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랑케는 로마의 역사적 역할에 대해 "모든 고대사는 여러 개울이 호수로 흘러 가듯이 로마의 역사로 흘러들어 가고, 모든 근대사는 다시 로마로부터 흘러나왔다"라고 표현했다. 로마 인들은 오리엔트 문화와 그리스 문화.
거기에 로마 인들 자신의 문화가 융합된 세계적 문화를 만들어 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 인들처럼 한낱 도시 국가에서 출발했음에도 그리스 인들이 폴리스 상간의 대립과 분쟁을 극복하지 못한 것과는 다르게 이탈리아를 통일하고 마침내는 지중해 세계를 통일하여 앞으로 다가올 유럽 세계를 준비한 것이다. 따라서 로마역사를 지중해 세계 통일의 역사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이후 로마 인들은 선진 오리엔트 문명과 그리스 문명을 통합해서 중세를 거쳐 근대에 전해 주어 문명의 디딤돌 역할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저명한 로마 역사연구자 중 한 사람인 프랑스의 클로드 니콜레는 "우리는 모두 로마 시민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말은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에 둘러싸인 지중해를 자신들의 호수로 만들어 통치한 로마 인들의 위대한 성취를 말해 주기도 한다. 로마 인들이 정말 위대한 점은 지중해를 지배하지 않고 잘 관리함으로써 지중해를문명의 교류와 전파의 공간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 P12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사 이야기》를 살펴보려 한다. 로마사와 관련해 우리 독자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이기때문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사를 성공 만능주의, 영웅주의, 엘리트주의 관점이라는 굴절된 시야로 바라본다. 《로마인 이야기》가 인기를 누린 이유는 신자유주의 물결이 휩쓸기 시작한 1990년대 이래 우리 사회의 풍토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사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리더십을 중시했고, 그러다 보니 민중은 언제나 영웅을 추종하는 존재로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난다.
어찌 보면 이것은 독재를 변호하고 민주주의를 유보하는 것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시오노 나나미가 바라보는 로마 제국의 팽창은 침략과 영토에 대한 욕구가 아닌 로마의 안전을 확립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일본이 선제적으로 자국의 안전을 위해 조선을 침탈했다는 위험천만한 논리로 발전할 수 있다. 자국의 안전을 위해 침탈했다는 주장은 제국주의적 팽창을 은폐하고 합리화하기 위한 기만적인 표현이다. 현재 진행 중인 국사 교과서 국정화와 맞물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사에 대한 이해는 많은 우려를 자아낸다. 로마사에 대한 시오노 나나미의 왜곡된 이미지에서, 한국 현대사를 자랑스러운 영광의 역사로 재조명하자면서 오랜 산고 끝에 성취한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고 합리화하려는 우익 진영의 움직임이 연상되는 것은 필자만의 기우일까?
- P13

■ 아주 짧게 정리한 로마 

1000년의 역사로마의 역사를 간략히 정리해 보자. 기원전 753년 로물루스가 건국한 로마는 중부 이탈리아 라티움 지방 팔라티누스의 언덕 작은 산골 마을에서 시작해 500년의시간을 거치면서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지중해 세계를 정복하여 유럽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를 지배하는 대제국으로 성장했다.  - P13

 작은 도시 국가로 출발한 로마는 한동안 에트루리아 출신 왕들의 지배를 받았고, 기원전 509년 에트루리아 왕의 지배를 무너뜨리고 권력의 균형과 견제를 내세운 공화정을 수립한다. 자유로운 선거와 공정한 경쟁을 제도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로마 공화정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공화정 수립 후 기원전 3세기까지 이탈리아 반도의 여러 도시 국가를 차례로 정복한 로마는 기원전 3세기에 접어들면서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지배하는 강력한국가로 발전했다. 그리고 기원전 3세기와 기원전 2세기에 걸친 카르타고와의 세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서는 지중해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지중해는 로마의 지배권이 관철되고 로마 문명이 외부로 나가는 통로로 이용되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외래 문명이 로마로 들어오는  통로이기도 했다. 하지만 로마의 정복 사업으로 수혜를 본 사람들은 소수의 귀족들과 부유한 평민들뿐이었다. 많은 로마 시민이 토지를 버리고 제국의 수도인 로마로 이주해 빈민 집단을 형성했다. 상층 계급은 전에는 감히 꿈꾸지도 못하던 엄청난 부를 향유했고 수많은 노예를 거느리게 되었다.
명예와 부당 이익을 얻기 위해 귀족들 사이에 벌어진 격렬한 정치 투쟁으로 기원전 1세기에 내란이 초래되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카이사르가 등장해 강력한 독재 권력을 확립하며 내란이 종식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당하면서 로마는 다시 한 번 내란의 격랑에 휩쓸리게 된다. 카이사르의 증손자이자 양자이던 옥타비아누스가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공화정이 종식되고 로마는 제정으로 넘어가 정치적으로안정기에 접어든다. 그 후 200년 동안 지속되던 로마 제국 전성기는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 (기원전 27년 ~ 기원후 180년)로 불렸는데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기번은 이 시기를 인류 역사상 가장 행복하고 번영한 시기라고 극찬했다.  - P14


하지만 로마의 군인들이 자신의 사령관을 황제에 옹립하면서 기원후 235년부터 기원후 284년까지 불과 50여 년의 짧은 기간에 26명의 황제가 교체되는 난맥상을 보여 주었다. 로마는 그야말로 군인 황제들의 천하가 되었다. 군인 황제들이 빈번하게 교체되던 시기에 로마 제국은 동쪽으로는 페르시아 인들에게 그리고 북쪽으로는 게르만 족에게 지속적인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결국 기원전 509년 공화정 수립으로 시작된 로마 제국의 역사는 이민족들의 공격을 이겨 내지 못하고 기원후 476년에 멸망함으로써 대략 1000년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때 멸망한 로마 제국은 서로마 제국이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오늘날의 터키, 이스탄불)로 수도를 옮긴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은 1000년가량 더 살아남아 서양 중세역사의 한축을 담당했다.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 
전설에 따르면 카르타고는 기원전 814년 현재의 레바논 지역에 살던 페니키아 인들이 현재 튀니지 수도인튀니스 지역에 정착하면서 설립되었다. 카르타고는 지중해 남서쪽 돌출된 곳에 자리 잡은 천혜의 항구로 서부 지중해의 무역을 장악하기에 이상적인 위치였다. 카르타고 세력은 북아프리카를 넘어 스페인, 사르디니아, 그리고 시칠리아까지 뻗어 나갔다.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카르타고를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라고 표현했다.
- P26

로마법의 중요성 : 
중세 이래 서양의 거의 모든 국가는 로마법의 권위를 인정하고 로마법에 근거해 자국의 법률을 정비했다. 현재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가 로마법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게다가 로마는 기원후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공인했고, 기원후 392년에는 국교로 선포했다. 로마 제국은 기독교를 자국의 종교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종교로 키웠다.
- P33

로마의 정신을 지배한 그리스 : 
기원전 2세기 로마가 그리스를 점령하면서 그리스 문명이 로마로 유입되었다. 그리스 문학과 예술로 인해 로마 인의 정신세계는 깊어지고 생활에는 세련미가 더해졌다. "정복된 그리스가 야만적인 정복자를 정복했다"는 호라티우스의 말처럼 정복가 로마인들이 오히려 그리스 문명의 포로가 된 것이다. 그리스 문명과 로마 문명이 뒤섞이며 서양 고전 문명이 탄생했다.
- P36

미케네 문명 : 
기원전 2000년경 발칸 반도 북쪽에 있던 인도-유럽 어족에 속하는 이주민들 일부가 후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1600년 ~기원전 1200년) 무렵 그리스로 남하하여 그리스 중부 및 남부 지역과 크레타 섬을 점령하고 미케네 문명을 일으켰다. 미케네 문명에서 사용하던 ‘선문자 B‘가 1952년에 해독되면서 아카이아 인들이 그리스어를 최초로 사용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 P37

크레타 문명 :
 기원전 2000년경에 발칸 반도 북쪽에 도달해 있던 인도 유럽 어족에 속하는 이주민 집단 일부가 도래한 뒤에 일어난 크레타 문명(미노스 문명이라고도 한다)은 크레타 섬에서 출발해 에게 해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크레타 문명은 기원전 1750년부터약 50년 동안 전성기를 맞이하지만 기원전 1450년경 크레타 섬에 침입한 미케네 인에게 멸망당한다. 그리스 본토에서 일어난 미케네문명은 기원전 1600년경에 전성기를 맞았다. 기원 전 1250년경에는 그리스 본토와 경쟁하던 트로이가 멸망했고, 곧이어 1200년경에는 미케네 문명도 종식되었다. - P73

에트루리아 인 : 
에트루리아 인의 정확한 기원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에트루리아 인은 로마의 북서쪽, 지금의 토스카나에 적어도 기원전 900년경에는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혹은 기원전 1200년경에 정착했을 수도 있다. 에트루리아 인은 인도 유럽 어족이 아니었고 오늘날 유사한 언어가 남아 있지 않아 지금까지 발견된 수천 개의 비문은 해독이 불가능하다. 에트루리아 인이 남긴 화려한 무덤 벽화에 향연, 춤, 운동 경기가 묘사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에트루리아 장례의식의 일부이던 검투 경기가 포함되어 있다. 후일 로마에서 인기를 끈 검투사 경기는 에투루리아의 장례식 경기에서 발전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스 문화는 에투루리아 인을 통해 로마에 들어왔는데 알파벳 문자가 그 중 하나다. 초기 로마에 에투루리아가 미친 영향은 막대했다. 로마는 에트루리아 도시들의 전형인 격자형식을 모방해 도시를 설계했다. 에트루리아
의 건축 설계 또한 로마에 흔적을 남겼다. 수도교, 교량, 상하수도 시설, 그리고 아치와 볼트(아치형 둥근 천장)는 모두 에트루리아의 유산으로 훗날 로마 건축의 특징이 되었다. - P145

에트루리아의 멸망 : 
12개 도시의 연맹체를 이루고 있던 에트루리아 인들의 힘은 기원전 6세기 절정에 이르렀다. 각 도시 국가는 중앙정부 없이 각각 귀족의 지배를 받았고 자치와 독립을 유지했다. 그 때문에 번번이 갈리아 인, 그리스 인, 삼니움 인에게 팽창을 저지당했다. 로마는 테베레 강 북쪽 25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에트루리아 인들의 도시 베이이와의 오랜 전쟁 (기원전 406년 ~ 기원전 396년)에서 승리했다. 결국 에트루리아 인들은 기원 전 350년경 로마에게 분할되고 정복되었다. - P147

강탈 사건의 의미 : 
로물루스가 사비니 여인들을 강탈해서 로마 인들과 혼인하게 하고 그 결과 두 민족 간에 융합이 이루어진 것은 이민족을 통합하고 시민권을 개방하는 정책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또 사비니 왕 타티우스를 로마의 공동 왕으로 추대했는데, 전승에 따르면 로마가 도시를 확대하고 여러 종교 의식을 확립하게 된 데에는 타티우스의 역할이 컸다. 로마는 사비니 인과의 융합으로 다민족국가로서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고 인구가 어느 정도 늘어나면서 팔라티누스 언덕의 조그만 부락에서 강력하고 거대한 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결국 ‘사비니 여인 강탈 사건‘을 계기로 로마 공동체의 미래가 안정을 찾았고, 이웃 민족들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다. - P161

누마의 통합 정책 : 
누마 왕(누마 폼필리우스:로물루스이후 선출된 왕으로 사비니 왕의 사위)은 로마가 물과 기름처럼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는 현실을 개탄하고 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질서와 풍습을 세우려고 했다. 그는 로마 인들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여러 개의 작은 그룹으로 나눴다. 도시 거주민들을 목수 조합, 철공 조합, 염색공 조합, 도공 조합 등 직업에 따라 만들어진 조합에 소속시켰다. 이런 직능 조합에 대한 귀속감이 강해지면서 잡다하게 혼합돼 있던 각 민족의 다양성이 약해지고 로마 사회의 통합성이 강화되었다. 이처럼 누마는 다양한 출신 종족과 문화때문에 통합성이 없던 로마의 풍속을 순화하고 제도를 확립했다. - P177

새로운 달력 : 
누마 왕은 로마 달력을 개정했다. 누마 이후에 카이사르와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에 의해 두 번 더 달력이 개정되었으나 가장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 낸 사람은 누마 왕이었다. 누마의 치세 이전에 로마의 달력은 10개월에 불과했다. 이러한 이유로 1년의 마지막 넉 달이 잘못된 숫자로 이름 지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일곱 번째 달이 9월, 여덟 번째 달이 10월, 아홉 번째 달이 11월, 그리고 열 한번째 달이 12월이었다. 1년은 304일이었고 아주 이상하게도 겨울은 달이 없는 기간으로 여겼다. 기원전 715년 이런 로마 달력에 누마 왕이 1월과 2월의 2개의 달을 덧붙이고 1년을 12개의 음력으로 나누어 개정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기원전 45년에 카이사르가 누마 왕의 태음력 달력을 개정해 새롭게 태양력을 시행했다. - P179

둘루스 호스틸리우스 : 
세 번째 왕 툴루스 호스탈리우스는 전사였다. 그는 누마가 통치하는 동안 로마가 약해졌다고 여기고 늘 전쟁을 하려고 했다. 그의 치세에 로마 인들은 경쟁 도시이자 선조들의 도시이던 알바통가를 철저히 파괴했다. 신전들만 파괴를 면했다. 둘루스는 알바통가의 주민 전체를 로마로 옮기게 했고, 로마 시 인구는 두 배로 늘어났다. 패전국 주민들에 대한 일관된 방침에 따라 알바롱가 주민들에게 로마 인들과 동등한 시민권을 부여했으며, 알바롱가의 부유한 가문들은 로마의 귀족 계급으로 편입시켰다. 이 새로운 알바롱가 가문들이 원로원에 포함되면서 원로원 의원의 숫자는 증가했다.
(알바롱가의 율리우스 가문에서 카이사르가 태어난다) - P187

임부스 마르키우스 : 
누마 왕의 손자인 앙쿠스 마르키우스는 할아버지처럼 종교의 올바른 운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달리 평화를 사랑하지는 않았다. 로마가 정당하게 전쟁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종교 의례를 수립해 주변 라틴 민족들을 제압했다.
그는 로마의 영토 지배권을 북쪽으로는 한때 에트루리아 인이 지배한 지역까지, 서쪽으로는 오스티아 항구까지 확대했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어머니는 에트루리아 인, 아버지는 코린트에서 도망 온 부유한 사람이었다. 순수한 에트루리아계 혈통이 아니라서 차별을 받던 그는 부인 타나퀼과 함께 로마로 이주했다. 성공을 위해 열심히 일한 타르퀴니우스는
새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는데 그들 중에는 연로한 앙쿠스 왕도 있었다. 그는 왕의 최측근 조언자가 되었다.
앙쿠스가 죽자 앙쿠스의 두 아들을 사냥을 떠나게 한 뒤 로마 역사상 최초로 공개적인 선거 운동과 투표를 통해 왕으로 선출되었다.
- P200

상업왕의 시대 : 
기원전 6세기에 다섯 번째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를 시작으로 여섯 번째 왕 세르비우스 둘리우스 그리고 마지막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에 이르기까지, 에트루리아 출신의 마지막 세 왕의 치세로 인해 로마에서는 씨족과 원로원의 권한이
약화되고 왕권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변화가 일어났다. 로마는 에트루리아 인들의 영향을 받아 정치, 경제, 문화가 급속히 발달했고, 라티움 지역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도시 국가가 되었으며, 곳곳에 많은 공공건물과 광장이 들어섰다. 에트루리아 출신 왕들이 통치하던 시대는 ‘상업왕의 시대‘ 라고 불릴 만큼 로마에는 외국의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많이 모여들어 그들의 거주 구역이 따로 마련될 정도였다.
- P205

왕이 된 노예 :
 노예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타르퀴니우스  집안의 노예이던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는 이상한 방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선왕 타르퀴니우스가 죽어 가고 있는 중에 왕비 타나퀼은 사람들에게 남편이 무사하다고 말했다. 왕비는 세르비우스에게 왕의 역할을 맡아 달라고 말했으며, 사람들에게는 타르퀴니우스가 회복할 때까지 세르비우스가 왕의 역할을 대신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계략으로 세르비우스는 타르퀴니우스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기 전에 통치자로서 자신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세르비우스늠 선왕 타르퀴니우스에 이어 또다시 에트루리아 인 출신 으로 로마의 여섯 번째 왕이 되었다. - P225

세르비우스 성벽 : 
로마의 테르미니 역 앞 광장에는 길이 100미터에 달하는 돌무더기가 늘어서 있다. 이것이 바로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성벽의 일부분이다. 이 성벽은 세르비우스의 이름을 따서 ‘세르비우스 성벽‘으로 불리지만, 사실은 훨씬 더 후인 기원전 378년에 세르비우스가  세운 성벽 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총길이 약 11 킬로미터인 이 성벽은 로마의 일곱 언덕을 모두 둘러쌌다고 한다.
- P227

쿠리아 회 :
 왕정기 로마에는 무장 가능한 모든 성년 남자 시민의 총회로 쿠리아 회라는 민회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시민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출하거나 입법을 행하는 민주적인 민회와는 거리가 멀었고, 혈연의 유대를 통해서 귀족들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수동적인 기구였다. 이런 초보적인 민회는 공화정 초기에 이르러 정치적으로 힘을 잃는다.
- P228

켄투리아 회 : 
켄투리아라는 말은 숫자 100을 뜻하는 라틴어 켄툼에서 유래했다. 하지만 1개 켄투리아 인원이 정확히 100명이었던 것은 아니다. 켄투리아 회는 전 시민의 병역 의무를 전제로 재산과 무장 정도에 따라 193개 켄투리아(기병 18권투리마, 보병 170전투리아 비무장병 5켄투리아)로 조직되었다. 기병은 귀족 출신들로 조직했고, 보병은 평민 출신들을 재산에 따라 등급별로 조직했다.
- P229

왕정 시대 마지막 왕 :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왕은 ‘거만한 타르퀴니우스‘인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였다. 다섯 번째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아들이자 여섯 번째 왕 세르비우스의 사위이던 ‘ 거만한 타르퀴니우스‘는 세르비우스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독재자로 주로 정치를 실시했고, 왕에게 조언하면서 유일하게 왕권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던 원로원을 무시했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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