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5년 5월, 마키아벨리가 메디치가 출신의 교황 클레멘스 1세에게 피렌체사』를 바친다. 피렌체를 지배한 메디치가의 의뢰에 따라 지은 책이기 때문에, 메디치가 사람들을 허심탄회하게 평가할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메디치가의 군주적 지위와 성향을 분명히 드러내 보인다. 메디치가 사람들의 능력이 뛰어났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정치적 의미와 효과에 대해서는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메디치가의 군주화를 공화정에 해로운것으로 파악했다. 개인적 평가와 정치적 평가는 엄연히 다르다. 뛰어난 수장들 덕에 메디치가는 성공 가도를 달렸다. 개인이나 가문이라는 사적 차원에서는 좋다. 하지만 국가 차원에서는 군주정의 대두이자 공화정의 몰락으로 나타났다. 마키아벨리는 성장하는 편이 아니라 쇠락하는 편에 섰다.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메디치가를 더 혹독하게 비판하고 싶었을 것이다.
메디치가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그의 저작에서 어렵지 않게 볼수 있다. 『군주론』에서 군주는 모름지기 자신의 권력을 탐하기보다.
는 제도 개혁을 통해 강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메디치가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 P92

『로마사 논고』와 『피렌체사』에는 사적 이익을 위해 사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메디치가에 대한 비판이 적혀 있다. 공화정을 옹호하는 현실주의자 마키아벨리는 피렌체가 직면한 메디치가의 군주적 권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메디치가의 권력이 피렌체를 더 강한 나라로 만드는 데 쓰일 수 있도록 설득하는 방법으로 비판적 지지를 택했다. 바로 이것이 마키아벨리를 군주제의 옹호자로 보이게 했다. 그러나 그는 군주제를 옹호하지 않았다. 자유를 누려온 피렌체에는 공화정이 더어울린다는 생각을 분명히 드러냈다. 그는 군주제를 지지해서가 아니라 메디치 군주 가문이 이미 장악한 권력을 제대로 사용하기를바라서 『군주론을 썼다.
- P94

마키아벨리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 

■ 로렌초 데 메디치
1449년에 태어났다. ‘국부‘라는 호 칭을 받은 할아버지 코시모의 뒤를이어 ‘위대한 자‘로 불릴 만큼 메디치가를 전성기로 이끌었다. 메디치가를 대표하는 문화·예술 후원 활동으로 피렌체 르네상스를 꽃피운것이다.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를비롯해 수많은 예술가들이 로렌초의 후원을 받았다. 1478년에 일어난 파치가의 암살 시도에서 자신은
부상을 입는 데 그쳤지만 동생 줄리아노를 잃은 뒤 철저히 복수하며,
피렌체에 피바람을 일으켰다. 파치가의 편에서 음모에 가담한 사람들
로렌초 데 메디치의 시신이 시뇨리아궁에서 내걸리거나 아르노강에 던져졌으니, 메디치가에 반기를 들면 어떤 꼴을 당하는지 확실하게 보여준 셈이다. 파치가가 메디치가를 제거하려고 일으킨 사건이 결과적으로는 메디치가의
피렌체 지배를 강화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현실이 만들어내는 뜻밖의 결과를 어릴 때
보았기 때문에 마키아벨리가 현실주의자로 성장했을 수도 있다. 1492년에 죽은 로렌초의 무덤은 산로렌초성당에 있다.
- P97

■라모보나를라1452롤라

1452년에 페라라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의사이자 대학교수인 할아버지의 교육을 받았는데, 그를 의사로 키우려는 할아버지의 뜻과 달리 신학과 철학에 관심이 많았고,
결국 도미니코수도원에 들어갔다. 수도회의 발령에 따라 피렌체 산마르코수도원의 강사로 일하다 볼로냐로 갔다. 그런데 교회 개혁을 외친 그의 이미지를 이용하려는 메디치가에서 그를 다시 피렌체로 불러들였고 그는 얼마 있다 산마르코수도원장으로 뽑힌다. 그는 메디치가가 씨를 뿌린 세속적 축제를 종교 행사로 바꾸면서 피렌체 개혁에 나섰다. 샤를 8세의 침입으로 쫓겨난 메디치가의 자리를 차지하지만, 피렌체 내의 정적들과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집요한 공격을 받아 결국 집권하고 4년만인 1498년에 시뇨리아 광장에서 화형당한다. - P96

■ 체사레보르자

타락한 교황의 대명사인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이다. 그가 태어난 1475년에는 알렉산데르 6세가 추기경이었다. 아버지의 지대한 관심을 받으며 성장한 보르자는 10대 중반에 이미 교회의 주교가 되었고, 피사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메디치가와 교류했다. 위대한 자-로렌초 데 메디치의 아들이자 훗날 레오 10세가 되는 조반니가 보르자와 같은 나이로 피사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교황인 아버지와 프랑스 왕의 지원을 받으며 이탈리아 로마냐 지역의 군주가 되려고 했다. 마키아벨리가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으로 여길 만큼 리더십을 발휘해 강력한 군대를 갖췄지만, 1503년에 아버지가 죽고 적대적 관계에 있던 율리우스 2세가 교황이 되면서 감금당하는 신세가 된다. 스페인 땅으로 이감되었다가 탈출한 뒤 자신이 주교로 있던 나바라 지역의 군대를 통솔하지만, 1507년에 배신자의 성을 공격하다 적의 손에 끔찍한 죽음을 당한다. - P96

■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

1433년에 피렌체의 명문 귀족가에서 태어났으며 마키아벨리와 절친했다. 페라라와 파두아의 대학에서 법을 공부하고 정치가와 역사가로서 활약했을 뿐만 아니라 사업적 감각도 뛰어나 큰돈을 벌어들였다. 인민 중심의 공화정을 구상한 마키아벨리와 귀족 중실 공화정을 지향한 그가 오랫동안 교류하면서 서로 사상적으로 성숙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 가벼워 보일 만큼 자신을 드러낸 마키아벨리와 달리 귀차르디니는 차갑고 신중했다. 귀차르디니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얻은 세상 사는 지혜를 모아 후세를 위한 『회고록Ricoradi politici e civill을 만들었는데, 이 책이 지금까지 독자의 사랑을 받으며 그는 처세의달인으로 불린다. 1540년에 죽을 때까지 큰 시련 없이 영화를 누렸다.
- P97

독서와 토론으로 소통하는 인문주의자
마키아벨리는 소통을 즐긴 사람이다. 메디치가의 군주정이 강화되면서 공직에서 물러나 세상에 참여하고 소통할 길이 막혀버렸을때 그는 사람이 모이는 곳을 찾아다녔다. 그중에서도 당시 지식인과 엘리트 들의 정원 모임이 적극적으로 이용되었다. 오리첼라리정원은 젊은 귀족들과 소통하는 공간이었다. 지금 피렌체 중앙역 서남쪽에 자리한 오르티 오리첼라리는 마키아벨리에게 특히 중요한공간으로, 피렌체의 유력 가문인 루첼라이 집안이 소유한 정원이었다. 여기서 피렌체 명문가의 젊은이들과 마키아벨리가 독서와 토론을 함께 했다. 피렌체에서 새로 부활하는 인간에 대한 관심이 정원모임의 문학, 철학, 신학, 천문학 등에 관한 독서와 토론이라는 시민적 방식으로 드러난 것이다.
정원 모임에 참여한 젊은이들은 부와 영향력뿐 아니라 훌륭한자질을 갖춰 장차 피렌체 정치를 이끌 만한 잠재력이 있었다. 
......
당대 이탈리아와 피렌체의 정치를 비판한 《로마사 논고》를 썼다.......이 책은 그가 모임에서 특히 가까이 지낸 부온델몬티와 루첼라이에게 헌정된다. - P101

현재의 답을 과거에서 찾다.
마키아벨리의 대표작으로 『군주론』을 꼽는 사람들이 많지만 『로마사 논고』를 그보다 더 중요하게 보는 이도 있다. 그가 공직에서 물러난 뒤 인문주의자들과 함께한 정원 모임을 통해 『로마사 논고』를쓰기 시작했는데, 세상에 다시 나갈 기회가 되기를 기대하며 메디치가에 바친 『군주론』 집필 작업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메디치가는 끝내 그를 견제하며 일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는 죽을 때까지『로마사 논고』와 『피렌체사』 등 역사 집필에 몰두한다. 앞에 말한것처럼 피렌체 사람들은 그를 역사가로 기억하며 그가 역사를 연구하지 않았다면 『군주론』을 쓸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역사 저술이 중요하다.
마키아벨리는 공직에서 외교와 국방 업무를 맡아보며 피렌체와 이탈리아가 놓인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진단한문제는 바로 ‘무력함‘이었다. 강대국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전쟁까지 일으키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약소국은 강대국의 힘 앞에 내던져졌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알프스 북쪽의 강대국들이 이탈리아반도로 내려와 사사건건 간섭하던 시기였고, 이를 겪은 마키아벨리의 문제의식은 강한 나라를 만드는 데 있었다.
- P105

마키아벨리는 비르투스 로마나의 핵심을 양과 질의 측면에서 파악한다. 『로마사 논고』 2권 2장에서 자유와 인구 증가와 능력 계발의 관계를 언급한 대목을 한번 보자.

자유가 보장된 모든 도시와 지방 들은 세계의 어느 곳에서나 매우 커다란 번영을 누린다. 이는 무엇보다도 인구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결혼이 사람들에게 더 자유롭고 매력적인 것이 되고 각자 자신의 가산을 빼앗길 것이라는 두려움이 사라져 아이들을 기꺼이 낳아 키우기 때문이다. 또 사람들은 아이들이 노예가 아닌 자유인으로 태어난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통해 뛰어난 인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기 때문이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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