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정 수립 : 
기원전 509년 로마 귀족들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했다. 왕정의 몰락은 소수 토착 혈통 귀족에게 권력이 넘어갔음을 의미했다. 2명의 집정관은 켄투리아 회에서 선출되고 임기는 1년이었다. 이들은 최고 통수권을 갖고, 재판관 역할을 했으며, 민회를 소집하고 안건을 제출할 수 있었다. 또 군대 지휘권과 국정 운영 권한을 가졌으며, 재임 중 민회나 원로원의 견제를 받지 않았다.

한 왕 대신 두 집정관을 택하다.
왕정이 몰락하면서 소수의 혈통 귀족들에게 권력이 넘어갔다. 한때 왕이 지니고있던 군대 지휘권은 이제 민회(켄투리아 회)에서 1년 임기로 선출된 2명의 집정관에게 돌아갔다. 2명의 집정관은 공동으로 군 통수권‘ 또는 최고 명령권‘을 의미하는 임페리움을 가지고 있었고, 1인의 집정관에 의한 권력 남용을 방지할 목적으로 집정관 각자는 상대방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각각의 집정관은 어디를 가든지 항상 처벌권을 상징하는 파스케스를 든 12명의 호위병을 동반했다.
- P241

집정관의 강력한 권한

로마의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로마 공화정은 왕정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집정관은 2명이고 선출직이며 임기가 있다는 점에서 왕과 달랐지만, 그들에게 보장된 권한은 왕의 권한만큼 강력했기 때문이다. 집정관들은 군 통수권자로서 전쟁 준비와 작전 수행에서 절대적인 권한을 가졌으며, 군 지휘관을 임명하고 징병 명부를 작성하고,
시민을 징병했다. 또한 집정관에게는 전쟁에서 명령에 불복종한 자를 처벌할 수있는 권한이 있었다. 그들은 민회를 소집하고 정책이나 법률에 관한 안건을 제안했으며, 재판관의 역할을 수행했고, 민회의 결정 사항이나 재판 결과를 집행했다.
집정관들은 내부적으로 국정을 책임진 최고 지배자로서 로마 국가를 대표했다.
이론적으로만 볼 때 집정관들은 민회나 원로원의 견제를 받지 않고 1년의 임기 동안 능률적으로 국정을 이끌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 P243

원로원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원로원은 재정 통제권을 지니고 있오서 전쟁이나 공공사업 등에 대한 국고의 지출을 결정했다. 이것은 원로원이 행정에 대해 사실상의 통제권을 장악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원로원이 가진  권한은 궁극적으로
정무관들이 민회에 제출하는 모든 법안에 대에 원로원이 공식적으로 충고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공화정 시대 내내 이 권한을 상실하지않았다. 따라서 로마의 진정한 통치자는 원로원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집정관을 비롯한 여타정무관들은 원로원의 조언을 집행하기 위한 조직에 불과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집정관의 임기가
1년밖에 되지 않은 반면 원로원 의원은 종신직이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모든 사람이 원로원 의원의 타이틀을 열망하고 있었으므로 집정관까지도 자신의 운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원로원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원로원은 비록 법적으로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여러 제도와 장치를 이용해 모든 일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즉 원로원의 권력은 법에 기초하고 있었다기보다는 오히려 특권적인 지위로부터 유래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집정관은 개인적으로 원로원에 반대할 수 없었으며, 그것은 그 자신에게 유리하지도 않았다. 요컨대 집정관이 원로원의 심복과 같은 기능을 수행했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 P246

공화정의 역사는 신분 투쟁의 역사

기원전 509년 로마 귀족들이 에트루리아 왕들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수립했다. 이미 왕정기에도 있던 원로원은 유지되었다. 왕을 대체하기 위해 원로원은 매년 집정관 2명을 선출했다. 원래는 귀족 출신만이 집정관에 오를 수 있었다. 공화정 수립 이후 귀족과 평민 사이에 전개된 신분 투쟁의 결과 평민들에게도 집정관이 되는 길이 열렸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평민들이 집정관이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집정관은 전쟁과 법률에서 왕이 가졌던 권력을 소유했다. 임페리움으로 불린 이러한 최고 권력은 직무에 따라 점차 다른 정무관들에게 분산되었지만, 공화정말까지 행정적 권한을 보유했다.
로마 사회는 귀족과 평민의 두 계급으로 나뉘었다. 귀족은 관직을 가질 수 있었고, 원로원 의원, 사제, 집정관 등이 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평민은 군대에 복무할 수 있지만 복무 대가로 급료가 지급되지 않았으므로 언제든지 채무자로 전락할 수 있는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평민들은 전투 중간에 귀족들을 위해 계약 노동자로 일해서 채무를 변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채무를 변제하지 못한 평민들은 땅과 자유를 잃었다. - P248


평민들의 권리를 지켜 줄 호민관의 탄생

신분 투쟁 초기에 호민관직은 재산과 야심있는 평민들이 보유하게 되었다. 호민관은 평민들 만의 민회인 트리부스 평민회에서 1년 임기로 선출되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정무관이 아니고집정관이 가지고 있던 임페리움도 없었다. 하지만 집정관조차도 갖지 못한 신체 불가침이라는특별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호민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평민의 생명과재산, 이익 그리고 권리를 수호하는 것이었으므로 호민관은 민회에서 통과된 법.평민
원로원의 칙령, 정무관의 행정 등이 평민의 이익에 배치된다고 생각하면 거부할수 있는 권한을 지녔다. 이 밖에도 호민관에게는 법안에 대한 발의권이 부여되었으며, 필요에 따라 김정관과 여타 정무관들에 대한 체포권이 주어졌다. 관습적으로 인정된 호민관의 거부권은 나중에 원로원이 야심만만한 집정관들에게 대처하는 적절한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평민들은 호민관을 통해 법안을 제출함으로써 자신들의 이익을 제도권 내에서 주장할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호민관은 단순히 평민의 선두에 서서 귀족과 대결하는 것만이 아니라 귀족과 평민 사이에 다리를 놓는 중개 역할도 맡았다. 만약 평민들이 호민관을 내세워 원로원과 사사건건 대립했다면 신분 투쟁의 격화로 로마 공화정이 무너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호민관을 지낸 사람은 자동적으로 원로원 의석을 부여해서 평민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극단적 주장을 하는 것은 막았다.
- P255

12 표법, 드디어 법률이 문자로 기록되다.

성산 사건이 일어난 지 40여 년이 흐른 기원전 451년 입으로만 전해지던 기본적인 법률들을 문자로 기록해 포룸(광장)의 나무 서판(나중에는 동판으로 바뀜)에 공포하는 권한이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를 위원장으로 한 법률 제정 10인 위원회에 주어졌다. 이곳에서 만든 안이 켄투리아 회를 통과해 로마의 국법이 되었다. 이법을 영구히 보존하고 모든 사람 앞에 공포한다는 뜻으로 12개의 표에 새겨 광장에 세웠기 때문에 12표법‘이라고 한다.
12표법이 공포되기 전 법률은 법적·종교적 전승의 문제였으며, 이러한 전승은 귀족들에 의해 공포되었다.
- P257

로마는 어떻게 이탈리아를 정복했는가

공화정 초기 로마는 모든 이웃과 분쟁을 겪었다. 로마가 새로운 정치적•사회적 질서를 모색하는 사이 에트루리아 인, 갈리아 인.
그리고 여타 이웃 부족들이 로마 영토를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수차례 넘겼다. 종종 패배 또는 내부 붕괴 직전에 결연한 의지로 사력을 다해 내부와 외부의 위협을 모두 극복했다. 이렇게 로마는 중부 이탈리아의 주요 세력으로 자리 잡았을 뿐 아니라 대제국을 위한 기초를 닦았다. 위기를 넘긴 로마는 본격적으로 이탈리아 반도 정복에 나선다. 로마의 적극적인 공세는 로마보다 앞서 남부 이탈리아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그리스, 카르타고와 충돌하는 원인이 되었다.
- P566

로마 발전의 발판이 된 라틴 통맹

로마는 당정 시대부터 이미 이웃 부족들과 동맹 관계를 맺고 있었다. 로마의 주도권이 강했다고는 하지만 라틴  동맹에 속해 있던 여러 부족 사이의 역학 관계는 것의 대등했다. 기원전 509년에 로마가 왕에서 공화정으로 체제를 바꾸자 동맹국들이 대거 로마와 결별을 선언했다. 동맹국들은 로마가 아닌 로마를 다스리는 왕과 동맹을 맺었다고 생각했다. 로마가 왕정을 무너뜨리자 이를 동맹 관계의 폐지로  생각한 것이다. 이는 당시 라틴 동맹의 결속력이 얼마나 허약해는 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에트루리아 인들의 패배로 얻은 로마의 평화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로마는 강력한 도시가 되었고 그런 상태가 지속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라틴 부족들은 새로운 지배 질서 아래에서 로마에 주도권을 넘기출 마음이 전혀 없다. 결국 로마와 나머지 라틴 부족들은 전쟁을 돌입했다. 이미 나머지 라틴 부족들을 능가하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로마는 이들을 제압하고 기원전 493년에 카시우스 조약을 맺었다. 위기를 맞을 때 서로 도와준다는 내용의 조약이었다. 이 조약으로 로마 공화정 수립으로 인해 해체된 라틴 동맹이 재건되었다. 로마와 라틴동맹은 공동방어에 동등하게 기여했고, 일부 시민권을 공유했으며, 정복으로 얻은 전리품을 절반은 로마에, 나머지는 다른 동맹국에 동등하게 분배하였다.
라틴 동맹은 공식적으로는 동등자 사이의 평등조약이었다. 하지만 동맹군의 소집과 총지휘는 로마가 맡기로 하는 등 사길상 아테네를 맹주로 하던 그리스의 델로스 동맹처럼 로마을 맹주로 한 동맹이었다. 로마는 라틴 동맹을 발판으로 삼아 에트루리아 인,사비니 인, 그리고 볼스키인들을 정복하고 세력을 확대해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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