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제국사 - 전4권 - 히틀러의 탄생부터 나치 독일의 패망까지
윌리엄 L. 샤이러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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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아돌프 히틀러의 등장


제1장 제3제국의 탄생 


"1909년 11월, 히틀러는 〈운명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빈에 도착한 지 1년이 채 못 되어 지몬덴크 골목의 가구 딸린 방에서 나와야 했고, 이후 4년 간은 싸구려 여인숙에서 지내거나 도나우 강 근처 빈 제20구의 멜데만 슈트라세 27번지에 있는, 누추한 남성 노숙자 쉼터에서 지내며 시에서 운영하는 무료급식소에 자주 찾아가 겨우 허기를 달래곤 했다." "그렇지만 이런 굶주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끝끝내 어엿한 직장을 구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나의 투쟁》에서 밝혔듯이, 그는 행여 프롤레타리아트 신분으로, 육체노동자 신분으로 미끄러져 내려갈까 봐 전전긍긍하는 프티부르주아지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훗날 그는 그때까지 지도자 없이 낮은 급료를 받으며 무시당하던 광범한 화이트칼라층을 토대로 삼아 국가사회주의당을 조직하면서 이 두려움을 활용했다. 이 두려움은 또한 수백만에 달하는 이 화이트칼라층 사이에서 적어도 사회적으로는 자신들이 '노동자'보다 낫다는 환상을 조장했다."(44-5)


"《나의 투쟁》에 썼듯이, 어느 날 그는 빈 노동자들의 대중 시위를 목격했다. 〈거의 두 시간 동안 그곳에 서서 거대한 인간 용이 천천히 꿈틀대며 지나가는 모습을 숨죽인 채 지켜보았다. 불안감에 휩싸인 나는 결국 그곳을 떠나 어슬렁어슬렁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사회민주당의 기관지를 펼쳐 있고, 당 지도부의 연설을 검토하고, 당 조직을 살펴보고, 당의 심리학과 정치적 수법을 곱씹고, 그 결과에 대해 숙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회민주당의 성공을 설명하는 세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첫째, 그들은 어떻게 대중운동을 일으키는지 알고 있었다. 대중운동 없이는 그 어떤 정당도 무력하다. 둘째, 그들은 대중 사이에서 구사하는 선전술을 터득한 상태였다. 셋째, 그들은 그가 말하는 〈정신적·육체적 테러〉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이 세 번째 교훈은 분명 부실한 관찰에 근거했고 거기에 터무니없는 편견이 섞여 있긴 했지만,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 교훈을 활용할 터였다."(51-2)


"히틀러가 살던 무렵의 빈에는 이러한 지지의 필요성과 대중이라는 토대 위에서 정당을 구축할 필요성을 이해한 정치 지도자가 한 사람 있었다. 바로 빈의 시장이자 기독교사회당 지도자인 카를 뤼거 박사였다." "훗날의 히틀러와, 빈의 중간계급 하층의 우상인 덩치 크고 화통하고 상냥한 시장 사이에는 분명 닮은 구석이 별로 없었다. 뤼거가 불만 많은 프티부르주아지를 끌어들이고 나중의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극성스러운 반유대주의를 동원한 정당의 당수로서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유력한 정치가가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넉넉하지 않은 환경에서 성장해 고학으로 대학을 나온 뤼거는 상당한 지적 성취를 거둔 사람이었으며, 유대인을 포함한 반대자들도 그가 본심으로는 점잖고 예의 바르고 관대한 사람이라는 것을 선뜻 인정했다." "이 점이 청년 히틀러에게는 신경에 거슬렸다. 히틀러는 뤼거가 지나치게 관대하고 유대인의 인종 문제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다."(54-5)


"그러나 히틀러는 결국 뤼거의 천재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뤼거는 대중의 지지를 받는 법을 알았고, 현대사회의 온갖 문제와 대중을 사로잡는 선전 및 웅변술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뤼거가 강력한 교회를 상대하는 방식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뤼거는 〈유서 깊은 제도권의 지지를 얻기 위해 어떠한 수단이든 기민하게 활용했고, 그리하여 오랜 권력의 원천들로부터 자신의 운동에 이로운 것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었다.〉 요컨대 바로 여기에 훗날 히틀러가 독일에서 자신의 정당을 조직하고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활용한 이념과 수법이 담겨 있다. 그의 독창성은 1차대전 이후 우파 정치인 가운데 유일하게 그런 이념과 수법을 독일 정세에 적용했다는 데 있다. 이로써 민족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정당들 중에서 나치 운동만이 대규모 추종 세력을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군대, 공화국 대통령, 대기업 협회─〈유서 깊은 제도권〉의 3대 세력─의 지지를 확보해 독일 총리 자리까지 차지할 수 있었다."(55)


제2장 나치당의 탄생 


"전후의 혼란기에 바이에른의 우파로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규군, 즉 국가방위군Reichswehr이 있었다. 비텔스바흐 왕가의 복귀를 바라는 군주제 지지자들이 있었다. 베를린에 수립된 민주공화국을 경멸하는 다수의 보수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이 갈수록 늘어난 대규모 제대 군인의 무리, 1918년의 패전으로 바닥을 모르고 추락한 무리가 있었다." "1920년 3월 14일, 국가방위군은 뮌헨에서 호프만의 사회민주당 정부를 전복하고 구스타프 폰 카르를 수장으로 하는 우파 정권을 수립했다. 이로써 이 바이에른의 주도는 공화국을 뒤엎고 권위주의 정권을 세워 베르사유 조약의 강제 조항을 거부하기로 결의한 독일 내 모든 세력을 끌어들이는 중심지가 되었다. 이곳에서 에어하르트 여단의 단원들을 비롯한 자유군단의 용병들은 피난처를 마련했고 또 환영을 받았다. 루덴도르프 장군과 불만 많은 다수의 퇴역 장교들도 뮌헨에 정착했다. 이 비옥한 땅에서 아돌프 히틀러도 첫걸음을 내디뎠다."(70-2)


"1920년에 입당한 루돌프 헤스는 학위논문으로 써서 상을 받은 「독일을 다시금 지난날의 영광으로 이끌 인물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글로 히틀러를 감동시켰다. 〈모든 권위가 사라지는 곳에서는 인민을 이해하는 사람만이 권위를 세울 수 있다. ··· 독재자는 처음부터 광범한 대중에게 더 깊이 뿌리박고 있을수록 그들을 심리적으로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더 잘 이해할 것이고, 노동자들로부터 불신을 덜 받을 것이고, 인민 가운데 가장 정력적인 이 계층 사이에서 지지자를 더 많이 얻을 것이다. 그 자신은 대중과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모든 위대한 인물과 마찬가지로 그는 개성 그 자체이다. ··· 불가피할 때면 그는 유혈 사태도 피하지 않는다. 중대한 문제들은 언제나 피와 철에 의해 결정된다. ··· 목표에 이르기 위해서라면 그는 가장 가까운 친구들마저 짓발고 넘어설 각오가 되어 있다. ··· 입법자는 지독히 무정하게 일을 처리한다. ··· 필요할 때면 척탄병의 군화로 그들[인민]을 짓밟을 수 있다.〉"(94-5)


"1921년 4월 연합국은 독일에 배상금 청구서를 들이밀었다. 1320억 금마르크─당시 액수로 330억 달러─라는 경악스러운 금액에 독일인들은 도저히 지불할 수 없다며 울부짖었다. 통상 1달러에 4마르크였던 마르크화의 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1921년 여름에는 1달러에 75마르크로 떨어졌고, 1년 후에는 400마르크로 폭락했다. 1921년 8월 에르츠베르거가 살해되었다. 1922년 6월, 공화국을 선포했던 사회민주당의 필리프 샤이데만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같은 달 24일, 외무장관 라테나우가 길거리에서 총을 맞아 죽었다. 세 사건 공히 범인은 극우파의 일원이었다. 휘청거리던 베를린 중앙정부는 결국 정치적 테러를 엄벌하는 내용의 공화국 보호를 위한 특별법 발포로 이 도전에 응수했다. 바이에른 정부가 특별법을 시행하려 하자, 이제 인정받는 젊은 지도자 축에 드는 히틀러를 비롯한 이 지역 우파는 레르헨펠트를 끌어내리고 베를린으로 진격해 공화국을 쓰러뜨릴 음모를 꾸몄다."(101)


제3장 베르사유, 바이마르, 맥주홀 폭동 


"1918년 11월, 절대권력을 쥔 사회민주당은 영속적인 민주공화국의 토대를 재빨리 닦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호엔촐레른 제국을 지탱하던 세력들, 민주정 독일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을 세력들을 영원히 탄압하거나 적어도 영원히 억제해야 했을 것이다. 그 세력들이란 봉건적인 융커 지주를 비롯한 상류층, 거대 카르텔을 주무르는 대자본가들, 자유군단의 떠돌이 용병들, 행정조직의 관료들, 그리고 무엇보다 군부와 참모본부였다. 사회민주당은 낭비가 많고 비경제적인 광대한 사유지, 독점기업과 카르텔을 해체하고, 나아가 새로운 민주정에 충성스럽고도 성실하게 봉사하지 않을 모든 사람을 관료제, 사법부, 경찰, 대학, 군대에서 남김없이 내쫓아야 했을 것이다. 이 사회민주당원들 대다수는 독일의 다른 계급들과 마찬가지로 기성 권위에 머리를 숙이는 습관이 몸에 밴 선량한 노동조합주의자였던 터라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군부에 권위를 양도하기 시작했다."(105)


"빌헬름 그뢰너는 루덴도르프에 이어 제1병참총감이 된 장군이었다. 1918년 11월 9일, 스파에서 힌덴부르크 원수가 머뭇거릴 때 카이저에게 이제 더는 군의 충성을 받으실 수 없으니 퇴위하셔야 한다고 직언했던─군부가 결코 용서하지 않은 용감한 행동─인물도 그뢰너였다." "조국이 극도로 곤경에 처한 순간에, 두 사람은 비밀 전화선을 통해 재회했다. 바로 그때 사회민주당 지도자와 독일군 2인자는 한동안 공개되지 않을 테지만 국가의 운명을 결정할 협약을 맺었다. 에베르트는 무정부 상태와 볼셰비즘을 진압하고 군과 그 모든 전통을 유지한다는 데 동의했다. 그 대가로 그뢰너는 신정부가 자리를 잡고 목표를 수행할 수 있도록 군이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독일군은 구조되었지만, 공화국은 탄생한 바로 그날 침몰하고 말았다. 그뢰너 자신과 지조 있는 소수를 제외한 다른 장군들은 공화국에 충성할 마음이 결코 없었다. 결국 힌덴부르크의 주도로 그들은 공화국을 나치당에 팔아넘겼다."(106)


"정식으로 선출된 정부가 민주적 정신에 충실하고 나아가 내각과 의회에 복종할 새로운 군을 건설하지 못한 것은 시간의 경과가 알려준 대로 공화국으로서는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사법부를 숙청하지 못한 것도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법 집행자들은 반혁명의 중심 중 하나가 되어 반동적인 정치적 목적을 위해 사법을 악용했다. 역사가 프란츠 L. 노이만은 〈정치적 사법이 독일공화국의 생애에서 가장 암울한 페이지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고 단언했다. 카프 폭동 이후 정부는 705명을 반역죄로 기소했지만, 그중 오로지 베를린 경찰청장만이 형벌─5년간의 '명예로운 금고'─을 받았다. 프로이센 정부가 그의 연금 지급을 중단하자 대법원은 다시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반역 관련 법은 공화국 지지자에게는 가차없이 적용되었지만, 조만간 아돌프 히틀러가 알아챌 것처럼 공화국을 전복하려 시도한 사람은 무죄로 풀려나거나 가벼운 처벌만 받았다."(116-7)


"1923년 1월 11일, 프랑스의 루르 점령으로 독일 경제의 목이 졸리자 마르크화는 바닥을 모르고 급락했다(최종적으로 1달러당 조 단위까지 도달했다). 덕분에 독일 중공업은 무가치한 마르크화로 변제함으로써 부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강화조약에 의해 불법화되었는데도 '병무국'이라는 명칭으로 가장해 잔존하던 참모본부는 마르크화 폭락 덕에 전채戰債가 청산되었고 따라서 독일의 다음 전쟁을 방해할 재정적 장애물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지만 인민 대중은 산업계 거물들, 군, 국가가 통화 폭락으로 얼마나 많은 이득을 보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이 알았던 것이라곤 은행 잔고가 아무리 많더라도 대충 묶은 당근 한 다발이나 감자 반근, 설탕 수백 그램, 밀가루 1파운드도 살 수 없다는 사실이 전부였다. 그리고 날마다 굶주림의 고통을 몸으로 알았다. 궁핍과 절망 속에서 그들은 모든 사태의 책임을 공화국에 돌렸다. 이런 시절이 아돌프 히틀러에게는 하늘의 선물이었다."(118-20)


"바이에른 정부를 전복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난 맥주홀 폭동 재판에서 루덴도르프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히틀러를 비롯한 피고들에게는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그러나 〈누구든 독일국 헌법 또는 주 헌법을 강제로 변경하려 시도하는 사람은 종신형에 처한다〉라고 언명하는 법률─독일 형법 제81조─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옛 란츠베르크 요새에서의 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평판사들이 이 선고마저도 가혹하다고 항의했지만, 재판장은 히틀러가 6개월 복역한 후 가석방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말로 그들을 달랬다. 히틀러를 외국인으로서 추방하려던 경찰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판결은 1924년 4월 1일에 내려졌다. 그로부터 채 아홉 달도 지나지 않은 12월 20일, 히틀러는 석방되어 민주국가를 전복하기 위한 싸움을 자유롭게 재개할 수 있었다. 반역죄를 범했다고 해도 그 결과는, 범행자가 극우파일 경우, 법조문에도 불구하고 그리 무겁지 않았으며, 공화국 반대파의 다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147-8)


제4장 히틀러의 정신과 제3제국의 뿌리 


"《나의 투쟁》 제1권에서 히틀러는 생존공간Lebensraum(생활권) 문제,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사로잡았던 주제를 길게 논한다." "히틀러는 새로운 영토 획득은 〈동방에서만 가능했다. ··· 유럽 내에서 땅을 원한다면 대체로 러시아를 희생시켜야만 얻을 수 있었고, 이는 새로운 제국이 옛 튜턴기사단의 길을 따라 다시 행군하여 독일의 칼로써 장차 독일 민족이 쟁기질하고 매일 빵을 얻을 땅을 획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라고 말한다." "독일 국민은 얼마나 넓은 국토를 가질 자격이 있는가? 히틀러가 말하는 '표본 연도'는 독일인이 슬라브인을 다시 동쪽으로 몰아내던 무려 6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터였다. 동쪽으로 밀어내기를 재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 내 주데텐란트, 단치히를 포함하는 폴란드 서부를 차지한다. 그다음은 러시아 본국이다. 이렇게 써놓았는데도 불과 수년 후에 히틀러 총리가 바로 이 목표를 성취하겠다고 나섰을 때 세계는 왜 그토록 놀랐던 것일까?"(155-8)


"일부 역사가들, 특히 영국 역사가들은 히틀러의 세계관을 조야한 형태의 다윈주의로 여겨왔지만, 사실 그 세계관은 독일의 역사와 사상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다윈과 마찬가지로, 그러나 동시에 독일의 여러 철학자, 역사가, 국왕, 장군, 정치인과 마찬가지로, 히틀러는 모든 사람의 인생을 끝없는 투쟁으로 보았고, 세계를 적자가 살아남고 최강자가 지배하는 밀림─〈한 생물이 다른 생물을 잡아먹고 약자의 죽음이 강자의 삶을 의미하는 세계〉─으로 여겼다." "그렇다면 신의 섭리에 따라 〈지배자의 권리〉를 부여받은 자연이 〈가장 사랑하는 자식, 가장 용감하고 근면한 자식〉은 누구인가? 아리아인이다. 아리아인은 어떻게 그토록 많은 것을 성취하고 그토록 뛰어난 존재가 되었을까? 히틀러의 답변은 다른 인종들을 짓밟음으로써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의 투쟁》의 이 대목에서 우리는 나치의 인종 우월성 관념, 지배인종 관념, 즉 제3제국과 히틀러의 신질서의 기반을 이룬 관념의 핵심을 만난다."(161-2)


"1871년부터 1933년까지, 실은 히틀러가 몰락한 1945년까지 독일 역사의 행로는, 중간의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를 제외하면, 직선으로 나아가는 완전히 논리적인 과정이었다. 남성 보통선거에 의해 의원들이 선출되는 제국의회를 창설함으로써 민주적인 외양을 꾸미긴 했지만, 사실 독일 제국은 황제이기도 한 프로이센 국왕이 통치하는 군국주의적 전제국가였다. 제국의회는 권한이 거의 없었거니와, 국민의 대표들이 울분을 토하거나 자신들이 대변하는 계급을 위해 보잘것없는 이익을 좇아 흥정하는 토론 모임에 지나지 않았다. 권한─신성한 권리─은 군주에게 있었다." "빌헬름 2세는 의회의 방해를 받지 않았다. 그가 임명한 총리는 그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지, 의회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았다. 의회는 총리를 끌어내릴 수도 없었고, 붙들어둘 수도 없었다. 그것은 군주의 대권이었다. 이런 이유로 독일에서는 민주주의, 국민주권, 의회의 우위 같은 관념이 결코 뿌리내리지 못했다."(177-8)


제2부 승리와 공고화


제5장 권력에 이르는 길: 1925~1931 


"1924년 말, 출옥한 지 2주 만에 히틀러는 바이에른 주 총리이자 가톨릭 계열의 바이에른인민당 당수인 하인리히 헬트 박사를 서둘러 만났다. 근신하겠다고 약속하자(히틀러는 아직 가석방 중이었다) 헬트는 나치당과 그 기관지에 대한 금지 처분을 풀어주었다. 헬트는 바이에른 법무장관 귀르트너에게 〈야수를 제압했으니 쇠사슬을 조금 풀어주어도 괜찮겠지요〉 하고 말했다. 바이에른 총리는 이런 치명적인 판단 착오를 가장 먼저 범한 독일 정치인들 중 한명이었다. 그러나 결코 마지막 정치인은 아니었다. 《민족의 파수꾼》은 1925년 2월 26일, 히틀러가 쓴 〈새로운 시작〉이라는 제목의 긴 사설과 함께 복간되었다. 이튿날 히틀러는 뷔르거브로이켈러에서 열린 부활한 나치당의 첫 대중집회에 연사로 나섰다." "히틀러는 두 가지 목표를 추구했다. 하나는 모든 권력을 자기 손에 쥐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나치당을 오직 합법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권력을 추구하는 정치 조직으로 재건하는 것이었다."(215-6)


"헤르만 뮐러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마지막 총리이자 바이마르 공화국을 지지한 민주 정당들의 연정에 기반을 둔 마지막 정부의 수반으로 1930년 3월 사임했다. 후임 총리는 가톨릭 중앙당의 원내대표 하인리히 브뤼닝이었는데, 그는 자신의 재정 계획 조치들을 승인하도록 제국의회 의원 다수를 설득하지 못했다. 그러자 브뤼닝은 힌덴부르크에게 헌법 제48조를 발동하여 비상대권에 의거한 대통령령으로 자신의 재정 법안을 승인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응해 의회는 대통령령의 철회를 의결했다. 의회제 정부는 경제 위기로 강력한 정부가 반드시 필요한 순간에 와해되고 있었다. 이런 교착 상태를 타개하고자 브뤼닝은 1930년 7월 대통령에게 제국의회 해산을 요청했다. 선거일은 9월 14일로 정해졌다. 브뤼닝이 무슨 근거로 이 선거에서 의석의 과반을 무난히 차지할 것으로 전망했는지는 끝내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예상보다 일찍 기회가 왔음을 알아챘다."(248-9)


"큰 기대를 걸었음에도 1930년 9월 14일 밤에 나온 당일의 선거 결과에 히틀러는 퍽 놀랐다. 2년 전, 나치당은 81만 표를 얻어 제국의회 의원 12명을 당선시킨 바 있었다. 그런데 이날 나치당은 640만 9600표를 얻어 107석을 차지함으로써 기존의 가장 약소한 아홉 번째 정당에서 단숨에 제2당으로 약진했다." "군대, 그리고 대기업 및 금융계로 이루어진 재계, 양측의 지도부는 바이마르 공화국을 독일 역사에서 잠깐 스쳐지나가는 불운한 한때로밖에 보지 않았다. 성공적인 선거 결과에 달아오른 히틀러는 이제 이 양대 세력을 설득하는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들은 나치당의 선동과 저속함을 좋아하지 않았을 테지만, 공화국의 첫 10년간 너무나 억제되어온 독일의 오랜 애국심과 민족주의 감정을 나치당이 되살리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나치당은 독일 국민을 공산주의, 사회주의, 노동조합주의, 그리고 쓸데없는 민주주의로부터 빼내겠다고 약속했다. 무엇보다 독일 전역을 불타오르게 했다."(250, 256)


제6장 바이마르 공화국의 마지막 나날: 1931~1933 


"슐라이허의 눈에는 바이마르 체제를 약화시키는 원인들이 명확하게 보였다─누군들 몰랐겠는가? 우선 정당들이 너무 많은 데다(1930년에는 그중 10개 정당이 각각 100만 표 이상을 얻었다) 각 당의 목적이 너무 엇갈리고 저마다 자기 당이 대변하는 특정한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를 돌보는 데 너무 몰두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제국의회에서 각각의 차이를 메우고 지속적인 다수파를 형성하여 1930년대 초에 독일이 직면한 중대 위기에 대처할 만한 안정적 정부를 뒷받침할 수가 없었다. 1930년 3월 28일에 총리직을 맡은 브뤼닝이 어떠한 정책을 내놓든 제국의회에서 과반 지지를 얻을 수 없었고, 그저 정부의 소관 업무를 수행하는 데 그쳤으며, 경제가 마비된 상황에서 무엇이라도 하려면 헌법 제48조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 조항에 따르면 비상사태에서는 총리가 대통령의 승인만 받으면 긴급명령에 의해 통치할 수 있었다. 슐라이허는 총리가 바로 이 방법으로 통치하기를 원했다."(273)


"당시 뜻밖의 터무니없는 인물이 무대 중앙에 잠시 얼쩡거렸다. 슐라이허 장군이 1932년 6월 1일 독일 총리에 앉힌 53세의 프란츠 폰 파펜이라는 자였다." "파펜에게는 이렇다 할 정치적 뒷배가 전혀 없었다. 심지어 제국의회 의원도 아니었다. 정계에서 경험한 최고의 지위가 프로이센 주의회 의원이었다. 파펜이 총리에 임명되자 소속 정당인 중앙당은 그가 당수 브뤼닝을 배신했다는 데 분개하여 만장일치로 당에서 제명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파펜에게 초당파 내각을 구성하라고 지시했으며, 파펜은 슐라이허가 이미 각료 명단을 준비해둔 덕에 즉시 정부를 꾸릴 수 있었다." "파펜의 첫 직무는 슐라이허와 히틀러 사이에 맺어진 협정을 이행하는 것이었다. 6월 4일, 파펜은 제국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를 7월 31일에 새로 치르기로 했으며, 의심 많은 나치 인사들로부터 어지간히 재촉을 받고는 6월 15일에 돌격대 금지령을 해제했다. 그러자 독일 역사에서 일찍이 본 적 없는 정치적 폭력과 살인이 잇따랐다."(295-7)


"7월 20일, 파펜은 프로이센 정부를 해산하고 스스로 프로이센 제국판무관에 취임했다. 이는 독일 전역에 가닿을 일종의 권위주의 정부를 세우려는 대담한 행보였다." "파펜은 또 슐라이허가 급조한 '증거'를 들이밀며 프로이센 당국이 공산당과 한통속이었다고 비난했다. 프로이센의 사회민주당 측 각료들이 완력에 밀려 쫓겨나지 않는 한 스스로 물러나지는 않겠다고 하자 파펜은 기꺼이 완력을 행사했다." "좌파 세력이나 민주적인 중도 세력이 민주정 전복 시도에 진지하게 저항할지 모른다고 걱정할 필요는 더 이상 없었다. 지난 1920년에는 민주정 전복 시도에 맞서 총파업으로 민주정을 구한 바 있었다. 이번에도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의 지도자들이 그런 대응을 검토했으나 너무 위험하다는 이유로 성사되지 않았다. 요컨대 파펜은 합법적인 프로이센 정부를 해산함으로써 바이마르 공화국의 관에 또 하나의 못을 박은 셈이었다. 그가 큰소리친 대로 그 일에 필요했던 것은 병력 1개 분대뿐이었다."(297-8)


"1933년 1월 23일, 총리 슐라이허는 힌덴부르크를 방문해 제국의회에서 과반 지지를 얻지 못했음을 자인하면서 의회 해산과 더불어 헌법 제48조에 의거해 대통령의 명령으로 통치하는 국가긴급권을 발동하도록 요구했다. 마이스너에 따르면 장군은 제국의회의 〈한시적 배제〉도 요구했고, 정부를 〈군사독재정〉으로 전환해야 할 것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온갖 간사한 음모를 꾸몄음에도 슐라이허는 지난 12월 초의 파펜과 같은 신세였다. 다만 이제 두 사람의 입장은 정반대였다. 지난번에는 파펜이 국가긴급권을 요구했지만 슐라이허가 이에 반대하면서 자신이 나치당의 지지를 받아 다수파 정부를 구성하겠다고 제안한 바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슐라이허가 독재를 고집하고 파펜이 힌덴부르크에게 자신이 히틀러를 정부에 끌어들여 제국의회에서 다수파가 되겠다고 장담하고 있다. 얽히고 설킨 음모들이 베를린을 가득 채운 가운데 슐라이허는 마지막 순간에 후임 총리로 히틀러를 지지하고 있었다."(326-8)


"이렇게 뒷문을 통해, 내심 혐오하는 보수적 반동주의자들과의 비루한 정치적 거래를 통해 지난날 빈의 부랑자이자 1차대전의 낙오자, 난폭한 혁명가가 대국의 총리가 되었다. 분명히 국가사회주의당은 정부에서 소수파였다. 내각의 열한 자리 중에서 세 자리밖에 차지하지 못했고, 총리직을 별도로 치면 그마저 핵심 직책이 아니었다." "중요한 부처들은 보수파에 돌아갔다. 그들은 나치당에 올가미를 걸었으니 이제 자기네 목적대로 부릴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파펜 본인은 독일 부총리 겸 프로이센 총리가 되었고, 힌덴부르크로부터 부총리를 대동하지 않을 경우 총리를 접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 독특한 직책에 힘입어 급진적인 나치 지도자에게 제동을 걸 수 있다고 파펜은 확신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러나 이 경박하고 음험한 정치인은 히틀러라는 인물을 알지도 못했고─아무도 히틀러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그를 여기까지 밀어올린 세력의 힘을 이해하지도 못했다."(331-2)


"독일의 계급과 집단과 정당 가운데 어느 하나도 민주공화국의 폐기와 아돌프 히틀러의 대두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나치즘을 겪었던 독일인들의 중대한 잘못은 서로 단결하지 못한 것이었다. 국가사회주의당은 대중의 지지를 가장 많이 받은 1932년 7월에도 총 투표수의 37퍼센트를 얻는 데 그쳤다. 그러나 히틀러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던 독일인 63퍼센트는 설령 일시적으로라도 단결하여 나치즘을 근절하지 않으면 이 공통의 위험이 자신들을 압도하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너무 분열되고 근시안적이어서 서로 힘을 합치지 못했다. 모스크바의 지령을 따르는 공산당은 마지막까지 어리석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먼저 사회민주당, 사회민주당계 노조, 중간계급 민주 세력을 쓰러뜨리면 일시적으로는 나치 정권이 들어설 테지만 그것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며, 그러면 공산당이 정권을 넘겨받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수립한다는 생각이었다."(332-3)


"보수층은 한때 부랑자였던 오스트리아인이 수중에 있는 한 자신들의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화국 파괴는 첫 단계일 뿐이었다. 그들이 원한 다음 단계는 권위주의 국가, 즉 국내에서는 민주주의라는 '난센스'와 노동조합의 권력에 종지부를 찍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1918년의 판결을 무효화하고, 베르사유 조약의 족쇄를 벗어던지고, 대군을 재건하여 그 군사력으로 독일을 다시 양지바른 곳으로 이끌 수 있는 국가였다." "호엔촐레른 제국은 프로이센의 군사적 승리에 의해, 독일 공화국은 1차대전에서 패한 뒤 연합국에 의해 건설되었다. 그러나 제3제국은 전쟁의 부침이나 외세의 영향에 빚진 것이 전혀 없었다. 제3제국은 평시에 독일인들 자신의 약점과 강점에 힘입어 평화롭게 출범했다. 1월 30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완벽하게 헌법이 정한 바에 따라 히틀러에게 총리직을 맡겼을 때, 독일인 상당수, 아마도 과반수는 나치의 폭정을 자초한 줄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곧 알게 될 터였다."(335-6)


제7장 독일의 나치화: 1933~1934 


"의사당 화재 다음날인 1933년 2월 28일, 히틀러는 〈국민과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긴급명령에 서명하도록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설득했다. 헌법에서 개인과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7개 항을 유예하는 내용이었다. 〈개인의 자유 제한, 보도의 자유를 포함해 의견을 자유롭게 표명할 권리 제한, 집회와 결사의 권리 제한, 우편과 전신 및 전화에 의한 통신의 비밀 침해, 가택 수색 영장, 재산의 몰수 또는 제한 명령 등도 별도로 규정하지 않는 한 법적 제약을 넘어 허용된다.〉 또한 긴급명령은 필요할 경우 연방 주들의 전권을 넘겨받을 권한을 중앙정부에 부여했고, 〈심각한 치안 교란〉을 포함하는 다수의 범죄에 사형 판결을 내릴 수 있게 했다." "3월 5일, 히틀러의 생애에서 마지막으로 민주적 선거를 치른 날에 독일 국민은 투표를 통해 발언했다. 온갖 테러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독일인의 과반은 히틀러를 거부했다. 나치당은 가장 많은 1727만 7180표를 얻었지만, 이는 총 투표수의 44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347, 350)


"3월 23일, 의회에는 이른바 수권법─정식 명칭은 〈민족과 국가의 위난을 제거하기 위한 법률〉─이 상정되어 있었다. 간략하게 5개 조로 구성된 이 법은 향후 4년간 국가 예산 통제, 외국과의 조약 승인, 개헌 발의 등을 포함하는 입법권을 의회로부터 빼앗아 내각에 넘겨준다는 내용이었다. 그뿐 아니라 내각이 제정하는 법률은 총리에 의해 입안되고 〈헌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명시했다. 또 어떠한 법률도 〈제국의회 및 제국참의원 제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아야 했고─분명 가장 잔인한 농담이었다─대통령의 권한은 〈건드리지〉 말아야 했다." "표결 결과는 찬성 411, 반대 84(모두 사회민주당)였다. 이렇게 해서 독일 의회민주주의가 결국 매장되었다. 공산당 의원들과 일부 사회민주당 의원들이 체포된 것을 제쳐두면, 비록 테러를 수반하긴 했지만 모든 것이 아주 합법적으로 진행되었다. 의회는 헌법상 권한을 히틀러에게 넘겨줌으로써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354-7)


"1933년 5월 17일, 히틀러는 제국의회에서 '평화 연설'을 했는데, 이 연설은 기만적 선전술의 걸작이었다. 전날 루스벨트 대통령은 세계 44개국의 수반들에게 군축과 평화를 지지하는 미국의 계획과 희망을 개괄하고 모든 공격 무기─폭격기, 전차, 이동식 중포─의 폐기를 호소하는 내용의 울림 있는 메시지를 전했다. 히틀러는 루스벨트의 제의를 곧장 받아들여 최대한 활용했다. 독일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전쟁은 〈제어되지 않은 광기〉라고 했다. 전쟁은 〈현존하는 사회 질서와 정치 질서의 붕괴를 야기〉한다고 했다. 나치 독일은 다른 국민들의 〈독일화〉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 가지 경고가 들어 있기는 했다. 독일은 특히 무장이라는 점에서 다른 모든 국가들과 동등한 대우를 요구했다.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독일은 제네바 군축회의와 국제연맹에서 모두 탈퇴하는 편이 나을 거라고 했다. 이 경고는 예상치 못한 히틀러의 합리적인 발언에 서구 세계가 환호하면서 그만 잊히고 말았다."(373-5)


"1934년 4월 11일, 총리는 블롬베르크 장군, 육군 총사령관 베르너 폰 프리치 장군, 해군 총사령관 에리히 레더 제독을 대동한 채 킬 항구에서 순양함 도이칠란트 호에 올랐다. 두 총사령관은 힌덴부르크의 건강 악화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는데, 고분고분한 블롬베르크의 지지를 받는 히틀러가 자신이 국가방위군의 축복을 받아 대통령의 후임이 되면 어떻겠냐고 직설적으로 제안했다. 군부의 지지에 대한 보답으로 히틀러는 룀의 야망을 억눌러 돌격대를 대폭 축소하고, 제3제국에서 육해군만이 계속 무기를 소지할 수 있도록 보장하겠다고 제안했다." "육군 장군들의 상의는 5월 11일 바트나우하임에서 이루어졌고, '도이칠란트 호 협정'에 관한 설명을 들은 육군의 최고위 장교들은 히틀러를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후임으로 만장일치로 지지했다." "히틀러가 최고의 권좌에 오르기 위해 치른 대가는 대수로운 것이 아니었다. 바로 돌격대의 희생뿐이었다. 모든 권한을 틀어쥔 히틀러에게 돌격대는 더 이상 필요 없었다."(382-3)


제8장 제3제국의 삶: 1933~1937 


"히틀러는 과거를 모든 좌절이나 실망과 함께 청산하고 있었다. 한 단계씩, 그리고 신속하게 베르사유 조약의 족쇄로부터 독일을 해방시키고, 승전한 연합국을 당혹하게 만들고, 독일을 다시 군사 강국으로 바꿔가고 있었다. 이것은 대다수 독일인이 원하던 바였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들은 지도자가 요구하는 희생, 즉 개인의 자유의 상실, 스파르타식 식사(〈버터보다 총을!〉, 고된 노동을 감수하려 했다. 1936년 가을까지 실업 문제가 대체로 해결되어 거의 모든 사람이 다시 일자리를 얻었고, 노조 결성 권리를 빼앗긴 노동자들이 충실한 도시락 통을 앞에 두고서 적어도 히틀러 치하에서는 더 이상 굶주릴 자유가 없다고 농담을 한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이 무렵 〈사익보다 공익!〉이 나치의 인기 있는 구호였으며, 괴링을 비롯해 다수의 당 간부들이 몰래 자기 배를 불리고 있었음에도 일반 대중은 겉보기에 개인의 이익보다 사회의 안녕을 우선시하는 새로운 '국가사회주의'에 속아 넘어갔다."(412)


"나는 전체주의 국가에서 검열을 받고 거짓말을 하는 신문과 라디오에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속아 넘어가는지를 몸소 체험했다. 나는 사실을 확인할 기회가 있었고 정보원이 나치인 경우에는 처음부터 의구심을 품었음에도, 몇 년 동안 조작되고 왜곡된 정보를 꾸준히 접하다 보니 특정한 인상을 받게 되고 종종 그런 정보에 호도되는 경험을 하면서 깜짝 놀라고 때로 간담이 서늘해지곤 했다." "교양 있고 총명해 보이는 사람들도 라디오에서 듣거나 신문에서 읽은 허튼소리의 어떤 부분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이따금 그런 지적을 하고 싶었지만, 실제로 말하고 나면 마치 내가 전능한 신을 모독이라도 한 것처럼 주변에서 불신의 눈빛으로 노려보고 충격에 입을 다물곤 했다. 그래서 정신이 뒤틀린 사람이나, 히틀러와 괴벨스의 발언이나 진실을 무시하는 그들의 냉소적인 태도를 인생의 현실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접점을 찾아보려는 시도마저도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를 나는 깨닫게 되었다."(439-40)


"독일 경제 회복의 진정한 기반은 나치 정권이 1934년부터 재계와 노동계─아울러 장군들─의 에너지를 쏟아부은 재무장에 있었다. 독일 경제 전체는 나치 용어로 전쟁경제Wehrwirtschaft라고 알려졌는데, 이는 전시만이 아니라 평시에도 전쟁으로 귀결되는 기능을 수행하도록 계획적으로 설계된 경제였다. 루덴도르프 장군은 1935년에 독일에서 출간된 저서 《총력전Der Totale Krieg》에서 총력전을 적절히 준비하기 위해 다른 모든 부문과 마찬가지로 국가경제 역시 전체주의적 기준에 의거해 동원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독일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발상은 아니었는데, 18세기와 19세기에 프로이센에서는 정부 세입 가운데 무려 7분의 5가 육군을 위해 지출되었고, 언제나 국가경제 전체가 주로 국민 복지의 수단이 아닌 군사 정책의 수단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물론 독일이 그런 규모의 전쟁을 〈부득이하게〉 준비했던 것은 아니다─그것은 히틀러의 계획적인 결정이었다."(458-9)


"처음에 게슈타포는 괴링이 정권의 적을 체포하고 살해하는 데 동원한 개인적 테러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1934년 4월, 괴링이 힘러에게 프로이센 비밀경찰의 수장 자리를 넘긴 뒤에야 게슈타포는 친위대의 한 부문으로서 팽창하기 시작했고, 한때 양계업자였던 온화하면서도 가학적인 새로운 지도자와, 친위대 보안국Sicherheitsdienst, SD의 수장으로서 악마 같은 기질을 지닌 청년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천재적인 지도 아래 모든 독일인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가진 징벌 기관으로 발돋움했다. 1935년 프로이센 최고행정법원은 게슈타포의 명령과 행동은 사법심리의 대상이 아니라고 결정했다. 1936년 2월 10일에 공포된 게슈타포 기본법은 이 비밀경찰 조직을 법 위에 두었다. 법원은 게슈타포의 활동에 어떤 식으로든 개입할 수 없게 되었다. 게슈타포 내에서 힘러의 오른팔 중 한 명이었던 베르너 베스트 박사는 〈게슈타포가 지도부의 의지를 이행하는 한, 합법적으로 활동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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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세계사를 바꾼 50가지 전쟁 기술 - 고대 전차부터 무인기까지, 신무기와 전술로 들여다본 승패의 역사
로빈 크로스 지음, 이승훈 옮김 / 아날로그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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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고대 세계의 군사 제국들

01 전차 : 고대 세계의 탱크


기원전 2000년대 초의 몇 세기에는 전술 부문에서 주목할 만한 혁신이 이루어졌다. 나무를 구부리는 공법이 개발되어 살이 있는 바퀴를 제작할 수 있게 되면서 전차 무게가 더 가벼워졌다. 또 합성궁composite bow이 개발되어 빠르게 움직이는 전차에서 발사체를 더 빨리 발사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전차 제작, 말의 사육과 관리, 전차 몰이꾼과 전사를 훈련하는 데 비용이 매우 많이 들어 대규모 병참 지원이 필수적이었다. 야전에서 다수의 전차대를 유지하려면 군대는 상당한 수의 바퀴 제조자, 전차 제작자, 활 제작자, 대장장이와 병기 제작자가 필요했다. 적 보병대 사이로 돌입해 대형을 무너뜨리는 것이 전차의 임무였다. 전황이 뒤바뀌면 전차는 적의 추격을 맡았다. 전차대 운용은 한 나라의 군사력을 대변하는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 당시의 강대국―이집트와 지금의 중부 튀르키예에 있는 히타이트Hittite, 지금의 이라크에 있는 아시리아Assyria―은 모두 전차를 운용한 대표적인 국가들이다. 10-1)


기원전 첫 1000년대 중반, 페르시아인들은 낫이 달린 바퀴로 전차 운용 기법을 개선했다. 그리스의 군인이자 역사가인 크세노폰(기원전 425∼335년경)은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기원전 530년경 사망)이 낫이 달린 전차를 도입했다고 썼으나 4세기의 역사가 크니도스의 크테시아스에 따르면 이보다 더 일찍 도입되었다고 한다. 인도 사료에 따르면 아자타샤트루Ajatashatru왕(기원전 494∼467) 치세의 마우리아 제국이 브리지 연맹에 대한 원정에서 낫이 달린 전차를 사용했다고 한다. 소小 키루스Cyrus the Younger(다리우스 2세Darius II의 아들로 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Artaxerxes II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기원전 401년경에 전사했다.―옮긴이)는 전차를 대량으로 운용했다. 그러나 전차가 전장에서 활약할 날은 얼마 남지 않았다. 기원전 331년의 가우가멜라Gaugamela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는 페르시아 전차가 제멋대로 달려 지나가도록 대열을 열어준 후 뒤쪽에서 공격했다. 12)


02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 :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무적 보병


마케도니아군의 중핵은 보병으로 구성된 팔랑크스였다. 필리포스와 알렉산드로스의 힘은 상당 부분 팔랑크스의 끈질김과 신뢰성에 기인했다. 페제타이로이pezhetairoi 혹은 ‘발의 동반자’의 초석을 놓은 사람은 필리포스가 확실하다. 이들이 이렇게 불린 이유는 왕의 친위대인 귀족 위주의 ‘동반자hetairoi’ 기병대에 대응하는 전술적, 정치적 평형추로서 왕과의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보병 1만 2,000명과 기병 1,500명을 이끌고 원정에 나섰다. 보병 9,000명은 출신지에 기반한 ‘발의 동반자’ 1,500명으로 구성된 병단taxeis으로 조직되었다. 나머지 3,000명은 ‘방패 병단hypaspists’이라는 엘리트 근위대를 이뤘다. 발의 동반자 병단과 방패 병단은 마케도니아군 전열의 중앙에 배치되었고 기병대는 양 측면에 배치되었다. 전자는 기병대와 제대梯隊를 이루어 기동할 수 있도록 훈련받았다. 발의 동반자 병단은 적의 대열에 충격을 주어 분쇄하는 역할에 사용되었다. 분쇄된 적은 팔랑크스가 밀어붙였다. 14)


마케도니아 중장보병의 주무기는 사리사sarissa(길이 6.3미터, 무게는 8킬로그램)라는 긴 양손잡이용 창이었다. 전술 단위로 팔랑크스에서 가장 작은 전투부대는 256명으로 이루어진 스페이라speira로, 16명씩 오와 열을 지어 밀집대형을 펼쳤다. 팔랑크스대 첫 5열의 병사들은 단단한 밀집 공격대형을 짠 채 자기가 든 사리사를 앞줄의 병사 어깨 너머로 뻗도록 훈련받았다. 제일 앞줄의 병사들은 자신의 사리사를 적을 향해 수평으로 들었는데 창의 길이가 4미터에 달했다. 제일 앞줄 1미터 뒤에 선 두 번째 줄의 병사들은 사리사를 들어 앞줄 너머 3미터 앞까지 뻗었다. 세 번째 줄은 사리사를 더 높은 각도로 들었고 네 번째 줄은 그보다 더 높이 들었다. 다섯 번째 줄의 병사들은 날아오는 적 발사체의 위력을 분산하기 위해 사리사를 하늘을 향해 세우는 동시에 돌격하는 부대의 타격력에 무게를 더했다. 팔랑크스병들은 사리사를 다루기 위해 무거운 동체 갑옷을 벗고 가벼운 가죽제 흉갑과 투구, 각반을 착용했다. 14-5)


03 헬레폴리스 : 움직이는 거대한 공성탑


거대한 공성병기의 달인 데메트리오스 폴리오르세테스Demetrius Poliorcetes(‘포위자’, 기원전 337∼283)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남긴 제국의 지배권을 두고 다툰 장수 중 한 명이다. 알렉산드로스가 사용한 혁신적 기술 중 다수를 데메트리오스 폴리오르세테스가 로도스섬 포위전에서 사용했다. 데메트리오스는 철두철미하게 일하는 사람이었고 공성전은 고대 세계의 전쟁에서 가장 인상적인 전쟁 양식이 되었다. 데메트리오스는 기원전 306년에 벌어진 키프로스에 있는 살라미스Salamis 공성전에서 거대한 공성탑을 세웠다. 약 40미터 높이에 기단의 한 변 길이가 20미터에 이른 첫 헬레폴리스 공성탑은 거대한 통짜 바퀴 4개 위에 얹혀 이동했다. 탑 내부는 발사 무기로 가득 차 있었다. 가장 낮은 층에는 80킬로그램까지 나가는 발사체를 투척할 수 있는 중투석기가 있었고, 가운데 층에는 무거운 화살을 발사하는 쇠뇌가 있었다. 꼭대기에는 경량 투석기와 궁수들이 있었다. 내부에서는 200명이 공성탑을 운용했다. 17-8)


04 삼단노선 : 지중해를 누비던 주요 전투함


기원전 6세기 언젠가, 이단노선의 노잡이석에 세 번째 단이 추가되어 삼단노선이 탄생했다. 해양 군사 활동에 대한 아테네의 어떤 기록을 보면 노의 길이는 4∼4.5미터였던 것 같다. 삼단노선은 사실상 방어시설이 없었고 갑판 양현에는 난간이 없었다. 아마 도선을 쉽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삼단노선은 순항을 위해 돛을 가지고 다녔고, 순풍이 부는 상황에서는 노를 젓는 속도보다 더 빨리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돛을 펴면 전투 중에는 지그재그로 항해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러면 취약한 배의 현측이나 선미를 적에게 노출하게 되므로 전투 전에 돛을 내리거나 아예 육지에 남겨두었다. 삼단노선의 승조원은 200명이었고 그중 170명은 노잡이였다. 노잡이는 하류층에서 모집했으나 노예는 아니었다.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전의 삼단노선에는 중무장한 전투원과 궁수 몇 명이 탑승했다. 피리 주자 한 명도 탑승해 노잡이들에게 피리를 불어 시간을 알려주었다. 20-1)


충각ramming 전술은 삼단노선이 사용한 기본 전술이다. 충각은 삼단노선의 강화된 선수 밑에 튀어나온 금속판을 덮은 ‘부리’다. 삼단노선의 지휘관인 트리에르아크trierarch는 자신의 기량을 총동원해 정면충돌하려는 듯 돌진하다가 오른쪽 혹은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적에게 가장 가까운 쪽에 있는 노를 뻗어 적선의 옆을 긁으며 노를 부순다. 적의 갤리선은 뱅뱅 돌며 사용 불능 상태가 되고, 승자는 불구가 된 적선을 뒤에서 충각으로 들이받는다. 손상된 삼단노선의 승조원들이 배와 함께 바다로 가라앉을 운명을 피할 유일한 방법은 적이 충각을 빼내기 전에 적선으로 옮겨 타는 것이다. 로마 제국의 함대 역시 삼단노선이었다. 결코 뛰어난 뱃사람이 아니었던 로마인들은 끝에 큰 스파이크가 달린 거대한 건널판(코부스Covus)의 도움을 받아 해전을 대규모 도선전투渡船戰鬪로 바꾸려 했다. 코부스는 배와 적선을 단단히 붙들어둘 수 있었으나 자칫하면 사용자의 배가 뒤집히는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22)


05 로마군단 : 대적할 자 없던 무적의 군단


기원전 4세기 로마인들은 팔랑크스 대형보다 더 유연한 마니풀루스Manipulus(로마군단의 최소단위 부대로 60∼120명 규모―옮긴이) 위주의 대형에 의존하게 되었다. 군단은 30개의 마니풀루스로 나뉘었는데 모두 중장보병인 하스타티hastati, 프린키페스principes, 트리아리이triarii(젊은 신참병, 장년의 경험 있는 고참, 전투 경험이 많은 최고참―옮긴이)로 구성된 대대가 각 10개씩 있었다. 마니풀루스마다 경무장 척후병(벨리테스velites) 40명이 배속되었다.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로 구성된 마니풀루스는 짧은 찌르기용 칼(글라디우스gladius), 장방형 방패(스쿠툼scutum), 무거운 투창(필라pila) 2개로 무장한 120명의 병사로 구성되었다. 트리아리이 역시 비슷하게 무장했으나 찌르기용 창(하스타hasta)을 휴대했다. 기병대는 10개의 투르마turma(로마의 기병부대 단위, 복수는 투르마에Turmae―옮긴이)로 구성되었으며 창과 원형 방패로 무장했다. 이때 군단병들은 로마 시민이자 재산 소유자여야 했다. 23)


마니풀루스로 구성된 군단은 카르타고와 치른 두 번의 전쟁(기원전 264∼241, 218∼201)에서 실전을 치르면서 붕괴 일보 직전까지 갔다. 줄어드는 인구를 비롯해 가중된 압박으로 인해 군단은 6년간 복무하는 아마추어 민병대에서 직업인으로서 장기 복무하는 자원병으로 구성된 군대로 탈바꿈했다. 오랜 구상을 거쳐 실행된 이 과정은 기원전 107년에 집정관으로 선출된 가이우스 마리우스GaiusMarius(기원전 157∼86)가 도입한 개혁의 결과로 여겨진다. 이제 군단은 30개의 마니풀루스가 아니라 10개의 코호르스cohors로 구성되었다. 새로운 코호르스는 각각 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아리이로 이루어진 마니풀루스 3개와 벨리테스로 구성되었고 총원은 400명이었다. 그 결과 부대는 독립적 전투가 가능해졌다. 최선임 백인대장인 프리무스 필루스Primus Pilus(첫 번째 창이라는 뜻―옮긴이)는 군단이 전투에 나서면 가장 경험 많은 병사로 구성된 제1대대 제1백인대百人隊, centuria를 지휘했다. 24)


06 야전에서의 로마군단 : 완고하고 결연하게 규율을 지키다


군대의 선두에서는 정찰부대인 경보병과 기병대가 매복 징후를 찾는다. 본대의 선봉은 군단에서 온 1개 부대, 기병대에서 온 1개 부대로 구성되었다. 그다음 각 백인대에서 10명씩 차출된 인원으로 구성된 숙영지 측량대가 왔다. 측량대 뒤에는 공병대가 따라왔다. 그다음에는 강력한 기병대의 호위를 받는 군단장과 참모진의 짐을 실은 대열이 따라왔다. 그 뒤에는 보조기병대와 보병대에서 뽑은 경호대를 거느린 군단장이었다. 행군의 다음 순서는 군단 소속 기병대 120명이었고 이들 뒤를 분해한 공성기, 공성탑, 파성퇴, 투석기를 운반하는 노새 대열이 따랐다. 정예병들의 호위를 받는 군단의 고위 장교들과 군단 본대가 다음이었다. 군단은 나팔수와 기수들의 뒤를 따라 행군했다. 각 군단의 뒤를 보급 마차 대열이 따랐다. 군단 뒤에는 자신들의 기수를 앞세운 보조병 부대가 왔다. 행군 대열의 마지막 부대는 경·중보병과 보조기병대로 구성된 후위대였다. 군단과 얼마 거리를 두지 않고 비전투 종군자들이 따라왔다. 27-8)


행군이 끝날 무렵, 트리부누스tribunus(현대의 대대장급 장교―옮긴이) 한 명과 측량부대가 선발대로 파견되어 숙영지를 설치할 곳을 골랐다. 적과 이미 접촉했을 때는 수원지와 가깝고 적대세력으로부터 4킬로미터 떨어진 장소를 고르는 것이 중요했다. 이상적인 후보지는 솟아오른 탁 트인 평원에 있고 적이 숨을 만한 데가 없는 곳이었다. 2개 군단이 이용하는 숙영지의 면적은 약 700제곱미터였고 측량부대가 세심하게 구획했다. 행군 숙영지 주변에는 대개 깊은 해자를 팠고, 파낸 흙은 보루를 쌓는 데 사용했다. 적과 가까운 곳에 숙영지를 구축할 때에는 기병대, 경보병대, 중보병대 절반은 적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해자 앞쪽에 배치했다. 완공된 행군 숙영지 가운데를 비아 프린키팔리스via principalis라고 불린 대로가 관통했으며 이 도로는 집정관의 막사 앞까지 이어졌다. 영구적으로 지은 요새처럼 숙영지 구역은 격자로 나뉜 구조였고 군단의 각 부대는 자기 구역을 배당받았다. 28-9)


07 로마군의 공성전 기법 : 도시를 봉쇄해 구원군을 차단하다


세부 내용이 정확히 알려진 가장 이른 시기의 공성전은 제1차 포에니 전쟁 시기인 기원전 262년에 벌어진 카르타고령 시칠리아의 아그리겐툼Agrigentum(아그리젠토Agrigento) 포위다. 로마군은 아그리겐툼 주위로 두 개의 숙영지를 잇는 두 개의 벽을 건설했는데 이것은 이중벽bicircumvallation으로 알려진 시스템이다. 두 벽 중 내벽은 포위된 도시를 봉쇄하고, 외벽은 적 구원군을 차단하는 데 사용되었다. 두 성벽 사이에는 너비 수백 미터에 이르는 넓은 가도가 있어 이중성벽 어디로라도 병력을 재빨리 이동시킬 수 있었다. 요새와 전방초소는 외벽과 내벽을 따라 일정 간격을 두고 설치되었다. 적 구원군의 개입을 막는 것만큼 포위된 도시의 굶주림을 가속화하는 것도 중요했다. 카르타고 구원군이 도착했고, 전투를 시도한 아그리겐툼 방어군이 패하자 이중포위가 벌어졌다. 유일하게 현존하는 관련 기록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52년에 중부 갈리아의 알레시아Alesia에서 벌인 포위전에 관한 기술이다. 30)


Chapter 2. 중세 전쟁

08 중기병과 사슬 갑옷 : 가볍고 유연하면서도 튼튼한 갑옷


중세 군대에서 기수가 확실하게 기여한 바는 바로 기동성이다. 군사작전에서 습격이 회전會戰보다 훨씬 중요했던 시대에 정찰과 토벌 임무를 위해 빠르게 장거리를 이동할 수 있던 기수의 역할은 매우 귀중했다. 프랑크의 왕이자 서쪽 황제 샤를마뉴Charlesmagne(747∼814)는 가공할 위력의 기병대를 전장에 전개했다. 그런데도 50년간의 군사행동에서 회전은 단 두 번, 모두 783년에 벌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카우치드 방식으로 기병창을 잡는 모습(겨드랑이에 끼우고 손으로 꼭 잡는 기병창)은 바이외 태피스트리Bayeux tapestry(1080년경)에서 볼 수 있다. 이 태피스트리는 보병에게 돌격하는 기병을 보여주는 유일한 중세 회화자료다. 헤이스팅스Hastings 전투(1066)에서 노르만 기병이 반복해서 돌격했으나 색슨군의 방패 벽을 돌파하지 못한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전투 마지막 단계에서 색슨군 전열이 붕괴하고 나서야 노르만 기사들은 흩어진 색슨 보병에 타격을 가할 수 있었다. 35)


사슬 갑옷은 날이 있는 무기로 하는 베기 공격과 뾰족한 무기로 하는 찌르기 공격 방어에는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검으로 정확히 수직 각도로 표면을 타격하면 연결된 고리를 벨 수 있었다. 사슬을 리벳으로 접합하지 않은 경우에는 창으로 정확히 겨누거나 얇은 칼로 찌르면 갑옷이 뚫릴 수 있었다. 사슬 갑옷은 폴액스poleaxe(긴 자루에 달린 도끼―옮긴이)나 핼버드halbard(미늘창이라고도 함. 도끼와 창을 한데 합친 무기―옮긴이)같이 타박상이나 골절상을 일으킬 수 있는 모든 타격병기로부터도 착용자를 보호하지 못했다. 사슬 갑옷은 철퇴나 전투망치에 맞아 생기는 외상도 막지 못했다. 결국 착용자는 단단한 투구를 사슬로 만든 코이프coif(머리가리개―옮긴이) 위에 써야 했다. 14세기경에는 판갑이 쇠뇌 화살, 타격용 무기, 창으로 찌르기에 대해 사슬 갑옷보다 방어력이 좋았다. 그러나 14세기와 15세기에 장궁longbow과 핼버드로 무장한 기율이 잘 잡힌 보병은 말탄 기사의 맞수가 되기에 충분함을 입증했다. 36-7)


09 바이킹 롱십 :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병력 수송선


전쟁에서 사용된 롱십에는 여러 종류가 있었다. 가장 작은 배인 스네키아snekkja(‘가늘고 튀어나온 것’)는 길이 17미터에 폭 2.5미터였다. 이 배의 승조원은 41명(노잡이 40명, 조타수 1명)이었다. 정복자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은 1066년의 잉글랜드 침공에서 롱십 600척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가장 큰 롱십 중 하나는 스케이skei(‘물을 가르고 나가는 것’)로, 길이는 30미터에 조금 못 미치고 승조원은 최대 80명이었다. 이보다 더 긴 롱십도 존재했다. 노르웨이의 이교도를 내리치는 기독교의 망치라 불렸던 올라프 트뤼그바손Olaf Tryggvason(재위 960∼1000) 왕이 만든 롱십은 길이가 거의 46미터에 이르렀다. 이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설계, 구조, 자재가 잘 결합된 완벽한 습격용 기계이자 태생적으로 항해 안정성이 뛰어나고 흘수선이 얕아 어느 해안에나 상륙할 수 있으며 유럽에 있는 강들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게 만들어진 양날검과도 같은 함선이라는 점이다. 39)


돛이 도입되면서 롱십 건조에 새 시기가 열렸다. 양모로 만든 돛에 가죽 띠를 덧대 강화했는데, 이는 돛이 젖었을 때 형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용골이 더 깊어졌고 선폭이 더 넓어졌으며 건현이 더 높아졌다. 해안에 접근할 때나 강에서 항해할 때는 노를 이용했다. 항해에 유리한 조건에서 롱십은 11노트까지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이물과 고물에 있는 무서운 동물의 머리는 롱십이 육지로 다가갈 때만 부착해서 거친 풍랑을 만났을 때 파손되는 사태를 피했다. 양현에 방패를 가득 달고 항해 중인 롱십의 묘사는 실제와 맞지 않는다. 방패는 바다에 빠뜨려 잃어버리기에는 너무나 귀중한 물건이었다. 조타는 우현에 부착된 노 하나가 맡았다. 12세기와 13세기에 건현이 더 높은 한자동맹식 코그Hanseatic Cog가 개발되면서 롱십의 시대는 끝나갔다. 코그선은 다음 세대에 등장할 범선의 시조다. 습격을 위해 설계된 롱십은 요새화된 항구도시와 진보한 해상전투의 시대를 맞아 경쟁력을 잃었다. 40-1)


10 방패벽 : 어깨와 어깨를 맞대어 만드는 벽


1066년 1월에 왕위에 오른 잉글랜드의 색슨 왕 해럴드 고드윈슨은 그해 두 전선에서 전쟁을 치렀다. 9월 25일에 그는 동생 토스티그와 노르웨이 왕 하랄 하르드라다가 이끄는 침공군을 요크셔의 이스트라이딩에 있는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물리쳤다. 고드윈슨은 승리를 거두자마자 발걸음을 돌려 남쪽으로 행군해 또 다른 왕위 주장자와 대결했다. 9월 27∼28일에 군대를 거느리고 페븐시에 상륙한 노르망디의 윌리엄 공작이었다. 윌리엄은 내륙으로 진격해 헤이스팅스Hastings에 도달해 10월 14일 아침에 해럴드 왕이 이끄는 군대와 마주쳤다. 색슨군은 대개 방패벽 뒤에서 보병으로 싸웠다. 방패벽은 역사가 오래된 전술로서 기원전 7세기부터 그리스군이 사용했으며 나중에는 로마군도 사용했다. 로마 군단병들은 이 진형을 테스투도testudo(거북이)라고 불렀다. 이 진형에서 가장 앞줄은 방패를 수직으로 들고 그 뒤의 병사들은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 적이 던지는 투사체가 뚫을 수 없는 방벽을 만들었다. 43)


초기 중세시대의 북유럽에서도 방패벽은 익숙한 방어 전술로 남아 있었다. 특히 반 직업군인인 병사들로 대열을 전개할 때 사용되었다. 이 전술의 약점은 대열이 한 번 뚫리거나 흩어지면 방어군이 기병의 공격에 취약해진다는 것이었다. 헤이스팅스에서 해럴드는 캘드벡 힐이라는 경사가 급한 능선에 최적의 방어 위치를 잡고 측면 방어에도 만전을 기했다. 윌리엄이 잉글랜드 정복을 원한다면 공격해야 했다. 노르만군 좌익이 후퇴하면서 패배할 위험에 처했다. 위기의 순간, 윌리엄은 부하들을 독려해 다시 재집결시켰고 결정적으로 전술을 바꿨다. 기병대 돌격을 막아낸 후 지친 색슨군은 노르만군이 후퇴를 가장하자 여기에 속아 방패벽을 포기하고 추격에 나섰다. 이제 취약한 상태가 된 색슨군은 노르만 기병을 상대로 그 대가를 치렀다. 날이 저물 무렵 3,000명 규모의 후스카를housecarls 친위대와 함께 전열 한가운데에 있던 해럴드 왕은 얼굴에 화살을 맞았고 일단의 노르만 기사의 칼을 맞고 목숨을 잃었다. 43-4)


11 성 : 성을 짓는 다양한 방법


앵글로색슨인의 잉글랜드에서는 성이 없었기 때문에 노르만인은 1066년의 헤이스팅스 전투 이후 잉글랜드를 쉽게 정복할 수 있었다. 노르만인은 목재와 흙으로 빠르게 축성할 수 있는 ‘모트 앤드 베일리’식 성을 선호했다. 앙주의 풀크 네라가 992년에 랑제Langeais에 지은 탑처럼 돌로 만든 성은 짓는 데 시간이 훨씬 오래 걸렸고, 잉글랜드에서는 12세기에 들어서야 모트 앤드 베일리식 성이 석성Stone Castle, 石城으로 대체되었다. 노르만 지배를 돌로 장중하게 웅변하는 듯한 런던의 화이트 타워White Tower(런던탑이라고도 불린다―옮긴이)는 1100년에 준공되었다. 노퍽Norfolk의 라이징성CastleRising은 1138년에 완성되었는데 층마다 기능이 다른 아성tower keep, 牙城(성 안에 지어진 요새화된 탑으로 성이 함락될 경우 최후의 거점으로 삼았다―옮긴이)의 훌륭한 예시다. 점점 더 복잡해진 축성술은 한 성안에 또 다른 성이 있는 동심원성concentric castle, 同心圓城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45)


흑색화약을 쓰는 포병이 등장하기 전, 성은 보급 기지와 패배할 경우의 피신처 혹은 습격이나 원정의 도약대로 기능했다. 적의 영토 안이나 국경 근처에 성을 구축하는 것은 적대적 의도를 표명하는 행동이었다. 더욱이 성의 수비대는 병참선을 위협할 수 있었다. 시리아의 홈스Homs시에서 약 48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크락 데 슈발리에Krak des Chevaliers는 십자군의 의도를 빼어난 형태로 표현한 중세 최고의 동심원성 중 하나다. 남쪽면의 외벽과 내벽 사이에는 성 밖에서 들어오는 수로교aqueduct로 물을 대는 대형 개방식 저수조가 있었다. 동쪽 내벽을 통해 들어오는 성의 입구는 방어시설로 보호되었으며 입구에 도달하려면 유턴을 두 번 해야 했다. 이때 공격자들은 위쪽의 숨겨진 화살구멍arrowloop을 통해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과 각종 공격물에 노출되었다. 가장 취약한 남측면의 성 내벽 두께는 30미터였다. 이 측면의 아랫부분은 경사 사면으로 보강되었고 직경 9미터의 방어탑 7개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46-7)


12 중세의 공성전 : 성을 함락하는 다양한 방법


1216년 10월, 반기를 든 귀족들에게 충성하는 기사들이 로체스터성을 점령했다. 존 왕은 친히 공성전을 감독했다. 첫 전투에 투입된 공성기 5대는 외성에 이빨 자국도 내지 못했다. 성 외벽이 돌파되고 수비 병력이 아성으로 철수하자 존 왕은 갱도 굴착으로 공격 방법을 전환했다. 아성 한 모퉁이가 무너졌지만 수비대는 굶주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항복하기 전까지 성을 지켰다. 포위전에서는 도시 외벽에 총공격을 감행하기 전에 대개 공성기를 이용해 투사체投射體를 발사했다. 망고넬mangonel(만가논manganon, 즉 ‘전쟁 기계’라는 뜻에서 나온 말)로 알려진 이 캐터펄트식 공성기는 적의 진지에 투사체를 던져넣을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망고넬을 사용해 바위나 인화성 물질 또는 생물전의 초기 형태로 썩은 시체나 동물의 사체를 적진으로 쏘아 던졌다. 12세기경에 아랍인들과 접촉하면서 십자군은 가공할 만한 무기 트레뷰셋trebuche을 개발했다. 13세기에 들어오자 트레뷰셋은 가장 중요한 공성병기가 되었다. 49-50)


나무 기단에 단단히 설치한 A 모양의 뼈대 두 개로 이루어진 트레뷰셋은 평형추를 들어 올렸을 때 생성되는 에너지를 사용해 투사체를 던지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A 모양의 뼈대 위쪽 끝 사이에는 발사체를 던지는 지렛대arm가 회전축에 고정되어 있었다. 지렛대의 약 8분의 1은 회전축 앞에 있었고 나머지는 뒤에 있었다. 무거운 평형추(큰 돌을 채운 상자)는 지렛대의 짧은 쪽 끝에 매달려 있었다. 사용자는 다른 쪽 끝에 부착된 밧줄과 도르래 장치를 이용해 윈치로 지렛대를 아래로 당겨 평형추를 위로 올렸다. 지렛대 끝이 투사체를 실을 수 있게 수저 모양인 것도 있었으나 대개 슬링의 원리를 이용했다. 지렛대 끝을 빠르게 수직으로 끌어올리면 슬링 한쪽 끝이 열려 발사체가 투척되는 형태였다. 트레뷰셋으로 죽은 말과 시체를 비롯한 대형 투사체를 상당히 먼 거리에서 발사해 포위된 도시와 마을 벽 안으로 던져넣을 수 있었다. 트레뷰셋의 가장 큰 단점은 너무 크고 기동성이 없다는 점이었다. 50-1)


13 도검 : 전장의 필수 무기


도검은 단검에서 진화한 검으로 청동기시대에 개발되었다. 기원전 150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첫 청동제 도검은 칼자루와 칼날을 별도로 제작하고 리벳으로 결합했다. 이런 종류의 무기는 찌르기 용도로는 효과적이었지만 너무 세게 베면 부서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로부터 500년 뒤, 날과 자루를 하나로 주조한 전형적인 형태의 청동기시대 도검이 등장했다. 자루의 날을 연결하는 슴베 부분에서 폭이 넓어졌다가 완만하게 좁아지며, 날 전체 길이의 3분의 2 부분에서 급격히 좁아져 올라가 뾰족한 칼 끝부분을 완성한다. 이로 인해 자르기와 찌르기 모두에 유용한 무기가 탄생했다. 철검 시대로 접어들면서, 중동에서는 휜 날이 인기를 끈 반면 로마 군단병들은 짧고 폭이 넓은 글라디우스 검을 사용했다. 이 검은 오른쪽에 차고 오른손으로 뽑을 수 있었으며 근접전에서 유리했다. 그 뒤로 몇 세기가 흐르면서 도검은 신화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일급의 검을 만드는 데 비용이 많이 든 점이 이유일 것이다. 53-4)


13세기부터 갑옷이 발전함에 따라 도검도 변화했다. 한 손으로 쓰는 베기용 검은 금속판에 튕겨 나갔기 때문에 검을 더 날씬하고 뾰족하게 만들어 갑옷의 취약한 부분을 찾아 공격하고자 했다. 칼자루는 두 손으로 잡을 수 있도록 확장되고 더 길어졌다. 길고 무거운 검으로 공격하면 갑옷을 입은 적이 균형을 잃게 되어 다른 형태의 공격에도 취약해지므로 큰 피해를 줄 확률이 커졌다. 16세기에 들어 갑옷을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되어 검을 쓰는 사람의 손을 갑옷 장갑으로 가릴 수 없게 되자 손을 보호하기 위해 칼자루와 코등이quillons(칼자루와 칼날 사이에 있는 보호용 날개)가 더욱 복잡해졌다. 레이피어(민간용 무기)를 사용하는 펜싱이 발달하면서 이러한 변화를 촉진했다. 보병 부문에서 검은 화기로 대체되었으나 기병대는 계속 도검을 사용했다. 19세기에도 기병창과 검은 기병대가 가장 선호하는 무기였다. 기병도는 똑바로 뻗은 날에서 헝가리 후사르Hussar 기병이 도입한 구부러진 세이버sabre로 바뀌었다. 54-5)


14 장궁 : 철판 갑옷도 꿰뚫은 백년전쟁 핵심 무기


에드워드 1세(재위 기간 1272∼1307)는 자신의 군대에 웨일스 궁수들을 대거 기용했다. 웨일스 궁수들이 휴대한 활은 길이가 약 1.8미터에 이르렀다. 나무를 말리고 구부려서 모양을 잡아 활을 만드는 데 최대 4년이 걸렸으며, 그 후 방수 왁스, 수지, 정제 지방을 바른 다음 삼이나 아마 또는 비단으로 만든 시위를 부착했다. 중세 유럽에서 사용한 갑옷의 질이 향상되었기 때문에 장궁으로 쏜 화살로 갑옷을 뚫으려면 큰 힘이 필요했다. 전투 사격에서 유효성을 유지하기 위해 궁수는 장기간 훈련을 거쳤다. 에드워드 1세는 일요일에 활쏘기 연습 이외에 모든 스포츠를 금지했다. 중세 시대 활의 정확한 사거리를 추정하기는 어렵지만, 헨리 8세가 모든 사격장의 길이는 최소 220야드(200미터)여야 한다는 칙령을 내린 바 있다. 정확한 사격을 유지할 수 있는 거리는 약 200야드(183미터)까지다.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는 전투 개시 단계에 벌어진 수평 일제사격에서 화살이 250야드(228미터) 거리를 날아갔다. 56)


15 초기의 화포 : 의미 있지만 결정력은 없었던 중세 무기


초기의 대포는 거칠게 사각형으로 깎은 재목에 얹혀 적을 향해 놓인 다음 발사되었다. 이 단계에는 대포가 병사들의 사기에 미치는 효과가 물질적 피해보다 더 중요했다. 에드워드 3세는 칼레 포위전(1346)에서 대포를 사용했으나 도시는 대포가 아니라 기아 때문에 항복했다. 갓 태어난 포병대는 처음에 교회로부터 마법과 유사한 짓을 한다고 낙인찍혔다. 실제로 당시의 대포는 목표물에도 사용자에게도 위험한 물건이었다. 훈련받는 포수들은 포 주변에 흩어진 화약을 쿵쿵 밟지 말라는 경고를 들었다. 불안정한 화약이 점화해 폭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초창기에는 발사체로 화살을 사용했지만 15세기경에는 철포탄을 사용했고, 나중에 가벼운 돌포탄으로 대체했다. 돌포탄은 더 저렴했고 가벼운 구조물을 부수고 들어갈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명중했을 때의 충격으로 부서지면 더 효과적인 인명 살상 무기가 되었다. ‘사문석 화약serpentine powder’이라고 알려진 흑색 화약은 15세기 초에 상당히 개선되었다. 60-1)


프랑스에서 불안정한 화약의 해결 방안이 등장했다. 바로 ‘알갱이 화약Cornedpowder’이었다. 화약의 세 원료를 갈아 물에 적신 다음 섞으면 일종의 ‘케이크’가 만들어지는데, 이 케이크를 말린 다음 부숴서 체로 쳐 알갱이 크기를 반드시 균일하게 만들어야 했다. 알갱이 화약은 대포에 집어넣고 불을 붙이면 즉시 불이 붙었고 서펀틴 화약보다 위력이 세 배나 더 강했다. 발사 후에도 잔여물을 남기지 않고 습기나 흔들림에 강하며 다루기 쉬웠으나 단조로 제작한 대포에 사용하기에는 너무 위력이 강했다. 알갱이 화약이 널리 쓰이려면 주조 대포가 도입된 16세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주조 대포와 알갱이 화약은 쇠로 된 발사체에 새 생명을 부여했다. 돌을 깎아 포탄을 만들려면 공이 많이 들었지만 쇠로 주조 포탄을 만들기는 상대적으로 간단했고 비용도 적게 들었다. 알갱이 화약과 더 튼튼한 대포가 합쳐져 쇠로 된 포탄의 파괴력을 키웠다. 포탄 두 개를 사슬로 연결하면 유용한 대인 병기가 되었다. 61-2)


Chapter 3. 화약 혁명

16 해상전 : 해상전투를 위한 함선들


갤리선은 15세기 말엽까지 설계가 거의 바뀌지 않은 건현이 낮은 함선으로서 순항할 때는 라틴 돛lateen sail(큰 삼각돛―옮긴이)을, 전투할 때는 죄수나 포로가 젓는 여러 단으로 설치한 노를 사용해 추진했다. 16세기에 들어서 갤리선에는 앞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대포가 설치되었다. 즉 목표에 대포를 발사하려면 배 전체가 선회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갤리선의 전술은 배에 탑승한 다수의 병사들에게 달려 있었다. 갤리선들이 소이성燒夷性 투사체를 서로에게 발사한 다음 적선에 올라타는 것이 이들의 임무였다. 오스트리아의 돈 후안이 이끄는 기독교도 함대가 서부 그리스의 파트라스만Gulf of Patras 북쪽 해안에서 터키 갤리 함대를 대파한 1571년 레판토Lepanto 해전은 갤리선으로만 싸운 마지막 대규모 해전이었다. 캐럭선carrack은 군용으로 채택된 건현이 높은 상선으로, 건현이 낮은 갤리선보다 포격용 플랫폼으로 적합했으며, 16세기 초에 경첩으로 개폐 가능한 포문이 도입된 다음부터는 더 그러했다. 65)


헨리 8세의 메리 로즈호처럼 높이 솟은 선수루를 갖춘 갤리언선galleon은 캐럭선에서 진화한 배다. 1509∼1510년에 건조된 메리 로즈호는 병사들이 적함으로 건너가기 전에 타격을 입힐 수 있도록 특별히 설계한 선수루를 갖췄다. 메리 로즈는 해상전투의 중간 단계를 대변하는 함선이다. 17세기 들어 핵심적 위치를 차지한 함선은 전열함ship of the line이다. 전열함이란 대포를 배치한 옆면을 적함 쪽으로 두고 함선들이 일렬로 늘어서는 진형으로 기동할 수 있도록 특별히 설계된 배다. 피니어스 페트Phineas Pett가 설계하고 아들 피터가 건조하여 1637년에 진수한 소버린 오브 더 시즈Sovereign of the Seas는 찰스 1세가 보유한 함대의 자랑이었다. 이 배는 건조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부과한 특별세인 ‘함선세Ship Money’에 쏟아진 엄청난 반대를 뚫고 찰스 1세가 주도해 만든 웅장한 위신의 상징이었다. 이 배는 앞으로 1860년까지 건조된 모든 전열함의 원형이 되었다. 65-7)


17 보방 혁명 : 군사공학의 아버지, 보방


세바스티앵 르 프르스트르 마르키스 드 보방SébastienLePrestreMarquisedeVauban(1633∼1707), 흔히 보방으로 알려진 이 인물은 프랑스군 원수이자 당대 최고의 공병 전문가로 공성 기술자이자 요새 설계자로 유명했다. 1670년대 말, 보방은 포위전의 교리를 체계화했다. 연달아 평행참호를 파서 적 요새에 신중하게 접근하는 방식은 1673년 마스트리히트 포위전에서 보방이 도입한 것이다. 수비 병력이 충실했던 마스트리히트는 13일 만에 함락되었고 이 전투는 19세기 말까지 모든 포위전이 따라야 할 모범으로 남았다. 보방 최고의 작품은 프랑스 북부 국경을 지키는 이중 요새선인 프레 카레Pré Carré였다. 1692년 나무르Namur 포위전에서 보방은 도탄 사격법ricochet firing, 跳彈射擊法을 완성했다. 이 사격법으로 사격한 직사포탄, 곡사포탄, 간혹 공성포탄은 바깥쪽 흉벽을 지나쳐 방어벽 안쪽에 부딪혀 사방으로 튕겨 나가며 방어 진영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70-1)


18 포병의 시대 : 전장을 지배하게 된 아쿼버스와 머스킷


흔히 요새 벽에 설치되었던 경량 화기에서 발달한 아쿼버스arquebus는 보병이 오른팔 밑에 끼워 넣고 땅에 박은 거치대에 의지해 발사하는 무기였다. 곧 더 작은 변종이 생산되어 끝을 가슴에 대고 양손으로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참호나 방책 뒤에 배치되어 창병과 미늘창병의 보호를 받는 아쿼버스병은 체리뇰라Cerignola 전투(1503)에서 유효성을 증명했다. 이 전투는 화약 기반 화기로 승리한 첫 전투였다. 1695년 잉글랜드 왕실 조병창은 잉글랜드 훈련대(민병대)의 무기를 장궁에서 화기로 대체한다고 포고했다. 아쿼버스의 정확도는 제한적이었으나 단거리에서는 갑옷을 관통할 수 있었고 큰 총알 한 발 대신 산탄을 발사하면 여러 군데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 아쿼버스병은 석궁으로 무장한 궁수보다 더 빨리 사격할 수 있었으며, 훈련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숙달된 장궁수를 길러내는 데 비하면 극히 짧았다. 아쿼버스병의 등장으로 훈련 정도가 낮은 경장갑 보병의 전투력이 향상되었고 궁수가 도태되기 시작했다. 72)


아쿼버스에서 발전한 머스킷musket은 처음에는 거치대가 필요했으나 점차 어깨에 견착해 사격할 수 있었다. 머스킷의 발사 속도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렸다. 재장전 훈련에 18단계가 필요했고 두 발을 발사하는 데 7분 정도 걸렸다. 첫 줄의 병사들이 총을 발사한 후 재장전을 하러 뒷줄로 이동했고, 이렇게 순차적으로 한 줄씩 앞으로 나가 사격했다. 머스킷의 첫 격발장치는 매치락matchlock이었다. 매치락 머스킷은 서서히 타는 화승을 화약 접시priming pan에 넣어야 발사되었다. 1539년에 도입된 휠락wheellock은 처음으로 자체 점화가 가능한 장치였다. 이제 거추장스러운 화승 없이 공이를 당긴 상태로 휴대하며 언제든지 총을 발사할 수 있게 되었다. 17세기 말에 새로운 격발장치인 플린트락flintlock이 등장했다. 플린트락은 부싯돌을 문 스프링 작동식 공이를 사용했다. 이 장치는 방아쇠를 당기면 부싯돌이 화약 접시에 불똥을 일으켜 작동하는 구조였다. 영국군은 그 뒤로 150년간 플린트락식 소총을 사용했다. 73)


19 화력과 급습 : 제병통합 전투의 달인 말버러 공작


말버러 공작이 기틀을 잡은 유연한 군사적 환경으로 인해 지휘관들은 보병, 포병과 기병을 지형과 지휘관의 의도에 맞추어 배치할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150년간 지속될 패턴이 수립된 것이다. 1701년에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 왕 윌리엄 3세는 처칠을 영국-네덜란드 연합군의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702년 왕위에 오른 앤 여왕은 그를 말버러 공작에 봉했다. 말버러 공작은 뛰어난 전략가이자 전술의 달인이었다. 그는 기병의 돌격 속도를 속보good round trot에서 구보canter로 바꿨다. 이것은 아직 카라콜caracole 전술(선도 기병이 화기로 사격한 후 말을 달려 후방으로 이동해 재장전한 다음 교대로 사격하는 전술)을 버리지 못한 프랑스군에게 특히 효과적이었다. 그는 포병 배치에 엄청난 노력을 들였으며, 중요한 구역에 대포를 집중 배치하거나, 총진격 중에 대포를 전방으로 보내 근접 지원을 제공했다. 그의 지도하에 영국 육군은 아쟁쿠르 전투 이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상을 획득했다. 75)


Chapter 4. 근대전의 탄생

20 브라운 베스 소총 : 처음으로 대량 생산된 소총


영국군의 주력 보병 화기인 활강식 랜드 패턴Land Pattern 머스킷 플린트락 또는 ‘브라운 베스’ 소총은 1722년에 설계되어 그 뒤로 100년 이상 생산되었다. 이 전장식 소총은 납탄과 화약을 넣은 카트리지를 썼으며 플린트락 기구로 점화했다. 방아쇠를 당기면 부싯돌이 튀긴 불똥이 총신의 터치홀touchhole을 통해 장약으로 갔다. 18세기와 19세기 초의 전장에서는 정확한 조준 실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밀집대형으로 이동하는 병사들은 적의 머스킷 일제사격에 대형 과녁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한 병사가 쏜 총에서 쏟아져 나온 불똥이 장전 중인 다른 병사의 화약에 옮겨붙지 않게 하려면 일제사격이 필요했다. 플린트락 장치는 1807년에 알렉산드로스 존 포사이스 목사가 퍼커션 캡Percussioncap을 발명한 후 퇴출되었다. 때리면 불꽃이 일어나고 방수가 되는 구리제 뇌관인 퍼커션 캡은, 특히 축축한 날씨에 불발되는 경향이 있고 오발이 자주 일어나던 플린트락에 비해 믿을 만했다. 79-81)


21 기동 포병 : 전쟁의 달인 프리드리히 대왕의 유산


15세기 말쯤 화포는 바퀴 달린 포차가 더해져 어느 정도 기동력을 확보했다. 하지만 포병의 기동 속도는 옆에서 행군하는 포수들의 행군 속도에 제한을 받았으므로 이 혁신은 속도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즉 포병은 걷는 속력보다 더 빠를 수 없었다. 17세기 초에 구스타부스 아돌푸스는 보병이 견인하는 경량 화포인 연대포를 도입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가벼운 무게 때문에 전장에서의 효과가 제한적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18세기 전쟁의 달인인 프리드리히 대왕이다. 이전의 기병대는 적을 만나면 멈춰 서서 소지한 화기로 교전하도록 훈련받았다. 프리드리히는 기병도와 창을 주 무기로 복원하고 기마 포병horse artillery이라는 형태로 추가 화력을 지원했다. 프리드리히의 기마 포병대 소속 사수들은 말을 탔으므로 이 병과에는 새로운 통일성과 속력이 생겨났다. 기마 포병대의 대포는 당연히 가벼울 수밖에 없었으나 적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힐 정도의 위력을 갖고 있었다. 82)


‘사선 대형Obliqueorder’은 기마 포병과 더불어 프리드리히의 중요한 발명품이다. 프리드리히는 오랜 기간 원정하면서 수적으로 우세한 적과 자주 마주친 경험이 있었다. 사선대형은 잘 훈련되고 기율이 엄정한 프로이센 보병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동시에 적의 수적 우세에 대응하기 위해 고안한 방책이었다. 전 전열에서 적과 교전하는 대신, 프로이센 부대들은 사선 대형으로 기동하며 적의 측면을 향해 이동했고 선봉 부대는 적의 중앙과 정면에서 교전했다. 프리드리히는 최대한 지형지물을 이용해 기술적으로 기동을 숨겼고 후속부대를 계속 투입해 적의 측면을 압박했다. 적의 측면이 무너지면, 이때까지 측면공격을 엄호하던 기병대가 전면적으로 투입되어 적 전열에서 무너진 부분을 이용하기 위해 칼을 빼 들고 일제 돌격으로 급습했다. 로이텐Leuthen 전투(1757)에서 프리드리히는 아군보다 규모가 두 배 이상인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승리함으로써 7년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달성한 슐레지엔 지배를 확립했다. 83)


22 나폴레옹의 군단 : 포병은 가장 효율적인 무기


프랑스 포병의 근대화는 1765년 이전 몇 년에 걸쳐 장바티스트 드 그리보발Jean-Baptiste de Gribeauval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그가 추진한 개혁으로 인해 프랑스군은 대대 수준의 화력 지원을 하던 경량 야포를 폐지하고 이를 대규모로 집결한 포대로 대체했다. 이 포대가 집중 화력을 퍼부어 적의 전열에 구멍을 내면 기병이나 보병이 그 구멍을 이용해 전과를 확대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기병대를 가공할 위력을 지닌 무기로 만들었으나 기병대가 사용한 전술은 나폴레옹 전에 이미 확립된 것이었다. 나폴레옹의 전쟁 수단에서 눈에 띄는 특징이 속력과 유연성이다. 나폴레옹은 진지전보다 기동전을 옹호한 기베르 백작Comte de Guibert(1743∼1790)의 영향을 받았다. 기베르는 독자적으로 작전이 가능한 사단 단위로 군을 조직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나폴레옹이 좋아한 『전술일반론』의 저자이기도 한 기베르는 징집병으로 국민군을 편성하는 것을 선호했다. 이것 역시 프랑스 혁명이 나폴레옹에게 남긴 유산이었다. 85)


1800년에 나폴레옹은 모든 병과가 포함된 군단corps d’armée으로 군을 재조직했다. 군단은 다른 군단과 합류할 때까지 최대 36시간을 단독으로 작전할 수 있었다. 사실상 군단은 독자적 참모진과 보병, 기병, 포병대와 사령부를 갖춘 군대 자체의 축소판이었다. 군단장의 대략적 진공선은 나폴레옹이 결정했지만, 그 다음부터는 행군 중에 어느 정도 융통성을 허락받았다. 적과의 교전은 군단장이 자발적으로 결정할 수 있었고 근처의 다른 군단장들은 대포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행군했다. 군단 개념은 바타용 카레bataillon carré(대대 방진) 진형으로 완전히 구현되었다. 이 대형에서 개별 군단은 이틀 행군 거리 안에서 평행 경로로 행군하며, 선견부대, 차장遮障 임무를 맡은 기병대와 예비대, 그리고 좌익과 우익의 보호를 맡는다. 이렇게 행군하는 나폴레옹의 군대는 사방을 두루 방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소속 부대 중 하나가 적과 접촉하면 어느 방향으로든 전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86)


23 해상 화력 : 목조 함선의 마지막 대해전 ‘트라팔가르’


17세기 중엽의 함선은 갑판마다 같은 구경의 대포를 배치해 건조했다. 이러한 함선으로 인해 생겨난 현측 일제사격broadside은 이후 200년 동안 해상전의 특징이 되었다. 해전에 대한 이 간단한 접근법은 새로운 방법으로 대체되었다. 존 클러크John Clerk는 『해군 전술에 대한 에세이』에서 전열 돌파를 옹호했다. 함수나 함미에서 공격을 받은 배는 포를 돌려 적을 겨냥할 수 없다. 클러크는 영국 해군이 적의 전열을 뚫고 들어가서 뒤에 남겨진 적함을 압도한 다음, 나머지 적함이 침로를 바꿔 전투를 벌이기 전에 이탈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트라팔가르Trafalgar 해전(1805년 10월 21일)에서 허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 제독은 프랑스-스페인 연합합대의 전열을 두 군데에서 적절한 각도로 돌파했다. 이 대담한 계획에 압도된 빌뇌브Villeneuve 중장이 지휘하는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의 대열 중앙과 후미는 영국 함대와 난전에 휘말렸고 뛰어난 영국군의 포술과 조함 능력이 여기에서 빛을 발했다. 88-9)


Chapter 5. 산업과 전쟁

24 무기 대량 생산 : 사정거리와 치명도를 끌어올린 산업혁명


18세기에 소화기 생산 분야는 중세 이후로 바뀐 것이 거의 없었다. 19세기쯤에는 정밀한 도구와 이제 막 시작된 산업 자동화에 힘입어 국영 조병창들과 민간 생산자들은 교체 가능한 부품으로 구성된 표준화된 무기로 재빨리 생산 품목을 바꿨다. 19세기의 첫 30년 동안 플린트락이 퍼커션락으로 대체되면서 머스킷 총의 성능은 크게 향상되었다. 총열에 강선(총탄에 회전력을 주어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 총열 내부에 판 홈)이 파인 총은 미국 독립전쟁(1775∼1781)과 반도전쟁(1808∼1814)에 도입되었다. 강선이 파인 총열에 사용할 총탄은 총열 안쪽에 꽉 맞아야 하면서도 장전하기 쉬워야 했다. 이 문제는 프랑스에서 발명자의 이름을 딴 미니에 총탄Minié bullet이 개발되면서 해결되었다. 미니에 총탄은 아래쪽이 비어 있고 테두리가 있는 원뿔형 총탄이다. 심하게 오염된 총열에서도 쉽게 빠져나오고 테두리가 강선에 꼭 물린 미니에 총탄은 미국 남북전쟁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93)


다음 단계는 전장식 소총을 후장식 소총으로 교체하는 것이었다. 전장식 소총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사수가 누운 상태로 재장전하기가 지극히 어려웠다는 점이었다. 후장식 소총은 1848년에야 군용 총기로 등장했다. 프로이센의 총기 제작자인 요한 니콜라우스 폰 드라이제Johann Nicolaus von Dreyse의 아이디어에서 탄생한 이 소총은 바늘식 소총Needle gun이라고 알려졌다. 프로이센군이 1848년에 채택한 드라이제 바늘식 소총은 나중에 모든 볼트 액션식 소총의 조상이 된 폐쇄식 볼트 시스템을 장비한 첫 소총이다. 바늘식 소총 덕에 프로이센군 보병은 1분에 8발의 속도로 사격할 수 있었다. 총미에 상자형 탄창 혹은 총열 아래에 원통형 탄창을 장비한 볼트 액션식 소총은 전 세계 군대의 표준 보병 화기가 되었다. 1885년에 무연화약smokeless powder이 도입되자 전환 과정이 완료되었고, 1900년경에 보병용 소총의 형태가 고정된 후 제1차 세계대전을 지나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를 때까지 유지되었다. 93-4)


25 기관총 : 한 번에 다수의 목표물을 파괴하다


미국의 남북전쟁(1861∼1865)으로 인해 자동화기의 발전에 가속도가 붙었다. 1861년 시카고의 치과의사 리처드 조던 개틀링RichardJordanGatling이 개발한 개틀링건Gatlinggun은 회전식 프레임에 설치된 총신 6개로 구성되었다. 회전하는 총신이 차례로 탄창과 나란히 배열되면 장전 접시로 떨어진 카트리지가 장전기를 통해 약실로 삽입된다. 총알이 발사되면 다 쓴 탄피는 총신이 회전하면서 추출된다. 중력에 의한 장전과 흑색화약 카트리지에 의존하던 기존의 기관총은 무기로서 신뢰받지 못했으나, 금속 카트리지와 무연화약이 발명되자 기관총의 잠재력에 날개가 달렸다. 여러 분야에서 활동한 만능 발명가인 미국인 하이럼 맥심HiramMaxim은 총알의 반동을 다음 총알을 장전하고 발사하는 데 이용하여, 천 벨트에 끼운 카트리지가 자동으로 장전되어 발사되는 구조를 개발했다. 드디어 사수를 작동기구에서 해방시킨 진정한 기관총이 탄생한 것이다. 사수가 해야 할 일은 방아쇠를 계속 당기는 것뿐이었다. 95-6)


맥심이 확립한 기본적인 기관총 설계는 30년간 유지되었는데, 점차 다른 개량형들도 등장했다. 미국의 존 M. 브라우닝John M. Browning은 발사 가스 일부를 이용해 장전 과정을 보조하는 총을 만들었다. 브라우닝이 추가한 부분은 영국군이 1912년에 채택한 수랭식 비커스 기관총에 차용되었다. 1914년 영국군 대대는 일반적으로 비커스 기관총 2정을 보유했다. 다만 고위층에서 이 기관총이 곧 차지하게 될 중요성을 내다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독일군은 7.92밀리미터(0.3인치) 파라벨럼Parabellum탄을 사용하는 벨트 급탄 수랭식 기관총 6∼12정으로 기관총 중대를 편성하고 이를 3개 대대로 편성된 연대에 배치함으로써 지휘관의 손에 가공할 집중 화력을 쥐어주었다. 1914년 여름과 가을에 걸쳐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전이 시작되자 양군이 배치한 기관총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1914년 영국군 사단은 기관총 24정을 배치했으나 1916년경에는 열 배로 늘어난 204정이 배치되었다. 97)


26 드레드노트형 전함 : 거함거포의 시대를 열다


미국 남북전쟁(1861∼1865) 기간인 1862년에 중대한 의미가 있는 해상 대결이 벌어졌다. 8인치 두께의 철제 장갑을 둘러친 회전포탑에 탑재된 11인치 활강포 2문을 장비한 북군 소속 포함gunboat인 모니터Monitor함이 햄프턴 로즈Hampton Roads에서 남군의 버니지아Virginia함과 근거리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 결투는 결론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비록 조잡하기는 했어도 모니터함의 선회포탑은 미래의 함선이 나아갈 길을 가리켰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시사점이었다. 20세기로 접어들 무렵, 해전 기술은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1904년에 제1 해군경으로 임명된 피셔 제독은 이런 상황에 자극을 받아 ‘모든 포를 대구경포로all-big-gun’ 장착한 전함 설계를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던 중 1905년 5월에 일본이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하자 피셔 제독의 숙고에 절박함이 더해졌다. 이 해전은 현대적 해군 포술이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를 보여준 극적인 시연이었다. 99-100)


1905년에 피셔 제독은 지금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전함을 구식으로 만들 전함 건조 프로그램을 발족했다. 이 프로그램의 목적은 당시 사용 가능한 추진 기관, 방어력, 무장 부문의 진보를 단 하나의 선체에 몰아넣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로터리 터빈 기관, 장갑 방어, 거리측정용 광학장비, 사격 통제 시스템과 폭발 지연신관을 이 전함에 적용할 계획이었다. 1905년 10월부터 1906년 2월까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건조되고 진수된 배수량 1만 8,000톤의 전함 드레드노트Dreadnaught는 1만 3,000마력 파슨스Parsons 증기터빈으로 속력 21노트를 냈다. 당시로서는 전함이라기보다 순양함의 속력이었다. 연장포탑 5개에 탑재된 30.5센티미터(12인치)포 10문이라는 드레드노트의 무장은 당대 어떤 현역 전함보다 강력했다. 어뢰정 공격에 대한 방어책인 7.6센티미터(3인치) 속사포 26문 덕에 적 어뢰정은 사정거리가 3,000야드(2,743미터)였던 당시의 어뢰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100)


Chapter 6. 제1차 세계대전

27 참호전 : 진흙탕 속 가장 참혹했던 전투


1914년에 프랑스군 포병의 근간은 1897년에 도입된 75밀리미터(3인치) 속사 야포였다. 이 포는 5.4킬로그램(12파운드) 고폭탄 혹은 7.2킬로그램(16파운드) 유산탄을 9킬로미터까지 쏘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야포는 참호전에 적당하지 않았고, 포탄은 엄중하게 방어된 진지를 위협하기에는 너무 가벼웠다. 개전 무렵의 영국 대륙원정군(BEF)은 중포 없이 18파운드(8.2킬로그램) 속사 야포만 야전에 배치했다. 이 포 역시 잘 구축된 참호에 효과를 발휘하기에 충분한 무게의 포탄이나 부앙각이 없었다. 19세기 후반 독일은 강화 진지를 격파할 무기를 개발했다. 따라서 독일군 야전포병 전력에서 곡사포howitzer(포신이 짧고 고각으로 더 무거운 포탄을 발사하는 포)가 차지하는 비율이 적보다 더 높았으며, 이는 결정적 우위로 작용했다. 가장 인상적인 대포는 무시무시한 75톤 무게의 크룹Krupp 42센티미터(16.5인치) 곡사포였는데 이 포는 918킬로그램(2, 052파운드) 포탄을 14.2킬로미터까지 발사할 수 있었다. 104)


1914년 전에 완성된 포병 기술인 간접 포격을 사용해 포수들은 보이지 않는 목표물에 사격할 수 있었다. 위장한 탄착관측수가 전화로 포수들에게 지시를 보낸 다음 첫 탄의 명중 결과를 관측하고 사격제원 수정을 지시한다. 참호전 환경에서 이는 매우 중요한 방법이었지만, 1914년 여름에 병사들은 기동전을 예상했기 때문에 간접 포격은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1915년 봄 무렵, 이 허황한 희망은 산산이 부서졌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서부전선 사상자의 70퍼센트는 포병 때문에 발생했다. 1916년 6월에 솜 전투 전의 준비 포격에서는 독일군 철조망을 뚫고 포대를 침묵시키며 방어군을 대피호에 묻어버릴 의도로 150만 발을 발사했다. 타는 듯이 뜨거운 7월 1일 아침 07시 30분, 포격은 독일군 제2선으로 이동해 갔다. 독일군 기관총수들은 충격을 받았으나 다치지 않은 채 대피호에서 나와 무인 지대를 걷는 속도로 전진하던 영국군 13개 사단에 압도적 위력의 기관총탄을 우박처럼 쏟아부었다. 105)


28 화학전 : 참호를 지옥으로 만든 화학 무기


1915년 4월 22일 오후 5시, 불길한 느낌을 주는 녹황색 구름이 이프르Ypres의 연합군 진지를 향해 서서히 다가왔다. 이 구름은 공세를 앞둔 독일군이 참호에 있는 500개의 가스 실린더에서 사전공격의 일환으로 방출한 압축 염소가스chlorine gas였다. 독일군 포로와 탈주병들이 이 새로운 무기에 대해 경고했지만 대응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이프르 북쪽 측면에 있던 프랑스군 식민지병 2개 사단이 이 구름에 휩싸여 겁에 질린 채 도주했다. 전선에 생긴 너비 6.5킬로미터의 공간에 있던 사람들은 고통스럽게 질식해 죽어갔다. 1915년 9월 25일, 영국군은 루스Loos의 독일군 진영에 염소가스를 살포했으나 가스는 적의 참호에 거의 도달하지 못했다. 그 뒤로도 가스 포탄의 사용이 점점 늘어나 1918년경에는 최소 63종의 가스가 사용되고 있었다. 머스터드가스의 희생자 중에 아돌프 히틀러AdolfHitler가 있었다. 히틀러는 제16 바이에른 동원연대에서 복무하다가 1918년 10월에 이프르에서 영국군의 가스 공격을 받았다. 109)


29 공중전 : 전쟁에 하늘이라는 새로운 차원을 더하다


1915년 2월, 프랑스인 롤랑 가로와 레이몽 솔니에가 전방 사격 기관총을 실험했다. 이들은 발사한 총탄 중 적은 수만 프로펠러에 부딪힐 것이라 계산하고 총탄을 튕겨내기 위해 프로펠러에 강철판을 붙였다. 4월, 가로는 독일군 전선 후방에 불시착했고 노획된 모랑-솔니에Morane-Saulnier N형 덕에 네덜란드 태생 공학자 안토니 포커는 프로펠러가 앞을 가리지 않을 때만 총이 발사되는 기계적 동조 기어mechanicalinterruptergear를 만들었다. 이 장치는 아인데커Eindecker라 불린 포커 E.I 단엽기에 탑재되었고, 이렇게 해서 진정한 의미의 첫 전투기가 탄생했다. 막스 이멜만과 오스발트 뵐케 같은 뛰어난 조종사들이 조종한 아인데커 E.III형은 서부전선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1915년 8월부터 1916년 1월까지 영국과 프랑스 항공대가 입은 손실은 ‘포커의 징벌Fokker Scourage’이라고 알려질 정도였고, 속절없이 당한 연합군 조종사들은 ‘포커의 밥Fokker Fodder’이라고 불렸다. 111-2)


오스발트 뵐케는 1916년 2∼6월에 베르됭 상공에서 겪은 격렬한 공중전 경험에 기반해 전투 목적으로 특화된 비행대, 야크트슈타펠Jagdstaffel(전투 비행대, 흔히 ‘야스타Jasta’라고 불림)을 편성했다. 뵐케가 지휘하는 야스타 2의 초창기 부대원으로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 남작ManfredFreiherrvonRichthofen이 있었다. 리히트호펜은 80기 격추를 기록해 최고의 에이스가 된다. 양측에서 신형기를 도입함에 따라 연합군에서도 에이스가 탄생하기 시작했다. 프로펠러가 뒤쪽에 달린 ‘푸셔pusher’형 전투기인 DH2(전방을 바라보는 조종사 좌석에 루이스Lewis 기관총을 장착)를 몰고 비행한 영국군 제6 비행대의 라노 호커Lanoe Hawker 소령은 공중전에서 첫 빅토리아 십자장Victorian Cross(VC)를 받은 영국 항공군단 조종사가 되었다. 1916년 11월 23일, 솜 전투가 끝날 무렵 호커는 알바트로스Albatros D.II 복엽기를 조종하던 리히트호펜과 격렬한 선회전을 벌인 끝에 그의 열한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112)


30 폭격기의 도래 : 지평선을 따라 비치는 전략 폭격의 여명


1917년 5월 독일 육군은 영국 본토의 목표물을 습격할 수 있는 공기보다 비중이 큰 폭격기를 개발했다. 고타Gotha G.IV 폭격기다. 탑승원 3명 중에 항법사와 폭격수를 겸한 관측수가 지휘를 맡았다. 최대 폭탄 탑재량은 500킬로그램(1,100파운드)이었고 폭탄은 기체 내부 혹은 외부에 탑재했다. 고타 폭격기는 1917년 5월 25일의 포크스턴Folkestone항 공격을 시작으로 6월 13일과 7월 7일에 극적인 런던 주간폭격을 벌였다. 독일의 런던 공습으로 자극받은 영국도 전략폭격부대를 창설했다. 1918년 봄에 선보인 이 부대는 프랑스에 있던 초창기의 영국 공군(RAF)과는 별개 부대로 독일 산업시설 폭격 임무를 맡았다. 이 부대의 주력기는 핸들리 페이지 O/400 폭격기로 최대 폭탄 탑재량 907킬로그램(2,000파운드), 최고속력 시속 95마일(시속 152킬로미터), 작전상승고도 2,590미터(8,500피트)였다. 악천후 그리고 이들에 전술 역할을 부여하자는 요구 탓에 O/400 폭격기의 독일 군수공장 폭격은 몇 번에 그쳤다. 116)


31 현대적 전차 : 참호를 건너 험지를 주파하는 전투 차량


1914년 10월 어니스트 스윈턴ErnestSwinton 소령(나중에 대령)은 영국군 최고사령부(GHQ)와 접촉해 전쟁 전에 개발된 강철 궤도식 홀트Holt 농업 트랙터를 장갑차량으로 개조하자는 제안을 제출했다. 최고사령부는 이 제안에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았지만, 스윈턴의 계획은 제1 해군경 윈스턴 처칠이라는 지원군을 얻었다. 1916년 초에 시제품 전차인 ‘빅 윌리’는 하트필드 파크Hartfield Park에서 성공적으로 시험을 마쳤다. 신무기에는 ‘탱크Tank’라는 암호명이 붙었는데, 대포를 장착하지 않으면 물을 나르는 용기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1916년 9월 15일 솜에서 처음으로 실전에 전차가 투입되었을 때, 출발점에 도착한 마크 Ⅰ 전차 32대는 전술적 배치 문제뿐 아니라 기계적 취약성과 짧은 항속거리의 희생양이 되었다. 전차는 1917년 11월의 캉브레 전투 때부터 비로소 효과적으로 이용되었다. 캉브레는 수량, 조건, 전술 면에서 전차에 유리한 전투였고, 훗날 전차가 만날 기회를 아주 살짝 보여주었다. 118-9)


마크 Ⅳ 전차Mark IV Tank는 마크 Ⅰ과 마찬가지로 마름모 비슷한 형태에 차체 전체를 감아 돌아가는 궤도를 터비했으나 개선된 라디에이터와 소음기를 장착했고, 궤도를 압연 강철로 만들어서 접지력이 더 좋았다. 다만 이 궤도는 약 32킬로미터까지만 제대로 굴러갔다. 12밀리미터(0.5인치) 두께의 장갑 방어력은 전 모델보다 개선되어 철갑총탄armor-piercing bullet, 徹甲銃彈(장갑판을 관통할 수 있도록 합금 등으로 강화한 탄자를 가진 총탄―옮긴이)에 유효했다. 실전에서 마크 Ⅳ 전차의 내부는 소음과 열로 가득한 불지옥이었다. 현가장치suspension가 없었으므로 살짝 무엇에 찧거나 부딪히면 충격이 몇 배로 증폭되었고 탑승원들이 뜨거운 엔진으로 내동댕이쳐질 위험이 상존했다. 전차가 피탄되면 뜨거운 철 조각이 사방으로 날아다녔고 장갑판이 총탄을 맞으면 탑승원들은 제철소 직원들처럼 흩날리는 뜨거운 금속에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 탑승원들은 눈을 보호하기 위해 얼굴 마스크를 썼다. 119-20)


Chapter 7. 제2차 세계대전

32 전격전 : 신속한 기동과 기습으로 돌파구를 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군사 이론가들은 기계화전 교리 개발에 매달렸다. 참호전의 교착 상태를 피하고 전장에서 기동과 이동을 회복하는 것이 목표였다. 전격전 교리의 아버지는 많으나 고대부터 내려온 통찰에 현대 기술을 응용하는 데 가장 큰 공로를 세운 사람은 하인츠 구데리안Heinz Guderian 대령(나중에 장군)이다. 통신과 차량 수송 전문가였던 구데리안의 목표는 적과 정면에서 교전해 압도적인 화력으로 격파하는 것이 아니라, 신속히 적의 지휘 통제체계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었다. 고속으로 기동하며 무전기로 서로 협력하는 독립적인 기계화 제대가 전장에서 가장 중요한 한 점, 즉 ‘중점schwerpunkt’을 공격해 돌파구를 연다. 이 부대들은 적의 방어선을 뚫고 후방 깊숙이 침투하며, 뒤에 따라오는 보병은 살아남은 적을 여러 개의 포위망에 나눠 가둔다. 첫 돌파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공중 포병으로서 루프트바페Luftwaffe(독일 공군)의 수평 및 급강하 폭격기를 이용한다. 122-3)


1941년 여름, 바르바로사 작전Operation Barbarossa이라고 알려진 독일의 소련 침공에서 소련의 붉은 군대도 같은 운명을 겪었다. 소련군은 ‘가마솥’ 전투라는 별명으로 불린 몇 개의 대규모 포위전을 거치며 전멸 직전까지 갔다. 3개의 ‘가마솥’에서 100만 명이 포로로 잡혔다. 하지만 전격전이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데 동부전선의 여러 조건이 훼방을 놓았다. 소련 땅의 광대한 크기, 영하의 겨울 날씨와 봄, 가을의 진창 같은 극단적인 기후, 끝이 없어 보이는 인적자원 공급은 동부전선에 전개한 독일군의 힘을 빼버렸다. 1941년 12월에 참전한 미국은 소련 군대와 민간인을 무장시키고 먹여 살리는 데 중대한 역할을 했다. 다시 기력을 회복한 붉은 군대는 히틀러를 점점 소모전의 늪으로 끌어들였다. 이중 가장 특기할 만한 전투로 스탈린그라드 전투(1942년 8월∼1943년 2월)와 쿠르스크 전투(1943년 7∼8월)가 있다. 이 전투에서 전격전의 기본 원칙, 즉 기습, 충격, 기동은 소련 여름의 흙먼지처럼 날아가버렸다. 124)


33 레이더 : 전투기 조종사들의 믿을 만한 눈


전파 방향 거리 탐지(장치)radio direction and ranging의 미국식 약어인 레이더는 영국에서는 RDF(radio direction finding, 전파방향탐지)라고 알려졌다. 레이더는 송출된 전파에너지 펄스가 목표물에 맞아 반사될 때의 에너지를 탐지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펄스의 속도는 이미 알고 있으므로 송출과 수신 사이의 시간을 측정하면 레이더 조작원이 목표물까지의 거리를 계산할 수 있다. 레이더 보고는 해안과 내륙의 관측초소에서 오는 정보와 교차 검증되었고, ‘걸러진’ 결과는 전투기 사령부 소속 전투비행단과 구역 기지Sector Station(주 기지)로 전송되었다. 요격 관제사들은 적 편대의 항로를 지도에 그리는 데 소요되는 6분의 시간을 감안해 요격 비행대를 배정했고 비행대는 다가오는 적기를 향해 긴급 출격했다. 개전 후 10개월 동안 루프트바페는 영국 제도로 정기적으로 정찰기를 보내 연안 운송 선박을 공격했다. 영국 공군은 여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레이더 요격시스템을 발전시켜 상당한 효율성을 발휘했다. 125-6)


34 전략폭격 : 머리부터 발끝까지 파괴해 굴복시키다


폭격작전은 영국이 나치 독일을 직접 공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전보다 고도화된 항법 보조장비를 갖춘 4발 폭격기(쇼트 스털링, 핸들리 페이지 핼리팩스, 아브로 랭카스터)가 대량으로 일선에 도입되면서 상황이 개선되었다. 이들의 도입은 폭격기사령부의 정책 변화와 때를 같이했다. 폭격기사령부는 간간이, 극적인 방법으로 특정 목표에 대한 정밀폭격을 유지했으나 이제 폭탄 대부분은 ‘지역’을 목표로 삼아 떨어지게 되었다. 폭격기사령부가 독일의 군수공장을 파괴할 수는 없어도 노동자들이 사는 곳은 파괴할 수 있었다. 폭격기사령부 사령관 아서 해리스ArthurHarris 대장은 독일 도시를 체계적으로 파괴하는 것만으로도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믿었다. 지역 폭격의 첫 단계는 1943년 7∼8월에 절정에 달했다. 이 기간에 수행된 고모라 작전Operation Gomorrah에서 폭격기사령부는 함부르크에 잇달아 파괴적인 폭격을 단행했다. 1944년 연말에는 독일 도시 대부분이 폐허로 변했다. 130)


1942년 미 육군항공대 제8공군의 지휘관들은 자위 능력을 갖춘 폭격기로 편성한 대형으로 주간에 고공 정밀폭격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은 전쟁 초기에 루프트바페와 영국 공군 폭격기사령부가 이 전술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는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미 육군항공대는 독일 상공에서 자신의 이론을 실천에 옮겼다가 전멸 일보 직전까지 갔다. 대규모 편대비행을 하던 B-17 플라잉 포트리스Flying Fortress와 B-24 리버레이터Liberator 폭격기가 루프트바페 주간 전투기를 상대로 입은 손실이 점점 늘어갔다. 1943년 늦여름경에는 평균 손실 비율이 1회 출격당 10퍼센트에 달했고 이런 손실을 유지하며 전투를 계속하기란 불가능했다. 1943년 12월에 뛰어난 성능의 P-51 머스탱Mustang이 호위전투기로 도입되면서 위기가 끝났다. 이 전투기는 독일 내륙 깊숙한 곳까지 폭격기를 호위할 능력이 있었을 뿐 아니라 상공에서 적 전투기를 소탕하기 위한 전투 초계활동fighting patrols도 할 수 있었다. 130-1)


35 기갑전 : 현대 전차 설계의 본보기 T-34


소련 전차군의 주축은 T-34/76 중형 전차로 1940년 여름에 처음으로 일선에 배치되었다. 이 전차는 기본 성능이 뛰어나 크게 개조하지 않고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사용되었다. 기동성, 방어력, 화력의 균형을 잡은 T-34 전차는 현대적 전차 설계의 기초를 놓았다고 여겨진다. T-34 경사 장갑의 특징은 포탄의 관통 저항력을 높였다는 것인데, 독일군이 5호 전차 판터를 만들 때 이 점을 베꼈다. T-34의 균형 잡힌 설계를 완성한 것은 포신이 길고 포구 초속이 빠른 혁신적인 전차포였다. T-34 전차는 접지압을 최소화한 폭이 넓은 궤도를 장비했으며, 러시아의 봄과 가을철의 특징인 진창(라스푸티차rasputitsa)과 겨울철에 깊게 쌓인 눈 같은 거친 지형에서도 빠르고 기동성이 좋았다. 튼튼한 전천후용 디젤 엔진 덕분에 T-34의 출력 대 중량비는 매우 훌륭했으며 항속거리는 299킬로미터로 독일군 5호 전차(판터Panther)와 6호 중전차(티거Tiger Ⅰ, Ⅱ)의 거의 두 배였다. 이러한 특징은 광활한 소련의 전장에서 아주 중요했다. 134)


36 유보트 전쟁 : 낮에는 잠항하고, 밤에는 공격하고


제1차 세계대전 때 유보트(독일어 운터제보트Unterseeboot에서 나온 말)로 알려진 독일 잠수함이 대서양 보급선을 끊어버려 하마터면 영국이 항복할 뻔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유보트들도 제1차 세계대전 때만큼 위협적이었으나 전투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연합군의 기술력에 패배했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얻은 승리였다. 1940년 여름부터 노르웨이와 프랑스의 대서양 연안에 있는 노르웨이와 프랑스의 기지를 획득하면서 유보트, 독일 수상함대, 장거리 정찰기들은 작전 범위를 확장하고 분쟁 수역으로 직접 접근할 수 있었다. 또한 이로 인해 ‘젖소’라 알려진 보급 유보트로부터 연료를 재보급받기가 더 쉬워졌다. 기회를 잡은 유보트들은 ‘늑대 떼wolf pack’ 전술로 작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낮에는 호송선단을 미행하고 밤에 부상해 공격했다. 유보트 승조원들은 1940년 7월부터 10월까지의 기간을 ‘행복한 시간Happy time’이라고 불렀다. 그동안 연합군 선박 217척이 격침당한 데 반해 유보트는 단 2척만 잃었다. 136)


유보트를 이기기 위해 연합군은 광대한 바다에서 이들을 탐지하고 격파할 장비가 필요했다. 공동 마그네트론 밸브cavitymagnetronvalve가 영국에서 발명되고 여기에 기반한 강력한 센티미터파 레이더가 등장해 가장 중요한 기술적 돌파구가 열렸다. 이 레이더는 1941년 4월에 부상한 잠수함을 10마일(16킬로미터) 거리에서, 잠망경을 1, 200미터(3,937피트) 거리에서 탐지해냈다. 공대지Air to Surface(ASV) 레이더는 1943년 봄에 도입되었다. ASV 레이더를 장비한 비행기와 탐조등, 폭뢰는 밤에 부상한 유보트를 탐지하고 파괴할 수 있었다. 1943년 5월에 연합군이 격침한 유보트 36척 중 22척을 비행기가 격침했다. 고주파 방향탐지장치(허프 더프huff duff)를 장비한 호위함들은 기지로 무전을 발신하는 유보트의 위치를 정확히 특정해 미행할 수 있었다. 청음 어뢰로 무장한 미국제 초장거리Very Long Range(VLR) 리버레이터 폭격기는 유보트가 항공 공격을 받을 걱정 없이 누비던 대서양 가운데의 틈새를 좁혔다. 137)


37 디데이 : 역사상 가장 중요한 상륙작전


이렇게 많은 과학적 준비 과정과 창의성을 들여 시행한 군사작전은 일찍이 없었다. 요행에 맡긴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유타Utah, 오마하Omaha, 골드Gold, 주노Juno, 소드Sword라는 암호명으로 부른 상륙 예정 해안은 특수 코만도 부대원들이 노르망디에서 가져온 모래 표본을 광범위하게 분석한 다음 연합군 계획 입안자들이 선정했다. 연합군 정찰기는 각 상륙 지역의 사진을 인치 단위로 촬영했고, 상륙 예정 부대의 수석 과학고문 솔리 주커먼Solly Zuckerman은 모자이크식으로 모은 촬영 결과물을 분석해 오버로드 작전에 선행한 수송 계획을 짰다. 상륙 뒤 연합군은 독일군이 노르망디의 거점을 증원하기 위해 사용할 서부 독일과 프랑스의 철도 시스템을 연합군 중폭격기와 전술폭격기로 파괴하기로 계획했다. 복잡한 연합군 기만 계획의 일환으로 영불해협이 제일 좁은 파드칼레Pas-de-Calais에 다수의 폭탄을 투하했다. 노르망디가 아닌 이곳에 연합군이 상륙할 것이라는 독일군의 심증을 굳히기 위해서였다. 140)


정확한 일기예보는 오버로드 작전 성공에 필수적이었다. 1944년 6월 6일에 잠시 날씨가 좋아질 것이라 예측되었고, 이 예보에 기반해 작전의 개시일이 결정되었다. 5,000척에 이르는 연합군 대함대가 영불해협을 건너는 동안 연합군은 독일군을 상대로 전자적 기만작전을 발동했다. 해군 소속 론치launch(대형 동력선―옮긴이)들이 칼레와 불로뉴Boulogne로 향했다. 모두 병력 수송선과 비슷한 반사파를 내도록 특별히 제작한 반사판을 단 풍선을 끌고 있었다. 상공에서는 폭격기들이 살포한, 규격에 맞춰 재단한 금속 띠(영국군은 ‘윈도window’라는 암호명을, 미군은 ‘채프chaff’라는 암호명을 붙였다)가 큰 강물처럼 반짝이며 떨어졌다. 이 금속 띠는 허위 레이더 신호를 만들어냈다. 영국이 통제한 이중스파이 후안 푸홀 가르시아Juan Pujol Garcia(‘가르보Garbo’)는 독일 정보기관의 담당관들에게 노르망디 상륙은 기만책일 뿐이며, 공격의 중점은 파드칼레가 될 것이라고 알렸다. 140-1)


38 나치의 비밀병기 : V-1과 V-2


루프트바페에서 개발한 FGZ-76 비행폭탄 V-1은  베르너 폰 브라운이 개발한 로켓 V-2에 비해 장점이 상당했다. V-1은 제작비용이 저렴하고 생산이 간단했으며 V-2에 필요한 귀중한 액화 산소와 고순도 알코올 대신 저질 연료를 태웠다. 곧 ‘두들버그doodlebug(개미귀신―옮긴이)’라는 별명을 얻은 V-1은 전쟁 초의 폭격 이후 다시 런던을 최전방 도시로 돌려놓았다. 이들의 정확도는 특별히 높지 않았으나 런던은 매우 큰 목표물이었고 독일의 의도는 V-1의 공격 효과가 무차별적으로 발휘되는 것이었다. 1944년 8월 말에는 런던 지역에서 2만 1, 000명이 V-1에 죽거나 중상을 입었다. 25만 명의 젊은 어머니와 어린이들이 대피했고 100만 명이 자발적으로 도시를 떠났다. 밤에는 수천 명이 런던의 지하철역에 몸을 피했다. 1944년 9월 초가 되자 최악의 V-1 공세가 끝났다. 연합군이 북프랑스의 발사기지들을 점령했고 독일군은 더 먼 네덜란드에서 발사하거나 개조된 폭격기로 공중발사하는 수밖에 없었다. 143-5)


런던 시민들이 한숨 돌릴 틈은 없었다. 9월 8일, 네덜란드에 있는 한 발사장에서 불과 5분 전에 발사된 V-2가 시 전체에 들릴 정도로 엄청난 폭음을 일으키며 런던 교외 치즈윅Chiswick에 떨어졌다. V-2 한 발은 V-1보다 20배 더 비쌌다. 하지만 두들벅 V-1과 달리 V-2는 접근을 알리는 경보도 없었고 발사된 뒤에는 요격할 방법이 없었다. 고폭탄 1톤을 실은 V-2는 80∼100킬로미터까지 상승했다가 음속 4배(시속 4,000킬로미터)의 속력으로 지상에 재돌입했다. 발사기를 겸한 차량으로 수송되는 V-2는 평평한 땅이라면 어디서든 발사될 수 있었으며 공중에서 탐지되지 않도록 발사장 위치를 주기적으로 옮겼다. V-2 공세는 남부 잉글랜드에 232발이 떨어진 1945년 2월에 절정에 달했다. 3월 8일에 런던의 스미스필드Smithfield 시장에 떨어진 V-2로 233명이 죽었다. 모두 합쳐 1,115발의 V-2가 잉글랜드에 떨어졌다. 그중 517발이 런던에 떨어져 2,754명이 사망하고 6,523명이 다쳤다. 145-6)


39 호위전투기 : 발군의 성능을 지닌 장거리 전투기


1943년 1월부터 독일 영공을 얕게 돌파하기 시작한 미 육군항공대의 손실은 2월부터 꾸준히 늘어났다. 제8공군이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의 항공기 조립공장과 슈바인푸르트Schweinfurt의 베어링 공장을 공습한 8월 17일에 손실은 최고조에 이르러다. 미군은 두 도시를 겨냥한 폭격에 파견된 376대 가운데 60대를 잃었고 이보다 많은 수를 전손 처리했다. 노스아메리칸NorthAmerican사의 P-51B 머스탱이 1943년 12월에 도착하자 위기가 해소되었다. 롤스로이스 멀린 엔진을 동력원으로 하고 340리터 보조 연료탱크를 장비한 머스탱의 항속거리는 1,600킬로미터에 달해 엠덴Emden, 킬Kiel, 브레멘Bremen까지 폭격기를 호위할 수 있었다, 1944년 5월에 도착한 물방울 모양 캐노피를 장비한 P-51D형은 날개가 강화된 성능 개선 모델이었다. 이례적으로 많은 연료를 탑재할 수 있었고 보조 연료탱크까지 갖춘 D형의 항속거리는 2,400킬로미터여서 독일 내 어떤 목표물까지든 호위 비행이 가능했다. 148)


1944년 1월에 미군은 개선된 폭격기 지원 릴레이 시스템을 도입해 전쟁이 끝날 때까지 표준으로 유지했다. 이 시스템에서는 전투기가 사전에 지정된 폭격기와 합류하는 지점까지 비행한 다음 다른 부대와 교대할 때까지 비행하는 대신 1개 전투비행단이 폭격기 이동 경로에 있는 한 지역 전체를 맡아 폭격기 편대가 통과하는 동안 해당 지역을 초계했다. 머스탱이 도착하자 폭격기 편대 구성의 또 다른 전술적 변화가 촉진되었다. 폭격기 대형은 12기로 구성된 3개 비행대로 줄었다. 선도 비행대는 중앙에, 2개 후속 비행대는 그 위와 아래에서 대형을 형성했다. 전반적 전력은 3분의 1이 줄었으나 새 대형이 차지한 공간은 이전 대형보다 17퍼센트 더 늘었다. 이로 인해 조종사들의 긴장이 줄고 상공의 머스탱들이 엄호를 제공하기가 더 쉬워졌다. 머스탱은 영국 본토 방공전에서 Me 109가 그랬듯이 폭격기 편대의 근접 엄호뿐만 아니라 적을 수색해 격멸하는 역할을 맡은 전투 초계 활동도 했다. 149)


40 항공모함 : 태평양전쟁 승리의 열쇠


항공모함은 1차 세계대전에서 사용되었던 수상기모함의 후예다. 앞뒤가 훤히 뚫린 비행 갑판을 이용해 항해 중에 비행기를 발진시킬 수 있었던 진정한 의미의 첫 항공모함은 영국 해군이 수상기모함을 개조해 만든 HMS 아거스Argus함으로 1918년 10월에 취역했다. 전후 몇 년 동안 가장 강력한 태평양의 해상세력인 미국과 일본이 영국을 따라 항공모함 건함 경쟁에 뛰어들었다. 1941년 봄에는 미국과 일본 해군이 보유한 항공모함 수에 격차가 생겼다. 일본군은 미 해군의 4척에 비해 10척이라는 결정적 우위를 누렸다. 하지만 전함을 10척씩 보유한 미국과 일본 해군은 아직 전함이 해양 패권을 결정지을 무기라고 보았고 전함에 결정적 역할을 맡길 계획이었다. 진주만 기습은 이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12월 7일 오전 07시 55분, 일본군은 완벽한 기습을 달성했다.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비행기들은 진주만에 정박해 있던 미군 전함 8척을 격침하거나 행동 불능으로 만들었고 지상에서 비행기 300대를 격파했다. 150)


항공모함의 유명한 ‘선데이 펀치Sunday Punch’(강력한 타격력―옮긴이)는 탑재한 전투기 36기, 급강하폭격기 36기, 뇌격기 18기의 몫이었다. 표준 전투기는 커다란 덩치의 맷집이 좋은 F6F 헬캣Hellcat으로 일본 전투기보다 성능이 한 수 위였다. 급강하폭격기는 중무장한 복좌식의 커티스SB2C 헬다이버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가장 많이 운용한 급강하폭격기였다. 뇌격기는 뛰어난 설계의 튼튼한 TBF 어벤저Avenger였다. 이 3종은 함께 운용되며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다. 항공모함은 첨단 장비들로 가득 차 있었다. 대공, 대수상 수색 레이더와 사격통제 레이더가 있었고, 평면위치표시기plan position indicator(PPI)로 함선들의 항적을 확인하고 다수의 항공모함으로 구성된 부대가 밤이나 악천후에도 고속으로 항진하며 대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피아식별장치IFF로는 적 함선이나 비행기를 식별했다. 태평양함대의 주력을 차지한 에식스Essex급 항공모함 중 전쟁에서 손실된 배는 한 척도 없었다. 152-3)


41 암호 해독 : 제2차 세계대전 최고의 기술 승리


영국 암호 해독자들이 원래 이용한 무기는 봄베Bombe라고 알려진 전기 기계식 컴퓨터로 앨런 튜링이 상당 부분을 설계했다. 이 기계는 에니그마의 전기회로와 짝이 맞춰져 있었다. 여기서 독일군이 저지른 부주의가 끼어들었다. 송신국은 수신국에 자신의 에니그마가 어떤 방식으로 설정되어 송신하는지를 알려줘야 했기 때문에 송신국 운용 요원은 보내는 전문마다 같은 글자가 반복된 문자열을 앞에 첨부했다. 훈련받은 수학자가 이렇게 정해진 패턴을 접한다면 전문을 해독할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1941년에 독일은 모스부호가 아닌 텔레프린터teleprinter(전기신호를 자동으로 문자로 변환해 인쇄하거나 천공 테이프에 기록하는 기계―옮긴이) 전문 송신 방법을 도입했다. 로터가 12개 달린 극도로 복잡한 로렌츠Lorenz 암호기는 전문을 암ㆍ복호화해 천공 테이프의 도움을 받아 1초에 25개의 문자를 송신했다. 에니그마보다 보안이 강화된 로렌츠를 빠르게 해독하는 것은 봄베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 155-6)


1943년 5월, 북아프리카에서 로렌츠 암호기 2개를 노획하면서 100개에 가까운 밸브가 달린 반전자식 기계를 제작했다. 얼마 후 영국 우정청British General Post Office(GPO) 연구부의 맥스 뉴먼과 T. H. 플라워스가 만든 더 강력한 콜로서스 기계가 개발되었다. 전자식 릴레이 대신 밸브 1,500개가 달린 이 기계는 1944년 초부터 피시 암호를 해독하기 시작했다. 우정청 팀은 콜로서스의 더 강력한 버전인 콜로서스 Ⅱ를 3개월 안에 만들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들은 블레츨리 파크에 있는 한 건물에서 이를 제작하는 데 성공했다. 밸브 2,400개를 갖춘 콜로서스 Ⅱ는 마찰 기어로 움직이는 천공 테이프를 장착했는데 광전식 판독기로 읽히는 이 테이프는 제한적으로 메모리 역할을 했다. 세계 최초의 프로그램이 가능한 전자 디지털 컴퓨터인 콜로서스 Ⅱ는 1944년 6월 1일이라는 아주 중요한 시점에 실전에 투입되었다. 1945년 5월 무렵에 블레츨리 파크에는 10대의 콜로서스가 있었으며 전쟁이 끝난 후 모두 파기되었다. 156-7)


42 원자폭탄 : 세계 멸망을 향한 한 걸음


원자폭탄은 19세기 후반의 앙리 베크렐의 방사능 발견, 피에르 퀴리, 마리 퀴리의 라듐 발견, 빌헬름 뢴트겐의 X선 발견과 1900년에 어니스트 러더퍼드가 개요를 서술한 베타선의 발견에서 기원한다. 헝가리 태생 유대인 물리학자 레오 실라르드LeoSzilard는 1934년에 특정 원자핵에 중성자neutron로 알려진 입자를 쏘면 이 원자를 쪼갤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쪼개진 원자는 더 많은 중성자를 방출하며 더 많은 원자핵을 쪼개게 되고, 이 과정이 반복되면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방사하는 연쇄반응이 일어나게 된다. 과학자들은 이 에너지를 이용해 가공할 위력을 가진 폭탄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국에서는 오토 프리슈Otto Frisch와 루돌프 파이어럴스Rudolf Peierls가 폭탄 제조에 필요한 즉시 폭발성 연쇄반응을 생성하려면 우라늄의 드문 변종(우라늄 235)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동안 프랑스에서 연구하던 과학자들은 인공원소인 플루토늄으로도 폭탄을 만들 수 있음을 발견했다. 158)


Chapter 8. 냉전과 그 후

43 탄도미사일 : 핵 억지력의 주축


미 해군의 첫 잠수함 발사 미사일 계획은 레귤러스Regulus와 주피터Jupiter 프로젝트라는 실패작으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순항 미사일을 전략 미사일로 사용하려고 했으나 순전히 주피터와 레귤러스 미사일의 무게만으로도, 무엇보다 잠수함이 미사일을 발사하기 위해 부상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비실용적인 시스템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잠수함은 부상했을 때 제일 취약한데, 연료를 채운 미사일이 갑판에 있으면 더더욱 취약해졌다. 폴라리스와 그 후계자는 순항 미사일보다 매력적이었다. 미 해군은 1956년에 폴라리스 프로그램을 도입했고, 1960년 7월에 첫 SSBN(탄도미사일 원자력 잠수함)인 USS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이 잠항 상태에서 처음으로 미사일을 발사했다. 조지 워싱턴이 탑재한 폴라리스 미사일 16발은 개별 발사 튜브에 수납된 채 정비와 조정을 거쳤고, 관성항법장치로 정확하게 지정된 위치의 수면 아래에서 발사되었다. 목표물은 잠수함과 미사일에 있는 소형 컴퓨터로 설정되었다. 163)


폴라리스의 첫 모델인 A-1은 사정거리가 1,850킬로미터였고 600킬로그램짜리 W47 단일 핵탄두를 탑재했다. 1962년 5월, 도미닉 작전OperationDominic에서 기폭 가능한 (폭발력을 줄인)W47 탄두를 탑재한 폴라리스 미사일이 태평양에서 시험 발사되었다. 미국이 실제 탄두를 실은 잠수함 탑재 탄도미사일을 시험 발사한 경우는 이번이 유일했다. A-1은 유럽 주둔 미군이 전개한 지상 발사 중거리탄도탄 시스템을 보충할 전략자산으로 기획되었다. 중거리탄도탄 시스템은 소련 내륙의 목표물을 공격하기에는 사정거리가 부족했으므로 미국은 기존 핵억지력의 부족한 측면을 보강하기 위해 폴라리스 미사일을 개발했다. 폴라리스 미사일의 다음 버전은 사정거리가 더 길었다. A-3형은 단일 목표물에 넓게 분산할 수 있는 다탄두 독립목표 재돌입 탄도탄(MIRV)이었다. 포세이돈 미사일로 진화한 B-3형은 소련의 대탄도미사일 방어망(ABM)을 압도하기 위한 고속 강화 재돌입 탄두를 14개까지 탑재했다. 163-4)


44 헬리콥터 : 현대 전장에 가장 잘 적응한 병기


1941년에 세계 최초로 헬리콥터를 군사작전에 사용한 나라는 독일이다. 전쟁 전에 수송과 여객용 비행기로 설계된 포케-아흐겔리스Focke-Achgelis Fa 223 드라헤Drache(용)와 이보다 작은 플레트너Flettner Fl.282 헬리콥터가 독일이 운용한 사상 첫 군사용 헬리콥터다. 1950년대 초중반에 베트남과 알제리에서 식민전쟁을 벌인 프랑스군이 헬리콥터 활용의 선구자가 되었다. 알제리 전쟁에서는 기수 장착 고정식 기관총, 로켓 포드와 유선유도 미사일로 무장한 시코르스키 S-55와 쉬드 알루엣SudAluette이 험지 상공을 비행하며 민족주의자 게릴라들과 싸웠다. 베트남 전쟁은 자연환경상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전투 헬리콥터 전술의 시험대가 되었다. 1966년경 대 게릴라 전투counter-insurgency warfare용으로 사용될 헬리콥터에 대한 특별한 소요가 제기되었고 그 결과 벨Bell 휴이Huey UH-1 다목적 수송 헬리콥터 약 1,500대가 베트남 전역에 등장했다. 이 중 상당수는 무장 탑재가 가능하도록 신속히 개조되었다. 166)


처음부터 공격용으로 설계된 헬리콥터인 벨 AH-1 휴이 코브라HueyCobra는 1967년 9월에 베트남에 도착했다. 휴이 코브라는 베트남전의 사역마 보잉-버톨Boeing-VertolCH-47A 치눅Chinook 중형 수송 헬리콥터를 호위할 수 있는 빠르고 무장이 충실한 헬리콥터에 대한 미 육군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진행된 긴급 개발 프로그램의 결과물이었다. 공격력이 강하고 매우 튼튼한 코브라 헬리콥터는 베트남과 캄보디아에서 작전시간 100만 시간을 기록하며 적 진지와 장갑차량을 공격하고 비무장 수송 헬리콥터를 호위했다. 코브라 헬리콥터의 탑승원들은 나무, 언덕이나 건물 같은 자연적 위장망을 이용해 숨어 있다가 정찰하거나 공격할 때만 ‘갑자기 튀어나오는’ ‘전술지형비행nap of the earth’ 기법을 다듬어나갔다. 헬리콥터는 속도와 공간 측면에서 고정익기와 아주 다른 환경에서 작전했다. 이로 인해 공대공 요격에서는 어느 정도 안전할 수 있었으나 지상에서 발사하는 대공포화와 로켓 공격에는 취약했다. 167)


아파치 헬리콥터는 고강도 전투 조건을 견디고 악천후에서 비행하며 주야를 막론하고 작전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아파치의 핵심 특징 중 하나는 헬멧 탑재 통합 디스플레이 조준 시스템(IHADSS)이다. 조종사 혹은 사수의 헬멧과 30밀리미터(1.2인치)M230 체인건이 연동되어 있어 머리의 움직임에 따라 체인건이 목표물의 위치를 수정ㆍ추적한다. 아파치의 주 착륙장치 사이에 M230 체인건이 있었고 작전에 맞게 무장을 변환할 수 있었는데 주로 AGM-114 헬파이어Hellfire 대전차 미사일과 하이드라Hydra 70 다목적 무유도 70밀리미터(2.75인치) 로켓탄을 함께 탑재했다. 기수 조준기에 탑재한 적외선 전방주시장치(FLIR) 시스템 덕에 아파치는 수백 마일 깊숙이 적진으로 들어가 적을 타격할 수 있었다. 이 능력은 미 공군과 공유한 극초단파UHF 무전 시스템으로 더욱 향상되었는데 이로 인해 A-10, 해리어와 같은 표적 지정기target designator로 자주 활동한 고정익기와 협동 공격을 하기가 수월해졌다. 168)


45 돌격소총 : 전후 세계의 소화기 중 가장 중요한 품목


돌격소총은 단발과 연발을 선택해 사격할 수 있는 소총 혹은 카빈소총carbine으로, 발사 탄약의 총구 에너지와 크기가 권총탄과 전통적으로 위력이 더 강한 소총탄의 중간이다. 이런 종류의 소총은 지원 역할을 맡아 지속 사격에 특화된 경기관총과 소총탄이 아닌 권총탄을 발사하는 기관단총의 중간에 속한다. 널리 실전에 투입된 첫 돌격소총은 독일제 StG44(Sturmgewehr 44, 독일어로 ‘급습’ 혹은 ‘돌격소총’이란 뜻. 1944년부터 배치)이다. 이 소총은 극한의 추위에도 분당 500∼600발의 발사속도를 유지하며 잘 작동했으며 동부전선에서 특히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훨씬 더 대량으로 생산된 드럼 탄창을 단 붉은 군대의 PPS나 PPSh-41 기관단총에 대항하는 것이 StG44의 주된 역할이었다. 가장 유명한 돌격소총인 AK-47(아브토마트 칼라시니코바Avtomat Kalashnikova 모델 1947)은 단발ㆍ연발 선택이 가능한 가스 작동식 돌격소총으로서 발명자인 소련의 무기 설계자 미하일 칼라시니코프의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170-1)


1959년에는 프레스 공법으로 제작한 금속제 총몸과 반동으로 총구가 솟는 현상을 상쇄하기 위한 경사형 소염기를 갖춘 경량 개량형 모델이 도입되었다. 이 모델AKM(Avtomat Kalashnikova Modernizirovanni)은 다른 모델 전체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수량이 생산되었다. 칼라슈니코프에는 1930년대 이래 소련 무기 설계의 가장 좋은 점들이 압축되어 있다. 그가 설계한 총은 단순하고 간편하며 유지 보수가 쉽고 부주의한 취급과 오염을 견디면서도 계속 작동했다. 여기에는 내부를 크롬 도금한 총열과 약실, 가스 피스톤과 가스 실린더가 도움이 되었다. 20세기에 생산된 대부분의 군용 탄약(그리고 사실상 구 소련과 바르샤바조약군의 탄약 전부)에는 염소산칼륨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매우 중요한 특징이다. 사격할 때 화약에 든 염소산칼륨이 부식성 있고 습기를 잘 흡수하는 염화칼슘으로 바뀌어서 영구적 피해를 막으려면 계속 청소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군용장비 부품 다수는 크롬으로 도금되어 있다. 172)


46 제트전투기 : 새로운 전술 혁명을 촉발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몇 달 전, 루프트바페는 유럽 상공에 처음으로 제트전투기를 실전에 도입했다. 메서슈미트Messerschmitt Me 262다. 하지만 제트전투기 대 제트전투기의 공중전은 한국전쟁(1950∼1953)에 와서야 벌어졌다. 더 빨라진 속력과 더 복잡해진 계기류로 인해 세심한 비행기술이 요구된 새로운 전투 조건은 새로운 종류의 조종사를 낳았다. 더욱이 제트전투기가 달성한 속력과 고도는 전면적인 전술 혁명을 촉발했다. 이로써 적기의 꼬리를 잡으려는 도그파이트dogfight는 종언을 고하는 듯했다. 막상 한국전쟁에서 전투를 치러보니 도그파이트의 시대가 끝났다는 선언은 시기상조였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의 중간 시기에 또 한 번 혁명적인 변화가 생겼다. .50구경 브라우닝 기관총은 20밀리미터(0.79인치) 기관포와 공대공미사일로 대체되었다. 미사일 유도 시스템, 전투기 탑재 레이더, 공중 재급유는 베트남 상공을 비행하던 조종사들이 공중전 생존기법과 아울러 숙지해야 할 필수사항이었다. 174)


한국전쟁에서 가장 뛰어난 성능을 보인 전투기는 F-86 세이버F-86 Sabre 전투기였다. 베트남전쟁 최고의 전투기인 F-4 팬텀F-4 Phantom Ⅱ에는 조종사 1명, 레이더 관제사Radar Intercept Officer(RIO)1명이 탑승했다. 팬텀은 아군 공역에 침입한 적기와 교전하는 것이 아닌 적지 상공에서 먹잇감을 찾는 공중우세를 위해 설계된 전투기이다. 팬텀은 강력한 펄스 도플러Pulse Doppler(짧고 강한 펄스 전파를 발신해 반사신호를 도플러 효과를 이용해 분석, 목표물의 속력을 알아내는 레이더―옮긴이) 레이더를 장착하고 스패로Sparrow 미사일과 사이드와인더Sidewinder 미사일 4발로 무장했다. 초기 모델에는 기관포가 없었으나 F-4E형은 20밀리미터(0.79인치) M61 벌컨Vulcan 회전 다총신 기관포를 장비했다. 사이드와인더 미사일은 표적이 된 비행기가 방사하는 적외선을 따라 유도된다. 사이드와인더가 가장 효과적인 상황은 적의 꼬리를 물고 추격할 때였는데, 목표물의 배연기로 유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75)


47 스텔스 : 역사상 가장 비싼 군용기 B-2


독일은 1944년부터 작전에 투입된 7C형 잠수함에 구멍이 난 내층과 매끈한 외층으로 이루어진 합성고무 피복을 씌웠고 그 덕에 U-480은 연합군 소나의 탐지를 피할 수 있었다. 루프트바페 역시 원시적인 스텔스 기술을 시험했다. ‘전익기flying wing, 全翼機’ 형태를 띤 제트기인 호르텐Horten Ho. 229는 1945년 1월에 처음으로 비행했으나 실전에 투입되지는 못했다. 이 비행기의 혁신적인 설계는 전후 미국의 노스럽Northrop사가 만든 8발기인 YB-49에 반영되었고, 그 직계 후손인 B-2 스텔스 폭격기가 1989년 여름에 처음으로 비행했다. 1950년대에 철의 장막 양편의 군용기 설계자들은 레이더 반사 면적Radar Cross-Section(RCS), 즉 레이더에 나타나는 표적의 크기 단위를 줄이는 방법을 개발했다. 1964년, 록히드Lockheed사는 고공에서 작전하며 레이더 탐지를 피할 정도로 속도가 빠른 SR-71 블랙버드Blackbird 정찰기를 만들었다. 1980년대 록웰Rockwell B-1 폭격기에도 스텔스 기술의 여러 양상이 반영되었다. 178-9)


첫 스텔스 비행기는 록히드 F-117 나이트호크 단좌전투기로 1983년 10월에 처음으로 일선에 배치되었다. 다면으로 된 기체는 레이더 신호 반사를 목적으로 설계되었으며 애프터버너afterburner(제트 엔진의 배연을 재가열해 추력을 증대하는 장치―옮긴이) 없는 터보팬 엔진 2개가 동력원이다. 스텔스 설계로 생긴 제약 때문에 나이트호크Night Hawk는 아음속subsonic(마하 0.5∼0.8 정도의 속력―옮긴이)만 낼 수 있었다. 전투기로 분류되었으나 나이트호크는 실제로는 전투폭격기였다. 나이트호크에는 레이더가 탑재되지 않아서 단면적에서 전파 배출이 낮아졌다. 일반적 폭장량은 2,270킬로그램이었고 페이브웨이Paveway 레이저유도폭탄과 관통 폭탄 혹은 통합정밀직격병기Joint Direct Attack Munition(JDAM) 2발과 원거리 투하 유도폭탄 1발로 구성되었다. 제1차 걸프전쟁 동안 나이트호크는 걸프 전역에 있는 미군기 수의 2.5퍼센트에 불과했으나 미 공군의 전략목표 40퍼센트 이상을 타격했다. 179-80)


노스럽 그러먼 B-2 스피릿B-2 Spirit은 적 방공망을 깊숙이 뚫고 들어가 통상무기와 핵무기를 투하 발사하기 위해 설계된 스텔스 중폭격기다. B-2는 음향, 적외선, 시각, 레이더 피탐지 특성이 줄어들어 스텔스성을 얻었다. 애프터버너 없는 터보팬 엔진 4개는 배연 피탐지 특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날개에 푹 파묻혀 있다. 레이더파를 흡수하는 복합 소재로 만들어졌으며 전익기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리딩 에지leading edge(날개 앞부분 끝단―옮긴이)가 줄어든 B-2의 윤곽선을 레이더로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B-2는 1997년 1월에 작전 능력을 획득해 2년 뒤에 코소보 전쟁에서 처음으로 실전에 나와 분쟁 첫 두 달 동안 선정된 세르비아군 목표물의 3분의 1을 폭격했다. B-2는 이 임무를 수행하면서 미주리주 화이트먼Whiteman 기지까지 왕복 비행했다. B-2는 항구적 자유 작전에서 공중급유 지원을 받아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목표물 폭격 임무를 달성하면서 가장 긴 비행거리를 기록한 작전 하나를 수행했다. 180)


48 크루즈 미사일 : 자체의 힘으로 날아가는 미사일


1947년 5월, 미 공군은 B-29, B-36 피스메이커Peacemaker와 B-52 스트래토포트리스Stratofortress에서 발사할 수 있는 초음속 지대공 미사일 제작 계약을 벨 항공기 회사Bell Aircraft Company와 체결했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GAM-63 래스컬Rascal 미사일이었다. 래스컬은 이 미사일의 유도 시스템인 레이더RAdar 스캐닝SCAnning 링크Link의 약어이다. 래스컬은 1957년에야 미 공군이 도입해 일선에 배치했다. 이 미사일은 액체연료 로켓 시스템으로 추진되었고 표적의 위치가 미리 프로그램된 관성 유도 시스템을 사용했다. 래스컬은 1961년에 하운드 독HoundDog 미사일로 대체되었다. 이 미사일에는 최신 TERCOM(지형대조항법terrain–contour matching) 유도 시스템이 실렸다. 이 시스템은 미사일에 비행경로의 상세한 지도를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운드 독 미사일은 지나가는 지상의 모습을 이 지도와 계속 대조해 가며 필요하다면 진로를 수정하며 사전 지정된 경로를 유지했다. 182-3)


토마호크는 1970년대에 개발된 장거리, 전천후 아음속 미사일로 현재 미국과 영국 해군 수상 함정 및 잠수함에 탑재되어 있다. 토마호크는 로켓 보조를 받아 발사된 다음 터보팬 엔진으로 동력을 전환한다. 토마호크의 엔진은 거의 열을 발산하지 않아서 적외선 탐지기로 발견하기가 어렵다. 토마호크는 목표물까지 최대 항속거리 1,126킬로미터를 초저공에서 고아음속으로 ‘순항’하며 임무에 따라 맞춰진 여러 개의 유도 시스템으로 회피 경로를 따라 조종된다. 토마호크 지상 공격 미사일(TLAM)은 TV 카메라를 장착하고 목표 주변을 배회할 수 있으며, 지휘관들은 목표물에 입힌 피해 정도를 평가하고 필요한 경우 다른 목표로 미사일을 보낼 수 있다. 비행하는 동안 토마호크는 메모리에 있는 GPS(전 지구 위치파악 위성global positioning satelite) 좌표나 다른 어떤 GPS 좌표로 사전에 지정한 목표 15개 중 어느 것으로든 다시 프로그램해서 목표물을 바꿀 수 있다. 183-4)


49 무인 공중전 : 미래의 군용기 UCAV


1980년대에 미 중앙정보국CIA과 국방부는 처음에 ‘냇Gnat’이라고 부른 정찰용 드론을 시험하기 시작했다. 1994년 7월, 제너럴 어토믹스 에어로노티컬 시스템사가 프레데터Predator UAV(unmanned aerial vehicles)의 제작 계약자로 선정되었다. 1995년 봄에는 유고슬라비아에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발칸 반도에 처음으로 프레데터 UAV를 배치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작전이 개시된 2001년경에 미 공군은 프레데터 60기를 획득했다. 그중 20기를 작전 중에 상실했는데 대부분 악천후가 원인이었다. 그 후 제빙 시스템과 항공 전자 장비를 개량했다. 발칸 작전 이후 프레데터는 헬파이어 미사일을 발사하는 공격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개량되었다. 프레데터가 정숙성이 뛰어나고 헬파이어가 초음속으로 비행하는 미사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주 강력한 결합이었다. 처음에는 프레데터를 운용기지 근처에 세워둔 밴에서 조종했으나 2000년경 통신 시스템 개선으로 아주 먼 거리에서도 조종할 수 있게 되었다. 185)


MQ-9 리퍼는 고공에서 장시간 체공하며 정찰 임무를 수행하도록 설계된 첫 헌터 킬러hunter-killer UCAV다. 탑재한 950마력 터보프롭 엔진은 프레데터의 엔진보다 출력이 강하며 이로 인해 열다섯 배 더 무거운 중량을 탑재할 수 있고 순항속력은 세 배 빨라졌다. 완전 전비중량으로 비행할 때 리퍼는 14시간까지 체공할 수 있으며 탑재 무장을 줄이고 증가 연료탱크를 장착하면 42시간까지 체공시간을 늘릴 수 있다. 리퍼에는 헬파이어 미사일, 225킬로그램 레이저 유도 폭탄과 통합정밀직격병기JDAM를 포함한 여러 종류의 무장을 탑재할 수 있다. 리퍼에 탑재된 유도장비는 ‘멍텅구리’ 무유도 폭탄을 전천후 ‘스마트’ 폭탄으로 바꿀 수 있다. 리퍼 운용원은 열 카메라를 비롯한 여러 센서를 이용해 목표물을 수색하며 지형을 관측할 수 있다. 리퍼에 탑재된 카메라는 3.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자동차 번호판을 읽을 수 있다. 운용원이 내린 명령은 위성 링크를 거쳐 몇 분의 1초 만에 리퍼에 전달된다. 186)


50 사이버 전쟁 : 전쟁의 다섯 번째 영역


최초의 사이버 전쟁으로 자주 인용되는 사건은 2001년 4월에 미군 EP-3 아리에스 ⅡAries II 스파이 비행기가 남중국해에서 중국 전투기와 충돌한 다음 벌어졌다. 사건 후 몇 주 동안 중국과 미국에 있는 수천 개의 웹사이트가 변조되거나 해커의 공격을 받았다. 사이버 전쟁은 2006년에 이스라엘이 시아파 무장단체인 헤즈볼라를 처치하기 위해 레바논을 침공했을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스라엘 국방군IDF 정보부는 허위 정보 전술을 이용해 헤즈볼라의 지원을 받는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국을 무력화하고 헤즈볼라 웹사이트에 서비스 거부 공격을 벌였다. 2007년에는 논란거리가 된 전쟁기념물인 탈린의 청동병사Bronze Soldier of Tallinn를 이전한 후 에스토니아가 러시아로부터 사이버 공격을 받았다. 에스토니아 정부 부처, 은행과 언론매체가 주요 공격목표였다. 2008년 8월, 단기간 지속된 남오세티야 전쟁에서 러시아군은 공습 및 병력 이동과 동시에 구 소련 국가인 조지아에 사이버 공격을 개시했다. 189)


안전하지 않은 인터넷 연결이 점점 많아지는 현상으로 인해 e-공격이 들어올 경로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Malicious software(악의적 소프트웨어)’의 약어인 멀웨어Malware는 목표 컴퓨터 시스템을 파괴 또는 방해하거나 정보 수집을 위해 침투하도록 설계된 프로그램의 일종이다. 스턱스넷Stuxnet 웜은 특정 산업 시스템을 감시하고 전복하도록 프로그래밍된 복잡한 멀웨어로, 산탄총이라기보다 저격소총처럼 작동한다. 2009∼2010년에 스턱스넷의 주된 목표는 이란의 나탄즈Natanz에 있는 우라늄 농축 공장이었다. 표면적으로는 민간 에너지용 프로그램이었지만 결국 핵무기 개발의 전주곡이 아니냐고 의심받았다. 감염된 메모리 스틱을 통해 침투한 것으로 추정되는 스턱스넷은 나탄즈 공장의 원심분리기 속도를 바꿨고, 결국 원심분리기 약 1, 000대가 철거 후 제거되었다. 스턱스넷은 이란 핵 개발을 2, 3년 후퇴시키는 효과를 거뒀다. 이 공격의 배후에는 미국의 도움을 받은 이스라엘 정보부가 있었다.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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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정의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 '제노사이드'와 '인도에 반하는 죄'의 기원
필립 샌즈 지음, 정철승.황문주 옮김 / 더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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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_23 


"1914년 9월부터 1944년 7월 사이 리비우를 통치하는 세력이 여덟 번 바뀌었다.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갈리치아 로드메리아 왕국과 크라쿠프 대공국 및 아우슈비츠와 차토르 공국'이라는 긴 이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바로 그 '아우슈비츠'이다). 이 도시는 오스트리아에서 러시아로, 그리고 다시 오스트리아로 넘어갔다가 서부 우크라이나에서 다시 폴란드에 속하게 되었다. 그후 독일로 넘어가고 소비에트연방을 거쳐 마침내 우크라이나로 넘어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레온 할아버지가 어릴 때 걸어 다녔던 갈리치아 왕국의 도로는 뉘른베르크 재판의 마지막 날, 한스 프랑크가 600호 법정에 들어서게 된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유대인 및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사용했다. 하지만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유대인 사회는 완전히 소멸되고 폴란드인들도 사라졌다. 리비우의 그 도로들은 20세기 혼란스러웠던 유럽의 축소판이며 문화를 갈기갈기 찢어놓은 유혈 분쟁의 중심지였다."(30)


Part I 레온(LEON) _37 


"1914년, 비엔나에 도착한 레온의 가족은 '동유대인Ostjuden(동유럽 출신 유대인)의 이민'으로 알려진, 갈리치아에서 비엔나로 이주한 수만 명의 이민자들 중 하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문에 엄청난 수의 유대인 난민이 새로운 집을 찾아 비엔나로 왔던 것이다. 요제프 로트는 북부 기차역을 '그들 모두가 도착하는 곳'이라고 하고, 그 우뚝 솟은 홀은 '고향의 냄새'로 가득 찼다고 썼다. 비엔나의 새로운 거주자들은 레오폴드슈타트와 브리기테나우 등의 유대인 구역으로 이동하였다." "인플레이션이 만연하고 삶이 고단한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많은 수의 난민이 동쪽으로부터 이주해 왔다. 게다가 반유대주의의 확산과 함께 국수주의자들이 반이민자 감정을 부추기는 형국으로 발전하자 정치권은 정부가 제대로 돌아가도록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1918년 8월에 결성된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은 상대 당에 합병되었다. 그 당의 지도자는 아돌프 히틀러라는, 카리스마 있는 오스트리아인이었다."(56-9)


"1933년 1월 말,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아돌프 히틀러를 독일의 총리로 임명한다. 독일 국회의사당인 라이히츠탁은 불에 타 사라지고 독일연방 선거에서 나치가 더 많은 표를 획득했다." "4개월이 지난 1933년 5월 13일 토요일, 새로운 독일 정부의 대표가 처음으로 오스트리아를 방문했다. 3발기인 독일 정부 비행기가 레온의 상점에서 멀지 않은 아스페른 비행장에 내렸다. 여기에는 새롭게 임명된 바이에른 주 법무장관이며 히틀러의 전 법률고문이자 친구인 한스 프랑크 박사가 이끄는 일곱 명의 나치 장관들이 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오스트리아 총리인 엥겔베르트 돌푸스가 오스트리아 나치 집단을 비합법화 한다는 조치들을 발표하였다. 그 때문에 돌푸스는 프랑크의 방문 1년 남짓 후인 1934년 7월, 오스트리아 나치 집단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들의 리더는 변호사인 오토 폰 베히터였다. 그는 10년 후 렘베르크의 나치 총독이 되었으며, 무장친위대 갈리치아 사단을 창설한 인물이다."(64-6)


"1938년 3월 12일 아침, 독일군이 오스트리아를 침공해 비엔나로 행진하면서 엄청난 규모의 군중들로부터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쿠데타에 따른 오스트리아 합병Anschluss은 독일로부터의 오스트리아 독립에 대한 국민투표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비엔나에 도착한 히틀러의 옆에는 새롭게 임명된 비엔나 총독, 아르투어 자잉스잉크바르트가 있었다. 그들의 뒤에는 망명지 독일로부터 막 돌아온 오토 폰 베히터가 있었다. 며칠 만에 국민투표로 합병이 비준되었고, 오스트리아 전역에 독일법이 적용되었다. 나치에 반대하는 151명의 오스트리아인이 비엔나에서 독일 뮌헨의 다하우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유대인으로 하여금 강제로 도로바닥을 닦도록 학대하였으며, 대학 입학과 전문직 진출이 금지되었다. 몇 주 지나지 않아 유대인의 자산과 부동산, 사업 등록을 의무화하였다. 그리고 이는 레온과 매형인 막스가 운영하는 주류상점의 종말을 뜻했다."(71-2)


"나는 1944년 8월, 파리가 미군에 의해 자유를 되찾기 전 어렵던 시기에 (비엔나를 탈출한) 레온이 어떻게 살았는지 거의 알아내지 못했다. 당시 프랑스 거주 유대인 연합UGIF 소식지인 〈뷜땅〉Bulletin은 명령위반에 따른 위험을 경고하는 내용과 강제 점령한 파리에서의 삶을 찍은 사진들을 게재함으로써 나치 규제의 플랫폼 역할을 하였다. 초기의 한 명령은 오후 8시부터 아침 6시까지 유대인들이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이다(1942년 2월). 한 달 뒤 유대인의 채용을 금지하는 새로운 규정이 발표되었다. 1942년 5월부터 모든 유대인들은 가슴 왼쪽에 유대교의 상징인 다윗의 별을 달아야 했다(레온이 일했던 품격 있는 19세기 빌딩의 UGIF 본부 사무실에서 제공). 7월에는 유대인들이 극장이나 다른 공연장에 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10월부터 유대인들은 매일 한 시간씩만 쇼핑이 가능하고 전화 소유가 금지되었으며, 지하철의 마지막 칸에만 탑승할 수 있었다. 1943년 8월에는 특별 신분증이 발급되었다."(98-9)


Part II 라우터파하트(LAUTERPACHT) _111 


"라우터파하트의 삶은 렘베르크에서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 간의 유혈충돌을 촉발시킨 스물세 살의 '붉은 왕자' 빌헬름 대공이 비밀리에 내린 결정 때문에 완전히 달라졌다. 레온이 비엔나로 떠난 지 5년이 지난 1918년 11월에 빌헬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대 중 폴란드 부대를 렘베르크에서 축출시키고, 그들을 대신하여 우크라이나 사단 중 두 연대를 배치하였다. 11월 1일, 우크라이나군은 리비우의 지배권을 획득하고 이곳을 새로운 나라인 서부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수도로 선포한다.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민족 간의 심각한 전투가 이어졌고, 유대인은 그 사이에 끼어 패자를 선택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11월 11일, 폴란드가 독립을 선언한 날 독일과 연합국 간에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에도 갈등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1주일 만에 우크라이나인들이 폴란드인들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였으며 종전협정이 이루어졌다. 리비우는 로보프로 바뀌면서 약탈과 살인이 만연했다."(125-6)


"그동안 굳건했던 권위가 무너지면서 새로운 폴란드 또는 우크라이나 국가가 가시화되자 폭력적인 민족주의가 촉발되었다. 유대인들은 분열되어 여러 상이한 반응을 보였다. 집단 정체성과 자치권에 대한 여러 이슈들은 민족주의의 발생과 제1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국가의 부상과 함께 법이 정치무대의 중심에 자리잡게 만들었다. 어떻게 하면 법으로 소수민족을 보호할 수 있을까? 어떤 언어를 써야 하는가? 특별한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오늘날에도 전 세계에서 제기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대한 지침을 제공할 만한 국제 규범이 없었다. 오래되었든 신생이든 간에 각각의 국가는 영토 안에서 사는 사람들을 원하는 대로 취급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다수가 소수를 대하는 법에 대해서 국제법은 몇 가지 제한을 둘 뿐 개인은 권리가 없었다. 라우터파하트의 지적인 성장은 이 같은 중요한 시기와 맞물려 이루어졌다."(127-8)


"전후 협상 과정에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폴란드의 국제연맹 회원 자격을 '소수민족과 약소국민을 평등하게 취급한다'는 약속과 연계시키는 특별 협정을 제안했다. 하지만 미국 흑인, 남부 아일랜드인, 플랑드르 지방 사람들, 카탈로니아인 등 다른 집단에게도 비슷한 권리가 주어질 것을 우려하여 영국은 그 제안에 반대했다. 영국은 국가가 원하는 대로 국민을 취급할 권리인 주권의 침해 또는 국제기구에 의한 감시를 반대하였다. 영국은 더욱 많은 '불의와 압제'가 벌어지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입장을 고수했다. 새로운 폴란드 정부 역시 이것을 내정에 대한 부당한 간섭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1919년 6월에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 제93조는 폴란드로 하여금 민족, 언어 또는 종교적으로 소수민족이라고 여겨지는 '주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두 번째 조약에 서명하도록 요구했다. 권리는 모두가 아닌 일부 집단에게 주어졌고, 전쟁에서 승리한 국가들은 자국의 소수민족에 대해서는 그와 같은 의무를 부담하지 않았다."(131-2)


"1919년 라우터파하트는 프로이트, 클림트, 말러의 도시인 비엔나의 서부역에 도착했다. 그곳은 제국의 종말로 인한 트라우마와 경제 불황을 겪고 있었다. 라우터파하트는 사회민주주의자 시장이 이끄는 도시, 갈리치아에서 넘어온 난민이 넘쳐나고 인플레이션과 가난이 만연한 '붉은 빈'에 도착했다. 러시아 혁명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안을,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희망을 선사했다. 오스트리아는 무릎을 꿇었고 제국은 해체되었다. 예속과 굴욕의 격앙된 민족주의 감정이 느껴졌다. 라우터파하트와 레온 같은 젊은 동유럽 유대인이 갈리치아로부터 유입되면서 만만한 표적이 되었다." "라우터파하트는 법과대학에 등록했는데, 그의 스승이 바로 저명한 법철학자 한스 켈젠이다. 그는 다른 유럽 국가들이 모델로 삼았던 오스트리아의 혁신적인 새 헌법 초안 작성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이 헌법은 시민의 요청에 따라 헌법을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독립적인 헌법재판소 제도의 효시가 되었다."(135-6)


"1921년 켈젠은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라우터파하트는 개별 시민은 양도할 수 없는 헌법상의 권리를 가지며, 이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법원에 재판을 신청할 수 있다는, 유럽의 새로운 사상을 직접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폴란드에서처럼 소수민족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과는 다른 모델이다. 라우터파하트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 두 가지 개념의 핵심적인 차이점은 집단과 개인, 그리고 국가적 강제력과 국제적 강제력이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법률질서의 중심에 개인이 놓여 있었다. 반대로 법은 군주를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이 주를 이룬, 국제법의 동떨어진 보수적인 세계에서는 개인이 국가를 상대로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생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베르사유 조약 제93조와 나의 외할아버지 레온이 1938년 폴란드 국적을 잃게 만든 폴란드 소수민족보호조약은 일부 국가의 일부 소수민족을 보호했는지는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개인은 보호하지 못했다."(136-7)


"헤이그에 위치한 최초의 상설 국제사법재판소는 국가 간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열망하며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1922년에 설립되었다. 국제사법재판소는 국제법의 여러 법원法源 중에서 조약과 문명국가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일반원칙인 관습법을 주로 적용했다. 그런데, 그런 관습법은 보다 잘 완비된 국내법 체계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라우터파하트는 국내법과 국제법 사이의 이러한 연계성은 소위 '주권의 항구성과 불가양도성'을 한층 더 제한할 수 있는 원칙을 발전시킬 '혁명적인' 가능성을 제공할 것임을 깨달았다. 그의 삶을 통해 형성된 실용적이고 본능적인 성향과 렘베르크에서 받은 법학교육으로 인해 라우터파하트는 주권을 제한할 가능성을 믿었다. 이것은 작가나 평화주의자의 열망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의를 실현하고 국제 진보에 기여하겠다는 철저하고 굳게 뿌리박힌 사상에 의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덜 소외되고 덜 엘리트적이며 외부적인 영향에 보다 더 개방적인 국제법을 원했다."(144)


"1945년 7월, 국제 형사법원 창설 과정에서 라우터파하트는 '침략행위'라는 단어 대신 '전쟁범죄'라는 용어를 쓰는 것을 제안하며 전쟁법 위반은 전쟁범죄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조언했다. 또한 러시아와 미국이 이견을 보이고 있는, 아직 밝히지는 않았으나 그가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는 민간인에 대한 잔학행위를 해결하기 위해 국제법에 새로운 용어를 도입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갔다. 개별 민간인에 대한 잔학행위를 '인도人道에 반反하는 죄罪'라고 칭하는 것이 어떨까?" "이 같은 용어는 국제법의 보호 범위를 확장할 것이었다. 이 용어의 사용으로 전쟁 시작 전에 독일 국민 중 유대인과 다른 소수민족에 대해 독일이 자행한 행위 또한 재판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에는 1938년 11월 레온이 독일제국에서 추방당한 일과 1939년 9월 이전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자행된 조치 등이 포함된다. 더 이상 국가는 자국민들을 마음대로 취급할 수 없게 된 것이다."(185-6)


Part III 노리치의 미스 틸니(MISS TILNEY OF NORWICH) _191 


"〈유대인을 먼저.〉 미스 틸니는 서리 채플의 목사 데이비드 팬톤이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는 〈새벽〉에 쓴 글에 큰 영향을 받아 그와 가깝게 지냈다. 그녀는 '유대인과의 전투를 통해 나는 주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제목의 히틀러 연설에 대한 〈타임스〉의 1933년 7월 25일자 기사(크리클우드의 라우터파하트가 읽었을 가능성이 높은 기사) 이후 팬톤이 쓴 글을 본 것이 틀림없다. 팬톤은 히틀러의 반유대주의적 분노를 비이성적이며 제정신이 아닌, 전혀 종교에 기반하지 않은 순전히 민족적, 광신적 증오라고 비판하였다. 팬톤은 히틀러의 시각은 개별 유대인의 성격이나 행동과는 완전히 별개의 것이라고 썼다. 이 글은 튀니지 제르바 섬에 살고 있는 미스 틸니에게 자극을 주었을 것이다. 1년 후인 1934년 봄, 그녀는 프랑스의 유대인들 사이에서 일하는 데 헌신하기 위해 프랑스로 옮겨왔다." "1939년 1월, 레온이 파리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여전히 침례교 교회에서 (유대인 난민을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203-4)


"7월 15일, 〈신뢰와 노역〉은 미스 틸니가 파리에서 일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1주일 후, 위험을 감수하고 그녀는 어린 아이를 데려오기 위해 비엔나의 서부역으로 갔다. 그녀는 첫 돌이 막 지난 갓난아기(나의 어머니)를 자신의 손에 믿고 맡기는 리타를 만났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리타와 함께 레온의 누나인 로라도 11살 된 헤르타를 데리고 역으로 나왔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헤르타도 미스 틸니와 함께 파리로 갈 예정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로라는 헤르타를 보내지 않기로 했다. 헤어지는 고통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결정은 이해가 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2년 후인 1941년 10월, 어린 헤르타는 어머니와 함께 리츠만슈타트에 있는 게토로 강제이주되었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헤르타와 로라는 학살당했다. 미스 틸니는 아이 하나만 데리고 기차를 타고 파리로 이동했다. 파리 동부역에서 그녀는 레온을 만났다. 그녀는 이름과 주소를 종이쪽지에 적어 레온에게 주었고, 그들은 각자 파리의 다른 방향으로 떠났다."(205-6)


Part IV 렘킨(LEMKIN) _221 


"1918년 7월, 전 세계적으로 인플루엔자가 유행했고, 많은 사망자 가운데 렘킨의 남동생 사무엘도 포함되었다. 그가 열여덟이 되던 해 즈음이었다. 그때부터 렘킨은 집단의 파괴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한 가지 핵심 포인트는 뉴스에 나왔던 1915년 여름에 있었던 아르메니아인 대량학살이었다. 〈120만 명 이상의 아르메니아인이 살해당했으며, 이유는 단지 그들의 기독교인이기 때문이었다〉라고 그는 덧붙였다. 오스만 제국 주재 미국 대사인 헨리 모겐소는 1918년의 로보프 학살에 대한 보고서를 준비하면서 아르메니아인 대량학살을 '역사상 최대의 범죄'라고 표현했다. 러시아인들에게 이 사건은 '기독교 문명에 반하는 범죄'이며, 프랑스에서 사용했다가 이슬람교의 민감성을 감안하여 수정한 용어인 '인류 문명에 반하는 범죄'이다. 〈국가가 살해당했으며 범죄를 자행한 사람들은 풀려났다.〉 렘킨은 이렇게 적으며 오스만 제국의 장관인 탈랏 파샤를 가장 잔인한 범죄자라고 규정했다."(229)


"1921년 6월 베를린에서 '아주 생생하게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재판이 진행되었다. 피고인은 독일 수도에서 전 오스만 제국 정부의 장관인 탈랏 파샤를 암살한 젊은 아르메니아인 소호몬 텔리리안이었다." "텔리리안의 변호사는 집단 정체성 카드를 꺼내 피고인이 '인내심이 많은 아르메니아 대가족'을 위해 복수한 것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다. 렘베르크 판사는 배심원들에게 만약 텔리리안이 '내면의 혼돈' 때문에 자유의지 없이 행동했다면 석방하라고 요청한다. 배심원은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 '무죄' 결론을 내렸으며, 이는 엄청난 소동을 낳았다." "당시 주권은 완전하고 절대적인 통치권을 의미했다. 렘킨은 주권이란 외교정책 또는 학교나 도로를 세우거나 사람들에게 복지를 제공하는 등 다른 것들을 위해 존재한다고 보았다. 국가가 '수백 만의 무고한 사람들을 죽일 권한'을 갖는다는 것이 아니다. 렘킨은 만약 주권이 그런 것이라면 그런 행위를 방지하는 법이 필요하다고 보았다."(234-6)


"현실적인 이상주의자였던 렘킨은 적절한 형법이 실제로 잔학행위를 금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생각에는 소수민족보호조약이 적절치 않았다. 따라서 그는 사람들의 삶을 보호하고, 잔학행위─집단학살─를 예방하고, 반달리즘─문화유산에 대한 공격─을 예방할 수 있는 새로운 규정을 상상했다. 그런 생각은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닌데, 가장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범인은 전 세계적으로 어느 국가의 법원에서도 재판해야 한다는 '보편적 사법권' 관념을 주창한 루마니아의 학자 베스파시안 V. 펠라의 견해를 기반으로 하였다." "1934년 폴란드는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1919년 소수민족보호조약을 파기했다. 외무부 장관 벡은 국제연맹에 폴란드가 소수민족을 박해하지 않았다면서 다른 국가와 동등한 취급을 원한다고 밝혔다. 다른 국가들이 자국의 소수민족을 보호할 의무가 없다면 폴란드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독일 제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보도하였고, 렘킨은 검사직을 그만두었다."(248-9)


"렘킨의 타고난 호기심은 독일 점령에 정면으로 맞섰다. 독일 나치의 법률이 정확하게 어떻게 실행되었는가? 독일인들은 여러 가지 결정을 서면으로 하는 등 질서정연하게 행동했다. 그리고 문서로 더 큰 계획에 대한 단서를 남긴다. 때문에 그것은 독일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반박할 수 없는 증거'로 이어질 수 있다." "렘킨은 일정한 패턴을 가지는 '결정적인 조치'를 계속 추적했다. 첫 번째 조치는 '국적박탈'로, 유대인과 국가 간의 연결고리를 단절시켜 개인을 무국적자로 만듦으로써 법의 보호를 제한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비인간화'로, 목표한 민족의 기본적인 법적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다. 두 단계의 패턴은 유럽 전역에 적용되었다. 세 번째 조치는 '정신적, 문화적으로'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다. 렘킨은 1941년 초부터 점진적인 단계로 진행된 유대인의 완전한 말살을 위한 법령을 가려냈다. 개별적으로 각각의 법령은 악의가 없어 보이지만 함께 적용되고 국경을 초월하여 실행되면 큰 목적이 드러났다."(259-61)


"1941년 미국으로 망명한 렘킨은 객관적이고 학문적인 방식으로 변론과 증거를 통해 미국인들을 설득하고 싶었다. 그는 워싱턴에 있는 카네기 국제평화기금에 제안서를 보냈고, 조지 핀치는 제안서에 긍정적인 답변을 보내왔다." "그렇게 출판된 《추축국의 유럽 점령지 통치》 제9장에서 렘킨은 '잔학행위'와 '반달리즘'을 버리고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내는데, 그리스 단어 'genos'(종족 또는 민족)와 라틴어인 'cide'(살인)를 결합한 단어이다. 그는 이 장의 표제를 '제노사이드Genocide'로 정했다." "제노사이드는 직접적으로 개인을 대상으로 하지만 개인의 자질이 아니라 국가적 집단의 일원으로서 당하는 행위와 관련된다고 렘킨은 9장에 적었다. 〈새로운 관념은 새로운 용어를 필요로 한다.〉 어떤 과정을 통해 그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는 설명도 없이 '제노사이드'라는 단어를 집어넣었다. 선택한 단어는 점령한 영토를 생물학적으로 영구히 바꾸려는 독일의 원대한 계획에 반대하는 결과를 이끌어냈다."(276-9)


Part V 나비넥타이를 맨 남자(THE MAN IN A BOW TIE) _293 


Part VI 한스 프랑크(FRANK) _315 


"킬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1924년에 졸업한 프랑크는 개업 변호사로 일하며 뮌헨공과대학교 법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강인하고 기회주의적이지만 지적이거나 야심가는 아니었던 그는 1927년 10월 베를린 재판에서 나치 피고인들을 변호할 변호사를 찾는다는 〈퓔키셔 베오바흐터〉 신문의 광고를 본 순간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프랑크는 지원했고 합격하여 마침내 고위급 정치 재판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나치의 법률 전문가 중 한 사람이 되어 수십 건의 재판에서 나치 정당을 변호한다." "프랑크의 도움으로 히틀러는 법정을 미디어 전략의 장소로 활용하였다. 그 자리에서 그는 합법적 수단으로 정치 권력을 얻으려 할 뿐이라는 주장, 즉 사실상 〈합법성의 선서〉를 공개적으로 공약했다. 프랑크의 스타일은 유연했지만 히틀러는 변호사나 법적인 사무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의 관심은 이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주었다."(319-20)


"1939년 10월 25일, 한스 프랑크는 폴란드 총독 직을 수락하였다. 초기의 인터뷰에서 프랑크는 폴란드가 이제 '식민지'이고 폴란드 국민들은 '위대한 독일제국의 노예'라고 말했다. 프랑크는 국왕처럼 굴었다. 폴란드 국민들은 그의 완전한 지배를 받는 대상이라고 했다. 폴란드는 국민이 권리를 가지는 입헌국이 아니며, 소수자들에 대한 보호는 없었다. 바르샤바는 짧은 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되었지만 프랑크는 재건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대신 그는 수많은 법령을 공포하였는데, 그중 다수는 렘킨이 전 세계를 다니면서 들고 다녔던 가방에 들어간 것이었다. 프랑크의 명령은 넓은 영토와 야생동물(보호대상)에서 유대인(비보호대상)까지 많은 것을 대상으로 했다." "프랑크는 생사에 대한 완벽한 결정권을 가졌으며, 1935년 베를린 회의에서 밝힌 생각, 즉 그의 총독령에서 '국민의 공동체'가 유일한 법적 기준이고 그러므로 개인은 주권자인 총통의 생각에 예속된다는 것을 실행하려고 하였다."(327-30)


"프랑크는 〈뉴욕타임스〉에 의해 전범으로 지목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1943년 초, 그는 공식 회의에서 〈1등이 되는 영예를 안았다〉고 발표했다. 이 표현은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그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들(유대인들)은 반드시 사라져야 합니다.〉 프랑크는 내각에 이렇게 말했다. 이 표현은 박수갈채를 이끌어냈고, 그로 하여금 한 단계 더 나아가게 했다. 그는 언제 멈춰야 할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디서 발견되든 사라질 것이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계속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독일제국의 단합과 무결성이 지속될 것이다." "3월에 크라쿠프 게토는 SS 소위 아몬 괴트의 효율적인 지휘 덕분에 1주일 안에 비워질 것이다. 5월에 바르샤바 게토에서 일어난 반란이 진압되었고 유대교 회당을 파괴하는 최종 조치가 취해졌다. 이 조치는 친위대 중장 위르겐 스투루프에 의해 진행되었고, 그는 세부사항에 대한 보고서를 자랑스럽게 히믈러에게 제출했다. 이로 인해 바르샤바 인구가 백만 명 줄었다."(374-5)


Part VII 혼자 서 있는 아이 (THE CHILD WHO STANDS ALONE) _393 


Part VIII 뉘른베르크(NUREMBERG) _407 


"1945년 11월 20일, 제프리 로랜스 재판장이 재판을 개시했다. 그는 〈본 재판은 세계 법률 역사상 유례가 없는 재판입니다〉라고 말문을 열며 공소장을 읽기 전에 간단한 소개를 했다. 4개 연합국의 검사들은 각각의 공소사실을 하나씩 낭독하였다. 미국 검사들이 첫 번째 공소사실인 국제범죄를 공모했다는 점을 낭독하였다. 바통은 영국 검사들에게 넘겨져 둥근 얼굴의 데이비드 막스웰 파이프 경이 두 번째 공소사실인 평화에 반하는 범죄에 관해 낭독하였다. 세 번째 공소사실은 프랑스 검사들에게 할당된 '제노사이드' 혐의를 포함한 전쟁범죄였다. 프랑크는 이 용어에 어리둥절했을 것이며, 어떻게 이 용어가 여기까지 와서 피에르 무니 검사가 이 법정에서 사용하게 되었을까 궁금했을 것이다. 네 번째인 마지막 공소사실은 소비에트 검사가 낭독한 '인도에 반하는 죄'였다. 프랑크에게는 또다시 어리둥절한 새로운 죄목으로, 이 공개 법정에서 처음으로 사용되는 용어였다."(413)


"재판 이틀째 날, 재판장은 미국 수석검사 로버트 잭슨에게 검사측이 사건에 대하여 진술하라고 말했다.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범죄에 대한 역사상 최초의 재판을 시작하는 영광은 엄청난 책임감을 동반합니다.〉 잭슨은 단어 하나, 하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매우 조심스럽게 단어를 선택했다. 그는 승리자의 자비와 패배자의 책임, 비난받고 처벌되어야 할 계획적이고 사악하고 파괴적인 잘못에 대해 이야기했다. 시민들은 자신들의 존재가 무시되는 것을 더 이상 참지 않을 것이며, 이런 일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승리에 도취되고 부상에 고통 받는 위대한 4개국이 복수를 선택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생포한 적을 법의 심판대 앞에 세운 것은 권력은 이성에 따른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하지만 재판은 명확하지 않은 법 이론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어야 하며, '소수의 사람들에 의한 하찮은 범죄의 처벌'을 위한 것도 분명 아니라고 강조했다."(422-4)


"라우터파하트는 피고인들이 국제법 하에서 국가 스스로가 범죄를 저지를 수 없기 때문에 국가에 충성하여 범죄를 자행한 개인 역시 유죄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칠 것이라고 예상했다. 쇼크로스는 법정에서 국가도 범죄자가 될 수 있다며, 개인의 경우에 비해 더욱 극적이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국가의 범죄를 억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괴링, 스피어와 프랑크가 그의 눈에 보였다. 쇼크로스의 법리적 주장의 핵심은 라우터파하트의 것이었다. 〈국가는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영국 법무장관인 쇼크로스는 재판 이전과 재판이 끝난 후에도 오래도록 자주 반복될 명확한 어구를 사용하여 선언하였다. 〈국가의 권리와 의무는 인간의 권리와 의무이다.〉 국가의 행동은 국가라는 무형 인격 뒤에 숨어 면책을 구할 수 없는 정치인들의 행동이다. 이것은 개인의 책임이라는 관념을 아우르고 근본적인 인간의 권리와 근본적인 인간의 의무를 새로운 국제적 질서의 핵심에 두는 급진적인 표현이었다."(430)


Part IX 기억하지 않기로 선택한 소녀(THE GIRL WHO CHOSE NOTTO REMEMBER) _463 


Part X 판결(JUDGEMENT) _479 


"렘킨은 전쟁 이전인 1933년부터 줄곧 자행된 모든 집단학살에 '제노사이드' 죄목을 적용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쇼크로스는 (라우터파하트가 작성한 논고문 초안에는 아예 빠져 있었던) 이 단어를 제한된 의미로 사용하였다. '제노사이드'는 가중처벌이 가능한 '인도에 반하는 죄'이지만 전쟁과 관련하여 자행되었을 때에만 해당된다. 이러한 제한은 1945년 8월 뉘른베르크 헌장 정의 조항에 있는, 악명 높은 세미콜론으로 인한 제6조 ⓒ항의 해석론이었다. 쇼크로스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요건'이라고 강조하며, 한 손으로 가져왔던 제노사이드를 다른 한 손으로는 그 전체 의미에서 제한을 둠으로써 한발 물러섰다. 이 표현을 읽으며 나는 1939년 9월 이전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일어난 모든 행위를 재판에서 제외하려는 의도를 이해하였다. 이로써 1938년 11월 이전의, 레온과 같은 개인과 다른 수백만 명을 대상으로 궁핍화와 추방, 재산몰수, 축출, 구금, 살인 등은 이 재판의 사법권을 벗어나는 일이 되었다."(508-9)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크로스는 라우터파하트로부터 많은 부분을 가져왔다. 소급효과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왜냐하면 말살, 노예화, 핍박과 같은 모든 전쟁범죄 행위들이 대부분의 국가법에 의해서도 범죄이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가 독일법으로는 합법이라는 사실은 전혀 정당화 되지 않는다. 그 행위들이 국제사회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전쟁은 폭군들이 피통치자들에게 잔학행위를 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전쟁에 대한 인도주의적 개입이 허용되었다면 그랬을 때만 정당하고 합법적이다. 국제법상 어떻게 '사법절차에 의한 개입'이 불법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쇼크로스는 좀 더 나아갔다. 그는 개인이 아닌 국가만이 국제법 아래에서 죄를 범할 수 있다는 피고인들의 논리를 반박했다. 국제법에는 그런 원칙이 없으므로 국가를 도와 인도에 반하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은 국가 뒤에 숨을 수 없다. 〈개인은 반드시 국가를 초월해야 한다.〉"(509-10)


"판결 첫째 날인 9월 30일은 전체적인 사실관계와 법리 판시에 집중했다. 각 피고인의 유죄 여부는 두 번째 날 발표될 것이었다.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재판부는 작은 섹션으로 나누었다. 인위적이긴 했지만 재판부의 권한으로 법률가들이 편한 방법을 택한 것이다." "재판부는 신속하게 기관들의 문제를 처리하였다. 나치 수뇌부, 게슈타포, SD(비밀경찰), 그리고 SS(친위대)는 그에 속한 50만 명의 장병들과 함께 책임이 인정되었다. 이로 인해 범죄자들의 숫자가 엄청나게 늘었다. SA(돌격대), 독일제국 각료와 독일군의 일반직원과 고위급 장서들은 처벌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사법적 타협 행위였다. 재판부는 다음으로 예비음모, 폭력 행위 및 전쟁범죄 행위에 대해 판결하였다. 인도에 반하는 죄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판결의 중심에 섰다. 인도에 반하는 죄는 국제법의 일부로 인정받았다." "재판부는 추상적 실체가 아닌 인간이 저지른 국제범죄에 대해 라우터파하트가 작성한 주요 표현을 채택했다."(532-3)


"이튿날 로렌스 재판장이 정확히 오전 9시 30분에 스물한 명의 피고인들 각각에 대한 판결 선고를 위해 법정에 입장하였다." "열 두 명의 피고인들은 항소권 없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들 중에는 교수형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프랑크, 로젠베르크, 자이스잉크바르트가 포함되어 있었다." "스물 한 명의 피고인들 가운데 세 명이 무죄를 선고받았다. 독일제국은행의 전 회장 얄마르 샤흐트는 침략전쟁 계획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없어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18개월 동안 히틀러의 부총통 역할을 했던 프란츠 폰 파펜도 같은 이유로 무죄가 선고되었으며, 괴벨의 선전부의 중요하지 않은 직원이며 공석인 상사의 직무를 애매하게 대행하던 한스 프리체는 독일인으로 하여금 잔학행위를 하도록 선동했다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무죄가 선고되었다. 몇 명은 인도에 반하는 죄에 대해 유죄가 선고되었으나, 제노사이드 혐의가 인정되어 유죄 판결이 내려진 피고인은 없었다. 그 용어는 사용되지 않았다."(535-8, 542)


에필로그 _547


"재판이 끝나고 몇 주 후, 뉴욕 북부에서 유엔 총회가 열렸다. 1946년 12월 11일 총회의 의제에는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기 위한 다양한 결의안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 두 개가 뉘른베르크 재판과 관련된 것이었다. 국제인권장전 제정을 위한 길을 다지기 위하여 총회는 인도에 반하는 죄를 포함하여 뉘른베르크 헌장에서 인정한 국제법의 원칙이 국제법의 일부라는 점을 확인하였다. 유엔 총회는 결의안 95호를 통해 라우터파하트의 사상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새로운 국제 질서에 개인의 위치매김을 명확히 하기로 결정하였다. 총회는 그 다음으로 결의안 96호를 채택하였다. 이 결의안은 뉘르베르크에서 재판부가 판결한 내용을 넘어셨다 제노사이드가 전체 인간집단의 존재의 권리를 부정한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총회는 재판부의 판결을 넘어 제노사이드가 국제법상 범죄임을 선언하였다. 판사들이 발을 들여놓기 꺼리던 영역까지 각국 정부는 렘킨의 연구를 반영한 규정을 법제화하였다."(547)


"허쉬 라우터파하트는 뉘른베르크 판결 선고 다음날에 케임브리지로 돌아갔다. 그의 저서, 《국제인권장전》은 제노사이드 조약이 채택된 다음날인 1948년 12월 10일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세계인권선언〉에 영감을 주었다. 선언이 법적인 효력이 없다는 사실에 실망한 라우터파하트는 이것이 좀 더 강제력이 있는 것으로 발전하는 시발점이 되길 희망했다. 이것은 1950년에 체결된 〈유럽인권조약〉으로 이어졌다. 뉘른베르크 검사였던 데이비드 막스웰 파이프가 개인이 제소할 수 있는 최초의 국제인권재판소의 창설을 조약에 구체적으로 명문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다른 지역적, 세계적 인권조약이 뒤따랐지만 아직까지 렘킨의 제노사이드 조약에 준하는 인도에 반하는 죄에 대한 조약은 없다. 1955년, 라우터파하트는 헤이그에 있는 국제사법재판소의 영국 판사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1960년에 사망하였으며, 케임브리지에 묻혔다."(548-9)


"국가들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밀고 당기기를 계속하며 국제범죄의 처벌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가운데 국제형사재판소라는 발상이 실현되기까지 50번의 여름이 지났다. 1998년 7월, 과거 유고슬로비아와 르완다에서의 잔학행위가 촉매가 되어 마침내 변화가 이루어졌다. 그해 여름 150개국 이상이 로마에서 국제형사재판소 설립을 위한 규정을 제정하기로 합의하였다. 나는 동료와 함께 협상의 분위기를 고무시키기 위해 조약의 전문, 즉 서론에 해당하는 소개글을 작성하는 초창기 역할을 즐겁게 수행하였다. 드러나지 않게 일하면서 우리는 '국제범죄의 책임이 있는 자들에 대하여 형사재판 관할을 가질 각국의 의무'라는 간단한 한 문장을 조약 전문에 삽입시켰다. 해로울 게 없어 보였는지 그 문장은 협상 과정에서 살아 남아 국제법에서 국가들이 그러한 의무를 승인하는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제노사이드와 인도에 반하는 죄를 처벌하는 권한을 갖는 새로운 국제재판소가 마침내 창설되었다."(549-50)


"제노사이드 범죄를 입증하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가해집단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강화하는 동시에 피해집단 구성원들 간의 연대감 또한 강화시킨다. 집단에 초점을 맞춘 '제노사이드'라는 용어는 '그들' 또는 '우리'라는 의식을 증대시키는 경향이 있으며, 집단 정체성이라는 감정을 강조함으로써 이것이 바로잡으려는 바로 그 상황을 부지불식간에 오히려 부추기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한 집단과 다른 집단을 맞서게 대치시킴으로써 화해의 가능성은 낮아지게 되는 것이다. 나는 제노사이드 범죄가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하는 죄의 형사소추를 왜곡할 것을 우려한다. 왜냐하면 제노사이드의 피해자라고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 검사에게 제노사이드 혐의로 기소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주기 때문이다. 어떤 집단에게는 제노사이드 피해자라고 인정받는 것이 역사적으로 빈발해온 분쟁의 해결에 기여하거나 집단학살을 감소시키는 결과와 무관하게 단지 '민족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가 될 뿐이다."(5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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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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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1장 패배에 대한 두려움 


"민주주의는 어떻게 아무런 잡음 없이 권력을 이양하는 단계에 도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패배를 받아들이는 규범을 유지할 수 있을까?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앞으로 다시 승리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할 때, 정당은 패배를 더 쉽게 받아들인다. 정당이 패배를 쉽게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두 번째 조건은 권력 이양이 재앙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즉,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생계가 어려워지지는 않을 것이며, 권력을 넘겨주는 정당과 그 지지자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원칙이 위협받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선거는 종종 많은 것이 걸린 전쟁처럼 보인다. 그러나 '너무 많은' 것이 걸린 전쟁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두려워할 때, 정당은 어떻게든 권력을 넘기려 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패배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은 정당이 민주주의에 등을 돌리게 만든다. 정치인들이 패배를 지지 기반에 대한 존재적 위협으로 느낄 때, 그들은 권력 이양에 필사적으로 저항할 것이다."(37-9)


2장 독재의 평범성 


"정치학자 후안 린츠가 〈충직한 민주주의자loyal democrat〉라고 부른 사람들은 언제나 세 가지 기본적인 행동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 첫째, 승패를 떠나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의 결과를 존중해야 한다. 이 말은 패배를 일관적이고 명확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 민주주의자는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전략을 분명히 거부해야 한다. 군사 쿠데타를 지지하고, 폭동을 조직하고, 반란을 조장하고, 폭탄 투척 및 암살 등 다양한 테러 행위를 계획하고, 정적을 물리치거나 유권자를 위협하기 위해 군대나 폭력배를 동원하는 정치인은 민주주의자가 아니다."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반민주주의 세력과 확실하게 관계를 끊어야 한다. 민주주의 암살자에게는 언제나 공범이 있다. 그 공범은 민주주의 규칙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그 규칙을 공격하는 정치 내부자들이다. 린츠는 이들을 가리켜 〈표면적으로 충직한semi-loyal 민주주의자〉라고 불렀다."(62-3)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얼핏 충직한 민주주의자와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대부분 정장과 넥타이 차림의 주류 정치인이며, 겉으로 규칙을 준수하고, 심지어 그 규칙을 기반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민주주의에 노골적으로 반대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살해당했을 때에도, 살해 도구에서 그들의 지문이 발견되는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착각해서는 안 된다. 표면적으로 충직한 정치인은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존재를 드러내지 않지만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그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움직인다. 즉, 민주주의를 지지한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폭력이나 반민주적 극단주의에 눈을 감는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그들이 그토록 위험한 이유다."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가 독재 세력과 협력할 때, 노골적인 독재 세력은 훨씬 더 위험해진다. 주류 정당이 전제적인 극단주의자를 용인하고, 묵인하고, 혹은 이들에 대해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할 때, 민주주의는 곤경에 빠진다."(63-4)


"다양한 정치 스펙트럼에 걸쳐 있는 정치인들이 폭력적이거나 반민주적인 행동을 거부할 때, 극단주의자들은 고립되고, 힘을 잃고, 포기한다." "그러나 주류 정당이 반민주적 극단주의자를 용인하고 암묵적으로 지지할 때, 이는 반민주적인 행동에 따른 처벌 수위가 낮아졌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낸다.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은 반민주 세력을 정당화하는 단계에서 나아가 그들을 격려하고 심지어 더 급진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독재의 평범성banality of authoritarianism이 의미하는 바다. 민주주의 붕괴를 주도하는 많은 정치인은 자신의 자리를 보존하거나 더 높은 자리로 올라서려는 야심 찬 경력지상주의자다. 그들은 심오한 원칙을 기반으로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게 아니라, 단지 민주주의에 무관심할 뿐이다. 그들이 반민주적 극단주의를 묵인하는 이유는 그게 가장 쉽게 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 붕괴에 반드시 필요한 조력자 역할을 맡게 된다."(75-6)


3장 이 땅에서 벌어진 일 


"백인 반동주의자들은 (재건 시대에) 등장한 다인종 민주주의에 미국 역사상 전례 없는 테러 행위로 응수했다. 흑인 시민이 남부 지역 대부분의 주에서 다수, 혹은 다수에 가까운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다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잔혹한 무력〉이 필요했다." "사실 1870년대에 민주당이 권력을 탈환하기 위해 활용했던 테러와 부정행위 전술은 영구적인 해결책이 아니었다. 그래서 민주당은 남부 전역에 걸쳐 '합법적인'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허물어뜨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1888~1908년 동안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투표권을 박탈하기 위해 주 헌법과 선거법을 뜯어고쳤다." "1890년, 미시시피주 헌법제정의회는 인두세와 비밀 투표, 그리고 읽고 쓰기 능력 시험을 받아들였다. 남부의 많은 주가 이후 10년 동안 이러한 〈독창적인 고안품〉을 받아들였다." "남부 지역 민주당은 대규모 투표권 박탈을 통해 다인종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첫 여정에서부터 길을 잃게 만들었다."(117, 123, 125, 127)


"투표권을 박탈하기 위한 〈합법적인〉 절차와 관련해서 최종적으로 점검해야 할 사항이 한 가지 남아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연방 사법부였다. 그중에서 가장 결정적인 것은 '길레스 대 해리스(1903)' 소송이었다." "'길레스 대 해리스' 소송은 과거에 노예였던, 그리고 앨라배마 유색시민투표권연합의 대표가 된 경비원인 길레스가 앨라배마의 몽고메리 카운티 기록위원회를 상대로 제기한 투표권 소송이었다." "이 판결에서 대법원의 다수 의견을 작성한 대법관은 올리버 웬들 홈스 주니어 판사였다. 홈스는 그 소송이 앨라배마주의 유권자 등록 제도가 부당하다고 주장한 것이라는 점에서, 만약 법원이 길레스의 손을 들어주고 다른 유권자들을 등록 명부에 추가한다면 앨라배마주의 부정행위에 동조하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뉴잉글랜드 귀족가문의 후손인 홈스는 법원이 그들 자신의 손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결국 대법원은 투표권 박탈이 이뤄지는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기로 결정했다."(127-9)


"연방이 투표권을 보호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남부 지역의 민주주의는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흑인 투표율은 1880년 61퍼센트에서 1912년 상상조차 힘든 2퍼센트로 곤두박질쳤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시민 다수를 차지한 루이지애나와 미시시피,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서도 흑인 시민의 1퍼센트, 혹은 2퍼센트만이 투표할 수 있었다. 1876년에 유명한 조지아주 정치인 로버트 툼스는 이렇게 말했다. 〈다음 번 총회가 열린다면 '국민'이 통치하고 흑인이 목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바로잡을 것이다.〉 그의 이러한 소망(남부 지역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공통적인 소망)은 한 세기 만에 현실이 되었다. 이후 남부 지역에서는 한 세기에 걸쳐 독재 시대가 이어졌다. 흑인 선거권이 사라지면서 정치적 경쟁이 무너졌고, 남부 전역은 일당 지배 체제로 전락하고 말았다. 민주당은 테네시주를 제외한 이전 남부연합의 모든 주에서 70년 넘게 권력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다섯 개 주에서는 '한 세기 넘게' 이어졌다."(133-4)


4장 왜 공화당은 민주주의를 저버렸나 


"21세기 초 공화당 정치인들은 선거 패배를 두려워했다. 그러나 많은 공화당 지지자는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을 잃을까봐 두려워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나라였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 나라 안에서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였다. 미국 역사에 걸쳐 백인 기독교인들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인종적 수직체계의 맨 꼭대기에 앉아 있었다." "백인 미국인은 사회적으로 최소한의 지위를 보장받았다. 이는 곧 〈백인 시민에게는, 볼 수 있지만 그 아래로는 절대 떨어지지 않을 유리 바닥〉이었다. W. E. B. 듀보이스는 이러한 특권을 백인으로 살아가는 〈심리적 임금psychological wage〉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21세기로 접어들면서 미국은 더 이상 백인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었고, 한때 굳건했던 인종적 수직체계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회 내에서 보장된 지위와 더불어 성장한 사람은 그러한 지위를 빼앗겼을 때 부당함을 느끼게 된다. 실제로 많은 백인 미국인은 스스로를 희생자라고 느꼈다."(165-6)


"이러한 느낌은 오바마의 당선으로 한층 더 증폭되었다. 정치학자 마이클 테슬러는 연구를 통해 (정치적으로 온건한)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이 미국인의 정치적 태도를 뚜렷하게 급진화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바마의 당선으로 모든 미국인은 그들의 나라가 다인종 민주주의의 평원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백악관에서 일하는 모습이 매일 TV 화면에 나오면서 미국인들은 더 이상 인구 통계적으로나 정치적 차원에서 새로운 현실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많은 백인 미국인은 그들이 자라난 나라가 그들을 저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했다. 다인종 민주주의에 대한 반발은 주로 백인 기독교 민족주의로 모습을 드러냈다. 사회학자 필립 고르스키는 이를 〈(백인) 기독교인이 미국을 건국했지만 이제 박해받는 (민족적) 소수가 되어가는 위기에 봉착했다〉라는 믿음으로 설명했다. 〈백인 기독교인〉은 이제 종교 집단이라기보다 민족 집단, 혹은 정치 집단에 더 가깝게 되었다."(167)


"트럼프의 성공은 백인의 정체성에 기반을 둔 정치가 공화당 내에서 승리의 공식이라는 사실을 보여줬다. 나이를 불문하고 많은 공화당 정치인들은 트럼프의 스타일과 태도를 그대로 따라했다. 반면 트럼프 열차에 탑승하기를 거부한 공화당 정치인은 은퇴하거나, 아니면 예비선거에서 패했다. 2020년에 트럼프에 반기를 들었던 어떤 계파도 공화당 내에 머물러 있지 못했고, 트럼프의 극단주의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반대 목소리는 묻혀버리고 말았다." "많은 트럼프 지지자는 〈거대 대체 이론great replacement theory〉을 믿었다. 이 이론은 미국의 엘리트 집단이 〈토착〉 백인 집단을 쫓아내기 위해 이민자를 동원하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었다." "2021년 미국 기업연구소가 후원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공화당원 중 56퍼센트가 〈전통적인 미국적 삶의 방식이 너무나 빨리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구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했다. 민주주의 자체를 공격할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172-5)


5장 족쇄를 찬 다수 


"민주주의자 대부분은 개인의 자유, 그리고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야당의 권리가 다수결주의 범위 너머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하지만 동시에 민주주의 사회는 다수에 권력을 부여해야 한다. 사실 다수에게 상당한 정도의 발언권을 부여하지 않는 정치 시스템은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없다. 반다수결주의에는 이러한 위험이 따른다. 다시 말해 다수에게 족쇄를 채우기 위해 설계된 규칙은 정치적 소수가 다수를 '지속적으로 억압'하고, 심지어 다수를 '지배'하도록 만들 수 있다. 민주주의 이론가 로버트 달은 〈다수의 독재〉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소수의 독재라고 하는 위험한 현상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점에서 일부 영역을 다수결주의의 범위 너머에 놓아두는 작업이 중요한 것처럼 그 밖의 다른 영역은 '다수결주의의 범위 안에' 그대로 남아 있도록 만드는 작업 역시 중요하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배보다 상위의 개념이지만, 다수의 지배가 없다면 민주주의도 존재할 수 없다."(209-10)


"특히 두 영역만큼은 다수결주의 안에 있어야 한다. 그것은 선거, 그리고 의회의 의사 결정을 말한다. 첫째, 누가 공직을 차지할 것인지 결정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표를 얻은 자가 더 적은 표를 얻은 자를 이겨야 한다. 어떤 자유민주주의 이론도 이와 다른 결과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후보자나 정당이 다수의 의지를 거슬러 권력을 잡을 때, 민주주의는 그 의미를 잃어버린다. 둘째, 선거에서 이긴 자가 통치해야 한다. 의회 다수는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민주적 절차를 훼손하지 않는 한 법률을 통과시킬 수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 관점에서 볼 때, 의회 소수가 다수가 지지하는 일반적이고 합법적인 입법 과정을 영구적으로 가로막도록 허용하는 압도적 다수 규칙은 옹호하기 힘들다. (무제한) 상원 필리버스터와 같은 압도적 다수 규칙은 정치적 소수에게 강력한 무기인 거부권을 선사한다. 그러한 거부권이 시민의 자유나 민주적 절차에 대한 보호의 차원을 넘어설 때, 의회 소수는 그들의 의지를 다수에게 강요할 수 있다."(210)


"또한 반다수결주의에는 시간적인 문제가 있다. 헌법은 수십 년, 혹은 수 세기 동안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한 세대는 필연적으로 미래 세대의 손을 묶게 된다. 법률 이론가들은 이를 일컬어 '죽은 손의 문제problem of the dead hand'라 부른다." "수정의 장벽이 너무 높을 때, 오늘날 다수는 사회적 요구와 지배적 가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법률의 〈강철 우리〉 속에 갇혀버릴 위험이 크다." "사법부는 이러한 문제에 취약하다. 특히 판사의 신분을 임기제한이나 정년과 같은 조건 없이 강력하게 보장할 때, 더욱 그렇다. 사법심사Judicial review(법원이 모든 국가기관의 행위의 적법성을 판단하도록 하는 제도)는 판사들에게, 그리고 일부는 수십 년 전에 임명된 판사들에게 오늘날 다수가 만든 법률과 정책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민주주의는 몇몇 핵심적인 반다수결주의 제도 없이는 살아남지 못한다. 그러나 동시에 반다수결주의 제도가 지나치게 만연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지 못한다."(213-6)


6장 소수의 독재 


"소수의 지배를 떠받치는 기둥 중 하나가 선거인단 제도다. 이 제도는 보통선거를 두 가지 방식으로 왜곡시킨다. 첫째, 거의 모든 주(메인과 네브래스카주를 제외한)는 승자 독식 방식으로 선거인단 표를 할당한다. 이러한 방식은 전국적인 보통선거에서 패한 후보가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준다." "선거인단 제도의 두 번째 왜곡인 작은 주 편향은 명백하게도 공화당에게 어드밴티지를 선사했다. 각 주에 할당된 선거인단 수는 의회 대표의 수, 즉 하원 의원에다가 상원 의원을 합한 수와 동일하다. 그런데 상원에서는 인구 밀도가 낮은 주들이 과잉대표권을 행사하기 때문에, 선거인단은 총 538표 중 20표 정도가 시골 지역에 편향되어 있다." "1992~2020년 동안 치러진 모든 대선에서 공화당은 2004년을 제외하고 보통선거에서 패했다. 다시 말해 3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공화당이 더 많이 득표한 것은 '단 한 번'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공화당 대선 후보들은 그동안 '세 번'이나 대통령이 되었다."(253-6)


"소수의 지배를 뒷받침하는, 그리고 당파적 편향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는 두 번째 기둥은 상원 제도다. 미국 전체 인구에서 20퍼센트 미만을 차지하는 인구수가 낮은 주들만으로도 상원에서 과반을 차지할 수 있다. 그리고 전체 인구의 11퍼센트에 해당하는 주들만으로도 필리버스터로 입법을 가로막을 수 있는 충분한 상원 의석을 확보할 수 있다." "소수의 지배를 떠받치는 세 번째 기둥은 대법원이다. 선거인단과 상원의 특성을 고려할 때, 보통선거에서 패한 대통령이 대법원 판사를 지명하고, 미국 전체 인구의 소수를 대표하는 상원 다수가 이를 승인하는 일이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 "소수의 지배를 떠받치는 네 번째 기둥은 헌법에 기반을 두지 않은, 그리고 인위적인 다수를 '만들어내고' 때로 더 적은 표를 얻은 정당이 의회를 장악하도록 허용하는 선거 제도다." "많은 주 의회가 권력을 쥔 정당에 유리한 방식으로 선거구를 재구획함으로써 유권자를 의도적으로 분할했다."(256-9, 262)


"1980년에 태어나서 1998년, 혹은 2000년에 처음으로 투표한 미국인을 떠올려보자. 그가 성인이 된 이후로 민주당은 상원 선출을 위한 6년 단위의 보통선거에서, 그리고 한 번을 제외한 모든 대선의 보통선거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그는 공화당 대통령과 공화당이 장악한 상원, 그리고 공화당이 임명한 대법관이 다수를 차지하는 대법원 체제에서 성인기의 삶 대부분을 살아가고 있다. 소수의 지배가 모습을 드러내는 현상이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패자가 승리하도록 허용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는 또한 국민의 삶과 밀접한 공공 정책에 교묘하게 영향을 미친다. 여론은 절대 완벽하게 정책에 반영되지는 않는다." "당파적 소수가 과잉대표권을 행사하도록 제도가 허용할 때, 여론은 외면과 억압을 받는다. 〈다수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상원 의원이나 판사가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사안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여론과 동떨어진 결론이 나온다고 해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266-7)


"정치 세계는 두 세기가 넘도록 경쟁을 만병통치약처럼 생각했다. 정치 이론가와 실무자 모두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이 제시했던 반민주적인 이념을 물리치기 위한 원칙을 종종 언급한다. 밀은 널리 알려진 표현을 통해 진실이 거짓에 승리를 거두려면 〈대립하는 의견 사이의 충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제임스 매디슨은 《연방주의자 논집》 10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파가 다수를 차지하지 못할 때, 다수가 정기적인 선거를 통해 사악한 입장을 물리친다는 공화국 원칙이 우리를 구제한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선거 제도가 특정 지역이나 집단에게 과잉대표를 허용할 때, 그래서 정당들이 '유권자 다수를 확보하지 않고서도' 선거에서 이길 수 있을 때, 유권자의 생각에 반응해야 할 압박이 줄어든다. 그럴 때 정당들은 급진화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 바로 이러한 일이 21세기 초 공화당에서 일어났다. 공화당은 경쟁해야 할 동기를 무디게 만드는 〈헌법적 보호 장치〉의 수혜자가 되었다."(280-1)


"대법원은 게리맨더링으로 구성된 주 의회에서 소수의 독재를 강화하고 있다. 미국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형태 중 하나로 드러난, 위스콘신주의 악명 높은 선거구 지도는 2016년 연방 법원에 의해 허물어졌다. 하지만 2018년 닐 고서치가 대법관으로 있는 연방대법원이 그 판결을 뒤집으면서(실제로 절차적 문제를 이유로 판단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게리맨더링으로 구성된 주 선거구 지도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1년 후 앤서니 케네디 대법관이 자리에서 물러나고 브렛 캐버노가 그 자리를 이어받은 상황에서 연방대법원은 5 대 4의 다수 의견으로 주의 당파적 게리맨더링 사건을 심판할 권한이 대법원에는 없다고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장 존 로버츠는 다수 의견으로 이렇게 말했다. 〈당파적 게리맨더링 주장은 연방대법원의 권한을 넘어선 정치적 문제를 제기한다.〉 이렇게 반다수결주의 상원에 의해 구성된 반다수결주의 대법원이 주 차원에서 소수의 지배를 강화하고 있다."(282-3)


7장 표준 이하의 민주주의, 미국 


"미국은 예외적인 국가다. 이제 다른 어떤 민주주의 국가보다 소수의 지배에 더 취약한 상태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다른 민주주의 국가들은 어떻게 미국을 앞질러나갈 수 있었을까?" "미국 헌법은 민주주의 세상에서 가장 수정이 힘든 헌법이다. 도널드 러츠가 헌법 수정 절차에 관한 비교 연구를 통해 31개 민주주의 국가들을 살펴봤을 때, 미국은 난이도 지수에서 최고점을 차지하면서 다음으로 높은 점수를 기록한 국가(호주와 스위스)를 큰 폭으로 따돌렸다. 미국에서 헌법을 수정하기 위해서는 상원과 하원 모두에서 2/3의 승인을 받아야 할 뿐 아니라, 3/4에 달하는 주들의 비준도 받아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은 세계적으로 대단히 낮은 수준의 헌법 수정률을 보인다. 미국 상원의 발표에 따르면, 헌법을 수정하기 위한 시도가 11,848번 있었다. 그러나 성공을 거둔 사례가 27번에 불과하다. 재건 시대 이후로 미국 헌법이 수정된 것은 20번에 불과하며, 가장 최근 사례는 30년도 더 된 1992년이었다."(314-5)


"미국은 선거인단 제도를 유지하는 유일한 민주주의 국가다. 선거인단 제도를 규정하는 헌법 조항은 가장 빈번한 개혁 시도의 대상이 되었다. 한 추산에 따르면, 지난 225년에 걸쳐 선거인단 제도를 폐지하거나 개혁하기 위한 시도는 700회를 넘었다. 20세기 중 이를 위한 본격적인 시도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있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세 번의 〈아슬아슬한〉 대선(1960년과 1968년, 1976년)이 있었고, 여기서 보통선거의 승자가 선거인단 투표에서 아주 근소한 차이로 패했다." "1969년 9월에 하원은 선거인단 제도를 폐지하기 위한 법안을 338 대 70으로 통과시켰다. 이는 헌법 수정에 필요한 2/3 찬성 요건을 훌쩍 넘어선 것이었다. 그 법안이 상원으로 넘어갈 무렵, 갤럽 설문조사 결과는 미국인 81퍼센트가 개혁안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그러나 과거의 많은 시도에서 그랬듯이 개혁안은 상원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렇게 개혁안은 표결에 이르지도 못한 채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315, 318-9)


"또 한 번의 진지했던, 그러나 다시 실패로 끝난 헌법 개혁 시도는 1970년대에 있었다. 그것은 남녀평등 헌법 수정안Equal Rights Amendment, ERA으로 여성의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려는 시도였다." "상황은 비준에 유리하게 흘러갔다. 닉슨과 포드, 카터 대통령 모두 ERA를 지지했고,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1972년과 1976년에 찬성의 뜻을 밝혔다. 여론 또한 분명하게 비준의 편을 들었다. 1974년 갤럽 여론조사에서는 74퍼센트가 ERA를 지지했고, 1970년대에 걸쳐 실시한 설문조사들에서는 전반적으로 2 대 1로 비준에 대한 찬성의 뜻을 드러냈다. 그러나 흐름은 이어지지 못했다. 1973년 이후로 5개 주가 추가로 ERA를 비준함으로써 1977년 기준으로 총 35개 주가 비준을 마쳤다. 미국 전체 비준까지 3개 주만 남은 상태였다. 그런데 하원이 비준 마감 시한을 1982년으로 연장했음에도 추가 비준은 나오지 않았다. 비준을 하지 않은 주들 15개 중 10개 주는 남부에 있었다. 과연 탈출구는 있는 것일까?"(320-1)


8장 민주주의를 민주화하다


"1930년대의 유럽에서 비롯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한 가지 전략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모든 세력을 포괄적인 연합 속으로 몰아넣음으로써 반민주적인 극단주의자들을 고립시키고 물리치는 것이다." "하지만 봉쇄는 단기 전략에 불과하다. 민주주의 한가운데에는 경쟁이 있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장기적인 연합은 오히려 민주주의를 허물어뜨릴 수 있다. 진보 세력과 보수 세력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일시적으로 손잡을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유권자는 이들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유럽의 경험에 따르면, 〈대연정〉이 오랫동안 이어질 때 유권자들은 그들을 배타적이고 불법적인 공모 연합으로 바라보게 된다. 또한 주류 정당 간의 연합이 지나치게 길어질 때, 〈기득권 세력〉이 그들을 억압하고 있다는 포퓰리스트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봉쇄 전략을 통해 반민주 세력이 권력을 잡지 못하게 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세력을 반드시 약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327-9)


"다음으로 전제주의자를 대적하는 두 번째 전략 역시 1930년대 유럽이 트라우마를 겪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이 전략의 핵심은 정부의 권한과 법률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반민주 세력을 '축출하고', '적극적으로 고발하는' 것이다. 이 전략은 2차 세계대전 직후에 서독이 처음 사용했다. 히틀러가 권력을 잡았던 경험을 한 독일의 전후 헌법 설계자들은 민주주의 정부가 내부의 전제적 위협에 직면해서 무력하게 서 있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선동가, 혹은 〈반헌법적인〉 연설과 집단 및 정당을 '금지하고 제한할 수 있는' 헌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봉쇄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배제 전략에도 뜻하지 않은 함정이 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쉽게 남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폭넓은 연대를 형성하고 반민주적 극단주의자에게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은 전제주의의 급박한 위협에 직면해서 반드시 필요한 전략이다. 그러나 이는 급한 불을 끄기 위한 임시방편에 불과하다."(330-2)


"제임스 매디슨을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던져준 기본 원칙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그 원칙이란 극단주의 소수를 견제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선거를 통한 경쟁이라는 것이다. 매디슨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는 과제가 가장 〈악의적인〉 정치적 충동을 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국민 다수가 선거에서 '실질적인 우위'를 점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이를 위해 미국은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 20세기 초 미국의 개혁가 제인 애덤스는 이런 글을 남겼다. 〈민주주의의 병폐를 치료하기 위한 약은 더 많은 민주주의다.〉" "투표를 더 쉽게 만들고, 게리맨더링을 없애고, 선거인단 제도를 직접적인 보통선거로 대체하고, 상원 필리버스터를 없애고, 상원을 보다 비례적으로 만들고, 대법원 종신제를 폐지하고, 헌법 수정을 좀 더 쉽게 만드는 개혁, 이 모든 변화를 통해 미국은 세상의 모든 나라를 따라잡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혁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지 않을까?"(332-3, 341)


"우리의 여러 개혁안이 가까운 미래에 채택되지는 않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헌법 개혁을 위한 아이디어가 거대한 국가적 정치 토론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침묵이다. 주류 집단이 아이디어를 불가능한 제안이라고 판단할 때, 정치인들이 아이디어를 언급조차 하지 않을 때, 신문사 편집자가 아이디어를 외면할 때, 교사들이 수업 시간에 아이디어를 설명하지 않을 때, 학자들이 순진하다거나 현실 감각이 없다는 비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더 이상 아이디어를 내놓지 않을 때, 다시 말해 야심 찬 아이디어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릴 때, 싸움은 이미 끝난 것이다. 어떤 개혁도 자기 충족적인 예언이 되지 못할 것이다." "논의와 아이디어는 결코 공허한 노력이 아니다. 제도 변화의 과정에 참여한 이들은 프랑스 시인 빅토르 위고가 말한 〈때를 맞이한 아이디어보다 더 강력한 것은 없다〉라는 표현을 종종 거론하곤 한다. 그러한 때도 누군가 아이디어를 내놓아야만 찾아온다."(342-5)


"그러나 의제의 공론화는 시작에 불과하다. 민주주의 개혁을 위해서는 지속적인 정치적 압박이 필요하다. 의미 있는 변화는 일반적으로 지속적인 사회적 운동, 즉 활동을 통해 논의의 흐름을 바꾸고, 결과적으로 특정 사안에 대한 정치적 힘의 균형점을 옮기는 광범위한 시민 연합을 통해 이뤄진다. 국민 청원과 방문 캠페인, 집회, 행진, 파업, 피켓 시위, 연좌 농성, 보이콧 등 다양한 수단을 활용하는 사회 운동이 여론과 언론 보도 방향을 바꿀 수 있다. 궁극적으로 사회 운동은 개혁을 지지하는 새로운 유권자 집단을 양산하고 현상 유지를 옹호하는 이들의 입지를 약화시킴으로써 정치인의 선거적 계산을 바꾼다." "실제로 미국에서 정치적·경제적 통합을 향한 많은 중요한 진보는 당시에는 개혁가로 인정받지 못했던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과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 린든 존슨 시절에 이뤄졌다. 이들 중 누구도 진정한 급진주의자는 아니었다. 사실 그들은 결국에 스스로 뒤집었던 기존 체제가 만들어낸 인물이었다."(3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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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미국, 제국의 연대기 - 전쟁, 전략, 은밀한 확장에 대하여 걸작 논픽션 19
대니얼 임머바르 지음, 김현정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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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로고 지도 이면의 사실들


# 로고 지도logo map. 알래스카와 하와이(더 나아가 푸에르토리코, 사모아, 괌 등까지)를 제외하고 미국 영토를 떠올리는 방식을 지칭하는 용어.


1941년 12월 7일, 일본 군용기가 오아후섬의 해군기지에 나타났다. 미국 국민의 뇌리에 굳건히 박힌 이 진주만 공격은 말 그대로 공격이었다. 일본군 폭격기는 타격하고 후퇴한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필리핀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최초 공습이 시작된 후 계속해서 더 많은 공습과 침략, 정복이 뒤따랐다. 미국 국적의 1600만 필리핀인들은 하와이 주민들과는 전혀 다른 전쟁을 겪게 되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진주만’으로 잘 알려진 사건은 사실상 태평양 전역의 미국과 영국 점령지를 기습적으로 타격한 전면적인 공격이었다. 하루 만에 일본군은 미국 영토인 하와이와 필리핀, 괌, 미드웨이섬, 웨이크섬을 공격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국 식민지였던 말레이반도, 싱가포르, 홍콩을 공격하고 타이를 침략했다. 전체적인 상황을 보면 ‘진주만’(일본이 침략에 실패한 몇 안 되는 표적 중 하나)이라는 명칭이 정말 그 운명적인 날에 발생한 사건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할 것이다. 10-1)


루스벨트는 왜 필리핀의 중요도를 격하시켰을까? 정확히 알 수 없겠지만 그 이유를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루스벨트는 일본이 미국을 공격했다는 사실을 내세우려 했을 것이다. 루스벨트는 하와이와 관련해 전달받은 내용을 적당히 다듬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와이 인구는 백인의 비율이 필리핀에 비해 비교적 높긴 했지만, 여전히 주민 4분의 3이 아시아인 또는 태평양 도서 출신이었다. 루스벨트는 확실히 이런 점 때문에 대중이 하와이를 외국으로 인식할까봐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연설 당일 아침 그는 연설문을 한 번 더 수정했다. 일본군의 비행중대가 ‘오아후섬’이 아닌 ‘미국령 오아후섬’을 폭격했다고 바꾼 것이다. 오아후섬 폭격으로 ‘미 해군과 육군 병력’이 피해를 입었으며, ‘수많은 미국인이 목숨을’ 잃었다고 말했다. 미국령 섬에서 미국인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야말로 루스벨트가 강조하려던 내용이다. 필리핀이 외국으로 격하됐다면, 하와이는 ‘미국’으로 격상된 셈이었다. 12-3)


미국이라는 제국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스스로 제국으로 존재해왔다는 사실을 줄기차게 무시해왔다는 점이다. 미 제국주의의 규모가 유감없이 드러났던 1898년 이후의 짧은 기간을 제하면 제국주의 역사의 상당 부분은 은밀히 전개돼왔다. 그 이유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미국은 스스로를 제국이 아닌 공화국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반제국주의 항쟁 속에서 탄생했으며, 히틀러의 천년제국인 라이히와 일본제국에서 소비에트연방의 ‘사악한 제국’에 이르는 여러 제국에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심지어 판타지 세계에서도 미국은 제국에 맞섰다. 로고 지도는 자국의 일부를 배제하고 기술되므로, 본토인들은 자국 역사를 불완전한 시각으로 볼 수 밖에 없다. 미국의 해외 영토는 전쟁을 일으킴과 동시에 수많은 발명을 이뤄냈고 대통령을 일으켜 세워 ‘미국인’의 진정한 의미를 정의하는 데 일조했다. 그 영토들을 역사에 포함시킬 때 비로소 우리는 판타지가 아닌 실제 미국의 완전한 모습을 볼 수 있다. 24-5)


제1부 식민지 제국


1. 대니얼 분의 몰락과 부상


미국을 건국한 사람들은 대니얼 분과 같은 개척자들을 노골적인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국가의 ‘쓰레기’(벤저민 프랭클린), ‘육식동물보다 나을 것이 없는’(헥터 세인트 존 데 크레브쾨르) ‘백인 야만인’(존 제이)이었다. 조지 워싱턴은 독립전쟁 후 ‘모든 권위에 도전하려는 노상강도 떼가 서부 지역에 정착하거나 이 지역을 뒤덮는 상황’에 대해 경고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좀더 깊은 문제가 연루되어 있었다. 애팔래치아 서쪽 영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한 것은 미국이 유일한 나라는 아니었다. 견고한 정치적 조직체를 구성한 북미 원주민들은 그들 나름의 북미 지도를 그려왔고, 18세기 후반 백인과의 싸움에서도 그 영토를 지켰다. 대니얼 분은 바로 이처럼 예민한 곳을 건드렸던 것이다. 그는 백인 정착민들을 서부로 이끌면서 인디언 영토를 침략했다. 이는 미국 정부가 싸움에 끼어들 손쉬운 구실을 마련해주었다. 이런 개입은 유럽인과 원주민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 당혹스러운 상황을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30)


워싱턴이 개척자들을 짜증스러워했다고 해서 확장을 반대했다는 뜻은 아니다. 문제가 된 것은 잠깐이었다. 미국 영토는 광대했지만 정부는 약했다. 산맥을 넘어가 무단으로 토지를 점유한 자들을 통치하기란 불가능했으므로 불가피하게 시작된 전쟁을 치르는 데 돈이 많이 들었다. 그러자 워싱턴은 정착 과정이 엘리트의 통제하에 ‘촘촘히’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식으로 해야 변경 지역이 분과 같은 떠돌이들을 위한 피난처가 되지 않고 문명의 진보를 위한 최전선으로서 당당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었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이러한 비전을 실현하고자 변경 지역을 구분하기 위한 정치적 범주를 만들었다. 즉 영토territory였다. 공화국 지도자들은 대서양에 위치한 주들의 경우 절대로 미국 서부 경계를 이루는 미시시피강 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지 않겠다는 협약을 체결했다. 서부 토지는 주 정부가 아닌 연방정부가 관할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큰 의미의 국가의 영토로서 관리된다는 것을 뜻했다. 31-2)


제퍼슨과 워싱턴이 스스로 ‘촘촘히’라고 표현했다시피 인구가 증가하더라도 백인들이 너무 많은 공간을 차지하지 않고 정착할 수 있도록 그들을 이끌어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유럽 인구가 과거에 더디게 증가했음을 감안한다면 이는 터무니없는 가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부터는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를 최초로 인식한 사람이었다. 1749년에 그는 필라델피아 인구조사를 비롯해 보스턴, 뉴저지 및 매사추세츠의 인구수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의 연구는 충격적일 정도로 정확했다. 그 어떤 근거 이상으로 강력했다. 식민지 인구가 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25년마다 인구가 2배로 늘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경제학자인 토머스 맬서스는 식량 공급이 인구 증가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암울한 전망을 내놓았는데, 이는 상당 부분 프랭클린의 북미 인구통계(맬서스는 ‘역사상 거의 유례없는 가파른 인구 증가’를 가리키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를 근거로 한 것이었다. 34-5)


백인 인구의 증가는 다이너마이트의 폭발력에 비견될 만했으며 건국의 아버지들이 세운 국가의 이상을 깨버렸다. 처음 수십 년간 지배적이었던 위대한 제퍼슨식 시스템은 반半식민 상태에 있던 서부 거주민과 함께 더 이상 유지될 수가 없었다. 대니얼 분과 같은 사람이 아주 많아진 것이다. 정부는 1830년대가 되자 무단 거주자 기소를 포기하고 그 대신 그들이 토지를 구입하도록 했다. 1860년대에는 공유지를 ‘자영농지homestead’로 무상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는 해당 토지에 거주하고자 하는 거의 모든 시민에게 돌아갔다. 대규모 백인 인구가 거주하는 영토는 곧 주로 승격됐다. 금광꾼이 몰려들었던 캘리포니아는 2년 후 군사정부에서 주 지위로 격상됐다. 문화도 바뀌었다. ‘노상강도’ 또는 문명의 변방에 선 ‘백인 야만인’이라고 멸시당하는 대신, 정착민들은 개척자pioneer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얻었다. 더 이상 상습적 범법자가 아니라 역동적인 국가의 자랑스러운 기수로 칭송받게 된 것이다. 36-7)


2. 인디언 거주지


인디언 세력의 주축은 체로키족이었다. 체로키족은 그 수가 17세기와 18세기에 많게는 절반 가까이 줄었으나, 19세기 초반에 다시 늘기 시작했다. 체로키족은 유럽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공화국 내에 그들만의 영역을 개척해갔다. 그들은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고 노예를 사들였으며 수도를 건설했다. 세쿼이아라는 은 세공인이 음절문자 체계를 고안하면서 체로키어로 기록할 수 있게 됐다. 이로 인해 부족 신문인 『체로키 피닉스』가 영어와 체로키어로 발행되면서 곧 인기를 얻었다. 1827년 체로키족은 미국 헌법을 본떠 헌법을 채택했다. 유권자들은 부유한 혼혈 기독교인 쿠위스구위Koo-wi-s-gu-wi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체로키 공화국 초창기에 그들의 토지 소유권은 대체로 존중받았다. 워싱턴 행정부는 체로키족과 조약을 체결하여, ‘문명화된’ 체로키족을 미국 시민으로 받아들인다는 가능성을 수용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처럼 취약한 성과가 백인의 토지 소유욕에 맞서 유지되기는 어려웠다. 38-9)


이와 더불어 남부의 목화 재배 열풍이 시작되고 체로키족 영역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체로키족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됐다. 1828년 조지아주는 체로키 헌법에 무효를 선고하고 체로키족의 토지를 요구했다. 앤드루 잭슨 대통령은 이를 승인했다. 인디언 거주지는 ‘용인되지 않을 것’이라 선언했다. 체로키족은 조지아주의 직권에 따르거나 서쪽 영토로 떠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대법원은 조지아주의 조치가 위헌이라고 선포했다. 그러나 상위 법원의 판결은 무단 거주자들의 맹공 앞에서 아무런 힘도 없었다. 합의에 따라 2000여 명이 자발적으로 떠났다. 그러나 1만6000명쯤 되는 나머지 사람들은 이를 거부했다. 미국 정부는 7000명의 민병대와 지원병을 보내 총검을 앞세워 그들을 체포하고 투옥시켰다. 철창에 갇힌 체로키 인디언들은 다시 오늘날 오클라호마에 해당되는 곳으로 강제 이주됐다. 체로키 인디언들은 이 여정을 ‘울면서 지나온 길Nunna daul Isunyi’이라 불렀다. 39-40)


3. 해조분에 대해 항상 궁금했으나 묻기 어려웠던 모든 것


1857년, 개즈든 매입이 비준된(1854)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은 카리브해와 태평양 연안의 작은 섬들을 합병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경에는 100여 개 섬을 차지하게 된다. 당시 그 섬들에는 원주민도 없었고 전략적인 가치도 없었다.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 비도 내리지 않는 바위섬인 경우가 많았다. 농사를 짓기에 부적합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19세기에는 누구나 간절히 바랐던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일반인들 사이에서 새똥으로 알려진 ‘백금’이었다. 해조분은 흔히 페루 연안의 친차 제도에 서식하는 가마우지, 얼가니새 및 펠리칸에게서 나오는 질산이 풍부한 똥으로 생각됐다. 게다가 친차 제도는 비가 거의 오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해조분은 몇백 피트 높이로 쌓였고 햇볕을 받아 말랐기 때문에 섬에는 몇 세기 동안 석회화된 새똥이 그대로 암석화되었던 것이다. 1840년대에 페루산 해조분을 실은 선박이 처음으로 들어왔고, 해조분은 곧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47, 49-50)


# 개즈든 매입(Gadsden Purchase).  현재 미국 애리조나주 남부와 뉴멕시코주에 해당하는 76,800 제곱킬로미터 지역을 1853년, 멕시코로부터 미국이 구입한 사건을 가리킨다.


해조분 채굴은 19세기에 이뤄졌던 노동들 중에서도 거의 최악의 노동이었다. 등골이 휠 정도로 힘들고 석탄 채굴 시 폐 손상과 같은 피해를 입게 될 뿐만 아니라 몇 달 동안 뜨겁고 건조한 데다 악취와 역병이 도는 섬에 고립돼 있어야 했던 것이다. 나배사 인산염 상사는 볼티모어의 흑인들을 일꾼으로 활용했는데, 1889년 감독관과 일꾼 사이에 시비가 붙었다가 이내 폭력 사태로 번졌다. 백인 관리자들이 도끼와 면도칼, 곤봉, 돌멩이, 못쓰게 된 권총과 다이너마이트를 들고 싸우던 일꾼들을 향해 발포했다. 아비규환 속에서 5명의 백인 관리자가 목숨을 잃었다. 다섯 구에 달하는 백인 시체와 신문 지면을 채운 살아남은 관리자들의 생생한 증언으로(다소 과잉된 반응의 ‘검은 학살자들’이라는 머리기사가 실렸다), 피고인들의 앞날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볼티모어의 흑인 인권 운동가들은 기금을 모아 막강한 법률팀을 고용했다. 그중에는 메릴랜드 변호사 시험을 통과한 최초의 흑인 변호사 E. J. 워링도 있었다. 53-4)


재판에서는 최후 수단인 정당방위가 최종 쟁점으로 떠올랐다. 변호사들은 폭동을 일으킨 사람들은 미국 관할권 밖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유죄 선고를 받을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아이티 역시 나배사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어떤 미국 관리도 그곳에 상주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도 주목했다. 그리고 해조분 제도법의 이상한 표현을 파고들었다. 해당 제도가 미국령에 ‘부속된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짚은 것이다. 부속되다니? 정확히 그게 무슨 의미인가? 피고인 측은 나배사를 외국 영토로 보았다. 이는 폭동을 일으킨 이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주기 위한 것 이상이었다. 이것은 미국이라는 제국의 적법성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져 곧 대법원까지 올라갔다. 대법원은 검사 측 손을 들어주며, 미국 법의 적용 범위에는 ‘명백히’ 나배사도 포함된다고 판결을 확인해줬다. 그러나 피고 측 주장에는 일리가 있었다. 나배사가 미국의 영토라면 정부는 어디에 있는가? 55)


벤저민 해리슨 대통령 역시 같은 의문을 품었다. 그는 폭도들이 ‘미국 영토 내에서’ 일하던 ‘미국 시민’임이 확실하다고 보았다. 또한 나배사 인산염 상사가 미국의 일부를 법이 아닌 회사 규정으로 다스려지는 자체 세력권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우려했다.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다. 해리슨 대통령은 조사를 위해 USS 키어세이지 군함을 보냈다. 키어세이지호 장교들은 나배사가 ‘재소자 시설’처럼 운영되고 있으나 감옥의 ‘편의 시설과 청결함’은 없다고 보고했고, 이에 해리슨은 폭동을 일으킨 이들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그는 주동자들의 사형선고를 감형해주고 이 문제를 연두교서에서 언급했다. 그는 “미국의 노동자들이 미국 관할권 내에서 정부 관리나 재판소의 도움으로 그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하는 처지라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당시까지 모호했던 원칙을 대통령이 확실하게 못 박아 말한 셈이었다. 즉 새똥이 널려 있는 바위와 섬들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 간에 그곳은 결국 미국의 일부였다. 55-6)


4.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최고의 날


1890년에 발표된 머핸의 장황한 논문인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은 그리 쉽게 읽히는 글은 아니나 강력한 시사점을 담고 있었다. 머핸에 따르면, 엄밀히 말해 한 국가는 자체 기지를 가질 필요가 없다. 실제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 우방국에서 빌리면 된다. 그러나 이는 평시에만 가능했다. 그리고 개척 종식의 시대에는 강대국 간의 평화 유지가 점차 어려워졌다. 이는 심각한 문제였다. 산업화가 진행될수록 원거리에서 생산된 농작물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이다. 해군 이론가인 머핸은 목적지보다 해상로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는 바다를 ‘훌륭한 고속도로’로 구상하고 미국이 이를 지속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사실상 해상로를 지키고 물자를 공급하는 데는 그 경로상의 지점들, 즉 안전한 항구만 있으면 된다. 머핸이 인정했듯이, 적군의 공습이 있을 때 한 지점이라도 사수하려면 그 주변에 영토를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기지가 본격적으로 식민지화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62-3)


당시 해군부 차관보였던 루스벨트가 보기에 그 책은 해군의 고전 이상이었다.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 역동적인 국가를 위한 각본이었다. 미국은 제국을 빼앗아야 한다. 기존 제국들을 몰아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거의 모든 전쟁을 환영할 것입니다. 이 나라에는 전쟁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루스벨트는 1897년에 이렇게 선언했다. 어디인지를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떠오르는 제국들 사이에서 확연히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는 제국은 바로 스페인이었다. 기다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898년 2월 15일, 원인 불명의 폭발로 아바나 연안에 배치된 메인호에 있던 262명이 사망했다. 2월 25일 오후, 루스벨트는 모든 중대장에게 배에 석탄을 가득 채우라고 명령하고 예비 탄약 보급품을 징발했으며 기지 사령관들에게 전쟁 가능성을 알리고 양 의원에 무제한 해군 신병 모집을 요구했다. 루스벨트는 특히 아시아 전대를 이끄는 듀이 준장에게 전쟁이 일어나면 필리핀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63-5)


그 전쟁은 대개 미국-스페인 전쟁이라 불리며 1898년에 시작됐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더 정확한 명칭은 스페인-쿠바-푸에르토리코-필리핀-미국 전쟁이 되어야 할 것이다. 미국은 실상 후발 주자였고, 스페인 제국을 거의 몰락시켜버린 장기간의 유혈 충돌이 끝나갈 무렵 한 차례 병력을 투입했던 것이다. 쿠바에 상륙(다이키리 해변에서 쿠바군이 스페인 군대를 무찌른 덕에 가능했다)한 직후 루스벨트는 쿠바인들을 보고는 ‘중대한 전쟁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완전히 넝마 상태’라고 생각했다. 널리 공유되던 그런 판단은 큰 영향을 미쳤다. 쿠바인들이 전쟁에 기여한 바가 거의 없다고 생각한 미군 지휘관들은 그들에게서 평화를 앗아가는 것에 대해 일말의 거리낌도 없었다. 필리핀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국과 스페인 군대는 비밀 협약을 맺어 마닐라를 두고 전쟁을 벌이는 척하기로 했다. 단 스페인이 마닐라를 미군에게만 이양하고 필리핀인들은 출입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69-70)


5. 제국의 속성


윌리엄 매킨리에게 모든 일은 매우 빠르게 일어났다. 스페인 제국이 몰락하면서 필리핀 군도 전체가 예상치 못하게 매킨리의 손아귀로 넘어갔다. 필리핀을 스페인에 다시 넘겨야 하나? 아니면 팔아야 할까? 그냥 이대로 두는 게 낫나? “나는 매일 밤 자정까지 백악관 안에서 서성였다.” 매킨리는 성직자들에게 “여러분, 저는 전능하신 주님 앞에 무릎 꿇고 빛으로 인도해달라고 숱한 밤 기도했음을 당당히 고백합니다”라고 했다. 매킨리에게는 어떤 선택지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식민지를 스페인에 반환하는 것은 ‘겁쟁이’처럼 보일 테고, 다른 나라에 이를 넘기는 것은 ‘잘못된 판단’일 것이다. 그는 필리핀인들에게 자치능력이 없다고 봤다. 그래서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즉 필리핀을 차지한 뒤 “필리핀인들을 교육하고, 그들에게 더 나은 삶을 안겨주고 문명인으로 만들어 기독교인으로 개종시키는 것이다. 주님이 인간을 위해 죽으신 것처럼,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베푸는 것이다”. 72)


그러나 법적으로는 해결할 문제들이 남아 있었다. 이는 1901년에 대법원까지 올라갔다. 수정헌법 제4조에 따라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국적을 받을 수 있었다. 여기에 영토도 포함되었는가? 정부는 미국United States이라는 말이 모호하다고 주장했다. 그 명칭은 미국 관할권 하의 모든 지역을 지칭할 수 있으나 협의의 개념으로 주 연합체를 가리킬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헌법이 가리키는 ‘미국United States’은 그런 협의의 개념이며 그 주들만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영토는 헌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단순한 이유로 헌법에 따른 보호를 받을 권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미국United States’에 다양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환기시키면서 보충 의견을 낸 대법원 판사는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문구를 통해 논거를 명확히 표현했다. 푸에르토리코는 “국내라는 맥락에서는 외국인데, 이는 해당 섬이 미국에 편입되지 않은 데다 점령지로서 미국의 부속물appurtenant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81-3)


1901년 판결은 통칭 도서 판례Insular Cases로 알려져 있다. (짐 크로법이 합헌이라고 명시한) 플레시 판례와 마찬가지로 도서 판례의 쟁점은 인종이었다. 다수 의견에는 헌법의 틀 내에서 ‘야만인’과 ‘이방의 인종’에 관한 것을 포함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한 대법관은 그렇게 하면 ‘미국의 제도가 망가져’ ‘정부 구조 전체’가 ‘전복’되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고 보충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1954년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사건에서 대법원은 플레시 판례를 뒤집고 ‘분리하되 평등한separate but equal’ 시설은 법에 따라 평등을 보장할 수 없음을 선언했다. 도서 판례는 이보다는 훨씬 덜 알려져 있다.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보장받는 수정헌법 제4조에 따른 시민권이 편입되지 않은 영토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 지역들에서는 투쟁을 거친 후에야 뒤늦게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는 ‘법정 시민권’으로 자리 잡게 됐는데, 헌법이 아닌 법령으로 보호되며, 따라서 무효가 될 수도 있는 권리였다. 83-4)


푸에르토리코인들은 1917년에 시민이 되었으며, 미국령 버진아일랜드인들은 1927년에, 그리고 괌 주민들은 1950년에 시민권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법정 시민권이기 때문에 무효가 될 수도 있었다. 필리핀인들은 47년간의 미국 통치하에서도 시민권을 획득할 수 없었다. 미국령 사모아인들은 1900년 이후로 ‘미국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법적으로만 ‘미국 국적자’일 뿐이다. 그들은 입대가 허용되며 많은 수가 군복무 중이다. 그러나 그들은 시민이 아니다. 도서 판례의 중요성은 법의 영역을 넘어선다. 미국 영토 중 ‘편입’된 부분과 ‘편입되지 않은’ 부분을 구분하는 이런 판례들은 미국의 일부 지역이 진정한 미국이 아니라는 생각을 법으로 확정지었다. 일부 영토는, 즉 백인 정착민들로 채워진 영토는 주 지위를 기대해볼 수 있었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대법원장이 표현했듯이 ‘육신으로부터 분리된 그림자처럼 무기한으로 모호한 중간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그런 ‘무기한’ 상태가 오늘날까지 계속된다. 84)


6. 자유의 함성을 내지르다


정복에 대한 환상은 언제나 똑같다. 지도자를 무너뜨리면 나라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을 얻었으나 필리핀군과의 싸움에 돌입하면서 이런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또다시 험난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필리핀 남쪽으로 갈수록 루손과는 상황은 다소 동떨어져 보였다. 아기날도의 항복은 이론상으로는 필리핀 공화국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미국은 세력 범위를 남쪽으로 넓혀 필리핀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인 사마르까지 확장을 꾀하다가 필리핀 저항 세력이 여전히 활동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1901년 5월, 아서 맥아더 장군(더 잘 알려진 더글러스 맥아더의 아버지)는 ‘과감한 조치’를 통해 ‘가능한 한 빨리’ 사마르를 ‘깨끗하게 처리’하라고 명령했다. 이러한 과감한 조치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방식이다. 교역을 중단시키고 농작물을 태워버리고 민간인을 이주시키고 게릴라에 맞서 험준한 지형을 넘어다니는 ‘하이킹’에 나서는 것이었다. 94)


극도로 가혹한 전술이 밝혀지면서 ‘유감’을 표명하긴 했으나 그 효과는 무시무시했다. 미국의 공공사업 활동은 저항군에 대한 지지를 약화시키는 한편, 고문·방화 및 식량 몰수를 통해 저항 세력을 혹독하게 응징했다. 1902년 공화당 의원 한 사람은 “필리핀은 군화에 짓밟히고 완전히 초토화되었다”고 말했다. “미군들은 포로도 남기지 않고 기록도 남기지 않은 채 필리핀을 간단히 쓸어버린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필리핀인을 잡기만 하면 죽여버렸다.” 이런 이야기를 보면, 목숨을 잃은 대다수 필리핀인은 광적인 ‘하이커’들의 손에 죽기라도 한 것처럼, 마치 전쟁이 사마르 전역에서 일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들릴 수 있다. 확실히 총격과 방화로 수만 명이 죽임을 당하긴 했다. 그러나 19세기에 흔히 그랬듯이 대부분의 전쟁 피해자는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였다.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되자 이러한 재해가 한순간에 급속히 확산됐다. 콜레라, 말라리아, 이질, 각기병, 우역, 결핵, 천연두, 선페스트가 한꺼번에 터져나왔던 것이다. 96-7)


민다나오, 팔라완, 바실란 및 술루 군도의 섬들을 가리키는 ‘모로랜드’는 필리핀에서 인구 밀도가 낮아 전체 인구 순위의 끝에서 세 번째에 해당되는 곳이었다. 이는 다른 나라였다. 주민의 대부분이 가톨릭교도가 아닌 무슬림(이른바 ‘모로인’)이었고 술탄과 다투 통치 방식을 따랐다. 이슬람법을 따르고 일부다처제였으며 노예제도 유지됐다. 러프 라이더스 시절부터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오랜 전우였던 레너드 우드 장군이 1903년 모로주의 총독이 되었다. 우드는 ‘확실한 교훈’을 기대했다. 그러나 얻은 것은 그가 두려워하던 것이었다. ‘수십 번씩 쓸데없이 반복’되는 양상이었다. 이는 우드가 바라 마지않던 싸움이었다.  모로주는 1913년에 민정이 실시되면서 14년간의 계엄령이 종료됐다. 사실 육군의 첫 12명의 참모총장은 모두 필리핀전쟁에 참전했다. 1899년 교전 발생 시부터 1913년 모로랜드의 군정 종식에 이르기까지, 필리핀전쟁은 아프간전쟁 다음으로 미국이 최장기로 참전한 전쟁이다. 98, 100-2)


# 다투. 필리핀 군도의 원주민을 다스리는 통치자를 일컫는 말


7. 배타적 집단의 외부


쿠바식 모델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03년 도미니카공화국의 재정이 붕괴됐다. 대통령인 카를로스 모랄레스는 미국의 도미니카 합병을 환영한다는 뜻을 넌지시 밝혔다. 그런 제안을 내놓은 것은 두 번째였다. 10여 년 전이라면 루스벨트는 모랄레스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필리핀전쟁 때문에 지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배가 불룩한 보아뱀이 고슴도치의 엉덩이까지 홀랑 삼켜버리기라도 할 듯 그 땅을 합병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대신 루스벨트는 쿠바 스타일의 계약을 체결했다. 미국 정부가 도미니카공화국 재정에 대한 임시 통제권을 가지며(따라서 미국 은행에 채무 상환을 보장), 그 대가로 모랄레스 정부를 반군 세력과 외부의 적들로부터 지킨다는 내용이었다. 이로써 미국의 이익은 보호받고 도미니카공화국은 독립을 유지하게 되었다. 미국은 카리브해 국가들과 차례로 그런 계약을 맺었다. 미국은 재정과 무역을 좌지우지하게 됐지만 형식적으로 주권은 손대지 않았다. 108)


남부 출신인 우드로 윌슨이 제국 추세에 역행하려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피식민지인들에 대한 윌슨의 동정은 확실히 남북전쟁 후, 그의 표현에 따르면, 북부가 ‘정복당한 속국’(이전 남부 연합 소속 주들)을 다뤘던 방식에 분노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윌슨이 남부 출신이라는 점에는 어두운 면도 있었다. 윌슨은 일부 주변 사람들처럼 유색인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아이’ 같은 존재로, 자치 이전에 ‘교육’이 필요한 존재로 봤다. 그는 아이들이 총기를 다룰 준비가 되기도 전에 힘을 얻는 건 최악의 상황이라고 봤다. 그는 이전에 노예였던 사람들이 남북전쟁 직후 공직에 나서는 것을 경계했다. 윌슨은 그런 상황을 ‘남부 백인이 검둥이의 발아래’ 놓이는 것이라고 썼다. 이는 대재앙이며 ‘문명의 진정한 전복’이라는 것이었다. 미 흑인의 때이른 정계 진출은 전쟁 그 자체보다도 더 ‘비할 데 없이 깊고 되돌리기 어려운’ 상처를 남겼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10)


윌슨은 작은 나라와 그들의 민족자결권을 위해 말했으나 그런 발언은 유고슬라비아·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헝가리 등 남부 유럽을 염두에 둔 것이었고, 푸에르토리코는 계획에 없었다. 1917년 미국 정부는 푸에르토리코 바로 옆의 카리브해 군도 중 작은 섬들로 이뤄진 덴마크령 서인도 제도를 사들였다. 이 식민지가 바로 미국령 버진아일랜드로서, 1900년 이후 합병된 최초의 유인 영토였다. 제국은 살아남았고 모든 승전국의 식민지는 그대로 유지됐다. 위임통치는 명백히 인종적 계급에 따라 정해졌고 중동 국가들의 영토는 최상위(독립의 과도기 단계인 ‘클래스 A’)에, 아프리카와 태평양 제도 영토는 그 아래(‘클래스 B와 C’)에 놓였다. 일본 대표는 국제연맹 협약에 최소한 인종적 평등에 관한 문구를 삽입하라고 요구했다. 이 제안은 압도적인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프랑스 대표는 그런 논지에 “반론의 여지가 없다”고 봤다. 그러나 윌슨은 이를 저지하며 인종 평등의 원칙을 그대로 두는 것조차 거부했다. 113-4)


8. 화이트 시티


“자본과 세심한 계획만 있다면 알아서 굴러간다.” 대니얼 버넘은 시카고에 화이트 시티를 세운 해에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나 당시는 그렇게 믿었는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그 발언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달았다. 계획은 ‘알아서 굴러가지’ 않았다. 세심한 관리가 요구됐던 것이다. 도시란 기괴할 정도로 복잡하기에 도시계획에는 세밀한 주의가 요구된다. 시카고 계획은 구상에서부터 실행에 이르기까지 그룹 활동일 수밖에 없었다. 이를 수행하는 데에는 수십 년이 걸렸다. 400명의 저명인사로 구성된 위원회가 이 계획의 시행을 담당했다. 반면 필리핀은 달랐다. 설득할 유권자도 없었다. 버넘은 도착할 때까지 필리핀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몰랐고, 체류 기간은 6주에 불과했다. 버넘은 총 6개월간 계획에 몰두했는데, 그 기간에 여행과 관광도 하면서 바기오에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시켰다. 시카고에서라면 버넘이 그토록 서둘러 일을 끝낼 순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닐라에서는 가능했다. 119-20)


버넘과 같은 사람들에게 식민지란 본국에서 계획에 차질을 불러오는 저항에 부딪힐 걱정 없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현할 수 있는 일종의 놀이터였다. 본토인들은 땅을 몰수하고 세금을 전용하고 산꼭대기에 낙원을 짓기 위해 일꾼들의 목숨을 희생시켜도 되었던 것이다. 한편 필리핀인들은 그 과정에서 부수적인 존재로 밀려났다. 버넘의 도시계획 한가운데에 따로 분리된 공간은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으나 그들이 낸 세금으로 비용을 충당했다. 그들이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은 식민 지배자의 눈에 가치 있는 존재임을 어필해 조금이나마 존중을 받는 것뿐이었다. 건축 분야에서는 윌리엄 파슨스보다 더 심혈을 기울여 버넘의 계획을 실행한 후안 아레야노가 본보기라 할 수 있었다. 아레야노가 마닐라에 돌아오자마자 처음으로 받은 중요한 의뢰는 버넘이 루네타 주변 지역에 계획한 의사당 건축이었다. 의사당 건물의 상징성으로 마닐라라는 위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건물을 지은 사람이 필리핀인이라는 사실이다. 125-7)


9. 국경없는의사회


프리츠 하버가 1915년 이프르에서 염소가스를 방출한 이후 화학전의 위협이 감돌았다. 루스벨트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가스를 먼저 사용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으나 군대는 그와 상관없이 화학전에 대비했다. 독가스를 제조하고 테스트까지 했다. 화학전 부대의 의료 지원팀을 이끄는 사람은 코닐리어스 로즈였다. 의료 지원팀 지휘관으로서 그는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승인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고위급 의사였다. 화학전 부대의 기록을 검토해봐도 그가 실험을 주저하거나 망설였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열정적으로 실험을 주도했다. 그는 사람들을 데리고 와 가스실로 보내도록 했으며 그들에게 어떤 가스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권고하기도 했다. 그는 다른 피부색을 지닌 사람들이 화학물질로 인한 화상에 얼마나 다르게 반응하는지 등 실험에 대한 의견을 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로즈는 “화학전에서 독가스를 비롯한 사전 공작에 맞서 싸운” 데 대해 공로훈장을 받았다. 140-1)


로즈에게 이는 시작일 뿐이었다. 과학자들은 전쟁 초기부터 로즈가 주로 다루던 화학물질인 겨자 작용제가 림프 조직과 골수를 표적으로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림프종을 치료하는 데 사용되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과학자들은 전쟁이 끝나자 전쟁 중에 알게 된 사실을 활용해 이 문제를 다시 다루기로 했다. 로즈는 화학전 부대에서 그와 함께 겨자 작용제를 연구했던 프로그램 관리자 거의 전원을 채용했다. 이번에는 신약 개발이라는 명목이었다. 맨해튼 메모리얼 병원과 슬론 케터링 연구소 두 곳의 이사장을 나란히 맡은 로즈는 대규모 연구실과 함께 풍부한 자금도 확보한 상태였다. 게다가 병원은 실험 단계의 치료법에 기꺼이 동의할 만한 불치병 환자들로 가득했다. 로즈는 암과 싸우기 위해 각종 화학물질을 실험하면서 이른바 ‘전력을 다해 전면 공격’에 나섰다. 『사이언스』는 그를 당대 ‘미국 의학계에서 가장 뛰어난 연구자 중 한 사람’으로 추켜세웠다. 그는 1949년에 『타임』 지의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141-2)


10. 미국이라는 요새


미국 영토 거주자들에게 제국이란 일상에서 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본토에서 제국의 존재는 시야에서 간단히 사라져버렸다. 영국이 거대하게 우뚝 솟은 웅장한 건물을 점령지 통치의 기반으로 삼았다면, 미국은 식민지 수도에 단 하나의 식민지 건물도 짓지 않았다. 식민지 관리를 길러내기 위한 학교도 짓지 않았다. 미국은 아무런 계획도 없이 육·해군 및 내무부 산하의 급조된 관료주의 체계에 따라 해외 영토를 관리했던 것이다. 이유는 뻔했다. 유럽 식민지를 감독했던 전문 행정관과 달리 해외 영토에 파견된 이들은 자기가 배치된 곳에 대해 잘 몰랐고, 보직 순환이 빨랐던 것이다. 본토의 무신경함은 늘 이들 영토에 부담으로 다가왔으나, 1930년경에 이는 노골적인 위협으로 발전했다. ‘요새화된 미국Fortress America’이 적대적인 세력에 맞서 방어벽을 세우자 이후 10년간 경제적 파탄과 군사적 위험이 이어졌다. 식민지들은 보호는 커녕 오히려 본토를 둘러싼 장벽이 높아지자 외부의 감시를 받게 됐다.143-4)


전 세계를 휩쓴 대공황으로 전 세계가 무역에 문을 닫아걸자 주요 국가들은 내수 생산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내수란 식민지가 포함된 개념이었다. 네덜란드와 프랑스, 영국 등 주요 제국주의 국가들로서는 아시아의 식민지로부터 고무와 같은 열대작물을 여전히 조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리고 거대 제국을 거느리지 않은 독일이나 이탈리아, 일본과 같은 산업 국가들은 식민지에서 물자 조달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중요한 요소였다. 미국은 특수한 상황에 있었다. 식민지를 보유하긴 했지만, 식민지가 생명줄은 아니었다. 오히려 잠재적 위협에 가까웠다. 일례로 식민지에서 생산된 설탕은 본토의 사탕수수와 사탕무에서 추출한 설탕과 경쟁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본토 농부들은 자신들이 보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0년대 미국은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막대한 관세를 부과했다. 이러한 정서 때문에 국경 자체가 달라질 상황이었다. 필리핀은 미국이라는 거대한 장벽 밖으로 쫓겨날 참이었다. 146-7)


본토는 필리핀에 그리 의존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수십 년간의 미국 통치 후 필리핀은 미국 본토에 상당히 의존하게 되었다. 1930년경에는 필리핀의 대미 교역이 전체의 약 5분의 4에 달했다. 게다가 식민지 정부는 현지 저항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소규모 원주민 부대를 창설했으나 필리핀은 외세의 침입을 격퇴할 대외군을 창설할 수 없었다. 갑자기 미군의 보호와 본토 시장에 무관세로 상품을 수출하던 길이 동시에 막혀버리자 대혼란이 일어났다. 미 하원에서 필리핀 독립을 승인하는 법안이 순조롭게 통과되자, 필리핀 의회는 1934년 5월 1일, 미국의 필리핀 점령 36주년이 되는 날 만장일치로 이 법안을 비준했다. 강대국이 최대 식민지를 폭력으로 위협하지 않고 독립시키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가까운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현재의 인도네시아)는 300년간 네덜란드의 통치하에 있었다. 그러나 그 10분의 1에 해당되는 기간 동안 미국의 점령하에 있던 필리핀은 독립을 앞두게 됐다. 148-9)


11. 전쟁 국가


교전 지역의 삶은 언제나 조심스럽고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했다. 외출할 때는 방독면을 들고 다녀야 했다. 엄격한 통금을 지켜야 하는 삶이기도 했다. 그러나 안전 조치들은 침략에 대비한 것만이 아니었다. 군대는 하와이 주민 자체에 대해서도 극도의 경계 조치를 주장했다. 해군장관이 보기에 하와이는 주민의 3분의 1 이상이 일본계여서 인구 구성이 의심스러운 ‘적국’이었다. 이에 따라 미국 역사상 최초로 대규모의 지문 날인과 최대 규모의 백신 접종 캠페인이 진행되었다. 하와이 주민들은 신분증을 항상 소지하고 다녀야 했으며 이를 지키지 않으면 체포될 수 있었다. 거리에 돌아다니는 총 외에도 육군은 법 시행을 위한 군정재판소 체제를 수립했다. 그들이 시행한 정의는 성급했고 무자비했다. 하와이 군정재판소에서 (배심원도 변호사도 없이) 재판받은 수만 명의 피고인은 강도, 폭행, 사기 등과 같은 일상적인 일로 기소되지 않았다. 그들은 주로 결근, 통금 위반, 교통 위반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160-2)


그렇다고 하와이 교도소에 수감된 사람이 많았다고 생각할 이유는 별로 없다. 복역 대신 헌혈하거나, 벌금을 내는 대신 전시 채권을 구입하라고 피고에게 명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식으로 육군은 하와이 주민들에게 애국적인 행위에 가담하도록 강제했으나, 본토인들은 이를 선택할 수 있었다. 하와이의 계엄령은 3년 여간 지속됐는데, 이는 일본이 하와이에 위협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기간보다 2년 반 정도 더 길었다. 하와이의 군사령관은 지배권 포기를 계속해서 거부했다. 내무장관은 이를 “미국의 하와이 ‘점령 영토’”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결국 계엄령이 해제된 것은 잇달아 법적 이의가 제기되면서 일반에 해당 사안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영토 문제에 본토가 관심을 가진 드문 경우였다. 대법원은 하와이의 계엄령은 불법이며 그곳의 시민들은 본토 시민들과 동일한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그런 판결은 계엄령뿐 아니라 전쟁 자체가 완전히 종식된 1946년에 가서야 내려졌다. 163)


일본은 필리핀을 점령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알래스카로 넘어갔다. 1942년 6월, 일본은 더치 하버를 폭격했고 알류샨 열도의 아가투, 아투, 키스카섬을 점령했다. 일본군은 1년 넘게 이 섬들을 점령한 후 아투의 몇 안 되는 인구(42명)를 전쟁 포로로 삼아 일본으로 이송했다. 알래스카 일부를 점령한 것은 중대한 성취였고 선동가들은 알류샨 열도에서 일본으로 가져온 유적을 자랑스레 전시했다. 미국 본토인들은 그 사건에 대해 거의 몰랐는데, 이는 공식적인 검열 때문이었다. 알래스카에서는 검열이 의무였고 굉장히 활발히 이뤄졌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완벽에 가까운 정보 봉쇄였다. 군 당국의 광범위한 해석에 따라 알래스카 생활의 거의 모든 부분이 그렇게 통제됐다. 기자들은 알래스카를 ‘가장 조용한 전구戰區’라거나 ‘숨은 전선’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이는 잊힌 전쟁이다. 일본군이 알래스카 근처까지 왔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알류샨 열도의 알류트족 억류 사실을 알면 또 한 번 놀란다. 164-5)


12. 목숨을 내놓아야 할 때가 있는 법


일본은 식민지 주민들의 원한을 제대로 이해했다. 일제 선동가들은 필리핀인들에게 미국의 기나긴 제국의 역사를 상기시키면서 북미 인디언의 토지를 강탈한 이야기로 시작해 멕시코전쟁과 스페인 식민지 합병 및 필리핀전쟁으로 이어갔고, 일본의 침략에 대해 초토화 정책을 채택한 데까지 나아갔다. 한 일본 언론인은 “미국이 널찍한 대로와 산속 호화 리조트를 짓기 위해 여러분의 세금을 마구 썼다”고 덧붙이며 대니얼 버넘의 시대에 입은 상처에 소금을 마구 비벼댔다. 일본은 다른 것을 약속했다. ‘아시아인을 위한 아시아’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것이다. 이는 오랫동안 식민지를 겪었던 지역에서는 강력하고 혁명적인 생각이었다. 일본은 백인 열강들이라면 아시아의 독립을 절대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연합국에서 가장 이상주의적인 사람들조차 모든 인종을 동일한 존재로 생각해야 한다는 원칙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으니, 아시아인들이 동등한 존재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대체 얼마나 되겠는가? 180-1)


막상 일본의 통치가 시작되자, 이와 관련된 상황은 기대와 반대로 흘러갔다. 마닐라를 장악한 후 나온 일본의 첫 공식 발표는 위협적이었다. 필리핀인 및 ‘자국 영토 전체’에서 비롯되는 어떤 적의나 저항도 ‘잿더미’로 화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둘째 주가 되자 군정은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17가지 행위를 적시했다. 여기에는 반란, 허위 정보 유포, 군사적 가치(의류 포함)가 있는 모든 것의 훼손, 식량 은닉, 통행 방해, 또는 어떤 식으로든 군의 ‘이익에 반하는’ 행위 등이 포함됐다. 이러한 행위를 권유하기만 해도 처형의 근거가 됐다. 필리핀인들은 곧 일본이 필리핀을 해방시키러 온 것이 아니라 약탈하러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주 예전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1899년을 다시 사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또다시 콜레라가 마닐라를 덮쳤다. 사회적 붕괴와 사람들의 이주 때문에 초래된 결과였다. 필리핀인들은 또다시 저항했다. 항복한 맥아더 군대의 잔류병들과 새로 결성된 게릴라군들은 일본인들을 공격했다. 181-2)


1944년 10월, 20만 명이 넘는 맥아더 부대가 해변에 상륙하면서 필리핀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싸우기 전에 퇴로를 차단해버렸다”는 것이 맥아더 선두 사단의 공식적인 기록이었다. 이와부치의 퇴로를 끊어버림으로써 맥아더는 사실상 인구 밀집 도시에서 최후의 저항을 하라고 부추긴 셈이었다. 맥아더의 병사들은 신중히 대량 학살의 현장으로 들어갔다. 일본군이 도시 전역의 건물 안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건물에 들어가 하나하나 찾아내 습격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 건물 전체를 폭격하는 것이 훨씬 더 쉬워 보였다. 일본군이 특히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던 인트라무로스는 결국 맥아더의 승인하에 완전히 잿더미가 됐다. 2월 23일, 미친 듯이 폭격이 계속되던 한 시간 동안 아직 사람이 살고 있는 도시의 밀집 지역으로 1분마다 3톤에 달하는 폭탄이 날아들었다. 건물 안에 있는 일부는 적군이기도 했지만 대다수는 민간인이었다. 이 민간인들 역시 정당한 대우를 받지는 못했을지라도 ‘미국인’이었다. 187-90)


제2부 점묘주의 제국


13. 킬로이가 여기 다녀갔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미국 본토를 군수품을 대량으로 쏟아내는 거인의 심장이라고 생각해보자. 일련의 기지들은 동맥처럼 기능하면서 이러한 군수품을 전선으로 내보낸다. 이들 기지에는 비행기가 착륙하고 선박이 정박하며 부품과 연료·식량이 저장되고, 또 이곳에서 부상자를 치료하고 손상된 물건들을 수리했다. 1940년 당시 루스벨트 행정부는 서반구의 영국령 기지와 50대의 구축함을 교환했다. 미국은 이 기지들을 99년간 조차했다. 그러나 관할권의 범위는 깜짝 놀랄 정도였고, “아마도 영국 정부가 이전에 영국령을 넘긴 그 어떤 경우보다 광범위할 것”이라고 영국 주재 미국 대사는 자랑했다. 전쟁 중에 미국은 2000개의 해외 기지에 무려 3만 개에 달하는 군사시설을 보유하고 있었다. 미군들은 어딜 가나 눈에 띄는 낙서로 자신들의 존재를 표시했다. 벽 너머를 들여다보는 만화 캐릭터 얼굴에 “킬로이가 다녀갔다Kiloy Was Here”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실제로 킬로이는 어디에나 있었다. 199-201)


간단히 말해,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을 전 지구적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국무부 관리들은 지도상의 각 나라, 식민지, 지역, 속령 등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확립하면서(많은 경우 처음으로) 전시 메모를 맹렬한 기세로 쏟아냈다. 외몽골, 북부 부코비나, 중국령 투르키스탄(신장 위구르 자치구), 영국령 보르네오섬, 프랑스령 소말리아, 남부 소말리아 또는 카르파소 남부 루테니아 등 미국의 주요 의제에 등장한 모든 지역에 관해 어떤 입장을 취할지 고심하는 모습은 얼굴에 진땀이 흘러내리는 만화 캐릭터가 연상될 정도였다. 미국에서 전쟁은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1944년에 기자인 존 허시는 “한때 유럽의 침공이 쉴 새 없이 이민자가 미국으로 밀려들어온 방식이었던 것처럼, 이제는 이 이민자의 자손들이 쉴 새 없이 유럽으로 몰려가는 식으로 미국의 침공이 일어나고 있다”고 썼다. 다른 점이 있다면 유럽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는 것뿐. 남극을 제외한 모든 대륙에 대거 ‘침공’이 이뤄졌다. 202, 204-5) 


14. 미국의 탈식민화


제2차 세계대전은 전 세계적으로 제국에 대한 저항을 촉발시켰다. 반란은 아시아에서 시작됐지만 이내 아프리카와 카리브해 지역 및 중동으로 퍼져나갔다. 놀라울 정도로 짧은 기간에 식민지 주민들은 전 세계의 대제국들을 해체시켰다. 1940년에는 전 세계의 거의 3분의 1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식민지 상태에 놓였다. 1965년에는 그 수가 50분의 1로 줄었다. 식민지 주민들은 백인 지배 세력이 아시아의 힘에 의해 물러나는 것을 목격했다. 이는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그들은 다년간 라디오 스피커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아시아인을 위한 아시아’라는 일본의 메시지를 들었다. 1943년에 그들은 버마와 필리핀에서 일본이 식민지들에 명목상이나마 독립을 허락했을 당시 자유 그 자체를 맛봤다. 아시아인들은 생각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동에 옮길 수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아시아 전역에 무기가 보급되자, 식민지 시대 전반을 특징지었던 엄격한 군비 통제는 완전히 효력을 잃었다. 210-1)


미국은 억지로 식민지를 보유하려 하기보다는 필리핀을 서둘러 포기했다. 이는 일제 부역자 문제를 남겼다. 루스벨트는 사망 전에, 전쟁 중 일제에 부역한 이들의 권한을 박탈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그러나 누가 ‘부역자’이고 누가 아닌지를 가리기가 애매했다. 맥아더의 보좌관이었던 마누엘 로하스 주위로 짙게 드리워진 암운이 소용돌이치면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전쟁 중에 로하스는 친일 정부 내각의 인사였다. 그는 일제에 ‘깊숙이 관련되어 있었던 것이 분명’하나, 미 총영사는 “양측을 도우며 신중을 기했다”고 보고했다. 맥아더는 이를 참을 수 없었다. “로하스는 부역자가 아니오.” 그는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했으나) 로하스가 “게릴라 운동의 주요 동력 중 하나였다”고 주장했다. 1946년, 필리핀 사회의 유력 인사들 중 일부의 지지를 받아 로하스는 독립 국가가 된 필리핀의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부통령은 미국의 필리핀 탈환(마닐라 전투) 기간에 가족을 잃은 엘피디오 키리노였다. 216-7)


필리핀 독립을 묵인하기 위해 미국 지도층은 필리핀인들의 자치능력이 부족하다는 인종차별주의적 두려움을 버려야 했다. 하와이와 알래스카의 식민지 지위를 끝내려면 이와는 다른 종류의 인종차별주의를 극복해야 했다. 하와이와 알래스카의 주 지위를 인정하기 위해 본토 정치인들은 백인의 확고한 지배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했다. 1948년부터 트루먼은 그런 목표를 활발히 추진했다. 그 영토들에 주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아시아와 태평양 도서 지역 주민들의 마음’에 ‘엄청난 심리적 영향’을 끼치리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곳의 미국 편입은 국내 정치의 다른 축을 흔들어놓을 것이 분명했다. 이 신생 주들이 소속 정당에 얼마나 충성하든 간에, 인종적 구성으로 인해 시민권 운동에 확실히 힘을 실어주게 될 것이었다. 이로써 거의 언급되지 않았던 시민권 전쟁의 전선이 열렸다. 마침내 1959년에 알래스카와 하와이는 각각 49번째 주와 50번째 주로 의회 승인을 받았다. 218-20)


15. 푸에르토리코가 미국인 걸 아는 미국인은 없다


무뇨스 마린과 알비수는 공통점이 많았다. 젊고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였으며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고 본토 명문 대학의 법학 학위를 소지하고 있었다(무뇨스 마린은 조지타운, 알비수는 하버드). 그들은 대화하면서 정치적 견해가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동기는 달랐다. 알비수가 ‘미국인을 몰아내는’ 데 골몰해 있었다면 무뇨스 마린의 일차적 관심사는 ‘기아 퇴치’였다. 필리핀이 해방된 1946년에 무뇨스 마린은 공개적으로 독립에 반대하면서, 당 내부에서 독립을 지지한 이들을 숙청했다. 그의 대중민주당PPD은 독립도 주 지위 획득도 아닌 그 중간에 해당되는 해결책을 찾으려고 했다. 미국 시장 진출 기회를 잃지 않으면서도 푸에르토리코가 자치권을 획득하는 게 최선이었던 것이다. 탈식민화가 빠르게 이뤄지는 가운데 필리핀이 독립을 쟁취하고 괌은 시민권을 얻었으며 알래스카와 하와이는 주 지위 획득에 나서자, 본토 정부는 푸에르토리코라는 난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224-5)


무뇨스 마린은 푸에르토리코 기아 문제를 두 가지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식량 생산을 늘리든가 아니면 인구를 줄이는 것이었다. 그는 경제 발전을 촉진해 푸에르토리코를 빈곤에서 점차 벗어나도록 지휘했지만 그 역시 두 번째 해법에 솔깃했다. 그는 “인구를 줄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현실적이며 가장 저렴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고 썼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가 대부분인 사회에서 이는 민감한 문제였다. 산아제한은 민족주의자들의 분노를 부추겼다. 알비수는 오히려 인구가 부족하다고 봤으며, 산아제한이 ‘민족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침범’하려는 시도이자 푸에르토리코인의 출산의 자유를 가로막는 행위라고 여겼다. 공개적으로 정부는 산아제한과 무관했다. 하지만 비공개적으로는 의사와 연구자 그리고 제약 회사에 최선을 다할 것을 주문했다. 푸에르토리코가 20세기의 가장 혁신적인 발명품 중 하나인 피임약을 실험하기 위한 무대가 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226-7)


1947년 무뇨스 마린의 정당은 이민국을 설립했다. 주민들이 섬을 떠나도록 하는 일을 전담하는 국가 기관으로, 매우 희귀한 경우였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떠났다. 1950년에는 푸에르토리코인 7명 중 1명이 푸에르토리코가 아닌 본토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55년에는 거의 4명 중 1명에 육박하게 됐다. 알비수는 여전히 독립을 주장했던 반면, 무뇨스 마린은 좀 덜 강압적인 형태의 식민 정책을 추구했다. ‘미국인을 몰아내는 것’과 ‘기아를 몰아내는 것’을 두고 1930년대에 그가 저녁을 먹으며 알비수와 벌였던 토론은 우호적인 논쟁에서 곧 세계관의 근본적인 불화로 비화하게 됐다. 그러나 뉴욕으로 이주의 물결이 거세지자 독립해야 할 명분은 더 약화됐다. 뉴욕에 거주하는 푸에르토리코인의 존재 한 명 한 명이 푸에르토리코를 미국과 더 단단히 묶어버렸다. 1950년 7월 무뇨스 마린의 요청으로 트루먼 대통령은 새로운 정부 구성을 위해 푸에르토리코 헌법제정회의를 요구하는 법에 서명했다. 230-2)


이어진 주민투표는 푸에르토리코 주민들에게 주 지위를 원하는지 아니면 독립을 원하는지를 묻지 않았다. 본토에 대한 기존의 식민지 관계의 범위 내에서 새로운 헌법을 택할 것인지를 물었다. 4대 1로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겠다는 투표 결과가 나왔다. 새로운 정부는 영어로 ‘연방Commonwealth’이라 불렸으며 스페인어로는 ‘자유연합주’라고 불렸다. 사실상 권한 구조는 변한 것이 없었다. 푸에르토리코인들은 미 연방정부에 대해 투표권이 없었으나 정부는 푸에르토리코에 대해 재량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미국 의회는 그런 재량권을 활용해 헌법 개정안에 따른 경제적 권리에 대한 법안을 즉시 부결시켰다). 차이가 있다면 무뇨스 마린이 주장한 대로 이제 본토와의 관계는 푸에르토리코 유권자들이 승인한 것이며 따라서 강제에 의한 관계가 아니고 상호 합의에 의한 관계가 된 것이었다. 미국 침공 기념일인 1952년 7월 25일, 무뇨스 마린은 푸에르토리코 연방의 초대 지사로 취임했다. 235)


16. 합성소재의 세계


식민지 작물이라 할 수 있는 고무는 산업 경제의 구석구석 쓰이지 않는 데가 없었기 때문에 수익성 높은 사업이었다. 1941년 12월 7~8일, 일본은 고무를 비롯한 핵심 원자재 공급 문제를 우려해 중국 너머로 전쟁 범위를 확대했고 자원 매장량이 풍부한 동남아시아까지 진격했다. 몇 달 만에 일본은 미국 고무 공급의 97퍼센트를 차지한 유럽 식민지를 점령했다. 미국과 동맹국들은 사실상 고무 공급원이 끊긴 셈이 됐다. 이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위협이었는지 제대로 옮기기는 어렵다. 대대적으로 주목받았던 한 정부 보고서에는 이러한 상황이 “매우 위험하므로 즉각적인 시정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미국은 전방과 후방 모두 붕괴 위기에 직면할 것이다”라는 내용이 담겼다. 새로 심은 고무나무는 채취하기까지 최소 6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됐다. 다른 식물에서 고무를 추출할 수 있을까? 수천 명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이를 실험(마치 식물학 분야의 맨해튼 프로젝트라 할 만했다)했으나 별 소득은 없었다. 244)


고무 합성의 비결이 밝혀졌을 때 극적인 대발견의 순간 같은 것은 없었다. 이는 충분한 자금을 지원받은 화공학자 집단이 이끌어낸 1000여 가지 발견에 힘입은 결과였기 때문이다. 산업적 성취는 과학적 발전만큼이나 놀라웠다. 전쟁이 끝날 무렵 미국에는 51개의 합성고무 공장이 가동되었고, 그것들의 전체 운영비를 합치면 하루에 200만 달러에 달했다. 그런 공장 한 곳에서만 1250명이 일했고, 2400만 그루의 고무나무와 9만 명 이상의 노동력을 요하는 고무농장을 대체하기에 충분한 합성고무를 만들었다. 1944년 중반의 고무 공급은 정부 요건을 충족했고, 1945년경에는 이를 넘어서기에 이르렀다. 합성고무가 화학자들이 모자 속에서 홱 끄집어낸 유일한 토끼는 아니었다. 정말 놀라운 일은 미국이 전쟁 중에 거의 끊다시피 한 원자재의 수였다. 견사, 삼, 황마, 장뇌, 목화, 양모, 제충국, 구타페르카, 주석, 구리, 동유 등을 차례로 합성 물질로 대체했다. 미국 경제 전반에서 식민지는 화학으로 대체되었다. 247-8)


플라스틱만큼 이런 상황을 잘 나타내는 합성소재는 없다. 미군은 더 이상 쉽게 확보할 수 없는 모든 ‘전략’ 물자 대용품으로서 대부분 석유로 만든 플라스틱을 사용하고자 했다. 전시 협력은 가능한 한 플라스틱을 기반으로 이뤄져야 했던 것이다. 합성고무는 천연고무가 사용되는 주요 분야 하나를 대체한 반면, 플라스틱을 미세하게 응용할 수 있는 범위는 무수했다. 투명 플라스틱인 플렉시유리Plexiglas는 비행기 조종석 창문을 만드는 데 사용될 수 있었다. 셀로판지는 식품 저장고의 양철통을 대체할 수 있었다. 플라스틱과 유리를 합성한 유리섬유는 항공기 제작에 사용할 수 있었다. 1930~1950년에 전 세계에서 연간 생산되는 플라스틱의 양은 40배가 늘어났다. 2000년에는 1930년의 규모에 비해 약 3000배로 늘어났다. 각종 원자재를 식민지에서 추출하기보다는 국제 무역을 통해 안전하게 조달할 수 있게 되면서 긴박감이 상당히 줄었다. 국가 보안이 더 이상 원자재에 좌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248-52)


17. 이것은 신이 행하신 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 기획자들은 한 당황한 장군이 표현한 “상상 이상의 군수품 요건”에 맞닥뜨렸다. 모든 해외 주둔 군인에게 미국은 하루에 30킬로그램의 군수품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확실히 전쟁 발발 전에 군수logistics란 전문가 용어였지 일상의 대화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사관학교에서는 용맹과 리더십, 전술적 정확성을 높이 샀으며 조달과 운송은 뒷전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전장에서의 영웅적 행위를 찬양하는 데 그쳤던 사령관들은 점차 적재량과 재고 수준, 물자 보급로에 관해 자주 언급하게 됐다. 군수 혁신은 속도를 높이는 것 이상이었다. 장거리 운송망을 운영하기 위해 더 이상 대규모 지역이나 지대를 점령할 필요가 없었다. 지도상의 지점들을 연결하는 것만으로도, 때로는 밀림의 공터에 있는 비행장 정도만 연결하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플라스틱과 기타 합성소재처럼 이들 신기술은 식민지를 전혀 필요 없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259-60)


항공기 수가 넘쳐나자 연합군은 이것을 전투 이외의 목적으로도 활용할 수 있었다. 거의 모든 분야에 활용했을 정도다. 장거리 보급로도 항공 운송을 통해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은 거의 4000대에 달하는 B-29 슈퍼포트리스를 생산했는데, 이것들은 각각 20톤의 물자를 실어 나를 수 있었다. 항공술과 마찬가지로 무선은 공간을 건너뛰는 기술이었다. 두 개의 트랜스시버만 있으면 되었다. 그 사이에 위치한 땅을 통제할 필요도 없었다. 무선을 통해 멀리 떨어진 지역이 서로 연락할 수 있게 됐을 뿐만 아니라 배와 비행기, 트럭, 탱크, 잠수함 그리고 전장에서도 통신이 가능해졌다. 미국이 전 세계에 건설한 멀리 떨어진 수천 개의 기지는 무선 기술 없이는 운영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메시지를 내보내면 누구든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미국은 암호화 기술에 엄청나게 투자했다. 1만6000명의 암호 통신 사무직원이 전쟁 중에 통신 암호화와 암호 해독에 종사했다. 261, 265-6)


18. 붉은색 팔각형의 제국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부유하고 막강한 데다 화학자와 공학자들 덕분에 식민지 건설 없이도 해외 영토를 좌지우지하는 수단을 보유하게 됐다. 이것 말고도 전쟁 덕분에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게 됐다. 이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좀더 심층적인 수준에서 진행됐다. 바로 표준에 관한 것이었다. 1920년대에 표준국에는 가장 신뢰받는 정부 관리 중 한 명이 있었다. 바로 상무장관인 허버트 후버였다. 오늘날 후버는 1929년 재임 중에 주식시장 폭락을 겪은 불운한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있다. 후버는 요령 없는 정치인이자 경제 운용에 서투른 사람이었는지 모르지만, 매우 유능한 관료였다. 후버가 생각하기에 진정한 경제 문제의 원인은 자본가의 부정 때문도, 노동자의 조바심 때문도 아니었다. 바로 물건의 비효율성 때문이었다. 효과가 없는 일에 많은 시간과 돈이 낭비됐던 것이다. 그는 그 문제를 해결하면 모두가 골고루 혜택을 누리고도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표준화와 간소화를 번영의 핵심이라고 본 것이다. 274-7)


표준을 공표하는 제국의 능력은 식민지 정복의 주요 이점이었다. 제국의 표준화란 머나먼 땅에서도 식민 지배자의 관행이 지켜진다는 의미였다. 제국은 새로운 법과 아이디어, 언어, 스포츠, 군사 협정, 패션, 도량형, 예의범절, 화폐, 업계 관행 등을 식민지에 고스란히 옮겨놓았다. 실제로 식민지 관리들은 이러한 작업에 상당한 시간을 투자했다. 영국의 도량형 체계(피트, 야드, 갤런, 파운드, 톤)가 제국주의 체계라고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러한 도량형은 영국 제도를 넘어 대영제국 전체에 동일한 단위 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보급됐던 것이다. 제국은 사람들까지 표준화시켰다. 필리핀의 간호 업무를 예로 들어보자. 영토 합병 이후 미국 정부는 곧 그들을 교육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이후 필리핀이 미국의 최대 외국 간호 인력 공급지가 된 데에는 시장의 역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필리핀이 비교우위를 갖게 된 것은 여러 세대에 걸쳐 간호사들이 정확히 미국 표준을 따른 실무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279-80)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표준 문제는 한층 더 심각했는데, 미국이 유럽에 인력과 자금만 보낸 게 아니라 세계 전역으로 엄청난 물량을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국은 비호환성 문제를 해결하고자 여분의 나사와 너트, 볼트를 해외로 보내는 데 6억 달러를 썼다. 제조업체들이 그냥 유럽식 표준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던 것일까? 유럽이 연합군 전시 경제의 중심에 있을 경우에만 유럽 표준을 따르는 것이 합리적이었고, 유럽은 곧 그 중심적 역할을 잃었다. 프랑스의 함락과 영국에 대한 폭격 사태로 유럽의 공장들은 가동을 멈췄다. 동시에 미국 제조업은 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미국 공장들이 더 많은 물건을 생산할수록 그들의 표준화 작업은 더 정교해졌다. 저명한 두 전문가의 표현에 따르면, 표준화의 목표는 “전체 공정을 거대한 강처럼 순조로운 흐름에 통합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미국 주도의 표준화를 감안할 때 전후 세계화가 적어도 처음에는 미국에게 유리했다는 사실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281-2)


19. 언어는 바이러스다


언어는 정지 표지판이나 나사산과 마찬가지로 표준에 해당되지만, 그보다 더 깊은 층위에서 작동한다. 언어는 어떤 개념을 떠올리기 쉽게 혹은 어렵게 만들면서, 사고방식을 형성하고 동시에 사회를 구성한다. 단일 언어가 지구상에서 지배적인 언어가 되었다는 사실, 거의 모든 교육받은 권력층이 어느 정도 이 언어를 구사한다는 사실은 이처럼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 버지니아 사람들이 캘리포니아 사람들과 같은 언어를 사용한 것처럼 단일 언어가 사용될 수 있었던 것은 정착지 건설 붐 덕분이었다. 너도나도 정착지 건설에 뛰어들면서 상당히 동질적인 집단이 방대한 영토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정착민들 외에 영어를 국가 공용어로 만드는 데에는 훨씬 더 폭력적인 과정이 동반됐다. 토착언어는 강제로 금지되었다. 그러나 제국은 방대했고 부족어를 쓰지 못하게 일일이 감시할 만한 충분한 식민 지배 관리도 없었다. 그래서 정부는 다른 수단에 의지했다. 무엇보다 식민 당국은 교육을 활용했다. 292-3)


연합군 지도부는 전쟁을 어떤 식으로 수행할 수 있을지를 논의하다가 언어에 생각이 미쳤다. 윈스턴 처칠은 하버드에서 1943년에 한 연설에서 “미래의 제국은 의식의 제국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는 정신적 식민화의 핵심은 언어적인 것에 있다고 믿었다. 처칠은 하버드 학생들에게 영어가 전 세계에서 사용된다면 영어 사용자들이 누리게 될 ‘엄청난 편리함’에 대해 상상해보라고 주문했다. 더 이상 영토로 쌓아올린 제국에 구애받지 않고 ‘세계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영어가 맞닥뜨린 과제는 기술적인 차원 이상의 것이었다. 영어 확산의 주요 수단이었던 식민 지배는 눈에 띄게 와해되고 있었다. 탈식민화로 6억 명 이상이 영국과 미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그들은 계속 영어를 사용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많은 사람이 영어가 자국에 끼친 해악을 거세게 비난했다. 1949년 유엔 총회는 회원국 국민이 모국어로 초·중등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결의했다. 295, 298-9)


그러면 영어는 어떻게 전 세계에 널리 퍼졌을까? 표준은 다른 종류의 권력과는 작동 방식이 다르다. 정부는 세금을 부과하고 병력을 징집하며 당사자를 구속할 수 있다. 이는 항상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표준은 강제하기가 훨씬 어려우며, 언어는 특히나 더 그렇다. 표준은 힘을 반영하지만 실제 압력이 국가에서 비롯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공동체의 압력이 더 크다. 동떨어진 문화들이 가까이에서 마주치면서 공통 언어의 필요성이 커졌다. 그러나 어떤 언어를 사용할 것인지는 아무나 선택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선택한 언어를 골라야 하고 발전 가능성이 가장 커 보이는 언어를 선택해야 했다. 일단 임계치에 다다르면, 그런 선택은 사실상 의무가 되어버렸다. 세계화를 주도하는 국제사회는 공통 언어의 필요성을 가장 먼저 깨달았다. 그들은 일찌감치 영어를 선택했고(대표적으로 항공 교통 관제사들), 각국이 영어를 받아들이자 영어는 더욱 추진력을 받으면서 결국 전 세계가 영어에 올라타게 되었다. 301)


20. 권력은 곧 주권이오, 미스터 본드


점점이 흩어진 작은 땅들은(해조분 제도의 하울랜드, 자르비스 섬 같은) 공식적인 제국의 황혼기에 특히 중요하게 취급됐다. 탈식민화의 물결이 전 세계를 덮치면서 지도상에서 제국주의 체제가 대부분 쓸려나갔지만 작은 섬들은 거의 모두 이러한 물결을 피해갔다. 대규모 식민지는 자급자족을 꿈꾸며 민족주의 운동을 통해 독립을 실현하려 한 데 반해 작은 식민지는 그럴 수 없었다. 무뇨스 마린이 인정했던 것처럼 독립은 경제적 자살이나 마찬가지일 터였다. 미국령 버진아일랜드나 괌과 같은 소규모 지역이 무장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실제로 자살 행위가 될 것이었다. 지정학적 요소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강대국들은 여전히 지도를 펼쳐놓고 게임을 계속했다. 미국은 제국을 구성하는 포트폴리오를 재구성해 대규모 식민지는 처분해버리고, 전 세계에 흩어진 소규모의 반半 주권지역, 즉 군사기지에 투자했다. 오늘날 전 세계에는 그런 기지가 800여 개에 달하며 그중 중요 기지는 섬에 위치해 있다. 314)


구체적으로 미국은 도서 기지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스완 제도가 좋은 예다. 스완 제도는 카리브해의 고립된 지역의 세 개 섬으로 이뤄진 작은 군도로서, 미국이 점령한 최초의 해조분 제도에 속했다. 해조분이 바닥나버렸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 정부는 그레이트스완섬을 다른 식으로 활용할 방법을 찾아냈다. 미 농무부USDA는 구제역이 의심되는 수입 가축의 검열을 위한 장소로 이곳을 활용했다. 1950년대에는 CIA가 그레이트 스완섬에 활주로와 5만 와트의 무선 송신기를 설치했다. 매우 강력한 이 송신기는 남아메리카까지 도달할 수 있어서, 육로로는 접근이 불가능한 영토까지 무선 전파로 포괄할 수 있었다. 1954년 CIA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과테말라의 좌파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쿠데타를 지원하는 과정에서, 무선 방송을 이용해 가짜 뉴스를 퍼뜨렸다. 스완섬의 송신기를 활용해 미국은 이번에는 쿠바에서 피델 카스트로의 사회주의 정권을 겨냥해 좀더 안전하고 정교한 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316-7)


핵무기와 섬 사이에는 긴밀한 관계가 있다. 즉 세계 최대의 살상 무기는 인류 문명과 가장 동떨어진 지역에 배치된 것이다. 작은 섬들은 대다수 인구가 사는 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로 인해 핵폭탄을 실험하고 저장하는 데 이상적인 장소가 된다. 미국이 최초의 원자폭탄을 실험할 때 과학자들은 뉴멕시코의 사막을 골랐다. 그러나 미 원자력위원회AEC는 후속 실험 장소로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찾았다. 섬을 찾아내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한 해군 장교는 “우리는 수십 장의 지도를 꺼내 외딴 지역을 찾기 시작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마셜 제도의 비키니 환초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마침 이 섬은 전쟁 말기에 미국이 점령한 미크로네시아 제도에 속해 있었다(이곳은 곧 미국이 감독하는 ‘전략적 신탁통치령’이 된다). 1946년 7월 1일, 미군은 그곳에서 2개의 핵폭탄을 터뜨렸다. 일본에 떨어뜨린 것보다 성능이 훨씬 강력했다. 이 실험으로 한때는 알려져 있지 않던 환초의 이름이 유명해졌다. 319)


21. 기지 국가


‘점’들은 툴레나 비키니 환초, 스완 제도와 같은 섬이나 외딴 장소에 찍혀 있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인구가 극도로 밀집된 지역에 점이 찍히기도 했다. 잉글랜드 북부의 항구 도시인 리버풀을 예로 들어보자. 그 모든 영국 도시 중 하필 리버풀에서 1950년대에 대중음악을 중심으로 한 활기찬 10대 문화가 싹트게 된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 리버풀이 유럽 내 최대 미 공군기지가 있는 버턴우드에서 서쪽으로 약 24킬로미터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유럽으로 가는 관문’이었던 이 도시는 대서양을 횡단하는 군용기가 착륙하는 곳이었다. 1636개의 건물에는 유럽 최대의 물류 창고와 함께 군의 유일한 유럽전자장비 보정연구소가 있었다. 야구팀, 축구팀, 무선국이 있었고 미국에서 끊임없이 연예인들(밥 호프, 냇 킹 콜, 빙 크로즈비)이 유입됐다. 조지 마틴이 보기에 이는 혁신이었다. 그는 군부대가 “미국 문화와 이들에게 인기 있던 음반을 함께 들여와 리버풀 일상의 주류 문화에 곧바로 연결”한 셈이었다고 기억했다. 325-7)


기지의 영향 아래 살았던 사람들은 기지에 대해 분개감을 표출하기도 하고 기지를 중심으로 삶을 일구어가면서 시위와 참여 사이를 오갔다. 1952년 군정이 끝난 이후에도 20만 명의 미군이 일본 본섬의 2000개 이상의 군시설에 계속 주둔했다. 미 군정이 끝난 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18퍼센트만이 일본이 진정한 독립 국가라고 주저 없이 느낀다고 답했다. 일본 기지는 봉쇄된 미국인 거주지인 ‘아메리카 타운’으로 운영됐다. 이들은 자체 사무실과 주거지, 쇼핑센터, 학교, 소방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기지는 물리적으로 확장되면서 주변 지역을 흡수해, 대형 시설을 짓기 위한 공간을 확보했다. 일본인들도 잘 알고 있었다시피, 기지를 수용하는 것은 단지 술집의 난동과 비행기 추락, 혼잡한 거리에 술 취해 뛰어든 지프를 감내하는 것만 의미하지는 않았다. 제멋대로 뻗어가는 미군 시설 내에 일본인을 위한 특별한 장소가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냉전 중에 이는 지구상 최대 규모의 꾸준한 수익원 중 하나였다. 328-9)


22. 첨병전


미국이 차지한 지도상의 점들 중에 처음부터 다란만큼 가망 없어 보이는 곳도 드물었다. 사막 한가운데의 빈 공간이었던 다란은 외부인을 환영하지 않는 전제군주국으로 알려진 사우디아라비아에 있었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에는 석유가 매장돼 있었고, 석유는 세계를 움직이는 원천이었다. 미국 정부는 1945년에 다란에 대규모 공군기지를 임대하기로 했다. 그러나 기지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사우디 왕실은 성조기가 메카와 메디나 땅 위로 날아다니는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 우려했다. 몹시 노심초사한 나머지 사우디 왕은 다란의 미 영사관이 물리적으로 깃발을 꽂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그 대신 성조기가 사우디 땅에 닿지 않도록 건물 측면에 부착되게끔 했다. 해당 장소는 기지가 아닌 ‘비행장’으로 불려야 했다. 정치적 불안이 넘실댔으나 모하메드 빈라덴은 이를 노련하게 헤쳐갔다. 그는 사우디 정부가 선호하는 건축업자가 됐다. 동시에 그는 미국과도 다수의 사업을 진행하며 뉴욕에 지사를 운영했다. 340-1)


빈라덴은 1967년에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그를 태우고 비행했던 대부분의 조종사처럼 해당 비행기 조종사도 미 공군 참전 용사였다). 그는 22명의 아내로부터 낳은 54명의 자녀에게 수억 달러에 달하는 건설회사를 유산으로 남겼다. 그의 아들 중에는 이익을 얻게 돼 마냥 기뻐하는 사람도 있었다. 가족 사업에 뛰어들어 대규모 방어 및 기반 시설 계약을 따내는 이도 있었다. 그중 아들 오사마는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 신을 믿지 않는 초강대국(소련)이 무슬림 땅(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는 데 맞서고자 한 오사마 빈라덴은 무자헤딘에 합류했다. 그는 아예 아프간 국경 도시인 페샤와르로 거처를 옮겼다. 빈라덴은 기반시설을 건설한 사람이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파키스탄에서 무자헤딘의 본거지를 운영했다. 1988년, 그는 성전(지하드)을 지휘하기 위해 소규모 단체를 조직했다. 이는 당연하게도 알카에다 알아스카리야al-Qaeda al-Askariya(‘군기지’라는 뜻)라 불렸다. 또는 줄여서 알카에다(‘기지’)로 통했다. 341-2)


(이라크전쟁을 계기로 1962년에 철수했던) 다란에 미군이 (다시) 주둔하는 것은 1990년대에도 1950년대와 별 다를 바 없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기지 근처의 사우디인들은 티셔츠를 입고 차량을 운전하는 여군을 보고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바그다드의 라디오 방송은 미군이 이슬람의 가장 성스러운 곳을 더럽힌다며 비난했다. 빈 라덴은 “이 나라를 더러운 발로 아무 데나 돌아다니는 미군들이 사는 미국 식민지가 되도록 내버려두다니 부도덕하기 짝이 없다”며 격분했다. 미국은 “아라비아반도를 이 지역 최대의 육·해·공군 기지로 만들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가 가장 반대를 표명한 것은 지금까지 일관되게 지적했던 미군의 사우디아라비아 주둔이었다. 이는 강조할 필요가 있다. 9·11 테러 이후 “왜 저들은 우리를 미워하는가?”라는 질문이 끝없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빈라덴의 동기는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불분명한 것도 아니었다. 9·11 테러는 크게 보면 미국의 기지 제국에 대한 보복이었다. 346-9)


미국 정부가 ‘블랙 사이트Black Site’라 불리는 비밀 감옥을 운용한 관타나모만은 미국이 1903년부터 영구 임대한 조차지였다. 쿠바가 ‘최종 권한’을 보유하긴 했으나, 조차권 덕분에 미국은 관타나모만에서 ‘전적인 관할권 및 지배권’을 쥐게 됐다. 이와 유사한 법률 체계가 파나마운하 지대와 오키나와에도 적용됐다. 이것의 장점은 미국 정부가 배타적 지배권을 가진 영토를 얻으면서도 ‘미국의 주권이 적용되지 않는 외국 영토’가 되는 것이라고 미 법률자문실 소속 존 유 변호사와 패트릭 필빈 변호사는 주장한다. 관타나모만은 그 특수한 법적 지위로 볼 때 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어울리는 한 쌍이다. 미국의 두 전초기지이자 거의 기억에서 잊힌 19세기 전쟁의 전리품으로, 미국의 일부가 아니면서 미국의 관할권 내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곳은 오래전 제국주의 시대의 기이한 흔적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이와 같은 지도상의 작은 점들은 점으로 연결된 오늘날 미 제국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355-6)


결론: 지속되는 제국


197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장기간 지속되던 태평양 제도 신탁통치령이 종료됐다. 마셜 제도 공화국, 미크로네시아연방, 팔라오공화국은 미국과 ‘자유 연합 협정’을 맺어 주권 국가로 독립하면서도 미군 기지용 부지를 제공하는 대가로 경제적 지원을 받게 됐다. 그러나 (사이판이 속한) 북마리아나 제도는 푸에르토리코와 유사하게 연방에 편입됐다. 1986년, 법령이 통과되면서 3만 명에 달하는 주민이 미국 시민권을 부여받았다. 북마리아나 제도 주민들은 미국법의 적용을 받기로 했으나 연방법에 따른 최저임금과 이민법의 상당 부분은 면제됐다. 가장 가까운 직업안정보건청은 수천 마일이나 떨어져 있었다. 동시에 교역상의 이유로 북마리아나 제도 주민들은 미국의 일부로 간주됐다. 그런 조건의 결합은 강력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거의 노동 감독이 이뤄지지 않는 환경에서 보잘것없는 임금을 받고 ‘메이드 인 USA’ 상표가 달린 옷을 만들 수 있는 법적 토대가 마련됐기 때문이다. 357-8)


워싱턴에서 최고의 수입을 올리는 로비스트인 잭 에이브러모프의 포트폴리오에는 독특한 점이 있었다. 그는 『포천』 500대 기업을 대변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법의 허점을 활용했다. 노동법의 목적상 북마리아나 제도 주민들은 미국에 속하지 않았다. 교역상으로는 미국에 속했지만 말이다. 로비 규정의 경우, 이곳은 외국 정부에 해당됐다. 로비스트에게 이는 대성공이었다. 에이브러모프는 촉토인디언미시시피밴드를 대변한 로비활동에도 착수했다. 이들은 도박세 징수에 맞서 싸우는 중이었다. 그는 사이판에서와 동일한 전략을 활용해 인디언 부족 정부가 정치인들에게 신고할 필요가 없는 선물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이용했다. 그는 더 많은 인디언 부족을 고객으로 받았다. 잭 에이브러모프가 사이판 문제를 다루면서 알게 된 내용은 부시 행정부의 존 유 변호사가 관타나모 기지 문제를 통해 알게 된 것과 똑같았다. 즉 제국은 여전히 존재하며 변칙적인 합법적 지위를 가진 곳들은 매우 유용하다는 사실이었다. 358-9)


현재 푸에르토리코, 괌, 미국령 사모아, 미국령 버진아일랜드 및 북마리아나 제도와 같은 영토에 거주하는 인구는 약 400만 명에 달한다. 이들은 의회와 대통령이 임의로 결정하는 사항에 따라야 하지만 의원도 대통령도 투표로 선출할 권리는 없다. 투표권법이 제정된 지 50년 이상이 지났으나 그들은 여전히 선거권을 박탈당한 상태다. 제국은 세계를 연결하는 해외 기지의 형태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미국의 외교 정책에는 거의 독보적으로 영토라는 요소가 들어간다. 영국과 프랑스는 합쳐서 13개 정도의 해외 기지를 보유하고 있으며 러시아는 9개, 다른 나라들은 하나씩 보유하고 있다. 미국 이외의 국가가 소유한 해외 기지는 30개 정도 된다. 미국은 이에 반해 약 800개에 달하는 기지를 보유하고 있으며 다른 해외 기지에 출입할 수 있는 협정도 맺고 있다. 수십 개 국가에서 미군 기지를 수용한다. 이를 거부하는 나라들도 미군 기지에 둘러싸여 있다. 확장된 미국 영토는 다시 말해 우리 모두의 가까이에 있다. 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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