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3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5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7장 '동원 대중'과 '피해 대중' / 1956년


"50년대 이승만 반공체제의 히스테리, 바로 그걸 온몸으로 표현하고 실천한 인물이 김창룡이었다. 이승만이 이론이었다면, 김창룡은 실천이었다." "이승만의 이론이 '빨갱이 사냥'에만 국한된 건 아니었다. 그의 '빨갱이 사냥'은 늘 정치적이었고 정치와 연관되었다. 이승만에게는 그것까지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수하가 필요했다. 그게 바로 김창룡이었다. 김창룡을 위한 육군 특무대가 창설되었을 때, 특무대에 부여된 주요 임무 중의 하나는 정치공작이었다." "이승만은 출신별, 지역별로 형성된 군내 파벌이 상호 반목하도록 조장하는 동시에 그 모든 걸 감시하고 공작을 추진하기도 하는 기구로 헌병대와 특무대를 이용하였다. 김창룡의 충성 경쟁 라이벌은 헌병대의 원용덕이었던 셈이다. 헌병대는 반민특위 활동에 쫓겨 입대한 이익흥, 전봉덕, 노덕술 등 경찰 간부들까지 가세해 정치 개입 성향이 매우 강했지만, 충성 경쟁에서는 김창룡보다 한 수 아래였다."(17)


"민주당은 3월 28일 전국대회를 열어 신익희를 대통령 후보로, 장면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민주당은 선거구호로 〈못살겠다 갈아보자〉를 내걸었다." "이승만 정권에 대한 염증의 반사 효과였겠지만, 신익희의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했다. 5월 3일 한강 백사장에서 열린 신익희의 강연회에는 30만 인파가 몰렸다. 서울운동장도 장충당공원도 빌릴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장소였다."(33-5) "야권 후보 단일화의 기운도 무르익고 있었다. 진보당 후보 조봉암은 4월 3일 정부통령 후보 백지화, 나아가서는 자신의 출마까지도 취소할 수 있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를 열흘 앞둔 바로 그 날 신익희가 죽을 줄 누가 알았으랴. 신익희는 5월 5일 새벽 5시경, 부통령 후보 장면과 함께 호남선 열차를 타고 전북 이리로 향하던 중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졸도했다. 수행원들이 인공호흡을 시도하며 기차 안에서 의사를 찾았지만 의사는 한 사람도 없었다."(37-8)


# 5·15 선거 결과 이승만이 52% 득표로 대통령 당선


"〈비 내리는 호남선〉이라는 노래의 인기가 시사하듯이, 신익희의 사망은 많은 사람들을 허탈과 좌절에 빠지게 만들었다. 박경수는 〈그런 민심의 허탈은 한편으로 '이승만은 하늘에서 낸 사람'이라는 엉뚱한 '신수설(神受說)'까지 떠돌게 하면서 그 추종자들로 하여금 전혀 반성이나 개전의 빌미조차 가져보지 못하게 했다〉고 말한다. 그랬다.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정반대였다. 이승만은 5월 26일 기자회견에서 이기붕의 부통령 낙선에 대한 질문을 받고 〈나는 과거에 민중의 인텔리젠쓰, 즉 명철을 믿어왔던 것이나 지금은 그것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답변했다." "그는 기자회견을 가진 그 날 선거 주무장관인 내무부장관에 이익흥을, 치안국장에 김종원을 임명했다. 이익흥은 일제 때 경찰서장 출신으로 이승만의 방귀에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는 명언을 남겼고, 김종원은 여순·거창 사건에서 이미 악명을 떨친 바 있는 인물이었다."(41)


"(야당 후보의 입후보 등록 방해 공작을 펼쳐) 야당의 손발을 꽁꽁 묶어 그라운드에 들어오지도 못하게끔 해놓고 치른 8월 8일의 기초의회 선거 결과가 자유당의 압승으로 끝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여권이 전국에서 90% 이상을 휩쓸었다. 선거 후 순경 박재표가 (투표함 2개를 수송 도중 바꿔치기한) 환표 사건을 폭로함으로써 자유당이 다단계 선거 대책을 세웠다는 게 알려졌다." "그러나 8월 13일에 치러진 서울특별시·도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이 22%의 당선자를 배출했으며, 서울에서는 자유당이 참패했다. 서울시의원 47명 중 민주당이 40명을 차지했다. 서울에서는 자유당원이 자유당으로 입후보하지 못하고 무소속으로 나와 무소속 후보자들은 '순수 무소속'을 표방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서울에서 자유당 공천을 받아놓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이른바 '가면(假面) 입후보자'가 42명이었는데, 이 중 5명만 당선되었다. 전형적인 여촌야도(與村野都) 현상이었다."(64-5)


8장 '장길산'과 '홍길동'을 기다린 세상 / 1957년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미국의 원조에 기대 굴러가던 한국의 '원조 경제'는 심각한 제약 조건을 안고 있었다. 한국 정부는 원조물자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었다. 그것을 판매한 뒤 그 대금을 대충자금(代充資金, Counterpart Fund)이라 하여 적립해야 했다. 이 자금은 한미합동경제위원회의 철저한 통제를 거친 뒤에 쓸 수 있었다. 이런 방식을 통해 미국은 한국 정부와 경제를 통제하였다. 정부재정 가운데 절반이 넘는 대충자금은 미국에서 무기를 사들이는 등 주로 군사용으로 사용해야만 했다." "건설업계에는 정부 발주 공사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는 '자유당 5인조'라는 게 있었다. 대동공업, 조흥토건, 극동건설, 현대건설, 삼부토건 등이었다. 삼부토건은 국내 건설업 면허 1호로 도로·항만 등 각종 토목 공사에 주력하였고, 현대건설은 57년 9월 한강 인도교 복구 공사를 수주하면서 '자유당 5인조'에 진입하였다."(143-4)


"『현대문학』 59년 10월호에 발표된 이범선의 〈오발탄〉은 뿌리뽑힌 월남민 가족이 겪는 처참한 가난의 고통을 다룸으로써 남한 사회가 자랑으로 내세우는 '자유'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였다." "한수영은 〈어머니, 그래도 남한은 이렇게 자유스럽지 않아요?〉라는 말에 주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 대화는 〈오발탄〉 가운데서도 가장 냉소적인 부분이다. 주인공 송철호의 이 설득은 그 자신조차 움직이지 못하는 무력한 것이다. 실성한 어머니와 임신중독에 걸린 아내, 영양실조로 말라가는 어린 딸, 상이용사로 제대해 은행강도를 하다가 총에 맞아 죽는 아우, 양공주인 누이들에게도 이 설득은 효력 상실이다. 요컨대, 이 독백에 가까운 설득은, 삶과 송두리째 맞바꾼 자유의 가치가 남한 사회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월남민 주인공의 역설이며, 체제 유지의 내적 동의가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50년대적 아이러니에 해당한다.〉"(148-9)


9장 '생각하는 백성'과 '인의 장막' / 1958년


"이승만의 '세계 4대 강국론'은 그가 평소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아 온 '반공적 선민의식'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것이었다. 이승만의 평소 주장에 따르면, 한국은 세계 반공진영의 중심지이자 '자유진영의 보루'였다. 그런데 이는 오직 공산주의에 대한 호전성을 강경하게 드러낼 때에만 유지할 수 있는 타이틀이었다. 그래서 국민에게는 늘 '성스러운 사명'이 강조되었다. 한국인은 세계를 구출해야 할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한국인은 자유세계를 구해야만 할 세계 정의의 사도이기 때문에, 한국인의 목숨은 한국인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목숨을 내걸고 싸우려는 한국인에게 세계가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은 물질적 도움을 받는 대신에 세계에 정신적인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에 한국인은 당당하게 생각해야 한다." "중요한 건 세계적인 반공 지도자인 이승만의 뜻과 명령에 복종할 때에만 세계를 구원해야 할 한국인의 사명이 성취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183-4)


"제4대 민의원 총선거를 4개월 남겨둔 58년 1월 11일 조봉암, 박기출, 김달호, 윤길중 등 진보당의 주요 간부 10여 명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었다. 다음 날 (소위 '근로인민당 재건사건'의 핵심 인물로 지목되어 체포된) 박정호 사건을 담당하고 있던 부장검사 조인구는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박정호 등 10여 명에 대한 공소 내용을 설명했다. 조인구는 〈평화통일이란 구호는 남한의 적화통일을 위한 방편으로서 대한민국의 존립을 부인하는 것이다. '북진없는 정강정책을 갖는 정당을 조직하라'는 김일성의 지령 내용은 바로 진보당의 확대 공작에 귀착된다〉고 말했다. 조인구는 〈진보당이 박정호 사건에 관련되어 수사 대상에 오르는 것 아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문제는 진보당이 내건 평화통일의 진의가 무엇인가를 규명한 후 그것이 북괴의 지령과 동일할 때는 수사 대상이 될 것〉이라고 답했다." "정부는 재판도 열리기 전인 2월 25일 진보당의 등록을 취소시켰다."(190)


"자유당과 폭력조직의 유착은 진보당 사건에까지 영향을 미치려 들었다. 조봉암은 1958년 7월 2일 1심 재판에서 평화통일 주장이나 간첩혐의는 모두 무죄 판결을 받은 가운데 징역 5년을 언도받았다. 판결 뒤 이기붕 수하의 반공청년단 수백 명이 동원돼 법원청사에서 난동을 부렸다. 이들은 〈친공 판사 유병진을 타도하라!〉, 〈조봉암을 간첩혐의로 처벌하라!〉고 외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승만은 1심 판결이 내려지자 국무회의 석상에서 〈이러한 판사들을 처리하는 방법은 없는가〉라고 분노했다." "10월에 열린 2심 재판에서 검사 조인구는 조봉암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조인구는 훗날(1994년) 〈조봉암에게 사형을 구형한 것은 검찰총장·서울시경국장 등 나의 윗선에서 사형을 협의하여 지시한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이승만의 뜻과 그 뜻에 충실한 공포의 관제 시위에 '겁먹은' 고등법원은 조봉암에게 사형을 선고했다."(194-6)


"1958년 11월 18일, 자유당은 간첩 색출을 명분으로 하는 전문 3장 40조 부칙 2조로 구성된 신국가보안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 법안은 검찰 실무자인 오제도, 문인구, 조인구 등에 의해 마련된 것이었다. 이 법안은 강력한 언론제한 규정과 더불어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간첩행위를 극형에 처하게 하되 간첩활동의 방조행위에 대해 범죄구성의 요건을 명백히 하며, 간첩죄 피고인의 변호사 접견을 금지하고, 상고심 제도를 폐지한다는 3대 원칙의 정략이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이 법안에는 국가보안법 적용 대상을 확대하여 종래 북괴의 지령에 의해 운영되는 단체라고 규정된 적용 대상 외에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집단 또는 단체의 조직을 추가했다. 또한 이적행위의 개념을 확대시켜 종래 군사상의 비밀탐지에만 적용하던 간첩에 대한 개념을 적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국가의 이익과 관련된 모든 정보의 수집을 국가보안법 처벌 대상으로 규정했다.〉"(207-8)


# 12월 19일, 야당 의원 감금 후 날치기 통과


10장 파국을 향한 질주 / 1959년


"50년 3월 '귀속재산처리법' 시행령이 공포되면서 정부 소유의 귀속재산 불하작업이 시작되었지만, 이 작업이 본격화된 것은 전쟁이 끝난 54년 이후부터였으며 58년까지 거의 처분되었다. 귀속재산은 자본가에게 자본축적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권력과의 줄만 있으면 거저먹는 거나 다름없었다. 귀속재산은 10분의 1에 불과한 가격에 특혜 불하되었으며, 15년 이상 할부불의 지급조건으로 책정된 구입대금마저도 저리의 은행융자로 조달되었기 때문이다. 장하진에 따르면, 〈고정된 구입대금에 비해 15년 동안 물가 등귀에 따라 공장 가치는 약 260배나 상승하여 사실상 무상으로 공장을 취득한 결과가 되었다. 곧 이 시기에는 자산이 없이도 불하만으로 하나의 재벌이 창조되는 신화를 낳았다. 50년대의 89개 주요 대기업체 가운데 불하된 귀속기업체는 36개로 전체의 40.4%를 차지하였으며, 22개 거대 기업체 중에서는 그 비중이 더욱 높아 15개 업체(68%)나 되었다."(271-2)


"1957년 8월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된 은행 민영화는 은행을 중심으로 하는 재벌 구조를 형성케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유인학은 〈기업과 정부의 유착관계의 대표적인 사건은 4개 시중은행의 민영화와 관련되어 1954년부터 시작되어 1956년에 종결된 시중은행주 불하공매인 바, 불하공매 과정은 정치적 영향력의 대결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정치적 파워에 의해 좌우되었다〉고 말한다. 〈삼성그룹을 비롯한 당시 대표적 재벌들은 시중은행 불하공매에 참여하여 시중은행의 소유권을 취득하면서 재벌의 기본적인 형상을 이루게 되었다. 삼성그룹은 흥업은행(한일은행) 지분의 83%, 조흥은행 지분의 55%를 취득하면서 4개 시중은행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여 한국 최초로 완전한 재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삼성그룹 이외에 삼호그룹이 저축은행(제일은행), 대한제분이 상업은행, 개풍그룹이 서울은행을 소유하게 되어 산업자본이 금융자본을 지배하는 형상을 갖추게 되었다.〉"(275)


"대중의 침묵에 대해 이승만 정권의 억압과 공포 분위기 조성에만 그 책임을 돌릴 순 없을 것이다. 우선 민주당이 문제였다. 민주당은 미 대사관 못지않게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잘되었다는 반응이었다. 58년 2월 이승만 정권이 사실과 거리가 먼 이유로 재판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진보당 등록 취소를 공포했을 때에도 역시 민주당은 정략적인 주판알을 튕기면서 긍정적인 표정이었다. 언론, 특히 야당지들은 어떠했던가? 이들 역시 민주당과 크게 다르지 않은 집단이었다. 이승만의 '반공 히스테리'를 이들도 공유하고 있었다. 자유당 정권은 조봉암 사형에 아무런 사회적 저항이 없는 것에 대해 득의양양해 하면서 이제 본격적으로 '3·15 부정선거'를 위한 준비 작업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자유당 정권은 59년 11월부터는 각 시도 경찰국장, 사찰과장, 경찰서장, 도지사, 시장, 군수, 구청장 등에게 사전 사표를 받아 놓고 사전 선거운동을 강요하였다."(262)


"내무부장관 최인규가 이미 59년 11월에 세운 부정투표 계획에는 '4할 사전투표'와 '공개투표' 전략이 들어 있었다. '4할 사전투표'란 자연 기권자, 무효표, 번호표를 교부하지 않는 등의 방법으로 생길 조작 기권자, 유령 기권자, 매수 기권자, 전출자, 노쇠자 등을 전 유권자의 4할로 책정하고, 이 4할의 투표자를 자유당 후보 지지표로 만들어 투표 전에 미리 무더기로 집어넣는다는 계획이었다. 또 '공개투표'란 유권자를 3인조·9인조로 편성해서 자유당 당원, 경찰관, 공무원 또는 그 가족, 매수자가 조장이 되어 공개투표로 여당 후보를 찍게끔 하는 계획이었다. 여당계 유권자들에게 자유당 완장을 착용시켜 투표장 주위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유권자들에게 심리적 압박감을 주며, 민주당 참관인을 매수하거나 불가능할 때는 시비를 걸어서 함께 퇴장하도록 소동을 일으키라는 구체적인 행동요령까지 들어 있었다."(301-2)


"3·15 선거는 '불법·무효'라기보다는 그냥 '장난'이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그런 선거였다." "일부 지역에서는 이승만과 이기붕이 얻은 표가 총 유권자수를 초과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군대의 개표 결과는 유권자 수의 120%가 이승만에게 표를 던진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또 한번의 장난질이 시작되었다. 이승만의 득표율은 80%, 이기붕의 득표율은 70에서 75% 정도로 하향 조정하라는 경찰 지령이 전국 개표소로 하달되었다." "마산 경찰당국은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마산 시위를 〈공산당 지하조직의 폭동〉으로 조작했다. 경찰은 주모자로 구속한 26명을 공산당으로 몰아 혹독한 고문을 가했고, 정남규를 남조선 노동당원으로 둔갑시키고 각종 증거물을 조작해 제시했다. 마산경찰서 형사주임 노장광은 시위대 시체가 안치된 도립병원 시체실에 들어가 자신이 〈인민공화국 만세〉라고 쓴 전단을 숨진 학생들의 호주머니에 집어넣기까지 했다."(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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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4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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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의 사망으로) 정전회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군사분계선 문제는 이미 52년 1월 27일에 타결되었으며, 52년 5월에 이르러선 포로교환 문제를 제외하곤 거의 모든 의제에 합의한 상태였다. 3월 19일 소련 내각은 한국전쟁을 정치적으로 마감한다는 결정을 중국과 북한에 통보하면서 부상 포로의 우선 교환에 동의하도록 지시(또는 요청)했다. 미국은 이미 53년 2월 22일에 〈우선 부상 포로부터 교환하자〉는 제의를 한 바 있었는데, 이를 소련측이 수용키로 한 것이다. 스탈린의 장례식에 참가하고 돌아온 중국의 주은래는 3월 30일 미국의 제안을 수용한다고 발표했다." "(일반 포로 교환 문제는) 주은래가 송환을 바라는 포로는 즉각 송환하고, 송환을 바라지 않는 포로는 일단 중립국인 인도 쪽에 넘쳐 처리하도록 하자는 타협안을 내놓았는데, 이를 미국이 받아들였다. 그래서 6월 8일에는 '포로교환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20-1)


"이승만이 헌병 총사령관 원용덕에게 은밀히 지시한 명령은 반공 포로를 석방하라는 것이었다. 원용덕은 헌병들을 각 수용소로 나누어 파견했다. 이들은 미군 보초를 영창에 가두어 버리고 반공 포로 석방에 들어갔는데, 바로 6월 18일 새벽 5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포로교환 심사 과정에서 북한으로의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 포로들을 일방적으로 석방해버린 것이다." "(세계를 경악으로 몰아넣은) 이승만의 반공 포로 석방은 북한과 중국의 휴전회담 거부를 유도하여 휴전협정 체결을 지연 또는 파탄시키려는 계산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포로 석방이 휴전을 막을 순 없었다. 공산군측은 정말 휴전을 절실히 원했던 것이다." "바로 그 시간 38선 근처에서 치열한 '땅따먹기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정전협정 체결이 다소 지연될 수는 있을 망정 움직일 수 없는 대세라는 것이 확실해진 이상 땅을 조금이라도 더 빼앗겠다는 싸움이었다."(34-7)


# 7월 12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합의, 54년 11월 17일 정식 발효


"경제 제일주의와 더불어 일본 사회의 우경화도 한국전쟁의 영향이었다. 반공 전쟁을 틈타 전범들이 대거 사회에 복귀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들의 영향력 강화는 결국 55년 자유민주당 결성으로 나타났으며, 이 보수 우익 정당은 향후 끝이 없는 장기집권을 하게 된다." "미국이 패전국 일본에게 매우 관대한 평화조약 및 안보조약의 체결을 서두른 것도 한국전쟁의 산물이었다. 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체결된 대일 강화조약 및 태평양 안보조약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은 52년 4월 28일 공식적인 주권 독립국으로 새롭게 출발하였으며, 56년 12월 18일에 유엔에 가입하게 된다." "한국을 전승국에서 제외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재일교포 문제 등에 대한 보상 처리를 하지 않아도 되는 성과와 더불어 영토 문제에서도 큰 이익을 안겨 주었다. 일본은 이 틈을 이용해, 독도까지 넘보았다."(54-5)


"반공은 곧 친미(親美)를 의미하고 친미(親美)는 곧 친기독교(親基督敎)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미국이 주도하는 한국전쟁에선 더욱 그랬다." "기복(祈福) 신앙은 전후의 잿더미와 비교돼 엄청난 풍요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는 미국을 닮고 자본주의 정신에 투철해지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미국에 대한 동경과 숭배, 물질에 대한 한(恨)의 종교적 표현이 바로 기복 신앙이었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기복 신앙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성격마저 갖게 되었다.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특별한 한국의 기복신앙은 마찬가지로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특별했던 한국의 역사적 상황이 낳은 산물이었다." "현실이 각박한 만큼 복을 구하는 신앙의 발현도 전투적이었다. 김흥수는 1951년 부산에서만 100여 개의 교회가 신축되었으며 그밖에도 교인들은 천막이나 창고 건물, 심지어는 언덕 풀밭 위에서 모이고 있었다고 말한다."(120-1)


"전쟁이 제공한 계급상승 혹은 사회이동의 기회 개방은 도덕 없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낳았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남한 사회의 자본주의 발전을 가져오는 이른바 '전쟁의 역설'로 나타났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혼자 하는 것보다는 잇속으로 결속된 파벌을 만들 때에 더욱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레고리 헨더슨은 한국전쟁이 파벌 조직을 크게 키우는 동시에 악화시켰다며 이렇게 말한다. 〈파벌 사회에서는 주로 충성스런 부하를 돌보아주는 능력에 가치를 둔다.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자파 사람들을 더 많이 돌볼 수 있다. ····· 파벌주의는 전쟁과 부패로 더욱 만연했다. 전쟁은 경험이 부족한 장교들의 오류를 확대시켰으며 이를 호도하기 위한 파벌 보스의 보호막이 끊임없이 필요해 부패가 더욱 확산됐다. 죄상이 중하면 중할수록 일단 보호를 받게 되면 충성의 요구가 더 커졌다. 죄를 저지른 자는 파벌의 주요 모집 대상이다.〉"(129-30)


5장 자유당 독재체제의 구축 / 1954년


"이승만은 1954년 5월 20일로 예정된 제3대 총선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그는 52년 발췌개헌 때 2차에 한해서 중임할 수 있다는 조항을 삭제하고 싶었지만 당시 여건이나 분위기가 그것까진 못한 터라 그 일을 해내야만 할 3대 국회에 큰 기대를 걸었기 때문이다. 5·20 총선에선 최초로 정당이 각 선거구마다 1인의 후보를 공천하는 공천제를 실시하였는데, 이승만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하였다. 4월 6일 이승만은 〈개헌 조건부로 입후보케 하라〉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그래서 자유당에선 개헌 지지는 공천의 전제 조건이 되었다." "경찰은 마을 반장회의 등을 열어 야당은 반정부당으로 공산당보다 더 나쁘며, 공산당보다 더 나쁜 야당 후보에게 투표하면 너희 마을은 공산당 소굴로 본다, 너희 마을 표가 120인데 야당 표가 한 표 나오면 너희 부락에 공산당이 하나 있고, 열이 나오면 열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식의 협박을 일삼았다."(188-9)


# 11월 27일 국회 본회의 표결 '사사오입' 통과


"5·20 총선의 최연소 당선자는 경남 거제군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출마한 26세 청년 김영삼이었다. 중학생 때부터 대통령 꿈을 키워온 김영삼 학생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건 웅변 연습이었다." "김영삼이 정부수립 기념 웅변대회에서 받은 2등상은 외무부장관상이었는데, 당시 장관은 장택상이었다. 그 인연으로 김영삼은 서울대 3학년 재학 중이던 50년 4월 초순에 장택상의 요청을 받아 장택상의 지역구인 경북 칠곡에서 웅변으로 장택상 선거운동을 도와 주었다. 또 이게 인연이 돼 김영삼은 얼마 후 장택상의 비서로 일하게 되었다. 52년 5월 24일 이승만이 총리를 장면에서 장택상으로 바꿨을 때 장택상은 자신이 이끌고 있던 신라회 회원 21명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지지하는 쪽으로 돌려놓은 바 있었다. 신라회는 영남 및 대한청년단 출신들로 구성돼 있었는데, 이 신라회의 운영을 도맡다시피 한 사람이 바로 장택상의 비서인 김영삼이었다."(192-3)


# 김대중은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


"(원조 요청차 미국 방문길에 오른) 이승만은 7월 28일 미국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사실상 제3차 세계대전을 촉구하는 초강경 연설을 하였다." "(중국과의 즉시 결전을 요구하는 주장에서) 이승만이 역점을 두고자 했던 것은 〈미국의 보병은 단 1명도 필요치 아니하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한국을 이용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이는 이미 수개월 전부터 이승만이 역설해온 것이었다. 이승만은 54년 5월 8일 『뉴욕타임스』 기고를 통해 한국이 인도차이나에 2개 사단을 파견할 뜻이 있다는 제안을 했었다는 걸 상기시키면서 그 제안은 제스처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방미는 '불행한 방문'이 되고 말았다. 이승만의 귀국 직후 미국은 이승만의 호전성에 불안감을 느껴 주한미군을 2개 사단만 남겨놓고 나머지 4개 사단을 수개월 내에 철수시키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회는 8월 18일 야간에 국회를 소집하여 유엔군 일부 철수에 대한 반대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197-9)


6장 '우상 정치'와 '동원 정치' / 1955년


"수난의 역사를 겪은 한국 민중은 강력한 지도자를 열망해 왔다. 이승만은 그런 요청에 부응했고 그런 토양을 최대한 이용했지만, 그건 최악의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승만에 대한 충성이 사적 이익 추구의 수단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곡필(曲筆) 연구 전문가인 김삼웅은 자유당 시절 3월 26일은 '어용곡필배들의 잔칫날'이었다고 말한다. 그 날이 이승만의 생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49년부터 시작된 '이승만 우상화'는 50년대 내내 조선조의 왕도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극을 치달았다. 이승만의 귀환일과 생일은 국경일처럼 경축되었다. 학교마다 이승만의 초상화가 내걸리고, 이승만의 생일에는 집집마다 태극기를 달아야 했다. 지폐엔 이승만의 초상화가 인쇄되고 이승만 동상까지 세워졌다. 55년 3월 26일 이승만의 80회 생일 기념식은 '80'이라는 십진법의 원리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승만 우상화의 정점을 보여 주었다."(240)


# 〈이렇게 위대한 리 대통령을 영도자로 모신 우리 민족의 영광이야말로 그 어느 민족에 비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오직 대통령의 영도에 따름으로써 행운의 열쇠를 간직할 수 있다. 그리하여 리 대통령이 오래 생존해 계시면 그만큼 민족의 활로는 열리게 된다. 우리 민족만의 행복이 아니라 실로 전 자유세계의 광명이다〉 - 『서울신문』 칼럼 〈인심천심〉


"이승만은 수많은 관변단체들의 총재이기도 했다. 이 단체들은 모두 이승만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는 걸 공식적으로 선서하였다. 이승만을 위한 것이라면 테러도 정당화되었다. 애국심은 초법적인 것이었다." "정당도 이승만 임금을 모시는 '내시 정당'이었다. 이기붕은 56년 5·15 정부통령 선거 때 자유당의 위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 자유당으로서는 '제도보다 인물'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 우리는 이승만 박사의 정치이념과 그분의 통일 방략을 절대 지지하는 인사들에 의하여 조직된 이 박사님을 지지하는 정치단체가 자유당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정당보다는 관료조직을 더 좋아했다. 그는 정권 경쟁을 해야 하는 정당체계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경찰과 행정조직을, 그것도 측근을 통해 맹목적 충성을 유도하는 형태로 모든 걸 해결하고자 했다." "이승만의 인사 정책에서는 '충성' 하나면 족했다."(245-6)


"(인도에서 반둥회의가 개최된) 1955년경 제3세계의 화두는 '평화공존'이었지만, 이승만 정권은 그걸 '친공(親共)'으로 간주하고 배격하였다. 이승만은 이미 54년에 〈미국이 공존주의를 주장하게 될 지라도 우리로서는 자유독립의 권리를 위하여 싸워 죽기로 결심한 것이니 모든 친일친공 분자들은 극히 조심해서 외국인과 연락하여 시국을 혼란케 만든다는 것을 생각도 말아야 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었다. 이승만은 이러한 '공존주의' 사상을 〈반정부 분자들의 파괴모략에서 나오는 것일 뿐이니 이런 분자들을 먼저 제지하여야 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신경질적인 반응과는 달리, 반둥회의에서 제기된 '반식민주의'와 '비동맹주의'는 당시 국내의 지식인과 문인들에게도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나세르는 52년 육군 중령으로 쿠데타를 주도해 정권을 잡았는데, 훗날 한국에서 5·16쿠데타에 대한 초기의 호의적 반응은 나세르의 활약이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것이 힘입은 바 컸다."(251-3)


"1955년은, 반일운동과 반공운동이 결합해 이승만식 '동원 정치'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 해였다." "45년 9월 동경의 맥아더 사령부는 일본 열도 주변에 선을 그어 일본 어선의 조업을 제한하였다. 이는 맥아더 라인으로 불렸다. 미국은 49년까지 맥아더 라인을 세 번에 걸쳐 확장해주었지만 일본 어선은 50년부터 맥아더 라인을 침입해 한국 근해에서 마구잡이 조업을 해왔다." "이승만은 (52년 4월로 예정된) 맥아더 라인 철폐에 대비하여 한국의 어업 자원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접 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을 구상하게 되었다. 51년 9월 7일 국무회의를 통과하여 52년 1월 18일에 공포된 이 선언은 연안으로부터 평균 60마일을 한국의 해양 주권 영역으로 간주하였다. 이 선이 바로 '평화선'이다." "52년 9월 이승만이 해군에게 평화선을 침범하는 일본 어선은 나포하고 필요할 경우에는 발포하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한국과 일본 사이의 갈등은 뜨겁게 달아올랐다."(261-4)


"1955년 여름은 민국당의 발전적 해체와 더불어 범 야권 통합신당 창당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9월 19일에는 민주당이 창당되었다. 이승만은 55년 10월 8일 유엔이 북괴군을 무장해제하고 북한에서 자유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놀라운 주장을 하더니, 11월에는 일본이 이북 공산당과 합해서 남으로 내려올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더욱 놀라운 주장마저 하였다. 근거는 없었다. 이승만에게 중요한 건 이렇게 위기 분위기를 고조시키면서 국민을 시위에 동원하는 것이었다." "손호철은 이승만 정권의 반일주의에는 체제정당화와 대중동원을 위한 목적 이외에도 정치적 반대 세력을 무력화시키려는 당략적 목적도 내포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당시 가장 강력한 정치적 반대 세력이었던 민주당, 특히 민주당 구파는 한민당에 뿌리를 둔 친일 지주들이 실세를 구성하고 있었다는 점과 관련, 이 정권의 반일주의는 이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269-70)


"원내 15석의 군소정당으로 전락한 민국당의 발전적 해체를 통한 범야권 통합의 첫 번째 움직임은 54년에서 55년에 이르는 시기에 민국당 중심의 '호헌동지회'가 결성되고, 55년 초에 신당촉진위원회가 구성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당 창당에 있어서 가장 큰 쟁점은 조봉암 세력의 참여 문제였다." "민국당의 대주주였던 김성수는 병석에 누운 몸으로 민주대동의 입장에서 조봉암과 합작할 것을 보수파에 종용하였다. 보수파들이 김성수의 권유에 마지못해 조봉암이 반공노선을 지지하겠다는 것을 공적으로 약속할 것을 조건으로 제시하자, 김성수는 조봉암에게 명확히 태도를 밝힐 것을 권고했다." "이에 조봉암은 〈지팡이를 짚고서라도 신당운동에 따르겠다〉고 했지만 보수파들은 계속 색깔 공세를 취했다. 신도성을 비롯하여 김성수의 유언을 들은 사람들이 보수파 간부들의 모임에서 김성수의 뜻에 따르자고 역설하였지만 조병옥과 장면 등이 강력히 반대하였다."(297-9)


# 신당 참여가 배제된 조봉암 세력은 진보당 창당으로 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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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3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머리말 6·25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1장 골육상쟁(骨肉相爭)의 근본주의 /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자체가 바로 이승만 대통령의 '공갈 정책'이 실패한 결과라고 할 정도로 그의 '무력통일 공갈'은 매우 중요하고 심각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가 무력으로 통일하겠다고 허세를 부림으로써 국내외에서는 그의 실력과 의도에 관해 많은 오해를 하게 되었다. 국내외의 많은 사람들은 이승만과 그의 정권이 북한에 비해 우월한 힘을 갖고 있거나 적어도 자위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이들은 이 박사에게 더욱 무기를 주려고 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한국이 북한에 비해 군사력에 있어 열세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무기만 주면 이 대통령과 그의 군대가 38선을 넘어 북진할 것이라는 점을 두려워해 그에게 무기를 공급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그의 공갈 정책의 결과는 이승만의 위협이 실현되어 한국군이 북진할 경우에 대비해서 김일성과 그의 북한 공산정권이 더욱 군비확장에 박차를 가했을 것이라는 점이다."(31-2)


박명림은 7월 1일 새벽의 대전 탈출은 어떤 명분으로도 설명되기 어려운 '도망'이었다고 말한다. "6월 25일 전쟁 시작 이후, 특히 6월 27일 서울 탈출 이후 7월 9일 대구로 이동하기까지 서울-대구-대전-수원-대전, 그리고 다시 대전-이리-목포-부산-대구에 이르는 15일 동안의 이승만의 행적은 한마디로 의문투성이였다. 단순한 우왕좌왕이라고 부르기에는 국가원수로서 너무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누란의 위기에서 이승만은 두 번의 통치 공백, 사실상의 통수권 유고사태를 빚었던 것이다. 처음엔 대구로 혼자 도망하였다가 대전에 도착할 때까지 열차 내에서 머문 12시간 30분이었고, 두 번째는 훨씬 더 길어서 대전-부산 간 이동에 소요된 32시간이었다. 이 시간 동안 그는 아무런 군대통수 기능을 행사할 수 없었고, 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의 입만을 바라보던 각료들이 황망히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 동안 정부로서 아무런 정상적 기능도 수행하지 못하였다."(66-7)


"(민간인 대량학살을 일컫는) '뿌리뽑고 씨 말리기' 원칙은 열 명 가운데 하나를 잡기 위해선 열을 다 죽여도 좋다는 발상에 근거한 것이었다."(89-90) "6·25전쟁 중 저질러진 '뿌리뽑고 씨 말리기' 가운데 그 정신을 가장 철저하게 실천한 학살극은 이른바 '나주 부대'의 학살 사건일 것이다." "나주 부대란 인민군이 공격해오자 나주경찰서 경찰관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100여 명 규모의 임시부대였다. 이들은 전남 강진·해남·완도·진도 등지로 후퇴하면서 이상한 짓을 저질렀다. 나주 부대는 7월 하순께 전남 해남군 남창에서 완도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완도중학교 교사가 전화를 받자, 〈우리는 인민군이다. 완도로 간다〉고 밝혔다. 이에 완도에서는 '인민군환영준비위원회'가 구성돼 시가지 환영대회까지 준비했다. 나주 부대는 인민군으로 위장해 그 환영대회에 참석한 후 그 자리에서 '인민군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을 사살했다."(92)


"학살은 악순환의 게임이었다. 네가 죽였으니 나도 죽여야겠다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복수의 질과 양이 똑같이 이루어질 리는 만무했으니 증폭은 필연적이었다." "경기도 고양 금정굴 민간인 학살 사건도 바로 그런 악순환 때문에 빚어진 참사였다. 그 지역에서 좌익세력이 우익단체 단원 50여 명을 처형했다. 9·28 수복 직후 국군과 치안대에 의해 보복이 이루어졌는데, 이때의 희생자가 1천여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피를 본 사람들이 더욱더 피에 굶주리게 되는 악순환 속에서 '범주의 폭력'은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좌익세력이 비교적 왕성해 일단 '빨갱이 마을'로 낙인찍히면 그 마을 사람들 모두는 그 운명을 감수해야 했다. 우익일지라도 자신의 마을이 '빨갱이 마을'로 소문난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다." "부역 혐의자에 대한 보복에는 '병균의 논리'가 적용되었다. 이 논리는 학살의 현장에서 급조된 게 아니라 당시 한반도를 지배하던 '게임의 법칙'이었다."(132-4)


2장 '톱질전쟁'의 와중에서 / 1951년


"한반도 땅덩이가 좁은 탓이었겠지만, 6·25전쟁은 전형적인 '톱질전쟁'이었다. 톱질을 하듯이 왔다갔다하면서 점령과 후퇴를 반복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더 비극적이었다. 전선이 왔다갔다하면서 죽어나는 건 민간인들이었다. 누구를 지지하는가? 이들에게는 이런 고문이 강요되었고, 그 와중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게다가 톱질전쟁은 전선이 따로 없는 전 국토의 전선화를 초래하면서 빨치산 투쟁을 낳았고, 이는 민중들 사이에 원한관계를 만들어 그 원한이 민간인들 상호간에 학살을 일으키기도 했다. 1951년 1월 1일 중국군 6개 군단이 38도선을 돌파하여 남하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12월 24일 서울시민들에게 대피령을 내렸지만, '빽'과 줄이 있는 사람들은 얻어들은 게 있어 이미 12월 초부터 피난길에 나섰다." "지난 여름 서울 잔류로 수복 후 호되게 당했기 때문에 너나할 것 없이 피난길에 올라 중국군이 입성하기 하루 전인 1월 3일 서울은 '무인지경'이었다."(183-4)


"50년 12월 21일 '국민방위군 설치법'이 공포돼 소집된 국민방위군 중 서울에 모여든 방위군 숫자만 50만 명에 이르렀다. 여기서부터 세계 역사상 그 유례가 없을 기막힌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 50만 명을 어떻게 후송할 것인가? 놀랍게도 이들은 걸어서 혹한의 천릿길을 돌파해야 했다. 제대로 된 숙식도 제공되지 않았다. 징집된 사람들은 군복을 줄 줄 알고 홑바지와 저고리 차림으로 나섰는데, 아무것도 주질 않았으니 얼어 죽으라는 소리나 다를 바 없었다. 잠잘 때는 2명당 가마니 1장이 전부였다. 행군이 계속되면서 동사·아사·병사·낙오자들이 속출하는데도 아무런 대책이 마련되지 않았다. 이들을 가리켜 나온 '죽음의 행렬' 또는 '해골의 행렬'이란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이들 중 일부는 경상남도와 북도의 교육대에 수용되었고, 일부는 제주도로 옮겨졌지만, 수용되지 못한 장정들은 노상의 거지 신세가 돼 해골 모습을 해가면서 계속 죽어 나갔다."(200-2)


"함평에서 민간인 524명을 학살하고 가옥 1천454동을 불태웠던 11사단 예하 부대의 이른바 '견벽청야' 학살극은 51년 2월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서 또다시 발생했다. 11사단 9연대 제3대대는 719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는데, 죽은 사람 가운데 14세 이하가 전체 사망자의 절반인 359명이었으며, 60세 이상의 노인이 전체 사망자의 10%, 그리고 나머지 40%의 사망자 중에서도 3분의 2는 부녀자들이었다." "'톱질전쟁'이라고 하는 전쟁의 구조상 전선이 따로 없는 가운데 빨치산 출몰 지역은 낮에는 국군, 밤에는 빨치산의 지배하에 놓이기 마련이었다. 그런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선 낮에는 국군에 협조하고 밤에는 빨치산에 협조하는 '이중 생활'을 하는 건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빨치산 토벌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빨치산에 협조하는 자들은 씨를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212-3)


"리지웨이는 휴전회담이 시작된 7월 10일 미 합동참모본부로부터 〈북한과 중국 공산군에게 최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안겨 줌으로써〉 협상이 타결될 수 있도록 군사적으로 압박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2년 후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국무장관이 되는 존 포스터 덜레스에 따르면 〈중국군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명백한 우위를 (모든 아시아 국가들 앞에) 보여주지 못한다면 한국의 협상에서 얻어낼 것이 그다지 많지 않으리라 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후 8개월 동안 미 공군은 적의 통신망과 보급로 타격을 이유로 철도, 차량, 도로, 교량 파괴는 물론 마차나 손수레, 창고로 이용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모든 주택과 방공호에 네이팜탄과 소이탄, 세열탄 등을 퍼부었다." "미국은 51년 8월 내부적으로 미군이 군사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경우 원자폭탄을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10월에 '허드슨 하버'라는 암호명 아래 몇 차례 원자탄 투하 연습까지 실시하였다."(243-4)


"휴전회담이 진행되던 그 시기에 미군은 북한을 폭격하기에 바빴고, 남한 산악 지대를 파고든 북한군 잔류 세력은 빨치산 투쟁을 하기에 바빴다. 그래서 빨치산 세력이 가장 왕성한 지리산 일대는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으로 뒤바뀌곤 하였다. 빨치산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휴전회담의 한국측 대표였던 백선엽은 51년 11월 16일 토벌군사령관으로 차출되었다. 최전선의 2개 사단도 토벌군으로 차출되었다. 이는 이승만이 8군사령관 벤플리트에게 간곡히 요청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미군은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 60여 명의 미군 고문단을 파견하였다. 선전전도 미군이 주도했다. 미군은 남원에 방송 시설을 갖추고 투항 권유 방송을 송출했으며, 투항 권유 전단을 동경에서 인쇄해 공수해 왔다. 전단은 〈그 넓은 지리산이 하얗게 덮일 정도로 대량으로 공중 살포했다〉 살포된 전단은 모두 992만 장이었다."(248-9)


3장 '군사 전쟁'과 '정치 전쟁' / 1952년


"1952년 들어서도 휴전회담을 둘러싼 논란은 계속되었다. 흥미로운 건 북한의 지도부에서는 이런 논란이 있었던 반면 남한에선 오직 한 목소리뿐이었으며 휴전을 찬성했다간 '빨갱이'로 몰리기 십상이었다는 점이다." "이승만은 52년 3월 분단 상태에서의 휴전은 한국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없다는 진단을 내리면서 〈민족국가로 생존을 위하여 단독으로라도 계속하여 싸워나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런 주장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휴전 불가'를 협상 카드로 이용하였다. 트루먼은 3월 4일 이승만에게 서신을 보내 한국 정부가 계속 유엔군사령부와 협력하겠다고 약속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3월 21일 답신에서 그런 약속에 대한 대가로 한미간의 상호방위조약 체결과 한국 병력의 증강을 요구하였다. 52년 4월에는 '통일없는 휴전 반대 국민총궐기대회'가 열렸으며, 이런 종류의 데모는 휴전협정이 맺어지는 그 날까지 계속될 이승만의 협상 카드가 되었다."(277-9)


"1952년 내내 남한은 '군사 전쟁'과 동시에 '정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이승만 정부는 51년 11월 30일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공고 기간을 마치고 52년 1월 28일 표결에 들어갔는데, 재석의원 163명 가운데 가결이 19표, 부결이 143표, 기권이 1표 나왔다. 이에 이승만은 〈국회의원이 잘못하면 국민의 투표로써 소환한다〉는 협박 성명을 냈다. 그 성명의 정신을 이어받은 '원외 자유당'은 18개 사회단체들을 규합해 개헌안 부결 반대 민중대회를 개최하는 한편, 〈민의를 배반한 국회의원들을 소환하라〉는 소위 국회의원 소환운동을 전개했다. 52년 1월 말부터 부산에는 백골단, 땃벌떼, 민족자결단 등 각종 단체들 명의로 된 〈살인 국회를 해산하라〉는 구호 및 각종 전단이 넘쳐 흐르는 등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국회는 52년 4월 17일 개헌선을 한 명 초과하는 123명의 연서로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280-2)


"6월 21일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한 개헌안이 국회에 상정되자 내각제 추진 의원들은 국회 출석을 거부하고 잠적하였다. 정족수 미달로 개헌안 심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7월 1일부터 국회 임시회의를 개최하기 위한 의원들의 강제 연행이 시작되었다. 개헌안의 의결 정족수는 123명이었는데 도무지 의원들을 모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먼저 붙잡혀 온 의원들은 임시의사당에 연금되어 정족수가 찰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 일을 위해 국제공산당 혐의로 체포된 10명의 의원들까지 석방 및 동원당했다. 7월 4일 185명 가운데 166명이 출석하여 정족수에 이르렀다. 그 날 밤 9시 30분 경찰과 관제 시위대가 국회의사당을 완전 포위한 가운데 발췌개헌안 안건에 대한 표결에 들어갔다. 표결 방법은 기립 표결이었다. 개헌은 출석의원 166명 가운데 163명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3명은 기권이었으며, 반대는 단 한 명도 없었다."(289-91)


# 8월 16일 이승만 2대 대통령 취임(부통령 함태영)


"51년 7월부터 시작된 휴전회담에서 포로의 '자동송환'이냐 '자유송환'이냐를 놓고 북한과 미군은 지루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미군측은 포로들의 의사를 먼저 묻고 원하는 대로 보내주자는 '자유송환'(또는 자원송환)을 주장했고, 북한측은 포로들을 의무적으로 돌려 보내야 한다는 '자동송환'을 주장했다." "한홍구는 미국이 자원송환을 고집한 까닭은 표면적으로는 인도주의적 원칙에 따라 본인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군사적 승리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도덕적으로나마 결정적 승리를 바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박명림도 미군측이 자유송환 원칙을 고수한 본질적인 이유는 공산 포로들이 모국 송환을 거부할 때 또 그렇게 함으로써 얻는 반사적 이익, 즉 체제간 대결에서의 심리적·도덕적·선전적 승리를 집요하게 추구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52년 5월 휴전회담은 딱 하나만 빼고 거의 모든 의제에 합의했는데, 바로 그 마지막 하나가 포로교환 문제였다."(304-5)


"미국은 52년 11월로 예정된 미 대통령 선거 전에 협상에서 개가를 올리기 위해 북한을 압박하는 강경 대응책을 썼다. 그건 바로 대대적인 북한 폭격이었다. 6월 23일 미군은 500대 이상의 폭격기를 동원해 압록강에 위치한 수풍댐과 10개의 수력발전소를 폭파하였다." "북한 지도부의 조기 정전 희망은 수풍발전소가 폭격당한 이후 더욱 강렬해졌다. 8월 20일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중국 외상 주은래는 〈수풍발전소가 폭격당한 이후 북한 주민들이 심하게 동요하고 있으며 심지어 일부 북한 지도부까지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졌다〉며 〈이에 부담을 느낀 북한 동지들이 정전협상에 집착하게 됐다〉고 밝혔다. 미군의 폭격은 7~8월 '압력펌프작전'이라는 암호명으로 더욱 강화되어 평양을 비롯한 북한의 78개 도시와 마을을 집중 폭격하는 초토화 작전을 전개했다. 10월로 접어들자 폭격 목표물로 삼을 만한 도시와 산업시설들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정도였다."(3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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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인간 - 군국주의 일본의 정신분석
노다 마사아키 지음, 서혜영 옮김 / 길(도서출판) / 200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 패전 이후 일본인들의 반응

1. 무벌화(無罰化) : 전쟁 가담자에게도 피해자에게도 전쟁은 비참한 것이므로 모두를 벌하지 않고 함께 평화를 제창하자는 평화운동으로 치환

2. 물질주의로 '바꿔치기' : 경제 부흥으로 미국의 경제력을 따라잡으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자세로, 부국강병의 군국주의 이데올로기를 경제성장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 치환


"나는 지금까지 전범으로 중국의 수용소에 잡혀 들어간 많은 일본군들을 만나왔는데, 그들에게 공통된 점은, 〈나는 중국인을 학살했다. 그러므로 사정이 어찌됐건 그들도 나를 죽일지 모른다〉고 하는 두려움이 없었다는 점이다. 윤리적인 죄의식이 없는데다, 중국쪽에 기대려는 어리광 심리마저 있었다. 죄라고 자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죄라고는 느끼지 않는다 하더라도, 많은 중국인을 학살했으니까 자신도 죽임을 당할 거라고 생각할 법도 한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여기에는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집단에 준거해서 사는 인간의 정신적 강인함이 잘 나타나고 있다. 자아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은 집단으로 있는 한 불안하지 않다. 집단이 혼란상태에 빠질 경우 자신도 혼란에 빠지지만, 그것은 일과성일 뿐이다. 집단은 끊임없이 개개인이 한 행위에 대한 책임을 모호하게 흐리고, 모든 행위에 동의하는 장치로서 기능하고 있다."(42-3)


"유아사 씨 등이 중국 대륙에서 생체해부에 대한 죄목을 추궁 받던 시기에, 생체해부 및 인체실험의 추진자였던 기타노 세이지, 후타키 히데오 등 전 731부대(관동군 방역급수부)의 중추와 나이토 류이치 전 육군 군의학교 방역연구실 교관은 1951년 '일본 블러드뱅크'를 만들었다. 그들은 전쟁 중에 실시한 인체실험으로 터득한 혈액의 동결 건조 기술을 사용하여, 산야, 가마가자키, 고토부키쵸와 같은 싸구려 여인숙 거리에서 혈액을 싸게 사들여 만든 건조혈액을 미군에 팔아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한국전쟁 특수는 전쟁범죄 의학자들을 윤택하게 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1964년 '미도리십자'로 발전한 이 회사는 미국의 매혈을 다량 수입하여, 후생성과 한몸이 되어 일본을 혈액제제의 소비대국으로 만들어갔다. 한편 후생성의 중심 연구소인 국립예방위생연구소의 역대 소장과 각 연구부문의 책임을 맡고 있는 부장의 대부분은 전 육군 방역급수부나 군의학교의 의사였다."(54-5)


"오가와 씨는 의료 전도의 뜻을 버리지 않고 펑티엔으로 돌아와 만주의과대학에 재입학했다. 이 의학생 시절, 기타노 교수로부터 〈현지 원숭이를 사용한 발진티푸스 예방 왁진 개발 실험〉 강의를 받았다. 기타노는 731부대에서 부대장 이시이 시로 다음 가는 자리에 있으면서 당시 군의 대좌였으나, 칙명에 의해 만주의대 미생물학교 교수가 되었다. 후에 기타노는 731부대장(소장)이 된다. 기타노 교수는 온화한 얼굴로 칠판에 그림을 그리며 〈장기의 병변이 이와 같이 나타나고, 체온이 이와 같이 내려가 죽었다〉고 설명했다. 오가와 씨는 〈만주에 현지 원숭이가 있었나?〉하고 의아해했으나, 그것이 중국인이나 러시아인을 사용한 인체실험이었고, 실시된 장소가 의대 미생물학과 교실과 해부실이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82) 기타노 세이지는 39년 2월, 13명의 중국인을 발진티푸스에 감염시킨 뒤 그들을 생체해부해 얻은 지식을 토대로 발진티푸스 예방 왁진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오가와 씨는 강한 척하는 인간의 어쩔 도리 없는 나약함을 줄곧 보아왔다. 만주사변 직후 펑티엔에서 경비를 서던 학생들의 공포심과, 공포를 견디다 못한 살인.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의 초년병 교육 시절, 인격이 퇴행하여 죽음에 빨려들어가는 병사들의 모습. 스지아주앙과 베이징 제1육군병원에서 전쟁 영양실조증으로 말라비틀어지고 왜소하게 오그라들어 죽어가는 병사들. 혹은 자살하는 병사. 그들은 약탈전쟁에 적응할 수 없음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도망죄로 총살당하기 직전의 병사들. 오가와 씨에게는 〈인간을 여기까지 몰아넣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이 있다. 전쟁은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이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일으킨다. 그러나 전쟁터의 현실은 관념을 넘어선다. 관념은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나지만, 전쟁터의 시간은 길고, 그것을 견뎌야 하는 자에게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기나긴 비인간적인 시간 속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인격이 해체되는 위기를 맞이한다."(105-6)


"황허가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산동성 내륙부에서, 고지마의 중대는 당시의 일본 육군이 범한 모든 악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촌락을 습격하여 빼앗고 태우고 몰살시켰다. 초년병을 단련시키기 위해 중국 농민을 나무에 매달아두고 총검으로 찌르는 훈련도 시켰다. 나무에 매단 중국인의 흉부를 5~6명의 병사들에게 차례로 찌르게 하는 것이다. '토끼사냥'이라 불리던 중국인 강제연행 작전도 펼쳤다. 1942년 9월부터 연말에 걸쳐 중국인 일꾼사냥이 실행됐다." "한 개 중대(고지마 중대는 150명)가 죽 늘어서서 4km에 걸친 지역을 맡는다. 일본 병사 한 명에 경비원 10명 정도를 붙여서 물샐틈없이 좁혀 들어간다. 중심이 되는 분대장의 소재지에는 일장기를 세우고, 반경 16km의 커다란 포위망을 만든다. 이 포위망을 좁혀가면서 중국 농민을 잡아들였다. 하늘에는 비행기가 날면서 각 중대의 진행을 조정했다."(115-6)


"(패전 후) 일본 포로들은 마음이 흔들렸다. 누구 한 사람, 자신이 형법상의 죄를 저질렀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들이 저지른 잔학행위를 알고 있는 중국인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점, 생존자나 유족의 신고에 의해서 반드시 보복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두려워했다. 저마다 굳은 얼굴 표정 아래 불안, 분노, 절망, 변명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5년간이나 시베리아에 억류되어 혹사당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려 죽어갔지만, 나는 견뎌냈다. 그만큼 괴롭힘을 당한 우리들을 이제 또 다시 전범이라고 보복하다니, 너무나 불공평하다. 전쟁은 국가와 국가가 벌이는 사투다. 전범이란 전쟁을 명령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지, 나는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이렇듯 그들의 사고는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의심은 감정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폭력적 성향, 인간에 대한 불신, 권위주의는 중국 쪽에 투영되어, 거꾸로 자신들을 덮쳤다. 자기자신의 인간관, 사회관에 포위되어 있었던 셈이다."(118-9)


"관리소쪽에서 보자면 고지마 씨는 이른바 '완고(頑固) 분자'였다. 딱딱한 변명의 갑옷을 두르고 웅크리고 있는 수인들에게 중국 쪽이 취한 방침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일본군이 저지른 일들을 알려주는 것, 군대 하나하나는 자신이 관여한 전쟁터밖에 모른다. 게다가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지금 당장 직시하는 일은 괴롭다. 그래서 중국쪽은 중국 각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으며 지금도 전쟁 피해가 얼마만큼 지속되고 있는지를 알리는 방법을 취했다. 다른 하나는 충분한 보살핌이었다. 둘 다 우순 전범관리소에 배속된 혁명군 병사들이 해방군이 되어 배우고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인간관계였다. 거기에 하나 더, 이 두 가지 방침을 지탱해준 것은 '시간'이었다. 천천히 시간이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릴 것. 이렇게 기다려줌으로써 전범들의 태도변화에 대비하고자 했다." "희생자와 그 가족, 그리고 그들의 동포가 있다는 것을, 그들이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고지마 씨는 겨우겨우 깨달아갔다."(127-8)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돌아가고 싶다. 그러나 자신은 중대장이었으니, 부하가 무슨 말을 할지 모른다. 고지마 씨는 '내가 죽였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고 결정하고, 우선 고백서 비슷한 것을 써서 내기로 했다. 몇 월 몇 일, 몇 명을 이끌고 어디어디로 가서 팔로군 몇 명과 전투를 했다. 적의 유기 사체 몇 명, 전과는 소총 몇 정, 기관총 몇 정. 우리 편의 손해는 ····· 하는 식으로 서너 편 써냈다. 마치 전투보고서 같았다. 서류를 내면 바로 오 지도원이 불렀다. 담화실에 들어가면 〈고미자, 너는 제국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다.〉 그것으로 끝. 다른 아무런 설명도 없이 반장을 불러 다시 방으로 돌려보냈다. 이렇게 되자 불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돌아갈 수 있게 해 봐야지'하고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보고서를 내면, 바로 호출됐다. 〈너는 제국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다.〉 오 지도원의 답은 그것 뿐. 뭐가 제국주의 사상인가?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고지마 씨는 더욱 더 움츠러들 뿐이었다."(133-4)


"1954년 10월, 가족들의 편지를 받고 고지마 씨는 〈나는 중국에 억류되어, 따뜻한 방에서 따뜻한 옷을 입고 쌀밥을 먹고, 무엇 하나 어려움 없는 생활을 보내고 있다〉고 썼다." "이에 대해 오 지도원은 이렇게 말했다. 〈고지마, 네가 쓴 편지는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오랫동안 헤어져있던 사람이 쓰는 편지가 아니다.〉 〈오랫동안 못 만난 일본인은, 편지 서두에 '하루라도 빨리 만나고 싶다', 이렇게 쓰는 것이 습관 아닌가? 네 편지는 중국을 칭찬하는 것으로 시종일관하고 있으니, 요컨대 관리소쪽에 잘 보이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 고지마 씨는 심경에 변화를 일으켰다. 〈더 이상 저항해봤자 소용없겠다.〉" "고지마 씨는 방으로 돌아가, 이번에는 기억나는 모든 악행을 종이에 쓰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고백에 값한다고 생각되는 것을 모두 정서하여 오 지도원에게 제출했다. 이렇게 해서 1955년 봄 다른 병사들보다 늦게, 드디어 고지마 중대장의 '인죄(認罪, 죄를 인정함)'가 성립했다."(139-40)


"고지마 씨가 모든 것을 다 고백한 뒤, 오 지도원은 각 마을에서 올라온 고소장을 한 장 한 장 읽어줬다. 한 장에 한 건씩 적힌 고소장이 두꺼운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있었다." "중국쪽은 독자적으로 조사한 것과 전범이 자백한 것이 일치하면 죄를 인정한 것으로 판정했다. 그들은 자백을 유도하는 일도 없었고, 자백에 기초하여 조사하지도 않았다. 이와 같은 배려 아래 양자가 접근했을 때, 죄를 자각한 것으로 인정했다. 〈전쟁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시오. 그것만으로도 좋소.〉 〈전쟁이란 이렇게 잔혹한 것입니다. 당신이 한 행위는 중국 인민에게 커다란 재난과 그 뒤에 남는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것을 알기 바라오.〉 일관되게 지속적으로 중국쪽은 그렇게 말했다. 그 뿐, 고소의 내용을 듣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고지마 씨 내면의 감정까지 묻는 일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가해와 피해의 사실에 대한 인식을 요구했을 뿐이었다."(140-1)


"마침내 기소 면제 결정을 듣는 순간, 그저 '돌아갈 수 있다'는 환희가 가득 차 올라왔다. 지금까지의 죄의 자각도, 어떤 형벌이든 달게 받겠다던 반성도 한 순간에 날아가버렸다."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에 11년간 억류되었다 돌아온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세뇌 당한 남자', '빨갱이'라는 낙인이었다. 취직이 안 되고, 공안경찰의 정기적인 방문을 받아야 했다. 그를 받아주겠다고 열성인 곳은 증원을 서두루고 있던 자위대뿐이었다. 대학 시절의 교수님과 선배가 애를 써줬지만, '중국 귀환자'라는 이유로 아무데서도 일을 시켜주지 않았다. 그런 한편, 자위대에서는 제국 군인이 그대로 살아 돌아왔다는 이유로 입대할 것을 권했다. 고지마 씨는 이런 일본의 현실을 마주하고, 〈과연 중국에서 말한 것이 틀림없구나〉하고 생각했다." "전범관리소에서 배운 사상과 일본의 현실에 비추어보며 생각하는 나날이 한동안 계속됐다. 고지마 씨가 개인으로서 전쟁범죄와 맞서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148-50)


"우리들은 전쟁 중의 잔학행위에 대해 들었을 때, 〈전쟁이란 그런 거다. 인간을 짐승으로 만든다〉고 일반화하기 쉽다. 〈영국과 미국도, 소련도, 중국까지도 다 그랬다〉는 반론을 덧붙이면서 자기 나라의 범죄를 중화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개개의 사례를 검토한 뒤의 귀납이 아니라, 미리 해버린 일반화이며, 사실을 잊으려는 의도를 숨기고 있다." 야전 소대장에 임명된 도미나가 씨가 살인이라는 입사식(入社式을 치를 때 "〈상관의 명령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자기변명을 했던 것도, 미리 해버린 일반화였다." "자신의 부하가 될 하사관, 병사는 모두 버젓이 한 사람 몫의 군인 노릇을 해내고 있다. 그들은 사람을 죽이는 데 거리낌이 없다. 그들의 지휘관으로서 아직 검증되지 않은 나에게 상관은 〈베라〉고 말한다. 귄위에 의한 명령, 그리고 부하에게 약점을 잡히고 싶지 않다는 생각, 이 두 가지에 힘입어 그는 순순히 제국 육군에 적응하는 길을 선택했다."(189-90)


"1938년 난징을 침략했을 때, 누가 먼저 1백 명을 베어 죽이느냐는 경쟁을 벌여, 일본 군인의 무용담으로 일본 국내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던 무카이 도시아키(전 육군소좌, 1946년 1월 난징에서 총살형당함)와 노다 쓰요시(전 육군소좌, 1948년 1월 광동에서 총살형당함)의 유서는 다음과 같다. 무카이의 유서는 〈나는 천지신명께 맹세코 포로와 주민을 살해한 일이 전혀 없습니다. 난징 학살사건의 죄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 내가 죽음으로써, 중국 항전 8년이 패배로 끝난 데 대한 한을 씻고, 일·중 친선, 동양 평화의 단서를 이룬다면 이렇게 버려짐을 행운으로 알겠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노다도 마찬가지로 유서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포로, 비전투원의 학살, 난징 학살사건의 죄명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거부하겠습니다. 죽음이 선고된 것에 대해서는 하늘의 명이려니 체념하고, 일본 남아의 최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드리겠습니다. (···)〉"(214-5)


"둘 다 중화민국 정부에 의해 처형당했는데, 죽음을 앞에 두고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든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누구나가 같은 논리다. 자신은 〈일본 군인 혹은 군속으로서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이고, 전쟁범죄는 저지르지 않았으며, 중국인을 괴롭히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에 진 이상, 일·중 평화를 위해 희생자가 되어 죽는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자신이 저지른 잔학한 행위를 상기하고 후회스러워 치를 떨며, 다른 사람들의 비난과는 관계없이, 정신적으로 상처를 입은 인간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자신의 공격성을 전혀 자각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자기자신의 공격성은 부인하고 있다. 그 대신 적에게 강한 공격성이 있었고, 자신은 그러한 상대의 공격성에 고스란히 희생된다고 굳게 믿고 있다. '투사'의 심리적 메커니즘을 교묘히 사용하고 있다." "이들은 상대에게만 공격성이 있다고 느끼고 있으므로, 거기서 죄의식이 생겨날 리 없다."(216)


타이위앤 전범관리소에서 지내면서 점차 중국쪽의 요구를 알게 된 나가토미 씨는 "'이미 사형으로 정해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자, 거꾸로 살고 싶은 욕구가 강렬해졌다. 그러나, 〈내 죄행은,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밖으로 끌려나가 대중재판에서 욕설을 들으면서 죽는 것만은 싫다. 그것만은 봐줬으면 좋겠다. 어차피 죽는 거라면 모두가 있는, 온정을 느낄 수 있는 이 방에서 죽고 싶다.〉 나가토미 씨는 이렇게 생각하고, 목매어 죽을 끈을 만들었다. 내일은 죽자고 결심한 날 밤, 감방의 창틀로 내리비추는 달빛을 보고, 그는 '살고 싶다'는 생각에 어쩔 줄을 몰랐다." "군국주의 이데올로기로 만들어진 갑옷을 입고 있던 감정이, 억제를 뚫고 '괴롭다'고 외쳐댔다. 〈그토록 악행을 거듭해온 사내가 이 무슨 어리광이냐〉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가토미 씨의 자아는 죽음에 직면해서야 비로소 자신의 적나라한 감정의 부르짖음을 들었던 것이다."(237-8)


"판결은 13년의 금고형. 체포 이후의 기간이 형기에 포함되어 남은 기간은 7년이었다." "판결 뒤에 타이위앤에서 우순 전범관리소로 이송된 나가토미 씨 등은 오전에는 책을 읽고 학습하고, 오후에는 양계, 야채 재배, 논 개발 등에 종사했다. 이른바 교육형(敎育刑)을 받은 것이다." "그는 1963년 9월에 석방되어 26년 만에 귀국했다. 취직은 어려웠다. 공안 경찰의 미행, 잠복이 계속되었다. 겨우 취직한 일본도로공단의 사무실에도 전화가 걸려오고, 때로 연행되기까지 하는, 집요한 추적을 견디지 못하고 퇴직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익 나가토미 청년이 폭력으로 일궈온 일본이란 사회가 어떠한 곳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 뒤 나가토미 씨는 침뜸치료원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반전 평화와 일·중 우호를 호소해 왔다. 나가토미 씨는 요청하는 곳이 있으면 전국 어디든, 아무리 작은 집회라 할지라도 기꺼이 갔다. 육중한 풍채, 걸걸한 목소리로 자신이 중국에서 얼마나 잔혹한 짓을 했는지 얘기했다."(240-1)


"'731부대'는 세균전 수행을 위해 일본 육군이 1933년에 창설한 '관동군 방역급수부' 본부의 약칭이다. 전후에는 부대장 이시이 시로 중장(군의)의 이름을 따서 이시이부대라고도 불렸다." "본부인 핑팡에는 1939년부터 패전 때까지 약 3천명이 실험용으로 보내졌다. 어린이를 포함한 중국인, 러시아인, 조선인, 몽골인, 소수의 구미인이 실험동에 격리되어, 인체실험과 실험 후의 생태병리해부에 의해 죽어갔다. 이들 731부대로 이송되는 희생자를 관동군 헌병대는 '특이급'(특별이송취급)이라고 불렀다. 군사경찰인 헌병대는 용의자를 체포, 조사한 뒤에 만주국의 법원(삼심제)에 송치해야 한다. 법제상 재판을 하지 않고 살해 결정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 731부대 이송은 단 한마디의 통첩으로 실행에 옮겨졌다." "「특이급에 관한 통첩」을 보면, 특이급 인물에 대해 〈죄상이 가벼우나 석방불가〉란 글귀가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헌병에 체포된 자는 누구라도 특이급이 될 수 있었다."(253)


'특고(特高, 특별고등경찰)의 하느님'이라고 불리던 쓰치야 씨는 "1934년 4월에 관동헌병대의 헌병이 된 뒤 12년간 쭉 치치하얼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도 특고 외길로, 부대 부속 소위로까지 승진했다. 한 번도 전근하지 않은 헌병은 예외 중에서도 예외이다. 그만큼 역대의 대장이 그를 신뢰하고 놓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294) 전쟁이 패전으로 막을 내리고 소련군의 진격이 코앞으로 닥쳐오자 "그의 장래를 보장하던 문이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래서인지 그의 의식은 과거로 향했다. 헌병 제복을 입고 자랑스런 계급장을 달고, 말 위에서 등을 곧게 편 자세로 거리를 지나간다. 그는 혼자서 치치하얼의 거리 전체와 마주할 생각이었다. 그에게 치치하얼은 하나의 대상물이며, 하나의 생명이었다. 그의 의식에서 치치하얼은 살아 있었지만, 그 거리의 인간은 죽어 있었다. 살아서 생활하는 개개의 인간을 그는 몰랐다."(297-8)


"그의 인간관을 서서히 서서히 변화시켜 간 것은 중국인 관리소원의 태도였다. 결코 모욕하지 않고, 소리치지도 않았다. 식사는 정성들여 요리해서 가져다 주었다. 산책도 체조도 하게 해주었다. 머리가 길어지면 이발도 해 주었다. 병에 걸리면 헌신적으로 치료와 간호를 해주었다. 보살핌을 받을수록 차차 마음이 괴로워졌다. 이러한 중국인의 태도 하나하나가, 그에 대응하는 과거의 그의 행위를 떠오르게 했기 때문이다." "쓰치야 씨는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이런 대접을 받아도 좋을리가 없다. 이런 후한 대접에 만족해하는 자신은 어떤 인간일까? 그는 개인으로 존중받는다는 것, 즉 전범과 관리자라는 관계이기 이전에 대등한 인간으로 교류한다는 것을 처음을 체험했다. 지금까지 일본인으로서의 인간관계에는, 도움이 됐든 안 됐듯, 효율과 타산의 관점밖에 없었다. 신뢰도, 도움이 되냐 안 되냐에 따라 고려됐다. 가족관계는 애정이 넘쳤지만, 그것은 가족 내에서의 일일 뿐이었다."(300-1)


귀국 후 반전평화운동에 참여한 쓰치야 씨를 두고 세뇌당했다는 둥, 일본공산당이라는 둥 비난이 쏟아졌다. 그에게 쏟아진 우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말로 속죄할 마음이라면, 그것을 깨달았을 때 깨끗이 자기 몸을 처분하는 것이 전해져 오는 무사의 자세다. 젊어서 그 기회를 놓치고 지금도 배를 가를 용기가 없다면, 행각승이라도 돼서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인 피해자의 혼을 위로하는 공양 행각이라도 하는 게 어떠냐?〉 〈대동아전쟁의 대의명분은 아시아 약소 민족을 미국과 영국의 질곡으로부터 해방하는 데에 있었으나, 일본은 결국 패했다. 그러나 전후 40년, 아시아가 해방된 사실을 너는 어떻게 보느냐?〉 이 글들은, 쓰치야 씨가 진술한, 헌병들이 혐의를 두고 체포하여 고문하는 과정을 관철하는 사고 그 자체를 보여준다. 자신이 지목한 자는 혐의가 있는 자이며, 혐의는 확증이 있는 사실로 갈아치워지고, 자백하지 않는 자는 공산당원이기 때문인 것으로 된다."(309)


"전후 세대(전후에 태어난 사람만이 아니라, 나와 같이 전쟁 중에 태어났더라도 전후에 자아 형성을 한 사람을 포함하는 개념)가 부모나 친척으로부터 들어온 전쟁은, 전사 통지, 공습의 공포, 소개(疏開), 전쟁 때와 그후의 식량난 등이었다. 이와 같은 얘기는 부모 세대가 즐겨 얘기했다. 그것은 곤란을 극복해온 자기 긍정의 감정과 함께 전해졌다. 그러나 부모들은 결코 자신이 저지른 침략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 "전후 세대는 부모에게 묻지 않았다. 공습의 공포, 소개나 철수 때 고생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당신은 전쟁 때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무엇을 했습니까? 묻지 않았다. 확실히 그들이 굳게 입을 다문 것도 그 원인의 하나일 것이다. 온 나라가 나서서 문제의 본질을 얼버무리기도 했다. '비참한 전쟁'이라고 틀에 박힌 표현을 써서, 침략전쟁의 구체적인 사실을 피해 갔다." "전후 세대의 교과서 『민주주의』(1949.8)를 보면,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음에 아연해진다."(332-4)


"전쟁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민주주의와 세계평화」란 절에서는 〈전쟁이 일어나면, 다수의 국민은 군인이 되어서 전쟁터를 향하며, 죽음의 위험에 직면한다. 그뿐만 아니라, 근대전에서는 국내의 후방도 폭격을 받아, 여자와 아이들도 희생당한다. 집이나 재산이 불탄다. 막대한 전비를 부담하여 경제생활은 커다란 타격을 입는다〉고 전쟁의 피해만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전제주의라고 서술한 뒤, 정말 놀랍게도 일본의 전쟁 확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독일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이런 서술은 오늘날 일본인의 전쟁관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하고 있다. 천연자원은 거의 없지만 일본인의 근면과 기술은 장래에 번영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식의 비슷한 주장을 반복해서 싣고 있는 교과서 『민주주의』의 페이지들을 넘기면서, 전후 세대의 사상 형성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잘 알 것 같았다. '전후 민주주의'와 '침략전쟁에 대한 부인'은 하나의 세트였다."(3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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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2 -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개정판 한국 현대사 산책 2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3장 분열에서 분단으로 / 1947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이승만의 대미(對美) 로비 효과는 신통치 않았다. 그는 원래 5~6주 동안 미국에 체류할 예정이었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자 체류를 연장해 가면서 미국 정부의 동향을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국제정세는 이승만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1947년 3월 5일, 전(前)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은 미국 남부의 작은 도시 풀턴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행한 연설에서 유럽에는 '철의 장막'이 드리워졌다고 주장했다." "3월 12일 이승만에게 큰 도움이 될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다.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이 그날 상하 양원 합동의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으로 불리는 선언을 한 것이다. 트루먼은 〈미국의 목적은 소수파가 독재정치를 강요하는 공산 침략주의에 대항해 자유민주주의 제도와 영토보전을 위해 투쟁하는 세계의 모든 국민을 원조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23-5)


"여운형의 암살은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서중석은 〈1947년 6월 28일 하지는 이승만에게 이승만과 김구가 계획 중이라는 테러행위를 즉각 중지하도록 요구하는 서한을 은밀히 보내지 않고 '공개적으로' 보냈는데, 그 이후 미군정의 태도를 보면 여운형의 암살을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공개적으로' 경고만 하고는 방관하였다는 인상을 준다〉고 했다. 〈1947년 7월 19일쯤의 시점에서 미국으로 볼 때 김규식과는 달리 여운형은 이제 더 이상 필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이 시기 미국은 냉전의 길목으로 깊숙이 들어서고 있었다. 한국 문제는 더 이상 소련과 협의하여 처리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좌우합작위의 좌측 수석이었던 여운형이 암살당함으로써 좌우합작운동은 사실상 활동 정지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후, 한반도 문제가 UN으로 이관되자, 좌우합작위는 활동을 시작한 지 1년 5개월 만인 47년 12월 6일 공식 해체되었다."(51-2)


'하나의 민주공화국' 수립을 위해 46년 2월 9일 이래, 다섯 차례나 북한을 방문한 "여운형은 1886년생, 김일성은 1912년생으로, 여운형이 26년 연상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엔 더욱 장유유서(長幼有序) 의식이 강하던 때였고 그런 의식이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김일성과 김구·이승만은 36~37년의 나이 차이가 났는데, 바로 이런 나이 차이가 세대간 의식 차이와 더불어 남북협상을 어렵게 만든 점도 전혀 없진 않았을 것이다. 어찌됐건 방북, 그것도 위험을 무릅쓰면서 38선을 넘나드는 것에 대해 여운형의 측근들이 그런 장유유서의 질서를 언급하면서 반대할 때에 여운형은 〈나라의 통일독립을 위해 선후배나 체면을 가릴 때인가〉라는 말로 반대를 일축하곤 했다고 한다. 이런 점을 높이 평가하는 정병준은 해방정국에서 〈북한 방문을 통해 민족통일과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정치적 연대 형성에 노력한 것은 여운형뿐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58-9)


4장 욕망과 폭력의 제도화 / 1948년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훗날 긴 세월 끝에 '제주 4·3항쟁'이라는 이름을 얻게 될 사건이 일어났다. 350명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함으로써 시작된 이 사건이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사실상 6년 6개월 간 지속되면서 엄청난 유혈사태로 비화되리라곤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장대는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의 탄압에 대한 저항, 단선·단정 반대와 조국의 통일독립, 반미구국투쟁을 봉기의 기치로 내세웠다."(106) "육지 응원 경찰의 대거 투입으로 48년 7월경 경찰 병력은 2천 명으로 늘어났다 이 가운데 응원 경찰이 1천 500명이었는데, 이들은 '제주는 빨갱이섬'이라는 인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 "본격적인 민간인 학살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인 48년 11월 중순부터 49년 3월까지 약 4개월 동안에 발생하게 된다."(113-4)


"해방 후부터 계속 제기되어 온 친일파 처단 문제는 1948년 8월 5일 제헌국회 제40차 본회의에서 의원 김웅진의 발의로 다시 본격 논의되기 시작했다.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을 둘러싸고 공방이 치열하던 8월 26일 국회의원의 숙소와 시내 각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삐라가 살포되었다. 〈대통령은 민족의 신성(神聖)이다. 절대로 순응하라. 민족을 분열하는 반족안(反族案)을 철회하라. 민족 처단을 주장하는 놈은 공산당의 주구(走狗)다. 인민은 여기에 속지 말고 가면 쓴 의원을 타도하라. 민의를 이반하는 의원은 자멸이다. 한인은 지금 뭉쳐야 한다.〉 8월 27일엔 2명의 방청객이 국회의사당 안에서 〈국회에서 친일파를 엄단하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빨갱이다〉라는 삐라를 살포했다. 이런 반발 움직임을 가리켜 『독립신보』 8월 27일자는 〈친일파들이 발악〉한다고 평하였다." "특히 친일파의 아성이라 할 경찰이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160-1)


"여순사건은 그 배경에 있어서 좌익 군인들이 '숙군(肅軍) 작업'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점과 아울러 경찰과 경비대가 평소 견원지간(犬猿之間)이었다는 점도 자리하고 있었다." "〈경찰은 국민생활의 모든 면에 걸쳐서 간섭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걸핏하면 생사람을 좌익으로 몰아 때려잡는 바람에 '관제 공산당'이라는 새 용어가 생겨났고, 사람들은 그게 무서워 무조건 쩔쩔 맸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흔히 좌익운동을 하다가 경찰에 쫓기게 되면 국방경비대에 들어가는 것이 상식처럼 돼 있었고, 일반 청년들도 경찰에 억울하게 당하고 나면 그들을 한번 봐주기 위해 일부러 국방경비대에 입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국방경비대와 경찰은 마치 견원지간처럼 으르렁거렸다. 그들은 서로 만나기만 하면 충돌하기 마련이었고, 그게 커지면 총격전까지 벌이는 일도 더러 있었다.〉" "장택상 등 경찰 간부들이 경비대를 경시하였고 경찰관들도 경비대를 경찰예비대로 간주하여 깔본 것도 갈등을 키웠다."(174-5)


"여순사건이 거의 진압되어 가던 9월 29일 잠자고 있던 내란행위특별조치법안이 다시 등장하여 국회 본회의에 제출되었다. 이 법은 곧 '국가보안법'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사회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 법은 공산주의를 불법화하고, 공산주의에 대한 정의와 처벌 규정이 아주 모호해서 정권이 정적을 제거하는 데에 얼마든지 악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은 한민당과 이승만 지지세력의 연합에 의하여 11월 20일 국회를 통과해 12월 1일 공포되었다. 이제 통일 논의 자체가 어렵게 되었다. 북측에 무엇을 제안한다거나 남북회담을 하자거나 합작을 하자는 것도 국가보안법에 따라 처단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을 가장 원한 사람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당시 법무부 검찰국 초대 검찰과장 겸 고검 검사로서 '빨갱이 잡는 검사'로 이름을 날린 선우종원에게 〈빨갱이는 무조건 포살(捕殺)해야 돼〉라고 격려하였다."(189-91)


5장 반공의 종교화 / 1949년


"한민당은 신익희와 지청천 세력을 흡수해 49년 2월 10일 민주국민당(민국당)으로 다시 태어났다. 민국당은 49년 4월 말에 이르러 소속의원 69명의 제1당으로 부상했다. 이승만은 힘이 달려 이들과 어느 정도 연합할 수밖에 없었다." "강력한 1인 집권체제를 원하는 이승만으로선 무언가 다른 대안을 모색해야만 했다. 이승만은 자신이 장악할 수 없는 정당 체계에는 고개를 돌리고 정치적 과제까지도 자신의 측근을 중심으로 한 관료조직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했다." "3월경에 이르러 좌익이 거의 소멸되었다는 건 그런 프로젝트의 나아갈 바를 시사해 주는 것이었다. 물론 좌익의 산악 게릴라전은 49년 9월 최고조에 달해 이듬해 3월까지 계속되지만, 합법 공간 및 일상적인 민생 영역에서의 좌익은 49년 3월 남로당 지도자 김삼룡과 이주하가 체포된 뒤 붕괴되었다. 남로당의 궤멸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 남한에서 이렇다 할 인민 봉기가 없었다는 사실에서도 증명된다."(225-6)


유사 국가 기구에 의한 통치 계획의 일환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학도호국단이다. "학도호국단은 이미 48년 10월에 구성된 대한청년단과 49년 8월에 재편성돼 나타날 국민회와 함께 3대 반관(半官) 또는 유사 국가기구적 대중조직으로 '3위1체'를 구성했다." "대한민국 국적이 있는 18세 이상의 모든 남녀는 모두 국민회에 가입해야만 했으며, 그와 동시에 성년 여성은 대한부녀회, 청년은 대한청년단, 학생은 학도호국단에 가입해야만 했다. 이것 말고 청년들은 민보단, 소방단, 의용단에도 가입해야 했다. 국민회비를 내지 않으면 식량배급통장이나 물자의 배급을 중지한다고 위협했고, 청년단비를 내지 않으면 38선에 보낸다고 위협했다. 이 모든 조직의 총재나 명예총재는 모두 이승만이었고, 대한부녀회만 프란체스카가 총재를 맡았다. 그러나 어느 하나도 법률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매우 기이한 이중적 국가체제 운영 방식이었던 것이다."(226-7)


"학도호국단은 족청의 부단장을 역임하였다가 초대 문교부 장관으로 발탁된 안호상의 일민주의(一民主義) 사상에 근거하여 안호상의 지도하에 만들어졌다. 안호상은 '국민사상을 귀일(歸一)' 시키기 위한 일민주의 사상 보급에 문교 행정의 중점을 두었다." "『일민주의 개술』에서 이승만은 〈하나가 미처 되지 못한 바 있으면 하나를 만들어야 하고, 하나를 만드는 데에 장애가 있으면 이를 제거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일민은 생각도 같고 행동도 같아야만 하며, 동일성과 동질성이 생명이라고 했다. 〈우리는 일민이다. 이 일민, 곧 한 민족에는 오직 한 주의만이 그 지도원리가 된다. 만일 두 주의들, 세 주의들을 지도원리로 한다면 우리는 한 민족이 아니라, 도리어 벌써 두 민족, 세 민족이 되고 말아, 한 민족의 부정이요 멸망이다.〉 일민주의 추종자들은 피를 강조했다. 핏줄과 혈통이 주된 화두였다. 히틀러의 게르만 순혈론과 '피와 땅'과 거의 같은 담론이었다."(227-8)


6월 5일 이승만 정권은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개선의 여지가 있는 좌익세력에게 전향의 기회를 주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을 만들었다. "국민보도연맹은 그냥 가입만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동지나 아는 사람들을 고발하는 자백서를 쓰게끔 강요받았으며, 그밖에도 고통스러운 일들을 해야만 했다. 박명림은 〈보도연맹은 민중 속에 침투한 정보망이자 동원망〉이었다며, 〈자수와 밀고가 장려되었다. 이 자수와 밀고는 한국전쟁 전후로 남한과 북한이 공히 동원했던 충성을 추출하는 방식이었다〉고 했다." "보도연맹은 더 나아가 '알아서 기는 문화'와 '충성경쟁'을 낳게 했다. 박명림은 〈보도연맹의 설립과 자수의 권장, 그것은 시민사회에 대한 물샐틈없는 옥죔의 시도였다〉며, 〈과거에 좌파활동을 한 자들은 자수하여 국가에 대한 과거의 불충을 사죄할 것이며 이를 통해 국가가 베푸는 은전을 받으라는 종용을 받았다〉고 했다."(248-9)


"김구는 이승만과는 다른 인물이었지만, 동질적인 세대적 특성은 공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은 1875년생, 김구는 1876년생이었다. 이는 이들이 30년 가까이 왕정체제하에서 산 사람들이라는 걸 의미한다. 이들의 왕정체제 이후의 삶은 내내 복고적인 투쟁의 연속이었다. 아니 이들의 전 생애가 투쟁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그 투쟁은 민주적인 방식으로 이루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들이 해방정국에서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때엔 이미 70대 노인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말은 어떻게 했을망정, 일상적 영역에선 생물학적 연령으로 인해 극복하기 어려운 권위주의와 특권의식을 갖고 있었다."(267) "이는 이들에 비해 36~37년이나 젊었던 김일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은 거쳐야 할 사회 발달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해방 직후에도 왕조적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던 바, 김일성은 그 전통에 편승하여 자신에 대한 우상화 작업을 이승만 못지않게 해 나갔다."(271-2)


"해방정국을 주도한 '통역 정치'의 다른 한쪽엔 '기독교 정치', 특히 '개신교 정치'가 있었다. 미군정 치하에서 우대를 받고 미국인들에게 접근하는 데엔 영어 다음으로 개신교가 유리하였다는 뜻이다."(279) "개신교는 '반공' 및 '친미'의 강력한 보증수표였다. 개신교 스스로 '반공'과 '친미'를 위해 적극적인 이념성과 정치성을 띠는 걸 마다하지 않았고, 종교지도자들은 그걸 부추겼다. 해방 후 장로교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목사 가운데 하나였던 한경직은 45년 9월 평안북도에서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조직했다가 46년 1월 5일 조만식의 연금 이후 월남했다. 한경직은 일본 천리교회가 남기고 간 재산을 미군정으로부터 접수하여 영락교회를 세웠다. 공산주의를 반드시 베어야만 할 '괴물'이며 '묵시록에 있는 붉은 용'으로 간주한 한경직은 신자들의 정치참여를 촉구하였다." "영락교회 청년회의 핵심 회원 가운데 한 사람인 오제도는 서북청년단 조직에 참여하였고 나중에 '사상검사'로 이름을 날렸다."(282-3)


맺음말 전투적 극단주의의 배양


일체의 도덕과 윤리와 행동규범이 무시되고, 간교와 탐욕과 냉혈이 그 자리를 차지한 무법천지, "그런 '무질서'와 '아사리판'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남한 사회를 휩쓸었다.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 또는 좀더 잘먹고 잘살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카오스의 도가니' 속으로 뛰어들었다. 우익 청년단체에게 테러와 폭력은 호구지책이었지만, 그들은 그런 행위를 포장할 그 무엇이 필요했다. 이데올로기는 그들의 호구지책 행위를 더욱 극렬하게 만들 수 있는 명분을 제공했다. 정치행위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출발한 면도 있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 어떤 이데올로기를 실현시키기 위한 정치행위를 하기 위해선 정치자금을 만들어야 했고 사람을 불러모아야 했다. 그러나 이 일은 곧 그 나름대로의 자율적 힘을 갖게 되어 역으로 정치행위를 규제하였다. 정치 패거리의 안녕과 번영을 위한 일이 민족에 우선하면서 정치세력 간 타협은 점점 멀어져 갔다."(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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