평등조약이었다. 하지만 동맹군의 소집과 총지휘는 로마가 맡기로 하는 등 사길상 아테네를 맹주로 하던 그리스의 델로스 동맹처럼 로마을 맹주로 한 동맹이었다. 로마는 라틴 동맹을 발판으로 삼아 에트루리아 인,사비니 인, 그리고 볼스키인들을 정복하고 세력을 확대해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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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랑케는 로마의 역사적 역할에 대해 "모든 고대사는 여러 개울이 호수로 흘러 가듯이 로마의 역사로 흘러들어 가고, 모든 근대사는 다시 로마로부터 흘러나왔다"라고 표현했다. 로마 인들은 오리엔트 문화와 그리스 문화.
거기에 로마 인들 자신의 문화가 융합된 세계적 문화를 만들어 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 인들처럼 한낱 도시 국가에서 출발했음에도 그리스 인들이 폴리스 상간의 대립과 분쟁을 극복하지 못한 것과는 다르게 이탈리아를 통일하고 마침내는 지중해 세계를 통일하여 앞으로 다가올 유럽 세계를 준비한 것이다. 따라서 로마역사를 지중해 세계 통일의 역사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이후 로마 인들은 선진 오리엔트 문명과 그리스 문명을 통합해서 중세를 거쳐 근대에 전해 주어 문명의 디딤돌 역할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저명한 로마 역사연구자 중 한 사람인 프랑스의 클로드 니콜레는 "우리는 모두 로마 시민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말은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에 둘러싸인 지중해를 자신들의 호수로 만들어 통치한 로마 인들의 위대한 성취를 말해 주기도 한다. 로마 인들이 정말 위대한 점은 지중해를 지배하지 않고 잘 관리함으로써 지중해를문명의 교류와 전파의 공간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 P12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사 이야기》를 살펴보려 한다. 로마사와 관련해 우리 독자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이기때문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사를 성공 만능주의, 영웅주의, 엘리트주의 관점이라는 굴절된 시야로 바라본다. 《로마인 이야기》가 인기를 누린 이유는 신자유주의 물결이 휩쓸기 시작한 1990년대 이래 우리 사회의 풍토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사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리더십을 중시했고, 그러다 보니 민중은 언제나 영웅을 추종하는 존재로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난다.
어찌 보면 이것은 독재를 변호하고 민주주의를 유보하는 것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시오노 나나미가 바라보는 로마 제국의 팽창은 침략과 영토에 대한 욕구가 아닌 로마의 안전을 확립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일본이 선제적으로 자국의 안전을 위해 조선을 침탈했다는 위험천만한 논리로 발전할 수 있다. 자국의 안전을 위해 침탈했다는 주장은 제국주의적 팽창을 은폐하고 합리화하기 위한 기만적인 표현이다. 현재 진행 중인 국사 교과서 국정화와 맞물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사에 대한 이해는 많은 우려를 자아낸다. 로마사에 대한 시오노 나나미의 왜곡된 이미지에서, 한국 현대사를 자랑스러운 영광의 역사로 재조명하자면서 오랜 산고 끝에 성취한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고 합리화하려는 우익 진영의 움직임이 연상되는 것은 필자만의 기우일까?
- P13

■ 아주 짧게 정리한 로마 

1000년의 역사로마의 역사를 간략히 정리해 보자. 기원전 753년 로물루스가 건국한 로마는 중부 이탈리아 라티움 지방 팔라티누스의 언덕 작은 산골 마을에서 시작해 500년의시간을 거치면서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지중해 세계를 정복하여 유럽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를 지배하는 대제국으로 성장했다.  - P13

 작은 도시 국가로 출발한 로마는 한동안 에트루리아 출신 왕들의 지배를 받았고, 기원전 509년 에트루리아 왕의 지배를 무너뜨리고 권력의 균형과 견제를 내세운 공화정을 수립한다. 자유로운 선거와 공정한 경쟁을 제도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로마 공화정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공화정 수립 후 기원전 3세기까지 이탈리아 반도의 여러 도시 국가를 차례로 정복한 로마는 기원전 3세기에 접어들면서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지배하는 강력한국가로 발전했다. 그리고 기원전 3세기와 기원전 2세기에 걸친 카르타고와의 세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서는 지중해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지중해는 로마의 지배권이 관철되고 로마 문명이 외부로 나가는 통로로 이용되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외래 문명이 로마로 들어오는  통로이기도 했다. 하지만 로마의 정복 사업으로 수혜를 본 사람들은 소수의 귀족들과 부유한 평민들뿐이었다. 많은 로마 시민이 토지를 버리고 제국의 수도인 로마로 이주해 빈민 집단을 형성했다. 상층 계급은 전에는 감히 꿈꾸지도 못하던 엄청난 부를 향유했고 수많은 노예를 거느리게 되었다.
명예와 부당 이익을 얻기 위해 귀족들 사이에 벌어진 격렬한 정치 투쟁으로 기원전 1세기에 내란이 초래되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카이사르가 등장해 강력한 독재 권력을 확립하며 내란이 종식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당하면서 로마는 다시 한 번 내란의 격랑에 휩쓸리게 된다. 카이사르의 증손자이자 양자이던 옥타비아누스가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공화정이 종식되고 로마는 제정으로 넘어가 정치적으로안정기에 접어든다. 그 후 200년 동안 지속되던 로마 제국 전성기는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 (기원전 27년 ~ 기원후 180년)로 불렸는데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기번은 이 시기를 인류 역사상 가장 행복하고 번영한 시기라고 극찬했다.  - P14


하지만 로마의 군인들이 자신의 사령관을 황제에 옹립하면서 기원후 235년부터 기원후 284년까지 불과 50여 년의 짧은 기간에 26명의 황제가 교체되는 난맥상을 보여 주었다. 로마는 그야말로 군인 황제들의 천하가 되었다. 군인 황제들이 빈번하게 교체되던 시기에 로마 제국은 동쪽으로는 페르시아 인들에게 그리고 북쪽으로는 게르만 족에게 지속적인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결국 기원전 509년 공화정 수립으로 시작된 로마 제국의 역사는 이민족들의 공격을 이겨 내지 못하고 기원후 476년에 멸망함으로써 대략 1000년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때 멸망한 로마 제국은 서로마 제국이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오늘날의 터키, 이스탄불)로 수도를 옮긴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은 1000년가량 더 살아남아 서양 중세역사의 한축을 담당했다.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 
전설에 따르면 카르타고는 기원전 814년 현재의 레바논 지역에 살던 페니키아 인들이 현재 튀니지 수도인튀니스 지역에 정착하면서 설립되었다. 카르타고는 지중해 남서쪽 돌출된 곳에 자리 잡은 천혜의 항구로 서부 지중해의 무역을 장악하기에 이상적인 위치였다. 카르타고 세력은 북아프리카를 넘어 스페인, 사르디니아, 그리고 시칠리아까지 뻗어 나갔다.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카르타고를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라고 표현했다.
- P26

로마법의 중요성 : 
중세 이래 서양의 거의 모든 국가는 로마법의 권위를 인정하고 로마법에 근거해 자국의 법률을 정비했다. 현재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가 로마법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게다가 로마는 기원후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공인했고, 기원후 392년에는 국교로 선포했다. 로마 제국은 기독교를 자국의 종교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종교로 키웠다.
- P33

로마의 정신을 지배한 그리스 : 
기원전 2세기 로마가 그리스를 점령하면서 그리스 문명이 로마로 유입되었다. 그리스 문학과 예술로 인해 로마 인의 정신세계는 깊어지고 생활에는 세련미가 더해졌다. "정복된 그리스가 야만적인 정복자를 정복했다"는 호라티우스의 말처럼 정복가 로마인들이 오히려 그리스 문명의 포로가 된 것이다. 그리스 문명과 로마 문명이 뒤섞이며 서양 고전 문명이 탄생했다.
- P36

미케네 문명 : 
기원전 2000년경 발칸 반도 북쪽에 있던 인도-유럽 어족에 속하는 이주민들 일부가 후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1600년 ~기원전 1200년) 무렵 그리스로 남하하여 그리스 중부 및 남부 지역과 크레타 섬을 점령하고 미케네 문명을 일으켰다. 미케네 문명에서 사용하던 ‘선문자 B‘가 1952년에 해독되면서 아카이아 인들이 그리스어를 최초로 사용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 P37

크레타 문명 :
 기원전 2000년경에 발칸 반도 북쪽에 도달해 있던 인도 유럽 어족에 속하는 이주민 집단 일부가 도래한 뒤에 일어난 크레타 문명(미노스 문명이라고도 한다)은 크레타 섬에서 출발해 에게 해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크레타 문명은 기원전 1750년부터약 50년 동안 전성기를 맞이하지만 기원전 1450년경 크레타 섬에 침입한 미케네 인에게 멸망당한다. 그리스 본토에서 일어난 미케네문명은 기원전 1600년경에 전성기를 맞았다. 기원 전 1250년경에는 그리스 본토와 경쟁하던 트로이가 멸망했고, 곧이어 1200년경에는 미케네 문명도 종식되었다. - P73

에트루리아 인 : 
에트루리아 인의 정확한 기원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에트루리아 인은 로마의 북서쪽, 지금의 토스카나에 적어도 기원전 900년경에는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혹은 기원전 1200년경에 정착했을 수도 있다. 에트루리아 인은 인도 유럽 어족이 아니었고 오늘날 유사한 언어가 남아 있지 않아 지금까지 발견된 수천 개의 비문은 해독이 불가능하다. 에트루리아 인이 남긴 화려한 무덤 벽화에 향연, 춤, 운동 경기가 묘사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에트루리아 장례의식의 일부이던 검투 경기가 포함되어 있다. 후일 로마에서 인기를 끈 검투사 경기는 에투루리아의 장례식 경기에서 발전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스 문화는 에투루리아 인을 통해 로마에 들어왔는데 알파벳 문자가 그 중 하나다. 초기 로마에 에투루리아가 미친 영향은 막대했다. 로마는 에트루리아 도시들의 전형인 격자형식을 모방해 도시를 설계했다. 에트루리아
의 건축 설계 또한 로마에 흔적을 남겼다. 수도교, 교량, 상하수도 시설, 그리고 아치와 볼트(아치형 둥근 천장)는 모두 에트루리아의 유산으로 훗날 로마 건축의 특징이 되었다. - P145

에트루리아의 멸망 : 
12개 도시의 연맹체를 이루고 있던 에트루리아 인들의 힘은 기원전 6세기 절정에 이르렀다. 각 도시 국가는 중앙정부 없이 각각 귀족의 지배를 받았고 자치와 독립을 유지했다. 그 때문에 번번이 갈리아 인, 그리스 인, 삼니움 인에게 팽창을 저지당했다. 로마는 테베레 강 북쪽 25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에트루리아 인들의 도시 베이이와의 오랜 전쟁 (기원전 406년 ~ 기원전 396년)에서 승리했다. 결국 에트루리아 인들은 기원 전 350년경 로마에게 분할되고 정복되었다. - P147

강탈 사건의 의미 : 
로물루스가 사비니 여인들을 강탈해서 로마 인들과 혼인하게 하고 그 결과 두 민족 간에 융합이 이루어진 것은 이민족을 통합하고 시민권을 개방하는 정책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또 사비니 왕 타티우스를 로마의 공동 왕으로 추대했는데, 전승에 따르면 로마가 도시를 확대하고 여러 종교 의식을 확립하게 된 데에는 타티우스의 역할이 컸다. 로마는 사비니 인과의 융합으로 다민족국가로서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고 인구가 어느 정도 늘어나면서 팔라티누스 언덕의 조그만 부락에서 강력하고 거대한 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결국 ‘사비니 여인 강탈 사건‘을 계기로 로마 공동체의 미래가 안정을 찾았고, 이웃 민족들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다. - P161

누마의 통합 정책 : 
누마 왕(누마 폼필리우스:로물루스이후 선출된 왕으로 사비니 왕의 사위)은 로마가 물과 기름처럼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는 현실을 개탄하고 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질서와 풍습을 세우려고 했다. 그는 로마 인들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여러 개의 작은 그룹으로 나눴다. 도시 거주민들을 목수 조합, 철공 조합, 염색공 조합, 도공 조합 등 직업에 따라 만들어진 조합에 소속시켰다. 이런 직능 조합에 대한 귀속감이 강해지면서 잡다하게 혼합돼 있던 각 민족의 다양성이 약해지고 로마 사회의 통합성이 강화되었다. 이처럼 누마는 다양한 출신 종족과 문화때문에 통합성이 없던 로마의 풍속을 순화하고 제도를 확립했다. - P177

새로운 달력 : 
누마 왕은 로마 달력을 개정했다. 누마 이후에 카이사르와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에 의해 두 번 더 달력이 개정되었으나 가장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 낸 사람은 누마 왕이었다. 누마의 치세 이전에 로마의 달력은 10개월에 불과했다. 이러한 이유로 1년의 마지막 넉 달이 잘못된 숫자로 이름 지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일곱 번째 달이 9월, 여덟 번째 달이 10월, 아홉 번째 달이 11월, 그리고 열 한번째 달이 12월이었다. 1년은 304일이었고 아주 이상하게도 겨울은 달이 없는 기간으로 여겼다. 기원전 715년 이런 로마 달력에 누마 왕이 1월과 2월의 2개의 달을 덧붙이고 1년을 12개의 음력으로 나누어 개정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기원전 45년에 카이사르가 누마 왕의 태음력 달력을 개정해 새롭게 태양력을 시행했다. - P179

둘루스 호스틸리우스 : 
세 번째 왕 툴루스 호스탈리우스는 전사였다. 그는 누마가 통치하는 동안 로마가 약해졌다고 여기고 늘 전쟁을 하려고 했다. 그의 치세에 로마 인들은 경쟁 도시이자 선조들의 도시이던 알바통가를 철저히 파괴했다. 신전들만 파괴를 면했다. 둘루스는 알바통가의 주민 전체를 로마로 옮기게 했고, 로마 시 인구는 두 배로 늘어났다. 패전국 주민들에 대한 일관된 방침에 따라 알바롱가 주민들에게 로마 인들과 동등한 시민권을 부여했으며, 알바롱가의 부유한 가문들은 로마의 귀족 계급으로 편입시켰다. 이 새로운 알바롱가 가문들이 원로원에 포함되면서 원로원 의원의 숫자는 증가했다.
(알바롱가의 율리우스 가문에서 카이사르가 태어난다) - P187

임부스 마르키우스 : 
누마 왕의 손자인 앙쿠스 마르키우스는 할아버지처럼 종교의 올바른 운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달리 평화를 사랑하지는 않았다. 로마가 정당하게 전쟁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종교 의례를 수립해 주변 라틴 민족들을 제압했다.
그는 로마의 영토 지배권을 북쪽으로는 한때 에트루리아 인이 지배한 지역까지, 서쪽으로는 오스티아 항구까지 확대했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어머니는 에트루리아 인, 아버지는 코린트에서 도망 온 부유한 사람이었다. 순수한 에트루리아계 혈통이 아니라서 차별을 받던 그는 부인 타나퀼과 함께 로마로 이주했다. 성공을 위해 열심히 일한 타르퀴니우스는
새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는데 그들 중에는 연로한 앙쿠스 왕도 있었다. 그는 왕의 최측근 조언자가 되었다.
앙쿠스가 죽자 앙쿠스의 두 아들을 사냥을 떠나게 한 뒤 로마 역사상 최초로 공개적인 선거 운동과 투표를 통해 왕으로 선출되었다.
- P200

상업왕의 시대 : 
기원전 6세기에 다섯 번째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를 시작으로 여섯 번째 왕 세르비우스 둘리우스 그리고 마지막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에 이르기까지, 에트루리아 출신의 마지막 세 왕의 치세로 인해 로마에서는 씨족과 원로원의 권한이
약화되고 왕권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변화가 일어났다. 로마는 에트루리아 인들의 영향을 받아 정치, 경제, 문화가 급속히 발달했고, 라티움 지역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도시 국가가 되었으며, 곳곳에 많은 공공건물과 광장이 들어섰다. 에트루리아 출신 왕들이 통치하던 시대는 ‘상업왕의 시대‘ 라고 불릴 만큼 로마에는 외국의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많이 모여들어 그들의 거주 구역이 따로 마련될 정도였다.
- P205

왕이 된 노예 :
 노예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타르퀴니우스  집안의 노예이던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는 이상한 방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선왕 타르퀴니우스가 죽어 가고 있는 중에 왕비 타나퀼은 사람들에게 남편이 무사하다고 말했다. 왕비는 세르비우스에게 왕의 역할을 맡아 달라고 말했으며, 사람들에게는 타르퀴니우스가 회복할 때까지 세르비우스가 왕의 역할을 대신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계략으로 세르비우스는 타르퀴니우스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기 전에 통치자로서 자신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세르비우스늠 선왕 타르퀴니우스에 이어 또다시 에트루리아 인 출신 으로 로마의 여섯 번째 왕이 되었다. - P225

세르비우스 성벽 : 
로마의 테르미니 역 앞 광장에는 길이 100미터에 달하는 돌무더기가 늘어서 있다. 이것이 바로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성벽의 일부분이다. 이 성벽은 세르비우스의 이름을 따서 ‘세르비우스 성벽‘으로 불리지만, 사실은 훨씬 더 후인 기원전 378년에 세르비우스가  세운 성벽 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총길이 약 11 킬로미터인 이 성벽은 로마의 일곱 언덕을 모두 둘러쌌다고 한다.
- P227

쿠리아 회 :
 왕정기 로마에는 무장 가능한 모든 성년 남자 시민의 총회로 쿠리아 회라는 민회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시민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출하거나 입법을 행하는 민주적인 민회와는 거리가 멀었고, 혈연의 유대를 통해서 귀족들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수동적인 기구였다. 이런 초보적인 민회는 공화정 초기에 이르러 정치적으로 힘을 잃는다.
- P228

켄투리아 회 : 
켄투리아라는 말은 숫자 100을 뜻하는 라틴어 켄툼에서 유래했다. 하지만 1개 켄투리아 인원이 정확히 100명이었던 것은 아니다. 켄투리아 회는 전 시민의 병역 의무를 전제로 재산과 무장 정도에 따라 193개 켄투리아(기병 18권투리마, 보병 170전투리아 비무장병 5켄투리아)로 조직되었다. 기병은 귀족 출신들로 조직했고, 보병은 평민 출신들을 재산에 따라 등급별로 조직했다.
- P229

왕정 시대 마지막 왕 :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왕은 ‘거만한 타르퀴니우스‘인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였다. 다섯 번째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아들이자 여섯 번째 왕 세르비우스의 사위이던 ‘ 거만한 타르퀴니우스‘는 세르비우스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독재자로 주로 정치를 실시했고, 왕에게 조언하면서 유일하게 왕권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던 원로원을 무시했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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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대주의는 히틀러 덕분에 영원히는 아니겠지만 한동안 불신을 사게 되었다. 이는 유대인이 갑자기아주 유명해져서가 아니라, 벤구리온 자신의 말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 시대에는 가스실과 비누공장이 반유대주의의 귀결점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교훈은 외지에 사는 유대인에게도 마찬가지로 불필요한 과잉의 것이다. 그들은 이 세계의 적대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자기 민족의 3분의 1이 파멸된 엄청난 재앙을 겪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어디에나 반유대주의적 요소가 영원히 존재한다는 그들의 확신이 드레퓌스 사건 이래 시온주의 운동 진영의 가장 유력한 이데올로기적 요소가 된 것만은 아니었다. 이는 또한 달리 설명되지않는, 초기 단계의 나치 정권에 대한 독일 유대인 공동체의 협상적 태도를 설명해 주는 원인이기도 했다(이런 협상은 말할 필요도 없이 유대인협의회가 뒤에 취한 협상적 태도와 크게 구별된다. 아직 어떤 도덕적문제도 개입되지 않았고, 단지 그 정치적 결단의 현실성‘ 만이 문제가되었다. ‘추상적‘ 비난보다는 구체적 도움이 더 낫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마키아벨리적 과장이 없는 현실 정치였으며, 그 위험성이 드러나게 된 것은 수년 뒤 전쟁이 발발한 후, 유대인 단체들과 나치 관료사이의 일상적 계약 때문에 유대인 지도층 인사들이 유대인 탈출을 돕는 일과 나치스가 유대인의 이동 격리를 돕는 것과의 차이점을 제대로구별하지 못하게 된 때였다). 친구와 적을 구별하지 못하도록 유대인을 무능하게 만들어 버린 것은 바로 이런 확신이었다. - P59

그런데 그와 같은 단 한 경우가 법정의 주목을 끌었다. 이는 아테나워의 가장 가까운 고문들 중 한 사람인 한스 글로브케 박사(Dr.
Hans Globke)이다. 그는 25년 그 이전에 뉘른베르크 법에 대한 악명높은 주석의 공저자였고, 그로부터 얼마 지난 뒤 모든 독일계 유대인에게 이스라엘 이나 ‘사라‘를 중간 이름으로 갖게 해야 한다는 놀랄 만한아이디어를 낸 사람이었다. 그런데 글로브케라는 이름(오직 이 이름만)이 피고에 의해 지방법원 기록에 삽입되었는데, 이는 아마도 아데나워 정부를 설득해서 범죄인 소송 절차를 시작하게 하려는 희망에서였을 것이다. 여하튼 전 내무부 담당관이자 아데나워 내각의 현 국무장관은 나치스로부터 당한 유대인의 고통의 역사에서 예루살렘의 전 회교법 고문보다 더 유명해질 권리가 있었다.
왜냐하면 이 기소사건과 관련된 한 재판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 역사였기 때문이다. 이 역사적 재판의 심판대에 서 있는 것은 한 개인이 아니고 나치 정부도 아니며 바로 역사 전체에 나타나는 반유대주의이다."
- P69

모두 오랫동안 지위를 유지해온 저명한 시온주의자인 유대인 지도층인사들과 그의 첫 개인적인 접촉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가 ‘유대인문제‘에 그렇게 매혹된 이유는 그 자신의 ‘이상주의‘ 때문이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가 언제나 멸시한 동화론자들이나 그를 지루하게 만든 정통파 유대인과는 달리 이 유대인은 그와 같은 ‘이상주의자‘ 였다. 아이히만의 생각에 따르면 ‘이상주의자‘란 단지 어떤 ‘이상‘을 신봉하거나,
또는 도둑질하거나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이러한 조건은 필수불가결하기도 하다. ‘이상주의자‘ 란 자신의 이상을 삶을 통해 실천한 사람이었고(따라서 사업가 같은 사람은 아니었음),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 특히 어떤 사람이라도 희생시킬 각오가 된 사람이었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아버지마저도 죽음으로 보냈을 것이라고 경찰심문에서 말했을 때, 그는 자신이 어느 정도로 강력한 명령을 받고 있었는지만을 말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자신이 얼마나 이상주의자‘로서 살아왔는가를 보여주려 한 것이다.  - P97

아이히만이 만난 가장 위대한 ‘이상주의자‘는 그가 헝가리에서 유대인 추방을 협상한 루돌프 카스트너(Rudolf Kasiner) 박사였다. 아이히만이 수천명의 유대인을 불법적으로 팔레스타인으로 보내는 대신(기차는 사실상  독일 경찰에 의해 보호되었음), 여러 수용소(그곳에서 몇십만이 아우슈비츠로 보내졌음)에서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합의를 통해 구출된 저명한 유대인과 시온주의 청년 조직원 수천 명은 아이히만의 말에 의하면 ‘최고의 생물학적 재료‘ 였다. 아이히만의 이해에 따르면 카스트너 박사는 자신의 ‘이상‘을 위해 동료 유대인을 희생시켰는데 이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아이히만을 재판한 세 판사 중한 명인 베냐민 할레비(Benjamin Halevi) 판사는 이스라엘에서 카스트너 재판을 담당했다. 그때 카스트너는 아이히만과 다른 나치스 고위관료들에게 협조한 것에 대해 자신을 변호해야 했다. 할레비의 의견에 따르면 카스트너는 "영혼을 악마에게 팔았다." 그런데 이제 악마 자신이 피고석에서 심판받고 있는데 그도 ‘이상주위자‘임이 드러났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영혼을 판 자고 ‘이상주의자‘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 P98

자신이 게토 체계를 ‘발명‘ 했다든가, 모든 유럽의 유대인을 마다가스카르로 보낼 생각을 해낸 척한 것은 완전히 허풍이었다. 아이히만이 자기가 ‘아버지‘ 라고 주장한 테레지엔슈타트게토는 동쪽의 점령지역에 게토 체계가 도입된 지 몇 년이나 지나서야 설치되었다. 그리고 몇몇 특권 계층을 위해서 특별 게토를 설치한 것은 게토 체계와 마찬가지로 하이드리히의 ‘생각‘ 이었다. 마다가스카르 계획은 독일 외무부에서 탄생한 것 같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한 아이히만의 기여는 그가 좋아한 뢰벤헤르츠 박사에게 대부분 의존한 것이었다.
400만여 명의 유대인을 어떻게 전쟁 후 유럽에서 수송할 것인지에 대한 몇 가지 기본적인 생각들을 하기 위해 그는 뢰벤헤르츠 박사를 소환했다. 마다가스카르 계획은 일급비밀이었으므로 뢰벤헤르츠 박사는 팔레스타인으로 수송할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 P103

"관청용어 (Amtssprache)만이 나의 언어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관청용어가 그의 언어가 된 것은 상투어가 아니고서는 단 한 구절도 말할 능력이 정말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정신과 의사들이 그렇게 ‘정상적‘이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한 것이 이 상투어들이었을까? 성직자가 그에게 맡겨진 영혼을 위해 희망하는 ‘긍정적인 생각‘ 들이 그것일까? 예루살렘에서 아이히만이 자신의 정신의 이러한 긍정적인 면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었던 기회는, 그의정신적 심리적 건강을 담당한 젊은 간수가 그에게 쉬면서 읽으라고
‘로리타‘를 빌려주었을 때였다. 이틀 뒤 아이히만은 책을 돌려주었는데 이때 그는 화가 나 있음이 분명했다. "아주 불건전한 책" (Das ist aberein sehr unerfreuliches Buch))이라고 그는 그 간수에게 말했다). 분명 재판관들이 피고에게 그가 말한 모든 것이 공허한 말뿐이라고 드디어 말한 것은 옳았다.  - P105

다만 그들은 이 공허함이 가장된 것이며, 피고가 공허하지 않은 끔찍한 다른 생각들을 감추려고 그런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이 반박될 수 있는 것은, 아이히만은 기억력이 상당히 나쁨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중요한 일이나 사건에 대해 동일한 선전문구와 자기가 만든 상투어를 단어 하나 틀리지 않고 일관성 있게 반복한 점 때문이다(자기가 스스로 만든 문장을 하나 말하더라도 그는 이말이 상투어가 될 때까지 계속 반복했다). 아르헨티나나 예루살렘에서 회고록을 쓸 때나 검찰에게 또는 법정에서 말할 때 그의 말은 언제나 동일했고, 똑같은 단어로 표현되었다.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speak)은 그의 생각하는데 무능력함(inability to think),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와는 어떠한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the words)과 다른 사람들의 현존(the presence of others)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reality as such)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대인 경찰관의 심문을 받는 현실을 8개월 동안 마주하면서 아이히만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왜 친위대에서 상위 직책을 얻지 못했는지를 장황하게 반복적으로 설명했다. 그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할 일을 다했고, "전선으로 가자. 그러면 나는 더 빨리 연대 지휘관이 되겠지, 라고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고할 정도로 현역 군무로 전근되도록 신청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법정에서는 이와 반대로 그는 자신의 살인적 임무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근을 요청한 척했다. 여기에 대해 그는 별로 우기지는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레스 대위에게 한 발언에 대해서는 대조심문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동부의 기동 살인부대였던 돌격대에 지명되기를 바란다고 레스 대위에게 요청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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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5년 5월, 마키아벨리가 메디치가 출신의 교황 클레멘스 1세에게 피렌체사』를 바친다. 피렌체를 지배한 메디치가의 의뢰에 따라 지은 책이기 때문에, 메디치가 사람들을 허심탄회하게 평가할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메디치가의 군주적 지위와 성향을 분명히 드러내 보인다. 메디치가 사람들의 능력이 뛰어났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정치적 의미와 효과에 대해서는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메디치가의 군주화를 공화정에 해로운것으로 파악했다. 개인적 평가와 정치적 평가는 엄연히 다르다. 뛰어난 수장들 덕에 메디치가는 성공 가도를 달렸다. 개인이나 가문이라는 사적 차원에서는 좋다. 하지만 국가 차원에서는 군주정의 대두이자 공화정의 몰락으로 나타났다. 마키아벨리는 성장하는 편이 아니라 쇠락하는 편에 섰다.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메디치가를 더 혹독하게 비판하고 싶었을 것이다.
메디치가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그의 저작에서 어렵지 않게 볼수 있다. 『군주론』에서 군주는 모름지기 자신의 권력을 탐하기보다.
는 제도 개혁을 통해 강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메디치가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 P92

『로마사 논고』와 『피렌체사』에는 사적 이익을 위해 사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메디치가에 대한 비판이 적혀 있다. 공화정을 옹호하는 현실주의자 마키아벨리는 피렌체가 직면한 메디치가의 군주적 권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메디치가의 권력이 피렌체를 더 강한 나라로 만드는 데 쓰일 수 있도록 설득하는 방법으로 비판적 지지를 택했다. 바로 이것이 마키아벨리를 군주제의 옹호자로 보이게 했다. 그러나 그는 군주제를 옹호하지 않았다. 자유를 누려온 피렌체에는 공화정이 더어울린다는 생각을 분명히 드러냈다. 그는 군주제를 지지해서가 아니라 메디치 군주 가문이 이미 장악한 권력을 제대로 사용하기를바라서 『군주론을 썼다.
- P94

마키아벨리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 

■ 로렌초 데 메디치
1449년에 태어났다. ‘국부‘라는 호 칭을 받은 할아버지 코시모의 뒤를이어 ‘위대한 자‘로 불릴 만큼 메디치가를 전성기로 이끌었다. 메디치가를 대표하는 문화·예술 후원 활동으로 피렌체 르네상스를 꽃피운것이다.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를비롯해 수많은 예술가들이 로렌초의 후원을 받았다. 1478년에 일어난 파치가의 암살 시도에서 자신은
부상을 입는 데 그쳤지만 동생 줄리아노를 잃은 뒤 철저히 복수하며,
피렌체에 피바람을 일으켰다. 파치가의 편에서 음모에 가담한 사람들
로렌초 데 메디치의 시신이 시뇨리아궁에서 내걸리거나 아르노강에 던져졌으니, 메디치가에 반기를 들면 어떤 꼴을 당하는지 확실하게 보여준 셈이다. 파치가가 메디치가를 제거하려고 일으킨 사건이 결과적으로는 메디치가의
피렌체 지배를 강화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현실이 만들어내는 뜻밖의 결과를 어릴 때
보았기 때문에 마키아벨리가 현실주의자로 성장했을 수도 있다. 1492년에 죽은 로렌초의 무덤은 산로렌초성당에 있다.
- P97

■라모보나를라1452롤라

1452년에 페라라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의사이자 대학교수인 할아버지의 교육을 받았는데, 그를 의사로 키우려는 할아버지의 뜻과 달리 신학과 철학에 관심이 많았고,
결국 도미니코수도원에 들어갔다. 수도회의 발령에 따라 피렌체 산마르코수도원의 강사로 일하다 볼로냐로 갔다. 그런데 교회 개혁을 외친 그의 이미지를 이용하려는 메디치가에서 그를 다시 피렌체로 불러들였고 그는 얼마 있다 산마르코수도원장으로 뽑힌다. 그는 메디치가가 씨를 뿌린 세속적 축제를 종교 행사로 바꾸면서 피렌체 개혁에 나섰다. 샤를 8세의 침입으로 쫓겨난 메디치가의 자리를 차지하지만, 피렌체 내의 정적들과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집요한 공격을 받아 결국 집권하고 4년만인 1498년에 시뇨리아 광장에서 화형당한다. - P96

■ 체사레보르자

타락한 교황의 대명사인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이다. 그가 태어난 1475년에는 알렉산데르 6세가 추기경이었다. 아버지의 지대한 관심을 받으며 성장한 보르자는 10대 중반에 이미 교회의 주교가 되었고, 피사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메디치가와 교류했다. 위대한 자-로렌초 데 메디치의 아들이자 훗날 레오 10세가 되는 조반니가 보르자와 같은 나이로 피사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교황인 아버지와 프랑스 왕의 지원을 받으며 이탈리아 로마냐 지역의 군주가 되려고 했다. 마키아벨리가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으로 여길 만큼 리더십을 발휘해 강력한 군대를 갖췄지만, 1503년에 아버지가 죽고 적대적 관계에 있던 율리우스 2세가 교황이 되면서 감금당하는 신세가 된다. 스페인 땅으로 이감되었다가 탈출한 뒤 자신이 주교로 있던 나바라 지역의 군대를 통솔하지만, 1507년에 배신자의 성을 공격하다 적의 손에 끔찍한 죽음을 당한다. - P96

■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

1433년에 피렌체의 명문 귀족가에서 태어났으며 마키아벨리와 절친했다. 페라라와 파두아의 대학에서 법을 공부하고 정치가와 역사가로서 활약했을 뿐만 아니라 사업적 감각도 뛰어나 큰돈을 벌어들였다. 인민 중심의 공화정을 구상한 마키아벨리와 귀족 중실 공화정을 지향한 그가 오랫동안 교류하면서 서로 사상적으로 성숙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 가벼워 보일 만큼 자신을 드러낸 마키아벨리와 달리 귀차르디니는 차갑고 신중했다. 귀차르디니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얻은 세상 사는 지혜를 모아 후세를 위한 『회고록Ricoradi politici e civill을 만들었는데, 이 책이 지금까지 독자의 사랑을 받으며 그는 처세의달인으로 불린다. 1540년에 죽을 때까지 큰 시련 없이 영화를 누렸다.
- P97

독서와 토론으로 소통하는 인문주의자
마키아벨리는 소통을 즐긴 사람이다. 메디치가의 군주정이 강화되면서 공직에서 물러나 세상에 참여하고 소통할 길이 막혀버렸을때 그는 사람이 모이는 곳을 찾아다녔다. 그중에서도 당시 지식인과 엘리트 들의 정원 모임이 적극적으로 이용되었다. 오리첼라리정원은 젊은 귀족들과 소통하는 공간이었다. 지금 피렌체 중앙역 서남쪽에 자리한 오르티 오리첼라리는 마키아벨리에게 특히 중요한공간으로, 피렌체의 유력 가문인 루첼라이 집안이 소유한 정원이었다. 여기서 피렌체 명문가의 젊은이들과 마키아벨리가 독서와 토론을 함께 했다. 피렌체에서 새로 부활하는 인간에 대한 관심이 정원모임의 문학, 철학, 신학, 천문학 등에 관한 독서와 토론이라는 시민적 방식으로 드러난 것이다.
정원 모임에 참여한 젊은이들은 부와 영향력뿐 아니라 훌륭한자질을 갖춰 장차 피렌체 정치를 이끌 만한 잠재력이 있었다. 
......
당대 이탈리아와 피렌체의 정치를 비판한 《로마사 논고》를 썼다.......이 책은 그가 모임에서 특히 가까이 지낸 부온델몬티와 루첼라이에게 헌정된다. - P101

현재의 답을 과거에서 찾다.
마키아벨리의 대표작으로 『군주론』을 꼽는 사람들이 많지만 『로마사 논고』를 그보다 더 중요하게 보는 이도 있다. 그가 공직에서 물러난 뒤 인문주의자들과 함께한 정원 모임을 통해 『로마사 논고』를쓰기 시작했는데, 세상에 다시 나갈 기회가 되기를 기대하며 메디치가에 바친 『군주론』 집필 작업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메디치가는 끝내 그를 견제하며 일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는 죽을 때까지『로마사 논고』와 『피렌체사』 등 역사 집필에 몰두한다. 앞에 말한것처럼 피렌체 사람들은 그를 역사가로 기억하며 그가 역사를 연구하지 않았다면 『군주론』을 쓸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역사 저술이 중요하다.
마키아벨리는 공직에서 외교와 국방 업무를 맡아보며 피렌체와 이탈리아가 놓인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진단한문제는 바로 ‘무력함‘이었다. 강대국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전쟁까지 일으키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약소국은 강대국의 힘 앞에 내던져졌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알프스 북쪽의 강대국들이 이탈리아반도로 내려와 사사건건 간섭하던 시기였고, 이를 겪은 마키아벨리의 문제의식은 강한 나라를 만드는 데 있었다.
- P105

마키아벨리는 비르투스 로마나의 핵심을 양과 질의 측면에서 파악한다. 『로마사 논고』 2권 2장에서 자유와 인구 증가와 능력 계발의 관계를 언급한 대목을 한번 보자.

자유가 보장된 모든 도시와 지방 들은 세계의 어느 곳에서나 매우 커다란 번영을 누린다. 이는 무엇보다도 인구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결혼이 사람들에게 더 자유롭고 매력적인 것이 되고 각자 자신의 가산을 빼앗길 것이라는 두려움이 사라져 아이들을 기꺼이 낳아 키우기 때문이다. 또 사람들은 아이들이 노예가 아닌 자유인으로 태어난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통해 뛰어난 인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기 때문이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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