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유대주의는 히틀러 덕분에 영원히는 아니겠지만 한동안 불신을 사게 되었다. 이는 유대인이 갑자기아주 유명해져서가 아니라, 벤구리온 자신의 말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 시대에는 가스실과 비누공장이 반유대주의의 귀결점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교훈은 외지에 사는 유대인에게도 마찬가지로 불필요한 과잉의 것이다. 그들은 이 세계의 적대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자기 민족의 3분의 1이 파멸된 엄청난 재앙을 겪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어디에나 반유대주의적 요소가 영원히 존재한다는 그들의 확신이 드레퓌스 사건 이래 시온주의 운동 진영의 가장 유력한 이데올로기적 요소가 된 것만은 아니었다. 이는 또한 달리 설명되지않는, 초기 단계의 나치 정권에 대한 독일 유대인 공동체의 협상적 태도를 설명해 주는 원인이기도 했다(이런 협상은 말할 필요도 없이 유대인협의회가 뒤에 취한 협상적 태도와 크게 구별된다. 아직 어떤 도덕적문제도 개입되지 않았고, 단지 그 정치적 결단의 현실성‘ 만이 문제가되었다. ‘추상적‘ 비난보다는 구체적 도움이 더 낫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마키아벨리적 과장이 없는 현실 정치였으며, 그 위험성이 드러나게 된 것은 수년 뒤 전쟁이 발발한 후, 유대인 단체들과 나치 관료사이의 일상적 계약 때문에 유대인 지도층 인사들이 유대인 탈출을 돕는 일과 나치스가 유대인의 이동 격리를 돕는 것과의 차이점을 제대로구별하지 못하게 된 때였다). 친구와 적을 구별하지 못하도록 유대인을 무능하게 만들어 버린 것은 바로 이런 확신이었다. - P59

그런데 그와 같은 단 한 경우가 법정의 주목을 끌었다. 이는 아테나워의 가장 가까운 고문들 중 한 사람인 한스 글로브케 박사(Dr.
Hans Globke)이다. 그는 25년 그 이전에 뉘른베르크 법에 대한 악명높은 주석의 공저자였고, 그로부터 얼마 지난 뒤 모든 독일계 유대인에게 이스라엘 이나 ‘사라‘를 중간 이름으로 갖게 해야 한다는 놀랄 만한아이디어를 낸 사람이었다. 그런데 글로브케라는 이름(오직 이 이름만)이 피고에 의해 지방법원 기록에 삽입되었는데, 이는 아마도 아데나워 정부를 설득해서 범죄인 소송 절차를 시작하게 하려는 희망에서였을 것이다. 여하튼 전 내무부 담당관이자 아데나워 내각의 현 국무장관은 나치스로부터 당한 유대인의 고통의 역사에서 예루살렘의 전 회교법 고문보다 더 유명해질 권리가 있었다.
왜냐하면 이 기소사건과 관련된 한 재판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 역사였기 때문이다. 이 역사적 재판의 심판대에 서 있는 것은 한 개인이 아니고 나치 정부도 아니며 바로 역사 전체에 나타나는 반유대주의이다."
- P69

모두 오랫동안 지위를 유지해온 저명한 시온주의자인 유대인 지도층인사들과 그의 첫 개인적인 접촉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가 ‘유대인문제‘에 그렇게 매혹된 이유는 그 자신의 ‘이상주의‘ 때문이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가 언제나 멸시한 동화론자들이나 그를 지루하게 만든 정통파 유대인과는 달리 이 유대인은 그와 같은 ‘이상주의자‘ 였다. 아이히만의 생각에 따르면 ‘이상주의자‘란 단지 어떤 ‘이상‘을 신봉하거나,
또는 도둑질하거나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이러한 조건은 필수불가결하기도 하다. ‘이상주의자‘ 란 자신의 이상을 삶을 통해 실천한 사람이었고(따라서 사업가 같은 사람은 아니었음),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 특히 어떤 사람이라도 희생시킬 각오가 된 사람이었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아버지마저도 죽음으로 보냈을 것이라고 경찰심문에서 말했을 때, 그는 자신이 어느 정도로 강력한 명령을 받고 있었는지만을 말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자신이 얼마나 이상주의자‘로서 살아왔는가를 보여주려 한 것이다.  - P97

아이히만이 만난 가장 위대한 ‘이상주의자‘는 그가 헝가리에서 유대인 추방을 협상한 루돌프 카스트너(Rudolf Kasiner) 박사였다. 아이히만이 수천명의 유대인을 불법적으로 팔레스타인으로 보내는 대신(기차는 사실상  독일 경찰에 의해 보호되었음), 여러 수용소(그곳에서 몇십만이 아우슈비츠로 보내졌음)에서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합의를 통해 구출된 저명한 유대인과 시온주의 청년 조직원 수천 명은 아이히만의 말에 의하면 ‘최고의 생물학적 재료‘ 였다. 아이히만의 이해에 따르면 카스트너 박사는 자신의 ‘이상‘을 위해 동료 유대인을 희생시켰는데 이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아이히만을 재판한 세 판사 중한 명인 베냐민 할레비(Benjamin Halevi) 판사는 이스라엘에서 카스트너 재판을 담당했다. 그때 카스트너는 아이히만과 다른 나치스 고위관료들에게 협조한 것에 대해 자신을 변호해야 했다. 할레비의 의견에 따르면 카스트너는 "영혼을 악마에게 팔았다." 그런데 이제 악마 자신이 피고석에서 심판받고 있는데 그도 ‘이상주위자‘임이 드러났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영혼을 판 자고 ‘이상주의자‘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 P98

자신이 게토 체계를 ‘발명‘ 했다든가, 모든 유럽의 유대인을 마다가스카르로 보낼 생각을 해낸 척한 것은 완전히 허풍이었다. 아이히만이 자기가 ‘아버지‘ 라고 주장한 테레지엔슈타트게토는 동쪽의 점령지역에 게토 체계가 도입된 지 몇 년이나 지나서야 설치되었다. 그리고 몇몇 특권 계층을 위해서 특별 게토를 설치한 것은 게토 체계와 마찬가지로 하이드리히의 ‘생각‘ 이었다. 마다가스카르 계획은 독일 외무부에서 탄생한 것 같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한 아이히만의 기여는 그가 좋아한 뢰벤헤르츠 박사에게 대부분 의존한 것이었다.
400만여 명의 유대인을 어떻게 전쟁 후 유럽에서 수송할 것인지에 대한 몇 가지 기본적인 생각들을 하기 위해 그는 뢰벤헤르츠 박사를 소환했다. 마다가스카르 계획은 일급비밀이었으므로 뢰벤헤르츠 박사는 팔레스타인으로 수송할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 P103

"관청용어 (Amtssprache)만이 나의 언어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관청용어가 그의 언어가 된 것은 상투어가 아니고서는 단 한 구절도 말할 능력이 정말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정신과 의사들이 그렇게 ‘정상적‘이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한 것이 이 상투어들이었을까? 성직자가 그에게 맡겨진 영혼을 위해 희망하는 ‘긍정적인 생각‘ 들이 그것일까? 예루살렘에서 아이히만이 자신의 정신의 이러한 긍정적인 면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었던 기회는, 그의정신적 심리적 건강을 담당한 젊은 간수가 그에게 쉬면서 읽으라고
‘로리타‘를 빌려주었을 때였다. 이틀 뒤 아이히만은 책을 돌려주었는데 이때 그는 화가 나 있음이 분명했다. "아주 불건전한 책" (Das ist aberein sehr unerfreuliches Buch))이라고 그는 그 간수에게 말했다). 분명 재판관들이 피고에게 그가 말한 모든 것이 공허한 말뿐이라고 드디어 말한 것은 옳았다.  - P105

다만 그들은 이 공허함이 가장된 것이며, 피고가 공허하지 않은 끔찍한 다른 생각들을 감추려고 그런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이 반박될 수 있는 것은, 아이히만은 기억력이 상당히 나쁨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중요한 일이나 사건에 대해 동일한 선전문구와 자기가 만든 상투어를 단어 하나 틀리지 않고 일관성 있게 반복한 점 때문이다(자기가 스스로 만든 문장을 하나 말하더라도 그는 이말이 상투어가 될 때까지 계속 반복했다). 아르헨티나나 예루살렘에서 회고록을 쓸 때나 검찰에게 또는 법정에서 말할 때 그의 말은 언제나 동일했고, 똑같은 단어로 표현되었다.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speak)은 그의 생각하는데 무능력함(inability to think),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와는 어떠한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the words)과 다른 사람들의 현존(the presence of others)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reality as such)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대인 경찰관의 심문을 받는 현실을 8개월 동안 마주하면서 아이히만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왜 친위대에서 상위 직책을 얻지 못했는지를 장황하게 반복적으로 설명했다. 그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할 일을 다했고, "전선으로 가자. 그러면 나는 더 빨리 연대 지휘관이 되겠지, 라고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고할 정도로 현역 군무로 전근되도록 신청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법정에서는 이와 반대로 그는 자신의 살인적 임무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근을 요청한 척했다. 여기에 대해 그는 별로 우기지는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레스 대위에게 한 발언에 대해서는 대조심문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동부의 기동 살인부대였던 돌격대에 지명되기를 바란다고 레스 대위에게 요청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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