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주의 역사 - 각주는 어떻게 역사의 증인이 되었는가
앤서니 그래프턴 지음, 김지혜 옮김 / 테오리아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1장 각주─종의 기원


"1백 년 전이라면,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간단히 구분했을 것이다. 곧 텍스트는 설득하고 주는 증명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17세기에조차도 일부 호고가(好古家, antiquary)는 기록을 담은 부록에 〈증빙자료Preuves〉라는 제목을 붙였다. 반면 오늘날 많은 역사가들은 그들의 텍스트가 가장 중요한 증명, 곧 증거에 대한 통계적 분석이나 해석학적 분석의 형태를 띠는 증명을 제공하고, 주는 그 사료만을 구체적으로 명시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런 경우에 많은 비평가들은 저자들이 사료를 오독했거나 잘못 해석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고 나면 저자들이 주장을 반박하느라 애쓸 필요가 없다. 그런 비판들은 대부분의 경우 한가지 일반적이고 문제성 있는 가정─저자들은 그들의 텍스트에 담긴 모든 주장의 증거를 빠짐없이 열거할 수 있다는 가정─에 부분적으로 의지한다. 하지만 사실상 누구도 중요한 문제와 관련된 사료를 전부 다룰 수는 없다. 하나의 주에 그 모두를 인용할 수는 더더욱 없다."(32-3)


"각주를 쌓아 간다고 해서 텍스트의 모든 진술이 검증된 사실로 쌓은 난공불락의 요새에 기대고 있음을 입증할 수는 없다. 오히려 각주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존재한다. 첫째, 각주는 설득한다. 각주는 독자에게 역사가가 수용할 만한 양의 연구를 했음을, 그 분야에서 용인될 만한 충분한 연구를 했음을 확신시킨다. 치과 벽에 걸린 면허증처럼, 각주는 역사가가 자문을 구하고 추천을 받기에 〈충분히 훌륭한〉 실무자임을 증명한다. 그러나 역사가가 어떤 구체적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둘째, 각주는 역사가가 실제 활용한 주요 사료를 나타낸다. 각주는 보통, 사료의 텍스트를 해석하면서 역사가가 정확히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설명하지 않지만, 비판적인 동시에 개방적인 독자가─부분적으로─그 일을 할 수 있게 충분한 단서를 제공한다. 어떤 장치도 이보다 더 많은 정보를─혹은 더 큰 확신을─줄 수는 없다."(40-1)


"고대 세계와 르네상스 시대의 인습적인 정치사가들은 하나의 수사적 전통 안에서, 말하자면 자신의 동료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정치인이나 장군으로서 글을 썼다. 그들이 생산한 역사는 사료와 연대 추정보다 미덕과 악덕에 대한 관심을 훨씬 더 크게 반영했다. 그들이 저작은 보편적인 타당성을 주장한다. 그들은 선과 악, 신중하거나 경솔한 언동과 행동의 예,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도 유효한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교훈을 주는 예를 유려한 언변으로 묘사했다. 반대로 근대의 역사가들은 자신의 명제를 지지하려 할 때조차 한계를 분명히 한다. 각주는 중심 이야기와 연동하지만 또한 확실히 구별되는 부차적인 이야기를 형성한다. 위쪽에 놓인 서사를 지탱하는 사유와 연구 자료를 제시하면서, 각주는 그 서사가 연구 형태, 기회 그리고 역사가가 연구하는 동안 가졌던 구체적인 질문의 종류에 따라 역사적으로 조건지워진 산물임을 증명한다."(41-2)


2장 랑케─과학적 역사에 관한 각주


"(2차 사료보다 1차 사료에 의지했던) 랑케는 단순히 자신이 읽고 필사하고 사용했던 것을 쌓아 두기만 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그는 1830년대와 1840년대 그의 주요 저서인 《종교개혁 시대의 독일 역사》를 가리켜 독일 기록보관소를 누빈 승리의 행진에서 얻은 결과물이라고 표현했다. 랑케는 유명해진 말로, 이 두툼한 책이 고작해야 역사학의 혁명을 한 모금 들이킨 그 전조일 뿐이라고 예언했다. 〈나는 우리가 더 이상 사료를 모방한 가공물에 근대의 역사를 근거시킬 필요가 없음은 말할 것도 없고─직접적인 지식인 경우를 제외하고─동시대 역사가들의 보고서에도 근거할 필요가 없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우리는 목격자의 설명과 가장 진정서 있고 직접적인 사료들에 근거해 그 역사를 구성하게 될 것이다.〉 그는 인쇄된 텍스트를 찾아내고, 베껴 쓰고, 평가하고, 편집하고, 필사된 텍스트와 대조하는 고된 작업 내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75-6)


"예를 들어, 종교개혁의 역사에 부록으로 부칠 기록을 준비하면서, 랑케는 〈그 연구에 참여할 독자〉, 〈참여적인 독자〉를 요구하는 서문 원고를 거듭 작성했다. 그는 자신이 해당 사료 혹은 자신이 활용한 사료를 모두 인쇄할 수는 없음을 인정했다. 〈공문서 기록을 통째로 출판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적인 독자라면 최소한 그가 인쇄한 기록을 철저히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독자에게, 그가 사료에서 비롯된 소소한 언어적 어려움이라고 표현한 것을 극복할 것과, 원사료가 대사건들에 대해 제공하는 〈특별히 생생한〉 설명을 따라갈 것을 촉구했다. 가능하다면, 독자는 본문과 사료를 함께 공부해야 했다." "랑케 자신은 계속해서 새로운 사료를 입수하게 되었을 때 느끼는 짜릿한 발견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그는 새로운 종류의 사료가 자신의 시야를 넓혀 주고 자신을 더 객관적이게 한다고 생각했다."(76-7)


"확실히, 이례적으로 길었던 랑케의 노년에─특히 교사로서 그의 호소가 실패하기 시작했을 때─의심이 일기 시작했다. 랑케가 특정 부류의 기록─베네치아 대사가 상원에 보낸 공식보고서 같은 것─을 과거의 상황이나 사건을 채색한 재구성물로 보지 않고, 그런 상황이나 사건으로 향하는 투명한 창으로 받아들인 것은 부당했음이 자명해졌다. 그런 기록의 작성자는 엄격한 관행의 틀 안에서 그 기록들을 작성했고, 그 청중들에게 자신이 직접 보고들은 것만 보고하지 않았으며 실제로 일어난 일을 그대로 들려주기보다는 개인적인 이론을 확신시키려는 일이 잦았다."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주요 기록과 명문가의 문서를 신뢰한 랑케가 충분히 살피지 않고 역사에 대한 특정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였음이 자명해졌다. 그런 해석은 민족이나 문화에 관한 이야기─처음에 과거에 대한 랑케의 관심을 사로잡았던 이야기─보다 국가와 군주들의 이야기에 우위를 두는 것이었다."(86-7)


3장 역사가는 어떻게 뮤즈를 찾았을까─각주에 이르는 랑케의 길


"랑케는 자신의 출판인인 게오르크 라이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첫 책이 국가의 검열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 것인지와 같은 민감한 질문을 던졌다. 그는 또한 한층 더 불안해하며 각주의 문제를 제기했다. 놀랍게도 랑케는 젊은 저자로서 부득이한 경우에만 주를 사용해야 할 것 같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는 불쾌감을 주는 것들을 가급적 짧게 유지했다. 〈나는 진정한 주석에 열중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피했다. 하지만 이제 막 자신의 길을 만들고 자신감을 얻어야 하는 초심자의 연구에서 간접인용은 불가피하다고 느꼈다.〉 랑케는 여전히, 각주가 있음을 알리는 표시로 자신의 텍스트를 망가트리지 않고 진흙이 붙어 부어 오른 발 같은 주석으로 자신의 지면을 더럽히지 않을 방법을 찾고 싶어 했다. 그는 고전작가들의 판본에서 이미 일상적인 관행이 된 것처럼, 페이지마다 혹은 절마다 행수를 제한하고 주는 본문에 맞춰 끝에 둘 것을 제안했다. 랑케는 자신의 저작에서 주석의 존재를 기껏해야 필요악 정도로 여겼다."(91)


"젊고 무명이던 랑케가 자신은 사료고증의 형식적인 측면에는 관심도 없으며 현학적이어 보이는 것을 혐오한다고 공언했을 때, 그는 그저 점잔을 뺀 것이 아니었다. 설사 랑케가 자신의 출판인이 학문성 못지않게 문체에도 신경을 쓴다는 사실을 알았을지라도 말이다." "그는 자신의 텍스트를 하나의 전체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 그 텍스트를 뒷받침하는 증거를 찾기 위해 자신의 책과 주, 발췌문과 요약문을 뒤졌다. 그는 이미 완성된 텍스트라는 스튜에 출전 표시라는 양념을 뿌리기 위해 그런 양념통을 사용했다. 이는 랑케가 일관되게 실천했던 바였던 것 같다. 노년에 그가 비서들과 함께 그리고 비서들을 통해 작업했을 때에도 그의 방법에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 젊은이들은 출전의 표시된 사항들을 추적해야 했는데, 랑케는 그저 단서만 줄 뿐이었고 때때로 그것들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기도 했다. 이 점은 〈언제나 랑케에게 납득시키기 아주 어려운 점〉이었다."(92-3)


"역사는 역사적 과거와 역사가의 연구라는 이중의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는 점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는커녕, 랑케는 학계 기술자들의 추한 장치로 자신의 강력한 서사와 보기 좋게 잘 짜인 전투장면을 망가뜨리는 일을 피했다." "그는 최상의 역사적 서사는 고전적인 것이며 주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모든 기술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면, 그래서 학문적인 장치를 제거할 수만 있다면 그런 장치 없이 글을 쓰기를 갈망했다." "랑케는 무엇보다도 〈오직 있었던 그대로만 말하기를 원했다.〉 그런데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여러 사람이 보여 주었듯이, 역사가로서 랑케의 의도에 관한 이 유명한 격언은 사실 훨씬 더 유명한 투키디데스의 구절을 전략적으로 배치한 인용문이었다. 자신의 진지하고 정확한 설명을 위한 모델로 그리스의 정치사가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을 인용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작품에 해설을 덧붙여 두 사람의 텍스트 사이에 있는 문학적 관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을 반길 리 없었다."(96-8)


4장 각주와 계몽사상가─계몽주의의 간주곡


"역사서술에서 서사와 비평적 성찰의 결합은 19세기가 동트기 전에─혹은 랑케 이전에─확립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새로운 가설을 생각할 때가 되었다." "예를 들어, 1768년에 티소가 《문인들의 건강에 관하여》라는 정교한 연구서를 출간했을 때, 티소는 자신의 책 서문에서 〈프랑스 저술에서 나날이 훨씬 더 가혹하게 인용이 추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용을 유지한 것에 대해〉 스스로를 변호해야 한다고 느꼈다. 절대 완벽하며 후속세대가 더 발전시킬 필요 없는 저작의 저자만이 인용을 멈출 권리가 있다고 티소는 설명했다. 티소 자신의 경우는 독자가 같은 문제를 계속 공격할 것이라 예상되기 때문에 자신이 사용한 사료를 표기해야 한다고 느꼈다. 결국 그는 어떤 식으로도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을 곳인 난외에 몇 마디 말을 배치해 자신이 의거한 작가들에게 〈그들에게 빚지고 있는 존경〉을 보인다고 해도 〈해로울 것이 없음〉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127-9)


"(기번을 비판한) 데이비스와 기번 모두 진지한 역사서에는 주가 있어야 한다고 전제했다." "각주는 잉글랜드의 위대한 계몽주의 역사가들이 그들이 것으로 만들기 전에 이미 역사가들의 표준적인 작업 절차의 일환이 되어 있었다." "1776년 4월 8일 데이비드 흄이 출판인 윌리엄 스트레이헨에게 보낸 편지는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의 각주가 처음엔 미주였다는 것 그리고 흄이 불평하고 난 뒤에야 그 주들이 기번의 지면 위에서 이제 우리가 그것들의 전통적인 제 위치라고 생각하는 지점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일깨운다. 그 편지는 또한 기번의 각주작성의 기술적인, 곧 고증의 측면이 설명이나 형태에서 그리 혁신적이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 흄은 역사학의 텍스트에서 간접인용을 할 때 그 진술의 전거를 확인시켜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조금도 새로운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그런 주가 편리한 위치, 곧 지면의 발치나 난외를 차지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권고했다."(136-8)


"기번이 미주로 처리한 《로마제국 쇠망사》 1권을 내놓기 10년 전에 이미 유스투스 뫼저는 화려하게 사료고증을 거친 《오스나브뤼크의 역사》의 예비 초판 인쇄를 마쳤다. 예외적인 개인들이 도전한 전통적 범주를 폐기하는 일보다는 그들의 업적을 주목하는 일에 훨씬 더 적극적이었던 에두아르트 푸어터는 역사서술을 다룬 20세기 초의 역사가로서 뫼저의 업적이 (비록 내용은 지극히 보수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방법과 표현에서 놀랍도록 근대적이며 심지어 급진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푸어터가 인정했듯이, 뫼저는 자신이 연구한 사료를 숨김없이 밝히려고 노력했다. 요컨대, 전혀 다른 세계, 전혀 다른 사회, 심지어 전혀 다른 도서관에서 지내며 연구했던 18세기의 여러 역사가들이 각주를 작성했다. 역설적이지만, 역사학의 고증을 분명하게 제시하라는 요구가 확립된 시기는 현학을 세속적 미신의 한 형태로 여겨 경멸했던 계몽사상가들의 시대였다."(142-3)


5장 미래로 돌아가다 1 ─드 투, 세부사실을 고증하다


"탁월한 법률가이자 라틴어 학자였던 자크-오귀스트 드 투는 1544년부터 1607년에 이르는 자기 시대 유럽의 역사를 직접 쓰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보댕과 마찬가지로, 드 투는 프랑스의 정치체제가 종교 전쟁에서 몰락하는 것을 목격했다. 보댕과 달리, 그는 계속해서 프랑스 가톨릭이─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은 말할 것도 없고─종교 전쟁으로 인해 프로테스탄트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많은 비난을 샀다고 믿었다. 드 투는 정직하고 불편부당한 서사가 사회적 정치적 평화의 토대에 기여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것은 기즈 공 같은 강력한 가톨릭 악당의 죄와 자신의 친한 친구 조제프 스칼리저 같이 학자의 면모를 갖춘 프로테스탄트의 무고함과 고귀함을 입증할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서사가 불관용과 타락으로 찢긴 것을 종교적 관용과 공적인 삶의 엄격함으로 봉합할 수 있음을 증명하게 되리라는 것이다."(176-7)


"드 투는 (직접 증언을 근거로 삼아) 가능한 한 자신의 증거와 독자 사이에 자신의 라틴 문체를 제외하고 어떤 장애물도 두지 않으려고 했다." "동시대의 역사에서는 자연스럽게 직접적인 증언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드 투에게는 다른 자원도 있었다. 예를 들어, 그는 자신의 방대한 서재를 자신과 다른 이들의 연구조사를 위한 하나의 공적 토대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직무상의 위치 덕분에 자신이 접근할 수 있었던 국가 문서들을 사용했다. 랑케나 기번보다 훨씬 먼저 비평적 역사─저자가 동기를 찾고 원인을 확인하느라 부심하는 것은 물론이고 시간상에 나타난 몇 개월의 오차를 두고 고심했던 종류의 역사─가 존재했다. 드 투가 이런 종류의 역사를 쓴 유일한 저자는 아니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잉글랜드 역사를 서술하기 위해 로버트 코튼이 수집해 놓은 방대한 양의 목격자 증원과 필사본에 의지했던 캄덴 역시 놀랄 만큼 비슷한 예를 제공한다."(183-4)


"드 투가 유일하게 거부한 일은 그저 주를 덧붙이는 일뿐이었다. 주를 덧붙였다면 동시대의 모든 독자가, 나중에 자신의 작업장을 찾을 방문객을 위해 그가 비축해 둔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그는 해적판 《현대사》를 〈정치적〉 주해로 치장한 멜키오르 골다스트에게 통역할 수 없는 라틴어로 호통을 쳤다. 그리고 드 투의 명분은 쉽게 찾을 수 있다. 드 투는 그 작품의 토대에 들인 그 모든 비평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상부구조는 고전적인 것으로 유지하고 싶어 했다. 그는 확실히 각주가 힘찬 그리스 로마식 열주와 지붕선을 망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에 더 많은 것을 품고 있었을지 모른다. 드 투의 측근들─누구보다도 로마의 법률가들, 곧 완전하고 정확한 인용이나 '주장'의 전통이 고대 세계에 이미 존재했던 학과의 실무자들로 이루어진 그의 측근들─사이에서 각주와 결부된 문학적인 문제와 지적인 문제 모두 많은 논의를 거쳤기 때문이다."(187-8)


6장 미래로 돌아가다 2 ─교회사가와 호고가의 개미 같은 근성


"1677년에 키르허는 암스테르담에서 웅장한 도판들을 수록해 중국의 종교적 유물과 세속적 유물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경이에 관한 저서를 발표했다." "모든 점에서 키르허는 장소, 신분, 출처를 확인하는 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가령, 책 끝에 등장하는 비문의 사본에는 발견 장소와 일자가 함께 제시되었고 중국인 마테우스가 〈1644년 로마에서···원본으로부터 이 비문을 직접 옮겨 적었다〉는 점을 명시했다." "그가 옮겨 쓴 1차 사료들이 서로 모순될 때조차 그는 그것들을 그저 옮겨 쓰기만 했고 독자들이 그 불일치를 걱정하게 내버려 두었다." "키르허는 드 투와 전혀 다른 역사 연구 모델─어울리지 않는 생소한 것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백과사전적 적극성을 특징으로 하는 모델, 같은 지면 위에서 여러 목소리가 말하도록 허용하고 여러 종류의 문자가 등장하도록 허용하는 모델─을 제공했다. 무엇보다 그는 사실을 엮어 감동적인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일보다 사실을 확인하는 데 더 관심을 보였다."(199-203)


"정치사가는 모든 증거를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대조하는 일을 고집했을 때조차 실용적인 통찰력과 무엇보다 고급한 문체를 칭찬했다. 교회사가는 지식을 높이 평가했다. 야누스 니키우스 에리트라이우스는 바로니오의 생애에 관해 쓰면서 바로니오의 경건함에 전율한 것이 아니라, 그가 〈거의 무한한 수의 책 속에 흩어져 있던 어마어마한 양의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고, 그 모두에 통달하고, 각 주장에 대한 어떤 판단에 도달하고, 최종적으로 학식 있고 정확한 방식으로 글쓰기에 몰두한〉 엄청난 에너지에 전율했다." "프로테스탄트 학자들은 자신들의 이른바 혁신이라는 것이 실은 복원임을 입증할 사료를 찾고 출판하는 방대한 작업에 이에 견줄만한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 매튜 파커는 대리인을 파견해 잉글랜드의 섬들을 오가며 앵글로색슨어와 라틴어로 된 중세 잉글랜드 교회의 필사본 유물들을 찾게 했다."(216-7)


"묵직하게 사료를 제시한다고 해서 엄격한 객관성이 부여되지는 혹은 함축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파커는 원본 원고의 복사본에 적힌 내용을 담은 새 페이지로 빈틈을 메워 자신의 필사본을 〈개선하려고〉 전문 필경사를 고용했다. 9세기 알프레드 대왕의 생애를 다룬 아세르 주교의 전기를 출간했을 때, 파커는 이제 사라지고 없는 그 필사본의 철자, 그리고 심지어 고전적이지 않은 어휘까지 살그머니 바꾸어 버렸다." "가톨릭 학자들 역시─때로는 아주 강압적으로─그들의 증거를 조작했다. 예를 들어 로마 카타콤의 개방은 초기 그리스도교도의 삶과 예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영적 열광을 만들어 냈다. 가톨릭 세계 도처에서 강력한 통치자와 부유한 도시들이 그들의 교회에 안치할 순교자의 유골을 얻기 위해 경쟁했다. 카타콤을 담당한 로마의 학자들은 이에 동조하여 (순교자들의) 유골을 수습해 골격을 만들고 거기에 이름을 붙였다."(218-20)


7장 학식의 심연 속 명석함과 판명함─근대적 각주의 데카르트적 기원


"1700년경에 논쟁적인 문제에 몰두했던 작가─다른 작품들의 출전 표시에 나타난 모든 오류를 담고자 했던 피에르 벨의 《역사 비평 사전》이나 모세5경의 진위 여부를 분석하면서 이를 사료고증으로 뒷받침한 리샤르 시몽의 《구약의 비판적 역사》 같은 작업들에서─는 모두 자신들이 지뢰밭에 들어서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연스럽게 각주는 숨은 공격과 공공연한 공격에 맞서 자신을 보호하는 최선의 방법으로서 역사학적인 주제와 문헌학적인 주제를 다루는 많은 작가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17세기에는 베이컨, 데카르트, 보일, 파스칼이 고대의 과학적 권위를 해체하는 것이 목도되었다. 프랑스의 프롱드와 영국의 청교도가 왕의 정치적 권위를 해체하는 것이 목격되었고, 라 페레르와 스피노자가 성서의 역사적 권위를 해체하는 것이 목격되었다. 권위와 증거의 문제가 모든 면에서 대두했다. 17세기 말의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필연적으로 지적 권위에 관한 이런 저런 물음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267)


"그러나 과거를 연구하는 사람은 특별한 문제에 직면했다. 벨은 17세기 말이 경과하면서 성직자들이 보인 불관용의 일반적 형태에 저항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들의 학문분과 전체에 대한 훨씬 더 근원적인 공격에 맞서야 했던 많은 유럽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폭넓은 영향력을 발휘했던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은 새로운 철학을 위한 프로그램을 포함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역사학적 지식을 고사시키는 비평도 포함하고 있었다. 데카르트는 역사학과 인문학을 유익함과 엄격함에서 여행보다 나을 것 없는 유희로 폄훼했다." "벨과 그를 따라 각주를 달았던 동료들은 (수학적 형식을 역사 연구에 직접 적용하려 했던 학자들과 달리) 더 건설적인 방식으로 데카르트에 답했다." "벨은 역사의 〈확실성〉이 비록 수학의 확실성과 다르지만, 〈수학의 심오한 추상성〉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며 인간의 삶에 훨씬 더 잘 적용되며, 심지어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훨씬 더 확실하다〉고 주장했다."(267-71)


"그러나 기번이 오래 전에 지적했듯이 그리고 더 최근에 리프킹이 동의했듯이, 벨의 설명 모델에는 여전히 하나의 실질적인 특징이 결여되어 있었다. 바로 경제다. 벨은 그의 글을 급하게 썼고 이후 판본에서 본문이 아니라 해설에 새로운 정보를 추가했다. 이는 너무 복잡해서─그리고 때로는 너무 자기 모순적이어서─독자는 박식의 늪 같은 데 빠진 자신을 발견했다. 때때로 본문은 독자에게 확실한 안내나 인식할 수 있는 하나의 이야기를 제공하기보다 몇몇 일화를 제공하는 데에 그쳤다." "벨이 공격한 바로 그 설명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는 데에는 여러 해의 시간이 걸렸고 여러 지적 진영에서 온 학자들의 노력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벨의 적수 가운데 한 사람인 동료 위그노이자 망명 지식인인 장 르클레르크는 벨이 할 수 있었던 것보다 독자를 더 많이 배려한 각주 이론을 고안해 냈다." "르클레르크가 보기에 역사가가 기꺼이 각주를 사용하려는 것은 비판적 합리성의 표시였다."(278-81)


에필로그 몇 가지 결론적 각주


"17세기와 18세기 문자공화국에서 벨과 기번의 각주는 그들에게 뻔뻔함과 박식함이라는 두 가지 평판을 모두 안겼다. 그들의 장치는 그들이 자신들의 서재를 잘 활용했다는 것을 증명했으며 몇몇 다른 사람들이 비슷한 방식으로 연구하고 글을 쓰도록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수사적인 서사보다 독창적인 가설에 더 풍성한 보상을 안겼던 19세기 독일의 새로운 대학 체제에서는, 텍스트보다 각주와 고증한 사료 부록이 누군가를 더 유명하게 만들 수 있었고, 비평적인 주장이 건설적인 주장보다 더 많은 모방자를 얻을 수 있었다. 하인리히 니센처럼 그 많은 총명한 젊은이들이 주석을 잘 단 그들의 박사 학위 논문 주제로 사료비평의 문제를 택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마침내 내용과 형식이 서로 일치했다." "19세기 말과 20세기에 유럽 주요 국가의 기록보관소가 열람실을 개방했다. 허가받은 독자들이 그곳에 보관된 (거의) 모든 사료를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292-3)


"출간된 것이든 출간되지 않은 것이든 사료에 아무리 접근한다 해도 역사의 미해결 문제를 모조리 해결할 수는 없음이 드러났다." "그러나 불행히도 각주가 표준적인 학문적 도구의 지위로 부상하면서─많은 경우─각주의 양식은 크게 축약된 기록 인용의 목록으로 쇠퇴해 버렸다. 랑케는 근대 역사학의 장치를 창조한 연금술사로 여겨지지만, 사실 각주를 싫어했고 각주를 만드는 데에서는 자신의 독창적인 연구나 책의 부록을 쓸 때 기울였던 세심한 주의와 창의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각주가 가장 눈부시게 번성했던 때는 그것이 본문의 진실성을 뒷받침하는 것은 물론이고 본문의 서사에 대한 역설적인 언급으로도 기여했던 18세기였다. 19세기에 각주는 비극적 코러스의 탁월한 역할을 상실했다. 많은 카르멘들처럼 각주는 노동자로 전락해 거대하고 더러운 공장에 갇힌 자신을 발견했다. 예술로서 시작된 것이 어쩔 수 없이 일상이 되었다."(295-6)


"역사가의 간접인용과 직접인용의 관행이 그의 지침에 부합하는 일은 드물다. 각주는 결코 해당 작품에서 사실에 관한 모든 진술을 뒷받침한 적이 없으며 뒷받침할 수도 없다. 모든 실수를 막거나 모든 불일치를 없앨 수 있는 장치는 없다. 현명한 역사가는 자신의 일이 페넬로페의 길쌈 일과 비슷하다는 것을 안다. 무늬와 색상의 조합이 끝없이 변하면서 각주와 텍스트는 계속 함께 할 것이다. 안정성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적으로 조건지워져 있고 오류의 가능성이 뚜렷한 각주만이 과거에 관한 진술이 확인 가능한 사료에서 도출되었음을 우리에게 보증한다. 그리고 그 점이 우리가 그 진술을 신뢰해야 하는 유일한 근거이다." "각주는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보증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주는 예술과 과학의 불가피하고 혼란스러운 혼합, 곧 근대 역사학의 혼란스럽지만 불가피한 일부를 형성한다."(3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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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세이(平成)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요시미 슌야 지음, 서의동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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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글 '헤이세이'라는 실패─'잃어버린 30년'이란 무엇인가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2세는 17세기 초 유럽에서 최대최강을 목표로 군함 '바사vasa호'의 건조를 명했다. 1628년 8월 10일 마침내 완공된 바사호는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항해를 시작했지만 얼마 안가 선체가 중심을 잃고 쓰러지면서 침몰했다." "바사호 참사는 일부 치명적인 미스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계획이 지나치게 거대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지나치게 큰 규모의 배에 과다한 중장비, 너무 높은 마스트 등 모두 최대이길 바라는 왕의 주문 자체에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기세등등한 대국 국왕의 명령에 대해 어느 누구도 정면에서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고, 기술자는 스스로의 지식을 구사해 부여된 직무 범위 내에서 왕의 의향을 좇아 일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직무에서 결코 오류를 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부분의 최적화는 전체의 최적화와 다르다. 부분적으로는 아무리 똑바로 쌓아올려도, 전체가 똑바르게 되지는 않는다."(8-9)


# 헤이세이 30년 동안 발생한 4개의 쇼크

1. 버블경제의 붕괴(1989.1~1995.1)

2. 한신·아와지대지진과 옴진리교 사건(1995.1~2001.9)

3. 9·11 테러와 국제정세의 불안정(2001.9~2011.3)

4.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제1원전사고(2011.3~2019.4)


제1장 몰락하는 기업국가─은행의 실패, 가전의 실패


"1980년대 말 일본은 자신감이 절정에 달했다. 경제는 호조였고, 그 기반도 약하지 않았다. 내수도 상승하고 있고, 실업률은 최저 수준, 학생의 취업 전선도 공급자에게 대단히 유리한 시장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그러므로 여유가 있을 때 산업의 체질 개선과 기술 혁신을 추진한다면 〈개인 소비도 솟아오르고 성장은 지속할 것〉으로 여겨졌다." "세련된 자신을 연출하는 것이 행복의 실체라고 모두들 믿을 수 있던 시대가 버불의 1980년대였다. 젊은이들은 아직 1990년 이후 등 미래에 대한 불안은 없었고, 미래는 과거와 다름없이 밝고 풍요로울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성장 시대의 인간에게는 성장 이후의 사회에 대한 상상력이 작동하지 않는다. 차를 운전하면서 앞이 잘 안 보일 경우 똑바른 길이 있을 것으로 믿어버리는 것과 같아, 커브를 꺾을 수 없는 상태로 벼랑에서 굴러 떨어지고 만다. 버블시대에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다."(43-5)


"(버블이 이미 제어불능 단계로 확대되어버린) 1980년대 말의 일본경제를 되돌아보면 한편으로는 (1985년 9월 G5에서 체결된 플라자합의가 촉발한) 엄청난 기세의 엔화강세로 국내 제조업은 대타격을 입었고, 이는 특히 중소 제조업에서 심각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수 확대를 위해 금리가 대폭 완화됐고, 시중에는 대량의 자금이 풀렸지만, 이들은 엔화강세로 이윤이 감소한 제조업을 활성화시키기보다는 부동산이나 주식 투자로 돈을 벌려는 방향으로 사람들을 몰아갔던 것이다. 문제삼아야 할 것은, 당시 정말 필요했던 것이 금리인하나 재정투입이었던 것인가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목표는 미국의 무역적자를 축소시키기 위해 일본의 내수확대와 수출주도형 산업의 구조전환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엔화강세를 진정한다는 이유로 추진된 금융완화는 내수를 확대시키고 제조업을 지지하기보다 주식과 부동산에 대한 과잉투자를 초래했다."(49-50)


"거대함선 일본호가 옆으로 쓰러지며, 마침내 침몰에 이르는 첫 충격이 나타난 것은 1995년부터였다. 이 해 7월, 코스모신용조합의 경영이 파탄했고, 8월에는 효고은행, 기즈신용조합도 파탄, '주센住專문제'가 결정적으로 심각해진다. 1990년 이후 땅값이 대폭락을 계속하는 가운데 땅값 상승을 전제로 확대노선을 밟아온 금융업계의 붕괴가 가장 약한 곳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붕괴는 1997년부터 1998년에 걸쳐 정점에 달한다. 1997년 11월 우선 산요증권이 파탄했고, 이어 20대 대형은행 중 하나인 훗카이도척식은행이 파탄했다. 이어 4대 증권회사의 하나인 야마이치증권이 '자진폐업'한다. 붕괴는 일본경제의 중추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났다. 일본호는 이미 구멍이 뚫려 선내에 물이 차는 단계를 지나 배 전체가 바닷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이듬해인 1998년에는 일본장기신용은행과 일본채권신용은행이 잇따라 파탄을 맞았다."(54-5)


# 주센住專문제 : 주택금융전문회사가 버블붕괴 직후 떠안은 불량채권과 그 처리를 둘러싼 문제


"2000년대 이후 파탄의 중심은 금융계에서 과거 '재팬 이즈 넘버원'의 주역이던 제조업의 붕괴로 향해갔다. 그중에서도 일본의 실패를 두드러지게 드러낸 것은 전기電機산업이다. 1990년대 말 금융의 실패는 버블시대의 '재테크' 광풍에 휩쓸린 기업의 말로였지만, 2000년대 이후 전기산업의 실패는 보다 뿌리 깊었다. 일본기업의 체질 그 자체가 1990년대부터 진행된 글로벌화와 인터넷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결과였다." "일본 대기업이 (종합전기 메이커라는) 수직적인 분업체계 유지에 집착하면서 글로벌한 수평분업에 적응하지 못했던 것은, 그들이 반도체가 〈절대로 져서는 안 되는 '본업'〉으로는 간주하지 않았던 것과도 표리를 이룬다. 일본에서 '전기메이커가 사라지는 날'을 생생하게 묘사한 오니시 야스유키에 따르면 가전에서 중전重電까지 폭넓게 취급하는 일본기업에게 〈반도체는 여러 사업 중 하나에 불과하고 '실패해도 회사가 망할 일은 없다'는 안이함 속에서 경영이 이뤄졌다.〉"(64-9)


"헤이세이 시대, '설마 그럴 리가 없다'고 여겼으나 몰락으로 치달은 일본의 전기기업 중에서도 특히 실패 규모와 영향이 컸던 것은 (근대 일본의 전기화를 중추적으로 담당해 온) 도시바의 실추였다." "거함의 침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조직내부에 억압의 사슬이 엄존했으며 정보도 횡적으로 공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도시바에서는 '챌린지'라는, 통상의 방법으로는 달성 불가능한 목표를 경영진이 각 부문에 강요했다. 그것이 상명하달식으로 전달되면서 이익을 부풀려 수익이 좋아진 것처럼 꾸미는 부정회계가 만연했다." "한편으로 도시바 몰락의 직접 요인은 그들이 2006년 거액을 쏟아부어 웨스팅하우스의 원자력 부문을 매수한 데 있다." "이미 당시, 1979년의 스리마일섬과 1986년의 체르노빌 사고를 겪으면서 원자력은 결코 안전하지 않고 리스크가 큰 시설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도시바가 원전건설에 집착한 이유는 원전수출이 국책사업으로 지정됐기 때문이다."(78-80)


제2장 포스트 전후정치의 환멸─'개혁'이라는 포퓰리즘


"헤이세이 직전인 1988년 발각된 리쿠르트 사건은 헤이세이 정치의 액상화를 가속화하는 쇼크로 작용했다. 리쿠르트 사건이 원인이었다고 하긴 어렵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헤이세이 정치질서는 일거에 유동화로 나아갔다." "리쿠르트 사건의 특징은 제공된 것이 미공개 주식이라는 점인데, 종래 법적 규제의 바깥에 있던 금융상품이었을 뿐 아니라 양도대상도 극히 넓어 자민당 실력자 대부분이 포함됐고, 그 범위는 야당에까지 미쳤다. 뇌물 수수 목적도 상당히 애매했다. 일반적으로는 정계나 재계에서 리쿠르트사의 '지위'를 높일 목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지위'라는 것이 대단히 애매한 탓에 뇌물을 제공한 측은 실제로 명확한 목적의식이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저 회사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에게 미공개주식을 대량으로 건넨 것이었다. 뇌물을 건넨 목적도, 받은 쪽의 범위도, 수수 방법도 그 전까지의 상식을 크게 벗어난 사건이었다."(94-5)


"(스캔들의 여파로) 자민당 내 다케시타파가 분열하면서, 1993년 8월에는 사회당, 신생당, 공명당, 민사당 등 8개 회파會派 연립의 지원으로 일본신당의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총리로 하는 정권이 탄생했다. 물론 정권의 탄생을 배후에서 연출하고, 전후 55년 체제의 숨통을 끊은 것은 오자와 이치로였다. 호소카와 정권은 오자와의 지원 내지는 조종을 받으며 소선거구 비례대표병립제 도입 등 선거제도 개혁과 정치자금규정법 개정 등을 실현했다. 호소카와가 스캔들로 사임한 후 연립의 중추에 있던 오자와는 하타를 총리로 세우지만, 하타 정권은 2개월의 단명으로 끝난다. 이 흐름을 타고 자민당은 사회당 위원장인 무라야마 도미이치에게 총리를 맡도록 하는 신공을 발휘해 정권복귀에 성공했고, 자민당 야당시대는 종막을 고했다. 무라야마 내각 이후 하시모토 류타로, 오부치 게이조, 모리 요시로와 자민당을 중심으로 한 연립정권이 이어지지만, 모두 단명으로 끝났다."(99-100)


"리쿠르트 사건을 계기로 자민당 파벌의 정치역학은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에 걸쳐 액상화되어갔다. 특히 이 액상화, 아니 멜트다운이 발생한 중심무대는 과거 다나카 카쿠에이에 의해 구축됐고, 다나카가 록히드 사건으로 총리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정계를 지배해온 거대한 정치 권익집단인 다나카파였다. 그리고 마치 핵폭발처럼 주위를 빨아들이며 이 멜트다운을 확대시킨 것은 오자와 이치로라는, 다나카 못지않은 개성 강한 정치가였다. 오자와는 1990년대 일본 정치는 물론, 민주당 정권 탄생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헤이세이 일본 정치는 오자와를 중심으로 움직여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통의 파벌 역학이나 정당의 자기보존 능력으로 보자면 일어날 리 없는 중선거구제 파괴가 1990년대 일본에서 극적인 스피드로 추진된 것은 오자와 이치로라는, 다나카 가쿠에이로 시작하면 3대째에 해당하는, 극히 특이한 보수정치인의 움직임을 빼면 이해할 수 없다."(104)


"고이즈미와 자민당과의 관계는 1990년대에 걸쳐 치열한 대결을 거듭해온 오자와와 자민당 간의 관계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오자와의 경우, 자민당을 뛰쳐나와 신당을 만들고, 권모술수를 동원해 자민당을 궁지에 몰았지만, 그 정치 수법은 구 다나카=다케시다파와 매우 흡사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이즈미가 자민당의 지배체제와 싸우기 위해 도입한 것은 오자와적인 수업 대신 직접 언론 앞에 나서 자신의 말과 퍼포먼스로 적이 누구인지를 시사하고, 대중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정세를 전환시키는 방법이었다." "고이즈미 내각은 헤이세이 기간의 모든 내각 중에서도 가장 '성공'한 내각이다. 역으로 말하면, 헤이세이의 일본에서 고이즈미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성공한 정권은 없다." "문제는, 민주당 정권의 '대실패'와의 비교를 덧붙이면, 헤이세이 시대 정치의 성공은 고이즈미 같은 포퓰리즘적 방식으로만 달성할 수 있는 게 아니냐는 의문을 갖게 한다는 점이다."(129-32)


"2009년 8월 30일 중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115석에서 308석으로 의석수를 3배 가까이 늘리며 압승했다. 하토야마 유키오가 총리가 되고 정권교체가 실현됐다." "'콘크리트에서 사람으로'를 비롯해 민주당이 매니페스토를 통해 표방한 정책에는 자민당이 오랜 기간 누려온 기득권의 굴레를 깨뜨리겠다는 임팩트가 있었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은 먼저 거버넌스 설계에서 몇 차례 결정적인 실수를 범했다. '정'과 '당'을 일원화하겠다는 원칙을 관철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양자의 제도적인 조정 시스템을 파괴해버린 탓에 '정치주도'의 이름 아래 '관'을 권력중추에서 배제하게 됐고, 이로써 내각이 과다한 조정 리스크를 지게 됐다. 게다가 정부 내에서도 핵심인 국가전략국 구상은 그간의 내각관방 체제와 모순됐다." "결국 2012년 12월에 실시된 중의원 선거에서는 자민당이 118석에서 294석으로 3배 가까이 의석을 늘리며 압승했다."(145-6)


"수차례 정치주도의 실패를 거치면서 아베 정권은 민주당이 내건 래디컬한 정치주도를 부정하고, 이를 교활한 관저주도로 대체했다." "게다가 민주당 정권의 실패가 너무도 참담한 것이어서 사람들은 더 이상 이런 식의 '정치주도'라면 딱 질색이었다." "헤이세이 시대 일본이 추구해온 정치주도란, 공적인 의사결정의 주체를 행정기관의 관할주의 메커니즘에서 끄집어내 총리관저가 됐건 시민과 정치인들의 이니셔티브가 됐건 누군가의 강력한 리더십 하에 두려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행정에서 빼앗은 결정권은 의사결정 프로세스가 확실히 기록되고 공개됨으로써 그 공정성이 검증되지 않는다면 새로운 독재의 싹이된다. 제2차 아베정권은 민주당 정권의 실패를 뒤집고 관저주도의 기본형을 확립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최대 위험은 관저와 성청의 관계가 액상화하는 가운데 공적기록에 기반한 정치의 공정성이 뿌리부터 손상되면서 전체가 허구화한 것이다."(147-53)


제3장 쇼크 속에서 변모하는 일본─사회의 연속과 불연속


"일본 사회에는 다양한 참사를 사회 '실패'의 결과라기보다 외부에서 초래된 '쇼크'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단순한 '쇼크'로 간주하는 이는 적지만, 옴진리교 사건이나 미야자키 쓰토무의 유아연속유괴살인사건, 고베의 '사카키바라세이토'의 연속아동살상사건, 아키하바라 묻지마 살인사건, 사가미하라 시의 장애인 시설 '쓰쿠이야마유리원'에서 일어난 대량살인사건 등은 모두 범행동기가 불가해한 것으로, 광기에 의해 돌연 저질러진 '쇼크' 이상의 것으로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버블붕괴도, 중간층의 붕괴를 초래한 격차확대도 '1.57 쇼크'로 알려진 초저출산도 '지방소멸'로 일컬어지는 인구감소도, 모두 헤이세이 일본이 불가항력적으로 입은 사회적인 '쇼크'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이렇듯 '쇼크'로 간주하고 요령부득의 일로 받아들이는 수용 패턴은 사회가 정책이나 정치적 타협이 야기한 실패들을 '실패'로 인식하며 그 구조적 문맥을 정면에서 응시하는 것을 곤란하게 만든다."(161-2)


"2011년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헤이세이뿐 아니라 전후를 통틀어 일본이 경험한 최대 사건이었으며, 1995년에도 일본을 근저에서 뒤흔든 한신·아와지대지진이 발생했었다." "두 대지진 모두 고도성장기 일본식 개발주의의 위험성을 근저에서 지적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지진은 원전이나 고속도로, 인공섬 같은 기술의 한계를 드러내 보였을 뿐 아니라 전후 흔들림 없을 것으로 여겨지던 사회의 기반이 의외로 무르고, 불안정함을 일깨웠다. 1995년의 지진은 직하형이었기 때문에 붕괴 충격은 고층빌딩이나 고속도로 등 도시 인프라에서 두드러졌다. 2011년의 재해는 바다의 쓰나미에 의한 것으로 광대한 지역에 미쳤으며, 에너지 공급체계가 근본부터 의문시됐다. 두 차례 지진으로 현대 일본의 대도시와 그 광대한 배후지 양쪽 모두 도마에 오른 것이다. 또한 고도성장기에 발전해 1970년대에 확립된 도시개발과 에너지 공급체계 전체에 심각한 물음표가 붙게 됐다."(165-8)


"일본 전체가 고베시가지를 괴멸시킨 대지진의 충격 한가운데에 있던 1995년 3월 20일, 이번에는 도쿄 도심에서 사람들을 한층 격하게 뒤흔든 사건이 발생했다. 옴진리교 신도에 의한 지하철 사린사건이다." "1995년 3월 이후 지하철 사린사건의 쇼크로 옴진리 교단 특유의 타자공포감을 이번엔 거꾸로 일본 사회가 갖게 됐다. 사건 후 TV에서는 엄청난 물량의 특별 보도프로그램이 편성됐고 높은 시청률을 획득했다. 이 시기 TV는 거의 전면적으로 '옴' 관련 소재로 뒤덮였다." "신문의 경우 스포츠지나 석간신문뿐 아니라 종합지에서도 속속 센세이셔널한 제목으로 보도가 이뤄졌고, 오보도 되풀이됐다. 이는 사람들이 극히 기괴한 사건에 대한 강박적인 호기심과 불안에 휘둘리는 과정이었다. 즉, 옴진리 사건의 '쇼크'란 교단 신도들에 의한 범행만을 가리키지 않고, 그런 쇼크로 촉발돼 일본사회 전체가 빠져든 타자에 대한 공포심의 고양, 강박적인 타자 배제 등 모든 활동을 포함했다."(168-72)


"신도들에게 행해진 '모략'이나 '마인드 컨트롤'의 결과물이라는 옴사건의 해석은, 이 사건을 받아들이는 사회 쪽의 일상과는 철저히 이질적인 것으로 옴신자들을 타자화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모략'론은 옴 교단의 이해불능한 행위를, 현대 일본사회가 안고 있는 반사회적 집단의 악랄한 의도에 의한 것으로 간주한다. '마인드 컨트롤'론은 옴 신자들의 행위를 교조의 '광기'로 조작된 집단적 비정상으로 간주하고, 이 광기와 우리들 자신의 정기正氣=일상은 철저히 불연속적이라고 여긴다. 어떤 것이든 '옴'이란 불쌍하긴 하되 '우리들'과는 다른 세계 사람들이고, 그 다른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교조의 '광기' 혹은 '어둠'의 조직이라는 뜻이다. 1995년에 휘몰아친 옴 보도는 사건에 이러한 해석을 부여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공포심을 자극하면서도 우리 자신의 리얼리티가 뿌리부터 추궁당할 가능성을 박탈하면서 사건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만으로 소비되는 것을 가능케 했다."(173-4)


"헤이세이 시대를 뒤흔든 쇼크에는 〈권투의〉 보디블로처럼 보다 지속적으로 사회를 변모시켜온 것도 있다. 보디블로처럼 일본을 덮친 쇼크에는 글로벌한 신자유주의의 조류가 관통하고 있다." "헤이세이 직전은, 가장 격차를 보기 어려운 시대였다. 그러나 이 1억 총중류總中流의 상황이 헤이세이가 시작될 무렵, 버블경제 속에서 변질되기 시작했다. 변화의 방아쇠는 부동산 가격의 상승이었다. 버블경제 결과, 자산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격차가 확대됐다. 자기 소유의 집이 없는 사람들은 부동산 가격이 너무 올라 앞으로 평생 집을 가질 수 없음을 깨달아야 했다. '격차사회'라는 단어가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격차가 확대되고 있다고 답한 사람이 늘어났을 뿐 아니라 상대적 박탈감으로 자신은 하층에 속한다고 답하는 사람도 늘어났다. 1980년대 말은 계층면에서 일본인들의 의식에 균열이 확실히 생겨나던 순간이었다." "일본이 다행증多幸症적인 소비사회에서 불안투성이의 격차사회로 바뀌었던 것이다."(182-5)


"헤이세이 일본 사회가 양극화로 나아간 것은 인구구조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초소자화超少子化가 멈추지 않게 된 것이다." "여성 한 사람이 평생 동안 평균적으로 낳는 아이 수인 합계특수출생률이 연속해서 1.50을 밑돌고 있는 것은 그 국민의 인구가 자력으로 회복가능한 선을 넘었다는 것, 즉 사회의 기반이 더 이상 지속불가능하게 됐음을 의미한다. 인구동향에는 일종의 관성의 법칙이 작용하기 때문에 출생률 저하는 장기적인 추세로 유지된다. 실제로 합계특수출생률이 2.00을 밑돌기 시작한 뒤 반세기 가까이 지났기 때문에 이 추세는 이미 장기화되고 있다. 그리고 반세기 이상 전부터 출생률이 저하한 영향이 지금, 인구감소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즉 출생률 변화가 인구구조를 확실하게 변화시키기 시작하는 데까지는 반세기의 시차가 있다. 지금 당장 소자화의 근원적인 대책이 마련돼 출생률이 회복되더라도 인구가 회복기조로 바뀌는 것은 적어도 반세기 이상 지난 뒤의 일이라는 것이다."(199-201)


제4장 허구화하는 아이덴티티─'아메리카닛폰'의 행방


"헤이세이 경제가 버블 붕괴로 시작했고, 헤이세이 정치가 55년 체제를 무너뜨렸으며, 헤이세이 사회가 단카이 주니어 세대의 취직빙하기와 조우함으로써 초소자화가 멈추지 않을 것을 예고하듯, 헤이세이 문화는 '종말'의 예감을 이어받는 것으로 시작했다." "'종말'에 대한 관심은 사회의 성장에 대한 '꿈'이 성장의 끝에 대한 '불안으로 바뀌는 순간에 부상한다. 1970년대 초는 바로 이런 불안감이 분출하던 시대였다. 이런 불안감은 1980년대의 다행증적인 시대를 넘어 재부상했고, 현실 속의 다양한 붕괴가 사회 전반에서 분출하던 것이 헤이세이 시대였다. 전후 일본의 '종말' 이미지의 원점으로 삼아야 할 것은 1954년 비키니 환초에서 미국의 수소폭탄 실험으로 일본의 참치어선이 피폭된 것을 계기로 제작된 영화 《고질라》다. 태평양 저편에서 등장한 고질라는 도쿄 도심부를 유린하며 수도를 철저히 파괴한다."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도쿄대공습의 재연이고 전후 일본인에게는 원풍경原風景적인 '종말'이었다."(216-8)


"1980년대의 '종말' 예감은 묵시록적인 이미지를 계승하면서도 '핵=방사능'으로 인한 문명 파멸에 대한 성찰을 심화시킨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전쟁보다는 테러, 그것도 내면적인 파괴의 이미지로 결정화된 『AKIRA』가 있다." "두 작품은 헤이세이에 선행한 시대가 낳은 '종말' 서사의 쌍벽이지만, 스튜디오 지브리의 전개가 나타내듯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이후의 계보는 '종말'에서 '판타지'로 향했다. 반면 헤이세이의 '종말' 서사의 주류를 이룬 것은 『AKIRA』의 계보다. 이 계보는 안노 히데아키의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20세기 소년』을 거쳐 안노가 제작한 영화 《신 고질라》로 이어진다. 여기에 '종말' 서사를 집어넣은 오시이 마모루의 영화 《공각기동대》와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을 추가하면 '종말'은 헤이세이 일본 애니메이션계 서브컬처를 관통하는 기축 테마였음을 알 수 있다. 전후 일본인들은 오랜 기간 '종말'의 예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221-6)


"TV나 레코드에 의해 확산되고 소비된 주류 대중문화를 관통한 것은 '종말'의 예감만은 아니었다. 대중문화에 있던 것은 오히려 '미국'에 대한 희망이다." "1960년대 말 청년들의 '반란' 시대를 지나 1970년대는 '패배' 후의 침잠과 내향의 시대였다. 이 시대에 '아메리카닛폰'에 균열이 발생했고 그 균열에서 '포스트 전후사회'적인 감성이 부상했다." "해외에서 역수입돼 대히트한 YMO(옐로 매직 오케스트라)의 반전은 안과 밖, 자아와 타자, 일본과 미국, 내셔널과 글로벌 간 경계선의 위치바뀜을 나타낸다. 1970년대 초에는 아직 남아 있던 '내=일본'과 '외=미국'의 경계선은 1980년대가 되면, 서서히 부상하던 미디어의 시간과 공간을 통해 쉽게 조작가능한 것이 됐다. YMO는 〈'외'를 향해서는 '일본'과 '아시아'를 상징적으로 짊어지며, 서구인의 테크노 오리엔탈리즘적인 시선을 유도하는 것으로 주목을 끌었다. 반대로 '내'에서는 '외'에서의 평가를 지렛대로 이른바 박래품 대접을 받으며 인기를 획득했다.〉"(232-5)


"마릴린 아이비 콜럼비아대 교수는 1970년대 일본을 대표한 'Discover Japan'에서 '이그조틱 재팬'으로의 이행을, 동시대의 아이덴티티 정치와 연결지었다." "1980년대에 등장한 '이그조틱 재팬'에서 재발견되어야 할 자신은 이미 허구일 뿐이다. 아이비는 외국의 시선을 의식해 영어로 쓰여진 'Discover Japan'과는 달리, '이그조틱 재팬'이 가타카나로 쓰여진 것에 주목한다. 가타카나는 통상, 일본인이 자국에 수입된 외국 제품이나 개념을 나타내는 데 쓰이는 서체이다. 이것이 '일본'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 쓰여졌다는 것은, 일본이 이미 일본인 자신에게도 '외국'으로 느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게다가 통상, '자/타'를 구분하는 경계선으로 보자면 '이그조틱'한 것은 '자아'가 아니라 '타자'다. 따라서 광고가 주장하듯 '재팬'이 '이그조틱'하다고 하면 그것은 이미 '일본'이 타자화됐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설정된 것은 마치 서구 관광객처럼 자국의 풍경에 오리엔탈리즘적인 시선을 보내는 일본인 자신이다."(236-7)


"코스프레에서 스트리트 패션까지 1970년대에 나타나 1990년대 이후에 전국화, 일상화한 현상은 '미디어 속의 타자'와 '도시 속이 자신'이 반향하며 융합하는 현상이었다. 일반적으로는, 스타와 아이돌, 판타지 주인공은, 동경의 대상이긴 하되 자신이 아닌 타자이다. 그런 타자의 복장과 스타일, 몸짓의 일부를 자기표현에 인용하는 것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모방이었고, '오리지널'에 대한 '카피'였다. 그러나 이 관계는 1990년대에 반전된다. 이미 인터넷 이전부터 젊은이들은 서브컬쳐, 패션, 음악 영역에서 누구나 오리지널 즉 발신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넷 사회의 확대는, 이 경향을 결정적으로 만들었다. 코스프레에서 청년들은 단순히 만화, 애니메이션 주인공을 모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코스프레를 공연하는 청년들 스스로 자신을 '작품'화하고, 그 제작자, 즉 가공 이미지의 공급자가 된 것이다. 이제 와서는 '카피'가 '오리지널'이 된 것이다."(257-8)


"헤이세이 시대를 문화 차원에서 훑어보면 ①'종말'의 실현 ②허구로서의 '일본' ③새로운 집합성이라는 3가지 조류가 이 시대를 관류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첫째로 1970년대부터 부상한 '종말'의 예감은 헤이세이 시대 들어 두 차례 대지진과 옴진리교 사건,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의해 눈에 보이는 현실이 된다. 버블 붕괴와 급격한 경제적 쇠퇴, 격차사회화와 인구감소 등에 의해 장기적으로도 '종말'은 이 나라에서 실현되고 있다. 두 번째로, 역시 1970년대에 시작된 일본의 소비사회화는 우리 자신의 아이덴티티와 '일본'의 자아인식을 근저에서 변화시켰다. 1980년대에 등장한 것은 현실성이 존립할 지평의 상실이고 헤이세이의 리얼리티 전체가 이 변화의 연장선상에 있다. 세 번째로 1990년대말 이후 인터넷의 일상 침투는, 우리들의 집합성을 근본부터 바꿨다. 인터넷은 다른 입장을 연결하는 대화의 매개에서, 얼마 안 가 배제의 매개로 반전해가지만, 동시에 각 유저들을 '수용자'에서 '발신자'로 변모시켰다."(267-8)


마침글 세계사 속의 '헤이세이 시대'─잃어버린 반세기의 서곡


"헤이세이는 종언의 시대이고, 시작의 시대였다. 종언이라는 것은 인구증가의 종언, 경제성장의 종언, 총중류화의 종언이다. 뒤집어 말하면, 인구가 축소하고 경제가 장기적으로 정체하고 사회가 분열해가는 시대의 시작이었다. 정치는 전후 일본의 시스템을 '개혁'하려 거듭 노력했지만, 이 사회의 기반적 변화에 몇 번이고 걸려 넘어졌다. 또한 헤이세이는 일본이 동아시아의 중심이던 시대의 종언이기도 하다. 지금부터 약 150년 전, 메이지유신을 달성한 일본은, 서양의 기술, 제도, 지식을 전력으로 도입해 불과 30년에 동아시아의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동아시아의 중심성을 중국으로부터 빼앗았고, 아시아태평양전쟁 패배 이후에도 미국과 일체화하는 것으로 이를 유지했다. 그러나 냉전 후의 헤이세이 시대, 동아시아의 중심은 일본에서 중국으로 옮겨갔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원상복구로, 일본이 동아시아의 중심이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말까지의 시기가 특수한 시대였던 것이다."(3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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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유 한길그레이트북스 138
마르셀 그라네 지음, 유병태 옮김 / 한길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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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중국사회체제사의 두드러진 특징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연속성에 있다. 학파 여부를 떠나 모든 중국철학자는 오랜 지혜의 전통에서 비롯된 범국가적 상징체계는 필시 그 적합성과 효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철저히 믿었다. 상징체계에 대한 중국인의 믿음은 이성(理性)에 대한 서구인의 믿음에 비견된다." "모든 중국범주들은 체험을 조직화하기 위한 장기간에 걸친 시도의 산물이다. 따라서 중국범주들이 모든 점에서 잘못 설정되었다는 선입견은 경솔한 태도의 소치이다." "중국사유체계를 이끈 사상들에 따르면, 인간사유는 단순한 지식습득이 아닌 문명화를 위한 활동에 그 기능이 있었다. 사유의 역할은 효율적이면서 총체적인 질서를 점진적으로 자리잡아주는 데 있었다. 그러기에 하나의 태도와 일치하지 않는 개념은 없으며, 하나의 삶의 지침과 일치되지 않는 학설은 없다. 중국인의 사유체계를 근본적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곧 중국인의 태도 전반을 특징짓는 것과도 같다."(44-6)


1부 사유의 표현


1장 언어와 문자


"중국어는 투박하면서도 섬세하고, 극히 구체적이면서도 효과적인 작용력을 갖춘 언어로, 교묘한 여러 저의가 충돌하는 설전을 통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사고의 명료한 표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국인은 무엇보다 자신의 의도가 은연중이지만 그러나 반드시 전달되기를 바랐다." "언어는 무엇보다도 행동을 끌어내는 데 목적이 있었다. 언어는 행동을 분명히 알리기보다는 행동을 이끌어내려고 했다. 〈표현은 말에 효력을 부여한다.〉 상대보다 우위를 원하거나 친구나 손님의 행동에 압력을 가할 때면, 하나의 단어나 말을 여러 문구 속에 반복 주입시켜 생각을 완전히 사로잡는 것으로 족하다. 중국단어는 관념을 가리키기 위한 기호와는 무관하며, 추상성과 일반성이 최대한 명확하게 규정되어야 하는 개념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단어는 먼저 개별형상들 가운데 가장 역동적인 형상을 보여주면서, 그 형상들이 형성하는 하나의 미묘한 복합체를 상기시킨다."(52-3)


"중국인들은 명료한 표현수단, 즉 기호로서의 가치를 지닐 뿐 그 자체로는 무감각한 표현수단을 강구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언어가 각 단어를 통해 말은 곧 행동임을 상기시켜준다는 점이다. 생명과 운명을 뜻하는 중국어 ming(명命)은 소리 또는 문자로 만물을 지칭할 때 쓰는 ming(명名)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두 존재의 이름이 혼돈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닮았다 한들 그다지 문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이름들 각각은 개별적 본질을 총체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이름이 개별적 본질을 표현한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확히 말한다면, 이름은 개인의 본질을 호명하고, 개인의 본질을 현실로 불러낸다. 따라서 이름을 아는 것, 단어를 말하는 것은 곧 존재를 취하는 것이자 사물을 창조하는 것이다." "하나의 명칭을 부여하는 것은 곧 하나의 지위, 하나의 운명, 하나의 표상을 부여하는 것이다."(56-7)


"공자는 개의 형상기호인 견(犬)은 하나의 완벽한 소묘라고 천명했다. 이 기호와 함께 공자가 확신하는 것은 하나의 묘사는 굳이 대상의 모든 특성을 재현하지 않아도 적절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묘사의 적절성은 바로 어떤 유형의 행동이나 관계를 특징짓거나 함축하는 하나의 태도를 간명하게 드러내는 데 있다. 이는 형상관념에도 공히 적용된다. 친구나 우정의 관념은 맞잡은 두 손을 도상화한 단순글자인 우(友)로 형상된다. 씨족간의 결속을 다지는 협약(혼약, 군사동맹, 제휴)은 손바닥으로 맺어졌다. 문자기호는 먼저 일련의 양식화된 여러 동작을 상기시키면서 일반적인 가치를 지닌 한 관념을 지시한다." "문자표상은 양식화된 동작을 간직(하고자) 하며 또한 의례적 의미의 동작을 형상화(하려고) 하기에 정확한 상기력을 지닌다. 그뿐만 아니라 문자표상은 일련의 상(象)의 흐름을 촉발하여 개념의 어원적 재구성을 가능하게 한다."(65-6)


2장 문체


"우선 중요한 사실은 중국고대의 시는 유형상 경구시(警句詩)에 속한다는 점이다. 고대 시는 잠언 속에 깃들어 있는 지혜와 권위를 즐겨 차용한다. 고대 시는 참신한 표현, 새로운 조합, 독창적인 은유에는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기에 매양 동일한 시상(詩想)들이 계속해서 반복되며, 이 시상들 또한 아주 유사한 영감에 속하는 것들로서 극소수의 전범에서 따온 것들이다." "가령, 〈꾀꼬리가 노래하네!(有鳴倉庚)〉, 〈서로 응답하며, 사슴들이 외치네!(유유鹿鳴)〉 같은 시상들은 달력의 금언들로서 특히 (인간과 자연이 화합하는) 봄과 가을에 관계되는 말들이다." "이러한 전통적 즉흥을 통해 고무될 수 있는 제재는 참신한 발견이면서 복원된 전고(典故)로서 경구의 형식으로 지속되면서 자유로이 다시 창안되었고 또 그 완벽한 적절함으로 선호되었다. 사람들이 서로 노래로 화답하며 전통적 앎과 창의력을 견주는 동안 제재는 축제 속의 자연이 되풀이되고 창안해내는 신호와 적절하게 어울려야 하기 때문이다."(72-4)


"중국인은 지혜로운 시인들이나 충성스러운 신하(이 둘은 서로 다를 바 없다)에 의해 시연(詩聯)들로 재구성된 시적 제재와 달력의 경구가 교화의 힘을 지녔음을 극히 당연시한다. 이미 관례화된 모든 비유는 우화적 경구로서 자연의 질서를 일깨우며, 운명을 예시하고 나아가 운명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작가들이 한결같이 잠언을 빌려 말하려는 이유는 그들의 생각이 공통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의 생각을 돋보이게 하는 합당하면서도 가장 교묘한 방식은 바로 입증된 문구 속에 자신의 생각을 흘려넣는 데 있기 때문이며, 또 결과적으로 자신의 생각은 그 문구의 신빙성을 차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고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한없이 적용될 수 있는 일종의 중립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가장 특이하게 적용되는 경우에도 행동으로 유도하는 실질적인 힘을 잃지 않은 채 말이다."(76-8)


"작가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전통에 의거하여 각색한다. 하지만 전통적인 소화가 삽입되어 있는 전개들의 의도가 서로 다른 것만으로도, 하나의 소화는 각각 상이한 사유운동을 유발하기에 충분하다. 상투적인 일화들은 가장 독창적인 작가들에게는 글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우화가 널리 선호된 것은 바로 그것이 제공하는 중립적인 힘 때문이었다. 단순한 문구나 단어처럼, 우화의 중립적인 힘은 우화가 외견상 평범해 보일수록 더욱 강하게 작용한다. 사실,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우화를 빌려 여러 생각을 일일이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화의 권위를 빌려 전개 전반에 걸쳐 권위를 부여하는 데 있다." "우화는 어떤 암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정신자세를 마련해준다." "독자는 세부와 체계의 분석적인 검토를 경유함으로써 생각의 수용을 종용받는 것이 아니다. 독자는 하나의 종합적인 암시에 휩싸인 채 일거에 개념체계 전체에 사로잡히게 된다."(84)


"운율상의 유사성은 표상들의 힘을 강화하는 효력이 있다. 이 유사성에 의해 표상들간의 친화성과 표상들의 환기력은 배가된다." "중국작가들은 (현학적 산문의 이상인 고문체의 특징이기도 한) 어떤 확고하고도 안정된 균형감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고상함과 설득력을 얻고자 하는 모든 형식의 글뿐만 아니라 심지어 산문을 쓸 때조차도, 간략한 경구들이 운율의 유사성에 따라 상호 엄격한 균형과 연계하는 구성방식을 취한다. 그들은 때로는 과도한 반복에 구애됨이 없이 간략한 경구들을 중첩시키기도, 때로는 작품주제가 되는 (서구의 글에서는 주요명제에 해당하는) 중심문구를 하나의 후렴처럼 반복하기도 한다. 또 그들은 주제와 관계되는 문구들을 교묘히 병행해 주제를 대체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한다. 이 경우, 다양한 제재들의 전개는 작가의 생각을 분산하기보다는 오히려 촉진함으로써 더욱 강한 설득력을 갖게 한다."(90-1)


2부 주개념(主槪念)


"고대중국의 어느 현자의 경우도, 우리에게 수(數)·시간·공간·원인 등에 관한 서구의 추상적 관념과도 같은 개념들에 의거할 필요성을 느꼈으리라고 짐작하게 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반면, 모든 '학파'의 현자들은 한 쌍의 구체적인 상징(음陰·양陽)을 빌려 시간·공간·수를 종합적으로 고찰하면서 상호관계를 인식하게 해주는 율동을 감성적으로 전하고자 한다." "서구주석가들은 대부분 이 개념들을 추상적으로 정의되거나 규정될 수 것으로 간주한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우선 서구철학자들의 개념어에서 이 개념들에 상응하는 것부터 찾아 나선다. 통상 그들의 개념들을 교리적 실체처럼 제시한 다음, 이 개념이 비합리적인 것 또는 무의미한 것이라는 결론에 머무르고 만다. 그들의 관점에서 이 개념들은 실로 중국사유가 (완전히 수용되고 있는 유행어를 빌려 말하면) '전 논리적' (前論理的) 또는 '신화적' 정신임을 입증해주는 방증에 지나지 않는다."(96-7)


1장 시간과 공간


"중국의 시간관과 공간관은 비개인적인 것으로서 곧 범주로서의 권위를 갖는다. 하지만 중국인이 시간과 공간을 중립지대로 여기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시간과 공간에 추상적 개념들을 설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철학자도 시간을 획일적인 운동에 따라 질적으로 유사한 순간들이 연속되는 단조로운 기간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또 어떠한 철학자도 공간을 등질적 요소들이 병립된 하나의 단순한 넓이나 또는 모든 부분들의 중첩이 가능한 하나의 넓이로 간주하지 않았다. 중국의 모든 철학자들은 시간에서는 일체의 절기와 시기, 즉 일체의 시대를, 공간에서는 기후와 방위의 복합체, 즉 지방이라는 복합체를 보고자 했다."(99) "시간의 고유한 효능성은 순환하는 데 있다. 시간은 이 순환성에 의해 원형(圓形)으로서의 특질을 지니게 됨으로써 공간의 일차적 특성인 정방형(正方形)과 상반된다. 원형과 정방형은 곧 시공상의 순수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103)


"사회활동이 거의 쉴 틈 없이 줄기차게 이행되는 문명에서 기간의 주된 성격은 연속성에 있는 것 같다. 고대중국인들의 사회생활은 겨울 농한기에 절정을 맞는 반면 세속적인 일들이 재개되어 사람들이 다시 분산될 때면 이내 소강상태로 돌아간다. 시간(그리고 공간) 역시 오직 집회와 축제의 시간(그리고 장소)에 한해 완전히 응축된다. 이렇게 충만한 공간의 번성기와 공허한 공간의 쇠퇴기는 교대했다. 사회감각을 주기적으로 복원해야 하는 필요에 따라, 중국인들은 시간과 공간에 공통되는 하나의 율동구도를 생각했다. 분산시기와 응집시기의 상반성에 원칙을 두는 이 율동구도는 애초 대립과 교대라는 두 단순개념으로 표현되었으며, 시공간은 처음부터 시공의 특성들 사이에 효능성의 차이가 있음을 전제하고 있었다." "한편, 주기적으로 재창조되어야 하는 시간과 공간은 하나의 중앙이 있기에 사회적 기능성을 지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123)


# 중앙의 수장을 중심으로 정방형 배치를 이루는 사회구조


2장 음양(陰陽)


"음양의 상반관계는 두 실체, 두 힘, 두 원칙의 상반관계와는 전혀 무관하다. 이 관계는 어떠한 표상보다도 암시력이 풍부한 두 대표적인 표상들의 관계일 뿐이다. 음양은 그 자체만으로도, 다른 모든 표상들을 짝패로 상기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강력한 상기력으로 다른 표상들 사이의 짝짓기를 유발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음양에 한 쌍의 으뜸항목으로서의 권위와 위상을 부여하게 되며, 바로 이 권위에 따라 한 쌍으로서의 음양은 모든 상반관계의 토대이자 우주를 구성하는 대조양상들의 주재자인 조화, 즉 일체성과 협동성을 지니게 된다." "이처럼 음양은 표상작용을 통해 구체적인 양상들을 나타낸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음양을 실체나 힘 또는 원칙으로서 인식하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음양은 실로 무한하고도 총체적으로 상기시키는 힘을 지닌 표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136-8)


"중국인들은 음양의 대립에서 자연의 산물을 율동적으로 분배하는 원칙을 보았다. 그러기에 우주의 일체성이 바로─음양이 서로 맺어지면서 성적으로 소통하는 동안에, 사람들이 제반 장소와 제반 기회, 제반 활동과 제반 직무, 제반 표상들을 일관되게 분배하면서 집단성혼을 거행하기 위해 하나의 대동질서를 복원하던─이 성스러운 순간만큼 그토록 완벽하고 총체적으로 느껴졌던 적은 없었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 사회와 우주가 성의 범주에 따라 이항(二項)식 질서체계를 갖게 되었지만, 이는 조금도 이원론적 실체론에 근거하는 형이상학적 경향의 소산이 아니다. 쌍의 개념에 소통의 개념이 결부되어 있으며, 총체의 개념이 양분의 질서를 통솔하고 있다." "음양의 대립은 (존재와 무 같은 절대적인 대립이 아니라) 번갈아 직무를 수행하며 차례로 전면에 나서는 두 성의 집단처럼 상보적인, 즉 경쟁적이며 연대적인 두 집단의 상대적이며 순환적인 대립이다."(153-4)


3장 수(數)


"모든 현자는 수를 표상과 동일시했으며, 다양한 조작에 따라 다각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대상으로 삼았다. 예를 들어 인류의 배태기간이 열 달임을 알게 된 한 철학자(회남자)는 자신의 지식을 앎의 전반에 결부시킨다. 〈하늘은 1, 땅은 2, 사람은 3에 해당하고, 3을 3번 하면 9이고, 9를 9번 하면 81이고 [80과 1], 1은 태양을 다스리며, 태양의 수는 모두 [1(십 단위)=] 10이고, 태양은 사람을 다스린다. 따라서 사람은 임신 10개월만에 태어난다〉고 역설했다. 이어 〈[9×8은 (70과) 2인 까닭에] 2에 해당하는 달이 다스리는 말(馬)은─[2(+십 단위)=] 12태음월(太陰月)에 준하여─12달의 배태기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단순히 9를 7, 6, 5 등으로 곱해 가면서) 개는 [9×7=(60과) 3] 3달, 돼지는 [9×6=(50과) 4] 4달, 원숭이는 [9×5=(40과) 5] 5달, 사슴은 [9×4=(30과) 6] 6달, 호랑이는 [9×3=(20과) 7] 7달을 배태기로 취한다〉고 했다."(160)


"하나의 수-상징은 많은 실상과 표상들을 불러오며, 경우에 따라서는 그 등가물로 주어지는 여러 수들이 결부되기도 한다. 수는 중국인들이 간과하는 개별화된 양적 가치가 아니라 더욱 흥미로운 상징적 가치를 지닌다. 왜냐하면 상징가치는 조작재능에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아, 수들을 일종의 연금술의 대상으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수들은 그들의 주된 기능에서 파생되는 다각적인 효능성에 따라 변이할 수 있다. 무엇보다 먼저 수들은 표상항목으로서의 의미와 기능을 가진다. 수는 사물의 분류를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이 경우의 분류는 단순한 순번부여나 수량의 양적인 규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행해진다. 중국인들은 단지 순서를 위한 순번 부여나 양적 측면에서의 산출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중국인들은 특정집단의 특성이나 위계질서를 표현하는 데 수를 사용한다. 수는 분류기능과 이에 연관된 의례기능도 겸한다."(160-1)


# 수가 특정한 상징으로 형상화된 대표적인 경우 : 십간(干)과 십이지(支) 그리고 십진수


"점술가들은 시공에 관련된 사회적 표상들을 비롯하여 상호연관된 분류체계들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게다가 그들은 이 모든 관습이 사람들의 생각을 사로잡아 행동의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권위를 부여해야 했다. 그들은 이러한 목적으로 기하와 산수의 상징들을 사용했다. 이 상징들은 다른 부류의 표상들처럼 형상력과 작용력을 발휘했다. 다른 표상들에 비해 어떤 면에서는 더욱 추상적이었던 이 상징들은 각별히 신뢰받았던 것 같다. 이 상징들은 조작의 무한한 가능성으로 인해 가장 다양한 분류들을 연계짓는 데 사용되었으며, 그 조작이 임의적인 경우에조차 그 조작에 통제를 기했던 것 같다. 중국인들이 이 상징들을 통해 우주질서를 형상화할 때면, 세계의 형상은 이들로부터 어떤 필연성을 확보하는 듯이 보였다. 세계형상은 조작의 효능성을 보장하면서도 조작을 용이하게 했다. 점술은 세계를 인식하고 안배하려는 열망을 반영한다."(212-3)


"수의 기능은 크기를 표현하는 데 있지 않다. 수는 구체적 규격들을 우주상의 비례전반에 부합시키는 데 운용된다. 하나의 수-표상이 자신의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려면, 다음 두 사항을 표현하고 내포할 수 있어야 한다. 즉 하나는 세계의 항구적 구조를 상기시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질서나 문명의 전범(典範)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가장 의미심장한 수-표상은 3과 2, 3과 4, 5와 4, 10과 8, 9와 6, 8과 7, 64와 80, 63과 81, 144와 216, 108과 72 등이다. 이 수들은 총수 360(=5×72=6×60)에 의해 그 운용이 통솔되는 까닭에 우주의 형태와 생태를 명확히 드러낸다." "수는 측정보다 대립과 상관관계를 제시하는 데 사용된다. 중국인들은 우주가 형성하는 체계 속에 사물의 통합을 기하기 위해 수를 사용한다." "우리는 중국의 수 사상 속에 가장 엄격한 순응성, 양식에 대한 집착, 기발한 착상, 개인성에 대한 애착 등이 경이롭게 화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276-8)


"1(하나)은 언제나 완전함 그 자체이며, 2(둘)는 쌍일 따름이다. 2는 음양의 교대(와 총합이 아닌 결합)를 특징으로 하는 쌍 그 자체다. 그리고 1, 즉 완전함은 음도 양도 아닌 축 그 자체로서 음양의 교대를 바르게 한다. 다시 말해, 1은 중앙의 정방형이다. 즉 (도가에서 말하듯 그 자체는 비어 있기에, 바퀴를 돌게 하는 차륜의 가운데 구멍처럼) 계산에는 포함되지 않으나 공간 전체를 상징하는 큰 정방형을 분할하는 네 직사각형에 의해 형성되는 만자의 회전을 통솔하는 중앙의 정방형이다. 1은 가산될 수 없는 불가분함이다. 왜냐하면 1은 홀수와 짝수의 종합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1은 총체인 까닭에 수치 1로 될 수 없는 일체다." "이렇듯 일체(하나)이면서 한 쌍이며, 수의 용어로는 정수(整數)라 할 수 있는 완전함 그 자체는 모든 홀수 속에서, 그리고 제일 먼저 3(1+2) 속에서 구현된다. 우리는 3이 만장일치의 완곡한 표현임을 확인할 수 있다."(280)


4장 도(道)


"도가의 저자들은 '기법, 방법, 규칙'의 의미를 지니는 술(術)과 법(法)에 도를 대립시킨다." "'도가의 시조들'은 용어 도를 언제나 덕(德)과 함께 병용했다. 그들에게 단어 덕은 개별화될 때의 효능성을 지칭한다. 이중적 표현인 도-덕은 일상 언어에서는 줄곧 덕성을 뜻하는 말로 상용되었으나, 사실 덕성은 단순히 윤리적인 의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도-덕은 '매력', '군주의 영향력', '유능한 권력'을 의미한다. 덕은 신화에서는 가장 완벽하고 특출한 여러 천재들의 자질들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덕이 '특수한 덕목'을 나타내며, 현동화(現動化) 과정에서 개별화되는 효능성을 가리키는 철학어로서 사상적으로 사용된 것은 아마도 원칙상 거의 구별되지 않는 두 개념을 대립시켜 분석하려는 의도에 따를 것일 터이다. 그리하여 덕은 특히 개별적 차원에서의 성취를 의미하는 반면, 도는 실현된 일체를 통해 드러나는 총체적 질서를 나타낸다."(305-6)


"도는 음과 양, 두 양상의 총합이 아니라, 이 둘 간의 교대를 조율하는 장치다. 『계사』에 제시된 도의 정의에서 볼 때, 도는 교대하고 순환하는 하나의 총체로서 간주될 수 있다. 양태마다 동일한 총체가 재현되며, 모든 대조는 빛과 그림자의 교대와 대립의 관계를 그 준거로 하여 형성된다. 도는 음양보다 상위의 범주로서, 지대한 능력과 총체와 질서를 총괄한다. 음양이 그러하듯, 도 또한 하나의 구체적인 범주다. 즉 도는 어떤 기본적인 대원칙이 아니다. 도는 실제 여러 집단의 현동하는 사물들의 운행을 관장하지만, 그렇다고 하나의 실체와 힘은 아니다. 도는 조율 기능을 행한다. 그러기에 존재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할 따름이다. 도는 사물의 율동을 조절한다. 실재하는 모든 것은 자신이 갖는 시공상의 각 위치에 따라 규정된다. 요컨대 실재하는 모든 것 안에 공간-시공의 율동인 도는 존재한다."(327)


"우주뿐만 아니라 우주를 구성하는 각 집합적 개체들은 본래 순환하는 것이기에 교대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는 신념이 사유를 완전히 지배하면서, 연속성보다는 상관성이 언제나 사상적으로 우선되었다." "중국인들이 기꺼이 기록하려 했던 것은 원인과 결과가 아니라, 출현순서가 중요하지 않기에 비록 동일한 근원에서 비롯함에도 제각기 특별한 것으로 간주되는 여러 양상들이다. 이 양상들은 모두 똑같이 묵시점임에 따라 상호대체가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메마른 강물, 무너진 산, 여자로 변한 남자 등은 임박한 왕조의 몰락을 알려주는 동일한 징표다. 이들은 모두 하나의 동일한 사건에 대한 네 양상으로, 하나의 질서는 그 효력이 다하면 새로운 질서에 자리를 물려주고 사라짐을 알려준다. 이렇듯 모든 것은 하나의 전조나 하나의 기호 (또는 일련의 기호들)의 확인으로서 마땅히 기록되어야 하는 반면, 그 어떠한 것도 작용인으로서 중시되지 않는다."(330-1)


3부 세계체계


1장 대우주


"중국인들은 정치에 각별한 위상을 부여했다. 그들에게 세계의 역사는 문명의 역사 이전에는 시작되지 않았다. 중국의 세계역사는 창조설화나 우주론적 사변에서가 아니라 바로 군주들의 전기(傳記)에서 시작된다. 고대 영웅들의 전기에는 신화적인 요소들이 상당수 담겨 있다. 하지만 어떠한 우주 생성론적 제재들도 각색을 거치지 않고는 문학 속에 포함될 수 없다. 모든 전설은 인간역사의 사실들과 그 정치철학들을 반영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국가문명의 거룩한 창시자들에 의해 구현된 조화(和)에 힘입어 영위되고 존속되며, 인간과 존재물들 각자는 이 창시자들의 지혜에 힘입어 자신의 본질(物)과 부합할 수 있으며 나아가 자신의 운명(命)을 완전하게 실현할 수 있게 된다. 현자들의 공덕에 의한 사회조화는 크나큰 평화(太平)와 더불어 대우주의 완벽한 균형을 가져오며, 이 균형은 모든 소우주의 조직 속에도 반영된다."(343)


"중국인들은 신(神)들이 괴물들과 함께 등장하는 신구(新舊) 모두의 전설들을 역사의 외부인 신화의 시대, 즉 어렴풋하고 요원한 시대에 묶어두지 않았다. 모든 시간은 인간과 역사에 속한다. 우주는 현자들이 국가의 운명을 건립하는 그 순간부터 비로소 실재적으로 존재한다. 이 문명은 구주(九州)의 전체에 걸쳐 군림한다. 유기적인 공간과는 무관한 야만인들의 사해(四海)는 성인들에 의해 안배된 공간에 테두리를 형성해주면서 공간 너머로, 아울러 시간 너머로 펼쳐진다. 실재적인 세계의 이 어렴풋한 주변들은 야만인들뿐만 아니라 괴물 그리고 신들에게 적절한 곳이다. 인간의 대지는 중국인들 그리고 그들의 조상들과 수장들만의 영역이다. 중국의 군주들은 전답을 정방형으로 분할하고 신전(明堂)을 건립하여 자신들이 집정하는 성역과 군영과 도시의 9구역에 적합한 방위를 부여했다. 실재적인 우주의 안배와 그에 따른 진정한 우주관을 가능하게 하는 제반 분류들은 이 신성한 관례들에서 파생되었다."(360-1)


2장 소우주


"좌우(左右)에 관련된 제반 사상들, 관습들, 신화들만큼이나 중국인의 소우주관을 적실하게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중국에서 좌와 우는 절대적으로 대립되는 양상을 띠지 않는다. 존재와 무, 순수와 비순수의 관계와는 달리 음양은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사물들을 선과 악으로 분할하도록 강요하는 종교적인 격정은 중국인에게는 찾아볼 수 없다." "천덕(天德)과 지덕(地德)은 상호보완적이다. 이 두 덕은 교대로 임무를 수행한다. 더욱이 이 두 덕은 차례로 가장 완벽한 현자들에게 영향력을 미친다. 가장 완벽한 현자들은 처음에는 재상의 위치에서 자신의 임무수행을 위해 활약하며, 지상에서의 크고 작은 모든 일에 자신의 역량을 떨친 후 군주의 위치에 오르면 오직 하늘의 일을 탐문하는 데에만 몰두했다. 그럴 때 그들의 삶의 유일한 목적은 어떠한 세부적인 효율성(德)도 능가하는 지대한 효능성(道)을 자신 속에 응집시키는 데 있다."9363-4)


3장 예법(禮法)


"중국인들은 인과관계를 가늠하기보다는 조응관계를 찾아내어 그 목록을 작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우주질서는 문명질서와 구분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항구적이고 필연적인 일련의 상관성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전통예법들의 목록을 작성하는 일은 좀 더 정교한 기술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이 기술의 중요성은 전혀 다른 데 있다. 앎은 곧 권능이다. 현자인 군주는 문명의 수액을 분비한다. 현군(賢君)은 만물의 위계질서 전반에 일관된 태도체계를 확립하여 문명을 유지하고 파급한다. 현군은 법의 구속력에 기대지 않는다. 그에게는 전통적 규범의 권위만으로도 충분하다. 사람은 단지 본보기만을 필요로 할 뿐이며 사물 또한 사람처럼 본보기만을 필요로 할 따름이다." "중국인들은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지 않는다. 영혼개념, 즉 육체와 물체 전반에 대립하는 정신적 본질에 대한 사상은 중국사유와는 전혀 무관하다."(391)


"귀(鬼)들과 신(神)들은 육신을 떨쳐버린 영혼들이 아니다. 혼(魂)과 백(魄)은 하나는 정신적이며 다른 하나는 물질적인, 두 영혼이 아니다. 혼과 백은 하나는 숨결과 모든 신체기관의 발산물에 속하며, 다른 하나는 피이면서 모든 체액(體液)에 속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두 군(群)의 생명의 원천을 가리키는 항목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들 중 한 군은 양(陽)으로서 마치 숨결과 이름을 제공하는 아버지와 같으며, 다른 한 군은 음(陰)으로서 마치 피와 음식을 제공하는 어머니와도 같다. 전자는 다독여 온기를 불어넣는 하늘과 유사하며, 후자는 보듬어 양육하는 땅과 유사하다. 술을 부어 흥건한 땅은 육체의 분해에 따른 생성물로 비옥해지는 반면, 제물들의 더운 연기는 하늘로 날아 올라간다. 생명은 죽음과 교대하며, 하나의 순환질서와 5를 단위로 하는 율동이 계절의 회귀나 윤회를 관장하여 모든 것이 죽음으로 돌아가듯 모든 것은 생명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403)


"중국인들은 실체와 힘을 거의 구별하지 않는다. 이는 중국인들의 모든 개념을 지배하는 것이 율동과 사회적 권위에 대한 사상들이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이 의례와 음악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들은 의례와 음악을 예법의 상호보완적인 두 양상으로 대립시킨다. 사람들의 구분과 그 일들의 구분은 의례로 확립되는 반면, 모든 존재가 조화 속에 영위되는 것은 음악에 의해서다."(410-1) "의례와 음악은 예법을 따라 자신들의 몸짓 하나하나가 우주를 형성하는 거대하고도 율동적인 동태체계 속에 합치되리라는 느낌을 고무시켜준다." "의식(과 음악)이 지니는 큰 효력은 규칙적인 율동을 주입하는 데 있다. 존재방식이 예법의 통치를 따를 때, 존재는 격상하고 지속적으로 영위될 자격을 얻는다. 이 상징체계를 자기화하는 개인은 국가의 문명을 자신의 몸속에 간직하게 된다. 그럴 때 그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게 되며, 하나의 개인성도 얻게 된다."(415-7)


4부 교파와 학파


1장 통치술(統治術)


"『관자』나 『한비자』에 나오는 사상들은 거의 번역이 불가능한 두 단어로 요약된다. 그 하나는 비결·방법·기교를 의미하는 글자 술(術)이며, 다른 하나는 여건·상황·정세·힘·영향력을 의미하는 글자 세(勢)다." "당시 전제군주들은 항상 혁명적 시기의 도래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천자의 지위를 찬탈할 준비를, 즉 문명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최소한의 것을 변화시키는 것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것과 같으며, 최소한의 변화의 징후를 포착하는 것은 총체적 변화를 가져올 기회를 잡는 것과도 같았다." "전제군주들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정치고문으로 기용하여 그들에게 유리한 징후를 살피도록 했다. 그들로서 기회를 놓치게 되든가 제때에 구하지 못하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과오나 죄를 범하는 것과 같았다." "정략가들은 결코 통치를 운에 맡겨야 한다고는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통치술은 운명을 타진하고 운명을 이용하는 것이었다."(432-3)


"고대의 학파 가운데 가장 교파성이 짙으면서 공격적인 성향이 강했던 학파는 묵가(墨家)다. 서구에서는 흔히 이 묵가를 피압박자들을 구원할 책무를 자임한 기사단원(騎士團圓)들에 비유한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이 묵가를 설교사제단(說敎司祭團)에 비유하는 것이 더 적절하게 보인다. 묵가의 구성원들이 지향한 목적은 야망으로 지혜를 저버린 군주들을 다시 지혜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데 있었다. 이에 따라 그들은, 학파의 원조가 작성한 것으로 여겨지는 설법용 기본 훈시문을 소지한 채 군주의 동의를 얻어내는 데 능란한 삿된 고문(顧問)들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런가 하면 적어도 기원전 4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그들 중의 일부는 별도의 집단(묵자에서 분리된 제자들인 별묵別墨)을 형성하여 논법에 심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논법을 창시하거나 논변가(辯士)라는 이름에 걸맞은 최초의 인물들로 보이지는 않는다."(437)


"중국어에는 시제나 성수(性數)가 없다. 이 중국어의 특성은 어떤 역설들을 재미있는 문구로 표현할 수 있게도 했으나 모든 개념을 분석하는 데 어려움을 안겨주기도 했다. 중국어는 동사, 명사, 형용사 부사 등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이러한 조건에서 중국인들이 유사관계 속에 언급된 용어들의 관계를 분석하려는 생각을 한 것은 가히 놀라운 일이며, 이러한 분석을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한 것 또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흰색과 고체, 말과 흰색, 명명(命名)과 대상(事) 또는 그 상징(形)에 관한 여러 토론들은 그 의외성과 혁명성으로 인해 놀라운 면모를 보인다. 이 토론들은 숭상되어왔던 기존의 분류와 조응체계의 붕괴를 불러왔다. 변증사상가들은 예법을 그 토대부터 뒤흔들었기에 심한 반대에 봉착한 끝에 미미한 호응을 얻는 데 그쳤다. 그들은 오랜 기간 토착화된 논리의 추종자들을 극복하지 못했다."(450-1)


"정명론(正名論)은 질서에 대한 학설이다. 정명론의 득세는 예법이 누렸던 권위를 통해 설명된다." "봉건질서와 예법이 지배하는 동안 정확한 말과 논리는 올바른 행동과 윤리와 불가분했다. 따라서 우주의 제반 동태는 군주의 행위에 좌우된다는 명제에는 어떠한 이의도 제기될 수 없었다. 사물과 사유의 질서는 그 누구보다도 언행이 일치해야 하는 군주가 어느 것 하나 경솔히 명명하지 아니하고 누구 하나 의례에 부합되지 않게 임명하는 일이 없을 때 비로소 자리 잡게 된다. 모든 귀족과 현자들은 군주처럼 행실이 자신의 위상, 즉 자신이 부여받은 지위와 이름에 걸맞도록 노력해야 한다. 명(名, 개인의 이름)은 개인의 지칭뿐만 아니라 개인에게 돌아오는 명예와 수명, 유산(分), 재산과 직분의 지칭에도 사용된다. 말하자면 어느 누구도 자신의 직분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이는 의례의 원칙이기도 하다. 〈예법이 모든 것에 퍼져나가면, (만물의) 직분도 고정된다(定).〉"(455-6)


"흔히 행정에 관여했으며 군주의 이상적인 위인됨을 이상으로 삼았던 작가들을 법가(法家)라는 이름의 항목으로 분류한다. 이들은 정론가(政論家)들과 구별된다. 정략가들이 특히 외교적 제휴를 성사시키는 데 전념한 반면, 이 법률가들은 국가가 내부의 힘을 활용하는 방법에 관심을 두었다. 이들의 주된 관심영역은 영토와 군대의 조직화, 경제와 재정, 사회의 번영과 규율이었다. 일체의 전통체계를 거부한 궤변가들이 정략가나 외교가들에게 최상의 보조자로 보였던 반면, 행정가들이나 법률가들은 안정된 질서를 사유의 관건으로 삼았던 논리학자(名家)들에게 공조를 구했다. 궤변가들이 봉건세계를 전복시켜 그들의 군주가 패권을 장악하도록 도왔던 것과는 달리, 이 법률가들은 행정의 혁신적인 시행을 정당화하기 위한 새로운 사상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이들은 새로운 사상으로서 군주와 법의 존엄성을 주장하게 되었다."(463)


"법가의 군대식 위계질서는 완전히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상벌제도에 근거를 둔다. 통치에는 부정적 또는 긍정적 평가를 적용하는 권력으로서의 형(刑)과 덕(德)이라는 '두 주먹'이 있다. 군주는 두 양상을 지닌 이 권력의 어느 부분도 위임하지 않는다. 승진과 강등은 관리나 영주가 자의에 따라 사사로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승진과 강등은 법의 권한이다. 군주는 공시된 법만이 통치할 수 있는 행정에는 개입할 수 없다. 반대로 어떠한 신하도, 재상도 군주의 소관 사항에 개입할 수 없다. 국가의 최고 지침은 군주의 결정 사항이다. 정치는 오직 군주의 권한이다. 권(權, 기회마다 운명의 무게權를 자기 쪽으로 기울게 하는 외교적 결탁)에 힘입어 세(勢, 상황에 따른 성공의 조건)의 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기법들은 오직 군주 고유의 몫이다. 〈기법(術)은 군주가 쥐고 있는 고삐요, 법령(法)은 관리의 규칙이다.〉 이렇듯 법가는 법과 통치술을 완연히 구별한다."(471)


2장 공익책(公益策)


"공자는 이익의 추구뿐만 아니라 일체의 비속한 경쟁을 배격한다. 수양이 된 사람은 오롯이 극기(克)를 추구한다. 〈아침에 도를 얻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으리!〉라는 의연한 경구는 자강불식(自彊不息)의 귀족정신윤리를 함축적으로 제시한다." "공자는 군주의 효능성인 도-덕을 세습적 자질에 한정하는 관점에서 탈피한다. 그러나 공자는 이 효능성은 일체의 비루한 집념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자인 군주에 의해서만 완성될 수 있다고 보았다 공자는 귀족만이 도와 덕을 추구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귀족은 '농토에서 자유로우니' 저급한 세사와 걱정거리를 벗어나 생활하며, 예법을 실천해 자신을 문명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도와 덕의 체득은 개인의 노력 여하에 좌우되는 문제로 항구적인 집중과 매순간의 집요함을 요구한다." "유가사상에서 도-덕은, 인간의 덕목으로서 문명사회에서 타인과 교섭해서만 배양되는 인(仁)과 의(義)의 실천으로 도달하는 이상적인 자기완성과 동일시된다."(488-9)


"자기수양(수기修己 또는 수신修身)은 단순히 개인의 윤리적 의무로 그치지 않는다. 인간의 존엄성은 사회생활을 통해 형성되니 현자들이 도달한 자기수양은 사회를 유익하게 한다." "사람을 아는 것이나 자신을 수양한다는 것은 곧 자신을 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앎은 단순한 성찰이나 단순한 교분을 통한 앎이 아니다. 현자가 행동을 향도하기 위해 알고자 하는 개인의 행동들은 결코 독자적인 현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각 개인은 자신의 생활공간이자 인격과 인간의 존엄성을 형성해주는 공간인 위계집단과 결고 관념적으로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공자와 그 제자들은 인간에 대한 관념적인 학문이 아닌 심리학과 윤리 그리고 정치를 포함하는 생활기예의 정립을 도모했다. 이 기예는 선대로부터의 앎과 체험 그리고 상호관계적인 삶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제반 관찰을 통해 형성된다. 인문주의는 이 기예나 앎에 적실한 이름이다."(492-4)


"묵자는 염세주의자이자 보수주의자다. 그의 태도를 규정짓기는 쉬우나 그의 사상을 규명하기는 어렵다. 이 설교자는 증명보다는 설득에 집착하여 논증방식에 선동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 "묵가의 핵심은 통치의 기원에 관한 고유의 시각에 있다. 인간의 사회성(仁)보다는 내 것과 남의 것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차이를 중시한 묵가는 인간이 무질서(亂)에서 벗어나려면 모든 결정을 군주에 일임하고 그를 믿고 따라야 한다고 보았다." "묵자의 사상은 법가와는 또 다른 유형의 과격성을 지닌다. 묵자는 어떠한 이완도 용납하지 않는 이상적인 통일성(同)을 내세운다. 왜냐하면 총체적이고 항구적인 통일성이 없으면 무질서가 야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왕이 법을 명령하는 것으로 충분했던 법가와는 달리, 묵자는 군왕이 생각을 하명해야 한다는 사상을 펼친다. 이것이 묵자가 으뜸과 성현과 군주의 의미를 지닌 인(仁)과는 구별하여, 의(義)에 부여한 의미다."(497-9)


3장 신선술(神仙術)


"도가의 현자들은 타인이나 자신을 이롭게 하려는 의도나 바람에서 완전히 벗어나 오롯이 선(仙)을 추구했다. 그들은 금욕주의자이면서도 고행을 거부했으며, 신앙인들이면서도 신과 교리와 윤리와 신념 등을 중시하지 않았으며, 신비주의자들이면서도 기도나 감정의 분출은 극히 냉정했고 비개인적이었다. 나아가 오직 자신들만이 인간의 진정한 친구임을 의심하지 않으면서도 선행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경멸을 표하면서 사람들을 인도하는 진정한 방법이 무엇인지를 모색했다. 그들은 사회적 의무에 관련되는 모든 언급을 신랄하게 야유했다. 중국역사에서 도가의 현자들은 강력한 권위의 교주들, 탁월한 정론가들, 변증에 뛰어났던 변론가들, 심오한 사상의 철학가들을 능가하는 최고의 작가들로서 위상을 누린다. 그럼에도 이들은 오로지 겸허와 초연과 은둔 같은 태도에 중요성을 부여하여, 자취를 남기는 자는 어느 누구도 성인이 아님을 암시했다."(507-8)


"도가의 기본적인 논지는 공평하고 불변하는 하늘이 사계절을 관장하면서도 언제나 본래 그대로라는 사상에서 파생되었다. 즉, 도는 보편적 자발성의 내재적 원리로 제시된다. 도는 본질적으로 완벽하게 공정하고 무차별적이다. 도는 '비어 있다'(虛). 도에는 아무런 선입견이나 편견도 있지 않아 어떠한 자발적인 행동도 방해받지 않는다. 도는 일체의 특수성도 지닐 수 없는 총체이자 명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라는 점에서 어떠한 개별화와도 충돌하지 않는다. 독립적이고 비편파적이기에 도(하늘 자연)는 개입과는 달리 오직 작용밖에 머물면서 작용에 활기를 불어넣을 뿐이다. 도는 무위, 즉 무간섭을 유일한 원칙으로 삼는다. 만약 우리가 도의 활동성과 행동성을 느낄 수 있다면, 이는 도가 연속적인 공허 속에서 무한히 빛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총괄적인 공존의 원리로서 도는 하나의 중립지대를 형성하여 자발적인 상관작용을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이 상관작용이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한다."(529)


"도가의 대가들이 양자(楊子)의 절대적 개인주의와 변별될 수 있었던 것은 주관주의를 극복하게 해준 우주의 통일성을 인식했기 때문인 것만은 아니다. 그들은 전혀 염세적이 아니었다. 그들이 인간적인 오만에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만물의 평등성에 대한 신념에 기인한다." "도가의 정치사상에서 경건과 공익의 개념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장자는 묵자가 제시한 상부상조 개념을 조롱한다. 묵자의 이 개념을 따르면, 도적을 죽이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부류의 궤변들은 잔혹한 전제주의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구원은 단지 개인적 차원에서만 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전제군주 하에서는) 어떠한 정치적 미봉책도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따라서 유일한 선택의 여지는 정치 너머의 커다란 정치에 있을 뿐이다. 즉 스스로 구원하는 자만이 남을 구원할 수 있으니 자신을 구원하는 것만으로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550-1)


4장 정통유가(正統儒家)


"공자의 불충한 제자들은 인간의 언행을 관찰하여 인격의 의미를 정제하려 하기보다는 관례적 전통에 관한 연구에 모든 앎을 예속시키는 데 몰두했다. 그러다 훗날 주된 개념으로 정립될 한 개념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게 된다. 이것이 성(誠)의 개념이다. 군자는 모든 점에서 주의 깊고 세심하게 의례를 따라야 한다. 매순간 가장 중요한 행동이나 사소한 거동 하나에도 '성심(誠心)을 다해' 의례준칙을 따르는 자만이 성실한 자로 평가받을 수 있다. 이렇듯 마음 됨됨이를 관건으로 삼는 윤리가 보수주의의 저변을 이루었다. 도가에서 '마음'이라는 용어는 전생(前生)을 상기시키는 말이다. 공자를 내세운 예법주의자들이 이 단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은, 정통유가의 승리에 기여한 통합주의 성향이 한결 진척되었음을 나타낸다. 여기에 맹자는 고결한 마음에 관한 그의 양심론(良心論)을 통해 유가에 새로운 도약을 가져왔다."(560-1)


"사실 맹자에게 영예를 가져다준 것은 그의 논변과 논지가 아니라 그의 태도였다. 맹자는 정통유가 최초의 대변인이자 민주주의적 색조 아래 귀족정신의 윤리를 제시한 최초의 논변가였다. 나아가 그는 옛 원칙들을 선양하여, 전제군주들의 입을 막아버릴 목적으로 궤변을 사용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몸으로 일하는 자들은 심성으로 일하는 자들을 양육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그들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최초의 문사로서, 문사의 전형을 정착시킨 인물이었다. 문사는 용기 있는 비난을 가할 자세를 항상 갖추되 결코 알현을 간청하지 아니하며, 먼저 부탁은 아니하되 언제나 격식에 따라 초빙을 받아야 하며, 또한 직책은 기꺼이 받아들이되 뇌물은 거절해야 한다. 문사는 자긍심 속에서 이해관계에 초연하고 자신의 명예와 독립성을 지켜야 하며, 군주일지언정 그 누구도 현자보다 우월하지 않다는 생각을 자신의 모든 태도를 통해 모두에게 주입해야 한다."(568)


"순자가 보기에 사회는 인간에게 지고한 위상을 부여하는 원천이다. 사회적 삶의 조건은 직분(分), 즉 직위와 직무와 부와 권위의 분배에 있다. 사회적 삶의 이러한 기본조건은 사회 목적을 규정한다. 사회 목적은 결코 법가가 시사하는 것처럼 단순히 사물들에 대한 통제력이나 인간집단으로서 권능을 얻는 데 있지 않고, 오로지 윤리적인 활동체계를 형성하는 데 있다. 무질서한 집단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사회가 있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내 것과 남의 것의 구분을 인정할 줄 아는 현명함을 갖춰 공정성을 실천해야 한다. 자신의 본성만을 따른다면 공정성은 실천될 수 없으니, 그 실천은 오직 일체의 관습, 즉 예(禮)의 지배 아래에서만 가능하다. 사회의 힘과 인간의 윤리적 가치는 하나의 동일한 토대에 의거한다. 이 토대는 다름 아닌 자연 그대로가 아니라 자연에 덧붙은 것으로서 사회적 삶의 필요에 따라 인간, 즉 현자들이 일구어낸 문명이다. 선(善)은 자연 속에 있지 않다.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회다."(571)


"동중서는 선정 통치론의 지지자로서, 인간의 본성은 향상되어야 한다는 사상을 수용했다. 그리고 음악도 인간 본성의 향상에 기여하지만 예는 더욱 크게 기여한다는 주장을 통해 통치의 기본임무가 백성의 교화에 있음을 역설한다." "이처럼 철저한 정통론자였던 동중서는 올바른 생각과 행동교육을 담당할 관리들을 문사들에서 뽑을 것을 교육정책으로 제안했으며 (한조漢朝는 그의 제안을 채택했다) 교육가의 자세로서 공평문사를 요구했다. 교육관료는 출세를 지향해서는 안 되며, 부를 축적하기 위해 '재산을 소인배들처럼 금고에 보관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부가 순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보았다. 부의 순환은 봉건시대에 귀족들의 의무이기도 했다. 동중서는 관료들의 의무가 평상인들의 의무와 같을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한대에 정통유가의 전파가 사회적 삶의 이유이기도 했던 관료계층의 형성에 전력한 인물들 속에 포함될 수 있다."(582)


결론


"중국인들은 질서를, 추상적 명령체계나 추상적 추론체계에 의해 확립될 수 없는 크나큰 평화(太平)의 양상으로 생각한다. 이 평화가 도처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실제적인 범절, 자발적인 연대감, 자유로운 위계질서에 대한 첨예한 의식(意識)을 요구하는 상호수용의 추구가 필수적이다. 중국의 논리는 엄격한 종속논리가 아니라 유연한 위계질서의 논리다. 중국인은 질서개념에 이 개념의 출원지인 여러 형상들과 감정들이 구체적으로 포함하는 모든 것들을 보지하려 했다. 중국인이 질서개념에 도를 상징으로 부여하여 도를 모든 독립성과 일체 조화의 원리로 간주하든, 또는 질서개념에 이(理)를 상징으로 부여하여 이를 공평한 모든 위계질서나 분배의 원리로 간주하든지 간에, 질서개념에는 이해와 화합이야말로 자신의 내면과 주위의 평화를 구현하는 길이라는 생각─물론 아주 치밀하면서도 그 토대인 향촌생활에 밀접하게 닿아 있는 생각─이 담겨 있다."(5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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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를 읽다 - 쓸모없음의 쓸모를 생각하는 법 유유 동양고전강의 5
양자오 지음, 문현선 옮김 / 유유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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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속된 세계관


"갑골문으로 쓰인 복사卜辭나 청동기에 보이는 상나라 문화와 『초사』에 보이는 초나라 문화 사이에는 아주 쉽게 교집합이 발견됩니다. 귀신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상상으로 가득 차 있으며 사람과 귀신 사이의 상호 관계에 대한 묘사가 넘치지요. 주나라 사람과 문화의 관점(불연속 세계관)에서 보면 이는 모두 '괴력난신'怪力亂神에 해당하는 것으로, 믿어서도 안 되고 믿을 가치도 없는 일들입니다." "폭넓은 고대 문화를 살펴보건대, 상나라와 초나라의 문화는 고고학자 장광즈 선생이 주창한 '연속된 세계관'에 기초합니다. 사람과 외부 환경 사이에 명확한 구분과 단절이 없다는 의미지요. 세상 만물은 나와 절대적으로 다른 존재가 아닙니다. 이것은 저것으로 변화할 수 있고, 저것 또한 이것으로 변화할 수 있지요." "이러한 문화의 축적이 있었기에, 장자는 우언寓言이라는 형식을 골라 쓸 수 있었고, 그 자신만의 독특한 삶의 방식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34-8)


"장자가 묘사하고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완벽하게 '연속된 세계관'이었습니다. 그는 이처럼 주류가 아닌 세계관으로 자신이 처한 전국 시대의 어지러운 세상을 평가하고 판단했지요. 이에 반해 노자는 여전히 주나라 문화의 '불연속 세계관' 입장에서 어떻게 인간관계를 처리할지, 어떻게 역발상의 논리로 이 인간 세상에 더욱 적합한 방식을 찾아낼지 신경을 쓰고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양자 모두 '도'道를 이야기하고 '도'라는 말로 완전하고 신비한 원리 원칙을 통칭하며, 마찬가지로 '자연'自然을 강조하면서 자연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장자는 사람이 자연을 광활한 공간으로 삼아 인간 세계라는 비좁은 범주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연을 유유히 누비며 도에 따라 살아가는 방식을 찾는 데 중점을 두는 반면, 노자는 자연의 도리를 인간 세상에 적용해 인간관계를 처리하고 이를 통해 더 안정적이고 강력하게 인간의 삶을 장악하는 일에 관심을 집중합니다."(40-1)


2 상대성에서 시작하다


"연못에서 살면서 몇 길 높이를 채 오르지 못하는 작은 새가 거대한 붕새를 비웃습니다. 〈저이는 도대체 어디를 가려고 하는 것인가? 나는 펄쩍 날아올라도 몇 킬로미터를 날지 못하고 곧 내려오며 풀숲 사이를 이리저리 날아다닐 뿐이지만 이 역시 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난다는 것은 결국 이런 일일 뿐이다. 그런데 저이는 도대체 어디로 가려고 하는 것인가?〉 작은 새는 두 번이나 〈어디로 가는가?〉라고 되풀이 물음으로써 거대한 붕새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도리어 붕새에 대한 경멸을 드러냅니다. 이야말로 우리가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대상과 맞닥뜨렸을 때 자주 드러내는 반응이 아닐까요? 이것이 바로 〈작은 것과 큰 것의 차이〉입니다. 오늘날의 개념을 사용하자면 이는 서로 다른 잣대와 크기를 넘어서는 '공약불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작은' 잣대의 크기로는 '큰' 잣대와 크기의 문제에 깊이 다가갈 수 없는 법입니다."(82-3)


# 〈연못 안의 작은 새가 비웃으며 말했다. "저이[붕]는 또 어디로 가는가? 나는 펄쩍 날아올라도 몇 길을 오르지 못하고 내려오며 쑥대밭 사이를 맴돌지만 이 또한 날 만큼 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저이는 또 어디로 가는가?" 이것이 작은 것과 큰 것의 차이이다.〉 『장자』 내편 제1편 「소요유」


# 공약불가능성 : 현대의 과학과 과거의 과학을 같은 기준으로 비교할 수 없음을 가리키는 말로 과학철학자 토머스 쿤이 사용한 개념


"(붕새의 비유를 사람에게 적용해보면) 〈지혜는 한 가지 벼슬을 감당할〉 등급에 속하는 사람이 있고, 〈영예와 모욕의 경계를 가늠하는〉 등급에 속하는 사람이 있으며, 〈바람을 타고 다니며 가볍고 묘하게 날기를 잘하는〉 등급에 속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위에는 〈지인至人, 신인神人, 성인聖人〉의 등급에 속하는 사람이 있지요." "그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자아가 없고 육체 조건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지인〉이 될 수 있지요. 노력을 할 필요도 없고 공로를 세우고자 애쓰지도 않지만 세상 만물을 만들어 낼 수 있으니 〈신인〉입니다. 다른 사람이 뜻을 이룰 수 있도록 해 주지만 어떠한 명성도 굳이 바라지 않으므로 비로소 진정한 〈성인〉인 것이지요." "이것이 '작은 앎'과 '큰 앎'의 차이로, '작은 앎'을 가진 낮은 등급의 사람은 이해의 잣대와 크기가 훨씬 더 큰 '큰 앎'을 가진 사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89)


# 〈그러므로 말한다. "지인에게는 자기가 없으며 신인에게는 공로가 없고 성인에게는 이름이 없다."〉


3 절대성으로 상대성을 초월하다


"〈도〉를 감추는 것은 선입견과 편견이며, 작은 부분만 보고 전체를 다 아는 듯 여기는 태도입니다. 말을 감추는 것은 갖가지 화려한 수식과 교묘한 화법입니다. 그래서 유가와 묵가의 논쟁과 같이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이 있습니다. 이 두 학파는 모두 〈작은 이룸〉을 얻어 각기 다른 입장에서 화려한 수사를 동원해 서로 대립합니다." "옳고 그름을 제대로 평가하는 기준과 방법을 찾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들처럼 이런 언어의 상대적인 논쟁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들의 불분명함에서 벗어나 맑고 깨어 있는 방식으로 대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밝음〉일까요? '이것'과 '저것'이 서로 대응하여 이루어진다는 사물의 상대성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이것' 아니면 '저것'입니다. 나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인 것이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저것'이 됩니다. 고정된 '이것'과 '저것'은 없습니다."(151-2)


# 〈도는 작은 이룸에 감춰지며, 말은 화려함에 감춰진다.〉 〈그러므로 유가와 묵가의 시비가 있어 그 그르다고 하는 바를 옳다 하며 옳다고 하는 바를 그르다 한다.〉 〈그 그르다고 하는 바를 옳다 하고 그 옳다 하는 바를 그르다고 하려면 밝음을 따름만 한 것이 없다. 사물은 저것이 아님도 없고 사물은 이것이 아님도 없다. 저것으로 말미암으면 보이지 않으나 스스로 알면 그것을 알게 된다.〉 『장자』 내편 제2편 「제물론」


"그래서 성인은 이러한 상대적인 이치에 기대지 않고 〈하늘〉에 의지합니다." "'樞'(추)는 가운데서 사물이 회전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장치로 '문지도리'는 문이 회전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문의 중심축입니다. 그렇다면 〈도의 지도리〉는 '도'가 회전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중심축을 뜻하겠지요. 어떻게 '도'를 회전하게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회전의 가운데〉, 다시 말해 원심에 서는 것이죠. 원심은 원의 한가운데이며, 이쪽도 없고 저쪽도 없습니다. 모든 대립하는 입장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지요. 이쪽에 있지 않으며 저쪽에 있지도 않습니다. 중심점에는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습니다. '저것'과 '이것'이 구분되지 않으므로 〈무궁에 대응〉할 수 있습니다." "〈밝음〉은 옳고 그름, 저것과 이것의 상대성을 꿰뚫어보며 상대적이지 않고 절대적인 원점을 찾아내, 그 자리에 굳게 서서 바쁘고 번잡하며 상대적인 저것과 이것, 옳고 그름을 관찰하고 그에 대응합니다."(154-6)


# 〈이것 또한 한 가지 시비요, 저것 또한 한 가지 시비다. 과연 저것과 이것의 구분은 있는가? 과연 저것과 이것의 구분은 없는가? 저것과 이것이 그 짝을 얻지 못하는 것을 일컬어 도의 지도리라 한다.〉


4 관점이 곧 편견이다


"〈만물은 실로 그러한 바가 있으며, 만물은 실로 가능한 바가 있다. 만물은 그러하지 않음이 없고, 만물은 가능하지 않음이 없다.〉 이것이 바로 「제물론」의 핵심입니다. '제물'齊物은 모든 것을 한 가지로 바꾸고, 한 가지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만물은 그러하지 않음이 없고, 만물은 가능하지 않음이 없다〉라는 이치를 보라고 하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그렇거나 그렇지 않음', '가능하거나 가능하지 않음'은 종종 〈만물은 실로 그러한 바가 있으며, 만물은 실로 가능한 바가 있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이름이나 이름 붙이기, 주관적인 규정에 우리 자신이 집착하면서 나온 편견입니다. 이렇게 해서 구별이 생기고, 이렇게 해서 '같지 않음'이 생겨나지요. 그래서 '제물'은 곧 구별과 편견을 꿰뚫어보는 것이며, 주관적인 관점에서는 사실 어떤 사물을 무엇이라 불러도 상관없다는 점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각각의 사물에는 나름의 자연스러운 이치가 있고 모두 평등해집니다."(165)


"청나라 말 중화민국 초기의 학자 차오서우쿤은 『장자내편주』莊子內篇注에서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제물론」의 본문을 마치고 나면 그 뒤는 조항의 열거에 지나지 않으며 상술한 내용을 설명한다.〉 이런 관점은 일리가 있습니다. 어쨌거나 장자 자신도 이미 '말'言에 대해, 해석이나 설명에 대해 경고한 바 있지요. 자신의 글에서 말했듯 〈이로써 그칠 따름입니다.〉 ... 도가 일단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이는 더 이상 모두를 하나로 아우르는 근원적인 '도'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진정한 이치는 교묘한 말로 전달할 수 없는 것이지요. 진정한 자애는 어디에나 두루 펼쳐지기에 특정한 방향에서 나타나지 않습니다." "〈큰 도는 이름 부를 수 없다〉라는 말은 『노자』의 제1장 첫머리에 나오는 〈도를 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변함없는 도가 아니다〉 道可道, 非常道와 같습니다." "『노자』에서는 이 역설의 원칙을 인간 세상에서 사는 방식으로 돌려 사상의 핵심을 이룹니다."(186-8)


"여기서 우리는 장자의 모순 그리고 그가 웅변이라는 방식을 활용한 또 다른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큰 바룸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진심으로 이렇게 믿고 있었다면, 아무 말도 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장자 자신의 글을 쓰지 말았어야 하지요. 그런데도 그는 말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논쟁하거나 설명하는 '행위'와 논쟁하거나 설명하고자 하는 '이치' 사이에 근본적인 모순과 갈등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확신하며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한편으로 이야기를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 자신이 한 말과 할 수 있는 말에 질문을 던집니다. 갖가지 웅변 기술을 쓰면서, 그는 우리를 이해시키고 믿게 하려 할 뿐 아니라, 동시에 이 웅변 기술이라는 것이 의지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우려고 합니다. 현대의 논리 언어로 설명하건대, 장자의 글은 끊임없이 첫 번째 진술로부터 멀어지며, 두 번째 진술은 첫 번째 진술에서 쓰인 언어와 이치를 '메타'meta 검증하지요."(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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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를 읽다 - 공자와 그의 말을 공부하는 법 유유 동양고전강의 3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 / 유유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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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논어』의 연원


"공자의 가장 큰 공헌은 서주西周의 귀족 교육 체계인 '왕관학'王官學의 내용을, 출신 성분으로 봤을 때 그런 자격이 부족한 이들에게 가르친 것이었습니다." "귀족 교육의 핵심인 글쓰기가 공자를 통해 확대되고 전파되어 그 결과, 중국 최초의 민간 저술이 탄생했습니다. 『논어』 이전의 다른 문자 기록은 모두 왕조의 봉건 귀족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시경』, 『서경』, 『춘추』는 다 귀족 교육의 중요한 교재였기에 문자로 기록된 겁니다. 『시경』은 관리가 민요를 수집해 민간의 사정을 살피던 채풍采風 및 귀족 연회의 여흥과 관계가 있으며, 『서경』은 조정의 문서를 모아 놓은 겁니다. 『춘추』는 사관이 자신의 직분에 따라 작성한 방대한 사건 기록이지요. 그렇게 기원전 5세기까지 이루어졌던 글쓰기에 대한 독점과 제한을 공자는 교육이라는 방식을 빌려 부수었으며, 이에 힘입어 그의 제자들은 최초의 민간 저술인 『논어』를 집필했습니다."(39)


"역사적으로 『논어』의 더 새롭고 혁명적인 의의는 바로 『논어』가 그 전에는 없었던 인간관계, 즉 사제 관계를 구현했다는 사실입니다." "공자 이전의 교육은 가르칠 자격이 있는 사람이 배울 자격이 있는 사람을 가르쳤는데, 그 자격은 혈연과 신분으로 정해졌습니다." "반면 공자와 그가 가르친 사람들은 혈연관게가 아니었습니다. 공자의 수많은 제자들은 본래의 봉건 질서 속에서 그런 귀족 교육을 받을 자격조차 없었습니다. 따라서 공자가 맡은 역할은 사실상 봉건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혹은 다른 각도에서 보면 마침 봉건 질서가 흔들리던 춘추 시대였기에, 공자가 옛 체제의 규범을 어기고 본래 폐쇄적이고 독점적이었던 귀족 교육의 내용을 차별 없이 더 많은 이들에게 제공할 수 있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족과 친족 간의 유대를 통해 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들이 공자를 좇아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41-3)


2 스승으로서의 공자


"그 시대에 구舊귀족의 태도는 자리와 직무가 생겼을 때 관련 지식과 기능을 잘 익히면 된다는 것이었지요. 그 지식과 기능이란 군주와 다른 고관들을 대하는 예의, 연회에서 쓰이는 음악과 그 의미 그리고 시를 인용해 넌지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방법 등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새로운 유형의 인물들이 나타났습니다. 그 '야인'들은 적극적인 태도로 알아서 예악을 배우고 만반의 준비를 갖춰, 누가 자기를 필요로 하면 즉시 국정과 외교의 책임을 맡았습니다. 사실상 공자의 주요 업무는 제자들이 〈먼저 예악에 나아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제자들, 다시 말해 〈먼저 예악에 나아가는〉 사람들은 평소 공자의 가르침 아래 열심히 예악과 규범을 익히다가 언제든 국정과 외교 분야에서 그것을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정말로 국정에 쓰고자 한다면 나는 '먼저 나아간 사람', 즉 이미 준비를 마친 사람을 쓰겠다〉고 주장한 겁니다."(53-4)


# 〈먼저 예악에 나아가는 것은 야인野人이고 나중에 예악에 나아가는 것은 군자다. 만약 실제로 쓰고자 한다면 나는 먼저 나아가는 쪽을 좇겠다.〉, 「선진」편 첫째 장


"공자가 보기에 스승은 학생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특히 자신이 말하고 가르치는 내용에 대한 학생들의 의문과 반박을 통해 끊임없이 스스로 정진하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스승은 당연히 학생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지만, 만약 스승과 학생 사이에 스승이 학생을 돕고 영향을 주는 일방적인 관계만 있고 거꾸로 학생이 스승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고 영향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공자가 바라는 이상적인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졌기에 공자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해도 기꺼워하기만 하는 안회를 두고 〈나를 돕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불평한 겁니다. 그는 진심으로 가르치고 배우면서 서로 성장하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을 중요하게 생각한 인물이었습니다." "어쨌든 안회에 대한 공자의 원망은 진짜 원망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마지막 한마디에서 '기쁠 열說' 자를 쓴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 '說'자는 '悅'자와 통하며 마음 속에서 우러나온 기쁨과 희열을 뜻합니다."(64-6)


# 〈회는 나를 돕는 사람이 아니니, 내 말에 기뻐하지 않는 바가 없다.〉, 「선진」편 넷째 장


3 공자는 진리의 확성기가 아니었다


"공자가 '효'를 중시한 까닭은 나날이 혼란해지던 춘추 시대에 그가 목도한 인간 세상의 숱한 고통이 수백 년간 유지되었던 서주 봉건 질서의 파괴 및 와해와 근본적으로 관련되었기 때문입니다. 봉건 질서는 친족의 인륜을 확장하여 사회적 인간관계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공자가 생각하기에 세상을 바로잡으려면 마땅히 봉건 질서를 회복해야 했고, 또한 봉건 질서를 회복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인륜 관계의 각 주체들이 주어진 역할을 잘 수행해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자식 된 자는 '효'에, 신하 된 자는 '충'에 힘쓰는 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공자는 결코 자식과 신하에게만 편파적으로 역할을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동시에 아비 된 자도, 군왕인 자도 각기 아비답고 군왕다워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어디까지나 관계는 상대적이므로 행위에 대한 요구도 필연적으로 상대적이어야 했습니다."(78-9)


# 〈효성스럽도다. 민자건이여. 그의 부모와 형제가 그에 관해 하는 말에서 사람들이 흠을 잡지 못하는구나.〉, 「선진」편 다섯째 장


"공자가 보기에 배움을 향한 진실한 감정과 즐거움의 기준에 부합하는 제자는 안회밖에 없었습니다." "안회는 공자의 가르침이 가졌던 모순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인물입니다. 공자의 가르침은 그 시대에 매우 유용해서 무질서한 사회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인재를 키워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자는 본래 그런 용도의 가르침에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 공자 자신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가르침은 주나라의 예악禮樂을 회복하는 데 유용했습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 사람을 근본으로 삼는, 윤리가 바탕인 봉건 시기의 예절과 의례 정신으로 돌아가는 데 필요했던 겁니다. 공자의 가르침은 공명과 이익이나 현실에 따르지 않음을 강조했으며, 유용하게 쓰이려고 만들어진 것도 아닙니다. 이 가르침의 모순은 그의 가르침이 인본주의로 돌아간 '무용한 학문'이면서도 결과적으로 유용해졌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제자가 겨우 서른한 살의 나이에 요절했으니 공자로서는 당연히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89-90)


# 〈계강자가 물었다. "제자들 중에 누가 배움을 좋아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안회라는 자가 배움을 좋아했는데 불행히도 명이 짧아 죽었고 지금은 없습니다."〉, 「선진」편 일곱째 장


4 본래의 공자로 돌아가기


"염유(염구)가 스승에게 한 말을 보면 내적인 능력을 들어 자신의 그리 훌륭하지 못한 외적 행동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승은 내적인 느낌과 동기를 기준으로 그를 비판합니다. 스승이 진정으로 주목한 것은 그가 얼마나 훌륭한 행동을 했느냐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내적으로 얼마나 강한 동기를 갖고 더 잘하려고 하는지, 그것을 더 중요시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공자는 확실히 '유심론자'입니다. 염유에 대한 그의 추궁은 실제로 눈에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마음을 문제 삼고 있으니까요." "확실히 주관적이긴 합니다. 그러나 이런 주관성은 공자의 사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 자신의 풍부하고 민감한 공감 능력에 의지해 공자는 어떤 가치, 즉 진실하고 성실하게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것이 외적인 표현으로 남에게 잘 보이고 남을 설득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공자는 염유가 정말로 '역부족'인지 아니면 '선을 그은 것'인지 그 내적인 차이를 한눈에 꿰뚫어본 것입니다."(126-7)


# 〈염구가 말했다. "스승님의 도를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부족일 따름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역부족인 사람은 중도에 포기하는데 지금 너는 선을 긋고 있다."〉, 「옹야」편 열두째 장


"춘추 시대는 왜 그렇게 혼란하고 무질서해서 수많은 사람이 불안에 떨며 살아야 했을까요? 공자의 견해는 시종일관 같았습니다. '예'를 잃었기 때문이었지요. '예'가 버려지고, 왜곡되고, 변질되었다고 본 겁니다." "묵가, 도가 그리고 훗날의 법가의 공통된 출발점은 기존의 '예'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인정한 것이었으며 적어도 '예'가 현실의 요구에 부적합하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본래의 '예'를 밀어내고 '예'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법을 찾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공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의 외적 형식과 내적 정신이 서로 근본적으로 어긋나 버린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혹은 '예'가 형식화되어 인간의 진실한 감정과 이어졌던 끊이 끊어졌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보기에 새상을 구하는 방법은 '예'의 정신을 탐구하고 처음에 설정된 '예'의 원초적인 의미로 돌아가 다시금 '예'가 인간 내면의 진실한 감정과 결합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130-1)


# 〈공자께서는 상을 당한 자 곁에서는 일찍이 배불리 드신 적이 없다.〉, 「술이」편 아홉째 장, 〈공자께서는 곡을 한 날에는 노래를 부르지 않으셨다.〉, 「술이」편 열째 장


"공자의 장점은 배우기를 좋아하고 많은 것을 기억하며 자기가 배운 것을 어떻게 가르질지 잘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칫하면 이 지식과 기능은 공자 자신에게 제대로 속하지 못하고, 실제 삶에서 그저 스쳐 지나가기만 할 뿐 자신에게 전혀 영향을 주지도 못하고 자신을 바꾸지 못하게 될지도 몰랐습니다." "공자는 언제나 배운 다음의 일을 걱정했습니다." "공자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 했고 제자들이 그런 사람이 되는 것도 당연히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식과 기능은 가르칠 수 있어도 가장 중요한, 그 지식과 기능이 자신을 진정으로 변화시키게 하는 것만은 가르칠 수 없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스스로 깨달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이런 몇 가지 일을 끊임없이 걱정했는데 이 걱정 자체가 그의 꾸준한 수양인 동시에 제자들을 감화시키고 영향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진정한 솔선수범이었던 것이죠."(140-2)


# 〈덕을 닦지 못하고, 배운 것을 연구하지 못하고, 의로운 얘기를 듣고도 실천하지 못하고, 선하지 못한 점을 고치지 못하는 것이 나의 근심이다.〉, 「술이」편 세째 장


5 스승에게는 정답이 없었다


"자로와 염유가 차례로 공자에게 완전히 똑같은 질문을 합니다. 〈말을 들으면 바로 행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공자는 각기 다른 답을 내놓습니다. 자로에게는 〈어른이 계시니 의견을 여쭤 봐야 하지 않느냐? 어찌 듣자마자 행하겠느냐?〉라고 답했고, 염유에게는 〈옳다. 들으면 바로 행해야지〉라고 답했습니다. 당시 공서화는 공자 옆에 가장 자주 있던 제자여서 그 두 번의 문답을 다 들었습니다. 당연히 무척 당황스러웠을 겁니다. 그래서 왜 다른 대답을 했는지 물으니 공자는 〈염유는 성격이 소극적인 편이어서 망설이지 말라고 격려한 것이고, 자로는 성격이 충동적이고 늘 혼자 두 사람 몫의 일을 하려고 해서 다소 늦춰 준 것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는 이른바 '인재시교'因材施敎로서 인물에 맞게 가르치는 교육 방식입니다. 진정한 교육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그리고 정답이 아닌 답을 제자들에게 내줄 수 있는 사람만이 스승이 될 자격이 있습니다."(173-4)


# 〈자로가 물었다. "들으면 바로 행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형父兄이 있는데 어찌 듣고 바로 행하겠느냐?" 염유가 물었다. "들으면 바로 행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들으면 바로 행하여라." 공서화가 물었다. "유가 들으면 바로 행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스승님은 '부형이 있다'고 하셨고 구가 들으면 바로 행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스승님은 '들으면 바로 행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혼란스러워 감히 여쭙겠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구는 물러나는 성격이라 격려한 것이고, 유는 두 사람 역할을 하므로 물러나게 했다."〉, 「선진」편 스물 두째 장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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