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마르공화국의 해체 3 - 민주주의에서 권력붕괴 문제에 관한 연구
칼 디트리히 브라허 지음, 이대헌 외 옮김 / 나남출판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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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공화국의 해체 과정


B. 권력공백의 단계 : 파펜-슐라이허 시기


제7장 "신국가"


"브뤼닝의 실각과 함께 권력은 힌덴부르크를 둘러싼 소규모 집단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 사건은 독일에서 의회민주주의의 종식을 의미했다. 1930년 이후 대통령정부라는 개념은 헌법적 현실이 되기는 했다. 그러나 브뤼닝은─우리가 그의 정부에 건 기대들을 어떻게 평가한다 하더라도─임기가 끝날 때까지 그의 지배의 의회민주주의적 작업방식을 확고히 지켰다. 브뤼닝의 후임자인 파펜이 당시 자신의 정부가 권위적인 유형의 브뤼닝 정부를 단순히 지속하고 있을 뿐이라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되돌아보면 파펜 스스로가 그의 정부와 브뤼닝 정부 간의 〈결정적 차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파펜의 반응은 새 선거를 통하여 마지막 남은 잠재적인 민주적 다수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 선거가 얼마나 과격한 결과를 낳을지는, 당시의 정치적 사정을 보든 주 의회 선거의 경과를 보든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15)


"파펜 정부의 형성과 형태는 독일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거의 철저했다. 거기에는 중간계급과 노동자층 대표가 하나도 없었다: 이것은 분명히 공화국으로부터 빌헬름 제국 시기의 귀족-관료적 정권으로 그리고 경제적 권력 집단들로의 후퇴를 입증했다. 좌파들의 신문은 명확한 근거를 가지고 〈귀족내각〉, 〈반동적 집중의 내각〉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제기했던 반면에, 중간정당들의 반응 또한 결코 미약하지 않았다. 국가당은 헌법정신에 거슬러 구성되었고, 극우정당들이 공식적으로 책임은 지지 않으려 하면서, 극우정당들의 지시만을 수행하는 내각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기독교 사회당 역시 분명히 거리를 두었고 적어도 나치당에게 공식적으로 책임을 함께 지도록 요구했다. 독일민족인민당 역시 그들이 새 제국정부의 형성과 목표 설정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그것에 대해 아무런 연관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확신을 고집했다."(23-4)


"슐라이허가 기존 권력구조의 틀 내에서 나치당을 길들이기 위해 노력했던 반면에, 파펜 주위의 사람들은 근본적인 개혁, 곧 권위주의적 국가의 창출을 위해 그러한 조치들을 이용하고자 애썼다." "그 핵심은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칼 슈미트의 비판에 의거하여 〈입헌적인 [즉, 영향력이 없을 정도로까지 제한된] 의회주의〉를 통해 국가질서의 정치적·헌법적 기본 특징들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대통령 중심의 권위주의적〉 국가에 대한 요구는 헌법 제54조에 대한 공격을 의미했는데, 이에 따르면 정부는 제국의회의 신임을 필요로 했고 불신임 표결의 경우에 물러나야 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군주적 반(半)절대주의로의 후퇴를 의미했다. 즉, 의회의 통제에 아주 제한적으로만 노출된 국가수반은 내각을 자신의 〈초당적인〉 통찰력으로 선택해야 하고 그런 식으로 정부를 모든 당파적 이해관계들로부터 독립적으로 만들어야 했다."(26-9)


"〈신국가〉의 이데올로기는 새로운 권위관계의 선언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군주제적 이데올로기에 의식적으로 접목하여 나치의 지도자 개념에 맞서 〈혁명적-보수적〉 지배 개념이 제기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국가의 〈지배자〉로서의 힌덴부르크가 부분적 운동의 〈지도자〉로서의 히틀러보다 우위에 놓여졌다. 그 때문에 포괄적인 헌법 개혁을 통해서 〈정당들과 사회세력들의 놀이 공으로서 이리저리 차이지 않고 그 위에 확고부동하게 서 있는 강력하고 초당적인 국가권력을 창출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 질서는 〈지배의 헌법적 생존조건들〉로부터가 아니라 정신적-도덕적 조건들로부터 그 정당성의 기반을 얻었다. 그것은 〈결코 협상 대상이 아니며〉 제한되어서는 안 되었고 〈신에 의해서만 책임을 지므로 본질적으로 절대적이었다〉: 〈지도자는 초자연적으로 정당화'되어지는' 반면 (신이 보낸 인물인) 지배자는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37)


제8장 프로이센, 파펜의 쿠데타


"프로이센은 1919년 이래 짧았던 두 번의 예외(슈테거발트 내각과 마르크스 내각)를 제외하면 사민당 주도의 바이마르 연정에 의해 통치되었다. 이전보다 더 정치적 타협 준비가 되어 있는 사민당이 〈부르주아 블록〉 내에 계속 머물렀고, 중앙당이 철저한 민주정치를 더욱 결연하게 주장했던 바로 이 순간의 프로이센 정치 상황은 제국의 그것보다 본질적으로 더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이제 전반적인 권력 이동이 바이마르 질서의 가장 중요한 이 토대(사민당 주도의 연정구조)를 고립시켰다." "브뤼닝의 실각에 따른 여러 사건들은 중요한 부분 문제인 프로이센 문제를 구체적인 정치적 결전의 장으로 만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극우적 파트너와 독일민족인민당의 영향을 받고 있는 파펜 내각의 가장 큰 관심사는 가장 거대한 지방정부(프로이센)를 신속히 제압하여 자신의 권위주의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었다."(82-3)


"프로이센 내각은 파펜에게 내정 간섭의 법률적 계기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파펜의 간섭의 근거는 무엇보다 〈공공의 안전과 질서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이었다." "프로이센 쿠데타를 헌법적으로 정당화시키기 위한 주요 논거는 이른바 공산주의자들의 위험이었다. 우익이 활용했던 그 오래된 전술, 즉 공산당의 〈마르크스주의〉와 사민당의 〈마르크스주의〉를─실제 의미와는 상관없이─동일시하여 사민당을 포함한 모든 연정을 〈볼셰비즘적〉이라고 비난하는 전술은 파펜과 힌덴부르크의 마지막 의구심을 잠식시킴으로써 새로운 승리를 거두었다. 관건은 극단적으로 분열된 의회가 정상적인 후속 정부를 구성하지 못할 경우 정부 운영의 문제였다. 그러나 프로이센 정부에 공산주의자들이 침투해 들어왔다는 주장이, 의회 소수파인 〈민족적 야당〉이 폭력을 통해서만 달성할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그런 정부 교체의 〈국가 정치적〉 근거를 다시 한 번 더 제공해야 했다."(85-90)


"프로이센 대표들과의 만남에서 파펜은 평소의 방식대로 대단히 신속하게 진행된 협의를 〈이것은 결국 국가이성의 활동이다〉라는 말로 끝냈다. 이로써 결국 법치국가 사상에 대해 권력국가 사상이 우위에 섰다는 것이 아주 공개적으로 표현되었다. 〈프로이센에 대한 제국의 간섭〉은 결코 은밀한 쿠데타가 아니었다. 이것은 오히려 동원된 제국군대에 의해 지원받았고, 독재의 계관법률가 칼 슈미트에 의해 법정에서 변호되었다. 〈헌법을 상황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논거였다." "2개의 바이마르공화국 헌법 규정을 반대하는 데 〈국가이성〉이 동원되었다. 반 년 뒤 파펜은, 슐라이허와 함께 연합하여 행한 쿠데타에서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런 쿠데타의 명수를 만났다. 하지만 히틀러의 부총리로서 파펜은, 히틀러가 자신을 위해 헌법 전체를 폐지하는 데 〈국가이성〉과 〈국가이익〉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지켜보게 될 것이었다."(100-1)


"쿠데타는 진정한 내전상황을 초래했다. 한편에서는 힌덴부르크와 슐라이허에게 충성하는 제국군대가 서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프로이센 정부의 기관으로서 프로이센 경찰과 아울러 바이마르 연정 정당, 제국기치, 그리고 총파업이라는 가장 효과적인 투쟁 수단을 갖고 있는 노조가 서 있었다. 그리고 서로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있고 각자 고유한 목표에 기초한 이 전선 사이에는 또한 나치 전투조직과 공산주의 전투조직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경찰지도부, 특히 베를린 경찰지도부가 저항을 위해 전력을 기울였던 것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저항 의지를 원천적으로 억제하는 데 있어서 제국군대에 대한 결코 부당하다고 볼 수 없는 존경심만으로도 충분했다. 지속적인 경제 위기 속에서, 무질서와 혁명적 저항에 대한 혐오가, 관헌국가로부터 전수된 이러한 혐오에 근거한 일련의 금기사항들이 위와 같은 존경심과 더불어 한 역할을 하였다."(113)


"제국기치의 한 회원의 말을 믿는다면, 조직을 강화하고, 모든 반(反)공화주의적 노력들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며 〈영구적인 공화국 긴급 보호 상황〉 선언에 전력투구할 강한 세력이 제국기치 내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무장은 대단히 불충분하였다. 그리고 결정권은, 7월 20일 헌법에 근거한 항의로 대항했지만, 민주주의적 정당성을 지닌 자신들의 직책에 따른 의무인, 구체적인 정치적 책임의식을 지니고서 대항하지 못했던, 너무 조심스런 집행부와 공화주의적 장관들, 정당집행부, 노조집행부에게 있었다." "독일사민당의 최고결정기구는 7월 20일 사건 4일 전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헌법의 법적 기초에 벗어나는 행동은 하지 않겠다는 결론을 만장일치로〉 내렸다." "합법성 유지가, 권위주의적이며 전체주의적인 헌법 적대세력에 의해 합법성이 일방적으로 이용되는 〈상황에 맞는〉 유사합법성으로 전환되는 곳에서는 그 한계를 갖기 마련이었다."(116-7)


제9장 파펜 내각의 고립


"프로이센에 대한 작전은 파펜 시대의 절정이었다. 하지만 불과 며칠 후, 7월 31일 선거가 반대 진영의 압도적인 다수 득표와 함께 대통령 내각의 자화자찬격 정부 계획에 등을 돌리는 결과를 낳은 순간 환상은 산산히 깨지고 말았다. 파펜이 제국의회 해산과 선거 일정의 최대한 연기를 통해 자신의 출발을 위해 벌었던 8주의 기간은 이날로 막을 내렸다. 모든 정당이 기대와 우려 속에서 기다렸던 선거 결과는 성공적 작전의 주역들이 희망했던 명예 획득을 저해하였다." "프로이센 작전은 공화국 지지파의 약점을 노출시키면서 동시에 나치당의 권력 장악 기대감을 강화하였고 전체주의 운동권이 자신감을 갖도록 하는 결정적 선도자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 며칠 동안 〈신국가〉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폭력적이고 소란스러운 프로이센 장악은 강화된 국가 권위의 표현이 아니라 단지 그것에 대한 민주적 정당들의 외면을 확고하게 한 동시에 반항적인 나치당에게 그들의 권력 장악 구상을 위한 좋은 사례를 제시하였다."(127-8)


"1932년 7월 31일의 선거는 내정적 정쟁(政爭) 중지와 집회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유혈충돌로 분출된 극도의 긴장과 흥분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 전반적으로 선거 결과는 모든 진영에 실망을 초래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30년에 비해 증가된 투표율에서 나치당은 그들의 제국의회 의석을 충분하게 배가할 수 있었으며 주 의회에서 차지했던 규모에 도달할 수 있었지만 대통령 선거 2차 투표에서 얻었던 득표 이상을 많이 넘어서지는 못했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선거 조건 아래에서 나치가 이룩한 확장의 최종점은 이미 도달했던 것이다. 독일 유권자의 62.8%가 이 시점에조차 나치 지배에 반대하기로 결정했던 반면 나치가 도달한 상한선은 37.2%였다. 나치당은 사민당이(독립사민당 없이) 1919년 바이마르 국민의회 선거에서 당시 단독 지배권을 주장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때 얻었던 득표율보다 낮은 지지를 얻었다."(137-8)


"한편 부르주아적 중도진영은 사라졌으며 〈민족〉 진영과 〈마르크스주의〉 진영의 공고화 이후 나치당의 더 이상의 팽창이 어려워 보였던 반면에, 그 양 진영 사이에 중앙당은 동요 없이 서 있었다. 이처럼 정당 진영의 경화와 포화상태 속에서 정당의 종식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거나─논의의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유리한 타협을 가능하게 하였을 자기 진영의 성장에 대한 희망을 상실한 채 서로 맞섰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무엇보다 대통령 내각의 막대한 패배였다. 그의 유일하고 안전했던 의회 내 기둥이었던 독일민족인민당과 독일인민당은 대폭 약화되어, 정부는 중앙당과 나치당 협력에 의해 문제 없이 무너질 수 있었다. 그런 유리한 과반수는 파펜 정부를 헌법상 정식으로 축출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우를 막을 수 있는 길로서는 파펜과 히틀러의 협력 아니면 제국의회의 해산, 이 두 가지 가능성만이 있었다."(141-2)


"〈히틀러의 권력 요구를 제어하고〉 그의 대중 운동을 〈긍정적인〉 민족주의 안에서 강력하고 제국군대에 의해 통제되는 대통령 내각으로 이끈다는 오랫동안 추진되어 온 계획은 이제 결정적 단계에 접어들었다." "7월 31일은 새로운 단계를 열었으며 그 결과는 히틀러를 전문가들이 보증하는 정부의 총리로 만드는 것이었다. 슐라이허가 볼 때는 상황이 아직 그런 조치를 허용하는 것으로 보였다. 즉, 제국군대와 국가 기구는 온전해 보였고, 슐라이허와 힌덴부르크의 입지는 신뢰할 만한 제어력과, 대통령 독재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야망에 대한 균형추를 보증하고 있었다. 이 계획이 실패할 경우에는─제 3단계로서─나치당을 분열시키는 대안만이 남아 있었다." "어쨌든 1932년 7월, 8월 슐라이허가 추진한 계획의 전환은 그로 하여금 하는 수 없이 자신이 충분한 경험이 없으며 제국군대의 권력 토대가 충분치 않았던 영역에 발을 들여놓게 하였다."(144-5)


"8월 30일 파펜, 가일, 슐라이허는 힌덴부르크, 마이스너와 함께 노이데크에서 새롭고 대폭적인 경제 및 제도 계획에 관해 논의했다. 이 기회에 최종적으로 의회해산 명령이 결정되었으며,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재선거를 수개월 연기하며, 그동안 비상명령을 통한 대규모 제도 개혁을 실시하는 계획이 진지하게 논의되었다." "하지만 뢰베 대신에 괴링이 제국의회 의장으로 선출되고 사민당이 의장단과 모든 서기직으로부터 배제되자 상황은 급변하였다. 신임 의장이자 의회에 적대적인 〈운동〉의 대표인 괴링은 의회와 대통령 내각을 반목시키고, 의도된 의회해산에 대한 항의의 표현으로 이미 대통령 선거를 통해 입증된 제국의회의 다수 확보 능력과 업무능력을 강조함으로써 나치당의 전술적 능력을 과시하였다. 이틀 후 연립내각 협상의 지속을 알리는 중앙당과 나치당 공동성명이 뒤따랐다. 이제 정부는 거의 완전히 고립되었으며 사방으로부터 동시에 위협받고 있음을 깨달았다."(159-60)


제10장 파펜에서 슐라이허로


"1932년 11월 6일에 선출된 제국의회는 새로운 연립 가능성을 전혀 제공하지 못했다. 이제 전체주의적 정당들의 부정적 다수(의석의 50.7%)는 옛 브뤼닝 블록에 대응했다. 이제 사민당에서 인민당까지 〈대연립〉(38.2%)도 하르츠부르크 전선도(42.3%) 정부 구성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이 기본적 상황 내부에서 중심축의 이동이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이론적으로도 중앙당-바이에른인민당과 나치당 사이의 연립을(48.8%) 불가능하게 했고, 민족인민당은 7월 31일에 잃었던 핵심적 위치를 되찾았다." "부르주아 정당들의 4년에 걸친 감소 또한 이제 멈췄다. 극히 명백히 여기에 책임이 있었던 것은 7월 선거에 비해 낮은 투표율(80.6% : 84.0%)만도 아니었고, 또 다섯 차례에 걸친 대규모 투표로부터 추적당한 주민들의 싫증도 아니었다. 정치적 발전의 가능성 있는 전환점은 나치당의 지속적 상승이라는 신화가 일격을 맞았음─히틀러의 전체주의적 지배 요구에 대한 거부─을 알려주었다."(190-2)


선거결과는 나치의 팽창에 맞선 민주적 정당들의 증가된 대항력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이미 시작된 나치당의 후퇴 운동은 며칠 후에 작센의 지방자치단체 선거 및 뤼벡의 시장선거에서 계속되었으며, 모든 선거 단위에서 가시적으로 된 충분히 가능성 있는 현상이라는 점은 극히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대학에서 대학생들의 선거행위에서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특히 나치당 내부의 분위기와 고려들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인식이었다. 히틀러의 완전한 권력 요구는 이제 특히 나치당의 당지도부에서 파괴 현상과 분열 현상을 야기한 심각한 부담에 직면한 것으로 보였다. 이것은 처음에 힌덴부르크와 파펜의, 이어서는 슐라이허의 새로운 그리고 최종적인 길들이기 시도를 야기한 상황이었다. 너무도 명백히 나치당의 팽창 능력에 한계를 보여준 마지막 선거의 결과는 길들이기 구상의 반대자들을 나치의 권력의식 및 그 조직적인 토대에 대한 새로운 과소평가로 오도했다."(209)


"(힌덴부르크는 히틀러 및 카스와의 협상이 실패한 뒤) 먼저 파펜에게 의사를 타진했다. 사실 파펜은 히틀러의 비타협적인 태도가─8월 13일 이상으로─진정한 국가비상사태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는 관점을 명확히 제시했다. 제국의회에 반대하고 거의 무한정 확장된 헌법 제48조로써만 통치하던 힌덴부르크는 이제 그 이상의 조치를 취했다. 그는 〈바이마르 헌법이 그러한 상황에 전혀 대비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제까지 정부를 유지시키고 그의 총리직 아래서 모든 저항에 맞서 필요할 경우 정부의 계획을 폭력으로 관철시키는 것을 지지했다. 반항적인 제국의회의 배제, 모든 정당들 및 반(半)정치적인 조직들에 대해 제국군대와 경찰을 통한 억압 그리고 국민투표나 〈새로 소집된 국민의회〉를 통하여 허용된 헌법 개혁 등은 후겐베르크 측에 의해서도 강하게 영감을 받은 제안이었고, 이를 위해서 파펜은 〈만일의 경우 바이마르 헌법의 중단〉을 감행할 수 있기를 바랐다."(235-6)


"슐라이허는 독일민족인민당에 의해서만 담지된 그토록 협소한 내각을 지속적으로 후원하는 것이 자신의 필생의 업적, 즉 국방부장관의 초당적인 역할을 위험에 빠뜨리지나 않을까 염려했다. 어쨌든 그는 이러한 권력도구를 폭력적인 복고정책을 위해서 투입하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동시에 그는 의문의 여지 없이 히틀러에 대한 폭력 행위가 위험스러워 보이게 한 〈제국군대의 내적 분열〉을 고려했음에 틀림없었다." "슐라이허는 다시 한 번 〈제국군대의 신뢰〉에서 나오는 전권적인 주장으로 정치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제공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늙은 주인〉은 자신의 마음을 얻을 수 있고 또 정치적 위기의 이성적인 중재를 위한 최후의 기회를 허비할 수도 있는 총리를 해임했다. 그와 함께 가일도 자신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로써 광범위한 개혁안들은 외관상 명백히 포기되었지만 〈새로운 국가〉라는 이상향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240-2)


"슐라이허의 관념들은 도달가능한 모든 정당들과 집단들의 접근과 협력에 지향되었으며, 파펜 식의 원칙적인 개혁 선전을 포기했다." "그는 의회의 일시정지(새로운 선거 없이)를 생각했다. 제국기치와 철모단은 통일적인 제국전사연맹으로 통합되고, 이러한 종류의 다른 모든 조직들은 해체되어야 하며, 노동조합들은 하나의 단일 노동조합으로 통합되고, 나치당은 완전히 금지되어야만 했다." "이 계획 또한, 사민당 중앙위원회가 어떠한 협정도 거부함으로써, 파괴되었다. 사민당은 공산당과의 경쟁에 대한 두려움과 정치화된 장군에 대한 불신을 공화국의 파탄에 대한 인식보다 더 강하게 갖고 있었다." "슐라이허는 두 가지 요인들을 경시했는데, 이들은 결국 일차적으로 그의 실각과 〈길들여지지 않은〉 나치당의 승리를 초래했다. 그 두 가지 요인이란 그의 달갑지 않은 친구이자 그의 등 뒤에서 히틀러와 힌덴부르크 사이의 가교 역할을 했던 파펜과 자신의 모든 계획을 지원했던 독일민족인민당의 이탈이었다."(256-7)


제11장 "집권"으로 가는 길


"사건은 많았지만 결과는 적었던 1932년 말, 정치적 장면은 제국대통령 관저를 둘러싼 중재자들과 책략가들의 바쁜 활동으로 결정지어졌던 권력 공백의 징후 속에 있었다. 그 가운데 공산주의자들은 짧은 파시스트적 간주곡 이후의 그들의 집권을 꿈꾸고 있었다. 프롤레타리아적 통일전선과 민주주의·의회주의적 결집의 구호들 사이에 끼여서 노동조합의 실용주의적 요구의 압박을 받고 있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상당한 기반과 행동의 자유를 상실했다. 중앙당은 카스의 잃어버린 핵심적 지위를 되찾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던 폭넓은 우익 정부의 구상을 위해 좌익과의 연대를 대폭적으로 희생시켰다. 독일 자유주의는 정치적으로 사망했고, 중도 우익은 완전히 분열했으며, 공화국에 적대적이었던 보수주의의 독일 민족주의 부류는 파펜의 전복으로 새로운 내적 갈등에 빠졌다. 나치들은 마침내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오인할 수 없는 위기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259)


"슐라이허는 (상호대립을 상쇄하고 미미한 정부의 지반을 확대하기 위해) 파펜의 프로이센적 해결안을 고수하는 동시에, 의회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사회보험의 사안을 지지하며 노동조합과 협상했지만, 독일 산업의 제국협회 요구에 대해서도 지지를 약속했다. 그는 위로부터의 권위주의적 군사독재를 거부했지만, 대통령 내각은 그의 〈초당파적〉 노선이 정당정치적 이해를 통해 방해받지 않도록 할 것임을 장군이자 제국 국방부장관으로서 강조했다." "이런 가운데 실각 2주 후인 12월 16일, 파펜은 귀족클럽의 연례집회에서 명예 손님으로 연설을 했는데, 여기서 그는 그의 좌절된 개혁 계획을 슐라이허의 균형 전술에 대해 날카롭게 대비시켰다." "파펜은 스스로가 집권해 있던 1932년 8월과 11월에는 히틀러에 대한 모든 양보를 거절하고 슐라이허의 계획들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러나 이제 병든 개인으로 강등된 그는 스스로 히틀러를 통해 권력을 회복하는 길을 모색했다."(260-8)


"브뤼닝의 실각 이후, 이제 86세인 힌덴부르크는 사실상 〈측근〉(Kamarilla)이란 슬로건이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가졌을 만큼, 그의 최측근의 영향력에서만 자문을 받았다. 4명의 충복 중 새로운 별이 파펜이었던 반면에, 슐라이허의 영향력은, 분명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와 마이스너와 무관하지 않게, 눈에 띄게 줄었다." "파펜에 대한 재신임이 힌덴부르크의 희망사항에서 첫 순위를 차지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나치당과 교감을 주고받으며 정부를 공격하는 방식은) 파펜의 첫 임용을 이끌었던 생각이었고, 브뤼닝의 배제를 초래했던 행동이었으며, 동시에 그것은 나치 문제에 대한 힌덴부르크의 분열적 관념에 부합하는 것이었는데, 그의 이러한 관념 때문에 일찍이 브뤼닝의 해결 노력이 저지되었다. 그것은 히틀러와 싸워야 할지 그를 등용해야 할지 선택하지 못하는 무능력이었고, 그가 신임하는 사람을 통해 나치당을 그의 〈민족주의적인〉 친구들의 진영으로 이끌고자 하는 기대이기도 했다."(290-1)


"슐라이허의 억제책은 우익단체들과 경제계들에게는 실망이었는데, 이를 계기로 그들은 종국적으로 히틀러 군대 쪽으로 옮아갔다." "장군은 황태자가 정상에 서 있는 군주정의 복고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파펜의 실패 후에 슐라이허를 바라보며 가졌었던 기대에도 부합하지 못했다." "나치 지도부는 나치적 혁명에 뒤이어 군주정적 복고가 이루어질 가능성을 전적으로 열어 놓았고─빌헬름 2세의 귀환을 거부했던 브뤼닝과는 다르게─파펜이 실제로 힌덴부르크를 그러한 해결에 관하여 설득할 수 있을 가능성도 배제되지 않아 보였다. 군주정으로 넘어가는 교각으로서의 온순한 나치, 그것은─무솔리니의 해법을 바라볼 때─이제 바이에른의 군주정체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새로운 활력을 얻었고, 외교계의 계산 속에서는 이미 몇 달 전부터 고려되었던 생각이었으며, 또한 대기업 후원자들의 희망을 움직였다." "그러나 히틀러가 권력을 얻은 후에는, 그러한 희망이 곧바로 무시되었다."(305-7)


"힌덴부르크는 〈빌헬름 2세와 히틀러 사이에서 남의 자리를 맡아주는 비극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것은 자신의 결정도 1933년 1월 30일의 국민투표도 아니었다." "불분명하고, 이미 오래전부터 민주적으로 통제되지 않았던 제국군대의 권력 지위는 바이마르공화국의 해체를 가속화시키지는 않았을지언정, 저지시킬 능력이 없었다." "반 년 뒤에 이미 효력 있는 안전장치들은 모두 제거되었고 민주주의의 담지자들은 배제되었다. 즉, 정당들, 의회, 주, 노동조합들, 경제, 언론과 문화가 〈획일화〉의 궤적을 따라 사라졌던 반면에, 제국군은 확실한 통제하에 들어갔다. 권위주의적 대통령 중심적 민주주의의 껍데기뿐인 연속성은 1년간 더 지속되었다. 그리고는 힌덴부르크가 사망했고 군대는 1934년 6월 30일의 학살─에른스트 룀 숙청─을 재가했으며, 아무런 저항 없이 히틀러에게 충성서약을 바쳤다. 나치 지배가 공고화되었던 이 시기의 끝에 히틀러의 무제한적인 단독 통치와 그의 전체주의적 기구들이 확립되었다."(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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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공화국의 해체 2 - 민주주의에서 권력붕괴 문제에 관한 연구
칼 디트리히 브라허 지음, 이대헌 외 옮김 / 나남출판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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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공화국의 해체 과정


A. 권력의 상실 과정 : 브뤼닝 시대


제1장 브뤼닝 정부의 성립


"의회가 지배하는 마지막 다수파 정부─사민당의 뮐러 내각─는 1928/1929년에 오랜 협상 끝에 그리고 여러 중간단계를 거쳐 출범하였으며, 수많은 내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든 연립정부들보다 더 오래 유지되었다." "그러나 1918년 이후 공화국의 구조와 메커니즘의 민주적 건설의 태만함 등은 더 없는 부담이 되었고, 그 결과 공화국은 비록 뜻밖인 것은 아니지만, 갑자기 그 최대의 시험대에 올라 있었다. 새로운 정치형식에 친숙해질 수 있는 기간이 너무 짧았고, 전쟁 이전 시기의 안정된 사회에 대한 기억과 냉정한 현재에 대한 맹목적 실망이 너무 생생했다. 따라서 모든 위기현상이 전후문제라는 보다 더 큰 연관관계 속에 있다면, 그 현상은 대중을 타협으로 애써서 균형을 이룬 정당정치에 대한 분노로, 또 복잡하지 않은 강력한 질서, 결단력 있고 권위주의적인 지도부 등에 대한 강한 기다림으로 몰고 갈 수 있었다."(16-20)


"유럽의 동반자가 될 당시의 적대국가들과 끈질기면서도 평화적인 논쟁에서 공화국의 외적인 해방과 내적인 공고화를 위한 (외무장관) 슈트레제만의 수단인 〈화해정책〉은 새로이 시작되는 경제위기의 인과관계에 빠져들었다." "슈트레제만의 죽음은 뉴욕 주식시장의 붕괴와 결합되었다. 이 세계사적인 사건은 수출시장에서 독일의 상황에, 외국자본의 회수에, 산업상황에, 실업의 증가와 농업의 판매위기에 동시에 뚜렷이 악영향을 미쳤다. 전면에서 이익단체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는데, 특히 1929년 3월에 새로이 형성된 농업의 〈녹색전선〉 또한 의회 안팎의 활동을 집중적으로 전개하였다. 정부는 이미 1929년에 현저한 조세수입 감소를 기록해야만 했고, 절약에 대한 호소가 제기되었다. 1929/1930년 겨울엔 연립정부 내의 사회주의파와 자본주의파의 갈등이 번번이 일어났다. 이는 슈트레제만이 죽기 하루 전에 독일인민당과 사민당 사이에 타협을 달성한 후였다."(21-2)


"실업의 증가가 점점 더 거대한 사회적 부담금을 필요로 하였지만, 경제적 위기현상들이 조세수입의 감소에 반영되었을 때, 이제 갈등은 새로이 대연정의 정치적 영역에서 발생하였다." "독일인민당은 근본적인 개혁, 즉 사회적 부담금의 축소에서 재정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을 보았다. 이에 반해 사민당은 재정적인 치유를 무엇보다도 실업보험의 희생으로─바로 지금─실행해서는 안 된다는 노동조합의 요구를 지지하였다. 사민당은 부담금의 증액 (피고용인이 항상 절반을 부담)과 보험부담금의 유지를 요구했다. 근본적으로 한편에서는 〈부담금 축소〉, 다른 한편에서는 〈부담금 증액〉이라는 투쟁구호와 함께 실업자의 보조 전반에 대한 요구권을 둘러싼, 말하자면 독단적인 〈자율경제〉에 맞서서 어렵게 달성한 노동자의 〈생존권〉과 〈존엄성〉에 대한 인정을 둘러싼 논의가 진행되었다. 여기서 전선도 점차 정당정치적으로 명확히 특징지어졌으며, 대연립을 가로질러 진행되었다."(24)


"오락가락하는 사민당과 특히 〈비타협적인 노동조합들〉의 책임은, 향후 정치적 형세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 행사가능성이 의회주의 정부 형태의 타도와 더불어 완전히 가로막힐 위험성이 명백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연립의 붕괴를 감수했다는 점에 있었다. 물론 그것은 그 구성원의 의지에 구속된 그리고 그 통일성의 유지를 위하여 투쟁하는 한 정당의 딜레마에 근거를 둔 〈비극적인〉 책임이었다." "그 결과는 가장 강력한 민주정당 및 제국의회의 완전한 자기배제였다. 반 년 후에 제국의회는 이론적으로도 대연립정부를 구성할 마지막 기회를 잃었다. 이익정책적 이데올로기적으로 마르크수주의적인 원칙들이 타협능력이 있는 현실주의를 이긴 것은 정치적 영역에서 당 전략의 실패를 의미했으며, 사민당이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심각한 패배였다." "1930년 3월 27일은 〈사민당과 독일민주주의 전체의 암흑의 날〉이 되었다."(38-9)


# 1930년 3월 브뤼닝 정부 출범


제2장 권위주의 국가로 가는 길목에서


"경제적·정치적 상황에 대한 깊은 불만은 공산당보다 나치당에게 훨씬 더 유리했다. 나치당의 상승은 즉각 가시적으로 사민당을 축출하고 중도우파의 지탱가능한 연립을 안정시키려던 힌데부르크(바이마르공화국 2대 대통령)-브뤼닝 계획의 파탄을 의미했다. 이미 후겐베르크─브뤼닝 내각 초기부터 제국의회의 해산공작을 벌였던 독일민족인민당의 당수─의 국민발의를 위한 선동은 당에 위신과 추종자들뿐만 아니라 점차 〈이행정책〉에 불만을 품은 경제계의 재정적 후원까지도 얻게 되었다." "이 전복은 전반적으로 여전히 활동능력과 연립능력을 갖춘 옛 제국의회의 파괴에 뒤이었다. 적어도 여러 지역 선거의 결과들은 이 운동을 매우 분명하게 알려준다. 이 운동은 독일민족인민당의 약화와 중도정당의 감퇴에 모든 주에서 나치당의 놀라운 성장을 대비시켰던 반면에, 공산당도 부분적으로 사민당을 제물로 삼아 득표를 증대시킬 수 있었다."(92-3)


"브뤼닝의 독자노선은 점차 국내정책이 복잡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가차없는 재정개혁〉에 지향되어 있었으며, 그는 모든 다른 문제들을 이 문제보다 하위에 두었다." "그는 자신의 구상들을 여러 차례의 선언을 통하여 국내정치적인 결과에 상관없이 〈모든 합헌적인 수단들을 동원하여〉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제국의회의 배제와 해체에 직면한 모든 민주적인 정당들의 경고와 염려, 명백히 저돌적으로 성장하는 나치적 급진주의의 파괴적 선동에 대한 언급, 경제위기의 영향으로 독일무대의 흥분과 무분별이 반영된 새로운 제국의회의 완전한 활동불능에 대한 두려움, 이 모든 것들은 브뤼닝의 사고와 계획 속에서 가차없는 정부령을 통하여 자신의 재정경제적 계획을 관철시킬 수 있는 가능성들과 계획들의 배후로 밀려난 듯했다." "브뤼닝은 자신의 확고한 개혁구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의회에 반대하여 또는 의회 없이 예전에 종종 위협하였던 권위주의의 길로 나아갔다."(97-8)


"1930년 7월 15일에 브뤼닝은 정치적 협상 가능성 및 타협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재정적 조치들에 대하여 결정적으로 제국의회의 논쟁을 개시했다." "7월 16일의 표결에서 정부는 공산당, 사민당, 나치당 등 야당과 독일민족인민당 다수파의 반대로 193 대 256으로 패배하였다. 뒤이어 브뤼닝은 정부가 (재정) 보전안에 대한 협상의 지속에 전혀 가치를 두고 있지 않다고 선언하고, 즉시 대통령의 비상령을 선포하는 길로 나아갔다. 정부가 형성된 후 독일민족인민당 우파를 끌어들이려던 정부의 희망이 거의 충족되지 못하고, 정치적 타협이라는 민주적인 길을 포기한 후, 이 길은 이제 외관상으로도 (정상궤도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사민당이 비상령을 무효화시키자는 안을 (정부에 대한) 불신임안과 연결시켜 제출하자, 7월 18일의 격렬한 논쟁과 브뤼닝의 새로운 패배가 이어졌고, 이어 브뤼닝은 대통령령을 통해서 제국의회를 해산하였다."(99-100)


"브뤼닝은 1930년 7월 18일에 자신의 계획에 반대하는 우연적인 다수(Zufallsmehrheit)의 저항에 반의회 투쟁으로 대답함으로써, 그리고 흥분한 국민들에게 그러한 상태에서 조기선거라는 거의 도발적인 (무리한) 요구를 부과함으로써, 자신이 오랫동안 고려해왔던 경제정책을 (어쩔 수 없이) 일관성 있게 수행하고 있다는 전술적 의구심과 모든 정치적 고려를 일거에 희생시켰다. 이제 그는 선거를 통하여 의회에서 안정된 기반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었다." "그는 주로 민주적인 의회로 인한 계획들의 위험과 교환하여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큰 위험을 얻었다. 그 영향 면에서 파악하기 어려운 이 더 큰 위험은 이제 정치적 지평선을 점점 흐리게 하였으며, 마침내 바이마르공화국을 구출하기 위하여 잘 계획된 모든 경제적 조치들을 환멸스럽게 만들게 될 것이었다. 이제 원칙적으로 반공화국적인 나치당이 거리와 의회에서 제일의 정치적 강자로 부상하게 되었다."(109-10)


제3장 공황기의 정부


"1930년 9월 14일의 선거에서 제국의회 의석수의 증가로 인한 의회 신참자들의 대거 진입을 포함하는 의회에서의 엄청난 세력관계 변화는 오직 극단적인 정당들, 특히 나치당에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나치당이 9배로 늘어난 원내교섭단체가 되어 제국의회로 들어왔을 때, 이미 선거운동에서 결코 소박하지 않은 대담한 당의 기대치는 초과 달성되었다. 나치당은 민족적 보수주의자들 대신에 대중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대중들은 사회적으로 위기에 취약한 소부르주아층 및 농민층에 속하면서, 심리적으로는 감성적이거나 증오심에 불타는 왕조적·권위주의적 영광을 신봉하는 자들이었다." "브뤼닝은 이 선거가, 예상했던 나치표의 성장을 미연에 방지하고, 향후 4년 이내에 활동능력이 있는 의회의 권력배분을 만들어 냄으로써, 공황과 곤궁에 처한 정부가 극복되고 좌우의 열병에 가까운 급진적인 운동이 고갈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 계산은 완전히 빗나갔다."(144-5)


"부르주아층을 선거에 끌어들인 구호들은 효과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모든 부르주아 정당 및 우익정당들의 위협물인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투쟁〉은 공산당의 득표증가로 귀결되었고, 중도파의 결집은 근본적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그것은 결국 〈책임 없는 자들의 승리〉가 되었다. 왜냐하면 비투표자들에 대한 호소로 5백만 명이나 더 많은 사람들이 투표에 참여하였으나, 이들은 주로 나치를 지지하였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증가하는 실업자 외에도 벌이가 나쁜 단기노동자들과 사무직원, 소기업가들이 수백만 명이나 있었다. 여기에 소시민적 중간계급, 농민층, 청년들이 추가되었다. 이들은 인플레이션에서 아무런 잘못도 없이 저축과 내적·외적인 안전을 상실하였다." "본래 '신생정당들'은 청년들에게 무조건적인 신뢰, (직접적인) '행동'이라는 비합리적인 철학 그리고 청년운동의 저항 이데올로기 등을 제공하였는데, 이들은 이제 정치적인 능동성으로 바뀌었다."(149-50)


"나치당은 1930년 11월 30일 브레멘에서 9월 14일에 비해 득표수(25.5%)를 거의 2배로 늘렸다." "브뤼닝은 28개 법안을 포함하는 거대한 전체 안이 제국의회에 상정되어 각 정당 간의 협의─그가 제출한 프로그램의 입법적인 측면에 대한 정규적인 의회의 논의─후에 아마도 다수의 동의를 받을 가능성이 없어 보인 12월 3일에 해임되었다. 힌덴부르크는 이미 이틀 전에 헌법 제48조를 근거로 하여 〈경제와 재정의 안정〉에 관한 포괄적인 비상령을 발동시켰다. 1930년도 예산을 법령으로 (7월 26일) 강제로 통과시킨 데 이어 1931년의 예산도 비상령으로 강제로 통과시켰다. 이는 총 104억 마르크에 달하는 것으로 1930년에 비해 (수입과 지출을 합쳐) 총 11억 5천 2백만 마르크의 긴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보전정책에도 모자랐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판매 위기와 실업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었다."(171-5)


"1931년 7월 1일 이후 국가 간의 모든 채무지불의 1년간 유예를 제안한 이른바 후버 모라토리움(Hoover-Moratorium)은 배상의 역사에서 사실상 결정적인 한 장을 의미했다. 독일은 모든 지불을 1년간 유예함으로써 가장 큰 이익을 볼 수 있었지만, 동시에 그 계획은 특히 상호 채무관계에 가로막혔던 유럽의 구매력과 수입능력의 회복에 대한 미국의 관심에 사실상 상응하는 경제적 관점들이 깔려 있었다. 그 계획은 여전히 강하게 결합되어 있던 미국 자본이 전혀 관심을 가질 수 없었던 독일 신용능력의 붕괴를 최후의 순간에 막으려 했다. 주식시장은 후버 선언의 출판에 주가 상승으로 답했다. 유럽 최대의 배상채권자인 프랑스의 저항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긴 했으나, 힘든 협상 과정에서 미국의 압력으로 매우 넓게 고려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대담할 정도로 솔직한 정책도 위기의 정치적 결과를 극복하지는 못했다."(207-9)


제4장 대통령 내각과 〈민족적 반대파〉


"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한 공화국의 모든 반대자들은 〈하르츠부르크 전선〉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제 장교단과 방위단체 출신의 반공화주의자들과 왕조주의자들은 정치지도자들과 나란히 서게 되었다. 경제 지도자들은 이 외부 권력의 대표자들을 지지하였다. 경제 지도자들은 이제 중요한 이익단체들과 함께 기존의 부르주아적·사회민주주의적인 타협질서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처음에는 환영받기도 했던 브뤼닝의 권위주의적 임시처방책에 대해서도 결단코 반대하였다. 여기에는 독일민족인민당, 나치당, 철모단, 전국농업연맹(Reichslandbund), 여러 경제단체들, 독일인민당, 경제당, 전독일연맹, 그리고 여러 귀족가문들이 대표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건설적인 개혁안이나 혁명계획을 위한 공통분모 혹은 정치적 기반을 공유하지 않았다." "따라서 뒤이은 파펜과 슐라이허 정부의 영향 아래 있었던 '권력공백'의 단계는 이미 이 순간에 두드러졌던 것이다."(216-8)


"후일 후겐베르크 자신의 발언에 따르면 하르츠부르크 자체는 (현 체제를 전복하기 위한 투쟁의 선포이자, 〈민족적 반대파〉 연합이 최후의 승리로 나아가는 시작을 의미했으며) 특히 우익반대파가 공동의 대통령후보를 합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경우에서도 후겐베르크는 분명 여전히 히틀러를 자신의 앞잡이로 만들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는 이를 위해서 자신의 천재적인 동맹자들, 〈민족적 부르주아지〉 및 경제계의 대중선동적인 나치의 활동에 대한 거부감을 힘닿는 대로 화해시키고자 했다. 나아가서 그는 순진한 자의식에서 추가적인 독일정책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거기서 그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다른 한편에서 독일민족인민당 및 나치당과 더불어 독일민족인민당과 중앙당 사이에 있는 많은 정당들이 어떻게 전술적으로 평행선 속에 설정될〉 수 있는가였다. 그렇지만 나치당은 하르츠부르크에서 예전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자신의 노선을 조종했다."(221)


"1931년 11월 25일, 한 나치 이탈자에 폭로된 〈복스하이머 문서〉는 나치가 권력을 장악했을 경우 그것을 실행할 계획을 작성한 것이었다." "이 문서는 현존하는 국가질서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타도된 뒤에 나치의 집권이 오게 될 것이라고 가정했다. 이어 〈나치 돌격대, 지역방위부대들〉 또는 유사한 조직들은 유일한 질서의 담지자로서 〈공석이 된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각 내각의 기능을 넘겨받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나치) 반역사건의 법적인 추적은 제국고등검찰과 제국대심원에 의해 저지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제국정부가 마지막 시간에 급진주의에 대하여 자신의 권위를 강화시킬 수 있는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려는 실천적인 시도를 하지 않았다는 점, 또 정치적 측면의 판결을 정치적으로 매우 오락가락하는 사법부 관료들의 판단에 맡겼다는 점, 그리고 나아가서 바로 지금 우파와의 연립 탐색, 즉 후겐베르크와 히틀러를 둘러싸고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이다."(253-7)


"그 사이에 경제적 위기는 더욱 심화되었다. 그 파멸적인 영향은 공적·사적인 생활 전체로 확산되었다. 확실히 국제관계의 수정을 위한 브뤼닝의 노력은 궁극적으로 독일에 대한 배상금 지불 압력을 완화시킬 수 있다는 전망을 열었다. 후버 모라토리움은 일시적인 비상령으로서 인정받았다. 그것은 최종적인 해결의 필요성에 대한 전반적 인식을 빠르게 성장하게 한 전기를 마련했다." "브뤼닝의 올바르고 진정한 긴축재정 정책이 외국에서 얻은 신뢰는 경제적·군수기술적인 문제들의 이성적이고 전체적인 규정에 대하여 새로운 길을 여는 협상에서 본질적인 요소였다." "그러나 그러한 객관성은 독일 내에서 그의 낮은 인기 때문에 중단되었고, 결국 배상회의가 1932년 4월과 7월로 연기되자, 군축회의의 결의안은 심지어 1932년 12월까지 지연되었다. 이 결의안은 결국 그의 후임자들과 이어서는 히틀러가 세밀한 계획과 끊임없는 노력의 결실을 따서 자신의 바구니에 담을 수 있었다."(260-1)


제5장 제국대통령 선거


"힌덴부르크는 단호하게 자신의 고유한 목표로서 모든 정치적 노력의 중심을 우파정부 건설에 옮겨 놓았다." "재선에 나서기로 결심한 힌덴부르크의 최종적인 결론은 특징적인 것이다." "〈어떠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파로의 건전한 발전을 위한 나의 노력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무조건 늦어도 5월에는 치러져야만 할 프로이센 선거 이후에 집중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새로운 협상들을 시작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대통령제 정부를 우파로 이동시키고 〈집중정부〉를 구성할 뿐만 아니라, 브뤼닝 체제의 가장 중요한 지역기반인 프로이센 정부를 교체하는 것 또한 말하자면─완전히 〈민족적 반대파〉의 의미에서─제국대통령궁의 정치적 계획 일정에 포함되었다. 공화주의적 기관들의 권력 상실을 최종적으로 확인하게 될 사건들은─이는 브뤼닝의 실각과 프로이센 정부에 대한 폭력적인 작전이다─그러한 계획으로부터 발전된 것이지 직접적인 깜짝 작전의 결과는 아니었다."(291)


"적어도 힌덴부르크가 히틀러와 대결하여 명백한 승리를 거둔 것은(49.6% : 30.1%) 민주적 결집후보의 첫 번째 목적을 충족시켰다. 이는 또한 점차 커지던 나치의 권력 요구에 대해 다시 한 번 그 한계를 지키라고 요구한 것이었고, 나치 지도부의 고조된 분위기를 당의 상황에 위협적인 심각한 침체상태에 빠뜨렸다. 뒤스터베르크가 재기불가능할 정도로 패배한 것(6.8%)은 〈민족적 반대파〉 내부의 경쟁관계를 명백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후겐베르크에 유리한 방향으로 결정했다. 독일민족인민당, 철모단 그리고 그 밖의 〈민족적 단체들〉은 의문의 여지 없이 엄청난 수의 유권자들을 나치당의 매우 영향력 있는 급진적 선동에 빼앗겼다." "나치의 득표수는 1930년의 제국의회 선거와 뒤이은 지방선거에 견주어서 추정해보면 계속 증가하였다. 그러나 그 수는 본래 당이 기대했던 수준에 뒤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주목할 만한 관찰자들의 추정보다도 약간 뒤처져 있었다."(326)


"헌법은 제1차 선거에 대해 절대다수를 요구했으나, 힌덴부르크는 간발의 차로 이를 달성하지 못했다. 물론 이러한 헌법의 여러 규정에 따라 제국대통령의 제2차 선거는 4월 10일로 예정되어 되었다. 우파의 다른 매력적인 통일후보자를 얻으려는 시도들과 황태자를 옹립하려는 노력들은 힌덴부르크와 히틀러의 지속적인 경쟁관계와 대비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황태자는 얼마 후에 곧 자신은 히틀러를 선택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이로 인해 그는 세간으로부터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신뢰의 파괴에 대해 좌파는 엄청나게 분노했고, 슐라이허도 몹시 화가 났다. 슐라이허는 아마도 히틀러를 쳐부수기 위해 황태자의 입후보를 고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2차 선거에서 히틀러(36.8%)는 힌덴부르크(53%)에 맞서 더 높은 득표의 증가를 달성(6.6% : 3.4%)했으나, 수많은 선거연설에서 표현되었던 2천만 표에서 3천만 표의 기대는 명백히 성공하지 못했다."(328-32)


"어쨌든 힌덴부르크는 주로 1925년에 그에 반대했던 집단들의 힘으로 재선되었고, 따라서 그의 재선은 이제 압도적으로 정반대되는 기대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1925년에 사람들이 그에게서 1918/1919년의 바이마르〈체제〉를 반(反)공화주의적으로 바로 잡아줄 것을 기대했다면, 1932년의 투표는 명확한 다수가 안정된 민주적 상황 그 자체의 유지와 재건에 대한 희망을 지닌 것이었다. 이것이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적 또는 보수주의적인 의미로 이해되었건 간에 말이다." "이 선거는 공화국의 마지막 승리로 보일 수 있었다. 그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고, 이어 공화주의자들을 때려눕히며, 이제 그 반대자를 물리치고, 마지막으로 히틀러 정부를 순치시키려 했을 때, 힌덴부르크는 중요한 모든 과제에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화는 시시각각으로 상승하여, 마침내 한 민족의 정치적 판단력의 상징적인 이미지로까지 되었다."(333-5)


제6장 브뤼닝의 실각


"1932년 4월 13일, (제국 국방장관과 내무부장관을 겸임했던) 그뢰너는 친위대와 그에 속하는 모든 참모부와 시설들, 돌격대 예비대, 자동차 돌격대, 해양 돌격대 및 기수 돌격대, 항공단, 위생단, 지도자학교, 돌격대 병영, 병기창들에도 관계된 돌격대 금지를 공표했고, 이어 4월 14일 경찰조치들이 발표되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가택수색과 광범위한 압수뿐만 아니라 나치본부인 뮌헨의 〈갈색의 집〉의 임시점거를 포함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저항에 부딪치지 않았다. 이러한 경과는 나치 측에서─괴벨스의 메모가 보여주듯이─준비하고 있었으며 더욱이 슐라이허 측의 즉각적인 대적행위를 계산에 넣을 수 있다고 믿었다는 추정을 분명하게 해주었다. 히틀러 자신이 그의 돌격대 부하들에게─그는 그 수를 40만이라고 계산했다─새로운 합법적인 전술을 호소했는데, 여기서 그는 그들을 〈이제부터는 단지 당 동지들이라고만〉 표현했으며 박두한 주 의회선거를 〈복수의 날〉로 일컬었다."(349-50)


"슐라이허가 그뢰너와 결별한 결정적인 요인은, 방위단체들의 탈정치화를 통하여 우익을 안전하게 포섭하는 문제와 내정적 위기를 해결하는 동시에 국가가 통제하는 군사력 강화를 성취한다는, 그가 선호하던 계획이 내무부의 돌격대 금지를 통하여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모든 〈군사적이고자 하는 조직들〉에 대해 유보적이었고 특히 철모단의 점증하는 정치화에 단호히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든 현실정치적인 주의력은 나치당의 상승에 집중되었다. 그는 국방정책에 대한 나치당의 긍정적인 태도를 제국군대에 적대적인 급진적 좌익에 대한 균형추로서 계산에 넣고, 그들의 쿠데타 의도를 온전한 제국군대를 동원하여 중지시키고, 그들의 정치적 승리의 행진을 세계경제 대공황 동안의 책임을 통해서─그리고 고령의 힌덴부르크가 그러한 실험에 대한 확실한 지지를 보장해주는 한─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361-3)


"그의 협력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뢰너의 돌진〉을 통해 위협받고 있다고 여겨졌던 이 기본구도를 슐라이허는 이 몇 주뿐만 아니라 다음 몇 달간 확고히 견지했다." "슐라이허는 정부의 기반을 우측으로 넓히려는 노력이 〈그의〉 총리인 브뤼닝을 통해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 희망이 실패한 것으로 보이자 그는 자신의 힘으로 나치당과의 교감을 넓혀 갔으며 이제는 그뢰너뿐만 아니라 브뤼닝도 실각시키는 쪽으로 일을 꾸몄다. 〈우리는 슐라이허 장군으로부터 위기는 계획한 대로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괴벨스는 이렇게 들떠서 승전가를 구가하였다. 브뤼닝의 실각은 이제 회복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문제는 이제 누가 의회적으로 묵인되었던 바이마르공화국의 마지막 정부의 해체로부터 가장 큰 이익을 거둘 것인가, 권위주의적인 개혁가들인가 혹은 민주주의에 적대적인 전체주의자들인가에 있었다."(363-5)


"한편 4월 24일 주 의회 선거 결과 (사민당 지도부가 명명한) 〈나치공산주의자들〉이 의석의 절대다수인 52%를 차지했다. 민주주의 다수파 형성이 결국 봉쇄되었던 동안에, 나치당과 공산당은 수많은 불신임안과 선동안─한편으로는 볼셰비즘에 대항한, 다른 한편으로는 파시즘에 대항한 수없이 인용되었던 방어벽으로서─으로써 그 어떤 구체적인 내용도 없이 공동의 의회 내 승리를 거두었다. 나치당은 정부와 공산당을 반목시켜 이용했고, 공산당은 다시금 민주주의 세력의 모든 유보에 대해서 볼셰비키의 권력장악으로의 길은 바로 파시스트적 중간정권을 거쳐 간다는 천편일률적인 기대로써 대응했다. 이제 독일의 모든 의회들에서, 새로운 권력분배의 긍정적 이용에 대한 어떠한 전망도 열어 놓지 않은 채 민주적 메커니즘의 기능능력이 마비되었다. 이것이 바로 권력인수를 할 능력이 없는 다수의 일관된 부정성, 즉 권력공백이었다."(3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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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공화국의 해체 1 - 민주주의에서 권력붕괴 문제에 관한 연구
칼 디트리히 브라허 지음, 이대헌 외 옮김 / 나남출판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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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권력구조의 문제


제1장 바이마르공화국의 형성에 대하여


"비스마르크의 〈현실정치〉의 길은 프로이센의 군사적 귀족과 독일 부르주아층의 결합을 거쳤다. 그리하여 1870/1871년의 승리는 혁명의 정신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결산일 뿐만 아니라 독일적 정치발전과 서방적 정치발전 사이의 분열을 확대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였다. 이 민족적 성공들은 민주적 이상의 빛바랜 광채보다 통일의 사상과 성공의 경험으로부터 더 강한 인상을 받았던 자유주의자 다수를 비스마르크 지지자로 만들었다. 민족적 이데올로기 앞에서의 시민적 자의식의 이 내적 붕괴는 독일 민주주의 발전의 결정적 단절을 표시했다. 봉건적 사회구조와 강력한 관료제에 기초한 〈민주적 장식물로 치장한 군주적 국가〉는 이제 시민을 안전하게 길들일 줄 알았다. 비스마르크의 헌법조작,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들, 프로이센 지배의 군사정치적 및 정신적 전통을 통하여 대의제적·민주적 발전은 저지당했고 세기 전반기의 징후들 역시 뒤로 내던져버려졌다."(50-1)


"1918년의 혁명은 양면성─패전의 비참함과 〈응급처방이자 전술적 방편〉으로 도입된 민주주의의 불충분함─을 가진 사건이었으며, 공화국은 국가질서를 전혀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않았고 강력한 봉건적 및 관헌국가적인 기구들은 자신들과 자신들의 요구들을 힘들이지 않고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한 상황하에서 대두하였으며 그 존재가 독일제국의 패전과 연결되어 있으며 지속적으로 부담을 안고 있었던 바이마르공화국의 약체성은 이중의 원인을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민주주의 사상의 정착과 젊은 국가의 역사적 기초에 대한 의식의 심화가 어떤 시기에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활발한 반대세력들은 겉보기에만 그리고 단기간에만 움츠러들었다; 그들은 심지어 혁명이 일어났던 몇 주간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패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전쟁 전과 전쟁 중의 선전을 벗어나지 못한 정치적으로 피동적인 대중을 곧 다시 장악하였다."(64-5)


"급속히 재강화되는 대산업, 10만 병력으로의 감축 뒤에 팽팽하게 자율적으로 조직화된 제국군대, 새로운 질서에 의해 거의 어떤 피해도 입지 않은 관료의 중단되지 않은 권력, 곧 다시 화해불능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으로 전락하는 정당들, 사회적 및 경제적 이해관계들을 대변하는 실질적으로 강화된 집단들, 사려 깊게 보호되고 섬세하며 모든 신분상의 하락을 배상하고도 남는 위신에 대한 다양한 사회계층들의 욕구, 특히 순수한 민주적 타협을 거부한 군주적-보수적 및 민족주의적 반대운동들의 세력 및 영향력 강화: 이 모든 원심적인 세력들이─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공화국의 권력분배를 문제 삼았고 무의식적이지만 상당히 효과적으로 끊임없이 발호하는, 위기의 순간들에 위험스럽게 발생하는 아주 상이한 상대들의 연합으로 결합되었는데, 약한 민주주의 국가는 이들에 대해 충분한 방어수단도, 효과적 통합수단도 갖고 있지 않았다."(78-9)


제2장 의회민주주의에서 대통령제 국가로


"전후 몇 년간의 난제들에 직면하여 불가피한 것으로 보였으나 정부 부처 관료들의 반의회적 활동들에 도움이 된, 각료에게 폭넓은 전권을 양도한 결정은 입법부를 상당한 정도로 약화시켰다." "의회적 공화국의 민감한 구조와 그것을 지탱하는 정당들 사이의 대립들이 흔히 정부형성시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를 초래했기 때문에 곧 성과 없는 연정협상 대신에 그들의 전문지식, 사회적 처지 및 정치적 태도 덕분에 관료층의 신뢰를 보장받은 〈전문가들〉로 구성된 정부를 세우려는 경향이 형성되었다. 이로써 헌법이 그것에 허용한 권력에 도달해 본 적이 없는 제국의회는 통제기관으로서 더욱 강하게 공격을 받았다. 경제적 관계들의 복잡화로 국가가 경제에 점점 더 간섭을 확대하고 정당은 이익단체들의 영향을 받게 됨에 따라 권력은 입법부로부터 국가관료 및 사적 관료의 수중으로 이동하였고 여기서 의회는 더 이상 아무런 통제를 행사할 수 없었다."(86-9)


"의회적 정치구조를 파괴하고 비스마르크-빌헬름적 관헌국가를 복구하려는 그러한 시도들은, 분화된 정당구조 덕분에 정부 형성은 연정의 틀 내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특히 더 위험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불안정한 타협의 기초 위에서 사람들은 의회적으로 약한 내각, 대다수의 경우에 심지어 단지 관용받는 소수내각을 넘어서지 못했다." "정부의 결성은 의회 다수당을 통한 당연한 권력 인수가 아니라 처음부터 별로 안정적이지 못한 연립정부를 창출하기 위한, 일반인들이 알지 못하는 힘겨운 협상을 의미했다. 그러한 협상에서는 실제적인 연정강령뿐만 아니라 장관 자리의 분배도 중요하였다. 야당이 여당을 교체하거나 그 거꾸로 교체하는 관습은 의회의 다수파 구성 상황으로 형성될 수 없었다. 동시에 계속적인 연정구성의 어려움들은 정부의 연속성을 지켜야 한다는 강요와 더불어 이미 일찍부터 정부 구성에서 제국대통령의 기능을 강화시켰다."(90)


"이론적 토론은 항상 재삼재사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와 정당국가적인 실제 사이의 차이를 물고 늘어졌으며, 이 대립들을 너무 낙관적으로 그리고 분별없이 동일시했다." "의회적인 정당국가를 둘러싼 징후적 논쟁은 이미 세계경제 대공황이 발생하기 오래전에 상당한 규모에 달했다. 한 유명한 법학자의 1927년 베를린에서의 총장 취임 연설은 한 사례를 제공한다. 여기서 매우 조심스럽게 권위주의적 국가론의 초안이 구체화되었으며 이것을 대통령제 정부 그리고 특히 파펜 실험의 문필적 및 정치적 지지자들이 수용할 수 있었다. 정당국가에 대한 이 비판 역시 정당이 아니라 전체 인민의 위탁에 결속된 〈인민의 심부름꾼〉으로서의 의원에 대한 〈순수한〉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관점을 칼 슈미트가 동일한 이름의 글에서 (극복해야 할) 〈오늘날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기초〉라고 일컬었으며, 그것이 1919년 독일헌법도 완전히 지배했다."(98-9)


# 정당정치 내의 의원들이 토론이 아니라 파벌들의 결정─책임지지 않는 익명의 권력─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의회적) 정당국가는 극복되어야 한다는 주장


"반동적-군국주의적 및 민족주의-권위주의적 집단들의 비타협적 태도 못지않게 파국적이었던 것은 여기서 새로운 헌법의 구속력 없는 자유주의를 내키지 않아 했고 혁명사건들의 급진적 민주주의의 단초들을 배신당한 것으로 믿었던 사회주의적 성향의 대중들의 실망으로 인한 냉담성이었다. 이렇게 해서 의회는 극단적인 좌·우 급진정당들을 얻었으며 그 강세는 곧 집단들의 자유로운 대결과 건설적인 야당의 여지를 거부했으며 의회적 메커니즘을 결국 치명적으로 마비시켰다." "〈순수하지 못한 다수〉로의 그들의 성장은 의회를 완전한 마비와 지속적 자기해체의 상태로 빠지게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속에서는 초의회적이고 권위적인, 민주적 헌법을 극도로 긴장시키며 결국 파괴하는 조치들만이 통치를 가능하게 했다." "바로 이것이 결국 민주적 틀을 파괴했고 집단들의 끝없이 고조된 적대상태를 갑작스런 폭력적 종말로 몰고 갔다."(108-9)


"이 과정에서 단 하나의 헌법결정의 도입과 확장이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유명한 제48조는 계엄입법과 비상사태입법의 전통에 접속하였다; 그것을 헌법으로 삽입한 것은 국민의회에 의해서 많은 우려들에도 불구하고 단호히 민주적 성향의 의원들 다수의 동의를 얻어 당시 국가의 내·외적 상황에 직면하여 가결되었다." "여기서 제국대통령의 예외권과 비상령권의 삽입은 분명히 (민주주의자였던) 에버트의 인물에 맞추어져 있었고 결코 헌법을 초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위기상황에서 헌법의 온전한 보존과 헌법적 질서의 재건을 위한 수단으로서 의도되었다. 공화국 초기에 제48조의 적용도 이러한 방식으로 수행되었다." "그 당시는 물론 권위주의적 해결책의 가장 용감한 지지자들조차도 이 조항이 언젠가 매년 계속하여 정부의 모든 시도들의 거의 유일한 버팀목이 되고 전체주의적 국가질서로의 이행을 지지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계산하지 못했다."(116-8)


# 힌덴부르크 제국대통령 선출 이후 권위주의적 대통령군주제의 기반으로 해석·활용되었다.


제3장 민주적 공간에 있는 정당들


"유일하게 의회정치를 가능케 했던 정당들의 연정(聯政)은 점점 더 이익단체들과의 연결 및 그들 조직의 진입을 예상해야 했고, 이는 정당들의 내부구조와 기능적 배치를 계속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공화국의 정당구성이 전체적으로 거의 변하지 않은 채 과거 붕괴되었던 군주제 상태에 연결되었다는 사실은 새로운 국가가 지속적 안정을 보일 것이라는 기대에서 가정할 수 있는 것만큼 좋은 형편은 아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왜냐하면 빌헬름 국가의 정당들은 갑작스럽고 결코 예상하지 않았던 혁명에 의해 새롭게 부여된 위치, 즉 임시적인 의회민주주의의 첫 번째 책임자라는 아주 상이한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곧바로 내외적으로 경직화 경향, 즉 군주제적 권위주의 국가에서 정당과 의회가 맡았던, 소극적이고 찬반에서 거의 무의미한 역할에 부응하는 외형과 내용을 채택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143-4)


"가령, 사회의 가장 약한 부류인 〈노동자 계층의 삶의 원칙〉으로서의 철통같은 조직, 수와 조직 면에서 뛰어난, 거의 군대와 같은 결합을 통한 대중의 구조화를 자랑했던 사민당의 전통적 형태들과 탄탄한 결속은 흔들렸다. 그러나 사회주의 운동 내에서 이러한 이질화 과정과 이에 수반한 지도부의 마찰, 그리고 독립사민당(USPD), 스파르타쿠스동맹 및 공산당의 이탈을 가져왔던 극좌파에서의 분리경향 등에 맞서서, 곧바로 사민당 중도파의 조직적 이념적 경직화가 시작되었다. 중도파는 과거 투쟁에서 전수되었던 조직의 내부 원칙에 의존했고, 또한 지도부의 구성뿐만 아니라 외부와 관련한 당의 전술과 당 내부의 통합과정에서도 단호하게 전쟁 전의 전통에 의존했다." "특히 〈반동적〉 제국군대에 대한 불신은 처음부터 공권력 중 군대와 같은 권력요소에 대해서 본질적인 영향력 행사를 방해했고, 이 요소가 결국 우익 쪽으로 향하도록 했다."(144-6)


"바이마르 국민의회에서 계속된 경향, 즉 사민당 의원들 중 절반 이상이 노조 경험을 갖고 있고, 그들 중 3분의 1 이상에게 노조관료가 본업이었다. 설사 그들이 정식으로 당 경력에 연결되지 않고, 부분적으로 주 의회, 지자체 의회 그리고 작은 행정기구에서 일했다 하더라도, 당과 노조간부들의 권력과 정치양식은 꼼꼼한 관료지배의 빛과 그림자 모든 면을 지니면서 의회활동, 즉 당의 의회주의적 스타일에 영향을 주었고 제국의회 원내교섭단체의 전술적 활동을 현저하게 제한했다." "사민당 의원들은 사적 관계를 통해 당 지도부와도 확실하게 결속되어 있었다. 사민당 원내교섭단체의 행동과 주도권은 자주 당론과 의회 외부에서 활동하는 다른 기관의 결정을 선도했다. 거기에 계속적으로 현실적인 개혁적 방향으로 기울었고, 자신들의 조합원들이 사민당 지지자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사회주의 계열 노조들의 영향이 첨가되었다."(152-3)


"긴장의 해결방식과 기존 국가와 사회질서에 대한 사민당의 입장은 다른 민주정당들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현실노선을 추구하는 점진적 사회주의의 참여 하에서 구성된 바이마르 연정의 안정과 유지─이것은 바이마르의 기회였다. 이것 대신 우리는 전통적 야당의 태도에서 벗어나기를 주저하고 당 구조 및 당의 이데올로기적·마르크스적 이상을 새로운 과제에 적응시키는 데 머뭇거리는 사민당의 완고한 망설임을 기록한다. 이는 또한 우파 및 극좌파의 모든 접촉시도를 반대한 민감성과 연결된다. 지금까지 신뢰할 수 있었던 유권자 계층을 잃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이념적이고 조직적인 부동성이 중요한 정치적 결정들을 해야 할 시점에서 우유부단하고 이중적인 그리고 결국은 완전히 수동적인 태도를 결정했다." "이로써 나치가 승리하기 오래전에 이미 공화국 최후의 보루로서의 그들의 권력은 거의 저항 없이 차례로 무너졌다."(161)


# 주요 우파 정당들

1. 독일민족인민당(DNVP) : 반反혁명·반反공화주의 세력들을 주축으로 결집된 정당

2. 독일민주당(DDP) : 공화국의 안정과 자유주의 구축을 우선시한 부르주아 정당

3. 독일인민당(DVP) : 국내정치보다 강대국과의 외교정책을 중시한 부르주아 정당

4. 중앙당 : 반反극단·반反권위주의적 태도로 타협자세를 유지한 가톨릭 기반 정당


"중앙당이 핵심부를 중심으로 아주 안정적으로 그룹화되고 마지막까지 사회적으로 다채로운 〈국민정당〉(Volkspartei)으로 남았던 반면, 독일민주당과 독일인민당뿐만 아니라, 온건한 보수주의적-기독교적 우파와 독일민족인민당 역시 변형과 해체 과정의 소용돌이에 처하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큰 흐름은 사민당의 조직 자체는 흔들지 못했지만 그들의 정치 활동은 마비시켰다. 공산당과 나치당은 이러한 역동성의 양극점이 되었다." "〈독일중간계급 제국당〉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유사 정당들〉 역시 바이마르 정당체제의 이러한 위기적 전개의 테두리에서 일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의 파괴적 효과는 의회소속 정당들의 통합관심을 여론과 유권자의 영역에서 민감하게 교란시켰고─정치적 대립을 화해할 수 없는 개별 이해들의 적대감과 증오의 태도로 변형시킴으로써─다수당을 구성하기 위한 협력을 지속적으로 방해했다."(179)


제4장 전체주의적 정당들의 발흥


"의회 메커니즘을 결국 완전히 절름발이로 만드는 데 성공한 두 정당은─각자 자기 나름대로─1918년 혁명과 관련된 문제 덕분에 형성되고 프로필을 얻게 되었다. 독일공산당(KPD)은 혁명이 의회적인 경로로 들어서고 바이마르공화국의 타협안이 소련식의 발전 과정에 의도적으로 대립적인 방향을 취하게 되었을 때 최종적으로 형성되었다. 여기서 평의회 혁명가들은 다수파사민당(MSPD)의 길에서 이탈해나갔다. 나치당(NSDAP, 민족사회주의 독일노동소속당)은 이에 반해 혁명이 충분히 급진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혁명이라는 사실 자체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했다. 이 사건은 보수적-군주적 집단에 의해 역사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극단적인 민족주의 성향의 특수집단들은 일반적인 야당적 태도를 넘어서서 우선 혁명과 패전의 결과로서 바이마르공화국과의 어떤 전술적 타협에도 반대하는 반(反)혁명적 활동을 전개했다."(183-4)


"독일공산당과 나치당의 형성 과정과 내정적 위치는 일정한 유사성을 보였는데, 이것은 조직형식을 보더라도 확인이 된다." "이들은 민주적 다원주의에 대해서는 철저한 명령구조로, 의회적 타협의 역동성에 대해서는 획일화된 독재 방식으로 맞서고, 연정과 야당의 위치를 주고받는 게임에 기초한 민주적 연속성을 애초부터 봉쇄했다. 그로 인해 민주주의의 자연스러운 내부 운동과정은, 이것은 자유로운 국가 내의 사회 유동성의 정치적 표현인데, 정치적 자유를 결코 훼손하지 않는 합법적 표현 형식에서 제약을 받게 되었다. 동시에 역동적인 정치적 발전은,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민주적 의미에서 다수당 연정이나 야당연합의 형성에 지속성을 마련해 줄 수 있는, 의회정당들의 한계를 넘어서 의회를 초월한 영역으로 치달아, 결국에는 완전히 전체주의적이고 어떤 화해도 거부하는 정치적 구원종교의 영역에로 흘러들었다."(184-5)


"1919년 창설된 코민테른은 주도적 역할을 차지하면서 무엇보다 서방에서 실패한 혁명 대신 러시아 혁명의 영광을 실현하고자 했으며 (독일공산당은) 명백히 모스크바의 도구가 되고 말았다." "공산주의 당 노선의 고립된 성격이 이러한 제한을 통해 그만큼 더 첨예하게 바이마르공화국의 내정적 역동성 한가운데서 드러난다. 이 성격은 1928년 이후 당의 성장, 곧 영향력 증가와 유권자의 바람이 갖는 일정한 고유 비중을 통해서도 거의 변하지 않았다. 공산당의 명령과 복속 구조는 이러한 최악의 경우에조차 견지되었고, 대중적 기반이 확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간부정당으로서의 공산당은 원격조종되었고 종교와 비슷한 형태의 기대내용들에 의해 유지되었으며 호전적인 나치조직과의 경쟁에서 더욱 강화된 바 있다." "그러나 혁명적인 반란시도들이 실패하고(1918~1923) 의회제공화국이 안정화되면서 공산당은 합법적 영향력을 통해서 대중을 얻으려는 방법으로 전술을 바꾸었다."(194-5)


"극단적 저항운동으로서 나치즘은 국민의 정치·사회적 구성에 대한 생각에서만 공산주의와 다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반(反)자본주의적 논리와 혁명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사회질서, 관료적 관헌국가를 전복하기보다는 그것의 보다 철저한 조직화와 계서적이고 명령추종적이며 권위주의적인 기반 및 권력확장을 지향하는 일련의 주장들을 가지고 공화국에 맞서 싸웠다." "나치당은 단순한 반항운동으로서가 아니라 '적개심운동'으로서 시작했다. 군사적 패배와 〈과다한〉 민주적 변혁으로 비로소 정치화된 소수의 실망자들이 그 핵심을 형성했다. 1930년 이후 대중정당의 조직화된 지지층, 특히 간부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자기 신분과 가족 내에서 스스로를 국외자로서 느꼈으며 노이로제가 될 만큼 자존심이 상했고, 균형감각을 갖지 못하고 적응을 잘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밖에도 괴벨스 현상에서 표현된 것처럼 정치적 영향력을 얻게 된 프롤레타리아화한 지식인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201-2)


# 나치운동의 세 가지 뿌리

1.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와 반反의회주의 감정에 기반한 저항

2. 경제적·사회적 위신의 하락을 두려워한 '중간계급의 공포'

3. 청소년의 세대 문제와 낭만주의의 반항적 분위기 이용


제5장 정치적 공간에서의 급진운동


"바이마르공화국 말기에 거의 모든 공공생활 영역의 논의를 지배하였던 '민주주의와 의회주의의 위기'라는 표어는 특히 전통적인 정당의 본질과 기능을 겨냥한 것이었다. 민주적 정당들의 운동능력, 수용능력 그리고 재생능력이 거의 사라져 간 대신에, 낭만적·유기체적인 논리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형식의 정치대표체에 대한 요구는 그만큼 커졌다. 즉, 정당 대신에 '운동' 혹은 '연맹', 사회 대신에 '공동체', 민주적 조직 대신에 권위주의적 종자구조, 의회주의적 조정 대신에 혁명적 투쟁, 자유로운 결정 대신에 무조건적 복종, 다원주의 대신에 완전한 통합 등이 새로운 형식으로 자리잡아갔다. 그 배후에는 특히 '낡은 것'의 지배적 계서제(階序制)에 대한 전반적 저항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저항은 세대 문제가 표출된 것으로 초시대적 성격을 지녔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전후 상황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하여 그 정도가 특히 강했다."(239-40)


# 종자구조(從者構造, Gefolgschaftsstruktur)

'종자'(Gefolgschaft)란 본래 영주, 군주 혹은 귀족과 종자 사이에 신뢰와 복종에 기초한 관계로, 게르만 법률의 본질적 요소인 commitatus 및 이로부터 파생된 모든 현상들을 지칭하는 용어. 나치는 이 개념을 독일사회의 모든 영역, 특히 노사관게에 도입하여 지도자-종자의 도식을 발전시켰다.


"나치는 권위주의적 정치공동체의 이상에 가장 분명하고 설득력 있는 형식을 만들어 냈으며, 모든 본질적 특징들을 통일시키는 듯이 보였다." "이는 합리적 논리를 비합리적 비전에 기초한 신념공동체(신앙연합체)의 신비로운 연대감으로 대체하고, '지도자' 속에 체현된 '일반의지'를 통하여 무미건조하고 역겨운 일상정치를 조화로운 '민족공동체'의 영역으로 끌어올리겠다고 약속한 조직원리들이었다. 여기서 '낡은 것들'에 대한 청소년─청소년은 그들에게 전쟁에 대한 책임('좌파'단체들이 그랬다) 혹은 혁명에 대한 책임(그 '민족적' 반대파들이 그랬다)을 덮어씌웠다─의 저항은 조직적으로 표현되었다. 이 슬로건들은 급진정당들의 (젊은) 연령 구성으로 매우 효과가 있었다. 이 슬로건들은 '상대화 경향이 있는 지식'보다는 교양에 희의적인 '행동'을 중시하였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대학교 및 대학생의 활동영역에서도 일찍 호응을 얻었다."(246-7)


"활동적인 전쟁세대 및 전후세대, 〈특히 참전자들〉의 모집에서 외관상 군대와 유사한 대형과 엄격한 기술적 구성으로 반대파의 준군사조직들에게 매우 효과적인 경쟁자가 된 것은 지도자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단체가 아니라, 국가에 충실하고 헌법을 보호하는, 심지어 외국에 지부를 두기까지 한 대중조직이었다. 그들의 투쟁은 일차적으로 반공화주의적 정당들과 그 준군사단체들의 파괴활동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투쟁은 또한 해체되던 종파 집단 및 단체의 민족지상주의적·권위주의적인 유토피아를 파괴하는 데에도 유용했다. 이 단체들은 역설적으로 제국기치(참전자 및 공화주의자연맹)가 지켜낸 상태를 극복한 후에 본래 실천하고자 했던 규정을 넘어서 낭만적·영웅주의적인 지도자 국가라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무인지대(Nienandland)로, 민족공동체라는 초민주적 독재의 비전으로 나아갔다." "이 소수파는 결국 (공화국) 말기에 정당정치의 개편으로 〈민족적 반대파〉에 흡수되었다."(268-9)


"제국기치는 공식적으로 350만 명의 회원이 속했으나, 시대의 민주주의에 걸맞은 어떤 것을 갖지 못했다. 이 조직의 존재는 정치적 반목의 격렬함과 국내정치에서 공화국이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음을 의미했다." "나치 돌격대(SA)는 (제국기치가 해체되면서) 점차 비워진 공간 속으로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돌격대는 거리에서도 나치당의 권력성장이 존중받도록 배려했고, 폭력과 테러로 시민을 협박할 수 있었다. 바이마르공화국 말기에 집회, 행진, 가두투쟁 등 공공영역에서 거의 유일하게 강력한 반(反)제국기치 세력이 된 돌격대는 오랫동안 철모단의 대중운동 그늘에 가려져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 내부에서도 결국 당군대(黨軍隊)는 〈민족적 반대파〉의 모든 연합단체들과 전사단체들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과 더 구체적인 목표를 관철시켰다. 히틀러는 돌격대를 나치당의 〈물리적〉 권력도구로 조직하여 투입하고자 하였다."(269-70)


제6장 이데올로기와 사회구조


"19세기의 독일 자유주의는 국내정치를 형성하고 개혁할 수 있는 힘을 민족주의 사상에 빼앗겼으나, 사회주의의 발전에 그 흔적을 남겼다. 19세기는 민족주의 사상이 특히 서방 민주주의의 경험과 제안을 자신만만하고 오만하게 차단한 과정이었다. 게다가 독일인들은 전쟁의 패배를 예상하지도 못했고, 패배를 인정하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그로부터 국내외 정책에 파생된 모든 결과들을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차단 과정은 독일인들의 저항으로 더욱 심화되었고, 결국 거대한 정치적 흐름들 사이의 논쟁을 민족주의적 고립이라는 좁은 공간으로 몰아넣었다. 여기서 이 흐름들은 중재되지 못하고, 따라서 거의 불가피하게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게 서로 충돌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신중한 배상이행 정책의 대표자들조차 (자신의 입장에 대한) 공개적 고백으로부터 국제관계의 냉정한 평가로 물러섰다. 급진적인 이데올로기들은 공화국의 거의 모든 국면에서 (활동)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다."(284-5)


"반유대주의는 독일에서 최대의 정치적·세계관적 관철능력을 발전시켰는데, 경제적·사회적 구조에 대한 언급만으로는 이 사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이 사실은 오히려 반유대주의가 전체주의적 행동계획과 구성계획을 통해서 민주적 사회의식 및 국가의식을 파괴하는 데서 차지하는 전술적·전략적 중요성을 증명해 준다. 전체주의적 운동이 적과 동지라는 극단적 이데올로기를 통하여 사회적, 정신적, 종교적으로 위기의식에 휩싸인 당대인들에게 제공한 것은 〈속죄양의 철학〉이라는 편안한 탈출구였다. 이는 불쾌감과 실패, 공포와 분노의 근거를 잘 묘사하여 손쉽게 특정의 소수 그룹에 뒤집어씌우려는 아주 오래된 심리적·의식적인 욕구였다. 모든 박해의 기반이 된 이 욕구는 결국 위기의 탈출구로, 문제를 극도로 단순화시킨 사람의 수중에 있는 가장 예리한 무기가 되었다. 여기서 실망, 적응의 어려움, 현실적인 문제의 부정, 그리고 이해할 수 있는 비이성적 공격성 등은 증오감으로 귀결되었다."(289-90)


"나치즘은 민족지상주의적·전체주의적인 정당으로서보다는 경제적 현실과 사회적 위신 요구 사이에서 갈기갈기 찢어진 중간계급 선박의 이른바 조난구호자로 나섬으로써 대중운동이 될 수 있었다." "중간계급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현존하는 신분제적 감정의 영역, 즉 사회의식의 영역에서 긴장된 바이마르공화국의 경제상황, 더 대규모의 경제정책적 융합 및 기능적 종속 경향 등의 압력 아래 있었다. 이 계층은 프롤레타리아화의 위협에 대항하는 보루, 경제적 상태와 사회 이데올로기적 요구 사이에 놓여 있는 격차의 해소책, 신분제적 특수 존재─필요하고 가능하다면, 위기에 책임이 있는 실망스러운 민주주의를 넘어─의 구제자를 찾았다. 《공산당 선언》의 저자들이 관찰했듯이, 그런 추동력으로부터 성장한 것은 혁명적 이데올로기보다는 오히려 보수적 이데올로기였다. 전투적 중간계급의 이데올로기는 이 계층의 지속적인 몰락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 되었다."(300-1)


"이제 가장 급진적인 반대파 정당이자 동시에 가장 시끄러운 반공운동 조직인 나치당을 선택한 사무직원, 부르주아지, 농민 등은 아직 거의 초안도 잡히지 않은 나치국가에 '찬성한 것'이 아니라 우선 현존하는 국가에 반대하기로 결정했다. 민족주의적 혹은 신분제적이고 낭만적인, 반자본주의적인 구호 혹은 계급투쟁에 적대적인 구호를 동원해서 달성했건 간에, 나치당은 중간계급의 거대한 정당이 되었다. 나아가서 나치당은 새로운 (비)투표자, 자포자기에 빠진 실업자들과 본능적 확신에 찬 기회주의자들에게도 손을 뻗칠 수가 있었다. 나치당은 특히 그 경제적 토대를 빼앗긴 계층의 위신 욕구를 채워 줄 신분제적 질서에 대한 희망을 품게 했다. 〈민족적〉(national)이란 이 중간계급적 의미에서 반(反)프롤레타리아적인 것을 뜻했고, 〈사회주의적〉이란 반(反)금권정치적인 것을 의미했다." "신분제 원리는 평준화 위협에 대한 균형추로서 사무직원들과 관리계층에게도 유인력을 가졌다."(315-6)


제7장 관료제 문제


"왕조적 절대주의가 만들어낸 직업공무원 계층은 귀족과 더불어 신분제 국가의 붕괴 이후에도 계속 존속했으며, 인민 전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사회집단이었다. 그런데 이 사회집단을 의회민주주의와 결합시키는 일은 그들의 강력한 신분제적 결속으로 처음부터 방해를 받았다. 비스마르크 시기에는 프로이센 내무부장관이었던 푸트카머의 조치를 통해 공무원제도의 절대주의적 개혁이 이루어졌으며, 이어 전통적으로 계몽된 그리고 여러 방면에서 봉건제에 적대적이었던 이 계층의 태도는 카스트의 계서제적 폐쇄성으로 대체되었다. 또 이 카스트는 종종 기괴하게 보일 정도로 습관과 세계관이 동일했고, 특히 보수적 당국의 정치문제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통일된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결정권을 갖는 군주는 엄격하게 조직된 행정 계서제의 꼭대기에 있었다." "〈공무원 계층의 탈정치화〉 요구는 바로 이 시기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328-30)


"공무원 계층이 국가의 기본적 제도로서 어떻게 헌법의 전체적 연관관계 속에 편입될 것인가라는 문제 앞에서, 우리는 관료계층의 가장 영향력이 강한 핵심집단이 민주주의 본래의 문제점들에 거의 입장을 표명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이 집단의 경향과 관심사는 본질적으로 정치적 문제점들을 행정기술적 과제로 환원시키고, 과도한 전문화를 통하여 법을 〈법학적 대수표〉(Logarithmentafel)로 만들어 입법부를 회피하는, 간단히 말해서 모든 생활을 명령에 끼워 넣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의회의 통제와 내각 상급자들의 취약함은 주로 이러한 기술적 사고방식을 강화시켰는데, 이 사고방식은 다양한 정치적 음모, 심지어는 〈관료의 사보타지〉에 공간을 제공했다. 거기에는 또 기술적 능력을 기반으로 한 질서의 권위주의적 국가상, 즉 계서제로 등급화된 관헌국가의 형식적 신격화가 사회적으로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그리고 유동성이 있는 국가 구상보다 더 가까이에 있었음에 틀림없었다."(336-7)


"민주주의에서는 행정관료 문제와 관련하여 〈사법부의 정치화〉라는 표제어로 종합된 현상들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 애매한 개념은 사법부가 〈정치적인 것〉의 영역에 속한다는 인식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것이 불명료하다는 것은 기준들의 불확실성과 혼란을 상징한다." "본래 사법부는 직접적인 국가기구이자 관료적인 실행기구라는 이중적인 기능 덕택에 애매한 중간입장을 취했고, 여론 형성과 조정에서 특히 효과적인 심리적 도구로 작동했다." "모든 법질서는 그 형성으로 인해 관련 공동체에서 권력의 배분에 직접 영향을 미치므로, 모든 법체계에서 사법부는 남용될 수 있다. 이것은 바이마르공화국에서도 현저했다. 거기에 영향을 미친 것은 특히─전문적인 특수화 경향과 학문적 법률가 신분의 사회적 폐쇄성 경향 속에 각기 포함된─재판관 권력의 증대였다. 완고한 인사정책은 정치적 과정과 헌법의 발전 속에 표현된 법 개념의 약화와 해체를 더욱 심화시켰다."(348-50)


"자유주의적, 평화주의적 혹은 사회주의적 정치가들과 정치평론가들은 검은 제국군대의 불법적 기구들 및 그밖의 군국주의적 우익급진주의 현상들을 비판했다. 그런데 이 모든 비판이 반역으로 처벌받았던 반면에, (반란자 처벌을 위한) 특별재판소의 재판(Feme-Prozess)에서 (바이에른의 우익정권 내지 히틀러 반란사건이) 놀라울 정도로 가볍게 처벌되었다는 사실은 상당히 일방적인 것이었다. 나치 장교들에 대한 라이프치히의 반역죄 재판에서 히틀러를 '증인'으로 출석시킨 것, 재판 자체의 실행, 주심에서 제국재판소 검찰관의 이해할 수 없는 태만 등은 사법관료 수뇌부의 정치적 취약성 혹은 약점을 증명했다." "그러한 현상들의 정치적 영향은 결국 극히 무의식적으로도 조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 사건에 대한 일방적인 판결들은 증오심에서 부당하게 취급된 사람들, 회의적인 경멸과 권력현실적인 사법부의 평가를 통해서 이득을 본 자들로 채워져 있다."(354-5)


제8장 경제정책적 권력구조


"바이마르공화국의 경제적 권력구조는─정당에 대한 엄청난 영향력 행사와 정치적·경제적인 인적 연합체제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관료의 영향력 아래 있던 각종 정부 위원회들의 복잡한 연결과─경제정책의 협상과 결정에 직접적인 영향력 행사를 통해서도 〈전문가 이데올로기〉로 위장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민주적으로 은폐된 그리고 관료적이고 〈전문가적〉으로 정당회된 직접적인 이니셔티브를 통하여 정치적 공간에서 찾아내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민주적 기구들에 의한 최소한의 통제도 빼앗긴 상태였다. 정치에서 이익정치로, 그리고 이익정치에서 정치로의 이 지속적인 변화는 집중 과정, 즉 (연합철강이나 IG 파르벤 같은) 독점적 카르텔 및 콘체른의 형성 과정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 자유주의의 이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집중 과정은 정치적·경제적 연결 과정들을 떠받쳤고, 여기에 과두제적 성격을 부여했다."(387-8)


"카르텔과 콘체른 체제는 모든 경제생활을 자신과 정치의 관계 속에서 과두제적으로 구조화된 조직들과 영향력 있는 이익적 결합들의 네트워크로 덮어씌웠다." "이에 대한 실질적 조치들은 매우 약했으며, 특히 민족정책적 관점에 의해서 방해를 받았다. 만약 광범위한 반(反)트러스트 입법에 대해서 한 번도 진지하게 말할 수 없었다면, 여기에 기여한 것은 공산당과 부분적으로는 사민당 측에서 자본주의의 이러한 〈최후의 과잉〉이 지닌 불가피성에 대한 결정론적 확신이었다. 특히 노동조합과 사민당 온건파에게서는 희망적인 견해가 발전될 수 있었다. 즉, 이 단계에서 자본주의는 원하지 않았지만 자유경쟁을 포기하고 사회주의적 계획경제를 준비했다는 것이었다. 나아가서 사민당의 지도적인 경제이론가는 1927년에 현존하는 경제에서는 모범적인 민주주의적 경제체제를 이끌어내기 위하여 국가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389-90)


"〈독점 자본주의〉의 경제적·합리적인 자기 정당화는 그에 대한 자유주의적·경제적인 반론 뿐만 아니라 사회정책이나 정치 일반과 관련된 반론에도 완고하게 그러나 엄청나게 효과적으로 대응하였다. 이는 합리화운동의 전반적인 틀 속에서 카르텔 운동과 콘체른 운동이 갖는 경제적 효율성에서 출발하였고, 다음에는 이윤, 임금, 가격 등이 발전과 인구에 대한 배분을 고려하였다. 반면에 이 자기정당화는 그것이 정치권력의 배분에 미치는 영향 문제를 무시하였다. 세계경제 대공황의 발생과 전개과정은 여기서도 경제와 정치의 밀접한 결합을 보다 더 분명하게 조명해 주며, 결국 경제 체제에 비해 정치 체제가 허약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제 이 경제 체제는 구조적·주기적 원인으로 발생한 각종 어려움들을 정치 수준으로 이동시켰고, 아래로부터, 즉 해고된 노동자들, 사무직원들, 소상점주들, 탈출구가 없어 보이는 실업으로부터 민주주의적 메커니즘을 흔들리게 하였다."(392-3)


제9장 제국군대


# 제국군대(Reichswechr)의 세 가지 뿌리

1. 베르사유 조약이 가한 압도적인 구속력

2. 1918년/1919년 독일의 혁명적인 정치 상황

3. 제크트 장군


"독일 정당들 중에서 비무장 화해정책을 가장 선호하였던 사민당이 1919년 당시 재임 중이던 바우어 내각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평화군을 위한 예비위원회〉를 설치함으로써 평화조약에 서명한 지 불과 일주일 후에 새로운 제국군대의 재건을 위한 첫 조치를 취한 것도 바로 이 내각이었다." "새로운 군대가 납세자들의 희생으로 군사적으로 쓸모없이 단순한 병사놀이라는 부정적 평가를 받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이 베르사유 조건의 틀을 넘어서야만 했던 것이다." "사민당의 상대자들은 정부에 결여되어 있던 것 모두─명확한 목표 설정, 단호함, 결연함 그리고 경제적으로 강력한 주민계층의 후원─를 예전에 제국장교단의 형태로 더욱더 많이 보유하였다. 제국장교단은 1918년 11월의 붕괴로부터 놀라울 정도로 빨리 회복되었으며, 특히 〈임시 제국군대〉의 건설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증명되었다."(418-9)


"프로이센-독일제국에서 장교단은 경제적으로가 아니라, ① 위신에 맞게 사회계서 피라미드의 최정상에 위치한 군국주의화된 사회질서와 ② 개인적 충성에 기초한 왕조와의 유대라는 두 가지 중심축에 의거했다." "그 질서 속에서 장교단은 〈제1신분〉, 즉 특권적인 엘리트였다. 게다가 장교단은 나머지 사회 계층에 대해서도 군국주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주지하다시피 이 체제는 이미 프로이센 왕조에서 자유주의자들의 격렬한 공격을 받았고, 제국 시기에는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계승되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압력 아래서 장교단은 공격받았던 왕조와 밀접히 결합되었으며, 그리하여 프로이센-독일 군사체제의 두 번째 접점이 형성되었다. 장교단은 자유주의자들의 헌법선서 요구에 맞서 병사들에게 더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왕조에 대한 개인의 신뢰에 기반을 둔 유대를 강력히 장려하였다. 이는 주로 귀족적인 장교단 내에서 여전히 생생한 봉건적 미래상과 연결될 수 있었다."(421-3)


"(군부가 주도한 카프쿠데타의 실패는) 곧 제크트의 시기가 도래했음을 의미했다. 제크트는 이제 군지휘부의 책임자 자리를 찬탈했고, 제국군대 재건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대기주의적인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여기서 첫 조치로서 광범위한 정치적 야망을 동시에 포기하면서 전통적인 지침에 따른 군대의 건설이 주목을 받았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현존하는 정권과의 타협이 이루어졌다. 이 타협에서 정권은 군지휘부에 있는 장교단을 승인하는 한편, 군대의 재건에 자유재량권을 보장해주었다. 정부는 군정책 영역에서 이렇게 보장된 자율성에 대한 대가로 장교단으로부터는 공식적인 충성선서를 받았고, 또한 정치적으로 더 이상 활동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받아냈다. 제국군대는 공식적으로 정치무대에서 물러났으며, 〈비정치적〉임을 선언하였다." "이로써 장교단과 국가 사이의 이익 유대를 재건시키려는 시도는 중단되고, (일종의 휴전협정 같은) 임시변통적인 해결책으로 대체되었다."(434-5)


"(군사문제에서 의회를 배제하고자 했던) 제크트의 목표는 국방부장관과 육군지휘부 사령관 사이의 관계를 역전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국가법적인 의구심이 있었으므로, 그는 〈명령권〉(Befehlsgewalt)과 〈지휘권〉(Kommandogewalt)에 대한 어느 정도 세련된 구별법을 이용하였다. 즉, 후자(지휘권)는 육군지휘부 책임자에게 속하는데, 이는 제국군대의 모든 부대와 기관에 대한 최고명령권 및 장교인사에 대한 결정적인 영향력을 포함해야 할 것이었다. 또한 전자(명령권)는 장관의 소관사항이나 본질적으로는 행정권에 한정되어야 할 것이었다. 이처럼 국방부를 〈명령실행 참모부〉와 행정당국으로 나누려는 노력은 제크트의 요구로 그 정치적 중요성을 획득했다. 그에 의하면 육군지휘부의 사령관은 〈어떠한 정치적 속박도 없이 무조건적이고 단독으로···〉 제국군대의 이익을 대표해야 하는 반면에, 국방부 장관은 〈무엇보다도 군부대의 정치적 혼란을 멀리할 수 있어야만〉 했다."(439-40)


"국방부장관 지위의 약화는 군지휘부의 책임자가 내각회의에 참석하고 특히 제국대통령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바이마르 헌법에 의해서 강력해져 거의 군주제적인 부가물로서 제공되었던 대통령의 지위는 일찍이 제국 군지휘부의 주목을 받았고, 또 여기서 장교단의 의도대로 변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나는 듯했다. 따라서 제국군대를 특히 대통령과 결합시키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군사영역으로부터 그것을 넘어서서 대통령에 이르는 직무상의 위계체계에서 이른바 〈직접적인 군사적 보고의 길〉이라는 특별한 통로가 설치되었는데, 이는 군 지도부의 책임자가 국방부장관과 총리를 우회하여 직접 대통령에 이르는 길이었다. 이 길은 공식적으로 군사적 기술적인 문제의 논의에만 이용되었으나, 진행 중인 사안이 중요할 경우 장관에게 알리지 않고서도 이용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군 지도부의 책임자가 어느 정도의 정치적 영향력을 전개할 수 있었다는 것은 금방 명백해진다."(4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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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에 붙이는 주석
제바스티안 하프너 지음, 안인희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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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히틀러는 정확히 56년(1889-1945)을 살았다. 생애 전반 30년과 그 뒤 26년 사이에는 무어라 설명할 길이 없는 심연이 놓인 것처럼 보인다. 30년 동안 무엇 하나 변변치 않은 실패자였다. 그런 다음 갑작스럽게 지방의 유명 정치가가 되는가 싶더니 마지막에는 전 세계의 정치를 뒤흔드는 인물이 되었다." "히틀러의 생애를 가르는 단면은 횡단면이 아니라 길게 가르는 종단면이다. 1919년까지는 허약함과 실패, 그리고 1920년 이후로는 힘과 업적이라는 식으로 갈라서는 안 된다는 얘기이다. 그보다는 이전과 이후를 막론하고 정치적 삶과 체험에서의 비상한 집중도와, 개인적 삶에서의 정도 이상의 빈약함으로 나누어야 한다. 전쟁 전에 불확실한 보헤미안 생활을 할 때도 그는 마치 가장 중요한 정치가인 양 정치적 시대사건Zeitgeschehen 속에서 살고 움직였다. 그리고 뒷날 총통으로 있을 때도 사생활 면에서는 출세한 보헤미안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삶의 결정적 특징은 단조로움과 1차원성이다."(28-9)


"히틀러에게는 성격이나 개성에서 발전도 성숙도 없다. 그의 성격은 일찌감치 확정되었다. 아니 압류되었다고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놀랍게도 언제나 똑같은 자리에 머물렀다. 그 무엇도 덧붙여지는 것이 없다. 무엇인가를 받아들이는 성격이 아닌 것이다. 부드럽고 사랑스럽고 화해하는 요소는 모두 결여되었다. 자주 수줍음처럼 작용하는, 접촉을 꺼리는 기질을 온건함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렇다. 긍정적인 특성들─의지력, 용기, 부지런함, 강인함 등─은 모두 '경직된' 면에 속한다. 부정적 특성들은 가차없음, 복수욕, 신의信義 없음, 잔인성 등이다. 게다가 아주 처음부터 나타나는 것으로 자기비판 능력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히틀러는 평생 동안 그야말로 자기 자신에만 푹 빠져 지냈으며, 아주 어린 시절부터 생애 마지막 날까지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히틀러 숭배에서 히틀러는 숭배의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최초이자 가장 오래도록 충실한 신도였다."(34-5)


# 히틀러의 정치적 전기

1. 일찌감치 삶을 대체하여 정치에 집중

2. 최초의 (아직은 사적인) 정치 활동. 오스트리아에서 독일로 이민(1913년)

3. 정치가가 되기로 결심(1918년 11월 혁명 이후)

4. 대중연설가로서 자신의 집단최면 능력을 발견함(1920년 2월 24일 첫 대중연설)

5. (모두가 기다리는 기적을 행할 자인) 총통이 되기로 결심

6. 개인적 기대수명에 맞추어 정치 시간표를 짜기로 결심(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자신의 삶의 시간과 동기화)

7. 자살 결심(정치적 삶이란 전부 아니면 무無의 문제)


성과


"정권 획득 이전에 히틀러는 오로지 선동가라는 명성만을 얻었었다. 대중 연설가로서, 그리고 대중 최면술사로서의 성과들은 논란의 여지가 없었고, 1930~1932년에 절정에 이른 위기의 기간에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진지한 권력 후보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가 권좌에 올라서도 자신을 지켜내리라고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통치는 연설과는 다르다고들 했다. 또한 히틀러가 연설에서 통치자들에게 과격한 비난을 퍼부으며 모든 권한을 자신과 자신의 당을 위해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모순을 고려하지 않은 채 온갖 종류의 불만을 가진 사람들에게 맞장구를 쳐대면서, 당시 가장 중요한 근심거리인 경제 위기와 실업 문제에 대해 어떤 대책을 가지고 있는지 구체적인 계획을 전혀 내놓지 않았다는 것도 눈에 띄는 일이었다." "그런 만큼 그 사람이 1933년 권력을 장악한 이후, 매우 활력이 넘치고 발상이 풍부하고 능률적인 활동가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심리적 반작용이 더욱 컸다."(61-2)


"1933년 이전에도 히틀러의 관찰자와 비평가들이 조금이라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면 연설 재능 말고도 한 가지가 더 눈에 띄었을 것이다. 즉 그의 조직 능력인데, 더 엄밀히 말하자면 대단한 업적과 성과를 낳을 수 있는 권력 기구를 만들고 지배하는 능력이었다. 20년대 말의 민족사회주의당은 오로지 히틀러의 작품이었고, 30년대 초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기도 전에 이미 조직력이라는 면에서는 다른 모든 정당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20년대 히틀러의 두 번째 작품은 내전용 군대인 돌격대SA로서, 당시의 다른 모든 정치적 전투 기구들은─민족주의 기구인 철모단, 사회민주당 기구인 제국기, 심지어는 공산당 기구인 붉은전사단까지도─여기 비하면 절뚝거리는 속물 단체처럼 보일 정도였다. 돌격대는 전투 열의와 돌격 능력에서 다른 모든 단체를 훨씬 앞섰으며, 잔인성과 살인 의욕에서도 당연히 앞섰다. 오로지 돌격대만이 진짜로 두려운 대상이었다."(62-3)


"30년대 중반의 경제기적이 정말로 히틀러가 이룬 업적인가? 이런저런 반박을 예상할 수 있으나 그래도 이 질문에는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 히틀러가 경제나 경제정책 면에서 완전 문외한이라는 말은 맞다. 경제기적에 발동을 건 몇 가지 발상들은 대부분 그의 생각이 아니었고, 당시 모든 것을 좌우한, 대단히 위험한 재정적인 묘기는 분명히 다른 사람, 곧 그의 '재정 마법사'인 히얄마르 샤흐트의 공로였다. 하지만 샤흐트를 데려다가 먼저 제국은행의 수장으로, 이어서 경제장관으로 일하게 한 사람이 히틀러였다. 그리고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전임자들이 주로 재정적 측면의 온갖 고려 끝에 막은 경제 활성화 정책들을 서랍에서 꺼내 작동시킨 사람도 히틀러였다. 세액공제부터 금속 가공 연구소 어음, 근로봉사부터 고속도로에 이르기까지 여러 정책들이 나왔다." "그는 경제가 지금 이 순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아챌 만큼 정치적 본능을 지녔다."(66-7)


"경제기적이 가장 인기 있는 히틀러의 업적이었지만, 통치기의 첫 6년 동안 독일의 재무장과 군비확장을 이룬 것도 똑같이 센세이셔널하고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히틀러가 총리가 되었을 때는 현대적인 무기도 공군도 없이 그저 10만 명의 군대뿐이었다. 1938년에는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군대와 공군력을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믿기 힘든 업적이다! 군사기적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보상감과 민족주의적 자부심을 일깨웠다. 이 또한 바이마르 시대에 어느 정도의 사전 작업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고, 게다가 개별적으로는 히틀러의 세부 작업이 아니라 군 지도부가 이룩한 엄청난 성과였다. 하지만 히틀러가 명령을 내리고 영감을 주었다. 군사기적은 히틀러의 결정적인 자극이 없었다면 경제기적보다도 더욱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임기응변에 지나지 않은 경제기적보다 그가 훨씬 더 오래 마음에 품었던 계획과 의도에서 나온 일이기도 했다."(68-9)


"히틀러는 라우슈닝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어째서 우리는 은행과 공장의 사회화 따위가 필요한가. 만일 사람들을 확고하게 하나의 규율 안에 집어넣고 거기서 나올 수 없게 한다면, [은행과 공장의] 사회화라는 게 대체 무슨 소용인가. ······ 우리는 사람을 사회화한다.〉 이것은 히틀러 민족사회주의[나치즘]의 사회주의적 측면이다." "인간이 노동에서 소외되는 것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서 소외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목적이 인간의 소외를 없애는 것이라면 인간의 사회화가 생산수단의 사회화보다 이런 목적을 훨씬 더 크게 달성한다.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부당함을 제거하는 정도이다. 그것도 지난 30년 또는 60년의 세월 동안 입증된 바로는 효율성을 대가로 지불하고 얻는 이점이다. 하지만 인간의 사회화는 실제로 소외를, 그러니까 대도시에서의 소외를 제거하는데, 이 경우 개인의 자유를 대가로 지불해야 한다. 자유와 소외란 동전의 양면이고 공동체와 기율도 마찬가지다."(79-81)


성공


"히틀러의 모든 성공은 1930년부터 1941년 사이 12년 동안에 일어났다. 그 이전, 이미 10년이나 계속된 정치 경력에 성공이란 없었다. 1923년의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고, 1925년에 새로 정비한 정당은 1929년까지 중요하지 않은 소수 정당이었다. 1941년 이후로도, 실은 1941년 가을부터는 성공이란 전혀 없었다. 군사적 시도는 모두 실패하고 패배를 거듭했으며, 동맹국들은 떨어져나가는데 적진인 연합군은 연합을 유지했다." "원한다면 찾아볼 수는 있지만, 역사에서 이와 비슷한 것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상승과 하강, 그렇다. 성공과 실패가 번갈아 나타난다. 순수한 실패, 순수한 성공, 그런 다음 다시 순수한 실패라는 세 단계를 이렇게 분명히 나눌 수 있는 경우는 없다. 동일한 사람이 오랫동안 겉보기에 희망이 없는 무능력자, 그런 다음엔 거의 그만큼의 기간동안 겉보기에 천재적인 능력자, 이어서 다시 이번에는 겉보기가 아니라 진짜로 희망이 없는 무능력자. 이것은 설명을 요하는 일이다."(95-7)


"그가 편안해져서 채찍을 느슨하게 하거나 떨어뜨렸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그의 에너지와 의지력은 공적인 활동의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똑같이 놀라운 것이었고, 그의 지배력은 총리관저의 벙커에서도 절대적인 것이었다. 마지막 순간 그의 통치 영역은 오로지 이 총리관저에만 한정되었지만 그 순간에도 여전히 절대적이었다." "성공에 익숙해진 사람이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운명에 도전하려는 오만함을 드러냈다는 주장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히틀러의 몰락을 불러오는, 러시아를 공격하기로 한 결정은 성공에서 자양분을 얻은 오만함에서 갑자기 떠오른 발상이 아니었다. 이 공격 계획은 아주 오래 전부터 거듭 숙고하여 결정된 히틀러의 주요 목적이었다." "히틀러가 과대망상에 빠져 있었다면 원래 처음부터 그랬다." "1923년의 쿠데타 실패가 그가 수업을 한 유일한 사건이었다. 다른 경우에서는 거의 섬뜩할 만큼 늘 완전히 똑같은 사람이었다. 그의 정책은 1925년부터 1945년까지 완전히 동일하였다."(97-9)


"이로써 우리는 뜻밖에도 히틀러의 성공 곡선의 비밀을 풀 열쇠를 손에 쥐게 된다. 이 열쇠는 히틀러 자신의 변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히틀러가 상대한 적들이 변한 것과 적들 자체가 바뀌었다는 점에 있다." "성공의 경우는 언제나 양측이 있게 마련이고, 한쪽의 성공은 다른 쪽의 실패가 된다." "히틀러는 단 한 번도 더 강하거나 질긴 적을 상대로 성공을 쟁취한 적이 없었다. 20년대 말의 바이마르 공화국과 1940년의 영국만 해도 그에게는 너무 강한 적이었다. 우선 그는 약한 자가 강자를 상대할 때 이용하는 교묘하고 풍부한 발상이나 기민함을 갖지 못했다. 1942~1945년의 연합군에 맞선 전쟁에서 연합군의 내부 갈드을 이용하여 그들을 갈라놓겠다는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반대로 히틀러는 여러 가지로 부자연스러운 동서 연합군이 서로 단합하는 데 누구보다도 기여한 바가 많았고, 무모한 고집으로 모든 접합점이 터지려는 연합군이 서로 달라붙어 있도록 가능한 온갖 일을 다 했다."(100)


"그에 반해 성공은 모두 정말로 아무런 저항 능력이 없거나 의지가 없는 적들에 맞서서만 거둔 것이었다. 국내정치에서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이미 속이 다 비어서 실질적으로 죽어가고 있을 때 죽음의 일격을 가했다. 국제적으로는 1919년의 유럽 평화조약이 이미 안에서부터 흔들려서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때 끝장을 냈다. 두 경우 모두 이미 쓰러지고 있는 것을 쓰러뜨린 것에 지나지 않았다. 30년대에 히틀러는 철저히 허약한 적들을 상대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후예 자리를 놓고 히틀러와 맞서던 독일의 보수주의자들은 전략도 없고, 히틀러에 맞서 저항할까 연합할까를 두고 속으로 흔들리면서 자기들끼리 싸우던 사람들이었다. 마찬가지로 30년대 후반의 영국과 프랑스 정치가들이 저항과 동맹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을 때 히틀러는 외교적 성공을 쟁취했다. 1930년의 독일, 1935년의 유럽, 그리고 1940년의 프랑스의 상태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히틀러의 성공은 기적이라는 후광을 잃게 된다."(101)


"외교 분야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1919년 파리에서 전쟁 이전 유럽의 4강 체제가 무너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은 전쟁으로 인해 붕괴되고, 러시아는 유럽과의 협력에서 배제되었다. 그로써 러시아는 자연스럽게 승전국 연합에서도 배제되었다. 동시에 1917년 러시아를 위해 전쟁에 뛰어들었던 미국은 승전국 연합에서 물러나면서 옛날 동맹국들의 평화협정에 동참하기를 거부했다. 따라서 평화협정은 처음부터 실질적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담당했다. 마치 바이마르 공화국이 바이마르 연합을 이룬 세 개 정당만으로 유지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두 경우 모두 기반이 너무 약해서 전체를 다 감당할 수가 없었다. 본질이 그대로 유지된 독일 제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힘만으로 베르사유 조약에 명기된 제약들에 붙잡아두기에는 너무 강했다." "더욱이 조약의 모욕적인 취급 방식은 독일을 수정주의와 보복주의의 길로 몰아넣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이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미친 듯이 이 길로 나아가도록 만들었다."(118)


오류-잘못된 생각들


"히틀러의 역사적·정치적 세계상, 곧 '히틀러주의'를 짤막하게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역사적 사건을 담당하는 존재는 오로지 민족 또는 종족(인종)이다. 계급도, 종교도,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의 국가도 아니다. 역사는 〈한 민족의 생존을 위한 싸움의 과정을 서술한 것〉이다. 또는 선택하기에 따라서는 〈모든 세계사적 사건은 종족의 자기보존 충동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는 〈원칙적으로 목적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으며, 그 목적은 인간의 종족적 생존의 유지라고 볼 수 있다.〉 또는 약간 덜 방어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국가의 목적은 육체적·영적으로 동일한 생명체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유지하고 촉진하는 것이다.〉 〈국내정치는 한 민족이 외교적 주장을 하기 위해 내적인 힘을 확보하는 일이다.〉 여기서 외교적 주장이란 싸움이다. 〈살려고 하는 자는 싸워라. 그리고 영원한 투쟁으로 이루어진 이 세상에서 싸우지 않는 자는 삶을 얻지 못한다.〉"(136)


"간단히 말해 정치는 전쟁이자 전쟁 준비이며, 이 전쟁에서는 첫째로 생존공간이 핵심 문제이다. 생존공간의 문제는 아주 보편적인 것으로 모든 민족, 심지어는 모든 생명체에 타당한 것이다. 〈생명체의 자기 보존 충동과 지속적 보존의 욕구는 무한한데, 그에 비해 이 전체 생명의 과정이 이루어지는 공간은 유한하다. 생존공간의 이런 한게가 바로 생존전쟁을 강요한다.〉" "둘째로 전쟁에서는 지배와 종속이 문제가 된다. 〈자연의 귀족주의적 기본 원칙이 원하는 것은 강자의 승리와 약자의 박멸 또는 약자의 무조건 굴복〉이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서로 경쟁하여 더 나은 품종으로 발전해야 하는 힘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거침없는 게임〉이다. 셋째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민족들의 지속적인 전쟁에서는 세계지배가 핵심 문제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먼 미래에, 지구 전체의 수단과 가능성을 바탕으로 최고 인종이 지배 민족이 되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인류에게 다가올 것임을 짐작하기〉 때문이다."(137-8)


"이것은 히틀러의 세계상의 절반에 불과하다. 다른 절반은 바로 반유대주의다." "민족이론에서는 역사 전체가 생존공간을 놓고 벌이는 민족들의 지속적인 싸움이었다. 반유대주의 이론에서 우리는 갑자기 그것이 역사 전체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히틀러에 따르면 민족들의 싸움과 나란히 역사에서 또 다른 지속적인 내용이 있는데, 곧 인종 싸움으로서, 그것은 백인, 흑인, 황인종 사이에 벌어지는 싸움이 아니라 백인종 내에서 벌어지는 싸움, 곧 '아리안'과 유대인 사이의 싸움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유대인과 다른 모든 종족들 사이의 싸움으로서, 그들은 보통 때는 끊임없이 서로 싸우다가도 유대인에 맞서서는 모조리 한편이 되는 것이다. 이 싸움은 말 그대로 목숨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으로, 멸종을 지향하는 싸움이다." "실제로 히틀러는 자신의 특성을 유대인 멸종자라 규정하고 특별히 독일 정치가가 아닌 전 인류의 선두에 서서 싸우는 자라고 주장했다."(140-2)


"히틀러의 정치체계에서 국가가 아주 하위의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우리는 전혀 다른 맥락인 히틀러의 성과 부분에서 그가 정치가[국가의 사람]가 아니었다는 놀라운 사실에 부딪혔다. 그는 심지어 전쟁이 시작되기 오래전에 독일이라는 국가의 특성으로 보이는 것을 모조리 파괴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고, '국가 속의 국가들'이라는 혼돈으로 대체해버렸다. 이제 우리는 히틀러의 사고체계에서 이런 잘못된 행동의 이론적 근거를 보고 있다. 히틀러는 국가에 관심이 없었고, 국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으며, 국가를 하찮게 여겼다. 오직 민족과 종족만이 중요할 뿐 국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국가란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으로, 한마디로 전쟁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다. 히틀러에게도 1933~1939년의 기간 동안 전쟁 준비가 없을 수 없었지만, 그가 만들어낸 것은 전쟁 기계일 뿐 국가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일은 반드시 뒤탈이 있는 법이다."(147-8)


실수-잘못된 행동들


"유대인들은 해방된 이후로 모든 서방 국가에서 훌륭한 애국자들이었다. 하지만 이들 유대인의 애국주의가 독일에서처럼 빛나고도 매우 감정적인 경우는 없었다. 유대인이 히틀러 이전까지는 독일과 사랑에 빠졌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1933년에 이 모든 것이 끝났다. 히틀러는 독일에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의 순종적 사랑을 증오로 바꾸어놓았고, 또한 유대인 친구들에게 신의를 지킨 독일인들─분명 대다수는 아니지만 또한 가장 형편없는 계층도 아닌─까지 적으로 만들었다. 독일 안에서 히틀러 파동에 대해 수동적인 저항이나마 꾸준히 지속하게 만든 힘은 그의 반유대주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히틀러가 반유대주의로 자신의 권력욕에 처음부터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핸디캡─대외적 평판 하락이나 대규모 인재 유출 같은 현상들로 대표되는─을 불러왔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그의 첫 번째 잘못이었다. 아직도 여전히 과소평가 되고 있는 잘못이다."(171-3)


"물론 여기에 다른 잘못들이 덧붙여진다. 히틀러의 반유대주의가 처음부터 독일에 불러들인 폐해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두 번이나 자신의 목적에 매우 가까이 다가갔다는 사실은 그대로 남기 때문이다. 1938년 가을에 영국과 프랑스의 완전한 동의를 받아 동유럽에서 독일의 패권이 인정되었을 때와, 1940년 여름에 프랑스에 대해 승리하고 또 다른 많은 나라들을 점령함으로써 러시아 이편의 유럽 대륙 거의 전체가 그의 발치에 놓였을 때였다." "〈나는 유럽의 마지막 기회였다〉고 히틀러는 1945년 2월 보어만 구술에서 말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맞는 말이다. 다만 그는 이렇게 덧붙여야 했다. 〈그리고 나는 그 기회를 망쳤다.〉 그 기회를 망친 것이 그의 두 번째 잘못이었다." "1938년 가을과 1940년 여름에 히틀러는 두 번이나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를 못 보았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집어던졌다. 이는 1941년에 러시아를 공격하고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는 뒷날의 잘못보다도 오히려 더욱 무거운 잘못이다."(173-7)


# 두 번의 잘못

1. 뮌헨 협정 위반(1938) : 체코슬로바키아를 군사적으로 점령한 후 분할하는 조치는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와 동맹을 맺도록 부추겼다.

2. 프랑스와의 동맹 무시(1940) : 프랑스와 평화조약을 맺어 유럽의 패권 국가로 우뚝 설 수 있는 정치적 기회를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기회를 손수 만들어내고 다시 없애버렸다." "그는 바로 이런 역사적 순간에 스스로 입증했듯이, 극히 드물게도 정치적 재능과 군사적 재능을 겸비한 사람이었다. 동시에 그에게 완전히 결여된 것은 정치가의 건설적인 상상력, 곧 지속적인 것을 건설하는 능력이었다. 그래서 그는 평화조약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전에 국내에서 헌법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과 비슷하다.(평화조약은, 국가들의 공동체에서 헌법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확정 짓기를 꺼리는 것과 초조함이 그 걸림돌이었다. 이 두 가지는 그의 자기 경탄과 맥을 같이했다. 그는 스스로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고 여기고, 자신의 '직관'을 맹목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에, 그 직관을 속박할 어떤 제도도 만들지 못했다. 그리고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자신을 대체할 수 없다고 여기고, 살아서 자신의 강령을 무조건 실현하려고 했기 때문에 자라는 데 시간이 필요한 그 무엇도 심지 못하고, 그 무엇도 후계자들에게 넘겨줄 수 없었다. 후계자를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185)


"설명할 길이 없는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의 동기를 찾으려면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히틀러 자신이 그 동기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1945년에 히틀러는 정말로 독일에 남아 있는 모든 것을 폭파하여 민족에게 살아남을 가능성을 남기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니까 이런 파괴를 통해 이 민족이 세계정복의 능력이 없음을 입증한 데 대한 벌을 내리려는 것이었다. (1941년, 러시아 전선에서 벌어진) 최초의 패배에서 벌써 이런 배신의 생각이 불현듯 떠오른 것이다. 그런 생각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히틀러의 성격과 어울린다. 가장 극단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는 그의 성향, 그것도 '얼음처럼 차갑게' 그리고 '번개처럼 재빨리' 말이다."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히틀러는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로써 모스크바 앞의 전투를 통해 예고된 패배를 완전히 결정지었다. 그리고 1942년부터는 패배를 막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마치 히틀러는 승리에는 관심이 없고 다른 것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195-7)


"히틀러가 이 기간에 점점 더 안으로 움츠러든 것도 특이한 일이다. 그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대중과의 접촉이 없고, 전선 방문도, 공습을 받는 도시를 둘러보는 일도, 공개연설도 거의 없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군 사령부에서만 살았다." "이 시기 그의 전략은 (스탈린그라드에서 제6군단을 희생시킨 기묘한 결정처럼) 융통성이 없고, 기발한 발상도 없으며, 구호라면 오로지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켜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싸우고 있었고, 아직도 시간이 필요했다. 왜? 히틀러는 언제나 두 가지 목적을 가졌다. 독일이 유럽을 지배하는 것과 유대인을 멸종시키는 것. 첫째 목적은 실패했다. 이제 그는 두 번째 목적에 집중했다. 독일 군대가 그 길고도 희생적인, 아무 소용도 없이 질질 끄는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날마다 인간화물을 실은 기차들이 수용소로 달려갔다. 1942년 1월에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 명령이 나왔다."(197-8)


범죄


"히틀러는 통치자나 정복자로서만 잔인했던 것이 아니다. 히틀러에게서 특이한 점은 국가이성이 조금도 그럴 이유나 핑계를 주지 않는데도 상상할 수 없이 대규모로 사람을 죽였다는 점이다. 그렇다. (정치적 계산 능력보다 살인의 욕구가 더욱 강했던) 그의 대량학살은 정치적·군사적 이익에 반하는 경우가 많았다." "히틀러의 대량학살은 전쟁 때 행해졌지만, 절대로 전쟁 행위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전쟁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지만 언제나 개인적인 욕구이던 대량학살을 위한 핑계로 전쟁을 택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나의 투쟁』에 이렇게 썼다. 〈전방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쓰러진다면 후방에서는 적어도 해충을 박멸할 수 있다.〉 히틀러에게 해충인 사람들의 박멸은, 전쟁을 통해 후방의 주의력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다는 점에서만 전쟁과 연관성이 있었다. 그 밖에 이런 박멸은 히틀러에게 자체 목적이지, 승리를 위한 또는 패배를 막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202-3)


"1942년부터 1945년까지의 기간에 전 세계에는 히틀러의 대량학살이 단순히 '전쟁범죄'가 아니라 순수한 범죄이고, 그것도 그때까지 들어보지 못한 규모로 이루어지는 범죄로서, 보통은 전쟁범죄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되는 문명의 파국이라는 의식이 살아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의식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을 통해서 다시 사라지고 말았다." "재판에서는 히틀러의 원래 범죄, 곧 폴란드와 러시아 사람들, 유대인들, 집시와 병자들에 대한 대량학살이 기소에서 부수적인 사항이 되었다. 대량학살은 강제노동 및 추방과 더불어 '인류에 대한 범죄'로 분류되었고, '평화에 대한 범죄', 곧 전쟁 자체와 '전쟁범죄'가 핵심적인 기소 내용이 되었다. 전쟁범죄란 '전쟁법과 전쟁관습의 위반'으로 정의되었다. 하지만 이런 위반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양측 모두에서 이루어졌고, 전쟁 자체란 승전국도 행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전쟁에서 졌다는 이유로 피고가 유죄 판결을 받는 것이라고 누구든 쉽게 말할 수 있었다."(204-5)


"어쩌면 누군가는 뉘른베르크에서 모든 전쟁이 아니라 오직 침략전쟁과 정복전쟁만을 범죄라고 낙인찍은 것이라고 이의를 제기할지 모르겠다. 히틀러는 정복전쟁을 했고, 적어도 동쪽에서만은 아무도 그것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1차 세계대전과는 달리 2차 대전에서는 '전쟁 책임'의 논란이 없다. 히틀러가 독일을 지배하는 대제국의 건설을 가까운 목적으로, 세계지배를 원대한 목적으로 삼아 이 전쟁을 계획하고 원하고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조차 무조건 범죄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설사 인류는 오늘날의 기술전쟁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전쟁을 없애야 한다는 의견을 내세워도 마찬가지다. 주권국가들의 세계에서 전쟁을 피할 길이 없다면, 이런 기술시대의 전쟁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 되었다 해도,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은 인류의 현재 상황논리에 들어 있는 것이다." "결국 뉘른베르크의 시도처럼 전쟁을 범죄로 규정하는 일은 그것을 더욱 끔찍하게 만들 뿐이다."(208)


"히틀러의 특별한 범죄는 (전쟁의 불가피성을 전제하는) '전쟁법과 관습의 위반'이 아니며, 그러니까 뉘른베르크 제판에 이름을 준 '전쟁범죄'가 아니다[뉘른베르크 전범재판]." "2차 세계대전 후에 이런 지혜를 잊은 것은 승전국의 잘못이었다. 무엇보다도 히틀러의 범죄를 모든 전쟁에서 일어나는 전쟁범죄와 한통속으로 몰아붙이면서 그 범죄의 특별한 성격에 대한 감각이 무뎌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히틀러의 대량학살은 전쟁범죄가 아니라는 점이 특징이다. 전투의 절박함과 열기 속에서 전쟁포로 죽이기, 빨치산과의 전투에서 인질을 총살하기, '전략적' 공중전에서 순수한 거주 지역에 대한 공습, 잠수함 전투에서 여객선과 중립적인 배들을 침몰시키기, 이 모든 것은 전쟁범죄이며, 분명 매우 끔찍한 것이지만, 전쟁이 끝나고 나면 일반적 합의에 의해 양측에서 그냥 잊는 게 더 낫다. 하지만 대량학살, 전체 주민계층을 계획적으로 멸종시키려는 것, '해충박멸' 등을 사람에게 행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210-1)


"1942년 11월에 이중 의미로 많은 것을 드러내주는 유명한 히틀러의 발언이 나왔다. 〈나는 기본적으로 언제나 12시 5분에야 멈춘다〉는 말이다. 독일을 둘러싼 포위망이 점점 좁혀지던 이 시기에도 그가 사령부의 테이블 담화에서 아직도 여전히 쉽게 깨지지 않는 자기만족과 심지어 이따금 꽤 기분이 좋아 보이기까지 한 것은, 연합군이 매일 가까워지는 만큼 이제 남은 마지막 목적 실현에 다가가고 있음을 의식한 것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3년 동안 날마다 전 유럽에서 유대인 가족들은 자기들의 집이나 숨은 장소에서 끌려나와 동쪽으로 이송되어 벌거벗은 채로 죽음공장으로 밀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곳 소각장 굴뚝은 날마다 연기를 피워 올렸다. 이 마지막 3년 동안 히틀러는 지난 11년처럼 성공을 즐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것을 포기하기는 쉬웠다. 그 대신에 전보다 더 많이 살인자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배려마저 버린 채 희생자를 손에 쥐고 멋대로 행동하는 살인자였다."(228-9)


배신


"1944년 8월 22일에 히틀러는 루덴도르프가 1918년 9월 29일에 행한 것과는 정확히 반대로 행동했다. 그는 '뇌우 작전'을 펼쳐서, 갑작스럽게 옛날 바이마르 공화국의 장관·시장·의원·당직자·정책담당 공무원 등을 체포하도록 했다. 그들 중에는 뒷날 연방공화국의 출범 시기에 주인공이 되는 콘라트 아데나우어와 쿠르트 슈마허 등도 끼어 있었다. 이들은 루덴도르프가 비슷한 상황에서 정부를 넘겨주고 전쟁의 청산을 맡긴 인물들로서, 이른바 독일의 정치적 예비군이었다. 루덴도르프는 피할 수 없는 패전에 직면하자 그들에게 지배권을 넘겼다. 히틀러는 비슷한 상황에서 그들을 배제했다." "이 조치는 히틀러 생각에 너무 일찍 이루어졌던 1918년의 전쟁 중단이 이번에도 되풀이되는 것을 반드시 막으려는 첫 번째 조치였다. 그 어떤 기회도 남김없이 쓰라린 마지막 순간까지 싸우기로, 그의 말대로 하자면 〈12시 5분까지〉 계속 싸우기로 결심한 상태였던 것이다."(238-9)


"1918년 11월이 다시 눈앞에 있었다. 히틀러는 이번에는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로 결심하였다. 여기서 1918년의 시점에 아주 강렬했다가, 지금 다시 피어난 증오, 독일 '11월의 범죄자들'에 대한 증오, 곧 독일 사람들에 대한 증오를 보지 못한 채 넘어가서는 안 된다. 『나의 투쟁』에서 히틀러는 1918년 이후에 나온 어느 영국인 기자의 진술에 충심으로 동감한다며 인용하였다. 〈독일인 세 명 중 한 명이 배신자다.〉 이제 그는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분명하고도 정확한 생각을 표현하는 모든 독일인, 그리고 이 전쟁이 끝난 다음까지 살아남고 싶다는 소망을 드러내는 모든 독일인을 가차 없이 죽이려고 했다. 히틀러는 언제나 커다란 증오를 품고 있었고, 사람을 죽이는 행위에서 많은 기쁨을 느꼈다. 여러 해 동안 유대인, 폴란드인, 러시아인을 향해 분출하던 히틀러의 증오의 힘, 히틀러의 내면에 있는 살인충동은 이제 공개적으로 독일인을 향했다."(240-1)


"아르덴 공격은 2차 대전의 다른 어떤 기획보다도 더 많이 히틀러 자신의 작품이었는데, 군사적으로 보면 정신 나간 기획이었다. 공격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당시 전쟁 기술의 조건으로 보아 적어도 3 대 1 정도로 전력이 우세해야 했다. 하지만 1944년 12월에 서부전선에서 힘의 상황은, 완전히 우세한 연합군의 공군력을 빼고 보아도 1 대 1에 못 미쳤다 약자가 강자를 공격한 것이다. 게다가 공격 지점에서 잠깐만이라도 우세하기 위해서 히틀러는 골격만 남기고 동부의 방어전선에서 병력을 몽땅 동원해야만 했는데, 당시 참모총장 구데리안이 러시아군이 강력한 공격을 해 올 것이라는 절망적인 경고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했다. 히틀러는 이중으로 큰 모험을 한 것이다. 서부전선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면 나중에 제국 서부 지역의 방어를 위해 꼭 필요한 병력을 소진하는 것이고, 동시에 러시아군이 공격해 올 경우 동부전선은 방어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 두 가지 모두 실제로 일어났다."(242-3)


"여기서 히틀러의 핵심 동기가 전혀 외교적인 것─서부전선에서 뜻밖의 극단적인 결전을 벌여 서방세력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어 타협을 강요한다. 그렇지 않다면 동부 전선에서 패배하게 될 것이고, 서방세력은 자기들의 몫이 무엇인지를 보게 된다─이 아니라 국내 문제이고, 실제로 자기 나라 사람들을 향한 것이었다고 추정하면 그의 사고방식은 훨씬 덜 복잡한 것이 된다. 국민의 다수와 히틀러 사이에는 1944년 가을에 이미 틈이 벌어져 있었다. 대다수 국민은 히틀러가 바라는 전망 없는 결전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1918년 가을과 같은 결말이 나기를 원했고, 이제 그만 끝나기를, 가능하면 온건한 결말, 그러니까 서부전선에서 끝나기를 바랐다. 그러니까 러시아군을 밖에 묶어두고 서방세력을 들어오게 하는 것, 그것이 1944년 말에 대부분의 독일 국민이 속으로 바라던 결말이었다. 히틀러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일 수는 없었지만, 아르덴 공격으로 그것을 망쳐놓을 수가 있었다."(245)


"정말로 적군보다 더욱 잔인하게 파괴를 실행하는 것이 히틀러의 의도였다. 적군은, 적어도 서방의 적군은 〈도이치 민족이 가장 원시적인 생존을 위해 필요한 기반을······ 파괴〉하려는 목적을 갖지는 않았다. 그 결과 이제 빠른 속도로 진행된 적군의 점령은 적어도 서부에서는 압도적으로 구원으로 여겨져 환영을 받았고, 나치 국민을 만나리라 기대했던 미국·영국·프랑스군은 그와 달리 망상에서 완전히 벗어나 히틀러와는 아무 상관도 없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점령군은 당시 그것을 아첨하는 위장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정말로 총통에게 배신당했다고 느꼈고, 사실이 그랬다. 연합군이 이미 착수하고 있던 '재교육'은 마지막 몇 주 동안 히틀러가 강력한 방식으로 이미 완수해 놓았다. 독일인들이 이 마지막 몇 주 동안 겪은 것은 마치 그동안 함께 살아온 남편이 갑자기 살인자임이 드러나자, 사람들에게 남편을 물리치고 자기를 구해달라고 외치는 여자와 같았다."(250-1)


"히틀러는 독일 국민을 사랑했는가? 그는 독일을 찾아냈다. 알지 못한 채 선택했다. 엄격히 말해서 그는 독일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독일 국민은 그가 선택한 민족이었다. 그의 타고난 권력본능이 나침반 바늘처럼 그들을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 잠재력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가리켰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말로 그랬다. 그리고 그는 오로지 권력의 도구로서 그들에게 관심이 있었다. 그는 독일을 위해 원대한 야망을 가졌고, 그런 점에서 자기 세대의 독일 사람들과 마음이 맞았다. 당시 독일 사람들은 야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다. 야망은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이 둘이 합쳐져서 히틀러에게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독일의 파괴는 히틀러가 자신에게 부과한 마지막 목적이었다. 그가 파괴하려던 다른 것들에서 그랬듯이 이것도 완전히 이루지는 못했다. 그로써 그는 독일이 마지막에 자기에게 결별을 선언하도록, 그것도 생각보다 더 빨리 더욱 근본적으로 결별하도록 하였다."(2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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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독일인 이야기 - 회상 1914~1933
제바스티안 하프너 지음, 이유림 옮김 / 돌베개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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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Prolog


"독일에서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초등학생이었던 세대는 날마다 여러 나라들이 벌이는 거대하고 자극적이고 매혹적인 게임처럼 전쟁을 경험했다. 이는 평화가 제공하는 것보다 훨씬 신나고 극적인 만족감을 주었다. 이것이야말로 나치즘의 근본 비전이 되었다. 여기서 나치즘은 선전의 힘과 단순성, 판타지에의 호소, 활동 동기 등을 얻었다. 또한 내부의 적에 대한 편협함과 잔인함도 여기서 비롯했다. 이 놀이를 함께 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숫제 '적'으로도 인정하지 않고 그저 흥이나 깨는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많은 것들이 나치즘을 강화하고 그 성격을 변하게 했다. 하지만 그 뿌리는 바로 여기, 독일 군인들의 '전선 경험'이 아니라 독일 학생들의 전쟁 경험에 있다." "전쟁을 현실로 직접 경험한 사람들은 대개 이를 다르게 평가하기 마련이다." "나치즘의 근간이 된 세대는 1900년에서 1910년 사이에 태어나 전쟁이라는 현실에 아무 영향도 받지 않고 이를 거대한 놀이로 경험한 사람들이다."(31-2)


"1918년 혁명은 나와 내 또래에게 전쟁과 정반대로 영향을 미쳤다. 전쟁은 우리의 실제적인 일상생활을 전혀 바꾸지 않아서 때로 지루할 지경이었지만 환상에는 마르지 않는 풍부한 재료를 제공했다. 혁명은 일상생활에 새로운 변화를 많이 가져왔고 이 변화는 매우 다채롭고 자극적이었지만 우리의 환상에 끼어들지는 않았다. 혁명은 전쟁과 달리 그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을 단순하고 분명하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혁명의 모든 위기, 혁명 과정에서 일어난 파업과 총성과 반란과 시위 행렬은 모순으로 가득하고 혼란스러웠다. 사실 정말 중요한 게 뭔지는 끝내 분명해지지 않았다." "혁명의 와중에 권력은 거리에 굴러다녔다. 그 권력을 집어 든 사람들 가운데 진정한 혁명가는 아주 드물었다." "진정한 혁명가들이 아마추어처럼 비조직적인 폭동을 연달아 일으키면 방해자들이 반혁명으로 맞섰다. 그들은 정부군으로 위장한 이른바 '자유군단'을 내세워 혁명을 몇 달 만에 피비린내 나게 진압했다."(44-6)


"혁명에 반대하는 결정이 내려졌지만 안정은 멀었다. 오히려 베를린에서는 3월에 혁명의 시체를 매장하고서야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뮌헨에서는 4월에야.) 베를린에서는 노스케가 원래 혁명을 지원했던 '인민해병대'를 적절한 절차 없이 해산하려고 하자 시가전이 더욱 격렬해졌다." "그러나 결과는 처음부터 분명했고 승자의 복수는 잔혹했다. 1919년 봄 좌파 혁명이 형태를 갖추려고 헛힘을 쓸 때, 이후의 나치 혁명은 히틀러가 없었지만 이미 완성되어 굳건하게 자리 잡았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때 에베르트와 노스케를 구해준 자유군단은 단원들의 구성, 특히 견해, 태도, 투쟁 방식에서 이후의 나치 돌격대와 그냥 똑같다. 그들은 이미 '도망치려다가 총에 맞았다'는 장치를 만들어냈고 고문 기술을 발전시켰으며 그리 많이 묻거나 가려내지 않고 중요하지 않은 적수까지 벽에 세워 총살함으로써 1934년 6월 30일을 예고했다. 실천을 뒷받침할 이론만 부족했다. 이론은 나중에 히틀러가 제공한다."(49-50)


# 1934년 6월 30일 : 에른스트 룀을 비롯한 정적, 정부 요인, 유대인을 학살한 '긴 칼의 밤'을 지칭한다.


"세계대전은 모든 민족이 다 경험했고, 혁명, 사회적 위기, 총파업, 부의 재편, 화폐 평가절하 등도 거의 다 경험했다. 하지만 어떤 민족도 1923년 독일에서처럼 이 모든 게 한꺼번에 터무니없이 극단적으로 치솟는 일은 경험하지 않았다. 돈뿐만 아니라 모든 가치 기준이 사라져버린, 어마어마한 사육제謝肉祭의 행렬과 끝없는 피투성이 농신제農神祭는 어떤 민족도 경험한 적이 없다. 1923년을 겪고 난 다음 독일인은 꼭 나치즘이 아니라도 어떤 환상적인 모험에라도 뛰어들 준비를 마쳤다. 나치즘의 심리학적·정치학적 뿌리는 훨씬 더 깊이 내려간다. 하지만 나치즘의 광란적인 특징을 결정하는 것은 그때 이미 만들어졌다. 냉혹한 광기, 불가능한 것을 향해 오만할 만큼 거침없이 나가는 맹목적 결단력, '우리한테 유용한 것이 정당한 것이다'와 '불가능이란 없다'는 원칙, 1923년 같은 경험은 어떤 민족이 영혼의 상처 없이 치러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듯하다."(72)


"8월, 1달러는 100만 마르크에 이르렀다. 우리는 믿을 수 없는 기록이라도 들은 양 숨을 멈추고 말았다. 두 주일 뒤에는 이에 대해 웃었다. 달러가 100만 경계선에서 새로운 추진력이라도 얻었는지 속도를 열 배 높여 곧 1억, 이어 10억 마르크로 뛰어올랐기 때문이다. 9월이 오자 100만 마르크는 아예 실제적인 가치가 없어지고 10억 마르크가 지불 단위가 되었다. 10월 말 지불 단위는 1조 마르크였다. 그러는 사이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제국은행이 지폐 발행을 중단했다." "8월 중순, 정부는 극렬한 거리 폭동으로 인해 허우적거렸다." "이제 우리는 국가가 멸망하길, 제국이 분해되길, 그러니까 우리 사생활에 일어나고 있는 일에 걸맞은, 끔찍한 정치적인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대했다. 라인란트가 변절했다, 바이에른이 변절했다, 황제가 돌아왔다, 프랑스군이 진군했다 등등 소문이 이토록 무성한 적이 없었다.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지 구분하기 어려웠다."(82-3)


"그러다가 정말 기대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어느 날 '지속적인 가치를 지닌' 돈이 다시 나올 것이라는 믿을 수 없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더니 얼마 뒤 정말 새로운 화폐가 나왔다. '렌텐마르크'라고 적힌 작고 볼품없는 회녹색 지폐. 렌텐마르크로 처음 물건 값을 치를 때면 다들 약간 미심쩍은 마음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기다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상인은 그 돈을 실제로 받고 물건을 내주었다. 1조 마르크 가치가 있는 상품,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또 그다음 다음 날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믿을 수 없었다." "그 몇 주 전 슈트레제만이 총리 자리에 올랐다. 정치는 단박에 훨씬 평온해졌다. 이제 아무도 공화국이 무너질 거라고 수군대지 않았다. 온갖 '동맹'이 툴툴거리면서 겨울잠을 자려고 물러났다." "그랬다. 우리 세대가 독일에서 경험한 딱 한 번 뿐인 진정한 평화기가 시작되었다. 1924년부터 1929년까지 6년 동안 슈트레제만이 외무장관으로 독일 정치를 이끌었던 슈트레제만 시대."(85-8)


"1914년부터 1924년 사이에 일어난 사건들 때문에 나이 든 세대는 자신의 이상과 확신을 의심하면서 소심해졌다. 반면 젊은이들은 공적인 소란, 센세이션, 무정부주의, 무책임한 숫자 놀음의 위험한 매혹밖에 아는 게 없었다. 공적인 긴장이 멈추고 사적인 자유가 돌아오자 그들은 이를 선물이라기보다는 박탈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그저 이 모든 것을 자기가 본 것보다 더 커다란 규모로 직접 해보기만 기다렸다. 그러면서 모든 사적인 생활을 '지루하다' '부르주아적이다' '고리타분하다'고 치부했다. 대중은 무질서의 온갖 센세이션에도 익숙해졌다. 게다가 그들 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커다란 미신, 즉 그동안 맹목적이고 교조적으로 칭송해온 전지전능하신 성 마르크스의 마법적인 능력과 그가 예언한 역사 발전의 필연성에 대한 믿음까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표면 아래에는, 거대한 재앙을 일으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모두 갖춰져 있었다." "곧 닥칠 재앙의 전조마저 이런 평화로운 풍경에 딱 어울리는 듯했다."(90-3)


"1930년 봄 브뤼닝이 공화국 총리 자리에 올랐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독일에 처음으로 엄격한 주인이 생긴 것이다." "배상금을 지불하는 게 불합리하다고 증명하기 위해 그는 은행이 문을 닫고 실업자 수가 600만까지 올라가는 등 독일 경제가 거의 무너지도록 만들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국가 재정을 유지한다고 '허리띠를 더 졸라매라'는 엄격한 가장의 처방전을 가차 없이 적용했다." "브뤼닝은 이를 악물고 모든 고통스러운 결과를 감당했다. 외국 여행을 불가능하게 만든 '외환 관리'와 이민을 불가능하게 만든 '이민세', 나중에 히틀러의 효과적인 고문 도구에 속하게 된 것 가운데 많은 것을 브뤼닝이 도입했다. 더 나아가 언론 자유의 제한과 제국 의회의 억압도 그 시작은 브뤼닝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는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서 이 모든 일을 했다. 하지만 공화주의자들은 이런 일이 일어난 다음 과연 무엇을 더 지켜야 할지 묻기 시작했다."(110-1)


"브뤼닝에게는 진정한 추종자가 없었다. 그는 '묵인되었다.' 그는 차악이었다. 몹시 가학적인 고문 전문가에 맞서 학생들을 때리면서 〈내가 너희들보다 아프다〉라고 말하는 엄격한 교사였다. 사람들은 브뤼닝이 히틀러를 막을 딱 하나뿐인 보호막으로 보였기에 그를 감쌌다. 브뤼닝도 당연히 이를 알고 있었고 그가 정치적으로 생존하는 이유는 히틀러에 대항하는 한편 히틀러가 존재하는 것이었기에, 그는 절대 히틀러를 없앨 수 없었다. 브뤼닝은 히틀러에 맞서 싸워야 하지만 동시에 히틀러를 보존해야 했다. 히틀러는 실제 권력을 잡아서는 안 되지만 계속 위험하게 남아 있어야 했다. 브뤼닝은 2년 동안 이를 악물고 얼굴에는 미소를 띤 채 어려운 줄타기를 해냈는데, 이것만 해도 대단한 성취였다. 그가 균형을 잃는 순간이 오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럼 그다음엔? 브뤼닝의 시대에는 내내 이런 질문이 남았다. 그럼 그다음엔? 음울한 현재가 무시무시한 미래에 대한 전망 덕분에 가벼워 보이는 시대였다."(112)


"1932년 여름까지 점점 더 숨이 막혀가더니 브뤼닝이 갑자기 별다른 이유도 없이 실각하고 파펜-슐라이허의 막간극이 이어졌다. 아무도 정체를 모르는 귀족들이 정부를 세우더니 반년 동안 정치는 마치 헝가리 경기병들의 질주 같았다. 공화국이 무너지고 헌법이 효력을 잃고 제국 의회는 해산되었다가 다시 선출되기를 거듭했다. 신문은 금지되고 프로이센 정부는 떠나고 행정 기구 고위층은 모두 바뀌었다. 게다가 이 모든 일이 마치 흥미진진한 모험처럼 명랑한 분위기에서 일어났다." "그때 나치들은 어느새 최종적으로 허용된 제복을 입고 거리를 꽉 채우는가 하면 폭탄을 던지고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 그해 8월 사람들은 히틀러와 부총리 자리를 놓고 흥정하다가, 11월에는 파펜과 슐라이허가 갈라진 뒤 히틀러에게 총리 자리를 제안했다." "모든 진지한 장애물은 치워졌다. 헌법도 없고 법적 계약도 없고 공화국도 없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다."(118-9)


혁명Die Revolution


"1933년 1월 30일, 아침신문 표제는 다음과 같았다. 〈공화국 대통령 히틀러 호출.〉 무력감에 짜증이 났다. 대통령은 지난해 8월에 이어 11월에도 히틀러를 불러서 각각 부총리와 총리 자리를 제안했다. 히틀러는 그때마다 불가능한 조건을 내걸었고, 그때마다 정부에서는 근엄하게 '절대 다시' 이런 시도를 하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하지만 '절대 다시' 하지 않겠다는 결의는 기껏해야 석 달 동안 유지되었다. 그때 이미 독일에서는 마치 오늘날 세계가 그러는 것처럼 히틀러가 원하는 것을 모두, 언제나 다시 점점 더 쉽게 제공하다 못해 숫제 강요하려는 병적인 욕망이 그의 적수들 사이에서 지배적이었다." "점심 때 신문 표제는 〈히틀러 다시 지나친 요구〉였다. 사람들은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치게 요구하지 않는다면 히틀러의 성정에 맞지도 않을 테지. 이렇게 다시 한 번 독배를 피할 수 있게 되는구나." "5시쯤 저녁신문이 나왔다. 〈민족주의자 중심 내각 구성, 총리 히틀러.〉"(134-5)


"1933년 2월 무렵 독일인들 대부분이 공산주의자가 국회의사당에 불을 질렀다는 거짓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고 해서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이 이 문제를 너무나 간단히 접어버렸다는 것은 탓해야 한다. 바로 여기서 처음으로 나치 시대 독일인들의 성격상 집단적 약점이 드러난다. 독일인들은 국회의사당이 불에 조금 그을렸다고 해서 헌법으로 보장된 개인적 자유와 기본권을 빼앗겨도 마치 당연한 것처럼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였다. 공산주의자들이 국회의사당에 불을 질렀으니 정부가 '단호하게 대처'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음 날 나는 연수원 동료 몇 명과 함께 이 사건에 대해 토론했다." "내가 말했다. 〈어떤 공산주의자가 국회의사당에 불을 질렀다고 해서 내가 읽고 싶은 신문을 못 읽게 하다니, 이건 개인적인 모욕이라고 생각합니다. 안 그래요?〉 누군가가 가볍게, 악의 없이 대답했다. 〈아뇨, 왜 그래야 하죠? 지금까지 「전진」이나 「적기」를 읽으셨나요?〉"(151-2)


"혁명이란 무엇인가? 법률 전문가들은 헌법을 그 안에 규정된 것과 다른 방법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빈약하나마 이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1933년 3월 나치 '혁명'은 혁명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엄밀하게 '합법적으로', 헌법이 허용한 방법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눈속임이다. 하지만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찬찬히 살펴봐도 그해 3월에 일어난 일들이 정말 '혁명'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지 여전히 의심이 간다. (기존 질서와 그 수호자인 경찰, 군부 등을 타격하는) 혁명이 늘 감동적이고 장엄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참극, 폭력, 약탈, 살인, 방화 등이 함께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혁명가'이길 바라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용기를 보여주며 목숨을 걸기를 바라게 마련이다. 바리케이드는 시대에 조금 뒤떨어졌을지 모르지만 어떤 형식이든 자발성, 봉기, 헌신, 반란 등은 참된 혁명을 이루는 본질적인 구성 요소로 보인다. 1933년 3월 혁명에는 그 가운데 단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다."(154-5)


"네 가지 요소가 결합해 나치 정권이 세워졌다. 네 가지 요소란 테러, 축제와 장광설, 배반, 마지막으로 집단적 허탈 상태다. 집단적 허탈 상태란 수백만이 동시에 신경쇠약에 걸린 듯 정신을 놓은 상태다. 많은 나라, 사실 대부분의 유럽 국가가 태어날 때 이보다 더 많은 피를 흘렸다. 하지만 어떤 국가도 이토록 혐오스럽게 탄생하지는 않았다. 유럽 역사는 두 가지 형태의 테러가 있다. 하나는 고삐 풀린 혁명적 군중이 승리에 취했을 때 나타나는 걷잡을 수 없는 살의다. 다른 하나는 무적의 국가기구가 권력을 과시하며 위협하려고 냉혹하고 면밀하게 계획해서 일으키는 잔혹 행위다. 이 두 가지 테러는 대개 혁명과 억압으로 나눠진다. 첫째 테러는 혁명적이다. 순간적인 흥분과 분노, 도취 상태에 빠졌다는 데서 그 변명을 찾는다. 둘째 테러는 억압적이다. 혁명에서 일어난 만행을 보복한다는 데서 그 변명을 찾는다. 이 두 가지 테러를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 방식으로 결합하는 게 나치의 몫이었다."(155-6)


"3월 말 나치는 이제 혁명적 활동을 시작할 수 있을 만큼 강해졌다고 느꼈다. 혁명적 활동의 조심스런 첫걸음은 1933년 4월 1일부터 유대인에 대항해 불매동맹을 맺는 것, 즉 그들을 보이콧하는 일이었다." "이와 동시에 유대인에 대한 '계몽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시작했다. 사실 유대인은 '하류 인간'으로 일종의 동물인데 악마의 특성까지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널리 퍼진 두려움 너머 이상하고도 실망스러운 일이 있다면 이렇게 나치가 누군가를 살해하겠다는 의도를 공개적으로 밝힌 일이 독일 전체에 논쟁과 토론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반유대주의가 아니라, '유대인 문제'에 대해서. 이는 나치가 그때부터 다른 많은 '문제'에 대해서도 국제 무대에서 거듭 써먹어 성공한 수법이다. 한 나라든, 민족이든, 인종 집단이든 나치가 누군가를 죽이겠다고 공공연하게 위협하면 갑자기 그게 일반적인 화제가 되었다. 그것도 협박을 받은 사람들이 과연 존재할 권리가 있는지를 문제 삼아 널리 토론했다."(172-4)


"모두들 갑자기 유대인에 대해서 나름대로 의견을 세우고 표명할 권리가 있다고 느꼈다. 더 나아가 반드시 표명해야 한다는 의무감까지 생겼다."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에서 일하면 이를 범죄로 간주하거나 적어도 눈치가 없다고 평가하는 게 곧 일반적인 의견으로 인기를 끌었다. 유대인의 옹호자에게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유대인들은 뻔뻔스럽게도 의사, 변호사, 언론인 가운데 이렇게 높은 백분비를 차지한다고 항의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사람들은 대체로 '유대인 문제'를 백분율 계산으로 다루기를 좋아했다. 공산당원 가운데 유대인 백분비가 너무 높지 않은지, 세계대전 전사자 가운데 유대인 백분비는 너무 낮지 않은지 조사하기도 했다. (박사학위를 소지하고 스스로 지식인인 체하는 어떤 남자는 아주 진지하게 전체 유대인 가운데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사람은 12,000명 뿐인데, 이는 이에 상응하는 아리아인의 숫자에 비하면 너무 적다고 주장하면서 나치의 반유대주의를 '어느정도 정당화'하기도 했다.)"(175)


"(이 모든 일에 깃들어 있는 광기를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지만) 나치 정권 아래에서도 적어도 처음 몇 년 동안 일상생활은 겉보기에 전혀 바뀌지 않고 그대로였다. 영화관, 극장, 카페가 꽉꽉 들어차고 야외와 무도장에서는 쌍쌍이 춤을 추었다. 사람들이 평온하게 거리를 거닐고 젊은이들은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몸을 쭉 편 채 느긋하게 누워 있었다. 나치도 이를 선전용으로 우려먹을 만큼 우려먹었다. 〈우리의 일상적이고 평화롭고 행복한 나라에 와서 보라. 유대인들까지도 얼마나 잘 지내는지 와서 보라.〉 광기, 공포와 긴장, '하루하루 이어지는 삶'과 죽음의 무도, 그 비밀스런 흐름은 물론 보이지 않았다. 마치 베를린 지하철역에서 〈수염을 잘 깎아서 기분 좋은 하루〉라는 카피가 달린 면도날 광고에서 활짝 웃고 있는 남자 얼굴을 보면서 그가 벌써 4년 전에 대역죄로 플뢰첸제 교도소 마당에서 머리가 잘린 그 남자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191)


작별Abschied


"그 무렵 내가 작별을 해야 했던 것이 대법원만은 아니었다. 작별은 모든 것을 관통하는 극단적인 좌우명이 되었다. 예외도 없었다. 내가 살던 세계가 날마다 자연스럽게, 소리를 내지 않고 녹아내리더니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공식적인 영역에서 눈에 띄게 일어나는 일이 거의 가장 무난한 일이었다. 그래, 정당이 사라졌다. 해산했다. 우선 좌파정당이 해산한 다음 우파정당도 해산했다. 나는 어느 정당의 당원도 아니었다. 대중이 그 이름을 말하고 그가 쓴 책을 읽고 그가 한 연설을 토론하던 사람들이 사라졌다. 이민을 떠나기도 했고, 수용소에 들어가기도 했다." "더 불안한 것은 어쩐 일인지 우리 일상의 한 부분이던 별로 해를 끼칠 것 같지 않은 사람들까지 꽤 많이 사라진 것이다. 날마다 듣다보니 그 목소리가 마치 지인처럼 익숙해진 라디오방송 아나운서가 집단 수용소로 사라졌다. 그 이름을 들먹이는 사람까지 곤란해졌다! 여러 해 동안 우리와 동행하던 남녀 배우들도 갑자기 사라졌다."(241-2)


"(공산당원이던) 한스 오토는 어느 날 만신창이가 된 채 친위대 병영 마당에 누워 있었다. 체포된 다음 '잠시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4층 창문에서 몸을 던졌다고 했다. 매주 악의 없는 해학으로 베를린 시민을 웃기던 신문 만화가가 자살했다." "5월에 상징적으로 책을 불태운 일은 신문 기사에 그쳤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서점과 도서관에서 책들이 사라졌다. 좋든 나쁘든 현대 독일 문학이 완전히 지워졌다. 뭔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나치가 참아주던 몇몇 작가들은 이제 볼링 핀처럼 허공에 홀로 서 있었다. 그 밖에는 고전이나 갑자기 솟아난 끔찍하고 부끄러운 수준의 혈통문학과 향토문학 뿐이었다." "많은 신문과 잡지가 신문 가게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거기 남아있는 신문과 잡지에 일어난 일이 더 이상했다. 정말 그 신문이나 잡지인지 도저히 다시 알아볼 수 없었다." "「베를리너 타게블라트」나 「포시셰 차이퉁」처럼 오랜 전통을 지닌 민주적·지성적 신문이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나치 기관지로 탈바꿈했다."(242-4)


"1933년 여름 나치가 아니었던 독일인들은 어떤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을까?" "우월성이라는 유혹에 굴복한 사람들은 초기 나치 정책이 보여주던 초심자의 도락적 성격에 연연한다. 그들은 날이면 날마다 이 모든 게 오래 지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증명하려고 애쓴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처음에는 확신에 차서 평온하게, 시간이 지나면 자기를 속이려 애쓰면서 나치 정권은 반드시 몰락한다고 예언한다. 마침내 나치 정권이 자리를 잡고 성공했을 때, 그들은 이런 상황에 대비해 무장하지 못했고 허황한 통계에 따라 면밀하게 계산한 심리적 폭격의 대상이 되었다. 실제로 1935년부터 1938년까지 뒤늦게 나치에 복속한 사람들은 대부분 이 집단에서 나왔다." "우스운 것은 언젠가 실망을 모두 맛본 다음 그들이 옳다고 증명되리라는 사실이다. 나치가 몰락한 다음 그들이 돌아다니면서 내 이럴 줄 알았다고 떠벌리는 모습이 선연하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들은 희비극적 인물로 남을 것이다."(249-50)


"둘째 유혹은 원한을 품는 것, 즉 피학적으로 증오와 고통과 한없는 비관주의에 자신을 넘겨주는 일이다. 이런 반응은 독일인들이 패배를 맞을 때 거의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반응이다. 즉 독일인은 누구나 (사생활이나 공공생활에서) 영영 포기해버리고 싶은, 무심하고 기진해서 자신과 세계를 기꺼이 악마에게 넘겨주고 싶은, 화가 나고 우울해서 도덕적으로 자살하고 싶은 유혹에 맞서 싸워야 한다. 모든 위로를 거부하다니! 아주 영웅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자세에 가장 유독하고 위험하고 악랄한 위로가 숨어 있는 걸 아무도 보지 못한다. 이렇게 마음껏 자기를 희생하면서 바그너적인 죽음과 몰락에 탐닉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패배를 패배로 받아들일 능력이 없는 패자에게 남은 가장 큰 위안이다. 아이가 인형을 잃어버리고 나서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처럼 서럽게 엉엉 울어대는 게 나치와의 전쟁에서 지고 난 다음 독일인의 기본자세가 되리라고 감히 말한다.(1918년 많은 독일인이 이미 이런 태도를 보였다.)"(250-1)


"셋째 유혹은 앞에서 나온 유혹에 굴복할 때 어떤 결과가 빚어지는지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증오와 고뇌로 영혼이 망가지고 싶지는 않다. 선량하고 온유하고 친절하고 '착하게' 남아 있고 싶다. 하지만 날이면 날마다 증오와 고뇌를 블러일으키는 일이 몰려드는데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을 무시하고 외면하고 귀를 막고 숨어들 수밖에 없다. 이는 부드러운 것을 딱딱하게 만들어 결국 현실감각을 잃고 마는 다른 형태의 광기로 이어진다." "갑자기 다양한 전원문학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1934년에서 1938년까지 독일에서는 어린 시절의 회상록, 가족소설, 풍경 화보집, 전원시와 섬세하고 여린 소품이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나왔다. 평범한 사람들은 물론 문학계에서도 이를 거의 알아채지 못했다. 나치의 공공연한 선전문학을 빼면 거의 모든 책이 다 이런 분야에서 나왔다. 그러나 이것도 시들해졌는데 아마 아무리 애를 써도 이런 문학에 필요한 무해함을 더는 얻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253-5)


"아니, 개인 생활로 물러나봤자 아무 소용 없었다. 어디로 물러나든 내가 피해 도망친 그것이 바로 앞에 있었다. 나는 나치 혁명이 정치와 사생활의 오랜 분리를 없애버렸고, 나치 혁명을 단지 '정치적 사건'만으로 다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혁명은 정치 영역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사생활에서도 똑같이 일어났다. 독가스처럼 벽을 통해 스며들었다. 이 독가스에서 벗어나려면 딱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신체적으로 멀어지는 것, 이민이었다. 즉 내가 태어나 언어를 배우고 교육을 받은 나라, 게다가 애국이라는 연결 고리가 있는 나라에 작별을 고하는 것이다." "우리가 독일과 작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독일이 독일로 남지 않기 때문이다. 독일 민족주의자들 스스로 독일을 망가뜨렸다.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기 위해서 자기 나라에서 떨어져 나가야 하는지를 두고 갈등했다. 그러나 비록 수많은 통용구와 상투적 표현으로 가려 있지만 진정한 갈등은 민족주의와 내 나라에 대한 충실함 사이에서 일어났다."(269-73)


"1933년 10월 13일 토요일, 독일이 군비축소회의와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날 저녁 히틀러가 연설을 마친 다음, 라디오에서 국가의 첫 소절이 흘러나오자 (사법연수생을 위한 훈련소에 있던 우리는) 모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몇몇은 나처럼 머뭇거렸다." "〈이건 중요하지 않아. 난 아니잖아. 이건 중요하지 않아〉 하는 느낌이 혀 위에 쓴맛처럼 남았다. 이런 느낌으로 나는 팔을 들어 올린 채 3분쯤 허공에 뻗고 서 있었다. 국가와 호르스트 베셀 노래가 딱 그만큼 오래 걸렸다. 거의 다 절도 있게 딱딱 끊어가며 쩌렁쩌렁 같이 불렀다. 나는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를 때 그러듯 입술을 조금 달싹이면서 같이 부르는 시늉만 했다. 하지만 모두 팔은 높이 치켜들고 있었다. 인형극을 공연하는 사람이 끈 달린 인형의 팔을 들어 올리듯 라디오가 우리 팔을 잡아당겼다. 눈이 없는 라디오 앞에 그렇게 서서 우리는 노래를 부르거나 부르는 척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른 사람의 비밀경찰이었다."(326)


"이런 '훈련소'에서도 의심할 나위 없이 행복이 피어난다. 동료애라는 행복이다." "동료애는 나치의 커다란 유혹 물질이자 미끼였다. 나치는 행복을 갈망하는 독일인들을 진전섬망증에 이를 때까지 동료애라는 알코올 속에 빠뜨렸다. 히틀러유겐트, 돌격대, 국방군, 수많은 훈련소와 연맹들을 통해 어디에서나 독일인을 동료로 만들었고 저항할 수 없는 나이에서부터 이런 마취제에 익숙해지게끔 했다." "동료애는 시민적인 의미에서든, 더 나쁜 종교적인 의미에서든 자기 스스로 책임진다는 느낌을 완전히 없애버린다." "'각자 자기를 위해서'라는 냉혹한 법칙이 아니라 '모두 한 사람을 위해서'라는 관대한 법칙 아래 살게 해준다." "더 나쁜 것은 동료애가 자기 자신과 신과 양심 앞에서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한 책임을 덜어낸다는 사실이다. 그는 동료들도 다 하는 일을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곰곰이 생각할 시간도 없다. 동료가 그의 양심이고 그는 동료들이 다 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용서받는다."(3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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