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36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김재홍 옮김 / 길(도서출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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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1장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애와 사상의 발전 


"아테네에서 인생의 절반을 보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죽기 직전에 안티파트로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런 상황(외국인 거주자)에 대해 불편을 느끼던 자신의 처지를 솔직하게 피력하고 있다. 〈아테네에서는 동일한 일들이 시민에게서만큼 이방인에게도 적당하지 않다. 아테네에서 지내는 것은 어렵다〉라고.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다른 시민들과 더불어 살며 폴리스에 [공동으로] 참여하는(koinonein) 삶 혹은 오히려 정치적 공동체(koinonia)로부터 차단된 외국인과 같은 삶, 이 둘 가운데 어떤 삶이 더 바람직한 것인가〉라는 문제를 심각하게 논하고 있다.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이 점이 오히려 그로 하여금 학문 연구 활동에 전심전력으로 몰입할 수 있게 동기를 부여해주었는지도 모른다. 출신이 아테네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웃사이더로서 아테네의 현실 정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고, 실제로 그는 『정치학』에서 중립적 관점에서 당시의 정치 상황을 비판적으로 기술하고 있다."(620) 


"『정치학』 제1권에서 자연적 노예제를 옹호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노예에게도 친절함을 베풀며, 자신을 돌봐준 노예들을 적절한 시점이 되면 자유의 몸이 되게 해주라고 유언을 남긴 점은 조금은 당혹스럽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유언장에 남긴 대로 노예를 해방시켜준 점에 비추어보면, '주인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함으로써 자유라는 보상(athlon)을 얻을 수 있다'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자연에 의해 그들 양자에게 부여된 상응할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을 때 노예와 주인 서로에게 어떤 유익함과 친애(philia)가 있게〉 된다(1255b12-13)라고 말하는 점과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노예인 한에 있어서는 그를 향한 친애가 없지만, 인간인 한에 있어서는 그를 향한 친애가 존재한다. ······ 인간인 한에서 친애 또한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1161b2-8)라고 말하는 점을 고려하게 되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사항이다."(625-6)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 저작 곳곳에 플라톤의 영향이 짙게 배어 있음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들을 도입한 사람들이 우리의 벗들〉이라고 표명하면서 자신이 플라톤의 추종자에 속한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가 스승에 대해 여러 분야에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할 때조차도 그는 늘 스승에 대한 깊은 존경심과 감사하는 마음을 지닌 채로 애정을 표명하곤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을 두고 〈사악한 사람은 찬양할 자리를 갖지 못하는 사람으로, 죽어야만 하는 인간들 중에서 누구도 능가할 수 없는 플라톤만이 그 자신의 삶과 자신의 저술 탐구를 통해 인간이 동시에 행복하고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명확히 보여줬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논리학 작품을 가리키는 『오르가논』이 아카데미아 시절에 쓰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플라톤의 학생으로서 스승의 철학에 도전하는 일에 전혀 주저하지 않았던 것 같다."(643-4) 


"『정치학』 제1권 제2장에서 피력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적 자연주의에 기초하는 세 가지 기본 테제는 이렇다. 첫째, 인간은 자연적으로(본성적으로) 폴리스적 동물이다. 둘째, 폴리스는 자연적으로 존재한다. 셋째, 폴리스는 자연적으로 개인에 앞선다. 다음으로 그가 냉정하고도 중립적인 태도로 정치체제에 대한 관찰자로서의 정치적 스탠스를 취하는 것은 자신이 아테네에서 거류 외국인(metoikos)으로 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옹호하는 정치체제는 다수가 번갈아 지배하는 민주정(인민정, 제3권 제11장 〈다중이 소수인 가장 좋은 사람들[tous aristous oligous]보다도 더 최고의 권위가 있어야만 한다는 견해가 ······ 어쩌면 어떤 진리마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주장될 수 있다고 여겨질 수 있겠다〉)과 가장 우월한 자가 지배하는 왕정(제3권 제17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자신이 경험한 아테네의 민주정과 마케도니아 왕 필립포스의 절대적 왕권의 영향으로 추정할 수 있다."(655-6) 


# 제4권에서는 귀족정과 폴리테이아가 혼합된 '혼합정'이 최선의 정치체제라고 말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분류상 제작학에 속하는 수사학을 '오르가논'(논리학)이나 정치학에 포함하는 것이 그 목적에 더 적합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물론 변증술이나 수사학적 방법이 논증을 만들기 위한 기술(dunameis tines tou porisai logous)임은 틀림없다. 그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을 변증술에 대한 '짝패'(antistrophos)로 보았다. 하지만 수사학은 그 이상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설득적 논증을 고안하는 것 이외에도 연설가는 청중의 심리와 그들이 처한 정치적 상황을 알아야만 한다. 즉, 연설가의 앎은 학문적 지식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실제적인 문제'를 향한다. 그래서 수사학은 인간의 감정을 해부해야 하며, 설득을 목표로 하는 정치 연설가들은 경제적 문제, 군사적인 사항과 제도적인 정보를 포함한 앎을 소유해야만 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을 〈『변증론』의 하나의 곁가지이자, 정당하게 정치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도덕적 성품에 대한 탐구〉라고 말한다(『수사학』 1356a25-27)."(662-3)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은 페리파토스의 지도자였던 안드로니코스가 헬레니즘 시기의 학문 분류 방식을 좇아 편집했다는 것이 일반적 정설이다. 이에 앞서 플라톤 아카데미아의 크세노크라테스가 처음으로 학문을 삼분(三分)해서 분류했다고 하는데, 헬레니즘 시기의 스토아 철학의 주요 부분도 논리학, 자연학, 윤리학으로 분류된다.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벡커판의 편집 순서도 논리학에 해당하는 『오르가논』이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이어서 자연에 대한 탐구에 해당하는 『자연학』을 비롯하여 생물학에 관련된 작품들, 그 뒤를 잇는 문자 그대로 '자연학 다음에 오는 것들'을 의미하는 『형이상학』이 자리하며, 다음으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비롯한 실천 영역에 적용되는 윤리학 저작과 『정치학』이 그 뒤를 잇는다. 맨 끝자리에서는 제작에 관련된 탐구에 해당하는 『수사학』과 『시학』으로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의 편집 순서는 그의 학문 분류 방식과도 얼추 맞아떨어진다."(671-2)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제6권 제1장에서 인간의 활동을 '안다(본다)', '행한다', '만든다'로 삼분하고 각각 이에 해당하는 앎을 이론지, 실천지, 제작지로 크게 구별한다. 이론지에는 자연학, 수학, 제일철학(혹은 신학), 영혼에 대한 탐구 등의 학문이 귀속되고, 실천지에는 윤리학과 정치학이, 그리고 제작지에는 시학과 수사학 등이 포함된다. 이론학(epistemai)은 그 자체적인 앎을 추구하고, 실천학은 개인과 폴리스에서의 행위의 좋음과 관련되며, 제작학은 아름답고 유용한 대상을 만드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가령 선박 건조, 신발, 시(詩), 건강이나 힘과 같은 좋은 성질들이 실천학의 대상이다. 그렇다면 '오르가논'으로 총칭되는 논리학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모든 학문을 위한 예비학이자 도구였지 결코 독립된 지위를 갖는 학문으로 분류되지 않았으며, 이런 측면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논리학은 이론철학과 자연철학을 탐구하기 위한 '도구'로 생각될 수 있다."(672-3) 


"아리스토텔레스는 고결하게 저 높은 세계에 있는 것들에서만 아름다움(kalos)을 구하지 않았다. 그는 생물학 탐구자로서 아무리 비천한 생명체들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하였다." "그가 언급하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일화를 예로 들어보자. 철학자로 좋은 평판을 받던 헤라클레이토스를 만나기 위해 그를 방문한 사람들은 헤라클레이토스가 부엌의 화덕 가에 쪼그리고 앉아 불을 쬐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멈칫거렸다. 그러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두려워 말라는 듯이 〈들어오시오. 여기에도 또한 신들이 있소이다〉(einai gar kai entautha thous)라고 말을 건넸다. 이 일화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하는 현상세계에서도 진리가 찾아질 수 있음을 보이면서 현상세계에 대한 탐구에 다음과 같은 중요한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모든 동물에도 무언가 본성적이고 아름다운 것〉(tinos phusikou kai kalou)이 있음을 알기 위해 우리는 주저 없이 동물에 대한 탐구에 다가서야만 한다는 것이다."(678-9) 


#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방법(윌리엄 키스 C. 거스리) 


1.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의 목표를 독단적인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 자체의 명료화와 문제 자체들이 포괄하고 있는 난점(아포리아)들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일에 두었다. 

2. 직접 관찰한 경험과 상식을 기반으로 학적 탐구를 수행─플라톤과 비교하여 강력한 경험론적 측면─하고 있으며, 관찰과 이론이 일치하는 경우에 그 이론을 타당하다고 판단한다. 

3.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을 정초하는 일반적인 전제를 찾는 방법이 바로 논리학이라고 보았기에, 자기의 학적 인식의 기반을 이루는 논리학을 독립적인 포괄적 체계로 논구했다. 

4. 아리스토텔레스를 특징 짓는 사유 형식은 목적론적인 사유 방식이며, 그에 따르면 한 사물의 본성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작업은 사물의 목적인을 제시하는 것과 동일하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방법(김재홍) 


1. 해당하는 주제에 대한 일련의 엔독사(통념, ta endoxa)를 수집하여 하나의 부류로 분류한다. 여기에 속하는 엔독사는 인간이 함께 공유하는 삶의 방식과 관련한 것들이다. 

2. 이것들 중에 적절한 것과 부적절한 것을 탐지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이 작업은 해당 학문의 원리와 사실에 부합하는가와 관찰에 부합하는가라는 '논리적 정합성'에 따라 행해진다. 

3. 부적절한 것을 폐기하고, 새로운 부류의 엔독사를 만들어낸다. 가장 유력한 것들을 포함하는 최적의 부류를 선택하기 위해 매듭을 풀고, 왜 그것들이 그런지를 밝혀낸다. 

4. 경험적으로 수집된 '현상'을 개념 분석하여 정교하게 해석한 엔독사는 충분하게 증명된 것들이다. 최종적으로 남겨진 엔독사는 한 주제의 탐구를 위한 참된 후보가 될 수 있다. 


"『변증론』은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탐구의 중요한 도구가 되는 변증술적 방법(dialektike)을 논하는 저작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인 분야와 경험적 탐구에 적용될 수 있는 학문 방법의 도구라 할 수 있다. 그는 학적 탐구에서 잠정적이고 단계적인 절차를 밟는 접근 방법을 취한다. 그 방법과 절차는 우선, 다루어질 문제에 대한 다양한 견해와 정보를 수집하여 그 문제를 적절하게 형식화하여 진술한 다음, 그 진술들이 문제의 핵심을 온전하게 드러내는 질문으로 정립되고 있는지를 검토하고, 이어서 그 논쟁점을 체계적으로 분석한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에 따라 자신의 원래 사유 방향에 부적합한 것들은 폐기하며 새롭게 문제를 정립해나가는 길을 찾는다. 이러한 과정에서 학적인 탐구의 태도로만 일관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의 철학적 체계는 독단적이지 않으며, 그의 철학 방법은 진리 탐구 모형의 전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704) 


"인간의 행위와 감정과 관련된 실천철학의 목적은 원칙적으로 〈앎이 아니라 행위〉이다. 앎(gnosis)은 수학과 같은 정확성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행위(praxis)를 목적으로 하는 윤리학은 개연성만 확보하면 되는 것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1권 제3장에서는 윤리학의 주제와 물음과 관련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윤리학적 주제들은 늘 어떤 가변성을 가지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대강에서 또 개략적으로(pachulos kai tupo) 참을 밝히는 데 만족헤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에서 그런 것'들에 대해 논의하고 또 '대부분의 경우에서 그런 전제'들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기에, '대부분의 경우에서 그런 것'(결론)들을 추론하는 데 만족해야 할 것이다〉. 윤리학의 영역에서 다루어지는 그 주제의 본성(phusis)이 허용하는 한, 그만큼의 정확성을 추구하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수학자에게는 엄밀한 '증명'을 요구하며, 수사학자에게는 설득적 논의만을 요구한다."(705)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의 임무가 아포리아의 해소에 있음을 자주 강조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 철학에 대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규정을 떠올리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른 곳에서 〈아포리아를 해소한다는 것은 철학적 문제에 대한 해법의 발견〉이라고 말한다. 그에게서 난점을 푸는 일(euporean)은 먼저 난점이 왜 일어나는지를 상세하게 밝혀내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diaporean', 즉 난점을 상세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도대체 문제가 무엇인지를(aporean) 깨달아야만 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나중에 가서 아포리아를 해소한다는 것은 애초의 아포리아를 해소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diaporean'의 과정과 'aporean'의 과정은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양자가 동의어로 사용됨에도 불구하고, 'diaporean'은 난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주어진 난제에 얽혀 있는 사항을 상세히 들춰내는' 작업을 의미한다."(7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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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엘리트 정치 - 마오쩌둥에서 시진핑까지
조영남 지음 / 민음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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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엘리트 정치인가?


"중국에서 일반적인 의미로 통치 엘리트라고 할 때는 공산당 중앙위원회(Central committee)의 구성원인 중앙위원을 가리킨다. 개혁기에 중앙위원은 약 200인의 정(正)위원과 약 150인의 후보 위원(투표권 없음)을 합쳐 350인 전후다. 여기에는 공산당중앙, 국무원, 전국인대,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전국정협), 인민해방군의 지도부가 포함된다. 또한 지방 31개 성급(省級) 단위의 당서기 및 성장·시장·주석, 중요한 인민 단체의 지도자, 중앙 소속 일부 국유 기업의 최고 경영자(CEO)도 포함된다." "그러나 중앙위원회는 정치국 같은 다른 권력 기구, 혁명 원로의 비공식 모임, 혹은 중앙 공작회의에서 이미 결정된 내용을 사후에 추인하는 역할에 머무는 일이 많다. 따라서 중앙위원회에 초점을 낮추어 분석할 경우에는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엘리트 정치를 파악할 수 없다." 즉, 중국 엘리트 정치의 중심은 중앙 정치국(政治局, Politburo)이며 그 중에서도 정치국 상무위원회가 핵심이다.(19-20)


# 중앙 정치국 구성 인물들

1. 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 혹은 총서기 : 마오 주석과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 총서기(1982년에 당 주석 폐지)를 가리킨다.

2. 정치국 상무위원회 : 공산당 중앙, 국무원, 전국인대, 전국정협, 중앙 기율검사위원회(중앙기위) 등 '5대 권력 기구'의 현직 최고 지도자들로 구성된다.

3. 중앙 서기처(書記處) : 일상 업무를 처리하는 사무 기구로서, 공산당 중앙 판공청 주임, 조직부 부장, 선전부 부장, 통일전선부(통전부) 부장, 정법위원회 서기 등으로 구성되며, 서기처의 실질적 책임자인 상무 서기는 총서기의 후계자가 맡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4. 중앙 군사위원회(중앙군위) : 인민해방군을 지도하는 군 지도자 중에서 두 명이 정치국원으로 선발된다. 중앙군위 주석은 공산당 총서기가 겸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유일한 예외가 후야오방과 자오쯔양 총서기 시절 덩샤오핑이 중앙군위 주석을 계속 유지한 경우다).

5. 지방 당서기 : 4대 직할시(베이징, 톈진, 상하이, 충칭)와 중요 성급 단위(성과 자치구)의 당서기들이 정치국 구성원에 포함된다. 4대 직할시는 고정이며 나머지 성과 자치구는 바뀔 수 있다.


# 중국 엘리트 정치의 유형

1. 일인지배(마오쩌둥) : 당 주석이나 총서기 개인이 정책결정권, 인사권, 군 통수권을 독점 행사한다.

2. 원로지배(덩샤오핑) : 혁명 원로 등 소수의 최고 지도자가 위의 권한을 행사한다. 원로지배는 혁명 원로가 주도하는 비공식 정치가 (공식 정치에 앞서) 실제 권력을 행사하는 ‘이중 정치 구조’라는 점에서 집단지도와 다르다.

3. 집단지도(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 : 정치국 상무위원과 정치국원이 위의 권한을 집단적, 공식적으로 행사한다.


"새롭게 선임된 총서기는 먼저 주어진 인사권을 최대한 활용하여 자파 세력을 권력 기관의 요직에 앉힌다. 장쩌민의 상하이방(上海幇), 후진타오의 공청단파(共靑團派), 시진핑의 '시진핑 세력' 등 다양한 파벌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다음으로 이들은 정풍 운동(整風運動, rectification campaign)과 부패 척결(反腐敗, anti-corruption) 운동을 전개하여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경쟁 세력이나 반대파를 굴복시킨다.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이 집권하자마자 정풍 운동과 부패 척결 운동을 전개한 것은 권력 공고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마지막으로 총서기는 여세를 몰아 자신의 통치 이념을 공산당의 지도 이념으로 승격시킴으로써 최고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확립한다. 장쩌민의 ‘삼개대표(三個代表) 중요 사상’, 후진타오의 '과학적 발전관', 시진핑의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사상'(일명 '시진핑 사상')은 이렇게 해서 지도 이념이 되었다."(29-30)


"과두제의 딜레마로 인해 과두제가 일인지배로 변질되는 과정, 다시 말해 최고 지도자(소련의 경우 공산당 서기장)가 권력을 축적하여 과두제가 붕괴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이론이 권력의 순환 이론(circular flow of power theory)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공산당 서기장은 정책 집행의 권한을 갖고 있고, 이를 이용하여 지방 당서기에 대한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방 당서기는 서기장을 지지하는 사람을 당대회 대표로 선출하고, 당대회 대표는 다시 서기장을 지지하는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을 선출한다. 이 위원들이 서기장의 뜻에 따라 정치국원과 서기국 서기를 선출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서기장의 권한은 강화되고, 과두제는 일인지배로 변질된다." "다만 중국의 총서기는 소련의 서기장과는 달리 집단지도를 붕괴시킬 정도로까지 권력을 축적하지는 못했기에 중국의 엘리트 정치는 지금까지 집단지도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49-50)


1부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시대의 엘리트 정치


"마오쩌둥 시대(1949~1976)의 엘리트 정치는 마오의 일인지배를 특징으로 한다. 먼저, 마오는 통치 기간 내내 최고 지도자로서 정책 결정, 인사 선임, 후계자 지명, 군대 동원과 관련된 권한을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그는 중요한 회의를 소집하여 공산당의 노선이나 방침을 결정하거나 변경할 수 있었다. 또한 후계자를 자기 마음대로 선정하거나 취소할 수도 있었다. 이런 점에서 마오는 평생 동안 그 누구의 도전도 받지 않는 '압도적 지위(predominant status)'를 누린 최고 지도자였다. 그러나 '압도적 지위'에 있었다고 해서 마오쩌둥이 항상 독재자로 군림했던 것은 아니다. 1949년 중국 건국부터 1958년 대약진운동 추진 전까지 마오는 동료들과 협의하여 주요 문제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권한을 행사했다. 반면 1958년부터 1976년 사망할 때까지는 독재자처럼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권한을 자의적으로 행사했다."(63-4)


# 마오쩌둥 일인지배의 특징

1. 카리스마적 권위와 권력(정책 결정권, 인사권, 군 통수권) 독점

2. 제도와 절차를 무시하고 공산당 위에 군림하는 '사회주의 황제' 양상

3. 개인숭배가 일상화되면서 동료 지도자들과 주종 관계 형성


# 마오쩌둥 일인지배의 시기별 과정

1. 권위의 확립(1935~1948) : 중국 건국 직전까지의 시기로 마오를 정점으로 뭉친 혁명 세력이 엘리트 정치를 행사하는 '옌안 체제'가 성립된다.

2. 협의적 권력 운영(1949~1956) : 건국부터 공산당 8차 당대회까지의 시기로, 마오가 자신의 '압도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협의적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3. 일인지배의 발전(1957~1965) : 대약진운동 시기부터 문화대혁명 직전까지의 시기로 1-2선 체제의 수정주의적 운영방식에 불만을 품은 마오가 권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하면서 '독재 방식'이 뚜렷한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 1-2선 체제 : 공산당을 총괄하면서 일상 업무를 수행하는 류사오치의 1선과 국가 전략과 비전을 제시하는 마오쩌둥의 2선으로 구성된 체제

4. 일인지배의 비극(1966~1976) : 문화대혁명 시기부터 마오 사망까지의 시기로 마오의 일인지배가 극단화되었고, 중국이 전체주의 체제로 전락했다.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 원로들은 1978년 공산당 11기 중앙위원회 3차 회의(11기 3중전회)를 기점으로 마오쩌둥 시대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의 계속혁명' 노선, 일명 문화대혁명(1966~1976) 노선을 과감히 폐기했다. 대신 공산당은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을 새로운 당 노선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새로운 노선을 실천하기 위해 공산당은 ‘개혁 개방’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사유화(私有化, privatization), 시장화(市場化, marketization), 개방화(開放化, opening-up), 분권화(分權化, decentralization)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덩샤오핑 시대에는 사회주의 혁명과 건국을 주도했던 혁명 원로들이 엘리트 정치를 주도하는 원로지배(gerontocracy)가 나타났다. 이는 마오쩌둥의 일인지배를 벗어난 과도기의 엘리트 정치체제로, 장쩌민 시기에 들어 집단지도가 등장하면서 소멸했다."(237-8)


"이중 정치 구조에서는 공식 정치의 구성원, 즉 총서기, 정치국 상무위원, 정치국원, 서기처 서기가 원로 정치의 결정에 의해 언제든지 임명되거나 파면될 수 있었다. 만약 공식 정치의 구성원이 원로 정치를 존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원로들의 결정을 제대로 집행하지 않는다고 원로들이 판단할 때, 원로 정치는 공식 정치를 개편했다.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의 실각은 이런 이중 정치 구조의 구조적 모순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즉 이들은 이중 정치 구조의 희생물이었다." "이중 정치 구조의 문제점은 집단지도가 수립됨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 이것은 장쩌민 시기에 시작되어 후진타오 시기에 완성되었다. 이를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원로 정치의 종결이었다. 원로 정치는 개인적 명성과 인맥이라는 정치적 자산을 가진 혁명 원로들이 주도한 것으로, 원로들이 정치 무대에서 사라져야만 끝날 수 있었다."(251-2)


2부 덩샤오핑 이후의 엘리트 정치 1 : 집단지도와 권력 운영


# 이중 정치 구조의 운영 사례

1. 후야오방의 실각(1986~1987) : 아직 공식 지위를 갖고 있던 혁명 원로들은 학생들의 자유화 요구에 우유부단하게 대처하고, 덩샤오핑을 비롯한 원로들의 퇴진 문제를 거론한다는 등의 이유로 후야오방을 1987년 총서기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2. 공산당 13차 당대회의 지도부 선출(1987) : 덩샤오핑의 제안으로 혁명 원로들이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물러났지만, 후임 인선(자오쯔양, 리펑, 차오스, 야오이린, 후치리)의 권한은 여전히 원로들의 사전 결정 사항을 추인하는 역할에 머물렀다.

3. 자오쯔양의 실각과 장쩌민 총서기 선임(1989) : 덩샤오핑을 필두로 한 원로들은 톈안먼 사건을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동란(動亂)〉으로 규정하고, 무력진압에 소극적이던 자오쯔양과 후치리의 직무를 정지시키는 한편, 장쩌민을 총서기에, 리루이환과 쑹핑을 정치국 상무위원에 새로 임명했다.


"장쩌민 시기에는 장쩌민을 중심으로 한 상하이방이 주도 세력이었지만, 이들이 정치 권력을 독점할 수는 없었다. 그 결과 장쩌민 집권 1기에는 장쩌민(총서기)-차오스(전국인표 위원장)-리펑(국무원 총리)의 삼두 체제, 집권 2기에는 장쩌민(총서기)-리펑(전국인대 위원장)의 이원 체제가 형성되었다. 후진타오 시기에 들어서는 공청단파(후진타오)와 상하이방(장쩌민)-태자당(쩡칭훙) 연합 세력이 중앙과 지방에서 권력을 나누어 가졌다." "2002년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인선 과정에서는 최대 세력인 상하이방이 다수(9인 중 6인)를 차지하고 다른 세력이 일정한 지분을 인정받은 형태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2004년 9월 장쩌민의 중앙군위 주석 사임과 후진타오의 승계, 2006년 9월 천량위 상하이 당서기 퇴진과 2007년 3월 시진핑 당서기 임명 등은 후진타오 세력과 쩡칭훙 세력 간의 타협을 통해 이루어졌다."(322)


# 집단지도가 자리잡은 배경

1. 공산당의 제도화 :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대회), 중앙위원회, 정치국, 정치국 상무위원회 등 주요 권력 기구가 당헌과 당규에 따라 조직되고 운영된다.

2. 혁명 원로의 퇴진 : 혁명 원로들의 퇴진으로 자연스럽게 특정 개인이나 파벌이 절대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게 되면서 각 세력 간에 타협을 중시하는 일종의 신사협정이 맺어지게 된다.

※ 주요 파벌

1. 학연그룹 : 칭화방(칭화대학 출신), 베이다방(베이징대학 출신)

2. 지연그룹 : 베이징방, 상하이방, 간쑤방

3. 혈연그룹 : 태자당(혁명 원로의 자제들)

4. 기타 : 공청단파(공산주의 청년단 출신의 지도자들)


# 집단지도를 보완하는 제도

1. 연령제 및 임기제 : 장기집권을 막고 통치 엘리트의 정기적인 순환을 위해 .동직(同職) 2회 10년, 동급(同級) 15년 제한. 원칙을 수립하고, 정치국 상무위원과 정치국원들(중앙군위 주석과 국가주석(부주석) 제외)의 연령을 68세까지로 제한한다.

2. 민주 추천제 : 혁명 원로나 공산당 총서기 등 소수의 최고 지도자가 아니라, 공산당 중앙위원을 비롯한 350~400인 정도의 통치 엘리트가 일종의 선거인단이 되어 정치국 상무위원과 정치국원을 추천한다.


3부 덩샤오핑 이후의 엘리트 정치 2 : 집단지도와 권력 승계


# 권력승계의 규칙

1. 연령제

2. 임기제

3. 권력 기구 인선에서 세력 균형 유지

4. 후계자 사전 선임(민주 추천제)

5. 점진적 '집단' 승계


"시진핑의 권력 기반은 장쩌민 및 후진타오의 집권 초기와 비교했을 때 매우 공고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우선 정치국 상무위원의 분포에서 태자당과 상하이방이 절대 다수로, 시진핑 본인을 포함하여 총 7인 중에서 6인이나 되었다. 또한 퇴임 후 후진타오는 정치에 개입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후진타오 본인이 중앙군위 주석까지 이양하고, 비공개 회의에서 정치 원로의 정치 개입을 반대하는 주장을 펼친 이상 최대한 현실 정치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7인제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시진핑이 지도력을 발휘하는 데 9인제 상무위원회보다 유리했다. 시진핑이 주요 정책과 인사 문제를 결정할 때, 다른 정치국 상무위원을 설득하고 합의를 도출하는 데는 작은 규모가 상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7인제 상무위원회는 후진타오가 시진핑에게 준 커다란 선물 중의 하나였다."(492-4)


4부 덩샤오핑 이후의 엘리트 정치 3 : 집단지도와 권력 공고화


"권력 공고화(power consolidation)란, 정치 지도자가 권력원을 확보하여 직위에 상응하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 과정과 결과를 의미한다." "중국에서 최고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군 통수권, 이념적 권위(ideological authority), 개인적인 관계망(personal networks) 혹은 파벌(faction)을 장악해야 한다. 그 밖에도 국민이나 특정 집단, 예컨대 노동자, 농민, 지식인의 지지 역시 최고 지도자의 중요한 권력원이지만 앞서 말한 세 가지와 비교했을 때에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 중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 공산당 일당제 국가이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의 신임을 얻고 자신을 잘 선전하여 국민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던 화궈펑이 덩샤오핑 세력에 의해 권력에서 축출된 것이나, 대학생과 지식인의 지지를 받았지만 보수파 원로들에 의해 총서기에서 물러나야만 했던 후야오방의 사례는 이를 잘 증명한다."(526)


# 장쩌민, 후진타오 , 시진핑의 권력 공고화

1. 자파 세력(파벌)의 충원 : 장쩌민(상하이파), 후진타오 (공청단파), 시진핑(태자당)

2. 정풍 운동(整風運動, rectification campaign)과 부패 척결 운동의 전개

※ 정풍 운동 : 당정 간부의 업무 태도와 사업 풍토를 개선하기 위해 공산당 중앙이 전 조직과 당원을 대상으로 학습과 상호 비판 활동을 전개하는 일종의 공산당 정화 운동

3. 이념적 권위를 확보하기 위한 교육과 선전

3-1. 장쩌민의 삼개대표(三個代表) 중요 사상 : 선진 생산력 발전, 선진 문화 전진, 가장 광범위한 인민의 근본 이익 추구

3-2. 후진타오의 과학적 발전관 : 균형 발전 및 지속 가능한 발전에 방점

3-3. 시진핑의 시진핑 사상 : 중국몽(中國夢)을 실현하기 위해 사개전면(四個全面) 추진(전면적 소강 사회 완성, 전면적 개혁 심화, 전면적 의법치국(依法治國), 전면적 당 엄격 관리)


"장쩌민은 2001년 7월 공산당 창당 80주년 기념식 축사를 통해 삼개대표 이론을 공식화했다." "이때 공산당 내외에 포진하고 있던 '좌파(左派) 세력'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이 이론이 갖는 현실적 의의는 여러 가지인데, 그 중 핵심은 사영 사업가의 입당을 허용하는 것이었다. 사영 사업가는 과학 기술자처럼 '선진 생산력'을 대표하는 집단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1989년 일부 사영 사업가들이 톈안먼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이후 공산당은 이들의 입당을 공식적으로 금지했다. 이제 장쩌민의 삼개대표 이론이 발표됨으로써 이런 금지 결정은 정당성이 사라졌다. 반면 좌파 이론가들은 과거나 지금이나 사영 기업가는 착취계급으로 노동자 계급의 적이기 때문에 절대로 공산당 입당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2000년 2월 장쩌민이 삼개대표 이론을 제기한 이후 이를 기정사실로 하기 위한 교육과 선전 활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후진타오는 이를 적극 지지하고 추진했다."(562-3)


결론 : 집단지도의 분화와 전망


"시진핑은 강력한 조직 체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먼저, 공산당 중앙의 권위를 강화했다. 전에도 정풍 운동과 부패 척결 운동이 있었지만 성과는 그때뿐이었다. 그러나 시진핑은 달랐다. 전과는 다른 강력한 정풍 운동과 부패 척결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여 공산당 중앙의 권위를 확립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후진타오 시기에 유행했던 '구룡치수(九龍治水)', 즉 '아홉 마리의 용이 물을 관리한다'와 같은 말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았다." "또한 시진핑은 영도소조를 대규모로 신설하여 당·정·군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새로운 지도 체제를 구축했다. 그는 전면적이고 전방위적인 개혁을 추진한다는 명분으로 많은 영도소조를 신설하여 자신이 직접 조장이나 주임을 맡고, 요직에는 자파 세력을 충원했다." "마지막으로 시진핑은 강력한 정풍 운동과 부패 척결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기득권 세력의 저항과 반대를 극복할 수 있었다."(6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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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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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창하는 의식의 우주 속에서 자유의지는 유영하는가? 침잠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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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동물원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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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여전히 시달리고 있는 역사에 관한 이야기 :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 동북아시아 현대사에 관한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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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전후 천년사, 인간 문명의 방향을 설계하다
마이클 스콧 지음, 홍지영 옮김 / 사계절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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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축의 시대의 정치


"축의 시대에 아테네-로마-노나라에서는 극도의 독재로 인해 누적된 불만, 갈등과 사회불안으로 점철된 현실보다는 더 나은 이상 사회를 향한 갈망이 변화를 촉발했다. 그리스와 로마의 정치혁명은 공동체의 주도로 진행되었으며 어떤 로드맵도 없이 시작되었다. 반대로 중국에서 공자는 국가 통치 방식의 변화를 정교하게 설계했다. 그는 새로운 사상을 도입한 혁신자라기보다 옛 사상의 '전수자'라는 입장을 취했지만, 아마도 자산의 사상과 신조가 무엇인지 뚜렷이 밝힌 중국 최초의 인물일 것이다. 세 지역에서 변화를 촉발한 원인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각 사회의 전통과 당면한 문제의 차이는 서로 다른 결과를 도출했다. 한 사람의 덕망 높은 통치자가 권력을 장악한 중국, 사회계급별 권력의 균형을 이루고자 한 로마의 '중도', 그리고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사회계약과 관계 개념을 바탕으로 근본적으로 다른 3개의 통치 체제가 등장했다."(27-8)


1장 아테네 민주주의 : 민중의 힘을 향한 갈망


"(기원전 508~507년에 클레이스테네스가 제안한 개혁안은) 크게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는 행정구획의 최소 단위인 '데메스demes(대략 오늘날 구區에 상당)'를 모든 시민의 참여-권리-책임의 기본 단위로 삼는다는 내용이었다. 논란의 소지가 더 컸던 두 번째 제안은, 4개의 씨족으로 구성된 기존의 부족을 해체하고 데모스를 근간으로 하는 10개의 부족을 신설하여 아테네 시민이 국가를 위해 시간과 에너지, 의견을 제공하는 창구로 삼는다는 내용이었다. 새로운 부족 개념이 획기적이었던 이유는 기존의 부족 제도에 내재된 귀족들의 세력 기반을 와해시키고 각 부족이 국가 운영에 동등한 발언권과 권한을 갖도록 의도적으로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더욱 파격적인 것은 각 부족에서 국가 운영에 참여할 (모두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관직을 담당할) 사람을 뽑을 때 선거가 아니라 무작위 추첨제로 선출하여 모든 이에게 기회가 평등하게 돌아가도록 보장했던 점이다."(34)


"이 시기의 아테네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은 사용된 적이 없다. 이 용어가 만들어진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솔론은 '디스노미아dysnomia(무질서)'와 대조되는 '에우노미아eunomia(질서)'에 대해 얘기했다. 기원전 510년과 508년의 아크로폴리스 포위 사태에 이르는 과정에서는 '이소노미아isonomia(법 앞의 평등)'가 논의되었다. '데모크라티아demokratia(시민에 의한 통치)'가 최초로 개념화되고 언급되는 것은 기원전 490년과 480년 페르시아의 침략을 겪고 난 후의 일이다. 아테네의 정치체제가 파르테논 신전과 아테네제국 시대의 민주주의체제로 진화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아테네 민주주의를 향한 첫걸음이었던 민중 봉기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기원전 460년대에 이르러, 아테네 성인 남성 시민 모두가 천부의 권리로 누리게 된 정치체제를 기리기 위해 아테네에서 태어난 한 남자아이에게 데모크라테스Demokrates라는 이름이 주어졌다."(49)


"로마 공화국 형성에 관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 기록은 기원전 3세기 말에 로마 원로원 의원 퀸투르 파비우스 픽토르가 쓴 책과, 기원전 2세기 후반에 그리스인 폴리비오스가 쓴 『역사』가 있다." "폴리비오스는 로마가 압도적인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분석하면서, 그 주요 요인으로 로마의 군사조직과 공화정체를 꼽았다. 그는 민주정체의 일시적 성공이 "우연과 상황의 산물"이었다면서 "민주정체의 비일관적인 속성"을 혹평했다." "이들은 아테네가 기원전 510~508년에 경험한 정치적 위기와 극적인 변화를 중요한 역사적 기점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한 명은 그리스인이고 다른 한 명은 그리스어로 글을 썼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공화국은 로마인들이 폭군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아테네인들은 기원전 510~509년에 참주를 축출했다. 고대 그리스인 (또는 그리스어로 글을 쓴 로마인) 역사에게 이것은 꽤나 마음에 드는 우연의 일치였다."(54-5)


"로마와 그리스(아테네)의 정치 격변에 관한 역사 기술은 단순히 날짜가 겹치는 것 이상의 깊은 관련이 있다. 민주주의가 출현하기까지 수세기 동안 아테네에서 벌어진 권력 투쟁 과정에 등장했던 개념과 촉매 역할을 한 인물들이 로마가 공화정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다룬 기록에서도 등장한다. 이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두 문화권은 밀접한 관계였으며, 특히 기원전 6~5세기에는 매우 활발하게 문화적·경제적으로 교류했다." "더 눈여겨봐야 할 지점은 로마가 새로운 정치체제를 수립한 후에도 계속해서 아테네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워갔다는 점이다. 공화국 수립 직후 로마 대중과 리더들이 다수의 권리와 소수의 권력 간의 균형을 찾으려고 고군분투했던 격동의 반세기 동안, 로마의 입법자들은 아테네에 체류하며 그곳의 법률 제도와 헌법─특히 로마인 자신들과 비슷한 딜레마를 겪었다고 여겼던 솔론의 개혁─을 연구하여 로마에 도입했다."(59-60)


2장 로마 공화국 정부의 완성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로마의 모든 거주자에 대한 인구조사 및 그들이 보유한 재산에 대한 국세조사를 시행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계급별로 분류하여 병역의 의무와 정치 참여 방식을 규정한 것이다. 첫 번째 계급 '에퀴테스equites(기사)'는 로마군의 기병대를 구성하는 로마의 가장 부유층 시민들로 구성되었다. 그 아래로 재산 정도에 따라 1등급에서 5등급까지 5개의 계급이 있었다. 최하층 계급은 가장 가난한 시민, 흔히 '프롤레타리proletarii'라 불리는 이들로 구성되었다. 각 계급은 '켄투리아centuriae' 또는 '백인대'로 세분되었다. 이는 정치와 군사적 기능을 모두 가진 소규모 공동체로, 시민들은 백인대 단위로 투표하고 전투에 참여했다. 이들 계급이 한자리에 모인 정치 의회를 '코미티아 켄투리아타comitia centuriata(켄투리아회會)'라 불렀다. 각 켄투리아는 수와 무관하게 한 표씩 행사했는데, 이는 유산계급에 편향된 체제였다. 투표 순서도 늘 상위 계급에 우선권이 주어졌다."(66-7)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마련한 이 선거제도는 (이후 1등급 켄투리아 숫자가 약간 바뀌기는 하지만) 로마 역사를 통틀어 변함없이 지속된 로마 정체의 기반이었다. 공화국의 최고 관료들을 '선출'하고, 법률을 마련하고, 전쟁과 평화를 선포하는 역할을 한 것도 바로 이 기구다." "기원전 510~509년 로마에서 혁명이 일어나기 반세기도 더 전에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에 의해 도입된 선거제도는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축출된 후 구성된 새 정부의 중심을 이루었다. 새로운 체제는 '로마인의 공공재'라는 의미의 라틴어 '레스 푸블리카 로마나res publica romana'로 불렸다. '공화국republic'과 특정 종류의 정체를 의미하는 '공화정체republicanism'라는 용어가 여기서 유래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로마인들은 켄투리아회를 통해 두 명의 집정관(공동 리더)을 선출하고 그들에게 시민과 군대를 소집하고 지휘하는 권한인 '임페리움imperium(명령권)'을 부여했다."(67-8)


"신생 공화국은 항구적인 전시 상황이 불러온 사회 내부의 문제와 요구를 해결해야 했다." "그리스에서는 이미 한 세기 전에 솔론에 의해 불법화된 채무 노예제가 로마에는 남아 있었고, 적대 관계인 인접국들의 위협으로 인해 무역이 제한되어 경제도 침체되었다. 동시에 인구가 증가하면서 식량 부족이 심화되었고, 토지 분배를 두고도 갈등이 커졌다. 로마는 공화국 초기의 반짝이던 성공을 뒤로한 채 급격하게 위기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사태는 하층 계급 출신으로 구성된 보병들이 채무 노예제에 반대하며 로마 인근 언덕에 진을 쳤을 때 정점에 달했다." "로마 근교 언덕에서 이루어진 합의는 로마 사회에 존재하는 가난과 빚을 뿌리 뽑는 것이라기보다는, 공화국에 평민 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정부 관직을 신설하는 것으로 결론났다. 기원전 494~493년경 최초로 평민 계급을 대표하는 정무관이 선출되었다. 이 새로운 정무관은 '호민관tribune'이라 불렸다."(77-9)


"로마 공화국은 한 세기 가까이 거의 매년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 이 압력은 로마를 아테네와 같은 방향으로 떠밀었다. 전쟁의 위협과 그로 인한 시민의 이탈을 감당할 수 없었던 로마 원로원은 호민관 제도를 신설하는 등 민중의 요구를 빠르게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도시를 방어할 수단을 가진 자에게 더 큰 정치적 권리를 부여했다. 왕정을 폐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시 방어를 위해 일시적일지언정 한 사람에게 독재권을 부여한 것이다." "전쟁은 로마 사회가 도시를 방어하고 외적을 물리친 '군인'에게 특별한 명예를 부여하게 된 배경이다. 로마의 생존이 달린 핵심 전투가 모두 육지에서 치러졌다는 사실은 특히 중요하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의 살라미스 해전처럼 하층 계급이 전투를 주도한 경험이 없다. 로마의 전쟁은 유산계급이 국가 방어의 책임을 내세워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정당화하는 계급사회가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85-6)


3장 공자와 성군


"중국에서 역사를 기술하고 논의하는 방식을 보면, 중국 문화에서 개별 통치자가 가진 중요성(그리고 인품의 중요성)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유능하고 도덕적인 군주가 등장하여 새 나라를 세우지만, 후대 왕들이 개국 군주처럼 위대한 통치자인 경우는 드물다. 결국 극도로 무능한 군주가 즉위하고, 그와 그의 왕조가 강하고 도덕적인 새 통치자에 의해 물갈이되고 신생 왕조가 탄생하는 흐름이 중국 역사의 전형이다."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중국 역사서 중 하나인 『서경書經』은 상고시대를 왕조별로 정리한 산문집으로, 공자 시대 이래 국가의 통치 철학을 정립할 때 본보기로 삼아온 중요한 서적이다. 『서경』은 상나라가 멸망한 이유로 마지막 왕의 결점을 지목하며, 왕의 잔혹한 통치를 견디다 못한 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명시한다.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통치자가 도덕적으로 타락한 결과 자멸하는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서경』에서는 특히 하늘이 내린 천명을 강조한다."(97-8)


"공자의 세계는 대략 5,000만의 인구가 수세기에 걸쳐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던 일촉즉발의 위태로운 세상이었다." "주나라 제후국들의 내부 갈등은 동원된 병사의 수나 전쟁의 지리적 범위, 그리고 지속 기간이라는 면에서 아테네인들이나 로마인들은 상상도 하기 힘든 규모였다." "주나라 제후국들은 육지에서 지속적인 영토 방어전을 치르면서 통치 계급에게 권력이 집중된 구조를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나 로마와는 달리 군주의 힘만으로 대규모 군대를 육성하거나 그들을 먹이고 무장시키기 위한 물자나 자금을 조달할 수 없었다. 따라서 더 크고 중앙집권화된 행정 조직이 구축되었다. 그 결과 진정한 의미의 관료제가 탄생했다. 관료층은 학문과 기술을 익혀 직위를 획득한 신생 하급 귀족으로 채워졌다. 이렇게 능력을 중시하는 사회 환경 속에서 '사士(선비/문관)'라는 사회·정치적 계급이 발달했으며, 공자의 가문도 이 계급에 속했다."(102-4)


"공자는 모든 사람에게 나무랄 데 없이 행동할 것을 요구했지만, 특히 군주의 기준은 더욱 엄격했다." "그에 따르면, 훌륭한 군주는 세 가지 핵심 개념을 지킬 때 탄생한다. 첫째는 덕德이요, 둘째는 의義요, 셋째는 예禮다. 의 없는 용기는 아무 의미가 없다. 〈군자가 용맹스럽고 의로움이 없으면 문란한 짓을 하고, 소인이 용맹스럽고 의로움이 없으면 도둑질을 한다.〉 만일 의로움과 양립할 수 없다면 삶의 모든 것을─삶 그 자체까지도─거부해야 한다. '예'는 유교의 다른 덕목과 마찬가지로 평생 갈고닦아야 하는 덕목이다. 오랜 기간 독서와 교육, 자기 수양을 통해 사회적 의례와 전통을 익히고 따름으로써, 단순히 의식을 위한 의식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신념을 갖고 진심을 담아 따르고 행함으로써 통치자는 천명을 얻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공자는 예가 귀족들의 도를 넘는 행위를 교화하고 통제하여 국가 전체에 혜택을 가져올 수 있다고 여겼다."(109-10)


"로마 사회에서 중시했던 미덕과 공자가 꼽은 훌륭한 군주의 자질이 겹치는 부분도 많지만(예를 들어 '인'은 후마니타스humanitas, '덕'은 디그니타스dignitasm '의'는 아욱토리타스auctoritas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로마 공화국의 지도자들에게는 끊임없는 금욕적 수양이 강조되지 않았다." "로마 공화국에서 개인의 도덕성, 공정함, 학습, 고결함의 중요성이 다시 대두되는 것은 원로원 의원 소小카토 같은 비판자들이 당시 지도층에 만연한 도덕성 부재를 한탄한 공화국 말기에 이르러서다. 이런 경향은 공자 시대의 중국과 유사한 방식으로 국가를 통치한 로마 제정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의 로마와 그리스 저작에서는 품성의 중요성과 통치자의 결함이 드러날 때의 위험을 논하기 시작했다. 공자는 당대 군주들에게 외면당했다. 전쟁의 위협이 상존하던 난세에 군주 개인에게 엄청난 노력을 요구하는 해결책─직설적으로 설파되었을 때─이 호응을 얻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114-5)


맺음말


"이 시기에 탄생한 정치혁명과 정치철학이 고대 사회가 직면했던 문제에 대응하고, 한발 앞서 나가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테네, 로마, 그리고 중국 노나라는 몇 차례의 대내적 사회 변혁과 대외적 전쟁을 경험하면서 몇몇 인물의 주도하에 국가 구성원들의 요구를 조율하고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공동체를 방어할 수 있는 정치적 대안을 모색했다." "직접민주주의, '혼합정체', 그리고 공자가 주창한 수기치인의 덕목을 갖춘 공정하고 현명한 군주가 모든 이를 다스리는 왕정이 그것이다. 서로 다른 도전에 직면했던 사회에서 등장한 서로 다른 성격의 이 세 체제의 차이점은 명백하다. 하지만 더욱 흥미로운 것은 세 체제의 공통점이다. 공자, 로마인들, 그리고 아테네인들도 (기원전 4세기 이후) 솔론처럼 책임을 동등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자격에 따라 적절하게 배분했던 통치자, 즉 국가를 믿고 맡길 수 있는 개인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동의했다."(122-4)


2부 전쟁과 변화하는 세계


"기원전 3세기 말부터 기원전 2세기 중반까지는 지중해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이르는 '고대 세계'에서 대부분 젊은이로 구성된 일단의 통치자들과 장군들이 국경을 다시 긋고,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고,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행군하고 항해하고 전투를 벌이고, 계략을 꾸미고, 통치하고, 목숨을 잃던 파란만장한 역사의 한 시기였다." "그 결과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은 지 고작 80년 만에 지중해와 중국, 동서양의 두 세계가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132-3) "카르타고를 파괴하고 그리스의 코린토스를 쑥대밭으로 만든 로마는 기원전 140년대와 130년대에 지중해의 패자로 부상했다. 한편 한무제는 서쪽으로 눈을 돌렸고, 그 압박은 중앙아시아 유목민이 박트리아(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지역)를 집어삼키게 만든다. 이는 동서양의 역사가 서로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한 최초의 사건이다. 두 세계의 접촉이 로마에서 중국 낙읍에 이르는 영구적인 네트워크로 발전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140)


4장 새로운 세대의 부상


"로마는 끈질긴 저항에 부닥쳤지만, 결과적으로는 지중해 세계를 제패했다. 중앙부는 혼란에 빠졌고 동방에서는 진나라가 세력을 확장했다. 제1차 포에니전쟁에서 패한 카르타고는 지중해에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하밀카르의 지휘하에 스페인에 새로운 세력 기반을 구축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로마는 제1차 포에니전쟁의 승자로 부상했지만 하스드루발과의 (스페인 분할 지배) 합의에 만족했을 것이다. 그들은 이탈리아 북부를 침공한 중유럽의 갈리아인들로 인해 스페인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로마가 스페인으로 세력을 넓히고, 그리스에 교두보를 구축하고, 소아시아 트로이의 독립을 요구하고, 카르타고에게서 빼앗은 지중해 패권을 만끽하는 동안, 북쪽에서 온 갈리아인들은 이탈리아 북부를 초토화시키면서 로마가 새로 점령한 지역의 갈리아족을 선동했다. 향후 5년간 로마는 이탈리아 북부에 군대를 투입하여 반란을 진압하고 침략자들을 내쫓는 일에 집중해야 했다."(165-6)


"동쪽에서는 사면초가에 몰린 셀레우코스 2세가 거대한 제국을 통치하는 일에 한계를 느꼈다. 위협이 발생할 때마다 광대한 제국을 가로지르며 행군하던 그는 마침내 기원전 225년경, 적의 칼이 아니라 말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군주로서 매우 굴욕적인 죽음이었다. 그의 뒤를 이은 아들 셀레우코스 3세는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1세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으러 가는 도중 자신의 군대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만다. 아마 그들은 전투 경험이 전무한 사령관 밑에서 아탈로스처럼 전장에서 뼈가 굵은 베테랑과 맞붙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이제 스무 살도 안 된 안티오코스 3세가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위를 물려받았다. 마케도니아에서는 기원전 221년에 열여섯 살이 된 필리포스가 섭정인 당숙의 그늘에서 벗어나 필리포스 5세로 등극했고, 같은 해 이집트에서는 이십대 초반의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코엘레 시리아의 지배권을 두고 셀레우코스 제국과 분쟁에 휘말리게 된다."(166-7)


"하스드루발의 대표적인 성과는 로마와 스페인을 분할 지배하는 협상을 성사시킨 것이다." "카르타고는 에브로강 남쪽에 설립된 로마인 정착촌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스페인의 광대한 영토 대부분을 자유롭게 통치할 수 있었다." "그 하스드루발이 켈트족 왕의 노예에게 암살당하자 스페인 주재 카르타고군은 즉시 스물여섯 살의 청년 한니발을 사령관으로 선출했고 카르타고 원로원이 이를 비준했다. 한니발은 그로부터 3년이 채 지나기 전에 하스드루발이 로마와 맺은 조약을 파기했다. 외교 대신 전쟁을 선택한 그는 에브로강 남쪽의 로마인 거주지 사군툼을 공격했다. 그리고 피레네산맥을 향해 행군을 시작했다. 그의 성姓이 '전광석화'라는 뜻의 '바르카'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후대 로마 역사가의 표현처럼, 〈알프스산맥을 헤치고 혜성처럼 등장한 한니발이 마치 창공에서 던진 무기처럼 눈 덮인 산꼭대기로부터 이탈리아로 쏟아져 내려왔다.〉"(166-7)


5장 관계의 성립


"기원전 215년 무렵, 카르타고와 마케도니아는 1,500킬로미터나 떨어진 서로 다른 대륙에 위치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양국을 위협하는 공동의 적(로마)을 제압하기 위해 단합했으며, 서로의 세력 확장을 기꺼이 지원하고자 했다. 필리포스 5세와 한니발은 국제 공조를 통해 입지를 다지려고 했다." "이집트에서는 최근 즉위한 젊은 프톨레마이오스가 셀레우코스 제국의 젊고 미숙한 왕 안티오코스 3세와 힘을 겨루면서 명성을 키워갔다. 안티오코스 3세는 이집트의 도전에 맞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동시에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광대한 영토를 방어해야 했다. 중국의 진시황제도 수세기 동안 전화가 휩쓸고 간 땅을 새질서 아래 통합하고, 갈수록 팽창하는 유목민 세력으로부터 국경을 방어하고, 신생 제국의 생존을 보장해야 하는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확장하는 체스판 같은 세계에서 살아남고 번영하기 위해서는 동맹을 활용한 전략적 공격과 방어가 유일한 (생존) 방법이라 여겼음이 틀림없다."(169-70)


"(기나긴 전쟁 끝에) 카르타고가 '새로운 제국'이라 여겼던 스페인은 이제 로마의 손에 넘어갔다. 한니발의 동생은 전사했고, 한니발에 대한 카르타고의 지지는 여전히 불확실했다." "기원전 205년, 20년 전보다 더 성숙하고 현명해졌지만 전쟁에 지친 리더들이 고대 세계의 체스판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이 처한 상황은 제각각 달랐다. 사십대에 접어든 한니발은 로마를 협상 테이블에 앉히려는 노력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서른 살의 로마 장군 스키피오는 스페인에서의 승리에 한껏 고무되어 한니발과의 정면승부를 고대하고 있었다. 삼십대의 필리포스 5세는 더 이상 자신이 로마의 목표물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역시 삼십대인 안티오코스 대왕은 지중해에서 중앙아시아를 연결하는 통일 제국의 전성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는 분열된 지중해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정치에 발을 들일 준비를 마쳤다. 한편 그의 오랜 적수였던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4세 사후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204)


"중앙아시아의 박트리아에서는 에우티데모스와 젊은 아들 데메트리오스가 동쪽 유목민으로부터 셀레우코스 제국을 지키는 수호자 역할을 확립해나갔다. 중국에서는 새로운 왕조의 수장 유방이 통일 제국 한나라를 통치했다. 그리고 이 신생 제국의 북서쪽 국경 너머에서 고도로 훈련된 흉노 부대를 이끄는 젊고 대담무쌍하며 무자비한 묵특이 한나라를 넘보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각자가 속한 공동체 관계를 재정립했으며, 그 과정에서 고대 세계를 더욱 가까이, 주로 폭력을 사용하여 연결했다. 그들이 각자의 세력권을 확장하고 동맹을 구축하면서 전쟁이 여러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양상이 나타났다. 일부 지역에서는 단일 통치자의 지배하에 거대하고 통합된 공동체가 탄생했다. 이런 움직임의 결과─특히 동쪽에서 외견상 무질서하게 시작된 대이주로 인해─세계는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었다."(204-5)


6장 동방과 서방의 제국


"대륙을 재통일한 한고조 유방은 효율적인 통치 체제를 구축하는 한편 묵특의 등장으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북쪽의 국경선 방어에도 신경을 써야했다. 방대한 제국의 통치와 방어라는 이중의 도전은 로마 공화국 역시 수십 년 내에 직면하게 될 문제이기도 했다. 한니발이 이탈리아 남부 신전 벽에 자신의 업적을 새기며 지난 세월을 반추할 무렵, 젊은 스키피오를 로마군사령관으로 임명한 로마는 카르타고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또한 이집트에 보다 직접적으로 개입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를 공격할 예정이었다. 게다가 안티오코스 대왕이 지중해를 넘보고 있었기에 셀레우코스 제국과의 충돌도 불가피했다. 고대 세계의 강대국들이 각자의 세력권 내에서 지배권을 다지고 경계선을 방어하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시도한 결과 2개의 대제국이 탄생했으며, 그 사이에 위치한 수많은 경쟁 집단들은 불안정한 정세에 휘말렸다."(207)


"기원전 190년 3월 18일,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동생)가 아시아를 향한 기나긴 행군을 시작하기 위해 로마군을 이끌고 이탈리아 남부에서 그리스 북부로 항해했다." "8월경에는 한니발이 이끄는 안티오코스 대왕의 함대가 로마 편에 선 로도스인들에게 격파당했다. 이제 에게해는 로마와 로마 동맹에 완전히 장악되었다." "로마군은 그해 군사작전 기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셀레우코스 영토에 진입했다. 사르디스로 가는 길과 에페소스의 해군기지는 안티오코스 대왕이 방어에 만전을 기한 요지였다. 시필로스산 기슭 헤르무스강 근처에 자리잡은 도시 마그네시아 아드 시필룸(오늘날 터기 이즈미르에서 북동쪽으로 65킬로미터 거리)에서 로마군과 안티오코스군이 맞붙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안티오코스군 전사자는 무려 5만 3,000명인 반면 로마 측 전사자는 단 394명에 불과했다. 이 숫자의 정확성은 차치하고라도, 그날 로마의 승리는 절대적이었다."(241-2)


"안티오코스 대왕은 힘들게 얻은 아시아 연안과 타우루스 산맥 서쪽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평화협정을 받아들여야 했다. 로마는 새 영토의 상당 부분을 동맹국에 ('로마의 선물'로) 분배했다. 그리스와 지중해 동부 지역을 구슬리기 위한 능숙한 외교 제스처였다. 그 밖에도 안티오코스 대왕은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했으나, 왕위와 나머지 제국은 그대로 유지하도록 허락되었다." 안티오코스의 권위가 무너지자 왕국 내부에서 연쇄적으로 균열이 일어났다. "무력으로 병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셀레우코스 동쪽 변방의 파르티아가 반란을 일으켰다. 박트리아에서는 에우티데모스 사후 통치자 자리에 오른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가 정복 전쟁을 벌여 동쪽과 힌두쿠시 산맥 너머 인도로 영역을 확장했다. 로마의 성공을 보고 간이 커진 지방 관료들이 잇달아 독립국을 선포하고 왕을 참칭했다. 안티오코스 대왕이 평성 일궈온 업적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졌다."(242-3)


맺음말


"한니발이 생을 마감한 기원전 182년, 그의 위대한 적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도 눈을 감았다. 그는 일생 동안 지중해 세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특히 어떤 과정을 거쳐 로마의 지배가 확립되었는지를 남다른 위치에서 지켜봤다." "스키피오는 로마 세력권을 지중해 전역으로 확장하고자 하는 노력과 집착, 그리고 그에 따른 문제에 직면했으며, 영토를 유지하고 방어하는 데 요구되는 까다로운 균형을 절감했다. 스키피오가 처음 전쟁에 참가했을 때 로마는 지중해의 여러 세력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가 세상을 뜰 무렵에 이르면 지중해는 로마의 호수로 변했다." "로마 체제는 모든 남성에게 영웅이 되라고 장려하는 한편, 고위 공직자의 임기를 제한해 단기적 의사 결정을 선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명성을 탐하는 집정관들을 보면서) 폴리비오스가 카르타고의 단점으로 지적했던 지도부의 불협화음이 로마라고 해서 예외가 아님을 절실히 깨달았다."(245-6)


"기원전 2세기 말에 여러 가지 요인─중앙아시에서 벌어진 문화권 사이의 무력 충돌과 이후 중국의 확장, 생존을 위해 기동성과 연결성이 요구되었던 혹독한 물리적 환경, 그리고 장사와 무역에 타고난 수완을 보인 인간 공동체들의 노력─이 맞물려, 아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공식 상업망이 출현했다. 수십 년 내에 이 네트워크는 중국(한나라 장안의 대규모 서시西市)에서 티레(지중해 동부 연안에 위치한 카르타고인 선조의 도시), 그리고 마침내 로마까지 연결된다." "실크로드는 콜럼버스가 미대륙을 발견하고 바스코 다 가마가 아프리카 희망봉을 성공적으로 탐사해 새로운 동서 무역 항로와 시장을 개척할 때까지 1500년 동안 동서양의 가장 중요한 통로로 기능했다. 그리고 이 새로운 통로를 통해 물품뿐만 아니라 사상이 이동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신에 관한 다양한 개념이 고대 사회 전역에 거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250-1)


3부 연결된 세계의 종교


"한무제와 그의 뒤를 이은 황제들은 무역과 통신을 향상시키고자 제국을 가로지르는 3만 5,000킬로미터 길이의 도로를 건설했으며,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도입했다. 실크로드의 동쪽 종착지인 수도 장안은 25만 명이 훌쩍 넘는 인구를 가진 거대한 상업 도시로 성장했다. 그들은 서쪽으로 중국의 세력권을 확장했다. 통칭 실크로드라고 알려진 무역 네트워크를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동양인들이 서쪽의 보배라고 여겼던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평원의 빠른 말, 중국 사료에서 한혈마汗血馬라 찬사를 보내는 명마를 확보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한나라의 황금기는 기원후 9년에 왕망이 일으킨 정변으로 잠시 중단되었다. 하지만 무능했던 '신新'왕조는 10여 년 만에 농민반란으로 무너졌다. 그 후 한나라(후한)가 재건되고, 동쪽의 낙양(과거 주나라의 도읍)이 새 수도로 정해졌다. 이후 수 세기 동안 한나라는 머나먼 지역의 교역 상대에 대한 지식을 더 많이 습득했다."(258-9)


"같은 기간에 박트리아왕국을 점령한 월지는 실크로드상의 '원형 교차로'라는 탁월한 입지에 힘입어 중앙아시아에 쿠샨제국이라는 자기들만의 정주 국가를 건설했다. 쿠샨은 국제적인 세계였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베그람 근처 카피사에서 발견된 쿠샨 왕들의 (소유로 추정되는) 저장고 2개는 1세기부터 2세기 초의 로마, 이집트, 인도, 중국산 물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쿠샨제국의 서쪽에서는 사면초가에 몰려 쇠락해가는 셀레우코스 제국이 독립한 파르티아에 천천히 잠식당하는 중이었다. 파르티아는 쿠샨제국과 마찬가지로 실크로드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제국을 형성했으며, 두라 에우로포스(오늘날 시리아에 위치) 같은 주요 무역 도시가 번성했다. 기원전 1세기에 지중해 동쪽 연안에서는 셀레우코스 제국 공주의 아들이자, 훗날 로마에 의해 한니발에 비견될 만한 위험한 적으로 간주되는 미트리다테스 6세가 이끄는 폰토스 왕국이 강국으로 부상했다."(259)


"(최초로 세례를 받은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의 통치 기간은 로마 세계의 종교적 지형이 끊임없이 변화하던 시기와 맞물려 있다. 기원전 2세기의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공화국체제의 강점과 개인의 용기를 강조하는 가치관 외에도 미신이나 신앙을 뜻하는 '데이시다이모니아deisidaimonia'가 〈로마 체제의 응집력을 유지하는〉 핵심 요소라고 말했다." "4세기는 로마제국이 주변을 둘러싼 고대 세계의 변화에 점차 적응해나가는 과정의 일부로서, 로마와 기독교의 관계를 다룰 때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시기다." "그러나 이 시대의 중요성은 기독교의 연대기와 지중해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수용한 최초의 국가는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자리 잡은 아르메니아왕국이다." "아르메니아왕국의 기독교 개종은 티리다테스의 개인적 구원뿐만 아니라 아르메니아의 왕권이 걸린 문제였으며, 서쪽의 로마와 동쪽의 파르티아(이후 사산제국) 사이에 낀 소왕국의 안전이 달린 문제이기도 했다."(268-9)


"또한 오늘날 4대 종교에 포함되는 힌두교와 불교도 이 시기에 중대한 발전과 확장을 이루었다. 인도에서는 힌두교와 불교의 상호작용이 가져온 종교적 변화를 등에 업고, 그리고 유목 민족의 이동과 실크로드 개척이 유발한 사회 변화를 바탕으로 굽타왕조가 정권을 장악했다. 굽타왕조는 점차 힌두교의 새로운 요소와 오래된 요소를 독특하게 조합하여 그들의 통치를 뒷받침하는 종교와 신의 세계, 사회를 창조함으로써 세속적 권위와 종교적 권위를 통합했다. 굽타왕조는 종교적 다양성과 문화 발전을 이루며 인도 역사의 황금기를 구가했다. 중국에서는 한나라의 수도 낙양으로 곧장 이어지는 실크로드를 통해 상품뿐만 아니라 여러 사상이 유입되었다. 그중 하나가 '축의 시대'에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다. 기원후 수세기에 걸쳐 중앙아시아와 인도를 통해 들어온 다양한 형태의 불교가 서서히 중국 사상에 뿌리를 내렸다."(269-70)


7장 내부와 외부로부터의 종교 혁신


"(굽타 왕조 시대의) 인도 사회에서 불교의 인기는 힌두교 바르나 체제를 위협했다. 특히 평등 이념에 따라 수행에 전념한 초기 불교는 오직 하나의 계급(브라만)만이 공동체를 위한 제식을 수행할 권리가 있다고 규정하는 기존 체제에 의문을 제기했다." "기원전 2세기부터 브라만 계급이 범상한 직업을 수행하면서 바르나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인식이 한층 강화되었다. 동시에 (실크로드를 포함한) 수익성 높은 무역로를 통해 부를 쌓고 중산층으로 부상한 바이샤 계급과 중요성이 커지면서 바르나 사이의 구분도 엷어졌다. 여기에 더해 이민족(특히 유목민)의 이주는 바르나를 더욱 약화시켰다." "유목 민족의 왕이 되기 위해서는 출신 가문의 배경보다 전투에서 얼마나 용맹한지와 부족을 잘 다스릴 수 있는지가 중요했다. 이런 사고방식은 필연적으로 인도 전통 신앙 및 계급 체제에 영향을 미쳤으며, 날 때부터 바르나에 의해 사회적·종교적 위치가 정해지는 기존 체제의 정당성에 도전하는 대안으로 기능했다."(276-7)


"콘스탄티누스 1세는 기독교와 이교 전통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면서 관용 정책을 펼쳤다. 락탄티우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를 믿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그는 여전히 이교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제국을 다스리는 이교도 황제였다. 그는 즉위 10주년 행사 때 이교 희생제는 거부했지만 전통적인 이교 경기는 허용했다. 그는 새로운 목욕장을 짓는 동시에, 최초의 성 베드로 성당을 포함한 새 성당을 건축했다. 새 성당은 로마 도시 중심부의 전통적 이교 사원들을 위협하지 않도록 왕실이 소유한 땅이나 도시 성벽 밖에, 사회적 다수인 이교도들에게 익숙한 바실리카basilica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교의 '무적의 태양Sol Invictus(솔 인빅투스)'신 이미지와 함께 그를 자신의 '동료'라고 새긴 주화를 발행했으며, 일요일을 휴일로 삼아 태양신 숭배에 전념하도록 했다(일곱째 날은 쉬는 날이라고 선포한 기독교 경전을 따른 것이 아니다)."(281-2)


# 콘스탄티누스 1세의 관용 정책이 직면한 기독교 내부 분쟁

1. 도나투스파 : 기독교 박해 시절 로마 당국의 압력에 굴복한 적이 있는 배교자를 강력히 배척하고 그들이 행하는 성사의 효력을 거부한 분파

2. 아리우스파 : 성부와 성자의 동일 본성을 부정하고 그리스도가 신에 종속되는 개념이라고 주장한 분파


8장 종교의 강요, 공존, 결합


"티리다테스 3세는 대내적으로 중앙집권화를 촉진하고, 대외적으로는 강대국 사이에 위치한 아르메니아의 지정학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그레고리우스와 협력하여 국민들의 기독교 개종을 강행했다. 반면 콘스탄티누스 1세는 자신의 통치권을 부정하거나 제국의 안정과 통합을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모든 종교에 관용을 베풀었고, 이교 종교 의식에서 황제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듯이, 기독교회의 위계 구조에 황제의 자리를 마련하여 자신의 통치권을 강화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인도와 중국의 통치자들도 종교 의례를 변모시켰다. 인도의 굽타왕조는 오래된 힌두교 의례와 새로운 힌두교 의례를 결합하여 통치자의 지위를 강화하고 제국의 안정과 통합을 도모했다. 반면 서진이 멸망하고 군사 갈등의 시대가 다시 도래한 중국에서 포교승들은 전통적인 중국의 종교 사상 및 사회 관행을 흡수하고 새로 등장한 복수의 통치자들의 필요에 부응하며 불교를 개조했다."(310)


"중국 역사 연대기에서 한나라와 6세기 말에 시작되는 수·당 시대 사이에 위치한 4~6세기는 정치적·군사적으로 극심한 혼란과 분열의 시기다." "불교는 이 시대에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크게 번창했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지배층이나 일반 백성이나 할 것 없이 모두에게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시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삶은 자연재해, 전염병, 기근으로 점철된 끝없는 투쟁이었고, 간헐적인 외세의 침략과 내부 세력 다툼으로 인한 전란의 피해까지 감당해야 했다. 끝없이 돌고 도는 윤회의 속성상 세속적인 야망은 부질없다고 강조하는 불교는 사람들의 염세주의와 공명했다. 동시에 선업을 쌓으며 착하게 살면 윤회(업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가르침은 사회 모든 계층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제공했다. 이러한 교리는 로마, 아르메니아, 그리고 인도에서 확고하게 뿌리내린 종교 체제와 대비된다."(340)


9장 종교와 통치


"아르메니아에서는 종교적 권위와 세속적 권위의 갈등이 훨씬 더 피비린내 나는 양상을 띠었다.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려는 통치자의 야심, 기독교를 기존의 종교적·사회적 지형에 이식하려는 분투, 그리고 로마제국과 사산제국의 좌우되는 정치적·군사적·종교적 결정이 이를 더욱 부채질했다. 한편 4세기 후반의 인도 굽타왕조에서는 통치자들이 구축해놓은 종교와 통치의 전략적 결합이 한층 강화되었다. 이와 함께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안정이 도래했고, 이것은─로마와 아르메니아에서 특정 계열의 기독교만 수용하고 나머지는 죄다 불법화했던 것과는 달리─종교적 다양성, 존경, 관용의 만개로 이어졌다. 중국에서는 불교를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각을 중화하기 위해 (불교와 도교 그리고 유교의 서사를 연결하여 중국인들이 불교 개념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불교계의 노력이 꾸준히 지속되었다. 그 결과 황제가 불교로 개종하고 황실의 지속적인 지원을 약속하기에 이르렀다."(351)


"379년부터 395년까지 로마 황제를 지낸 테오도시우스 1세는 율리아누스가 360년에 사망한 후 집권한 여러 황제들 중에서 처음으로 일정 기간 이상 로마제국 전체를 단독으로 지배한 황제다(그리고 로마제국을 단독으로 지배한 최후의 황제다). 380년 1월 그리스 북부 테살로니키에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성자와 성부의 관계에 관한 칙령을 발표했다. 후대에 익숙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동등한 위엄과 삼위일체 개념 아래〉 하나의 신성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공식 노선을 따르지 않는 자는 '미치광이'로 규정되어 신과 황제의 분노를 감당해야 했다." "383년부터 모든 다른 종류의 기독교 신앙은 공식적으로, 법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이단'으로 배척되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가 강경한 입장을 취한 이유는 간단하다. 심각한 외부의 위협에 맞서 거대한 제국을 통합하고 안정시켜야 했기 때문이다."(358-60)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세상을 떴다. 그의 추도 연설을 맡은 사람은 종교와 통치의 관계에 뜻밖의 전환을 불러온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였다. 연단에 선 암브로시우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비록 그는 죽기 직전에 이르러서야 공식적으로 기독교로 개종했지만)가 창시한 기독교 통치 왕조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는 계속해서, 하지만 이것이 곧 콘스탄티누스 1세와 후대 황제들이 자처했듯이 황제가 교회의 최고 권위자가 된다는 의미는 아니며, 황제에게 종교적 권위를 행사하는 것은 주교들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암브로시우스는 390년 테살로니카 반란을 가혹하게 진압한 책임을 물어 테오도시우스 1세를 파문했고, 황제는 수개월간 속죄한 후에야 성당 출입이 허용되었다. "로마 세계는 이제 하나의 종교를 가졌으나 세속적 통치자와 종교적 통치자를 따로 두었으며, 점점 더 후자의 권위가 강해지고 있었다."(362-3)


"찬드라굽타 2세와 후계자들의 치세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특정 종교와 지배 계급 사이에 강력한 유대 관계가 존재하는 동시에 제국의 다양한 신앙이 포용, 권장, 보호되었다는 점이다. 찬드라굽타 2세의 즉위 5년째인 380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투라 석주는 시바를 최고신으로 숭배하는 힌두교 종파가 번영했다는 증거다." "그러나 관용 정책은 굽타왕조의 종교 관행이 가진 위계적 교리 중 상당 부분을 명빅해 거부했던 불교에까지 확장되었다. 실제로 굽타왕조는 관료를 따로 임명하여 불교, 그리고 마투라에 주재하는 수천 명의 승려 및 굽타제국의 수도 파탈리푸트라에 주재하는 수백 명의 승려를 관장하게 했다." "굽타왕조가 불교에 보여준 관용은 기원전 6~5세기 축의 시대에 불교와 함께 출현한 자이나교에까지 확장되었다. 자이나교가 굽타제국의 종교와 사회의 위계적 성격에 불교보다 더욱 격렬하게 반대했음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375-7)


맺음말


"4세기에 일어난 기독교, 힌두교, 불교의 역동적인 변화는 이전 수세기에 걸쳐 고대 세계가 연결되면서 그 토대가 마련되었다. 각 종교는 전파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변형을 거쳤다는 사실도 짚고 넘어간다. 고대 힌두교와 불교가 특히 그런 경우이다." "교류와 혼합에 더해, 4세기가 주요 종교의 역사와 고대 세계사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기인 또 다른 이유는 새로 등장한 종교가 로마 세계, 아르메니아, 그리고 인도에서 통치자들이 영토를 통합하고 안정시키고 강화하는 난제를 풀어나갈 또 다른 길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형성된 종교와 통치의 관계는 나라마다 제각각 달랐으며, 종교적 권위와 세속적 권위가 결합된 곳부터 적대 관계를 이룬 곳까지 다양하게 나타났다. 평화와 관용과 사랑을 핵심으로 하는 종교와 전쟁과 폭력을 통해 제국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손잡은 것은 상당히 역설적이지만, 인간사는 이러한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3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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