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상인 - 서울,개성,인천 지역 자본가들과 한국 부르주아의 기원, 1896~1945 역비한국학연구총서 28
이승렬 지음 / 역사비평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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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8세기 후반 도성의 상업계에 두 가지의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게 된다. 하나는 시전상인과 사상층이 경제외적인 분야 즉 조선왕조 정부·궁방·권세 있는 양반사대부의 후원을 얻기 위해 벌인 경쟁이었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상품유통경제의 주도권을 둘러싼 시전상인 대 사상층의 경쟁이었다. 도고행위─시전상인과 같은 관상도고나 경강상인과 같은 사상도고─는 모두 경제 외적인 배경을 전제로 행해지는 상행위였지만, 도고상인 간의 경쟁은 조선 후기에 나타난 아래로부터의 상품화폐경제 발달을 반영하는 새로운 모습이었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재야 사림과 중앙관료 사이에 유기적으로 연결된 기반이었던 사림정치의 주자학 이념이 파탄을 맞고 소수의 경화사족이 정권을 독점한 것도 도성 주변 상인들이 성장할 수 있었던 여건이었다. 세도정권은 수령-이서층으로 연결된 수령권을 매개로 재지사족의 향권을 제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에 의한 농민수탈을 방조하면서 이익을 취하고 있었다."(50)


"농민수탈의 방조는 세도정권이 말단 지배기구에서 복무하는 수령과 이서층에게 주는 복종의 대가였으며, 이러한 부패의 공유를 통해 세도정권은 정치적 생명을 연장해갔다." "조선의 19세기는 현물경제에 기초한 국가적 상품화폐경제와 화폐수탈에 기초한 농민적 상품화폐경제가 병존하는 시대였다." "한말의 조세수취제도 및 재정운영이 가지고 있는 많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경제개혁의 최우선 과제는 현물경제와 화폐경제가 병존하는 지금의 이중구조를 혁파하고 화폐경제로 완전히 전환하는 것과 중간수탈이 자행될 수 있는 허점을 가진 현 징세기구를 대대적으로 개혁하는 것이었다. 전자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조세금납화의 젼면실시와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화폐개혁, 그리고 국고은행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중앙은행의 설립이 요구되었으며, 후자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조세의 부과와 징수체계를 분리하여 근대적인 징수제도를 수립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다."(51-2)


"(광무정권과 도고상인층이 합작하여 금융근대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도고상인들이 은행가로 전환한 것은 한국에서 부르주아의 등장을 의미했다. 정부와 상인의 공생관계 위에서 성장한 그들은 국가권력에 의존적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저항 없이 식민지 지배체제에 편입되었다. 대한제국의 금융근대화를 추진했던 은행가들은 대한제국 금융기구의 식민지적 재편을 주도했고, 일제강점 이후에는 조선상업은행장 및 한성은행장을 지내는 등 금융계의 주요인물이 되었다. 또 친일귀족, 일본인 고위관리와 자본가, 그리고 한인 자본가들이 함께 식민지기 '자본과 권력'의 교제를 위한 최고의 사교공간인 대정친목회, 조선실업구락부를 조직했다. 이런 연유로 그들은 식민지기 금융 산업의 주변에서 부르주아로서 부와 사회적 지위를 누렸지만 사회를 주도할 만한 도덕적·이념적 헤게모니를 가지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대한제국의 유산인 그들은 식민지 근대, 식민지 자본주의가 전개되던 발판이기도 했다."(59)


# 조선은행 창립(1896.6), 한성은행 창립(1897.2), 대한제국 출범(1897.10), 대한천일은행 설립(1899.1)


제1부 대한제국과 상인


"조선은행의 초기 영업은 상업금융과 정부의 지원을 통해 순조로웠다. '창립주의서'에 나와 있듯이 상업금융은 '금은포면'과 같은 상품을 담보로 한 연리 12~24%의 단기대부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정부의 지원도 적지 않아 운영자금을 조성하는 데 큰 문제는 없었던 것 같다." "조선은행 영업은 독립협회운동의 성쇠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 창립 발기인 대부분이 독립협회 창립 발기인인 점, 독립협회운동이 고조기에 달했던 1889년까지는 정부의 조세금 취급인가를 받거나 국고금 예치 등의 특혜를 얻었지만 1889년 후반 독립협회운동의 좌절 이후에는 영업상황을 보여주는 사실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 은행장 안경수가 1898년 6월 한국을 방문한 일본 다이이치은행 두취(頭取) 시부자와 에이이치를 통하여 100만 원을 차입하여 태환지폐를 발행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가 8월에 망명함으로써 은행을 주도할 수 있는 인물이 없어진 점 등은 조선은행의 부침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80-2)


"1899년 10월부터 이용익을 중심으로 한 광무정권의 관료들은 차관도입을 위해 일본·미국·프랑스·러시아·벨기에 등 여러 나라와 분주하게 접촉했는데, 이 사업은 순탄하지 않았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국제정세에서 일본의 주도권이 강화되는 추세였으나 1895년 러시아·프랑스·독일의 삼국 간섭 이후에는 조금 달라져서, 상대적으로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지기는 했지만 열강들의 세력은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국제관계는 광무정권이 독자적인 개혁과 외교를 펼칠 수 있는 환경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력 균형을 조금이라도 깨는 조치에 대해서는 어김없이 제재가 돌아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열강의 간섭을 타파하려는 구체적인 시도로는 광무정권이 프랑스계 자본인 운남雲南신디케이트와 체결한 차관 계약이 있는데) 청일전쟁, 갑오개혁, 을미사변 등을 통해 일본의 침략 의도를 체험한 광무정권은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103-4)


"일본공사 하야시는 각국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면서 광무정권 내에서 이번 차관 교섭을 반대할 세력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고종을 직접 알현하는 자리에서 차관교섭이 향후 대한제국에 미칠 해악을 강조하는 등 부산하게 움직였다. 영국, 미국, 일본 삼국은 러시아와 프랑스의 영향력이 대한제국에서 신장되는 것을 반대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이해관계였기 때문에 공동보조를 취할 수 있었다." "마침내 정부는 1902년 2월에 운남신디게이트와 맺은 차관도입 계약의 이행 거부를 선언하게 되는데, 이는 달리 말하자면 차관을 제공하는 나라의 경제적 지배를 의식해 프랑스 같은 유럽 국가들이 제공하는 차관을 선호했던 이용익의 노선이 1902년 1월 30일에 영일동맹을 체결한 일본외상 고무라의 노선에게 패한 것이다. 열강의 세력이 균형을 이루는 상태에서 외자도입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광무정권은 외자도입을 추진하는 와중에도 많은 부작용을 낳는 백동화 발행을 늘려갈 수밖에 없었다."(106)


"대한천일은행의 본점 경영진은 크게 네 가지 계통에서 충원되었다. 첫째, 민병석·이근호·최석조와 같은 황실 측근의 관료 및 재무관료, 둘째, 김기영·홍정섭 등으로 대표되는 개성상인, 셋째 조진태로 대표되는 시전상인과 경성의 대상(大商)인 김두승·백완혁, 넷째 인천 객주 출신의 김종례 등이다. 나머지 임원들 역시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전환국 전·현직이 대한천일은행의 운영을 주도하거나 참여했다는 사실은 대한천일은행의 설립이 백동화 인플레이션의 부작용을 완화하기 위한 백동화 유통 확대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증거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가장 확실한 자금 조달원인 전환국 관료 최석조를 중심으로 하여 경성·개성·인천의 상인들로 짜여진 대한천일은행의 경영진은 국가와 상인의 협력 관계가 은행 설립의 모태가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1902년에 영친왕이 은행장, 광무정권의 재정관리자인 이용익이 부행장으로 취임하면서 더욱 뚜렷해졌다."(120-1)


제2부 일본제국주의와 은행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제국주의는 대한제국 정부에 강요한 '제1차 한일협약'(1904년 8월 22일)을 맺고 재정과 외교 분야의 정무를 실질적으로 관장했다. 1904년 10월에 대한제국의 재정고문으로 일본 대장성 주세국장 메가타 다네타로가 부임했고 그가 맨 처음 단행한 사업은 대한제국의 화폐발행기관인 전환국의 폐쇄였다. 또한 그에 그치지 않고 메가타는 조선의 화폐와 재정제도를 전면적으로 바꾸어나갔다. 그동안 인플레이션을 촉발시킨 원인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화폐의 침략을 저지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던 백동화는 이제 더 이상 발행되지 않고 역사 속으로 퇴장했다. 메가타 다네타로의 두 번째 사업은 다음해 1월 15일에 체결된 탁지부와 일본 다이이치은행 간의 '화폐정리 사무에 관한 계약'이었다. 이로써 다이이치은행은 한국의 화폐정리에 관한 전반적인 업무를 취급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었다."(213)


"일본 정부는 1905년 3월에 칙령 제73호를 공포하여 다이이치은행에게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했고, 이 은행은 한국에서 실질적인 중앙은행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다이이치은행권은 칙령 2호에 근거한 금본위제가 아니라 일본의 원화(圓貨)를 발행 준비로 하는 원화본위제 아래에서, 즉 1905년 6월 1일부터 한국의 본위화가 된 다이이치은행권은 금화·금은지금·일본은행태환권 등과 같은 정화(正貨)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행되었는데, 여기에는 일본 정부의 치밀한 계산이 들어가 있었다. 식민지 화폐제도를 수립하는 데 드는 비용을 절감하는 것이 하나의 이유였고, 식민지 경제의 모순이 일본 경제에 끼칠 위험성을 대비한 것이 또 다른 이유였다." "(화폐정리를 위한 화폐교환 과정에서) 한상韓商들이 재산상의 피해를 입은 것은 2대1로 설정된 구화폐와 신화폐의 교환비가 및 까다로운 교환조건 탓도 있지만, 불안감으로 인해 적절한 재산운용에 실패한 것이 주요한 원인이었다."(214-5)


# 일본이 관여한 주요 조치

1. 대한천일은행을 조선상업은행으로 개칭(1911년)

2. 한성공동창고(주) 설립 : 부동산 담보 대출을 시행하여 부동산 중심의 자산구성을 가진 한상들의 금융 경색 완화

3. 한성수형조합 설립 :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어음 발행과 유통을 활성화(신화폐와 일본통화 태환권만 결제수단으로 인정)

→ 사회 혼란을 수습하고 체제를 안정화시키는데 기여


"조선상업은행의 대출 동향은 식민지 경제의 흐름의 대강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민족적 구분 없이 191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증가했던 미곡 및 포목상에 대한 자금 융통은 식민지적 교역구조라 할 수 있는 미면교환무역의 확대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조선회사령'을 실시하여 자유로운 자본 운동을 억제하고 한국을 일본의 식량공급 기지이자 상품 시장으로 만들고자 했던 조선총독부의 지배정책에 은행자금이 동원되었다. 토목건축업자에 대한 대출 역시 관공서 및 군대 등의 시설을 건설하는 용도로 쓰였다는 점에서 '무단통치'로 명명되는 1910년대 지배정책의 물리적인 기반 조성에 은행 자금이 동원된 것으로 봐야 한다." "특히 1910년대 후반기에 미곡수출이 지나치게 증가하면서 국내 미가가 급등하고, 이에 따라서 수입 면직물의 가격 역시 상승하여 물가가 크게 오르는 등 인플레이션 현상이 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상업은행은 계속해서 금리를 인하하면서 미면교환무역을 지원했다."(279)


제3부 식민지 조선사회와 계급


"1910년대의 한인 자본가들의 대응은 크게 네 가지 방식으로 나타났다. 첫째, 대한천일은행·조선상업은행의 경영진에 참여했던 김기영·김진섭·홍충현처럼 금융·상업자본에서 금융자본 혹은 산업자본으로의 전환을 모색했거나 둘째, 한일은행의 백인기와 민대식처럼 지주자본에서 금융자본으로 전환한 경우이다. 셋째, 경성방직의 김성수와 김연수처럼 지주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 전환한 사례이고 넷째는 박승직처럼 중세적 상업자본에서 근대적 상업자본으로 성장한 사례가 있었는데 경성의 여러 포목상 중에서도 그러한 자들이 많았다. 조진태와 백완혁은 어떤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1910년대에 그들의 정치적·사회적 배경이 다른 상인이나 지주들에 비해 우월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놓인 유리한 환경을 이용하여 자본의 전환을 모색하지 않은 이유는 한말 이래로 끊임없이 정치세력과의 연대를 통해 자본의 운동을 도모했던 그들만의 전통이 1910년대에도 그대로 답습되었기 때문이다."(312)


"은행의 경영진이 선택한 자본축적의 길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유형은 대한제국의 몰락에 직면하여 관료와의 유착관계에서 벗어나 민간 자본가로 전환한 경우이다. 상업·산업자본가로 전환한 개성상인 김기영과 금융·산업자본가로 전환한 김진섭은 노년의 나이에도 기업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두 번째 유형은 대한제국과의 유착을 통한 자본증식에 한계를 느끼면서 또 다른 권력층인 친일정치세력 및 일제와의 정치·경제적 유대관계를 통해 관변 혹은 예속적 금융자본가의 지위를 유지한 경우이다. 조진태·백완혁이 이 사례에 해당된다." "대정친목회 회원이던 조진태는 『조선일보』의 초대 사장에 취임했다. 1920년 3월 5일에 『조선일보』는 '신문명 진보주의'를 사시로 내걸고 창간되었지만, 일제와 유착해 있던 조진태를 비롯한 대정친목회 인사들로는 민족주의가 고양된 1920년대 전반기의 한국 사회에서 여론을 주도할 수 없었다."(313-4)


"한편 전라도 대지주의 자제로서 일본유학을 다녀오고 서울에 정치적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20대 초반의 청년 김성수 주변에 엘리트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1919년에 김성수는 한국 방직산업의 선도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경성방직을 창립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인한 아시아 시장에서 유럽 상품의 퇴조, 면방직제품의 수요가 풍부한 국내 시장의 여건 등은 당시 한국에서 면방직산업이 발흥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었다. 그의 인적 네트워크는 그의 선택을 뒷받침해주었다. 그러나 국가의 보호도 받지 않고 시장의 동향을 완전히 예측할 수 없었던 상태에서 지주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 전환하는 것은 그 당시에는 드물고 획기적인 일이었다. 조기준의 지적대로 김성수는 마셜이 언급한 '개척적인 기업가'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김성수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식민지 조선 사회의 여론 형성에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는 『동아일보』를 1920년 4월에 창간했다."(322-3)


"이러한 그의 행보는 지대나 이자 수익에 익숙해 있는 지주 혹은 자본가들과 달랐다. 그 덕택에 그는 약관의 나이 20대에 지주·교육·산업·언론자본 등 복합적 성격을 지닌 부르주아로서 식민지 조선에 지대한 영향력을 가진 인사로 부상했다." "김성수는 친일적 문명개화론자, 애국계몽운동 세력, 대상인과 지주층, 그리고 일본유학 경험이 있는 청년 지식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다. 실로 다양한 세력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었으며, 그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갖고 자본주의 근대화를 추구하는 세력의 핵으로 부상했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현상은 부르주아 1세대에 속하는 시전상인 출신 장두현과 미곡상인 고윤묵이 김성수의 인적네트워크 안에 들어간 점이다." "이러한 인물들을 그의 주변에 모이게 한 것은 그가 부르주아 1세대까지 포함하는 자본가 사회의 지도적 위치로 부상했음을 보여주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323-5)


"(1923년에 일어났던 물산장려운동은 의욕이 넘치는 산업부르주아의 정치적 능력을 대중적으로 검증하는 시험무대였다.) 『동아일보』는 조선인들이 살기 위해 당면과제인 조선사람의 생산력 발달─민족경제의 실력 양성─을 위해서는, 민중은 민족적 대의로 개인의 경제적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조선인이 만든 상품을 사야한다는 점을 역설했다. 물산장려운동을 둘러싼 논쟁에서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에 대항했던 여러 논객들 역시 그러한 논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처럼 민중지향적 계몽운동가나 산업부르주아의 입장을 대변하는 『동아일보』 모두 '개인'보다는 전체-민족을 강조하는 점에서 일치했다. 그들 모두 조선인의 경제력이 향상되면 민중의 절박한 생활현실이 개선될 수 있다는 단계론적 진화론적 자본주의 근대화론으로 수렴되고 있었다. 또 비판적 견해들에 대해서는 계급분열을 조장하는 것으로만 치부했고, 비판세력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던 점에서도 비슷했다."(334)


"물산장려운동이 실패한 원인으로는 조선인들의 자본·기술·경제적 역량·자본주의적 단합력 부족·경제상 정치적 실권이 없는 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자는 이미 운동을 시작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던 문제들이고, 사회주의자들의 조직력이 일반 민중의 소비패턴까지 규제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많다. 그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조선산 상품의 가격 폭등과 같은 시장질서의 왜곡을 통제할 지도력을 결여한 운동주도세력에 있었다. 물산장려운동 주도세력은 민족적 명분만을 민중에게 강요하고, '우리 것을 사라'고 외쳐댈 뿐이었지 민중의 신뢰를 얻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인도의 스와데시 운동이 민중적 지지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국민회의와 간디라는 정치적·도덕적 구심점이 있었지만, 이에 비해 물산장려운동에서는 그러한 역할을 수행했던 개인 혹은 단체가 없었다."(336)


"일본과 조선은 같은 동족이라는 '일선동조론'을 매개로 한 '내선일체론'은 조선인 자본가가 '민족'을 대신하여 일본·황국(皇國)을 국가로 대체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였다. 그러나 그들은 '민족'이란 가치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내선일체론'은 차별 받고 있는 민족을 위한 실천 이념이었다. 자본가 계급의 이데올로기인 '문화적 민족주의'는 그러한 논리를 더욱 다듬었다." "1920년대 문화운동을 대표하는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의 표면에는 독립을 위해 우리 민족이 무엇을 고치고 준비할 것인가에 적극적인 주장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망국에 이르게 한 '조선적인 것'에 대한 허무주의적 인식이 흐르고 있었다." "그의 내부에는 계기만 주어진다면 '내선일체론'을 수용할 터가 마련되어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황국신민'관, 그리고 민족 차별을 벗어나기 위해 청년들에게 침략전쟁에 학병으로 참전할 것을 권유하는 행위는 아마도 그의 입장에서는 크게 모순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346-7)


"박흥식의 식민지 파시즘 수용은 개인에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었다. 현준호는 호남의 대지주였고, 경성방직과 『동아일보』에 이사 및 주주로 참여했으며, 또 박흥식이 운영하는 화신무역의 대주주였다. 박흥식은 경성방직의 이사 및 주주로 참여했으며, 김연수 및 경성방직은 화신무역의 대주주였다. 한말부터 친일적 금융자본가로 조선실업구락부 창립의 주역이었던 한상룡은 김연수가 설립한 남만주방적(주)의 발기인이었고 김연수는 조선생명보험회사의 주주였으며 조선실업구락부의 회원이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인 대자본가들은 서로 사업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산업부르주아가 주도하여 설립한 『동아일보』 창간사에 표방했던 자유주의·민주주의 이념이 동료 부르주아에 의해─그리고 스스로에 의해─철저하게 부정되고 있었다. 또 최초로 정치적 주체임을 자임했던 부르주아 세력은 '지배할 권리'와 '돈 벌 권리'를 맞바꾸었다."(350)


결론


"한국사에서 부르주아의 기원을 탐색할 때 피해갈 수 없는 문제는 근대로 이행할 수 있는 사회적 역동성이 과연 조선왕조 사회 내부에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에 근대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가능케 할 내적 가능성을 농업적 경로에 제한하지 않고 상업적 경로까지 확장시킨다면 한국의 근대이행에 대한 이해는 훨씬 풍부해질 수 있다. 상업적 경로를 고려한다는 것은 단지 관권의 비호를 받고 있는 독점적인 시전상인에 대항하는 자유상인을 연상시키는 경강상인 같은 사상(私商) 즉 상업부르주아의 성장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17세기 이후 상업변동에서 성장한 상인과 국가의 상호의존적 관계 그리고 그것의 사회적 대응을 시야에 넣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아래로부터 일어날 수 있는 조선왕조 사회의 내적 변화를 제한한 요인이었지만, 역설적으로 국가가 주도하는 위로부터의 근대화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이기도 했다."(354)


"상인들의 자본과 지식은 조세제도 개혁과 화폐금융정책에 반드시 필요한 근대 금융기관 설립의 씨앗이었고, 1903년 중앙은행 창설을 주도하는 수준까지 나아갔다." "대한천일은행에서 중앙은행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근대 금융기관 설립이 추진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조세·화폐제도 개혁을 위시하여 사회경제 분야의 개혁을 위해 금융근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 역대 어느 조선왕보다 강한 권력을 소유하게 된 고종이 의정부 내의 반대를 물리치면서 적극적으로 추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양반관료들의 정치 공세에도 불구하고 상민 이용익을 재상에 등용하여 광무정권의 근대화를 추진하게 한 것은 고종의 권력 기반이 안정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증거였다. 전제황권의 수립은 정치제도의 발달이란 측면에서 볼 때 반동적인 현상이겠지만, 그것 또한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의 개혁과정에서 나타나는 정부주도성에 해당되는 일이다."(3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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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어스 - 홀로코스트, 역사이자 경고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조행복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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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히틀러의 세계


"히틀러의 견해는 인간은 동물이며 윤리적 숙고 그 자체가 유대인의 타락을 보여주는 징후라는 것이었다. 보편적 이상을 세우려는 시도와 이를 향한 노력은 바로 증오해야 할 대상이었다." "히틀러는 비종족주의적 태도란 모두 유대적인 것이며, 보편 관념은 유대인의 지배 도구라고 생각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둘 다 유대인의 특성을 지녔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명백히 투쟁을 포용한 것은 유대인의 세계 지배 욕망을 감추는 엄폐물일 뿐이었다. 국가에 관한 추상적 관념도 전부 유대인이 만든 것이다. 히틀러는 이렇게 썼다. 〈그 자체가 목적인 국가 따위는 없다.〉 히틀러는 분명하게 밝혔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특정 국가나 정부의 보존이 아니라 인류의 보존〉이었다. 기존 국가들의 국경은 종족 투쟁의 과정에서 자연의 힘에 의해 없어질 것이다. 〈우리는 정치적 국경의 존재 때문에 영원한 진실의 경계에서 돌아서서는 안 된다.〉"(22-3)


1 생활공간


"히틀러는 『나의 투쟁』을 쓰면서 생활공간Lebensraum이라는 낱말을 배웠고 이를 자신의 의도에 맞게 사용했다. 그의 저술과 연설에서 생활공간은 물리적 생존을 위한 부단한 종족 투쟁에서부터 세계 최고의 생활 수준을 갖춘다는 주관적 의미를 위한 끝없는 전쟁에 이르기까지 그가 자연에 투쟁을 부여한 온갖 의미를 다 표현했다. 생활공간이라는 용어는 독일어에 프랑스어의 생활 환경biotope에 상당하는 낱말로 들어왔다. 생활공간은 생물학적 맥락보다는 사회적 맥락에서 다른 것을 뜻할 수 있다. 이를테면 가족의 안락함이나 〈거실〉과 비슷한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의미를 한 낱말에 담는 것은 히틀러의 순환적 사고를 촉진했다. 다시 말해 자연은 곧 사회이고, 사회는 곧 자연이었다. 따라서 물리적 생존을 위한 동물의 투쟁과 더 나은 삶을 원하는 가족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둘 다 생활공간을 위해 싸웠기 때문이다."(37)


"유대볼셰비즘 신화는 히틀러의 전체적인 구도에서 빠진 조각을 채워주는 것 같았다. 그것은 특정 지역을 지구 전체와, 슬라브족에 맞선 식민지 전쟁의 승리에 대한 기대를 유대인에 맞선 영광스러운 반식민지 투쟁과 결합했다. 소련이라는 하나의 국가를 한 차례 공격함으로써 독일인의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 있었다. 소련 유대인의 괴멸은 유대인 세력의 제거를 뜻했다. 그렇게 되면 동부 제국의 창설이 가능해질 것이고, 이는 동유럽에서 미국의 프런티어 역사를 되풀이한다는 뜻이었다. 독일 종족의 제국이 세계 질서를 교정할 것이며 유대인으로 오염된 지구에 자연을 되돌려줄 것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유대인은 편리한 대로 제거할 수 있었다. 열등한 슬라브인이 독일을 어느 정도 방해한다면, 유대인이 그 결과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종족 제국의 추구는 유대인 근절 정책을 가져올 것이었다."(54)


2 베를린, 바르샤바, 모스크바


"히틀러는 독일 국가를 통제할 필요가 있었지만, 그 팽창은 실제로 그의 목적이 아니었다. 히틀러는 독일 민족주의의 효용을 이해했지만 실제로 민족주의자가 아니었다. 히틀러에게 동포 독일인들의 민족 감정은 그들을 종족 투쟁으로 몰아갈 수 있는 이른바 〈공간 정복의 힘〉이었다. 독일인들은 종족 투쟁에서 자신들의 고귀한 운명을 보고 실현할 수 있을 것이었다. 독일인들을 나라 밖에 그들이 지배할 수 있는 외계 속으로 들여보내려면 조국애가 필요했다. 히틀러를 이해했던 어느 독일인 여성이 말했듯이, 〈좁은 공간을 좋아하는 성향은 끈적한 덩어리처럼 독일 국민에 들러붙어 있는데, 이를 극복해야 한다〉. 생활공간이라는 훨씬 더 큰 대망을 위해서 히틀러는 (군국주의적) 발칸 모델에 다음의 일곱 가지 혁신을 더했다. 일당 국가, 폭력 전문 집단, 무정부 상태의 수출, 제도들의 이종 교배, 국가 없는 상태의 창출, 독일 유대인의 세계화, 전쟁의 재정의."(68-9)


"1918년 독일의 재난은 폴란드의 기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에서 독일인들을 위협했던 것은 거의 전부 폴란드인들에게 유쾌한 것이었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에서는 부당함의 상징이었지만 독립국 폴란드가 존재할 수 있는 법적 질서의 기둥이었다. 독일군이 동유럽에서 철수했을 때, 새로운 폴란드 군대가 그 힘의 공백을 메울 수 있었다. 폴란드인들은 독일의 속국이었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소련군과 싸웠다. 폴란드는 폴란드-소련 전쟁에서 승리했고, 1921년 리가 조약으로 소련에 맞닿은 폴란드 동쪽 국경이 정해졌다." "유대인은 거의 국토 전역에 많은 숫자로 존재했고, 따라서 다른 폴란드 시민들에게 유대인과의 교류는 일상생활의 한 부분이었다." "독일만큼이나 폴란드에서도 많은 유대인이 동화되었다. 차이는 동화된 폴란드 유대인 중에 이디시어를 말하고 이러저러한 형태로 종교적 전통을 엄수하는 자가 열 배 더 많았다는 것이다."(77-8)


# 폴란드의 현상유지 정책

1. 소련과 불가침 조약 체결(1932.7)

2. 독일과 불가침 조약 체결(1934.1)


3 팔레스타인의 약속


"히틀러는 오스만 제국에서 발칸 반도의 국민국가들이 탄생한 것을 군국주의의 긍정적인 사례로 보는 경향이 있었지만, 폴란드인들은 같은 역사를 민족 해방으로 보았고 이것이 유럽에서 아시아로 확산되리라고 이해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제국들에서 떨어져 나온 유럽의 속령들이 대체로 국민국가가 되었던 반면, 아시아의 속령들은 국제 연맹의 〈위임 통치령〉 형태로 프랑스 제국이나 영국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이 지역들은 독립국을 세울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따라서 강대국에 맡겨져 정치적 훈련을 받아야 했다. 사멸한 오스만 제국의 남부 시리아에서 떨어진 팔레스타인은 그러한 위임 통치령의 하나였다. 1920년 영국이 점령했을 때 팔레스타인에 살던 유대인은 매우 적었지만, 영국의 정책은 팔레스타인을 미래의 유대 민족의 고향으로 제시했다. 이는 시오니스트들의 바람과 일치했다. 그들은 언젠가 완전한 국가의 지위를 얻기 위한 협상이 타결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100)


"독일의 유대인 정책과 폴란드의 유대인 정책이 처음으로 크게 충돌한 곳은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였다. 나치의 탄압으로 독일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는데, 이 때문에 아랍인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이에 우파 시오니즘은 더욱 과격해졌으며 이르군(Irgun, 폴란드군사기구를 본따 만들어진 유대인 민족군사기구)을 지원한다는 폴란드 외교 정책이 실현될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 "1935년 이후 외교 정책을 수립한 폴란드인의 작은 집단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의 프로메테이즘에서 다른 형태의 프로메테이즘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피우수트스키가 추진한 원래의 프로메테이즘은 폴란드가 동쪽의 이웃 민족들, 특히 우크라이나인들이 소련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도록 도을 수 있다고 가정했다. 새로이 등장하던 프로메테이즘에서는 영국의 팔레스타인 지배에 반대하는 유대 민족을 지지하는 것이 필요했다. 폴란드 당국은 반反소련 노선을 포기하면서 친親시오니즘 음모로 노선을 바꾸었다."(109)


# 프로메테이즘Prometeizm : 제국에 반대하고 핍박받는 민족들의 대의를 지지하는 사업


4 국가 파괴자들


"1935년 독일 유대인은 2등 시민으로 영락했다. 1938년 일부 나치는 유대인에게서 국가의 보호를 박탈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국가를 파괴하는 것임을 알았다. 법적 차별은 어느 것이든 법률과 관료적 업무의 다른 측면에 미치는 예기치 않은 영향 때문에 복잡해지곤 했다. 몰수와 이주 같이 간단해 보이는 문제들도 나치 독일에서는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다. 반면 오스트리아가 파괴됐을 때, 오스트리아 유대인은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했고 과거에서 벗어나 미래를 내다보고자 했던 대다수의 손에 고통을 당했다. 국가 없는 상태는 폭력과 절도를 수행할 준비가 된 자들에게 기회의 창을 열어 주었다. 나치 국가는 병합의 논리에 따라 그 창문을 닫아야 했다.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일부가 되어야 했고 돌격대가 조장한 무정부 상태는 나치 국가의 통치 능력을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시적인 국가 없는 상태의 순간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132-3)


"(1938년 11월 9일 자행된) 수정의 밤Kristallnacht으로 괴벨스는 오스트리아 모델에서 나타났던 몰수와 추방이 독일에서도 작동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독일 유대인이 대규모로 고국을 떠나기 시작한 것은 전국적인 차원에서 폭력이 자행된 이후였다. 그렇지만 제국 내부에서 벌어진 무질서한 폭력은 막다른 길이었음이 드러났다. 독일 여론은 대체로 그 대혼란에 반대했다. 사람들은 절망을 목격하자 나치가 기대했던 것처럼 정신적으로 거리를 두는 대신 유대인을 동정했다. 물론 독일인들은 유대인이 폭력을 당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으면서도 동시에 유대인을 전혀 보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괴링과 힘러, 하이드리히는 즉각 독일 내부에서 포그롬을 조장한 것은 실수였다고 결론을 내렸다. 머지않아 이들은 괴벨스가 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그렇지만 독일 국경 너머에서, 전쟁 중에, 독일군이 국가를 파괴한 곳에서 포그롬을 실행한다."(136-7)


"폴란드의 관점에서 보면 독일은 유대인 문제에서 혼란을 초래하는 무익한 상대자였다. 독일의 유대인 정책은 팔레스타인의 문을 닫았고 수만 명의 유대인을 폴란드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영국 총리 체임벌린은 만일 팔레스타인에서 어느 한편에 화를 내야 한다면 그것은 아랍인이 아니라 유대인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랍인과 무슬림의 충성은 영국 제국 전체에 매우 중요했기에 감히 건드릴 수 없었다. 충돌이 다가오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럴 수 없었다. 1939년 5월의 어느 영국 백서White paper는 훗날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려면 아랍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권고했다. 영국은 독일의 위협으로부터 폴란드를, 이 점에서 간접적으로는 폴란드의 유대인을 보호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즉각 유대인의 대량 정착을 위해 열어 놓아야 한다는 폴란드의 의견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151-2)


"스탈린은 히틀러와 유럽의 동부를 나눠 갖기로 하면서 무력 충돌을 유럽의 서부로 돌리기를 바랐다. 그곳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을 상대해야 할 것이었다. 이는 소련의 이데올로기적 시각에서 보면 소련 외교의 작은 역할로써 자본주의의 모순이 전장에서 발현됨을 의미했다. 스탈린의 전술적 관점에서 보면, 가장 훌륭한 전쟁 수행 방법은 다른 이들이 서로 싸워 있는 대로 피를 흘리게 한 뒤 전리품을 취하는 것이다." "폴란드는 유럽의 전쟁에서 더는 동맹국으로 생각할 수 없었으므로 존재할 이유가 없었다. 몰로토프는 폴란드를 〈꼴보기 싫은 자식〉이라고 말했고, 히틀러는 폴란드를 베르사유 조약의 〈비현실적 피조물〉이라고 말했다. 스탈린은 〈옛 균형을 제거할 공동의 소망〉을 선언했다. 스탈린은 옛 균형의 파괴가 무정부 상태와 유대인의 고통을 뜻함을 알았다. 스탈린은 폴란드를 반으로 나누는 것이 200만 명의 유대인을 히틀러에게 넘겨준다는 의미임을 이해했다."(156)


5 이중 점령


"히틀러는 스탈린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대리인의 손을 빌려 국가를 파괴했다." "히틀러는 소련과 동맹을 맺으면서도 늘 동맹국에 넘겨준 땅을 침공할 궁리를 하고 있었다. 1939년 히틀러는 스탈린에 국가를 파괴하라고 권유했지만 뒤이어 1941년에 같은 땅으로 직접 출정한다. 그러므로 독일의 퓌러는 국가의 이중 파괴를 염두에 두었다." "독일인들은 1941년에 소련을 침공할 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을, 즉 처음으로 유대인을 대규모로 살해할 수 있는 상황을 찾아냈다. 최종해결이 실현된 곳은 독일에 앞서 소련이 지배했던 곳, 소련이 두 대전 사이의 국가들을 파괴한 후 독일이 소련 제도를 폐지한 곳, 즉 이중 점령 지대였다. 1939년에 독일 지배하의 약 200만 명의 유대인이 거의 전부 죽게 된다. 1939년과 1940년에 소련의 지배를 받게 된 200만 명의 유대인도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애초에 소련의 지배를 받은 유대인들이 제일 먼저 독일의 대량 학살에 희생된다."(176)


"(폴란드 시민들, 특히 장교단처럼 교육 받은 엘리트들을 대량 학살한) 볼셰비키는, 적어도 그들 중 일부는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어쨌거나 그들은 직접 그 일을 했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의미가 명확한 공식 문서로 남겨 기록 보관소에 잘 정리해 놓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찬동할 수 있었다. 진정한 책임은 공산당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치는 종족의 우월성이라는 화려한 문구를 썼고, 힘러는 독일 종족을 위해 다른 이들을 죽이는 행위에 도덕적 숭고함이 깃들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때가 오자, 독일인들은 계획 없이 마구잡이로 책임감도 없이 행동했다. 나치의 세계관에서, 일어난 일은 그저 일어났을 뿐이며 강자가 승리해야 하지만, 무엇도 확실하지 않았다. 과거와 현재, 미래 사이의 관계도 전혀 분명하지 않았다. 볼셰비키는 역사History가 자신들 편이라고 믿었고 그에 따라 행동했다. 나치는 자신들이 만들어 낸 무질서만 빼고 모든 것을 두려워했다."(183-4)


6 더 큰 악


"독일이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파멸했을 때, 소련이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 에스토니아를 점령하고 병합했을 때, 두 나라가 공동으로 폴란드를 파괴했을 때, 슈미트는 국가 없는 상태의 법률 이론을 준비했다. 이는 국제법은 규범이 아니라 힘에서 나온다는 원리에서 시작했다. 규칙은 누가 예외적인 상황을 만들 수 있는가를 드러낼 때에만 흥미롭다. 슈미트에게 〈구식의 국가 간 국제법〉은 구실에 불과했다. 누가 국가를 파괴할 수 있는가, 이것만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독일이 퓌러를 따라 〈국가의 영토라는 공허한 개념〉을 무시한다면, 독일의 힘은 그 자연 국경으로 흘러넘칠 것이다. 그 결과는 정치적 행동과 군사적 행동에 대한 규범적 제약(바로 유대인의 것인)으로 교란되지 않는 〈이치에 맞게 분할된 지구〉였다." "힘이 정의였다. 실제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원리의 문제이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이 결론은 원리라는 개념 자체를 폐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211-2)


"특수임무단은 유대인 이외의 다른 사람도 사살했으며, 특수임무단이 아닌 다른 이들도 유대인을 사살했다. 특수임무단이 제일 먼저 유대인을 대규모로 사살했지만, 이들은 독일인 가해자의 작은 부분을 차지한 소수집단이었다. 이들이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신화는 전후 독일 연방공화국의 재판 중에 대다수 독일인 살인자들을 보호하고 학살을 독일 사회에서 떼어 내려는 의도에서 등장했다." "1941년의 학살에 현지인들이 연루되었다면, 그것은 독일의 정책이 아니라 현지 반유대주의가 초래한 결과일 수도 있지 않은가? 이는 홀로코스트를 정치 없이 설명하는 일반적인 방법이다. 동유럽인들의 야만성이 분출한 것으로 역사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설명은 위안이 된다. 오로지 지나친 반유대주의와 관련된 자들만이 재앙 같은 폭력에 탐닉했으리라는 생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위안을 줄지언정 틀린 이 생각은 나치의 인종주의와 식민주의의 유산이다."(216-7)


"동유럽 현지에 반유대주의가 넘쳤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유구한 반유대주의는 왜 포그롬이 정확히 1941년 여름에 시작되었는지 설명할 수 없다. 그러한 설명은 포그롬이 독일이 소련을 몰아낸 곳에서 가장 많았다는 암시 가득한 사실과 그러한 곳에서 포그롬을 부추기는 것이 독일의 노골적인 정책이었다는 명백한 객관적 사실을 무시한다." "1941년 후반에 일어난 일은 학살 속도전이었다. 그로써 100만 명의 유대인이 목숨을 잃었고 독일 지도부는 자신들이 지배한 유대인을 전부 제거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 참화는 수동적인 유대인이나 공산주의자 유대인, 명령 수행자 독일인이나 계획 실행자 독일인, 잔혹한 반유대주의자 현지인 같은 고정 관념으로, 그밖에 다른 어떤 진부한 문구로도, 그것들이 당시에 아무리 강력한 힘을 지녔어도, 오늘날 아무리 편리하다고 해도, 설명할 수 없다. 이 미증유의 대량 학살은 특별한 성격의 정치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218-9)


"A 특수임무단 지휘관 슈탈레커는 이제 공식을 발견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의 말을 옮기자면, 유대인을 공격하는 데 〈토착 주민이 자연스럽게 반응하고 자진하여 이 조치들을 수행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었다. 슈탈레커는 소련 점령기의 경험을 친독일 행위로 〈유도할〉 필요가 있음을 얘기했다. 리투아니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입을 통해서나 매체를 통해서 현지 언어로 전달된 선전의 목적은 그렇게 유도할 도랑을 파는 것이었다. 슈탈레커는 독일이 유도한 포그롬을 일종의 인력 충원 연습으로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이중으로 점령된 라트비아에서 새로운 모델이 등장했다. 독일의 명령에 따라 대부분의 살인을 수행한 현지인들의 학살파견대가 등장한 것이다. 그 지도자였던 빅토르스 베른하르드 아라이스는 유럽 역사상 가장 능숙한 대량 학살자의 한 사람이 된다."(242)


7 독일인, 폴란드인, 소련인, 유대인


"1941년 말 독일은 소련 시민들의 협조를 받아 점령지 소련에서 약 100만 명의 유대인을 살해했다. 특수임무단은 살인 기술을 개선했으며 현지 주민에 정치적으로 접근하는 법을 완성했다. 특수임무단은 치안경찰과 국방군과 나란히 유대볼셰비즘 논리의 완전한 이행을 향해 조용히 전진했다. 그리고 유대볼셰비즘 논리는 서서히 승리를 가져오는 방법이 아니라 패배를 덮어 가리는 방법이 되었다. 특수임무단은 소련 국가를 무너뜨릴 수 없었지만, 소련 기관들을 파괴한 곳에서는 유대인을 죽일 수 있었다. C 특수임무단 지휘관 오토 라슈는 1941년 9월 〈유대인의 제거〉는 그 전쟁의 원래 목적이었던 전체적인 식민지 개척 작전보다 〈실제로 더 쉬웠다〉고 썼다." "경찰이 원래 할당받은 임무는 1941년 말까지 점령하기로 되어 있었던 훨씬 더 큰 영역을 통제하는 것이었는데, 바로 그 임무를 완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유대인을 죽이는 데 대규모로 투입될 수 있었다."(272)


"독일인에 의해서든 소련에 의해서든, 둘 다에 해당되는 경우든, 국가가 파괴된 곳이라면 어디서나 거의 모든 유대인이 학살되었다. 홀로코스트는 국가가 빠르게 연이어 두 번 파괴된 곳에서, 처음에는 소련이 전쟁 이전의 국민국가를 파괴하고 그다음에는 독일이 소련의 정부 기관을 파괴한 곳에서 집단 사살 작전으로 시작되었다. 이중의 〈국가 없는〉 지대에서 발전한 기술, 즉 현지인의 충원, 여러 독일 기관의 이용, 노출된 곳에서의 사살도 동쪽으로 더 나아간 곳, 다시 말해 독일 세력이 확장된 소련 지역 도처에서 적용되었다. 독일인들이 1939년 9월부터 들어와 있었으나 유대인의 대량 학살은 2년이 더 지난 후 시작된 서부 폴란드와 중부 폴란드에는 비밀 가스 시설, 게토에서 추방하기, 유대인 사냥이라는 다른 기술들이 적용되었다. 발트 국가들과 동부 폴란드, 소련의 유대인들에게는 총탄과 구덩이가 준비되었다. 유럽의 남은 유대인은 대부분 아우슈비츠라고 불린 곳을 향하게 된다."(290)


8 아우슈비츠 역설


"아우슈비츠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로서는 비교적 다루기 쉬운 상징이었다. 자신들이 저지른 악행의 실제 규모를 크게 축소했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와 홀로코스트의 융합은 독일인들이 유럽 유대인의 대량 학살이 발생하고 있을 때 그 사실을 몰랐다는 기괴한 주장을 가능하게 했다. 일부 독일인이 아우슈비츠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많은 독일인이 유대인의 대량 학살에 관해 몰랐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대인의 대량 학살은 독일에서, 적어도 가족들과 친구들 사이에서는, 아우슈비츠가 학살 시설이 되기 훨씬 전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었고 토론의 대상이었다. 3년에 걸쳐 수만 명의 독일인이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수백 개의 죽음의 구덩이 위에서 사살했던 동유럽에서, 대다수 주민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았다. 수십만 명의 독일이 학살을 목격했으며, 동부 전선의 수백만 명에 달하는 독일인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293-4)


"비슷한 이유에서, 아우슈비츠는 전후 소련과 오늘날의 탈공산주의 러시아에서 편리한 상징이 되었다. 홀로코스트를 아우슈비츠로 환원할 수 있다면, 독일의 유대인 대량 학살이 소련이 막 점령한 곳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쉽게 잊을 수 있다. 서부 소련에서는 누구나 독일인과 똑같은 이유에서 유대인의 대량 학살에 관해 알았다. 동유럽에서는 대량 학살 방법이 수많은 참여자를 요구했고 많은 사람이 그것을 목격했다. 홀로코스트를 오직 아우슈비츠와만 동일시한다면, 이러한 경험도 역사와 추모에서 배제될 수 있다. ... 물론 이 모든 일은 독일이 소련 국가의 파괴를 꾀했기 때문에, 문제의 소련 시민들이 전쟁 이전의 현실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몇몇 경우에는 자신들의 목숨을 부지하려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전쟁 이후 소련의 선전은 소련 체제에 의해 만들어진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이 대량 학살에 유용한 협력자가 되었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294-5)


"아우슈비츠는 또한 홀로코스트를 간단히 표현하는 기준이 되었다. 신비적이고 환원적인 방식으로 다루면 유대인의 대량 학살을 인간의 선택과 행위로부터 떼어 놓는 것 같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가 아우슈비츠로만 국한되는 한, 아우슈비츠는 그 영향을 받은 대다수 국가들과 그것으로 바뀐 풍경과 절연될 수 있다. 아우슈비츠의 문과 벽은 실제로 파리에서 스몰렌스크까지 세력을 뻗친 악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전쟁 전후로 폴란드에 있었던 작은 땅을 지칭하는 독일어 낱말인 아우슈비츠는 현실의 장소 같지 않다. 아우슈비츠 둘레에는 물리적인 가시철망은 물론 정신의 가시철망도 쳐져 있었다. 아우슈비츠는 기계화한 학살이나 냉혹한 관료주의, 근대성의 행진, 심지어 계몽의 종착점까지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아이들과 여자들, 남자들의 살해를 인간보다 더 큰 힘들이 완전한 책임을 져야 하는 비인간적 과정으로 보이게 한다."(295)


"독일은 소련이 점령하지 않은 곳에서는 소련의 점령으로 생겨난 심리적, 물질적, 정치적 자원을 이용할 수 없었다. 독일은 자신들이나 소련이 국가를 파괴하지 않은 곳에서는 파괴된 국가의 파편들을 다시 모을 수 없었다. 독일은 전쟁이 종족 지배 전쟁이 아닌 곳에서는 상대적 박탈의 정치를 적용할 수 없었다." "아우슈비츠에서 죽을 운명이었던 수백만 명의 유럽 유대인은 열차에 올라타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독일의 지배에 들어간 유대인 중에서 아우슈비츠로 가기로 되어 있었던 자들이 그곳으로 갈 예정이 없었던 자들보다 생존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이것이 아우슈비츠의 역설이며, 이는 국가들이 어떻게 파괴되고 어떻게 파괴되지 않았는지 고찰해야만 해소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이 일반적인 계획 속의 상이한 결과들을 설명하는 정치적 특수성이다. 아우슈비츠는 유대인 학살이라는 일반적인 계획을 증명한다. 또한 유대인을 보호하는 데 국가의 지위가 갖는 보편적인 의미도 증명한다."(298-9)


# 에스토니아와 덴마크의 사례 비교

1. 에스토니아 : 소련과 독일의 이중점령 경험, 국가 조직 파괴, 내부인들이 적극적으로 학살에 가담(그럼으로써, 소련에 복무한 혐의 제거), 그 결과 99퍼센트의 유대인 말살

2. 덴마크 : 이중점령 X, 독일 침공 후에도 국가 주권 유지, 독일의 식량 공급 기지 역할, 주권 보호 차원에서 유대인 시민들의 안전 보장, 그 결과 99퍼센트의 유대인 생존


9 주권과 생존


"독일의 동맹국들 중에서는 다른 국가의 잔해로부터 탄생한 꼭두각시 국가들이 홀로코스트가 발생한 무법 지대와 가장 많이 닮았다. 그러한 국가들이 탄생하려면 하나의 국가를 제거해야 했고, 옛 국가의 종말과 새 국가의 창조는 둘 다 독일의 명령으로 이루어졌다. 그 앞선 국가의 시민은 전부 그 이행기 동안 이전 정권의 보호를 빼앗겼다. 독일의 감독을 받아 헌법이 제정되었을 때, 유대인이 그 국가에서 완전한 시민권을 얻기는 불가능했다. 독일은 이 새로운 국가들의 유대인 주민을 먼저 노동 수용소로, 그다음 학살 시설로 수용하기를 간절히 원했고, 이는 현지의 민족정화론자들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독일이 만들어 낸 꼭두각시 국가, 즉 유고슬라비아에서 탄생한 크로아티아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탄생한 슬로바키아는 둘 다 다민족 국가가 파괴되지 않고는 권력을 장악할 수 없었던 민족주의자들이 통치했다."(319)


#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셰와 슬로바키아의 요제프 티소 정권, 그리고 자발적으로 유대인 학살에 나선 루마니아의 안토네스쿠 정권


# 네덜란드와 그리스, 그리고 프랑스의 사례

1. 네덜란드 : 미미한 반유대주의 정서에도 불구하고 1940년 여왕 빌헬미나와 정부의 망명으로 관료 기구 붕괴 → 4분의 3 가량의 유대인 말살

2. 그리스 : 미미한 반유대주의 정서에도 불구하고 1941년 독일에 맞서던 국왕과 정부 붕괴 → 4분의 3 가량의 유대인 말살

3. 프랑스 : 독일과 정책 협력을 맺은 비시 정부가 반유대인 법 주도, 그러나 프랑스가 시민권을 박탈한 유대인들에 한정해서 학살 실행 → 4분의 3 가량의 유대인 생존


10 잿빛 구조자들


"1941년 나치 독일이 소련을 공격했을 때, 스탈린은 억류하고 있던 폴란드 남성 시민을 이전과 다른 식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굴라크를 떠나 폴란드인 군대로 편성되어 독일에 맞서 싸울 수 있었다. 스탈린은 폴란드 시민들을 동부 전선에서 싸우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들이 그곳에서 싸운다면 나중에 소련에 문제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소련군은 어쨌거나 그 전쟁 중에 이미 한 차례 폴란드를 침공했으며, 이들이 바로 내무인민위원부로부터 탄압받은 경험이 있는 자들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을 소련과 폴란드에서 멀리 떨어진 서부 전선에서 싸우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곳에서 이들이 독일인을 죽이고 자신들도 죽는다면 더할 나위가 없었다. 폴란드 시민들이 굴라크에서 나와 서부 전선으로 이동하려면 유라시아 대륙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소련의 북부나 극동, 카자흐스탄에서 인도와 이란, 팔레스타인을 거쳐 서유럽으로 가야 했다."(364-5)


"어떤 이유에서든, 스탈린의 표적이 되기 쉬웠기 때문이든, 싸우고 싶은 열의가 더 강했기 때문이든, 아니면 폴란드 장교들과 더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든, 베타르 구성원들과 수정주의 시오니스트들은 폴란드 군대에 상당히 많았다. 이런 식으로 많은 우파 시오니스트가 길고 둘러가는 길이었을지언정 폴란드에서 팔레스타인으로 향했다. 영국은 그 전쟁 중에 바다를 통해서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오려 했던 유대인들을 막았지만 연합군 군복을 입고 육지로 들어오는 유대인은 거의 막을 수 없었다." "1943년 말 이후 전황이 나치 독일에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바뀌었으므로, 베긴의 이르군은 샤미르의 레히에 합류하여 반反영국 테러 활동을 수행했다. 이는 폴란드 유대인 두 사람이 폴란드의 동맹국에 맞서 식민지 해방 투쟁을 이끌고 있음을 뜻했다. 1944년 2월 베긴은 이르군이 영국 위임 통치령 정부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다고 선포했다."(366)


# 1949년 이스라엘 건설


11 신과 인간의 투사들


"소련은 전쟁으로 폐허에 된 나라로 들어갔고 전체적으로 적대적인 주민과 대면했다. 소련 세력은 나치가 폴란드에서 수행한 사회 혁명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승인했다. 결과적으로, 의도적이지는 않았을지언정, 독일은 소련의 표준적인 두 단계 혁명의 첫 번째 단계를 수행했다. 미래가 없어 보였던 집단의 재산을 권력의 은혜를 입게 된 다른 집단에 넘겼던 것이다. 이는 집단화를 통한 혁명의 완수를 준비했다. 소련 공산당의 선전은, 따라서 폴란드 공산당의 선전도 유대인의 특별한 고통을 부정했으며 유대인 학살을 평화를 사랑하는 소련 시민이나 폴란드 시민의 전체적인 수난의 일부로 묘사했다." "유대인을 구한 폴란드인들은 새로운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때로 성가신 존재였다. 전쟁에 관한 소련의 설명이 공허하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소련 지배의 사회적 기반에도(유대인의 재산을 훔친 폴란드인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 세간의 이목을 끌었기 때문이다."(397-8)


"자원하여 아우슈비츠로 들어갔다가 바르샤바 봉기에서 싸웠던 비톨트 필레츠키는 폴란드 공산당 정권에 의해 간첩으로 몰려 총살당했다. 독일인들에 의해 아우슈비츠 행을 선고받고 제고타에서 유대인을 능숙하게 구했던 브와디스와프 바르토셰프스키는 국내군에 복무했다는 사실 때문에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자발적으로 바르샤바 게토에 들어가 서방 지도자들에게 최종해결의 성격을 설명하려 했던 얀 카르스키는 종전 후 이민을 떠났으며 그래서 폴란드 공산다 당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유대인 혁명가들을 지원했던 폴란드 외교관 비톨트 훌라니츠키는 팔레스타인에서 피살되었다. 동유럽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유대인을 구조한 사람인 아마추어 외교관 라울 발렌베리는 소련 방첩부에 체포되어 악명 높은 루뱐카 감옥과 레포르토보 감옥에 억류되었다. 비록 지금까지도 상세한 내막은 아무도 모르지만 발렌베리는 소련에 구금된 상태에서 사망했다."(398-9)


결론 우리의 세계


"히틀러를 반유대주의적 인종주의자나 반슬라브주의적 인종주의자로 본다면 나치 사상의 잠재력을 너무 작게 평가하는 것이다. 유대인과 슬라브인에 대한 히틀러의 사고는 어쩌다가 극단으로 흐른 편견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바꿀 잠재력을 지닌 통일적 세계관의 발산이었다. 히틀러는 정치와 과학을 융합하여 정치적 문제를 과학적 문제로, 과학적 문제를 정치적 문제로 제시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히틀러는 자신을 원의 중심에 두고 모든 자료를 종족 학살이라는 완벽한 세계의 구도에 따라 해석했다. 그 세계는 오로지 유대인의 인간화하는 영향력으로만 더럽혀졌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지구의 부조화에 책임이 있는 생태학적 결함으로 제시함으로써 세계화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긴장을 인격화했다. 유일하게 건전한 생태학은 정치적 적을 제거하는 것이었고, 유일하게 건전한 정치는 지구를 정화하는 것이었다."(447-8)


"우리에게 구조라는 관념은 가깝고 살인의 이데올로기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다. 생태학적 공황, 국가 파괴, 식민지적 인종주의, 세계적 반유대주의는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다. 유럽과 북아메리카 사람들은 대부분 잘 작동하는 국가에서 살기에 그 전쟁 중에 유대인과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보전한 주권의 기본적인 요소들을, 즉 외교 정책과 시민권, 관료 기구를 당연하게 생각한다. 두 세대 후, 녹색 혁명은 유권자의 정서와 정치인의 언어에서 굶주림의 공포를 제거했다. 반유대주의 사상의 공개적인 표명은 서구 대부분의 지역에서 비록 그 힘이 약해지고는 있어도 여전히 금기이다. 우리는 다행스럽게 시간적으로 나치즘과 멀리 떨어져 있기에 나치 사상을 그 작동 방식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도 쉽게 내버릴 수 있다. 망각은 우리도 똑같을 수 있음을 덮어 가린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나치와 다르다고 확신한다."(450-1)


"미국인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국가 권력의 부재가 자유라고 믿는 것이다." "정치적 우파는 국제적 자본주의에 의한 국가 권력의 침식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본다. 정치적 좌파는 방향타 없는 혁명들을 미덕으로 묘사한다. 21세기에는 무정부주의적 저항 운동들이 전 세계적인 과두주의자들과 우호적으로 드잡이를 쳤다. 양쪽 다 국가를 진정한 적으로 보기 때문에 이 싸움에서 어느 편도 다치지 않는다. 좌파나 우파 모두 질서의 파괴나 부재보다 질서를 더 두려워하는 경향을 보인다. 공동의 이데올로기적 습성은 탈근대성, 즉 큰 것보다 작은 것을, 구조보다 파편을, 넓은 전망보다 힐끗 보기를, 사실보다 느낌을 더 좋아하는 것이었다. 좌파와 우파에서 똑같이 홀로코스트의 탈근대적 설명은 1930년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전통을 따라가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로 이들은 장래의 범죄 가능성을 낮추기보다는 높이기 쉬운 더 큰 잘못을 저지른다."(4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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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 왜곡된 현대사의 서막
박태균.정창현 지음 / 역사인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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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준혁 - 해방 후 첫 정치 암살의 희생자가 되다


"해방 후 테러의 첫 희생자가 된 현준혁은 1906년 평안남도 개천군의 빈농 가정에서 출생했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평안남도 개천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상경해 중동학교를 거쳐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수학하다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해 1929년 3월에 졸업했다. 이정도 되면 개천에서 용 났다고 할 수 있다. 경성제대는 조선으로 이주한 일본인을 위해 만든 대학이기 때문에 조선인들이 들어가기가 아주 힘들었다. 게다가 빈농 가정 출신으로 입학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부터 사회주의에 심취한 그는 1929년 5월 대구사범학교 교사가 되어 심리학, 영어, 한문, 교육사를 가르치다 1930년 가을부터 교내 비밀결사인 사회과학연구그룹을 지도했다." "구미 보통학교를 졸업한 박정희는 1932년 4월 1일 제4기생으로 대구사범에 입학했다. 바로 그해 4월 교사 현준혁은 학생들과 함께 항일 동맹휴교를 주도했다."(32-3)


"현준혁 암살의 순간을 보면 매우 조직적으로 치밀하게 준비됐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현준혁이 타고 다니는 차, 그의 일정, 그리고 그의 동선까지 파악해놓은 것을 보면, 이것은 하루 이틀 사이에 가능한 일이 아니다. 최소한 일주일 이상은 계획을 세워야 했고, 암살을 실행하는 1선과 2선의 행동대원들은 그의 얼굴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사진 자체가 귀하던 시절이었고 선명하게 인화하기도 어려운 당시 상황에서 누가 현준혁인가를 인식하고 가려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련군의 만행을 방조했기 때문에 암살했다고 주장한 백근옥의 증언보다는) 오히려 러시아 문서가 기록하고 있듯이 "현준혁이 도경무사령부를 도와 민족주의자들의 치안대를 해산시키려고 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 점에서 일제 말 염응택이 결성한 대동단이 해방되면서 "제2독립운동으로 반공산주의운동을 할 것을 결정"하고 현준혁을 암살했다는 분석은 설득력이 있다."(38)


"염응택은 백의사를 정식으로 출범시킨 뒤 일제 때부터 도움을 받은 신익회의 측근 조중서 등을 만나 백의사의 근간(根幹)과 활동 방향을 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먼저 이북에서 북조선공산당의 책임자로 떠오른 김일성과 그의 측근들을 암살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거사에 실패한 이들은 다시 1946년 3월 13일 자정 무렵 강양욱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서기장의 집을 습격했다." "암살대원 가운데 최기성은 보안대원들과 교전 중 사망했고 이희두, 김제철 등은 체포됐다. 이성렬은 간신히 체포를 면해 3월 말 서울로 돌아왔다. 체포된 대원들 속에서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의 직인이 찍힌 신분증과 임시정부 내무부장 명의로 발행된 '국자(國字) 포고'(임시정부의 미군정 접수포고문)가 나왔다. 암살 시도에 김구 주석이 개입했는지의 여부는 불투명하지만 이후 남북연석회 때까지 북측이 김구를 '살인·테러·방화의 괴수'로 지칭하며 비난한 이유를 엿볼 수 있다."(45-6)


"이영신의 추적에 따르면, 염응택은 신익희로부터 미군 정보국에 몸담고 있는 이순용을 소개받으면서 미군 정보기관과 연결됐다. 이순용은 재미교포로 미군에 입대해 2차 세계대전에 참여했던 CIC 소속 중사였고, 정부 수립 후 한국 정계에 들어와 이승만 정권 아래서 내무부 장관에 기용되기도 했다." "백의사의 활동은 대북 정보 공작뿐만이 아니라 국내 정치에도 깊이 개입했다. 실리 소령이 기록한 것처럼 백의사의 "주요 목적은 모든 '공산주의자들'과 '반정부' 정치인들을 암살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반정부' 정치인은 김구와 이승만의 노선에 반대하거나 따르지 않는 정치인을 의미했다."(48-9) "(현준혁 암살사건이) 해방 초기 정국에 미친 영향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해방된 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발생한 현준혁 암살사건은 그 후 38선 이남에서 주요 정치인들에게 닥칠 연속적인 비극을 알리는 첫 총성이자 친일파들에 의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왜곡된 현대정치사의 서막이었다."(51)


2 송진우 -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안 발표와 함께 쓰러지다


"1945년 12월 30일 새벽 6시 15분, 종로구 원서동 고하의 집에서 열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그 중 여섯 발이 송진우의 안면과 심장, 복부를 관통했다. 1945년의 말미를 장식하면서 1946년 이후 민족 분열의 가장 커다란 원인이 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안이 발표된 지 3일 만의 일이다."(56) "재판은 끝내 암살의 배후를 밝혀내지 못했다. 단지 암살자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는 점을 확인해줄 뿐이었다." "송진우가 미군정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고 당시 미군정의 여당이라고 불리던 한국민주당의 수석총무였기 때문에, 그의 암살범들이 극형에 처해지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었다. 한국에서 보수우익 세력들을 지원하고자 했던 미군정으로서는 보수적이면서도 합리적인 송진우의 목소리와 그의 존재가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초기 미군정의 운영에 치명적 손상을 주었다."(60-1)


# 송진우 암살사건의 의문점

1. 장덕수·여운형 암살사건 때와 달리 침묵으로 일관한 미군정

2. 경찰의 이상한 수사방식 :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의 직감으로 암살범들을 체포했다고 주장

3. 재판부가 가벼운 형량 선고 : 주범 한현우는 사형에서 징역 14년으로 감형


"미군정은 당시 한반도에서 좌파 세력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한국민주당을 파트너로 선택했지만, 한국민주당이 친일파·지주의 정당으로 비난받으면서 대중적 지지를 획득하지 못하자 더 대중적이고 반공적인 파트너를 찾게 되었다." "여기서 선택하게 된 것이 바로 이승만과 중국 중경에 있던 임시정부 세력이었다. 이들은 대중으로부터 명망을 얻고 있었고, 강력한 '반공주의자'였다. 따라서 이들이 국내에 들어와 한국민주당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적인 인사와 손을 잡을 경우 조선공산당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파트너를 만들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미군정 측은 임시정부가 국내에 들어오면서 이들에 대해 실망하기 시작했다. 미군정의 입장에서 볼 때 임시정부에 참여한 인사는 너무 민족주의적이고, 너무 고집쟁이였다."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던) 한국민주당 인사들의 마음은 이미 미군정의 지지를 받던 이승만 쪽으로 기울었고, 더 크게는 미군정에 기대고 있었다."(73-5)


"1946년 1월 초 주요 정치 세력들이 모여 정치 행동의 통일을 모색해보려는 노력이 있었다. 역사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이 회합은 모스크바 3상협정에 대해 우리 민족이 통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모임이었다." "이 회합에서 "모스크바 3상회의의, 조선의 자주독립을 보장하는 민주주의적 발전을 원조한다는 정신과 의도를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공동성명을 채택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4당 코뮈니케'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임시정부 측의 강력한 반탁 입장과 좌익 세력 일부에 의한 4당, 5당 회합에 대한 반대 등으로 실패하였고, 임시정부가 반탁운동을 내걸고 조직한 비상정치회의에 한국민주당, 국민당 등이 참여하면서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그런데 한국민주당의 입장에서 본다면 1월 7일 당의 수석총무로 김성수가 당선되면서 당내 분위기가 더욱 보수적으로 선회하였다는 점이 이 회합의 결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85-6)


"송진우 개인으로 보더라도, 그는 일제강점기부터 「동아일보」 중심의 민족운동을 전개했지만, 민족주의 좌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던 여운형,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였던 원세훈·김병로·홍명희 등과 유대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좌우합작'이라는 의미에서 본다면 그의 죽음은 1946년 2월 초 이후 38선 이남의 정치 세력이 좌우익, 즉 모스크바 3상협정 지지 세력과 반탁 세력으로 나뉘어 격렬한 쟁투를 벌이게 되는 한 원인을 제공했다고도 볼 수 있다." "송진우의 죽음 이후 임시정부 세력은 1945년 말 이후 여타 우익 세력의 큰 반발 없이 '반탁'을 강경하게 주장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일시적이나마 정국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당의 3상협정 지지 선언과 함께 전개된 찬·반탁 정국은 결국 좌우익 간의 골을 깊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보수우익 내부에서 임시정부의 주도권도 미군정이 주도한 민주의원의 결성과 함께 이승만에게 넘어갔다."(86-7)


3 여운형 -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와 함께 생을 마감하다


"여운형은 대중적으로 명망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정파의 지도자들은 그를 항상 경계하였다. 여운형이 건준을 조직하고 참여를 권유하자, 송진우를 비롯한 보수우익 민족주의자는 이를 거부했다. 여운형의 주도권 장악을 두려워한 보수적 민족주의자는 건준 안에서 여운형과 공동보조를 맞추기보다 여운형을 종이호랑이로 만들고 조직을 장악하는 데 주력했다. 또한 여운형은 미국의 이승만과 중경의 임시정부 세력이 귀국하자 이들과 협조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이들은, 여운형이 상당한 정치적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좌파 정치인들과 가깝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그런 여운형과 연합하기보다는 그를 경계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조선공산당의 박헌영도 여운형과의 연합 가능성이 있었지만, 대중적 인기가 높은 여운형을 견제했다. 좌파 주도권이 여운형에게 넘어가는 것을 경계했던 것이다. 남조선노동당 결성 과정에서 그를 고립시킨 것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99)


"각종 증언과 회고록, 그리고 당시의 상황 등을 통해서 보면 여운형의 암살범은 한지근이고 그 외 4~5명이 암살 현장에 행동대원으로 투입됐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김지웅과 염응택이 있었고, 이들 위에는 장택상이 자리 잡고 있다." "백의사의 고문이었다는 김지웅은 김구 계열의 인물로도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식민지 시기 만주에서 일본 헌병대 공작부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악질 친일파였다. 또한 신익희 역시 임시정부에 활약했지만, 1946년 말 김구를 제치고 이승만이 독립촉성국민회를 장악하도록 만든 일등공신으로서 1947년에 가서는 김구보다 이승만을 지지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1947년 시점에서 백의사가 사건의 배후에 있다면 임시정부 요인보다는 김지웅이나 신익희, 그리고 그 상부 지도자에 연결될 가능성이 더 높다. 직접 연결되지 않았더라도 누군가가 김지웅이나 염응택으로 추정되는 중간 브로커에게 암살을 의뢰했을 가능성도 있다."(119-20)


"그의 암살은 좌우합작운동과 미소공동위원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46년 말까지 좌우합작운동은 미군정의 정치 세력 재편 계획의 일환으로 입법 기구의 설치를 목표로 한 움직임이었지만, 1947년 초 이후 좌우합작운동은 김규식으로 대표되는 우파 민족주의 세력과 여운형으로 대표되는 좌파 민족주의 세력이 남북을 통틀어 우익과 좌익 세력을 모두 아우른 통일민주정부를 수립하려는 진정한 민족주의운동이었다." "여운형의 죽음이 좌우합작운동과 미소공동위원회 좌절의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아니었지만, 그의 죽음은 이제 미국과 소련이 합의한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합의를 추대할 만한 지도자가 없음을 의미했다. 소련이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이승만과 김구, 미국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김일성을 고려하면서 정치적 합의를 할 수 없었다." "여운형의 죽음은 단독정부 수립을 원하는 세력들에게는 내적으로 중요한 장애물 하나가 사라진 것을 의미했다."(123-5)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여운형의 암살 시기를 즈음해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친일파 척결을 위한 법안이 상정되어 논의된 사실이다. 당시 경찰에는 일제강점기 때 경찰 간부로 활동한 인물이 많았다. 미군정은 합리주의와 실용주의의 원칙에 따라 일제강점기에 친일을 했을지라도 경찰로서 경험이 있는 인물을 대거 등용하였다." "(경찰이 입법회의 의장 김규식과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한 여운형의 신변을 노리는 음모를 꾀하던) 당시의 경찰 수뇌부 조병옥 경무부장과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은 모두 한국민주당 당원 출신이다. 이들은 경찰에 들어가면서 미군정의 요청으로 한국민주당에 형식적인 탈퇴를 하지만, 실제로는 막강한 힘을 가진 경찰력을 한국민주당의 활동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유고에서 장택상은 자신이 이승만을 거의 전적으로 추종했으며 그 외의 정치 세력이 정권을 잡는 것을 막기 위하여 전심전력을 다했다고 밝혔다."(128-9)


"여운형의 암살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또 하나의 주체가 있었다. 바로 당시 38선 이남에서 유일한 권력체인 미군정이다. 여운형은 미군정을 찾아가 자신에 대한 경호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사실에 대해 항의하고 자신의 신변 보호를 요청했다. 하지만 미군정이 취한 일은 여운형에게 지방으로 피신하라고 하는 피동적인 권고만 했을 뿐이다. 미군정은 1946년 중반 이후 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하면서 김규식과 여운형을 새로운 정치적 파트너로 선택하였다. 그런데 김규식은 어느 정도 신뢰한 반면 여운형에 대해서는 의심의 눈총을 보내고 있었다. 이 점은 여운형이 김일성을 만나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을 때, 민주의원에 참여하지 않고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여했을 때, 그리고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참여하지 않았을 때 잘 나타났다. 민주의원과 과도입법의원은 미군정의 남한 통치 정책에 가장 중요한 기관이었는데도 여운형은 미군정의 참여 요구를 거부했다."(131-2)


4 장덕수 - 죽어서 김구를 법정에 세우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미국이 주한미군 철수를 추진한 이유로는) 첫째로 주한미군이 한반도에 오랫동안 주둔할 만한 명분이 없었다. 주한미군은 소련군과 함께 원래 일본군의 항복을 받기 위해 임시적으로 주둔했다. 따라서 일본군이 항복했으므로 한국 땅을 떠나야 했다. 둘째로 미국은 한국에 대규모 군대를 주둔시킬 만한 여력이 없었다." "당시 미국 정부는 국익의 관점에서 봤을 때, 보다 중요한 지역에 대한 원조에 집중해야 했고,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은 최우선 순위는 아니었다. 여기에서 미국은 딜레마에 빠졌다. 미군이 한반도에서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고 나간다면, 1945년 9월부터 진주하여 3년 넘게 운영한 미군정의 노력이 성과 없이 물거품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미국 정부는 국제기구에 한국 관련 문제를 이관했다. 국제기구의 감시하에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실시함으로써, 한반도의 전부가 아닌 일부에서라도 미국에 우호적인 정부를 세우겠다는 것이다."(140-1)


"미국의 대한對韓 정책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는 한국민주당이었다. 한국민주당은 미국이 하고자 하는 바와 가장 이해관계가 일치되는 정치 세력이었다. 비록 그 안에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 전쟁에 적극 협력한 사람도 있었지만, 당시 미군정으로서는 한국민주당만큼 신뢰할 수 있는 정치 세력이 없었다." "이러한 미국의 대안에 대해, 단독정부 수립을 통해 정권을 잡고자 한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당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상황에서 전혀 손에 잡힐 것같이 보이지 않던 '정치권력'이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죽음의 그림자가 정계를 뒤덮고 있었다. 이제는 그 죽음의 성격 자체가 달랐다. 그전까지는 단독정부 수립을 추구하느냐, 아니면 민족통일국가 수립을 추구하느냐의 분열로 일어난 테러였지만, 이제부터는 단독정부 수립이 기정사실화된 상황에서 권력의 주도권을 둘러싼 테러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141-2)


"장덕수 암살사건의 주범 박광옥 경사는 한국민주당 김성수 집에서 일하는 식모의 아들로, 김성수가 조병옥에게 추천해서 경찰이 되었다. 암살사건의 용의자들은 윤봉길 의사를 흉내 내어, 거사 직전 태극기를 배경으로 양손에 수류탄을 들고 "나는 조국 대한의 완전 독립을 위하야 혁명단원으로서 내 생명을 바치기로 서약함. 민국 29년 8월 26일 대한혁명단 OOO"이란 내용이 혈서를 가슴에 붙인 채 사진을 찍었다." "(암살의 배후로 밝혀진 대한학생총연맹은) 1947년 6월 운형궁에서 발족했으며,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총재로, 조소앙·엄항섭을 명예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 대한학생총연맹의 강령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살리고, 임시정부를 보호 육성하며, 이북의 '적색 마적'을 분쇄하고 , 남한의 단독정부 음모를 분쇄한다는 것이었다." "대한학생총연맹의 성립 과정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올리는 것에 반대하지 않은 (김구, 엄항섭, 조소앙 등의) 임시정부 요인들은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150-1)


"이승만은 1947년 11월 이내에, 즉 유엔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해 결의하기 이전에 38선 이남만의 선거를 실시하자는 '조기 선거론'을 개진하였다. 만약 유엔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미국이 깊숙이 개입한다면 자신보다는 김규식을 지지할 것을 걱정했던 것일까? 조기 선거론은 이후에도 이승만의 단골 레퍼토리 중 하나다. 1950년과 1954년 총선거, 1956년과 1960년의 대선에서도 항상 조기 선거를 주장했다. 다른 쪽에서 선거 준비를 할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한 전략이었다." "한국민주당은 미군정과 보조를 맞추어 유엔에 의한 38선 이남에서의 선거에 대해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이었지만, 동시에 신중한 준비를 통해서 선거에 임하고자 한다는 입장에서 이승만과 의견을 달리했다." "만약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미군정에서 장덕수를 중심으로 한 한국민주당에 강력한 지지를 보낸다면, 이승만이 최고 지도자의 위치로 부각된다고 할지라도 그의 권력은 상당히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172-3)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인해 가장 큰 이익을 얻은 지도자는 이승만이고,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도자는 김구였다. 김구는 암살사건의 증인으로 공판 과정에서 재판에 서야 했을 뿐만 아니라 이승만이 추진한 민족대표자대회와의 합동을 추진하던 일도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이러한 '찬물'은 그 개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남북연석회의가 개최되는 시점에서 김구에게 쏟아졌다는 점에서 큰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176) "남북협상을 결심하는 것은 김구에게 너무나 힘든 결정이었다. 그는 평생을 반공주의자로 살아온 사람이며, 그의 추종자들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장덕수 암살사건이 그의 노선 전환에 결정적 계기가 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의 작은 요인이 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암살의 배후를 김구로 몰아가려고 한 누군가의 음모는 오히려 김구를 민족의 지도자 반열에 올려놓는 결과를 초래했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178)


5 김구 - 38선을 베고 쓰러지다


"(암살 39일 만에 나온) 공소장의 내용은 백범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기보다는 암살자의 의중을 이해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김구가 반정부 활동을 했고, 공산주의자에게 동조하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안두희는 당연히 김구를 암살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기상천외한 공소장이 나온 것이다."(188-9) "공소장만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현장범의 체포와 조사 모두 상식을 벗어났다. 암살 직후 기다렸다는 듯이 경교장에 도착한 헌병들은 안두희를 연행해 육군 헌병대에 수감했다. 당시 서울지방경찰청 검사장이던 최대교는 이렇게 회고했다. "수사의 기본인 현장 조사는 물론 안두희의 얼굴도 볼 수 없었다. (···) 잠옷 차림의 신성모 국방장관은 김구 암살에 대한 보고를 받은 뒤 묘한 표정을 지으며 '이제 민주주의가 됐군' 하며 짤막한 한마디를 던졌다." 심지어 관할 서울지검도 모르게 검찰총장이 직접 (김구가 위원장이던 한국독립당 간부들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190-1)


# 안두희 재판 : 안두희가 한국독립당의 비밀당원이라는 사실, 당 내에 이견이 있었다는 사실, 한국독립당이 이승만 정권에 대한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일사천리로 진행


"성명서에 나타난 이승만의 관심은 오로지 김구 암살 직전에 발생한 국회 프락치 사건과 연계되지 않기를 절실하게 바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승만은 김구의 암살범을 두둔하였다. 그는 암살범의 살해 동기를 공개한다는 것은 "그 생애를 조국 독립에 바친 한국의 한 애국자에 대한 추억에 불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이 성명을 통해 김구의 암살이 곧 한국독립당 내에서 "조국을 위하여 가장 유익"한 행동 노선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차이에 의해 표출된 것으로 표현했다." "정작 암살범 안두희는 취조도 받지 않은 상태였고, 특무대로 이송돼 환대를 받고 있었다. 그는 26일 헌병사령부에서도, 27일 군특무대에서도 본격적인 취조는 받지 않았고 치료만 받았다. 특히 6월 27일 특무대로 이송된 후에는 김창룡 특무대장이 직접 찾아왔다. 암살의 배후를 추긍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커피 마시면서 아주 화기애애한 기분으로 경어를 쓰는 반가운 회동"이었다."(192-3)


"김구의 암살 배후를 추적하는 작업은 해방 정국 때 암살된 다른 인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세워진 정권들이 모두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외세와의 불평등한 관계가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 국민에게 김구와 같은 민족주의자에 대한 향수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김구의 암살에 대한 논의가 곧바로 민족주의의 부활을 상징하는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암살범이 감옥에서 출소한 이후 배를 두드리며 잘 살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안두희는 처음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곧 반공투사라 하여 15년으로 감형되었고,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형 집행 정지' 처분을 받아 출소하였으며, 곧이어 '형 집행면제'를 받아 육군에 복귀하였다. 1950년대에는 군에서 제대한 후 강원도 양구에서 군에 부식 납품을 하면서 살았다. 그는 한때 강원도 내에서 소득세 2위를 기록한 인물이기도 했다."(197)


"1948년 12월 말까지 남한 주둔 971 CIC 파견대에서 근무한 실리 소령은 김구가 안두희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자신이 한국에서 경험한 내용을 토대로 문서를 작성하여 보고했다." "이 보고서는 안두희와 백의사에 대해 "안두희는 이 비밀조직(백의사)의 회원이자 혁명단 제1소조의 구성원이다. 나는 그가 한국 주재 CIC의 정보원(informer)이었으며, 후에는 요원(agent)이 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다."(212) "암살단을 조직적으로 관리한 국방부 제4국 정보과장이 백의사의 중간 간부였다는 점은 이 암살이 조직적 차원에서 백의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김명욱이 백의사 정보국장이었으며 김구 암살을 국방부 차원에서 담당한 실무 핵심이었기 때문에 최소한 '백의사 출신'의 간부들이 김구 암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을 때 이들이 하는 일을 '정보 공작 전문기관'인 백의사 총사령 염응택이나 핵심 간부들이 몰랐을 가능성은 전무하다."(215)


"김구는 1948년 9월 9일, 38선 이북에서 정부가 수립되자 이에 대해 비난 성명을 발표하고, 이후 공식적인 정치 활동을 대폭 줄였다. 단지 김규식과 함께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이는 남과 북의 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은 정치 세력을 결집하여 앞으로 평화통일을 위한 활동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그는 암살되기까지 1년여 간, 1919년 임시정부에서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매우 소극적인 정치 활동으로 일관하였다." "그는 어느 쪽의 정부에도 참여하지 않은 채 오로지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외국 군대의 철수와 평화적인 통일정부의 수립을 바란다는 성명만을 발표하면서 앞으로의 정치 활동에 대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문제는 바로 이러한 시기에 김구가 암살되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가 주도적으로 정치를 하던 시기에는 어떠한 위험도 넘긴 그가 앞으로의 정치를 준비하고 있는 시기에 암살당했다는 사실은 매우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222)


# 1949년 6월이라는 암살 시점의 의미

1. 1948년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진 암살 시도의 마무리 

  1) 여순 반란사건(1948.10)의 배후로 남로당과 더불어 김구의 지지 세력을 지목

  2) 8연대 2개 대대의 월북 사건(1949.5)의 배후에 김구가 있다고 지목

  3) 암살 다음날(6.27) 북한에서 발표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과 김구를 연계

    → 3가지 사건 모두 김구를 친공산주의자로 매도


2. 이승만 정권이 맞닥뜨린 정치적 위기들 타파

  1) 반민특위 활동과 소장파 국회의원들의 평화통일 주장을 분쇄하기 위해 '반민특위 습격 사건'과 '국회 프락치 사건' 사주

  2) 1949년 말, 신익희의 대한국민당이 한국민주당과 합당하여 민주국민당을 창당하고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한 상황

  3) 여순 사건과 월북 사건에서 나타난 군부의 반反이승만 움직임

  4) 기정사실화된 주한미군 철수

  5) 인플레와 생산 침체, 농지 개혁의 미실시로 쌓여가는 대중의 불만


에필로그


# 암살사건의 공통점

1. 총을 이용한 개인의 저격으로 암살 실행

2. 장덕수 암살범을 제외하면 모든 암살범이 체포되었으나 조기 석방

3. 암살 주범은 모두 체포되었지만 배후는 오리무중

4. 암살 배후와 관련된 의혹에 항상 경찰이 등장(김구 암살에는 군부가 연루됨)

5. 백의사가 직간접적으로 전부 연관

6. 암살을 실행한 이들은 반공 성향이 강한 이북 출신의 청년들이었고, 배후로 거론되는 백의사, 경찰, 군 고위 간부들은 대부분 친일 경력 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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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동노 외 옮김 / 창비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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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망국, 1905~1945년


"(러일전쟁 승리 이후) 일본은 자유재량을 가졌음은 물론 도움의 손길까지 얻었다. 냉혹한 외교관으로부터 진지한 학자와 기독교 선교사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서구인들이 일본이 한국에서 맡은 "근대화의 역할"을 지지했다는 것은 슬픈 일이긴 하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왜 20세기의 첫 10년간 각양각색의 영국인들이 하나같이 일본을 칭찬했는가? 그 대답은 간단하다. 영국은 쇠퇴하고 독일과 일본은 전진하는데, 독일은 위협적인 존재였으나, 일본은 1902년 이후 영국의 동맹국이었기 때문이다. 150년간 지속된 두 번의 거대한 산업화 물결이 지나간 후, 영국은 신흥 산업열강들과 쇠퇴해가고 있는 산업기반에 포위된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대부분의 토론에서 열띤 자기분석이 두드러졌고, 효율성이 표어가 되었다." "영국 학자들은 효율성과 생산성의 모델을 찾고 싶어했으며, "국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영국이 배워야 할 교훈을 줄 것으로" 생각되는 일본이라는 나라에 주목했다."(204-5)


"대다수가 인정하고 싶어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한국인들이 식민독재에 부역했으며, 해방 후에도 너무나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의 관행을 자신의 행동모델로 삼았기 때문에 양자가 완전히 적대적이고 갈라선 관계였다고 할 수 없다. 20세기의 첫 10년 동안 세계의 관심을 급속히 끈 일본이라는 나라는 아시아의 많은 진보주의자들에게 떨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중국 민족주의의 창시자인 쑨원과 많은 열렬한 중국 청년들이 도쿄에 몰려들었으며, 한국의 많은 학생들과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내에서는 일진회라는 단체가 일본의 정책을 후원하는 이 새로운 대중조직에 수많은 한국인들을 끌어들였다." "한일합방은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면서 일본과 함께 근대화를 이루려 한 진보주의자들의 마지막 희망을 지워버렸지만,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동안의 유명한 '21개조 요구'와 그 요구가 유발한 중국의 5·4운동 때까지는 다른 아시아 근대화론자들의 꿈을 억누르지는 않았다."(209)


"처음에 일본은 한국의 상업을 직접 장악할 작정이었다. 식민지 당국자들은 1910년 한국 회사의 결성을 금지하고, 한국인이 납입하는 자본의 규모를 제한하는 법들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일본 자본이 이미 상당히 우세를 점한 다음에 나왔다. 일본인이 소유한 회사는 전체의 70%를 차지했으며, 한일 합작회사는 10.5%, 순수한 한국인 회사는 18%에 불과했다. 그러나 1920년대의 '문화정치' 아래서 한국의 상업은 성장하기 시작했다." "문화정치가 한국 산업에 가져다준 가장 중요한 성과는 한국의 산업이 곧 전체 동북아시아 지역경제에 대한 일본의 '행정적 지도' 내에서 통합적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한국은 중심부와 배후의 경제를 연결시키는 계획에서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으니, 바로 이때부터 오늘날까지도 동북아시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국가의 산업전략에 기반한 수출주도형 개발이라는) 일본 특유의 구성적 자본주의가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230-1)


"해방 이후 어떤 책이나 신문을 펼치더라도 박흥식을 반역의 원흉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본의) 협력자로 꼽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거물 자본가에게 정치적으로 원칙이 있는 행동을 기대한다는 것은 분개한 민족주의자들의 머릿속에서나 떠오를 법한 생각일 것이다. 뻔뻔스러운 친일파(이런 사람들은 오늘날 한국인들이 기억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있었다)인 박흥식은 1940년대 후반에 한국 최고의 갑부로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1948년 국회에 의해 부역자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러나 1949년 4월 이 파렴치하지만 교활한 기업가는 100만 원의 보석금을 토해내고 다시는 감옥에 들어가지 않았다. 기억해두어야 할 더욱 중요한 점은 김성수와 박흥식 같은 사람들은 많은 식민지들(예컨대 자바, 미얀마, 베트남)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일부 한국인들이 내가 19세기 말 미국의 악덕자본가들을 싫어하듯이 그들을 싫어하겠지만, 1930년대에 그들은 급진적인 변화의 선구자들이었다."(243)


"1930년대 중반에 일본은 동북아시아 전체를 포괄하는 중공업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다수의 식민열강들과는 달리 일본은 식민지에 중공업을 건설했으니, 생산수단을 들여와서 식민지의 노동력·원자재와 결합시켰다. 만주와 한반도 북부지역에는 제철소, 자동차공장, 석유화학공단, 어마어마한 수력발전 시설이 있었다. 그 지역은 일본이 독점적으로 장악하고 있었고 자국의 국내시장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국경은 초국가적으로 통합된 새로운 생산에 비해 덜 중요해질 정도였다. 이러한 변화들은 외적으로 유인되어 한국의 이익이 아니라 일본의 이익에 봉사했다. 따라서 이런 변화들은 일종의 과잉발전을 보여주었다. 똑같은 변화가 한국사회 전반에는 저발전을 초래했다. 이들 변화는 외부적인 원인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상류계급과 경영계급은 번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발달은 지체되거나 혹은 일본의 뜻에 따라 갑자기 비대해졌다."(247)


"1942년이 되면 노동은 오직 징집되거나 징용되었을 뿐이다. 한국 노동자들은 일본의 산업적·군사적 팽창의 필요에 따라 이리저리 이동하는 인력자본이 되었다." "전쟁이 지역적·지구적 차원에서 전개됨에 따라 한국인들에게 처음으로 군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비록 대부분은 징집된 보병들이었지만, 소수는 장교의 지위를 획득했으며 몇몇은 고위계급에까지 올랐다. 일본의 광범위한 전쟁 노력은 또한 제국 전역에서 노동력의 부족을 초래했다. 한국에서 이는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이 한국인이 관료직에 진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상당수의 한국 기간요원들이 중앙정부, 지방행정기관, 경찰 및 사법 기구, 경제계획기구, 은행 같은 곳에서 행정경험을 쌓았다. 그러나 이 일이 식민지배의 마지막 10년 동안에 일어남으로써 불화를 일으키는 유산을 낳았다. 이때는 일본의 통치가 가장 가혹했던 시기로 한국인들이 가장 고통스럽게 기억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249)


4장 열정, 1945~1948년


"(1945년 9월, 한국민주당 창당을 후원한 미국의) 결정은 어떤 정치단체에도 관여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국무부의 지침이든 불평등한 토지상황과 지주들의 대일협력에 대해 경고한 미국인들이 가지고 온 '육해군합동정보연구 75번'의 지침이든, 점령군의 지침에 정면으로 배치되었다. 니스트와 베닝호프와 하지가 이런 사람들을 좋아한 까닭은 모든 대안들, 특히 (미국인이 으레 정의하는 바의) 중도에서 좌측에 있다고 여겨지는 정치집단이면 어떤 것이든 더 나쁜 거 같았기 때문이다. 훨씬 나중에야 하지 장군은 니스트 대령의 상투적인 반응과는 반대로 한국의 정치상황이 실제로 어떠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1947년 말에 하지는 그 나름의 소박한 방식으로 미국이 처한 딜레마의 본질을 포착했다. 미국은 장점이라고는 반공주의밖에 없는 사람들을 지지하고 토착좌익들을 반대하는, 불운한 두 극단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도 한국사회에 들어설 토대가 전혀 없는 자유주의적인 결과를 바랐던 것이다."(273)


"조지 마샬 국무장관은 1947년 1월 말 딘 애치슨에게 보내는 비망록에서 "확실한 남한 정부를 조직하고 남한의 경제를 일본의 경제와 연결하는 정책을 입안하라"고 말했다. 참으로 적절한 말이었다. 몇개월 후 윌리엄 드레이퍼 육군장관은 "한국과 일본은 하나의 자연스런 무역·통상 지역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의 영향력이 한국에서 다시 확장될 것이라고 말했다. 애치슨은 국무장관 대행으로 행한 1947년 초 의회의 비밀증언에서 미국은 한국에서 이미 분할선을 그었으며, 그리스와 터키를 원조하는 '트루먼 독트린'의 모델에 따라 한국에서 공산주의를 저지할 주요한 프로그램을 위한 자금을 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애치슨은 봉쇄란 일차적으로는 정치적·경제적 문제, 즉 소련의 주변에 자족적이고 생존가능한 정권을 배치하는 문제라고 이해했다. 그는 두 동강이 난 한국경제가 "거대한 초승달"의 일부로서 일본의 복구에 여전히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296)


"한민당은 부유한 지주와 지방유지의 조직으로서, 그 당원들 대다수의 출신성분인 옛 양반 귀족과 마찬가지로 자원 배분과 부의 지배권을 두고 중앙행정부 권력과 싸웠다. 이승만의 대통령직과 한민당 사이의 긴장은 조선왕조에서 국가-사회간 갈등에 대한 제임스 팔레의 분석과 흡사했다. 이승만은 왕의 역할을 했고, 의회는 토지귀족의 이익을 결집시켰다. 그것은 한국 특유의 보수적인 방식으로 말하자면 새 병에 든 묵은 술이었다. 토지와의 연을 끊고 산업에 투자한 한민당 당원들한테는 이런 긴장이 크지 않았는데, 그것은 국가 관료제도가 그들과 결탁해 기득권의 재산을 배분하고 초기의 수입대체 산업화 계획을 통해 토착산업을 부양하기 위해 보호장벽을 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를 얻기 위해서는 과거처럼 국가의 보증이나 관료층과의 유대가 필요했으며, 한민당 기업가 대다수는 김성수처럼 전통적 토지권력의 특권과 지위를 산업투자가 가져다주는 더 큰 수입과 결합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303)


5장 충돌, 1948~1953년


"1945년 8월 한국이 분단되기 전에는 한국전쟁이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분단으로 인해 전쟁은 그 이후부터 줄곧 생각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북한의 침략에 대한 최초의 암시는 1950년에 온 것이 아니라 하지 장군이 워싱턴에다 공격이 임박해 있을지도 모른다고 알렸던 1946년 봄에 왔다. 남북한의 유력한 인물들이 통일전쟁을 심각히 고려했다는 최초의 증거도 태평양전쟁이 끝난 지 겨우 6개월밖에 안 된 바로 이 해방 초기에 나타났다. 그러나 미국도 소련도 자국의 군대가 전쟁에 말려들 가능성이 있는 한, 증오의 대상이 된 38도선을 제거하는 군사행동을 지지하려 들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에서 '열띤' 내전의 시발점을 소련군은 이미 철수했고 미군이 철수중이던 1949년 초 이후로 잡을 수 있다. 게다가 1949년은 중국공산당이 승리한 해였다. 중국공산당의 승리는 남북한 양측에 그리고 한반도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정책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333-4)


"미국의 시각에서 볼 때 이승만 정권이 거둔 하나의 절대적인 성공이 있다면, 그것은 1950년 봄에 이르러 남한 빨치산을 명백히 패배시킨 것이었다. 1년 전만 해도 유격대운동은 시간이 갈수록 증대될 듯이 보였었다. 그러나 1949년 가을에 시작된 진압작전으로 유격대는 많은 사망자를 내어 그들의 활동 재개가 예상되는 시기─1950년 초, 봄의 새싹이 돋아날 즈음─에 더이상 유의미한 작전을 재개할 수 없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딘 애치슨 국무장관과 (정책입안 책임자인) 조지 케넌 양자는 내부 위협에 대한 진압능력을 이승만 정권의 절제력을 시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보았다. 이것이 제대로 된다면 미국이 지원하는 봉쇄정책도 제대로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이승만 정권은 또하나의 국민당, 즉 '소(小)중국'으로 간주될 것이었다." "나약한 정책은 미국의 지지를 상실할 것이지만 그 위협을 잘 처리하면 "한국은 매우 존중받을 것이다"라고 굿펠로우는 썼다."(345)


"6월 25일 당일이나 그 이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든 이 전쟁은 일반적으로 인정된 나라간의 국경을 침범한 공격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전의 투쟁이 시작된 지점도 아니었다. 이데올로기적인 폭발성으로 충만한 "누가 한국전쟁을 시작했는가?" 하는 질문은 분명 잘못된 질문이다. 그것은 내전에 관한 질문이 아니며, 단지 동족상잔의 투쟁으로 직접 고통을 당한 세대들의 애간장을 쥐어짤 뿐이다. 미국인들은 남부가 썸터 요새에서 먼저 발포했다는 사실에 더이상 관심을 갖지 않지만 노예제도와 남부의 연방탈퇴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다. 아무도 누가 베트남전쟁을 시작했는지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남북의 한국인들은 미국인들이 마침내 그랬듯이 내전은 혼자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는 지혜를 깨닫고 화해할 것이다. 미국인들이 그렇게 하는 데 1세기 가량이 걸렸다. 그러므로 50년이 지난 후에도 한국의 화해가 여전히 미결정 상태인 것은 놀라울 것이 없다."(369)


6장 한국의 일출: 산업화. 1953년~현재


"이승만의 정치경제학은 어떤 것이었을까? 한마디로 그것은 "일본이 가진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달라, 그것도 내일 당장 달라"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만개한 산업경제를 원했고, 신생산업들은 방어벽─무엇보다도 일본으로부터의 방어벽─안에서 보육되기를 원했다." "한국과 타이완 각각의 60만 군대는 분명 비싼 경비가 들지만 무장해제한 일본과 긴 방어선을 가진 미국한테는 몰려드는 홍수를 막아주는 모래포대들이었다. 그러므로 공화당 행정부의 집권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에는 자유시장경제가 들어서지 못했다. 이승만은 전문가들이 '수입대체산업화'(ISI)라고 부르는 정책을 미국의 거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추진했다." "이승만은 이런 일에 노련한 대가였고, 미국으로부터 너무나 많은 무상원조를 받아내어 195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이런 돈이 한국의 총수입 가운데 6분의 5를 차지할 정도였다. 그것도 '합법적'이거나 기록된 총액만 그렇다는 것이다."(427-9)


"수입대체를 촉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나중에 원圓으로 개명된) 환화의 환율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수령된 달러의 가치를 높이고 원조수입을 극대화하는 한편 수입한 자본과 중간재의 비용을 저가로 묶어둘 수 있었다." "수입대체의 수혜자는 삼성의 이병철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승만은 이병철한테 제일제당과 제일모직과 같은 이전의 일본기업들을 두드러지게 유리한 구매가격으로 내주었다. 삼성은 이런 호의를 기억해두었다가 선거철에 보답했다. 이병철은 기억력이 흐리지 않은 사람이어서 나중에 이승만의 자유당에 6,400만 환을 주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주한미군의 존재 역시 군대식의 수입대체화를 가능하게 한 요인이었다. 이승만 정권과 미 제8군의 젖줄을 차지하는 경쟁에서 역대의 승리자는 나중에 대한항공까지 거느리게 된 한진기업의 사장인 조중훈이었다. 1950년대 내내 그는 주한미군과 운송계약을 맺었는데, 그 금액은 1960년에 이르면 연간 228만 달러에 달했다."(432-3)


"(쿠데타 이후) 혁명정부는 '부정축재자'라는 대집단을, 즉 이승만의 호의로 많은 돈을 번 사람들을 줄줄이 잡아들였다. 그 가운데 으뜸은 삼성의 회장인 이병철이었다. 그는 국민을 잡아먹는 돼지 같은 놈으로 기소된 기업인들을 대표하여 박정희 장군한테 가서 기업가들이 과거의 일본인의 적산(適産)을 훔치기 위해 정부의 뜻에 따르는 대신 외국자본을 추구하도록 장려함으로써 경제가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삼성, 금성 및 그밖의 기업들이 한국의 손바닥만한 내수시장을 이미 포화상태로 만들고 있으니, 이들 기업이 수출에 성공할지는 지켜보자는 것이다. 일부 미국인들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혁명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병철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은 후 곧 그를 포함한 10대 재계 총수들을 불러들여 그들과 협상했다. 그가 그들을 감옥에 보내지 않는 대신 그들은 새로운 산업에 돈을 투자하고 정부에 '지분'을 기부함으로써 '벌금'을 탕감하도록 하자는 것이다."(439)


"1970년대에 석유수출국기구(OPEC)로 말미암아 유가가 네 배로 급등한 후에 세계시장에 어마어마한 양의 오일달러가 떠돌아다니고 그 여파로 은행에서는 사람들한테 차관을 얻어가라고 구걸하는 상황에서, 한국은 이 돈의 흐름을 중개하여 이를 박정희의 '대대적인 중공업 추진정책'에 속하는 엄청난 고비용의 '6대 산업' 쪽으로 유도했다." "이 시기에 대규모 차관을 얻기 위해서는 회사 자체가 커야, 즉 재벌이라야 했다. 계속 차관을 받으려면 회사가 "거대해야 했다." 그러므로 한국형 모델의 핵심 요소는 금융이라 하겠는데, "한국 금융의 주된 목표는 가능한 한 많은 자본을 출혈을 감수하며 중공업화 계획에 투여하는 것이었다." 1979년대 상당 기간 동안 이런 차관의 평균비용은 마이너스 6.7%였는데 이에 반해 사채금리조차 플러스였고, 사실 그것은 물가상승률을 훨씬 웃돌았다. 누군가가 거의 7% 이자를 물어가면서 자기 돈을 써달라고 하니 괜찮지 않은가."(445-6)


"냉전 시대에 한국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비호를 받는 보호경제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국내적으로는 보호주의, 대외적으로는 수출주도 성장이라는 이들의 국가주도 신(新)중상주의적 프로그램에 대해 미국은 보고도 못 본 척하거나 심지어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두었다. 이 프로그램은 무엇보다 방대한 미국시장의 개방성에 의존했다. 여기에 바로 '아시아 개발국가'의 본질이 있었다. 이들 경제는 공산주의와의 전지구적 투쟁에서 대안적 개발 모델을 제공하는 데에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경제성장의 동력을 창출해냈다." "그러나 양극화된 냉전이 끝나고 이들 경제가 자유시장과 이른바 신자유주의에의 시대에 얼마나 '적합한가'의 문제가 전면에 등장하였으니, 많은 한국사람들에게 이런 상황은 놀라움과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므로 1997~98년 아시아 위기의 깊은 의미는 일본/한국 유형의 '후발' 산업발전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미국의 시도에 있다."(467)


7장 미덕2: 1960~현재의 민주주의 운동


"4월혁명으로 탄생한 제2공화국은 남한의 첫번째 민주정권이었다. 민주정권이라는 말에 부합되게, 야당은 내각이 입법부에 책임을 지는 2원내각제를 창출했다. 이 제도는 행정부의 폭넓은 권한을 약화시켰고, 대통령을 의식(儀式)의 용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명목뿐인 직위로 변환했다. 7월 29일에 선출된 새 국회는 다양한 견해가 분출되는 토론의 장이 되었고 언론은 자유로웠으며 경제건설을 위한 복잡정교한 계획들이 장면의 경제기획관들로부터 나왔다. 체제가 개방적일수록 국회는 더더욱 심한 언쟁에 휩쓸렸고, 더욱 독자적인 사상가들이 나타난 북한과의 통일을 지향하는 새로운 접근방식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가두시위가 없는 날이 거의 없었으며, 어떤 때는 학생들이 국회에 들어와 몸을 사리는 정치인들에게 호통을 치기도 했다. 그러자 서울 지배집단의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시련이, 전쟁 전의 시기를 상기시키는 시련이 시작되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명백한 좌경화 경향이었다."(497-8)


"1970년에는 한 노동자의 고독한 행동이 있었는데, 돌이켜보면 이는 한국 노동운동사의 이정표가 되었다. 섬유노동자인 전태일이 11월 13일 서울의 평화시장에서 분신했고, 불꽃이 그를 불사르는 순간에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고 외쳤다." "1970년 전태일의 분신과 1971년 김대중에 대한 대중적 지지야말로 유신체제의 핵심적인 이유였다. 1971년 10월 위수령 직후에 정권은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통과시킴으로써 박정희 대통령에게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고 국가안보를 위해 전국민을 동원하고 경제적 요구에 따라 임금과 가격을 정할 수 있는 (···) 거의 무제한적인 비상대권을" 부당하게 부여했다. 이런 조치들은 "유신 이전의 유신"이었으며, 즉각 산업노동자의 파업과 독립적인 노조들을 압살하는 데 활용되었다.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은 이제 대통령의 변덕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오직 단결권만이 문서상으로 남아 있었다."(532-3)


"(1972년 유신체제를 선포하면서 박정희는) 이전의 식민지 통치자로부터 또 하나의 모델을 따옴으로써 자신들의 끊임없는 반일적 호언장담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율사들한테 새로운 헌법을 쓰게 했는데, 거기에는 자기 임기에 대한 모든 제한을 제거하고 자신에게 내각과 심지어 국무총리까지 임명하고 해고할 수 있는 권한,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지명하는 (국회를 한낱 거수기로 만드는) 권한, 시민의 자유를 중지하고 파괴할 수 있는 권한, 그리고 유신헌법의 입안자들이 깜빡 잊고 포함시키지 못한 것이 무엇이든 그 법령을 발포(發布)할 수 있는 권한이 포함되어 있었다.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이 여전히 유효한 상황에 있건만 1970년대 초에는 청와대에서 긴급조치들이 황혼녘의 박쥐들처럼 줄줄이 나왔다. 1973년의 한 긴급조치는 모든 형태의 파업이 불법임을 선언했고, 1974년의 악명 높은 긴급조치 9호는 정권에 대한 어떤 비판도 국가안보의 위반과 거의 다름없는 것으로 만들었다."(513-4)


"미국이 전두환의 부대를 거부하거나 광주시민의 편을 든다면 그것은 1940년대 이후 유례가 없는 내정간섭이었을 것이므로 광주시민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이는 것 외에는 달리 대안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작전통제권이 한미연합사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책임은 면할 수 없었고 전선부대 이탈을 허용함으로써 카터의 인권정책은 난자질당한 꼴이었다. 미국은 그후 한국인의 달라진 태도에서 이 양자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전두환은 김대중을 체포하여 그에게 광주반란의 죄를 뒤집어씌우고 유신체제를 거의 포장하지도 않은 채 '선거인단'(통일주체국민회의)을 소집하여 자신을 제5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만듦으로써 12월 12일에 시작한 쿠데타를 매듭짓는 조치를 취했다. 광주항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는 아마 결코 밝혀지지 않을 테지만 매월 평균 2,300명을 기록하던 광주시의 사망자 통계가 1980년 5월에는 4,900명으로 치솟았다."(541-2)


"학생들은 무엇에 관해 항의했는가? 시금석은 언제나 광주와 광주에 대한 미국의 반응이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자신의 인권정치를 통하여 미국이 박정희 독재, 인권침해, 테러 등에 대하여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부풀렸다. 그는 한국에 정치적 위기가 증대되고 드물게도 경제적 하강국면이 도래했을 때인 1979년에 한국을 방문했다. 그러나 이때쯤에는 카터의 보좌관들은 카터에게 인권강화 노력을 기울일 표적은 한국과 필리핀 같은 '전략적' 동맹국들이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와 공산주의 독재정권들이라고 설득했다. 카터의 인권정책은 그의 행정부가 광주의 유혈사태에 고작 한가한 항의밖에 하지 않았을 때 카터의 면전에서 박살이 나버린 것이다." "수많은 반미행동의 시발은 1980년 12월 광주 미국문화원의 방화였고, 수많은 청년들이 자신들의 신념을 위해 자살을 감행하는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그런 반미행동은 흔한 일이 되었다."(550-1)


"1987년 6월의 광대한 반체제 운동을 묶어주는 것이라고는 단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직선제 정치로 돌아가자는 우렁찬 요구였다. 노태우에게 압력을 가하여 6월 29일 직선제 요구를 받아낸 후 중산층이 자신의 비정치적인 추구로 돌아서자 급진화된 청년들과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다시 한 번 소수가 되었음을 발견했다." "노태우 치하의 정치체제는 결코 '민간정권'이 아니었고 "군부가 야권에 비토권을 행사하면서 집권블록과 공존하는 형세였다." 또한 1987~88년의 남한에서 일어난 부분적인 민주화는 국가안전기획부와 같은 억압적인 국가구조를 해체하지 않은 채 진행되었다." "고도로 왜곡된 지역주의적 투표 패턴으로는 3자 경쟁에서 결코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할 것을 염려한 김영삼은 자신의 쪼개진 당을 이끌고 여권과 김종필 개인의 추종자들과 함께 합쳐서 '3당 통합'을 이뤄냄으로써 1990년 초에 민주자유당 혹은 민자당이 탄생했다."(558-9)


8장 태양왕의 나라: 북한, 1953~현재


"북한은 여전히 일본과 싸우고 있는 탈식민지 국가이다. 정부 통제하의 언론들이 50년 전 일본이 저지른 만행이나 일본의 군국주의가 곧 부활할 위험에 대해 경고하지 않는 날이 없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은 여전히 너무나 강렬하여 마치 전쟁이 방금 끝난 것과 같은 인상을 준다." "조선로동당의 독특한 상징/로고는 망치와 낫을 붓과 가로질러놓은 것인데, 이는 배운 자들과 전문가들을 끌어안는 정책을 상징한다. 마오쩌둥의 중국과는 대조적으로 김일성은 이들을 거의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들을 권력의 자리에 널리 등용하여 공산주의식의 '학자-관료' 계급을 공인하였다. 북한에는 서기·소상인·관리·교수 등을 일컫는 사무원이라는 모호한 범주의 사람들이 있다. 이 범주는 북한 체제의 입장에서는 남쪽으로 탈출했을지도 모를 식자나 전문가들을 붙잡아두는 데 쓸모가 있었고, 대부분의 북한 사람들한테는 자신의 '불순한' 계급배경을 감출 수 있는 하나의 범주를 제공해주었다."(575)


"전통적 조합주의는 위계, 유기적 연계, 가족이라는 세 개의 커다란 주제와 이에 상응하는 정치적 부권(political fatherhood), 정치 통일체(body politic), 거대한 연결망이라는 세 가지 이미지를 갖고 있다. "존재의 연결망 전체는 거룩한 근원에 의해 가동되는 거대한 유기체라고 상상할 수 있다." 전통주의자들이나 이후의 무솔리니 같은 파시스트들에게 있어서 정치통일체는 문자 그대로 신체를 뜻하는 살아 있는 유기체였다. 정치통일체의 모든 구성원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전체를 위해 기능한다. 우두머리는 국민의 아버지였고, 통치자와 피통치자는 "완전한 사랑"으로 묶여 있었고, 지도자의 아버지 같은 지혜와 자비는 "의지할 수 있고 결코 의심될 수 없었다." 왕은 자신의 신민들에게 사랑의 배려와 "아버지 같은 보살핌"을 보여주었다." "보수적 조합주의는 이러한 옛 모습을 되살리려 했고, 19세기에 나타난 낭만적 반자본주의와 반자유주의의 대표적 이데올로기였다."(578-9)


"아시아 사상가들은 실제로든 은유로서든 가족을 포기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거의 없다. 단지 마오쩌둥 시대의 중국에서 대약진운동을 추진하면서 가족구조를 공격하였으나, 이 기념비적인 시도조차 곧 중단되고 말았다. 가족은 아시아적 조합주의의 중심체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1,2차 세계대전 사이에 일본이 시도했다 실패한 '가족국가(family state)'이다." "김일성의 이데올로기는 조합주의의 역사를 큰 목소리로 되뇌었다. 마노일레스쿠와 마찬가지로 김일성은 역사적 갈등이 '단위'로서 프롤레타리아 계급 대신 민족을 상정하고, 예전의 식민지와 종속국가들, 그리고 주변부 사회주의 국가들은 공동의 대의를 걸고 수평적으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이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이러한 고유 이론에 도달하기 위해 유럽이나 일본의 이론들을 공부할 필요가 없었다. 김일성 시대 훨씬 이전에 이미 조선의 신유학은 인간의 신체를 적절한 생리학적 조화를 필요로 하는 유기체로 보았던 것이다."(582-3)


# 주체 사상(Juche idea)


"1963년 미 국무부를 위한 연구에서 이블린 머퀸은 이 체제의 본질을 최초로 파악했다. 그녀는 김일성과 측근의 관계를 "강철 같은 규율하에 이루어진 (···) 반半기사도적이며, 철회할 수 없는 무조건적인 결합"이라고 정확하게 지적했다. 그 관계는 "복잡한 관료제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적대적인", "지극히 개인적인" 체제라는 것이다. 1946년의 인터뷰에서 김일성의 유격대원은 항일유격대의 전통을 당과 대중조직한테도 좋은 원칙이라고 추천하였다. 이 원칙이 북한 전체의 조직화 원리라고 부언해도 좋을 듯하다(도쿄대학의 북한전문가인 와다 하루키 교수는 북한을 '유격대국가'로 부른다)." "그 결과 김일성의 유격대 집단은 다른 경쟁적 집단에 대해 쉽게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북한에서 사용하는 "우러러 받다"는 용어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위로 쳐다보며 받아들이다"를 의미하며, 종교적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사용한다. 이 용어는 아버지를 존대하는 의미에서 사용되기도 한다."(5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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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떠나며 - 1945년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의 최후
이연식 지음 / 역사비평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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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뜻하지 않은 재앙, 패전


"패전은 반세기 동안 아시아를 호령한 일본제국에 총체적 균열을 가져왔다. 좀 더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 것은 그동안 애써 감춰왔거나 제국의 논리로 강제 봉합되었던 일본인 사회 내부의 잠재된 불신과 갈등이 패전을 계기로 뚜렷하게 드러났다는 점이다. 특히 비상시국을 맞아 사리사욕과 개인의 보신만을 추구하는 사회 지도층의 낯 뜨거운 행태는 결국 민심의 이반을 가져왔다. 또한 그것은 오랜 기간 해외의 일본인 사회를 하나로 묶어낸 제국의 이념과 가치관을 급속도로 무너뜨렸다. 지도력과 상호 신뢰의 붕괴는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위기감과 피해 의식을 고조시켰고, 급기야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치닫게 만들어 곳곳에서 일본인 공동체의 해체를 촉진했다. 이제 '나만 살겠다'는 원초적 본능만 남은 조선의 일본인들에게 천황의 백성으로서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정체되고 균질화된 제국의 일본인상을 기대하기는 어려워졌다."(22-3)


해방 직후에 경찰서·주재소·행정관서 및 각 지역의 신사를 겨냥한 공격이 빈발했는데, 특이하게도 일본인보다 조선인 피해자가 훨씬 더 많이 발생했다. 이러한 사태의 근본적 원인은 "행정조직 말단의 조선인을 이용해 대민 지배를 꾀해온 총독부의 통치 방식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집단행동은 때로는 치밀한 계획 아래 조직적으로 발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해방 후 약 1주일 사이에 나타난 폭행·습격 등의 사태는 그동안 봉인되었던 조선인의 해묵은 감정이 정제되지 않은 형태로 한꺼번에 표출된 사건이었다. 이 시기에 벌어진 사건은 갑작스레 맛본 해방감에서 나온 비이성적 행동이기도 하지만 조선인의 가장 솔직한 속내가 드러난, 즉 양면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 결과 식민 지배 말기 전시체제 속에서 먹을거리와 물자를 공출하고 해외의 군수공장·탄광·전쟁터 등으로 사람들을 징발할 때 앞장서며 악역을 맡았던 조선인들이 지난날의 죗값을 톡톡히 치러야 했다."(26)


"재류 일본인들이 느낀 생경한 공포는, 다소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조선·조선인에 대한 총체적 무지와 무관심에서 비롯되었다. 직업적으로 조선인 사회 동향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첩보·정보계 관료나 한반도에 대자본을 투자한 기업의 간부 등 극소수 인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일본인은 사실상 조선인의 존재를 거의 의식하지 않고 살았다. 이런 경향은 식민 지배 초기에 수많은 조선인의 저항을 경험한 1세대와 달리 '문화통치' 시기에 이주해 왔거나 조선에서 태어난 식민자 2세의 경우에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이들은 조선을 타지로 인식하기보다는 본래부터 일본 본토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일본인은 (3·1운동 이후로) 패전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한반도 안에서만큼은 집단적 저항을 피부로 감지할 수 없었다. 조선의 일본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일상의 평화로 받아들였고, 조선인들을 자신의 일상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관심 밖의 존재로 치부했다."(26-7)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대혼란과 위기 속에서 더없는 기회를 포착하는 집단이 으레 등장하기 마련이다. 금융기관에서 너나없이 인출해간 돈이 시중에 풀리기 시작하자 곳곳에서 이른바 패전 특수를 노린 환전상이 나타났다." "환전상은 대개 일본 현지의 브로커나 그곳에서 돌아오는 조선인들로부터 일화日貨를 조달했으며, 이렇게 마련한 일화로 귀환하려는 일본인들이 인출한 조선은행권을 바꿔주었다. 이들 환전상은 조선은행권이 대량 인출된 시점에서는 일화를 비싼 값에 일본인들에게 팔았다. 또 일본인들이 본토로 거의 돌아가 일화 수요가 급감하는 시점에 이르러서는 해외에서 돌아온 조선인들에게 조선은행권을 비싸게 파는 환치기 수법으로 재차 이익을 챙겼다. 이뿐만 아니라 그런 식으로 모은 돈을 가지고 일본인 재산을 헐값에 매수하거나 한일 양 지역 사이의 밀수에 관여함으로써 이중 삼중으로 이익을 극대화했다."(35-6)


"짧은 기간이었지만 패전 후 약 1주일은 일본인 집단 내부의 다양한 차이가 드러난 시공간이었다. 평소에 조선인들로부터 원성을 사 그야말로 생명에 위협을 느낀 사람들은 진작 밀항선에 몸을 실었다. 또 본토에 생활 기반을 두고 있거나 조선에 미련이 없는 사람들은 대개 이른 시기에 돌아가려고 했다. 그리고 어차피 돌아가야 한다면 가급적 일찍 돌아가야만 늦게 온 사람들보다 정착 과정에 유리할 것으로 판단한 자들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이들은 뭐든지 먼저 하는 사람이 위험부담도 크지만 기회도 많은 법이라고 믿었다. 반면에 조선을 떠나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깊이 뿌리 내리고 정착한 사람들은 어떻게든 끝까지 남을 궁리를 했다. 패전 후 경성의 일본인들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자신의 미래를 위해 도움이 될 것인지 이리저리 복잡한 경우의 수를 따져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일본인이 만든 낯익은 '경성'의 모습은 어느새 이질적인 조선인의 '서울'로 변해가고 있었다."(46-7)


2 사면초가에 처한 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가 제일 우려하는 부분은 일본인들의 무더기 예금 인출로 발생할 수 있는 금융기관의 부도 사태였다. 만일 패전이 초래한 집단의 위기감 속에서 금융기관마저 부도에 처한다면 총독부의 행정력은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패전 후 1주일 사이에 많은 일본인이 현금에 집착하게 되면서 각 은행에는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상황이 전국적으로 지속될 경우 앞으로 1주일 안에 조선의 각 은행이 폐점할 것으로 예측했다." "한편 일본 정부도 1945년 8월 17일 시마즈가 대장대신에 취임하면서 본토로 돌아오는 일본인들에 대한 현금 지불, 외환 송금에 대한 현금 지불 한도액, 외지 예금 처리 방안 등을 비로소 논의하기 시작했다. 당시 쟁점은 조선에서 모라토리움을 선언하지 않되, 예금 인출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통화 증발增發(화폐발행량을 늘리는 것)과 그에 따른 인플레이션 방지책에 관한 것이었다."(65-7)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는 일본인의 안전한 귀환을 위해 모라토리움 카드를 버렸다. 이제 남은 선택지는 식민지에서 발생한 경제적 위기의 여파를 차단하기 위해 만주와 조선에서 각기 통용되고 있던 다롄은행권과 조선은행권을 새로이 조달하는 것이었다. "비상수단을 동원해 화폐를 조달한 결과, 조선은행 발행고는 1945년 3월에 35억 엔이던 것이 8월 15일 현재 49억 엔, 10월 18일 현재 88억 엔까지 늘어났다. 바로 이 돈이 청산자금으로 일컬어지는, 조선군과 조선총독부 등 각 식민기구와 일본인이 귀환하면서 발행한 자기방어적 화폐이다. 조선은행 기록에 따르면 이 돈은 제대군인의 귀환 여비 등 군 퇴각 비용, 관리의 퇴직수당과 귀환 여비, 그리고 각 회사의 퇴직금과 해산수당 등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의도적 지출'이라 할 수 있는데, 바로 이 돈이 향후 남한 사회에 심각한 경제 교란을 초래했으며, 그중 상당한 금액이 점령군을 상대로 한 접대비 명목으로 불투명하게 사용되었다."(67-8)


"1945년 8월 16일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은 경성의 일본인 유력자를 불러 향후 대책을 논의하며 패전 후 총독부의 통치력 저하에 따른 고충을 토로했다. 그는 현재 치안 유지를 담당하고 있는 조선군도 곧 점령군이 진주함에 따라 무력화될 것이므로 이에 대비해 민간 조직이 나서서 일본인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계기로 1945년 8~9월에 걸쳐 경성·부산·인천을 비롯해 전국에 37개의 세화회가 결성되었고, 조선총독부와 조선군사령부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한반도 거주 일본인의 원호 활동을 개시했다." 세화회는 애초에 민간 기부금을 모집해 설립하려고 했지만 모금 성과가 부진하자 "총독부에서 1,000만 엔, 은행과 회사에서 400만 엔, 그리고 9월 초 조선군사령부가 대전으로 이전하면서 남은 돈 400만 엔 가량을 지원받고서야 겨우 발족할 수 있었다. 즉 모라토리움을 방지하기 위해 일본에서 발행하여 조달한 화폐, 곧 청산자금 중에서 약 1,800만 엔이 일본인 세화회로 흘러들어갔다."(73)


3 잔류와 귀환의 갈림길에 선 일본인들


"한국 병합과 함께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정책을 종교를 통해 지원한 어용 기독교 세력인 경성YMCA는 일본이 패망한 지 2주일 만에 조선어 강좌를 부활시켰다." 조선어 강사를 맡은 오쿠야마 센조의 스승이 "몽골어·조선어·일어 등 동양어 비교 연구의 권위자였던 가나자와 쇼사부로이다. 가나자와는 언어학과 한일 양국의 고대 지명 연구 결과를 토대로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문법은 물론이고 일상 회화까지 능통했던 오쿠야마의 조선어 강좌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수강생을 모집하자마자 희망자가 정원을 넘어서는 바람에 1주일도 채 되지 않아 학급을 증설해야 했을 정도였다." "꽤 오랫동안 조선어를 배우지 않았던, 혹은 배울 필요조차 인식하지 못했던 일본인들이 조선어 강좌로 몰려든 사실은 패전 후에도 조선에 잔류하고자 한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조선 잔류의 희망을 품었던 일본인들의 꿈은 곧 물거품이 되고 만다."(81-3)


# 미군정의 집단 송환 방침(일본인 총철퇴령, 1946.1.23)


"1945년 10월 민간인 송환이 막 시작될 무렵, 서울 도심에는 왜노소탕본부倭奴昭蕩本部라는 단체의 명의로 '일본인들은 빨리 집을 내놓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는 선전문이 돌기 시작했다." "'왜노 소탕'이란 말 속에는 좀 더 복잡한 감정이 깔려 있었다. 즉 해방 후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일본인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 새로운 문제가 계속 생겨나고,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이 더 팍팍해지고 있다는 현실적인 불만과 실존적인 고민이 한데 섞여 있었다. 제일 먼저 사회문제로 부각된 사안은 주택 부족이었다. 이것은 식민지 시기 민족 차별적인 주택 정책으로 인해 일본인과 조선인의 주택 보급률 편차가 크게 확대된 상황에서 해방 후 해외 귀환자가 급속히 증가하자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했다." "일본인이 조선에 남아 각종 물자를 횡령하거나 밀반출하는 것도 큰 문제로 받아들여졌다." "일본인들이 귀환 국면에서 저지른 물자의 횡령과 반출로 인한 피해는 일반 서민이 감당할 몫으로 고스란히 전가되고 말았다."(97-99)


4 억류·압송·탈출의 극한 체험


"1946년 1월 초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북한 일본인의 남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미군 장교들이 평양을 방문했다. 그 자리에서 소련군 관계자는 상부로부터 일본인 송환에 관한 지시를 받은 적이 없지만, 일본인들을 그대로 돌려보내기에는 '매우 귀중한 노동력'이라고 발언한 바 있다. 이것은 거류 일본인에 관한 미소 양국 점령군의 시각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즉 일본의 GHQ와 주한 미군의 가장 큰 사명은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분리하여 다시는 미국을 상대로 일본이 무모하게 도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미군의 일본인 송환정책은 군사적 관점에서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분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신분에 따라 순차적으로 돌려보냈다는 점에서 계획 송환이고, 궁극적으로는 모두 돌려보냈다는 점에서 일괄 송환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 소련군의 정책은 일괄 '이동 금지' 후 필요에 따른 선별적 '활용과 방치'였다고 볼 수 있다."(114)


"만주와 북한 지역은 소련의 전후 복구를 위한 노동력과 설비·기계를 제공하는 노다지로 인식되었다. 특히 만주 지역의 경우 잠재적으로 소련을 위협할 수 있는 전시 산업을 파괴함으로써 군사적 안정을 꾀하고, 동시에 이들 시설을 전리품으로 반출해 감으로써 소련 국내의 산업 생산력을 제고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이 때문에 소련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만주 철군을 거부하며 각종 시설을 반출하는 데 주력했다." "전투를 통해 입북한 소련군이 보기에 일본군 포로는 더 없는 인적자원이었다. 더욱이 고급 기술을 연마한 엔지니어 그룹은 절대로 놓칠 수 없는, 하늘이 내린 선물이었다. 미국 측이 1945년 11월부터 북한을 비롯한 소련 점령지의 일본인 송환에 대해 협의를 요청했음에도 소련 측이 한사코 거부해온 주된 요인 중 하나는 바로 일본인에 대한 이 같은 인식 때문이었다." "소련군은 처음부터 일본인들을 본토로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116-7)


"과거 일본인들은 조선인에게 정체성·위생·근면의 잣대를 들이대며 근대화·문명화된 일본인이라는 우월감을 바탕으로 집단적 자기 정체성을 공유해왔다. 하지만 종전을 계기로 그러한 허상 아래 복류하던 균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 균열은 해외 일본인 내부에서만 끝나지 않았고, 본토인과 해외 귀환자 사이에 더욱 큰 파장으로 전개되었다. 남한의 일본인보다 불쌍한 북한의 일본인, 북한의 일본인 중에서도 제일 불쌍한 만주 피난민이라는 등식은 하카타 등 일본 귀환황에 도착하는 순간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본토인 입장에서 외지에서 돌아오는 모두가 자신의 삶을 더욱더 어렵게 만드는 민폐 집단일 뿐이었다. 단적인 예로 해외 일본인들은 점령군으로부터 '선량한 처자'를 지키기 위해 게이샤와 창기들을 위안대로 삼고자 했으나, 본토에 도착한 순간 결국 모든 부녀자는 외지에서 돌아왔다는 이유만으로 똑같은 취급을 받았다."(134-5)


5 뒤집어진 세상을 원망하며


"북한의 일본인들은 대략 1945년 9월부터 이른바 '근로봉사'라는 명목으로 무상 노동, 즉 집단 사역에 징발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두세 달이 지나자 출역자들은 일당 5~7원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것으로는 충분한 호구책이 될 수 없었다. 그마저도 없으면 연명이 불가능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 결과 별다른 수입도 없는 일본인들은 9월에 동결된 자신의 예금 중 매월 인출이 허가된 약간의 생활비와 요행히 접수를 면한 은닉 현금, 그리고 소지품 밀매 등을 통해 근근이 생활했다. 그러다보니 1945년 12월에서 1946년 1월을 고비로 돈을 벌어올 남성이 없는 가정, 패전 초기에 여러 번 강제 이사를 당한 가정, 숨겨둔 재산을 도난당한 가정이 제일 먼저 파탄에 이르기 시작했다." 이 무렵 무임 노동의 유상화 등 일련의 제제가 완화되자 "빈곤에 처한 군인·경찰 가정의 부녀자를 비롯하여 생활난에 허덕이던 일본인들은 조선인이 경영하는 이발소, 여관, 목욕탕 등에서 잡일을 하기 시작했다."(162-4)


"북한의 일본인들이 1946년 봄부터 대거 남하한 데는 '여기서 또 한 번의 겨울을 지낸다면 일본인 전체가 몰살할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기본적으로 작용했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한 외적인 요인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탈출을 묵인한 소련 점령 당국의 태도 변화가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소련은 이 시기 북한과 만주 등 점령지에서 생산 설비를 반출하려는 애초의 점령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했으므로 비교적 일본인 송환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1946년 겨울을 지나면서 북한 정계 역시 사실상 김일성을 중심으로 안정적인 정권 기반을 마련했기 때문에 일본인들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인 일반의 여론도 점차 일본인 송환을 요구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점령 초기 조선인들은 해방의 열기 속에서 일본인에 대한 당국의 제재 조치를 환영했다. 그러나 1945년 겨울을 지나며 서서히 당국의 방침을 비판하며 하루빨리 일본인들을 돌려보내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183-4)


# 일본인 송환 주장

1. 동정론 : 권력자들은 애초에 다 빠져나가고 약자들만 남아있는 상황이므로 돌려보내야 한다.

2. 무용론 : 식량과 주택 문제 등이 악화되는 와중에 일본인까지 챙길 수 없으니 돌려보내야 한다.


6 모국 일본의 배신


"귀환자·제대군인·소개민은 전후 일본의 열등 국민으로 전락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해외 귀환자는 본토인의 뿌리 깊은 편견으로 인해 혼처를 찾기가 더욱 어려웠다.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 여성의 경우는 이미 조선에 있을 때부터 본토인과의 결혼이 쉽지 않았다. 본토인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조선에 살던 일본인 남성조차도 "혈통을 믿을 수 없다, 가정적이지 않다, 본토의 시부모를 모실 줄 모른다"는 이유로 조선 태생 여성을 신부로 맞아들이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패전 후에는 (조선 태생 일본인 여성을 '불량한 말괄량이'라고 싸잡아 매도하는) 선입견 위에, 본토인에게 민폐만 끼치는 '귀환자(히키아게샤)'라는 또 다른 차별의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게다가 소련 점령지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점령군의 각종 폭행 사실이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실제로 피해자들이 본토로 돌아온 후 혼혈아를 출산함으로써 해외 귀환 여성은 정조마저 잃은 집단으로 매도되었다."(190-1)


"민폐 집단이라는 '사회적 낙인'과 귀환자라는 '주홍글씨'는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들 마음속에 한동안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다." "1957년 미요시 아키라가 작성한 논문에서 주목해 볼 대목은 "본토 귀환 이래로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는가?"라는 질문에, "너희들은 외지에서 호사를 누릴 만큼 누렸으니 조금 힘들게 사는 것도 당연하다"는 본토인의 따가운 시선을 꼽는 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점이다." "즉 패전으로 인해 이들을 구호할 여력이 없었던 일본의 객관적 상황, 군인뿐만 아니라 일반 민간인조차도 침략주의자로 오해하거나, 단지 식민지에서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생활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을 질시하던 본토인들의 정서에서 이런 인식이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결과는 귀환자들이 식민지에서 누렸던 온갖 특권과 풍요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냉대·배척·경계·질시 등 귀환자에 대한 본토인의 정서와 태도가 복합되어 나타난 현상이었다."(198-200)


"일본 정부는 '전쟁 피해의 균분'이라는 국민 통합의 대원칙이 무너질 경우에 감수해야 하는 정치적 부담을 안고 이들 각 집단의 불만을 그때그때 무마하는 선에서 전후 보상을 최소화하고자 했다. 일본 정부가 보상에 대한 국가책임 문제를 명기하지 않고 최대한 보상 액수를 낮추려고 한 것도 바로 여타 전쟁 피해자 집단으로부터 형평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을 막고자 한 정치적 고려 때문이었다. 특히 해외 귀환자들에게 특별교부금이 지급된 시기는 이들이 일본에 돌아온 지 무려 20여 년이 지난 시점이기 때문에 대상자 중 50세 이상의 65%, 35~49세의 32%가 이미 사망한 뒤였다. 일본 정부가 1980년대 말부터 한국을 비롯한 구 식민지 출신자가 제기하는 소송에 대해 이른바 '국가무답책國家無答責'을 비롯해 '개인 청구권의 부인', '시효' 등 옹색한 이유를 들어 시간을 끌면서 전쟁 책임과 전후 책임을 회피해온 법리적 태도는 이미 30년 전부터 자국민을 상대로 무수히 활용되었던 것이다."(210-1)


# 국가무답책國家無答責 : 1945년 이전 국가의 권력 행사로 인한 개인의 손해에 대해서는 국가가 책임질 법적 근거가 없다는 논리


"어쨌든 해외 귀환자들은 우여곡절 끝에 일본 정부로부터 전쟁 피해자로 공인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이들이 입은 객관적 피해에 대한 보상 개념이 아니라, 전후 일본 정부의 다양한 '필요와 지향'이 녹아든 담론적 성격이 강했다. 일본 정부 입장에서 보자면 당시 재정 상태로는 어차피 공적자금을 통한 구제가 어려웠던 상황이기 때문에 이들의 마음을 달래고 사회 일반의 도움을 이끌어내기 위한 명분이 필요했다. 그리고 제각기 다른 피해와 보상을 주장하는 여러 집단의 요구를 무마하면서 동시에 이들을 새로운 국민국가의 국민으로 통합하기 위해서도 무언가 공통의 화두가 필요했다. '전쟁 피해자'라는 개념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등장하여 전 사회적으로 유포되었다. 귀환자들은 피해자 집단으로서 정부의 공인을 받았지만 정부의 형식적인 지원과 본토인의 계속되는 냉대와 멸시 속에서 자신이 떠나온 식민지와 돌아온 조국에서 이중의 피해를 입었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211)


7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다른 기억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도 구 일본인 부동산의 부정 매매는 명의조작 등의 방법을 통해 계속 이루어졌으며, 이른바 뒷돈으로 10만 원이라는 '공정가격'이 상식화되었을 정도로 투기 행위가 일반화되었다. 이같은 투기는 남한의 주택 시장을 연쇄적으로 교란했다. 일본인 주택을 중심으로 시작된 투기붐은 조선인 주택까지 번져 집값은 날로 치솟았다. 그 영향은 심지어 도시 빈민과 해외 귀환자 등 최하층에까지 파급되어 방공호 한 칸도 2,000~3,000원의 세를 내야만 가까스로 얻을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한 군정 초기에 자유 매매를 허가함으로써 더욱 악화된 식량난은 1948년 유령인구 색출에 관계당국이 열을 올리고 있는 동안에도 쌀을 매개로 한 밀수가 계속됨으로써 개선될 기미가 없었다." "해방 초기부터 국내의 의식 있는 인사들이 일본인 재산 매매 금지를 강력히 요구한 것도 이 문제가 사회적 부의 분배 문제와 직결될 뿐만 아니라 사회 체질 자체를 왜곡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238-9)


"일본인 재산을 바라보는 사회 지도층의 기본 시각은, 이것이 향후 건국의 경제적 기초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또한 사회 전체가 공유해야 할 재산이라는 것이었다." "산업 시설의 해체·산매·반출 등은 결국 공업 생산의 저하와 그에 따른 노동자의 대량 실업, 그리고 임금 하락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낳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해외 귀환자의 대량 유입으로 실업률이 급상승했으므로 노동자의 생활을 더욱더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들은 공장관리위원회를 조직하고 회사나 공장을 집단 관리·운영함으로써 사태가 더 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해방 후 조선인 노동자들이 자주관리운동에 나선 것도 궁극적으로는 생산 시설의 조업 재개를 통해 일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일본인들의 재산 처분과 밀항을 도와 한몫 챙긴 조선인이 있었는가 하면 각 지역 인민위원회는 미군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주요 항구를 돌며 밀항하는 일본인을 직접 단속하고자 했다."(253-4)


"일본인이 처분한 재산은 관재인의 지위를 요행히 얻은 극소수에게 돌아갔고, 생산 시설의 파괴 및 물자의 투매와 폐기는 인플레를 부채질했으며, 물자 부족을 초래하여 밀수업자들을 창궐케 했다. 그 결과 대다수의 서민들은 초인적 내핍을 강요당한 반면, 모리배나 간상배로 통치되던 신흥 집단은 재력을 바탕으로 사회 각계에 손을 뻗쳐 온갖 비리를 저지름으로써 해방 당시 대다수가 지향하던 건강한 사회·국가 실현에 걸림돌이 되었다. 이러한 폐해는 결국 남아 있던 일본인들에 대한 '추방론'·'응징론'으로 확산되어갔다. 이제 조선인에게 일본인 송환 문제는, 억압과 착취의 원흉이니 마땅히 이 땅에서 추방해야 한다거나 혹은 해방이 되었으니 당연히 물러가야 한다는 식의 관념적 차원을 넘어, 그들로 인해 당장 자신의 일자리·먹을거리·잠자리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현실의 문제로 다가왔다. 조선인에게 일본인의 마지막 모습은 그들이 처음 이 땅에 발을 디딜 때와 마찬가지로 살상과 파괴로 점철되었다."(2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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