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역사 - 하 - 제8판
니콜라스 V.랴자노프스키.마크 D. 스타인버그 지음, 조호연 옮김 / 까치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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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제정 러시아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문화적 발전은 〈인텔리겐치아〉의 대두였을 것이다. 러시아어에서 영어로 들어온 이 용어는 교육받은 사람들 혹은 심지어 이상적인 삶에 헌신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교육받고 지적인 일에 종사하는 개인들로서 처음에는 계몽사상, 그다음에는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절대적인 원칙의 이름으로 자신들이 억압적이고 탄압적인 정치 및 사회 질서라고 생각한 것에 반대하던 사람들을 의미했다." "게르첸, 벨린스키, 바쿠닌 같은 〈서구주의자들〉은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중심 원칙을 위반한 것이라는 이유로 전제정치, 농노제, 그리고 인권이 부재하는 현실을 반대했고, 모든 개인들에게 존엄한 삶을 보장해주는 유일한 질서로서의 〈사회주의〉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호먀코프, 키레옙스키, 사마린과 같은 〈슬라브주의자들〉도 농노제, 시민적인 자유의 부재, 개인 생활에 대한 정부의 침해에 반대했으나, 〈정신적인 공동체〉라는 원칙의 이름으로 그런 태도를 취했다."(548-9)


"농민들은 때때로 일종의 노예제 수준까지 다다른 농노체제에 직면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농노들은 이동이 금지되었고, 노동 및 화폐 지대가 어느 정도 혼합된 지대를 지주들에게 납부해야 했다." "특히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에는 특정한 상황에 대해서 집단적으로 항의하는 농민들이 일으킨 지방의 〈소요〉를 정부가 기록으로 남겼다. 알렉세이 통치기의 스텐카 라진 반란, 표트르 1세 통치기의 블라빈의 반란, 예카테리나 2세 때의 푸가초프의 봉기처럼 대중 봉기도 때때로 발생되었다. 이런 반란은 지도자들의 이름을 따서 불렸는데, 지도자들은 모두 카자크(Kazak)였다. 카자크들은 한때 국경지역의 약탈적인 부족들이었는데, 모스크바국과 표트르 이후의 제국이 확대됨에 따라 그들의 자유와 자율성은 축소되었다." "예카테리나 대제는 푸가초프의 선언문을 읽고는, 그것을 〈공중누각〉이라고 일축했다. 그러한 〈누각〉─완전히 자유롭고 행복한 사회에 대한 꿈─은 러시아의 삶에서 오랫동안 실제로 남아 있었다."(550-1)


▶ 알렉산드르 2세 통치기(1855-1881)


"알렉산드르 2세는 자신의 대관식 때 모스크바의 귀족들에게 연설하는 자리에서, 농노제가 아래로부터 폐지되기 시작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 위로부터 그것을 폐지하는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 더 낫다는 유명한 말을 했다." "농노해방의 도래와 관련된 놀라운 측면은 그 과정이 공개되었으며, 공식적인 토론이 이루어졌다는 점이었다. 정부는 그 계획을 발표했고 토론과 제안을 권장했는데, 이것은 글라스노스트(glasnost)라고 알려진 공개와 개방의 과정이었다. 귀족 협의회는 개혁이 실시되는 방법에 관해서 논의하도록 요청받았고, 때때로 회의 진행 과정을 귀족이 아닌 사람들에게 공개하기도 했다." "1861년 2월 19일의 법을 통해서 농노제는 폐지되었다. 그때 이후로 러시아인들이 삶에서 인간의 예속상태는 사라졌다." "그러나 그 개혁이 농민들에게 다른 사회계급들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에는 실패했다. 그들은 여전히 인두세를 내야 했고, 농민공동체에 결박되었으며, 관습법에 기반을 두고 재판을 받았다."(557-9)


# 그 외의 "대개혁" 조치들

1. 지방정부의 기구들인 젬스트보 의회와 상임 위원회 설치

2. 사법부를 행정부에서 분리하여 사법부의 독립성 보장

3. 군 복무 의무가 하층계급에서 모든 러시아인으로 확대

4. 국립은행 창립, 교육과 검열 분야의 자유주의적 조치


"일부 관료층과 러시아 귀족들은 개혁 조치에 단호히 반대했다. 농민 봉기, 대학생 소요, 1862년에 일어난 원인불명의 화재, 1863년의 폴란드 반란, 1866년의 카라코조프의 황제 암살 시도 등 특수한 상황이 여기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정부가 변화를 어디에서 멈출지에 대한 근본적인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대개혁〉은 러시아의 전반적인 발전 및 당대의 지적 분위기와 함께 그 이상의 개혁을 위한 압력을 낳았다. 입헌군주체제를 용인하고 몇몇 다른 양보를 했더라면 대부분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제국의 안정을 가능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2세와 그의 후계자들은 그렇게까지 나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들은 더 이상의 변화를 주장하던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고, 기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분투했다. 〈대개혁〉은 크림 전쟁으로 구체제가 완전히 파산되었다는 것이 입증된 이후에야 실시되었다."(567)


"1870년대 무렵이 되면, 러시아 혁명운동을 이끌던 본질적으로 개인주의적이고 무정부적인 허무주의의 신조는 인간의 총체적인 해방에 강조점을 두면서 〈비판적 사실주의자들〉에게 정치적·사회적·경제적 프로그램을 부여했던 '인민주의'라는 새로운 신조와 결합되고, 그것에 의해서 대체되었다." "허무주의자들이 그들의 해방과 독립 그리고 자신들 주위의 썩어빠진 세상에 대한 우월감에서 기쁨을 느꼈다면, 인민주의자들은 러시아의 경우에 농민들을 의미하는 대중에게로 관심을 돌려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그들은 무지크(muzhik) 즉 농민들이 땀, 그리고 심지어 피의 희생으로 자신들이 받은 교육을 되갚고, 인민들을 좀 더 나은 미래로 이끌기를 원했다. 덧붙여 말하자면, 지식인들은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배우기를 원했다." "대부분의 인민주의자들은 자신들이 환경 때문에 가질 수 없었던 도덕적 순수성과 정직성─그들이 원한다면 진리─을 이런저런 방법으로 인민들 가운데에서 발견하기를 희망했다."(572-3)


"인민주의자들의 운동은 1873년, 1874년, 그 직후의 몇 년 동안 절정에 달했다. 1873년에 제국정부가 스위스에서 공부하던 러시아 대학생들에게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하도록 명령을 내렸을 때, 그들 중 상당수의 학생들은 러시아에 있던 수많은 다른 젊은 남녀들과 함께 〈인민 속으로(vnarod)〉 가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시골 마을로 갔으며, 그중에 약 2,500명이 농촌의 교사, 서기, 의사, 수의사, 간호사, 점원이 되었다." "특히 자발적이고 근본적인 대규모 인민혁명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던 바쿠닌의 추종자들은 자신들이 혁명을 단지 도와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반면에, 라브로프의 제자들은 점진주의의 필요성, 즉 대중이 구질서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기 이전에 교육과 선전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었다." "또다른 인민주의 이론가인 트카초프와 헌신적인 혁명가인 네차예프는 농민들이 행동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혁명가들 스스로 정부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573)


# 1881년 3월 13일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중앙아시아에 대한 적극적인 정복은 알렉산드르 2세 통치기가 되어서야 시작되어, 1865년과 1876년 사이에 일련의 과감한 군사 원정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이 10년 동안에 러시아인들은 코칸트, 부하라, 히바의 칸국들을 정복하고, 마침내 1881년에는 카스피 해 너머 지역을 병합하기도 했다.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로 팽창한 과정은 다른 지역의 식민지 전쟁 및 미국의 서부 확장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 중앙아시아는 상업적인 이유들 때문에, 원료 중에서도 특히 면화의 공급원이자 러시아의 제조품을 위한 시장으로서 매력적이었다. 그곳으로의 팽창은 국경을 안정시키고 약탈적인 이웃 민족들로부터 국경지역에 있는 러시아 정착지를 보호해야 한다는 안보상의 논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마찬가지로 이 시기에는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서구 제국주의와 아주 유사한 사고방식이 러시아에서 발전되었다. 특히 문명국가인 러시아가 후진 민족들을 통제하고 그들에게 질서를 가져다주어야 한다는 견해가 발달했다."(581)


▶ 알렉산드르 3세 통치기(1881-1894), 니콜라이 2세 통치기(1894-1917)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하고 사회적·정치적 혼란이 지속되자, 알렉산드르 3세와 니콜라이 2세는 정치 개혁의 길을 배격했다." "정부는 〈정교화-전제정치-국민성〉이라는 기치를 높이 내걸었는데, 이것은 시대 상황에 부합되지 못했다. 정교회는 다민족 제국에서 다양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거의 결속시킬 수 없었고, 심지어 자신들의 삶과 정체성에서 종교가 더 이상 중심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거나, 그것이 좀더 개인적이고 가변적인 형태의 신앙과 가치라고 생각하게 된 많은 형식적인 정교도 러시아인들조차도 통합시키지 못했다. 전제체제는 19세기보다는 20세기에 훨씬 더 시대착오적인 것이었으며, 진보를 가로막는 방해물이 될 가능성이 더 컸다. 여전히 차르와 인민 사이가 사랑과 헌신으로 신비롭게 결합되었다는 가부장적인 이상에 기반을 두는 민족주의는 일반적인 러시아인들의 정치적·사회적 욕구를 거의 충족시키지 못했다. 민족주의는 다민족 국가를 분열시켰을 따름이다."(583-4)


"니콜라이 2세는 차르의 무제한적인 개인 권력만이 러시아의 힘과 안정과 심지어 국가로서의 진보를 보증해준다고 명백히 믿었다. 그러나 이것은 도덕적인 능력이었으며, 정교회와 민족성과 결합된 전제정치였다." "늘 그렇듯이, 그는 〈차르의 심장은 신의 손안에 있다〉라는 전통적인 속담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는 러시아의 통치자는 국민들과 거의 신비로운 사랑이라는 특별한 유대를 맺고 있다고 믿었다. 심지어 1905년에 대규모 대중 소요사태를 당해서 전국적인 대표권을 가진 의회 설립 요구에 동의할 때조차도, 〈독특한 러시아적 원칙에 부합되는 질서의 기반 위에 서 있는 땅의 사람들과 짐 사이의 교감, 차르와 모든 루시 사이의 연합이 옛날 시대와 똑같이 확립되도록 하라〉고 말했다." "니콜라이의 형편없는 판단력과 황후 알렉산드라의 사악한 영향력에 대한 가장 악명 높은 징조는 라스푸틴처럼 믿을 수 없는 인물이 국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위치로 올라갈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590-2)


"1905년 혁명은 정부의 충격적이고도 억압적인 폭력 행위에 의해서 촉발되었다." "러시아 역사에서 〈피의 일요일〉이라고 알려지게 된 이 사건은 제국 전체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의 정치적·사회적 격변을 초래했다." "(행진을 주도한) 가폰의 노조는 노동자들을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멀어지도록 회유하고, 저렴한 찻집과 교화적 내용의 강연 그리고 일상적인 물질적 필요에 대한 관심을 통해서 전제정치에 대한 노동자들의 충성심을 육성하기 위한 경찰의 노력의 일환으로 1904년에 시작되었다. 그 결과로서 생겨난 조직의 모임은 사회비판, 도덕적 열정, 신성한 목적의 혼합이라는 특징을 가졌으며, 점차로 노동자들을 돕고 옹호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노동자들은 니콜라이 2세가 그곳에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충성스런 신민으로서, 그에게 시정과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겨울궁전 쪽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나 대량 학살로 인하여 분노가 크게 분출되었고, 혁명운동이 또다시 힘을 얻었다."(606-7)


"혁명운동은 10월 20일부터 30일까지 지속된 대규모 총파업에서 절정에 달했는데, 이것은 역사상 가장 대규모이자 가장 성공적인 파업으로 묘사되었다." "10월 총파업 동안에, 그리고 파업을 지도하기 위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노동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소비에트 혹은 평의회를 조직했는데, 이것은 그 당시에는 알려져 있지 않던 미래의 선구적 조직이었다. 니콜라이 2세와 그의 정부는 기본 활동이 마비되었고, 마침내 반대 세력이 엄청난 규모라는 것을 어쩔 수 없이 깨닫자 결국 항복했다." "10월 선언을 통해서 로마노프 가문의 제국은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이 사건은 반정부 세력의 분열을 가져오기도 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이런 개혁이 충분한지의 문제를 놓고 갈라졌다. 좌파 자유주의 입헌민주당원들은 정부의 양보가 미흡하다고 생각했다." "반정부 세력이 이렇게 분열되면서 1905년은 유혈 투쟁 속에서 끝났다. 겨울 동안 토벌 원정대와 즉결 군사재판을 통해서 많은 문제 지역에서 질서가 회복되었다."(607-9)


"1860년대의 급진주의 세대들, 즉 투르게네프의 〈아들들〉은 종종 모호한 급진적 변화 프로그램의 이름으로 기존의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권위를 배격했던 〈허무주의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일차적으로 자신들의 정신적 고향을 발견했다." "허무주의는 젊은 급진파 러시아인들을 기존 질서에 대한 충성심에서 해방시키기는 했지만, 인격의 총체적인 해방이라는 의미에서 사회적이라기보다는 개인주의적이었다." "보다 정교한 사회적 신조는 1860년대와 1870년대에 등장해서 소비에트 시대까지 러시아 급진주의의 상당부분을 지배했던 나로드니체스트보(narodnichestvo), 즉 인민주의의 형태로 갑자기 등장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보면, 인민주의는 인민에 대한 헌신, 자본주의에 대한 거부, 농민공동체의 힘에 의지해서 러시아가 자본주의의 해악을 피할 수 있는 각별한 역사적 기회를 가졌다는 신념, 사회혁명이 정치적 변화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주장 등으로 정의되었다."(676-7)


"러시아 사상과 문화에서 발생된 가장 의미심장한 변화 중의 하나는 최고 단계에 이른 철학에서 대중문화에 이르기까지, 정신적인 것과 종교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유물론에 대한 불만과 종교적·신비주의적 인식에 대한 매력은 아주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도 도달했다. 1908년~1909년 무렵에 나중에 소련의 계몽인민위원이 된 루나차르스키와 작가인 고리키를 포함한 일군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건신론(建神論)〉이라고 알려진, 다시 종교로 관심을 돌린 마르크스주의를 정교하게 만들어냈다. 그들은 차가운 합리주의, 유물론,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결정론이 대중의 혁명운동에 영감을 주기에 부적당하다고 생각하면서, 혁명을 위해서 〈신화〉의 힘을 되찾으려면 잠재의식적인 것과 정서적인 것에 호소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신이 있던 곳에 인간성을 가져다놓았지만, 종교적인 열정, 도덕적 확실성, 악과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의 약속 등을 유지하는 새로운 신앙을 창조해야 한다고 말했다."(682-4)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볼셰비키가 한 약속을 아주 호소력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또한 사회의 불만과 분노가 러시아의 허약한 신질서를 훼손하지 않았더라면, 레닌의 주장은 1917년의 역사에 대한 하나의 보충 설명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물론 질서가 무너지게 된 상당 부분의 원인은 계속된 경제적 붕괴, 특히 도시와 전선에서의 최악의 물질적 상황이었다. 기존의 정치 및 사회적 권위에 대해서 깊은 불신감을 갖고 있던 많은 하층계급 러시아인들이 보기에 유일한 해결책은 자신들의 일상생활에서 자신들이 더욱 많은 권력을 갖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하층계급 러시아인들은 부자들과 권력자들을 불신했고, 2월 이후로 혁명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그들을 비난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그들을 〈인민의 적〉이자 러시아와 혁명의 〈배신자〉라고 낙인찍기까지 했다." "혁명은 〈굴욕과 모욕〉을 끝장낼 것이며, 일반인들에게 부여되는 〈존중〉에 기반한 사회 및 정치 질서를 창출할 것이라고 말해졌다."(699-702)


제6부 소비에트 러시아


"레닌과 볼셰비키는 국가를 통치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명확한 청사진도 없이, 혹은 심지어 명확한 통치전략도 없이 권력을 장악했다. 레닌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인민의 〈에너지, 주도력, 단호함〉을 발휘함으로써 〈공산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혁명이라고 말했다. 1917년 11월에 행한 연설에서 그는 〈모든 노동하는 인민들〉이 〈당신들 스스로 이제 국가를 경영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어느 누구도 기다리지 말고 당신이 직접 일을 독자적으로 해나가도록〉 요청했다. 동시에 레닌은 〈혁명이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권위주의적인 일〉이라는 점을 부단히 상기시켰으며, 10월 이후에는 엄격한 통제, 무자비한 억압, 강철 같은 규율, 심지어 독재에 대해서도 종종 명백하게 말했다." "이런 모순되는 언어는 적어도 정권 초기에 인민의 주도권과 창의력에 대한 진지한 이상을, 지도력과 규율 그리고 중앙 통제에 대한 강력한 신념과 결합시켰던 모순된 정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것이었다."(720-1)


"제헌의회를 해산하기 전이라고 할지라도, 소비에트 초기의 많은 정책은 러시아를 변모시키려는 볼셰비키의 중앙집중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접근 태도를 보여주었다. 1917년 11월에는 언론이 국가의 통제하에 들어갔고, 많은 〈부르주아〉 신문과 온건한 사회주의 신문들이 폐간되었다. 경제를 중앙에서 통제하기 위해서 은행과 대규모 공장은 즉각 국유화되었고, 대외무역은 국가가 독점했으며, 12월에는 국가의 경제계획을 발전시키기 위한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1917년 12월에 정부는 무시무시한 〈체카(Cheka)〉를 설치했는데, 이것은 10월 이후에 흔히 발생하던 일상적인 폭력과 약탈, 그리고 반체제 활동 혐의에 대항해서 싸웠다. 그때부터 정치경찰은 소비에트의 생활에서 기본적인 현실이 되었다. 정부는 자유주의적인 입헌민주당을 〈인민의 적들의 정당〉이라고 선포했으며, 심지어 많은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들도 새로운 질서에 대한 위험한 반대세력이라고 간주했다."(724)


"국내 전선에서 전시 공산주의는 대체로 소비에트 체제가 외부의 적들과 벌이고 있던 격렬한 싸움의 결과로서 엄격하게 실시되었다. 국가는 1918년 여름부터 대규모의 잔혹한 전면 내전에 돌입했다. 소위 백군(白軍)이 들고 일어나서 적군(亦軍)에 의한 러시아 통치에 도전했던 것이다." "많은 외국들은 러시아에 무장 병력을 파견하거나 지방의 반정부 운동과 정부들을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1919년 10월부터 1920년 1월까지 소비에트 러시아를 봉쇄함으로써 개입했다." "이것은 볼셰비키가 더 큰 결단력과 경계심을 갖도록 자극을 주었을 따름이었다.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전시 공산주의는 무절제한 유토피아주의의 시기였다. 급진주의자들은 계급 없는 자유로운 사회라고 오랫동안 꿈꾸어오던 진정한 〈공산주의〉로 갑작스럽게 도약할 수 있다고 상상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다시 볼셰비즘 안에서 급진적인 해방과 지독한 권위주의가 이상하지만 지속적으로 뒤엉키는 모습을 볼 수 있다."(725-6)


# 적군의 승리 요인

1. 내전에 개입한 연합국들 간의 부실한 협력 관계

2. 볼셰비키가 주요 도시, 인구, 산업체, 군수품을 장악한 상황

3. 반볼셰비즘 외에 공통분모가 없던 백군 내부의 분열

4. 백군의 비러시아 민족들에 대한 반反분리주의, 농민들에 대한 반反토지개혁 성향


"전제정치가 붕괴된 직후에 러시아 제국으로부터의 이탈이 시작되었다. 1917년에 핀란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벨라루스가 독립을 선언했고, 1918년에는 에스토니아, 우크라이나, 폴란드, 자캅카스 연방(이후에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으로 해체됨)이 그 뒤를 따랐다. 1917년 12월에 개최된 제4차 중앙아시아 이슬람 교도 대회는 투르키스탄에 대한 자치를 선언했고, 중앙아시아에는 다양한 공화국이 등장했다. 폴란드 및 리투아니아와는 달리, 이런 국가들은 역사상 처음부터 독립국가들이었다. 자유주의적인 임시정부는 제국이 분열됨으로써 국가가 약화될 것을 우려했지만, 볼셰비키는 권력을 얻기 위해서 투쟁하면서도 모든 민족이 〈자결권〉을 가진다는 원칙를 고수했다." "그러나 볼셰비키 지도자들도 이론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연대 정신에 따라서 제국의 영토를 한데 묶어놓기를 희망했다. 그러므로 민족의 독립을 주창하던 사람들은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이라고 책망받았다."(733)


"스탈린이 자신의 연합 세력 및 숭배 세력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정치적 접근법이 가진 상호 연관된 두 가지 특징 덕분이었다. 첫째로, 그는 보통의 공산주의자 대중을 위하여 이데올로기를 단순화했고, 심지어 신성하게 만들었다." "레닌 사후에, 스탈린은 레닌의 저서를 도그마로, 반대 의견을 이단으로 간주하는 데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둘째로, 스탈린은 일관되게 낙관론, 희망, 신념을 강조했다. 예를 들면 트로츠키가 (레닌이 그랬던 것처럼) 장기적인 관점에서 러시아에서의 사회주의의 성공은 서구의 선진국들에서 혁명이 발발하여 사회주의자들이 권력을 잡게 되는 것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을 때, 스탈린은 〈영구혁명론〉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신뢰감〉을 조금도 보여주지 못하는 〈영구절망론〉이라고 조롱하면서, 〈일국사회주의론〉을 제시했다." "스탈린의 노선에서 벗어난 모든 편향을 비난했던 제15차 당대회는 신경제정책의 종식과 제1차 5개년 계획의 시작을 의미하는 조치를 채택했다."(748)


"제1차 5개년 계획은 분명히 경제에 대한 것 이상이었다. 〈위대한 전환〉이라고 불린 그것은 사회의 모든 측면을 변모시키려던 혁명이었다. 1928년에 샤흐티 석탄광산의 기술자들이 사보타주를 벌였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은 사건은 제국주의자들과 음모를 꾸몄다는 〈부르주아 전문가들〉에 대한 공개재판의 시발점이었고, 계급투쟁이 재개되었음을 가장 명확히 보여주는 선동 조치였다. 사회 전반에 걸쳐서 공산주의자들은 기존 전문가들에게, 특히 그들이 〈이질적인〉 계급 배경 출신이라면 그들의 권위에 도전하도록 격려받았다. 비공산주의 및 비노동자 출신의 기술자, 현장감독, 교사, 언론인, 국가 공무원, 작가 등에 대한 숙청의 폭풍이 몰아쳤다. 〈문화혁명〉이라고 불렸던 이것은 국가와 당이 착수했으나, 소비에트 사회 전반에 걸쳐서  그 혁명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벌어진 숙청으로 인하여, 노동자들과 공산주의자들에게 엄청난 신분 상승의 기회가 생겼다."(758)


"최근의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스탈린 체제는 단지 철권 통제, 억압, 공포에만 의지할 수는 없었다. 사회주의적 건설을 위한 열정, 〈부르주아〉 전문가들에 대한 계급적 적대감, 이데올로기적이거나 사회적으로 이질적인 사람들을 희생시켜서 위계질서에서 상승하려는 개인적인 야망 등은 체제의 동맹 세력과 지지 세력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여기에 구체적인 보상도 있었다. 특히 제1차 5개년 계획이 종료된 이후에, 동원 자체를 위한 동원은 물질적인 혜택도 약속하는 경향으로 대체되었다. 예를 들면, 스타하노프 노동자들은 새로운 의복, 자전거, 축음기, 라디오, 자기, 리넨 제품, 피아노 등을 보상받았으며, 그들이 당 집회나 생산 모임에서만이 아니라 파티와 무도회에서 여가를 보내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제시되었다. 실제로, 공공생활에서 행복은 널리 확산된 주제가 되었다." "신문은 적들과 숙청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매력적인 새 모자와 신발 그리고 공원에서의 무도회와 축제를 위한 광고로 가득 차 있었다."(769-70)


"흐루쇼프의 개혁 조치는 비록 많은 경우에 뜻하지 않은 결과가 생기거나 단지 실패에 그치기는 했지만, 많은 분야에서 의미심장한 계획을 담고 있었다. 그의 최우선 순위는 농업이었다. 농업 분야에서 그는 당이 생산에 좀더 적극 관여하도록 독려함으로써 행정을 재조직하고 〈처녀지〉 캠페인, 육류와 우유 캠페인 등 다양한 영웅적인 〈캠페인〉을 통하여 생산에 자극을 주려고 시도했다. 그는 또다시 행정적인 재조직과 캠페인을 통해서 소비재의 더 많은 생산과 좀더 나은 산업 경영을 장려하려고 시도했다. 대규모 주택건설 붐도 시작되었다." "아마도 가장 중대한 개혁은 문화의 탈스탈린주의화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문제점과 환멸감이 급속히 뒤따라 몰려왔다. 경제 발전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탈스탈린화 혹은 좀더 포괄적으로 말하면 소련 생활의 어느 정도의 〈자유화〉는 창의적인 공산주의의 에너지를 분출시켰다기보다는, 사실상 스스로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지고, 불안정을 초래했다."(819-21)


"흐루쇼프의 후계자들은 아주 다른 정신과 목적을 가지고 통치했다. 지도 원칙은 변화가 아니라 안정이었으며, 혁명이 아니라 질서였다. 1964년에 권력에 오른 새로운 집단지도부는 1917년 이후에 성년이 된 사람들로서는 첫 번째 통치자 세대였다. 그들은 혁명기에 어린이였고, 대부분 기술교육을 받았다." "대체적으로, 그들은 안정된 권력과 효율적인 경제발전 정책에 관심을 갖고 있던 실용적인 인물들이었다." "새로운 지도자들─특히 당수 브레즈네프, 수상 코시긴, 당 이론전문가 수슬로프, 최고 소비에트 의장인 포드고르니 등의 인물들─은 흐루쇼프의 대부분의 개혁 조치를 되돌리기 위해서 재빨리 움직였다. 그의 행정 재편은 취소되었다. 직책의 임기를 제한하고 관료제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을 장려하려는 급진 사상은 관료에 대한 직업적 안정성을 보장해주는 보수적인 정책으로 대체되었다." "지방의 주도권에 박차를 가하려던 경제적 실험은 모스크바의 중앙 통제로 대체되었다."(822-3)


"1982년 11월 10일, 브레즈네프가 사망한 후, 68세의 안드로포프가 서기장직을 맡은 것은 예상 밖의 일이 아니었다. 안드로포프는 어느정도의 세련미와 비범한 지성을 갖춘 사람으로서, 1982년 5월에 당 서기국에서 일하기 위해서 교체될 때까지 15년 동안 정치경찰인 국가보안 위원회의 수장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브레즈네프 치하의 정체(停滯)와 부패를 날카롭게 비판했떤 안드로포프는 고심 끝에 즉각 행정기구를 숙청하고, 결근 노동자들을 찾기 위해서 공공장소를 경찰이 조사하도록 하는 획기적인 조치 등으로 노동규율을 강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신장병으로 갑자기 중단되었고, 그는 지도자 지위에 있은 지 불과 1년 3개월 만에 사망했다. 안드로포프를 대체한 인물은 브레즈네프가 후계자로 생각했으나 이미 건강이 좋지 못했던 체르넨코였다. 그가 소련 지도자가 된 후 1년도 생존하지 못하자, 1985년 3월 11일에, 안드로포프의 후견을 받은 고르바초프가 정치국에서 당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826)


"고르바초프, 그리고 셰바르드나제와 야코블레프 같은 그의 원래의 동료들이 소련의 개혁을 시작했을 때 정확히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는 자신들에게도 분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르바초프 개혁의 토대에는 소련이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낮은 경제성장률은 점증하던 환멸감 및 비관론과 결부되었다.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그는 우선 위기를 공개적으로 인정함으로써 위기에 대응하라고 지시했다. 정부와 당은 낮은 경제성장률, 생활수준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 암울한 농업 상태, 제조품의 빈약한 질 등 경제 문제들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심화되고 있던 〈정체(停滯)〉─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을 가리키면서 널리 사용된 용어─에 대한 인정은 문화적 위기와 이데올로기적인 위기에 대한 인정과 짝을 이루었다." "고르바초프의 선언에 따르면, 소련은 한마디로 경제적 위기와 더불어 〈정신적 위기〉에 직면해 있었으므로, 재건축(페레스트로이카)이 필요했다."(892-4)


"아주 중요한 점은 고르바초프가 레닌주의적 사회주의의 이상을 강력하게 신봉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 만큼 그는 소련 사회의 실질적인 쇠퇴는 말할 것도 없고, 당 생활을 포함한 소련 생활의 많은 부분에서 자신이 목격한 광범한 냉소주의를 수용하기 어려웠다. 고르바초프는 소련 초기에 행한 레닌의 말을 종종 되풀이하면서, 개혁된 선봉 세력과 〈민주화〉의 결합을 통해서 소련이 활력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민주화는 경제 및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국민들의 신념에 또다시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열쇠였다. 그리하여 고르바초프는 시민들이 공적 생활에 더욱 참여하고, 더 많은 주도권을 가질 것을 촉구했다. 동시에 그는 러시아의 오래된 정치적 전통만이 아니라, 레닌을 뒤따라 강력한 중앙의 권위가 변화의 시기에 필수적이라고 믿기도 했다." "고르바초프는 사회주의에 대해서 말할 때, 그것의 본질적인 〈휴머니즘〉, 〈보편적인 인간적 가치〉의 옹호와 증진에 대해서 종종 거론하곤 했다."(894-5)


"소련의 민족정책 자체가 소련에서 민족주의 혹은 여러 민족주의의 대두에 기여했다는 점은 중요하다. 민족주의는 모스크바의 통치에 대한 반응이자 항의였을 뿐만 아니라, 소련이 다민족국가라는 공식적인 이상의 결과였으며, 그에 수반되어 민족문화와 정체성을 장려하는 정책을 취한 결과였다. 경제 발전, 도시화, 교육도 민족 및 종족 지도자들의 대두에 기여했다." "일단 고르바초프가 공개적인 표현에 대한 제약을 느슨하게 하자, 소련의 정책을 통해서는 민족적 정체성과 열망이 근절되지 않았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자치권을 더 달라는 요구는 종종 지방권력에 대한 것이었으며, 숨 막힐 듯한 소련으로부터 독립시켜달라는 것이기도 했다. 민족주의는 단지 과거의 부활이 아니라 억압받던 자들의 귀환이었다. 소련식 사회주의를 작동시키겠다는 고르바초프의 이상주의적인 약속으로부터 거리감을 느끼고 있던 많은 시민들에게 민족주의는 대안적인 신념을 제공했으며, 번영과 자유로 향하는 통로가 되었다."(901)


"소수민족의 공화국들이 자신들의 주권을 주장함에 따라서 소련이 붕괴되기 시작했다면, 1990년 3월에 중심에 있는 거대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이 주권을 주장했을 때 소련의 운명은 거의 필연적으로 결말을 맞이했다. 고르바초프와 그의 정부는 소련의 비러시아계 민족들을 통제하려고 노력할 때 러시아 공화국으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했다. 반대로 러시아 정부의 지도자들은 오래 전부터 〈중앙〉을 러시아의 진로를 가로막는 걸림돌이라고 간주하기 시작했고, 러시아의 〈자치권〉과 심지어 〈주권〉을 주장했다. 그리고 다른 공화국들이 이런 일을 동일하게 하도록 지원하면서 〈법의 전쟁〉을 시작했는데, 여기에서 새로운 러시아 법은 러시아 영토에 대한 소련의 법을 무효화시켰다." "고르바초프는 러시아 공화국을 장악한 옐친을 동료 개혁가로 보았으나, 그가 권위에 대항해서 고개를 들고는 더욱 빠른 속도의 변화를 요구할 정도로 대하기 아주 어려운 동지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907)


"러시아의 정치무대에 집중하던 옐친은 1990년 3월에 새로 신설된 러시아 공화국 의회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최고 소비에트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런 다음 그는 러시아 의회가 국민투표를 실시하도록 설득하여, 러시아 공화국 시민들이 직접 선출하는 새로운 대통령직을 승인하도록 했다. 1991년 6월 12일에 실시된 선거에서 옐친은 고르바초프나 중앙정부의 어떤 다른 지도자도 얻을 수 없었던 대중적인 지지와 민주주의적 절차를 놀랍도록 과시하면서,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옐친이 1990년 7월 12일에, 그리고 그 다음 날 솝차크와 포포프가 공산당을 탈당한 것은 지적할 만한 가치가 있다. 유서 깊은 도시, 장소, 거리는 옛 이름을 되찾았고, 차르 국가의 흰색, 푸른색, 붉은색 국기와 쌍두독수리 문장이 부활되었고, 공개적인 종교행사는 점점 빈번히 개최되었다. 이렇듯 자유주의는 민족주의 및 종교적 부흥과 결합되었다."(908-9)


제7부 러시아 연방


"옐친(1991년-1999년 집권)은 자신의 의사일정의 맨 꼭대기에 경제적 변화를 올려놓았다. 그러나 그 자신은 경제학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었으므로, 추바이스, 가이다르, 키리옌코 같은 경제 개혁가들에 대한 신뢰감을 거듭 표명했다. 그러나 개혁 과정에서 엄청난 어려움이 생기고, 점차로 강력한 이해관계를 가진 반대파가 경제 개혁 혹은 적어도 그런 특별한 종류의 경제 개혁을 원하지 않게 됨에 따라서 대통령은 거듭 후퇴해야 했고, 다른 무언가를 찾으려고 했다. 이런 우여곡절 속에서 옐친은 그보다 앞선 고르바초프와 마찬가지로 모든 방향으로부터 비난받았다. 한때 러시아에서 가장 호평받는 정치인이었던 옐친에 대한 여론조사의 지지율은 2퍼센트, 심지어 1퍼센트로까지 떨어지곤 했다." "그러나 그는 러시아 헌법상 대통령이라는 매우 강력한 지위로부터 큰 도움을 받아서, 정치적으로도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정부 내의 지도적인 인물들을 종종 해임하고 정부의 노선을 다소 변경하기도 했다."(930-1)


"새로운 러시아 연방의 89개 연방주체 중의 하나인 체첸 공화국의 인구는 러시아 인구의 1퍼센트도 안 되었고, 머나먼 캅카스 변방에 위치해 있었다. 그곳은 단지 석유와 가스의 수송로라는 점에서만 중요했다. 이슬람교를 믿는 체첸인들은 19세기 중반에 러시아의 통치를 받게 되자 샤밀의 지도하에 투쟁했고, 1917년 이후에는 소련 권력에 저항했다." "소련이 붕괴되고 소련의 각 공화국들이 독립을 선언하던 1991년에, 소련 공군의 장성인 두다예프가 원로회에 의해서 체첸의 지도자로 선출되어 독립을 선포했다. 그런 다음, 그는 아주 애매한 선거를 통해서이기는 하지만 체첸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두다예프는 모스크바의 권위에 자주 반항했고, 자국이 러시아에서 수많은 범죄 활동의 근거지가 되도록 용인했다. 러시아의 새로운 의회, 국가 두마, 심지어 많은 군 지도자들도 군사 개입에 반대했지만, 옐친은 체첸을 침입하기로 결정했다. 1994년 12월 11일에, 4만 명의 군인들이 체첸으로 파견되었다."(937-8)


"옐친은 러시아가 문명의 길에 서 있도록 하는 데에 자신의 개인적인 역할이 필수적이며, 자신에 대한 모든 반대가 공산주의로의 회귀에 관한 위협이라고 굳게 확신했던 것 같다. 1993년 12월 12일에 새로운 헌법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승리함으로써, 옐친의 입지는 더욱 강력해졌다. 행정부를 완전히 장악한 그는 장관들을 임명하고 해임할 수 있었으며, 입법부의 승인을 얻을 수 없었을 때에는 행정명령에 의해서 필요한 조치를 통과시킬 수도 있었다. 옐친의 헌법은 중앙정부가 지방에 대해서 더 큰 권력을 갖도록 해주었다. 그것은 대통령을 탄핵한다거나 헌법을 개정하는 일도 사실상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전문가들은 헌법을 〈대통령 만능주의적인 것〉이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결국 옐친이 정부예산과 온전한 입법 프로그램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양원제 입법부의 동의를 필요로 했다." "1993년 12월 선거에서 옐친이 거둔 승리는 동시에 실시된 새로운 두마 선거에서 다수 의석 확보에 실패함으로써 빛을 잃었다."(940)


"1999년 여름, 모스크바와 남부 러시아에 있는 아파트 건물 두 동에서 폭탄이 터져, 3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체첸의 테러리스트들은 비난받았고, 1999년 9월에 러시아의 대규모 침입으로 제2차 체첸 전쟁이 시작되었다. 아직까지 잘 보이지 않던 총리 푸틴은 〈우리는 그들을 옥외 화장실 안으로 완전히 쓸어버릴 것이다〉라고 선언하고 극단적인 무력 사용을 인가함으로써 자신의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여론조사에서 푸틴의 지지율은 50퍼센트로 치솟은 반면에, 공식적인 발언에서 점점 일관성을 상실하고 국가정치보다는 자신의 권력과 개인적인 안전에만 관심을 갖는 것 같은 옐친의 지지율은 겨우 1.7퍼센트에 불과했다. 이제 옐친조차도 자신이 옆으로 물러설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옐친은 1999년 12월 31일에 행한 신년 연설에서 대통령직 사임을 발표했다.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임명된 푸틴은 옐친과 그의 가족이 평생토록 법적 소추로부터 면제되는 것과 관대한 연금을 지급받을 것을 보장해주었다."(9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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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역사 - 상 - 제8판
니콜라스 V.랴자노프스키.마크 D. 스타인버그 지음, 조호연 옮김 / 까치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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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서론


"러시아의 성장은 러시아가 위치한 지역의 지리, 즉 확장에 방해가 되는 자연적인 장애물이 별로 없었던 광대한 평원이라는 점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모스크바국은 이런 환경 덕분에 동유럽을 가로질러 아주 쉽게 확대될 수 있었다. 러시아인들은 우랄 산맥을 넘어 곧장 태평양까지, 그리고 심지어 알래스카와 캘리포니아까지 진출했다. 이런 전진은 미국인들의 서부를 향한 대이동에만 비유될 수 있는 것이었다. 마침내 러시아 제국의 경계가 정해졌을 때, 그것은 북쪽과 동쪽으로는 대양과 접해 있었고 남쪽으로는 대부분 바다와 높은 산들 그리고 사막에 접해 있었다. 러시아인들이 일련의 다른 민족들과 뒤섞였던 서쪽에서만 국경과 지리는 무관한 것처럼 보였다. 아주 혹독한 기후 때문에 유럽 러시아의 북부에 흩어져 있는 부족들과 시베리아의 다양한 거주민들은 러시아인들의 전진을 전혀 저지할 수 없었다. 러시아인들은 영토를 쉽게 확대할 수 있었으면서도, 자신들은 외부의 공격을 잘 방어했다."(26-7)


제2부 키예프 루시


"키예프 시(市)는 9세기에 하자르족이 통치하던 동슬라브인들의 거주지였을 것이다. 『원초 연대기』에 따르면, 올레크라고 불리던 한 바랑기아인이 882년에 키예프를 점령하여 그곳을 새로운 수도로 삼고, 비잔티움의 중요한 시장(市場)과 아주 긴밀한 관계를 수립했다. 올레크는 공으로서의 계승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류리크의 젖먹이 아들인 이고리의 이름으로 통치했다. 그러다가 이고리는 올레크가 죽은 후인 913년에 권좌에 올랐다." "올레크와 이고리가 비잔티움과 전쟁을 치른 후 944년에 체결한 조약은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있다. 조심스럽게 작성된 조약의 문구와 놀랍도록 세세한 조항들에서는 루시인들의 콘스탄티노플 체류 문제, 주민들과 루시의 교역, 그리고 일반적으로 양국 사이의 관계가 다루어졌다. 분명한 사실은 비잔티움과의 관계가 특히 교역의 원천으로서 아주 높이 평가되었다는 것이다. 전쟁은 그리스인들과 멀어지지 않도록 이런 관계를 보호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54-6)


"1015년까지 나라를 통치하면서 블라디미르는 몇 가지 점에서 아주 중요한 발전을 이루었다. 첫째, 그는 질서를 수립하고, 내전 시기에 극심한 혼란에 빠진 동슬라브족이 키예프국에 충성을 바치게 하며, 루시 영토를 방어하고 확대하는 정치적·군사적 정책을 계속 펼쳤다." "둘째, 그는 그 이후 500년 동안이나 지속될 정도로 안정적인 키예프 루시의 지배가문의 원칙을 확립해놓았다. 류리크 가문은 러시아에서 정치적으로 합법적인 통치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원천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유명한 일은 블라디미르가 자신만이 아니라 루시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기독교를 수용한 일이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블라디미르가 기독교를 수용한 것은 군주가 비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탁월한 신과 세속적인 정치적 권위와 결합된 교회를 강조하는 종교의 도움을 받아서 다양한 민족들을 단일한 사회로 통합시키고, 자신 및 자신의 왕조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에 도움을 얻으려고 계획한 것이다."(59-61)


"기독교가 러시아로 전래된 것이 로마로부터가 아니라 비잔티움으로부터라는 점은 기억해야 한다. 비록 당시에는 이런 차이가 나중에 인식된 것과 같은 중요성을 가지지 않았지만, 그리고 동구의 교회와 서구의 교회 사이의 분열은 1054년에야 발생되었지만, 러시아가 비잔티움에 충성을 바친 것은 러시아의 이후의 역사의 많은 부분을 결정짓거나, 결정짓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그것은 러시아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외부에 남아 있었음을 의미했고, 반대로 러시아가 가톨릭 교회 자체가 줄 수 있었던 것을 얻지 못하도록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가 나머지 유럽 및 라틴 문명으로부터 상대적으로 고립되는 주된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것은 러시아가 서구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도록 크게 부추겼고, 러시아인들과 폴란드인들 사이의 비극적인 적대감을 조장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블라디미르가 콘스탄티노플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은 당대에 택할 수 있는 최상의 정신적, 문화적, 정치적 선택이었다."(63)


# 키예프 몰락의 여러 가지 이유

1. 지방 공국들의 성장 : 볼리니아-갈라치아, 스몰렌스크, 랴잔, 블라디미르-수즈달, 노브고로드 등의 강력한 공국들과 키예프 왕조 구조 사이의 긴장

2. 사회 갈등 : 농민들의 예속화와 도시 빈민들의 열악한 처지, 노예제도의 상존

3. 경제 붕괴 : 키예프를 우회하는 무역로의 발달로 국제적 지위 하락

4. 정부 체제의 실패 : 친족 간의 공동 통치와 형제 간의 순환 통치 관행이 불러온 만성적인 내부 갈등

5. 외부의 압력 : 스텝 지대의 하자르족, 페체네크족, 폴로베츠족 그리고 최후로는 몽골족의 침략


# 키예프의 정치 제도들

1. 공이라는 지위 : 공은 군사 지휘권, 재판권, 행정권을 갖고 있었지만 관리들은 물론 지방민들과 업무를 조율해야 했다. 키예프 공은 대공 혹은 위대한 공으로 명명되었다.

2. 두마(duma) 혹은 보야르 협의회 : 공 및 그의 측근 가신인 상급 드루지나의 협의회 및 협동 작업에서 발달했으며, 고위 성직자도 두마에서 한자리를 차지했다.

3. 베체(veche) 혹은 민회 : 전쟁이나 평화, 긴급 법령, 그리고 공과의 갈등이나 공들 사이의 갈등 같은 중대 사안을 다루는 자유민 집회로서 만장일치제제를 채택했다.


제3부 분령 시기의 러시아


"오래 전부터 러시아 역사학자들이 해온 주장에 따르면, 분령 시기(udel’nyi period)라고 알려진 분할과 패배의 이 시기, 특히 몽골 침략 이후의 암흑 같은 초기 100년 동안에 있었던 역사적 분열과 종말을 방지한 통합의 끈은 키예프 루시의 제도와 문화에 의해서 마련되었다."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들은 분령 시기가 위기와 생존의 시기였을 뿐만 아니라, 공국들 사이에서 앞을 향한 경쟁의 시기이기도 했고, 변화의 시기이기도 했다고 본다. 각각의 공국들은 키예프의 과거에서 자신들의 유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모스크바가 경쟁 공국들을 물리치고 승자로 입증되었다. 이와 관련해서 역사적 시대 구분이라는 언제나 골치 아픈 문제에 대한 관점에서 보면, 역사학자들이 키예프와 분령 시기를 〈중세 러시아〉라고 부르며, 중앙집권화된 모스크바국의 성립기를 〈근대 초기〉의 출발이라고 규정하는 경향은 점차 늘고 있다. 러시아 발전의 독자성보다는 폭넓은 유럽적 흐름과의 비교 가능성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101-3)


"이 새로운 시기는 우델(udel)이라고 불렸던 분령지, 즉 개별 공의 독립된 보유지를 따라 명칭이 붙여졌다. 그 시기에 분령지는 급속히 증대되었다. 전형적인 경우를 보면, 어떤 통치자는 유언을 통해서 자신의 공국령을 아들들에게 나누어주었고, 그리하여 여러 개의 새로운 정치적 독립체가 생겼다. 분할이 잇달아 이루어지면서, 공국의 허약한 통일성은 파괴되었다." "분령 시기에 있었던 러시아의 분할 현상은 인구 이동과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재편, 그리고 심지어 새로운 민족들의 등장과 결합되었다. 이런 과정은 키예프가 최종적으로 몰락하기 오래 전부터 대체로 점진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과정이 러시아 역사에 미친 총체적인 영향은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스텝 지대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투쟁이 러시아인들을 매우 소진시켜 놓았고 키예프의 운은 쇠락해갔다. 키예프 자체와 남부 러시아가 몽골에 의해서 끔찍하게 파괴된 것은 이런 추세를 강화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을 따름이다."(103-4)


"몽골인들─러시아 사료에서는 타타르인들이라고 불린다─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러시아인들에게 들이닥쳤다. 그들은 1223년에 남동부 러시아에 갑자기 나타나서 칼카 강 인근의 전투에서 러시아인들과 폴로베츠인들을 격파하고 스텝 지대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돌아와서는 1237~1240년에 러시아를 정복했고, 오랫동안 러시아를 통치했다." "유럽 침공을 시작한 몽골인들은 1236년에 우랄 산맥을 건너서 볼가 불가르인들을 처음으로 공격했다. 1237년에 그들은 러시아의 동쪽에 있던 랴잔 공국을 북쪽 방향에서 기습 공격했다. 몽골인들의 전략에 따르면, 유럽 쪽에 대한 주된 공격을 하기 위한 측면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러시아를 정복할 필요가 있었다. 러시아의 공들은 단결하지 못했고,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자신들의 성격대로 그들 중의 많은 이들은 침입을 받은 공국을 도우러 가거나 합동작전을 펴기보다는, 자신들의 자리에 머물렀고 격렬한 전투 끝에 차례차례 함락되었다."(107-110)


"노브고로드, 혹은 정식 명칭을 사용하면 대노브고로드 공국은 분령 시기 러시아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중요한 국가 중의 하나로서, 그리고 많은 역사학자들이 주장에 따르면 모스크바국의 성장과 통치로부터 수반된 중앙집권화된 전제체제 형태의 중요한 정치적 대안으로서 눈에 띈다. 사실 비교적 자유롭고 민주적이며 세계시민주의적인 노브고로드에 대한 기억은 19세기 및 그 이후의 러시아의 반정부 세력에게는 러시아의 억압된 민주주의 유산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에 못지않게 러시아 땅을 서유럽의 강국들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한 노브고로드의 역할은 러시아 역사에서 노브고로드가 가지는 반(半)신화적인 지위의 일부분이 되었다. 키예프의 세력과 권위가 쇠퇴하고 경제적, 정치적 무게 중심이 바뀌었을 때, 노브고로드는 가장 큰 교역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북부 러시아의 수도이자, 실제로 전 러시아의 지도적인 도시로 부각되었다."(120-1)


# 노브고로드의 제도와 생활방식

1. 13세기 후반에 은으로 만든 새로운 화폐인 루블 도입

2. 공을 초청하거나 해임할 수 있고, 각종 군사, 사법, 행정권을 행사한 베체(민회)의 막강한 권한

3. 대주교가 주관하고 보야르 집단이 참석하여 베체의 논의와 입법 조치를 견제한 명사 협의회

4. 자체의 베체와 관리를 보유한 지방의 자치권과 자율성 보장

5. 인간 생명을 존중하여 주로 온건한 처벌을 내린 사법체계


"14세기에 변방의 보잘것없는 소도시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소군주의 후손들이 러시아 역사의 진로를 바꿔놓았다. 모스크바는 14~15세기에 강력하고 팽창하는 왕조 국가의 중심이 되었다. 이 국가는 통치자의 '세습 재산'으로 정의된 엄청난 부와 광대한 영토에 의해서, 중앙집권화된 정치권력에 의해서, 경쟁자들과 몽골 칸국에 대한 군사적인 승리에 의해서, 유산과 운명이라는 세속적이고도 종교적인 개념에 근거를 둔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강화되었다. 사실, 필연성이라든가 민족적 운명이라는 압축된 의미를 갖고서 이 과정을 〈러시아 땅 모으기〉라고 묘사한 전통은 이 과정에 대한 많은 역사 서술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모스크바는 1147년 이전에 공이 거주하는 마을이나 정착지로서 출발했고, 12세기 중엽에는 벽으로 둘러싸인 중심지, 즉 소도시가 되었던 것 같다." "14세기에 그곳에는 목재로 된 크지 않은 요새(크렘린)가 있었고, 그 옆에는 상인 및 수공업자들의 주거지와 농가가 있었다."(145)


"14세기부터 몽골 제국은 부흥기를 경험하기도 했지만, 서서히 분열되며 약화되고 있었다. 흑사병으로 인한 황폐화, 발칸 지역과 중국 문제로 인해 취약점을 보이던 상업망, 킵차크 한국 내의 격렬한 권력 투쟁 등은 러시아의 공들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몽골인들이 힘을 보유한 동안에는, 모스크바의 공들은 칸들에게 완전히 복종하며, 열심히 그들에게 협력했다. 그들은 몽골인들을 도우면서, 참을성이 없고 투지가 넘치는 트베리와 몇몇 다른 러시아 땅이 파괴되도록 하여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이후에, 대공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이에 더해서 그들은 몽골인들을 위하여 공물을 거두었고, 그리하여 다른 러시아 공들에 대해서 어느정도의 재정적인 권위,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사법적인 권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반 3세는 마침내 칸국에 대한 충성을 거부함으로써 이런 점진적이지만 변화를 초래하던 과정을 완성했는데, 몽골인들은 그것을 중단시키거나 되돌릴 수 있는 힘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았다."(165-6)


"이반 3세의 아들인 바실리 3세는 부친을 이어서 1505년부터 1533년까지 통치했다. 새로운 통치자는 많은 면에서 선임자의 정책을 지속했으며 완성시켰다. 바실리 3세는 1511년에 프스코프를 획득하고, 1517녀에는 랴잔의 나머지 부분을 모스크바국에 합쳤을 뿐만 아니라 스타로둡, 체르니고프-세베르스크, 오카 강 상류지역 등 남아 있는 모든 분령지를 사실상 병합했다. 모스크바국의 통치자인 바실리 3세는 스몰렌스크를 목표로 세번의 군사작전을 단행하면서 리투아니아와 싸웠고, 마침내 1514년에 스몰렌스크를 점령했다. 그 결과 1522년에 체결된 조약으로서 러시아가 얻은 영토는 승인되었다. 그는 이반 3세의 정책을 지속하여 카잔 한국에 대해서 압력을 가했고, 그쪽 방향으로 러시아 국경을 확대했다. 바실리 3세는 신성로마제국과 교황청, 그리고 투르크의 유명한 술탄인 술레이만 1세, 그리고 심지어 인도의 대무굴 제국의 건립자인 바바르와도 외교관계를 수립했다."(162-3)


"모스크바국은 토지 소유권의 형태를 크게 바꾸었다. 분령 시기의 대부분 동안, 궁정이나 교회 토지를 제외하고는 토지 보유의 지배적인 유형은 보트치나로 알려진 세습 영지였는데, 이것은 사거나 팔거나 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는 사유지였다." "그러나 이반 3세와 그 이후의 공들 사이에서는 조건부적인 토지 보유 형태인 포메스티예가 점차 일반화되었다. 포메스티예는 군사적인 봉직을 맡은 대가로 전적으로 공의 재량하에 부여된 토지였다. 포메스티예 소유인이 공에게 봉사를 계속하거나 그의 형제나 아들이 그의 사후에 봉사를 제공할 수 있는 한, 포메스티예는 그 가문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보트치나와는 달리, 포메스티예는 팔거나 돈을 마련할 목적으로 저당 잡힐 수 없었다. 포메스티예 체제의 핵심적인 목적은 이반 3세와 그의 후계자들이 자신들의 군사 봉직자들에게 생활 기반을 제공하고 그들의 충성심을 확보하는 것이었다."(175-6)


"모스크바국의 통치자들은 바실리 3세의 치세 무렵에는 이전에 키예프국의 영토였던 곳의 많은 부분을 자신들의 통제하에 둘 수 있었지만, 키예프국의 유산 중 또다른 많은 부분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땅으로 남아 있었다. 사실상, 서부 러시아의 역사는 수 세기 동안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의 사회체제 및 성쇠와 연결되어 있었다." "리투아니아인들이 사실상 흑해로까지 확대된 이후에 인구의 3분의 2 혹은 심지어 4분의 3이나 그 이상은 러시아인들이었다고 추산된다. 도시는 여전히 러시아적 성격을 유지했고, 러시아의 보야르들과 정교회는 자신들의 높은 지위와 폭넓은 특권을 계속 보유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공들은 모두 리투아니아의 대공에게 속했지만 리투아니아 공들 바로 옆에서 각자의 분령지를 계속 지배했고, 양 귀족 사이의 통혼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리투아니아의 통치자들은 비록 이교도이기는 했지만, 정교도 신민들의 통치자로서 자신들이 맡았던 역할을 교회로부터 승인받으려고 했다."(198-201)


"리투아니아 군주 가운데 가장 크게 영토를 확장한 비톱트는 1399년에 몽골인들에 대한 중요한 작전을 펼치다가 참패를 당함으로써 큰 낭패를 보았다. 일부 학자들은 비톱트가 보르스클라 강변에서 승리했더라면, 모스크바와 폴란드 양쪽에 대해서 자신의 의지를 성공적으로 관철시킬 수 있었을 것이고 그리하여 동유럽의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결국 리투아니아를 위해서는 야기엘로의 결혼이 비톱트가 벌인 전쟁 혹은 리투아니아와 모스크바국 사이의 결혼동맹(바실리 2세는 비톱트의 손자)보다 더 중요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것은 리투아니아의 폴란드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의미심장하게도, 야기엘로는 야드비가와 결혼하기 위해서 정교회를 포기하고 로마 가톨릭을 선택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나라의 이교도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도록 만들었다. 자연히 성직자들이 폴란드로부터 리투아니아로 건너왔고, 교회는 폴란드가 행사한 영향력의 강력한 거점이 되었다."(202-3)


제4부 모스크바 러시아


▶ 이반 뇌제 통치기(1533-1584)


"이반 뇌제(이반 4세)는 통치 후반기에 이르러 보야르들과 점차 격렬한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어떤 의미에서 차르와 보야르 사이의 갈등은 논리적으로 그 이전의 역사부터 초래되었다. 모스크바국의 절대주의가 이반 뇌제와 함께 최고조에 달했을 때, 모스크바 팽창됨에 따라서 지속적으로 성장하던 보야르 층은 군주의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세력 중의 하나였다. 더구나, 보야르들은 모스크바국의 통치자들이 파괴하려고 열심히 노력했으며 그리하여 성공을 거두었던 고래의 분령 질서와 부분적으로 연관되었다." "공포의 통치가 그 뒤를 이었다. 리투아니아로 도망갔던 쿠릅스키 공과 관계된 보야르들과 그 외 사람들이 최초로 몰락했다. 다음 차례로는 차르의 사촌인 스타리차의 블라디미르 공이 자신의 친척들, 친구들, 동료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혐의자들과 희생자들의 범위는 점점 넓어졌다. 이반 뇌제는 (자신을 향한) 어떤 반대도 용납하지 않았다."(222-6)


"이반 뇌제는 1560년 첫 번째 아내 아나스타샤의 사망 이후에 정서적인 균형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이반은 기이한 개인적인 행동과 외모에 더하여, 잔인한 행동을 종교성과 결합시켰다. 그는 계속해서 기도했고, 종교 서적을 읽었고, 새로운 성인들을 배출했다. 그리고 그는 참회를 구하면서 살해당한 모든 사람들이 이름을 모으도록 하고는,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직접 기도했다. 잔인함과 경건함이라는 역설적인 혼합은 민간 자료에 나타난 이반 뇌제의 이미지에 반영되었다. 민요와 민간 이야기에서 이반 뇌제는─엄격함, 무시무시함,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의 혼합물로서의 그로자(groza)라는 의미에서─〈그로즈니 차르〉로서의 모습이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으면서도, 분노하고, 전제적이며, 잔인하고, 불공정하며, 끔찍할 수는 있지만 자애로우며, 용서를 잘하고, 관대하며, 정의로우며, 심지어 신하들과 동료들이 훌륭한 조언으로 자신을 반대할 때조차도 그들을 존중하는 통치자로 그려진다."(227)


▶ 동란의 시대(1598-1613)


1. 왕조의 문제 : 차르 표도르의 서거 후 정상적인 제위 계승자가 한 명도 없는 상황에 직면하면서, 자신이 제위 계승자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다수 등장하였다.

2. 국가적 문제 : 내분으로 러시아가 약화되자 폴란드와 그보다는 약하지만 스웨덴 역시 이 상황을 자신들의 영토상의 이익에 걸맞게 이용하려는 충동을 느꼈다.

3. 사회적 문제 : 봉직자들(봉직귀족, service gentry)이 성장하면서 이들이 봉직의 대가로 받은 영지인 포메스티예에 귀속되는 국유지와 농민들이 늘어났다.


▶ 미하일 로마노프 통치기(1613-1645)


"미하일 차르의 정부는 대가를 치르기는 했지만 외국의 공격을 제지했고, 국제관계를 안정시키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구스타부스 2세 혹은 구스타부스 아돌푸스를 새로운 왕으로 맞아들인 스웨덴은 유럽의 다른 지역을 차지했기 때문에, 1617년에 스톨보보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협정에 따라 스웨덴인들은 노브고로드와 그에 인접한 북부 러시아 영토를 반환했으나, 핀란드 만을 따라 난 띠 형태의 영토는 계속 보유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러시아인들을 바다로부터 멀리 밀어낼 수 있었다. 게다가 스웨덴은 2만 루블을 받았다. 폴란드인들은 좀더 큰 야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1617~1618년에 블라디슬라프가 러시아로 원정을 떠났다가 모스크바를 차지하는 데에 실패한 이후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14년 동안의 효력을 가지는 데올리노 휴전이 1618년에 체결되어, 폴란드는 스몰렌스크와 서부 러시아에 있는 몇몇 다른 점령지를 계속 보유하게 되었다."(262-3)


"농노제는 모스크바국의 경제와 사회 체제의 기반이었다. 농노는 노동력으로 귀족을 부양했고, 그럼으로써 국가 전체의 구조를 지탱해주었다. 농민들이 예속된 역사는 키예프 시기까지 소급될 정도로 오래되었다. 노예제를 포함하여, 초기에 성립된 농민들의 예속 상태는 계약의 결과였다. 농민들은 주로 금전이나 곡물 혹은 농기구를 빌린 대가로, 지주에게 오브로크라고 불리는 지대를 납부하고, 바르시치나라고 불리는 부역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비록 1년부터 10년에 이르는 기한이 정해졌다고 할지라도, 농민들이 채무를 다 갚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에 협정은 연장되는 경향이 있었다. 사실 농민들이 지주들에게 매년 내는 분담금은 종종 대부금에 대한 이자에 불과했다. 특히 봉직귀족계급이 믿을 수 있는 농업 노동력의 근원을 확고히 하려는 필요성 때문에, 농민들의 이동을 제한해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되었다." "17세기 말에는 농노의 증여 관행이 발달되었다. 즉, 농노는 사실상 노예로 취급되었던 것이다."(276-7)


"도시민의 중심 계급은 여러 계서적인 집단으로 세분된 상인과 수공업자였다. 1649년에 제정, 공포된 『울로제니예』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특히 과세를 위해서 도시 생활을 규제했다. 사실 정부는 세금의 많은 부분을 도시에서 징수했다. 과세를 집단적으로 책임지고 있던 도시 공동체로부터의 청원에 대한 반응으로, 교회나 부유한 상인들이 주로 관리하고 있던 〈백민(白民, belyi)〉 교외 지역이 법으로 폐지되었고, 모든 도시 집단이 과세 대상자인 〈흑민(黑民, chernyi)〉 도시로 통합되었다. 그리고 정부는 세금을 납부하는 공동체에 도시 교역과 제조업에 관한 독점권을 부여했다. 이런 혜택과 더불어, 『울로제니예』는 도시민들도 사실상 농노화했다. 도시민들은 도시의 허가 없이는 세금을 납부하는 공동체를 떠날 수 없었고, 도망친 도시민들을 회복시키는 제한 규정도 폐지되었다. 상인들과 수공업자들도 아들이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받아야 하는 폐쇄적이고 세습적인 카스트이자 비유동적인 계급이 되고 말았다."(278)


"17세기에 이루어진 모스크바국의 확장으로 인해서, 과거 모스크바 공국의 서쪽, 북쪽, 남쪽, 동쪽에 있는 영토와 민족들이 차르의 지배하에 들어오게 되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서쪽으로의 영토 팽창, 특히 우크라이나를 복속한 1654년의 협정이 과거 러시아 영토의 재통일이라고 오래 전부터 주장해왔던 한편, 대부분의 학자들은 동쪽과 남동쪽으로의 팽창은 〈식민지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남부 스텝 지대로의 진출은 카잔 한국과 아스트라한 한국을 정복한 이후에 계속되었다." "가장 극적인 팽창은 동쪽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비록 실질적인 정착은 좀더 느리게 진행되었지만, 같은 30년 동안 러시아인들은 넓디넓은 시베리아를 탐사하고 정복하면서 오비 강으로부터 태평양에 이르기까지 약 4,828킬로미터를 전진해나갔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인들은 별다른 저항 세력을 만나지 않았다. 이 지역에는 강력한 정치 공동체가 전혀 없었으며, 지방 엘리트들의 협조도 쉽게 이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288-9)


제5부 제정 러시아


▶ 표트르 대제 통치기(1682-1725)


"표트르 1세가 당대인들에게 심어준 인상은 엄청난 힘과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2미터가 넘는 키와 단단한 체구를 가지고 있던 차르는 깜짝 놀랄 만한 육체적 힘과 활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런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는 그의 통치기 전체를 상징하는 개인적인 특성이었다." "그는 처음에 사병으로 복무를 시작하여, 초급 장교로 승진하기 전에 모든 무기의 사용법을 배우면서 보병과 수병의 업무를 맨 밑바닥부터 익혔다. 군주는 폴타바에서의 승리 이후에는 육군대장 계급을, 대북방 전쟁의 성공적인 마무리 이후에는 해군대장 계급을 획득했다. 그는 성격상 모든 곳에 가보고 모든 것을 직접 보기를 원했으므로, 방대한 자신의 국토를 이전의 어떤 모스크바국 군주도 하지 않았던 정도로 이리저리 여행했다. 더구나 전례가 없는 방식으로 그는 1697~1698년과 1717년 두 차례에 걸쳐서 배움을 목적으로 서유럽으로 갔다." "그는 이론이 아니라 기술과 기능을 익히기 위해서 서구로 갔다."(321)


"동시에, 표트르는 과격하고 거칠고 잔인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그의 인상적인 정치인으로서의 모습과 완전히 무관하지 않았다. 그는 필요하다고 느낄 때에는 자신의 곤봉으로 귀족들, 친구들, 다른 궁정 사람들을 직접 때렸다. 정치적으로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주저하지 않고 반대자들을 유혈 진압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표트르 대제를 그가 숭배했던 이반 뇌제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 개혁가는 결코 스스로 과대망상증이나 피해망상증의 편집증적인 세계에 빠져 있지도 않았고, 자신을 국가와 동일시하는 것조차 거절했다. 하나의 구체적 사례를 언급하면, 표트르 1세는 군사적 헌신의 대상으로서 〈폐하를 위해서〉라는 구절을 지워버리고 그것을 〈국가를 위해서〉로 대체했다. 그는 자신의 국가에 봉사하고, 자신의 국가를 변화시키고 깨우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일관되게 기울였다." "모스크바의 외국인 거주 구역에서 표트르는 육군과 해군 업무, 기하학, 요새 축성등을 다양한 전문가들로부터 배웠다."(321-3)


"1721년 8월 30일, 대북방 전쟁에서 패한 스웨덴은 러시아와 니슈타트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핀란드의 상당 부분을 반환하고 200만 릭스-달러를 지불하기는 했지만, 리보니아, 에스토니아, 잉게르만란트, 카렐리아의 일부 그리고 몇 개의 섬을 획득했다. 사실상 러시아는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서 나중에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라는 독립국이 되는 소위 발트의 주들,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와 핀란드 만 옆에 있으며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남동부의 핀란드 국경지방을 얻었다. 특히 러시아는 비보르크라는 요새를 점령함에 따라, 핀란드 만을 실질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러시아는 스웨덴에게 굴욕을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오랜 적수인 폴란드에 대해 우세를 확보했으며, 독일 문제에 직접 관여─차르가 자신 및 이복형제인 이반 5세의 딸들을 위해서 결혼동맹을 주선한 것도 포함되었다─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러시아는 유럽의 주요 강국으로 성큼 나서게 되었다."(333)


"표트르 대제는 소위 이성의 시대 동안에 유럽에서 설파되고 어느 정도는 실행에 옮겨진 계몽 전제주의를 믿었다. 그는 전제정치 및 통치자와 신민 사이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개념을 모스크바국의 전통이 아닌 스웨덴으로부터 빌려왔다. 이반 뇌제와는 달리 표트르 대제는 법을 최고로 존중했고, 스스로 국가의 첫 번째 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일반적인 관점에 따라서 보야르 두마나 젬스키 소보르를 싫어했고, 전임자들보다 훨씬 더 고압적인 태도로 교회를 다루었다. 그리하여 그 개혁 군주는 모호하지만 실질적으로 절대 권력의 행사를 방해하던 모스크바국의 전통적인 제도들을 대체로 피했다. 그런 것들 대신에 그는 통치기구라는 완전히 새로운 조직을 구축해놓았다." "콜레기아(collegia)를 신설하면서 황제는 집행부의 다양한 분야를 전적으로 책임지게 할 수 있을 정도로 믿을만한 보좌관들이 충분하지 않으므로, 서로를 견제할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단언했다."(339-40)


▶ 표트르 대제 이후 ~ 예카테리나 대제 이전


"1725년부터 1762년 사이에 러시아에서는 통치자가 빈번히 교체되고 총신들이 계속해서 등장했다가 몰락했지만, 근본적인 사회적 변화는 계속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주의 권력과 지위가 강화되었고, 그에 반비례해서 농노의 지위는 더욱 악화되었다는 점이다. 아들 한 명만이 부친의 영지를 상속해야 한다는 표트르 대제의 주장은 심지어 개혁 군주의 통치기에도 거의 시행되지 못했고, 1731년에는 공식적으로 철회되었다. 안나 여제는 대규모의 국가 토지를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들에게 넘겨주었는데, 그 땅에 있던 농민들은 농노가 되었다. 엘리자베타도 이런 관행을 열심히 따랐다. 이렇게 하사된 토지는 봉직 의무와도 더 이상 관련되지 않았다." "1756년에는, 귀족 출신임을 입중한 사람들만이 귀족 명부에 등재될 수 있었고, 1758~1760년에 내려진 결정은 국가 봉직을 통하여 세습적인 귀족 지위를 얻을 가능성을 사실상 제거함으로써 표트르 대제가 실시한 조치들 중 또다른 하나를 폐기했다."(365-6)


▶ 예카테리나 대제 통치기(1762-1796)


"귀족의 공동 정체성을 인정하고 지주의 지위와 역할을 강화하기 위한 과정은 1785년의 귀족헌장에서 완전한 발전 단계에 다다랐다. 귀족은 비록 국가 봉직에 등록되어 있지는 않더라도 국가에 봉사하도록 여전히 기대되었지만, 헌장에 따르면 봉직계급으로서 러시아 귀족의 역사를 규정했던 〈봉사, 충성, 그리고 열정〉이라는 말은 세습적인 명예인 〈위엄 속으로〉라고 변경되었다." "귀족의 지위 상승은 농노제의 확대와 강화를 의미했는데, 이런 진전은 예카테리나 대제의 통치 기간 전체의 특징이기도 했다. 농노제는 새로운 지역, 특히 우크라이나에서 확산되었다. 예카테리나 정부는 본질적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이미 존재하던 제도를 확고히 했을 따름이지만, 우크라이나에서 농노제를 합법화하는 데에 기여했으며, 그 악습을 제국 전역에서 표준화했다는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예카테리나 대제는 자신의 총신들에게 국유지와 농민들을 빈번하고도 대규모로 하사함으로써, 스스로 농노제를 크게 확산시켰다."(383-4)


"예카테리나 대제는 자신과 나라의 성공 및 영예를 추구하면서, 제국을 확대하고 러시아를 강국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파닌과 포템킨 같은 정치가들, 루먄체프와 수보로프 같은 장군들의 도움을 받아서 여제는 국제무대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그 결과 제국의 국경은 크게 확대되었고, 수백만 명의 신민이 추가되었으며, 러시아는 유럽에서 새로운 위상과 명성을 얻게 되었다." "한편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은 또다른 우려를 낳았다. 처음에 예카테리나는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의미를 최소화하려고 했고, 자신이 좋아하던 계몽사상으로부터 그 사건들을 분리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혁명이 더 과격해지자 여제는 격렬한 적대감을 가지고 반발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및 서구가 당면했던 다른 골칫거리들은 여제를 도와주었다. 제1차 투르크 전쟁 후반부터 영국은 북아메리카 식민지와의 싸움에 몰두했고, 제2차 투르크 전쟁의 중요한 순간에 모든 강국들은 혁명기 프랑스 쪽으로 주의를 돌려야 했던 것이다."(385-6)


# 예카테리나 대제의 군사 활동

1. 투르크 전쟁 : 제1차(1768-1774)와 제2차(1787-1795)에 걸친 투르크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러시아는 흑해 연안에 이르렀고, 크림반도를 합병했다.

2. 폴란드 분할 : 러시아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는 제1차(1772), 제2차(1793), 제3차(1795)에 걸쳐 정치적 혼돈 상태에 빠진 폴란드를 분할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세임(의회)을 통해서 권력을 행사하던 아주 강력한 귀족과, 선출된 유약한 왕에게 지배받고 있었다. 분명히 다른 곳의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이곳의 통치자들도 자신들의 권력을 확대하려고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지방 의회로부터 지시받는 대표들로 구성된 의회는 절차상 전국적인 입법기구라기보다는 외교적인 회의체와 유사했다. 의원이라면 누구든 어떤 법에도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고 심지어 의회를 해산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부패의 확대, 외국의 간섭(러시아의 간섭을 포함한) 등은 빈번한 정치적 혼돈 상태를 낳았다. 전통적으로 의회가 해산될 때 주로 의지했던 방법은 특정한 입장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인 〈동맹〉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동맹〉은 거부권에 의해서 방해될 수 없었고, 강제로 자신의 견해를 부과할 수 있었다. 이런 정치체제는 〈내전에 의해 단련된 무정부 상태〉라고 설명되어왔다. 이 체제의 신봉자들은 이 체제가 가진 민주주의적인 성격을 존경했다."(390)


"폴란드 분할은 폴란드인들에게 비극을 가져다주었다. 한편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는 사실상 전례가 없는 놀라운 외교적 및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다. 이 국가들은 거대한 유럽 국가를 해체하고 완전히 파멸시켰으며, 과거의 적이자 경쟁자이자 갈등의 근원인 국가를 제거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영토, 자원, 인구를 크게 늘렸다. 동유럽은 완전히 이 나라들의 통제하에 들어갔으며, 프랑스는 자신들의 옛 동맹국을 잃어버렸다. 의미심장하게도, 폴란드 분할 이후 오랫동안 동유럽의 이들 세 군주국은 국제무대에서 서로 긴밀히 협력했다. 말하자면 공범들이었던 셈이다." " 폴란드 분할은 러시아 제국 내의 〈민족 문제〉의 출발점으로 작용했다. 여기에 폴란드의 해체로 인해서, 오랫동안 적대시했고 조심스럽게 러시아 바깥으로 내몰았던 종교적 〈이방인〉 집단인 유대인들이 대거 제국 안으로 들어왔다. 러시아 제국은 이제 유럽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유대인 공동체 중의 일부를 흡수하게 되었던 것이다."(394-5)


"18세기에 일어난 결정적인 사회적 변화 중의 하나는 러시아 군주의 지배하에 들어온 비러시아인들과 비정교도들의 수가 극적으로 증가했다는 점이다. 제국의 팽창 원인이 무엇이든지 간에─〈바다로의 충동〉, 아직 자연적인 국경선에 다다르지 않았던 점, 국경의 불안정성, 메시아적인 야망, 국제적인 경쟁 등─그 결과는 많은 상이한 민족들과 종교를 대변하는 사람들이 러시아 생활 속으로 강제로 들어온 일이었다." "대체로 공동체 간의 차이점을 인정했지만 우니아트파 우크라이나인들과 벨라루스인들은 관용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들은 진정한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이단이라고 보였기 때문이다. 대체로 유대인들과 이슬람 교도들은 의구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대상이었다." "러시아는 19세기 초에 여전히 〈전근대적인〉 제국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갈등과 저항을 위한 여지는 그곳에 있었다. 그리하여 다민족 제국이라는 점은 불안정한 현실이 되어, 점차적으로 러시아 제국에서 관심 사항이 되었다."(409-11)


"러시아가 빌려온 계몽주의 문화는 수많은 두드러진 특징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특히 세속주의의 승리를 대변했으며, 교회 중심적인 모스크바국의 문명과 현저한 대조를 이루었다. 분명히 정교회는 재정 러시아에 남아 있었고, 심지어 어떤 의미에서는 계속해서 국가와 연결되어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교회는 적어도 정부와 교양 있는 대중에 관계되는 한에서는 러시아의 삶과 문화에서 중심이 아니라, 동떨어져 있고 아주 무시당하는 구역이 되었다. 게다가 플로롭스키 등에 따르면, 우리는 이 구역 안에서는 독창성이라든지 성장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18세기의 유럽에서 무대를 지배했던 세속주의 철학은 이성, 교육, 사회의 이익을 증가시킬 수 있는 계몽된 사람들의 능력을 강조했다. 마지막 사항은 특히 통치자들에게 적용되었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국가의 방향을 정할 수 있는 아주 커다란 수단을 갖고 있었다. 이런 관점은 재정 러시아에 아주 놀라울 정도로 잘 맞았다."(413)


▶ 알렉산드르 1세 통치기(1801-1825)


"알렉산드르 1세 자신은 제위에 오를 때, 교육받은 러시아인들에게 그가 계몽주의 정신을 갖고 통치하리라는 희망을 갖게 만들 충분한 근거를 주었다." "외국 서적과 정기간행물은 물론이고, 해외여행과 외국인들의 러시아 입국에 대한 불쾌한 제한조치들이 폐지되었다. 검열은 완화되었고, 사설 출판사는 다시 문을 열도록 허용되었다. 수사 때의 고문은 폐지되었고, 예카테리나 대제에 의해서 귀족과 도시에 승인된 헌장은 다시 완전한 효력을 되찾았다. 그러나 이런 조치들은 기껏해야 자유주의적 프로그램의 시작에 불과했다. 맞닥뜨려야 하는 핵심적인 사안 중에는 농노제, 전제정치, 국가의 전반적인 후진성 및 행정기구의 무능과 부패 등이 있었다. 알렉산드르 1세의 통치기에 눈에 띄는 일들 중의 하나는, 개혁에 대한 이야기는 엄청나게 많았던 데에 비해서 실제로 실시된 것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알렉산드르는 전제정치를 제한하고 농노제를 폐지하고 싶어하면서도 실질적인 변화를 초래하기를 원하지 않았다."(437-8)


"알렉산드르 1세 그리고 적어도 그의 대부분의 자문관들은 민주주의적인 권력 균형을 통해서 집행부의 권력을 제한하는 것이 헌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당대 유럽의 많은 다른 국가에서처럼, 그는 주로 자의성과 제멋대로의 변덕으로부터 자유로운 질서 있는 행정 및 법체계를 도입하고, 그런 체계가 다양한 사회 신분의 대표들에 의해서 강화되는 것을 헌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법〉에 기반을 둔 국가인 법치국가가 그의 이상이었다. 그것은 합리화된 문서 절차와 명확하고 합리적인 기능분화에 기반을 둔 강력한 중앙 정부를 의미했다. 달리 말해서 알렉산드르는 표트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대제와 마찬가지로, 질서와 행복을 보장해줄 수 있고 변화를 위한 동력이 될 수 있는 갈역하고 합리적이며 중앙집권화된 국가의 필요성을 믿었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그가 전제군주로서의 자신의 특권을 애써 지키려고 했던 것은 위선이나 우유부단함이 아니라, 특정한 정치철학이 반영된 결과였다."(439-40)


"개혁이 실패한 것에 대한 하나의 설명은 알렉산드르 1세가 외교 문제와 전쟁, 특히 어렵기도 하고 심지어 대재앙이기도 했던 나폴레옹과의 전쟁에 지나치게 몰두했기─단 한 명의 프랑스 군인이라도 러시아 땅에 남아 있다면 강화를 고려조차 하지 않겠다는 식의─때문이라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필요한 외교적·군사적 준비를 한 이후 1812년 6월에 러시아를 침공했다.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포함한 수많은 유럽 국가들, 동맹국들, 위성국들, 즉 러시아의 민간 전통에 따르면 '12개의 침입하는 혀들'의 지지를 받았다. 러시아는 투르크와 강화를 체결하는 데에 성공하고, 스웨덴과 영국이라는 적극적인 동맹국을 확보했다." "러시아인들을 초기 전투에서 패배시킴으로써 강화를 간청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나폴레옹의 기대는 근거없음이 판명되었다. 예외적으로 추웠으며 일찍 시작된 겨울도 러시아 측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무엇보다도 병참 문제는 훨씬 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로 판명되었다."(445-50)


"알렉산드르 1세의 통치노선에 대한 실망감은 1825년 12월에 성공하지 못한 봉기를 일으킨 이후에 데카브리스트(Dekabrist)들이라고 알려진 러시아 최초의 혁명 집단이 등장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대부분의 데카브리스트들은 군 장교였고, 종종 귀족가문과 정예 부대 출신으로서 훌륭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프랑스어와 때때로 다른 외국어를 배웠으며, 나폴레옹에 대항한 군사 작전 도중 그리고 그 직후에 서구에 대한 지식을 직접 얻었다." "데카브리스트들은 본질적으로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의 전통을 따르던 자유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푸시킨과 그리보예도프 같은 문학계의 권위자를 포함하여 많은 교육받은 러시아인들의 공감을 얻기는 했지만, 사회적 지지는 거의 얻지 못했다. 아직 러시아 자유주의는 잉글랜드나 프랑스에서와 같은 광범위한 사회운동은 결코 아니었다. 러시아 중간계급이 미약하고 후진적이었다는 점도 핵심적인 차이들 중의 하나였다."(460-1)


▶ 니콜라이 1세 통치기(1825-1855)


"법이나 제도보다도 권력을 가진 사람이 더 중요했던 국가와 시대에서, 차르의 성격과 취향에 대한 질문은 사소한 의미 이상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성품은 권력과 통치라는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아주 잘 부합되었다. 1796년에 태어난 새로운 통치자는 자신의 형처럼 후기 계몽주의의 분위기에서 성장한 것이 아니라, 나폴레옹에 대항한 전쟁과 보수주의가 강화되는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그가 살던 때는 민족주의의 시대이기도 했다. 니콜라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권력은 서구의 계몽전제주의 개념보다는 러시아의 가부장적 권위주의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이데올로기가 가장 잘 표현된 것은 나중에 〈관제 국민성〉이라고 불리게 된 독트린이었다. 교육부 장관 우바로프 백작이 1833년에 공식적으로 선포한 관제 국민성 이론은 정교회, 전제정치, 국민성이라는 세 가지 원칙을 포함하고 있었다. 〈신앙, 차르, 조국〉처럼 다른 용어가 사용되었을 때도 그 순서는 중요했고 변하지 않았다."(466)


"이 세 원칙은 별개의 사상이 아니었다. 정교회(Pravoslavie)는 공식적인 교회의 역할과 윤리 및 이상의 궁극적인 근원을 강조했다. 많은 점에서 이것은 이성의 시대에 대한 거부이자, 인간의 이성과 능력에 중심적인 자리를 부여하는 관점을 배격하는 것이었다. 그 대신에, 인생의 〈신비와 불가해성〉 그리고 이성의 무의미함이 강조되었다. 정치적인 원리로서 이것은 사회를 완전하게 하려는 인간의 노력을 배격할 뿐만 아니라, 기존의 권위를 신으로부터 유래된 것으로서 신성화하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에 말해지고 있었듯이, 각 사람은 〈자신의 자리에서 신을 섬겨야 한다.〉 신성한 권위로서의 전제정치(samoderzhavie) 원칙은 이것에서 비롯된다. 덧붙여서, 인간은 본래 약하고 죄짓기 쉽다고 상정되었기 때문에, 질서를 잡기 위해서는 정부의 강력한 통제가 필요했다. 동시에, 그리고 전통을 따라서 그들은 전제정치가 러시아의 진보와 행복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최상의 수단이라고 간주했다."(466-7)


"앞의 두 원칙처럼 중요했던 국민성(narodnost)은 러시아 국민의 특별한 성격을 가리켰다. 부분적으로 이것은 전제정치의 또다른 측면에 불과했다. 그것은 러시아인들을 독특할 정도로 사랑스럽고 순종적인 신민이지만 동시에 강한 통제를 필요로 한다고 보는 관점이었다." "니콜라이 1세는 1831년의 군사 봉기 동안에 평범한 군인들은 자신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오를로프와 체르니셰프(고위 관리들)를 제외하면, 내가 그들 가운데 혼자 있었다는 사실을 보라. 모두가 넙죽 엎드리며, 자신들의 얼굴을 땅에 대고 있다! 당신의 러시아 민족은 이런 사람들이다.〉 알 수 있다시피, 국민성에 대한 이런 이상은 당대의 러시아적 전통과 유럽 사상, 특히 각 민족이 스스로의 독특한 천재성, 독자적인 역사, 제도, 언어, 기질, 덕성을 갖고 있다는 낭만주의적 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러시아의 천재성은 국민과 차르 사이에 사랑과 헌신이라는 독특한 유대관계라고 생각되고 있었다."(467)


"니콜라이 1세의 통치 초기에 일어난 데카브리스트 반란은 새로운 황제의 기본적인 생각만이 아니라, 혁명 세력과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그의 결심을 굳게 만들었을 따름이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그것은 귀족에 대한 황제의 신뢰를 땅에 떨어뜨렸으며, 황제가 어떤 일부 신하들이 가진 독립성과 자주성에 대해서도 불신하도록 만들었다." "황제는 군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치세 후기에는 그의 측근 중에 민간인이 거의 한 사람도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밀사에게 과도하게 의지했는데, 밀사들 중 대부분은 그를 수행하던 장군들이었다. 그들은 특별한 임무를 띠고 러시아 전역으로 파견되어 군주의 뜻을 즉각 실행에 옮겼다. 그들은 정식 행정체제의 범위 바깥에서 활동하는, 말하자면 군주의 분신인 셈이었다. 직접 명령, 절대적인 복종 그리고 적어도 공식적인 보고와 겉모습에 관한 한, 정확성이라는 군인정신이 모든 정부기구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부패와 혼란이 자리잡고 있었다."(468)


"1848년 이후 유럽의 혁명 사태에 겁을 먹은 니콜라이 1세는 완전히 반동적인 입장으로 돌아섰다. 러시아인들에게는 해외여행이 금지되었는데, 이 명령으로 특히 교사들과 학생들이 타격을 입었다. 의과대학을 제외하고는, 정부 장학금을 받지 않는 대학생의 수는 대학별로 300명으로 제한되었다." "헌법과 철학은 교육과정에서 배제되었고, 논리학과 심리학은 허용되었지만 신학 교수가 가르쳐야 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대학교 자체가 거의 폐지될 뻔했으나, 일부 고위 관리들의 시의적절한 개입이 이런 재앙을 막아냈다." "문학과 사상은 사실상 질식 상태였다. 심지어 우익 역사교수이자 관제 국민성 이론의 지도적인 주창자였던 포고딘조차도 니콜라이 1세의 재위 말기에 정부가 러시아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썩어문드러져서 악취를 풍기는 묘지의 침묵〉을 강요하고 있다고 비난할 정도였다. 이런 질실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러시아는 크림 전쟁에서 충격적인 패배를 경험하게 된다."(473)


"러시아가 1848년 이후에 겉보기에는 무적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니콜라이 1세는 유럽, 특히 동맹국들 사이에서 러시아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이 점차 자라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영국과의 복잡하고 불운한 관계는 니콜라이 1세가 자신의 근동 정책이 유럽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잘못된 신념을 갖도록 부추겼다." "1853년 10월에 러시아와 투르크 사이에 전투가 시작되어 러시아인들이 투르크의 함대와 수송선을 시노페 바깥에서 격침시킨 이후에, 영국과 프랑스는 1854년 3월에 투르크 정부에 합세했고, 사르디니아는 그 이듬해에 개입했다.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 교전을 벌이기 직전에 멈추었으나, 동맹국들 편에서 외교적인 압력을 강하게 행사했다. 니콜라이 1세는 유럽의 연합 세력에 대항해서 자신의 나라가 홀로 싸우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855년 3월 니콜라이 1세가 사망하자, 그를 계승한 알렉산드르 2세와 동맹국들은 3월 30일에 파리 조약을 체결했다."(483-6)


# 파리 조약의 결과

1. 투르크에게 다뉴브강 입구와 베사라비아 일부를 양도

2. 흑해 중립화를 인정하여 흑해에서 러시아 해군 철수 

3. 오스만 제국 내의 정교도들에 대한 보호권 주장 포기

4. 다뉴브 공국들(미래의 루마니아)은 열강들이 공동 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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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동의 탄생
데이비드 프롬킨 지음, 이순호 옮김 / 갈라파고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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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역사의 교차로에서


"18세기에 마침내 지구를 둘러싼 제국을 수립한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획득한 식민지 중에서도 전설로 가득찬 동방에 대해 가장 큰 자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그 의기양양함에는 뜻밖의 아이러니가 숨어 있었다. 아시아와 태평양에서 프랑스를 몰아내고 인도를 손에 넣어 승리의 대미를 장식한 것은 좋았으나, 수송로와 병참선이 지나치게 멀어져 여러 곳에서 끊길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그러한 취약점을 재빨리 간파했다. 나중에 본인 스스로도 주장했듯이, 시리아에서 전설과 영광의 길을 따라 바빌론으로 들어간 뒤 거기서 내쳐 인도까지 쳐들어갈 계획으로 1798년 이집트 원정에 이어 시리아로 진군해 들어갔다. 이후 그 계획이 물거품이 되자 러시아 황제 파벨을 꼬드겨 러시아군도 같은 길로 내몰았다. 영국은 중동의 토착 정권들을 지지하는 방식으로 유럽 국가들의 이런 팽창을 막으려고 했다. 중동을 지배할 의도는 없었으나 유럽의 경쟁국들이 그 지역을 지배하는 것 또한 결단코 막으려고 했다."(51)


"영국정부가 19세기 내내 유럽 국가들의 간섭, 전복, 침략에 맞서 쇠락한 이슬람 정권들을 지지하는 정책을 취한 것도 그래서였다. 그러자 이윽고 러시아제국이 영국의 주적으로 떠올랐고, 이때부터 러시아의 아시아 진출 계획을 막는 것은 영국 군부와 민관인 관리들의 집요한 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사실 '거대한 게임the Great Game'은 1829년, 당시 영국 총리였던 웰링턴 공작이 아프가니스탄을 통한 러시아의 공격에 맞서 인도를 지킬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을 공식적으로 논의하기 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다 그 논의에서 러시아의 아프가니스탄 접근을 막는 것이 최상이라는 결론이 내려졌고, 이때부터 쇠락한 아시아의 이슬람 정권들을 영국령 인도와 이집트로 가는 통로 사이의 거대한 완충지대로 만드는 것이 영국의 전략이 되었다. 특히 이것은 파머스턴이 오랫동안 외무장관과 총리로 재직할 때 추진했던 관계로, 그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51-3)


"거대한 게임이 특히 격렬하게 진행되던 서아시아에서는 다르다넬스의 좁은 해협 위쪽,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동서 통로와 지중해와 흑해를 잇는 북서 통로에 자리하여 수백 년 동안 세계정치의 교차로가 되었던 고대 비잔티움, 곧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이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 콘스탄티노플이 적대 국가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는 한, 강력한 영국 함대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해 흑해로 들어가 러시아 해안선을 장악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러시아가 다르다넬스 해협을 점령하는 날에는, 영국 함대는 해협으로의 진입을 차단당하는 것은 물론, 러시아 함대가 지중해로 진출하여 영국의 생명선마저 위협할 수 있었다. 아시아 대륙 저편에서는 아프가니스탄에 접한 드높은 산맥이 전략적 요충지였다. 침략군이 영국령 인도 평원으로 쏟아져 내려올 수 있는 요지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동아시아에서는 러시아가 그 고지대에 입지를 마련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 영국의 정책 기조가 되었다."(53)


"오스만제국은 제1차 발칸전쟁(1912~1913)에서 발칸동맹(불가리아, 그리스, 몬테네그로, 세르비아)에 패해 유럽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다. 제2차 발칸전쟁(1913)에서는 아시아 쪽 터키의 맞은편에 위치한 트라케(트라키아)를 용케 회복했다. 하지만 그 역시 제국의 붕괴가 계속되는 와중에 찾아든 잠깐의 휴지기에 불과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권을 잡고 술탄의 각료로 제국을 지배했던 콘스탄티노플의 청년튀르크당은, 제국의 영토가 치명적 위험에 처해 있고 유럽의 포식자들이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시시각각 다가온다는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오래지 않아 유럽 국가들은 아프리카 대륙마저 분할했고, 이제 그들이 눈길을 돌릴 만한 곳은 많지 않았다. 지표면의 4분의 1은 영국, 6분의 1은 러시아가 차지하여 대부분 지역은 이미 점령된 상태였고, 서반구도 먼로주의에 포함돼 미국의 보호를 받는 입장이어서, 유럽 국가들이 뚫고 들어갈 여지가 있는 지역은 중동뿐이었다."(77-8)


"CUP(통일진보위원회) 내의 다양한 분파는 강력한 유럽 국가를 동맹으로 확보하는 것이 터키 의제의 가장 절박한 사안이라는 데 뜻을 같이했다. 유럽권의 한 나라, 아니 열강의 하나─영국, 프랑스, 혹은 독일─만 동맹으로 얻으면, 오스만제국은 영토를 침탈당하는 일 없이 안전해지리라고 청년튀르크당은 판단했다. 러시아와 러시아보다는 힘이 다소 약한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그리스, 불가리아가 오스만제국을 침략할 개연성이 가장 높은 나라들이었다." "1914년 5월과 7월 사이에는 오스만의 정세가 더욱 악화되어 CUP 지도자들이 영국을 제외한 유럽의 다른 세 강대국에도 동맹의 개연성 여부를 은밀히 타진하는 상황이 되었다. 친프랑스파였던 해상장관 제말은 프랑스에 동맹을 제의했다가 거부당했다. 절망에 빠진 탈라트가 고심 끝에 러시아에까지 접근하는 무리수를 두었으나, 역시 퇴짜를 맞았다." "오스만제국은 열강의 어느 나라와도 동맹을 맺지 못하는 외교적 고립 상태에 빠져들었다."(83-4)


"불간섭 정책을 옹호하던 오스만제국의 국방장관 엔베르 파샤는 1914년 8월 말에 벌어진 타넨베르크 전투와 같은 해 9월에 시작된 마수리아 호수 전투에서 독일군이 러시아군에 대승을 거두자, 오스만이 러시아 영토를 획득하려면 독일이 단독으로 승리를 거두기 전에 참전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러시아는 수십만 명의 병력이 목숨을 잃거나 포로로 사로잡힌 상황이어서, 엔베르처럼 충동적이지 않은 사람도 러시아의 패배가 임박했음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독일의 승리 열차는 이제 막 역을 떠나려 했으므로, 엔베르로서는 이번이 기차에 올라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에 더욱 조바심을 냈을 것이다. 9월 26일 엔베르는 결국 동료들에게 의논도 하지 않고, 다르다넬스 해협을 봉쇄하여 외국 배들(사실상 연합국 선박)의 접근을 가로막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고는 일주일 뒤 독일 대사 폰 반겐하임에게, 대재상이 더는 오스만의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통보했다."(114-5)


2부 하르툼의 키치너, 장래를 준비하다


"영국은 오스만제국과 전쟁이 발발하자 이집트와 키프로스 문제를 명확히 해둘 필요를 느꼈다." "카이로의 영국청(이집트 총독 키치너가 근무하는 곳)이 원한 것은, 이름뿐이나마 언젠가는 독립시켜주겠다는 언질이 포함된 보호령이었는데, 영국정부는 두 나라의 병합이라는 본래의 결정을 번복하고 카이로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영국 내각의 결정으로 키치너의 영국청은, 키치너와 그의 참모들이 훗날 아랍어권 전역으로 확대시킬 생각이었던 통치 형태의 원형을 수립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인도에서와 같은 직접통치 방식이 아닌 보호령이 그것이다. 키치너의 이집트에서는 허울뿐이나마 세습군주와 토착 각료들이 존재했다. 따라서 영국 고문관들의 조언으로 결정된 사안이라 해도 모든 법령은 그들 이름으로 공표되었고, 그것이 바로 키치너 사단이 바란 정부 형태였던 것이다. 로널드 스토스의 표현을 빌리면, 〈영국은 명령법에 반대하고, 가정법을 좋아하며, 기원祈願법도 마다하지 않았다.〉"(136-7)


"1914년 영국인들의 관심은 온통 오스만제국이 참전하면 수에즈운하를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개연성에 모아졌다. 로널드 스토스도 예외는 아니어서 유럽의 국방부 관리들이 철도 시설을 중심으로 적국의 군사력을 분석하듯, 낙타에 초점을 맞추어 오스만의 군사력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실 낙타는 구실이었을 뿐, 스토스의 진짜 목적은 그 편지와 함께 1914년 9월 6일 클레이턴이 건네준, 낙타 이외의 또다른 문제들을 메카의 지도자와 논의해달라는 내용의 극비 비망록을 키치너에게 전달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이 비망록에서 클레이턴이 제기한 문제들 중에는 영국에 호의적인 아라비아 지도자를 이슬람의 칼리프로 만들어 오스만 술탄을 대체할 개연성에 대한 것도 포함돼 있었다. 클레이턴은 그것이 가능하다면 이슬람 성지의 수호자인 메카의 아미르가 칼리프의 명백한 후보자라고 말햇다. 그렇게 되면 성지순례의 면으로도 영국에 중요한 조력자가 생긴다는 것이 이유였다."(157-8)


"키치너는 외무장관 그레이의 승인을 받아 스토스에게 보낸 전문에서, 메카의 지배자에게 〈터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이 전쟁에서 아랍이 영국을 도와주면, 영국도 아라비아 내에서 일어나는 일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아랍인들이 외국의 공격에 맞서 싸울 때도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내용으로 답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여기서 '아랍인'은 아라비아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아라비아 반도가 술탄으로부터 해방되면 영국은 외세의 모든 침략으로부터 그곳 지배자들을 보호해주겠다는 말이었다." "사실 월권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키치너의 발언이었다. 그는 아라비아의 역할이 전시보다 전후에 더 중요할 것이라고 여긴 자신의 믿음을 반영하듯, 메카에 보내는 메시지를 폭탄선언으로 마감했다. 〈메카나 메디나의 칼리프는 진정한 아랍 종족이 되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보우하사 지금 벌어지는 모든 악에서 벗어나 그 선은 달성될 것입니다.〉"(161-3)


"키치너의 측근들은 그들이 이슬람권에 대해 안다고 믿은 그 모든 지식에도 불구하고 또다른 중요한 요소를 간과하고 있었다. 이슬람권의 불화와 분열상의 정도를 가볍게 본 것이었다. 그 점에서 이슬람의 극단적 청교도 운동인 와하브파의 지도자 이븐 사우드에게 수니파인 메카 지배자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라고 요구한 키치너의 계획은 현실적이지 못했다. 수십 개로 쪼개진 이슬람의 종파들이 그랬듯, 그 둘도 견원지간이었기 때문이다. 키치너와 그의 측근들은 메카의 지배자로 하여금 오판을 하게 만드는 오류도 범했다. 메카의 지배자는 그들이 보낸 전문을 보고 영국이 자신에게 거대한 왕국의 지배자를 제의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슬람의 새로운 칼리프가 뜻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메카의 지배자가 자신의 새로운 왕국의 경계지가 될 곳을 언급할 때 스토스가 소스라치게 놀란 것도 그래서였다. 키치너나 그나 아미르의 통치영역을 확대시켜줄 의도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164)


3부 중동의 진창에 빠진 영국


"1915년 초 (서부전선 병력 차출을 거부하던) 키치너는 돌연 마음을 바꿔 영국의 다르다넬스 공격을 제안했다. 러시아 최고사령부가 다르다넬스에 대한 양동 공격을 급히 요청해오자, 그 청에 응하지 않으면 러시아가 전쟁에서 발을 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나온 조치였다. 그렇게 되면 독일이 모든 병력을 서부전선에 투여할 수 있게 되어 영국과 프랑스에는 치명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가 견제 공격을 요청하고, 키치너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던 것은 사실 엔베르의 카프카스 고원 지대 공격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요청은 1951년 1월 러시아가 엔베르의 튀르크군에 신속한 승리를 거두기 전 영국에 전달되었다." "결과적으로 영국 지도자들은 있지도 않은 튀르크의 위협으로부터 러시아를 구해주겠다며 콘스탄티노플 공격에 총력을 기울인 것이었다. 처칠, 키치너, 애스퀴스, 로이드 조지, 영국, 중동의 운명을 바꿔놓게 될 다르다넬스 작전(갈리폴리 전투)은 이렇게 시작되었다."(196-7)


"키치너와 처칠의 다르다넬스 작전이 막상 성공할 조짐이 보이자 원조를 요청했던 러시아 정부는 좌불안석이 되었다. 작전 성공은 물론 기뻐할 일이었지만, 그렇게 되면 영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할 것이 뻔했고, 그러자 러시아인들 마음속에 지난 1세기 동안 거대한 게임을 벌이며 느꼈던 공포와 시기심이 되살아난 것이다. 러시아 정부가 우려한 것은, 영국이 일단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나면 내놓지 않으려 할 수도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1915년 3월 15일 러시아 외무장관 세르게이 사조노프가 니콜라이 2세 황제의 메시지가 담긴 비밀 통전通電을 런던과 파리에 각각 발송했다. 콘스탄티노플과 다르다넬스 해협, 그리고 해협에 인접한 지역을 러시아에 인도할 것을 연합국에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러시아는,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제국의 다른 영토와 그 밖의 지역에 갖고 있는 야망이 실현될 수 있도록 양국의 계획을 호의적으로 수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207)


"러시아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그레이가 콘스탄티노플 협정을 비밀에 부친 것은 그 내용이 공개될 경우 인도의 무슬림 여론에 미칠 파장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영국이 그때까지 남아 있던 최후의 무슬림 독립국, 따라서 중요성이 적지 않은 오스만제국을 파괴한 장본인으로 비춰지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 "그레이는 또, 오스만제국이 파괴되는 데 따른 이슬람교도들의 손실을 다른 곳에 무슬림 국가를 세우는 방식으로 벌충해줄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 메카와 메디나가 있는 아라비아가 그 후보지로 가장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그곳은 열강들도 탐내지 않았으므로 약속하기도 어렵지 않았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도 훗날, 〈외국 군대가 아라비아 땅을 점령할 것으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메마른 황무지여서 강대국이 목초지로 욕심 부릴 만한 곳도 아니었다〉고 썼다. 그때만 해도 아라비아에 엄청난 석유가 묻혀 있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211-2)


"한편 사이크스가 외유에서 돌아와 내각에 던진 주요 메시지는, 그동안은 아랍이 전쟁의 한 요소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제는 연합국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고, 따라서 메카의 샤리프 아미르 후세인과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절실한 사안이 되었다는 것이다." "각료들의 토의 끝에 결국 (카이로에 교섭권을 주어 후세인과 합의해야 한다는) 키치너의 안이 받아들여졌다. 그러자 헨리 맥마흔이 런던이 부여해준 권한과 지시사항으로 메카와 교신을 재개한 것이 바로 팔레스타인의 아랍인과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토록 오랫동안 그 의미를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게 만든 맥마흔 서한이었다." "1915년 10월 24일 맥마흔이 사뭇 달라진 어조로 후세인에게 답변을 보낸 것도 그래서였다. 원하는 약속을 해주라는 키치너의 지시를 받고 특정 영토와 경계지역에 대한 논의를 하기로 마지못해 동의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확실한 언질을 주는 데 따르는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헷갈리는 용어를 사용했다."(274-5)


"그가 그런 우려를 하는 것은 당연했다. 1916년 초 윈덤 디즈가 상황 파악을 위해 작성한 자료에 아랍인이 세 부류로 갈라져 있던 것도 그 힌트가 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영국이 그 모든 아랍인들을 만족시키기는 불가능했다. 그중 첫 번째인 시리아인들만 해도 프랑스를 철천지원수처럼 여겨 그들 영토에는 프랑스가 발을 들이밀지 못하게 하는 것을 주목표로 삼았고, 그것은 물론 프랑스의 요구와 상반되었다. 두 번째 아랍인인 후세인도 아랍왕국의 지배자가 되기를 원했으나 디즈는 아랍인 대다수와 터키인 모두 그것에 반대한다고 썼다. 〈이 생각은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것이 우리 대부분, 아랍인 다수, 모든 터키인들의 관점이다.〉 다른 아랍인들도 후세인을 지도자로 받아들이는 데 소극적이라는 것이 디즈의 생각이었다. 끝으로 이라크의 아랍인들이 있었다. 그들도 (디즈가 보기에는) 독립을 원했지만 인도정부가 그곳을 병합해 지배하려는 것이 문제였다."(277-8)


"그러나 클레이턴과 그의 동료들은 몰랐지만, (아랍 비밀결사 지도자인) 알 미스리, (영국 관리와 아랍 지도자 간의 매개 역할을 한) 알 파루키, 아미르 후세인도 영국에 위조화폐를 남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후세인에게는 군대가 없었고 비밀결사에도 부하들의 실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수만 혹은 수십만 명의 아랍군을 결집할 수 있다고 장담한 그들의 말은 모두 거짓이었다. 처음에는 아랍 봉기를 약속한 알 파루키도 11월 15일 마크 사이크스를 만났을 때는 태도를 바꿔, 연합국이 시리아 해안지대에 군대를 먼저 상륙시키지 않으면 아랍 봉기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후세인도 영국이 먼저 공격해주기를 내심 기대하면서, 아랍 봉기는 시기상조라고 주장하는 방식으로 행동에 나서기를 거부했다. 영국군이 시리아를 공격하지 않으면 아랍은 행동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사이크스는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영국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침략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결론을 내렸다."(281)


"1915년 11월 23일부터 프랑스와 영국은 후속 조치를 위한 협상을 벌였고, 갑론을박 끝에 서로 원하는 것을 얻어냈다. 사이크스 쪽에서 보면 프랑스가 확대된 레바논을 지배하고 여타 시리아 지역에 대한 독점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으니, 모술까지 이어지는 세력권을 프랑스에 부여하는 데 성공한 것이고, (프랑스 협상대표) 피코는 피코대로 그것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의 두 지방 바스라와 바그다드는 영국이 차지하기로 결정되었다. 걸림돌이 된 것은 팔레스타인이었다." "그리하여 두 항구도시 아크레(아코)와 하니파,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와 철도로 연결되는 영토 지대는 영국이 차지하고, 팔레스타인의 여타 지역은 모종의 국제기구 통치를 받도록 하는 절충안이 마련되었다. 팔레스타인과, 프랑스나 영국이 직접 통치하지 않는 중동의 나머지 지역은 아랍국 혹은 독립의 허울은 쓰겠지만, 실제로는 프랑스와 영국의 세력권을 분할될 국가들이 연합을 만들기로 했다."(289)


# 사이크스-피코 예비 협정(1916년 1월 3일 체결)


4부 전복


"서방권은 지난 몇십 년 동안, 시간상의 문제일 뿐 쇠락한 오스만제국이 언제든 붕괴되거나 혹은 해체될 것이라는 관점을 지녔으므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벌이는 긴박한 전쟁의 과정에서 오스만제국은 와해될 것이고, 제국 내에서 일어난 분란이 그것을 더욱 가속화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1916년 중엽의 양상은 그와 다르게 나타났다." "오스만군에 속한 다수의 독일장교들이 명령이 잘 먹히지 않는 것에 좌절과 혐오감을 느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양국 관계에 균열이 갈 만큼 그것이 심각한 양상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독일은 전쟁이 승리하는 쪽으로만 힘을 행사했을 뿐, 오스만 정부의 독립이나 혹은 CUP 지도자들의 입지를 불안하게 만드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이렇듯 독일은 연합국이나 동맹국의 그 어느 강대국보다 능란하게, 전후 아시아에 가진 영토적 야망을 전시 행동에 개입시키지 않는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었고 그 덕에 후방을 교란시키는 기회도 가장 잘 이용할 수 있었다."(309-10)


"우연인지 필연인지 키치너가 바다에서 유명을 달리한 것과 때를 같이해 메카에서는 아미르 후세인의 봉기가 일어났다. 후세인이 청년튀르크당이 자신을 폐위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일으킨 것이었다. 하지만 카이로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것이 키치너 사단의 노력이 가져온 성과로 믿었다." "그러나 후세인이 바란 아랍 봉기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오스만군에 속한 아랍부대들 중 후세인 편으로 넘어온 부대는 하나도 없었다. 오스만제국을 변절하고 연합국 측으로 넘어온 정치인이나 군인도 없었다. 알 파루키가 후세인에게로 몰려들 것이라고 약속한 강력한 비밀 군사조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후세인의 병력은 영국 돈에 매수된 수천 명의 부족민이 전부였다. 후세인에게는 정규군도 없었다. 헤자즈와 헤자즈 부족민들이 사는 인근 지역을 벗어나면, 후세인의 봉기를 지원해줄 곳 또한 없었다." "결국 후세인이 아랍 봉기를 선언한 지 1년 뒤에는 데이비드 호가스가 그것을 실패로 간주하는 상황이 되었다."(327-34)


5부 운명의 나락으로 떨어진 연합국


"행정부에 일어난 변화는 영국의 중동정책에도 우연치 않은 변화를 초래했다. 동방에 새로운 영토를 획득하는 것에 회의적이었던 애스퀴스와 그레이가 내각에서 퇴출되고, 자신의 중동관을 내각에 강요했던 키치너도 죽고 없어진 뒤, 키치너와 모든 면에서 대립각을 세웠던 로이드 조지가 총리가 되었다. 로이드 조지는 처음부터 동방을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결정적 변수로 보았다는 점에서 키치너와 달랐다." "중동에 관한 로이드 조지의 미래관은 많은 부분 기독교 백성을 학대했다는 이유로 오스만제국을 혐오한 그의 첫 정치적 스승이자 자유당 출신 총리였던 윌리엄 유어트 글래드스턴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튀르크 정부를 증오하게 된 데서 비롯되었다. 반면에 그는 소아시아에 영토적 야망을 가진 그리스에는 호의를 보였고, 성지(팔레스타인) 시온주의자들의 열망도 지지했다. 다만 두 번째 경우는, 유대인의 조국이 세워지더라도 그것이 영국의 통치를 받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리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366-7)


"1917년 5월 전쟁에 혐오감을 느낀 프랑스군이 폭동을 일으켜, 프랑스에서는 정치인들이 그간 편안하게 느꼈던 마지막 전시내각마저 붕괴했다. 전통적 지도력이 신뢰를 잃은 탓이었다." "이때 유일하게 남은 총리 후보자였던 조르주 클레망소도 로이드 조지처럼 정치적 '고독자'였다." "클레망소는 그 무엇에 앞서 증오자였고, 이 세상에서 가장 증오한 것이 또 독일이었다.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승리한 독일이 프랑스에 부과한 가혹한 강화조약을 비준하기 위해 열린 보르도 국민회의에서 끝까지 저항한 인물이 클레망소였던 것도 그 점을 말해준다. 그는 포기를 모르는 인물이었다. 독일에 맞서기 위해서는 프랑스의 힘을 모아야 하고, 그러므로 프랑스가 식민지 사업에 힘을 분산시킨 것은 실책이었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따라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프랑스에 병합시키려고 하는 프랑스 상·하원의원들에게는 그가 당연히 주적일 수밖에 없었다."(369-70)


6부 신세계와 약속의 땅


"로이드 조지는 1917년 5월 10일에 열린 하원 비밀회의에서 영국이 전쟁 중에 점령한 아프리카의 독일 식민지를 독일에 반환하지 않을 것이고, 팔레스타인과 메소포타미아도 터키가 보유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선언을 하여 그의 긴밀한 협력자마저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각료들 중 그 내용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로이드 조지는 마크 사이크스가 약속한 전후 중동에서의 프랑스 권리를 받아들일 의사가 없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사이크스-피코 협정도 중시하지 않았다. 그가 중요하게 본 것은 물리적 소유뿐이었다.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도 그는 1917년 4월 프랑스 주재 영국 대사에게 〈우리는 정복으로 그곳을 차지할 것이고, 이후에도 그곳에 계속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여, 프랑스도 종래에 그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게 될 것임을 시사했다. 로이드 조지는 내각에서 유일하게 팔레스타인 획득을 시종일관 원한 인물이었다.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조국을 조성하는 안도 지지했다."(412-3)


"로이드 조지는 (팔레스타인이 영국의 이익에 매우 중요하다는 논지를 펼쳐) 정부의 주요 민간인 각료들이 시온주의를 지지하도록 만들었다." "전시내각의 레오 에이머리와 마크 사이크스는 전후에 독일이 오스만제국을 독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우려했다. 그렇게 되면 인도로 가는 길이 적국 수중에 떨어져 영국에는 큰 위협이 될 수 있었고, 따라서 그 위험을 피하려면 튀르크와 독일을 격퇴하고 오스만제국의 남쪽 주변부를 차지하는 것이 첩경이었다. 내각이 개전 초부터 메소포타미아 병합을 염두에 둔 것도 그래서였다. 아라비아도 독립을 주장한 현지 지배자들과 협상을 벌여 보조금도 주고 지원도 약속하여 친영파로 만들어놓았다. 그리하여 그 지역에서 취약지로 남은 곳은 이제 팔레스타인뿐이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잇는 다리로서 이집트에서 인도로 이어지는 육로를 가로막는데다, 수에즈운하와도 가까워 운하는 물론이고 운하와 연결되는 해로도 함께 위협할 수 있는 요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425-6)


"전시내각의 또다른 인물인 옴즈비 고어가 팔레스타인 농업연구소에서 아론손이 거둔 성과에 감격한 것은, 그것이 시온주의 논점의 핵심을 건드린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지 커즌이 의회에서 개진한 시온주의 문제도, 팔레스타인 정착을 원하는 수백만 유대인들을 부양하기에는 그곳의 땅이 지나치게 척박하다는 것이었다. 그곳에 살고 있던 아랍인 원주민들도 추가 정착민을 받을 여지는 없다고 주장했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기존의 나라를 제거하지 않고는 두 번째 나라를 세울 공간이 없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런데 아론손의 발견으로 그 논점이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아론손의 연구대로라면 과학적 영농기술로 땅이 비옥해져 팔레스타인의 주민 60여만 명을 쫓아내지 않고도 수백만 명이 추가로 정착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옴즈비 고어도 시온주의 유대인들이 중동의 아랍어권 및 여타 민족들을 도와 그 지역이 갱생되면, 사막이 다시금 번영을 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고 런던으로 돌아왔다."(429-30)


7부 중동 침략


"영국 지도자들은 중동 아랍어권 지역의 정복이 끝나갈 시점이 다가오자, 후세인에 대한 현지인들의 반발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1914년을 시작으로 바그다드 및 다마스쿠스의 분리주의 지도자들과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 기울였던 클레이턴의 노력도, 비무슬림 통치에 반대하는 현지인들이 저항에 막혀 좌초된 바 있었다. 그리고 지금 다마스쿠스가 영국군의 진군로에 포함돼 있는 상황에서, 그들은 중동의 미래를 위해 연합국의 대의와 계획을 받아들이도록 그곳 주민들을 설득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파이살이 연합국의 계획에 동의한 것도 그들에게는 무용지물일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오스만 정부가 시리아에 즉각 자치를 허용함으로써 아랍 민족주의에 선수를 치려 했던 보고서들도 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영국은 시리아 지방들에서 후세인보다 한층 좋은 평판을 얻을 조짐을 보인 다마스쿠스의 토착 아랍 지도부에 맞서, 후세인의 권리를 지켜줘야 하는 곤혹스런 입장에 빠질 수도 있었다."(503-4)


"마크 사이크스는 1918년 중반 7인위원회가 제기한 문제들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영국의 의도를 담은 선언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사이크스의 외무부 상관들이 공식적으로 승인한 선언문으로도 새로운 돌파구는 열리지 않았다. 사이크스의 필치에서 나온 것들이 그렇듯 그 선언문도 사용된 단어만 달랐을 뿐 아라비아 반도 이외의 아랍권 모두, 이런저런 유럽세력권이나 통치권에 포함되도록 만든 영국의 전후 중동정책을 다시 말한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이크스의 선언이 인정한 완전한 독립은 아라비아 반도에 국한돼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독립된 지역이거나 혹은 아랍인 스스로 독립을 쟁취한 지역들만 독립을 인정했다는 말이다." "1918년 11월 8일에는 마침내 중동에 토착정부들이 들어설 수 있도록 전폭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영국-프랑스 공동선언문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말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프랑스의 주장에 따라 아랍 '독립'이 언급되지 않은 것이다."(506-7)


"외무부는 육군성으로 하여금 앨런비에게 새롭고 중요한 지시를 내리게 함으로써, 전부터 징후를 보여온 정치적 논제를 계속 진행시켰다. 앨런비가 점령한 시리아 영토를 점령된 적의 영토가 아닌 〈독립국 지위를 갖는 동맹의 영토〉로 취급하라는 것이 그것이었다. 외무부가 〈주요 지역들에 아랍 기를 게양하고 그것에 경례하는 것과 같은 특징적 혹은 형식적 행위를 함으로써 아랍의 토착 지배권을 인정하고 수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그간 수차례 논의되었던 지시를 내린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10월 1일 사이크스는 앨런비에게 군정 지역을 최소화하고, 프랑스의 역할도 그에 맞춰 축소시키라는 전문을 보냈다." "이렇듯 외무부는 앨런비에게 형식적으로는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따르되 실제로는 다르게 행동할 것을 주문했고, 그 점에서 외무부의 조치는 더 많은 것을 원한 프랑스, 프랑스에는 아무것도 주고 싶어 하지 않은 파이살, 혹은 카이로 아랍부의 어느 곳도 만족시키지 못한 해법이었다."(512-3)


8부 승리의 떡고물


"영국의 정책 입안자들은 러시아의 볼셰비키 정부가 독일의 입김 아래 있을 것으로만 알았지, 오스만정부와 독일정부의 틈이 어느 정도나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깜깜 무소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1918년에도 그들은 독일이 아시아 북부 지역 점령을 끝내고, 이제는 중부를 탈취하는 과정에 있으며, 아시아 남부의 영국 입지도 뒤흔들 채비를 했다고 믿었다. 그것이 전시에 팽배했던 관점, 다시 말해 독일이 세계제국을 건설할 야망을 갖고 있고, 그러므로 종전 뒤 아시아의 모든 지역은 독일의 거대한 노예 식민지로 전락할 것이며, 아시아의 부와 천연자원 또한 독일 산업의 연료가 되어 종국에는 독일이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관점과도 부합했다." "에이머리가 1917년 말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적은 것도 그것을 뒷받침한다. 〈전쟁은 이제 문자 그대로 동방으로 향해 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국-독일 경계선을 결정짓기 위해 아시아의 남은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을 벌이게 될 것은 자명한 이치다.〉"(546)


"1918년 여름 전시내각 회의에서 영국군 참모총장은 유럽전의 승리가 1919년 여름에는 힘들고 1920년 여름에나 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다." "따라서 영국 내각도 적군이 그토록 신속히 아니 별안간 무너지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해, (적국들과의 휴전협정을 고려하거나 그 문안을 작성하는 등의) 준비를 전혀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고 실제로 며칠 뒤 영국정부의 현안이 되었다. 10월 1일에서 6일 사이에는 오스만제국 정부와 몇몇 튀르크 요인들이 강화를 타진해 오고, 10월 3일에서 4일로 넘어가는 밤에는 독일이 윌슨 대통령에게 강화를 요청하여 협상의 물꼬가 터진 것이다." "영국의 전시내각은, 영국이 지배하기를 바라는 중동 지역이 행여 영국군에 점령되기 전 전쟁이 끝날까봐 안절부절 속을 태웠다. 레오 에이머리가 종전이 되기 전에 사실상 중동을 소유하고 있어야만 영국의 세력권에 편입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스뫼츠와 참모총장을 닦달한 것도 그래서였다."(554-6)


"1919년 겨울 총리실은 영국 언론에 파이살의 아랍군이 앨런비 장군의 시리아 정복에 〈현저하게 기여했다〉는 것과, 그들이 〈앨런비의 군대에 앞서 시리아 내륙의 4대 도시(다마스쿠스, 홈스, 하마, 알레포)에 입성했다〉는 취지의 기밀 비망록을 배포했다. 비망록에는 파이살군이 헤자즈의 외국군이 아닌 원주민군으로서 시리아 도시들에 입성했으며, 〈그러므로 시리아를 해방시키는 데 조력한 아랍군의 대부분은 그 지방 원주민들이었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비망록의 취지는 아랍어권 시리아는 그들 스스로 봉기를 일으켜 해방되었고, 그러므로 (튀르크에 이어) 그곳을 다시 지배하려는 의도를 가진 서구 민주주의의 원리 또한 그곳과는 맞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로이드 조지는 실제로는 아랍인들이 기여한 부분이 〈지극히 미미〉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프랑스가 영국의 또 다른 주요 동맹인 파이살에게 불리하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자, 파이살과 시리아의 대군이 그들 나라를 직접 해방시켰다고 주장한 것이다."(575-6)


9부 썰물은 빠지고


"1차 세계대전의 승리로 영국제국의 힘은 절정에 달했다. 중동과 여타 지역에서 점령한 영토를 추가하여, 과거 그 어느 때 혹은 세계의 그 어느 제국보다 광대한 대제국이 된 것이다. 로이드 조지는 전쟁으로 나라가 만신창이가 되고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희생이 큰 모험을 치르느라 지친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시에 얻은 영토를 하나라도 더 부여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로이드 조지는 중동에 파견된 영국군만 해도 250만 명에 달하고 그중 25만 명이 죽거나 부상당한 반면, 갈리폴리 전투를 제외하면 프랑스군은 사상자가 거의 없었고 미군 또한 중동에는 발도 디밀지 않았다고 하면서, 영국은 중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평화회의에서도 그는 108만 4000명에 달하는 영국 및 제국 병력이 오스만 영토에 주둔해 있다는 사실에 근거해 자신의 주장을 펴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와 더불어 영국을 제외하면 점령군에 의미 있는 규모의 군대를 파견한 나라는 없다는 점도 지적했다."(583-7)


"중동의 평화협상은 기본적으로 로이드 조지가 짠 각본에 따라 전개되었다. 이는 미국을 소비에트 러시아나 혹은 소생하여 재무장한 독일이 제기할 수 있는 위협으로부터 영국을 보호해줄 세력으로 삼는 동시에, 이탈리아 및 프랑스와도 싸움을 붙여 어부지리를 챙기려는 두 가지 속셈을 가진 각본이었다. 하지만 이 전략은 1918~1919년에서 1919~1920년으로 협상시점이 넘어가면서 미국이 영국의 동맹도 아니고 어느 나라의 동맹도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엇박자가 나기 시작했다. 미국이 세계정세와 '헝클어진 동맹관계'로부터 발을 빼려고 했기 때문이다. 미국과의 동맹이 어려워지자 로이드 조지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모색하여 예전과 반대되는 길을 걸을 요량으로, 그간 중동에서 취했던 반프랑스 정책을 철회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영국-프랑스 동맹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손상을 입은 뒤였다. 결국 중동 평화협상은 출발도 어설프고 끝은 더욱 어설픈 것이 되고 말았다."(592-3)


"미국은 터키와 싸운 교전국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윌슨은 오스만과 관련된 협상에 참여했다. 그가 제안한 14개 조항이 오스만 문제의 타결에는 적용할 수 없었지만, 정치철학의 표현으로 간주되어 국제문제는 다룰 수 있었던 것이다. 로이드 조지도 그것을 알고 우드로 윌슨이 오스만제국의 아랍어권 지방들의 안건을 심의하려고 하자, 시리아의 독립을 위협하는 프랑스─윌슨의 14개 조항과 원칙에 반하는 위협이었다─로 그의 관심을 바꿔놓았다." "윌슨은 당연히 시리아인 스스로 정부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지지했다." "아랍 대표로 평화회의에 참석한 파이살도 회의 참석자들에게, 그가 독립을 주장하는 아랍지역에서 팔레스타인은 배제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유대인의 주장에 대해 보이는 파이살의 이런 합리성은, 아랍인들의 독립 주장을 영국의 사주에 의한 속임수로 보고 그에 대해 강경노선을 고수한 프랑스의 클레망소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600-1)


10부 아시아를 덮친 폭풍우


"중동 지역에서 이윽고 분란이 시작되었다. 1918년에 시작된 독립의 요구가 1919년에 들어서는 소요로 발전해간 이집트를 시작으로, 표면상으로 이집트와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아프가니스탄의 인도 변경지에서도 1919년 전쟁이 발발했다. 아라비아의 영국 정책도 그와 비슷한 시기에 와해되는 조짐을 보였다. 불행은 겹쳐 일어난다고 했던가, 당시 중동의 영국 당국에는 안 좋은 일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형국이었다. 트란스요르단만 해도 부족 간 투쟁으로 혼란이 초래되고, 서팔레스타인에서도 1920년 봄 유대인을 향한 아랍인들의 폭동이 일어나며, 1920년 여름에는 이라크에서 봉기의 불길이 타올랐으니 그렇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혼란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에 대한 확실한 해답은 아마도 종전 뒤 (재정난으로 인해) 중동에 주둔한 영국군 병력이 충분하지 못해, 사방에서 도전해오는 적들의 기세를 효과적으로 차단하지 못한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629)


"전후 영국이 중동에서 갖고 있던 입지에 최초로 도전장을 내민 곳은 수십 년 간 영국이 '임시' 보호령으로 통치했고, 그곳의 영국 통치자들이 처음부터 아랍어권 사람들은 다른 어느 국가보다 영국의 통치를 좋아한다고 믿었던 이집트였다. 하지만 문제는 영국이 이집트에 독립을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되풀이한 점에 있었다. 따라서 이집트 정치인들이 그 약속을 믿고, 1차 세계대전도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으니 영국도 이제는 이집트에 독립의 일정을 제시할 때가 되었다고 여긴다고 해서 사리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었다." "술탄과 이집트의 지도부들이 원하는 것은 완전한 독립이었다. 하지만 수에즈 운하에 많이 의존했던 영국으로서는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이집트 지도부와 합의를 이끌어내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마저 실패하여 영국은 결국 현지 정치인들의 동의 없이 군대의 힘으로 지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631-6)


"아프가니스탄은 인도 평원으로 이어지는 고개들이 있는 영국의 또 다른 전략거점이었다. 그러다 보니 영국도 1세기 동안 여러 차례 유혈낭자한 전쟁을 치르며, 적대국(러시아)이 그 험준한 산악왕국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려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다 1907년 영국-러시아 협정 체결로, 아프가니스탄이 영국 보호령임을 인정받음으로써 그 문제도 일단락된 것으로 여겨졌다." "재차 발발한 제3차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종결짓는 라왈핀디 조약이 조인된 것은 1919년 8월 8일 오전이었다. 영국이 적대적 외세 특히 전략적으로 중요한 산악왕국으로부터 러시아를 몰아내기 위해 보유했던 외교권을 철회하고, 아프가니스탄에 완전한 독립을 부여하는 내용의 조약이었다. 그런데 라왈핀디 조약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아프간 정부는 새롭게 얻은 자국의 독립을 볼셰비키 정부와 조약을 체결하는 데 사용했다. 이렇게 영국이 지난 십수년 간 아프간을 보호령으로 삼은 결과 얻은 것은 우호가 아닌 원한이었다."(637-40)


"아라비아에서는 영국의 두 주요 동맹인 헤자즈의 왕 후세인과 나지드의 왕 이브 사우드가 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분쟁은 후세인의 지배권이 끝나고 이븐 사우드의 지배권이 시작되는 국경지대의 조그만 도시풍 오아시스들이었던 (알)쿠르마와 투라바에 집중되었다. 그곳들의 점유가 보기보다 중요했던 것은 너른 목초지와 더불어 부족들의 충성을 얻을 수 있다는 점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종교적 이유 때문이었다." "이븐 사우드는 선대로부터 18세기의 종교 지도자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하브의 가르침을 물려받은 와하브주의 신봉자였다. 1745년에 맺은 양가의 동맹관계도 두 집안의 잦은 혼인으로 더욱 돈독해졌다. 문제는 이 와하브주의자들(와하브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와하비로 불렀다)이 그것에 적대적인 사람들에게는 광신도로 보일 만큼 엄격한 청교도적 이슬람을 표방했고, 예리한 감각을 지닌 이븐 사우드가 와하브의 그런 광신적 에너지를 정치적 목적에 이용할 생각을 했다는 점에 있었다."(642-3)


"후세인이 자신의 권위가 침해당한다는 위기감을 느낀 것도 이런 청교도적 이슬람이 부근의 헤자즈 지방으로 스며들어왔기 때문이다. 정통 수니파였던 그에게 와하브주의는 교의적이고 정치적인 적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근절시키기 위해 쿠르마와 투라바로 되풀이해서 군대를 보냈으나 가는 족족 패하기만 했다." "1921년 말에 이르면, 전투병력만 15만 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흐완('종교상의 형제들'이라는 뜻)을 선발대로 내세운 이븐 사우드군은 아라비아를 완전히 정복할 기세였다. 1920년 9월 20일에는 《타임스》의 중동 전문 특파원마저, 카이로의 아랍부가 후세인을 이슬람 칼리프로 만들려고 한 정책은 실패작이었음이 드러났다는 기사를 썼다. 그는 이븐 사우드가 헤자즈를 점령할 것이라는 예측도 했다. 그의 말대로 이븐 사우드는 4년 뒤인 1924년 헤자즈를 점령하고 후세인을 망명길로 내몰았다." "영국은 이렇듯 중동제국의 서쪽과 동쪽뿐 아니라 남쪽 경계지에서도 더는 상황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644-5)


"한편 무드로스 휴전협정이 체결된 1919년 말엽 오스만제국에서 실시된 하원 총선에서는 민족주의자들이 압도적 다수로 당선되었다. 그런데 새로 뽑힌 의원들은 하원이 소집되기도 전, 터키 내륙 깊숙이 위치하여 바다와 영국 함대의 대포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고, 서른여덟 살의 민족주의 지도자 무스타파 케말이 새로운 투쟁기지로 삼은 곳이기도 한 앙고라(지금의 터키 수도 앙카라)에 모여들어, 민족계약National Pact으로 알려진 케말주의적 정치원리가 담긴 선언문을 채택하여 열화와 같은 대중의 성원을 받았다." "1920년 1월 중순에는 콘스탄티노플에서 하원이 소집되고 1920년 1월 28일에는 하원이 비밀회의를 열어 민족계약의 채택을 의결한 뒤 2월 17일 대중에 그 사실을 공표했다." "20세기의 정치적 논제가 유럽 주변 대륙들에 대한 유럽 지배의 종식에 있었다면, 오스만 의회의 독립선언이야말로 20세기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라 할 만했다."(646-7)


"앙고라에 수립된 케말의 터키정부가 처음 결정한 사항은 러시아로 사절단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두 나라 간에는 우호관계가 수립되었으나, 조약)1921년 3월 16일에 조인된 모스크바 조약)이 체결되기까지는 1년 여의 기간이 걸렸다." "당시 스탈린은 인종문제와 국가통제인민위원이었다. 그랬던 만큼 볼셰비키 이데올로기보다는 러시아의 국가 이익을 우선시했을테고, 그래서 케말이 (볼셰비키 운동에 적대적인 태도를 가졌다는 것과는 별개로) 영국에 손상을 줄 수 있다고 보고 그런 결정을 내렸다. 현실주의적 아니 냉소적 볼셰비키였던 그로서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케말을 지원할 만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전례 없이 많은 양의 소비에트 자금과 물자가 반볼셰비키 민족주의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러시아-터키 국경지대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소비에트 러시아가 외국의 정치운동에 제공한 최초의 중요한 군사원조였다."(649-50)


"시리아에서는 세 개의 주요 급진적 민족주의 단체가 활동하였다. 메소포타미아 출신의 아랍계 오스만군 장교들로 구성되었던 만큼 당연히 메소포타미아 지방들의 미래를 관건으로 삼은 알 하드, 대다수가 팔레스타인 출신 아랍인들이어서 파이살이 시온주의자들에게 해준 약속을 철회하도록 압력 넣는 것에 전력투구한 반시온주의 조직인 아랍 클럽, 세 단체들 중 명성이 가장 높았던 알 파타트(청년 아랍협회)가 그들이었다." "시리아 의회는 1919년 중반 소집되기 무섭게 자신들이 원하는 목적을 분명히 드러냈다. 지금의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이스라엘이 포함되는 대시리아 독립국을 요구한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는 방식, 혹은 프랑스의 요구에 맞서 미국, 영국, 시온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던 파이살의 계획과는 상충하는 요구사항이었다." "1920년 1월 말에는 호전적 민족주의자들이 시리아 의회를 장악한 채 (프랑스의 느슨한 위임통치를 인정한) 파이살-클라망소 협정을 부결시켰다."(658-60)


"그러나 시리아 민족주의자들은 그들의 입지와 파이살의 입지 모두 영국이 없으면 무너질 허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1920년 7월 26일에는 프랑스군이 다마스쿠스를 점령했고, 7월 28일에는 파이살이 망명을 떠났다." "프랑스는 시리아를 몇 개의 하부 지역으로 나누었다. 지금의 레바논이 된 대레바논도 그중 하나였다. 1920년 8월 1일 구로 장군이 선언한 대레바논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에 프랑스의 직접 통치지역으로 명시된 곳과도 대체로 일치했다. 그곳에는 옛 오스만제국의 한 지방이었던 레바논─프랑스의 후원을 받는 마론파 기독교도와 전통적으로 그들의 적이었던 드루즈파의 중심지─외에 해안가 도시들인 베이루트, 트리폴리, 시돈, 티레, 그리고 레바논 내륙의 상당 지역에 걸쳐 있던 알비카(베카) 골짜기도 포함되었다. 기독교도 근거지인 레바논에 생경한 지역들이 추가된 것이고, 그에 따라 다수의 수니파와 시아파 무슬림 인구도 그곳으로 유입되었다."(662-4)


"프랑스 정부는 시리아를 정복하기 위한 군사 행동을 하는 것과 더불어, 부근의 팔레스타인이 '시온주의 국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외교와 선전운동도 함께 펼쳤다." "하지만 1920년 프랑스가 영국의 이익에 직접적 위협을 가한 곳은 그곳들이 아닌, 장차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75퍼센트 정도를 접하게 될 요르단 강 동안의 인구가 적은 트란스요르단이었다. 부족적 삶과 구조로 보면 아라비아에 가깝고, 역사적으로는 많은 지역이 성서의 땅에 속해 있었으며, 과거 한때는 아라비아의 로마 속주에 속해 있기도 했던 복잡다단한 지역이었다. 게다가 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8년 가을에는 앨런비 장군이 그곳을 점령한 뒤 파이살이 통치하는 무능한 다마스쿠스 정부에 일임해 두었기 때문에, 사실상 그곳은 방치돼 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영국의 관점으로 보면 그것은 실책이었다. 프랑스가 다마스쿠스에서 파이살 세력을 몰아낸 뒤 파이살의 계승자를 자임하며 트란스요르단의 지배권을 주장했기 때문이다."(666-8)


"1917~1918년 앨런비 장군의 점령에 이어 팔레스타인에는 군정이 수립되었다. 그와 더불어 평판 나쁘고 수행하기 힘든 짐을 떠맡은 것에 대한 영국정부의 고난도 함께 시작되었다. 벨푸어선언에 따라 팔레스타인에 유대민족의 조국을 창설하는 문제를 두고 이해 당사자들끼리 군정 기간 내내 실랑이를 벌인 탓이다." "클레이턴만 해도 시온주의를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공동체를 전 세계 유대인들의 문화·정서적 중심지가 될 수 있도록 확장하되, 유대인 국가가 아닌 다민족 국가로서의 영국 통치령으로 받아들였다. 팔레스타인의 다른 영국군 장교들은 심지어 그런 한정된 시온주의조차 인정하지 않고 시온주의에 반대하는 아랍인들을 지지했다." "반면에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벨푸어선언이 영국정부의 확고한 정책이고 따라서 반드시 실행될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야 하며, 그렇게 하면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도 군말 없이 그 정책을 따를 것이고, 나아가 그것의 이점에도 눈뜨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672-3)


"로이드 조지는 바스라와 바그다드 그리고 모술에 대한 통치방법을 구상할 때, 그 세 곳이 단일 정치체로 통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이라크(영국이 메소포타미아 지역들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한 아랍식 명칭)는 단일 정치체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분열되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쿠르디스탄('쿠르드족의 땅'이라는 뜻)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모술을 구태여 이라크에 포함시키려 한 것도, 그곳이 전략적으로 중요하고 유전을 보유하고 있을 개연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아널드 윌슨은 시아파와 수니파 간의 갈등을 메소포타미아의 근본적 문제로 파악했다. 그에 따르면 200만 명에 달하는 메소포타미아의 시아파 무슬림이 소수파인 수니파 무슬림의 지배를 수용하지 않을 것은 뻔한 노릇이지만, 그렇다고 〈수니파 지배가 수반되지 않은 정부 형태 또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더구나 윌슨의 보고에 따르면 이라크 주민의 75퍼센트는 〈정부에 한 번도 복종해본 적이 없는〉 부족이었다."(679-80)


"페르시아의 스러져 가는 카자르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무력한 젊은 군주 아흐마드 샤는 목숨을 잃을까 전전긍긍하는 형편인데다, 그렇지 않더라도 친영파 인물을 총리에 앉혀두는 조건으로 영국정부의 정례 보조금을 받는 처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커즌의 지휘 아래 테헤란의 영국 공사와 페르시아 총리 및 그의 두 동료 관리들 간에 협상이 진행되었다. 이 협상에서 페르시아 대표들은 조인의 조건으로 영국에 13만 파운드를 요구하여 몰래 받아 챙긴 뒤 협정문에 서명하였다. 영국-페르시아 협정은 이런 협잡 끝에 1919년 8월 9일 조인되었다." "그러나 1921년 2월 21일 대령 레자 칸이 카자크 병력 3,000명을 이끌고 테헤란으로 진군, 권력을 탈취하고 스스로 육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권력을 장악한 지 고작 닷새밖에 안 된 2월 26일 테헤란의 신정부는 소비에트 러시아와 우호조약을 맺었다." "이렇게 해서 세 이슬람 국가들(터키,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은 러시아의 보호를 받는 반영 동맹국이 되었다."(689-96)


11부 러시아, 중동에 돌아오다


"소비에트가 페르시아 민족주의를 조장하고, 터키 민족주의를 후원하고, 이라크 봉기를 도와주려고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운동들 중 어느 것도 그들이 직접 고취하거나 지휘하지는 않았다. 중동 일대를 휩쓴 봉기가 볼셰비키 러시아가 연루된 광범위한 국제 음모 때문에 일어났다고 믿은 것은 영국의 망상이었다. 중동 사태는 일련의 어설픈 봉기들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중 많은 것들이 개별적 혹은 지역적 상황에 따라 자생적으로 발생했다. 따라서 그 운동들을 이용은 했을망정, 볼셰비키와 볼셰비키주의가 그 운동들에서 현저한 역할을 한 것은 없었다." "영국 관리들은 종전 뒤 중동에서 일어난 봉기들을 오래된 음모자들이 꾸민 사악한 음모로 규정했다. 영국 정보부는 볼셰비키와 국제 금융, 범아랍주의와 범튀르크주의, 이슬람과 러시아도 거대한 음모의 공범자들인 국제적 유대인 공동체들과 독일-프로이센이 이용한 재료로 보았다."(701-3)


"1919년 외무장관이 된 조지 커즌은 러시아와의 거대한 게임을 열렬히 옹호한 인물답게 러시아의 세력 팽창에 맞서 영국의 군사적 입지를 높여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러시아에서 독립한 남카프카스와 북부 페르시아에도 확고한 방어력을 구축해야 한다고 보았다. 커즌과 외무부 사무차관 하딩은 중동의 어느 한 지역을 러시아에 빼앗기면 도미노효과로 나머지 지역도 잃게 될 것이고, 그러다 나중에는 인도마저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인도장관 에드윈 몬터규와 인도 부왕 쳄스퍼드 남작 3세는 볼셰비키 러시아의 위협이 군사적인 면보다는 정치적인 면에 치중될 것이고, 그러므로 러시아와의 경쟁도 이슬람권 아시아 일대의 민족주의 세력의 지지를 얻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도 영국은 중동의 민족주의 세력을 러시아로 돌아서게 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고 하면서, 그 상황에 영국군까지 주둔시키면 민족주의 세력은 영국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710-1)


12부 1922년의 타결


"1921년 2월 식민장관으로 취임했을 당시 처칠에게는 이미 적은 비용으로도 중동을 지배할 수 있는 광범위한 복안이 마련되어 있었다. 지난날 육군장관과 공군장관을 겸직했을 때도 그는 비행기와 장갑차로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하여, 중동의 유지비를 줄이자는 제안을 했다. (당시 그가 쓴 글에) 방비가 잘된 공군 기지 몇 곳만 있으면 〈병력과 돈만 잡아먹는 기나긴 병참선 없이도〉 영국 공군은 〈보호령들을 충분히 지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록된 것도 그 점을 말해준다. 하지만 그것은 처칠도 인정했듯이 외부의 침략에서 메소포타미아를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의 '내적 안정 유지'를 유일한 목표로 삼은 전략이었다. 처칠이 중동에서의 영국 문제를 외부가 아닌 내부, 내적 분란에서 찾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시대에 뒤쳐진 제국주의적 관념을 내포하고 있던) 처칠의 전략은 토착민의 봉기 진압에 주안점을 두었던 만큼, 동의가 아닌 강압으로 아랍인을 통치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751-2)


# 카이로 회의의 네 가지 기본 안건(1921년 3월 21일)

1. 메소포타미아(이라크) 문제 : 파이살에게 왕위를 부여하며, 원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왕위를 제공한 것처럼 꾸민다.

2. 쿠르드족 지역 문제 : 이라크 편입 또는 쿠르디스탄 독립 안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여 현행 독립체 상태를 유지한다.

3. 트란스요르단 문제 : 파이살의 형 압둘라를 임시 총리로 임명하여 반프랑스 운동과 반시온주의 운동을 억제한다.

4. 이븐 사우드 문제 : 하심가 왕족(파이살, 압둘라)의 승승장구에 반발할 여지가 있으므로 연간 보조금을 인상해준다.


"파이살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위임통치령에 반대하고 이라크('뿌리가 튼튼한 나라'라는 뜻)의 정식 독립을 요구하여 영국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이라크와 영국의 관계를 국제연맹의 결정이 아닌, 양국 간의 조약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그에 대해 영국은 국제연맹의 승인 없이 이라크의 지위를 바꿀 법적 권한이 자신들에게는 없다고 맞섰다. 다만 위임통치령과 관련된 것이면 조약 협상에 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파이살은 위임통치령과 관련된 어떠한 문구도 조약에 포함시키기를 거부했다. 그런 식으로 협상은 런던에 분노와 좌절을 안겨주며 1년 넘게 지지부진 계속되었다." "따지고 보면 이라크와 이집트가 얻은 것은 제한된 자치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국가의 지위는 갖게 되었다. 이라크와 이집트 모두 정치 지도자들은 독립운동을 했다. 영국에 의해 임명된 군주들도 그 점에서는 다를 바 없었다. 그들로서는 그것이 자리를 보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764-6)


"압둘라를 트란스요르단 지배자로 남겨둠으로써 파생되는 문제는 정작 다른 데 있었다. 처칠도 예상하지 못했던 그것은, 그로 인해 영국이 사우드가와 하심가가 벌이는 아라비아의 극렬한 종교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영국 식민성이 트란스요르단에 잠정적으로 취한 일련의 행정적 조치들로 그곳은 영속적인 정치적 실체로 굳어져 갔다. 아라비아 왕자가 외국 수행원들과 암만에 정착해,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이라는 복잡한 통치체제 속에 항구적 요소로 뿌리내린 것이다. 팔레스타인은 본래 그곳의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에 분할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간 되풀이된 제안이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영토의 75퍼센트가 이미 그곳 사람도 아닌 아랍 왕조에 돌아가 버린 형국이었다. 훗날 입헌국가 요르단으로 독립하게 될 트란스요르단은 이렇게 팔레스타인에서 분리된 개별 정치체로 서서히 발전해갔다. 그리하여 지금은 요르단이 지난날 팔레스타인의 일부였다는 사실마저도 잊을 정도가 되었다."(772-3)


# 사우디아라비아 왕국과 요르단 하심 왕국의 대립


"1921년 아민 알 후세이니가 예루살렘의 대 무프티(최고의 법률적 권위자) 겸 팔레스타인 무슬림 지도자가 되었을 때 리치먼드는 그로 인해 시온주의가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타격을 받은 쪽은 오히려 아랍인들이었다. 대 무프티가 아랍인들을 피투성이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감으로써, 시온주의에 가하려던 것보다 오히려 더 끔찍하고 파괴적인 피해를 그들에게 입힌 탓이었다. 아만 알 후세이니는 '모 아니면 도' 식의 모험가였다. 그러다 보니 아랍인-유대인 문제도 유대인이든 아랍인이든 어느 한쪽이 쫓겨나거나 소멸되어야 끝장이 나는 극단으로 몰고 가 아랍 영토와 아랍인들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렸다. 그런 극단적 행보를 이어가던 끝에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결국은 나치 독일에 가서 아돌프 히틀러와도 손을 잡았다. 그렇다고 그가 아랍권 팔레스타인을 전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팔레스타인에는 아민 알 후세이니와 지도자 자리를 놓고 겨룬 여러 명의 경쟁자가 있었기 때문이다."(779-80)


"아랍 지도부와 시온주의 지도부는 벨푸어선언을 구체화한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안에 대해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위임통치령 내용과 시온주의에 대한 영국의 공약이 대폭 축소된 영국정부의 백서도 거부한다는 전문을 런던 식민성에 보낸 아랍회의 집행위원회와 달리, 하임 바이츠만 박사는 일단 그것으로 유대인들 대다수가 팔레스타인에서 발전을 이루어 자치권을 획득할 수 있는 기틀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 보고 영국정부의 결정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시온주의 지도부는 시간이 가면 상황이 개선되리라는 희망으로 처칠이 부여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받아들인 것이다. 반면 아랍회의 집행위원회는 시간이 가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처칠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거부한 것이다. 1922년 7월 22일에는 국제연맹이, 영국이 요르단 강 서안에 (처칠이 고쳐 쓴) 벨푸어선언을 실행하도록 명시된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안을 최종 승인했다."(791-2)


"오스만제국의 아랍어권 지역은 튀르크의 지배를 더는 받지 않게 되었다. 동쪽에 메소포타미아에는 아라비아 왕자(파이살)가 지배하고 쿠르드족, 수니파 무슬림, 시아파 무슬림, 유대인 인구가 뒤섞인 신생국가 이라크가 세워졌다. 독립국의 외양은 갖췄으나 실질적으로는 영국의 보호령이었다. 이라크에 접한 시리아와 크게 확대된 레바논은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팔레스타인과 요르단 강 동안에는 앞으로 입헌국가 요르단으로 독립하게 될 신생 아랍국이 수립되고, 요르단 강 서안은 유대민족의 조국이 들어설 때까지 당분간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는 것으로 상황이 정리되었다. 따라서 처칠이 원했던 오스만제국의 재건된 모습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재편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식민장관 처칠이 설정했던 주요 목표들은 달성한 셈이었다. 그가 정책의 최우선 목표로 삼았던 비용절감을 관철시킨 것만 해도 그랬다. 경제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군사체계를 확립한 것도 처칠이 거둔 큰 성과였다."(795)


"중동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된 것은 두 가지 요인 때문이었다. 하나는 유럽 국가들이 재편을 맡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영국과 프랑스가 왕조, 국가, 정치시스템만 구축해 놓고 그것들이 지속될 수 있는 대책 마련에는 소홀한 탓이었다. 전시와 종전 뒤 영국과 연합국은 중동의 구질서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부숴놓았다. 아랍어권 지역에서의 오스만 체제를 회복 불가능하게 파괴시킨 뒤 그 자리에 나라들을 세우고, 지배자들을 임명하며, 국경선을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국가시스템 비슷한 것을 도입했으나, 그것에 반발하는 현지인들의 저항까지 죄다 물리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중동 분규가 여타 지역의 분규와 비교하여 특별했던 것은, 1922년 초 영국과 프랑스가 합의한 내용에 따라 그 즉시 모습을 드러냈거나 혹은 종국에는 모습을 드러내게 될 나라들의 규모와 경계는 물론이고 그 나라들의 존립권 자체에도 의문을 제기하는 더욱 본질적인 문제가 내포돼 있다는 점이었다."(863-4)


"유럽의 정치 가설은 그에 대해 특별히 생각하는 사람이 없을 만큼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이론이 되었다. 그러나 최소한 그중 하나, 세속적 문민정부에 대한 현대적 믿음만은, 정치를 포함해 삶의 모든 양상을 지배하는 이슬람 율법을 1,000년 넘게 신봉해온 사람들이 사는 중동에서는 이질적 존재였다." "종교적 이유로든 그밖의 또 다른 이유로든, 1922년의 타결 혹은 그것의 토대가 된 근본적 가설에 맞서 지속적으로 저항하는 것이 중동 정치의 특징이 된 것도 이슬람에 대한 유럽인들의 이해가 부족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중동에는 합법성에 대한 인식─게임의 규칙이 없다는 것─이 없고,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믿음도 없으며, 경계지 내에서는 어느 곳이든 나라로 부르면 나라가 되고, 지배자를 칭하면 지배자가 되는 곳이었다. 그 점에서 연합국이 제아무리 1919년부터 1922년까지 오스만제국의 계승자들을 들어앉혔다고 주장한다 한들, 중동에는 아직 술탄의 진정한 계승자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었다."(8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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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회랑 : 국가, 사회 그리고 자유의 운명 - 2024 노벨경제학상 수상작가
다론 아제모을루 외 지음, 장경덕 옮김 / 시공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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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역사는 어떻게 끝나는가?


"지배는 단지 비인간적인 힘이나 폭력의 위협에서만 비롯되지는 않는다. 불평등한 권력 관계는 어떤 경우든 일종의 지배관계를 만들어낸다. 위협하거나 관습과 같은 다른 사회적 수단으로 강제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다." "지배를 받는 사람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로크의 개념을 가다듬어서 '자유'를 지배가 없는 상태로 정의한다." "자유는 단지 자신의 행동을 마음대로 선택한다는 추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런 선택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 혹은 조직이 당신을 협박하거나 뭔가를 강제할 힘을 갖고 있을 때, 혹은 당신을 복종시키려고 사회적 관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때 당신은 선택을 실행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실행 능력은 실제 강제력을 행사하거나 그렇게 하겠다고 위협하는 방식으로 분쟁이 해결될 때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굳어진 관습에 따라 강요된 불평등한 권력 관계로 분쟁이 해결될 때도 당신에게는 선택을 실행할 능력이 없다."(42-3)


"홉스는 폭력은 단지 그 위협만으로도 파괴적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누군가가 어두워진 뒤 집에 머무르며 이동과 교류를 자제함으로써 실제 폭력을 피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폭력의 위협은 유해하다는 말이다. 홉스에 따르면 전쟁 상태의 본질은 '실제 투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투쟁이 벌어질 수 있는 성향, 언제든 투쟁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성향에 있다.' 그러므로 전쟁 상태의 가능성은 사람들이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홉스는 또한 인간이 기본적인 편의와 경제적 기회를 원한다는 점을 알았다. 그는 '인간을 평화로 향하게 하는 정념은 죽음에 대한 공포, 편안한 삶을 위해 필요한 것들에 대한 욕구, 그런 것들을 자신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이라고 썼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전쟁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당연히 무정부 상태에서 벗어날 방법을 모색하고, '자신에 대한 제약'을 부과해 '비참한 전쟁 상태에서 스스로 벗어날' 방법을 찾을 것이다."(46-7)


"전쟁 상태를 피하는 것이 무엇보다 긴요하다는 홉스의 주장은 옳다. 일단 국가가 형성되고, 폭력 수단을 독점하며 법을 집행하기 시작하면 온갖 살인이 줄어들 것이라는 그의 예상도 정확하다. 리바이어던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통제했다. 오늘날 서유럽과 북유럽 국가에서 인구 10만 명당 살인 사망자는 한 명이 될까 말까다. 사람들은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자유에 더 가까이 다가섰다. 하지만 홉스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측면도 많다. 첫째로 무국가 사회도 폭력을 통제하고 분쟁을 억누르는 데 상당한 능력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물론 우리는 무국가 사회가 그다지 많은 자유를 실현하지 않는다는 점도 살펴볼 것이다. 둘째로 홉스는 국가가 실현할 자유에 관해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는 점이다. 확실히 홉스는, 그리고 국제사회도 한 가지 결정적인 문제에서 틀렸다. 힘이 곧 정의는 아니며, 권력은 확실히 자유를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국가의 속박 아래에서의 삶 역시 끔찍하고 잔인하고 짧을 수 있다."(50)


"(무국가 사회에서) 규범은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어떤 식의 행동을 피하고 억제할지, 언제 개인과 가족을 추방하고 다른 이들의 지원을 끊을지 결정했다. 규범은 또한 사람들이 결속하고 자신들의 행동을 조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그들이 다른 공동체 그리고 같은 공동체 내에서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상대로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 규범은 독재적 리바이어던의 후원 아래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리바이어던이 없을 때 규범은 사회가 전쟁을 피할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자유와 관련된 문제는 다양한 측면이 있다. 행동을 조정하고 분쟁을 해결하며 정의에 대한 공유된 인식을 형성하도록 진화된 이들 규범이 동시에 일종의 우리cage도 만들어낸다. 사람들의 역량을 줄인다는 점에서는 매한가지인 또 다른 지배를 강요하는 것이다. 오로지 규범에만 의존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더 단단하고 숨 막히는 제약일 수 있다."(62-3)


제2장 레드 퀸


"한편으로 국가를 통제하고 일반 시민을 지배하는 엘리트층의 힘을 제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국가의 역량을 확대하는 솔론의 (개혁) 방식은 고대 문명의 고유한 특성이 아니다. 그것은 족쇄 찬 리바이어던의 본질이다. 리바이어던은 사회가 기꺼이 협력하려 할 때는 더 큰 역량을 갖추고 훨씬 더 강력해질 수 있지만, 협력이 이뤄지려면 사람들이 바다 괴물을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신뢰해야 한다. 솔론은 그 신뢰를 구축했다. 그러나 신뢰와 협력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자유 그리고 궁극적으로 국가의 역량은 국가와 사회 사이의 힘의 균형에 달려 있다. 국가와 엘리트층이 지나치게 강력해지면 우리는 독재적 리바이어던을 부르게 된다. 그들이 뒤처지면 우리는 부재의 리바이어던과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둘이 함께 달리면서 어느 쪽도 우위를 차지하지 않는 국가와 사회가 필요하다. 이는 루이스 캐럴이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묘사한 레드 퀸Red Queen 효과와 다르지 않다."(95-6)


"아테네는 세계 최초의 족쇄 찬 리바이어던 중 하나를 만들었다." "국가는 사회를 지배할 수 없었지만 사회도 국가를 지배할 수 없었고, 어느 한쪽의 진보는 다른 쪽의 저항에 부딪히고 혁신을 자극했으며, 사회의 족쇄는 국가의 활동 범위와 역량을 새로운 영역으로 확대할 수 있게 해줬다. 이 과정에서 사회는 또한 국가가 민중의 통제 아래 남아 있으면서 역량을 더욱 깊이 발전시킬 수 있도록 협력했다. 이 모든 것에서 레드 퀸이 규범의 우리를 무너뜨리는 방식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리바이어던에 족쇄를 채우려면 사회는 협력하고, 집단을 조직하고, 정치에 계속 참여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일은 사회의 내부가 볼모와 주인으로 갈라지고, 씨족, 부족, 혹은 친족집단들로 나뉘면 일어나기 힘들다. 솔론과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들은 이처럼 대립적인 정체성을 점진적으로 제거했고 더 광범위한 협력의 축을 만들기 위한 공간을 조성했다. 이는 우리가 족쇄 찬 리바이어던의 창조 과정에서 반복해서 확인하게 될 특성이다."(103)


"우선 국가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멈추고, 사회의 분쟁 해결을 돕고, 사람들을 지배로부터 보호하고, 공공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하려면 미국의 국가건설자들처럼 강력한 국가를 요구하는 일단의 개인이나 사회집단이 있어야 한다." "(미 건국 과정에서 그 역할을 맡은) 연방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국가건설 계획이 리바이어던에게 '의지를 일임'해야 할 사람들의 마음에 들도록 권리장전과, 자기들의 권력에 대한 다른 견제장치를 도입해야 한다는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들이 이 모든 권리장전과 견제장치를 간절히 원한 건 아니었다. 사실 해밀턴은 이런 〈민주주의의 과잉〉을 헐뜯었으며, 대통령과 상원의원의 종신 재직을 제안하기도 했다." "족쇄 찬 리바이어던의 두 번째 축인 사회적 결집은 레드퀸 효과의 핵심이기 때문에 훨씬 더 중요하다. (정치 참여를 뜻하는) 사회적 결집은 엘리트층에 가하는 전반적인 압력을 포함한 제도화되지 않은 형태와 선거나 회의체를 통하는 제도화된 형태를 모두 취한다."(108-11)


"국가가 이름뿐인 부재의 리바이어던처럼 행동하는 대표적인 현대 국가가 레바논이다. 부재의 리바이어던은 사회가 국가를 믿지 못하고, 사회가 국가가 (인구 총조사 등으로 수집한 데이터에 기반한) 판독 능력을 악용할 것을 걱정할 때 생겨난다." "레바논은 1932년 단 한 차례 실시된 인구 총조사에서 나온 인구 비중─기독교인이 전체 인구의 51퍼센트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시아파와 수니파 그리고 드루즈파 무슬림으로 구성된다─에 따라 집단 간 권력을 배분했다." "이 협약은 결국 믿을 수 없을 만큼 허약한 국가를 낳았다. 부재하는 리바이어던 아래에서 예상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이 나라에서 권력은 국가가 아니라 개별적인 지역사회에 있다. 이 국가는 보건이나 전력 같은 공공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지만, 지역사회는 제공한다. 국가는 폭력을 통제하거나 법을 집행하지도 않는다. 시아파 무슬림 단체인 헤즈볼라는 자체적으로 사설 군대를 보유하고 있고, 베카밸리의 여러 무장 세력들도 그렇다."(125)


"레바논에서 국가는 국민이 올바른 공학적 설계를 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허약한 것이 아니다. 사실 상당히 현대적인 대학체제를 갖춘 이 나라 사람들은 중동 지역에서 가장 교육을 많이 받은 편이다. 그들이 역량 있는 국가를 건설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공동체들이 미끄러운 비탈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국가가 허약하게 설계된 것이다. 의원들은 자기들이 일을 많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아는데, 의사당에 왜 나타나겠는가? 누가 선출될지 정말로 관심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므로 의원들은 선거를 늦추기로 의결할 수 있다." "누구도 의회에 권력을 주고 싶어 하지 않고, 사람들은 의회를 불신하며, 사회적 행동주의 또한 싫어한다. 누구를 믿어야 할지 도무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는 국가가 다른 이들에게 포착될까 두려워하며 판독 불능 상태로 남아있기를 바라며, 그 가능성을 확실히 제거하려고 리바이어던이 계속 졸고 있도록 한다."(129-30)


제3장 권력의지


"국가건설자가 되려는 이들이 어떤 '경쟁우위edge', 즉 앞길의 걸림돌을 넘을 수 있게 해주는 특별한 뭔가를 가지고 있다고 하자. 무함마드의 경쟁우위는 종교에서 나왔다. 그에게는 분쟁을 해결하는 역할을 하는 데 정당한 권위를 부여하고 추종자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해주는 종교적 이념이 있었으며, 새로운 공동체를 창설하기 위해 그 영향력을 이용했다." "또 하나의 강력한 경쟁우위는 조직적인 요소로, 지도자가 더 강한 통솔력이나 군사력을 발휘하기 위해 새로운 연합이나 더 효과적인 조직을 형성하는 능력에서 나온다." "또 다른 가능성은 기술적인 경쟁우위다. 적들이 활용할 수 없는 총이라는 군사 기술에 크게 의존해 국가건설 계획을 실현한 하와이의 카메하메하 왕의 성공이 좋은 예다." "초기국가 형성의 마지막 특징은 (친족 공동체를 종교 공동체로 일신하려 했던) 무함마드의  부상이 잘 보여주는 것처럼 정치적 위계가 출현하면서 사회의 재조직화가 이뤄진다는 점이다."(156-7)


"무국가 사회는 경쟁우위를 가진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권력의지에 압도되고 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지도자들은 족쇄 찬 리바이어던을 창설하거나, 자유를 촉진하거나, 엘리트층과 시민들 간 권력의 불균형을 바로잡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자신의 권력과 지배를 확대하려는 동기로 움직인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아테네의 솔론은 예외적인 경우였다. 그는 부유한 가문과 엘리트층의 지나친 영향력을 억제하기 위해 권력을 잡았고, 따라서 리바이어던에 채울 족쇄를 만드는 건 그의 임무였다. 다른 국가건설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솔론 시대의 아테네와 다른 사회들을 구분 짓는 훨씬 더 근본적인 차이는 아테네 사회가 이미 정치 권력의 배분과 분쟁 해결을 규제할 어떤 공식적인 제도를 개발했었다는 점이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그런 제도는 솔론과 그 뒤를 이은 클레이스테네스를 비롯한 다른 지도자들이 민중의 정치 참여를 늘리고 사회와 정치의 위계를 억제하는 기존의 규범을 강화하도록 토대를 제공했다."(178-9)


"티브족이나 메디나, 메카, 줄루족 혹은 카메카메하 시대의 하와이에는 그런 제도들이 전혀 없었다. 그 대신 이런 사회들은 족쇄 찬 리바이어던에게 불리한 방법을 썼다. 실력자가 되려는 자들이 권좌에 오르는 것을 막으려고 이 사회들이 이용한 방법은 분쟁을 규제하고 정치적 위계의 출현을 저지하는, 주술과 같은 규범이나 친족 기반 관계 혹은 카푸 체계의 복합적인 수단들이었다. 그러나 일단 권력의지가 규범들을 무력화해버리고 나면 새롭게 부상한 국가 권력에 효과적인 대항력으로 남아 있는 것들은 많지 않았다. 국가건설자들은 또한 자신들의 의제를 추구하기 위해 재빨리 규범들을 바꿔버렸다." "이런 상황은 국가와 사회가 둘 다 허약한 바닥 부근에 해당하며, 이때 일단 진행되기 시작한 국가건설 과정을 억제할 수 있는 사회의 규범과 제도가 없으면 회랑으로 진입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권력의지에 직면한 사회는 독재적 리바이어던으로 가는 것밖에는 달리 길이 없다."(179-80)


제4장 회랑 밖의 경제


"독재적 리바이어던은 안전과 예측 가능성, 질서를 만들어낼 터이므로 더 나은 경제적 유인을 낳으리라는 홉스의 생각 역시 부분적으로만 맞다." "(무함마드 사후에 등장한) 우마이야와 압바시야 왕조들은 제국의 지방을 다스리고, 세금을 걷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점점 더 지역 엘리트층에 의존했다. 엘리트층의 지지를 받기 위해 그들은 '징세 도급tax farming' 제도를 도입해 일정한 금액을 받고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팔았다. 일단 다마스쿠스 정권이 준 징세권과 그다음에 권력을 잡은 압바시야 왕조의 바그다드 정권이 준 징세권을 갖게 되면 엘리트층은 지역사회에 어떤 세금이든 맘대로 부과할 백지수표를 쥐는 셈이었다. 이로 인해 징벌적으로 높은 세율의 과세와 엘리트층의 토지 축적이 함께 이뤄졌던 것으로 보인다. 엘리트층은 그들이 부과한 세금을 낼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에게서 토지를 넘겨받았기 때문이다. 제국의 이런 정치체제는 결국 자멸을 불러왔고, 분열된 제국은 945년 마침내 붕괴했다."(193-7)


"무함마드가 메디나에서 그랬던 것처럼 중재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 집단의 인정을 받으면 지도자가 되며, 〈지도자의 지위는 그가 우두머리라는 뜻이고,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복종하지만 그가 자신의 지배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권력을 갖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이븐 할둔은 일단 그런 지도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곧바로 사회를 미끄러운 비탈로 끌고 갈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이해했다." "할둔의 표현에 따르면, 결국 아랍의 집단의식이 사라지고, 인종이 소멸하고, 아랍주의Arabism가 완전히 파괴되면서 칼리프 국가는 정체성을 잃었다. 정부 형태는 순전히 왕권으로 다스리는 단순한 형태였다." "여기서 할둔은 새로운 왕조의 창건이 지니는 경제적인 함의를 암시한다. 왕조의 초기에 집단의식의 힘과 '종교의 억제력'이 작동할 때는 경제적 번영의 잠재력이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왕권'이 스스로 공고해지고 경제정책은 '백성의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파괴적'인 것으로 바뀌었다."(197-9)


"(전쟁 상태나 규범의 우리를 탈피한) 독재적 리바이어던은 사회를 조직하고, 법체계를 구축하고, 직접 경제성장을 자극하기 위해 투자도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독재적 성장'의 요체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정치적 권력을 손에 넣게 될수록 경제적 혜택의 독점은 더 심해지고 국가가 보호해야 할 재산권을 침해하려는 유혹은 더 커진다." "독재적 성장이 제한적인 수준에 그치리라고 보는 두 번째 이유 역시 근본적이다.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루려면 안전한 재산권과 교역, 투자뿐만 아니라 혁신과 끊임없는 생산성 향상이 필요하며 후자가 더 중요하다. 이런 것들은 독재적 리바이어던이 매섭게 지켜보는 가운데서는 이루기가 훨씬 더 어렵다. 혁신에는 창조성이 필요하며, 창조성에는 개인들이 두려움 없이 행동하고, 실험하고, 설사 다른 이들이 좋아하지 않더라도 자기 뜻에 따라 스스로 진로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필요하다. 이런 자유는 독재체제 아래서는 지속하기 어렵다."(206-7)


"무국가 상태에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끝없는 투쟁이 벌어지고 형편없는 유인체계 탓에 '열심히 일할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사회가 규범과 관습을 내세워 분쟁을 단속하고 폭력을 억제하면 경제는 규범의 우리에 갇히는 경향이 있다. 그런 경제는 규범에 제약을 받으며, 가난을 넘는 데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온통 뒤틀린 경제적 유인으로 가득 차 있다. 홉스는 독재체제가 이런 결과를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독재적 성장은 본래 취약하고 제한적이다. 독재적 리바이어던은 사회에서 수입을 더 많이 짜내고, 값진 자원을 더 많이 독점하며, 제멋대로 행동하려는 유혹을 끊임없이 받는다. 또한 국가 권력은 독재자 자리를 노리는 도전을 피하거나 무력화하는 엄청나게 비효율적인 체제를 만들어낸다." "여기에 더해 독재적 성장은 자유롭게 기능하며, 광범위한 기회와 경제활동의 유인을 만들어내고, 투자와 실험 그리고 혁신을 끌어낼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지 않는다."(223-4)


제5장 선정의 알레고리


"코무네 자치정부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려면 공화주의적인 시에나가 9인위원회 시대에 어떤 모습이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좋다.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성인 남성 시민이 모두 참여하는 민회였다. 민회는 로렌체티의 시대에 위축된 상태였지만 여전히 시에나의 정치체제 내에 있었고, 새로운 행정장관인 포데스타가 취임할 때처럼 특별한 경우에 모였다. 14세기 중반에 민회의 역할은 종을 울려 소집했던 '타종 평의회'로 넘어갔다. 평의회는 남성 시민 300명으로 구성됐는데, 시에나의 테르초라는 행정구역 세 곳에서 각각 100명씩 1년 임기로 선출했다. 이 기구의 선거인들은 9인위원회의 콘술들과 포데스타, 재정관과 '조달관'으로 불리는 네 명의 주요 재정 담당 관리들을 포함한 국가 행정 관료, 국가가 임명한 재판관들이었다. 정부의 주요 기능은 포데스타와 9인위원회가 수행했고, 조직화한 특정 이해관계자들, 특히 유력 상인조합과 오래된 귀족 가문들을 대변하는 다른 소수의 집정관 집단들이 있었다."(230)


"이탈리아의 여러 코무네는 중세 상업혁명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코무네의 정부체제는 5세기 말 서로마제국 붕괴에 따른 침체를 겪은 후 교역과 경제활동이 되살아날 수 있도록 해주는 법과 경제 제도를 만들어냈다. 이탈리아는 이 번영의 혜택을 받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남쪽에는 비잔틴제국, 동쪽에는 새로운 무슬림 국가들이 있어서 동방의 향신료와 수많은 사치품이 공급됐다. 북쪽에는 잉글랜드와 플랑드르가 있었다. 잉글랜드는 최고급 양모를, 플랑드르는 가장 인기 있는 직물을 생산했다. 거대한 교역이 이뤄질 무대가 마련됐다. 양모와 사치스러운 옷감, 향신료가 주인공이었다. 노르만 왕들이 지배한 12세기 중반까지 남부 이탈리아와 스페인도 좋은 위치에 있었지만 자치정부를 갖지는 못했다. 그래서 어느 쪽도 자치적인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 같은 방식으로 교역을 끌어오지 못했다. 이는 코무네가 어떻게 교역에 필요한 제도 발전을 촉진했는지와 관련이 있다."(242)


"누구든 혁신이나 가치 있는 투자를 위한 좋은 구상이 있다면 그것을 실행할 수 있도록 기회는 사회 안에서 널리, 공평하게 배분돼야 한다. 우리가 코무네의 사회적 이동성에서 본 것은 바로 그 점이다." "이 기회와 유인들은 또한 공정한 분쟁 해결과 법 집행체계로 뒷받침해야 한다. 프레스코화 '선정의 알레고리'에서 강조한 정의를 보라. 그러자면 다시 국가와 정치적 엘리트층이 법 집행에 간섭하면서 자기네에게 유리하게 몰아갈 만큼 충분히 강력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프레스코화의 밧줄을 보라. 여기에서 우리는 경제적 번영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족쇄 찬 리바이어던이 할 결정적인 역할을 볼 수 있다. 리바이어던에 족쇄를 채우지 않으면 어떻게 법이 국가와 정치적으로 힘 있는 사람들에게 확실히 적용되도록 할 수 있겠는가? 때때로 '법의 지배'라고 부르는 것 역시 리바이어던의 발목에 채운 족쇄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이들 족쇄는 헌법과 서약만이 아니라 사회가 쥐고 있는 밧줄이 있어야만 만들 수있다."(254-5)


"족쇄 찬 리바이어던은 단지 포용적 경제제도에 필요한 포용적 정치제도를 정점으로 끌어올린다고 실현되지 않는다. 족쇄 찬 리바이어던을 실현하는 것은 또한 레드 퀸 효과, 즉 사회가 국가 및 정치적 엘리트와 겨루고 그들을 제한하고 견제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그에 관한 논의는 사회가 조직화하고, 정치에 참여하고, 필요하면 국가와 엘리트에 반항하도록 돕는 규범들의 핵심적인 역할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족쇄만이 아니다. 법을 집행하고, 분쟁을 해결하고,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며, 경제적 기회와 유인을 창출할 경제제도를 뒷받침하는 리바이어던의 능력 역시 중요하다. 따라서 국가를 통제하는 사회의 능력과 국가의 역량이 맞수를 이루는 한, 국가의 역량도 똑같이 중요하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경제적 유인을 약화시키는 여러 규범과 관습의 우리를 완화하면) 심지어 규범의 다른 측면이 리바이어던을 계속 견제하더라도 역량 있는 국가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256-7)


제6장 유럽의 가위


"유럽의 발흥을 이끌어낸 원동력은 1500년 전 중앙에 집중된 권력과 (여성은 제외한) 보통 사람의 힘 사이에 뜻밖의 균형이 이뤄진 일련의 독특한 역사적 사건들에서 찾을 수 있다. 바로 이 균형이 유럽을 회랑 안으로 밀어 넣어 국가와 사회가 끊임없이 경쟁하도록 하는 레드 퀸 효과를 작동시켰다. 균형은 두 가지 요인이 어우러져 발생했다. 첫째는, 5세기 말에 의회와 합의에 따르는 의사결정의 규범을 중심에 두고 민주적으로 조직된 부족사회들이 유럽을 장악한 것이다. 둘째는, 로마제국과 기독교 교회로부터 흡수한 국가 기관들과 정치적 위계질서의 핵심 요소들을 물려받은 것이다. 로마의 국가와 교회는 5세기 말 서로마제국이 무너진 다음에도 계속해서 중앙집권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요소를 가위의 양날로 생각할 수 있다. 두 날을 쓸 수 있게 사북을 박으면 유럽의 가위는 족쇄 찬 리바이어던이 부상하면서 경제적 유인과 기회를 창출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267-8)


"유럽이 이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었던 연유에 대해 감을 잡기 위해 882년 프랑스 랭스의 대주교 힝크마르가 기록한 의회에 대한 묘사를 보자." "힝크마르는 샤를마뉴 시대의 인물로 당시 국가 통치 방식을 직접 목격한 아달하르두스를 인용해 그동안 이 왕국이 어떻게 통치돼왔는지 이야기하면서 (서프랑크 왕으로 즉위하는) 카를로만에게 왕국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쳤다. 그것은 놀랍게도 왕이 아무런 제약 없이 자기가 바라는 대로 실행하는 통치가 아니라 민중이 참여하는 의회에 바탕을 둔 통치였다." "그것은 게르만 부족 의회 정치의 요체였다. 샤를마뉴와 그 후의 카를로만은 이 의회들의 결정에 따라 행동하고, (남성)사회의 다양한 부문에 걸쳐 바람을 들으며, 중요한 결정에 대해 일정 수준의 총의를 확보해야 했다. 의회 참석자의 수는 분명 제한적이었지만, 샤를마뉴는 결정 사항을 더 낮은 수준의 회의에 전달할 사자들을 배치해 왕국 전체가 알도록 했다 이런 참여가 유럽의 가위를 구성하는 첫 번째 날이다."(268-71)


"(가위의 두 번째 날인) 로마의 관료조직은 요안네스가 기술한 것처럼 일련의 복잡한 '관습과 형식과 언어'에 따라 운영됐고, 구성원들은 군대에서 유래한 제복 형태의 '독특한 예복'을 입었다. 요안네스는 관료집단이 '보통 사람들'과는 분리된 정체성과 소속감을 지녔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가 설명한 것은 정교한 법체계 안에서 명료한 규칙에 따라 작동하는 광범위한 관료조직이다. 물론 관료조직은 개인적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고, 정확히 규칙이 정한 대로 움직이지도 않는다. 요안네스 자신도 전적으로 실력을 바탕으로 일자리를 얻은 것이 아니라 조티쿠스의 도움을 받았다. 더욱이 고위직 가운데 다수가 엘리트층, 원로원 계급 사람들의 몫으로 정해져 있었고, 어느 정도 부패도 분명히 있었다. 이런 결함에도 로마인들은 정교한 구조와 지역 조직을 갖춘 관료제 국가를 수립했다. 이런 세속 기관은 프랑크족이 로마와 교류하게 된 시기에 이미 정치 제도와 통합돼 있던 교회의 위계 구조에 상응하는 것이었다."(276-8)


"마그나 카르타는 얼마나 독특한가? 답은 전혀 독특하지 않다는 것이다." "마그나 카르타가 제정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유럽 전역에 걸쳐 '환희의 입성'과 비슷한 문서를 찾아볼 수 있다. 1205년 아라곤의 왕 페드로 1세가 카탈루냐에 준 헌장, 1222년 헝가리의 언드라시 2세가 준 황금헌장, 1220년 독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준 헌장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런 헌장들은 모두 같은 문제들에 초점을 맞췄으며, 특히 통치자는 세금을 물리려면 시민들과 협의하고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점을 보장했다. '대헌장'들 뿐만 아니라 의회도 유럽 전역에 걸쳐 생겨났다. 의회의 확산은 스페인에서 시작됐는데, 1188년 레온 의회가 생겼고 그 다음에 각자 따로 의회를 가진 아라곤과 카탈루냐, 발렌시아가 합쳐 만든 아라곤연합왕국으로 퍼져나갔다. 팔러먼트 같은 의회들은 이베리아의 나바라왕국과 포르투갈에서도 발전했다. 프랑스에서는 비록 전국적인 의회인 삼부회의 발전은 느렸지만, 각 지역의 신분제 의회들은 만개했다."(312-3)


"유럽의 가위를 이루는 두 날, 즉 로마제국의 국가기관들 그리고 게르만족의 참여적인 규범과 제도들이 뜻밖에 힘의 균형을 만들어낸 것 말고는 초기 유럽 역사에서 족쇄 찬 리바이어던의 부상을 예정하는 것은 전혀 없었다. 국가기관과 참여적인 제도 둘 중 어느 쪽도 그 자체로 족쇄 찬 리바이어던을 낳기에는 부족했다. 비잔티움처럼 첫 번째 날만 있을 때는 전형적인 독재적 리바이어던이 나타난다. 아이슬란드처럼 두 번째 날만 있으면 정치 발전은 거의 이뤄지지 않고 국가건설도 없다. 상황과 시대가 다르고, 결정적인 시점에 다른 우발적 사건들이 벌어지고, 가위의 두 날을 합치려고 시도했던 클로비스와 샤를마뉴보다 미숙한 다른 정치적 주역들이 있었다면 두 날을 합치더라도 실제 진행된 역사와 같은 방식으로 서로 균형을 이루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로마제국이 무너진 후 혼란스러운 5~6세기가 지나는 동안 가위의 두 날은 불안정하나마 균형을 만들어냈고, 유럽은 좁은 회랑 안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337)


제7장 천명


"한나라 이후 중국 정부는 세 가지 기본 원리에 동의했다. 첫째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황제의 군주적 지배 아래 백성들에게 조정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나 발언권을 주지 않아야 한다. 황제는 언제나 법 위에 있었다. 그 다음으로는 재능 있는 사람들을 관리로 두고 그들이 국가를 운영하도록 해야 한다는 사상을 들 수 있는데, 이는 황제가 바라는 대로 사회를 지배하는 데 필요했다. 이것은 유가 철학에 뿌리를 두었으며, 유가 사상은 '배움에 뛰어난 이는 공무에 헌신해야 한다'며 '덕이 있고 재능이 있는 이들을 고취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지막 핵심 원리는 황제가 백성의 복리를 염려하고 도덕적 가르침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황제는 시민들의 경제적 번영을 촉진해야 하며, 후기 왕조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백성들 가운데 부를 쌓아야' 한다는 가르침도 포함된다. 이 세 가지 원리는 일종의 사회계약이 돼 국가에 어떤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 조건들을 어기면 백성이 들고 일어날 수 있었다."(353)


"독재의 결정적인 특징은 사회가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단을 주지 않고 사회의 요구를 거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진나라가 부상하면서 민중이 정부에 참여할 수 있게 해줄 모든 요소를 없애버린 중국이 바로 그러했다. 참여를 위한 길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중국에서 사회가 리바이어던을 통제하고 만들어갈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분명 반란은 사회가 활용할 수 있는 대안으로, 황제들에게 커다란 불안감을 안겼다. 그러나 반란의 위협이 늘상 도사리는 건 아니었고 정치적 의사결정에 체계적인 영향을 미치지도 않았다. 중국 정부에 요구사항들을 분명히 밝히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자율적인 사회조직들은 어떨까?" "18세기 말과 19세기에 한커우漢口는 상인과 장인들의 활기로 북적이는 대도시였다." "그러나 겉모습에 속아서는 안 된다. 이 사회에는 자율성도, 지역적 연대도 거의 없었다." "각기 다른 상인집단들은 서로 협력하지 않았고 공공서비스와 조직에 투자하는 일에는 관심이 거의 없었다."(368-70)


"이 도시의 가장 중요한 사업인 소금 사업은 국가가 독점했고 상인들의 세력과 부는 국가가 인가해준 결과였다." "그러므로 중국의 상황을 더 자세히 뜯어보면, 심지어 가장 자율적이고 적극적인 사회가 출현하리라고 예상되는 곳에서조차 국가에 복종하고 의존하는 완전히 다른 사회를 발견하게 된다. 의존적이든 아니든 간에 중국 사회는, 국가가 강력한 통제력을 발휘해 규범의 우리를 완화하고 사회적, 경제적 자유의 여지를 확대한 덕분에 그 과정에서 혜택을 봤다. 우리는 다른 곳의 국가건설 과정에서는 무함마드와 샤카의 경우처럼 국가건설자들이 자신들을 가로막는 숨막힐 듯한 규범들과 친족 관계에 바탕을 둔 연합을 무너뜨렸고, 그러면서 규범의 우리를 어느 정도 완화하는 모습을 봤다. 하지만 중국의 상황에서는 국가의 독재에도 불구하고 친족집단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친족 관계들은 사실상 국가가 사회를 관리하는 전략의 일환으로 장려하고 지원했다."(370-2)


"1949년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주의자들이 승리한 후 상앙의 법가 사상과 공자의 도덕적 가르침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로 대체됐다. 과거와의 단절이다. 하지만 과거와의 연속성은 차이만큼이나 뚜렷했다. 하늘의 명령은 카를 마르크스의 명령으로 대체될 것이었다. 진나라 이후 중국이라는 국가의 결정적 특색은 사회에 대한 국가의 압도적인 지배력에 있었다. 그 점은 바뀌지 않았다." "독재의 본질이 제국 시대와 공산주의 시대의 연속성을 만들어냈다. 독재의 본질은 사회가 조직화하지 못하고 국가의 권력 구조 바깥에서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칠 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공산당이 정치 참여의 유일한 매개가 되기를 바랐는데, 이는 사실상 국가와 정치 엘리트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시민들을 통제한다는 의미였다. 이 점은 문화혁명 당시 때때로 나왔던, 상향식 비판을 허용하라는 요구가 폭력적으로 진압되었을 때 고통스러울 만큼 분명해졌다. 공산주의 치하에서 사회를 위한 목소리는 없었다."(384-5)


"현대화가 자동으로 자유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면, 독재적인 노선에 따라 조직된 경제에서도 활기찬 혁신이 확실히 이뤄지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중국 공산당이 만들어낸 그 모형은 자유 없이도 혁신을 일궈낼 수 있을까?" "초기 소련의 성공에서 볼 수 있듯이, 독재적 성장이라고 해서 혁신과 기술적 진보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이 경우들에서 성공은 좁은 영역에서 하나의 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제well-posed problem를 풀고 정부의 수요에 대응함으로써 이룬 것이었다. 그러나 여러 분야에서 미래 성장에 필수적인, 다양하고 지속적인 혁신은 기존의 문제들을 푸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들을 생각해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자면 자율성과 실험이 필요하다. 누군가가 엄청난 양의 자원을 제공할 수 있고, 개인들에게 열심히 일하라고 명령할 수는 있지만, 그들에게 창의적인 사람이 되라고 명령할 수는 없다." "회랑 밖에 있는 어떤 사회도 그 일을 해내지 못했다."(391-2)


제8장 파괴된 레드 퀸


"인도 국가와 사회의 진화에서 규범의 우리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아테네와 유럽에서는 레드 퀸이 국가와 사회 양 측의 발전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규범의 우리를 완화하기 시작했지만, 그동안 인도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인도에서는 카스트제도가 강화되고 그 단단한 계급구조에 국가가 부차적인 존재로 밀려나면서 사회는 파편화됐고 내부적으로 대립했다. 사회는 하나로 통일된 실체였던 적이 없었고, 사회 내부의 갈등과 그에 따른 불평등이 이 나라 정치에서 주된 문제가 됐다." "사회는 조직화하거나 국가를 감시할 수 없었다 비록 이 반도에도 유럽처럼 민중이 정부에 참여한 오랜 역사가 있었다 해도 사회의 정체성을 바꿔나가는 레드 퀸의 역동성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보다는 정치 참여가 카스트를 바탕으로 이뤄지고, 국가 자체가 카스트제도를 지지하고 카스트제도에 의해 보호를 받았기 때문에 카스트 기반의 정체성은 계속해서 재확인됐다. 이는 자유에 끔찍한 영향을 미쳤다."(403)


"카스트는 사회에 뿌리 깊은 위계 구조와 불평등을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정치의 본질을 왜곡했다. 사회는 파편화된 채 자기들끼리 전쟁을 벌였고 국가기관을 감시하는 데 실패했으며, 국가가 역량을 더 확대하도록 추동하는 능력도 몹시 부족했다. 최상위층의 브라만 계급은 나머지 계급을 지배하느라 너무나 바빴고, 나머지 계급들은 사회의 위계 구조 속 자신의 위치에 얽매여 있었다. 모두가 규범의 틀에 너무 철저히 갇혀 있었다. 역사적으로 인도의 국가는 적어도 카스트제도를 실행하고 재확인하면서 언제나 규범의 우리를 강화하는 것을 의무로 여긴 것으로 보인다. 독립 후 인도에 민주주의가 찾아왔을 때 카스트제도가 정치적 경쟁의 전선을 규정하면서 민주적 경쟁의 활력을 약화시켰다." "사회는 기존의 위계 구조를 뛰어넘어 조직화하고 정치인들이 책임을 지도록 하며 국가가 민중에 봉사하도록 유도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카스트의 분열로 불가능해졌다. 레드 퀸은 망가진 채로 남았다."(441)


제9장 세부적인 것들 안의 악마


"찰스 틸리는 17세기의 '군사혁명'으로 전쟁 위협이 증가한 것이 현대 국가를 낳았다고 주장했다." "비록 스위스에서는 군사혁명이 앞서 국가건설이 이뤄졌지만, 이 나라는 틸리의 주장을 완벽하게 뒷받침하는 사례다. 스위스는 역사적으로 샤를마뉴의 카롤링거제국 동쪽 지역을 계승하는 국가인 신성로마제국에 속했다." "스위스 지역에 대한 신성로마제국의 통제가 불완전했으므로 스위스 정체를 구성하는 각 칸톤(canton, 자치 주)은 자체적인 의회제도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칸톤은 시골과 도시가 뒤섞여 있었는데 게르만족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제국이 약해지면서 다시 부상한 의회 정치의 큰 흐름을 받아들이게 됐다. 스위스연방은 1291년 우리Uri, 슈비츠 운터발덴 칸톤이 루체른 호수 위쪽의 뤼틀리 평원에서 분데스브리프(Bundesbrief, 연방헌장)에 선서하고 서명함으로써 출범했다. 헌장은 권력을 중앙에 집중시키려는 의도가 있었고, 특히 공공질서와 무법상태에 관심을 쏟았다."(448-9)


"스위스의 사례에서는 전쟁의 위협, 특히 신성로마제국 군주의 지배권을 회복하려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속적인 위협이 중요한 유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 요인이 없었다면 개별적으로 행동했을 칸톤과 도시들이 큰 연방으로 단결하고, 권력을 중앙에 집중하고, 국가 역량을 키웠다. 중앙집권화가 이뤄지기 전에 스위스 칸톤들은 분쟁을 해결하고 법을 집행하는 데 법률이나 국가 권력보다는 씨족 중심의 사회구조에 의존하며 아마도 회랑 밖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유산은 또한 스위스 농민들이 자유롭고 사회가 이미 결집했다는 의미였다. 1291년에 시작된 중앙집권화는 사회가 국가의 권력 증대에 저항하고 균형을 맞출 만큼 강력해진 상황에서 이뤄졌다. 그래서 국가와 사회 모두 역량을 점차 확장하도록 앞장서 이끌어가면서 회랑 안으로 이행하도록 촉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스위스는 유럽에서 손꼽히는 활기찬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했지만 그런 과정이 결코 예정돼 있지는 않았다."(452-3)


"1640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새 선제후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48년간 통치했고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 나아갈 새 길을 제시했으며, 그 과정에서 대선제후로 불리게 됐다. 프로이센이 겪은 30년전쟁의 경험을 통해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강력한 무기'가 필요하다고 확신하게 됐다." "(국가 역량의 확대를 추구한)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먼저 끊임없이 의회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게끔 영구적인 과세권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1653년 그는 협상으로 이른바 브란덴부르크 휴회 합의를 이끌어내 6년에 걸쳐 53만 탈러를 받아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쿠르마르크 의회가 아닌 그가 세금을 거두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대신 그는 의회에서 하나의 원院을 구성하고 있던 귀족들에게 면세 지위를 주었다. '분할통치divided and rule'하는 영리한 전략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의회의 서로 다른 원들을 성공적으로 분리하고, 의원들이 그에게 맞설 통일된 세력을 형성하지 않도록 확실히 차단했다."(454-5)


"1740년부터 프로이센을 통치한 프리드리히 대제는 공격적인 영토 확장 전략을 폈다. 프로이센에서 전쟁은 국가를 만들었고 그 국가는 독재로 악명 높은 국가였다. 그 국가의 통치자들은 확실히 그렇게 생각했다. 대선제후는 〈신의 가호로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나는 결단코 전제군주처럼 통치할 것〉이라고 밝혔다. 프리드리히 대제는 그에 동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잘 운영되는 정부는 재정과 정책, 군사 모든 분야를 결합해 국가를 강하게 하고 그 힘을 확장한다는, 같은 목적을 추구하는 ··· 확립된 체계를 가져야 한다. 그런 체계는 오로지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다.〉 16세기에 프로이센은 강려한 의회가 군주제를 제약하는 가운데 신성로마제국의 다른 여러 지역처럼 회랑 안에 있었다. 전쟁은 국가 권력을 확대함으로써 이 나라를 회랑 밖으로 밀어냈는데, 이는 스위스에서 전쟁이 초래한 결과와는 아주 달랐다. 프로이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독재적인 길을 따라 빠르게 나아갔다."(457)


"러시아의 '체제 전환'은 왜 그토록 극적으로 실패했을까?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러시아가 회랑 밖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소련이 붕괴한 후 국가기관들은 재건됐지만, 보안조직들을 개혁하려는 시도는 별로 없었다. 실제로 정치인들은 체첸에서처럼 보안조직들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 문제의 뿌리를 들여다보면 국가가 더는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게 막고 옐친이 행사했던 것과 같은 고도의 재량권을 제한할 수 있는 민중의 결집이 없고, 독립적인 민간 이익집단조차 없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민영화와 경제개혁 자체만으로는 족쇄 찬 리바이어던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할 광범위하고 정당한 자산 분배를 이룰 수 없었다. 그 때문에 푸틴은 러시아가 1990년대에 성취했던 것을 거꾸로 돌리면서 새로운 독재체제를 강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푸틴의 리더십 아래 활기를 되찾은 KGB가 너무나 쉽게 경제와 사회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해줬다."(476-7)


"코스타리카와 과테말라는 비슷한 역사와 지리 조건, 문화적 유산을 갖고 있었고, 19세기에 똑같은 경제적 기회를 맞이했다. 그러나 두 나라의 분기는 다시 한 번 우리의 이론이 시사하는 바를 보여준다." "코스타리카와 비교할 때 과테말라는 무력에 의한 강제노동의 역사가 더 길고 토착민 인구가 상당히 많았으며, 과테말라 왕국의 독재적 국가제도를 물려받았다. 그래서 19세기말 커피 시장의 활황으로 생긴 국가건설의 유인은 이 나라에서 강력한 독재적 리바이어던을 만들어냈다. 스페인제국이 붕괴하면서 코스타리카에서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기관이 아예 없는 가운데 네 도시가 통제권을 가지려 경쟁했다. 코스타리카는 커피 덕분에 붕괴를 피하고 회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레드 퀸 효과는 공공서비스와 토지에 대한 재산권 강화로 뒷받침 된 소규모 자작농 기반의 커피 경제가 부상하는 과정에서 가장 뚜렷이 나타났다. 이런 과정은 몇십 년 후 제대로 작동하는 민주주의와 사회적 기반을 형성했다."(495-6)


"핵심 행위자들은 새롭고 지속성 있는 연합을 형성하거나, 새로운 요구와 불만, 서사를 분명히 표현하거나, 아니면 기술적, 조직적 혹은 이념적 혁신을 제안함으로써 사회의 진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코스타리카와 과테말라 사이에 눈에 띄는 구조적 차이점들이 있었지만, 코스타리카가 진로를 선택할 때는 1830년대와 1840년대의 브라울리오 카리요 같은 개인들이 큰 영향을 미쳤다. 코스타리카를 중앙아메리카연방공화국에서 분리하리고 한 그의 결정은 이 나라가 이 지협地峽 내 이웃 나라들과 다른 길로 갈라져 나갈 수 있도록 했다. 더 효과적인 국가기관들을 설립하기로 한 그의 결정은 소규모 자작농 기반의 커피 경제가 발전할 수 있도록 했다.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군대를 소규모로 유지하기로 한 그의 결정 덕분에 코스타리카 정치에서 군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미약했고 결국 1948년에 군대가 폐지되었다는 것이다. 카리요가 다른 결정을 했다면 코스타리카는 오늘날 과테말라와 더 비슷해졌을 것이다."(498-9)


제10장 퍼거슨은 무엇이 잘못됐나?


"연방주의자들은 강력한 대통령이 통제를 벗어나 권력을 남용하거나 어떤 집단 또는 '당파'에 포획될 수 있다는 점을 걱정했다. 그래서 그 모든 견제와 균형 장치를 두고, 행정부와 입법부 권력을 분립시켰다. 그들은 또한 민중의 정치 참여가 지나치게 많아질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 주 의회가 상원 의원들을 선출하고,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는 간접선거를 도입했다. 연방주의자들은 '주의 권리' 및 연방을 구성하는 주의 자치권을 보존하려는 이들에게 양보해야 했다." "이런 제도 설계는 미국을 회랑 안으로 밀어 넣는 작용을 했지만, 일종의 '파우스트의 거래'였다. 제도 설계를 통해 중요하게 보호한 것 중에는 남부의 노예 소유자들이 자신들의 노예를 착취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도 포함됐는데, 그것은 국가의 손을 묶었을 뿐만 아니라 그 손을 더럽혔다." "퍼거슨에서 괴롭힘을 당하거나, 벌금을 물거나, 감옥에 가거나, 심지어 살해 당하는 이들이 가난한 흑인 시민들이었다는 사실은 이런 경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505-6)


"미국의 리바이어던이 택한 경로는 역설적으로 또 하나의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그것은 뜻밖에도 일부 핵심적인 분야에서 국가 활동에 대한 효과적인 감시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문제다. 미국에서 국가는 연방주의자들의 타협과 민관협력 모형에 따라 부여된 구속복에 갇혀 있다. 그래서 냉전과 최근의 국제적인 테러가 초래한, 갈수록 복잡해지는 안보상의 도전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회의 감시를 별로 받지 않는 쪽에서 이러한 역량을 개발했다. 그에 따라 숱한 제약을 받고 여전히 설립 당시의 취약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안보와 군사 분야에서 족쇄를 차지 않은 채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리바이어던이 만들어졌다. 그 결과 국가안보국NSA이 사회는 물론 정부의 다른 기관으로부터 어떤 견제도 받지 않은 채 미국 시민들을 표적으로 한 방대한 감시와 자료수집 활동을 벌였다고 에드워드 스노든이 폭로했을 미국 리바이어던의 무서운 '얼굴'에 드러났다."(508)


"그렇다면 퍼거슨 경찰은 어떻게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으면서 주민들이 지닌 헌법상 권리를 침해할 수 있었을까? 권리장전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어느 정도까지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타협으로 만들어진 권리장전은 각 주가 아니라 연방정부에만 적용됐다. 각 주는 '경찰권'을 확보할 수 있으며 엄청난 재량권을 가졌다. 권리장전의 실제 문구는 이것을 명백히 규정하지 않았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양해됐다." "1865년 남북전쟁 패배는 권리장전에 대한 이런 관점에 종말을 고했어야 했다. 실제로 1868년에 통과된 수정헌법 제14조는 이런 조문을 담았다. 〈어떤 주도 미국 시민의 특권과 면책권을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하거나 시행할 수 없고, 정당한 법적 절차에 따르지 않고는 어떤 사람에게서도 생명, 자유 또는 재산을 박탈할 수 없으며, 관할권 내에 있는 어떤 사람에게도 법률의 펑등한 보호를 거부할 수 없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 조항이 각 주의 경찰권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거듭 판결했다."(510-1)


"이 모든 것은 1877년 이후 남부의 복원시대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수정헌법 제14조는 노예제도를 끝내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경제적 기회와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 개혁을 통해 남부의 재건을 이루려는 취지가 담긴 세 가지 수정조항 중 하나였다. 하지만 1877년 러더퍼드 헤이스 대통령은 '파우스트의 거래'에 전념해 북군을 철수하고 재건을 끝내기로 남부의 정치인들과 타협함으로써 선거인단 다수를 확보했다. 일단 북군이 떠나자 남부는 '복원'됐고, 재건을 밀어붙이던 힘은 갑자기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특히 악명 높았던 건 인종 분리를 강화한 '짐 크로법'들이었다. 1890년 남부 주들은 인두세와 문해력 시험을 통해 흑인들의 선거권을 빼앗으려고 자신들의 헌법을 개정했다. 경찰권을 그 조치의 핵심에 있었다. 북부는 짐 크로법을 용인하며 남부가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기로 합의했다. 권리장전이 주 의회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해석'은 이 거래의 핵심적인 부분이었다."(512)


제11장 종이 리바이어던


"아르헨티나의 국가는 부재하지 않는다. 국가는 정교한 법령과 대규모 군대, (관료들이 자신의 업무에 관심이 없는 듯하지만) 관료조직이 실재하며, 특히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어느 정도 기능을 발휘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독재적 리바이어던도 아니다. 그러나 확실히 우리가 만나본 아르헨티나의 관료들은 사회에 무책임하고 감응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며(이는 독재적 국가의 특징이다), 사람들에게 아주 쉽게 무자비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사실 이 국가는 사회의 취약성과 분열을 바탕으로 세워지고 뒷받침된다는 점에서 인도의 국가와 공통점이 많다. 이 국가는 사회에 책임을 지지 않고 견제받지 않는 독재적 리바이어던의 본질적인 특성과 부재의 리바이어던이 지닌 취약성을 함께 드러낸다. 국가는 분쟁을 해결하거나, 법을 집행하거나, 공공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다. 국가는 억압적이지만 강력하지는 않다. 이 국가는 그 자체로도 약하며, 사회도 약화시킨다."(557-8)


"종이 리바이어던의 힘은 공허하고, 대부분 영역에서 통일성이 없고 조직화하지 못하며, 이 나라가 통치해야만 하는 변방에서는 대개 완전히 부재한다." "종이 리바이어던이 유지되는 첫 번째 이유는, 권력의지를 추구하기 위해 정치 지도자와 엘리트층이 감수해야 할 위험이 압도적으로 크기 때문이다." "국가건설자들이 사회의 어떤 달갑지 않은 반발도 진압할 수 있고 경쟁자들에 맞서 계속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고 확신하지 않는 한, 국가에 맞서는 사회의 역량은 문제를 초래한다. 우리는 국가건설에 따르는 이와 같은 인지된 위험을 '결집 효과mobilization effect'라고 부를 것이다. 정치 지도자들이 역량을 키우려 하는 과정에서 반대자들이 결집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어떤 사회가 정치적 불평등을 크게 줄일 수 있을 만큼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미끄러운 비탈을 두려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표면적으로 사회의 제약을 받지 않는 정치적 엘리트가 국가의 역량 강화로 초래될 반발과 경쟁을 걱정할 수 있다."(563-4)


"종이 리바이어던이 상당히 많이 있고 그들이 무기력한 상태에서 깨어나려 하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때로 역량이 부족한 국가가 부도덕한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가면 강력한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우선 정치적 통제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노골적으로 억압한다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명령을 따르도록 설득하는 일에 훨씬 더 가깝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설득을 할 때 순종에 대해 보상해줄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매우 유용하다. 이때 친구와 지지자들, 혹은 지지자로 돌아서게 하고 싶은 이들에게 관료조직의 직위를 나눠주는 방법은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 막스 베버가 구상한 방식대로 관료조직에서 실력주의를 바탕으로 한 채용과 승진 체계를 제도화하면서 국가건설을 시작한다고 상상해보라. 더 이상의 뇨키(gnocchi, 유령 공무원)는 없고, 더는 이 직위들을 보상으로 활용할 기회가 없다는 의미다. 이런 이유로 실력주의와 국가 역량 구축을 포기하도록 하는 강력한 정치 논리가 작동하게 된다."(565)


"국가 자산을 약탈하기 위한 법규의 자의적인 이용에서 이득을 보는 능력은 종이 리바이어던에서 국가의 무능과 분열을 부추겼다. 종이 리바이어던이 국가 역량을 쌓는 데 실패한 것은 시민들에게는 양날의 칼이다. 능력이 떨어지는 국가는 시민들을 억압하는 능력도 떨어진다. 이런 것이 얼마간 자유의 토대가 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일반적으로 그렇지는 않다. 종이 리바이어던의 시민들은 자유를 누리기보다는 다른 두 세계의 가장 나쁜 면을 함께 겪을 것이다. 종이 리바이어던의 국가는 여전히 상당히 독재적이어서, 사람들의 목소리를 거의 듣지 않고 시민들에게 감응하지 않으며, 그래서 그들을 억압하거나 살해하는 데 딱히 주저하지 않는다. 동시에 시민들은 분쟁의 해결자이자 법의 집행자, 공공서비스 제공자로서 국가의 기능을 기대할 수 없다. 종이 리바이어던은 자유를 창출하거나 자유에 적대적인 규범을 완화하려 하지 않는다. 종이 리바이어던은 흔히 규범의 우리를 완화하기보다는 되레 강화한다."(566)


"시몬 볼리바르는 왜 라틴 아메리카를 통치하려는 시도가 '바다에서 쟁기질하는' 것과 같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을까?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남미 사회가 정치적 위계 구조와 불평등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일 것이다. 식민지 사회는 백인인 스페인 사람이 맨 위에 있고 토착민과 여러 지역의 흑인 노예들이 밑바닥에 있는 제도화된 계급구조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스페인인 엘리트는 크레올레로 불리는 남미의 토착민이 됐고, 다른 인종 간 결혼 및 출산이 이뤄지면서 누가 누구보다 우위에 있는 가리는 정교한 카스트(스페인어로 카스타casta)제도가 만들어졌다." "법과 조세는 사회적 지위에 따라 다르게 적용돼, 충분히 힘이 센 사람에게는 법이 전혀 적용되지 않았으므로 카스타가 중요했다. 법 앞의 평등이라고는 전혀 없어서 대다수 남미 사람들 눈으로 볼 때 법 자체가 부당하게 보였고, 그들은 식민지 시대의 '복종하지만 준수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격언을 채택했다."(581)


"종이 리바이어던은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세계의 다른 여러 곳에서 서식한다. 이들 중 몇몇 국가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모두 유럽 식민지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종이 리바이어던이 하나같이 유럽 식민지였던 이유는 유럽의 식민국가들이 식민지들을 통치하고 조종한 방식이 종이 리바이어던이 출현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런 국가를 불러일으킨 식민지화의 유물은 무엇일까? 첫째, 식민국가들은 식민지에 국가기관들을 도입했지만, 사회가 그것들을 전혀 통제할 수 없도록 했다(특히 식민국가들은 아프리카인들이 국가나 관료조직을 통제하는 데 아무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 식민국가들은 모든 일을 적은 비용으로 널리 전파할 수 있는 '간접 지배' 방식으로 하려 했다. 아프리카의 추장들 같은 지방의 유력자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방식으로 인해 실력주의적 관료조직이나 사법부가 출현할 수 없었다."(595)


"우연히 주어진 국가기관들과 간접적인 지배 방식의 유산은 국가와 사회를 모두 더 약화시키는 세 번째 요인을 불러왔다. 바로 식민지에서 벗어난 국가들의 자의적인 특성이다. 은크루마에게 국가를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 그토록 매력적이었던 이유 중 하나는 가나가 하나의 국가로서 통일성이 없다는 데 있었다. 이 나라에는 전국적으로 통용되는 언어가 없었다. 공통의 역사, 공통의 종교나 정체성, 합법적인 사회계약도 없었다." "요컨대 종이 리바이어던은 식민 제국들이 취약한 국가와 취약한 사회를 남겨두고 떠난 지역 그리고 그 둘이 서로를 영속화할 가능성이 큰 지역에서 형성됐다. 종이 리바이어던의 토대를 완성하는 마지막 요인은 국가들이 모여서 형성된 국제체제다." "국제체제는 이런 실패한 국가들에게도 국제적인 정당성을 부여했다. 일단 권력자가 국제사회에서 정중한 대접을 받고 국내에서 하고 싶은 약탈을 대부분 다 할 수 있으면, 실제로 권력이 공허하다는 사실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596-7)


제12장 와하브의 자식들


# 주요 용어들

1. 울라마ulama :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이슬람 사회의 법학자와 신학자의 총칭

2. 파트와fatwa : 울라마가 이슬람 경전을 당시의 문제나 논의와 관련지어 특별히 해석하고 상세히 설명하는 판결

3. 카디qadi : 이슬람의 율법 샤리아에 따라 사건을 해결하는 재판관

4. 자카트zakat : 쿠란에 의무로 명시된 종교적 세금

5. 이크완Ikhwan : 형제들이라는 뜻으로 알-와하브의 후손이자 알-셰이크가의 일원인 리야드의 카디가 시작한 종교 단체

6. 와하비즘Wahhabism : 18세기 중엽 아라비아반도에 나타난 이슬람 복고주의 운동으로 사우디아라비아 건국이념의 기초가 됐다.


"사우디아라비아 이야기는 규범의 우리가 강화되는 실례를 보여준다. 사회 규범들은 사람들의 관습과 믿음, 관행에 기초하고 있으며, 종교와 종교적 관행에 뿌리를 내렸다. 메디나와 더 넓은 지역에서 중앙에 집중된 권위를 확립하려는 무함마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사회에서도 규범이 종교에 깊이 뿌리 내렸다. 한발리 법학파의 노력, 와하비즘 그리고 전통을 강조하고 혁신에 반대하는 그들의 성향에 힘입어 이 규범들은 스스로 강력한 재생산을 거듭했다. 그다음에 와하브파의 열정을 군사적 확장에 이용한 이븐 사우드의 거래가 이뤄졌고, 그와 후계자들은 그에 대한 보상으로 주류 와하브파의 규범과 규제를 받아들였다. 왕국을 얻기 위해 치르는 작은 대가였다. 하지만 이븐 사우드와 압드 알-아지즈의 손안에 들어간 와하브파의 사상과 규제는 알-디리야의 오아시스 훨씬 넘어서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독자재가 되려는 중동의 다른 지도자들도 같은 구상과 전략을 활용하기 시작했다."(617)


"중동에서 이런 전략이 인기를 끈 것은 세 가지 연관된 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이슬람의 제도적 구조다. 이슬람, 특히 수니파 이슬람에서는 교회의 위계 구조가 없고, 개인과 신 사이에 개입하는 사제들이 없다. 이 종교에서 학식이 깊은 울라마는 사람들에게 경전의 해석에 관한 지침을 주고 파트와를 발표할 수 있다." "이는 사우드 정권이 울라마 집단을 접수해 자신들을 지지하는 파트와를 제공할 수 있게 길을 열어줬다." "두 번째 요인은 쿠란은 합법적인 문서가 아니며, 통치자에게 어느 정도 권력을 부여할지는 해석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세 번째 요인은 전제적인 이슬람제국들의 통치 기간에 발전하고 정착된, 국가와 사회에 관한 홉스식의 관점이다. 10세기의 저명한 철학자 알-가잘리는 이렇게 밝혔다. 〈술탄의 전제가 100년 동안 이어지더라도 그 피해는 피지배자가 다른 이들에게 휘두른 1년간의 폭정보다 덜하다.〉 따라서 전쟁 상태는 독재보다 훨씬 나쁘다."(617-9)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규범의 우리 때문에 가장 큰 타격을 받는 이들은 여성이다." "가까운 친척이 아닌 남성은 여성에게 손을 대는 것이 허락되지 않으며, 필수적인 의료행위는 고사하고 공손히 악수하는 것조차 금지된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여성은 불가촉천민이다. 복장 규정, 불가촉 조항, 여성들을 남성의 통제하에 두는 거미줄 같은 규제들은 쿠란의 특별한 해석에서 나왔다. 쿠란의 제4장 제34절은 '남성은 여성들의 보호자이자 부양자인데, 신께서 한쪽에 다른 쪽보다 (힘을) 더 많이 주셨기 때문이며, 그들이 자신의 재산으로 여성들을 지원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여성들은 어린이들처럼 남성들의 보호 아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되며, 이런 해석은 622년에 공식화한 무함마드의 메디나헌장 41번째 조항에서 여성을 언급한 것과 일치한다고 여겨졌다. 이 조항은' 여성은 오로지 그 가족의 동의가 있어야 보호받을 것’이라고 밝혔다."(622)


"중동에서는 독재자를 비판하는 담론을 발전시키기가 대단히 어려운데, 이는 독재자가 종교를 대표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독재자를 비판하면 곧 이슬람을 비판하는 것이 된다. 그에 따라 독재자의 종교적 신앙심이 그다지 깊지 않고 자신이 종교적 신념에 더 헌신한다고 지적하는 방식으로 비판을 전개하는 경향이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빈 라덴이 바로 그렇다. 그의 파트와는 이어서 '현 정권이 이슬람의 샤리아법을 정지하고 그것을 제정법으로 대체하고, 헌신적인 학자와 올바른 젊은이들과 유혈 대결을 시작하는 것'을 지적했다. 사우드가는 울라마 대다수를 포획했을지 모르지만, 빈 라덴 같은 '헌신적인 학자들'도 남아 있었다. 실제로 사우드가는 빈 라덴을 포섭하려 했지만, 그는 넘어가지 않았다. 빈 라덴은 사회 운동과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의제를 만들어갔는데, 그곳에는 서방과 미국에 대한 그의 증오뿐만 아니라 사우드가와 '현 정권의 억압적이고 부당한 행동과 조치들'에 대한 증오와 경멸이 배어 있었다."(633-4)


제13장 통제할 수 없는 레드 퀸


"바이마르공화국은 애초에 출범할 때부터 선출된 대의원들의 절반이나 되는 이들이 공화국의 제도에 믿음을 갖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무력화됐다. 좌파 가운데 어림잡아 5분의 1은 러시아식 혁명을 선호하는 공산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바이마르 민주주의 국가는 '부르주아' 국가였고 심지어 이 나라를 '파시스트' 국가로 보는 이들도 있었다. 우파에서는 대의원들의 약 30퍼센트가 그들과 연합한 대다수 전통적 엘리트와 같이 1914년 이전 보수주의자들이 지배했던 기존 체제로 돌아가 왕정을 복구하기를 원했으며, 일부는 나치와 마찬가지로 공화국제도의 정당성을 전면적으로 부인했다. 이런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은 1930년 선거 후 나치가 처음으로 상당한 의석을 차지했을 때 의회가 보여준 풍경일 것이다. 갈색 셔츠 제복을 입은 107명이 나치당원이 의사 진행을 방해하기 위해 77명의 공산당원과 결탁했다." "우파와 좌파는 모두 자신들을 선출한 제도를 전혀 존중하지 않았다."(643-4)


"집단들의 비타협적인 자세와 비례대표제에 바탕을 둔 선거체제는 바이마르공화국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원인이 됐다. 1928년에 이르자 작센농민당과 독일농민당을 포함해 열다섯 개의 서로 다른 정당들이 의회에 진출했다. 다른 스물여섯 개 당이 내세운 후보들은 선출되지 못했지만, 주요 정당들의 표를 갉아먹는 효과를 냈다. 어떤 단일 정당도 바이마르 시대 선거에서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했으므로 모든 정부가 연합정부였다." "그에 따른 좌절과 정체 때문에 정부가 일을 성사시키려면 점점 더 대통령의 특권에 의존해야 했다. 바이마르헌법 제48조에 따라 대통령에게 부여된 광범위한 긴급조치권들 덕분에 대통령이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기가 쉬워졌다. 이 권한들은 원칙적으로 의회 표결로 뒤집을 수 있었지만,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할 수 있었으므로 헌법 제48조를 원하는 대로 이용할 수 있었다. 초대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서로 다른 사안에 136차례나 그 권한을 발동했다."(644-5)


"독일의 엘리트와 장교들, 관료들은 왜 바이마르의 실험을 그토록 반대했을까? 바이마르 민주주의 실험의 반대자들은 대부분 프로이센의 토지를 보유한 귀족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는 점에서 같은 부류였다. 토지 소유자들은 흔히 사회의 역량을 키우고 민주주의를 시작하는 것을 (타협의 여지 없이 상대를 파괴해야 하는) 제로섬 관계의 관점에서 봤다." "프로이센 지주들의 태도와 이로 인해 회랑 안의 삶이 겪는 구조적인 어려움이 이례적이지는 않았을지라도, 프로이센의 지주 엘리트층은 사회적 결집에 저항하는 연합을 더 잘 형성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우선 최고위 장교와 판사, 관료 중 다수가 지주 엘리트층에서 나왔고 엘리트의 관점을 공유했다. 프로이센의 엘리트는 19세기 후반 사회의 변화가 진행 중일 때도 상대적으로 통일성을 보였고 정치적으로 지배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엘리트는 자신들이 독일 정치를 통제할 수 있고 필요하다면 시간을 비스마르크의 시대로 되돌릴 수 있다고 확신했다."(652-4)


"아옌데는 헌법적 수단을 통해 칠레가 사회주의로 옮겨갈 수 있다고 믿었을지 몰라도 자신의 연합에 참여하는 많은 이들은 그렇게 믿지 않았고, 아옌데가 그들을 통제할 수는 없었다. 노동자 집단들은 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농장과 공장을 점거했고, 정부는 그 점거를 승인하기 위해 개입했다. 토지개혁과 국유화는 대혼란에 빠져들었다. 〈엘 메르쿠리오〉지는 1972년 한 사설에서 '공화국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도 인민연합의 정당들도 ··· 법을 위반한 노동자와 농민, 학생 집단들에 대해 억압적인 조치들을 취할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 집단들은 이 점을 알고 이용했다. 그들의 행동은, 각종 정치제도가 인민연합의 반대 진영에서 만든 것들이며, 그러므로 인민연합이 총력을 다해 뿌리 뽑으려는 기존 질서를 방어하기 위해 설계됐다는 생각 때문에 더욱더 정당화됐다. 여기서도 우리가 고대 그리스나 미국에서 목격한 것과 아주 다른 제로섬 레드 퀸 효과를 볼 수 있다."(667-8)


"기독민주당 진영이 정부와 잠정적인 타협에 이르렀을 때는 그 정당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을 경고하는 보수적 당파에 의해 타협이 파기됐다. 곳곳에서 폭력이 터져 나왔다. 드브레가 아옌데에게 반대 진영의 폭력에 어떻게 맞설 것이냐고 묻자 아옌데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먼저 무력으로 폭력을 억제할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 반동적인 폭력에 대해서는 혁명적인 폭력으로 응답할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그들이 게임의 규칙을 깨트릴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아옌데가 상대편이 게임의 규칙을 깨리라고 본 것은 옳았지만, 그에 맞서 혁명적인 폭력으로 대응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크게 빗나갔다." "1960년대 칠레에서 일어난 사회의 결집과 강화의 과정은 국가의 강화와 짝이 맞았지만, 그런 과정은 1970년 이후 더 급진적인 요구로 이어졌을 뿐이다. 이 급진적 요구는 토지와 사업이 대거 몰수될까 봐 걱정하는 칠레 엘리트의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엘리트의 반동으로 칠레는 회랑 밖으로 밀려났다."(668-9)


"레드 퀸의 동학이 갈수록 엘리트층에 유리해지면 민중은 엘리트가 지배하는 체제보다 자신들의 이익에 더 우호적일 것으로 기대하면서 책임성이 없는 독재자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쪽을 택할 수 있다. 이는 희망적 바람에 불과하지만, 지금껏 사회는 엘리트와의 투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그들의 족쇄 찬 리바이어던을 파괴하는 쪽을 계속 선택해왔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이 점을 잘 요약했다. 〈인민은 귀족의 지배나 억압을 받고 싶어 하지 않지만, 귀족은 인민을 지배하고 억압하려고 합니다. 이 두 상반되는 욕구로 여러 도시에서 군주정이나 공화정 혹은 무정부라는 세 가지 결과 중 하나가 나타납니다. ··· 귀족들이 인민들을 물리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자신들 가운데 누군가를 지지하기 시작하고 그의 보호 아래 있으려는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를 군주로 내세웁니다. 일반 인민들 역시 귀족들에 저항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한 사람을 지지해 그의 권위에 의지해 보호받으려 합니다.〉"(680-1)


제14장 회랑 안으로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체제가 무너지고 남아프리카는 평화적인 방식을 통해 민주주의로 이행하면서 회랑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변화는 ANC(아프리카민족회의)와 흑인 중산층, 백인 산업가들의 새로운 연합을 기반으로 했다. 농업과 광업의 엘리트 집단은 흑인의 임금을 낮게 유지하는 정치·경제 제도의 주된 수혜자였다. 백인 노동자들 역시 큰 혜택을 봤는데, 흑인 차별과 피폐한 흑인 교육체계 같은 당시의 여건 덕분에 백인들은 숙련직과 반숙련직에서 자신들과의 경쟁이 사실상 금지된 흑인들에 비해 임금을 5.5배에서 11배까지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가들에게 아파르트헤이트체제는 그다지 좋은 조건이 아니었다. 흑인 차별로 백인 농장주와 광산 소유자, 노동자들은 혜택을 봤지만, 그로 인해 가장 비천한 비숙련직 외에는 어떤 자리에도 아주 싼 흑인 노동자를 고용할 수 없었던 산업가들은 인건비 증가를 감수해야 했다." "그러므로 산업가들은 아파르트헤이트 연합의 약한 고리였다."(697-8)


"1886년 트란스발에서 금이 발견된 후, 흑인들의 강제노동은 남아프리카의 농업과 광업 부문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해졌다. 값싼 흑인 노동력에 접근해 강압적으로 고용하고 싶어 하는 백인 농장주와 광산 소유자들의 바람은 흑인들의 참정권을 완전히 박탈하고 그들의 땅을 몰수하며 억압적인 아파르트헤이트체제를 구축하는 제도적 변화를 수용하도록 부추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상황은 상당히 달랐다. 1990년대 남아프리카는 금과 다이아몬드 생산이 여전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기는 해도 제조업 위주의 경제구조로 바뀌었다. 산업가들은 대부분 흑인 취업 금지를 끝내는 것을 선호했고, 특히 강력한 흑인 지도자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다면 대의제가 강화된 민주주의체제 아래 자신들의 자산을 보호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아파르트헤이트체제에 대한 국제 제제 역시 기업계가 지나치게 억압적이고 차별적인 제도를 폐지하는 데 동참하도록 하는 추가적인 유인을 제공했다."(730)


"터키 역시 군부와 관료집단이 지배하는 독재적 리바이어던에서 출발했다." "1923년, 훗날 아타튀르크로 명명된 무스타파 케말 휘하의 군대가 승리를 거두면서 터키공화국이 수립됐다. 터키공화국이 택한 길은 추가적인 개혁과 국가건설에 열려 있었지만, 항상 군과 관료가 이끄는 독재적인 형태였다(기업 소유주와 다른 이들은 이 연합의 주변 요소였다). 터키어 약자 CHP로 알려진 아타튀르크의 공화인민당은 경제와 사회를 현대화했지만, 그 지도자들과 협력자들이 견제받지 않는 권력과 경제적인 부를 쌓게 해줬다." "처음에 아타튀르크가 일당체제로 제도화한 CHP의 권력 독점은 그 후 몇십 년 새 무너졌지만, 불균형적으로 강력한 군부와 관료집단의 권력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군부가 장악력이 느슨해지거나 사회가 결집하고 있다고 느낄 때는 쿠데타를 통해 개입했다. 군과 민간 정부는 흔히 세속주의적이었지만 사회 통제를 위해 서슴지 않고 종교를 이용했으며 종교집단들과 연합했다 그만두기를 반복했다."(709-11)


"터키는 독재적인 국가 통제의 어느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옮겨 갔다. 2007년 이후 에르도안의 정의개발당(AKP)은 이 나라 권력의 여러 지렛대를 완전히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계기는 터키의 보안대, 관료조직, 사법부 그리고 교육체계에 뿌리를 내린 무슬림 성직자 펫홀라흐 귈렌의 비밀조직과 AKP 지도부의 동맹이었다." "2016년 7월 비밀리에 귈렌과 동맹을 맺은 군 장교들이 계획한 것으로 보이는 쿠데타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후, 에르도안과 그 협력자들은 계엄을 선포하고 보안대와 사법부, 관료조직의 귈렌 조직원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에르도안은 나아가 견제장치가 거의 없는 대통령 중심제를 도입했다. 이는 2017년 계엄령 아래 헌법 개정에 반대 운동을 할 수 있는 주류 언론이 없는 가운데 치른 국민투표에서 가까스로 통과됐다. 터키는 여전히 기자들을 가장 많이 감옥에 가둔 나라이며, 의회의 쿠르드족 지지 정당의 공동대표들을 포함한 몇몇 선출된 정치인들까지 가둬놓고 있다."(714-5)


제15장 리바이어던과 살아가기


"하이에크는 독재적 리바이어던이 출현하는 것을 막는 길은 사회가 국가의 권력과 지배에 맞서 효과적으로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하이에크의 빈틈없는 분석은 한 가지 활력, 즉 레드 퀸 효과를 빠트렸다. 사회가 국가 역량 확대에 맞서 할 수 있는 선택은 국가를 완전히 억제하는 길만 있는 게 아니다. 사회는 그 대신에 자신의 역량과 국가에 대한 자신의 견제장치를 확대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영국과 유럽 대부분 국가에서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새로운 도전을 맞았을 때 회랑 안에 머무르는 일은 자동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하이에크는 자유에 대한 더 기본적인 도전, 즉 새로운 유형의 '노예 상태'로 이끄는 행정국가의 힘이 확대되는 것을 염려했다. 그러나 레드 퀸 효과는 또한 제로섬 게임이 되지 않는 한 확장하는 국가에 대한 견제 기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새로운 능력과 제도적 장치를 개발하면서 사회가 회랑 안에 머물도록 도와주는 강력한 힘이 될 수 있다."(751-2)


"어쩌면 하이에크의 가장 번득이는 통찰은 국가와 시장의 균형이 단지 경제에 관한 문제만은 아니라는 생각일 것이다. 그것은 정치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국가가 사회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한 역량을 키우면서도 여전히 족쇄를 차고 있도록 보장하느냐다. 그러자면 사회가 국가와 엘리트집단을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도록 역량을 강화하는 새로운 방식이 필요하다. 국가 개입이 유익한지 판단하려면 그 개입에 따른 경제적인 상충관계만이 아니라 그에 따른 정치적 영향도 고려해야 한다. 이는 단지 국가의 역량에 관한 문제일 뿐만 아니라 누가 그 역량을 통제하고 감시하며 그 역량이 어떻게 쓰이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스웨덴과 다른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진정한 제도적 혁신은 더 개입주의적이고 재분배를 중시하는 국가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기업계와 노동자 대다수가 포함된 연합의 후원 아래 그런 일을 했고, 그 연합이 국가에 단단히 족쇄를 채우도록 한 것이다."(761-2)


"경제의 세계화와 자동화, 금융의 성장, 거대 기업의 부상이라는 경제적 추세들은 적어도 세 가지 이유에서 미국을 비롯한 몇몇 선진국들이 긴급하게 대응해야 할 도전이 되고 있다. 첫째, 그 추세들은 불평등에 영향을 준다. 둘째, 경제적 효율성에 문제가 있다. 지난 20년 동안 세계화가 극적으로 진전되고 새로운기술이 놀랄 만큼 발전했지만 소득과 생산성 향상은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세계화와 급속한 자동화는 여러 혜택을 줬지만, 이는 생산성과 경제적 번영에 훨씬 더 많이 공헌했을 다른 기술 발전을 희생시킨 대가였는지도 모른다." "세번째 도전은 기관들에 대한 신뢰에 관한 것이다. 족쇄 찬 리바이어던에게 필요한 것은 국가와 사회 간 힘의 균형뿐만이 아니다. 기관들에 대한 사회의 신뢰도 필요하다."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낙후되고 각종 기관에 대한 신뢰를 잃은 부문들은, 정치체제를 흔들려는, 그리고 회랑 안의 삶을 받쳐줄 국가와 사회 간 힘의 균형을 무너뜨리려는 운동의 주된 목표가 된다."(774-5)


"레드 퀸은 회랑이 좁을수록 통제할 수 없게 될 가능성이 더 커진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미국과 다른 여러 서방 국가들은 더 나은 처지다. 그들은 제조업과 서비스업을 바탕으로 경제를 다각화하고, 노동 강요는 아주 제한적인 역할만 하고,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반대하는 지배적인 집단들이 없고, 중단 없는 민주주의 정치가 더 넓은 회랑을 만들어낸 최근 역사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랑의 폭도, 회랑 안의 안정도 당연하다고 여길 수는 없다. 회랑의 폭은 민주적이고 참여적인 기관들에 의해 확대된다. 이 기관들이 사람들의 신뢰를 잃으면 회랑은 좁아지고 사회가 분쟁을 다루는 능력은 줄어든다. 그리고 레드 퀸이 고집스럽게 제로섬 게임으로 치달으면 회랑이 넓어도 레드 퀸은 통제할 수 없게 된다." "스웨덴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명백하다. 족쇄 찬 리바이어던과 새로운 정책들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타협을 끌어내고 광범위한 연합을 구축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776-8)


"구체적인 정책의 개혁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사회의 결집력을 전반적으로 재고하는 것이다. 토크빌을 크게 매혹시킨 19세기 미국 사회의 특징 중 하나는 정부 바깥에서 단체를 조직하고 형성하려는 사람들의 의지였다. 미국 사회는 이를 통해 특정한 사회적 문제들을 풀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의사결정에 대한 대중의 압력을 만들어낼 수도 있었다. 최근 이런 유형의 단체들이 쇠퇴하고 있다는 점이 많이 부각됐다. 쇠퇴의 범위와 정확한 원인에 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고 이 조직들이 모두 중요한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국가와 강력한 엘리트층을 계속 견제할 수 있는 유형의 연합들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것은 꼭 필요하다. 이 일은 경제적 엘리트집단의 영향력에 맞서는 노동자 조직들이 지난 몇십 년 동안 훨씬 약해졌기 때문에 더욱 중요해졌다. 이런 조직이 쇠퇴함에 따라 산업 노동자들과 다른 시민들 모두를 위한 새로운 정치 참여 수단이 될 대안적인 형태의 조직들이 더욱 필요해졌다."(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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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승리의 발자취 - 기독교는 어떻게 세계 최대의 종교가 되었는가?
로드니 스타크 지음, 허성식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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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제1부 성탄 전야


"수많은 신들을 섬기긴 했지만 로마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회는 신앙의 다양성을 허용하지 않았다. 신들에게 각자의 신전이 있었지만, 그 모두가 국가의 재정 지원을 받으면서 세세하게 통제되던 단일한 국가 체제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이교 신전이 맡은 주된 소임은 국가와 그 지배 귀족이 신들의 가호를 받고 있음을 확신시켜 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신전에 갈 뿐이었고, 그곳에 소속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이 어느 특정한 신을 좋아한다고 해서 자신을 그 신을 믿는 신자로 규정하지는 않았다─자신을 제우스(Zeus)를 믿는 신자 내지 유피테르(Jupiter)를 믿는 신자로 자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한 사람이 자신의 취향과 필요에 따라 여러 신전과 다양한 신들을 후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회중으로 조직된 종교생활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공통된 종교적 구심점과 소속감을 가지고 정기적으로 모이는 회합이라는 뜻에서 회중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22-3)


"로마에는 국가로부터 보조를 받는 국교가 없었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한데, 로마의 사제집단을 살펴보면 이것을 알 수 있다. 로마의 전통적인 신전들조차 전문적인 전임 사제를 두지 않았다." "로마의 사제는 사제 노릇이 그의 주된 역할이 아닌, 다시 말해 아마추어였기 때문에, 〈로마의 신전은 권력이나 영향력 내지 부가 모이는 독자적 중심이 될 수 없었다.···신전에 배속된 사제들이 없었기 때문에 신전은 사제들에게 권력의 기반을 제공하지 않았다.〉" "로마의 이교 신앙은 별도의 재정적 후원이 필요했다는 점을 제외하고나면, 신들의 수와 성격과 특화된 역할에 있어 다른 신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까닭은 로마의 신들이란 거의 모두 그리스에서 온 것이었고, 그리스의 신들 역시 이집트에서, 그리고 이집트의 신들은 수메르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신들이 이동하면서 그냥 이름만 갈아치웠던 것이다." "이렇게 제국의 동부와 이집트에서 유입된 새로운 종교들이 이른바 '동양 종교들'(Oriental faiths)이었다."(27-9)


# 로마에서 동양 종교들이 성공한 이유 (퀴몽+스타크)

1. 동양 종교는 종교적 감흥을 불러 일으키는, 감각에 호소하는 측면이 한층 더 강하다. (감각)

2. 로마의 전통 신들이 도시와 국가의 신들이었다면, 동양 종교의 신은 개인의 신이다. (양심-속죄, 용서와 결부된)

3. 로마의 전통 종교는 '경전'이 없었지만, 동양 종교는 성문화된 경전을 제공한다. (지성)

4. 동양 종교는 여성에게 적극적인 종교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젠더)

5. 동양 종교는 평신도들을 신도단, 즉 활동적인 신도 공동체 안으로 모여들게 한다. (조직화)


"로마의 신들은 그저 고객과 축제만 있었을 뿐, 신도나 정기적 예배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동양 종교는 〈새로운 공동체 의식과···훨씬 더 강력한 형태의 소속감을 제공했다.〉" "동양 종교는 분명한 종교적 정체성을 채택했고,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 긴밀하게 결속된 매우 활동적인 종교 공동체, 즉 고객이 아닌 신도단을 필요로 했다.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동양 종교의 신자들도 자신이 속한 종교 집단을 사회생활의 구심점으로 삼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종교적 헌신을 강화했을 뿐 아니라, 헌신의 자세를 통해 훨씬 더 큰 보상을 얻었는데, 그것은 동료 신자들이 그들의 헌신에 대해 보답으로 베풀어주는 것이었다. 종교 집단이 최고 수준의 헌신과 충성을 이끌어내는 것은 바로 신자들을 따로 모아서 친밀한 상호 교제를 가능케 하는 기회를 제공할 뿐 아니라 이들 간에 끈끈한 사회적 유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로마의 통치자들과 쓰라린 갈등을 초래하게 한 요인이기도 했다."(38-9)


"유일신교와 접촉한 여러 이교 집단은 그들이 섬기던 신들 중 하나를 다신교의 제한된 틀 안에서 가능한 대로 유일신교와 유사하게 변형하려고 했다. 이러한 방향으로 가장 광범위한 노력을 기울인 것이 바로 이시스교였다." "그러나 아무리 이시스를 〈유일하게 참되고 살아 있는 신〉으로 부른다고 해도, 이시스교가 이교주의에 속한 태생적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시스를 최고의 신으로 격상시키는 것은 가능했지만 유일한 신으로 인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시스의 아들인 호로스를 포함하여 여러 신들로 구성된 만신전(pantheon)의 존재를 이교주의의 맥락에서 부정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명백한 유사성을 지닌 유대교에 비하면, 이시스 신화는 온통 저세상에 관한 이야기였다." "시럴 베일리(1871-1957)의 말마따나 〈한편에는 비역사적이고 단지 이야기 속 꼭두각시에 불과한 전설적 인물들이 있었다. 반면에 유대교에는 참으로 역사적인 인물들이 포진해 있었다.〉"(51-3)


"이전에 독점적 지위를 누리던 종교들은 어쩔 수 없이 상대적으로 느슨하고, 나태하고, 현세적인 성격이 되기 때문에, 그 반대 세력은 대부분 이보다 강렬한 신앙을 추구하는 집단 곧 〈소종파〉(높은 헌신도를 지닌 종교단체를 지칭하는 명칭)로부터 나오게 된다. 독점적 종교가 처음에는 강렬한 신앙에 헌신된 이들에 의해 창설되었을지라도, 점차 주변의 사회적 환경에 적응하기 마련이다. 독점적 종교가 점점 태만해지는 한 가지 이유를 들자면, 그것은 종교적 강렬함이 결코 한 세대로부터 다음 세대로 물 흐르듯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소종파를 이끌던 교인 자녀 중 대다수가 그 부모들보다 긴장감이 덜한 신앙을 선호하는 것은 불가피한 현상이다." "이러한 과정은 오랫동안 〈종파의 변화〉(the transformation of sects), 즉 성공적인 종파들이 보다 온건한 종교 집단으로 변모되어가는 과정이라고 지칭되었다. 종교 지도자들이 정치나 경제와 같은 현세적 활동에 관여하면서 그 변화의 속도가 빨라진다."(62-3)


"그러한 종교 기관이 경쟁적 충동을 억누를 만한 강제력을 결여하고 있을 경우, 그 종교는 곧바로 긴장도 높은 신앙을 원하는 이들이 출범시킨 소종파 운동에 의해 포위당하게 될 것이다.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 포로기를 거쳐 돌아왔을 때 이스라엘에서 바로 이러한 일이 일어났었다. 유배지에서 귀환한 유대 지도자들이 내세운 유대교는 철저한 율법 준수와 다신교에 대한 절대적 불관용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정통주의에 대한 지도 권한이 예루살렘에 집중되었고 전문화된 세습 제사장 계층에 의해 장악되었으며, 이에 따라 성전도 재건되었다. 성전을 유지하고 세습 제사장직을 후원하기 위해 전체 유대인을 대상으로 십일조가 부과되었다. 어쩌면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점은 성전이 재정 기관으로 부상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성전이 국가의 금고, 심지어 투자 은행 같은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환전상들을 유치하기도 했다. 여기서 투자 은행이란 자본의 예치 장소를 말한다."(63)


"이것은 두 집단이 결합된 형태로서, 한편에는 국가로부터 보조를 받으며 성전을 관장하는 부유하고 상대적으로 현세적인 제사장 계층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종교적 순응을 강요하길 꺼려했던 〈외부인들〉인 정치적 지배자들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다양한 범위의 유대교 종교 집단들(탈무드에서는 24개의 종파를 언급한다)이 생겨나게 되었다. 아쉽게도 대부분의 종파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그들의 이름 정도인데, 그마저도 없는 경우가 있다. 논쟁에 휩싸인 유대교 종교 집단들 중에는 뭔가를 기록으로 남기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나마 알려진 것은 대부분 외부인들이 작성한 것이며, 이것들은 대부분 상당히 비우호적인 면모를 띠고 있다. 가장 중요한 자료는 1세기의 유대인 모험가이자 역사가였던 요세푸스(약 37-100)였는데, 그는 자기가 적어도 유대교의 세 주요 집단, 곧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와 에세네파에 가담해서 활동했었다고 말한다."(64-5)


"메시아라는 말은 아람어 〈마쉬아흐〉(mashiah)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기름 부음 받은 주님〉(그리스어로 christos)이라는 뜻이다. 수 세기 동안─특히 강력한 적들로부터 괴롭힘 당하던 시기에─유대인의 사고 속에 변함없이 자리 잡고 있던 주제는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어 〈이스라엘의 충만한 영광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공의가 세상을 다스리는 지복의〉 시대를 시작하신다는 것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지점을 넘어서면, 제이콥 뉴스너의 말마따나 유대교는 〈메시아에 대한 깔끔한 교리를 제시하지 못했다.〉 실제로 쿰란 문서를 기록했던 유대인들은 심지어 두 명의 메시아, 곧 〈기름 부음 받은 제사장과 기름 부은 받은 왕〉의 출현을 예견하기도 했다. 따라서 유대교의 메시아 대망은 〈혼란스럽고, 복잡하며, 심지어 모순되기까지 한 관념들의 거대한 덩어리〉였다고 하겠다." "메시아의 강림은 종종 종말 곧 〈죽은 의인들의 부활 및 악을 행한 자들에 대한 심판〉과 연결되곤 했다."(70-1)


제2부 로마 제국의 기독교화


"일반 교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예수운동의 활력은 〈공동 식사를 핵심으로 삼아〉 가정집에서 함께 모이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이것은 필시 〈최후의 만찬〉을 상기시키는 측면을 지니고 있었으며, 당연하게도 모든 사람이 그 거룩한 공동체 생활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 단체의 사명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예수의 가르침과 활동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복음서의 전승을 구성하는 문서자료를 최초로 수집하는 일이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이 점이 바로 복음서들이 때때로 유대인들에 대한 두려움과 반감을 나타내는 이유를 밝혀준다. 맨 처음 복음서를 기록한 저자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예수운동이 처한 전투적 상황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던 이들이었다." "유대인들의 박해가 일어났을 당시에 그리스도인의 수효가 극히 적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로마인들이 가한 박해보다 이 박해가 기독교 신앙의 존속에 더 큰 위협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97-9)


"바울은 혼자 여행하는 법이 없었다. 소수의 조력자들만을 대동하고 여행하는 법도 없었다. 도리어 많을 때는 40명이나 되는 신자들을 수행단으로 삼아 동행하였다. 이 정도 규모면 초기 〈회중〉을 구성하기에 충분했으므로, 이를 통해 믿음직한 예배 분위기를 유지하고 새 신자를 맞이하여 이들과 더불어 유대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가능했다. 바울의 수행원 가운데는 틀림없이 필경사(scribes)가 있었을 것이다. 책을 제작하기 위해 손으로 받아쓰고, 한 번에 하나씩 옮겨 적는 방식을 사용했던 당시에는 필경사를 대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우리는 바울의 필경사 중에 한 사람을 알고 있다. 그가 로마서의 말미에서 자신이 누구인지─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Tertius, 롬 16:22)─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헬무트 쾨스터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따라서 바울의 선교사역은 외로운 선교사 한 사람이 벌인 소박한 활동이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도리어 치밀하게 준비된 대규모의 조직적 활동이었다.〉"(105-6)


"이교 세계에서는 기독교의 신화적 요소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그리스도 이야기는 고대 영웅 설화의 모든 요소, 곧 어떻게 한 인간이 신의 경지에 오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의 완결판이었다." "더욱이 그리스도 이야기가 지닌 〈이교적 요소〉는 그리스-로마의 이교 신앙과 기독교 간의 문화적 연속성을 극대화시켰다. 이교도 출신의 개종자들은 자기들에게 친숙한 신들과 기적들에 대한 개념들 가운데 많은 것들을 그대로 가져갈 수 있었으며, 그러면서도 훨씬 더 강한 수준의 헌신과 더 포괄적인 도덕성 및 훨씬 더 강력한 구원의 메시지를 수용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다신교로 퇴행하는 경향을 찾아보기 힘든 것은 바로 예수가 신성을 너무나도 완벽하게 인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론 그 때문에 기독교는 유대교와 되돌릴 수 없이 갈라진 사이가 되고 말았다."(129-31)


"고대 도시에 만연한 불결함과 고통과 질병 및 익명성의 한복판에서 기독교는 긍휼을 베풀고 안전을 보장하는 섬과 같은 역할을 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교 세계에서, 특히 철학자들 사이에서는, 긍휼을 〈성격적 결함〉으로, 동정을 〈병적 감정〉으로 간주했다. 긍휼이란 무상의 도움이나 구호를 제공하는 것이므로 정의에 위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지의 설명에 따르면, 그리스 철학자들은 〈긍휼은 이성의 지배를 전혀 받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반드시 〈충동을 제어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과 〈받을 자격도 없는 자가 긍휼을 간청할 때〉 철저히 〈외면할〉 것을 가르쳤다고 한다. 저지는 계속해서 〈동정은 현자들에게는 합당하지 않은 성격적 결함이므로 아직 미성숙한 자들에게만 용납 가능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도덕적 분위기 속에서 기독교가 보여준 참으로 혁명적인 원리는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자비가 자기 가족뿐 아니라 신앙의 경계를 넘어서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들에게 뻗어나간다는 점이다."(170-1)


"그리스도인 작가들은 여성에 대한 예수의 태도가 혁명적이라는 점을 오랫동안 강조해왔다. 예수에게 있어 남녀는 평등했다는 말이다. 많은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은 성차별적이지 않은 예수의 말이나 행동이 성차별이 만연했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실제 젠더 관계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무시해버리곤 한다. 그러나 최근에 밝혀진 객관적 증거에 따르면, 의심할 여지 없이 초기 기독교 여성이 이교도 여성이나 유대인 여성에 비해 남성과의 관계에 있어 훨씬 더 평등한 권리를 누렸음이 분명하다. 로마시의 지하에 위치한 지하묘지 중 기독교 구역에 있는 3,733기의 묘실에 대한 연구는 그리스도인 여성에 대한 추모 비문이 그리스도인 남성에 대한 추모 비문과 그 길이에서 차이가 거의 없음을 밝혀냈다. 이렇듯 〈추모 비문에서 남녀 간에 차이가 없다는 사실은 유독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해당되는 특징이었고, 이 점은 그들을 도시의 비그리스도인들로부터 구별해주었다.〉"(186-7)


제3부 기독교화된 유럽의 성장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의 하나님에게 우선적으로 도움을 청한 한 가지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을 정도로 기독교가 필시 로마시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다수의 시민이 신봉하는 신앙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기독교가 비약적 성장 곡선을 그리며 빠른 속도로 확대됨에 따라 수천 명이 개종하게 된 상황을 모르고 지나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쩌면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요인은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가 오래전부터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막센티우스를 물리치고 로마에 입성한 콘스탄티누스를 군중들이 〈진심이 담긴 환호소리와 함께〉 맞이한 것은 그가 단지 승리자로서 입성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주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콘스탄티누스가 예전이 관례대로 유피테르 신전에 올라가 이교의 신들에게 제사 드리기를 거부하자, 로마시에 거주하던 그리스도인들은 틀림없이 흥분을 가라앉히기 힘들었을 것이다."(250-1)


"콘스탄티누스가 교회에 기여한 주요 업적은 성직자들을 부와 권력과 신분이 보장된 고위층으로 끌어올린 것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로 삼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가 실제로 한 것은 기독교를 황제의 총애를 받는 수혜자로 만들어 제국의 재화를 거의 무제한적으로 누리도록 한 것이었다.〉 법률상의 특권과 권력이 성직자들에게 아낌없이 하사되었다. 주교가 주관하는 교회 법정이 공식적 지위를 얻게 되었다. 성직자들은 세금을 비롯한 공적 의무를 면제받았다. 아울러 주교들은 〈이제 가장 부유한 원로원 의원들과 동급의 고위층이 되었으며···이에 따라 그들은 국가를 위한 재판관과 지사와 정무관의 역할을 맡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 결과 귀족 가문 출신의 사람들이 사제가 되기 위해 쇄도하는 현상이 나타났으며, 이로 인해 교회는 한층 더 세속적으로 변질되면서 이전의 활력을 상실한 기관으로 전락하게 되었다."(255-6)


"콘스탄티누스는 이교주의를 불법화하지 않았고, 비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도 용인하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가 이교 신전을 용인한 것보다 더 중요한 점은 그가 계속해서 이교도들을 집정관이나 지사를 비롯한 최고 고위직에 임명했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이교도 철학자들이 그의 궁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태양신을 묘사한 그림이 그가 주조한 동전에 새겨져 있기도 하다. 실로 〈콘스탄티누스가 가장 신랄한 언사를 내뱉은〉 대상은 이교도가 아니라 도나투스파와 아리우스파 같은 이단들 및 발렌티누스파 마르키온파 같은 영지주의 분파들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기번 이래로 주요 역사학자들은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을 신실성이 결여된 정치적 꼼수로 격하해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역사학자들은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을 진정성 있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그의 치세 동안 이교적 요소를 존치시킨 것을 종교적 화합을 추구하는 그의 의중이 반영된 사례로 인용한다."(261-2)


"통념적인 역사관과는 달리 이교주의는 즉시 소멸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것은 아주 서서히 종적을 감추었다." "초기 무슬림 군대가 639년 하란(Haran)을 공격할 당시 그 도시에서는 아직도 이교도가 그리스도인보다 우세했기 때문에, 아랍인들과 협상하기 위해서 파견된 대표단은 모두 이교도였다. 사실 10세기 말까지도 그리스를 포함하여 그보다 더 동쪽에 위치한 지역에서는 다수의 이교도들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었고, 이교의 신들에게 바쳐진 신전도 나름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상당한 시기 동안 로마의 몇몇 주요 도시를 포함하여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유행하던 종교적 관점과 관행은 이교주의와 기독교가 습합된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다. 끝으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교주의가 유럽에서 결코 완전히 소멸한 적이 없으며 기독교에 동화된 형태로 존속했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이교의 축제들이 매우 얄팍한 기독교적 외피를 입고 계속되었으며, 이교의 신들도 그런 식으로 많이 살아남았다."(270-1)


"배교자 율리아누스는 교회에 대한 국가지원을 중단하고 이교의 신전에 보조금을 지급했다. 그는 제국의 고위 관직을 그리스도인이 아닌 이교도들로 교체하였다. 그가 시행한 조치 가운데 훨씬 더 중요했던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고전을 가르치는 것을 불법화한 것이다. 이 법령에 따르면 상류층 부모가 자식을 이교도에게 보내어 배우도록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 고전 교육(paideia)의 커리큘럼 안에 무의식적으로 녹아들어 있는 언어 및 표정과 더불어 무수히 코드화된 기호체계를 습득할 기회를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 자녀들이 이러한 교육을 받지 못한다면 고대 로마의 엘리트 문화 속에서 경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울러 〈비교적 짧은 재위 기간에도 불구하고 율리아누스가 가한 가장 심한 상처〉는 끔찍한 박해의 시대가 또다시 전개될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그리스도인들에게 안겨준 것이다." "결과적으로 다원주의를 반대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리아누스는 좋은 빌미가 되었다.〉"(276-7)


"이교도의 영향과 세력의 쇠퇴는 매우 서서히 나타났는데, 로마 제국의 기독교화에 작용한 주요 요인은 다름 아닌 기회주의(opportunism)다. 율리아누스의 짧은 치세를 제외하고 나면, 콘스탄티누스 때부터 황제의 제위는 줄곧 기독교의 수중에 있었고 이후로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비록 내로라하는 이교도가 계속해서 정무직에 임명되고는 했지만 이들의 전망은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게다가 교회 내에 권력과 재력이 보장된 자리가 늘어감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거기에 접근할 수 없었다. 성공을 추구하는 개인과 가문이 날이 갈수록 더 많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로저 브라운의 말마따나 〈기독교를 통해 권력층에 접근할 수 있다는 확신이 고조된 것은 반이교주의 법령이나 신전의 폐쇄보다 다신교의 종언을 앞당기는 데 훨씬 더 효과적으로 작용하였다.〉 심지어 적잖은 이교 철학자들도 이교주의를 이탈하였고, 그 가운데는 기독교의 지도급 주교가 된 이들도 있었다."(284-5)


제4부 중세의 흐름


"역설적이게도 서구문명이 발흥하는 데 가장 유익을 준 요인이 바로 로마의 멸망이었다." "로마는 자유민들조차 대부분 최소한의 생존수준에서 연명하고 있었는데, 이는 그들에게 보다 나은 생활수준을 성취할 만한 잠재력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약탈적 지배층이 '잉여' 산물을 다 빨아들였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의 붕괴 덕분에 〈그 동안 세금을 갈취당했던 수백만의 인구가 그들을 마비상태로 몰아가던 억압에서 놓여남에 따라〉 새로운 기술이 다수 출현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자리 잡으면서 보통 사람들은 훨씬 더 나은 삶을 살게 되었으며, 수세기 동안 감소하던 인구가 마침내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다. 생산계급의 고혈을 짜내어 지배집단의 엄청난 낭비를 충당하거나, 황제의 자존심을 위해 거대 기념물을 축조하거나 숱한 식민지를 통제하기 위해 막대한 군대를 지원하는 일은 더 이상 없게 되었다." "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에 '암흑시대'로의 '몰락'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348-9)


# 중세의 발전

1. 기술 분야 : 물방앗간과 풍차 보급, 삼포제 경작 시행, 굴뚝과 안경의 발명 등

2. 자본주의 : 이윤, 재산권, 신용, 대출 같은 자본주의적 측면들에 대한 논의들

3. 도덕 분야 : 노예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노예제도에 반대함

4. 음악 분야 : 둘 이상의 곡조를 동시에 내어 화음을 만드는 다성음악의 출현

5. 미술 분야 : 로마네스크와 고딕 건축, 색유리 장식, 회화에 유성 안료 사용 등

6. 문학 분야 : 토착어를 쓴 단테와 초서 및 중세 무훈기를 남긴 무명의 작가들

7. 교육 분야 : 고등 학문을 다루는 대학의 등장으로 ‘새로운’ 지식을 추구함

8. 과학 분야 : 수백 년 동안 축적되어온 점진적 진보가 16세기 과학혁명 도출


"중세는 흔히 '신앙의 시대' 내지 '믿음의 시대'라고 기술되곤 하지만, 실제 중세 유럽의 대중은 의외로 회의적이었을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기독교에 대한 헌신을 결여하고 있었다." "중세기의 신앙생활에 대한 통계보고는 극히 적지만, 여러 시대와 장소에서 전해지는 신빙성 있는 보도는 의외로 많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보도의 내용 가운데 놀랍도록 일치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 대부분이 거의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지역주민들은 종종 교회건물 자체를 멋대로 이용했다. 1367년에 요크 대주교였던 존 토레스비는 교회 안에서 시장을 여는 행위, 특히 일요일에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 맹렬히 비난했다." "주교들마다 〈기도하는 집을 도둑의 굴혈로 만드는 자들을 질책했지만 허사였다.〉" "중세 유럽인들의 이러한 태도나 저조한 교회출석을 감안할 때, 이들 대부분이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에 대해 전적으로 무지했던 것도 그다지 놀랍지 않다."(370-6)


"중세기에 기독교에 대한 낮은 헌신도를 나타낸 것은 일반 대중만이 아니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하급 성직자도 마찬가지였다." "730년에 가경자 비드(the Venerable Bede)는 장차 주교가 될 에그버트에게, 영국의 사제들과 수도사들 가운데 라틴어를 아는 이가 거의 없으므로 〈나는 수차례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영어로 번역해서 제공했다〉고 말했다. 1222년에 옥스퍼드 회의는 교구 성직자들을 〈귀 먹은 개들〉이라고 묘사했으며, 1287년에 대주교였던 페첨은 〈사제들의 무식함으로 인해 사람들이 시궁창에서 뒹굴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성직자들이 평신도들과 다를 바 없는 것은 단지 무식하다는 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들 역시 비슷하게 방종한 삶을 살고 있었다. 이몬 더피의 보고에 따르면, 〈성직자들 사이에도 축첩이 만연한 탓에 무일푼의 성직자라도 집안 가득히 자녀들을 거느리고, 일요일마다 허접한 방식으로 전례(liturgy)를 집전하는 꼴이···유럽 전역에서 다반사였다.〉"(379-81)


"15세기가 시작되기 오래전부터 로마 가톨릭의 고위성직자를 포함하여 유럽의 모든 식자층 가운데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었다. 구체(sphere)라는 용어는 13세기 초에 나온 중세 때 가장 인기 있던 천문학 교과서의 제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콜럼버스가 반대에 직면했던 것은 지구가 둥글다는 주장 때문이 아니라, 지구의 둘레와 관련해서 그가 매우 잘못된 주장을 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콜럼버스는 카나리아 제도에서 일본까지의 거리가 약 4,500킬로미터라고 추산했는데 실제로는 약 22,400킬로미터에 달한다. 사람들은 지구의 둘레가 얼마나 큰지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콜럼버스의 항해 계획에 대해 반대한 것은 콜럼버스와 그의 선원들이 전부 해상에서 죽게 될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정말 놀랍게도 콜럼버스의 항해일지와 그의 아들이 남긴 『콜럼버스 제독 이야기』를 포함하여 당시의 기록 어디서도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콜럼버스가 증명해야 했다는 이야기를 찾아볼 수 없다."(400-1)


"'암흑시대'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혁명'이란 것도 없었다." "존 로크는 스콜라학자들을 사소한 일에 골몰하면서 자신의 무지를 덮기 위한 방편으로 쓸데없는 용어를 만들어내는 위대한 〈조폐국장〉과 같은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다른 이들은 그들이 얼마나 많은 천사가 바늘 꼭대기에서 춤출 수 있는지와 같은 터무니없는 주제를 논한다고 조롱했다. 결국 〈스콜라적〉이란 어휘는 대부분의 사전에서 〈진부하고 교조적〉이라는 말로 정의되는 형용사가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16, 17세기의 위대한 과학적 성과는 경건함으로 명망이 높은 일군의 학자들이 내놓은 것이었다." "'과학혁명'의 서막을 연 코페르니쿠스가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생각을 난데없이 떠올린 것이 아니었다. 그는 스콜라학파에 속한 교수들로부터 지동설에 기초한 태양계 모델을 가능케 하는 기초 개념들을 배웠다. 코페르니쿠스는 지난 수 세기 동안 이어져온 발견과 혁신의 긴 경로가 지향하던 그다음 단계로 나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405-6)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을 태양계의 중심에 두고 지구를 행성 가운데 하나로 보고서 태양 주위를 돌게 하였다. 그의 업적에 특별히 빛을 더해준 것은 그가 그것을 수학을 통해 표현한 것과 자신의 체계를 기하학을 통해 풀어냈다는 것이다. 이로써 해당되는 천체가 미래에 오게 될 위치를 계산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부활절과 하지 및 동지 등의 날짜를 확정하는 데 매우 긴요했다. 하지만 이러한 계산 결과가 기원후 2세기부터 전해져온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 토대를 둔 계산 결과보다 더 정확한 것도 아니었다. 코페르니쿠스는 태양계 내의 궤도들이 원형이 아니라 타원형임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체계를 제대로 작동시키기 위해 코페르니쿠스는 천체들의 궤도 안에는 회로(loops)가 있어서 천체들의 움직임을 지연시킨다는 가설을 세워야만 했다." "거의 한 세기가 지난 다음에야 독일의 개신교도였던 요하네스 케플러가 나타나서 코페르니쿠스의 원형 궤도를 타원형 궤도로 대체했다."(408-9)


"과학은 16세기 불현듯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수 세기 전에 스콜라학자들이 품었던 경험주의에서 비롯되었고, 이들이 혁신을 위한 체계적 노력을 경주함에 따라 새롭게 설립된 대학에서 그 자양분을 얻었다." "과학이 오로지 유럽에서만 발흥했던 까닭은 중세 유럽인들만이 과학을 연구 가능한 바람직한 대상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중세적 기풍(medievalism)이 과학운동의 형성에 미친 최대의 기여에는 확고한 믿음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의 비밀, 즉 인간이 밝힐 수 있는 하나의 비밀이 있다는 믿음이다. 이러한 확신이 어떻게 유럽인의 마음에 그렇게 생생하게 뿌리내리게 된 것일까?···그것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합리성에 대한 중세의 고집스러운 믿음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 하나님은 여호와가 지닌 인격적 활기와 그리스 철학자가 말하는 합리성을 겸하여 지닌 존재로 이해되었다.···따라서 자연에 대한 탐구는 합리성을 통한 신앙의 논증으로 귀결될 뿐이다.〉"(415-6)


"갈릴레이가 로마의 이단심문소에 소환되어 지구가 움직인다고, 즉 태양 주위를 회전한다고 하는 이단적 가르침으로 인해 고발당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견해를 철회하도록 강요받았다. 그러나 그는 투옥된 적도, 고문을 당한 적도 없다. 그는 가택연금에 처해졌고, 그러던 중 향년 78세로 사망하였다." "갈릴레이 사건은 역사적 맥락에서 보는 것이 중요하다. 당시 북유럽에는 종교개혁의 도전이 여전했고, 30년 전쟁이 한창이었으며, 가톨릭의 반종교개혁이 최고조에 달했었다. 가톨릭교회가 성경에 충실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개신교의 고발에 대해 부분적으로 대응하는 가운데 신학의 수용 범위는 축소되고 있었다." "초기 과학자들은 과학적 결론을 가설적 내지 수학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 거기에 직접적인 신학적 함의가 없다고 주장하는 보다 신중한 전략을 채택했었다. 교황이 갈릴레이에게 요구한 것도 〈자연과학을 통해 결정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었다."(422-3)


제5부 분열된 기독교 세계


"수 세기 동안 교회는 대중적인 개혁가들의 활력을 새로운 수도회 창설로 유도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위험한 대결을 비껴가게 해주었다." "성 프란치스코(1181-1226)가 이단으로 기소되지 않은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는 결코 성직자로 서품받은 적이 없었다. 그는 대중 앞에서 청빈과 겸손의 덕에 대해 설교하였고, 이는 특별히 성직자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1209년, 그는 열한 명의 제자를 데리고 로마로 가서 교황을 알현하여 새로운 수도회의 설립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그것은 매우 아슬아슬한 간발의 차로 허락되었다." "도미니코(1170-1221)는 1214년 툴루즈에서 탁발수도회를 설립했는데, (공의회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교황 호노리오 3세는 1216년에 그 수도회를 인가하였다. 이들 역시 창시자의 이름을 따 도미니코회라고 불리게 되었다. 프란치스코회와 마찬가지로 이들 또한 교회개혁을 위한 대중적 설교를 사명으로 출범하여 교황을 지지하는 대중적인 설교로 전환되었다."(447-8)


"최초의 거대한 이단운동인 카타리파(Cathars)는 10세기 불가리아에서 발생한 보고밀(Bogomil) 운동에 그 기원을 둔 것으로 보인다. 그 기원이 어디였든 간에, 카타리파는 〈가톨릭교회를 대놓고 사탄의 교회라고 부르면서 교회에 대해 직접적이고 저돌적인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들이 서유럽에서 신속하게 추종세력을 얻게 된 것은 교회의 도덕적 타락에 대한 불만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카타리파의 신학은 초기 영지주의의 신학과 매우 유사했다. 두 신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선한 신이고, 다른 하나는 악한 신이다.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면 물질세계가 너무나도 비극적이고 끔찍하고 사악하기에, 선한 신이 거기에 개입할 수 없음을 증명해준다. 따라서 카타리파는 세계가 악한 신(타락한 천사)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이 악한 신은 다름 아닌 구약의 하나님이라고 가르쳤다. 그리스도는 선한 신이 보낸 천사였으며, 그의 메시지는 이 세상의 악을 거부하고 선한 신과 인격적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었다."(451)


"카타리파가 일부러 교회 밖에서 출발했다고 한다면, 발도파(Waldensians)는 처음부터 교회개혁에 전념했던 수도원 운동의 초기 형태로 시작했다. 이 집단은 피에르 발도 내지 발데스라고 불리는 리용의 부유한 상인에 의해 창시되었다. 1176년 발도는 자기가 의뢰한 신약성경의 프랑스어 번역을 읽고 난 후 복음서가 실제로 무엇을 가르치는지 깨닫게 되었고, 곧이어 자신의 재산을 모두 희사한 후에 사도적 가난(apostolic poverty)을 주제로 설교하기 시작했다. 즉시 그의 주변에는 추종자들이 모여들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재산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가리켜 '리용의 빈자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179년 발도파의 대표들이 로마로 가서 교황의 공식 승인을 요청한 것은 상당한 염려를 불러일으켰다." "교황은 그들의 생활방식은 축복했지만 그들이 설교하는 것은 금지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설교를 중단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1184년 교황 루치오 3세는 이들을 이단으로 단죄하였다."(454-5)


"루터를 파문한 교황 레오 10세(재위 1513-1521)는 자신을 인문주의자이자 지성인으로 내세웠지만, 실상 그는 가장 악명 높은 〈게으름뱅이였으며···교회의 필요가 아닌 화려한 볼거리와 도박에 돈을 탕진한 희대의 탕아였다.〉 돈에 대한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혀 그는 면죄부 판매를 위한 공격적 활동을 전개했는데, 이것이 루터를 격분케 하고 많은 군주들을 루터 편으로 돌아서게 한 요인이었다. 영주들 편에서는 면죄부 판매에 대해 굳이 신학적 반대 가은 것이 있을 필요도 없었다. 면죄부 판매로 인해 막대한 양의 부가 그들의 백성들로부터 로마로 유출되는 것만으로도 이유는 충분했다. 게다가 교회는 단연코 유럽에서 최고의 부자이자 최대의 지주였다." "교회는 소유 재산에 대해 일체의 지방세를 납부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더군다나 교회는 엄청난 양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대부분의 유럽에서 소작농으로부터 국왕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에게 십일조를 부과함으로써 축적한 것이다."(468-9)


"이 시기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확고한 발판을 마련하게 된 루터의 종교개혁 및 기타 개신교 종교개혁에는 엄청난 역설이 존재한다. 이 '개혁들'은 지속되지 못하였다. 개혁의 각 주체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속화된 종교적 독점이 주는 여러 가지 폐해를 노출했던 반면에, 그들이 반기를 들었던 가톨릭교회는 극적인 과정을 거쳐 개혁을 위한 확고한 토대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이는 개신교의 도전으로 인해 경건형 교회가 (권력형 교회를 제치고) 권력에 복귀하게 된 것에 기인하며, 이 교회는 그 후로 다시는 위축되지 않았다. 반종교개혁이라는 명칭으로도 알려진 가톨릭의 종교개혁은 트리엔트 공의회(1551-1552, 1562-1563)를 통해 출범하였다. 성직매매가 근절되었고, 사제에 대한 독신이 강력히 시행되었다. 각국의 언어로 된 공인판 성경이 저렴하게 보급되었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소명감이 확실하고 박식한) 사제 후보자를 양성하기 위한 신학교 체제가 확립된 것이라고 하겠다."(479-80)


제6부 신세계와 기독교의 성장


"북아메리카의 13개 식민주에서 나타난 매우 낮은 수준의 종교적 참여도는 초기 정착민들이 유럽에 만연하던 현상을 그대로 가지고 왔음을 시사한다. 식민주의자들 가운데 미국에서 시온을 건설하려는 뜻을 품고 있던 종파에 속한 신자는 거의 없었다." " 그러나 유럽에서 기독교가 누리던 신앙의 게으른 독점은 미합중국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독립전쟁이 끝난 후 (식민주들의 세금으로 운영되던) 국교회 체제는 지속되지 못했다. 1776년에 이미 다종파적 상황이 실질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여러 개신교 교파들이 새롭게 등장함에 따라 급격히 확대되었다. 이러한 교파들은 대부분 지방에서 시작되었다. 이들 교파들은 모두 동등한 조건하에 설립되었으므로 정부의 편파적 지원 같은 것이 없었고, 교인들을 확보하기 위해 교회들 간에 극심한 경쟁이 유발되었다. 미국인들을 신앙을 위해 동원하게 된 것은 〈기적〉이었다. 그 결과 1850년이 되면 미국인의 삼분의 일이 지역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513-6)


"종교 간의 경쟁이 '값싼' 종교를 선호하게 될 것이라는 결론은 가격을 가치로 오인한 것이다. 소비시장의 작동방식을 살펴보면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은 대개 최저가의 제품을 서둘러 구매하기보다는 자신이 가진 돈에 견주어 최대의 가치를 제공하는 상품을 선택함으로써 효용을 극대화하려 한다. 종교의 경우, 사람들은 최소한의 것을 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정당한 희생에 대해 종교적으로 최고의 보상을 제공하는 신뢰성 있는 종교로 몰려간다." "미국에서 번창하는 초교파교회들은 요구하는 것이 매우 많은 교회들이다." "요구하는 것이 많은 종교 집단은 요구하는 것이 적은 종교보다 구성원들의 마음을 더 많이 끌고 그들을 교회에 붙잡아두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한 종교 집단은 새로운 교인들을 충원한다. 다시 말해서 그 교인들은 너무나 헌신된 나머지 다른 이들을 교회 울타리 안으로 데려오려고 애쓴다. 요구하는 것이 덜한 종교의 교인들은 이러한 일을 별로 내켜하지 않는다."(520-5)


"다종파적 상황이 모든 종교를 약화시킨다는 주장이 잘못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널리 받아들여졌던 것처럼, 다종파적 상황이 종교적 갈등을 유발하여 심한 경우 전쟁이나 박해로까지 이어지기 마련이라는 생각도 당연시되어왔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유혈사태가 야기된 것은 바로 단일 종교 체제에 맞서는 도전자들을 진압해온 정책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애덤 스미스는 종교적 갈등은 한 사회 안에 너무 많은 종교 집단이 경쟁하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적은 종교 집단[의 독점]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보았다."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상호경쟁적인 종교들이 존재하는 곳에는 '종교적 시민의식'의 규범이 발달하여 '다종파간의 균형'이 생겨나게 된다. 종교적 시민의식의 규범은 공적인 표현과 행동이 상호 존중의 원리에 따라 통제될 때 생겨난다. 다종파 간의 균형은 일단의 경쟁 집단들 간에 권력이 고르게 분산되어 갈등이 어느 편에도 이익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생겨난다."(528-30)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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