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들 (양장) - 빈부격차는 어떻게 미래 세대를 파괴하는가
로버트 D. 퍼트넘 지음, 정태식 옮김 / 페이퍼로드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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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저자가 분석 대상으로 삼은 1950년대와 2000년대의 '포트클린턴'은 특정 지명을 가리키는 고유 명사이지만, 당대의 생활상이 집약된 추상적 공동체를 가리키는 보편 명사이기도 하다. 포트클린턴의 과거가 현재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점은 "인구학적, 경제적, 교육적, 사회적 그리고 심지어 정치적 측면"(12)에서도 다양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1950년대의 포트클린턴 주민들은 "가족이든 아니든간에 모든 졸업생들을 '우리 아이들'로 생각했"(13)으며, "높은 절대적 이동성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같은 보조步調로 상승 이동했다." 이들의 물질적 상황은 대개 가난했지만, "공동체에 대한 (상호) 지원의 넓이와 깊이에 있어서는 부유했다."(21-2) 


2000년대에 들어서자 공동체를 떠받치던 "부모와 선생님, 공동체 내의 비공식적인 멘토"는 "경제적 장벽과 이웃의 편견"으로 대체되었다. 현재의 포트클린턴은 "백만 달러에 육박하는 맨션과 노후화된 이동식 주택"이 명확히 구분된 지역에 들어서 있는 단절된 공간으로 바뀌었으며, 주민들은 더 이상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우리 아이들'로 여기는 정서적 유대감을 공유하지 않는다. 아니 그런 아이들의 "존재에 대해 인식하는 이조차 매우 드물다."(51)


현재의 불평등은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밀접하게 관련된 척도인 교육을 통해" 확대되고 있으며, 이는 '계급태생'(class origins)이라는 말로 집약된다.(35-6) 경제적 격차를 따라 그어진 계급 경계선은 자신의 일상생활을 "사회경제적 영역 외부의 사람들에게 노출"(61)하는 비율을 급격히 떨어뜨린다. 이는 "중상위 계급 구성원들이 가난한 아이들의 삶에 대한 직접적인 인식을 갖고 있지 않기에, 기회격차가 벌어지고 있음을 인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는 사실을 뜻한다."(66)


'이웃 간의 분리', '교육에서의 차별'과 더불어 '계급을 가로지르는 결혼의 감소' 역시 "사회 계층 이동을 위한 디딤돌이 제거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65) 동일한 계급 배경을 지닌 상대방과의 혼인은, 광범위한 수준에서 인간 관계의 단절을 만들고, 이는 다시 길고 좁은 터널을 지나야만 도달할 수 있는 강고한 결속을 낳는다. "덜 교육받은 미국인들이 경험했던 경제적 전망의 급격한 하락"은 이들을 "신뢰가 떨어지는 배우자나 부모가 되도록 만든다."(110) 이들에게 경제적 행복은 "손에 닿지 못하는 것"으로 그려질 뿐이다.


이러한 기회격차(opportunity gap)는 "부분적으로는 지금의 풍요로운 아이들이 과거의 풍요로운 아이들보다 더 많은 이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만, 대부분은 현재의 가난한 아이들이 과거의 가난한 아이들보다 훨씬 더 열악한 상황에서 살기 때문이다."(50)  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일차적으로 부모와의 '상호인지적 자극'(congnitive stimulation)이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주 이야기하는 부모와 함께 자란 아이들"은 훨씬 향상된 언어 능력을 갖게 되며, 유아기에 방치된 아이들은 "뇌 발달 측면에서 바로잡기 힘들 정도로 심한 결핍"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164,7)


가정 외의 환경에서 주어지는 멘토링의 격차는 아이들의 분별력 격차(savvy gap)를 더욱 악화시킨다. 부자 아이들과 가난한 아이들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 중 하나는 "기회의 길에 자리잡고 있는 제도를 이해하고, 그러한 제도를 자신을 위해 작동하게끔 만드는 능력에서 뚜렷하게 대비되는 차이가 나타난다는 사실이다."(311) 가난한 아이들은 "대부분의 사람을 신뢰할 수 있"다고 말하기보다는 "아무리 조심을 많이 해도 지나치지 않다"(316)는 말을 듣고 자라며, 끊임없이 자신을 실망시키는 이웃과 제도에 마주친다.


학교는 "조직"의 측면에서는 경쟁의 평준화를 위해 존재하고 다양한 학습이 벌어지는 공간이지만, "장소"의 측면에서는 계급격차를 확대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학교는 "일종의 반향실反響窒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안에서는 아이들이 학교로 가지고 오는 강점과 약점들"이 서로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중산층 아이들은 학교에서 대부분 고무적이며 혜택이 많은 메아리를 듣게 되는 반면, 저소득층 아이들은 대부분 스스로를 낙심하게 만드는 해로운 메아리를 듣게 된다는 것이다."(263)


한마디로, "뇌는 고립된 컴퓨터가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 유기체로서 발달"(165)한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주된 사회화 과정을 '길거리'에서 겪는다는 것이 얼마나 기회를 잔혹하게 억압하는 일"(127)인지를 역설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고등교육을 받은 부모들이 이러한 연구들을 직간접적으로 더 많이 학습하고, 자녀 양육에 적용"하기 때문에, 계급 차이를 확대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모든 사회경제적 계급의 부모들이 양육과 교육에 대한 지출을 늘려왔지만", 그 규모는 불균등하며, "지난 수십 년 동안 더 꾸준하게 불평등해졌다."(184)


기회격차는 단순히 개개인의 삶의 질을 주관하는 것을 넘어, 민주주의적 가치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들은 고등학교 이후의 교육을 받지 못한 동년배들에 비해 두세 배 정도 더 투표에 참여"하지만,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다른 사회적 참여의 장에서는 급속히 빠져나가고 있다. 이는 "정치적 목소리에서 나타나는 계급적 차이"를 증폭시켜, 가난한 자들의 "정치적 소외를 더욱 악화"시키고, 경제적 압력에 노출된 "'생기 없는' 대중이 갑자기 감정적으로 격해져서 이데올로기적 극단주의를 표방하는 반민주적 선동 조작에 노출"될 위험성을 높인다.(343-4)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은 1) 근로소득 보전세제나 자녀세액 공제제도 같은 재정 지원으로 저소득층 가족 구조의 안정성 향상, 2) 부모의 육아 시간을 더 많이 보장하는 양육 휴가제 확대와 돌봄 서비스망 구축, 3) 가난한 지역의 학교에 더 많은 예산을 배정하고, 해당 교사들의 고용 조건을 개선하며, 사회복지와 건강 서비스를 결합한 공동체 학교 연합 구성, 4) 방과 후 학교나 과외활동을 통해 가정 밖에서 멘토링을 해주는 롤모델 제공 등이다.


교육은 아이들의 가능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기르고, 제도는 어른들이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규율한다. 저자의 대안들은 '우리 아이들'로 표상되는 "공감과 선의의 동료애" 정신을 부활시켜야 하며, 구조 개선의 선행 조건인 "이타적 인간의 확산"을 위해 공동체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가난한 아이들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은 그들의 삶에 '얼굴을 내밀어주는' 의지할 만한 어른의 존재"(371)라고 말할 때, 저자는 그들의 인내와 헌신을 개발하는 것은 물질적 지원과 보상 같은 '객관적 정신'이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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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의 이해 - 한마당강좌 1
폴 풀키에 / 한마당 / 198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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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의 출발점은 "아무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몸을 담글 수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부정적 긍정(不定的 肯定) 명제이다. 그는 파르메니데스의 "부동(不動)과 동일(同一)의 철학"의 대척점에서 "변화와 모순의 철학"을 주장하여, 존재가 품고 있는 "우연성, 변화, 다수성(多數性)"에 주목한다.(14-5) 제논은 스승 파르메니데스를 옹호하는 바, 그의 "부정(不定) 변증법"[아킬레우스와 거북이 논증]은 "하나의 명제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편이 인정하거나 증명한 전제를 파괴하는 방식을 취한다.


소피스트의 궤변술도 이와 유사한데, 이것은 "진리와 무관하게 그것을 사용하는 자의 이익에 맞추어 반대 사실을 증명함으로써 자기 편에 유리한 주장을 증명하려는 하나의 변증법이다."(18)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의 말재주를 타파하기 위해, 용어가 나타내는 사물의 성질을 규정하는 데 주목하여, 엄밀한 "정의(定義)를 요구하며 그것을 탐구, 논의한다."(19) 소크라테스에게 "사고(思考)란 특수한 것과 일반적인 것,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抽象的)인 것"의 부단한 전환이다.(22)


플라톤의 변증법은 소크라테스의 변증법에 '정신의 역동성'과 최초로 주어진 것을 초월하는 '도약'을 추가한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가 "진리, 곧 실재에 대한 인식을 목표"로 삼는 데 반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변증법은 "그럴 듯한 전제에서 출발"하여 상대방이 "공통적으로 받아들인 의견"을 가리킨다. 그는 결론의 참이 아니라, 추론 과정의 정합성에 주목하여, 과정의 올바름이 결론의 올바름을 이끌어낸다는 입장을 취했으며, 여기서 '변증법'이라는 말에 경멸적인 뉘앙스가 스며든다.(27)


스토아학파는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삼단논법과 제논의 논박 방법"을 받아들여, 변증법을 진리의 발견을 돕는 수단으로 이해했으며,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 고유의 변증법"을 계승하는 한편, 이데아를 신의 말씀으로 대체하여, 존재론과 변증법을 결합한 중세 신학의 밑돌을 놓았다.(29) 데카르트는 변증법이 수사학 같은 기술에 불과하며, 연역적 도구의 가치에 대한 집착이 그 바탕이 되는 "사실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을 게을리하게" 만든다고 비판하였다.(34) 칸트도 "가상(假象)에 바탕을 둔 헛된 추론을 변증법(론)"이라 칭하였다. 


헤겔에 이르러서야 "모순되는 것들이 명백하게 양립하는" 변증법이 재발견된다.(38) 전통적 변증법은 모순률을 "사물의 절대적 법칙"으로 인정하고, 양립하지 않는 결과를 배척하지만, 헤겔의 새로운 변증법은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사물 속에서 모순을 보고, 그러한 모순으로부터 존재의 활동에 기본이 되는 원동력을 이끌어낸다."(48) 그의 사유는 인간 정신(精神)과 신성(神性)사이에 대립되는 '동일성'과 '상이성'을 결합하고자 했던 독일 신비주의자들의 영감에서 비롯한 것이다.


헤겔의 절대 정신은 "자연 속에 스스로를 외화(外化)함으로써만 결정된다." 즉, "세계가 절대 정신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세계에 의해 절대 정신이 생성된 것"(58)이며, 주관적, 개별적 정신이 객관적, 절대적 정신의 형태로 나아가면서 스스로를 자각한다. 사유의 질서 안에서 반대되는 명제는 동시에 참일 수 없을지라도 동시에 거짓일 수는 있다. 여기서 각각의 반대 명제들이 포함하고 있는 "진리의 부분을 종합하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64) "합(合)은 모순을 극복하지만 상반되는 두 명제를 보존한다."(61) 


마르크스의 사적(史的) 유물론은 "역사를 설명하는 개념"이다. 이 이념은 "경제적, 물질적 조건에 의존하는 이념"이며, 상부구조에 불과하다. 그가 보기에 물질은 본질적으로 "활력(dynamisme) 이며 운동"으로서, 모든 정신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헤겔에게 "사물 자체는 사유의 반영에 지나지 않"지만, 마르크스에게 물질은 그 자체 안에서 "정(正)과 반(反)을 종합"하며, "그 종합은 우주 진행의 각 단계를 형성한다. 사유의 변증법은 사물의 변증법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70) 따라서 개체는 자신을 둘러싼 "작용 전체와 환경에 대한 개체의 반작용의 교차로에 위치"시켰을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다.(71)


마르크스주의는 "사물과 사유의 모순, 그리고 그것에 따른 불안정성"에서 진리의 잠정성(暫定性)을 이끌어낸다. "해결불가능한 이율배반(二律背反)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움직일 수 없고 결정적인 진리도 없다."(77) 문제를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자신들의 이론을 결정적, 절대적 진리로 간주하여 "변증법의 본질적 원리를 위배하고 말았다."(79)


과학은 절대성에 갇힌 이념의 사슬에서 변증법을 건져내어, 승리 자체라는 목표가 아니라 승리를 위한 투쟁의 과정에 작용하는 원리로 재규정한다. 그것은 "자신의 작업을 파괴하려는 부조리한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와 반대되는 이론 속에 포함되어 있는 진리의 요소"를 받아들여, 스스로를 풍요롭게 하고, "최초의 지식이 강요하는 한계로부터 정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분투이다. 과학적 변증법은 "기존의 지식과 모순되지만, 거기에 통합되어야 하는 새로운 경험"(127)을 통해 인식의 진보를 이어나가는 반작용을 부단히 요청하고 탐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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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역사 3 - 전란의 시대 : 고려후기편
임용한 지음 / 혜안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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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헌이 죽던 1219년 봄, 20만의 군대가 현재의 카자흐스탄 지방, 알타이 산맥 사면에 위치한 이르티슈 강 상류에 집결했다."(108) 징기스칸은 "타타르 정복전을 시작하기 전에도 무려 7년 동안 꼼짝 않고 군대를 조련"(112)하는 인내심을 발휘하여, 부족간의 전투에 길들여져 있던 몽골군을, 국가 단위의 광범위하고 조직적인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전략적인 군대로 탈바꿈시켰다. 반면 고려는 묘청의 난과 조위총의 난을 연이어 겪으면서 서경 세력을 일소하여, 북계 방어의 중심지를 상실한 상태였다.


1225년 고려 국경 부근에서 몽골 사신 저고여가 살해됐지만, 고려는 어떠한 해명도 없이 태평한 대응으로 일관하면서 국제 정세에 둔감한 모습마저 보였다. 당시 몽골은 서방 정벌과 금나라, 남송 공략에 주력하고 있었으며, 징기스칸이 사망한 "1227년에는 모든 군대가 회군하여, 후계자 문제로 갈등을 겪"으면서 내부 정비에 신경쓰느라 고려에게 아무런 압박을 가하지 않고 있었다.(118) 그러나 징기스칸의 셋째 아들 "우구데이가 즉위하면서 몽골은 서방원정을 중단하고 중국으로 시선을 돌린다."(120)


몽골은 "갈수기나 강이 언 후에 도강하는 전례를 깨고 1231년(고종 18) 8월 아직 압록강의 물이 창창할 때에 도강을 하더니 바로 의주를 포위했다."(117) 속도와 기동력, 생존력이 탁월한 몽골군은 부대를 나누어 사방을 공략하면서 적을 분산시키고, "흩어진 적보다 빠르게 집결하여 적의 머리와 심장을 치는"(125) 전술을 구사하였다. 몽골군은 그들의 명성에 걸맞게 "한 달 만에 평안도 지역을 거의 석권하고, 일부는 황해도까지 내려오는 놀라운 실력을 보여준다."(122) 안주성 전투에서 정면 대결에 크게 패한 고려군은 수성전에 주력하면서 "다시는 몽골군과 정면대결을 펼치지 않았다."(131)


12월 1일 개경이 포위되고, 1232년 1월 강화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항복할 마음이 없었던 최이는 "강화회담을 추진할 때부터 다음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다."(147) 그것은 항구적인 방어가 가능한 요새지역으로 수도를 옮기고, 전국을 비우는 '청야전술'이었다. 그가 선택한 강화도는 육지와 가까운 섬이자 "개경 사람들이 이주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넓"었고, "분지처럼 외곽이 산으로 감겨 있는" 천혜의 방어지였다.(152) 또한 최씨 가문의 사병들이 육지를 지키고, 수군이 바닷길을 장악했으므로 "전국이 분탕되어도 강화는 안전했다."(155)


최씨 무신정권은 이기기 위한 전략은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백성들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며, 정권 유지에 급급했다. 따라서 대몽골전쟁은 "몽골군과 전선을 형성하고 싸운 전쟁이 아니라 몽골군이 고려 땅을 짓밟고 돌아다니는 전쟁이었다."(159) 간혹 야별초가 몽골군을 물리친 사례가 있었지만, 이들의 파견은 "국가가 행정력과 지배력을 놓지 않으려는 시도였다." 정부는 몽골군이 물러난 "평화기(?)에 세금과 주민에 대한 관리권까지 포기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164)


전황이 지지부진하자 몽골은 "고려를 압박해서 빠른 시일 내에 항복을 받아내기로 방침을 정하고 (1253년부터) 7년 간 한 해도 쉬지 않고 고려를 침공한다. 약탈도 고려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한 전략적 타격으로 바뀐다."(196) 1258년 동북면(함경도)이 반란을 일으켜 몽골에 투항하고 강화에 대한 공략수위가 높아지자, 내분이 일어나 최씨정권의 마지막 계승자인 최의가 살해되고, 원종이 즉위한다. 원종은 무신집단의 위세에 눌려 폐위와 복권을 거듭했지만 몽골군의 도움으로 1270년 5월 무신정권을 완전히 종식시키고, 개경 환도를 선포하였다.(205-6)


고려 왕조 내내 지방의 향리층은 나름의 분업체계와 위계질서 아래 향촌사회의 치안을 담당하고, 전시에 지방군의 장교로 변신해 활약하는 체제 수호 집단이었다. 고려 후기, 권문세족들이 마을마다 땅과 노비를 빼앗고 대토지를 점유하자, "지배층의 제일 하단을 형성하는 무사, 군인층의 경제적 기반이 먼저 와해된다."(257) 지방사회가 사족과 향리로 분화되고 중앙 관료로 진출하는 자가 늘어나면서, 고려군의 장기인 수성전이 부실해졌고, 이는 홍건적과 왜구의 침공에 속절없이 국토를 유린당하는 계기가 된다.


추수철만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왜구는,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실어나르는 조운선을 강탈하기 위해 "아예 개경의 입구인 예성강 하구에 자리를 잡았다."(301) "1350년의 간지를 따서 '경인庚寅의 왜구'라고 불리우는 이들은 동아시아 전체"를 휘젓고 다녔으며, 대만을 점령하고,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까지 진출하였다.(308) "1374년(공민왕 23, 우왕 원년) 4월 350척의 대선단이 경상도 합포(마산 일대)로 상륙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왜구는 내륙으로 거침없이 들어오기 시작"했으니, 가히 임진왜란의 전초전이라 할 만큼 위세가 대단하였다.(309)


1376년에는 전남의 중심도시인 영산과 나주가 약탈당하고, 전주마저 함락되었다. 1377년 3월에는 수군증강계획에 따라 건조 중이던 병선 50척이 왜구의 기습을 받아 소실된다. 선단수에서 현저하게 밀리던 고려 수군을 구원한 것은 최무선의 화약이었다. 1380년 왜구는 500척으로 구성된 대함대를 이끌고 진포에 진출하더니 "배를 묶어 수상요새를 구축하고 내륙으로 들어갔다." 최무선의 화통군은 자신감에 도취되어 있던 왜선을 화기를 사용하여 불살라버렸다. "(근 30년 만에) 해전의 양상이 수세에서 공세로 바뀌는 순간이었다."(341)


당시의 화약은 "염초, 유황, 목탄을 섞어서 점토처럼 이긴 것"으로, 불을 붙여서 한참 태우다가 일정한 온도가 되면 폭발하는 원리였다. 따라서 화통을 사용하려면 "먼저 갈고리로 배를 붙잡고 철질려를 던져 왜구가 접근하는 것을 방해"하면서, 적절히 시간을 맞춰 화통을 왜선으로 던져야 했다.(353) 1375년 화통도감을 설치한 최무선과 1381년 해도원수로 임명되어 강력한 수군을 조련한 정지의 결합은 관음포 해전에서 화약무기의 파괴력을 극대화시킨 최상의 선택이었다. 이후로 "고려 수군과 왜구의 전력은 1:2에서 2:1로 역전되었다."(354) 


왜구와의 전투는 1419년(세종 1) 대마도정벌 때까지 줄곧 이어졌지만, 14~15세기의 집권층은 "일본이 국가 대 국가의 전쟁을 시작할 만큼 성장했음을 깨달았다."(356) 이 깨달음은 조선까지 이어져서 대대적인 수군 창설과 "일본과의 전면전을 전제로 한 대규모 군사개혁"으로 이어진다. "편제상으로 육군뿐이던 군제가 육군과 수군으로 이군화되고, 수군지휘부와 수군기지가 전국적으로 설치되었다."(357) 대륙과 한반도의 질기고 오랜 인연이 해양에서 불어오는 태풍과의 대결로 넘어가는 전환기가 도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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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역사 2
임용한 지음 / 혜안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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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2년(태조 25) 거란은 고려와 친선과 우호를 도모하기 위해 30여 명의 사절단을 파견했다. 그러나 태조 왕건은 거란이 "동족인 발해를 멸망시킨 무도한 국가이므로 이웃나라로 대접할 수 없다"(13)고 말하면서 사절단을 섬에 유배하고 낙타 50필은 만부교 아래 묶어서 굶겨죽였다. 왕건이 거란에 대해 강경일변도로 나간 이유는 후삼국 시절 발해 지배층이 대규모 유민을 이끌고 남하하여 자신의 정권 수립과 안정에 지대한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탈하면, 당장 "북쪽 국경이 동요하고, 서북지방과 서경이 동요"(19)하게 될 터였다.


그러나 "북방으로부터의 위협은 고려라는 신생 국가의 운명의 추를 바꾸어 놓을 만큼 거대하고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것은 큰 실책이었다. 거란과 여진, 만주족에 이르기까지 "소위 동이족에 속하는 민족들이 중원을 넘볼 때마다, 먼저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해동을 복속시켜 놓는 일이었다. 그들이 중국을 향해 서진하였을 때 배후를 찔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20) 피할 수 없는 전쟁에 단호히 맞서는 자세는 한반도에 자리잡은 국가의 숙명이지만, 거기에는 철저히 다져놓은 내실과 사전에 대비된 시기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거란은 926년에 발해를 멸망시키고, 다음 해에는 만리장성을 넘어 연운 16주를 차지하였다. 그들은 "지금의 북경지방을 중심으로 하북성 북부에 이르는 지역"을 장악하면서 "농경지역을 확보하고 한족 관리와 문화를 흡수"(22)한 대국으로 발돋움한다. 고려는 통일 후 47년 만인 "982년(성종 2)에 겨우 전국에서 12개의 대읍을 선정해 목사를 파견"(50)할 정도로 중앙의 장악력이 미비한 상태였다. 이러한 힘의 우열을 간과한 결과 초래된 "거란 전쟁은 한때 고려의 생명을 위협했고, 고려의 역사에도 큰 영향을 미친 길고도 치열한 전쟁이었다."(13) 


993년(성종 12) 8월, 소손경군이 기습적으로 압록강을 건넜다. 고려는 곧바로 "전국에 병마제정사를 보내 병력을 모집했고, 10월에야 겨우 군대를 편성했다."(89) 그러나 병사를 채우는 데 급급했던 조정은 주력을 동원한 방어전은 기획하지도 못한 채 항복협상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 때 거란의 공세가 고려와 여진의 동맹을 차단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서희는 강화회담에서 "압록강을 경계로 거란과 고려가 동시에 여진족을 공격하여 축출하고, 이 지역을 나누어 점령하자"는 제안을 내놓아 위기를 넘기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한다.


994년(성종 13)부터 거란과 고려는 여진에 대한 공세를 개시했다. 누구보다도 이 지역(강동 6주)의 정략적 가치를 잘 알았던 서희는 "압록강에서 청천강에 이르는 통로 상의 요지를 점령"하고 성을 쌓아 북방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106) 1005년 고려에서 "강조의 정변이 일어나 목종이 쫓겨나고 현종이 즉위했다."(111) 송과 '전연의 맹'을 맺어 형님의 나라로 올라선 거란은 세력 다툼에서 밀려나 외부의 협력자를 원하는 고려 지배층의 분열과 협조를 기대한 듯 "사신을 보내 미리 침공 통보를 하고" 정벌에 나섰다.


거란은 11월 25일 통주성에서 강조의 주력부대를 섬멸하고, 12월 6일 곽주성마저 점령했다. 중앙정부와 갈등을 빚던 서경세력이 일찌감치 항복의사를 내비치자, 궁지에 몰린 현종이 강화를 청하려는 찰나, "극적으로 탁사정이 이끄는 동북군 본대가 서경에 도착했다."(146) 서경이 거란군의 치열한 공격을 받고 있던 12월 16일, 은밀히 흥화진의 포위망을 빠져나온 양규와 700명의 결사대가 곽주성 탈환 작전을 전격적으로 성공시킨다. "하룻밤 사이에 거란군은 압록강과 대동강 사이에 유일하게 마련해 두었던 중간기지를 상실했다."(162)


거란군은 "놀라운 기동력과 세련된 부대 운영으로" 전투에서 여러차례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압록강 이남에서 단 한 개의 성도 자신의 영토로 만들지 못했다. 오히려 거란의 침공과 (국왕 반대파인) 강조의 사망은 현종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는 결과를 낳았다."(190) 개경을 함락했지만 보급선이 단절된 거란이 철병하자 현종은 국가 행정망 조직에 전념한다. 그는 "거란의 3차 침입이 있던 1018년 무렵에는 전국의 행정망을 경京 4개, 목牧 8개, 부府 15개, 군 129개, 현 335개, 진鎭 29개로 편제"(201)하여 군현제의 기본 골격을 만들어냈다. 


어느 편도 승기를 잡지 못하고, 어느 편도 물러서지 않는 "전쟁을 끝내려면 획기적인 전기가 필요했다."(211) 소배압은 지루한 공방전을 끝내기 위해 개경 직공 작전을 구상하고, 1018년 9월부터 준비에 착수했다. 소배압 부대는 이번에도 과감한 기동력으로 개경 입구에 이르는 데 성공하지만, 현종이 도주를 택하지 않고 개경 사수를 천명하자 난관에 봉착한다. 1019년 2월 2일 거란군과 고려군은 귀주성 앞에서 일대회전을 벌인다. 주력부대가 공방을 벌일 때 김종현의 1만 병력이 거란군의 등 뒤로 연결된 태천-귀주를 잇는 길에서 나타났다.


"천재일우의 기회를 포착한 고려의 병사들은 20년을 지속한 긴 전쟁과 고통의 종식을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232) 앞뒤로 협공 당한 "거란군 사상자와 포로가 수만 명이고, 살아서 돌아간 자는 겨우 수천 명이었다."(234) 처참한 패배를 당한 거란은 "고려와 여진을 평정하고 중원을 침공한다는 전략을 수정"하여 지금까지의 승리에 만족하기로 했다. "개경으로 귀환한 강감찬과 고려병사들은 거국적인 환영과 환대를 받았다."(235) 그러나 현실에 안주한 거란은 "제국을 형성해온 목표와 에너지를 잃어버리더니, 1122년 허무하게 멸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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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역사 - 삼국편
임용한 지음 / 혜안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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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2,3세기까지도 삼국은 부족연맹 사회였다. 전쟁이 벌어지면 이들은 각기 자신의 군대를 끌고 집결하고, 그들의 서열에 따라 편제되었다."(20) 이런 군대는 국지전에서 강한 단결력을 발휘하지만, 부족 간의 이해가 다르기 때문에 국가 규모의 전투에서는 뚜렷한 한계를 노출한다. 삼국은 군의 편제와 전술을 일원화하기 위해 신분제도와 경제 체제를 포함한 전체 사회의 개조작업을 벌였다. 한반도의 패권이 걸린 임진강, 한강 유역을 놓고 벌어진 "고구려(고국원왕)와 백제(근초고왕)의 공방전은 요동을 두고 벌어진 중국과 고구려의 전쟁과 마찬가지로 삼국 간에 피할 수 없는 대립의 시기가 도래했음"을 알렸다.(80) 


소수림왕의 개혁을 물려받은 광개토대왕이 백제의 북쪽 국경인 예성강으로 치고 내려오자 위기에 몰린 "백제와 신라는 왕실 간의 결혼으로 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저항했다." 절대 우위의 고구려가 처한 어려움은 한반도가 너무나 "좁은 반도인데다가 동쪽 땅의 1/3은 산악지대"이기 때문에 "백제나 신라 어느 쪽을 치든지 충청도를 경유"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백제를 공격하면 신라군에게, 신라를 공격하면 백제군에게 보급로가 노출되는 것이다."(97) 고구려는 "광개토왕의 대정복전과 장수왕의 (백제) 위례성 함락"이라는 기념비적 성과를 거뒀지만, 고구려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수,당과의 치열한 전쟁으로 국력을 소진하는 불운에 시달렸다.


거센 공격에 시달리면서도, 국가 체제를 정비한 백제(성왕)는 서기 551년 한성과 주변의 5군을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한성이 백제에게 점령되자 한강 이남에 진출했던 고구려군"의 배후가 위험에 노출되었고, 결국 신라의 북진을 차단하기 위해 죽령과 조령 일대에 배치한 부대를 철수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땅은 백제의 소유가 되지 못했다." 곧바로 소백산맥을 넘어 진격한 신라군이 "손쉽게 죽령 이북의 10개 군을 차지"하고 넘어와, 한강 하구에서 "성왕을 살해함으로써 신라와 백제는 단단히 원수가 되고 말았다." 백제는 "한강을 되찾기 위해서는 먼저 신라를 쳐서 괴산, 보은, 충주 지역을 빼앗아야 한다는 피맺힌 교훈을 배웠다."(125-6)


"고구려가 수와의 전쟁에 돌입하자 백제는 신라에게 맹공을 가했다. 수 양제의 침공이 있었던 진평양 33년(611년)에 요충이던 가잠성(위치 미상)이 백제 수중에 떨어졌고, 46년(624년)에는 함양 등지의 여러 성이 다시 백제에게 넘어갔다."(126) 그러나 신라는 전투에서 더 많이 패하면서도 한강 유역을 지켜냈다. 그 이유는 고구려가 요동에 발이 묶여 남방공략에 전념하지 못하는 사이, 신라는 남한강 수로를 통해 "어떤 나라보다도 한강 전선에 신속하게 병력과 물자를 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131) 


7세기는 삼국 항쟁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선덕왕 7년(638년)에는 고구려의 남하 거점인 고량포 지역을 방어하는 칠중성(파주군 적성면)이 고구려에게 함락되었다. 신라로서는 "북쪽 대문이 열린 셈이었다."(233) 위기의 때를 맞이하여 신라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진골 내부를 장악한 진골전통과 대원신통, 가야파 세 세력이 김춘추를 축으로 하는 결혼 동맹을 맺어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이들은 고구려와 백제의 대공세를 자신들의 힘으로 버틸 수 없음을 자각하고, "적극적으로 대당외교에 매달렸다. 그리고 2년 후에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이 시작된다."(248)


고구려는 수의 맹공을 견뎌냈지만, 대륙을 재통일한 당은 "고구려를 그대로 놓아 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180) 5호 16국 시절 대륙을 교란한 이민족 왕조는 "광개토왕 이전의 고구려처럼 부족체제의 작은 집단에서 출발"한 세력들이다.(230) 흩어져 있던 북방 유목민이 결집하면 큰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중국 왕조에게, 요동방어선을 장벽으로 삼아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강국 고구려는 그냥 두고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642년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서 평양성 전투의 영웅이던 영류왕(건무)을 토막쳐서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자, 644년 당은 이를 구실 삼아 고구려 원정에 나섰고, 고구려를 거의 패망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고구려 공략에 실패하자 당은 신라 무열왕 7년(660년)에 전격적으로 백제 파병을 결정하고,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대군을 한강 유역으로 보낸다. "신라도 여기에 맞추어 경주와 한산주의 군대 5만을 동원했다."(259) 안타깝게도 "백제에겐 요동방어망에 비견할 만한 요새지대가 없었다. 특히 당군의 진격로였던 서해안에서 부여로 진출하는 길목은 잘하면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낮은 평원지대였다.(272) 예상 외의 위기는 시간을 다투는 싸움이었다. 불운하게도 일본과 지방의 구원군이 도달하기도 전에 8월 2일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백제는 무너졌고, 소정방은 "9월 3일 의자왕 일행을 데리고 당으로 귀국했다."(270)


665년 8월 백제부흥운동을 진압한 "(신라의) 문무왕과 (당의) 유인궤는 공주 취리산에서 만나 백제 평정을 기념하는 제사를 지내고 양국 간에 맹약을 맺었다."(286) 이로써 신라가 한강 이남의 패권을 확고히 거머쥐게 되었다. 666년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세 아들 간에 권력다툼이 벌어지는데, "이것은 형제간의 분열이 아니라 고구려 지배층의 분열이었다."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맏아들 남생이 "당에 망명할 때 국내성 이하 6개 성, 10만 호가 그의 세력권 아래 있었고, 목저성 등 부여쪽 3개성이 그의 편에 붙었다."(287)


공식적으로 고구려는 668년에 망했다.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을 흡수하여 물자와 병력 부족을 만회한 신라군은 "백제에 주둔했던 유인궤와 당의 영웅 설인귀의 군대를 혈전 끝에 격퇴하여 어쩌면 평양지역의 총독이 되기를 원했던 설인귀의 마지막 꿈을 좌절시켰다. 동이(東夷)의 땅을 완전히 차지하려면 또다시 엄청난 대전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당은 신라와 곧 화해하였다." 이민족 군대와 연합했다는 사실 때문에 삼국통일은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그러나 "200년에 걸친 지독한 갈등의 최대 희생자는 백성들이었다. 지친 백성들을 위하여 100년 동안의 평화가 그들에게 주어졌다."(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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