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유신 -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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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유신의 몸과 광주의 마음을 가진 그대에게


유신시대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뼈대를 만든 시기다. 유신체제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던 민주화운동 세력조차 유신시대에 만들어진 사람들이었다. 1970~1980년대의 민주화운동 세력은 한마디로 유신의 몸과 광주의 마음을 가진 세대였다. 그들은 목이 터져라 자유와 민주를 외쳤지만 정작 자유를 누려본 적도, 민주주의가 몸에 밸 기회도 갖지 못한 불행한 세대였다. 유신시대는 일제가 키워낸 식민지 청년들이 장년이 되어 사회를 운영해간 시기였다. 이 시기는 친일잔재 청산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 친일잔재를 청산하려던 세력이 거꾸로 친일파에게 역청산당한 것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참혹하게 보여준 시기였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로의 ‘퇴행’은 박정희가 체질에 맞지 않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틀을 벗고 젊었을 때부터 익숙한 일본식 모델을 ‘한국적 민주주의’로 포장해 들고나온 것이었다. 유신시대는 김근태와 그 벗들에게 내란음모라는 어마어마한 죄목을 뒤집어씌운 자들이 일으킨 진짜 내란의 시대였다. 15-6)


제1부 헌정의 파괴


1971년 4월의 제7대 대통령 선거와 5월의 제8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는 박정희에게 큰 충격이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김대중의 거센 도전을 받아 상당히 고전했고,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여당인 공화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야당인 신민당이 의석을 크게 늘리며 개헌 저지선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제 헌법 절차에 따라 정상적인 방법으로 박정희가 대통령직 네 번째 임기에 도전하는 길은 완전히 막혀버린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야당에 정권을 내준다는 것은 꿈도 꿔본 적이 없고, 집권 세력 안에서도 2인자를 용납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집권 세력 안에서 김종필이 2인자로 부상하는 것을 막으려 공화당 안에 백남억, 김성곤, 길재호, 김진만 등을 주축으로 한 ‘4인 체제’를 구축했다. 4인 체제의 실력자였던 김성곤(쌍용그룹 창업주)은, 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절친한 친구로 5·16 직후 김일성의 밀사로 남파되었다가 처형당한 황태성 등과 함께 경북 지방에서 좌익 활동을 한 바 있었다. 20)


공화당의 재정위원장으로 정치자금을 주무르며 실력자로 부상한 김성곤은 1975년 박정희가 물러나는 것을 전제로 2원집정부제 개헌에 대한 구상을 다듬으면서, 지방의 시장·군수와 경찰서장 등에 자기 사람을 심는 데 분주했다. 박정희는 김종필(JP) 계열의 내무장관 오치성을 내세워 김성곤 등 4인 체제가 지방 요직에 심어놓은 사람들을 제거했고, 이에 분노한 김성곤 등은 야당이 내무장관 해임 건의안을 내자 이에 동조하여 오치성의 해임 건의안을 통과시켜버렸다. 이것이 유신 1년 전의 이른바 10·2 항명파동이다. 박정희의 특명으로 김성곤 등 공화당 의원 23명이 중앙정보부로 연행되어 고문과 구타를 당했는데, 김성곤은 콧수염이 뽑히는 모욕을 당하기까지 했다. 10·2 항명파동으로 공화당 안에서 박정희의 친정 체제가 확립되었다. JP계와 4인 체제 사이의 이이제이, 3선개헌과 정보정치의 주역이었던 ‘날으는 돈가스’, ‘공포의 삼겹살’ 김형욱에 대한 토사구팽 등을 거치며 집권 세력 내부를 완전히 평정한 것이다. 20-1)


미국 대통령 닉슨은 1969년 7월 아시아에 있는 미국의 동맹국은 “스스로가 자신의 방위에 대하여 일차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미국은 이 정책에 따라 베트남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고, 한반도에 주둔했던 미군의 철수도 시작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북한의 전면남침이 임박했다고 떠들어댔지만, 미국은 유신이 선포된 1972년 10월의 한반도 안보 상황은 한국에 매우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파악했다. 무엇보다도 남북대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중국과 소련 두 사회주의 강대국은 서로 반목하면서 각각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하고 있었다. 이런 데탕트 분위기에서 이북이 중국이나 소련의 지원 내지는 동조 없이 한반도에서 전면적인 군사행동을 감행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한반도 안팎으로 여러 가지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자 박정희는 1971년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다. 이어 12월 27일 새벽에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22-3)


박정희는 유신 쿠데타를 준비하면서 미국과 협의하거나 미국의 재가를 받지 않았다. 국무총리 김종필이 주한 미국대사 하비브를 통해 미국에 공식적으로 계엄 선포와 국회 해산에 대해 통보한 것은 유신 선포 하루 전인 1972년 10월 16일 저녁이었다. 하비브는 뒤늦은 통보에 불쾌해했지만, 국회에서 야당 의원이 공개적으로 비밀공작의 윤곽을 꼬집어 말할 정도로 소문이 파다했던 초헌법적 조치가 곧 취해질 것이라는 점을 미국이 사전에 전혀 감지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닉슨 독트린을 통해 아시아에서 한 발을 빼기 시작한 미국은 아시아의 동맹국들이 반공독재 체제를 강화하여 미국이 한 발 빠져나간 공백을 메우려는 것을 묵인해줄 수밖에 없었다.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는 박정희보다 3주 앞선 9월 21일, 공산주의자와 파괴분자들이 국가적 위기 상황을 촉발하고 있다며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헌정을 중단시켰다. 마르코스의 독재 체제 강화를 묵인했던 것처럼 미국은 박정희의 독재 체제 강화를 묵인해주었다. 27)


박정희에게는 메이지유신 말고도 따라 배운 또 하나의 유신이 있었다. 바로 유산된 유신, 쇼와유신(昭和維新)이다. 군부 내의 급진파 청년장교들과 기타 잇키(北一輝) 같은 초국가주의자들은 메이지유신을 재현해보자고 1936년 2월 26일 천황 친정을 명분으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들은 조선총독을 지낸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등 대신 여럿을 살해했지만 천황의 복귀명령으로 진압되어 주동자 15명이 사형을 당했다. 의회정치의 타도, 구정치인들의 부정부패 일소, 재벌 해체, 빈부격차 해소 등을 주장한 박정희의 생각은 쇼와유신을 추진하다가 진압당한 황도파 청년장교들의 생각을 빼닮았다. 1930년대 일본의 급진파 청년장교들이 10년 정도의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못 견디고 뛰쳐나갔다면, 박정희는 1년여에 불과했던 제2공화국의 민주주의 실험이 혼란이라며 판을 깨버렸다. 박정희의 강력한 식민지 체험이 만들어놓은 내면화된 세계관이 해방 30년이 다 되어서 제도로, 체제로 등장한 것이다. 33-4)


제2부 헌법 위의 한 사람


유신헌법 제40조는 대통령이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일괄 추천하여 후보자 전체에 대한 찬반을 투표에 부쳐 선출하도록 했다. 형식적으로는 간선의원이지만 사람들은 ‘관선의원’이라 불렀다. 이렇게 추천받은 국회의원의 임기는 지역구에서 선거로 선출된 의원 임기 6년의 절반인 3년이었다. 국회는 지역구에서 선거를 거친 ‘민선의원’ 146명과 대통령이 임명한 ‘관선의원’ 73명으로 구성되었다. 유신정우회(약칭 유정회)는 이렇게 선출 방식도 다르고 임기도 절반밖에 안 되는 73명의 ‘여권’ 의원들이 모인 교섭단체였다. 유신국회였던 제9대와 제10대 국회에서 의석수로는 원내 제1교섭단체였지만, 정당이 아니니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편찬한 《대한민국정당사》에는 나오지 않는다. 유정회는 원내 제1교섭단체였지만 정당도 아니었고 정강정책도 없었다. 그런 점에서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에서 이른바 ‘신체제’를 표방하면서 여러 정당들이 해산한 뒤 통합되어 출현한 대정익찬회와 유사하다. 37-9)


박정희는 5사단장 시절에 만난 윤필용을 총애하여 7사단장, 1군 참모장, 군수기지 사령관, 1관구 사령관 등 새로운 보직을 맡을 때 대부분 윤필용을 데리고 갔다. 5·16 군사반란 당시 윤필용은 육군대학에서 수학 중인 관계로 이른바 ‘혁명주체’가 아니었지만, 박정희와의 개인적인 인연 덕분에 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 또는 비서실장 대리로, 육군 방첩대장, 수경사령관으로 20년간 최측근에서 박정희를 보좌했다. 윤필용은 육군 방첩대장으로 있던 1965년 5월 원충연 대령 등이 주도한 쿠데타 모의를 적발하는 공을 세웠다. 원충연은 윤필용이 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을 할 때 최고회의 공보실장을 맡았던 박정희의 또 다른 측근이었다. 1960년대 초반에 발생한 수많은 반혁명 사건은 사실 모두 조작된 것인데, 원충연 사건만큼은 병력 동원이 계획된 실체가 있는 사건이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다른 반혁명 사건의 주역들은 모두 금방 풀려났지만, 원충연은 박정희가 죽고 난 다음에야 16년 만에 풀려났다. 43-4)


유신을 단행하기 이전에도 박정희는 2인자를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조금 치고 나간다 싶으면 다른 측근들의 견제가 집중되었다. 김종필 세력이 칼을 맞았고, 김성곤 등 4인 체제도 몰락했다. 유신을 전후한 시기에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역할이 증대되었다. 이후락이 평양에 가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와 7·4 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내자 그의 대중적 인기는 치솟았다. 유신의 기획과 실행 과정에서 이후락의 역할은 뚜렷했다. 윤필용도 처음에는 이후락을 견제했으나 이후락에 대한 박정희의 신임이 두터운 것을 보고 그와 손을 잡았다. 이후락과 윤필용이 가까워지는 것을 정작 그들의 보스 박정희는 바라지 않았다. 박정희뿐이 아니었다. 김재규의 뒤를 이어 보안사령관을 맡은 강창성은 이후락-윤필용의 구도에 맞서 박종규와 손을 잡았다. 이들 4인 이외에 박정희의 측근 한 사람이 등장한다. 청와대 대변인과 문공부 장관을 지낸 뒤 서울신문사 사장으로 있던 박정희의 골프 파트너 신범식이다. 45)


윤필용이 이후락과 작당하여 박정희가 노쇠하였으니 물러나게 하고 다음은 ‘형님’(이후락)이 해야 한다는 불경한 소리를 하고 다닌다는 것을 박정희에게 고자질한 이가 바로 신범식이다. 신범식도 자신이 윤필용 사건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강창성은 윤필용 등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육사 11기 이하의 장교들로 구성된 하나회라는 비밀 사조직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강창성은 사건을 확대하여 하나회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를 준비했다. 위기에 빠진 전두환, 노태우를 구해준 것은 박종규와 서종철(국방부 장관), 진종채(박정희의 대구사범 후배로 전두환의 전임 보안사령관) 등 영남 출신 장성들이었다. 그들은 박정희에게 강창성을 보안사령관에 그대로 두면 “경상도 장교의 씨가 마르겠다”며 박정희 자신이 군대 내의 친위대로 육성한 하나회가 초토화되는 것을 막아달라고 요청했다. 일국의 장성을 잡아다 모진 고문을 가한 강창성은 전두환 등 신군부가 집권한 뒤 감옥에서 삼청교육을 받았다. 45-7)


윤필용 사건으로 방아쇠가 당겨지면서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났고, 그 여파로 박정희 주변의 권력구도가 크게 변화했다. 청와대 비서실장 김정렴을 제외하고는 핵심 측근들 모두가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 빨려 들어갔다. 윤필용은 감옥으로 갔고, 중앙정보부장 자리에서 물러나 있던 김형욱은 윤필용이 잡혀가자 바로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다는 핑계로 대만으로 빠져나갔다가 미국으로 망명해버렸다. 이후락은 윤필용 사건으로 흔들린 입지를 만회하기 위해 김대중 납치 사건에 적극 나섰다가 교체되었고, 강창성은 토사구팽당했다. 김대중 납치 사건은 재일동포 사회에 반박정희 정서가 폭발하도록 하여 문세광의 박정희 저격미수(육영수 서거) 사건을 낳았고, 경호실장 박종규는 이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그 후임자가 된 것이 차지철이고, 중앙정보부장 자리는 신직수를 거쳐 김재규에게 돌아갔다. 박정희의 죽음을 가져온 구도는 박정희 자신만이 전모를 알고 있는 윤필용 사건에서부터 짜인 것이다. 48)


1974년 1월 8일 박정희는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발동했다. 긴급조치 1호의 주요 내용은 유신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와 유신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는 것이었다. 긴급조치로 금지한 행위를 방송, 보도, 출판, 기타 방법으로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언동 역시 금지되었다. 이 조치를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여 비상군법회의에서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했다. 대통령의 명령이 법률과 동일한 효과를 가질 수 있는 것이 긴급조치이니 3권분립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박정희의 집권 18년 중 절반 이상인 120개월가량이 계엄령, 위수령, 비상사태 또는 긴급조치였다. 유신시대는 1973년에 몇 달과 1974년 육영수 여사 서거 후 이듬해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될 때까지의 몇 달 만을 제하곤 쭉 긴급조치의 억압과 공포가 지속된 시기였다. 60)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통일운동가 8명의 목숨을 앗아간 박정희 정권 시기 최악의 공안사건이다. ‘재건’이란 말로 알 수 있듯이 이미 1964년에 인혁당(인민혁명당)이란 이름의 단체를 결성하려 했다는 대대적인 공안사건이 있었다. 그래서 1964년의 사건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10년 뒤 발생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2차 인혁당 사건이라 부르기도 한다. 두 사건은 주요 피해자는 물론 그 가해자도 겹친다. 1차 사건 당시의 라인업이 중앙정보부 수사과장 이용택, 검찰총장 신직수, 법무부 장관 민복기였다면, 10년 뒤 이용택은 중앙정보부 6국장, 신직수는 중앙정보부장, 민복기는 대법원장으로 사건을 처리했다. 1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은 엄청난 고초를 치렀음에도 개별적으로 공개적인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지만, 1차 인혁당 사건의 충격이 너무 컸던 탓인지 비밀지하혁명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는 데는 주저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들이 아무리 조심하려 해도 험난한 세월은 이들을 비껴가지 않았다. 65)


비도덕적인 유신정권은 학생과 시민들이 불법적인 체제에 도전하는 것을 못 견뎠다. 그들에게는 이 저항의 배후에 반드시 ‘불순세력’이 있다는 강박증이 있었다. 그 강박증은 불순세력이 없으면 만들어내기라도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었다. 1964년에 인혁당이 조직된 바 없으니 인혁당 ‘재건’이란 시나리오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재판과정에서도 고문으로 받아낸 진술 이외에 “반국가단체 결성 및 국가전복기도를 위한 활동을 확인할 수 있는 조직명, 강령 및 규약, 조직체계, 조직활동 관련 물증이 제시되지 않았다.” 참으로 기가 막힌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2차 인혁당 사건을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라 부르고 있지만 ‘인혁당 재건위원회’라는 반국가단체는 비상군법회의 검찰 측 공소장이나 대법원 판결문 어디를 보아도 만들어진 적이 없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인혁당 재건위’가 아니라 ‘인혁당 재건단체’라는 모호한 말로 배후조직의 성격을 규정했고, 박정희 정권은 무고한 사람을 8명이나 잡아 죽였다. 68)


#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 : 서도원, 김용원, 이수병, 우홍선, 도예종, 하재완, 여정남, 송상진


제3부 금기, 저항, 상처


1968년 국민교육헌장을 선포하면서 박정희는 우리와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우리의 출생의 의미를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규정해버렸다. 일본 군국주의식 사고방식이 꽉 박힌 박정희와 자유를 추구하는 젊은 세대는 맞지 않았다. 인혁당 사람들을 사형시킨 1975년에 박정희 정권은 무려 225곡의 가요를 금지곡으로 묶었고, 대마초 단속을 통해 이장희, 윤형주, 신중현, 김추자 등 인기 절정의 가수를 포함한 27명을 구속했다. 김민기나 신중현은 이름이 들어가면 무조건 금지되는 영예를 누렸다. 〈아침이슬〉도 금지곡이었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라는 구절은 검열관의 귀에는, 태양은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이고, 묘지는 박정희 치하의 남조선이고, ‘붉게 타오르고’는 적화통일로 들렸던 모양이다.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는 월북을 기도하는 노래처럼 들렸고, 가는 데마다 ‘하면 된다’라는 표어가 붙어 있던 시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패배주의의 상징으로 퇴출당했다. 98-9)


1968년에 교통사고로 숨진 모더니스트 김수영은 버드 비숍의 여행기를 영어로 읽다가 득도하듯이 단절된 전통과 만나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라는 절창(〈거대한 뿌리〉)을 남겼다. 그 후배들도 먼 길을 돌고 돌아서야 더러워진 전통, 흩어져버린 민중과 다시 만났다. 청년문화 논쟁은 ‘엘리트’와 ‘대중’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심화시켜 우리가 잃어버린 ‘민중’을 찾아야 한다는 절박감도 한층 심화시켜주었다. 1960년대에 사람들은 미친 듯이 서울로 몰려들었다. 한편에는 패티 김의 〈서울의 찬가〉가 있었고, 또 한편에는 김지하의 〈황톳길〉이나 〈서울길〉이 있었다. 이제 박정희의 〈잘살아 보세〉도, 대중가요 〈흙에 살리라〉도 불편해했던 도시적 감성을 지닌 젊은이들은 제 목소리로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아침이슬〉)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김지하가 〈아침이슬〉을 처음 듣고 예견했듯이 앞으로 무엇이 올 것인지,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젊은이들은 저 거친 광야로 나섰다. 100)


자본주의화를 겪은 모든 나라에는 저마다의 슬프디슬픈 여공애사(女工哀史)와 소년노동의 피눈물 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유교적 가부장제의 유산에 식민지 지배와 전쟁과 압축적 근대화를 겪은 한국의 여성 노동자들은 슬프기로 한다면야 다른 어느 나라의 자매들보다 더 슬픈 이야기가 많지만, 다른 나라 여공애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빛나는 순간들을 갖고 있다. 흔히 유신시대라 불리는 1970년대에 노동운동의 주역은 여성 노동자였다. 장기간에 걸친 군사독재에서 1970년대처럼 노동운동 내에서의 성비가 여성 쪽으로 기울었던 시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여성 노동자들은 1970년대 내내 노동운동을 책임졌고, 대학생들조차 변변히 데모를 하지 못했던 유신의 마지막 순간 YH 사건을 통해 철옹성 같던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는 단초를 열었다. 너무나 단단했기에 작은 충격도 흡수할 여지가 없어 깨져버린 박정희 정권과는 반대로, 그 시절의 여성 노동자들은 한없이 약했기 때문에 오히려 무한히 강해질 수 있었다. 101)


자본은 늘 재단사가 미싱사를, 미싱사가 미싱 보조를, 미싱 보조가 시다를 갈구게 하여 생산목표를 달성했다. 그래도 군대와 달랐던 것은 담임은 반장을 야단치고, 반장은 조장을 야단치고, 조장은 또 어린 여공을 야단치다가 서로 붙잡고 막 울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소박한 자매애, 형제애가 노동운동의 기초였다. 신순애는 ‘중등수업 무료’라는 유인물을 보고 찾아간 노동교실에서, 어느 날 사장이 “깡패가 죽어서 가마니로 덮어놨으니 구름다리 밑에 가지 마라”라고 했던 말의 주인공이 전태일임을 처음 알았다. 장시간 고된 노동을 마치고 공부하는 것은 힘들었지만, 여기서만큼은 그를 ‘7번 시다’가 아닌 신순애라는 이름으로 불러주었다. 7번 시다 신순애는 2년 반 동안 같이 일한 7번 미싱 언니의 이름을 모른다. 또래의 청소년들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 꽃이 되었다”를 책으로 배웠지만, 이제 비정규직의 어머니가 된 그 시절의 여공들은 그 시를 노동조합이나 야학에서 눈물로 체험했다. 106)


1970년대에 민주노조의 깃발이 오를 수 있었던 데는 개신교의 산업선교회와 천주교의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JOC) 같은 산업선교 또는 노동사목 조직의 역할이 매우 컸다. 너무도 열악한 노동 현실 속에서 자신들의 운명을 개선해보려는 노동자들이 손을 내밀 곳이라곤 교회밖에 없었다. 분신 1년여 전 전태일은 “저희들의 아버님”인 ‘국부’ 박정희 대통령에게 “자식 된 도리로서 아픈 곳을 알려드립니다. 소자의 아픈 곳을 고쳐주십시오”라며 탄원서를 보냈지만 아무런 답을 듣지 못했다. 반도상사 노동자들이 호소문을 전하려 노동청에 찾아가자 노동청 간부들은 “일도 안 하고 유인물이나 뿌리고 다니는 나쁜 아이들”에게 이런 불순한 짓은 “사회를 어지럽히는 범죄인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호통을 쳤다. 당시 노동운동의 지원에서 종교계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공산주의나 빨갱이로 몰릴 가능성이 적었고,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갖고 있어 권력이 쉽게 탄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25-6)


1970년대 들어 산업선교회와 가톨릭노동청년회의 활발한 활동으로 동일방직, 반도상사, 원풍모방, 콘트롤데이타 등에 연이어 민주노조가 들어선 것은 5·16 군사반란 후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직된 노총과 산별연맹이라는 공식적인 체계에 균열이 발생한 것을 의미했다. 유신정권은 이 균열의 진원지로 두 단체를 지목했다. 특히 1974년 2월 반도상사의 농성으로 분출한 노동자들의 분노를 어용노조 결성을 통해 체제 내로 흡수하려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중앙정보부는 적극적으로 산업선교회와 노동자들을 분리하려고 하는 한편, 산업선교회에 대한 전면적인 내사에 착수했다. 중앙정보부는 1974년 5월에 조화순 목사를 구속했다. 표면적으로는 노동자들과 함께 간 야외예배 설교를 문제 삼은 것이지만, 사실은 반도상사 노조 결성의 배후로 지목한 것이다. 전두환이 광주학살로 집권한 뒤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노동조합법을 개악할 때 악명 높은 ‘3자개입 금지’ 조항을 넣은 것은 바로 산선의 활동을 의식한 결과였다. 127)


제4부 유신의 사회사


나는 박정희 시대의 특징을 ‘조국 군대화’라 부르고 싶다. 전쟁이 법적으로 완전히 종결되지 않았고 60만이 넘는 대규모 상비군이 존재하는 한국 사회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병영이었지만, 민간인인 이승만이 지배했던 시기와 군인인 박정희가 지배한 시기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유신 직후인 1973년 1월 20일 박정희는 국방부를 순시한 자리에서 “앞으로 법을 만들어서라도 병역을 기피한 본인과 그 부모가 이 사회에서 머리를 들고 살지 못하는 사회기풍을 만들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박정희는 병무비리의 근절을 위해서는 병무청만이 아니라 유관기관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이유로 1973년 2월 26일 대통령 훈령 제34호로 ‘병무행정 쇄신에 관한 지침’을 제정했다. 이에 따르면 “병역기피자는 유신과업과 국민총화를 저해하는 ‘비국민’적인 행위자”로 규정되었다. ‘비국민’(히코쿠민)이란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전쟁책동에 비협조적인 사람들을 체제로부터 배제하기 위해 즐겨 쓰던 흉포한 언어였다. 153-4)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당시 박정희는 사회 저명인사나 특권층, 부유층의 자식들에 대해서 열외를 인정하지 않고 엄격하게 관리했다는 점이다. 유신시대에는 고위공직자나 재벌, 언론사 사주, 국회의원 등 상류층 자식들의 병적기록표에는 ‘특’이라는 도장이 찍혀 별도의 관리를 받았다. 이렇게 열심히 병역기피자를 없앤 것은 뜻하지 않은 부작용을 낳았다. 상당한 비율의 병역기피자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징병제도가 운영되다가 갑자기 병역기피자가 일소되었다는 것은 군대에 사람이 차고 넘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군사정권은 방위 제도를 만들고 전투경찰을 만들어 소집된 청년들을 정권유지를 위해 써먹었다. 그래도 사람들이 남았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기업에 배치되어 병역의 의무를 대신하는 산업특례요원들이었다. 기업이 자격을 취소하면 당장 현역으로 끌려가야 하는 산업특례요원은 군대라는 목줄로 죄어 맨 현대판 노예노동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군인들이 장악한 국가는 자본에 이렇게 베풀 줄 알았다. 156)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공산군의 공세가 강화되고 공산군이 사이공이나 프놈펜에 몇 킬로미터까지 육박했다는 보도가 거의 매일 신문에 실리던 1975년 초반은 한국에서 반유신 민주화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던 때였다. 4월 17일 크메르 정부는 공산 크메르루주군에 항복을 선언했고,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되자 이웃 라오스의 좌우 연립정부에서 우파는 사실상 몰락했다. 인도차이나에서 도미노 이론이 현실로 나타나는 가운데 박정희는 모든 긴급조치의 종합판이라는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여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비판과 반대를 금지했다. 5월 21일의 여야 영수회담 이후 그동안 나름 유신반대 투쟁에서 일익을 담당해온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8월 17일 반유신 세력의 통합을 위해 애써온 마지막 독립군 장준하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월남 패망’의 위기는 박정희로 하여금 잠시나마 민주화운동 세력의 거센 도전을 뿌리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164-5)


어쩌면 베트남 파병은 이남보다 이북에 더 극단적인 변화를 강요했는지도 모른다. 김일성은 베트남을 한국의 제2전선으로 보고 대규모 파병을 단행한 박정희에 맞서 한반도를 베트남의 제2전선으로 만들기 위해 이북 사회가 조금이나마 유연성을 견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포기했다. 베트남 파병은 한국의 정치사에도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위로는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황영시, 유학성, 장세동, 안현태 등 신군부의 주요 인물들이, 아래로는 광주에 투입되었던 공수부대의 장교나 하사관들 상당수가 베트남에 파병된 자들이었다. 이들 중 실제 베트남에서 민간인 학살에 관여한 자는 극소수라 하더라도, 유격대원과 민간인의 구분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베트남전쟁에서 민간인을 잠재적 베트콩으로 보고 총을 겨눴던 경험을 가진 자들이 광주학살의 주역이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라 볼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베트남에서 부와 경력을 쌓은 일부 장교들은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하나회와 같은 사조직으로 똘똘 뭉쳤다. 167-8)


유신 쿠데타로 또다시 헌법을 짓밟은 직후인 1973년 1월의 연두 기자회견에서 박정희는 “10월유신이라고 하는 것은 곧 새마을운동이고, 새마을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곧 10월유신”이라고 선언했다. 박정희의 말이 아니더라도 유신시대는 곧 새마을운동의 시대였다. 김정렴을 비롯한 유신정권의 핵심요인들이 입을 모아 증언하듯이 새마을운동은 “순전히 박 대통령의 개인 구상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새마을 교육에서 활용되던 교재를 보면 “각하께서는 (중략) 새마을운동의 개념에서부터 사업 내용, 그리고 전개 방향에 이르기까지의 자세한 지침을 손수 구상하셨고, 때에 맞추어 국민 앞에 제시·설명하셨다”고 한다. 박진도와 한도현이 잘 설명했듯이 “새마을운동은 처음부터 정연한 이론이나 체계를 갖고 시작된 것이 아니고, 최고 지도자의 소박한 관심에서 출발하여 한때 국정의 최고 정치철학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그렇기에 새마을운동은 “박정희라는 개인 그리고 유신체제를 떠나서는 설명할 수 없다”. 177-8)


많은 관찰자들은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이 1930년대 조선총독부가 추진한 농촌진흥운동을 빼닮았다고 지적한다. 박정희가 1970년 제창한 ‘새마을 가꾸기’란 조선총독부의 ‘아타라시이 무라 쓰쿠리’를 글자 그대로 번역한 것이었다. 농촌진흥운동이 박정희에게 미친 영향을 가장 상세히 기술한 것은 조갑제였다. 최길성 교수의 연구성과를 인용하여 조갑제는 새마을운동과 농촌진흥운동의 유사성에 대해 이렇게 서술했다. “운동의 이념은,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이 ‘자조, 자립, 협동, 충효애국’이고 그것의 집약적 표현이 국민교육헌장이었던 데 대해서 우가키 총독의 농촌진흥은 ‘자립, 근검, 협동공영, 충군애국’과 교육칙어였다. 박정희, 우가키 두 사람 다 농촌 출신 군인이었다. 두 운동의 현장 지도자들은 새마을연수원과 농도강습소에 의해 각각 양성되었다. 〈새마을노래〉와 〈농촌진흥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농가경제 5개년 계획, 육림일과 애림일, 모범 부락의 선정 등 공통점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178-9)


1968년 7월 15일 문교부 장관 권오병은 국민학교 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1969학년도부터 중학교 입시를 폐지하고 추첨으로 입학하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중학교 무시험 제도의 채택은 중등교육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팽창하는 데 따른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이에 더해 유신 쿠데타 직후의 추상같은 분위기에서 박정희 정권은 인문계 고등학교에 대한 평준화를 단행했다. 1974학년도부터 서울과 부산에서 인문계 고등학교는 연합고사를 통해 학군별로 총인원을 선발하여 추첨 배정하는 방식으로, 1975년도에는 대구, 인천, 광주로 확대한다는 것이다. 당시는 한국 사회에 일류 고등학교를 중심으로 한 학연·학벌 사회가 강력히 자리 잡고 있던 때였다. 그 정점에는 경기고-서울대의 특권적 교육재화를 보유한 사람을 가리키는 ‘케이에스(KS) 마크’가 있었다. 서울에는 5대 공립이니 5대 사립이니 하는 명문고가 있었고, 전국 각 지역에도 지역의 명칭을 딴 명문고들이 강력한 학연을 형성해가고 있었다. 201-3)


박정희는 이 학연 체제의 바깥에 있었다. 박정희 자신만이 아니었다. 이후락, 김형욱, 박종규, 차지철 등 군 출신 실력자는 말할 것도 없고 민간 관료 중에도 명문고 출신이 아닌 자가 훨씬 더 많았다. 명문 고등학교를 나온 육사 출신과 서울법대 출신들이 세상을 쥐고 흔들며 ‘육법당’의 전성시대를 구가한 것은 박정희가 죽은 다음의 일이다. 박정희는 명문 고등학교의 기득권을 박탈하는 악역을 경기고 출신인 민관식에게 맡겼다. 훗날 민관식은 자신이 경기고 출신이 아니었다면 평준화라는 개혁을 도저히 실천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무시험과 같은 충격요법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입시지옥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사회적 병폐라는 공감대가 사회 전반에 단단히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학벌과 일류 고등학교를 따지는 의식이 팽배해 있는 사회에서 중학과 고교의 평준화는 박정희가 늘 입에 달고 살았던 ‘가난한 농민의 아들’다운 정책이며 그가 행한 가장 급진적인 사회개혁이었다. 203)


제5부 유신체제의 붕괴


1960년대 말 이후 한국의 수출 팽창 신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발이었다. 1964년 중국이 핵실험을 강행하자 미국 재무성은 1966년 2월 ‘중공봉쇄’라는 기본정책에 따라 유럽으로부터 원료원산지 증명이 없는 가발을 일체 수입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제재조치를 취했다. 이 조치로 중국제 원료를 사용한 제품으로 미국 시장의 90퍼센트를 석권하고 있던 이탈리아의 가발 산업이 몰락했다. 당시 뉴욕의 한국무역관 부관장으로 있던 장용호는 한국산 가발이 유망할 것이라 생각하여 무역공사를 사임하고 발 빠르게 왕십리에 종업원 10명의 소규모 가발공장을 차렸다. 장용호는 회사의 이름은 자신의 이름을 따서 YH무역이라 지었고, 부사장에는 동서인 진동희를 앉혔다. 가발은 불티나게 팔려 YH무역은 2년 만에 면목동에 5층 건물(현재의 녹색병원)을 마련했고, 인천에 제2공장을 지었으며, 창사 4년 만인 1970년에는 종업원 수가 무려 4,000명을 넘어섰다. 장용호는 1973년 고액 개인소득자 순위에서 무려 7위를 차지했다. 207-8)


유신체제의 억압에 대한 불만은 널리 퍼져 있었지만 1979년 상반기에는 그 불만이 저항으로 표출되지는 못했다. 사복들이 캠퍼스에 쫙 깔려 있고, 로마병정 같은 복장을 한 전경들이 여러 대의 닭장차에 타고 앉아 있던 대학가에서 1979년에는 1학기가 다 가도록 이렇다 할 학생 데모조차 일어나지 못했다. 겉으로 볼 때는 태평성대였다. 학생들도, 야당 정치인들도, 재야인사들도, 민주투사들도 깨지 못한 그 위장된 태평성대를 제일 먼저 깨고 나온 것은 “이 나라의 배고프고 예쁜 아가씨들”이었다. 여성 노동자들이 야당 당사로 뛰어들면서 YH무역 사건은 한 개 회사의 노사문제가 아니라 정국의 뇌관이 되었다. 이 충격파를 흡수하기에 유신체제는 너무나 경직되어 있었다. 여성 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 들어간 지 만 24시간이 된 8월 10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고위대책회의는 신속한 강제해산을 결정했다. 진압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실신해 업혀가다 깨어나 농성장에 남은 스물둘 김경숙이었다. 212-3)


때로는 대사(큰 뱀), 때로는 왕사쿠라라 불렸던 유진산의 죽음은 싫든 좋든 한국의 야당사에서 한 세대가 저물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유신체제와의 정면대결을 회피했던 것은 꼭 유진산만이 아니었다. 유신헌법의 중선거구 제도에 따라 공화당과 사이좋게 동반 당선된 대다수의 신민당 의원들은 좀 더 ‘현실적’이고 좀 더 타협적이었다. 그러나 대의원들의 입장은 달랐다. 그들은 야당다운 야당, 정권을 비판하고 견제하고 싸우는 야당을 바랐다. 1979년 5월 30일에 거행된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대의원들은 “아무리 새벽을 알리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민주주의의 새벽은 오고 있다”고 외친 김영삼을 선택했다. “신민당은 유신체제에 참여하고 있으며 유신체제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체제라고 보는 견해는 크게 잘못”이라며 중도통합론을 강조해온 이철승이 신민당을 이끌고 있었더라면 YH무역의 여성 노동자들이 신민당사로 농성장소를 옮기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216-9)


유신의 종말이 채 20일도 안 남았던 1979년 10월 9일, 내무부 장관 구자춘은 기자회견을 열어 경찰이 “북괴의 폭력에 의한 적화통일혁명노선에 따라 대한민국을 전복,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전위대”인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이하 남민전)라는 불법불온 단체의 전모를 파악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남민전이 북의 지령을 받지 않는 자생적 공산주의 조직이라고 했지만, 속칭 반체제와는 성격이 완전히 판이하다고 강조했다. 남민전 사건은 일반 국민, 나아가 당시의 ‘반체제’ 재야인사나 청년학생들에게도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남조선’이라는 명칭, 북의 김일성에게 ‘피로써 충성을 맹세’하는 서신을 보냈다느니, ‘남조선해방전선기’를 걸어놓고 칼을 잡고 가입선서를 했다느니, 총기와 폭약을 준비했고 실제로 무장조직을 만들어 재벌 집을 털었다느니 하는 내용은 남민전이라는 이름의 조직이 기존의 민주화운동 선상에 출현했던 여러 조직이나 운동 행태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것이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220)


인혁당 관련자들에 대한 연쇄살인이 있고 채 1년이 안 된 1976년 2월 29일, 청계천 3가의 태성장이라는 중국음식점에서 이재문, 김병권, 신향식 등 3인은 남민전의 결성식을 가졌다. 이재문은 1차 인혁당 관련자이고, 김병권은 해방전략당, 신향식은 통혁당 관련자였다. 꼭 그렇게 모으려 했던 것은 아니지만, 1960년대를 대표하는 전위조직 관련자들 중에서 탄압 속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남민전이 결성되고 바로 다음 날인 3월 1일, 명동성당에서는 전 대통령 윤보선, 전 대통령 후보 김대중, 원내 최다선 의원 정일형, 종교인 함석헌 등 저명인사 11인이 서명한 ‘3·1 민주구국선언문’이 3·1절 기념미사의 마지막 순서로 낭독되었다. 시위도 농성도 없이 달랑 선언문 한 장 성당에서 읽었을 뿐인데 김대중 등 11명이 구속되었다. 공개적인 영역, 합법적인 영역에서의 모든 활동은 철저히 차단된 것이다. 독재정권에 대한 싸움을 포기한다면 모를까, 투쟁을 한다면 비합법, 비공개, 지하활동밖에는 길이 없었다. 223-4)


경찰이 남민전이라는 거대한 지하조직을 적발한 것은 뜻하지 않게 유신정권의 심장부에서 권력투쟁을 격화시켰다. 중앙정보부는 방대한 조직망에도 불구하고 남민전의 존재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수집하지 못했다. 남민전과 같은 조직을 적발해내는 것이 중앙정보부의 임무였음에도 대어를 낚은 것은 경찰이었다. 경호실장 차지철은 남민전 사건이 터지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무능을 질타했고, 박정희도 김재규에 대한 신임을 거두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남민전 사건은 김재규가 박정희의 신임을 잃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당시 〈동아일보〉는 “그 구성원들도 남의 달콤한 꾐에 속아 넘어가는 단순한 사람들이 아닌 교사, 학생, 지식인 등 이른바 ‘아는 사람’들이며 사회지도층도 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썼다. 오늘의 입장에서 보면 남민전에는 오른쪽으로는 이재오에서, 왼쪽으로는 김남주에 이르기까지 인재가 참 많았다. 유신은 그런 시대였다. 그 어둠의 시대는 남민전의 적발과 함께 저물어가고 있었다. 226)


1979년 8월의 YH 사건 이후 김영삼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 부마항쟁의 발발과 계엄령 선포 등으로 상황은 절정을 향해 숨 막히게 치달아가고 있었다. 파국은 너무나 갑자기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와버렸다. 유신체제 수호의 총책임자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친형과도 같은 각별한 사이였던 박정희를 총으로 쏴 죽인 것이다. 김재규의 박정희 살해 사건 수사 책임자 전두환은 10·26 사건을 “김재규가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대통령이 되겠다고 어처구니없는 허욕으로 빚어낸 내란 목적의 살인 사건”이라고 규정했다.1 박정희의 추종자들에게 이 사건은 ‘패륜아’ 김재규가 공적으로는 ‘국부’요, 사적으로는 ‘은인’인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사건이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권력의 최고 정점에 있는 자들이 자기들끼리 총 쏘고 죽이며 엄벙덤벙 난리굿을 친 사건이었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김재규의 어설픈 총질로 민중봉기에 의한 유신정권 타도의 기회를 날려버린 아쉬운 사건이었다. 242)


우리 역사에는 또 다른 10·26 사건이 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쏜 날이 1909년 10월 26일이었다. 분단과 전쟁과 학살을 거치면서 너무 얌전해진 탓인지 진보진영에는 대의를 위해 제 몸을 불태우고 제 피를 흘린 열사들은 일일이 이름을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넘치지만, 제 목숨을 바쳐 적의 피를 흘리게 한 의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오른쪽 동네라고 사정이 다른 것은 아니다. 친일파가 득세한 나라에서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김구로 상징되는 보수우익 의사의 계보는 대가 끊어졌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으면서도 박정희의 명예는 끝까지 지켜주고자 했던 김재규는 대가 끊겼던 한국 보수우익의 계보학에서 돌출한 마지막 대륙형 인간이었다. 김재규는 5·16과 유신이라는 박정희의 내란에 동행했으면서도 결국 이 내란을 종식시켰다. 김재규의 행동을 내란 목적 살인으로 몰고 간 것은 전두환의 내란이었다. 김재규가 사형당한 것은 광주에서 민중항쟁이 한창이던 1980년 5월 24일이었다. 252-3)


에필로그 – 도청에 남은 그들을 기억하자-광주, 그 장엄한 패배


광주 사람들은 광주의 소식이 전해진다면 서울에서도, 부산에서도, 대구에서도 시민들이 마땅히 들고일어날 것이라 기대했다. 전국의 시민들이 들고일어나야 살인마 전두환의 집권을 막을 수 있을 텐데 어느 곳에서도 그런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공수부대를 몰아냈을 때의 기쁨도 잠시, 하루하루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감이 몰려왔다. 총을 내려놓자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러나 그날 모두가 총을 내려놓았다면 광주는 우리 가슴에 오늘과는 다른 모습으로 남았을 것이다. 끝까지 총을 내려놓을 수 없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승패가 문제가 아니었다. 왜 총을 내려놓을 수 없다는 것인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걍’ 내려놓을 수 없었다. 텅 빈 도청에 전두환과 그 졸개들이 씩 웃으며 들어온다면 지금까지 죽은 사람은 뭐가 되고, 지금까지 싸운 건 또 뭐가 되느냐는 것이다. “산 사람을 더 생각하는 자들은 총을 내려놓자고 했고, 죽은 이들을 더 생각하는 자들은 총을 놓을 수 없었다.” 257)


도청의 진압이 있고 꼭 1년 뒤인 1981년 5월 27일 서울대에서 벌어진 광주학살진상규명 시위가 진압되어 갈 때 시위에 참여하지도 않고 도서관 5층에서 공부하던 김태훈이라는 학생이 ‘전두환을 처단하라’라는 구호를 세 번 외치고 몸을 던졌다. 그 꼴을 안 보았으면 모를까, 본 사람들은 또 광주의 자식이 될 수밖에 없었다. 광주의 죽음과 대면하면서 1970년대의 낭만적인 민주화운동은 치열해졌고, 엘리트 중심에서 보다 민중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1983년 9월 김근태를 의장으로 하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 결성되었을 때 민청련의 상징은 두꺼비였다. 옴두꺼비는 뱀의 길을 가로막아 스스로 잡아먹히지만, 뱀의 몸 안에 독을 뿜어 죽게 하고 그 몸 안에 알을 낳아 수백 마리의 새끼 두꺼비들이 뱀의 몸을 파먹으며 자란다는 것이다. 수많은 광주의 자식들은 ‘1980년 5월 26일 밤 내가 광주에 있었더라면 나는 총을 들었을까’라는 질문을 내려놓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2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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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5.18 - 정치군인들은 어떻게 움직였나
노영기 지음 / 푸른역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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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5·18진상규명투쟁의 역사 


"5·18의 가장 큰 특징은 '피해자나 참여자는 많으나 가해자는 거의 없다'는 점이다. 누가 군인들에게 총과 칼, 곤봉 등을 쥐어 주고 폭행과 발포를 사주했는지 아직도 미궁이다. 자료가 전혀 없기 때문은 아니다. 군, 그중에서도 보안사령부의 자료, 행정기관 자료, 민간 자료 등 방증 자료들은 넘칠 정도로 많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2019년 8월 5일, 16세의 고등학생으로 5·18항쟁에 참여해 '막내 시민군'으로 불렸던 박정철이 동지들의 곁으로 떠나갔다. 5·18의 진상규명과 연구가 '진행형'이어야 하는 이유는 넘치도록 충분하다.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후과는 역사 왜곡이다. '북한군 특수부대 침투설'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억지는 과거의 왜곡에서 시작하여 현재를 왜곡하며, 더 나아가 과거와 현재가 쌓아나갈 미래까지 왜곡한다. 역사 왜곡에 대한 비판이 필요한 이유이며, 40년이 지난 오늘 다시 5·18에 주목하는 이유이다."(32-4)


1_유신의 그림자


"박정희 정권은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를 선포했다. 긴급조치 제1호는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와 헌법 개정이나 폐지를 제안하거나 청원하는 일체 행의를 금지하며, 이를 위반할 때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여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와 함께 민간인을 군법회의에 회부하고 중앙정보부가 수사할 수 있는 긴급조치 2호를 동시에 선포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1974년 1월 15일 박정희 정권은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이끌던 장준하와 백기완을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이로부터 시작된 긴급조치는 1975년 5월 19일 결정판인 긴급조치 9호로 이어졌으며, 1979년 12월 8일 해제될 때까지 무려 2,159일간의 이른바 '긴급조치(긴조)의 시대'를 만들었다. 긴급조치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들은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군법회의에 회부되곤 했다."(42)


"대통령 박정희가 남긴 유산 중 하나는 군대를 자주 정치에 동원해 민간사회를 직접 통제한 것이었다. 1963년 12월 제3공화국이 출범한 이후 박정희 정권은 위기가 닥칠 때마다 시위 진압에 군대를 동원하곤 했다. 1964년 6·3항쟁, 1972년 10월 17일 유신 선포와 1979년 10월 부마항쟁 등의 현장에는 늘 군대가 출동했다. 계엄령 외에 위수령도 적극 활용했다. 1965년 4월 19일과 8월 26일, 1971년 10월 15일, 그리고 부마항쟁 때의 마산 지역에는 위수령을 선포했다. 특정 지역에 한정시켜 발동한 위수령은 그 모법母法조차 불분명한 대통령 명령이었다." "공격형 특수부대인 공수부대를 시위 진압에 투입한 것도 신군부가 처음이 아니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 공수부대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시위 진압이었고, 평시에도 공수부대의 훈련에는 시위 진압훈련인 '폭동진압훈련'이 포함되어 있었다.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 세력이 병영을 벗어나는 그 순간부터 공수부대는 정치에 동원됐다."(45-6)


"1980년 2월 18일 육군본부에서는 1·2·3군사령관과 특전사령관, 수경사령관에게 특별지시를 내렸다. 후방의 충정부대에 특별지시를 내린 것이다. 1/4분기의 폭동진압교육훈련(충정훈련)을 2월 중 조기 실시해서 완료하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공수부대도 정규 교육훈련을 거의 포기한 채 오로지 충정훈련에 매진했다. 주간에는 CS탄, 500-MD 헬기와 장갑차까지 동원됐고, 매일 밤 출동 준비 군장을 꾸렸다가 해체하는 혹독한 훈련이 기계처럼 반복됐다. 의아한 점은 당시 국방장관이던 주영복은 폭동 진압훈련을 실시하라는 육군본부의 지시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육군본부의 특별지시에 따라 강원도 화천에 주둔한 11공수여단에서도 충정훈련이 강화했다. 공수부대는 아니지만 후방의 충정부대로 배치된 20사단도 충정훈련을 실시했다." "이렇듯 1980년 2월부터 군은 충정훈련을 강화하고 있었다. 충정훈련은 신군부의 정권 장악을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66-7)


"〈부마지역 학생 소요사태 교훈〉은 보안사령부에서 작성한 일종의 작전평가서이다. 1976년 10월 16일 부마항쟁이 발생하자 박정희 정권은 10월 18일 00시 01분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해병 7연대를 부산대에, 3공수여단을 동아대에 각각 출동시켰다. 이날 부산의 남포동 등 7곳의 시위 발생 지역에 3공수여단을 투입, 〈철저하고 간담이 서늘하게 진압작전을 실시〉하여 〈학생이나 깡패들의 데모 의지〉를 〈말살〉시켰다. 다음 날에는 1공수여단과 5공수여단을 부산 지역에 추가 배치하고, 특전사령부 지휘부도 부산으로 이동시켰다. 10월 20일에는 1공수여단 2대대와 5공수여단을 마산 지역에 투입했다. 보고서에는 시위계층을 〈학생이나 깡패들〉로 명시하고 있다. 이 점은 5·18항쟁을 왜곡하는 논리 및 단어와 유사하다. 보안사령부는 5·18항쟁을 주도한 계층을 '학생, 깡패, 불순분자, 야당 정치인' 등으로 언급하고 있다. 항쟁 주체를 특정 계층으로 축소시켜 계엄군의 진압작전을 정당화하는 논리이다."(69-70)


2_5·17쿠데타-비상계엄 전국 확대


"무력으로 국회 개원을 막아 헌정질서를 유린한 신군부는 5월 31일에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발족시켰다. 신군부는 국보위를 설치한 뒤 개헌뿐 아니라 언론 통폐합 및 언론인 해직, 공무원 숙청, 10·27법난, 삼청교육대 설치 및 운영 등 무소불위의 불법적인 일들을 저지르며 제5공화국의 출범을 기획했다." "한편 5월 15일 서울역에서 회군한 전국대학 총학생회장단은 가두시위를 일시 중단하고 정부 발표를 기다리기로 결의했다. 국회 개원과 함께 학생들도 군 개입의 명분을 제공하지 않으려고 시위를 일시 중단한 것인데, 이는 신군부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움직임이었다." "당시는 야권과 국민들이 힘을 모아 유신체제를 청산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은 시기였다. 유신헌법을 폐기하고 민주공화국에 어울릴 만한 헌법을 채택하여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자는 국민들의 바람이 멀게만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신군부는 중앙정보부와 육군본부 보고서의 마지막 단계인 군 투입을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85-7)


"신군부는 5월 초순경부터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를 상정했다. 국내에서 가두시위가 발생하여 사회가 혼란해졌으므로, 이에 대처하여 국난을 극복하려고 군이 나선다는 게 군 동원의 명분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신군부가 5·17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정당한 조치로 만들기 위해 꾸며낸 거짓이었다." "5·17비상계엄 확대 조치 이후 보안사령부에서 작성한 〈5·17전국 비상계엄의 배경〉에서는 〈학원 및 노조의 소요사태로 극도의 사회혼란, 적색분자 개입의 본격화, 국민경제의 도탄〉 등을 틈타 북한의 비정규전 부대가 침투하면 국가가 망하게 될 것이므로 〈국가를 보위하고 3,700만 국민의 생존권을 수호하며, 안정 속에 성장과 발전을 희구하고 있는 대다수 국민의 여망에 부응코자 5·17조치가 필요하다〉고 결론내렸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신군부가 〈북한의 비정규전 부대의 침투〉를 꺼내들고 있다는 점이다. 5·18항쟁을 왜곡하는 논거가 이미 1980년 5월부터 등장하고 있었다."(88-9)


"최규하 대통령의 특별성명은 '북괴 남침설'을 재확인하는 성명이었다.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동시에 계엄사령관은 5월 17일 자로 '정치 활동의 금지, 정치 활동 이외의 옥내외 집회의 신고 및 언론의 사전 검열, 대학의 휴교, 태업 및 파업의 금지, 유언비어 날조 및 유포 금지, 선동적 발언 질서문란 행위 금지, 포고령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수색' 등을 규정한 포고령 10호를 공포했다. 포고령 10호에 따라 헌법에 보장된, 심지어 유신헌법에서조차 보장된 국민들의 기본권은 무시되었고 계엄포고 위반을 들어 무차별적으로 국민을 처벌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다. 한국사회는 다시 1979년 10·26 이전의 유신독재 시절 긴급조치보다 훨씬 더 강력한 계엄령이 작동하는 시대로 되돌아갔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령 해제는 국회의 권한이었다. 하지만 탱크와 완전 무장한 군인들이 지키는 국회 개원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1980년 5월에도 끝내 국회의 문은 열리지 못했다."(111-2)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군과 대통령의 주장은 '대국민 사기극'에 다름 아니었다. 1979년 12월 북한은 1980년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남북한이 단일팀으로 참가할 것을 제안했다. 북한의 제안에 대해 정부는 1980년 1월 24일 남북조절위원회를 통해 남북 총리회담을 개최하자고 역제안했다. 그리하여 1980년 2월 6일 판문점에서 '남북 총리회담을 위한 실무 접촉'을 시작으로 이후 총 10차례의 실무회담이 열렸다. 정부는 5월 초순부터 계속해서 국민들에게 '북한 남침설'을 유포시켰다. 그러면서도 2주에 한 번씩 북한과 회담하고 있었다. 심지어 5월 21일 전남도청 앞을 비롯해 광주 시내에서 계엄군이 집단발포하고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다음 날인 5월 22일에도 남북회담 실무진이 판문각에서 접촉했다. 국민들에게는 북한의 남침 위협 때문에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면서 그 위협의 배후이자 당사자인 북한과 실무 접촉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112-3)


"전국총학생회장단 회의에서 가두시위의 중단을 결정하고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다른 지역에서 시위가 소강상태에 들어간 반면, 광주에서는 5월 16일, 시내 9개 대학 학생과 시민 등 3만여 명이 오후 3시부터 전남도청 앞 광장에 모여 시국성토대회를 열었다. 시국성토대회에서는 각 대학 학생대표들이 함께 작성한 〈제2시국선언문〉(5월 15일 자)이 낭독됐다." "경찰은 주변의 질서유지에만 힘쓰고 학생들도 담배꽁초와 휴지를 줍는 등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가두시위와 집회를 마쳤다. 횃불시위를 마친 학생운동 지도부는 사태를 관망한 뒤 5월 19일 다시 성토대회를 열자고 결의하고 자진 해산했다. 5월 18일까지 시국을 관망하자는 전국총학생회단의 결의안에 따른 결의였다. 경찰이 시위를 지켜보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시위 대열을 보호해주는 가운데 5월 16일의 집회 및 횃불시위는 아무런 불상사 없이 끝났다. 그러나 이날의 평화로웠던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120-3)


3_항쟁의 시작


"5·17조치가 공표됨과 동시에 5월 18일 새벽 전국의 201개 보안시설에 총 2만 4,740명(2,009/22,731)의 계엄군이 배치됐다. 이날 전국의 주요 도시에 배치된 계엄군 병력 중에서 2만 2,342명(1,865/20,477)이 전국 92개 대학에 들어간 반면, 국가의 주요 보안시설 109개에는 불과 2,398명(144/2,254)이 배치됐다. 정부와 신군부의 주장처럼 북한의 남침 위협 때문에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국가 보안시설의 경계를 강화하고 계엄군 병력도 그곳에 집중 배치되어야 하는 게 상식에 맞다. 그런데 이날 전국 국가 보안시설에 배치된 계엄군의 비율은 채 10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후 광주에서 학생 시위가 발생하고 시민항쟁으로 전환되자 서울에서 광주로 계엄군 병력이 추가 파견됐다. 5월 19일부터는 광주 시내에 2대의 장갑차가 돌아다니고 헬기가 떠다녔다. 5월 27일 최종 진압작전인 상무충정작전이 실시될 때는 광주 시내에 18대의 탱크까지 진입했다."(126-8)


"계엄사령부 법무처는 5월 18일 법무기관에 법무장교를 감독관으로 파견하고, 5월 20일부터는 대법원과 법무부에 각 1명씩 파견할 계획을 세웠다. 또 계엄사령부는 각 지역의 계엄분소장들에게 5월 20일부터 6월 19일까지 한 달 동안 〈사회안정과 질서유지를 위해〉 군경합동 단속을 실시하여 〈사회의 암적 존재인 폭력깡패를 발본색원〉하라고 지시했다. 동시에 깡패 단속은 지역 책임제로 하되 〈암적 깡패는 군재에 회부〉하고 단속 결과를 매일 보고토록 지시했다." "주목할 것은 '지역 책임제'라는 형식을 빌려 연행자의 수를 지역별로 할당한 점이다. 단속 대상인 〈암적 깡패〉의 인권은 애초부터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 외 대상자들의 인권도 무시될 수밖에 없다. 명확한 기준이 없을 경우 임의의 원칙, 다시 말하면 군이나 행정기관의 자의적 판단 아래 국민들의 인권이 말살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결과적으로 이 같은 지역 할당제는 삼청교육대의 피해자들에게 그대로 적용됐다."(133)


"7공수여단 31대대가 전북대를 점거하고 학생들을 체포하던 도중 전북대 학생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전북대에 진주하던 공수부대를 피해 도망하던 전북대 학생 이세종(농학과 2학년)이 사망했는데, 7공수여단은 그 사인을 '좌상박부 골절 및 우측 두개골 함몰 골절'로 인한 즉사로 상급 부대(전교사: 전남·북계엄분소)에 보고했다. 그리고 〈변사자는 이 포위망을 탈출을 목적으로 지상 13미터 동 회관(학생회관) 옥상 북편 전등주에 매달려 은신하려다 힘이 빠져 변사한 것〉이며, 〈첩보 즉시 전주지검 안상수 검사가 현장에 입장, 지휘하여 진상규명 후 사체를 전북의대 부속병원 시체실에 안치 중〉이라고 보고했다." "안상수 검사는 2004년 10월 11일 열린 17대 국회의 전북도교육청 국정감사 자리에서 자신이 보기에는 〈총 개머리판에 맞아서 사망〉했으나 〈수사권이 비상계엄하라서 군부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끝까지 밝히지 못해 〈분통을 터뜨린 일이 있었다〉고 발언했다."(142-3)


4_폭력과 야만의 시간


"학생들이 시내에서 시위하자 5월 18일 오전 11시 40분경부터 전남도경 안병하 국장의 지휘 아래 경찰이 진압에 나섰다. 경찰이 투입되기 전인 오전 11시에 전남도경국장은 〈분산되는 자는 너무 추격하지 말 것, 부상자가 발생치 않도록 할 것, 기타 학생은 연행할 것〉을 지시하고, 11시 55분에는 〈연행 과정에서 학생의 피해가 없도록 유의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있었던 학생들의 가두시위, 특히 5월 16일의 횃불시위 등에서 시민과 학생들을 보호하던 경찰에 비해 이날 진압의 강도는 강했다. 군이 모든 걸 장악하고 있는 비상계엄 아래에서 평화를 지향한 그의 소신은 실현되기 힘든 '이상'에 가까웠다. 5월 27일 이후 안병하 전남도경 국장은 '직무유기' 혐의로 서울의 합동수사본부에 소환되어 수사를 받았다." "결과적으로 그는 합수부에서 14일간 고문을 받은 뒤 '자진 사표' 형식으로 석방되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1988년 10월에 사망했다."(149-52)


"공수부대가 광주 시내에 투입되어 잔혹하게 시위를 진압할 결과 5·18항쟁기 최초 희생자가 발생했다. 최초 희생자는 5월 19일 새벽 3시경 국군통합병원에서 사망한 김경철이다. 보안사령부의 〈검시결과 보고〉에 농아자로 기술된 것처럼, 그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인이었다. 그는 5월 18일 오후 친척을 배웅하고 귀가하다 공수부대원들에게 붙잡혀 외마디 소리 한 번 제대로 못 지른 채 온몸을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다. 〈검시결과 보고〉에서 그의 사인은 '후두부 찰과상 및 열상에 의한 뇌진탕'이었으며, 예리한 물체로 인한 타박사로 기록됐다. 〈검시조서〉에 서술됐듯이 그는 머리에서부터 몸통 아래에 이르기까지 온몸을 구타당했다. 혼수상태에 빠진 그는 병원으로 후송됐고, 결국 머리 뒷부분을 맞아 입은 뇌출혈로 사망에 이르렀다." "김안부도 공수부대에 무자비하게 구타당한 뒤 사망했다. 공수부대원들에게 구타당한 뒤 광주공원 부근에 처참하게 남겨진 그의 시신을 가족들이 수습했다."(168-9)


"학생들이 주도하며 수백 명 단위로 시위하던 5월 18일과 달리 5월 19일부터는 시민들이 시위에 본격 참여함으로써 그 숫자가 전날에 비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전날의 참상을 목격한 시민들이 최소한의 자구책을 마련하고 서서히 항쟁의 주역으로 시위를 이끌기 시작한 것이다.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를 진압하는 양상도 크게 달라졌다. 무엇보다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의 수가 전날에 비해 크게 늘어나고, 시위 진압에 사용된 장비도 달라졌다. 5월 18일에는 오후 4시부터 7공수여단의 2개 대대가 투입되어 진압했는데, 5월 19일부터는 서울에서 급파된 11공수여단의 3개 대대가 오전부터 광주 시내에 추가 투입됐다. 이날 충정작전 수행을 위해 차량 37대(장갑차 2대 포함)를 출동시키라는 명령이 기갑학교장에게 내려졌다. 광주 시내 상공에는 5월 19일 오전부터 헬기가 출현했고, 광주시 동구청에는 10시 57분경 〈상공에 헬리콥터 비행 순찰 중〉이라고 보고됐다."(179-80)


"5월 19일 시위 진압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공수부대원들이 금남로 한복판에서 믿을 수 없이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다는 점이다. 더욱 큰 문제는 5월 19일의 진압이 무자비한 폭력에 더하여 금남로 한복판에서 연행한 사람들에게 모욕을 주는 야만의 행동을 자행했다는 사실이다." "광주 시내에 계엄군으로 투입된 공수부대는 대한민국의 국민인 광주 시민들을 보호하지 않았다. 오히려 5월 19일에는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연행한 시민들의 겉옷을 벗겨 속옷만 입힌 채 기합(원산폭격)을 주었다. 동구청 민원실과 같은 관공서까지 쫓아 들어와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한 뒤 연행해갔다. 관공서만이 아니었다. 민가, 병원, 학원, 숙박시설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뒤따라와 난폭한 행동을 저질렀다. 누구도 이해하기 힘든 시위 진압 광경이었다. 후방에서 '국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시위 진압'이라기보다는 흡사 '전쟁터에서 적국의 한 도시를 점령한 승리자들이 벌이는 비이성적 폭력'에 가까웠다."(181, 184)


"5월 19일의 전교사 계엄회의와 2군사령부의 지시에 보이듯이 군은 시민들이 시위 대열에 합류하는 5월 19일부터 이를 '도시게릴라식 소요 및 난동'으로 규정하며 강력하게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즉 군은 시민들을 '도시게릴라'로 규정하여 강력한 진압을 예고하고 있었다. 또한 〈치명상을 입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과감한 타격〉을 주문하고 있다. 실제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도 더욱 강력하게 시위를 진압했다. 공수부대원들의 폭력 강도가 상부의 명령에 의해 더욱 상승한 셈이었다. 5월 19일 중앙기동예비대이던 3공수여단의 추가 파병이 결정되고 이동이 시작됐다." "아직 전교사에서 추가 병력 파병을 요청하지 않은 시각인데도 3공수여단의 파병이 결정된 것이다. 이는 광주의 상황이나 정식 명령계통과는 상관없이 작전이 진행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즉, 광주에 파견된 공수부대의 활동이 지역의 계엄분소와 별개로 독자적으로 전개된다는 의미이다."(209-11)


"군 최고 지휘부는 광주의 계엄군에게 광주 시내에서 발생하는 시위를 강경하게 진압하라고 계속해서 명령했다. 군 최고 지휘부의 명령은 공수부대의 지휘관들과 현장의 공수부대원들에게 하달되면서 진압의 폭력과 야만성을 증폭시켰다. 한 공수부대원의 수기는 당시 11공수여단이 점거한 조선대에서 벌어진 일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최고 지휘부의 명령이 현장에서는 어떻게 구현되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 집합된 병력에게 다시 구타를 강력하게 하지 않는다고 더 강하게 무자비하게 구타를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 이병을 불러내더니 이 병사는 구타를 전혀 하지 않는다고 "엎드려" 하더니 자신이 휴대한 진압봉으로 엉덩이를 열 대 때리는 것입니다. 그 고통의 얼굴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군요. 머나먼 광주에서까지 자기 부하를 구타하는 중대장이 죽도록 미웠습니다. 그리고 시위대에 대한 증오심은 더 강하게 생각만 나는 것입니다.〉"(224)


5_항쟁과 발포 사이


"'시민들의 시위와 공수부대의 진압 및 해산'의 구도를 뒤집은 것은 5월 20일 오후부터 시작된 기사들의 차량 시위였다. 공수부대의 폭력과 눈앞에 펼쳐진 처참한 광경에 분노하던 기사들이 5월 20일 오후 무등경기장 앞으로 차를 몰았다." "맨주먹으로 공수부대에 맞서던 시민들은 헤드라이트를 켜고 금남로로 진입하는 차량 대열을 보고 감격해하며 합세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어나는 시위 군중들이 공세가 거세지자 공수부대를 비롯한 군경은 점점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5월 20일 밤 광주시청을 지키던 3공수여단 병력이 시민들에게 포위당하며 고립됐다. 이에 전남대에 있던 3공수여단 본부중대 병력들이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광주시청으로 지원을 나갔다. 그런데 3공수여단 작전참모와 작전과 선임하사의 지휘 아래 지원을 나가던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대를 향해 집단발포했다. 5·18항쟁 기간 처음으로 군이 시민들을 향해 집단발포를 시작한 것이다."(246-9)


"광주역 앞에서 발생한 3공수여단 집단발포는 몇 가지 의문이 남는다. 먼저 3공수여단이 집단발포에 이르는 과정과 시간이다. 지금까지 3공수여단의 집단발포는 시민들이 차량을 이용, 공수부대를 공격하여 3공수여단의 대원들이 사망하거나 다치게 되자 발포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보안사령부 자료에 의하면 21시 50분에 3공수여단 정관철 중사가 8톤 트럭에 치어 사망한 뒤 각 대대에 M-16 소총 실탄을 나눠주고 장착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하지만 3공수여단 본부중대의 지원 병력이 전남대에서 광주역으로 출발한 때는 이보다 앞선 시각이다. 따라서 시민들이 자신들을 향해 발포하는 공수부대를 차량으로 공격한 것이라 추정하는 편이 더 합리적이다." "분노한 시민들이 격렬하게 대항한 까닭에, 시민과 공수부대원들 모두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결과적으로 3공수여단 철수과정에서 희생된 시민들의 시신은 5·18항쟁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다."(253-6)


"광주에서 시민에게 처음으로 무기가 반출된 때는 5월 21일 새벽이다. 시민들은 광주세무서를 불태우며 직장 무기고에 보관 중이던 카빈 소총 50정 중 17정을 반출했다. 이날의 무기 반출은 5·18항쟁에서 시민이 무장하고 군에 대항한 근거로 제시됐다. 그러나 당시 광주세무서에서 반출된 총은 실탄이 없는 빈 총이었으며, 군에서도 이 점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미 군에서는 〈광주세무서에서 CAR 17정 분실(20일 야간), 실탄 1,800발 사전 회수 통합 보관〉하고 있었다. 세무서뿐만이 아니었다. 당수 광주 시내의 실탄과 노리쇠 등은 전교사와 31사단이 이미 군부대로 옮겨놓았기 때문에 빈 총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군 자료의 용어와 서술 기조가 바뀌었다. 이전까지는 시위하는 시민들을 '시민'과 '학생' 또는 '군중'으로 표현했지만 방송국과 세무서 방화가 있은 뒤부터는 '폭도' 또는 '난동자'라 칭하며 시민 저항의 성격을 왜곡하기 시작했다. 최초로 폭도가 등장하는 것은 5월 20일 21시 5분의 보고이다."(258-9)


"5월 21일 새벽 3공수여단이 전남대로 철수한 뒤 시민들은 광주역 부근에서 처참하게 내팽개쳐진 두 구의 시신을 발견했다. 희생자들은 허봉(19)과 김재화(34)였다. 허봉의 사인은 '우측 두정골 열상, 좌측 좌두부 좌상'이었다. 사망 경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는 광주역 광장에서 공수부대원들에게 구타당한 뒤 피 흘리며 죽어갔다. 김재화는 광주역 광장에서 총상을 입고 노광철의원으로 옮겨졌으나 5월 21일 새벽 사망했다. 당시 그의 나이 34세로, 사인은 '좌측 흉부 우측 흉부 관통상(M16)'이었다. 이들 사망자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광주역 부군에서 총상이나 타박상을 입었다." "5월 21일 새벽, 광주역에서 발견된 두 구의 시신은 그때까지 광주 시민들의 가슴에 쌓인 슬픔과 분노에 불을 지폈다. 광주 시민들은 자신들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시민들은 태극기를 덮은 두 구의 시신을 손수레에 싣고 전남도청 앞 광장으로 향했다. 공수부대를 광주 시내로부터 쫓아내기 위해서였다."(260-2)


"각종 자료와 증언에 기초하여 5월 21일 오후 1시 전후의 상황을 다시 구성해보겠다. 5월 21일 새벽 5시경 광주역에서 참혹한 두 구의 시신을 발견한 시민들이 전남도청으로 향했다. 오전 10만여 명이 넘는 시민들이 전남도청 앞 금남로로 모여들었다. 전남도지사와 시민 대표들의 협상에서 시민들은 '정오까지 공수부대의 철수'를 비롯한 정부의 만행 인정과 사과 및 보상 등을 요구했다. 공수부대를 비롯한 계엄군은 점차 전남도청 쪽으로 밀려나며 시민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오후 1시 무렵 공수부대가 철수하지 않자 시민들은 실력행사에 들어갔다. 시민들이 금남로에 있던 계엄군 장갑차에 화염병을 던져 불이 붙자 계엄군 측 장갑차 한 대가 뒤로 물러났다. 이 무렵 시민들이 당일 오전에 아세아자동차로부터 꺼내온 장갑차가 전남도청 앞 분수대의 계엄군을 향해 돌진했다. 그로 인해 계엄군의 저지선이 붕괴되고 공수부대원들은 전남도청 분수대 뒤쪽과 전남도청 및 그 주변으로 피신했다."(284-5)


"전남도청 앞을 돌아 빠져나갔다가 다시 금남로에 나타난 시민 측 장갑차와 뒤따라온 버스가 또다시 공수부대를 향해 돌진했다. 뒤이어 11공수여단 63대대 8지역대 권용운 일병이 장갑차에 깔려 희생됐다. 시민이 몰던 장갑차가 잠시 멈춘 다음 전남도청 앞 분수대를 돌아나갈 무렵 공수부대원들이 장갑차를 향해 일제히 집단발포를 시작하고, 장갑차를 뒤따르던 버스를 향해서도 일제 사격했다. 그즈음 전남도청에서 〈애국가〉가 방송되고 분수대 부근의 공수부대원들이 본격적으로 집단발포했다. 이후 대열을 정비한 공수부대는 수협 등 주변 건물의 옥상에 저격병들을 배치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전남도청에서 100~300미터 떨어진 곳까지 저지선을 설정하고 그 안으로 들어오는 시민들을 향해 조준 사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금남로와 충장로 등지에서는 많은 시민들이 쓰러졌다. 금남로와 노동청 쪽 방향에 배치된 계엄군 장갑차도 금남로 쪽을 향해 기관총 사격을 실시했다."(285)


"계엄군의 집단발포에 놀라고 분노한 시민들은 곧바로 무기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니며 무장했다. 국가폭력에 대한 시민들이 무장저항, 부당한 공권력에 대한 시민들의 불복종이 시작된 것이다." "이렇듯 총을 든 시민들은 최소한의 자구책, 생존을 위해 총을 들었지만 언제라도 공권력의 잘못이 고쳐지고 평화가 찾아온다면 총을 내려놓겠다는 입장이었다." "시민들은 광주 이외의 지역에서 무기를 구했다. 주로 경찰서와 지서와 파출소, 예비군 무기고 등지에서 무기들을 꺼냈고, 화순 무기고(화순탄광)와 같이 폭발물이 있는 곳에서 무기와 폭발물을 구해 무장했다. 당시 각 지역의 경찰서 및 지서에는 최소 인원을 제외하고 대부분 광주에 집결해 있었기 때문에 무기를 꺼내 가는 시민들을 물리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 무장한 시민들이 광주 시내에 나타난 시각은 대략 5월 21일 오후 2시 30분 전후이다. 자료들에는 이날 오후 3시 무렵부터 총격전이 발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296-300)


"계엄군이 광주 시내에서 퇴각한 것은 작전상 후퇴일 뿐 진압작전의 근본적인 수정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계엄사령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규정하며 토벌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했다. 광주는 '외부의 불온세력'과 연계된 '폭도'들이 점거한 '불량도시'로 규정됐다. 계엄군의 작전은 광주와 외부를 단절시키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군에 자위권이 발동되고, 많은 양의 실탄이 병사들에게 주어졌다. 게다가 금남로를 비롯한 광주 시내에서 계엄군이 퇴각하여 외곽을 봉쇄할 병력들이 충분해졌다." "5월 21일 이후 실시된 계엄군의 광주 봉쇄는 새로운 '경계'를 통한 '구분 짓기'를 의미한다. 계엄군이 설치한 바리케이드는 단순히 시민들의 출입을 막는 데 그치지 않았다. 시민들의 출입을 군이 가로막는 것도 문제이지만, '폭도'와 '양민'을 가르는 경계가 만들어진 게 더 큰 문제였다. 이 바리케이드는 이후 외곽 봉쇄 기간 내내 '학살의 경계선'으로 기능했다."(310-2)


6_일어서는 광주


"시민군은 광주 시민들의 두터운 지지와 후원 속에 탄생한 조직이었다. 나이와 직업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손에 총을 들 수 있는 거의 모든 계층이 참여했다. 박남선은 전남도청 본관 1층의 전남도청 서무과에 시민(군)상황실을 차리고 상황실장을 맡아 시민군을 조직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항쟁 초기의 변화와 마찬가지로, 시민군의 주력도 대학생에서 청년들로 바뀌어갔다. 총을 잡은 시점에는 차이가 있지만, 시민군은 대부분 5월 21일 오후 전남도청 앞에서 많은 시민들이 희생되는 장면을 보거나 듣고 난 뒤에 자연스럽게 총을 들었다." "시민군 중 순찰대들은 일상적인 치안 유지뿐 아니라 사고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 차량 통제까지 했다. 5월 22일부터 차량등록증을 발급하고 5인 1조씩 순찰대를 구성했다. 5·18항쟁을 왜곡하려는 극우세력들은 이들을 '광수 몇 호'라 부르며 북한의 특수부대원들로 매도했다. 그러나 그들은 금남로나 충장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웃들이었다."(349-51)


"지금 와서 보면 민군 협상은 논의는 가능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어떤 결정도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한 협상이었다. 시민 대표들은 시민들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실질적인 대표단이었던 반면, 전교사의 군인들은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는 전남·북 계엄분소의 지휘부, 즉 계엄사령부의 하급 부대 실무자들일 뿐이었다. 군이 시민들의 신변안전을 보장하지도 않았고 다른 의미 있는 상황 변화도 없는 상태에서 수습위원들이 무기 회수에 나서자 시민(군)들은 강력 반발했다. 시민들은 무조건 무장해제(반납)만을 강요하는 군의 압박에 반발했다." "군이 시민대표단과의 협상을 계속하며 시간을 끌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계엄사령관이 한미 간 협의, 지역감정, 민간인 인질 등을 이유로 5월 24일까지 진압작전(상무충정작전)을 연기토록 지사하고, 국방부장관은 5월 25일 이후로 연기하도록 했다. 결국 전교사 사령관의 지휘 아래 5월 27일 01시에 상무충정작전을 실시하는 것으로 결정됐다."(357-9)


"시민 내부의 강온파 간 대립과 갈등은 세력 분화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5월 25일 밤 새로운 항쟁지도부가 구성됐다. 이날 새로 구성된 '민주시민투쟁위원회' 조직의 총 12명의 지도부 중 7명이 1970년대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경력이 있었다. 정상용·이양현·윤강옥 등은 민청학련사건 등 시국사건과 관련하여 구속 또는 제적당한 뒤 학외에서 활동했다. 윤상원과 김영철은 들불야학에서 강학으로 함께 활동하며 노동운동과 주민운동을 전개해왔다. 정해직은 교육운동을, 박효선은 극단 광대를 만들어 문화운동을 전개해왔다. 5월 26일 밤 항쟁 지도부는 계엄군이 재진입할 것을 예상하며 시민군을 재편하여 광주 시내 주요 지점에 배치하여 최후 항전에 대비했다." "시민군 상황실장 박남선은 〈여기에 있는 사람 중에서 두렵거나 무서운 사람, 처자식이 있는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시오〉라고 권유했다. 또 항쟁 지도부는 계엄군이 본격 진입하기에 앞서 여성과 어린 중고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364-6)


"5월 23일 국방부 출입기자단 21명이 국방부 대변인의 안내를 받으며 광주를 방문 취재했다. 이들이 촬영한 장면은 광주국군통합병원에 입원 중인 환자들(현역, 민간인)의 치료 장면, 병원 앞에서 군인과 폭도가 대치하고 있는 광경, 광주 시가지 항공 촬영, 불에 탄 MBC 건물, 도청 주변 폭도 동정, 시가지 차량 및 시민 움직임, 차량 소실 현장 등이었다. 5·18항쟁이 폭도들의 행위라는 인식을 심으려는 목적에서 의도된 사진 촬영이다. 국방부는 이들에게 헬기를 비롯한 각종 편의를 제공했다." "국방부 출입기자단과의 기자회견에는 5·18항쟁을 인식하는 군이 시각이 담겨 있다. 군은 기자들에게 (데모대 진압과정에서) 선무와 발포 명령이 없었기에 사태가 악화됐고, 불순집단이 섞여 있으며, 시민들의 저항을 〈반정부 폭도〉들의 행위로 낙인찍고 있다. 오늘날 5·18항쟁 왜곡의 주요 근거가 이미 1980년 5월 22일 국방부 출입기자단과의 회견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375-7)


"5·18항쟁의 왜곡과 관련해 또 언급되어야 할 부분은 보안사령부에서 고급 장교들을 광주에 파견한 점이다. 5월 19일 오전 9시경 보안사령부 참모회의에서 광주 상황에 대해 토의한 뒤 당시 보안사령부 기획조정실장인 최예섭 준장을 파견했다. 보안사령부는 광주일고·육사 출신의 홍성률 대령도 광주로 파견했다. 홍성률 대령은 1979년 '10·26' 사건이 발생하자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9사단장 노태우에게 '대통령 유고' 소식을 알리는 개인 서신을 직접 전달한 인물이다." "상무충정작전의 실행을 앞두고 보안사령부는 군의 진입에 앞서 시민군의 무선을 감청하려는 목적에서 515보안부대를 5월 26일 오후 7시 광주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이 과정에서 송정리비행장과 전교사에 대기 중이던 계엄군들에게 총 6,300만원의 돈과 중식용 소 7마리가 내려졌다. 이 중 보안사령관이 금일봉을 내린 게 흥미롭다. 보안사령관이 적지 않은 금일봉을 내린 것은 당시 누가 권력을 잡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위다."(398-400)


"공수부대가 행동을 개시한 시각은 5월 27일 01경부터였으며, 03시 30분부터 미리 정해진 광주 시내의 주요 지점으로 은밀히 침투했다. 상무충정작전이 본격 시작된 것이었다." "3공수여단이 새벽 4시 51분에 무장 헬기 지원을 요청했고, 전교사는 5시 35분에 헬기를 지원했다. 5시 28분에 군은 전남대병원을 점거했다. 특공 임무를 마친 공수부대가 보병부대에 점거시설을 인계하고 광주 시가지에서 철수를 완료한 시각은 3공수여단이 7시 5분, 7공수여단이 7시 15분, 11공수여단이 7시 25분이다. 뒤이어 보병부대가 광주 시내에 주둔하는 것으로 5월 27일 새벽에 전개된 상무충정작전은 일단락됐다." "전남도청을 비롯한 광주 시내 곳곳에는 시민들이 흘린 핏자국이 남겨지고 탄흔이 새겨졌다. 그렇게 5월 27일 아침이 찾아왔다. 시민들의 함성으로 가득했던 전남도청 앞 광장과 금남로는 탱크가 자리했다. 국민들을 학살한 자들은 헬기를 타고 전남도청을 들락거렸다."(408, 412-5)


"광주에 배치된 각 부대의 총 병력은 2만 365명(4,727/1만 5,590)이었다. 원래 전남·북 계엄분소인 전교사의 병력에 특전사령부 병력(3·7·11공수여단)과 20사단 병력이 더해진 통계이다. 총 47개 대대라는 엄청난 규모의 병력에 총 30대의 헬기와 항공기(O-1), 전차, 장갑차, 각종 차량 등의 장비까지 동원했으니 정부와 군, 신군부는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서 전쟁을 벌였던 셈이다. 5·18항쟁 기간 동안 총 2만 365명이 군인들은 총 51만 2,626발의 실탄을 사용했다. 발포하지 않은 계엄군을 감안하면 1인당 50여 발 이상 발포했고, 공수부대는 100여 발 이상의 실탄을 사용한 셈이다. 이는 5월 21일 이후 계엄군이 집단발포하고 무차별적으로 사격했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상무충정작전 직후 전남대병원과 조선대병원 소속 의사들과 보건소 의사들이 민간인 희생자들의 시신을 검안했다. 이후 검찰은 민간인 희생자 수를 총 142명으로 발표했다."(418-20)


"5·18을 무력진압하고 며칠 뒤 신군부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이하 '국보위')를 발족시켰다. 김대중을 비롯한 36명이 군법회의에 회부됐고, 김영삼 신민당 총재도 8월 13일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8월 6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장에서 대장으로 승진했다. 중장으로 승진한 지 불과 5개월여 만의 일이었다. 8월 16일 오전 9시 15분부터 9시 40분까지 합동회의를 가진 최규하 대통령은 오전 10시에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8월 18일 오전 10시 8분에 청와대를 나와 사저로 출발했다.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은 그렇게 사라져갔다. 뒤이어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자는 움직임이 펼쳐졌다. 이날부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안보보고회를 비롯해 21일 전군주요지휘관회의가 열려 전두환 장군을 국가원수로 추대했다.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그를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는데, 총 투표자 2,525명 중 1명이 기권했다 그리하여 9월 1일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4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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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인트 2025-12-08 1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단 한 사람의 한국 현대사 - 한 개인의 역사에서 모두의 역사로
이동해 지음 / 푸른역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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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아산 지주 집안의 왜정살이


1장 ‘천석꾼’ 내력 


"원래 조선인은 호적에 '본관+성+명'의 이름 체계를 기재했다. 〈짱구는 못 말려〉의 짱구 엄마 봉미선의 본관이 경주라고 가정한다면, 호적부 본관란에는 경주, 성명란에 봉미선이라고 적는 식이다. 여기서 본관인 '경주'와 성인 '봉'은 아버지에게서 내려온 것으로, 부계 혈통을 나타내며 변하지 않는다. 짱구의 아버지 신영식과 결혼했더라도 호적부에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본관과 성은 그대로 유지된다. 반면 일본인은 '씨+명'의 이름체계를 사용했다. 여기서 씨는 '가家'를 표현하는 식별부호로, 같은 호적에 등재된 사람은 모두 동일한 씨를 사용한다. 만약 여자로 태어난다면 결혼 전 아버지 가에 속했을 때의 이름, 결혼 후 남편 가에 속했을 때의 이름이 다르다. 봉미선의 일본 버전 이름은 고야마 미사에, 노하라 미사에 이렇게 두 개다. 고야마 미사에는 결혼 전 이름으로 고야마 가에 속한 미사에라는 의미다. 하지만 노하라 히로시와 결혼하고는 노하라 가에 소속되면서 호적에 기재한 이름도 노하라 미사에로 바뀐다."(44)


"따라서 '성'과 '씨'는 다른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성을 바꾸라는 뜻의 개성改姓이 아니라, 씨를 새롭게 만들라는 뜻에서 창씨創氏라고 한 것이다. 실제로도 총독부는 호적에 '본관'과 '성'을 남겨두도록 했다. 다만 씨를 새로이 만들어 '씨+명'을 법률적 호칭으로 사용할 뿐이라고 홍보했다. 또한 창씨는 강제적이었지만 개명은 선택사항이었다. 심지어 1인당 50전의 수수료를 지불하고, 재판소에 신청 이유를 제출해 허가를 받아야 개명이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창씨개명은 '일본식 씨를 새롭게 설정해 법률적 호칭으로 사용하도록 강요한 일'로 이해해야 한다. 엄밀히 따지면 개명은 선택사항이니 '창씨'로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창씨 신고는 일본 진무천황 즉위 2,600년 '기원절'에 맞춰, 1940년 2월 11일에 시작되었다." "일본은 조선인의 모든 것을 일본 스타일로 바꾸려 했다. 창씨도 그중 하나였다. 일본의 가家제도를 조선에 뿌리내리려고 했던 것이다. 여기엔 천황제 국가의 지배원리를 이식한다는 의미도 담겼다."(45)


2장 식민지 농촌 지주가 사는 방식 


"넓은 땅을 갖고 소작을 나눠 주는 지주제가 한반도에 정착한 건 16세기 후반이다. 토지에 부과된 조세를 벼슬아치가 직접 수취할 권리, 즉 수조권收租權이 소멸되자, 일정량의 녹봉에만 의지할 수 없던 관료층은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토지는 하나의 상품이 되어 거래되었고 널따란 땅을 가진 지주가 등장했다. 지주제는 일본 식민 당국의 토지조사사업과 등기제도를 통해 더욱 공고해졌다. 이에 따라 대토지를 소유하고 소작료를 받는 일은 식민지 조선에서 안정적으로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대표 사업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의 '건물주'처럼." "식민지 조선에서 소작료를 받는 방식은 세 가지로 나뉜다. ①소작료 액수를 고정하는 정조定租, ②지주와 소작인이 수확량을 어떤 비율로 나눌지 정하는 타조打租, ③수확 직전에 지주와 소작인이 함께 혹은 지주가 혼자 작황을 보고 어떻게 분배할지 정하는 집조執租다. 1930년 통계를 보면 타조가 44.4퍼센트로 가장 많고, 집조 28.2퍼센트, 정조 19.2퍼센트순이다."(54-5)


"짚으로 싸서 쌀을 담는 가마니, 가마. 우리에게 친숙한 이 말은 일본어 '가마스かます'에서 비롯됐다. 원래 조선에서는 홉(0.18리터), 되(1.8리터), 말(18리터), 섬 혹은 석(180리터)이란 단위를 사용했다. 그리고 짚으로 짠 '섬'에 곡식을 담아 숫자를 매겼다. 곡식 천 석을 거두는 부자란 뜻의 천석꾼처럼 말이다. 그런데 어쩌다 가마니가 등장한 걸까? 한 가마는 한 석의 절반에 해당한다. 19세기 말, 조선의 시장이 개방되자 일본은 막대한 양의 미곡을 사들인다. 이때 일본 상인들에게 고민이 생긴다. 첫째는 조선에서 사용하는 포장재인 '섬'이 일본 시장에 통용되는 '가마니'와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섬으로 산 쌀을 일본의 소비자가 선호하는 가마니에 다시 포장해야 했다. 둘째는 섬이 가마니에 비해 헐거웠다는 점이다. 조선의 경우 껍질 채인 벼 상태로 유통되었기 때문에 치밀하게 짜지 않은 섬을 사용해도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일본 상인은 현미나 백미로 가공해 쌀을 유통했기에 보다 촘촘한 가마니를 선호했다."(64-5)


2부 몰락 속의 해방 전후


1장 ‘황금광’ 열풍에 뛰어들다 


"1930년대에 연이어 벌어진 전쟁은 '국방 자재'와 '생산력 확충 자재' 수입 확대를 불렀고, 결제 수단인 금이 보다 절실해졌다. 또한 대공황 극복을 위해 통화 발행을 크게 늘린 탓도 있었다. 통화 가치가 폭락하지 않도록, 보험 격인 금을 상당량 확보해야 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 전시에 돌입하자 이젠 더 많은 생산을 넘어 통제까지 하기에 이른다. 9월 총독부는 '조선산금령朝鮮産金令'을 제정한다. 금제품 제조에 까다로운 규제를 두는 한편, 금을 직접 매입해 식민지 조선의 중앙은행인 조선은행으로 금을 집중한다는 내용이었다. 조선은행의 금은 최종적으로 일본 정부에 전달될 예정이었다. 이러한 정세에 맞춰 금 가격도 뛰어올랐다. 1911년 1돈에 2.95원이던 금값은 1937년에는 18원, 1939년에는 30원까지 오른다. 게다가 당국에서는 금을 시가로 매입했다고 하니, 금을 캐기만 하면 무조건 높은 가격으로 팔 수 있었다. 금광은 식민지 조선 최고의 투자처로 떠올랐다. 황금에 미친 '황금광黃金狂 시대'가 된 것이다."(75-6)


# 진주만 공격(1941. 12) 이후 일본의 금은 대외결제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잃었고, 1943년부터 수많은 금광이 총독부의 손길 아래 정리된다.


2장 태평양전쟁기 조선인 가정의 생활상 


"일제가 시행한 황민화 정책에서 학생의 자아는 중요하지 않았다. 언제든 국가를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일본어로 소통이 가능해 빠르고 정확하게 명령을 이행할 수 있는 사람이면 충분했다. 먼저 학생의 조선어 사용을 억제했다. 1938년 시행한 '제3차 조선교육령'은 필수과목이던 조선어를 선택과목으로 바꾼다. 강제는 아니지만 승진 평가나 학교 운영에 영향을 주다 보니 각 학교는 조선어 수업을 대폭 줄이게 된다. 1941년엔 초등학교 이수 학생을 위한 황민화 종합 대책, '국민학교규정'을 발표한다. 서양의 영향을 받은 교육에서 벗어나 일본의 참교육을 실시한다는 명분이었다. 〈국체에 대한 신념을 견고히 하며 황국신민임을 철저히 자각하는 일에 힘쓴다〉고 명시돼 있었다. 1938년부터 보통학교를 심상소학교로 바꿔 불렀는데, 1941년부터 심상소학교는 6년제 국민학교로 개편된다. 이어 1943년 '제4차 조선교육령'에서는 아예 학교를 징병제를 위한 군대의 보조기관으로 설정하고 노동력 공급원으로 활용한다."(90-1)


3장 해방 직후 아산의 이모저모 


"1945년 10월 5일, 미군정은 일반고시 제1호 '미곡의 자유시장'을 공포한다. 이로써 일제가 시행한 각종 식량 통제는 해제된다. 그러면 왜곡된 시장이 정상으로 돌아와 저렴한 가격으로 쌀이 유통될 것이라 보았다. 하지만 이것은 커다란 오판이었다. 해외로 나갔던 인구가 대거 유입되고 38도선을 넘어 내려오는 월남인이 다수 발생했으며, 일제 말 화폐의 대량 발행과 물자 부족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초래됐다. 쌀값이 하루가 다르게 오르자 사람들은 선뜻 판매하려 하지 않았다. 매점매석이 판을 쳤지만 행정이 완비되지 못해 단속에 어려움을 겪었다. 쌀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러다 식량 부족 사태에 직면하리라 판단한 미군정은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미곡의 자유 거래가 허용된 지 불과 3개월이 지난 1946년 1월 25일, 미군정은 법령 제45호 '미곡수집령'을 발표해 공출에 착수한다. 미군정 주도의 미곡 시장 통제 시스템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계속되다가 1957년에 가서야 완전히 사라졌다."(105-6)


"1947년 말의 한 기사를 보자. 〈아산군 온양리 국민학교 교원 중에는 일부 적색 악질분자가 있어서 아동들에게 '적기가赤旗歌'를 부르게 하는 등 악질행위를 계속하여 오던 중 학무과에서는 일부 숙청을 목적으로 그들 악질 교원에게 임시 전근을 명하였는데 도리어 그들은 밀의한 끝에 책임을 교장에게 전가시키며 모욕을 주다가 교장에게 사임을 권고하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학부모들의 알선으로 아동 지도의 지장이 없도록 양력兩力 일단 간정은 되었으며 (···) 〉" "'민중의 기旗 붉은 기는 전사의 시체를 싼다'는 가사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19세기 말 영국의 사회주의자가 독일 민요의 음에 가사를 붙여 〈더 레드 플래그The Red Flag〉라고 이름 붙인 게 시초다. 1920년대 일본 사회주의 운동가들에게 소개되었고 곧 조선으로 유입된다." "극심한 이념 대립으로 치닫는 가운데 흥미로운 부분은 학부모의 반응이다. 일단은 〈아동 지도에 지장이 없도록〉 학부모가 직접 중재에 나섰다. 이념에 크게 개의치 않았던 것이다."(108-9)


3부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서


1장 2주 만에 점령된 아산 


"'다 같이 공평하게 먹고살자'는 사회주의의 간단한 메시지는 빈곤을 겪는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47년 하반기, 좌익은 활발한 지하 활동과 폭력투쟁을 벌였는데 아산에서도 이러한 모습이 확인된다. 1947년 11월, '민주애국청년동맹' 아산 지역 책임자 이병학과 남조선노동당 당원 홍태식이 청년층 세력 확장을 목적으로 여러 직장과 단체에 사람을 잠입시켰다가 경찰에 검거된 바 있었고, 5·10총선거 직전인 1948년 5월 8일에는 사이렌을 신호로 경찰지서, 경찰 가족, 입후보자의 살해 및 방화를 계획한 17명이 염치면에서 체포되었으며, 9일엔 신창면의 전신주 2개를 파괴한 남로당원이 체포되었다. 우익의 시각에서 〈전쟁 나기 전에도 공산당이 많이 보였어〉라는 말이 나올 법했다." "인민군의 진주 소식을 접한 뒤 재빨리 인민위원회를 조직한 이들은, 인민군과 함께 진주한 민족보위성 정치국 산하 '군정 부대'로부터 마을을 인계 받아 북한 내무성 아래에 편재되었다. '인공 치하'가 시작된 것이다."(137-9)


2장 북한 당국의 점령 정책 


"북한 당국이 시행한 대표적인 점령 정책 몇 가지를 살펴보자. 첫째는 주민의 의식화다. 주민의 대부분은 전쟁 전 '반공反共'을 국시國是로 삼는 대한민국의 국민이었다. 당연히 그대로 둘 수 없었다. 북한은 문화선전성을 중심으로 각종 의식화 사업을 거의 매일 밤 실시했다." "둘째는 토지개혁이다. 북한 당국은 1946년에 이미 북한에서 실시한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급진적인 경험을 살려, 농민의 지지를 이끌려고 했다. 한 가지 알아 둘 점은 남한도 1949년 6월 '농지개혁법'을 제정하고, 1950년 3월이 되면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농지개혁안을 확정했다는 사실이다." "셋째는 세제개혁이다. 1950년 8월 18일 '공화국 남반부에 있어서 농업현물세를 실시함에 관한 결정서'를 공포하며 '농업현물세제'를 시행했다." "하지만 낙동강 전선에서 더 나아가지 못해 보급 상황이 열악해지자 '애국미', '감사의 쌀', 성금 헌납을 요구했고, '현물세 조기 납부운동'을 벌였다. 따라서 실제 현물세율은 훨씬 높았다고 볼 수 있다."(141-3)


3장 반동으로 찍힌 허홍무 일가 


"이승만 정부는 1948년 11월 여기저기 난립한 우익 청년단체들을 통합하기로 결정한다. 미군정 시절 좌익 탄압에 일조한 이들이었지만, 그동안 커진 영향력을 견제하는 한편, 청년 자원을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활용하려는 심산이었다. 12월 19일, 국민회청년단, 대동청년단, 대한독립청년단, 서북청년단 등 40여 개 단체가 모여 결성식을 가졌다. 통합된 단체의 이름은 대한청년단이었다. 〈우리는 총재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을 절대 복종한다〉, 〈민족과 국가를 파괴하려는 공산주의 적구도배赤狗徒輩를 남김없이 말살하여 버리기를 맹세한다〉라는 선언문 내용에서 이 단체의 성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공산주의자를 赤狗, 즉 '붉은 개'라 부르며 말살을 다짐하는 대한청년단은, 북한이 보기에 무조건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다. 게다가 일부는 경찰과 함께 보도연맹 학살에 투입되기도 했던 이들이었다. (허홍무의 아버지) 허용은 대한청년단에서 활동한 허창성, 허규의 형이라는 이유로 숙청 명단에 오른 듯하다."(154-5)


"허홍무가 굴에 숨어 있던 기간은 9월 초부터 말까지였다. 밖으로 나올 수 있던 것은 전세가 역전돼 인민군이 후퇴했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계기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만약 작전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허홍무는 기약 없이 굴속에서 지냈을 것이다. 자꾸만 음식을 갖고 방공호에 오르는 고모를 누군가 수상히 여겨 발각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작전을 계획하고 지휘한 맥아더는 생명의 은인이었다. 굳이 인천에 '맥아더 장군 동상'이 있다고 강조한 이유다." "북한은 인천 상륙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박태균은 이렇게 설명한다.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이 유엔군에 뚫릴 경우 인민군이 급격한 궤멸 상태를 당할 것을 더 두려워한 것 같다.〉 낙동강 전선 약화를 감수하고 병력을 빼 해안 방어를 강화하거나, 모든 역량을 낙동강 전선에 투입해 재빨리 한반도 점령을 완수하거나 둘 중 하나만 해야 했다. 보급선은 너무 길고 제공권은 미군이 장악한 상태에서 둘 다는 불가능했다. 후자를 선택한 결과는 인민군의 패퇴였다."(159-60)


4장 유혈이 낭자한 수복 광경 


"〈미 24사단 소속 일부 병력과 협동, 9월 29일에 전주에 진주한 나는 죽창 등을 가진 지방 청년들이 벌써 2,000여 명의 부역자를 체포해 놓고 있는 놀라운 광경에 직면하였다. 이런 때 대개 미숙한 경찰의 약식 신문을 거쳐 사찰주임 등이 등급을 대충 구분하여 놓으면 순회하는 법무장교가 왔을 때 '1열 사형, 2열 무기, 3열 15년 징역 ······' 등으로 즉결되는 것이 당시 수복지구의 비상조치령 운용 실태였으며 관官측 형편은 그때로서는 별무도리別無道理였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부역자 수는 부지기수이니 한정된 유치장이나 경찰 양식으로 언제 올지 모르는 판검사 수속만 기다릴 수는 전후戰後 좌우에 패잔 인민군이 우글우글한 판국에서 불가능했을 것이다.〉 박병배 전 전주경찰서장의 회고는 열악한 여건 속에 '비상조치령'이 얼마나 파행적으로 시행되었는지 보여 주는 사례라 하겠다. 형식적이더라도 절차를 밟았다면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렇지 못하고 즉결처분된 경우가 대다수였기 때문이다."(168-9)


4부 1954~1959년 사이의 전후 풍경


1장 배움 찾아, 촌사람의 서울살이 


"정전 조인식이 거행된 1953년 말, 손원일 국방부장관은 국군 증강을 강조한다. 〈우리 대한민국은 항시 이러한 사태에 대비하여 항상 자체 강화에 노력해 왔으며 앞으로도 국군 증강을 위하여 만전을 기할 것이다.〉 한편에서는 장기간 복무한 병사를 제대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전쟁 중 병력으로 충원된 인원은 77만 명에 달했다. 전시에 입대한 병사들은 '병역법'에 의거, 복무 기간이 무기한 연장된 상태였다. 4년 넘게 장기 복무한 사람도 많았다. 제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열악한 급여, 복지를 버티다 못한 군인들이 탈영하는 문제가 떠올랐다. 결국 정부는 1954년 4월 1일부터 사병이 제대할 수 있도록 조치한다. 많이는 아니고 조금씩. 병력 수는 유지해야 하는데, 병사들 제대는 시켜야 했다. 고민 끝에 정부가 내린 선택은 입대 연령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1954년 1월 8일 국무회의에서는 기존의 만 19~28세였던 징소집 연령을 위아래로 한 살씩 늘려 만 18~29세로 바꿀 것을 의결한다."(187)


"전쟁 통에 군인이 된다는 건 크나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국가의 부름에 응했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지금 누리는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병역 기피 방법은 다양했다. 군인 신분증을 위조해 군인 행세를 하는가 하면,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넘어가거나, 도끼로 손가락을 자르는 일도 있었다. 호적 담당 공무원을 매수해 생년월일을 변경하는 경우도 많았다. 심지어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것처럼 꾸미다 걸린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정부는 당연히 모든 행정력을 동원해 기피자 색출에 나섰다. 이러한 배경 속에 등장한 게 가두街頭 검색이다. 길거리에서 경찰, 헌병이 지나가는 젊은 남성을 한 명, 한 명 붙잡고 확인했다. 징소집을 회피한 자, 전출·전입 수속을 하지 않고 무단 여행한 자로서 걸린 사람은 그 즉시 입대시킨다는 방침이었다. 전출·전입 수속을 하지 않고 무단 여행한 자, 바로 허홍무였다. 〈병적증명서〉에 따르면 입대일은 1954년 7월 12일이다."(188-90)


2장 ‘쌍팔년도’의 군 생활 


"〈훈련소에서 도망가는 사람이 엄청 많았어. 울타리로 막 뛰어 나갔어. 그때 전방에서 군인들이 막 싸웠으니까. 전방 가면 다 죽는다, 이래 가지고, 도망가는 놈들이 다 전라도 놈들이었어. 전부가 전라도 사람.〉" "예전부터 들어온 전라도 편견에 대한 이야기는 이런 식이다. 그 뿌리를 밝히긴 쉽지 않다. 역사적으로 어떤 맥락이 있었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다만 분명한 점은 1950년대 들어 전라도에 대한 편견이 사회에 널리 퍼졌다는 것이다. 바로 전라도를 비하하는 뜻의 '하와이'라는 단어를 통해서였다. 배신의 의미가 함축적으로 담긴 '하와이'는 한국전쟁 직후부터 확산했다. 징병을 기피하고 탈영하는 사람 중 전라도 출신이 많은 것을 본 미 고문관이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에서도 하와이 출신 가운데 그런 경우가 많다고 얘기한 것에서 연유했다는 설이 있다. 물론 사실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분명 허홍무의 편견과 맞물려 탈영병 '전부가 전라도 사람'이란 기억을 만드는 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192-5)


"허홍무의 마지막 근무지는 충청남도 성환이었다. 그곳에서 탄약고 경비를 보다가 1958년 5월 30일에 제대한다. 46개월의 길고 긴 군 생활이었다. 〈거주표〉를 보면 허홍무는 1954년에 일등병으로, 1955년 12월 1일 하사로, 1957년 10월 1일 병장으로 진급했다. 뜬금없이 웬 하사냐고? 이때는 하사가 부사관이 아닌 병사 계급이었다. 1957년 초, '병진급령' 개정으로 이등병→일등병→하사였던 병사 진급체계가 이등병→일등병→상등병→병장으로 변경된다. 이러한 까닭으로 허홍무는 하사가 아닌 병장으로 제대한다. 그런데 제대 기한이 없었다니? 입대 첫날부터 남은 날짜를 계산했던 나로서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하지만 허홍무는 말 그대로 제대 자체가 없었다. 전쟁 발발 시점부터 입대한 모든 장병은 '병역법'의 전시하 복무 기간 연장 조항에 의거, 복무 기간이 무한대로 연기되었기 때문이다. 70여 만 대군은 그렇게 제대 없이 입대만으로 쌓아 올린 것이었다."(214-5)


3장 그 시절의 연애와 결혼 


"1950~1960년대, 오랜 세월 지켜 온 전통과 새로 유입된 서양문화가 충돌하는 가운데 한국인의 결혼관은 부모가 결혼 상대를 정해 주는 정혼定婚에서 연애결혼으로 한창 변화 중이었다. 1958년 7월부터 1년간 서울대와 이화여대가 서울 시내 300가구를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62퍼센트가 부모의 결정에 의해 결혼했지만 자녀가 결혼할 때는 적어도 자녀의 의사를 확인하겠다고 답했다. 정혼과 연애결혼을 절충해, 중매인에게 먼저 결혼 상대를 소개받은 뒤 사귀어 보고 뜻이 맞으면 결혼하는 '중매 연애'라는 새로운 풍조도 등장했다." "안타깝게도 아버지 허용은 아들의 의견을 물어볼 생각이 없었다. 부모가 결혼 상대를 정해 주는 정혼은, 자신도 그랬고 자신의 아버지도 그랬듯 '당연한 것'이었다. 그저 예전부터 하던 대로 할 뿐이었다." "허홍무는 아버지의 말을 차마 거역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효는 양반의 도리에 어긋나는 너무나도 큰 죄였다. 그는 끝내 아버지의 결정을 받아들였다."(228-9)


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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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물·동맹 - 행위자네트워크 이론과 테크노사이언스
브루노 라투르 외 지음, 홍성욱 엮음 / 이음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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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행위네트워크 이론: 불확실하고 변화하는 수상한 사물에 주목하라 (홍성욱)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은 우리가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래프, 설계도, 표본, 표준, 기관, 병균과 같은 '비인간'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은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형성되는 네트워크에 주목한다. 네트워크의 형성이 '번역(translation)'이라고 불리는 과정이다." "그렇지만 이 과정은 거의 항상 불분명하고 쉽지 않다. 네트워크의 형성을 특징짓는 여러 단계 중에 비인간을 '길들이는' 것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우리가 과학기술이라 부르는 것이다. 과학기술, 혹은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의 용어로 테크노사이언스(Technoscience)는 비인간을 우리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바꾸어주는 인간의 활동이다. 더 많은 행위자들을 포함하고 더 오래 지속되는 네트워크를 건설한 자가 그만큼의 권력을 갖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과학기술은 권력을 생성하는 데, 따라서 권력의 속성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이다."(7-8)


프롤로그 


제1장 7가지 테제로 이해하는 ANT(홍성욱) 


# 7가지 테제

1. ANT는 경계넘기를 꾀한다 : ANT는 사회(주관적·성찰적)/자연(객관적·사실적)의 구분은 물론, 이러한 구분에서 파생되는 가치/사실, 주관성/객관성과 같은 경계도 거부한다.

2. ANT는 비인간(nonhuman)에 적극적 역할을 부여한다 : 비인간은 인간과 마찬가지 행위자(actor)이다. 내가 다른 사람의 행위를 바꾸는 것처럼, 비인간도 우리 인간의 행위를 바꿀 수 있다는 의미의 행위능력(agency)을 가지고 있다.

3. ANT의 행위자는 곧 네트워크(network)이다 : 나는 나를 만드는 숱한 비인간 행위자들과 연결되어 있다. 나의 행위능력이란 나와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는 숱한 행위자들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된 '관계적 효과'로 볼 수 있다.

4. 네트워크 건설 과정이 번역(translation)이며, 번역을 이해하는 것이 ANT의 핵심이다 : 행위자들의 네트워크는 역동적이고, 소멸되기 쉬우며, 이종적이다. 네트워크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자신의 특성을 재정의한다. 따라서 번역, 즉 네트워크의 건설은 결과가 아니라 끝없는 과정이며,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성공적인 번역 과정은 권력을 획득하는 과정이다.

5. 네트워크를 잘 기술(description)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이론이다 : ANT는 이론(Theory)이라 불린다. 그렇지만 ANT 이론에는 잘 짜여진 체계가 없다. ANT는 성공했거나 실패한 네트워크 사례에 대한 역사적·인류학적 연구를 중시하는데, 실제로 ANT는 사례에 대한 경험적 연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6. ANT는 권력(power)의 기원과 효과에 대해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한다 : 인간은 다양한 비인간을 어떻게 조직하고 통제하는가에 따라서 더 큰 권력을 가질 수 있다. 권력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이해하면 그것을 어떻게 재분배할 것인가를 모색하는 데 도움이 된다.

7. ANT의 '사물의 정치학'은 민주주의를 위해 열려 있다 : 이 세상이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잡종적인 네트워크로 만들어져 있음을 인식하고, 그것이 인간 행위자와 비인간 행위자의 상호작용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인정하면, 그러한 실천 속에서 대안 네트워크의 가능성이 찾아진다.


제1부 ANT 해부하기 


제2장 ANT에 대한 노트: 질서 짓기, 전략, 이질성에 대하여(존 로) 


"왜 우리는 행위자나 기관 조직 뒤에 존재하는 네트워크를 거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까. 예를 들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텔레비전은 비교적 단순한 하나의 물체로 인식된다. 하지만 그것이 고장나면 사람들은 비로소 텔레비전이 전자부품과 인간의 개입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네트워크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건강한 사람에게는 자신 내부의 다양한 신진대사가 잘 인식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픈 사람, 혹은 의사들에게 신체는 인간적·의학적·약학적 과정들이 어우러진 복잡한 네트워크이다." "동어반복처럼 들리겠지만, 어떤 행위자가 단일 개체처럼 보이고 네트워크처럼 보이지 않는 까닭은 단순화에 있다. 모든 현상은 이종적인 네트워크의 산물이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세분화된 네트워크를 직접 대하지는 않는다." "ANT 이론가들은 이러한 불안정하고 가변적인 단순화를 결절(puntualization)이라고 부르며, 이러한 규칙화는 사회를 이루는 네트워크의 중요한 특성 중 하나이다."(47-8)


"결절은 과정이지 단번에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ANT에서 사회 구조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사회 구조는 건물의 뼈대처럼 계속 굳건하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적 과정 속에서 되풀이되고 재생산되는 갈등의 장에 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ANT는 일반적 의미의 다원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ANT는 힘이나 질서의 중심이 여러 개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ANT는 권력이 관계적이고 분배적 맥락에서 생성되는 것이지, 완성된 것이 아님을 주장한다. 고전 사회학의 용어를 빌리자면, 질서와 권력은 다툼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ANT에서는 질서를 향한 갈등에 대한 분석이 매우 중요하다. ANT의 목표는 규칙성, 사회적 조화, 질서와 저항의 과정들에 대해 연구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도구, 행위자, 기관, 조직 등과 같이 질서를 생성하는 번역의 과정을 연구하는 것이다. 즉 번역은 하나(행위자)가 다른 하나(네트워크)를 대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는 동사이다."(48-9)


제3장 번역의 사회학의 몇 가지 요소들: 가리비와 생브리외 만의 어부들 길들이기(미셸 칼롱) 


"세 명의 연구원이 구성한 질문과 그들이 제공한 기록을 보면 가리비, 생브리외 만의 어부 그리고 과학자 동료라는 다른 세 행위자들이 이야기에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연구원의 논문에서 그들이 전개한 주장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만약 가리비가 살아남기를 원한다면(이런 충동을 어떠한 메커니즘으로 설명하든지 상관없이), 만약 과학자 동료들이 이 주제에 관한 지식을 향상시키고자 한다면(그들의 동기가 무엇이든지 간에), 만약 어부들이 그들의 장기적 경제 이익을 보존하고 싶어한다면(그들의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렇다면 그들은 ①'어떻게 가리비가 부착하는가?'라는 질문의 답을 알아야만 하고, ②이 질문을 둘러싼 그들의 동맹이 그들 각각에게 이익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그들의 전체 계획은 가리비의 부착이라는 질문 주변을 맴돌고 있다. 이 행위자들에게 선택은 분명하다. 목표를 바꾸든지, 또는 유생이 부착하는 방법에 대해 연구하고 결과를 얻어내야 할 필요성을 인정하든지."(69-71)


"번역의 개념은 치환과 변형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문제제기 단계에서의 치환은 어부들에게 개인의 단기적 이해를 쫓는 대신 연구원의 연구를 따르기 위해 그들의 우선적인 문제와 계획의 초점을 바꿀 것을 권유했다. 관심끌기 단계에서 치환은 해저로 떨어지거나 해류에 떠밀리는 유생(어린 가리비)이 그물에 걸릴 때 이루어졌다. 상호 양보를 통해 동의가 얻어지는 등록하기 단계 동안의 치환은 유생을 더 효율적으로 포획하기 위해 새로운 위치로 옮기고, 유생 또한 연구원을 유생들의 영역으로 유인하는 일이었다. 동원하기 단계 동안의 필수적인 치환은 유생을 수집기에 부착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결국, 최종 단계의 치환은 불일치의 치환으로, 어부는 방벽에 잠입하고 연구원을 따르기를 거절하면서 가리비 보호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일련의 예측할 수 없는 치환에 힘입어, 이 모든 과정은 모든 행위자들을 세 연구원과 그들의 개발 계획을 지나쳐가도록 이끌어 여러 가지 변태와 변형의 결과를 낳게 한 번역이었다."(92)


"번역하는 것은 또한 다른 이들이 말하는 것과 원하는 것, 왜 그들이 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고 그들이 서로 어떻게 연합하는지를 자신의 고유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대변인으로 세우는 것이다. 세 연구원은 가리비, 어부 그리고 과학자 공동체를 대신하여 이야기한다. 처음에 이 세 가지 우주는 분리되어 있었고, 서로 의사소통할 어떤 방법도 갖고 있지 못했다. 마지막에는 확실성의 담론이 그들을 통합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을 의미가 명료한 방식으로 서로 관계 맺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다양한 종류의 치환과 변형, 협상, 그리고 여기에 수반된 조정이 없었다면 이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번역의 레퍼토리는 갖가지 사회적·자연적 실체들을 같이 끊임없이 혼합하는 복잡한 과정의 대칭적이고 관용적인 묘사를 제공한다. 그것은 또한, 소수가 그들이 동원한 사회적·자연적 세계들의 수많은 조용한 행위자들을 대변하고 대표할 권리를 어떻게 얻는지에 대한 설명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93-4)


제4장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에 관하여: 약간의 해명, 그리고 문제를 더 복잡하기 만들기 (브루노 라투르)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은 사회적 법칙이나 자연적 법칙과 같은 보편 법칙으로부터 출발하여 국지적 우연성을 제거하거나 보호해야 할 기묘한 특수성으로 파악하는 대신, 환원할 수 없고 비교할 수 없으며 연결되지 않은 국지성에서 출발하는데, 이러한 국지성은 가끔 많은 비용을 치르면서 일시적으로 비교 가능한 결합들로 귀결되기도 한다. 이러한 배경/전경 뒤집기를 통해 ANT는 무질서로부터의 질서나 카오스 철학과 약간의 유사성을 보이며, 민속방법론(ethnomethodology)과 많은 실질적인 연관을 갖는다. 보편성이나 질서는 규칙이 아니라 설명되어야 할 예외이다. 구역들, 우연성들, 군집들은 육지에 점으로 찍혀 있는 호수라기보다는 바다 위에 떠 있는 군도와 더 유사하다. 덜 유비적으로 말한다면, 보편주의자들은 모든 표면을 질서나 우연성으로 채워야 하는 반면에 ANT는 국소적인 질서의 꾸러미들 사이나 이런 우연성들을 연결하는 실조각들 사이를 채우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00-1)


# 네트워크들의 공통된 성질들

1. 멀고 가까움 : 네트워크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거리의 횡포' 또는 근접성을 제거할 수 있다. 가까이 있지만 연결되지 않은 요소들은 무한히 멀어질 수 있고, 매우 멀지만 연결되어 있는 요소들은 오히려 가까워질 수 있다.

2. 크고 작음 : 거시/미시 구분 모델은 사회가 마치 실제로 상층부와 하층부로 이루어진 것처럼 위계 관계에 얽매여 있다. 한 네트워크는 결코 다른 네트워크보다 더 큰 것이 아니라, 단지 더 길거나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3. 내부와 외부 : 네트워크는 모두 내부와 외부가 없는 경계이다. 질문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두 요소 사이에 연결이 만들어졌는가 아닌가 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연결들 사이의 공간을 채우는 데 연연할 필요가 없다.


제5장 인간과 기계에 대한 '발칙한' 생각: ANT의 기술론(홍성욱) 


"엔지니어를 포함해서 기술에 대해 낙관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기술 그 자체는 가치중립적이지만 기술을 누가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이를 선하게도, 혹은 악하게도 쓸 수 있다고 본다. 라디오는 가치중립적이지만, 그 기술이 나치당에 의한 선전도구로 사용되었을 때에는 나쁜 용도로,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민주화운동 조직의 메시지 전달용으로 사용되었을 때에는 좋은 용도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이러한 생각이 현대 기술의 복잡한 정치성을 왜곡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비판자들은 핵무기와 같은 기술은 어떻게 사용되어도 좋게 사용될 수 없다는 점을 반례로 지적한다." "이렇게 기술의 본질적인 정치성을 강조한 기술철학자 랭던 위너는, 흑인들이 주로 타던 버스가 통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존스비치(Jones Beach)로 향하는 고속도로 위의 고가를 일부러 낮게 설치한 뉴욕 건축가 로버트 모제스의 설계가 기술의 정치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주장한다."(139)


"그런데 기술의 정치성을 기술의 네트워크가 만들어낸 효과로 인식하면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다. 가령 뉴욕의 건축가 로버트 모제스가 인종차별주의의 영향을 받아 흑인들의 버스가 통과하지 못하도록 고속도를 낮게 설계했다고 해도, 흑인들이 수십 년 동안 이 문제 때문에 존스비치에 접근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상당한 논리적 비약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모제스가 이를 설계했던 1930년대와 현재의 사이에는 흑인들의 권리가 현격하게 향상된 1960년대라는 문화혁명의 시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모제스는 자신이 낮게 설계한 고가도로가 20세기 중엽 이후에는 흑인들의 버스가 아닌 현대 물류의 주역 컨테이너를 막을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모제스의 고속도로는 이제 1930년대와는 다른 인간-비인간의 네트워크 속에 위치하며, 따라서 1930년대와는 다른 역할과 정체성을 부여받는다. 기술을 둘러싼 네트워크가 달라지면, 그 기술의 정체성도 변하는 것이다."(139-41)


"우리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기술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기술의 속성을 이해하려고 기술에 대해 연구하지만, 기술이 항상 우리가 계획한 대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다시 기술과 인간 모두가 네트워크이기 때문에 그렇다. 기계 부품들이 모여서 기술을 만드는데, 어떤 경우에는 새로운 부품을 하나 더함으로써 전혀 예상치 않은 결과를 얻곤 한다. 또 기술은 기존의 기술-인간의 네트워크 속에 편입되어 그 속에서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하는데, 이 네트워크가 새로 도입된 기술에 의해서 변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기술의 효과, 용도, 의미를 정확하게 예상하는 것이 어렵다. 그러므로 창의적인 혁신가에게 요구되는 능력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예상하는 예언자의 능력이 아니라, 기술의 궤적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의외의 결과에 당황하지 않고 새로운 네트워크의 형성 과정을 예의 주시하면서 그 속에서 과거에는 없던 인간-기술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기술을 새롭게 위치시키는 능력이다."(142-3)


"기술이 행위능력을 갖는다는 것은 기술이 다른 기술들, 인간들 속의 네트워크에 위치해서 서로를 바꾸는 식의 영향력을 주고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술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대신하기도 하지만, (인간과 결합함으로써)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기도 한다. 도시의 범죄를 줄이는 것은 경찰을 늘려서 치안을 강화하는 방식으로도 가능하지만, 공공 디자인을 개량함으로써도 가능하다. 그런데 범죄 예방 외에도 현저하게 범죄를 줄이는 데 성공한 도시 디자인을 마주치는 것은 무장 경찰과 마주치는 것과는 또 다른 효과를 낳는다. 이러한 사례에서 보듯이 기술의 행위능력에 주목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을 기술에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인간의 고유한 영역인 윤리적 문제에 개입할 수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만 윤리의 '목적'(end)이 적용되고 대상에게는 '수단'(means)만이 부여되는 근대 윤리학의 골격은 윤리학과 기술이 혼합되어 버리는 상황에서는 그 의미가 약화되기 때문이다."(150-1)


제2부 ANT 확장하기 


제6장 경제 행위자 조합하기: 헤지펀드의 아장스망 (이언 하디& 도널드 맥켄지) 


"칼롱의 분석에서는 경제 행위자가 개인적인 존재가 아니며, '제도, 규약, 개인관계 또는 집단 내에 배태된' 존재조차도 아니다. 칼롱에게 있어 행위자란 '인간의 몸체뿐 아니라 보철물, 기구, 설비, 기술장치, 알고리즘 등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달리 표현한다면 (언어 유희를 수반한) 아장스망(agencement)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아장세(agencer)는 배열하거나 서로 맞추는 일을 하며, 아장스망은 조립, 정리, 배열 또는 배치를 의미하게 된다." "아장스망에 대한 언어유희의 또 다른 측면은 아장스(agence)와 에이전시(agency)이다(여기서 '아장스망'은 일반적인 영어의 '배치assemblage'와 같은 표현과는 달리 다소 수동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행위자들은 본래적인 성질이나 고정된 존재를 갖지 않는다. 그들의 특질은 복수의 아장스망으로 만들어진 것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따라서 〈행위능력을 (재)형성한다는 것은 그것을 구성하는 사회기술적인 복수의 아장스망을 (재)형성한다는 의미이다.〉"(158-9)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행위가 항상 안정성을 촉진하지는 않는다. 아장스망의 구성과 형성으로 인한 또 다른 효과는 감염의 위험이다. 예컨대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들로 금융위기가 확산되는 것을 들 수 있는데, 여기에는 무역을 거의 하지 않거나 금융위기 발생국과 무관한 국가들도 포함된다." "결과적으로 다수의 국가들을 대상으로 투자를 확대하는 행위자들에게 있어 최적의 전략은, 다른 행위자들의 거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은 놀랄 만한 상호연결을 창출할 수 있다." "이때 행위능력(agency)은 물론 공통적으로 트레이더와 같은 개인에게 귀착되지만 또한 흔히 '높은 수준의' 실체들에도 귀착된다. 예컨대, 우리가 관찰한 헤지펀드는 하나의 법적인 실치이고, 계약법은 행위능력을 펀드에 귀착시킨다." "그럼에도 트레이더들에 대한 보상은 즉각적인 보너스의 형태로 온다. 그것이 지독한 시샘과 격렬한 분쟁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흔한데, 이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188-90)


제7장 위험의 실재성: 독일의 유전자 기술(로즈메리 로빈스) 


"통상 위험은 그것이 자연적으로 결정된다는 '실재론적' 위험과 사회제도 속에서 형성된다는 '상대주의적' 위험으로 나누어진다. 실재론적 위험은 위험을 자연적 대상으로 간주함으로써 실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반면 상대주의적 위험은 위험을 사회제도에 의해 형성되는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위험을 사회제도에 따라 상대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둘 다 위험이 추상적 실체라는 데 있어서는 의견을 같이 한다. 내 생각은 위험이란 물질성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위험은 연결망이 유지되는 한 현실 속에서 계속해서 (재)발생한다. 내 생각에 위험은 단일한 것도 아니고 복수적인 것도 아닌 다중적인 것이다. 여기서 위험을 평가하는 일반화는 추상적인 일반화가 아니라 인슐린 시설과 같은 미시적 세계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배열, 혹은 배열과정과 우연히 연계된 일반화로 이해해야 한다. 위험을 이처럼 물질적으로 우연적인 실재로 이해하게 되면 실재론적 위험과 상대주의적 위험을 구별해야 할 필요성이 사라진다."(196)


제8장 ANT관점에서 본 한국 최초 우주인 논쟁 : PUS와의 만남 (안형준) 


"ANT 방법론의 핵심 가운데 하나인 '행위자 따르기'를 통해 우주인 배출사업에 참여한 각 행위자의 입장을 사회적 맥락 안에서 면밀히 분석할 수 있다. 〈항우연: 차후 이루어질 항공우주개발 사업에 대한 국민적 정당성 확보, 과학계: 스타과학자 배출을 통해 이공계 위기를 타파할 좋은 기회, 스폰서 기업: 자사와 자사의 제품을 소비자에게 홍보할 수 있는 기회, 공군: '항공우주군 수립'이라는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는 기회, 언론: 주목도 높은 뉴스와 특종 공급원, 대중: 한국최초우주인에 대한 자긍심 고취〉 항우연은 이런 중층의 네트워크에서 '의무통과점'이라는 전략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각 행위자들에게 이해관계와 역할을 부여해 동맹을 형성하고, 그 행위자들이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분배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각 행위자들은 독자성을 갖고 네트워크를 형성하거나 강화해나갔다. 하지만 행위자의 배반이나 예상치 못한 특성 때문에 생겨난 돌발상황으로 네트워크가 와해되기도 했다."(236-7)


"항우연이라는 행위자는 우주인 배출사업을 진행하면서 '실험'이라는 수사를 동원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강화해나갔다. 그 과정에서 ISS의 실험 공간에서 이소연과 실험장치 사이의 네트워크와 실험을 준비하는 지상의 과학자들 사이의 네트워크가 형성됐다. 그 결과 ISS에서 이루어진 실험도 모두 성공적으로 수행해 몇 편의 논문을 내고 유인우주실험의 경험과 노하우를 쌓는 등 나름의 성과를 거뒀다. 우주인선발프로그램 참여자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우주로245' 같은, 우주인 사업을 적극 지지하는 행위자네트워크가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인터넷게시판을 중심으로 이 사업에 대한 반감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더 큰 규모의 대중 네트워크가 차츰 형성됐다. 이들에게 이소연은, '실험 임무'가 아니라 '우주체험'과 동맹을 맺은 의무통과점으로 자리매김했는데, 항우연이 만든 '실험전문가 이소연'의 블랙박스는 해체됐고, 대중에 의해 '우주관광객 이소연'으로 다시 블랙박스화된 셈이다."(249)


제9장 현실정치에서 물정치로: 혹은 어떻게 사물을 공공적인 것으로 만드는가? (브루노 라투르) 


"지금까지의 정치철학자들이 강력한 객체 회피적 경향의 희생물이 되어왔다고 평가하는 것은 그다지 불공정하지 않다. 홉스에서 롤즈까지 그리고 루소에서 하버마스에 이르기까지, 많은 논의들이 적절한 집단(당)을 구성하고, 그것을 정당화하고, 그 대표성의 정도를 파악하고, 이상적인 연설 조건을 발견해내고, 합법적인 동의를 포착하고, 좋은 헌법을 쓰기 위해서 진행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무엇이 문제가 되는가라는 차원, 즉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객체의 영역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원이 가지는 신성함과는 달리, '공화국'(res publica)은 그다지 많은 사물들(res, 즉 things)을 포함하지 않는다. 정당화하고 합법화하는 과정은 중요하지만, 이는 소집을 위한 조건 중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 반은 문제 그 자체 속에, 문제가 되는 상황 그 자체에, 공중(public)을 만드는 '물'(res) 속에 있다. 그것들은 적절한 모임을 위해 재현되고, 정당화되고 합법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264)


"'객체 지향적 민주주의'라는 것은 이 편향을 고치려고 시도한다. 즉, 실제적으로는 항상 혼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론적으로는 분리된 '재현'(representation)이라는 말의 두 가지 의미를 통합하는 것이다. 첫 번째로, 법학과 정치학의 영역에서 잘 알려져 있듯이, 재현은 문제 주위로 정당한 사람들을 모으는 것을 지칭한다. 여기에서 적법한 절차가 뒤따르는 한 재현(즉, 대표)은 정당한 것이 된다. 두 번째는, 과학과 기술의 영역에서 잘 알려져 있듯이, 관심의 대상인 객체가, 모인 사람들의 눈과 귀에 어떻게 인지되는지를 표현 혹은 재-현(re-presentation)하는 것이다. … 문제를 재현하는 첫 번째 양상은 의회, 모임, 집회, 위원회 등으로 불리는 장소나 조직과 관련된 것이다. 두 번째 양상은 이러한 장소에 특정한 주제, 관심, 이슈, 개념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양상은 동시에 다루어져야 한다. 즉, 누가 관련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무엇이 고려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264-5)


"객체로 가득 차 있지만, 우리의 '정치'라는 개념 안에 그다지 잘 통합되지 않는 상황은 로렌제티의 유명한 프레스코 화[도시/시골에서의 좋은 정부/나쁜 정부의 효과]에서 보다 잘 드러난다. 많은 학자들이 이 그림에서 좋은 정부와 나쁜 정부를 재현하는 상징의 복잡한 의미를 해석해왔고, 그 복잡한 계보를 추적해왔다. 하지만 동시대의 눈에 가장 뚜렷한 인상을 남기는 것은 도시, 풍경, 동물, 상인, 춤꾼, 그리고 어디에나 존재하는 빛과 공간이다. 나쁜 정부는 단순히 혼란의 악마적 형상을 통해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색조와 파괴된 도시, 황폐한 풍경과 헐떡이는 사람들로 묘사된다. 좋은 도시는 단순히 미덕과 질서의 상징을 통해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투명한 색조와 단단한 건축물, 조화로운 풍경과 다양한 동물들, 원활한 인간관계와 풍요로운 생활을 통해 그려진다. 프레스코 화는 상징을 위한 단순한 장식을 넘어, 우리에게 좋음과 나쁨의 미묘한 생태학에 보다 주의를 기울이도록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267)


"우리가 '사물'(Ding)이라는 단어를 부활시키고, '현실정치'(Realpolitik)라는 단어를 '물정치'(Dingpolitik)라는 단어로 교체하려는 이유는 객관성이라는 값싼 개념으로부터 값비싼 증명으로의 변화를 강조하는 것과 맞닿아 있다. 객체는 너무 오랫동안 사실의 문제로 여겨졌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객체에서 사물로의 변환과 관련된 좋은 예가 바로 2003년 2월에 벌어진 콜롬비아 호 폭발이다. '어셈블리 드로인'(조립도면)이란 엔지니어들이 청사진의 발명을 표현하는 말이다. 하지만 콜롬비아 호의 잔해들을 커다란 전당에 모아놓고, 특별 위원회에서 온 조사관들이 기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연구하는 상황에서는 어셈블리(조립)라는 단어가 어딘가 기묘하게 들린다. 이는 고도로 복합적이고 기술적인 객체의 '분해도'(exploded view)['폭발한 관점'이라는 말도 되는]를 새롭게 제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폭발한 것은 그것이 사물이 되었을 때 그것들이 어떤 객체인가를 이해하는 우리의 능력이다."(272-3, 277-8)


# 객체가 사물이 되었다는 말은 '사실의 문제'가 '복잡한 관계성'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뜻한다.


"월터 리프먼과 그에 대한 철학자 존 듀이의 논평에 의하면, 대부분의 유럽 정치철학은 몸과 국가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것들은 다중의 상반된 의지를 단일한 일반 의지로 재현하려는, 실현 불가능한 의회를 조직하려 했다. 이러한 기획에는 현실성이 치명적일 정도로 결여되어 있다. 전체적이고 완결적이며 투명한 경향에 의해 착안된 이러한 재현은 충실할 수가 없다." "더 많은 다양성을 흡수할 수 있는 장치(듀이 시대의 '위대한 사회' 혹은 우리가 '세계화'라고 부르는 것)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매우 특수하고 새로운 방식의 재현을 고안해내야만 한다. 이것이 통일성과 전체성을 꿈꾸는 이들을 실망시키기에, 리프만은 이를 유령이라고 칭했다. 신기하게도 이것은 근본주의의 유령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는 유일한 정신이며, 착한 유령이다." "미국의 철학자들은 이러한 전통을 실용주의라고 불렀다. 프라그마타(pragmata), 그리스어로 사물(things), 이것이 진정한 (그리고 값비싼) 현실주의인 것이다!"(296-7)


에필로그 


제10장 '두 문화'와 ANT의 관계적 존재론(김환석) 


"1920~30년대에 칼 만하임은 지식사회학의 기획을 그 선구자인 마르크스, 뒤르켐, 베버의 유산으로부터 확장시켜, 모든 지식의 존재구속성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제창하였다. 하지만 만하임은 다른 지식들과 달리 과학의 내용(즉 과학의 이론, 사실, 방법 등)은 보편합리성을 지니므로 지식사회학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이후 로버트 머턴이 과학의 사회적 구조에 초점을 둔 과학사회학을 구축하였으나 그 역시 과학의 내용은 블랙박스로 남겨놓았다." "토마스 쿤이 1962년에 발표한 『과학혁명의 구조』는 과학철학과 과학사에 큰 변화를 일으킴으로써, 의도하지 않게 과학지식사회학(sociology of scientific knowledge, SSK)이라는 형태로 새로운 과학사회학이 출현하는 것을 돕는 역할을 하였다. 쿤의 패러다임 개념은 과학에서 관찰의 이론의존성을 지적한 것인데, 이는 과학이론의 선택이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관찰 사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실증주의적 과학관을 근본부터 뒤흔들어놓았다."(313-4)


"이처럼 근대세계가 중대한 위기에 당면하여 전환을 모색하게 된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두 문화에 대한 도전들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도전들 가운데 의식적으로 두 문화의 극복을 지향하는 대표적 분야가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STS)이라는 학제적 분야이다." "과학과 비과학을 철저히 분리하고자 했던 실증주의적 과학관에 대항하여 STS는 둘 사이의 구분이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거나 분명하지 않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즉 과학은 순수하게 자연 실재의 합리적 반영이고 인문학은 비합리성이 내포된 사회적 요인의 산물이라는 두 문화의 비대칭적 이분법이 신화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STS는 구체적인 경험적 연구를 통해 보이려고 했던 것이다. STS의 견해에 따르면, 인문학을 포함한 다른 지식들과 마찬가지로 과학 역시 사회적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며 따라서 지식의 내용에 사회문화적 요인들이 구성요소로서 포함된다고 했다."(308-9, 319-20)


"STS의 초기 흐름이었던 과학지식사회학(Sociology of Scientific Knowledge, SSK)의 문제의식은 인식론이었다. 지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즉 인간이 어떻게 세계에 대하여 알게(know)되는가에 대해 철학적 설명이 아니라 사회학적 설명을 하고자 했던 것이다. 연구를 통하여 그들이 내린 결론은, 다른 지식들과 마찬가지로 과학은 인간의 상호작용 행위가 만든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것이었다. 즉 과학과 비과학 사이에 대칭성을 확립한 것인데, 그러한 대칭성은 사회를 설명의 근거로 삼았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었다. 다른 한편, STS의 후기 흐름을 주도하는 ANT의 주된 문제의식은 존재론이다. 그것은 지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느냐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했지만, 그 관심은 그러한 지식을 만드는 존재들은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발전하였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이른바 '자연'과 '사회'라는 실재가 세계 안에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결국 두 학문영역이 분리되어야 할 근본적 이유란 없는 것이다."(321-2)


"라투르는 ANT가 생태적 위기 문제에 주는 함의에 대해 더 본격적인 성찰을 펼침으로써 일종의 새로운 정치생태학으로 그의 이론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는 '자연'이라는 범주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와 더불어 만들어진 근대주의의 구성물이라면, 절대적 '자연' 개념에 의존하고 있는 현재의 만은 녹색운동들은 근대주의 기획을 변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명을 연장시킬 뿐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한다. 이러한 근대주의의 한계를 벗어나 현재 세계가 당면해 있는 생태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술과학이 마땅히 논쟁과 타협이라는 정치적 과정을 거쳐야 하며, 이를 통해 인간과 비인간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결합되는 새로운 공생의 실험이 필요하다고 그는 역설한다. 라투르는 생태적 위기의 시대에 요청되는 정치는 '과학'과 분리된 영역으로서의 근대적 정치와 같은 것이 아니라, 반드시 과학(즉 비인간 행위자들)의 문제를 정치적 토론에 포함하는 새로운 정치라고 주장한다."(3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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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아우또노미아총서 20
브뤼노 라투르 지음, 홍철기 옮김 / 갈무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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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위기


"근대성은 어쨌든 시간의 흐름을 지칭한다. '근대적'이라는 형용사는 시간에 있어서 새로운 체제, 가속, 파열, 혁명을 지칭한다. '근대적'이라거나 '근대화', '근대성'이라는 말을 쓸 때에 우리는 그 반대말로, 낡아빠지고 정적인 과거를 지칭한다. 나아가 그 말은 언제나 고대인과 근대인이라는, 승자와 패자가 있는 싸움의 한복판으로 던져진다. '근대적'이라는 말은 따라서 이중적으로 비대칭적인데, 우선 시간의 규칙적인 흐름에 있어서의 단절을 지시하며 또한 정복자와 피정복자가 있는 전투를 가리킨다." "몇 걸음을 되짚어보자. 우리는 근대성의 정의를 다시 생각하고 탈근대성의 징후를 해석하여 왜 우리가 더 이상 지배와 해방이라는 두 가지 과제의 핵심사항에 헌신할 수 없는가를 이해해야만 한다." "이 글의 가설은 다음과 같은 것인데, '근대성'이라는 말이 두 가지의 완전히 다른 실천을 지시하고 있고, 이 두 가지 실천은 그 효과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구분되어야만 하지만 최근에 이것들이 혼동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40-1)


"실천의 첫 번째 집합은 '번역'translation인데 이는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존재들 간의 혼합, 즉 자연과 문화의 하이브리드들을 만들어낸다. 두 번째는 '정화'purification로서, 전적으로 구분되는 존재론적 지대를 창출하는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인간 존재들의 존재론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비-인간 존재들의 존재론적 지대이다. '번역'이 없다면 '정화'는 헛되고 무의미할 것이다. '정화'가 없다면 '번역'은 느려지고 제한되거나 심지어 불가능해질 것이다. '번역'은 내가 연결망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응하며, '정화'는 내가 근대적인 비판적 입장이라고 부르는 것에 상응한다. '번역'은 예를 들어 고층대기의 화학과 과학적, 산업적 전략, 그리고 국가 정상들의 관심사, 그리고 생태주의자들의 근심 모두를 단일한 연속적인 사슬로 연결시킬 것이다. '정화'는 언제나 거기에 있어 온 자연세계와, 예측가능하고 안정적인 이익과 이해관계가 있는 사회, 그리고 지시대상과 사회 모두로부터 독립적인 담론들 사이에 분할을 수립할 것이다."(41-2)


"우리가 번역과 정화, 두 가지의 실천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한 우리는 진정으로 근대인이다─우리의 비판적 기획이 저 아래에서 하이브리드들의 증식proliferation을 통해서만 발전할 수 있을지라도 말이다. 우리가 정화 작용과 혼성화 작용에 주목하기만 한다면 그 즉시 우리가 현재에 근대인임을 멈추게 되고 우리의 미래는 변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우리가 근대인이어 왔다는 사실도 중단되는데, 우리가 회고적으로 실천의 두 가지 집합이, 이제는 끝나가는 역사적 시기 안에서 이미 언제나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과거는 변화하기 시작한다. 결국 우리가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었다면 우리가 다른 자연-문화들에 대해 유지해온 고통스러운 관계 또한 변형되게 될 것이다. 상대주의, 지배, 제국주의, 허위의식, 제파 혼합주의syncretism─인류학자들이 '대분할'Great Divide이라는 느슨한 표현 하에 요약하는 모든 문제들─는 다르게 설명될 것이고, 그에 따라 비교 인류학을 변형시키게 될 것이다."(42-4)


# 하이브리드(hybrid), 혼성화(hybridization) : 하이브리드는 인간과 자연, 주체와 대상의 범주 사이에 존재하면서 양자 어느 쪽으로 간단하게 환원되지 않는 중간적인 존재, 혹은 행위자를 지칭한다.


2장 헌법


# 헌법(Constitution) : 근대성의 기본원리를 설명하기 위한 개념으로 '구조'보다는 가변적이며 문화나 공유된 신념보다는 실재적이다. 세계를 통치하고 관리하는 부문을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인간과 비-인간으로 분할하고 그 분할 상태를 유지하면서 각각의 영역의 자율성과 권리를 보장한다는 의미에서 권력 분립(separation of powers)과 기본권 보장을 목적으로 하는 근대 입헌주의 헌법과 유비적인 관계에 있다.


"셰핀과 셰퍼의 책의 탁월함은 홉스의 과학 저작들에 대한 발굴의 성공에서, 그리고 보일의 정치 이론을 망각에서 구출한 데에서 기인한다. 비대칭성을 수립하면서, 보일에게는 과학을, 홉스에게는 정치이론을 나눠주는 대신에 셰핀과 셰퍼는 오히려 훌륭한 사분법의 윤곽을 제시한다. 보일에게는 자신의 과학과 정치이론이 있고, 홉스에게도 자신의 정치이론과 과학이 있다." "다행스럽게도 둘은 거의 모든 것에 대해 동의했다. 두 사람 다 군주, 의회, 그리고 유순하고 통일된 교회를 원했고, 모두 기계론 철학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그러나 비록 두 사람이 철저한 합리주의자였지만 실험, 과학적 추론, 그리고 정치적 주장에서─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인 공기펌프로부터─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에 관해서는 의견을 달리했다.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인 두 사람 간의 불일치는 이들을 새로운 인류학을 위한 이상적인 실험 재료, 즉 완벽한 초파리로 만들었다."(57-9)


"보일은 의견doxa을 위해 명증한 추론의 확실성을 포기했다. 이 의견을 대중들의 허황된 상상력이 아닌 동료학자들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한 새로운 기제였다. 보일은 자신의 업적을 논리나 수학, 수사학 등 위에 정초하지 않고 재판의 흉내를 내는parajuridical 은유에 기댔다." "역설적이게도 구성주의자들의 핵심 질문─사실은 실험실에서 완전히 구축되는 것인가?─은 바로 보일이 제기하고 품었던 문제이다. 그렇다. 사실들은 실제로 실험실의 새로운 기자재들 안에서, 그리고 공기 펌프라는 인위적인 중재자에 의해 구축된다. 가스통 바슐라르 식으로 말하면 '사실들이란 제조되는 것이다.'" "신이 사물들에 대해서 아는 것은, 그가 그 사물들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실들의 본질을 알고 있는 것은, 우리가 완벽하게 통제하는 상황 하에서 그 사실들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식을 사실들로 이루어진 도구화된 자연으로 제한하고, 원인들에 대한 해석을 제쳐놓는다는 전제 하에서 우리의 약점은 힘이 된다."(60-2)


"홉스는 보일의 증명의 연극을 거부한다. 홉스에게 주권자는 사회 계약에 의해 임명된 행위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주권자가 자기 마음대로 행위하면서 리바이어던을 해체하기 위해 기댈 수 있는 신법divine law이나 최고의 존재란 없다. 지식이 권력과 동일한, 이 새로운 체제에서 모든 것─주권자, 신, 물질, 그리고 다중─은 그에 상응하는 수준으로 축소된다. 홉스는 심지어 자신의 국가학이 초월성에 대해 탄원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기각한다. 그는 모든 그의 과학적인 결과물들에 대해 의견이나 관찰, 혹은 계시를 통해서가 아니라 수학적 증명, 즉 만인이 동의를 하도록 이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논증의 방법을 통해 도달한다." "유명한 사회계약조차도 공포에 질린 모든 시민들이 자연 상태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해 갑자기, 그리고 동시에 도달하는 계산의 합일 뿐이다. 바로 이것이 홉스의 일반화된 구성주의로서 이것은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구상된 것이다. 구성주의는 어떤 형태의 초월성에도 의지하지 않는다."(64-5)


"보일은 정치가 배제되어야 하는 정치 담론을 창조하였고, 반면 홉스는 실험 과학이 배제되어야만 하는 과학의 정치를 상상했다. 달리 말해서, 그들은 우리의 근대 세계를 발명하였다. 이러한 근대 세계에서 실험실을 매개로 한 사물들의 표상은 사회 계약을 매개로 한 시민들에 대한 대표로부터 영원히 분리된다. 따라서 과학의 정치에 대해 보일이 취한 입장을 과학사가들이 간과한 바로 그때 정치 철학자들이 홉스의 과학을 무시한 것은 단지 실수가 아니다. 그들 모두는 홉스와 보일의 시대 이래로 '이중적으로 봐야' 했고 비-인간의 표상과 인간의 대표 사이에, 그리고 사실의 작위성과 정치체Body Politic의 인위성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를 수립해서도 안 되었다. 대표와 표상이라는 말은 동일하지만 홉스와 보일 사이에 일어난 논쟁은 이 단어의 두 가지 의미 간의 유사성을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오늘날 우리가 더 이상 완전히 근대인은 아니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의미는 다시금 보다 가깝게 접근하고 있다."(82-3)


"(근대인들이 인정하는) 초월성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동원 가능하고 인간화할 수 있고, 사회화할 수 있는 것으로 유지된다. 매일매일 실험실과 표본들, 계산과 이윤의 중심부, 조사기관과 연구기관들은 사회집단들의 다양한 운명들과 자연을 뒤섞는다. 반대로 사회는 우리가 계속해서 건설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사라지지 않고 우리를 능가하고 우리를 지배하며 그 자체의 법률을 지니고 있고, 그래서 자연과 마찬가지로 초월적이다. 매일 실험실과 표본들, 계산과 이윤의 중심부, 조사기관과 연구기관들은 사회집단들의 자유의 한계를 규정하고 인간들의 관계를 누구도 만든 적이 없는 지속가능한 사물로 변형시킨다. 근대인의 비판적 힘은 이와 같은 이중적인 언어에 놓여있다. 근대인은 자연을 인간으로부터 무한히 떨어뜨려 놓는 동시에 사회적 관계의 핵심에서 자연을 동원한다. 또한 그들은 사회의 법률을 불가피하고, 필연적이며 절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동시에 자신들의 사회를 만들고 허물 자유를 갖는다."(104-5)


"누구도 근대인이었던 적은 없다. 근대성은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근대 세계는 존재한 적도 없다. 이것은 회고적인 감정의 문제이며 우리 역사를 다시 읽는 문제이다. 나는 우리가 새로운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우리는 더 이상 탈-탈-탈근대주의자의 무분별한 비행을 계속할 필요가 없다는 것,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훨신 더 정교하고 더욱 비판적이며, '의심의 시대'로 더욱 깊숙이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결코 근대의 시대에 들어서기 시작한 적이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와 같은 회고적인 태도는 밝혀내기보다는 배치하며, 제하기보다는 부가하고, 비난하기보다는 친밀해지고, 폭로하기보다는 분류하는데, 이를 나는 근대적이지 않은 것nonmodern으로 (혹은 비非근대적인amodern 것으로) 규정한다. 근대인의 헌법과 함께 그 헌법이 증식시키기를 거부하면서도 허용하는 모든 하이브리드를 동시에 고려할 때에 누구나 비근대인인 것이다."(128-9)


"근대 세계는 '그 가능성에 있어서는'in potentia 과거와 단절하는 총체적이고 비가역적 발명품이다. 마치 프랑스 혁명과 볼셰비키 혁명이 '그 가능성에 있어서는' 탄생하는 새로운 세계의 산파였던 것처럼. 그러나 연결망으로서 볼 때에 근대 세계는 혁명처럼 실천들의 작은 연장, 지식의 순환에 있어서의 약간의 가속, 사회들의 조그만 확장, 행위자들의 수의 미미한 증가, 과거의 믿음에 대한 약간의 변경 이상의 어떤 것도 거의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것들을 연결망으로 간주할 때 서구의 혁신은 여전히 인지 가능하고 중요한 것으로 남지만 대신에 더 이상 영웅담의 소재로 충분치 않다. 그 영웅담은 급진적인 단절과 돌이킬 수 없는 운명, 비가역적으로 운이 좋거나 나쁜 거대한 어떤 것이다. 반근대인들은 탈근대인들처럼 그들 상대방의 경기장을 받아들였다. 다른 경기장이 우리 앞에 열려 있다. 이는 비근대적 세계들의 장이다. 그것은 중기 왕국Middle Kingdom이며 중국만큼이나 광활하면서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130-1)


3장 혁명


"탈근대인들은 한편으로는 물질적인 것과 기술적인 것의 총체적 분리를,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발화주체의 언어게임을 받아들임으로써─따라서 근대적 헌법의 하반부를 망각함으로써─, 혹은 자유롭게 부유하는 연결망과 콜라주의 혼성적 성격 안에서만 즐거워한다는 점에서─이 경우에는 근대적 헌법의 상반부를 망각함으로써─, 자신들이 여전히 근대인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정한 근대인은 언제나 정화작용뿐만 아니라 하이브리드의 광범위한 팽창을 개념화하기 위해서 비밀리에 중간적 존재들을 증식시켜왔다. 보일의 진공펌프나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도 보았듯이 과학은 언제나 공동체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근대적 모순이란 이중적 모순, 즉 한편으로는 자연과 사회라는 헌법의 두 보장간의 모순이자 다른 한편으로 정화와 매개의 작용간의 모순이다.〉" "탈근대인은 실제로는 지금까지 긴장을 일으킨 원인이었던 주 동인을 확실히 치워버리고 근대주의를 종결시킨다."(162-4)


"탈근대인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단 한가지뿐이다. 그들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그들은 정말로 종언을 고한 것이 아니라 종말들의 종말을 고했다─즉 종말을 고하는 방식들의 종말이자, 훨씬 더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비판들이 한층 더 정신없이 빠르게 교체되는 연속성에 이르는 이행 방식들의 종말이다." "'포스트모던주의자들postmods'에게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그들이 진정으로 이 종말을 확고히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지나치게 순진하지 않다는 점을 과시하기 위해 그들은 스스로 이 종말을 즐긴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보드리야르와 리오타르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그렇다. 그들에게서 우리가 기대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보드리야르가 항변하듯이 그들을 이번 천 년이 끝날 때까지 잠들어 있게 놔두고 우리는 갈 길을 가도록 하자. 즉 우리의 발걸음을 다시 따라가면서 더 이상 앞으로는 나아가지 않도록 하자."(164-5)


"니체가 오래 전에 관찰한바, 근대인은 역사주의라는 질병을 앓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과거와 완전히 단절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간직하고 모든 날짜를 기록하고자 한다. 그들이 더 많은 혁명을 축적할수록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아낄 수 있고, 그들이 자본화를 더 심화할수록 그들은 박물관마다 더 많은 것들을 전시하게 된다. 광적인 파괴는 똑같이 광적인 보존에 의해 균형을 이룬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진정으로 과거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인가? 아니다. 근대의 시간성이 시간의 경과에 그리 많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따라서 과거는 남아 있고 심지어 '회귀'하기까지 한다. 이제 이러한 부활은 근대인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따라서 그들은 이를 억압된 것들의 귀환으로 취급한다. 근대인들은 이를 의고주의archaism으로 본다. 그들은 '만일 우리가 조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것이고, 결국 암흑기로 떨어질 것이다'라고 생각한다."(180)


"근대인들에게 시간의 화살이란 애매하지 않다. 즉 시간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만 과거와 단절해야만 하고, 뒤로 가는 선택을 취할 수도 있지만 이미 자신들의 과거와 극단적으로 그 관계를 끊은 근대화의 전위들과 반드시 단절해야만 한다. 이러한 일방적 요구는 지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근대 사상을 조직했다. … 이제 와서야 다 알게 되었지만 우리가 할 수 없는 작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혁명이며, 그것이 과학, 기술, 정치학이나 철학에서의 혁명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을 하나의 실망스러운 일로 해석할 때, 마치 의고주의가 모든 것을 침범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때, 마치 이미 억압된 재료들을 우리 뒤에 쌓아둘 수 있는 공용 매립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할 때, 우리는 여전히 근대인일 것이다. 우리가 역대의 모든 요소들─오래되고 시대에 뒤쳐진─을 하나의 콜라주로 병치함으로써 이러한 실망감을 극복하려 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탈근대인으로 남게 될 것이다."(181-2)


"근대인들은 이 왕국을 이해할 방법을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준대상들을 단순히 억제하기만 원했다는 듯이 소거하거나 부정함으로써 사라지게 하지 않았다. 그 반대로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되 본격적인 매개자를 단순한 중간적 존재[중간매체]로 전락시킴으로써 그 역할을 제거했다." "그러나 매개자는 본원적 사건이며 번역하려는 대상이나 그 사이에서 매개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존재들을 직접 창조해 낸다. 우리가 단지 모든 행위자들에게 이 매개의 역할을 되돌려준다면 정확히 똑같은 존재들로 이루어진 바로 그 세계가 근대적이길 그치면서도 결코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던 것, 즉 비근대적인 것이 될 것이다." "잃어버린 통일체의 복원을 위해 중간매체를 증식시킬 필요성이 있다는 점은 꾸준히 인정되어왔지만 그 중간매체들이 순수 형태들의 혼합물로 이해되는 한 근대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지 않을 수 업다. 이 전체 차이는 겉보기에는 사소한 매개자와 중간매체 사이의 뉘앙스 차이에 달려있다."(200-2)


"분기점─그리고 합류점─은 출발점이 된다. 설명은 더 이상 순수한 형태들로부터 현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중심에서 극단들로 진행된다. 극단들은 더 이상 실재의 결합점이 아니라 무수한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결과물이 된다." "우리의 설명을 대상Object과 주체/사회Subject/Society라고 알려진 두 개의 순수 형태들에 국한시킬 필요는 없는데, 이들이 반대로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인 중심부에서 이뤄지는 실천의 부분적인 정화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설명으로 분명 자연Nature과 사회Society를 획득하게 될 것이지만, 그것은 최종 결과물로서이지 기원으로서가 아니다. 자연도 공전公轉을 하지만 주체/사회를 그 중심으로 삼지 않는다. 자연은 사물과 인간을 생성하는 집합체 주위를 선회한다. 주체는 공전하지만 자연의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다. 주체는 인간과 사물이 발생하는 집합체를 중심으로 공전한다. 마침내 중기 왕국이 표상/대표된다. '자연들'과 '사회들'은 이 왕국의 위상들이다."(202-4)


# 매개(mediation) : 매개란 기술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혹은 하이브리드와 하이브리드)를 연결하여 새로운 하이브리드를 창출하는 과정이다. 라투르는 이를 번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정화(purification) : 매개와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연결망으로서 존재하는 하이브리드, 즉 인간 행위자와 비-인간 행위자의 결합체가 분할되고 절단되며 순수한 주체와 대상, 사회(혹은 문화)와 자연이 추출된다.


"모든 매개자에게 자연과 사회 속에 구속되어 있던 존재[의 지위]를 제공함으로써 시간의 경과는 다시 한 번 쉽게 이해될 수 있게 된다. 모든 것이 자연과 사회의 극단들 사이에 갇혀있어야만 했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의 세계에서 역사는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자연은 단순히 발견되거나 사회는 전개되거나 무엇이던 다른 것에 적용될 뿐이었다. 현상이란 이미 존재하는 요소들과의 조우에 불과했다. 우연적 역사란 것이 분명 존재하였지만 인간에게만 허용되었고, 그것도 자연적 사물들의 필연성으로부터 분리된 것이었다. 우리가 중간에서 출발하자마자, 이 중간매체를 완전히 성장한 매개자의 신분으로 격상시키자마자 비로소 역사가 실제로 가능하다. 시간은 무의미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한다. 보일에게도, 공기의 탄성에도, 진공에도, 공기 펌프에도, 왕에게도, 홉스에게도 무언가 실제로 일어난다. 이들은 모두 변화한다. 역사는 더 이상 사람들people의 역사가 아니라 자연 사물들의 역사도 된다."(209-10)


4장 상대주의


"절대적 상대주의는 독립되고 통약불가능하며 어떤 형태의 위계에도 편입되지 않는 문화들을 가정한다. 이들은 자연을 판단에서 제외하므로 이들에 대해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이보다는 덜 명확한 문화적 상대주의의 경우에는 유일한 자연이 중요한데, 그러한 자연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과학의 작업, 사회, 구축활동, 동원, 연결망을 전제조건으로 가정하지 않는다. 아직 과학의 작업이 사람들의 관심영역밖에 머무르는 이유는 인식론에 의해 재검토와 수정의 과정을 거치는 것은 유일한 자연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계속되는 한 문화들은 저 유일한 자연에 대해 어느 정도 정확성을 지닌 너무나도 많은 관점들에 모두 분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특정 문화에 종속되지 않는 유일한 자연이 등장하게 되면 제3의 모델이 언제나 몰래 사용된다. 이 보편주의를 나는 '특수'하다고 부를 것이다. 오직 한 사회─그것은 언제나 서양이었다─만이 타자들의 위치를 포함하는 유일한 자연이라는 일반적 틀을 정의한다."(263-5)


"모든 자연들-문화들은 이들이 동시에 인간적인 것, 신적인 것, 비-인간적인 것들을 구성해 낸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 중 어느 것도 우리에게만 알려져 있는 외부적인 유일한 자연에 자의적으로 씌워진 기호나 상징의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 어느 '자연들-문화들'도─특히 서양의 경우─사물들로만 이루어진 세계에 거주하지 않는다. 모든 자연-문화들은 기호를 담고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류한다. 모든 인간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누구나 인간적 집합체들과 이를 둘러싸는 비-인간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집합체들을 구성함에 있어 어떤 사람들은 조상을 동원하고, 다른 종족들은 사자, 항성, 혹은 제물의 응고된 피를 사용하기도 한다. 우리 서구의 경우에는 유전학, 생물학, 천체물리학, 혈액의학 등을 동원했던 것뿐이다." "문화상대주의로부터 출발해 이제 우리는 '자연'상대주의로 나아간다. 전자는 우리를 말도 안 되는 결론으로 이끌었지만, 후자를 통해 우리는 다시 상식으로 복귀할 수 있다."(266-7)


"모든 집합체들은 서로 달라서 존재자들을 각자가 부여하는 속성에 따라서, 그리고 자신들이 용인한 동원 과정 속에서 나누어 버린다." "상대주의자들은 모든 문화들이 하나의 자연 세계에 대해 각자의 자의성에서 체계화된 것으로 봄으로써 이 문화들을 동일선상에 놓으려 애쓰지만 이러한 과정의 산물은 설명되지 못한다. 따라서 상대주의자들은 서로를 지배하려는 집합체들의 노력을 고려하지 못한다. 반대로 보편주의자들은 집합체간의 뿌리 깊은 동질성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는 그들이 서양인들에게만 자연에의 접근권을 부여하고 모든 타자들을 사회적 범주들 속에 속박시키기 때문이다. 타자들은 오로지 과학적 사고를 하거나 근대적 또는 서구적이 되어야만 이 범주들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과학과 기술이 훌륭한 것은 그것이 진실이라거나 효율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집합체 생성에 참여하는 비-인간적 요소들을 배가시키고 우리가 이들을 재료로 삼아 만드는 공동체를 보다 친밀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268, 271-2)


# 집합체(collective) : 기존의 공동체(community)를 대체하기 위한 개념. 공동체란 (자연, 대상, 사물과 분리된) 사회와 마찬가지로 순수한 인간 주체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집합체는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 모두를 포괄하는 집단, 사회, 혹은 공동체의 개념이다.


"나선형의 확장, 그것으로 촉진될 참여, 과학기술이 이 존재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무한히 확장하는 거리가 바로 근대적 과학의 특징이지, 결코 과학 이전 시대로부터의 완전한 어떤 인식론적 단절이 아니다. 근대적 지식과 권력이 특이한 것은 사회적인 것의 전제로부터 마침내 탈출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사회적 연결 관계를 재구성하고 그 규모를 확장하기 위해 더 많은 하이브리드들을 추가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공기 펌프 뿐만 아니라 세균, 전기, 원자, 항성, 이차방정식, 인조인간과 로봇, 풍차와 피스톤, 무의식과 뉴런이 모두 포함된다. '우리'에게 과학과 기술은 사회를 반영하지 않는데, 이는 '그들'에게 자연이 더 이상 사회구조를 반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누구도 더 이상 거울을 가지고 장난치지 않는다. 문제는 점점 커지는 규모로 집합체들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물론 차이점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는 규모의 차이일 뿐이다. 자연적인 차이는 없다─문화적으로는 더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272-3)


"근대 사회학자, 경제학자들은 개인 상호간의 접촉이라는 '미시적' 차원에 머무르거나 갑자기 '거시적' 차원으로 이동해 '탈맥락화'되고 '탈개인화'한 합리성을 제외한 모든 것들과 단절한다. 영혼이 제거되고 구체적인 행위자가 부재한 관료제가 존재한다는 신화는 순수하고 완벽한 시장이 존재한다는 것이나 보편적 과학 법칙이 존재한다는 허무맹랑한 생각의 판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에서 세계로,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비-인간의 세계로 연속적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해주는 아리아드네의 실이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실천과 도구, 서류와 번역의 연결망으로 이루어진 끈이다. 조직이나 시장, 제도는 조잡한 국지적 지상세계의 관계들을 재료로 삼아서 만들어진 천상의 대상이 아니다. 조직, 시장, 제도는 하이브리드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스스로를 묘사하기 위해서 수많은 객체들을 동원해야 한다." "국지적, 세계적이라는 양 극단보다는 우리가 연결망이라고 부르는 중간의 배치들이 훨씬 흥미로운 주제이다."(300-2)


"우리가 근대 세계를 포기한다고 해서 다른 누군가 혹은 다른 무엇인가가 되는 것은 아니며 우리가 어떤 본질에 도달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의 과정, 하나의 운동, 하나의 이행, 문자 그대로 공놀이에서 말하듯이 누군가에게 패스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연속되고 위험한─위험하기 때문에 연속적인─존재로부터 기원하는 것이지 하나의 본질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불변성이 아니라 현존의 상태에서부터 출발한다. 우리는 매듭vinculum 그 자체, 수많은 통로와 관계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집합적인 동시에 실재하고 담론적인 이 관계와 무관한 출발점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새로운 존재나 언어라는 더 최신 개념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의미의 세계와 존재의 세계는 동일한 세계로서, 번역의 세계이고 교체의 세계이며 이행의 세계이자, 위임의 세계이기도 하다. 모든 영속성, 견고성, 영구성은 그것의 매개자들에 의해 대가가 지불될 것이다."(318-9)


5장 재분배


"우리는 먼저 인간, 즉 인간주의가 충분히 공정하게 대하고 있지 않은 인간의 위치를 재조정해야 한다. 우리는 어디에 인간을 위치시켜야 하는가? 준대상과 준주체의 역사적 연쇄 속에서 인간을 우리가 오랫동안 알았던 것처럼 하나의 본질로서 정의하기란 불가능하다. 인간의 역사와 인간에 대한 인류학은 너무나 다양해서 그것을 하나의 최종적인 정의로 확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영리한 시도, 즉 인간을 의미의 진공상태인 자연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는 자유로운 실존으로 정의하는 것은 분명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우리는 모든 준대상에 대해 행위, 의지, 의미, 심지어 언어능력까지 허용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렇다면 자연 속으로 흡수되어야만 하는가? 그러나 만일 우리가 특정한 과학 분양의 특정한 결과를 찾음으로써 뉴런, 충동, 이기적 유전자, 기본적 욕구, 그리고 경제적 계산으로 움직이는 이 로봇에 옷을 입혀야 한다면 우리는 결코 괴물들과 가면들의 수준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336-8)


"우리는 엄숙하게 인간의 죽음을 선언하고 따라서 인간을 언어 게임이나 모든 지성 작용을 빠져나가는 비인간적 구조의 일시적인 반영으로 분해해야만 하는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연에 속하기 보다는 담론에 더 속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제나 인간을 자신의 내부로 분해시키고 인간의 죽음을 선언할 만큼 충분히 비인간적인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그러기에는] 인간의 의지, 인간의 행위, 인간의 말은 너무나 풍부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저 자연일 뿐인 것으로부터 영원히 분리시킬 인간에 대한 초월적인 정의를 통해 문제를 회피해야만 할까? 이는 근대성의 헌법의 한 극으로 후퇴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인권선언이나 헌법 전문들에 기입된 어떤 임시적이고 특수한 정의를 확장하도록 힘을 행사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두 번의 대분할을 다시 한 번 따라가는 것이며 또한 근대화를 믿는 일이 될 것이다."(339)


# 제1 대분할은 내적 분할로서, 우리(서구인) 안의 '자연'과 '사회'를 분리하는 것이며, 제2 대분할은 외적 분할로서, '우리'와 '그들'을 분리하는 것이다.


"우리는 준대상들을 표상하는 데 전념해왔다. 따라서 반드시 억제되어야 하는 것은 근대성의 헌법이 보장하는 사항─권력분립, 즉 정부의 두 부문이 분리된 상태, 그리고 정확하게 구획된 상태─인데, 그것이 근대인들의 분석의 연속성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자연과 사회는 구분할 수 있는 양극이 아니라 사회-자연들의, 그리고 집합체들의 연속된 상태의 동일한 산물이다. 따라서 우리의 새로운 초안의 첫 번째 보장사항은 준대상, 준주체들의 분리불가능성이 될 것이다. 집합체들의 연속적인 배치를 방해하는 모든 개념, 제도, 실천들, 그리고 그것들에 입각한 하이브리드들에 대한 실험은 위험하고 해롭고─또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텐데─부도덕한 일이 될 것이다. 매개 작용은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이중의 권력의 가장 중심이 될 것이다. 연결망은 은신상태로부터 벗어날 것이다. 중기왕국은 대표/재현될 것이며, 제3신분, 즉 아무것도 아니었던 그들은 이제 전부가 된다."(345-6)


# 근대/비-근대의 헌법


1. 근대적 헌법 : 자연은 초월적이지만 동원가능하다(내재적이다). / 비근대적 헌법 : 자연과 사회는 사회-자연들의, 집합체들의 연속된 상태의 동일한 산물이다(준대상, 준주체들의 분리불가능성).

2. 근대적 헌법 : 사회는 내재적이지만 우리를 능가한다(초월적이다). / 비근대적 헌법 : 객관적인 자연의 산출과 자유로운 사회의 산출에 대한 계속되는 추적. 마지막 분석에서는 결국 자연의 초월성과 사회의 내재성이 존재하지만 양자는 분리될 수 없다.

3. 근대적 헌법 : 자연과 사회는 전적으로 구분되며 정화작용은 매개 작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 비근대적 헌법 : 자유는 더 이상 동질적인 시간적 흐름에 기대지 않는 하이브리드들의 조합들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으로 재정의 된다.

4. 근대적 헌법 : 소거된 신은 완전히 부재하지만 정부의 두 부문 사이의 중재를 책임진다. / 비근대적 헌법 : 하이브리드들의 산출은 표면적이고 집합적인 성격을 갖게 되면서 하이브리드의 산출의 박자를 조절하고 늦출 수 있는 확장된 민주주의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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