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과 사상 아카넷 한국연구재단총서 학술명저번역 504
리처드 D. 앨틱 지음, 이미애 옮김 / 아카넷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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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빅토리아 시대 : 1830년이나 1832년(제1차 선거법 개정안 통과) 혹은 1837년(빅토리아 여왕 즉위)에서 1901년(빅토리아 여왕 서거)까지를 가리킨다.


"1830년대의 영국에서 조지 4세(웨일스 공) 섭정 시대의 오만한 사치는 새로운 산업화로 초래된 불결하고 비참한 상황과 나란히 존재했다." "디즈레일리의 소설 <무녀>(1845)에 등장하는 한 인물은 여왕의 나라, "지금까지 존재해 온 모든 나라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국가"가 실제로는 "두 나라이고, 그 두 나라는 교섭과 공감이 전혀 없어서 다른 지역에 거주하거나 혹은 다른 혹성에 살고 있듯이 서로의 습관과 사고, 감정에 대해서 무지하다. 그 두 나라는 완전히 다른 교육을 받으며 양육되고 다른 음식을 먹고 서로 다른 관습에 지배되고 동일한 법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 ······ 그것은 바로 부자와 빈자이다."라고 묘사했다. 그 둘 사이의 간극은 해마다 넓어져갔고, 그 간극을 좁힐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당대의 큰 난제였다."(38-9) 여기서 등장한 것이 이성의 시대를 대변하는 합리주의였으며, 벤담주의자과 계몽적 합리주의자들은 새로운 권위와 막강한 실제적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두 개로 나뉜 나라 중에서 영광의 시대를 대변한 것은 1851년에 개최된 수정궁의 축전(제1차 세계박람회)이었다. 수정궁 축전은 "빅토리아 시대의 '절정기', 혹은 역사학자 W. L. 번이 표현했듯이 '평형의 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고했다. 그 시대는 15년이나 20년에 지나지 않는 기간이었지만 우리가 빅토리아 시대의 이미지를 마음에 떠올릴 때 가장 쉽게 연상하는 시절이고, 빅토리아 시대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적용될 수 있는 상투적인 문구를 적용하기에 가장 적절한 때였다." "굶주린 40년대를 아슬아슬하게 지나온 후에 경제는 큰 도약을 이루었다. 1850년대와 1860년대는 영국이 과거에 그 비슷한 풍요도 누려본 적이 없을 정도로 호황을 누린 시절이었다. 대영제국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지상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였고, 세계의 선두에 선 은행이자 선적회사였고 제품 공급자였으며, 해군을 통해 상선들의 항로에서 평화를 유지했다."(40-1)


과거 영국에서 "인쇄물과 정치활동의 관계는 비교적 소수에 불과한 권력자들을 상대로 저술된 논쟁적인 팸플릿과 서적을 통해서 주로 형성되어 왔었다. 변화의 이면에 존재하는 동력은 "공적 의견"─실은 자신들의 입장을 명확히 표명하는 정선된 집단의 의견에 불과한─의 지지를 받은 사적인 세력이었다. 그러나 토리당의 지주들과 교회의 저항을 극복하며 1832년에 통과된 선거법 개정법안은 상황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중산층의 대변인이었던 휘그당에게 승리를 가져다준 것은 신문과 잡지가 유통시키고 형성한, 전례 없이 엄청난 규모의 여론이었다."(119) "1832년과 다시 (곡물법 폐지에 성공한) 1846년에 기치를 올린 주장, 즉 "민중이 승리했다"는 주장은 공허한 수사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존 스튜어트 밀이 '집합의지'라고 부른 것의 유효성에 대한 믿음이 생겼고, 인쇄물이 그 의지를 표현하는 주요한 도구가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121)


빅토리아 시대의 출판물이 보여주는 "다방면에 걸친 다양한 목소리 덕분에, 서로 다른 계층들은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사회에서 서로의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출판물들이 논쟁의 도가니를 계속 끓어오르게 하는 한, 국민의 마음은 침체될 수 없었다. 또한 동시에 이 출판물들이 해를 끼치지 않고 계급적 증오심과 잠재적으로 위험한 의견 차이를 터뜨려놓을 수 있는 안전밸브가 되었기 때문에,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은 계급투쟁을 피할 수 있었다.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신문과 잡지가 설교단이나 대포보다 더 강력하다고 믿었고, 이치에 맞는 인쇄된 활자로 인해서 병든 사회의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영국은 손상되지 않은 온전한 형태로 번영을 누리면서 20세기에 들어섰고, 그 마음이 활력적이며 그 자유가 축소되지 않았으므로, 출판에 대한 믿음은 결코 그릇된 것이 아니었다."(124)


당대의 번영을 상징하는 철도와 도시는 "문명의 최고의 승리이자 동시에 가장 큰 재앙을 불러온 문명의 과오였다.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든지 간에 도시는 압도적이었다. 젊은 시절의 디킨스와 여러 해 후의 헨리 제임스 같은 사람들은 도시가 복잡하고 대조적인 광경들과 사람들로 활기를 돋워준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도시의 만화경 같은 움직임, 끊임없이 들떠 있는 분위기, 부수는 사람과 건설하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변화들, 곧 영국에서 오랫동안 익숙했던 변화와 달리 규칙적으로 순환하거나 반복되지 않고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변화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그 광경이 매혹을 느끼게 했다면, 그것은 또한 소름이 돋아나게도 했다. 도시의 밀도와 확장은 속박감, 무기력증, 폐소공포증과 같은 감정을 일으켰다. 도시의 꼴사나운 모양새가 그 장엄함을 무색하게 만들었고, 대다수 주민들의 비참한 생활은 소수의 사치를 조롱거리로 만들었다."(132)


프랑스 혁명 이후로 페인 같은 급진파들을 선두로 평민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무제한적인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자들이 큰 소리로 외쳤지만, 노동자들 대다수는 아직 정치권력이라는 유혹적인 환영에 무관심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소음이고, 이 소음은 그것을 들은 보수주의자들뿐 아니라 많은 중도파의 가슴에도 두려움을 일으켰다. 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자코뱅주의와 동일시되었고, 영국이 처음에는 혁명을 치르고 있는 프랑스와, 나중에는 프랑스 제국과 몇 십 년간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실로 역모의 의미를 함축하게 되었다. 해협 너머에서 일어난 격동적인 이변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슬로건을 퍼뜨리는 선동가들이 대중을 일깨우면 내란이 일어날 수 있고 심지어 무정부 상태가 야기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140-1)


"빅토리아 시대의 절정기는 1860년대 말의 어딘가에서 막을 내렸고, 1870년대 중반 이후로 이어지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빅토리아 시대 중반의 황금기를 후기와 구분하는 한 해를 꼽는다면, 의심할 바 없이 제2차 선거법 개정안으로 도시 노동자에게 선거권이 부여되어 유권자의 수가 두 배로 확대된 1867년일 것이다. 그 법안으로 말미암아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지난 수십 년간 서서히 쌓여왔지만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으려 했던 논쟁거리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이제 평민이 점유하게 된 권력이 영국의 정치구조 및 그보다 더욱 중요한 영국의 문화와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지난 몇 십 년간 중산층은 영국 사회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구축해왔다. 이제는 육체노동자의 차례였다. 민주주의의 도래를 몹시 한탄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어떻든 그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야 했다."(42)


"제1차 선거법 개정(1832)은 영국과 웨일스의 유권자 수를 43만 5000명에서 65만 2000명으로 늘렸고 대략 50퍼센트가 증가한 것이지만 이는 성인 남자 여섯 명 중에서 아직 다섯 명이 투표권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147) "1867년에 중산층의 나머지 절반은 도시 노동자들 대다수와 더불어 투표권을 얻었다. 그리하여 거의 100만 명에 달하는 남자들이 선거인 명부에 첨가되었다. 이에 따라 의석을 재배분하면서 대도시들은 1832년에 얻지 못했던 의원 선출권을 갖게 되었다. 1884년의 세 번째 마지막 선거 개정안으로 투표권은 200만 농업 노동자들에게 확대되었고 그리하여 시골 지역에서 지방정부의 선거가 가능해졌다." 투표함의 민주주의에 대한 두려움과 우려가 있었지만 "그 이후로 자유당 정부와 보수당 정부가 번갈아가며 정권을 잡은 것은 새로 투표권을 받은 노동자들이 옛 양당 체제 내에서 움직이는데 얼마간 만족하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156-7)


이처럼 영국에서 변화의 물결은 온전히 체제 내 개혁으로 이어졌다.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에드먼드 버크의 정치국가와 사회에 대한 유기체론적 사상을 물려받았다. 국가는 인위적인 수단과 혁신으로 방해되어서는 안 되는 내적 성장 원칙을 가진 유기체이며, 그와 마찬가지로 사회는 몇 백 년의 전통이 살아 있는 결정체로서 명확히 규정된 사회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거의 신비스러운 속성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세습된 특권에 기반을 둔 계층구조에 신성함이 있다는 믿음은 사회적 유동성이 증가하고 있는 시대에도 존속했고, 고루하고 보수적인 사람들만이 그런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빅토리아 시대 내내 하위 계층민들은 '윗사람들'에 대한 상당한 원한을 마음에 품고 있었으며 중대한 시점에서는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이 뿌리박힌 관습적인 존중심 덕분에 이런 감정들이 계급 전쟁과 같은 것으로 점화되는 일은 결코 없었다."(50-1)


"남자들의 세계가 유용성(utility)이라는 이념을 최고 가치로 삼고 그 이념에 지배되고 있었던 때에, 상류층 여성의 세계가 거의 모든 행위의 시금석으로 삼은 것은 무용성(uselessness)이었다."(94-5) 여자는 가정을 "헌신적으로 수호하는 여사제라는 빅토리아 시대의 관념으로 말미암아 여성의 농노 상태는 정당화되었다." 인습적으로 여자는 "연약한 존재여야 했고, 시골의 오솔길을 함께 걷거나 정찬 식탁으로 인도하는 신사의 팔에 늘 기대야 했다."(98) "19세기 마지막 몇 십 년까지 점잖은 집안 출신이지만 생활 형편이 어려운 여자들에게 개방된 거의 유일한 직업은 (샬럿과 에밀리 브론테처럼) 학교 교사이거나 혹은, 그보다 더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제인 에어처럼) 개인 가정의 가정교사가 되는 일이었다. 그 두 가지 중 어느 쪽이든 간에 일은 고되고 사회적 지위는 그녀가 받는 보수만큼이나 낮았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가정교사의 지위는 상급 하인들과 같은 수준이었다."(102)


물질주의적인 가치를 신봉하는 빅토리아인들은 현재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과거에 대한 뿌리 깊은 감정─'향수'라는 단어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분위기에서는 혁신적인 것, 진보적인 것, 합리적인 것을 높이 평가했지만, 그들은 낭만적 기질과의 친화력으로 말미암아 오래된 것, 보수적인 것, 감정적인 것에 대한 공감도 똑같이 키워나갔다."(165) 빅토리아인들이 "중세 시대를 되풀이하여 환기한 데에는 더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빅토리아 시대가 제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안정되고 더욱 공정한 사회를 중세 시대에서 찾으려는 욕구, 의혹이 없는 더욱 통합된 지적 분위기를 찾으려는 욕구였다. 변화의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자신들의 방향성이 물리적으로나 지적으로 더욱 혼란스러워질수록 확고한 질서를 갈망한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더 많아졌다. 중세 시대는 그 시대에 살던 사람들에게 그처럼 정신적으로 '굳은 땅'을 제공했다고 그들은 믿었다."(169-70)


"기계는 자연을 굴복시키고 이용한 그 시대의 두드러진 상징이었고, 그 비유를 자유로이 확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또한 사회적·정치적 혁신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새로 발명된 기계가 아무리 독창적이거나 인상적이더라도 그 자체가 선善은 아니었다. 중요한 점은 그것이 낳은 산물이었다." "이와 같은 근거에서, 더 사려 깊은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변화(과정)와 향상(진보)의 동일시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했다. 어떤 이들은 목적지와 무관하게 과정이 직선적으로 끝없이 전진한다는 가정을 거부했다. 대신에 그들은 다른 종류의 움직임들이 있다는 역사적 증거를 제시했는데, 그것들 가운데 어느 것도 진보의 개념을 지지하지 않았다."(177) 앨프레드 월리스의 이론과 찰스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이론(1858)으로 대표되는 지질학과 고생물학 연구의 진전 역시 "자신만만한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을 겸손하게 만들어줄 메시지를 전했다."(178)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이데올로기는 공리주의와 복음주의다. 이 중에서 공리주의는 "제러미 벤담 주위에 몰려든 교조적 열광자들이 주장한 철학의 순수한 형태를 가리킨다. 벤담주의자인 국회의원들과 그 추종자들의 신조를 가리키기 위해서 가장 빈번히 사용되는 또 다른 명칭은 '철학적 급진주의'이다." "이 명칭들은 빅토리아 시대의 중산층이 신봉한 사회-경제-정치 이데올로기와 일련의 가치들을 가리켰고, 또한 그 시대를 지배했으며 이 강령을 채택하여 행동과 목적, 습관과 편견을 정당화했던 기업가 정신을 가리킨다."(187)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개인의 행동이나 사회적 행동을 결정하는 단 하나의 요소는 '좋은' 결과가 '나쁜' 결과보다 우위라는 것이 입증되는가의 문제였다. 그것을 입증하는 것은 수학적 계산이었는데, 벤담의 용어로 말하자면 "행복을 가져오는 계산법" 혹은 "도덕적 산수"를 통해 얻어졌다."(191)


벤담주의는 뉴턴의 기계장치를 윤리학에 적용한 것이었다. "공리주의와 떼어낼 수 없었던 것은 고전주의 경제학─대체로 실용적인 목적에서 그 두 학파는 1830년경에 하나로 융합되었다─이었고, 혹은 공리주의의 또 다른 동의어로 종종 부정확하게 사용되었던 빅토리아 시대의 일반적인 명칭을 사용하자면 "정치경제학"이었다. 정치경제학자들, 즉 칼라일이 "음울한 과학"이라고 불렀던 학문을 연구한 사람들은 그 분야에도 물리학에서의 중력의 법칙이나 벤담주의 윤리학의 쾌락/고통의 원칙처럼 최고의 경제적 법칙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체계는 확고하고 논쟁의 여지가 없었으며, 공리주의와 마찬가지로 정치경제학은 철학적 권위뿐 아니라 수학적 권위로 공식 인가된 표시를 달고 있었다. 정치경제학이 의존한 철의 법칙 가운데 첫 번째는 토머스 맬서스 목사가 그의 <인구학 개론에 관한 소고>에서 상술한 것이었다."(194-5)


애덤 스미스와 달리, 벤담은 "현재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식하면서 인간이 자신의 선호만 고려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자기만의 이익을 위해서 동료들을 이용할 가능성이 있음을 의식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스미스는 인간이 자기 이익과 사회 이익이 동일하다는 인식을 자연스럽게 혹은 직관적으로 갖게 된다고 주장했다."(208) "사회적 조건의 향상을 기대할 수 있는 다른 법안들을 통과시키는 데 벤담주의의 목소리가 기여한 바가 거의 없었다면, 그것을 주장하도록 여론을 형성한 점에서는 벤담주의의 노력이 공헌하 바가 상당히 컸다. 대개의 획기적인 사회개혁 법령을 제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구제가 필요한 상황을 대규모로 조사하는 작업이 선행되었는데, 과학적 성향을 가진 일부 선도적인 벤담주의자들은 지칠 줄 모르고 전문적으로 사실을 수집했다. 그들이 속해 있었거나 간부로 봉사한 위원회에서 발간한 "청서"는 구제 입법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표명하고 널리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212)


# 벤담주의의 긍정적 유산

1. 입법부와 법률 개혁 주도(특히, 형법 개정)

2. 당파를 초월한 전문가가 주도하는 공공 행정체계 수립

3. 약자를 보호하고 부양하는 국가의 역할 강화


"복음주의는 프로테스탄트 경건파의 한 형태로서 교리와 예배의 형식보다는 인간들이 살아야 하는 방식에 더 관심을 두었고, 더욱이 삶 그 자체를 위해서보다는 내세를 준비하는 과정으로서 삶에 관심을 두었다." "복음주의자들은 온갖 도덕적 오점을 찾아내고 영혼의 모든 움직임을 기록한 "영원한 현미경"을 언제나 근심스러운 눈길로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복음주의에 공감하지 않은 칼라일은 그것을 "병적인 자기 성찰"이라고 불렀다."(250) "복음주의는 1790년대부터 1830년대까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많은 사람들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격변이 종교적 무관심과 이신론적 합리주의, 철저한 무신론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으면서 이전에 유행하던 입장을 배격하고 다시 근본주의적 종교와 유사한 것으로 달아났다." 복음주의와 공리주의는 개인의 성격 안에 융합되어 있었는데, "평일에는 사업가인 사람이 주일에는 복음주의자라는 것은 빅토리아 시대 역사에서 진부한 말에 불과했다."(253-4)


"공리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은 인간의 속세의 운명을 이행하는 최고의 수단이 노동이라는 윤리에 똑같이 동의했고, 복음주의자들은 또한 노동이 천국의 보상을 받을 자격을 갖추기 위한 수단이라고 여겼다."(255) "맬서스주의와 신빈민구제법의 냉혹한 사상이 기독교가 설파하는 자선과 엄밀하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를 의문시한 사람들에게 복음주의는 개인적 곤궁을 해결할 수 있는 일반적인 방법은 노동이고, 그와 관련된 금욕의 실천이라고 대답했다. 훈련된 노동자는 결국에 노동자로서 성공했다. 가난이 게으름과 낭비 습관의 결과라는 것은 거의 자명했다."(257) "경제적, 사회적 불균형으로 분열된 국가에서 도덕적 복음주의의 원칙이 널리 수용되면서 화해를 추구하도록 영향을 미쳤고, 윤리적 민주주의라고 불릴 수 있는 방식으로 여러 계층을 결합시켰다. 이따금 마찰을 일으킨 계층들 간의 관계는 공동의 도덕을 소유함으로써 긴장을 완화할 수 있었다."(263)


"과학이 성서의 역사적 확실성과 성서에서 유래한 유대교/기독교적 인간관을 어떻게든 입증해주리라는 희망이 얼마나 남아 있었든지 간에, <종의 기원>은 그러한 희망에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조물주가 특별한 호의를 베풀어서 인간을 본래 완벽하게 창조했고 인간의 욕구에 각별히 맞춰서 우주를 만들었다는, 오랫동안 소중히 여겨온 신의 섭리론은 끝나고 말았다."(340) 그러나 진보에 대한 빅토리아인들의 신념은 대단히 뿌리 깊은 것이었기에 완전히 억누를 수는 없었다. 이제 인간은 "신의 중재에 의존해서 자신의 상황을 개선할 수 없으므로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으려면 스스로에게 의지해야 한다. 인간의 비극적 운명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깨닫고 사용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리하여 실증주의 윤리학에서는 우리에게 친숙한 자조自助라는 테마가 더욱 숭고한 표현으로 등장한다."(351)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전진은 '컬쳐'(교양/문화)라는 단어의 의미로 집약된다. 19세기 이전에 "컬쳐(culture)는 기본적으로 '자연 생장물의 재배'를 뜻했고 그 다음에 거기에서 유추하여 인간의 (특히 개인의) 수양 과정을 뜻했다. 그러나 보통 어떤 자질의 수양을 뜻했던 이 후자의 의미는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수양 자체, 그 자체로서의 어떤 것을 가리키도록 달라졌다. 그것은 처음에 '마음의 전반적인 상태나 습성'을 뜻했고 인간의 완벽함이라는 개념과 밀접히 연관되었다. 두 번째로 그것은 '한 사회 전체의 전반적인 지적 발달 상태'를 뜻하게 되었다. 세 번째로는 '예술의 총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네 번째로 19세기 후반에 들면서 그 단어는 '물질적, 지적, 정신적 삶의 총체적 방식'을 뜻하게 되었다." "사회가 더 이상은 그저 인간들이 공동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서 공존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겨질 수 없었다. 그에 덧붙여서 이제 사회는 그 구성원의 개별적 삶을 향상시킬 책임을 져야 했다."(357-9)


이러한 문화적 이상에 대항하는 세력들은 "널리 만연되어 있는 중산층의 심리 구조와 사회적 민주주의의 확산, 인간의 삶을 저하시킨 공장 체제의 존재였다."(360) "공장과 슬럼가의 생활이 빚어낸 최악의 결과들 가운데 한 가지는 개인이 대중에 융합되었다는 점이다. 그때까지는 가장 큰 사회집단이라고 해봐야 가족과 인접한 공동체에 불과했던 농촌과 시골 마을의 생활조건에서 사람들은 개인적 정체성을 유지해왔다. 자선을 받는 대상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개체個體였다. 그러나 이제는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공장과 제조소와 광산 근처에 음침하게 줄줄이 늘어선 집들을 꽉꽉 채우면서 그들의 정체성은 대체로 상실되고 말았다. 그들은 산업 프롤레타리아의 구성원들로 전환되었다."(363) 개인성과 더 나아가 인간성이 박탈되는 가운데 "무기력과 단조로움이 삶의 필요조건이 아니라는 자각은 공장 체제 덕분에 얻어진, 극소수에 불과한 사회적 이득 가운데 하나이다."(367)


문화의 성장 지체에 대한 답은 교육이었다.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가 다 같이 구원의 희망이 없는 노동에 구제할 길 없이 종속된 것은 아니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낭만주의의 사회적 비전을 신봉하며 그 정신에 따라서 모두 그렇게 주장했다. 교육을 문화적 진보는 아니더라도 대중적인 사회적 진보의 동인으로 간주하며 그토록 신뢰했던 경우는 서구 역사상 거의 없었다." "영국에서 보통교육을 실시하려는 추진력이 대부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사람들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초기에 벤담주의적 개선주의자들 사이에서 가장 친숙한 유행어는 '마음의 행진'이었다. 이 표현은, 과학과 기술로 인해서 물질적 환경이 변화되고 국가의 부가 증식되고 있던 그 시기에 진보가 지속될 수 있으려면 오로지 '유용한' 지식이 끝없이 증가하고 축적되며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그 지식을 이용하게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368-9)


"철학적 입장에서 예술에 반대한 공리주의적 저항은 광범위한 인도주의적인 문화를 도덕적, 사회적 근거에서 불신하는 경향을 강화시켰다."(399) "복음주의자들은 공리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단호하게 예술을 거부했고, 몇 가지 동일한 이유에서 그러했다. 복음주의자들에게도, 아니 적어도 더없이 엄격한 복음주의자들에게는 그것이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문제였다. 예술에 가장 헌신적인 낭만적 옹호자들의 진술을 어떤 입장에서 살펴보면 예술이 종교만큼이나 완전한 자율성을 주장하는 듯이 보였으므로, 복음주의자들은 그 두 가지를 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선택은 명료했고,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선택은 불가능했다. 내세의 주장은 현세의 주장을 무가치한 것으로 격하시켰다. 그러므로 시詩는 복음주의자들이 저항하려는 세속적 혼란을 일으키는 한 가지 요소라고 간주되었다."(403)


"공리주의와 복음주의의 시대에 수용될 수 있었던 예술의 기준은 대개 '도덕적 미학'이라는 용어로 요약될 수 있었다."(404) 그러나 러스킨과 모리스가 보기에 예술에는 훨씬 더 중요한 기능이 있었다. 예술은 "현대사회를 구제할 수 있고 세계를 인간이 노동하면서 살아가기에 적합한 곳으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417)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철제 다리나 과도하게 장식된 공공 건물, 대량 생산된 실내 설비들, 개울을 따라 줄지어 서 있는 보기 흉한 벽돌 공장들은 "사회의 질병이 외적으로 드러난 징후이며 그 원인의 일부이기도 했다." 이들은 당대인들이 "주위의 도덕적 추악성을 각성하고 아름다움이 어떻게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지를 인식하도록 지적하는 것을 자신들의 소명으로 삼았다. 그들에게 예술은 최고로 "유용한" 것이었지만, 그 유용성이란 그들을 주로 몰아세운 정치경제학자들이 결코 생각해보지 못한 의미에서의 유용성이었다."(419) 


"빅토리아 시대 중기의 당당한 정설들에 대항하는 강력한 조류가 1870년대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온건하고 시험적으로 보였지만 이전과 비교해볼 때 혁신적으로 확장된 국가 권력 앞에서 경제적, 사회적 개인주의는 물러나고 있었다. '예술을 위한 예술' 운동에 의해서 도덕적 심미주의는 전도되고 말았다." "오스카 와일드는 유명해지는 가장 쉬운 방법이 중산층이 대경실색하도록 충격적인 언행을 일삼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관습적인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키웠던 일체의 교리와 금언들은 여왕이 서거하기 오래전부터 공격받았다. "빅토리아 시대의"라는 형용사 자체도 진보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조롱조의 미묘한 어감을 띠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공정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이제 빅토리아인들의 마음의 속성이라고 간주된 답답함과 두루뭉술함, 그릇된 진리, 억압과 금기로부터의 해방이었다. "(4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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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평전 - 고뇌하는 진화론자의 초상
에이드리언 데스먼드 외 지음, 김명주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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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1809~1831


18세기 중엽 다윈의 양가 할아버지들을 포함하여 '기계로 인한 명성'을 얻은 사람들은 "정통파 신앙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들 대부분은 자수성가한 비국교도들로서, 국교회에 속한 사람들에게만 정치와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던 세상에서 아웃사이더들이었다. 그들은 성장하는 산업도시들에서 번성했던 반국교회 예배당 문화에 속했다. 이래즈머스의 자유사상을 제외하면, 그들의 지적 전위성은 조사이어와 같은 유니테리언파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것은 희망에 찬 굳건한 신앙으로서, 새롭게 나타난 산업 엘리트들의 자신감을 반영하고 있었다. (이들의 신념에 따르면, 신앙이란) 자동제어 엔진처럼, 즐거움과 고통이 기계적으로 작동하여 인간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기독교의 원리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은 지금의 생을 행복하게 산다. 그리고 내세에는, 방치되어 있던 결함들이 수리되어 모든 사람이 완전한 존재로 회복된다."(30-2)


아버지 로버트는 사냥과 화학실험에만 몰두하던 다윈을 에든버러 의대에 입학시켰다.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에든버러에서 만난 해면동물 전문가 그랜트는 "누구보다 열성적인 친親프랑스주의자였고,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과학과 사회의 급진적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결정적인 만남이었다. 다윈은 타협을 모르는 진화론자의 날개 밑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랜트에게 신성불가침의 영역은 없었다. 자유사상가였던 그는 자연의 권좌 뒤에 영적인 힘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생명의 기원과 진화는 단지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힘들이 작용한 결과이며, 모든 것은 자연 법칙에 따른다. 그가 영웅시하는 프랑스의 진화론자들인 악명 높은 장 바티스트 라마르크와 에티엔 조프루아 생틸레르처럼, 그도 상상력이 넘치는 새로운 비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화론은 어딜 가나 교회와 과학의 기득권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70-1)


"물질과 정신, 위험한 라마르크주의, 검열, 권력. 이들은 격정을 부추기는 문제들이었으며, 과학이 객관적인 관찰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과학은 정치협상의 복잡한 단편이었다. 물론 다윈은 어렸고, 대부분의 문제들은 그저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게다가 그가 에든버러에 있는 이유는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던 데다, 그마저 그가 혐오하는 것이었다." "찰스는 결국 의학공부를 못 견디고 1827년 4월에 학위를 받지 못한 채 영원히 의대를 떠났다." "에든버러의 논쟁은, 자연현상에 의거한 설명과 초자연현상에 의거한 설명, 자본주의와 특권 귀족과의 긴장을 똑똑히 드러내보였다. 인간을 물질적 존재로, 자연을 세속적이고 경쟁적인 시장으로 재정의하기 위한 투쟁은 구시대적인 스코틀랜드 교회의 권위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한동안 다윈은 과학의 사회적 측면을 맛보았던 것이다. 어쩌면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세계를 엿보았던 것인지도 모른다."(86-7)


신앙과 새로운 지식 사이에서 고뇌하던 다윈은 <기독교의 증거>에서 잠시나마 위안을 얻었다. "페일리에 따르면, 기독교의 계시는 '미래의 보상과 처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해준다. 그리고 내세에서 응분의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논리는 현세에서 저지르는 행동을 규제하는 데에 매우 유용하다. 영원한 지옥이 없다면, 사람들이 자신의 의무를 다할 동기가 사라지고 인간의 규칙에 충분한 권위가 실리지 않게 된다. 반면 미래의 보상을 약속하면, 권력과 부의 불평등하고 무작위적인 분배라는 되풀이되는 문제가 해결된다. 현세의 부당한 처우가 내세에서 고쳐진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굶주린 대중은 자신들의 곤경과 비천한 사회적 지위를 감내할 것이다. "이 한 가지 진리가 세상사의 성격을 바꾼다"고 <기독교의 증거>는 단언한다. 그것은 "혼돈에 질서를 부여한다. 즉, 도덕세계가 자연세계와 조화를 이루도록 만든다." 다윈은 이 논증에 매료되었고, 페일리의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다."(140)


2부 1831~1836


1831년 12월 27일 비글호에 올라탄 다윈은 항해 중에 라이엘의 <지질학 원리>를 탐독했다. 거기에는 "생명이 진화를 해왔으며 모든 생명의 계보를 나무로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한 명쾌한 반론이 마치 변호사가 쓴 책처럼 차곡차곡 전개되어 있었다. 동물들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가 하나의 줄기로 모일까? 라이엘의 대답은 "아니다"였다. 인간의 계보에 침팬지가 있다는 것, 유인원이 "인간의 속성과 위엄"을 얻으려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라이엘은 나아가, 지구상의 생명의 역사가 지금 완전히 잘못 이해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옛 화석들이 출현하는 순서를 보면 인류를 향한 전반적인 진보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특유의 독특한 표현방식으로 논했다. 그는 진보가 없다면 종변형도 없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종이 어떻게 죽고 탄생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던졌으며, 게다가 다윈이 지금까지 만난 어떤 책보다도 계통학적인 방법을 취하고 있었다."(225)


"다윈은 산훌리안 항구에서 발견한 '마스토돈'을 떠올렸다 그것을 멸종시킨 요인은 홍수 같은 격변이 아니다. 적어도 지층에 그런 증거는 남아 있지 않았다. 게다가 그 마스토돈이 작은 계곡에 매몰되어 있었던 지점은, 융기한 고원의 자갈 섞인 조개껍데기 층 위를 덮고 있는 일종의 롬층[모래, 부식토, 진흙이 섞인 비옥한 흙]이었다. 그러므로 마스토돈은 조개껍데기가 쌓인 시대보다 나중에 살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비슷한 조개가 오늘날의 바다에 살고 있으니, 기후는 그때로부터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식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갈층은 비옥하지 않아서 관목 정도밖에는 부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윈은 절멸에 관한 더 일반적인 두 가지 가설, 즉 홍수 같은 격변 탓이라는 설명과 기후변화 탓이라는 설명을 폐기했다. 라이엘이 말하는 창조자는 여전히 믿었지만, 라이엘의 기후변화설과는 결별한 것이다. 그는 자기만의 방향으로 가지를 쳐나가고 있었다."(272-3)


3부 1836~1842


"당대는 과학의 호시절이었다. 한사코 저항하던 옛 지층들이 비로소 정복되어, 암석들이 최초로 창조된 형태들을 드러내 보였으며, 캄브리아기, 실루리악, 데본기는 일상용어가 되고 있었다. 지질학은 어둡고 머나먼 과거를 들여다보는 은밀한 구멍이며, 지금은 화석이 된 생물들이 살았던 왕국들의 운명과 대륙들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창이었다."(351) "다윈은 라이엘의 강연을 듣고 비로소 그 화석들의 중요성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멸종한 메가테리움과 오늘날의 나무늘보, 멸종한 글립토돈과 오늘날의 아르마딜로가 서로 가까운 관계임을 이해했던 것이다. 다윈은 그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항해를 하는 동안에는 자신이 발견한 것이 그저 유럽과 아프리카산의 마스토돈과 코뿔소라고 추정했을 뿐, 이들이 남아메리카 고유종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 일로 더욱 예리해진 다윈은 마침내 중요한 질문을 하기에 이르렀다. 왜 한 장소에 살았던 과거의 생물과 현재의 생물이 그렇듯 가까운 관계일까?"(355)


급진적인 유니테리언파가 보기에 "자연은 기적의 영역이 아니라, 법칙과 질서에 따르는 것이었다. 유니테리언파의 이런 '결정론'은 생명이 스스로 발달한다는 생각으로 나아가게 했다." 생명체가 점차 고등한 상태로 올라간다는 견해는 "속박을 제거할 것, 종교와 시민의 제약을 없앨 것, 누구나 신이 준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해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도록 보장할 것, 다시 말해 모든 이가 자연과 신이 의도한 대로 상승할 수 있도록 허락할 것을 요구했다. 국교회 성직자들은 시민들을 낮은 단계에 묶어두고 있는 것이었다. 일부 급진적인 유니테리언파가 개혁과 진화를 동일한 맥락으로 본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자연이 스스로 발달한다는 생각은 그들에게는 전혀 공포가 아니었다. 마티노를 중심으로 한 이래즈머스 집단은 찰스가 자신만의 독자적인 결정론적 이론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366)


"'살아 있는 원자'는 급진적인 민주주의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개념이었다. 이들은 인간은 자기 운명을 스스로 통제하는 자유로운 존재라고 믿었는데,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있던 시대에 이것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었고, '살아 있는 원자'는 이들의 믿음에 과학적 근거를 가져다주었다. '살아 있는 원자'는 완벽한 정치적 유비를 제공했다. 권력은 아래에서 위로 '위임하는 것'이었다. 신이나 군주가 위에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원자들'인 민중으로부터 올라오는 것이었다. 스스로 조직하는 원자라는 개념은 민주적인 언론을 통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다윈은 신이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물질에 동력을 부여한다는 케임브리지 시절의 전통적 입장으로부터 세속적인 입장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살아 있는 원자'라는 개념은 자연이 스스로 발달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다윈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였다."(376)


"다윈은 종의 형태가 복잡해질수록 종에게 주어진 생명은 줄어든다는 오언의 말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런 다음에, 동물과 식물의 계통사史를 표현하기 위해 "불규칙하게 분기하는" 나무 한 그루를 그렸다. 만일 생명을 수령이 엄청나게 오래된 거대한 떡갈나무 한 그루로 표현한다면, 포유류 화석들은 생명력이 다해서 "죽어가는 말단의 싹"에 해당할 것이다. 나무의 줄기는 모든 생명이 비롯된 먼 과거의 공통조상을 상징한다. 그리고 나무줄기가 하나인 것은 궁극의 기원이 하나라는 뜻이다. 다윈은 지구에서 생명이 처음 비유기물로부터 저절로 출현한 일은 멀고 희미한 과거에 단 한 번 일어난 사건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살아 있는 분자들이 시도 때도 없이 도처에서 생겨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서로 관련이 없는 수백만 그루의 생명의 나무가 우후죽순 생겨난다고 한다면 문제가 "엄청나게 꼬인다." 생명의 기원은 실루리아기 이전의 어딘가에서 찾아야 하는 단 한 차례의 유일한 사건이었다."(387-8)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포유류인 주머니쥐가 사실은 파충류라고 주장한 일 때문에 그랜트는 즉결심판에 처해졌다. 다윈은 당대의 자연 과학자들이 관찰한 사실의 진위 여부와는 별개로 진보라는 신념과 신의 창조라는 신앙이 충돌한 이 사건에서 교훈을 얻었다. "그것은 라마르크주의의 지뢰밭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연이 거침없이 상승한다는 개념은 이미 폐기했다. "내 이론에 따르면, 진보로 향하는 절대 경향 따위는 없다." 환경은 "서서히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변하며, 생명도 마찬가지다. 환경조건이 안정되게 유지될 때도 있는데, 그런 경우 종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사람은 고대 그리스 시대 이후로 전혀 향상되지 않았다. 일부 동물들─예를 들면 기생충─은 심지어 단순해졌으며, 만일 이들이 멸종하면 다른 종들이 "퇴화하여" 그 생태적 지위를 메울 것이다. 그러므로 (다윈이 보기에) 거침없는 상승과 보증된 진보는 급진파의 신화였다."(463)


4부 1842~1851


찰스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큰 딸 "애니는 죽을 이유가 없었다. 다음 세상에서는 말할 나위도 없고 이 세상에서 벌을 받을 짓조차 하지 않은 아이였다. 찰스의 말을 빌리면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하는" 애니는 병에 굴복했고, 자연의 낫이 애니를 습격하여 그 아이를 무자비하게 짓눌렀다." "애니의 잔인한 죽음은 찰스가 질질 끌고 가던 도덕적이고 공정한 우주에 대한 넝마 같은 믿음을 산산조각 냈다. 훗날 다윈은, 비록 오래 끌기는 했지만, 이 시기가 자신의 기독교적 믿음에 종언을 고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집안에서도 믿음의 문제에 관해 훨씬 자유로워졌다. 언제나 힘들고 위험했던 아홉 번의 임신을 겪는 동안, 에마는 그들이 영원히 함께할 것이라는 안심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제 더는 아이를 갖지 않기로 함에 따라 이별에 대한 위협도 사라졌다. 그들은 분명 앞으로 오랫동안 함께할 것이다. 이제 찰스의 입장은 믿지 않는 자였다."(647-8)


5부 1851~1860


"종교계 인사들이 (번영하는 대영제국을 상징하는) 만국박람회의 공을 신에게 돌리는 동안, 문인 자유사상가들은 다른 쪽으로 고무되어 있었다. 많은 이들이 직업을 구하려는 세속적인 필요로 런던으로 왔다." "이들 모두는, 수정궁이 상징하는 새로운 시대는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적인 개혁을 요구할 것이며, 자연의 통역사들은 영국 국교회의 특권계급이 향유하는 지위와 보상을 요구할 정당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불안정한 연합을 형성했는데, 그 연합의 신조는 실증주의, 공화주의, 세속주의, 유물론, 심지어는 신을 믿지 않는 훨씬 극단적인 '주의'까지 온갖 사상을 망라했다. 이러한 엘리트 지식인들은 자연을 경쟁적인 시장으로 새롭게 규정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진보, 기술, 그리고 도덕과 인간을 자연 법칙에 맞추어 설명하는 일에 헌신한, 진화의 새로운 후원자들이었다. 이들은 변화의 주축이 되어 세상을 다윈에게 안전한 장소로 만들고 있었다."(652-3)


"마침내 자연선택에 관한 연구를 재개할 길이 닦였다. 때가 무르익었다. 젊은 개혁가들이 부상하고 있었고, <웨스트민스터 리뷰>의 진화론자들이 자리를 잡았으며, 과학의 사회적 토대는 눈에 띄게 변하고 있었다." 1854년 10월, "라이엘과 후커가 찾아와 다윈이 "추악한 사실들"을 가지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았다. 라이엘은 좌절했고, 후커는 동요했으며, 다윈은 조심했다. 신중할 것, 아직도 이것이 절대적인 명령이었다. 그 문제는 다른 모든 것에 파급을 미칠 너무나도 중대한 사안이기 때문이었다. 공책을 덮은 때로부터 15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창조의 초자연적 조직이 넝마가 되었음에도, 다윈은 여전히 후커에게 자신은 "양쪽의 논증을 모두 제공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다윈은 "종이 변한다는 입장만을" 지지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그와 같이 대단히 민감한 문제에 관하여 심지어 친한 사람들의 반응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던 다윈은 스스로를 혼란스러운 입장에 몰어넣는 희생을 감내했다."(690-1)


"다윈의 맬서스주의적 통찰력이 인구론에서 나왔다면, 다양성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설명하는 그의 메커니즘은 산업의 진보에 대한 청사진과 매우 비슷했다. 다윈은 산업에 많은 투자를 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웨지우드가家 사촌들은 공장의 조직화를 일구어낸 선구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들은 노동력의 명확한 분업을 바탕으로 하는 생산라인을 생각해냈다. 이것은 각각의 직공에게 하나의 전문화된 일을 맡김으로써 생산성을 올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노동력의 기계화와 그것이 생산에 미치는 영향을 다윈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다윈은 자연선택이 경쟁에 처한 동물 간의 "생리적 분업"을 자동적으로 증대시킨다고 주장했다. 북적이는 지역에서 일어나는 과도한 경쟁─다윈은 이것을 자연계의 종種공장이라고 불렀다─은 비어 있는 생태적 지위를 이용할 수 있는 변종에게 이익을 준다. 이러한 변종들은 새로운 기회를 잡아 그 빈틈을 활용할 것이다."(698-9)


여전히 자신의 이론을 세상에 공개하기를 주저하고, 농장에서 비둘기 교배를 통해 자연 선택에 의한 종변형의 유비를 관찰하고 있던 다윈에게 "1858년 6월 18일, 우편배달부가 도착하는 순간, 그가 쌓아올린 세계가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다윈은 그동안 사회적 지위를 잃을까봐, 그리고 물론 반발이 클까봐 두려워하며, 그 오랜 세월 동안 끔찍한 시련과 정신적 고뇌를 겪어왔다. 그리고 병 때문에 늦어지고, 손대서는 안 되는 것을 손대는 일로 인한 방황을 거쳐서, 마침내 20년 만에 출판 가까이에 와 있었다. 그런데 조용한 금요일 아침, 세상 반대편에서 우편물 한 개가 도착했다. 안에는 월리스가 쓴 스무 장 가량의 원고가 들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다윈의 격려에 대한 응답이었다. 다윈은 일생의 역작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라이엘에게 "선생님의 경고가 참혹한 현실이 되었습니다"라고 하소연을 했다. 다른 이가 그를 "앞질렀던" 것이다."(777)


그렇긴 해도, 월리스의 이론은 다윈의 이론과는 달랐다. "그는 자신의 재산으로 살아갈 수 있는 부유한 향사 자연학자도 아니었고, 헉슬리 같은 직업 교사도 아니었다. 그는 웨일스 변경지방에서 가난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고, 14세에 런던에 와서 건축업자의 견습공이 되었다. 밤에는 토튼엄코트 대로 바로 옆에 있는 사회주의자들의 집합소인 '과학의 전당'에서 지냈다." 월리스는 선택에 대해 "개체들 간의 극심한 경쟁을 상정하기보다는 환경이 부적합한 개체를 제거한다고 보았다. 게다가 월리스는 보르네오 섬에 사는 다야크족을, 다윈이 야만적인 푸에고인들을 바라본 관점과 달리, 인류평등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자의 관점으로 보았다. 그리고 월리스는 다윈이 제쳐놓은 질문을 제기하려 하고 있었다. 즉, 자연선택의 목적이 무엇인가? 진화의 힘은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작동한다는 것, 이것이 핵심이었다. 다시 말해, 자연선택의 목적은 "완벽한 인간이라는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었다."(779-81)


# 7월 1일 공동논문 발표, 1859년 11월 22일 <종의 기원> 출간


6부 1860~1871


"월리스와 다윈의 견해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었다. 다윈은 자연선택이 건축가로서의 신을 대신하듯, 성선택이 예술가로서의 신을 대신하도록 했다. 동물은 스스로 육종가가 되어 새로운 변종들을 만들어내며, 인간도 결혼상대를 선택하는 행위를 통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왔다. 하지만 다윈이 새의 화려한 깃털을 성선택 탓으로 돌릴 때마다, 월리스는 자연선택이 초래한 다른 적응을 지적했다. 암컷 새들의 칙칙한 빛깔은 개방된 둥지에서 살아남기 위한 위장색이다. 나방의 야단스러운 색깔은 포식자에게 불쾌감을 주는 경고색이며, 이런 종류를 흉내내어 의태를 하는 나방들도 있다. 월리스는 성선택이 인종을 만드는 "주된 요인"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이 일에 관해서라면 자연선택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다윈에게 이것은 "가장 큰 타격"이었다." "월리스는 자연선택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고집하면서 다윈보다 더한 다윈주의자로 나서고 있었다."(908)


"월리스는 인류의 확장된 의식을 선택의 영역에서 완전히 빼버렸다. 야만인들은 필요보다 훨씬 큰 마음의 능력을 갖고 있다. 그들은 고릴라의 뇌보다 약간 큰 뇌 정도면 충분하지만, 실제로는 영국의 지식인만한 뇌를 갖고 있다. 이것은 과잉지능이다. 자연선택은 당장 쓸모가 있는 것만을 상대하기 때문에, 야만인들에게 그러한 뇌를 부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적인 힘이라면 가능했을 것이다." "자연선택은 앞을 내다보는 눈이 없다. 자연선택은 미래의 필요가 아니라 그날그날의 생존에 대비할 뿐이다. 그리고 치열한 자본주의 탓에 도덕적 장애인이 된 빅토리아 시대 영국인의 "사회적 야만"을 보면, 자연선택은 더 나은 문명을 만들어낼 힘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월리스는 더 고차원적인 영적인 힘이 인류의 운명을 인도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슬플 만큼 당신과 생각이 다릅니다. 그리고 그것이 참으로 유감스럽습니다." 다윈은 월리스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945-6)


7부 1871~1882


"다윈은 자신이 공격에 노출되어 있음을 잘 알았다. 진화론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자연선택설의 운명은 시간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인간의 마음과 도덕성이라는 '성채'는 어떠한가? <인간의 유래>에서 다윈은 이 종교의 마지막 보루를 습격하여, 인간의 가장 신성한 형질들을 설명했다. 하지만 이 성채는 함락되지 않았고, 마이바트가 수호하는 인간은 자랑스럽게 난공불락의 존재로 건재하다. 이것은 다윈의 가장 뼈아픈 좌절이었다." "다윈은 <종의 기원>의 수정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해 성큼성큼 걸어 서재로 향했다. 몇 달 동안 중단했다 다시 붙들었다 한 끝에, 마침내 12월에 이 힘든 작업이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때 처음으로 '진화evolution'라는 말이 등장했다." "공격은 대가답게 이루어졌다. 다윈은 마이바트의 <종의 기원에 관하여>를 관통하는 가장 질긴 실을 베었다. 아가일과 오언 부류가 단단하다고 믿고 있었고 월리스조차 우려했을 만큼 강한 매듭을 끊어버렸던 것이다."(978-9)


"일부만 진화한 구조들은 기능을 할 수 없는 실패작일 뿐일까? 완전한 구조는 단 한 번의 창조적 도약으로 생길 수 있을까? 다윈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히 사실들을 쌓아올렸다. 그는 기능을 바꾼 기관의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함으로써 이 문제를 제거했다. 물고기의 부레가 양서류의 폐가 되고, 호흡관이 연장되어 날개맥이 있는 곤충 날개가 되었다. 마이바트는 핵심을 잘못 짚은 것이다. 초기 형태의 폐, 눈, 날개는 호흡을 하거나 보거나 펄럭일 필요가 없다." "마이바트의 '자연 법칙'은 오언, 아가일, 그레이의 법칙들과 마찬가지로 신의 칙령이며, 인도하고 지령하는 의지력의 표현이었다. 이 힘이 우주 속에서 엄밀한 과학적 질서를 유지하며, 생명을 조화로운 물결에 실어 앞으로 민다. 하지만 아름다운 조화를 갖춘 한 물고기나 개구리가 인도와 지령을 받아 다른 물고기나 개구리로 도약하는 것은 다윈의 눈에는 부자연스럽고, 지나치게 비쳤다. 이 정도면 과학은 "기적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셈이었다."(979-80)


"누구보다도 다윈을 일관되게 지지했던 이들은 유니테리언파 교도들과 자유종교 사상가들이었다. 이들은 다윈이 자신들과 같은 합리적인 반국교 전통에서 성장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항상 다윈의 자연주의적 관점을 높이 평가했다."(1117) 대수도원에 안치된 "다윈의 시신은 이 새로운 자연을 낚아챈 새로운 전문가들의 더 큰 영광을 위해 성소에 안치되었다. 이 매장은 이 전문가들을 신격화하는 것이었으며, 떠오르는 세속주의에 바치는 최후의 의식이었다. 이것은 자연의 시장의 상인들, 다시 말해 과학자들과, 정치와 종교계에 몸담고 있는 그들의 부하들이 권력을 계승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이것은, 명성을 얻고 있는 이러한 전문가들이 그들의 스승에게 보답하는 것과도 같았다. 왜냐하면, 다윈이 창조를 자연주의화하고, 인간 본성과 인간의 운명을 그들의 손으로 가져왔기 때문이다. 사회는 결코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악마의 사제"는 자신의 할 일을 다했다."(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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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력하는 종 - 경쟁하는 인간에서 협력하는 인간이 되기까지
허버트 긴티스.새뮤얼 보울스 지음, 최정규.전용범.김영용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 협력하는 종의 두 가지 명제

1. 사람들은 이기적인 이유에서뿐 아니라 진정으로 타인의 복지에 관심을 가진다. 동일한 이유로 타인의 협력 행위를 악용하는 사람들을 처벌한다.

2. 우리가 이러한 '도덕 감정'을 보유하게 된 것은 우리의 선조들이 살았던 환경에서 비롯한다. 협력하고 윤리적 규범을 준수하는 집단은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생존이나 세력 확장에 더 유리했고, 사회 지향적 동기가 확산될 수 있도록 자연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구조화되어 있었다.


협력적 행동이 행위자 자신에게 비용을 초과하는 이득을 가져다주는 경우에는 "전적으로 이기심에 의해 동기부여가 될 수도 있다. 시장 교환은 그러한 사례 중 하나다. 이 경우 협력은 일종의 공생mutualism으로 나타난다. 이는 행위자와 타인 모두에게 순이득이 발생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러나 협력은 때로는 행위자에게 순비용을 발생시키는 것일 수도 있으며, 따라서 협력하지 않는 것이 자신의 적합도fitness를 높이거나 또는 여타 물질적 보수를 증대시킬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협력적 행위는 이타주의altruism로 나타난다." 이기적 공생 모델들은 "다음 두 가지 사실들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 인간 사회에서의 협력은 가족 범위를 넘어서서 훨씬 더 큰 집단 내에서 발생한다. 또한 실제 삶과 실험실 연구 모두에서 보면 협력은 반복적으로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상호작용 속에서도 그리고 협력을 통해 평판 이득을 얻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에도 발생한다."(24-5)


"우리는 어떻게 (협력에서 기쁨을 얻거나 도덕적 의무감을 느끼고, 무임승차자에게 수치심을 안겨주는 감정의 묶음인) 사회적 선호social preference에 적합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두뇌를 가지게 되었을까? 초기 인류가 처한 환경 때문이라는 것이 우리 답변의 일부다. 우리의 후기 홍적세 선조들은 대형 포유류가 번성했던 아프리카 사바나 또는 그와 유사한 환경에서 거주했다. 당시 환경에서 사람들은 식량의 획득 및 배분 과정에서 협력적으로 행동함으로써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도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태어난 후 오랜 기간 동안 성인에 의존해야만 하는 인간의 느린 성장 과정 역시 자녀 양육과 식량 공급에 있어 비혈족 간의 협력을 필요로 했다. 그 결과 식량 공급, 자녀 양육, 비협력자들에 대한 처벌, 적대적 이웃으로부터의 방어, 그리고 정보 공유 등을 통해 협력적 전략을 유지하는 집단 성원들은 비협력적 집단의 성원들에 비해 상당한 이점을 가질 수 있었다."(25-6)


사회적 선호가 이기심을 압도하는 세 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인류는 이타적인 성원들이 이기적인 사람들로부터 착취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여러 방법들을 고안해왔다. 이 가운데 두드러진 것으로는 무임승차자들 또는 협력의 규범을 위반한 사람들에 대한 공적인 따돌림, 배척, 심지어 처형 등이 있다." "둘째, 인간은 장기적이고 정교한 사회화 시스템을 도입해왔고 이를 통해 개인들로 하여금 협력을 하도록 사회규범을 내면화시켰다." "셋째, 자원 및 생존을 둘러싼 집단 간 경쟁은 인간의 진화 동학에서 결정적 힘이었고 이는 여전히 그러하다. 많은 협력적 성원을 보유한 집단은 이러한 도전 속에서도 생존하며 덜 협력적인 집단의 영역으로까지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는 경향을 갖는다. 그리하여 문화적 전달cultural transmission 과정을 통해 번식상의 우위가 확보되고, 협력적 행동의 확산이 이뤄진다."(27-8)


# 이타성을 설명하는 용어들

1. 도움helping : 타인에게 이득을 제공하는 행위

2. 이타주의altruism : 도움을 철회하면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남을 돕는 경우

3. 제약constraint : 주어진 상황에서 한 개인이 취할 수 있는 행동들의 범위

4. 믿음beliefs : 자신의 행동과 결과 사이의 관계성을 포함하여 머릿 속으로 그리는 세계의 인과구조

5. 선호preference : 특정 행동이 가져올 다양한 결과에 어떤 가치를 부여할지 결정하는 좋고 싫은 감정


물질적 보상만을 기준으로 하면 배신이 최적화 전략인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서 "상대방이 협력할 가능성이 충분히 높다고 믿는다면 두 사람은 모두 협력할 것이다. 따라서 상호 협력과 상호 배신 두 경우 모두가 이 새로운 게임의 균형이 되는데, 이때 이 새로운 게임은 기존의 물질적 보수에 상대방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 보수를 결합시킨 게임이다." "각 경기자들은 타인 역시 협력할 것이라 확신할 경우에만 협력할 것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협력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상호 협력과 상호 배신은 모두 내쉬균형들이다. 두 개의 내쉬균형 가운데 어느 것이 실현될지는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 것인지에 대한 경기자의 믿음에 달려 있다. 이기심 때문이든 또는 자신이 상대방에게 악용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든, 배신을 선택할 강력한 유혹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실험들에서 상당히 많은 피험자들이 배신이 아닌 협력을 선호한다는 점이 밝혀졌다."(48-9)


# 내쉬 균형Nash equilibrium : 각 경기자의 선택이 다른 경기자의 선택에 반응하는 최적의 대응 전략인 경우


"우리는 문화를 유전적 전수 이외의 다른 경로를 통해 얻어지는 선호와 믿음의 집합체라고 정의한다. 문화는 그 자체로 진화적 힘이며, 따라서 유전자와 자연환경 간의 단순한 상호작용이 낳은 효과가 아니다.  우리는 "문화적으로 전달되는 선호와 믿음이 행위의 근접 원인이기는 하지만, 다시 이들 선호 및 믿음도 전적으로 우리의 유전자 구성과 자연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오류라고 생각한다. "자연환경과 유전자가 문화적 진화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반대로 문화가 유전적으로 계승되는 행위적 특징들의 상대적 적합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가 인간 사회에서의 협력의 기원과 다른 종과 구별되는 속성을 설명할 때 토대로 삼고 있는 두 번째 개념인 "유전자-문화 공진화 개념에 따르면 인간 선호와 믿음은, 유전자가 문화의 진화에 영향을 미치고 문화가 다시 유전적 진화에 영향을 미치는 동태적 과정의 산물이다."(51-2)


"환경 조건은 여러 세대에 걸쳐 연관성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 연관성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각 세대마다 유전을 통해서 다음 세대로 전달될 수 없는 가치 있는 정보들은 학습을 통해서 획득된다. 그러한 정보는 생식세포 안에서 암호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환경 속에서 동물은 비유전적 정보 전달 채널을 통해서 현재의 환경 상태에 관한 정보를 전달함으로써 이득을 얻을 수 있다. 생물학자들이 후생유전epigenetic이라 부르는 그와 같은 정보 전달은 대단히 보편적이며, 인간의 문화적 전달은 그것의 가장 고도하고 유연한 형태를 보여준다." 도킨스는 <확장된 표현형The Extended Phenotype>에서 유기체가 비버들의 댐, 벌들의 벌집, 그리고 심지어 사회구조(예를 들면 짝짓기 관행과 사냥 의례) 등의 형태로 환경적 인공물들을 직접 다음 세대로 전달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러한 틈새 구축niche construction 전략은 널리 확산된 후생유전적 전달의 형태 중 하나다.(54-5)


사회적 선호를 설명하는 최후통첩 게임의 결과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제안을 거절한 사람들의 태도다. 응답자들은 약간의 돈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제안자들의 불공정한 행동을 처벌하려는 욕구에 의해 동기부여가 된다."(67) "이들 실험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보수를 기꺼이 희생하면서까지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고, 다른 사람들의 협력에 대해 포상하고, 또 무임승차하는 사람들을 처벌하려고 한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어떠한 이득을 기대할 수 없는 경우에도 그렇게 한다. 우리는 이러한 행동을 이끌어내는 선호를 강한 상호성strong reciprocity이라 부른다."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서도 "피험자들은 상대방이 협력했다고 확신하는 경우, 또는 자신이 협력할 것이라는 의도가 상대방이 결정을 내리기 전에 전달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경우 더 높은 수준으로 협력을 했다. 이 사실은 피험자들이 강한 상호성에 의해 동기부여가 된다는 점을 보여주는 징표다."(68-9)


# 최후통첩 게임 : 제안자가 10달러를 받고 이 중 얼마를 응답자에게 나눠줄지를 제안하는 일회성 게임. 응답자가 제안을 거절하며 두 사람 모두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통상 제안자들은 50% 가까운 금액을 응답자에게 제안했고, 25% 이하의 제안은 대부분 거절되었다.


이기심 공리를 믿는 사람들은 공공재 게임에서 회차가 진행될수록 기여액이 하락하는 현상을 분석할 때, "실험에서 타인을 고려하는 행동이 발견되더라도 이를 익명적 상호작용에 익숙하지 못한 피험자들의 혼동 때문인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즉 피험자들의 행동은 이들의 믿음(즉 자기 행동이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에 대한 이해)을 반영하는 것이지, 결코 이들의 선호(즉 다양한 결과들에 대한 가치 평가)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설명이 타당하다면 동일한 피험자들은 똑같은 공공재 게임에 한 번 더 참여했을 때 첫 회 때부터 곧바로 기부를 하지 않아야 한다. 안드레오니와 쿡슨은 이러한 예측이 맞는지를 테스트해본 결과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냈다." 추가 실험에 따르면 "기부의 감소 추세는 무임승차자들에 대한 보복이 진행됨을 반영한다. 실제로 피험자들도 자신들이 기부를 줄였던 이유를 그렇게 이야기하곤 한다."(74-5)


# 공공재 게임 : 10명의 피험자가 10회짜리 게임에 참여하는데 매회마다 개인계정으로 받은 1달러 중 일부 혹은 전부를 공공계정으로 이전할 수 있으며, 그렇게 옮긴 1달러 당 0.5달러가 10명 모두의 보수에 더해진다.


최후통첩 게임을 진행할 때 "한 버전에서는 단지 '교환 게임'이라 부르면서 실험을 진행해봤고, 다른 버전에서는 게임 시작 전에 미리 시사상식 퀴즈를 내고 여기서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에게 제안자의 역할을 부여해봤다. 두 실험 모두에서 보통의 경우보다 낮은 제안율과 낮은 제안에 대한 낮은 거부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만일 개인들이 단지 자신의 금전적 보수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게임에 어떤 조작을 가했다 해도 게임의 결과는 바뀌지 않아야 한다. 교환 게임이라 부를 때, 또는 시사 퀴즈를 내고 그 결과에 따라 제안자의 역할을 부여할 때 강한 상호성이 상당히 약해진다는 점은 사회구조가 금전적 보수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회적 행위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암시한다. 교환 게임이라는 명칭에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행동을 한다거나, 또는 퀴즈의 도입을 통해 어떤 사람들은 그럴 자격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 등이 그 예들이다."(99)


협력적 개인들이 "예외적인 인지 능력과 높은 수준의 인내를 갖는다고 가정할지라도, 두 명을 넘어서는 개인들로 이뤄진 집단에서는 모델이 보여주고 있는 협력적 내쉬균형 해를 발견할 것이라 믿을 만한 근거가 없으며, 설사 도달하더라도 집단 성원들이 머지않아 협조적 전략을 포기하게 되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현실성이 희박한 조건하에서가 아니라면, 게임 모델들을 통해 확인되는 협력적 결과들은 접근 가능하지도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 이를 우리는 진화적 타당성을 결여한evolutionarily irrelevant 내쉬균형이라 부른다."(201) 내쉬균형에서 "개인들은 다른 경기자들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미리 예측해야 하고, 또 다른 경기자들이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 것이라고 예측할지를 예측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간단한 게임을 제외한 대부분의 게임에서 경기자들이 내쉬균형을 실행하는 데 요구되는 조건은 경기자들이 합리적이라는 가정(즉 그들이 최적 대응을 선택한다는 가정)만으로는 유도될 수 없다. 218)


"내쉬균형의 약점을 피할 수 있는 대안적인 균형 개념이 상관균형correlated equilibrium 개념이다. 상관 장치correlating device라는 것이 있어서 각 경기자들에게 각자가 어떤 순수 전략을 수행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공적 또는 사적 신호를 보내준다고 해보자. 상관균형이란 상관 장치가 존재해 모든 경기자들이 상관 장치의 조언을 따른다면 그 어떤 경기자도 다른 전략으로 전환함으로써 자신의 처지를 개선시킬 수 없는 상황을 말한다." 균형이란 오직 "사적 신호가 공적 신호에 매우 근접할 경우에만 존재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개인들은 어떤 주어진 집단 성원의 행동에 관해서는 거의 동일한 신호를 수신받아야 한다." 현실에서 이에 부합하는 상관장치가 바로 사회규범이다. "사회규범에 의한 협력적 균형은 진화적으로 안정적인 균형 전략일 뿐 아니라, 또한 사회규범 그 자체도 진화적인 적응이어서 경합하는 다른 사회규범의 침투에 대해 안정적이다."(220-2)


"우리의 (유전자-문화 공진화) 모형에서는 제도가 문화적 전달 과정에서 틈새niche의 역할을 함으로써 유전적으로 전달되는 속성들에 작용하는 선택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환경을 구축해나간다." "식량과 지식을 다른 집단 구성원들과 공유하고, 공동으로 의사결정을 내리고, 지배적인 남성이 집단 내에서 번식 기회를 독차지하지 못하도록 제어하는 제반 정치적 장치들은 이른바 번식적 균등화 장치reproductvie leveling의 예인데, 이러한 장치들이 틈새를 만들어내 이타주의의 진화에 도움을 준다."(274) "다수준 선택의 결과로 확산되는 이타주의적 속성(자신에게 희생이 되지만 집단 구성원들에게 이득을 주는 행동을 하려는 속성)에는 외부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해를 끼치려고 하는 속성도 포함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모델로 보여주고자 하는 과정은, 라랑드의 연구팀이 부른 것처럼, 관대한 개인들의 진화라기보다는 이기적 집단의 진화라고 묘사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276)


# 유전자-문화 공진화

1. 선별적 소멸 : 이타주의자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생존에 기여한다.

2. 균등화 장치 : 집단 내 선택압의 크기를 줄인다. 

3. 집단 사이에서의 유전적 차이 : 사회규범을 위반한 사람들을 배척하는 선별적 유유상종은 유전적 차이를 만들어낸다.

4. 딤의 소멸과 이타주의의 진화

☞ 딤(deme) : 서로 분리되어 존속하는 집단


"집단 간 공격 성향이나 내부인에 대한 편애(패거리주의)는 때때로 전투에 나가서 죽을 위험을 무릅쓰는 것으로 귀결될 수도 있고, 외부인과의 교류를 회피하기 때문에 배우자 찾기나, 공동보험, 거래 등을 통해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는 것 등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 따라서 그러한 성향은 당사자들에게 그리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타주의와 유사한 점이 있다." "다음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었다면 초기 인류사회에서 패거리 이타주의가 등장하고 확산될 수 있었을 것이다. 첫째, 이타주의자들이 대부분 패거리주의자들이고, 패거리주의자들 대부분이 이타주의자들이었다. 둘째, 패거리 이타주의자들 대부분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한 집단에 모여 살았다. 셋째, 가치 있는 자원들을 둘러싸고 집단 간 적대적인 경쟁이 자주 일어났는데, 이러한 경쟁에서는 자기 집단 성원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던져 다른 집단 사람들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존재했던 집단이 유리했다."(318-9)


# 전쟁이야말로 집단 내 협력을 최대로 이끌어낼 수 있는 수단이다. 이타성과 폭력성의 상호 공존/양의 되먹임.


"우리의 시뮬레이션은 자원 공유 또는 집단 내 유유상종을 만들어내는 집단 차원의 제도들이 진화하는 경우, 집단 선택이 이들 제도들(그 제도들을 채택한 집단에게 그 제도를 유지하는 데 따르는 비용이 드는 경우에도)과 이타주의의 공진화를 가능케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과정에서 핵심적인 것은, 식량 공유 등의 균등화 기제는 이타주의적 선호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아도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관습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이기적인 개인들에게조차 최적 대응이다." "일단 규범이 정착되면 그 규범은 집단의 규모가 커지고 집단이 친족 이외의 다양한 성원으로 이뤄지는 상황이 되어도 여전히 지속될 수 있다. 규범은 이타주의적 선호의 확산을 가능케 하고, 위반자들에 대한 처벌 성향을 진화시킴으로써, 더 큰 집단에서 균등화 기제를 안정화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이때 인간의 인지/언어 능력은 친족 범위를 넘어서는 이타주의의 진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308-9)


이타적인 선호가 진화하는 데 유리한 조건이 형성되는 모델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적합도가 높은 유전자일수록 생존율이 평균을 상회하기 때문에, 부모로부터 자식에게 특성이 전달되는 수직 전달vertical transmission을 통해서는 적합도가 높은 부모의 특성이 진화한다. 둘째, 부모 세대의 다른 구성원으로부터 젊은 세대로 특성이 전달되는 사선 전달oblique transmission은 이웃이나 교사 또는 정신적 지도자와의 개인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이뤄지며, 그 과정에서 젊은 세대의 구성원들은 특정한 규범을 내면화하는 사회화를 경험한다. 셋째, 보수에 기초해 사회적 학습이 이뤄진다는 것은 주기적으로 자신과 타인의 행위를 비교해 상대적으로 성공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행동을 모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보수가 규범의 채택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함으로써 사회화를 단순히 수동적이고 무비판적인 대상에게 규범을 주입하는 것이라고 보는 개인에 대한 과잉 사회화된 관점에서 벗어날 수 있다."(392)


"처벌이 존재하면 무임승차에 따른 이익이 감소하기 때문에 이기적인 개인들도 처벌을 피하기 위해 협력에 참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따라서 처벌자가 많이 존재하는 집단일수록 협력이 더 잘 이뤄질 수 있다. 개인이 처벌을 할 때보다 처벌을 하지 않을 때 더 높은 보수를 얻는다면 처벌은 이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처벌은 처벌자와 처벌 대상자 모두에게 비용을 초래한다. 그러나 처벌자 개인이 부담하는 비용은 처벌자의 수가 증가할수록 크게 감소한다. 처벌자가 집단의 다수를 차지하면 처벌의 위협만으로도 무임승차를 억제할 수 있으므로 실제로는 처벌 비용이 거의 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집단에 강한 상호성을 가진 개인들이 많을수록 그 집단은 더 높은 평균 보수를 얻게 되고, 그렇게 얻게 되는 이득은 집단 내에서 가끔씩 발생하는 무임승차 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처벌 비용을 상회할 수 있다."(350)


"공공재에 기여하는 것 그리고 공공재에 기여하지 않은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모두 이타적 행위이지만 실험 참가자들은 전자보다는 후자에 훨씬 심혈을 기울인다." "규범 위반자를 처벌하는 것은 처벌 대상자의 행위를 교정하려는 바람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인간이 가진 또 하나의 강력한 동기다. 따라서 실험 참가자들 자신의 설명이나 뇌과학 실험의 결과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실험 참가자들은 규범 위반자들을 처벌하는 것 자체로 기쁨을 느끼는데, 이는 우리가 모델화한 진화 과정의 결과일 수도 있다."(380-1) "협력이 적합도를 극대화하는 행위인데도 협력을 하지 않을 정도로 인내심이 부족한 개인들도, 동료 구성원의 이타적 처벌이 존재하면 부분적으로나마 수치심이나 죄책감 때문에 적합도를 증가시키는 행위를 하게 된다. 이 과정을 크리스토퍼 보엠은 제재 수단 선택sanctioning selection이라고 불렀다."(383-4)


"유전자-문화 공진화 모델과 다수준 선택 모델은 협력 행위의 출현과 확산을 매우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첫째,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개체군의 구조적 특성이 초래하는 행위의 유유상종을 기반으로 하는 선택 압력이 인류의 진화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둘째, 규범의 내면화와 집단 내 균등화 제도 그리고 집단 간 적대감과 같은 경험적으로 많이 보고된 행위들의 문화적 전달이 사회적 선호의 진화에 큰 기여를 했을 것이다. 셋째, 행위 실험을 비롯한 인간 행동의 관찰에서 드러난 인간 선호의 특징을 보면 인간의 협력을 가장 잘 설명하는 요소는 진정한 이타주의다. 여기서 진정한 이타주의란 미래의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자신을 희생하면서 가족이 아닌 타인까지 기꺼이 도우려는 의향을 의미한다. 이런 윤리적이고 타인을 고려하며 집단에 이로운 행동을 하려는 사회적 선호는 우리가 묘사한 유전자-문화 공진화와 다수준 선택의 심리적 결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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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와 공작 사이언스 클래식 31
헬레나 크로닌 지음, 홍승효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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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다윈주의, 그 경쟁자들과 배교자들


서로 다른 개체들에서 무작위로 일어나는 변이들의 일부는 유전된다. 이 변이들은 유기체의 생존과 번식에 작용하는 효과와는 무관하게 발생하지만 "자신이 부여하는 적응적인 장점에 따라 차별적으로 승계된다. 따라서 시간이 지날수록 개체군들은 더 잘 적응된 개체들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후 환경이 변해서 이전과는 다른 적응들이 유리해지면 생명체들은 점차 분기할 것이다. 이 모든 것들, 즉 자연 선택이 경이로운 결과물들을 만들어 내는 방식의 핵심은 작지만 많은, 축적된 변화들의 힘이다. 자연 선택이 원시 수프에서 난초와 개미로 단숨에 건너뛸 수는 없다. 그러나 수백만 개의 작은 변화들, 이전에 일어났던 변화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아주 긴 시간 동안 축적된 변화들로, 극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만약 그것이 이익이 된다 해도, 단지 우연일 뿐이다. 하지만 절대로 있을 법하지 않은 우연은 아니다." "즉 자연 선택의 힘이란 무작위로 생성되는 다양성에서 기인한다."(31)


"1859년에는 자연을 해석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방식이 존재했다. 공리주의적 창조론자들은 적응의 복잡성과 숙련된 솜씨, 기발한 유용성, 동물 혹은 식물이 그 주변 환경에 세심하게 들어맞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은 종들 사이의 관계에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유기체들을 개별적으로 연구했다. 반면 이상주의자들은 까다로운 세부 사항들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창조의 거대한 전체 계획과 자연의 다양성을 통합하는 패턴들에 사로잡혀 있었다." "둘 사이의 차이와 절충점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 두 학파는 하나의 원칙으로 수렴된다. 즉 자연을 조사하면 의도적인 설계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다윈주의가 겪은 가장 큰 도전이자, 가장 큰 승리는 바로 적응 증거였다. 또 다른 증거인 다양성의 패턴들은 단지 진화가 사실이라고 상정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다. 주된 문제는 적응적인 설계의 복잡성을 설명할 수 있는 진화 기제를 발견하는 일이었다."(40-1)


"자연 선택의 원료들, 즉 진화의 기반이 된 변화, 차이, 돌연변이들은 생겼을 때부터 설계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것들은 임의로 우연히 생겨났다. 여기서 '임의'는 무작위적으로 보이는 사건들을 의미하지 않는다." "적응적인 가치 측면에서 임의란,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라는 의미다."(43-4) "날개는 새의 환경에 적합하다. 날개가 주변 환경에 꼭 맞게 창조됐기 때문이 아니라 새의 조상들이 과거 환경에 적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완전성'이 나타나리라고 기대한다. 즉 조상 대의 적응이 현재는 관련 구조의 완벽함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역사는 기능 변화의 유산 또한 남겨 놓았다. "어떤 물고기들은 부레가 부력을 만드는 기능을 제대로 발달시키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대신 부레는 원시적인 호흡 기관이나 폐로 바뀌어 있다." 이것은 유능한 창조자의 특징이 아니다. 적응은 "신성한 숙련공"의 작업이라기보다는 "숙련된 땜장이"의 작업에 훨씬 가까워 보인다."(55-6)


"이상주의자들에게 의도적인 설계란 특정 유기체가 아니라 창조의 전체적인 패턴에서 나타났다. 그러므로 전체 종들에 관한 거대한 계획을 유지하기 위해, 특정 종에서의 적응의 효율은 당연히 희생될 수 있다. 이상주의자들은 완전성을 강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완전성을 강조하려고 특별히 애쓰기까지 했다."(58) 그러나 다윈이 생각하기에는 "어떤 '불완전성'도 거대한 패턴의 하위 요소들이 아니며 계통 발생과 자연 선택의 유산이다." "창조주가 한 기관이 다양한 기능들(때로 원래 기능에 비해서 중요성이 적은 기능들)을 수행하게 만들고, 어떤 기관들은 쓸모없는 흔적 기관으로 바꾸어 그들 모두를 마치 서로 무관한 것처럼 배열한 후, 긴밀히 협업하도록 만들었다는 말에 우리는 진정 만족할 수 있을까? 오히려 모든 난초 후손들의 공통적인 특징들이 있으며, 현재 난초들의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구조는 오랫동안 느린 변화의 과정을 거치며 생성됐다는 시각이 훨씬 단순하고 지적이지 않을까?"(61-2)


"몇몇 다윈주의자들이 라마르크주의에 끌리는 이유 중 하나는 다윈 이론은 자연 선택이 작용하는 변이들의 기원을 설명할 수 없으므로, 불완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라마르크주의는 적응의 원천을 설명해 준다. 적응은 환경이 제기한 도전들과 필요에 반응해 나타난다. 또 다른 이유는 희망이다. 다윈주의가 등장한 이래로 종종 표명됐던 이 희망은 라마르크주의가 진화에 질서를, 다윈주의에는 결핍됐다고 느껴졌던 지표를 부여하리라는 희망이다." "새뮤얼 버틀러는 다윈주의가 자연이 맡은 어떤 심각한 역할에서도 마음과 의지와 의도를 제거했다고 느꼈다. 반대로 그는 유기체가 주변 환경에 적절하고 창조적으로 반응하는 라마르크적인 기제에 매혹됐다. 그는 이 기제가 마땅히 주어져야 했던 목적성을 진화의 중심부에 부여했다고 생각했다." 라마르크주의의 마지막 매력은,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측면이다. "라마르크적인 유전 양상이 우리가 더 나은 미래에 도달하도록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다."(76-8)


# 도킨스의 반론

1. 사용과 불용 : 적응은 사용과 불용이라는 매우 제한적인 조건에 얽매이지 않는다. 가령, 원시 형태의 눈을 반복적으로 사용한다고 해서 눈의 적응 복잡성이 초래될 수는 없다.

2. 형질 획득 : 라마르크주의는 지시 모형(그 환경에 적합한 형질을 획득한다)이고 다윈주의는 선택 모형(다양한 변화 중에서 미미하게나마 개선을 불러온 형질이 선택된다)이다. 지시 모형은 선택 모형을 전제로 삼아야 한다.

3. 배 발생학 : 라마르크주의는 배 발생 과정을 청사진과 집의 관계처럼 상호작용이 가능하다고 보지만, 실제로는 레시피와 케이크의 관계처럼 비가역적이다(체세포는 생식세포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 다윈주의를 대체하려는 그 외의 주장

1. 정향진화 : 생물이 자연선택이나 다른 외부의 힘과는 독립적으로, 어떤 예정된 방향을 따라서 진화한다는 주장

2. 돌연변이설 : 돌연변이가 일으키는 불연속적, 급진적 진화가 종의 기원이 된다는 주장


"지난 몇십 년 간 다윈 이론은 혁명적인 변화를 겪었다. 한때 개별 유기체들에 초점을 맞추고 유전 단위를 암묵적으로 언급했던 다윈주의의 설명은 유전자에게 영광의 자리를 내주었다. 또 한때 다윈주의가 유기체의 구조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유기체의 행동, 특히 사회적 행동과 진화의 산물 중 하나인 제도와 책략에 대한 연구가 급증하고 있다."(103) "고전 다윈주의가 개별 유기체와 그 자손들의 관점에서 자연 선택의 작용을 분석할지라도 자연 선택이 궁극적으로는 복제자가 거주하는 유기체보다는 복제자를 다룬다는 생각이, 이 유기체 중심적인 견해 내부의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었다. 이것은 결국 번식 성공(reproductive success)이 실제로 관련되는 부분이다. 오늘날의 다윈주의는 이 시점을 택한다." "유전자의 차이는 표현형 효과에서의 차이로 나타난다. 자연 선택은 표현형의 차이에 작용해서 유전자에 작용한다. 따라서 유전자들은 표현형적 효과의 선택 가치에 비례해 다음 세대에 전달된다."(111)


"유전자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한 유전자의 표현형적 효과가 지닌 전체적인 선택 가치이다. 우리가 초록 눈동자에 상응하는 유전자라고 이야기할 때는, 그 유전자가 가진 효과 중 단지 한 특성만을 골라내고 있을 뿐이다. 갈색 눈동자를 만드는 유전자와 초록 눈동자를 만들어 내는 유전자들 사이의 차이점이 더 가느다란 발톱, 더 긴 팔다리, 더 작은 턱 등 모든 다른 종류의 특징들을 야기할 수도 있다." "이러한 다면 발현 효과(pleiotropic effect, 하나의 유전자가 둘 이상의 표현 형질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유전자의 시각에서 보면, 표현형들은 적응과 부수 효과로 깔끔하게 나뉘지 않는다. 단지 여러 표현형적 효과가 있을 뿐이며, 적응이란 이 효과의 전체 이익이 전체 비용을 상회하는 특수한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자연 선택은 표현형적 효과들에서 오는 되먹임으로 유전자에 작용한다."(112-3)


# 새의 부리는 부리를 만드는 유전자들의 표현형적 효과이지만, 새는 부리를 이용하여 둥지를 만든다. 즉 표현형적 효과가 새의 신체를 넘어 확장된 것이다.


"그렇다면 개체의 이익에 호소하던 유기체 중심적인 이론이,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뛰어난 성공을 거두었을까? 간단히 대답하면 유기체 중심적인 다윈주의는 훌륭한 근사치라는 것이다. 이기적인 유전자에게조차 성공적인 전략은 바로 그 유전자가 깃든 유기체의 생존과 번식을 촉진하는 일일 것이다." "유기체가 단지 유전자들의 운송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질지라도, 유기체는 유전자를 운반하기에 안전해야만 한다. 그래서 게놈 속의 다양한 유전자들은 더 많은 개체의 생존으로부터 이익을 얻을 것이다. 더욱이 유전자들은 혼자 고립되어 선택되는 게 아니라, 유전자 풀(gene pool, 유전자 공급원, 유성 생식을 하는 집단에서 집단 내 모든 개체들 안에 있는 유전 정보의 총합)에 속한 다른 유전자들의 배후 사정과 비교하여 선택된다. 따라서 어느 정도는 자신이 신체를 공유하는 다른 유전자들과 공존해 선택된다."(118)


"우연은 적응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만약 적응적인 가치가 없다고 추정되는 형질들을 설명하는 일이라면, 우연은 타당한 설명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우연은 다윈 이론에서 실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각 세대에서 개체군 내의 유전자들은 전 세대의 유전자들의 표본일 뿐이다. 확실히 자연 선택은 무작위 추출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자연 선택이 아닌 단순한 표집 오차에 따라 일부 유전자들이 제거되고 다른 유전자들이 그 자리를 대체할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어떤 종류의 표집 오차든지, 작은 개체군에서 그 가능성은 증가한다. 유전적 부동(genetic drift)으로 알려진 이 아이디어는 근대 다윈주의의 일부분을 차지한다." 유전자 빈도의 우연한 변화는 선택이 작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준다. 유전적 부동이 적응 이론으로 병합된 "창시자 원리(founder principle)는 특정한 유전형이 우연하게 지리적으로 고립됨으로써, 새로운 유기체 집단이 어떻게 진화할 수 있는지 설명한다."(154)



3부 개미


"새는 경계음(alarm call)을 낸다. 이것은 매우 이타적인 행동으로 보인다. 다른 개체들에게 위험을 경고하는 행위는 포식자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매우 위험한 행동이다. 우리는 이 행동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친족 선택(kin selection)은 자신의 친척들에게 도움을 주는 개체의 행동을 자연 선택이 선호할 수 있다는 원리다. 비록 그 도움이 유기체 자신에게 전가하는 비용이 클지라도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한 유전자를 상상해 보자. 그 유전자는 자신이 자리 잡은 유기체가 다른 유기체들 속에 있는 자신의 복제품을 돕는 방식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문제는 그 도움이 차별적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만약 경계음을 내는 유전자를 보유하지 않은 새들도 경계음을 내는 유전자를 가진 새들만큼이나 많은 도움을 받는다면, 자연 선택은 이 유전자를 선호하지 않을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바로 "가족 내로 이타주의를 제한하는 것이다."(404-5)


"그러나 수혜자가 그 동물의 친족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 이타적인 행동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상호 호혜성(Reciprocity)이 하나의 답이다. 이타주의로 보이는 행동이 실제로는 행위자들에게 이익이 된다. 그들은 각자 협동에 실패했을 때보다 성공했을 때가 더 나은 방식으로, 이타적인 호감을 교환하는 중일 수 있다. 선한 행동을 하는 데 들어간 비용은 답례로 선한 행동을 되돌려 받음으로써 보상된다."(407) "호혜적 이타주의자(reciprocal altruist)들은 서로를 인식하는 수단, 즉 선행을 하는 상대를 선호하고 그렇지 않은 상대를 제외시키는 식별 수단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들이 이 작업을 위해 고도로 발달된 두뇌를 가질 필요는 없다. 아니, 두뇌는 전혀 필요 없다. 친족 선택에서 주목했던 것처럼 지능적인 식별과 동등한 기능을 가진 다른 수단이 그 역할을 할 것이다. 소라게와 말미잘처럼 서로 의존적인 두 종들 사이에서는 접촉이 지속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413)


"친족 선택과 호혜적인 이타적 협동은 이타주의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잘 자리 잡았다. 훨씬 개성적인 설명은 자하비의 핸디캡 이론이다. 우리는 이미 이 이론을 성적으로 선택된 화려함에 대해 직관에 반하는 설명으로 다룬 적이 있다. 이타주의에 적용했을 때, 핸디캡 이론은 세계를 당혹스럽게 뒤집어 놓았다. 보초병처럼 행동하는 새를 고려해 보자. 그 새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친족을 돕거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일까? 자하비는 "전혀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그 새는 스스로를 돕기 위해서, 또 그 일이 위험하기 때문에 보초를 서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봐." 노래꼬리치레는 동료들에게 "나는 보초병의 의무를 짊어질 만큼 충분히 강하고 원기 왕성하고 기민해. 이 비용을 감당하고도 여전히 번성할 수 있어. 당신들도 여기에 의지할 수 있어. 오직 자질이 뛰어난 개체만이 스스로 핸디캡을 그렇게 많이 감당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이다."(414)


"벌목(Hymenoptera, 개미, 벌, 말벌을 포괄하는 집단)과 흰개미목(Isoptera)에는 불임 계급이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을 위해 일하는 종이 있다. 불임 계급들은 동료들의 새끼를 돌보고 군집을 방어하며 그 외 자신의 동료들에게 이익을 주는 수많은 시민의 의무들을 수행한다. 그들은 일생을 다른 개체들의 생존과 번식에 헌신한다. 자식을 남기지도 않는다. 확실히 이 점은 어려움을 제기한다. 자연 선택은 유전이 되는 적응들에 작용하는데 어떻게 이런 행동(이른바 진사회성eusociality)이 형성될 수 있는가? 불임 일꾼들은 어떻게 자기희생을 통해 이익을 얻는가? 또 그들은 어떻게 자신들의 이런 특성을 후세에 전하는가? 그 해답은 어떤 식으로든, 아마 친족 선택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번식 성공을 자식의 측면에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친족 선택 이론은 우리에게 형제나 자매가 딸이나 아들만큼의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465-6)


"공공 이익주의는 너무 멀리 퍼져서 사회성 곤충들의 군집을 상징적으로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하나의 유기체로 보는 시각이 흔해졌다." "이런 견해에서 이타주의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자연적으로 기대되는 현상이다. 어쨌든 공동체가 실제로 하나의 개체라면, '이타주의'는 기능의 전문화일 뿐이다. 불임 일꾼들이 다른 개체들을 돌보는 이유에 대한 물음이, 왜 심장은 몸의 다른 부분을 위해 뛰는지에 대한 물음보다 더 합리적이지는 않다. (이것은 개체를 이기적인 유전자들의 운반자로 보기 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오늘날에는 심장에 대해서조차 이러한 질문을 던질지로 모른다) 곤충 군집은 이해관계가 서로 상충하는 무리가 아니라, "여러 부분들이 상호 연관돼서 협동하고, 그 결과로 생리적인 노동 분화가 나타난" 잘 통합된 전체이다. 이 단일 유기체 모형은 냉혹한 자연 이론을 비평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매력적이었다."(490)


"대부분의 근대 다윈주의자들은 선택압으로써 사회적 압력이 지니는 잠재적인 중요성을 더욱 강조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오늘날의 다윈주의는 '자기 자신 같은 타인들'이 생성 가능하고 강한 선택적인 힘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정신적 자질들의 경우, 심리학자인 니컬러스 험프리는 인간에서 자기 인식(self-awareness)이 진화하는 데 사회적 삶의 복잡성이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숙련되고 민감하게 다루어야 하는, 우리 주위의 특히 어렵고 복잡한 부분을 구성한다. 타인을 이해하고 다루기 위해 마음속에 우리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인간, 즉 자기 자신에 대한 상을 가져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은 타인이 되는 것의 의미에 대한 모형으로 기능한다."(573-4) "헉슬리는 결국 우리의 도덕성이 자연 선택의 명령에 대항하는 전투이자 자연의 진로에 의식적이고 고되게 개입하는, 오직 문화적인 진화의 산물임에 틀림없다고 믿게 되었다."(581)


"인정하건대 우리는 독특하다. 그러나 독특하다는 사실이 독특하지는 않다. 모든 종들이 자신만의 방식을 가진다."(556) "헉슬리에게 문화는 자연 선택의 선호에 틀림없이 위배된다. 문화적인 진화는 우리를 현재의 우리로 만들기 위해, 유전적인 진화에 반해서 진전해야만 했다. 헉슬리가 생각한 것처럼 다윈주의가 냉혹하다면 반드시 이런 일이 일어나야만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다윈주의는 그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 우리의 감탄스러운 자질 중 대부분은 실제로 자연 선택보다는 문화의 유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유전자의 이기성에 굴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문화적 진화임에 틀림없다고 또 우리가 문화적 진화에 의존해야만 한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다. 자연 선택은 자기희생, 선행, 친절함과 타인에 대한 배려를 배제하지 않는다. 다윈주의적인 경로들이 이타주의를 이끌 수 있다."(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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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대학살 - 프랑스 문화사 속의 다른 이야기들 현대의 지성 94
로버트 단턴 지음, 조한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제1장 농부들은 이야기한다 : 마더 구스 이야기의 의미


# 빨강 모자 소녀 이야기 : 엄마의 심부름으로 할머니에게 빵과 우유를 가져가던 소녀는 숲속에서 늑대를 만난다. 늑대는 소녀의 행선지를 물어보고 길을 가로질러 할머니 집에 먼저 도착한 후, 할머니를 죽인 뒤 그 피는 병에 담고 살은 썰어서 접시 위에 놓았다. 그리고 할머니의 잠옷을 입고 침대 속에서 기다렸다. 잠시 후 늑대는 집에 도착한 소녀에게 천장의 고기와 포도주(할머니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한다. 소녀는 그것을 다 먹고 나서, 이불 속에 있는 할머니의 손톱과 이빨이 왜 이렇게 크고 날카롭냐고 물어본다. 그러자 늑대는 "너를 잘 먹기 위해서란다, 얘야."라고 말하고 소녀를 잡아먹었다.


"정치사와 같은 인습적인 장르에서 사용되는 것과는 다른 방법을 요구하는 장르인 망탈리테의 역사에서 정확성이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부적합한 것일지도 모른다. 세계관은 정치적 사건과 같은 방식으로 연도를 정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덜 '사실적'인 것은 아니다. 실제의 세계에 대한 상식적인 관념으로 들어가는 예비 단계의 정신적 배열이 없이 정치학은 발생할 수 없다. 상식은 그 자체로서 실재를 사회적으로 구성하는 것이며 그것은 문화마다 다르다. 상식은 어떤 집단적 상상력을 임의로 꾸며낸 것이 아니라 주어진 사회 질서 내에서의 경험의 공통적 근거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구체제하에서 농민들이 세계를 보았던 방식을 재구성하려면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녔던 것은 무엇인가, 그들 마을의 일상 생활 속에서 그들이 함께 나누었던 경험은 무엇이었는가를 물음으로써 시작하여야 한다."(43)


"마을의 차원에서 역사는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영주 제도와 생존을 위한 경제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흙에 몸을 굽히고는 원시적인 농사 기술 때문에 몸을 세울 기회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금 징수는 마을 내부에 균열의 틈바구니를 열었고 부채는 피해를 가중시켰다. 가난한 사람들은 보다 부유한 사람들에게 빌리는 일이 빈번히 있었다. 그 사람들은 '마을의 장닭 coqs du village'이라고 불리던 몇 안 되는 비교적 부유한 자들로서 시장에 잉여 곡물을 팔고 가축을 키우고 가난한 사람들을 노동자로 고용할 수 있을 정도의 토지를 소유하였다. 빚에 의한 노역 때문에 부유한 농민들은 영주나 교회의 십일조 징수자들만큼이나 증오의 대상이었다. 증오, 선망, 이익의 상충은 농민 사회를 관통하고 있었다. 마을은 결코 행복하고 조화로운 공동 사회 Gemeinschaft가 아니었다. 46-7)


"먹는가 못 먹는가, 그것이 일상 생활에서뿐만 아니라 민담에서도 농민들이 당면하던 문제였다. 이것은 대단히 많은 이야기에서, 때로는 사악한 계모라는 주제와 관련되어 나타난다. 그것은 구체제의 난롯가에서 특수한 반향을 울렸을 것임이 확실하다." 따라서, "요술 막대기, 반지, 혹은 초자연적인 은인이 생겼을 때 농민 주인공에게 처음으로 떠오르는 생각은 언제나 음식이다."(55-6) "농민들에 일상 생활 속에서 소송, 장원의 세금에 대한 속임, 밀렵 등으로 부유하고 권세 높은 사람들을 속이려 하듯 환상 속에서도 그들을 속임으로써 만족감을 얻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환상 속에서 공화주의의 맹아를 찾는다는 것은 허황된 일일 것이다. 공주와 결혼함으로써 왕을 당황하게 만든다는 꿈은 구체제의 도덕적 기반에 도전한다는 것과는 거의 무관하다."(92-3) 속임수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것을 최대한 이용해야 하는 '작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이다."(95)


# 다양하게 변주되는 민담들 : 영혼을 노리는 악마를 속여 양껏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얻어내거나, 위험을 눈치챈 빨강 모자 소녀가 늑대를 기만하고 탈출한다거나, 왕을 속이거나 곤란에 빠지게 하여 공주를 차지하는 등의 이야기들


제2장 노동자들은 폭동한다 : 생-세브랭 가의 고양이 학살


고양이 대학살에서 "우리가 웃음거리를 찾아내지 못한다는 사실은 산업화 이전 유럽의 노동자와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거리에 대한 하나의 증거이다." 그 거리를 인식하는 것이 문화 연구의 출발점인데, "왜냐하면 인류학자들은 낯선 문화에 침투하려는 시도에 있어서 최고의 입구는 그것이 가장 불투명하게 보이는 지점이라는 것을 알아냈기 때문이다."(115) "콩타는 그 사건을 노동자와 '부르주아' 사이의 운명의 불균형, 즉 일·음식·잠이라는 삶의 기본적 요소에 있어서의 불균형에 대한 언급이라는 컨텍스트 속에 위치시켰다. 그러한 부당한 처사는 견습공들의 경우에 특히 극악했다. 그들은 동물처럼 취급되었던 반면, 동물들은 그들의 머리 위로 올라가 그 소년들이 차지했어야 하는 자리인 주인의 식탁으로 승진되었다. 견습공들이 가장 혹사당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텍스트는 고양이를 살해한 것이 노동자들 전체에 퍼져 있던 '부르주아'에 대한 증오를 표현하였던 것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116-7)


확실히 '부르주아'는 "다른 문화권에 소속되었는데 그 문화권은 무엇보다도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규정된다."(122) 반면 18세기 직공들은 "게으르고, 변덕스럽고, 우유부단하고, 신뢰할 수 없다는 공통적인 가정" 아래 취급되는 '물건' 같은 신세에 놓여 있었다.(120) 그렇다면 왜 하필 고양이인가? 폭동과도 같은 환락이 허용되는 기간인 사육제 때 젊은이들은 규범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서 사회적 경계를 시험했고, 그의 일환으로 고양이를 고문하고 처형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양이는 6월 24일 하지에 거행되었던 세례 요한 성인의 축일에도 등장했다. 군중들은 모닥불을 피워 그 위를 뛰어 넘고 주위에서 춤을 추며 그해의 남은 기간 동안 재앙을 피하고 복을 받으려는 희망에서 마법적인 힘을 지녔다는 물체를 불 속에 던져넣었다. 이때 즐겨 던지던 것이 고양이로서 자루 속에 넣어 묶거나 끈에 매달아 늘어뜨리거나 말뚝에 묶여 태워졌다."(123-4)


# 고양이가 상징하는 의미

1. 마녀로 변신하거나 악마와 관련된 주술적인 힘

2. 가정에서 발동되는 (여)주인과의 일체감

3. 성적 은어


불완전하게나마 부르주아의 착취를 상징하는 고양이가 저지른 죄는 "견습공들에게 혹사를 시키고 제대로 먹이지 않은 죄, 죄인들이 모든 일을 하는 동안 사치 속에서 살았던 죄, 한두 세대 전에 혹은 인쇄업의 출발시에 존재하였던 초기의 '공화국' 속에서 주인들이 하였다고 전해지듯이 일꾼들과 같이 일하고 먹는 대신에 인쇄소에서 물러나 임금 노동자로 인쇄소를 채우려고 하였던 죄 등이다." "확실히 그들은 인격 모독을 느꼈고 죽임의 항연 속에 그것을 폭발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분노를 축적하였다. 반세기 후에 파리의 직공들도 같은 방식으로 폭동을 일으켜 무차별의 학살과 즉석의 인민재판을 결합시켰다. 고양이 학살을 프랑스 혁명의 9월 학살의 예행 연습으로 보는 것은 어리석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록 고양이 학살이 상징의 수준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할지라도 그 폭력성의 분출은 민중 봉기를 시사하였다."(142-3)


"고양이는 그들의 목적에 완전하게 부합되었다. (안주인이 키우는 고양이인) 그리스의 등뼈를 강타함으로써 그들은 주인의 아내를 마녀이자 동시에 음란한 여자라고 부른 것이었고 동시에 주인을 속고 있는 남편인 바보로 만들었다. 이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전달된 환유적 모욕이었고 그것이 성공한 이유는 고양이가 부르주아의 생활 방식에서 편애받았기 때문이었다. 동물을 학대하는 것이 '부르주아'에게 낯선 것이었던 만큼 애완 동물을 키운다는 것은 노동자들에게 낯선 일이었다. 이리하여 병존할 수 없는 감수성 사이에서 함정에 빠진 고양이는 양측 세계 모두에서 최악을 맛보았던 것이다."(147) 다만 이러한 장난은 19세기말에 프롤레타리아트화가 시작되기 전까지 대체적으로 상징적인 단계에 국한"되었던 바, 인쇄공들은 "동지회를 조직하고, 파업을 감행하고, 때로는 임금 인상을 강요하였지만 (여전히) 부르주아에게 복종하고 있었다."(148)


제3장 한 부르주아는 그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한다 : 텍스트로서의 도시


<1768년에 만든 몽펠리에 시의 상태와 설명>을 쓴 그는 "한편으로는 귀족과, 다른 한편으로는 평민들과 자신을 구분하였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기 주장에 공개적으로 집착하며 매페이지마다 확인되고 있는 그의 공감대는 도시 사회의 중간 범위 어디엔가 그를 위치시킨다. 즉 그는 의사·법률가·행정가·금리 생활자 등 대부분의 지방 도시에서 인텔리겐치아를 형성하였던 자들에 동조하였다. 이 사람들은 '구체제의 부르주아'에 속한다. 그들은 18세기적인 의미에서 부르주아였고 그 당시의 사전은 부르주아를 단지 '도시의 시민'이라고 정의하였을 뿐이다."(164) 몽펠리에 대행진은 여전히 귀족 계급에게 귀속되는 "도시 사회의 집합적인 질서를 표현하였다. 이것은 도로 위에서 펼쳐졌던 진술이었고 그것을 통하여 도시는 그 자체를 그 자체에게 내보였다. 그리고 때로는 신에게도 내보였다. 왜냐하면 몽펠리에가 한발이나 기근에 시달릴 때에도 행진은 벌어졌기 때문이다."(173-4)


"행진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중요한 장소를 부여하였던 반면 상인들을 위한 장소는 별로 없었고 제조업자를 위한 장소는 전혀 없었다. 또한 인구의 큰 부분을 차지하였던 거의 모든 장인·일용 노동자·하인들도 배제되었다. 그리고 여섯 명 중 한 명 꼴로 존재하던 신교도들도 제외되었다." "행진자들의 존엄성은 행진자들과 길가에 늘어선 세수하지 않은 일반 구경꾼들 사이에 그어진 구분보다는 (성직자·귀족·평민으로) 행진 대열 내에서 그어진 구분에서 발생하였다. 인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몽펠리에에서도 인간의 신분homo hierarchicus은 사회의 양극화라기보다는 단편화를 통하여 번성하였다. 계급으로 구분되는 대신에 사회적 질서는 세분화된 정도의 존엄성을 따라 구경꾼들을 통하여 파문쳤다." "제외와 포함은 경계 설정이라는 동일한 과정에 속하며 그것은 길거리에서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도 일어났던 과정이었다. 그러나 그 경계는 실행됨으로써 그 힘을 획득하였다."(177-9)


"<설명서>의 후반부는 구조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것은 전반부에서 휩쓸고 지나갔던 행진에 대조되는 몽펠리에의 견실한 주택 하나를 연상시킨다. 부르주아는 이 건물에서 본층을 차지하면서 귀족을 '귀족의 층piano nobile'에서 상층 꼭대기로 밀어올렸던 반면 평민들은 계단 밑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신분의 언어는 존엄성의 언어만큼이나 전근대적이었다. 우리의 저자는 일련의 구식 범주를 사용하였고 그것에서 구식의 의미를 제거하고 재배열하여 19세기에야 공개리에 출현하게 될 사회적 질서와 흡사한 모습을 전달하게 하였다. 그 사회란 옛 귀족과 신흥 부자의 혼합체에 의해 지배되는 '명사들'의 사회로서, 그 사회의 근본적인 동인은 부富였지만 그 부는 산업혁명이 아니라 토지·관직·금리·무역 같은 전통적인 원천으로부터 파생되었던 발자크식의 사회였다."(181-2) 


<설명서>의 저자는 '부르주아 신분'을 귀족과 평민 사이에 위치시키면서, 그 단절면에 대해 밀접한 경계를 유지했다. 즉 부르주아의 지위를 "소극적으로, 즉 적대적인 이웃 신분과 관련하여 정의했다."(184) 그가 진정으로 경악한 지점은 "평민의 '부르주아화'였다. 제2신분에 대한 최대의 위협은 제3신분과의 접경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평민들의 사악성을 네 개의 항목으로 요약했다. 1) 그들은 가장 작은 기회라도 생기면 고용주를 기만하고 속인다. 2) 그들은 일을 제대로 처리하는 적이 없었다. 3) 그들은 방탕의 기회를 포착하기만 하면 일손을 놓는다. 4) 그들은 부채를 쌓고 결코 상환하지 않는다."(188) "평민들은 그 자체로서도 악이었지만 그들의 신분을 벗어나게 된다면 사회 질서 전체에 대한 위협이었다. 사회의 단층면은 신분·지위·집단·계급, 또는 모든 종류의 단체가 만나는 접합선을 따라 이어졌다. 따라서 우리의 저자는 가능한 모든 지점마다 경계선을 강화시켜야 한다고 제안했다."(195)


'점잖고 행실이 좋은 정직한 사람'이라는 이상은 <설명서>의 여러 지점에서 다시 나타난다. "그것은 귀족주의적인 17세기 관념의 고상함에 근원을 두고 있지만 1768년에 이르면 이것은 부르주아적인 색채를 획득한다." "신사와 부르주아라는 두 용어는 몰리에르의 시대처럼 웃기는 모순이 더 이상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귀족의, 다른 한편으로는 장인의 옆에 서 있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어떠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부르주아 신사는 자신의 생활 방식을 개발하였다. 부유하고, 잘 먹고, 깔끔하게 입고, 취향에 맞는 물건에 둘러싸여 있고, 자신의 쓸모에 대해 확신하며 자신의 철학이 굳건한 그는 새로운 도시성에 기뻐한다. "행복한 자는 대도시에 사는 사람이다"라고 우리의 저자는 결론하였다. 그 결론은 식량 무료 배급을 받으려는 줄이나 구빈원이나 정신병원이나 교수대를 참작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의 추구를 선도하였던 사람들, 즉 제2신분의 '정직한 사람들'에게 적합한 것이었다."(200-1)


제4장 한 경찰 수사관은 그의 명부를 분류한다 : 문필 공화국의 해부


요즘 말로 하면 반체제 인사를 관리하던 데므리는 보고서를 기안하면서 오늘날 "생각하기조차 어려운 문학적 감수성과 관료적 질서의 결합을 보여준다. 그것은 저자들의 종교적·정치적 견해의 성격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들 문체의 품격에 대해서도 많은 언급을 포함하고 있다."(226)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데므리는 "문필 공화국의 법칙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그가 감시하던 사람들의 경력 속에서 그 법칙이 작용하는 것을 관찰하였다." 가령 드 베르니 원장 신부의 경우를 보면 데므리는 "가족 관계, 후견 관계, '보호제'의 그물망 속에 그를 위치시켰는데 그 단어는 중심적 용어로서 보고서 전반에 걸쳐 나오고 있다. 군주와 왕비에서부터 싸구려 팸플릿 작가에 이르기까지 경찰 명부 속의 모든 인물들은 보호를 찾고 받고 베풀었다." "이것이 그 체제가 움직이던 방식이었다. 경찰은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원리를 문제삼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전제로 받아들였다."(235-6)


"문인들의 존엄성과 그들 소명의 고결성은 이미 계몽 사상가들의 저작에서 하나의 중요 주제로 등장하지만, 데므리의 보고서에서는 그러한 주제를 찾을 수 없다. 비록 경찰은 한 작가를 보면 그를 알아보고 그를 데므리의 명부에 포함시킴으로써 다른 프랑스 사람들과 다르게 분류하였지만, 그들은 작가가 하나의 직업 혹은 사회 속에서의 지위를 지녔다고 말하지 않았다." "작가는 아직 현대적인 형태를 취하지도, 보호자에게서 자유롭지도, 문필 시장에 동화되지도, 한 직업에 전념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경찰은 작가를 어떤 인습적인 범주에도 위치시키지 못하였다." 데므리는 종종 작가들을 최저 한계에 도달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소년들garcons'이라고 지칭했는데, 이것은 "경찰 명부에 '신분이 없는 사람들gens sans etat'이라고 등장하였던 사람들, 그늘 속에 있던 현대 지식인들의 선구자들, 즉 위상을 정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위상을 정하는 것에 도움이 되었다."(246-7)


데므리가 궁극적으로 수호하고자 했던 "파벌이나 가신 집단이 비방을 받았다면 그것은 국가의 문제였다. 왜냐하면 궁정 정치의 체제 속에서 인격은 원리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고 개인의 신용은 잘 씌어진 팸플릿에 의하여 침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상범을 다루는 경찰 작업은 팸플릿 작가들을 잡아내고 비방이 인쇄되어 나타난 형태를 가리키는 중상libelles을 억제하는 문제인 경우가 종종 있었다."(252) "데므리는 혁명을 예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문필 공화국을 수사하면서 그는 적대적인 대중 여론의 물결에 더욱더 나약하게 노출된 왕국을 보았다. 후견인이 바뀌어가며 정신廷臣들이 부침하던 당시에 팸플릿 작가들은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그 체제에 대한 존경을 잠식시켰다. 그리고 위험은 모든 곳에 숨어 있었다."(255) 데므리는 무신론이 왕의 권위를 침해한다고 믿었고, 그가 보기에 디드로나 달랑베르 같은 자유사상가들은 중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위험한 존재들이었다. 


제5장 철학자들은 지식의 나무를 다듬는다 : <백과전서>의 인식론적 전략


"분류 정리를 한다는 것은 권력을 행사하는 일이다. 사과quadrivium가 아니라 삼과trivium로 분류된 과목이나 '경성硬性' 과학이 아니라 '연성軟性' 과학으로 분류된 과목은 결실을 맺지 못하고 시들지 모른다. 잘못된 서가에 꽂힌 책은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다. 인간 이하라고 규정된 적은 절멸될지도 모른다. 모든 사회적 행위는 도서관의 도서 목록이나 조직 도표나 대학의 학과처럼 명확하게 다듬어졌건 아니건 분류의 도식에 의해 결정된 경계를 따라 흐른다."(272) "디드로의 <백과전서>의 서두에 있는 도해, 즉 베이컨과 체임버스에게서 이끌어낸 유명한 지식의 나무는 새롭고 과감한 것을 제시하였다. 기존 체계 내에서 학문들이 어떻게 변경될 수 있는지를 보이는 대신에, 이것은 신성하다고 사람들이 주장하던 것의 대부분을 학문의 세계에서 배제시킴으로써 알려진 것과 알 수 없는 것 사이에 경계를 설정하려는 시도를 표명하였다."(274)


"종교를 철학에 종속시킴으로써 디드로와 달랑베르는 종교를 효과적으로 탈기독교화시켰다. 물론 그들은 정통을 지키고 있음을 공언하였다. 신은 '신성한 역사' 속에 스스로를 계시하였다고 그들은 기록하였다." 백과전서파의 전제는 "경건한 것처럼 들리지만 결론에서는 신학을 이성에 종속시키려던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이단의 냄새가 났다. 그리고 마치 감각적 인식을 쌓아올려 보다 복합적이고 추상적인 관념으로 만들어내면 신에 대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던 것처럼 그들은 로크류의 방식으로 이성을 묘사하였다." "베이컨은 이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신성한 학문'을 '인간적 학문'이나 정신의 능력과는 상관 없는 다른 나무에 위치시켰다. 이렇듯 베이컨은 실지로 계시 신학과 자연 신학을 위하여 두 개의 지식의 나무를 상정하였던 반면 백과전서파는 계시 신학과 자연 신학을 합쳐 단일한 나무에 올려놓고 그 양자를 이성에 종속시켰다."(284-5)


"<예비 논고>의 마지막에서 달랑베르는 자신의 동료 계몽 사상가들을 문인 중의 극치, 뉴턴과 로크의 후예라고 찬양함으로써 '백과전서파'와 '계몽사상가'라는 용어가 의미론적 영역에서 '학자', '현학가', '지성인'과 같은 용어들을 압도하게 되는 의미의 변천에 기여하였다." "<예비 논고>의 부분들은 단일한 전략을 수행하기 위하여 서로 맞물려 있다. 이것은 옛부터의 학문의 여왕을 왕좌에서 내려오게 하고 그 자리로 철학을 격상시켰다. 그러므로 현대판의 <신학 대전>은 중립적인 정보 편찬물과는 거리가 멀게 지식을 형상화하여 그것을 성직자에게서 빼앗아 계몽 사상에 동참하는 지식인들의 손 안에 넣어주었다. 이러한 전략의 궁극적인 승리는 19세기 중에 교육의 대중화와 현대적 학문 분야의 출현과 함께 도래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 중요한 과업은 백과전서파가 지식은 권력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지식의 세계 지도를 그림으로써 지식을 정복하려고 하였던 1750년대에 이루어졌다."(295-6)


제6장 독자들은 루소에 반응한다 : 낭만적 감수성 만들기


계몽 사상가들은 세계를 지도화하여 독자들의 정신에 새로운 세계관을 각인시키고자 했다. 그렇다면 18세기 프랑스에서 독서란 무엇이었을까? "18세기에 책은 손으로 만들어졌다. 종이는 낱장마다 개별적으로 정교한 공정을 거쳐 만들어졌기 때문에 같은 책 속에서도 페이지마다 달랐다. 각 글자·단어·행이 저마다 장인이 개성을 발휘할 기회를 제공하는 솜씨에 따라 만들어졌다. 책은 낱권마다 자체의 특성을 지니는 개체였다." "독자는 활자의 도안을 살피고 간격을 조사하고 안팎의 인쇄면이 일치하는가를 검토하고 주형을 평가하고 인쇄의 균등성을 검사하곤 하였다. 그는 우리가 한 잔의 와인을 음미하듯 책의 표본을 조사했다. 왜냐하면 그는 종이 위에 있는 것이 주는 인상을 바라보았지 단순하게 그것을 가로질러 그 의미에 도달하려고 하였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단 책의 물리적인 성질을 완전하게 자기 것으로 만든 후에야 그는 정좌하고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하였다. 316)


당대에 유행한 <독해 선집>과 <강의의 원리>를 저술한 비아르에게 이해란 단어의 정복을 뜻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텍스트의 "의미는 문법이나 구조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의미론적 단위 속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비아르는 마치 텍스트의 이해는 저절로 생기는 것처럼 단어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319) "루소는 독자들을 텍스트 속으로 안내하여 자신의 수사법으로 그들의 방향을 정해주고 그들이 어떤 역할을 맡도록 만들었다. 루소는 독자들에게 읽는 법을 가르쳐주려고 시도하기까지 하였고 독서를 통하여 그들의 내적 삶에 도달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전략은 인습적인 문학과의 결별을 요구하였다. 이야기의 뒤에 숨어버리고 볼테르의 방식대로 등장인물들을 인형극의 인형처럼 줄로 조종하는 대신에 루소는 자신을 자신의 저작 속에 던져넣었고 독자들도 똑같이 하기를 기대하였다. 그는 작가와 독자 사이의, 독자와 텍스트 사이의 관계를 변형시켰다."(323)


루소식의 독서는 "독자와 텍스트 사이의 관계를 혁신시켜 낭만주의로의 길을 열게 될 것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16~17세기에 만연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독서법, 즉 신의 말씀을 제삼자의 개입 없이 흡수하기 위한 독서법을 부활시킬 것이었다." "칼뱅파이건 얀센파이건 경건파이건 이전 종교의 독서와 루소식의 독서를 구분시켰던 것은 가장 의심스러운 형태의 문학인 소설을 마치 성경을 읽듯이 읽으라는 요청이었다."(329-30) "이런 종류의 독서는 믿음의 비약을 요구하였다. 그것은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겪으면서 어떤 식으로건 고통을 받았음이 확실하고 그것을 엮어서 문학을 초월하는 진리로 만들어냈을 저자에 대한 믿음이었다. 궁극적으로 루소 소설의 힘은 그 자신의 개성의 힘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프로메테우스로서의 저자라는 새로운 개념을 출발시켰고 그것은 19세기 멀리까지 지속될 것이었다. 그리하여 <신엘로이즈>에서 그는 장면 뒤에 숨는 대신 무대의 전면으로 걸어나왔다. 331)


"가장 세련된 학자들, 혹은 볼테르나 그림처럼 정확성에 까다로운 사람들은 <신엘로이즈>의 문체가 과장적이고 주제는 혐오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회 모든 계층의 평범한 독자들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그들은 울었고, 질식하였고, 격노했고, 자신들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고 더 잘 살자고 결심했고, 흉금을 털어놓고 더 많은 눈물을 흘렸으며, 루소에게 편지하여 가슴 속을 털어놓았다."(342) "1761년 <신엘로이즈>에 의하여 일어났던 눈물의 홍수는 또 다른 하나의 전낭만주의적 감상의 파도라고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새로운 수사학적 상황에 대한 반응이었다. 독자와 작가는 각기 텍스트에서 상정된 이상적인 모습을 취하면서 인쇄된 글을 넘어서 교류하였다. 장-자크는 자신을 올바로 읽을 수 있었던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혼을 열어놓았고 그의 독자들은 자신들의 영혼이 일상적인 실존의 불완전성을 넘어 격상되었다고 느꼈다."(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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