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형과 변용 - 한국 경제개발계획의 기원
박태균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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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1장 서로 다른 길, 그러나 공통된 목표


"1950년대는 전통시대로부터 50여 년밖에 지나지 않았고, 식민지의 강압정치와 그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이 교차되었던 일제강점기와 함께 좌우 대립에 의해 격정적 회오리가 몰아쳤던 해방정국으로부터 10년도 되지 않은 시대였다. 따라서 이 시기 지식인들의 경제체제에 대한 관념은 전통시대,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정국의 영향이 그대로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의 과정에서 대부분의 정치세력들은 독립 이후 새롭게 건설해야 할 국가에서는 정부가 경제질서에 대한 개입을 통해 효율적인 경제발전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을 경제목표로 제기하였다." "1940년 10월 임시정부가 발표한 대한민국 임시 헌법을 보면 경제조항 내에 '국민의 기본생활을 확보할 계획경제의 수립', '대규모의 주요공업, 그리고 광산의 국영 또는 국가관리', '토지사유의 제한과 농민본위의 경작권 확립', '공장의 경영, 관리의 노동자대표 참여' 등의 조항이 있다."(28)


"1920년대 이후 제국주의에 반대하기 위한 수단으로 도입된 공화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1930년대 이후의 사회민주주의 이론 및 일본과 독일의 국가사회주의 이론이 한국사회에 쉽게 수용되었던 것은 전통적 '공'개념과 대동주의의 사상적 기반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30년대부터 해방 직후까지 우익진영과 좌익진영의 경제정책은 토지 국유화, 대규모 생산기관의 국영, 경제적 활동에 대한 경제적 통제라는 공통적 내용을 담았다. 물론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의 '공'개념이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과 평등한 분배의 문제를 강조하였던 반면, 1950년대의 '공'개념은 효율적인 경제성장을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이것은 1950년대 서구의 후진국 경제개발론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국가가 경제질서에 개입함으로써 효율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해야 한다는 1950년대의 사회적 공감대는 경제개발계획이 입안·실행될 수 있는 중요한 사회적 요인이었다."(34-5)


"한국전쟁과 북한의 성공적인 복구과정은 남한에서 경제개발계획의 필요성의 사회적 공감대로 형성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지만, 1950년대의 보다 큰 충격은 미국의 대한원조 감소였다. 1950년대 미국은 '뉴룩정책New Look'을 채택하면서 후진국에 대한 군사·경제 무상원조를 삭감하였고, 1957년을 기점으로 하여 개발차관기금을 설치하면서 유상차관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한국군과 주한미군의 감축을 위한 논의와 미국의 공적 자본을 대신한 개인기업의 사적 자본 투자를 강조한 것은 미국의 대한원조를 감축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39) "원조의 감축과 함께 또 하나 주목된 것은 무상원조에서 유상차관으로의 전환이었다. 개발차관기금은 무상원조와는 달리 이자와 원금을 갚아야 하며, 차관 계약시 채권자측에서 제시하는 조건에 맞는 계획을 제출하고 이 계획이 승인되어야만 차관을 받을 수 있었다. 정부 관료와 정치인들은 차관을 승인받기 위하여 계획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기 시작하였다."(41)


"1950년대를 통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경제개발론은 '민간주도형' 경제개발론이었다. 민간주도형 경제개발론은 경제개발계획의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정부가 자유시장체제를 보조하는 역할만 하고 민간기업이 계획을 주도해야 한다는 내용을 골간으로 하였다. 1950년대 이승만 정부는 경제질서에 적극적인 통제를 가하였고, 이를 통해 정경유착을 통한 부패가 만성화되었다. 이러한 이승만 정부의 정책 때문에 한편으로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사상적 축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이승만 정부의 강력한 경제통제에 저항하는 수단으로서 자유주의 경제이론이 활성화되었다. 이들은 경제후진 현상이 정부의 강력한 간섭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민주당 신파와 함께 민간주도형 경제개발론을 주장한) 『사상계』 그룹의 핵심적인 주장은 경제 민주화와 외자의 적극적 이용이었다. 경제 민주화에서 가장 문제가 된 부분은 정부 통제의 완화와 자유경쟁적인 기업풍토의 조성이었다."(50-1)


# 『사상계』 필진들의 특징 : 미군정하에서 사회주의적인 경향의 교수들이 대학에서 쫓겨나거나 월북한 후 경제학계의 주류로 등장한 경제학자들. 환율 현실화로 원조에서 파생된 세입을 증대하고, 기업이 자율적 경쟁력을 갖추는데 무게중심


"국가주도형 경제개발론자들은 양적인 성장보다는 산업구조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들이 주장한)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과 내포적 공업화는 서로 다른 개념이면서도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양자는 모두 산업화 전략을 대외무역보다는 내부 경제구조의 균형발전에 두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 외부 자본에 종속적이지 않은 경제구조를 만들어 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즉, 외부 경제와 단절된 경제구조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적으로 중공업과 경공업, 그리고 농업을 균형되게 발전시켜 외부로부터의 수입을 대체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경제적 민족주의라는 용어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박희범은 〈'아랍에 낫세르주의'가 있다면 '한국에는 한국주의가 있다'〉고 강조하였으며, 최문환은 〈그들(구미)의 과제가 곧 우리의 과제가 아니다〉라고 표현하였다." "이 경향의 경제학자들에게 소위 '근대화'는 고유의 민족문화와 구미 합리주의의 적절한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56)


# 국가주도형 경제개발론자들의 특징 : 해방 직후 사회주의 계열의 교수들에게 가르침을 받아 해방 이후 대학을 졸업한 경제학자들. 외자도입보다는 내자 동원을 통한 민족자본의 형성, 대기업의 국유 또는 국영화에 무게중심


"1950년대 혁신운동을 주도했던 세력들은 서구의 사회민주주의적 방식을 경제개발의 이상적인 모델로 상정하였다. 이들의 경제사상을 잘 보여주는 것은 진보당의 경제정책이다. 진보당의 사회민주주의적인 지향은 1950년대의 세계정세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였다. 즉, 〈자본주의의 자기수정적 경향〉, 그리고 후진국의 〈민족적 자주독립〉과 〈국내 건설 촉진〉을 위한 노력을 1950년대의 주요한 세계정세로 인식하였다." "진보당에서 주장하는 소위 '사회적 민주주의'의 핵심은 자본주의 경제질서의 모순과 무정부성을 지양하기 위하여 경제에 대한 계획과 통제 정책을 적절하게 배합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교통, 체신, 운수, 은행 등 중요 산업부문과 거대 기업체를 국유화하며, 국가자본과 외국원조에 의해 필요한 산업부문을 신설하고 이를 국유화 또는 국영화할 것을 주장하였다."(61-3)


# 사회적 민주주의자들의 특징 : 경제개발 과정에서 통일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일본과 관계를 정상화하게 되면 일본 경제에 예속될 가능성을 경계하는 데 무게중심


"주목되는 점은 서로 다른 경제개발론들 사이에서 공통된 내용들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선 1950년대와 1960년대의 경제개발론은 모두 정부가 경제질서에 개입하는 '경제개발계획'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고 있었다. '민간주도형' 경제개발론자들도 정부가 개입하는 경제개발계획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었으며, 정부의 '보이는 손' 역할을 어떻게 하면 최소화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고민이었다. 이들이 국가와 관료의 경제질서 개입에 강력하게 반대했던 것은 이승만 정부를 통해 나타났던 비정상적인 행태 때문이었지, 정부 개입의 불가피성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1970년대 이후 정부의 경제질서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신고전주의적 입론들이 경제학자 및 관료들 사이에서 확산되었고, 1970년대 후반부터 경제안정화 정책의 일환으로 정부의 역할 축소를 위한 논의가 제기되었지만, 정부가 일정한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는 신화는 국민들 사이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67-9)


# 경제개발론들의 주요 공통점

1. 안정보다 성장 강조 : 미국이 원하던 통화가치 조절에 따른 인플레이션 안정화보다는 투자를 통한 생산공급의 확대로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자는 입장

2. 투자 산업부문에서 농업 강조 : 농업부문을 2차 산업 발전을 위한 기반이나 전제조건으로서만이 아니라 산업 발전의 기본 원리로 강조

3. 균형성장론 적극 수용 : 식민지 체제하에서 수립된 불균형적이고 왜곡되었던 산업구조를 혁파하여, 산업 부문별로 자립적이고 균형잡힌 성장 강조

4. 실업문제와 민족자본 부족 절감 : 생산력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위장실업(잠재실업)과 경제개발계획의 전제조건인 자본축적의 방법 고민


2장 현상유지정책에서 근대화론으로: 미국 대외정책의 전환


"1953년부터 집권한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한편으로는 한국전쟁 이후에 나타난 미국의 저개발국 원조정책의 변화, 즉 경제부흥을 위한 원조에서 군사원조로의 변화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이것은 첫째로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가 한국전쟁을 막지 못했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1949년 경제협조처 원조를 위한 자금 승인을 의회에 요청하면서 '한반도에서 남한의 자립되고 안정된 경제가 아시아의 등불이 될 것'이라고 강조하였지만, 한국전쟁은 이러한 인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즉, 경제적인 안정을 통해서 봉쇄를 강화하겠다는 정책이 후퇴한 것이다." "이제 경제원조만으로 저개발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공산주의의 확장정책을 봉쇄할 수 없다고 평가하기 시작했다. 둘째로 미국의 자체 재정 문제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해서 늘어난 미국의 재정을 줄여야 했고, 이의 일환으로 '건전한' 재정을 목표로 한 뉴룩정책 하에서 대외원조 역시 감축되기 시작하였다."(117-8)


"식민지에서 해방된 지역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국제학, 지역학, 정치학 등에서 먼저 나타났는데, 저개발국가의 역사, 문화, 그리고 사회구조의 다양성과 서구사회와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는 지적에서부터 출발하였다."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식민지의 경험, 민족주의·중립주의·공산주의로의 편향성, 그리고 현대화된 조직으로서 군대의 중요성 등이다. 또한 미국식 보편주의에서 벗어나 미국식 민주주의를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그대로 대입시키려는 경향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서유럽 중심의 보편주의에 비해 진보적인 견해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의 기준으로 볼 때 비민주적인 저개발국의 군부정권에 대한 지원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이론적 배경을 제공하였다. 제3세계의 정치체제를 서구정치에 그대로 대입하지 말고 문화적 상대주의 입장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1960년대의 파이와 헌팅턴의 연구 역시 이러한 경향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131-3)


# 로스토우의 근대화론

1. 군사 원조에 치우친 미국의 대외원조 재고는 저개발국의 경제성장을 저해하고 전체주의적 성향을 뒷받침한다.

2. 냉전의 축이 유럽에서 아시아로 이동(중국의 공산화, 비동맹 움직임, 민족주의 게릴라 운동 등)하고 있다.

3. 경제 원조는 군사 원조에 비해 미국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저개발국 국민들의 자신감을 고양시킬 수 있다.


"로스토우는 미국의 대외원조정책에서 "위대한 전환"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로스토우의 경제개발원조론은 군사원조나 소비재 원조에 비하여 상당히 많은 액수의 자금이 필요했지만, 미국이나 서구의 경제에 대한 기여가 가능하다는 점으로 원조자금의 증액을 합리화하였다. 로스토우가 강조한 경제개발원조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강조한 사적자본에 의한 투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자본"에 의한 "장기간의 계획된" 원조를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미국을 비롯한 선진제국의 국가재정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로스토우의 제안에는 "무상원조" 대신에 저리低利이기는 하지만 "유상차관" 형식으로 원조 수단을 바꾸어야 한다는 점을 중요한 전제로 하였다. 또한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이나 일본 같은 산업화된 국가들이 계속 발전할 수 있는 국제적인 경제활동의 환경을 창출하는 것〉을 주요한 목적으로 내세웠다."(146-7)


"로스토우는 저개발국의 식민지 경험을 경제성장 가능성의 중요한 전제로 상정하였다." "저개발국가들이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식민지적인 경험으로 형성된 사회간접자본이며, 이것이 도약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강력한 '민족주의'를 형성시켰다는 것 역시 로스토우가 지적하고 있는 저개발국 또는 제3세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외부의 침입이 민족주의를 태동하였지만, 그것이 후진국 근대화의 힘을 추동할 수 있는 최고의 동력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파악하였다." "로스토우는 민족주의에서 유발되어 국민적 단합에 기반을 둔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민국가의 확립이 경제개발계획의 실행에서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민족주의의 이용은 다른 한편으로 민족주의를 이용하려고 하는 '공산주의의 음모'에 대한 대응이며, 민족주의가 적대화되지 않도록 근대화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방안이었다."(148-9)


"사회개혁에 대한 로스토우의 주장과 관련하여 눈에 띄는 것이 후진국 내의 지배세력을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즉, 전근대적인 생산관계와 연결되지 않은, 그리고 해당 지역에서 가장 근대화된 기구와 관련이 있는 계급이나 계층을 새로운 사회지배 엘리트로 등장시키는 사회개혁이 경제개발원조의 가장 중요한 조건의 하나로 제시되었다. 새로운 정치지도력은 '젊고, 농촌 출신'이 바람직하며, 이러한 새로운 지도력은 지식인-상인-군인 연합이 되어야 한다고 설정하였다. 그럴 때 이들이 전근대적인 생산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사회개혁을 수행하면서 근대적 산업화에 더욱 매진할 수 있는 조건들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지도력의 창출에서 군대조직, 또는 군인이 차지하는 중요성이 특히 강조되었다." "로스토우는 1950년대를 통해 등장한 군부정권의 군사 엘리트들은 공산주의적인 성향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하였다."(152)


3장 안정에서 성장으로: 1960년대 초 미국의 대한정책 변화


"1956년 이후 송인상으로 대표되는 전문관료들이 경제정책을 입안할 수 있는 지위에 오르게 되자, 미국은 새로운 관료의 등장과 함께 경제개발계획을 위한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고 보았다. 아울러 부흥부 산하의 산업개발위원회 설치와 1959년의 경제개발 3개년계획 작성을 경제개발계획 실행을 위한 긍정적인 움직임으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긍정적인 인식과는 달리 1958년 이후의 지속적인 경제성장률 하락은 경제개발계획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또 다른 원인이 되었다. 1958년 이후 미국은 인플레 억제 목표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 인식하였고, 한국전쟁 이후 한국 경제에 나타난 유일한 긍정적인 신호라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의 억제와 미국의 원조 감소는 다른 한편으로 경제성장률 저하를 가져왔고, 민주당 정권 시기에 이르러서는 경제성장률이 2.3%까자지 하락하였다. 1959년 미 대사관 관리들은 처음으로 경제성장률의 저하로 성장을 위한 계획이 필요하다고 보았다."(244-6)


"경제 상황 못지않게 미국이 주목했던 것은 정치, 군사 상황의 변화였다. 미국의 대한정책은 1945년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국내적, 국제적인 상황에 따라 내용이 변화되었지만, 한반도가 중국공산당과 일본 사이에서 '완충지대'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군사적인 의미와 미국의 대한정책의 성패가 자유세계의 이데올로기적 전쟁의 '상징'으로서 역할을 한다는 정치적인 의미는 변하지 않는 기본적인 목적이었다." "정치·군사적인 관점에서 특히 중요하게 다루어진 것은 한국의 정치·사회적 안정 여부였다. 한국 내부의 정치적 불안정은 이데올로기의 전시장으로서의 한국이 외부로부터가 아닌 내부에서 붕괴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한국전쟁 기간의 '부산정치파동'을 통하여 한국의 정치적 불안정이 세계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 절감하였던 미국은 1950년대 후반의 정치적 불안정이 미국의 대한정책을 실패로 몰아갈 수 있는 중대한 문제로 인식하였다."(247)


"미국의 군사·정치적 상황에 대한 인식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지적되어야 할 부분은 북한의 상황 변화에 대한 인식이다. 1950년대를 통해 북한은 성공적으로 전재 복구를 이루었으며, 북한의 경제성장 역시 남한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미국은 북한이 경제 상황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데올로기적 전시장'인 한반도에서 사회주의 체제인 북한에 비해 경제 성장이 미흡하였던 남한의 상황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남한의 지식인들 역시 북한의 경제발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였고, 경제개발계획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주요한 원인의 하나였다. 미 국무부는 1962년 경제기획원의 경제개발계획안에 대해 7.1% 성장률을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였지만, 미 국무부 스스로가 새로운 정책결정 과정에서 남한이 북한보다 더 높은 경제성장률을 이루는 것이 중요한 경제적 목적의 하나임을 분명히 하였다."(252)


"케네디 행정부의 대한정책 변화는 1950년대의 대한정책과 비교하여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한국 정부가 경제개발계획을 입안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실시해야 하며, 미국은 경제개발원조를 통해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점이 우선적인 정책으로 설정되었다. 특히 대한원조에서 외국인 민간투자의 역할을 더 이상 강조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1950년대의 정책과 비교할 때 가장 큰 차이점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특징은 새로운 정책이 전반적인 사회적 개혁을 강조하였다는 점이다." "사회개혁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부분은 한국의 사회개혁이 단지 제도개혁에 그쳐서는 안 되고 정신개혁이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고 지적한 점이다. 여기에는 〈국가지도자들에 의한 국가의 목표와 이상의 규정과 대중적 선언〉, 〈학생, 지식인, 그리고 언론과의 보다 나은 관계 유지〉, 그리고 〈한국의 이미지 제고〉 등이 포함되어 있다."(259-60)


"미국의 대한정책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변화는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해야 한다는 부분이 1950년대에 비하여 더 강조되었다는 점이다." "1962년 5월에 나온 한일관계와 관련된 국가안보회의에 제출하기 위해 마련된 문서에서는 한일관계를 빨리 정상화해야 하는 이유로서 ①한국의 빠른 경제개발계획을 위해 일본의 원조가 필요하다는 점, ②수출을 위한 일본 시장이 필요하다는 점, ③자유세계의 단합과 아시아의 힘을 막는 중요한 장애물이 제거되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④북한 공산주의 정권과의 점증하는 심각한 경쟁에서 한국 정부의 권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 등이 지적되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④번 항목이다. 만약 일본이 남한만을 대상으로 한일협정을 맺을 경우 북한에 비하여 남한의 정통성이 더 강화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즉, 한일협정은 이 시기 대한민국 정부의 권위를 높여주는 방안의 하나로 논의되었던 것이다."(262-3)


"1964년부터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입안을 위한 미국인 고문, 특히 콜의 역할은 매우 시사적이다. 이전의 주한 미국대사관이나 원조관련 기관의 미국인 관료들이 대체로 경제전문가라기보다는 관리형 관료였던 데 비하여 1961년 민주당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을 위한 고문으로 내한했던 울프 박사와 콜 박사는 경제개발론 및 대외정책 전문가였다." "1964년 군복만 벗은 민간인 박정희를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는 시점에서 미국은 새로운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새로운 관료들을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1950년대 중반 이후 경제개발계획의 입안과 실시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한국은 1956년부터 경제개발계획을 입안하였는데, 계획의 입안과 실시가 힘을 받기 시작한 시기는 미국의 대한정책이 변화하기 시작하는 1961년이었고, 본격적인 실시가 가능했던 시기는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의 대한정책을 입안하는 부서에 새로운 관료들이 자리잡기 시작하는 1964년이었다."(272-3)


4장 경제개발계획과 그 수정


"1962년 1월 발표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중요한 특징은 두 가지이다. 첫째로 산업화 전략이 균형성장론과 수입대체산업화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산업화 전략에서는 핵심사업에 중점적으로 투자하는 방식의 불균형성장론을 따르고 있지만, 목표에서는 수입대체산업화와 산업 간의 균형성장이 제시되었다." "아울러 군사정부의 계획을 이전 계획과 비교할 때 나타나는 또 하나의 공통점은 산업별 계획이 병렬적으로 나열되어 있으며, 단기간에 작성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당시의 경제관료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바와 같이 부정확한 통계와 계획입안에 참여한 경제학자, 경제관료들이 풍부한 경험과 높은 수준의 이론을 겸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둘째로 내자 동원이 강조되었다는 점이다. 이전 계획이 자본축적을 위하여 외자의 적극적인 이용을 강조한 점을 고려하면 내자동원 강조는 국가주도형 경제개발론자들이 주도한 군사정부 경제개발계획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320-3)


# 계획안 발표 이후 진행된 내자 동원 정책의 실패

1. 금리 인상 : 예금금리를 대폭 인상해서 저축을 유도하였지만 엄청난 통화팽창에 따른 인플레이션 발생

2. 증권 시장 활성화 : 경제침체 속에서도 주가가 큰 폭으로 상승하면서 중앙정보부가 정치자금 조성

3. 통화개혁 : 환화와 원화를 10:1의 비율로 설정한 '긴급통화조치법'을 기습적으로 시행했으나 미국의 반발로 폐기


"내자 동원 실패는 통화개혁이나 증권파동의 처리과정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미국의 압력이나 정치적 부정의 개입 때문이기도 하지만, 군사정부가 당시의 경제현실을 무시한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이었다. 1959년부터 시작된 경기침체와 1960년과 1961년 환율의 현실화, 그리고 공공요금 인상에 따른 인플레이션 때문에 일반 국민들에게 산업자금을 동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통화팽창과 인플레이션은 계속되었지만, 일반 국민들의 손에 들어오는 자금은 없었고, 이것은 곧 소비 위축에 따른 생산능력의 감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반 국민의 돈으로 내자를 동원한다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경제시책이었다. 부정축재자 처리과정을 통해 은행을 장악하였지만, 시중자금이 경색된 상황에서 정부가 민간으로부터 투자자금을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채시장의 자금 역시 예상했던 것만큼 은행에 많이 유치되어 있지 않았다."(325-6)


"미국은 군사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이 비현실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졌다고 비판하였다." "정부의 과도한 역할에 대한 반대는 내자를 동원하여 경제개발계획을 수행하고자 하는 군사정부의 정책에 대한 불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외자를 이용한 불균형적인 경제개발이 저개발국을 자본주의 경제체제 내에 묶어둘 수 있다는 로스토우의 근대화론과, 내자동원 및 수입대체산업화를 주장하는 군사정부의 균형성장론은 서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또 다른 불만은 군사정부가 정책을 발표하기 전에 미국과 '사전 협의'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었다. 이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성격이 짙게 깔린 것이었다. 미국은 사후 승인이 아니라 계획입안과정에서 협의를 통해 미국의 정책에 적합한, 또는 미국이 판단하기에 실행가능한 계획을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은 '합의된 5개년계획'이 나오기 전에는 경제개발계획을 위한 원조가 불가하다는 방침을 군사쿠데타 직후 결정하였다."(330-1)


"1962년 11월부터 군사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수정작업에 착수하였다. 이 시점에서 미국이 군사정부에 요구한 사항은 제철소와 종합기계제작소 건설을 비롯한 수입대체산업화 전략의 포기와 수출 증대를 위한 중소기업 지원, 계획의 입안과 실시과정에서 사기업의 역할을 제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군사정부는 1963년 4월 본격적인 수정작업에 착수하여, 민정이양 선거 후인 1964년 2월 '보완계획'을 발표하였다." "보완계획과 같은 시기에 발표된 '제3년차 계획' 역시 민간부문 강화를 강조하였고, '합리적인 경제질서 확립'을 위해 공공부문의 비중을 낮추어나가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즉, 한국의 〈공공부문 비중이 타 자유진영제국가에 비하여 컸〉다는 점을 전제로 하여 정부기업의 한정과 민간기업의 지원 및 체질 개선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제시하였다. 또한 '안정기조 위에서의 개발계획 추진'은 민간부문의 활성화와 함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원칙의 하나로 제시되었다."(336-7)


"저개발국의 산업개발 형태를 수출주도형으로 전환하는 것은 케네디 행정부의 후진국 정책에서 나타나는 특징의 하나였다." "수출주도형 강조는 한국 정부의 재정수지 적자를 줄임으로써 미국의 대한원조를 감축할 수 있다는 점과 환율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는 이점이 함께 고려된 것이었다. 품질이 좋지 않은 한국제품이 수출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원화의 평가절하가 필수적이었다." "미국의 압력은 경제개발계획의 내용 수정에만 그치지 않았다. 1963년부터 1966년까지 자유무역체제를 지향하는 경제정책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1964년의 환율조정과 역逆금리제도 채택, 수출진흥을 위한 세제 개편, 1965년 이후 청와대에서 수출진흥확대회의 개최, 1967년 수입자유화 확대를 위한 네거티브 시스템 도입 등은 1963년 이전의 경제정책과는 정반대였다. 미국은 이 과정에서도 군사정부와 군사정부의 뒤를 이은 박정희 정부의 경제정책 수정 및 개혁 과정에 일부 개입하였다."(338-9)


# 역逆금리 : 통화불안 때의 평가변경이나 고금리를 노리고 외자가 유입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비거주자의 예금에 대해서 마이너스의 금리를 부과하는 것.


"보완계획 성립은 미국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었지만, 계획 자체의 내용을 보면 박정희 정부가 특정 부분에서 이전 계획의 특징들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제철소와 종합기계제작소 등 많은 양의 외화를 필요로 하는 산업은 제외되었지만, 수입대체를 목적으로 하는 비료, 정유, 시멘트 산업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산업목표로 남아 있었다." "실제 경제계획의 실행과정에서도 군사정부는 부정축재자 처리과정을 통해 수입대체를 목적으로 하는 산업에 중점 투자가 이루어지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또한 보완계획은 전체적으로도 1950년대의 중요한 담론이 되었던 균형성장론적인 성격을 담고 있었다. 수출이 이전에 비해 강조된 것은 사실이지만, 가장 우선적인 목표로 설정되지는 않았다." "미국이 중소기업 중심의 정책을 강조하였고, '보완계획' 내에도 중소기업 진흥을 위한 수출정책이 포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부는 대기업 중심정책을 고수하였다는 사실 역시 중요하다."(340)


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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