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탄생 - 시대와 대결한 근대 한국인의 진화
최정운 지음 / 미지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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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한국인의 정체에 접근하는 문제


"근대 소설문학이 표방하는 사실주의(realism)란─사회과학에서의 '현실주의(realism)'와는 달리─주어진 현실을 재삼 반복하고 운명으로 확언하는 과다 반복의 보수주의의 신파조 담론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사실주의는 아직은 없는 것, 없는 인물을 있을 수 있는 존재로 상상하여 흡사 이미 있는 존재로 포장하여 제시할 수 있는 언어 체계이며, 더 나아가 그 새로운 존재가 과연 현실 속에서 서식이 가능한지 실험하고 모색함으로써 주어진 현실의 대안을 시도할 수 있는 언어 체계이다." "근대 문학의 규범으로서의 사실주의는 결코 유토피아주의의 반대항이 아니다. 오히려 사실주의적 근대문학은 '영구 혁명'의 의미를 갖는다. 사실주의는 현실을 부정하는 이상의 광기를 길들이는 담론이다. 근대 소설문학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인물뿐만 아니라 존재하기를 고대하는 인물, 나아가서 존재할 수도 있는 인물 등 다양한 종류의 인물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22-3)


2장 홍길동과 성춘향


"홍길동이 큰 규모의 재물을 약탈하며 '활빈당 행수 홍길동'이라는 글을 크게 남긴 것이나 백성들에게 재물을 나누어준 것은 모두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홍길동이 백성들에게 재물을 나누어준 목적에 대해, 빈궁하고 불쌍한 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라거나 도와주기 위해서라는 교과서적인 답을 내놓는 것은 작가의 의도와 맞지 않는다.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세종 시대라는) 조선의 전성기였다.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불만을 표출한다든가 정치 사회적 질서가 붕괴되고 있다는 사실은 나타나지 않는다. 홍길동은 작가 허균이 이전에 제시했던 '호민(豪民)'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이른바 주로 정론에서 논하는 이 작품의 사회적 문제의식은 일제 치하의 지식인들이 그들이 처한 상황으로 미루어 발명한 것이지 원작의 의미는 아니었다. 『홍길동전』은 전근대적 영웅 소설로서 쓴 작품이었다."(40)


"단적으로 『홍길동전』은 동명왕 전설을 조선 후기라는 공간에서 반복시킨 신화(神話)였다. 홍길동은 무엇보다 하늘이 정해준 운명을 타고난 영웅이었고, 어렵사리 집을 나서자 밝은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작가 허균은 잘 알려진 대로 당시에 서양갑 등 서자 출신의 친구들과 가깝게 지냈고 그들의 불만과 울분에 익숙한 처지였다고 전한다. 잘난 사람이 조선에서 서자로 태어났다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역성혁명으로 스스로 왕이 되려는 반역의 길이 아니라면─옛날 동명왕처럼 새 나라를 만들어 왕조를 새로 여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는 누구나 수긍하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해결책이었고, 이에 그 길을 상상해서 만든 초현실적인 스토리, 그것이 바로 『홍길동전』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홍길동은 '덕(德)'과 '인(仁)'의 미덕도 갖춘 마음이 넉넉한 진정한 영웅이 되었다."(42-4)


"홍길동이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처지라는 그의 '주제가'로 유명하듯이 춘향 또한 특이한 사회적 신분이 그녀의 정체성의 출발점이다. 춘향의 어미는 퇴기 '월매'이고 아버지는 양반인 '성 대감'이다. '기생의 딸'이라 불리고 기생으로 취급받기도 했지만, 춘향은 동시에 '양반집 규수'였다. 본인과 그 어미는 양반의 생활 양식을 고수하며 살았고 춘향은 기생 일을 절대로 하지 않았다. 춘향이 어려서부터 서책을 가까이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계급적 조건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춘향의 신분 조건은 애매하고 논쟁적인 문제였다. 춘향의 미모는 이러한 사회적 신분의 애매함으로 인해서 더욱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신분의 애매함은 춘향과 그 어미가 그녀의 미모를 활용하여 극복해야만 하는 열등감이자 약점이며 평생의 숙제였다. 그녀의 이런 신분 조건이 없었다면 그녀의 아름다움은 이야깃거리가 될 필요도 없었고 희대의 사랑도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51)


"성춘향이라는 소녀는 천하일색의 미인에다 이몽룡 한 사람에게 정열적인 사랑에 빠져 정절을 목숨으로 지키고, 자신의 신념을 어떤 상황에서도 뚜렷하고 강하게 표현하는 당찬 근대적 여인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전통문화의 조선 여인의 아름다움까지 갖추고, 자아를 확신하는 여인이었다. 춘향이란 인물의 등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춘향이 원용하고 있는 사상적 기반인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은 한편으로는 사회의 신분 제도와 각종 계서제를 정당화하여 봉건 사회를 구성하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의 도덕성과 존엄성의 문제를 나라와 학문의 궁극적 목적으로 제시하여 오히려 근대화의 가능성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춘향의 출현은 조선이라는 중세 국가의 심각한 동요를 보여주긴 하지만) 성춘향 역시 끝까지 근대적이지는 못했다. 결국 그녀도 행복한 가정을 꾸미고 정경부인이 되어 신분 상승을 완성하고, 전통의 품안으로 회귀하고야 말았다."(61-2)


3장 신소설의 인물들과 그들의 세상


"우리의 공식적인 국문학사에서도 신소설은 묘한 역사적 단계로 이해되고 있다. 전근대 소설과 구분되고 근대 소설과도 구분되는데, 보통은 문학적 수준이 결여된 수준 낮은 작품들로 이해된다. 사건의 진행이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우연한 사건들이 수시로 끼어들며, 스토리는 복잡하고 정신없이 전개되고, 또 인물들의 이야기를 표현함에 있어 '우여곡절', '기구한 운명'이라는 말 외에 다른 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얼핏 개연성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여성 인물들이 빈번하게 자살을 시도하는 등 과도한 흥미 위주의 전개에 이르기까지 여러 이유로 신소설들은 역사 발전에서 비정상적인 단계로 취급되어왔다." "(을사조약 체결 1년 후인) 1906년에 신소설이 나타난 것은 뜬금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소설들을 유심히 읽어보면 그간 전혀 알지 못했던 대한제국의 현실이 담겨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71-2)


"이인직과 이해조의 소설이 보여주고 있는 당시의 현실, 즉 사회는 붕괴되고 개인으로 흩어져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모습이야말로 신소설이라는 새로운 이야기의 형태가 우리 역사에서 나타난 원인이었다. 루카치에 따르면 근대 소설은 "세계가 신에게 버림받았다"는 관념에서 출발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신소설도 죄악으로 가득 찬 사회, 망한 나라, 타락한 세상이라는 판단에서 출발하였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전무후무한 '신소설'이라는 문학의 장르가 나타난 것이었다. 근대 소설로서 신소설의 또 하나의 특징은 대부분의 경우 결코 행복하지 못하고 극도로 고단하고 참담한 인생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해피엔드로 끝맺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신소설이 전대미문의 참담한 이야기들을 엽기적으로 그려낸 작품들이었기 '해피엔드'는 더더욱 절실했을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이 더 독한 한(恨)을 풀어내야 했다."(102)


"홉스적 자연상태에서는 사회의 일관된 문화가 붕괴된 상태이며 따라서 개인들이 어떻게 만들어져야 한다고 규정하는 문화의 핵심적 구조가 작동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최고의 선택은 한반도를 떠나는 것 특히 유학이었고, 그다음은 자신의 개화된 의지를 증명하는 자살이었다. 이런 선택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서 약자들이야말로 가장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약자들은 피해자로서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당했다. 거의 삶을 포기한 사람들이든 그런 대로 살아 보겠다고 애쓰는 사람들이든 그들은 작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악행에 서슴지 않고 가담해야 했다. 영악해야 했고 교활해야 했다. 자신의 모습을 숨기기도 하고 상대를 기만해야 했다." "근대 사회 또는 근대성이란 다양한 얼굴을 갖지만, 한반도에서는 중세가 망가지고 흩어진 파편들로서의 개인들이 근대로 나타났다. 거기에서 처음 발견된 근대의 생명체는 속 빈 넝마 인형 같은, 인물성이 부정된 '피해자 여성'들뿐이었다."(131-3)


"이렇게 사회가 붕괴되고 모든 윤리가 파괴된 시대에 이르자 기존의 사회문화와 전통문화 전체가 부정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 시대에 오면 그간 구한말을 통해 지배력을 유지했던 '위정척사(衛正斥邪)'나 '수구(守舊)'는 급격히 힘을 잃고 '개화'가 지배적인 흐름으로 부상한다. 이 흐름은 갑오경장부터 뚜렷했다. 신소설 작품들의 경우는 노골적으로 친(親)개화 입장이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기존의 문화는 비참한 현실의 주범이었다. 이런 경향은 중국에서도 사회가 붕괴된 현상을 증언하던 루쉰의 『광인일기』에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세상이 '예교(禮敎)' 때문에 나타났다고 하며 중국의 유교 전통을 통째로 부정한다. 구한말의 마지막 시기에는 서구 문물, 지식과 사상들이 뚜렷한 의미와 용도도 묻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수입되었다. 20세기 초에는 서구의 '신학문'은 위기에서 구원을 위한 카리스마적 존재로 나타났다."(134-5)


"이미 1880년대부터 조선에서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이룩하여 천황이 권력을 잡은 후 국가가 일변하여 나날이 발전하고 백성들의 삶도 개선되어 태평성대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143) "이 시점에서 조선과 일본과 만주가 한 나라로 합쳐야 한다는 생각은 결코 민족주의적 사상을 배반하는 것이 아니었다. 충분한 힘을 전제로 유럽의 민족 국가 체제를 생각하던 19세기 후반 마치니 식 유럽의 자유주의적 민족주의 사상을 연상시킨다. 모든 민족은 대소를 막론하고 국가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1917년에 발표한 '14개 조항' 이후의 사상이었다." "이인직의 소설에서 개화주의뿐만 아니라 친일 사상은 노골적이었다. 그의 소설에서 수구, 전통문화를 고집하는 인물들은 예외 없이 완고하고, 무지하고, 폭력적인 '악당'들이었다. 이인직은 여러 곳에서 조선의 개화를 강하게 희구했지만, 여러 요인으로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적인 입장이었다."(146-7)


"1908년 직전에는 '민족'이라는 말이 쓰였어야 할 자리에 '인종', '종족'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었다." "동포는 '우리끼리', 주체의 하나임을 표현한 말인데 반해 '민족'은 우리를 밖에서 보고 지칭하는 객관적인 보통 명사였다. 물론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한민족', '조선민족' 등 보통 명사 앞에 고유 명사를 붙인 말이었다. 결국은 '민족'이라는 말을 선호하고 선택하게 된 것은 '민(民)'이라는 말로 정치적 의미를 부가한 종족의 뜻을 나타냈기 때문이었다. 이때 정치적 종족으로 말했다는 것은 당시 우리의 정체성을 어떤 국가에 대한 소속 의식을 떠나 규정했다는 의미이고, 이는 기존의 국가 즉 대한제국의 존재를 정체성에서 지워버렸음을 뜻한다. 즉 민족은 특정한 국가와는 직접 관계를 부정하며 일반적인 국가, 말하자면 앞으로 만들 국가와의 관계를 긍정할 뿐이다. 우리의 정체성이 적어도 언어 차원에서 현재와 같이 이렇게 표현되기 시작한 것은 1908년 초였다."(157)


"신소설들이 쓰이던 시대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최저점이었다. 이 시절 우리의 모습은 너무나 부끄러워 꽁꽁 가려야만 했다. 여러 의미에서 이 시대는 현대 대한민국의 연원이었고 금단의 성지(聖地)였다." "우리는, 현대 한국인은 이 '지옥 같은' 시대의 자연상태의 불구덩이에서 태어났다." "자연상태의 고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오래된 정체를 부정했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선택했던 인공의 정체를 다시 부정해야만 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오래된 '조선인'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결코 같은 '조선인'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긴 이중 부정의 여정을 거쳐 돌아온 모습은 '민족'으로, 또한 '한민족'으로, 비슷해 보이지만 새로운 모습이었다. 우리는 개인으로서, 집단으로서 이 자연상태의 불구덩이에서 단련되어 태어났다. 그러나 이 정체는 틀에 불과했다. 그 내용은 이제부터 채워나가야 했고 민족의 본질을 얻기 위한 기갈(飢渴)이 시작되었다."(172-3)


4장 초기 민족주의자의 두 초상


"『무정』의 주인공 '이형식'과 『꿈하늘』의 주인공 '한놈'은 각각 작가 이광수와 신채호의 분신이라고 일반적으로 평가된다. 말하자면 '이형식'과 '한놈' 두 인물은 각기 두 진영(개화민족주의와 저항민족주의)의 민족주의자들에게 애정 어린 그리고 자신들과 진배없는 인물이자 인격적으로 하자 없이 말끔한 인물이다. 그리고 두 인물 공히 경험적으로 관찰된 한국인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이상주의적으로 '이런 인물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해서 창조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인물의 최대의 공통점은 모두 외롭고 고독한 개인이라는 것이다."(179) "그런가 하면 두 인물의 조건은 대칭적이었다. 『꿈하늘』의 한놈은 아무런 뚜렷한 능력도 기술도, 남과 다른 어떤 조건도 가진 인물이 아니었다." "반면 『무정』의 이형식은 처음부터 경성학교 영어 선생으로 더운 유월 오후의 땡볕에 여학생을 가르치러 초빙되어 김 장로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181-2)


"이형식의 '내면'이라는 공간 장치는 이형식으로 하여금 특정한 여성에 대한 욕망과 사랑이 서서히 깊어지고 넓혀져 결국은 익명의 대중, 특히 민족에 대한 사랑으로 변화하도록 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었다. 이것이 근대 서구 문학 기법인 '내면'을 도입한 의미이자 용도였다. 욕망과 사랑은 인간의 생명력과 이성(理性)을 활성화시키며 특정한 관계에 있지 않은 이성(異性)에 대한 욕망과 사랑일 경우에도 못지않은 결과가 나타나며 이것이 바로 민족에 대한 사랑으로 전환되는 주요 메커니즘이다. 에로스와 아가페는 다른 종류의 사랑이며 에로스에서 아가페로의 전환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지만 춘원은 이것을 『무정』에서 이형식이라는 근대인의 내면에서 추동되는 정교한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해내었다." "이형식의 민족주의는 이론에서 가슴으로, 사람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서, 삶으로서의 민족주의로 접어든 것이다."(203-5)


"민족을 위해 필요한 지식은 그냥 '앎'으로서의 지식이 아니라 해외에서, 미국에서 배워 와야 하는 특정한 형식을 갖춘 지식이었다." "당시 조선의 전통적 사회 질서는 완전히 붕괴되고, 기존의 지배 계급이 초토화된 상태에서 이광수를 위시한 개화민족주의자들은 어떻게 조선 사회에 굳건하게 자리를 잡을 것인가가 핵심의 문제의식이었다. 공석이 된 지배 계급의 자리를 개화민족주의자들이 차지하는 일은 바로 현안이었고 어떤 명분과 어떤 전략으로 지위를 인정받을 것인가가 문제였다. 물론 신지식인들이 지배 계급의 위치를 요구함에 있어서 전과 같은 명분을 내세울 수는 없었다. 그들이 내세울 명분은 그들은 우리 민족을 구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해외에서 들여와 가르쳐 줄 사람들이라는 주장이었다. 서양에서 배워올 지식의 타당성과 위대함은 바로 그 지식을 만들고 활용하는 서구 제국들의 부강함이 증명하고 있다."(249-50)


"거의 동시대에 쓰인 단재의 『꿈하늘』은 전체적으로 대단히 대조적인 작품이다. 근대 소설이라기보다는 구소설의 형태로 쓰였지만 이는 고도로 의도적인 것이었다. 당시의 개화된 세상의 조선인들의 이성적 판단을 부정하고 전통적인 의로운 조선인 투사를 만들어내기 위해 꿈의 세계로 가서 신의 명령에 따라 전쟁에 임하는 전사를 창조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작품은 시대착오적인 작품이었다. 구한말에 등장한 저항민족주의가 개화에 근거한 근대적 사상이었다면 이 시대 조선인들을 민족이라기보다는 우선 전사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일제 시대에는 '개화'에서 '위정척사'의 사상으로 회귀하던 것처럼 보인다." "결국 한놈이라는 민족주의 전사는 어떤 역사적 현실에 위치해 있지도 않으며 현실 사회 속의 어떤 자리에도 뿌리내리고 있지도 못하다." "한놈이라는 인물은 단재가 '백지(白紙)'로서 제작한 민족주의자가 갓 태어난 모습이었다."(254-5)


"1910년대에 나타난 초기 민족주의자의 두 초상의 공통점은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의 형식을 채울 내용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각자 민족을 위해서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요건을 갖고 있지 못할 뿐 아니라 조건의 부재의 아쉬움을 아프게 느끼고 있었다. 이형식은 미국 유학을 통해서만 얻어올 수 있는 지식─'지식'이라는 이름의 부적(符籍) 또는 물신(物神)─이 없고, 이것을 가지러 미국 유학을 갈 기회를 갈구하고 있다. 또한 한놈은 신의 명령에 복종하고 신의 꼭두각시가 됨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구원의 없음, 외로움을 괴로워하고 있다. 무엇이 없음(不在)을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달리 표현하면 그것을 욕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초기 민족주의자들은 밖으로부터 얻어와야 하는 것들을 갖지 못해 뼈저리게, 고통스럽게 목말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식과 구원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다. 그들은 욕망하는 존재였지만 그 욕망하는 것, 아직 없는 그것이 무엇일지는 알지 못했다."(255-7)


5장 만세 후에 찾은 인물들


"3·1운동의 심층에서 우리 민족 대다수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우리 '민족'임을 '만세'로 고백하고, 피눈물로 회개하고, '한 민족'됨을 뼛속 깊이 느꼈다. 그들은 민족이라는 거대한 본류에 합류하였고 다시 태어났다. 그날이 1919년 3월 1일이었다. 3·1운동을 통해 '우리 민족은 하나다'라는 대명제가 요지부동으로 확립되었다."(262-3) "3·1운동의 의미는 무엇보다도 '민족'이라는 실체가 어마어마한 규모로 우리 눈앞에 한때 강림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반면 뒤이은 1920년대는 이제 그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는 상실감의 시대였다. '3·1운동은 실패했다'는 평가는 이러한 허탈감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민족주의는 이제 진짜 '운동'을 현실적으로 시작해야 하는 단계가 되었다. 1920년대 국문학, 근대 단편 소설문학의 과제는 우선 우리 민족이 다다라야 할 기준을 제시하는 것, 그리고 민족의 현재 그리고 앞으로 만들어가야 할 바람직한 상을 그려내는 것이었다."(265-6)


"김동인은 인간을 나누는 포괄적인 기준으로 인간의 '약함'과 '강함'을 독창적으로 제시했다. 도덕과 윤리의 문제를 포함해서 인간의 모든 문제는 약함에서 비롯되며 약함에서 벗어나 강해지게 되면 자연스레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이러한 발상은 단연 니체적 시각이었다. 나아가서 김동인이 '약한 인간', '타락한 인간', '망가진 인간'을 이해하고 이러한 비극의 핵심 원인으로서 '허영(虛榮)' 즉 남의 눈, 시선에 집착하는 문제를 제기한 것은 물론 서양 문학에서 도입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문학사에서 이러한 문제 제기는 김동인만의 독창적인 것이었다." "말하자면 김동인이 제기한 개인의 강함, 약함의 문제의식은 당시에 유행하던 (민족) '개조'의 문제의식에서 도출된 것이 아니라 독창적인 근대의 문제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또한 이 주제는 자신이 완성시킨 내면을 드러내는 고백체로 다루기에 최적의 문제였다."(312-3)


"김동인은 자신이 그간 몸담아왔던 개화주의적 입장에 대해 과감하게 회의를 던지고 다음 단계로 스스로 도약한 작가였다." "그의 작품에서 내면(內面)을 장착한 인물들은 하나같이 약한 자들이다. 약한 자들이 왜 약한 자가 되었는가를 이해하는 데 안성맞춤의 장치가 바로 내면이었다. 1920년대 말부터 김동인은 강한 인간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원하던 강한 자는 대부분 내면이 없는 존재, 내부가 들여다보이지 않는 '블랙홀 같은', '괴수 같은' 존재였다. 가끔 이런 강한 인물들이 나타난다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들은 길들일 수 없는 존재였고 따라서 우리의 일부가 될 수 없는 존재, 우리가 흉내낼 수 없는 존재였다. 이제 문제는 내면이 있는, 내면이 장착된 지식인으로서 강한 인간을 만날 수는 없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심각한 문제는 당시에 우리 지식인들 앞에 던져진 과제였다."(318-9)


6장 대도시 지식인의 출현


"1930년대에는 민족의 존재 양태의 관념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20세기 초반에 한국인이 신소설에 최초로 나타났을 때, 우리가 그런 처참한 상태로 내버려지게 된 배경에는 바로 공동체의 분해, 공동체의 상실이 있었다. 이때부터 우리 민족은 '공동체 상실'에 시달리며 '세상에 홀로 내던져진' 개인으로 생존에 매달려왔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이르면 조선의 지식인들을 품고 있는 공간은 전혀 새로운 공간이었다. 그곳은 대도시 문명의 익명의 '대중사회'였다. 대부분 공통적으로 생계를 위해 모여들어 이해의 기반 위에서 서로에 대해 신경 쓰지 않고 사는 이익 사회(Gesellschaft)였다. 어느 틈엔가 조선 지식인들은 전과는 전혀 다른 생태(生態)를 갖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1930년대는 "땐쓰", "스포츠" 열풍이 몰아닥쳤고 육체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였다. 따라서 지식인들은 패리어(pariah), 즉 일종의 폐쇄적 소수 종족으로 전락해가는 상황이기도 했다."(328)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나오는 구보를 포함한 (룸펜형) 지식인들이야말로 물질주의적인 대도시에서 소외(疎外)의 화신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외를 느끼겠지만 소외를 하소연하는 것은 바로 이 지식인, 대도시 문명에 한 발만 딛고 있는 지식인들의 의무이다. 그들은 한 발은 대도시 안에 딛고 나머지 한 발은 그 밖에 딛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사는 대도시 문명─그리고 자신을 소외시키는 대도시 문명─이라는 서식처를 비판적으로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바라본다. 그들은 자신들이 묘한, 이중적 존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월급쟁이'와 '노는 계집'들 사이에서 이들과 구별하며 동시에 동감하며 위치를 찾는다. 구보를 포함한 대도시 지식인들은 특이한 생태에서 태어난 새로운 종자였다. 대도시에서 태어난 존재들이지만, 그 자신의 서식처를 결코 떠나지 못하면서도 동시에 매일매일 경멸하는 종자였다."(348)


"1930년대의 모더니스트 소설들은 식민지 조선에서 지식인이 다시 태어나던 신화였다. 근대 지식인의 환경은 단연 모든 문화가 집결하는 대도시일 수밖에 없었다." "1930년대의 서울은 결코 식민지의 삶에 안주한 평온한 공간이 아니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지식인들은 춘원이 생각했던 민족의 선생이라는 지위를 포기하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소설가로, 지식의 생산자로 다시 태어났다. 모든 경제적 보상을 포기하는 이 선택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괴로운 것이었다. 예술가의 삶이란 힘들고 괴로운 것이었다. 이상의 『날개』는 한때 좌절했던 지식인이 다시 생명력과 열정을 회복하는 신화적 생체 실험이었다. 1930년대는 정치적으로는 평온한 듯 보이는 시기였지만 조선의 지식인들은 새로운 삶을 찾아 자신들의 새로운 싸움을 시작하던 시기였다. 이제는 지식의 중개상이 아니라 창조자로서의 싸움이었고 이 길은 고난의 길이었다."(369-70)


7장 새로운 전사의 창조


"심훈의 『상록수』에서 동혁을 뜨겁게 사랑하면서도 민족과 농민에 대한 의무감으로 자제하며 뜨겁게 일하다 과로로 숨진 채영신은 결국 부활하여 우리 모두의 몸속에 돌고 있으며, 그 누구보다도 박동혁의 몸속에, 골수에 섞여서 영원한 생명의 힘을 주게 되었다." "1933년 이광수의 『유정』이 발표되자 강한 조선인을 만드는 비결(秘訣)이 드디어 공표되었다.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랑으로 욕망과 이성의 갈등이 시작되고 두 힘 사이에 상승 작용이 일어난다. 그리고 두 힘을 최대한으로 확대시켜 그 사람을 죽게 한다. 그러면 그 죽은 이의 영혼은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과 주변 사람들을 강하게 만들 것이고, 그들은 끝까지 싸우는 불멸의 전사가 된다. 이것이 바로 그 비결이었다. 이는 결코 복잡한 과정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심훈은 최초로 이를 간파한 천재였고 『상록수』에서 멋지게 활용하여 불멸의 전사들을 민족 운동의 전선에 바로 배치하였다."(425-6)


"1930년대 중반이 되면 조선에서 사랑의 의미는 전적으로 변화하였다. 사랑은 행복을 위하여 이성과 행복한 교제를 하는, 그런 일이 아니었다. 사랑은 뜨겁게 그러나 끝없이 자제해야 하는 일이며, 이는 행복한 삶을 만드는 것이라기보다는 강한 인간, 강한 의지로 끝없이 참고 이루는 인간을 만드는 더욱 진지한 일이었다. 사랑은 고통스럽지만 보람 있고 생산적인 일이었다."(426-7) "춘원은 개인적으로 그가 스승으로, 아버지처럼 모시던 도산 안창호가 일제에 체포되자 칩거하여 창작에 몰두하였고, 그 성과가 바로 『유정』이었다. 물론 이는 예술 작품이었지만 동시에 수많은 강한 조선인을 독서에서, 교육에서 찍어낼 수 있는 공정(工程) 또는 '틀'의 발명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일제 후기 식민지 조선에서 생겨난 새로운 흐름, 사랑의 새로운 관념은 춘원의 업적이자 우리 근대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429-30)


8장 민중 영웅의 창조


"벽초 홍명희가 창조해낸 임꺽정은 백정이라는 천한 자리에 잘못 태어난 영웅이라기보다는 하늘이 조선 사회의 제일 밑바닥 자리를 임꺽정에게 점지해 준 것이었다. 원래 그는 백정 계급의 대표로서 백정을 포함한 천한 계급들을 규합해서 계급 투쟁을 벌이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임꺽정은 한 번도 백정 일을 한 적이 없었다. 나아가서 그는 백정이기에 사회의 밑바닥 계층으로 온갖 숨를 받지만 백정으로서의 삶의 방식이 그의 의식에 미친 영향은 전혀 없었다. 그는 물론 백정이라는 직업, 즉 소 잡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나 직업의식도 전혀 없다. 그에게 백정임은 사회의 밑바닥이라는 추상적 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천한 백정이었지만 (어린 이순신을 만나기도 하고 자신을 찾아온 퇴계를 문전박대하는 등) 조선 팔도의 산천과 인물들을 섭렵했다. 임꺽정은 계급적인 인물로 출발했지만, 전국적이고 민족적 의미를 갖는 인물로 발전하는 가운데 탈계급화 되었다."(448)


"임꺽정이 맞닥뜨려 싸워야 할 조선이란 세상, 투쟁의 대상으로서 현실은 그렇게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조선의 타락한 문화가 그를 타락시키지 못하란 법은 없었다. 이에 자연인으로서의 꺽정을 보호하는 장치로 설정된 것이 바로 그의 반지성주의였다. 임꺽정의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글을 못 배웠다는 것이다. 청석골에는 모사(謀士)인 서림 외에도 몇몇 두령들이 언문을 읽었지만 대장인 임꺽정은 언문도 읽지 못했다. 그가 글을 못 배운 것은 백정이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글방에 가서 아이들과 선생이 백정이라고 업신여기는 데 화가 나서 양반집 아이들을 패주고 선생의 '면상'에 책을 내던지고는 나가지 않았다." "글공부는 조선 문화의 나쁜 점으로 임꺽정이 싸워야 할 적들의 핵심적인 문화였고 임꺽정은 가까이해서는 안 될 문화였다. 천상의 이인들은 임꺽정을 반지성주의로 무장시켰던 것이다."(451-2)


"벽초는 어려서 한학(漢學)을 배우고 일본에 유학할 당시 서양 문학을 섭렵하여 당대 최고 지성인으로,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ia)'로 자신을 규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벽초에게 반지성주의는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수많은 이념과 지식에 대한 혐오감과 더불어 자신이 무기력한 지식인임에 대한 자괴심과 부정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임꺽정은 벽초가 '내가 차라리 ~라면'이라 스스로 말하면 가설적으로 만들어 낸 '다른 자아(alter ego)'였다. 그렇다면 반지성주의는 벽초라는 지식인이 자신의 '다른 자아'인 임꺽정을 창조하며 그의 몸에 힘들여, 억지로 새겨준 격률인 셈이다. 임꺽정의 반지성주의는 지식인들이 만들어낸 '민중'이라는 유령의 속성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임꺽정은 벽초의 '또 다른 자아' 즉 그의 개인적 심리 작용의 산물이며 벽초가 자신의 피조물의 몸에 새겨 넣은 인위적이고 가상적인 양심(良心)이었다."(501-2)


9장 결론


"(지식인들이 자신의 노력에 회의를 갖고,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며 품은) 반지성주의야말로 해방 이후 우리 민족끼리의 목적 없는 잔인한 싸움을 부추겼을지 모른다. 나아가서 강한 조선인을 향한 지식인들의 노력은 다른 대가도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민족의 본질을 찾는 선택의 핵심은 1920년대 춘원이 제안했던 도덕성 회복을 통한 '민족 개조' 계획을 기각한 것이었다. 이 선택을 우리가 비난할 수는 없겠지만 당시 '홉스적 자연상태'의 상처가 생생한 상황에서 도덕성의 문제를 제쳐놓고 강한 조선인을 추구한다는 것은 사회적 조건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결코 비켜갈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도덕성 문제는 한국인이 '해방'되었을 때 한국인의 첫 번째 특징으로 조우하게 될 문제였다. 해방된 한국인들은 아직도 너무나 거칠었고 여전히 박탈감에서 '힘'의 추구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문제들은 1930년대 춘원을 위시한 조선 지식인들이 이룩한 '강한 조선인' 추구의 대가였을지 모른다."(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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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경제 신화 해부 - 정책 없는 고도성장
박근호 지음, 김성칠 옮김 / 회화나무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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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서


제1부 아시아 나라들의 발전경로와 공업화


1장 1960년대 초기의 아시아경제


"미국의 원조에 의존한 경제재건은 소비재가공부문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는데, 1950년대 후반에 이미 국내시장이 포화상태가 되어 한국의 면공업도 상대적인 정체에 빠지게 된다. 이 때문에 한국정부는 해외시장을 개척하고 주한미군에 더 많은 면제품을 납품하고자 했다. 이에 더해 한국정부는 1957년 수출 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수출증대에 역점을 둔 각종 지원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미국의 경제원조가 1957년을 정점으로 감소세로 돌아서자, 소비재공업부문만이 아니라 재정과 무역수지 적자의 보전까지도 미국에 전면적으로 의존해온 한국경제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고, 이는 곧 경제성장의 둔화로 나타났다. 1957년에는 전년의 성장률이 1.3%로 낮았던 까닭에 8.8%라는 성장률을 달성했지만, 그 이후로는 정체가 지속되어 58년 5.5%, 59년 4.4%, 60년에는 2.3%까지 성장률이 하락했다. 1958년 이후에는 소비재산업의 정체와 농업부문의 부진이 겹치면서 한국경제는 심각한 불황에 빠져들었다."(39)


# 한국경제의 초기조건 : 아시아 국가들과의 비교(1964년)

1. 눈에 띄게 낮은 소득수준 : 국민소득 85달러로 필리핀이나 말레이시아의 절반에도 못 미침

2. 산업별 국민소득에서 농업부문의 비율이 높고 제조업부문이 상대적으로 낮은 위치를 점유

3. 노동분배율 수준이 상당히 낮았을 뿐 아니라 하향하는 경향을 나타냄 : 한국 28.4%, 대만 44.9%, 필리핀 41.6%

4. 소비성향(소득에 대한 소비지출의 비율)이 현저히 높고 저축성향은 낮음 : 평균소비성향 98.2%, 평균저축성향 1.9%

5. 엥겔지수가 상대적으로 높아 잠재적 공업제품시장의 확대 가능성 축소와 내수부진 초래 : 한국의 엥겔지수 67%

6. 외국원조 축소로 기계설비의 수입재원 확보가 난관에 봉착 : 한국 11%, 태국 20.4%, 말레이시아 17.6% (이상 고정자본투자율)

7. 수출규모가 현저히 작음 : 한국 1억 2000만 달러, 필리핀 7억 7000만 달러, 스리랑카 3억 9000만 달러 (이상 수출총액)


"1955년 봄에 개최된 반둥회의가 국제사회의 정치·경제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반둥회의는 미국과 소련의 대외정책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쳐 자본주의사회와 사회주의사회가 군사적 경쟁이 아닌 경제적 경쟁을 통해 체제의 우월성을 다투는 시대로 이끌었다. 반둥회의를 계기로 발전도상국들이 정치적으로 부상하게 된 반면, 경제민족주의(Economic Nationalism)도 점차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이후 세계경제는 불황에 빠져 있었고, 많은 발전도상국들이 심각한 경제부진에 시달리고 있었다. 불황은 발전도상국들의 주요 수출품이던 1차 산업제품의 가격하락이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시작되었고, 선진공업국과 발전도상국 간의 경제적 격차가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른바 '남북문제'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런 이유로 반둥회의에서는 발전도상국의 '경제개발'이 긴급한 과제로 강조되었고, 국제경제협력을 호소하는 목소리들이 높아졌다."(67-8)


"이 같은 국제사회의 정치경제적 환경 속에서 미국 역시 발전도상국의 '경제개발'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원조정책을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57년 5월,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미 의회에 보낸 대외원조특별교서에서 새로운 대외원조정책을 제안했다. 미국의 새로운 원조정책의 기조는 첫째, 기존 1년 단위의 무상원조방식을 장기 유상원조방식으로 바꾸어 증여를 차관형식으로 전환한다. 둘째, 이전의 프로젝트 원조방식 대신 국가개발계획을 지원하는 방식을 도입하고, 피원조국의 발전능력과 자조노력 정도를 중시한다. 셋째, 경제원조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우선순위 방식으로 원조를 배분하고 대규모 원조를 통해 피원조국의 경제적 자립을 지원한다. 한마디로 '선택과 집중'이라고 부를 만한 방침을 세운 것이다." "전환된 미국 원조정책의 가장 큰 특징은 발전도상국의 경제개발과 더불어 지리적으로 아시아 지역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71-2)


"아시아 지역에 대한 미국의 경제원조 흐름은 동아시아와 남아시아로 구분해서 살펴보아야 하는데, 특히 남아시아에 대한 원조증가를 면밀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에 대한 원조 누계액은 변경 전 44억 달러에서 변경 후 58억 달러로 증가했지만, 남아시아는 11억 달러에서 67억 달러로 6배 이상 증가하여 누계액에서 남아시아가 차지하는 비중 역시 7%에서 30%로 급증했다. 동아시아의 비중이 27%에서 26%로 약간 감소한 것과는 대조적이다."(73-4) "또 한 가지 고찰해야 할 것은 미국의 원조정책이 인도 중심으로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한국에 대한 원조감소는 단순한 양적 문제가 아니라 미국 대외정책에서의 '지위변화'라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원조공여의 기준으로 볼 때, 이 문제는 인도의 개발능력이나 자조노력이 우수하다고 평가된 반면, 한국은 '우수하지 못하다'고 여겨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76)


# 밀리컨·로스토 제안

1.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를 분리하고 경제원조 실행기관을 신설한다.

2. 정책의 연속성을 도모하기 위해 장기원조를 공여한다.

3. 경제원조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피원조국의 흡수능력을 중시한다.


"미국의 전환된 원조정책은 한국정부의 경제정책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국가개발계획을 중시하는 미국의 방침에 따라 한국정부 또한 장기적인 개발계획을 수립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이승만 정권은 1959년 4월 자립경제 기반 형성을 목적으로 하는 '경제개발 3개년계획(60~62년)'을 수립했다. 이 계획은 미국정부의 권고에 따라 구상된 것이었다. 계획의 담당자였던 이기홍(당시 부흥부기획국 기획과장)은 "미국의 원조가 급감할 것으로 예상되는 1957년 중반부터 AID 관리가 한국정부 정책담당자(김현철 부흥부장관)에게 장기경제개발계획안을 작성해 제출하도록 강력하게 권고"했다고 설명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1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62년부터 이를 실행했다. 이는 미국정부에게 쿠데타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특히 지원과 원조를 확보하기 위한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급조된 것이었다. 미국의 반응은 냉담했다. 경제개발계획이 아니라 '쇼핑목록'에 불과하다는 평가였다."(81)


2장 전환점, 1965년


"베트남전쟁이 미국의 대외원조정책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베트남전쟁이 본격화되면서 동아시아 지역이 경제원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확대되었다. 미국의 대아시아 경제원조 동향을 살펴보면, 60년대 후반 들어 남아시아의 비중은 현저하게 감소한 반면, 동아시아 지역의 비중은 확대되고 있다." "베트남전쟁이 확산되면서 아시아로의 편중 경향은 군사원조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미국의 대아시아 군사원조액을 살펴보면, 동아시아에 대한 군사원조 누계액은 60년대 전반(1961~65년) 약 39억 달러에서 후반(1966~70년)에는 107억 달러로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군사원조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전반기 49%에서 후반기에는 거의 82%까지 확대되었다. 동아시아 나라들은 이러한 대규모 군사원조를 통해 군사비 부담을 줄이고, 재정상황을 개선할 수 있게 되어 이를 경제개발자금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90-2)


"아시아를 둘러싼 국제경제환경이 동아시아 지역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환되면서 동아시아의 경제발전이 촉진될 수 있었던 반면, 남아시아 지역에는 불리해져 경제발전의 족쇄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 지역은 60년대 전반에 이미 연평균 6.6%의 성장을 달성하며 남아시아 지역의 성장률 3.9%를 넘어섰다. 60년대 후반 들어 동아시아 지역은 성장률이 9.8%까지 증가해 성장 속도가 빨라진 반면, 남아시아 지역은 2.2%로 감소했다." "베트남전쟁의 효과였던 경제원조의 확대를 통해 동아시아 나라들은 수입대체공업화에서 수출지향공업화로 전환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 나라들에게 베트남전쟁은 자립적 경제발전에서 외향적 경제발전으로 변모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남아시아 나라들에게는 대외의존형 경제발전 경로에서 '내향적' 전략으로 방향이 전환되는 발판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96-7)


제2부 정책 없는 고도성장


3장 고도성장의 시대로


"1960년대 전반기(61~65년)와 후반기의 연평균성장률을 비교해보면, 전반기가 6.2%였던 데 반해, 후반기는 11.1%로 높은 성장률을 나타내고 있다. 60년대 초까지 한국경제는 '빈곤의 악순환'에 빠져 있었고, 그래서 60년대 후반의 고도성장은 '한강의 기적'이라 부를 만큼 놀라운 변화였다.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산업구조의 변화이다. 60년대 후반 고도성장을 주도했던 것은 2차 산업과 3차 산업의 발전이다. 산업별 평균성장률을 보면, 60년대 후반 1차 산업의 평균성장률이 3.3%였던 데 반해, 2차 산업은 20.0%, 3차 산업은 13.1%였다. 제조업 역시 21.3%라는 높은 성장률을 나타냈다. 이러한 실적 차이는 각각의 산업부문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에도 영향을 미쳐 산업구조의 변화를 초래했다." "한국의 산업구조가 이렇게 급속하게 전환될 수 있었던 것은 제조업의 비약적인 성장 덕분이었고, 이러한 변화는 65년 이후에 뚜렷하게 나타났다."(123-5)


"60년대 초 한국의 원자재 수입은 미국으로부터의 무상원조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일의존도가 28%에 불과했지만, 65년 이후 급속도로 증가해 70년대 초에는 58%에 달했다. 그중에서도 수출용 원자재는 절반가량을 대일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한국의 공업화는 일본으로부터의 우수한 기계도입과 고품질의 수출용 원자재 및 중간재 수입 등을 통해 촉진되었고, 그 결과 생산과 수출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생산재 수입을 통해 고정자본을 형성하고 공업화를 촉진시켜 공업제품을 해외시장에 수출한 뒤 이렇게 획득한 외화로 다시 생산재의 수입을 늘린다는 순환메커니즘이 구축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일본에서 수입한 원자재와 중간재, 자본재를 한국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 조립가공한 후 완제품을 미국시장에 수출하는 이른바 '성장의 트라이앵글'이다. '성장의 트라이앵글'은 수출지향형 공업화의 발전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127-8)


4장 수출정책의 과대평가 : 수출계획 FIT&GAP 분석


"1964년 5월, 정부는 환율을 달러당 127.5원에서 256.53원으로 인하하고 65년 3월, 환율제를 고정환율에서 변동환율제로 전환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외국환에 대한 여러 가지 개혁조치들이 한국정부의 의도가 아니라 미국정부와 IMF의 유인책에 의해 실시되었다는 사실이다. 미국과 IMF는 외환정책의 개혁을 담보로 한국에 차관을 공여했다. 1964년 5월 단행된 대폭적인 환율인하 역시 미국에 의해 유도된 바가 컸다. 사실 수출지향형 공업화에서 환율현실화정책이 실시되는 것은 절실하고 중요한 문제였다."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는 "미국이 한국에 원화의 평가절하와 통화긴축을 충고했고 한국정부는 이 충고를 받아들여 실행에 옮겼다. 5월 3일 실행된 원화가치 재평가는 금년도 미국이 지원하기로 한 총 7500만 달러 중 1000만 달러의 원조금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기록했다. 이는 미국이 환율현실화정책에 개입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146-7)


# 변동환율제 도입(1965.4)은 IMF 차관과 연계


"제1차 3개년수출계획은 수출확대를 통한 외화사정 개선이라는 정책의 실현을 목표로, 1965년에서 67년까지 본격적으로 실시된 장기수출계획이다. 그것은 국제수지 위기에 직면해 있던 한국정부로서는 수입에 필요한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서라도 피할 수 없었던 선택이었다. 또 수출산업을 발전시키고, 외화획득의 증대를 도모해 유용하게 사용하는 것은 자립경제를 확립할 수 있는 기본적인 수단이기도 했다." "제1차 3개년수출계획의 입안은 대폭 지연되어 그 시안이 수립된 것은 1964년 12월 30일에 이르러서였다. 1965년 2월 16일에 수정안이 제출되었지만, 재수정을 거듭해 최종계획안은 1965년 3월 16일에야 확정되었다. 1965년부터 바로 시행하려고 했지만 시기를 맞추지 못한 것이다. 제1차 3개년수출계획이 경제장관회의에서 의결된 것은 1965년 7월 20일이었는데, 이러한 모습은 한국의 수출정책을 평가할 때 긍정적으로 지적되곤 하는 과감성과 거리가 멀다."(151-2)


5장 전자산업과 정책 없는 발전


"무역수지 악화라는 딜레마를 극복하고, 기간산업을 육성하며, 자립경제를 확립할 수 있는 기본적인 수단은 외화획득을 증대시켜 유용하게 사용하는 것이었다. 제2차 개발계획은 공업화를 위한 자본재 수입을 확대할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 필요한 재원을 스스로 조달하기 위해서라도 대폭적인 수출증가가 필요했다. 한국정부는 외화획득 증대라는 지침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1967년부터 71년까지 실시될 '제2차 5개년수출계획'을 급작스럽게 단행했다. 제2차 5개년수출계획은 제1차 3개년수출계획(1965~67년)의 마지막 해였던 1967년에 시작되었는데, 제2차 경제개발계획의 실시와 보조를 맞추기 위한 것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제2차 수출계획이 경공업제품의 수출에 기반을 두고 있어 수출품목 역시 생사류나 직물류 같은 섬유제품이 중심이었고, 텔레비전이나 트랜지스터, 집적회로(IC) 같은 전자제품의 수출계획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다."(227-9)


"라디오와 전기기기의 목표액은 1971년 1392만 달러로 1965년의 실적 190만 달러에 비해 7.3배 크게 증가되었다. 수출총액에 대한 비중도 1965년 1.1%에서 71년에는 2.5%로 커졌다. 한국정부는 라디오와 전자기기의 수출확대에도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상품구성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수출증가율을 보면, 다른 수출특화상품들보다 우선순위가 높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수출규모를 보면, 라디오와 전기기기의 목표액은 면직물(4900만 달러)의 약 4분의 1, 생사(4485만 달러)의 3분의 1, 도자기(2800만 달러)의 2분의 1에 지나지 않았고, 수출규모는 통조림(어패류와 양송이) 1486만 달러나 고무제품 1450만 달러, 공예품 1270만 달러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이었다. 라디오와 전기기기가 통조림이나 고무제품, 공예품 등처럼 대규모 자본투자나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 가공도가 낮은 잡화공업부문과 동등한 대우를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230-1)


"한국의 전자산업은 60년대 후반부터 비약적으로 발전해나갔지만, 이 시기에 전자산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육성계획이 명확하게 추진된 것은 아니었다. 제2차 개발계획은 자립경제와 중공업의 기반확립을 기본목표로 삼았을 뿐, 전자산업에 대한 명확한 육성계획 등은 제출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제2차 개발계획에 전자산업 육성계획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에 전자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이다. 전자산업의 발전 과정을 되짚어보면, 전자산업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67년부터였는데, 전자공업진흥법은 1969년 1월에 가서야 제정되었고, 이를 기초로 '전자공업진흥 8개년계획'이 수립되었다. 그리고 각종 지원제도와 같은 구체적인 실시방안들이 제출되는 등 본격적인 육성·지원이 시작된 것은 그 이후였다. 이는 한국의 전자산업이 (정부 주도의) 본격적인 지원정책이 실시되기도 전에 이미 성장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232)


제3부 고도성장의 보이지 않는 손


6장 수출주도형 성장과 바이 코리아 정책


"1960년대는 미국정부의 통상정책이 보호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던 시대였다. 한국 상품이 미국시장에서 지위를 높여가던 시기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보면, 이는 기이해 보인다. 미국의 국제수지가 1958년부터 만성적인 적자상태에 빠지면서 이른바 달러위기가 초래되자, 미국정부는 다방면에 걸쳐 국제수지개선책 혹은 달러방위책을 강구했지만 근본적인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아 해마다 대폭적인 적자가 지속되고 있었다. 1960년 11월, 미국정부는 해외달러지출을 절감하기 위해 바이 아메리칸(Buy American) 정책을 내놓았고, 63년 7월에는 대외군사지출·대외원조를 줄이거나 이자평형세(interest equalization tax)를 시행했으며, 65년 2월에는 금융계와 산업계에 해외투자·융자를 자제해달라고 요청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미국정부가 한국에 대해서만큼은 바이 아메리칸 정책을 완화해 적용하고, 심지어 우대정책을 실시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이다."(256-7)


"(이른바 '바이 코리아(Buy Korea) 정책'으로 전환한) 미국정부는 1965년 5월 열린 박정희-존슨 정상회담을 시작으로 한국과의 무역을 우대하는 정책을 강화해나갔다. 박정희-존슨 공동성명에서 미국은 한국의 수출 진흥을 지원할 것임을 밝혔는데, 기본적인 결정사항과 관련된 비밀조약이 양국 간에 체결되었다는 사실이 공개된 외교문서를 통해 드러났다. 박정희-존슨 정상회담의 한·미공동선언문에 명시된 한국의 안보 및 경제발전과 관련해 별도의 '각서'가 체결되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각서에는 북한이 경제발전을 성공적으로 이루었고, 군사력을 강화해나가고 있는 한반도 정세와 전망을 고려할 때 한국이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명기되어 있다. 한국의 안보라는 측면에서도 한국의 경제적 도약과 군사력 강화는 필수적이며, 이를 위해 미국이 지속적으로 협력한다는 내용이었다."(258)


# 한미 합의 사항

1. (비공개)

2. 한국의 장기적인 경제발전을 위한 미국의 지원

3. 한국의 수출확대를 위한 미국의 지원

4. 한·미상호군사협정 강화

5. 한국인 이민자의 농장노동자 수용

6. 한국의 아프리카 기술지원 프로그램에 대한 미국의 재정적 지원


7장 전자산업의 진흥과 바텔기념연구소


"미국인 직접투자는 발전단계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미국의 자본과 기술이 없었다면, 한국의 전자산업은 비약적인 성장을 달성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국은 196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기술혁신에 나섰고, 민간기술의 낙후성을 극복하기 위해 일본과 미국으로부터 새로운 설비와 선진기술을 도입했다. 그 배후에는 정부주도의 활발한 연구개발 활동이 있었고, 그로 인해 산업계와 직접적 관련이 있는 기술의 수준이 높아질 수 있었다. 한국의 전자산업은 1960년대 후반 일본에서 도입한 기술을 이용하여 텔레비전을 조립생산하면서 출발했지만, 같은 시기에 이미 트랜지스터나 다이오드, 집적회로(IC)와 같은 반도체의 연구개발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텔레비전 같은 기초산업을 육성함과 동시에 당시 최첨단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반도체 연구개발에도 나서고 있었다는 사실은 다른 발전도상국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만의 독특한 경험이라 할 수 있다."(274-5)


"1966년 6월 한·미협정을 근거로 한국과학기술원(KIST)과 바텔기념연구소 간에 자매결연협정이 체결되었다는 사실도 지적해두어야 한다. 이 협정에 의해 바텔기념연구소에 다음과 같은 지원업무가 부여되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① KIST의 창설 업무와 건설계획에 대한 지원, ② 상임연구원 모집과 기술훈련에 대한 지원, ③ 연구시설 및 기기 선정에 관한 협력, ④ 기술정보 제공, ⑤ 연구 및 조사프로젝트를 위한 전문가 파견 등이었다. 바텔기념연구소 소장이 KIST 이사회 구성원으로 참가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이는 KIST가 바텔기념연구소에 축적된 연구개발 역량과 노하우를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게 지원해 줄 최고의 스폰서를 얻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한국정부는 KIST의 연구활동이 한국의 산업계에서 신뢰를 구축할 수 있을 때까지 바텔기념연구소의 지원 임무가 계속되어야 한다고 요청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미국외교문서에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281)


"특징적인 사실은 1967년 3월 8일에 경제과학심의회의에서 심의, 검토된 '전자공업육성방안'이 한국정부에 의해 독자적으로 작성, 입안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 방안은 실제로 (바텔의 주도로 16개 산업기술부문을 점검한) 산업실태조사보고서와 거의 전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일치하고 있어서 사실상 바텔기념연구소가 정책을 수립해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이 시기 산업정책은 관료적 통제의 색채가 확실히 강했지만, 정부 내에 전자분야의 정책과 관련해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할 부서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자산업에 관한 정책 수립이나 검토·조정 등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전자산업은 당시 최첨단 산업의 하나였고, 한국에는 전자분야를 전공한 대학교수나 과학기술자 그리고 최신기술정보 등의 자원이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한국이 전자산업의 육성을 독자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했다."(307-8)


8장 미국국가안전보장과 쇼윈도전략


#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요인

1. 유인 요인(pull factor) : 자유세계지원군(FWMAF) 병력 모집이 각국의 소극적인 자세로 난관에 부딪히고 전황이 갈수록 악화되자 한국군 파병 규모 확대

2. 추진 요인(push factor) : '베트남 특수'와 '파병에 대한 보상'으로 받아낼 수 있는 경제적 원조

※ 기대 효과 : 경제성장, 한·미관계 강화(방치에서 밀월관계로 급반전), 군 전투력 향상 등


"박정희 대통령과 존슨 대통령 그리고 미국정부 고위관계자들과의 회담결과, 한·미 두 나라는 단순한 우호를 넘어 전략적 파트너 관계로 급속하게 발전했다." "방미 당시 대통령비서실이 대미교섭을 위해 작성한 「한·미 양국의 현실적 입장과 박 대통령의 방미목표」에는 군사쿠데타정권의 정당화, 한·미관계의 강화 그리고 '한국의 쇼윈도화' 등이 열거되어 있다. ① 현 정권과 한국국민에 대한 미국정부의 절대적인 신임과 지지를 확보한다, ② 극동에서 한국을 민주주의의 '쇼윈도'로 만든다는 미국정부의 확약을 받아내고, 그에 대한 실질적인 지지를 획득한다, ③ 한·미 간 여러 현안들을 고차적으로 해결한다, 혹은 조기해결을 위한 미국 대통령의 약속을 받아낸다는 등의 내용이다. 여기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한국을 '쇼윈도'로 만든다는 구상이 외교정책의 주요한 버팀목 가운데 하나로 자리하고 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지원과 미국정부의 확약을 모색했다는 것이다."(338-9)


"여기에서 강조해두어야 할 것은 미국정부가 한국의 '개발독재체제' 강화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는 사실이다. 그 배경으로는 다음의 두 가지 사항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미국은 베트남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박정희 군사독재 체제를 유지해야만 했다. 미국의 '더 많은 깃발' 캠페인이 파탄을 맞이한 가운데 유일하게 박정희 정권만이 베트남파병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둘째, '한국모델'은 공업화를 경제개발의 중심으로 두고 설계되었는데, 그 개발체제의 필수적인 담당자를 군사정권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계획수행 능력을 갖춘 안정된 정권이야말로 경제개발계획을 성공으로 이끌어 '한국모델'을 성사시킬 수 있다는 것이 미국 측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따라서 미국정부가 '한국모델'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박정희 군사정권을 안정화시키고 나아가 장기화시키는 것이 전제조건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로스트노선'이었다."(346-7)


종장 한국의 고도성장을 어떻게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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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체제의 성립과 전개 및 몰락 - 국제적.국내적 계급관계의 관점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학모노그래프 54
김수행.박승호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1 박정희 체제에 대한 평가가 왜 쟁점이 되는가?


"동아시아 발전모델에 관한 논쟁은, 신고전파 이론에 의거해 시장기구의 역할을 강조하는 시장중심론, 자율적인 국가에 의한 시장개입의 유효성을 강조하는 발전국가론, 유교문화의 역할에 주목하는 유교자본주의론, 동아시아지역의 특수한 지정학적 여건에 주목하는 국제주의적 시각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국제주의적 시각을 제외하면, 나머지 세 관점은 모두 주류경제학의 패러다임에 입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고, 시장중심론의 한계를 발전국가론이나 문화론이 보완하는 형식으로 논쟁이 전개되었다. 논쟁의 초점은 "박정희 군사정권이 제3세계에서 예를 볼 수 없는 고도성장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었는가"이므로, 이 논쟁에서는 논점의 차이와 대립에도 불구하고 고도성장은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반면 정치적 독재는 고도성장을 위한 불가피한 측면 또는 필요악이었다는 관점이 암암리에 전제되고 있었다."(2-3)


2 민족경제론 : 박정희 체제에 대한 정통적 비판


"민족경제론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이 추구하는 외자의존적 수출공업중심의 개발정책은 한국경제의 대외종속성을 강화하며 경제의 대내적 분업관련을 파괴해 불구적이고 파행적인 경제구조를 낳을 것이다." "따라서 자립경제의 확립을 점점 더 어렵게 하고, 매판 독재정권을 점점 더 강화하며, 한국경제는 대외종속에 따른 경제잉여의 유출과 외채위기로 파국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민족경제론은 1950~60년대의 제3세계 혁명이 제기한 '자립적 민족경제의 건설'과 '매판 독재정권의 타도'를 슬로건으로 내세웠기 때문에 한국의 진보진영에 의해 크게 수용되었다. 그러나 무엇이 '진정한 자립경제'인가에 대한 명확한 개념도 제시하지 못했고, 어떤 경로를 통해 '파국'이 불가피한가에 대한 분석도 없었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이 수출증진을 통해 고도성장─비록 '허울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을 달성하자마자 민족경제론적 관점은 점점 지지세력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8)


# 민족경제론 비판

1. 한국경제의 세계시장 편입은 불이익의 측면만이 아니라 기회의 측면에서도 보아야 한다.

2. 자본주의화의 진전에 따른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계급대립이라는 근본 과제를 외면한다.

3. 정치와 경제가 자본주의적 계급관계의 ‘정치적 형태’ ‘경제적 형태’임을 파악하지 못한다.


3 발전국가론 : 국가의 물신화


"발전국가론은 국가의 자율성과 국가의 개입을 성공적인 경제성장의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박정희 정권은 대내·대외의 이익집단으로부터 독립적이고 자율적이어서 한국경제의 장래를 공평무사하게 계획하고 집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고도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국가는 이익집단들이나 압력단체들로부터 상대적인 자율성을 가진다고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지만, 발전국가론은 박정희 정권의 상대적 자율성을 진지하게 다룬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전국가론은 박정희 정권이 기존 이익집단이나 낡은 경제지식에 포획되지 않으면서 한국경제를 고도로 성장시킬 지도자와 관료들을 지니고 있었다고 강조하기 때문에, 발전국가론은 국가물신주의(國家物神主義)에 빠졌다는 비판을 받지 않을 수 없다."(16)


"물론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1961년에 농민들과 노동자들이 아직 정치세력으로서 힘이 없었고, 야당정치인·종교인·일반시민·학생도 군사적 폭력 앞에 당분간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하더라도, 그 당시 남북대치와 미소냉전 상황에서 군사쿠데타 세력이 미국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미국 정부가 미군과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었고, 미국의 경제원조와 군사원조가 아직도 국가재정의 큰 기둥이었으며,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미국 정부의 호의(好意)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을 생각하면 군사쿠데타 정권의 대외적 자율성은 크게 제한되어 있었다. 또한 군사쿠데타 세력의 소시민적 민족주의는 광범한 민중을 지지기반으로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재벌과 자본가들을 국내의 동맹세력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으므로, 박정희 정권의 대내적 자율성도 크게 제한되지 않을 수 없었다."(17)


#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 부정부패

1. 부일(釜日)장학회 헌납 사건 : 부산일보·한국문화방송·부산문화방송 등을 소유한 김지태를 구속한 뒤, 처벌을 면해주는 조건으로 언론 3사의 주식과 부일장학회 토지를 헌납받아 정수장학회 설립

2. 경향신문 매각 사건 : 1965년 각 은행들이 경향신문에게 일제히 대출금을 상환할 것을 요구해, 1966년 기아산업 사장 김철호에게 매각됨. 이후 여러 과정을 거쳐 1974년 5·16장학회(정수장학회) 소유로 넘아감.


4 개발독재론 : 발전국가론의 제도주의적 수정


"이병천은 (발전국가론을 개량하여) '국가주의 근대화 수동혁명체제'로서 '개발독재체제' 개념을 만들었다. 개발독재론에 따르면, 박정희 집권기의 '사회발전체제'는 개발독재체제인데, 이 체제가 산업화에 성공한 것은 주로 특정한 제도형태, 이른바 '복선형(複線形) 산업정책(수입대체정책과 수출지향정책의 결합)' 또는 '개발주의 제도형태' 때문이며, 부차적으로 재벌체제와 노동의 '헌신(獻身)'이 기여했다. 이병천은 근대와 현대의 세계경제사에서 국가 개입이 산업화에 성공한 사례가 매우 드문 근본원인을 "국가의 지원과 보호가 새로운 생산적 부와 혁신을 창출할 수 있는 규율과 연계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며, 한국 산업화 성공의 핵심요인을 "국가 지원에 성과 규율을 연계시킨, 규율을 동반한 지원제도"에서 찾는다. 그리고 "국가에 의한 시장·자본·노동에 대한 유도-통제-규율방식의 틀에서 재벌체제와 노동의 헌신이 산업화에 기여했다"고 평가한다."(29)


"개발독재에 노동대중이 '동의'하고 '헌신'하며 나아가 '자발적으로 호응'했다는 평가와 압축적 산업화를 위해 단순한 '권위주의적 조절'이 불가피했다는 평가는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런 평가는 근본적으로 박정희 체제가 급속한 '자본주의적' 발달을 도모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본에 의한 노동의 처참한 착취, 자본과 노동 사이의 계급투쟁을 보지 못했고, 포악한 군사독재가 노동자들에 의한 계급투쟁과 중간계층(지식인·종교인·학생)의 민주화 투쟁을 탄압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 것이다. 개발독재론은 박정희 체제가 단순히 '국가주도하에서 민족주의적 산업화'를 추진하고 '근대적 민족국가'를 건설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모든 국민이 '공통의지'로 산업화를 지지하고 노동대중이 자발적으로 산업화에 헌신했다는 비상식적이고 몰역사적인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30-1)


5 박정희 체제에 대한 대안적 평가


"'자본축적'은 기계·기술·숙련 등에 의존할 뿐 아니라 임금수준·노동시간·노동강도 등에 의존하며, 특히 자본주의적 발달의 초기 단계에서는 전자를 규정하는 생산력보다는 후자를 규정하는 자본-노동관계, 즉 생산관계가 더욱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즉, 자본축적을 통한 자본주의적 발달은 기계·기술·숙련 등 생산력의 발달을 가져올 뿐 아니라, 임금노동자들을 더욱 많이 만들어 냄으로써 자본-노동관계를 경제영역 전체로 확대한다. 따라서 박정희 체제는 '고도성장', '압축성장', '근대적 산업화' 등 생산력 차원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자본주의적 계급관계인 자본-노동관계의 사회적 확장이라는 생산관계 차원을 가지고 있다. 더욱 분명히 말하면, '고도성장', '압축성장', '근대적 산업화'가 가능했던 것은 자본-노동관계의 사회적 확장이 군사정권의 '독재'에 의해 압도적인 자본 우위 하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41-2)


"'계급투쟁'이란 용어의 관용적 사용을 엄밀히 살펴보면, 자본(또는 정치권력)을 하나의 '구조'로 전제하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의 투쟁에만 계급투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자본을 구조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로 파악한다면, 즉 자본을 자본-노동의 착취관계로 파악한다면, 계급투쟁은 상호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전자를 '아래로부터의 계급투쟁'이라 한다면, 후자를 '위로부터의 계급투쟁'이라 부를 수 있다. 1960년대의 개발독재가 압도적 자본 우위의 계급 역관계에서 '위로부터의 계급투쟁'에 의해 급속한 자본주의적 발달을 도모했다면, 1970년대의 유신체제에 의한 개발독재는 1960년대의 급속한 자본주의적 발달에 따라 노동자계급이 대규모로 형성되어 '아래로부터의 계급투쟁'이 반(反)독재투쟁과 더불어 격화되는 상황에서 자본주의적 발달을 유지하기 위한 '위로부터의 계급투쟁'이었다."(45-6)


"5·16 군사쿠데타 이후 쿠데타 주도세력에 대한 지지 여부에 대해 미국 정부가 경제개발계획의 안정적 추진을 주요한 기준으로 삼았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국 케네디 정부는 박정희의 좌익 전력에도 불구하고 군사쿠데타 세력이 참신한 세력으로 부패를 일소하고 경제개발계획을 효율적으로 추진할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사후적으로 승인했다. 여기서 박정희 군사정권의 특수성은 군사쿠데타에 의한 집권이라는 정당성 취약 때문에 경제성장의 성과에 더욱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고도성장의 성공 요인을 정책 차원에서 찾는다면, 수출지향 산업화로의 정책전환보다는 한·일 국교정상화에 따른 대일청구권자금의 도입과 베트남파병 등에 의한 막대한 외자도입이 더 중요하게 작용했을 수도 있다. 이완범(1999)은 1960년대의 후진국 산업화에서 여타 제3세계와 남한의 결정적 차이는 원활한 외자도입에 있었다고 말한다."(54)


"박정희 체제의 역사적 성립과 전개과정을 자본주의적 계급관계를 중심으로 파악하면, 제국주의·정치·경제 사이의 내적 연관을 통일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냉전체제와 남북분단체제에서 미국은 남한을 '자유세계'(사실은 자본주의 세계)의 본보기(show-window)로 만들어야 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었고, 군부쿠데타 정권은 고도경제성장을 통해 쿠데타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할 과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박정희 정권은 정치적 독재를 통해 자본이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는 계급관계를 재구축·강화함으로써, 자본가들로 하여금 직접적 생산자들(농민과 노동자)을 무자비하게 착취하게 하고, 소수의 대자본(재벌)으로 하여금 중소자본을 수탈해 모든 잉여가치를 자기에게 집중시킬 수 있도록 하며, 모든 이용가능한 대내외 자원을 특정 성장산업에 투자하도록 대자본에 특혜를 부여했다. 이리하여 고도성장이 달성된 것이다."(58)


"박정희 체제의 장시간·저임금·위험한 노동은 도시와 농촌의 엄청난 상대적 과잉인구의 존재에 의해 유지될 수 있었다." "농산물의 낮은 가격정책은 도시노동자의 임금수준을 낮은 수준으로 억누르기 위한 것이었고 주로 미국 잉여농산물의 도입을 통해 실현되었는데, 그 결과 식량의 자급률은 1962년 93.4%에서 1969년 78.8%로 급격히 저하했고, 1963~64년에 도시근로자 소득을 크게 상회했던 농가소득은 1965년을 기점으로 낮아지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 공적사회부조(公的社會扶助)가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서민들의 생계는 가족적 복지망을 통해 겨우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런데 가족적 복지망은 가족 중 누군가가 희생될 것을 강요했는데, 그 일차적 희생자는 농촌 출신의 젊은 여성들이었다." "(전태일의 분신 저항으로 대표되는) 노동자계급의 참상에 비추어 볼 때 제도학파의 '사회적 합의'나 '공통의지'라는 시각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사실왜곡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61-3)


"1970년대 초반의 경제위기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대응은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봉쇄하는 조치로부터 시작하여 반동적인 유신체제를 구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신체제는 3선 개헌이라는 헌법파괴로부터 진전된 정치적 위기와 1960년대 말 사회·경제적 위기로 나타난 종속적 개발지배연합의 재생산 위기에 대응하여 등장한 공개적 독재체제였다."(이광일 2001) 박정희 체제는 '외국인 투자기업에 관한 특례법'(1970), 국가비상사태선포와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1971), 10월 유신(1972) 등 일련의 파시즘적 악법을 통해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을 한층 강화했다. 유신체제는 노동자의 단결권 자체를 총체적으로 부인하였으며, 이런 노조부인정책은 유신체제의 적자(嫡子)임을 내세워 또 다른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한 정권기 내내 계속되어 1987년 민주화 투쟁과 노동자 대투쟁에 의한 노동법 개정 때까지 유지되었다."(68)


"유신체제에 맞선 정치적·경제적 계급투쟁은 1970년대 말에는 세계경제의 위기와 맞물린 박정희 체제의 위기에서 다시 폭발적으로 고양되었다. 1979년 8월 외자기업의 철수에 맞선 YH무역노조의 완강한 생존권투쟁은 야당인 신민당의 당사(黨舍) 농성을 계기로 여당과 야당 사이의 정치투쟁을 야기했고, 나아가 서울민사지법이 신민당 총재 김영삼을 직무정지시킴으로써 부마사태로 발전했다. 이에 대한 대응책을 놓고 지배계급 내부의 분열에 의해 박정희가 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죽음으로써 유신체제는 종말을 맞게 되었다. 이 과정은 전형적인 계급투쟁의 역동성에 의한 것이다." "이후 노동자계급의 폭발적인 생존권 투쟁과 학생·지식인·종교인의 전면적인 민주화 투쟁에 대응하여, 지배계급의 '위로부터의 계급투쟁'이 전두환의 또다른 군부쿠데타로 표현되었다.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으로 상징되는 격렬한 계급투쟁으로 인해 박정희 체제는 더욱 강화된 억압체제로서만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77-9)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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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1947 - 전후 독도문제와 한.미.일 관계
정병준 지음 / 돌베개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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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1952년 1월 한국의 해양주권선언, 즉 평화선 발표에 대해 일본이 항의하면서 독도의 영유권을 둘러싼 논쟁이 시작되었다." 일본 외무성의 입장을 대표하는 각서는 모두 네 건인데, "첫 번째 각서에 첨부된 「1953년 7월 13일자 죽도에 관한 일본정부의 견해」라는 장문의 글에 일본정부가 주장하는 독도영유권의 핵심적 내용과 구상이 잘 드러나 있다. 일본 외무성은 역사적 사실과 국제법의 두 가지 측면에서 일본의 독도영유권을 다루었다. 먼저 역사적 사실로는 ①과거에 죽도(竹島) 혹은 기죽도(磯竹島)라는 명칭으로 불린 섬은 현재의 울릉도이며, 현재의 죽도는 과거에 송도(松島)로 불렸다. ②1693년과 1881년 조선정부의 항의로 일본인의 죽도 출입이 금지되었으나, 이는 현재의 울릉도이지 죽도(독도)가 아니다. ③한일 간 존재했던 충돌은 울릉도에 관한 것이지 현재의 죽도(독도)에 관한 것이 아니다. ④문헌·고지도상의 송도는 현재의 죽도(독도)로 일본에 알려졌고, 일본 영토의 일부분이다."(25-6)


"1952년 처음으로 한일 양국 간에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외교각서 교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이래, 양국의 각서는 일종의 독도연구사를 형성하게 되었다. 역사적 근거(문헌·지도·연구)와 국제법적 근거(SCAPIN·대일평화조약·독도폭격·독도 폭격연습장 지정 및 해제)가 동시에 다루어졌으며, 시기적으로는 삼국시대부터 1950년대에 이르는 긴 시기가 다루어졌다. 역사적으로는 광범위한 주제에 대한 바늘 끝 같은 첨예한 자료적 해석이 대립하기 시작했다. 한국정부는 역사적 근거를 강조하는 입장이었던 반면, 일본정부는 국제법적 근거를 강조하는 경향이 강했다. 때문에 한국은 일본의 국제법적 근거를 반박하는 데, 일본은 한국의 역사적 근거를 부정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이 시기에 양국 정부의 견해는 단지 외무부·외무성의 작업이 아니라 역사학자·지리학자·국제법학자 등 양국의 전문가가 총동원된 총력전의 양상이었으며, 주로 역사적 근거가 주요 쟁점으로 부각되었다."(32-3)


"1951년 샌프란시스코평화회담의 준비·진행 과정에서 일본이 미국을 이용해 독도영유권을 확보하려 시도한 것에서 전후 독도문제가 발원했다는 판단이 이 책의 출발점이다. 1905년 일본의 한국 침략과정에서 첫번째 희생물이 된 독도는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이었고, 전후 한국령으로 귀속되는 것이 당연했다. 1952년 일본이 한국을 상대로 독도영유권을 주장했을 때 그 근거는 일본의 고유영토설이나 1905년의 불법 영토편입 사실이 아니라 1951년 샌프란시스코평화회담에서 독도가 일본령으로 남게 되었다는 주장에 무게중심이 두어졌다. 즉, 일본은 1905년의 불법적 영토편입은 을사늑약으로 실질적 주권을 상실하고 항거불능이었던 한국을 상대로 한 일방적이며 제국주의적인 침략의 일환이었기에 주장의 근거와 정당성이 현저히 부족한 상태였던 반면, 자국과 48개국이 서명한 1951년 샌프란시스코평화회담·평화조약은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보편적 동의를 획득할 수 있는 근거라고 판단했다."(60-1)


#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의 성격

1. 미국 주도의 단극적(單極的) 평화조약 : 반공·반소가 핵심

2. 일본과 서명국들간의 평화관계 회복 : 중국(대만과 분열되어 대표성 논란)과 한국(식민지 전력 논란) 배제 → 공산주의 저지라는 반공에 방점

3. 일본의 전쟁책임과 배상·보상·사과 문제 외면

4. 조약 이후 동북아시아에서 미국과의 양자동맹을 통한 안보·지역 질서 구축


#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이 한일관계에 미친 영향

1. 한국을 서명국·조인국에서 배제하고 '2차 대전 이후 해방된 국가'로 간주하면서 (재일한국인을 비롯한) 한국의 국제법적 지위 문제 방치

2. 일본이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을 통해 독도를 일본령으로 인정받았다고 주장하면서 한일간 영토문제 상존

3. 일본이 한일회담 과정에서 한국의 대일청구권을 상쇄하거나 묵살하기 위해 적산(敵産)에 대한 대한(對韓)청구권을 주장하면서 배상·청구권 문제 쟁점화


1 한국 1947년 : 남조선과도정부·조선산악회의 독도조사


"1947년 6월 울릉도에서 시작된 일본인의 독도 불법상륙 및 한국 어선 총격사건은 (일본의 어업한계선인) 맥아더라인 확대 및 한국의 어로구역 축소 우려와 결합되면서 강력한 목소리로 발전했다. 그런데 당시 한반도의 정치적·사회적 상황은 혼란의 극을 달리고 있었다. 미소의 강력한 영향 속에 남북은 분단되었고, 좌우갈등은 격렬한 상황이었다. 완전통일·자주독립 국가 건설을 둘러싼 갈등과 미소·남북·좌우의 갈등과 대립은 생사를 건 인정투쟁으로 전개되었다." 찬반탁·좌우익의 대립이 극심한 물리적 충돌과 테러로 이어지는 "혼란한 시점에 한국인들 가운데에서 독도영유권에 대한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이다. 돌이켜보자면 당시 독도영유권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과 노력이 본격화된 것은 요행이자 천우신조에 가까웠다. 이후의 역사적 맥락에서 보자면 1947년 울릉도에서 시작되어 대구·서울로 이어진 독도에 대한 관심은 한국의 독도영유권 확립에 중요한 기여를 한 첫 출발점이 되었다."(107-8)


"1947년 독도조사대의 결성·파견에는 과도정부 민정장관 안재홍, 국사관 관장 신석호, 조선산악회 송석하·도봉섭 등 일제하에서 진단학회 활동을 벌였거나(신석호·송석하·유홍렬), 조선학 운동을 주도했던(안재홍·송석하) 인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즉, 식민지시대 이래 한국적인 것, 한국 문화·역사·지리 등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연구를 주도했던 인물들이 해방 후 독도조사대 결성을 주도한 것이다. 특히 안재홍이 민정장관 직위에 있었던 점은 조선산악회가 독도조사에 동원될 수 있는 실질적 힘이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1947년 8월의 독도조사는 비밀리에 수행되었지만, 해안경비대 등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이루어졌고, 이는 민정장관 안재홍의 조력이 아니면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독도에 대한 조사작업이 필요했던 과도정부 민정장관 안재홍은 소규모의 공식조사단 파견과 더불어 대대적인 학술조사활동을 민간의 조선산악회에 부탁했던 것이다."(120)


2 한국 1948년 : 독도폭격사건과 독도의 재발견·재인식


"1947년 독도조사로 시작된 한국인들의 독도 인식은 1948년 6월에 발생한 독도폭격사건을 통해 결정적으로 제고되었다." "사건발생을 처음 보도한 것은 『조선일보』 1948년 6월 11일자였는데, 6월 8일 오전 11시 반경 국적불명의 비행기가 독도에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소사를 가해 울릉도·강원도 어선 20여 척이 파괴되고, 어부 16명이 즉사하고, 10명이 중상을 입었다고 보도했다." "폭격소식은 다음 날 독도에 출어했던 어선을 통해 울릉도에 전해졌고, 울릉도 경찰은 6월 9일 저녁 7시 구조선 두 척을 독도로 파견했다. 그러나 불과 4톤도 안 되는 구조선으로는 구호작업을 뜻대로 할 수 없었다. 이들은 10일 저녁 6시 울릉도로 돌아왔는데, 폭격 당일 독도 부근에 흩어졌던 사체와 배 파편은 하룻밤 사이 파도에 휩쓸려갔고, 바위에 난파된 경양환(慶洋丸)에서 김준선, 최태식 두 사람의 사체만을 수습해 왔다. 폭격 당시 즉사한 사람은 9명이며, 행방불명자 5명도 즉사한 것으로 추정되었다."(179-81)


"하지는 6월 17일 맥아더에게 2급 비밀 전문을 보내 "(독도폭격) 문제는 현지에서 매우 중요한 이슈"이며 모든 구실과 경우를 활용해 총력적으로 반미주의를 부채질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악효과를 극복하고 대응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하지가 맥아더에게 원한 것은, "지난주 리앙쿠르암(독도)에서 한국 어선에 대한 우발적 폭격을 포함한 불행한 사태에 비추어, 맥아더 장군은 장래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 지역이 미군기의 폭격이나 총격지역으로 활용되지 않게 하라고 명령했음을 본인에게 통보했다"라는 하지 성명의 승인이었다." "아울러 딘 군정장관이 독도 동방 10해리 지점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지역에 대한 폭격금지를 요청한 것은 단지 이 해역이 한국 어민들의 어로지역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주한미군정의 관할구역이자 한국 영토임을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미군정은 이 지역이 한국 어부들의 어업구역이라며 구체적인 어획고를 제시하기까지 했다."(191-3)


"1948년 독도폭격사건은 한국인들에게 중요한 교훈과 계기를 제공했다. 이 폭격사건으로 말미암아 독도가 한국령이라는 국민적 공감대와 국내외적 확인작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언론의 보도는 피해 어민들이 강원도 울진·묵호, 울릉도 어민들로 모두 한국인들이며, 이들이 조업하던 독도 역시 한국령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또한 미군정 역시 사건이 발생한 독도에 "군의를 포함한 조사 및 구호반"을 파견했다. 즉, 독도의 관할권이 미군정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식과 조치들은 모두 사건발생지인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분명한 증거였다. 또한 이 사건의 조사와 처리에 일본정부나 SCAP은 전혀 개입하지 않았으며 일본 언론에 보도되지도 않았다. 때문에 독도폭격사건을 계기로 모든 한국인들은 독도가 명백히 한국의 영토이며, 불행한 사건이 발생한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했다."(244-5)


"일본은 미국에는 패배했지만, 아시아국가들 특히 한국이나 중국에는 패배하지 않았다는 이중적인 전후 인식을 갖고 있었다. 특히 전쟁 책임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일본은 미국에는 복종적·위계적 동맹을, 아시아국가들에는 멸시적이며 냉소적인 구제국주의적 시각을 유지했다. 이미 1948~49년 단계에서 일본 외무성은 한국의 독립을 부정했다. 훗날 한일회담 일본측 수석인 구보타 간이치로가 한국이 샌프란시스코조약 이전에 독립한 것은 국제법 위반이었다고 한 발언은 이러한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일본은 1905년 독도 불법 영토편입 사건을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침략의 맥락·구조에서 분리시켜 개별적인 사건으로만 다루려 했다. 이는 기본적으로 1900년대를 전후한 제국주의 침략과정에서 대한제국·조선 정부와 맺은 조약들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전제와 가정하에서 나온 것이었다. 일본이 철저한 전후 반성과 청산과정을 거쳤다면, 독도영유권 주장은 결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273-4)


3 일본 1947년 : 독도·울릉도는 일본령


외무성 조약국장이던 하기와라 도오루가 작성한 「평화조약에 대한 일본정부의 일반적 견해」 제1차안(1947.5)을 검토한 가세 도시카즈는 "카이로선언은 일본정부가 감수하기 곤란한 영토조항을 담고 있으므로, 일본정부가 이를 승인하는 것처럼 전제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카이로선언의 영토조항은 ①일본이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이래 탈취·점령한 태평양의 모든 도서 박탈, ②만주·대만·팽호도 등 중국에서 도취(盜取)한 영토의 중화민국 반환, ③폭력·탐욕으로 약취(略取)한 기타 일체의 지역에서 구축(驅逐)을 규정한 바 있다. 그런데 가세 참사관의 코멘트는 기본적으로 일본 외무성 관리들이 자국이 수락한 항복조건마저 무시하고 무력화하려 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일본은 포츠담선언에 제시된 무조건 항복조항을 수락함으로써 종전에 이르렀다. 포츠담선언은 곧 일본 항복문서의 기본텍스트가 되었다. 그런데 포츠담선언의 영토조항은 카이로선언을 계승한다고 명백히 규정하고 있다."(287)


"조지 앳치슨은 국무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치고문으로 맥아더와 충돌했다. 아시아우선주의자로 일본의 새로운 '황제'였던 맥아더는 반공주의에 입각한 일본 사회의 재건을 원했다. 맥아더는 전후 일본 개혁 대부분이 실제로는 "소련의 첩자"인 "이른바 자유주의자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을 수행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공직추방, 배상, 반독점 조치 등은 압력솥의 뚜껑을 여는 것이기에 개혁을 하는 시늉만 하며 실제권력은 똑같은 사람들 수중에 내버려두어 일본이 "타고난 아시아의 지도자"로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독려하는 것이 오히려 상책이라고 판단했다." 1947년 8월 강력한 대일징벌론자이자 중국통이었던 조지 앳치슨이 불의의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한 것을 계기로 "SCAP(연합국 최고 사령부) 내에서 중국전문가 대신 일본전문가가 득세하기 시작했고, 대일정책에서도 징벌적 정책과 민주화 정책에서 온건적 현상유지정책 내지 역전코스가 시작되었다."(299-301)


"일본 사회에 대한 시볼드의 인식은 '매료' 그 자체였다. 그는 일본계 여자와 결혼했고, 수많은 일본인 거물들을 친구로 삼았다. 전후에도 시볼드는 정치담당보고관으로 거리낌 없이 일본 극우 정치인들과도 교류했다. 시볼드는 태평양전쟁의 책임은 일본의 정치·경제·사상의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극소수 '군국주의자'들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 시볼드는 자신의 친일적 입장을 일본의 공산주의화 저지, 즉 반공주의로 정당화하려 했다. 그는 전후 일본에서 벌어진 전범추방, 재벌해체 등의 경제개혁을 공산주의자들이 사주라며 반대했다." "반면, 한국을 여섯 차례 방문했던 그는 한국인이 "슬프고, 억압받고, 불행하고, 가난하고, 조용하며, 음울한 민족"이며, "전후 상황과 이 대통령의 거친 성격은 미군사령관에 파견된 수많은 미국정치고문들에게 한국을 보다 완고하고 견딜 수 없는 곳으로 인식"한다고 썼다. 그는 이런 견지에서 대일평화조약과 초기 한일회담을 이끌어갔다."(302-3)


1946년 11월부터 1947년 6월까지 일본 외무성은 총 4차례에 걸쳐 연합국에 대대적으로 배포한 「일본의 부속소도」(Minor Islands Adjacent Japan Proper)라는 팸플릿에서 "울릉도를 일본령으로 묘사하려는 의도를 내보였다. 일본 외무성의 설명을 따라가보면 11세기에 일본이 먼저 울릉도를 인지했으며, 한국은 13세기 중반 이후에야 식민지화를 시도했지만, 15세기 이후 공도(空島)정책을 취했고, 임진왜란 후 1세기 동안 일본이 이 섬을 지배했다. 17세기 말 울릉도 영유권을 둘러싼 논쟁 끝에 한국령이 인정되었지만, 한국은 여전히 공도정책을 취했고, 일본 어부들이 인근에서 계속 어업을 했다. 19세기 후반에도 일본 내에서 울릉도 개발논의와 청원이 있었고, 일본정부의 불허에도 일본인들이 울릉도를 출입했다는 주장이다. 즉, 일본이 먼저 울릉도를 인지했으며, 1세기 동안 지배했고, 영유권 논쟁이 있었으며, 한국이 공도정책으로 사실상 방치한 사이에 일본이 실질적으로 개발했다는 내용이다."(345-6)


"다음으로 독도에 관한 팸플릿의 서술을 살펴보면, 일본인들은 고대부터 독도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1667년에 마쓰시마(松島)라고 명명했으며, 유럽인들은 1849년에야 리앙쿠르암이라고 명명했다. 한편 울릉도와는 달리 리앙쿠르암에 대해서는 한국 명칭이 없고, 한국에서 제작된 지도에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1904년 9월 시마네현 어부 나카이 요사부로가 일본정부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시켜 자신에게 대여해줄 것을 청원했다. 다음 해인 1905년 1월 28일 일본정부는 독도를 다케시마라는 이름으로 자국령에 편입시켰고, 이를 시마네현 현보에 고시했다. 나카이와 일본정부는 독도가 한국령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한제국정부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1년 뒤인 1906년 울릉도 군수 심홍택의 보고로 뒤늦게 사태를 파악했으나, 러일전쟁의 와중에 일본 군대가 궁성을 점령했고 외교권은 박탈당한 상태였다."(349-50)


"일본 외무성이 만든 허위정보에 기초한 팸플릿이 1948~51년 간 주요 길목에서 한국의 독도영유권을 무장해제하는 결정적 도구로 활용되었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 문건을 동경의 미국 외교관·관리들이 신뢰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손을 거쳐 국무부로 전달된 후 중요성이 재차 확인되었다는 데 있었다. 즉, 일본 외무성과 미 국무부 외교관·관리들의 교류와 소통, 상호 영향력이 한국의 정당한 권리와 요구를 침해했다는 사실이었다. 정부가 수립되지 않았던 한국은 일본의 이러한 허위정보와 문서조작작업을 전혀 알지 못했으며, 정작 대일평화조약이 논의되는 시점에는 국가의 운명이 걸린 전쟁에서 생존을 위해 허덕이고 있었다. 1905년 국가 운명이 백척간두에 서 있을 때 일본이 독도를 불법적으로 영토편입한 이후, 1947년 일본 외무성에 의해 또다시 허위문서로 조작된 정보가 유포되었고, 1950~51년 한국전쟁으로 한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일본의 허위정보가 미 국무부를 움직였다."(365)


4 미국 1947년 : 리앙쿠르암(독도)은 한국령


1949년 11월 2일 미 국무부가 작성한 대일강화조약 초안에는 부속지도가 첨부되었는데, 독도(리앙쿠르암)이 한국령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독도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사건이 이 시점에 발생했다. 국교가 수립되지 않은 일본에서 미 국무부의 대표이자 주일정치고문이었던 시볼드는 초안에 대한 검토의견서에서 독도가 1905년 일본령이 된 이후 단 한 차례도 한국의 이의제기를 받지 않아 일본 영토라는 주장을 폈다. 초안을 전달받지 못했던 주한미대사 존 무초는 미국과 유엔이 정책적으로 한국을 지지했으며 한국정부의 위신이 있기 때문에 한국에 대일평화협상 참가 및 서명국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미 국무부가 양국의 의견을 모두 수용하여 한국의 대일평화협상 참가, 독도는 일본령이라는 조항을 새로 추가한 "이 (수정) 초안의 존재는 일본이 주장하는 독도의 일본 영유권, 대일평화조약에서 독도가 일본령으로 확인되었다는 주장의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되었다."(375)


"1950년 5월 대일평화조약 대통령특사로 임명된 존 포스터 덜레스는 일본 및 연합국들과의 협상을 지휘했다. 덜레스는 대일평화조약의 핵심이 "비징벌적인 평화조약"에 있다고 생각했다. 제1차 대전을 종결한 베르사유회담에 초급 외교관으로 동석했던 덜레스는 베르사유조약이 패전국에 대한 전쟁책임을 명문화한 후 영토할양, 배상금 등을 강제했기 때문에 독일에 의한 제2차 대전이 발발했다고 생각했다. 당시 미 국무부가 작성한 기존의 조약 초안을 베르사유체제와 마찬가지로 배상을 포함한 징벌적 성격이 강했으며, 제2차 대전 이후 이탈리아와의 평화조약 역시 전쟁책임과 배상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때문에 덜레스는 국무부가 준비한 초안이 "지나치게 상세"하며, 일본인의 의견을 결정적으로 수용하지는 않더라도 시작단계부터 일본과 의논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덜레스가 추진한 비징벌적이며 배상문제를 거의 배제한 '평화조약'은 세계외교사에서 유례가 없는 우호적 조약이었다."(375-6)


"대일평화조약의 초안은 얄타체제로 대표되는 미·소·영·중 4대국의 연합전선이 냉전의 격화와 중국 대륙의 공산화로 대표되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붕괴되는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며 변화해갔다. 최종적으로 미국·영국은 일본과 평화조약 체결에 참가해 서명했고, 소련은 참가했으나 서명을 거부했으며, 중국은 초대받지 못했다. 미국은 적국 일본에 대해 가혹하고 징벌적인 조약 초안을 준비했다가, 1948년 냉전의 격화와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정책을 변경했다. 미국은 일본을 미국의 동아시아 하위동맹자로 설정했고, 일본에 관대한 평화조약을 제안했다. 미국은 남태평양의 구일본위임통치령의 접수 및 신탁통치, 오키나와에 대한 신탁통치 및 군사시설 유지, 일본 본토에 대한 군사시설 및 군대주둔권을 획득함으로써 대일평화조약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영국은 일본에 대한 경계심과 억제를 표명했으나 결국 초안에 약간의 수정을 가한 상태에서 대일평화조약에 동의하였다."(379-80)


"로버트 피어리는 전쟁기간 동안 국무부에서 대일정책 관련 업무를 맡았고, 1945년 10월 주일미정치고문실에 배속되어 근무했으며, 1946년 중반 미 국무부 극동국으로 옮겨 일본담당관 및 동북아시아과 등에서 일한 일본통이다." "1947년 1월 30일 로버트 피어리가 제출한 제1장 영토조항을 다룬 초안·비망록·지도 가운데 초안이 남아 있다." "피어리가 만든 매우 간단한 2쪽짜리 문서는 이후 1947~49년 국무부 대일평화조약 초안 영토조항의 원천이자 핵심이 되었다. 피어리는 대일평화조약의 영토조항 초안을 처음 작성할 때부터 제주도·거문도·울릉도와 함께 독도를 "한국 근해의 모든 작은 섬들"에 포함시켰다. 또한 피어리의 영토조항 초안은 1947년부터 1949년까지 독도를 한국령으로 표시한 미국측 초안으로 이어졌다. 특히 피어리가 일본통이며, 일본에 우호적인 입장이었음에 비추어볼 때 독도가 한국령으로 명확히 규정된 것은 매우 중요하고 특별한 의미가 있다."(388-9)


5 미국의 대일평화조약 초안과 독도 인식(1947~1951)


1. 미 국무부 조약 초안의 독도 인식(1947~1949) : 리앙쿠르암(독도)은 한국령

2. 시볼드의 공작(1949~1950) : 리앙쿠르암(독도)은 일본령 주장

3. 존 포스터 덜레스의 등장(1950~1951) : 대일평화조약에서 독도조항 삭제

4. 영미합동초안의 성립과 최종 조약문의 확정(1951)


6 영국의 평화조약 초안과 영미협의(1951)


7 미국과 일본의 협의(1951)


"(경제적 배상과 관련하여) 무배상은 대일평화조약 체결과정의 기본정신이자 원칙이었다. 무배상이 강조된 것은 장래 오랫동안 일본에 중대한 부담을 지우면서까지 배상하지 않도록 한 원칙을 주요 교전국인 미국·영연방·네덜란드 등이 승인했기 때문이며, 국민당 정부도 배상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배상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조약의 기본정신과 원칙이 무배상을 강조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무배상으로 불린다. 사실상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서 채택된 것은 역무(役務)배상이라는 새로운 방식이었는데, 이는 구상국(求償國)이 제공하는 원료를 가공해 인도하거나 구상국 연안수역의 침몰선박의 인양·해체를 맡는 방법 등으로 일본이 외화부담을 지지 않으면서 피해국의 손해를 보상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방식이 채택된 가장 큰 이유는 승전국인 미국이 일본에 다량의 원조를 제공하는 상황에서 일본의 배상액이 커지면 그만큼 미국의 부담이 늘어나기 때문이었다."(629-30)


"청구권과 관련해 일본 외무성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a) 일본의 재외재산: 연합국 중 〈일본과 현실적으로 전투행위에 돌입했던 제국에 있는 모든 일본 자산은 반환될 것〉. 일본 재산 중 사유재산에 대해서는 특별한 고려를 해줄 것을 간청. 전쟁에 따른 청구권의 지불에 이것이 적용될 때는, 재산의 소유자에 대한 보상문제는 일본정부의 재량에 일임해줄 것. (b) 약탈재산: 〈반환은 대부분 완료되었음. 평화조약의 체결과 함께 종결될 문제임〉. 괄호 친 두 부분은 일본 외무성의 기본적 시각을 보여주는 것인데, 교전당사국 내 일본 재산은 반환되어야 하지만, 일본이 타국으로부터 약탈한 재산은 반환이 완료되었기 때문에 평화조약 체결로 종결하자는 것이었다. 교전국가와 점령지의 경우에 이런 시각을 유지한다면 식민지의 경우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었다. 식민지에 대한 약탈재산이나 반환은 존재하지 않으며, 사유재산을 포함한 식민지 내 일본의 재산반환은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었다."(630-1)


"덜레스의 1951년 1~2월 동경 방문은 한국 전장에서의 상황이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성사되었다. 1950년 11월 중공의 개입 이후 백두산까지 진격했던 유엔군은 급속히 후퇴했으며, 1951년 1월 초에는 한국정부 및 주요 인사들의 제주도·일본 망명을 고려할 정도로 전황이 악화되었다. 대일평화조약의 조속한 체결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미국 조야에서 제기되었고, 덜레스는 전격적으로 일본과 대일평화조약·미일안보조약의 체결에 합의하게 된다. 다른 연합국과의 협의, 구체적 조약문의 세부적 수정작업이 남았지만, 1951년 2월 11일 그가 동경을 떠날 때 이미 대일평화조약은 거의 완성단계에 돌입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덜레스와 일본의 가장 주요한 관심사는 일본의 미래안보문제였다. 2월 2일 일본 국회에서 덜레스는 일본이 상호방위 같은 일정한 조약체제하에 들어온다면 미국은 주일미군을 확실히 보유해달라는 일본정부의 요청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것이라는 취지로 연설했다."(638-9)


# 미일안보협정과 미일행정협정(SOFA) 체결로 실현


"일본정부가 제시한 한국의 대일평화조약참가 불가 이유는 첫째, 한국이 일본과 관련해서는 평화조약에 따라 독립을 획득하게 될 해방국으로 일본과 교전상태나 전쟁상태가 아니었다. 둘째, 한국이 서명국이 되면 공산주의자들인 재일한국인들이 재산회복·보상 등에서 일본정부에 엄청난 요구를 할 것이다. 때문에 미국 초안에 명시된 것처럼 한국에 대한 권리·권원·청구권을 포기하고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는 정도면 충분하고, 양국 관계는 한일간 양자조약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요시다의 입장을 정리하면 ① 전시 한국의 연합국 지위 불인정, ② 재일한국인의 연합국 국민 지위 부여 시 일본정부 파탄, ③ 한국의 조약서명국 배제, ④ 한일관계 수립은 한일 간 협정으로 처리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회담일 오후, 재일한국인이 연합국 국민의 지위를 획득하지 않는 것만 확실히 보장된다면 한국이 강화조약의 서명국이 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덜레스에게 전달했다."(664)


8 한국정부의 대일평화조약 대응과 한미협의(1951)


# 덜레스의 1차 초안(제안용)에 대한 한국정부의 답신(1951.5.7)

1. 한국의 연합국·서명국 자격 부여 및 재일한국인의 연합국 국민 자격 부여

2. 대마도 반환

3. 재한일본인의 적산 몰수 인정

4. 맥아더라인 존속


"미 국무부는 미군정기 및 한국정부 수립기에 한미 협정을 통해 귀속재산으로 인정한 한국 내 일본 재산에 대해서는 타당성을 인정하였다." "한국에 대한 연합국 자격 및 조약서명국 지위 부여와 관련해서는, 한국이 주장하는 근거(임정의 대일투쟁·선전포고, 폴란드의 예)를 부인했다. 다만 이 문제와 관련해 미국정부의 입장이 결정되는 바에 따라 한국에 연합국·서명국 지위를 부여하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즉, 한국이 제시한 과거의 사실이 연합국·서명국 자격조건을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현재 미국의 대한정책적 입장에 따라 한국의 자격이 결정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마지막으로, 미국은 대마도 반환 요구와 맥아더라인 존속 요구를 과도한 배상 혹은 일종의 영토할양으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다." "전반적으로 한국의 주장은 당시까지 미국이 추구해왔던 '비징벌적이며 배상을 제외한' 평화적 조약 체결이라는 원칙과 큰 격차가 있었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상을 주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731-2)


# 미국의 결정사항 통보(1951.7.9)

1. 한국에 최신 대일평화조약 초안(제3차 영미합동초안) 제공

2. 한국의 조약서명국 자격 부정

3. 한국의 대마도 반환 요구 기각

4. 맥아더라인 논의는 국제어업회담으로 해결 권고


# 한국의 제2차 답신서 주요 내용

1. 재한일본인 귀속재산의 한국 소유권 확인(최우선 요구 사항)

2. 대마도를 기각하는 대신 독도·파랑도 등의 영토권 확정

3. 맥아더라인 유지


"한국정부가 최초로 독도를 거론한 제2차 답신서(1951.7.19)에는 독도의 명칭만이 거론되었을 뿐 독도·파랑도에 대한 어떠한 근거·관련자료도 제시되지 않았다. 한국정부는 조약 초안에 거론된, 일본이 방기할 도서인 제주도·거문도·울릉도 뒤에 단지 독도·파랑도를 첨부했을 뿐이다. 추가 설명도 전무했다. 또한 위치와 존재가 확인되지 않던 파랑도와 함께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주장함으로써 독도 자체의 실존감이나 신뢰도를 저감(低減)시켰다. 나아가 한미협의의 맥락에서 보자면 대마도 반환 요청이 기각된 다음에 독도 반환을 주장했고, 그것도 가공의 섬인 파랑도와 함께 요청함으로써, 독도가 한국측 영유권의 중요성에서 후순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한미협의(1951.7.19) 시점에 한표욱 1등서기관은 독도와 파랑도가 "대체적으로 울릉도 인근에 위치"한다고 발언함으로써 지리적·역사적·문헌적 정보가 부정확하고 미비했음을 드러냈다."(762-3)


"미 국무부는 1951년 8월 10일 대일평화조약과 관련해 한국정부에 최종입장을 통보했다. (여기서 러스크는 독도가 "1905년 이래 일본 시마네현 오키도사 관할하에 놓여져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독도는 7월 19일자 한국측 제2차 답신서에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미국은 불과 20여 일 만인 8월 10일에 일본령이라고 결정해 한국에 통보했다. 러스크 서한에 등장하는 이 대목은 1947년 6월 일본 외무성이 제시한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었다. 이 사이 한국측은 근거자료를 전혀 제시하지 못했다. 한국정부는 물론 주미한국대사관도 독도와 파랑도가 울릉도나 다케시마 인근에 있다고 했을 뿐 정확한 방위나 실체, 그것이 한국령이라는 역사적·문헌적 증거나 근거자료를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주한미대사관도 회신을 보내지 못했다. 이미 대일평화조약 초안 완성의 시기적 압박을 받고 있던 상황에서 미 국무부는 더 이상 결정을 늦출 수 없었고, 자신들이 보유한 정보에 근거해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777-9)


"지금까지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한국정부는 러스크 서한의 독도문제에 대해 공식적으로 항의하지 않았다. 조약서명국 자격·맥아더라인에 대해서는 몇 차례 의견을 개진했지만, 독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훗날 유진오는, 독도를 평화조약에 명기치 않은 것은 오랫동안 지속된 분쟁의 씨를 남겨놓은 처사라고 평가했다. 맥아더사령부가 맥아더라인을 그을 때 독도를 맥아더라인 밖에 위치시켜 한국령으로 표시했는데, 그것을 평화조약에 명시하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다만 그렇게 된 이유는 "미국이 독도를 일본 영토로 생각하는 것이라고는 해석되지 않는다. 울릉도에 부속된 소암초에 지나지 않으므로 특기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본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평가했다." "아울러 국가의 권위를 상징하는 정식 외교공문서에 실존하지 않는 섬(파랑도) 이름을 적어 우리 영토라고 주장한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고 기록했다."(785-6)


# 1950~1951년 간 한국의 최대 우선순위는 한국전쟁에서의 생존 및 승리였다.


9 보이지 않는 전투 : '독도분쟁'의 서막과 한·미·일의 대응


"1952년 1월 19일 (독도가 포함된 '영해선 이외의 어족자원 보호관할권(관할선)'을 확정한) 한국의 해양주권선언이 있은 직후, 일본 외무성은 성명을 발표해(1.20) 일본의 독도영유권을 주장했다. 일본 외무성은 한국정부가 한일 간 공해에 50~60마일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데, "강화조약에서 우리에게 귀속된 우리의 독도까지도 한국에 속하게 될 것"이며 "한국정부는 또한 그 지배하에 있지 않은 북한의 해역에까지 그 주권을 확장"하고 있다며 맹비난했다. 일본이 대일평화조약에서 독도가 일본령에 귀속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일본은 현재같이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고유영토설)이거나 1905년에 무주지로 편입된 영토(무주지편입설)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1951년 샌프란시스코대일평화조약에서 일본령으로 귀속된 섬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이 한국을 상대로 독도영유권을 주장하게 된 첫번째 배경이 샌프란시스코대일평화조약이었음이 분명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826)


1952년 9월 한국산악회 독도조사대의 방문을 전후하여 재차 독도폭격사건이 발생하자 "1953년 2월 27일 한국군은 한국 및 유엔군 당국의 완전 합의로 독도 주변 공폭(空爆)연습이 없을 것을 미극동총사령관 명의로 보장하였으며, "미국정부로서도 독도는 한국 영토의 일부임을 인정"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즉각 이에 대해 반박했다. 미극동군사령관에게 조회한 결과 "유엔군사령부는 독도에 있어 폭격연습의 중지를 한국정부에 통고한 것일 뿐, 그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라는 회답을 얻었다고 주장했다. 일본정부는 영유권 주장 근거로 두 가지를 내세웠는데, 첫째 대일평화조약에 일본이 권리·권원·청구권을 포기할 지역을 명문화해 규정했는데 독도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점, 둘째 독도는 미일합동위원회의 결정에 의해 폭격연습지 리스트에 추가되었는데, 이는 본래 독도가 일본령인 까닭에 합동위원회가 리스트에 올린 것이므로 한국령은 인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들었다."(840-1)


"독도문제가 표면화되는 중요한 동기는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의 체결과정에서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에 대한 미 국무부의 우호적 동향을 일본정부가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관련해 미 국무부는 러스크 서한(1951.8.10)을 일본정부에 공식 전달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정부는 윌리엄 시볼드 등을 통해 미 국무부의 결정내용과 관련 정보를 인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1947년 6월 일본 외무성의 팸플릿 작성과 1949년 11월 시볼드의 주장 이후 독도문제는 표면에서 전혀 논의되지 않았고, 1951년 2월과 4월 덜레스의 두 차례 동경 방문에서도 전혀 논의되지 않았다. 그런데 1951년 7월 한미협의과정에서 독도문제가 제기되고, 1951년 8월 딘 러스크 국무차관보의 서한이 제시되고 난 뒤에야 일본의 독도영유권 선전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인과관계로 보자면 일본측에 관련 정보가 누설되었거나, 일본측이 관련 정보를 입수한 후 선전이 시작되었음이 분명했다."(859-60)


"일본의 외교적 성명(1952)과 물리적 점령 시도(1953) 사이에 위치한 것이 바로 독도의 미군 폭격연습장 지정·해체 전략이다. 먼저, 1952년의 시점에 일본은 독도영유권을 주장할 근거가 현저히 약했기 때문에 미국을 이용해 영유권 증거문서를 확보하려 했다. 둘째, 1952년부터 1953년 5월까지 일본 순시선·어선 등이 독도 해역에 출현하지 않거나 독도에 불법상륙을 시도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이들은 독도가 미군 폭격연습장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셋째, 1953년 3월 19일 독도가 폭격연습장에서 해제되자 5월부터 본격적으로 불법상륙과 일본령 표지판 설치 등의 공격적 행동을 취했다. 넷째, 5~7월 간 여러 차례 독도 불법상륙을 시도하고 외교각서를 발표하는 등 화전양면 공세를 취한 후에야 일본은 한국정부를 상대로 독도의 폭격연습장 지정·해제가 일본의 독도영유권을 증명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는 우발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기획된 대응방략의 결과였다."(872)


# 1953년 물리적 점령 시도에 담긴 일본의 의도

1. 독도 폭격연습장 지정·해제로 미국에게 독도영유권을 확보했다는 자신감의 표출

2. 제2차 한일회담(1953.4.15~7.13)에서 일본 영토인 독도를 포함한 평화선(이승만라인)은 불법한 획선(劃線)이라는 것을 강조

3. 자신들의 도발에 맞선 한국측 대응을 통해 재무장강화의 구실을 만들려는 의도


"그런데 한국 어민들이 폭격을 당했고, 이에 대해 한국정부가 강하게 항의하자 미공군사령부는 폭격중단과 폭격연습장 해제를 결정했다. 만약 독도가 한국령이 아니라면, 미군은 한국정부에 대해 불법월경 및 불법어로로 발생한 사고였으며, 귀책사유가 한국측의 위법에 있었다고 통보하면 그만인 문제였다. 일본측 논리에 따르자면, 폭격연습장 지정이 독도에 대한 일본 영유권을 미국이 확인한 증거이듯이, 미국이 폭격연습장 사용중단을 한국정부에 통보한 것은 미국이 독도를 한국령으로 인정한 증거였다. 나아가 1948년 독도폭격사건에 이어 독도가 한국 어민들이 조업하는 한국 어장이자 한국 영토임을 미국이 재확인한 것이었다. 때문에 미군 당국은 한국정보에 통보했고, 한국정부가 이 사실을 공표한 다음에야 일본정부가 인지하고 미군 당국에 재확인을 한 것이었다. 일본정부는 미국이 일본과 상의 없이 독도 폭격연습장 사용을 중단하고 이를 한국정보에 통보한 사실에 대해 거세게 항의했다."(882)


"당시 미국에게는 한국 상황의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이었다. 만 3년 이상 지속된 전쟁은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스탈린이 사망함으로써 휴전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반공포로를 석방하는(1953.6.18) 등 휴전에 강력하게 반발하는 상황이었다. 미국에게 이승만은 도저히 통제 불능이었다." "1953년 중반 이승만의 휴전회담 반대가 절정에 달하자 미군 수뇌부는 또다시 이승만 제거계획을 꺼내들었다. 5월 3일 미8군사령관 테일러는 이승만 제거를 위한 에버레디계획(Everready Plan), 즉 상비계획을 승인했다." "이승만을 정점으로 한 한국정부에 대한 미 군부·국무부의 불신과 증오심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달했다. 거칠고 비이성적이며 막무가내인 이승만과 한국정부, 이에 대비되는 세련되고 고분고분하고 합리적인 일본정부, 이것이 당시 미 국무부 당국자들의 눈에 비친 한국과 일본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미 국무부는 독도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943-4)


"한일 양국은 독도에서 대결적 충돌을 벌였지만, 미국의 중재와 무마로 1953년 10월 6일 제3차 한일회담을 개최했다. 그러나 불과 보름 만에 일본 수석 구보타 간이치로의 망언으로 10월 21일 회담은 결렬되었다. 구보타는 작심하고 ① 한국이 강화조약 발효 전에 독립한 것은 국제법 위반이다, ② 일본 패전과 동시에 재한일본인을 전부 철수시킨 것은 국제법 위반이다, ③ 재한일본 사유재산 몰수는 국제법 위반이다, ④ 카이로선언의 '한민족이 노예상태'에 있다는 문구는 전시(戰時) 흥분상태에서 작성된 것이다. ⑤ 일본의 한국 식민통치가 한민족에 은혜를 주었다고 발언했다. 한국측에서는 구보타 발언의 철회 및 사과가 회담재개의 전제조건이었지만, 일본은 전혀 그럴 의사가 없었다. 존 앨리슨 신임 주일대사는 1953년 11월 18일 "일본 국내의 정치적 민감성 때문에 구보타 발언의 취소 혹은 직접적 사과는 정치적으로 불가능하다"라고 평가했다."(946)


"주일미대사관의 앨리슨 대사, 윌리엄 터너 참사관, 핀 2등서기관 등은 물론 워싱턴의 동북아시아국 일본과의 더닝까지 모두 러스크 서한의 공개를 통한 미국의 입장표명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동북아시아국장 매클러킨이 러스크 서한 공개를 억제하고 있었지만, 현장과 본부의 공개 요구가 국무부의 회랑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노회한 변호사 출신의 덜레스가 미 국무장관이 아니었다면, 1953~54년의 시점에 러스크 서한이 공개되어, 한미·한일 관계가 대파란에 휩싸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덜레스의 지시는 첫째, 독도분쟁과 관련해 미국이 일본편을 들 수는 없다. 둘째, 문제가 있다면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해야 한다. 셋째, 그때까지 미국이 중재할 수 있다. 넷째, 미국의 입장을 밝히라는 일본정부의 주장은 중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1월 23일자 앨리슨 주일대사의 전문은 바로 덜레스가 강조한, 미국이 독도분쟁에 "법률적으로 관련되지 않았다"라는 점을 강력하게 논박한 것이었다."(947-8)


동경의 반발이 거세지자 덜레스는 1953년 12월 9일 미 국무부의 최종 입장을 정리한 전문을 동경대사관에 보냈다. "이 전문에서 덜레스는 대일평화조약과 미국의 행정적 결정이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과의 독도분쟁에서 미국이 일본에 우호적으로 행동하길 기대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이는 1951년 대일평화조약문의 영토조항에 독도가 일본령에서 배제될 섬 목록에 포함되지 않은 사실, 그리고 1952~53년 간 미일합동위원회가 독도를 일본정부 시설로 인정해 폭격연습장으로 지정·해제한 사실을 언급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미국의 입장을 한국에 공식 통보한 1951년 8월 10일자 러스크 서한은 일본정부에 알려지지 않았다고 했다. 즉, 한국에 대해서는 정책결정을 통보했지만, 일본에 대해서는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일본정부에 대해 미국의 입장을 알리는 것이 필요하거나 바람직하겠지만, 최근의 한일관계의 어려움에 비추어볼 때 더 이상 미국이 개입하는 것은 안 된다고 못박았다."(949-50)


"덜레스는 평화회담 당시 미국의 입장은 수많은 조약서명국들 가운데 하나이며, 이것이 서명국들의 합의된 공론이자 결정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지적이었는데, 러스크 서한은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 조문의 최종 성안을 앞둔 급박한 시기에 행정실무자의 편의적 문서작업 과정에서 채택된 것으로, 국가 간 논의·결정 과정이나 고위급 정책결정을 거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덜레스는 미국이 공개적으로 소련이 점령하고 있는 하보마이를 일본령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일본은 이에 대해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는 반면, 공산 침략에 맞서 싸우는 허약한 위기의 한국에 대해서만 강력한 조치를 취하며 미국을 압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덜레스의 정책판단은 (독도분쟁이 "한국의 다케시마에 대한 요구"에서 비롯되었다는 식의) 한국인들의 관점에서 믿기 힘든 사실과 평가들을 담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1953년 12월의 시점에 가장 한국의 입장을 옹호한 결정이기도 했다."(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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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 -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김태우 지음 / 창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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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서막


1장 폭격의 역사 : 개관


"(공군이론의 창시자로 평가되는) 줄리오 두에는 국가의 모든 자원이 전쟁에 집중된 1차대전의 새로운 전쟁양상에 주목하면서, 지형에 국한되지 않고 언제나 공격에 임할 수 있는 공군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더불어 그는 공군력의 가장 핵심적 요소로 '제공권'의 장악을 강조했다. 두에의 주장에 따르면, 현대전에서 제공권의 상실은 곧 지상작전과 해상작전의 실패를 의미했다. 두에는 제공권 장악의 중요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현대 '전략폭격'의 효시가 된 생각들을 최초로 개념화했다." "두에는 적의 저항의지를 말살하는 것이야말로 전쟁의 주요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공군력에 의한 적의 핵심지역(vital centers) 무력화를 강조했다. 두에는 심지어 "군사목표보다 공업목표를 중시해야 하며, 적국의 도시에도 인정사정없이 타격"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군사작전의 핵심 파괴 대상이란 적 병력이 아니라 오히려 적 점령지역의 민간인들이었다."(28)


# 전략폭격과 전술폭격

1. 전략폭격(strategic bombing) : 적의 전쟁수행능력과 전쟁의지를 없애기 위해 적의 주요 도시나 생산시설, 정치·군사의 중추부 등을 파괴하는 폭격작전

2. 전술폭격(tactical bombing) : 지상부대나 해상부대의 작전을 돕기 위해 실시되는 공중폭격


"1942년 2월 아서 해리스의 영국공군 폭격기사령관 임명은 영국 공중폭격정책의 전환점을 의미했다. 당시 영국정부와 공군은 공중폭격 결과의 미미함에 대해 국내 여론의 심한 질타를 받고 있었다. 영국공군의 사기는 떨어졌고, 공군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수는 날로 증가했다. 처칠은 공중폭격 여론에 내몰렸다. 그로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1942년 초 영국정부와 공군은 마침내 과감한 해결책을 뽑아들었다. 영국정부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정치적으로는 좀더 솔직하고 군사적으로는 좀더 효율적인 '지역폭격'이라는 공중폭격정책을 제시했다. 지역폭격은 '목표구역폭격'(target area bombing)이라고도 불리는데, 명확하게 분리된 다수의 목표를 단일 목표로 취급하는 방법이다. 즉 군수공장이나 항구, 철도조차장 같은 군사 용도 시설과 주변 주거구역 등 시가지 '전체'를 하나로 묶어 군사목표로 간주해 일정 지역을 통째로 융단폭격하는 방식의 폭격작전이다."(35)


"태평양전쟁 당시까지만 해도 미군은 유럽에서와 동일한 정밀폭격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공군과의 공조 속에서 지속되었던 유럽에서의 정밀폭격과는 달리, 일본 군사·산업시설을 향한 정밀폭격은 그 효율성에서 적잖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1945년 1월, 헨리 아널드 미 육군항공대 사령관은 태평양지역에서의 국면전환을 위해 중국과 인도에 배치된 미공군 부대들을 전면 철수하고, 모든 B-29기들을 마리아나기지에 집결시켜 하나의 지휘통제 아래 둘 것을 명령했다. 더불어 조직개편의 일환으로 정밀폭격을 주장하던 헤이우드 한셀을 대신해 커티스 르메이를 제21폭격기사령부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후 미공군의 전략폭격 역사에서 독보적이고 상징적인 인물이 된 르메이는 2차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에 이르기까지 미군의 민간지역 무차별 폭격작전의 상징적 존재로 역사에 기록되었다."(40-1)


2장 일제시기 조선인과 공중폭격


"일본군의 전략폭격은 서구 중심의 공중폭격 역사 서술에서 빈번히 제외되거나 망각되었으나 1937년 게르니카 폭격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전략폭격이 같은 해 중국대륙의 주요 도시들에서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일본군은 일본의 대만·조선·중국의 저항세력을 향해 무차별폭격을 가하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 예로는 1920년 간도출병 당시의 조선인 거주지 폭격과 1930년 대만에서 발생한 항일무장봉기 우서(霧社)사건 진압시 공중폭격 등을 들 수 있다. 간도출병이란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 남동부 간도지방에서 조선인 무장독립운동단체 결성이 급증하자, 이를 토벌하기 위해 일본이 제19사단 시베리아 출병군 등을 간도에 투입한 사건을 일컫는다." "당시 일본군은 폭격의 효과와 관련해 "지금까지 한번도 비행기를 보지 못했던 선지인(鮮支人, 조선인과 중국인에 대한 멸칭)에게 많은 효과가 있었다"라고 평가했다."(47-8)


"일본군은 1910년대 이래 다양한 공중폭격 경험을 기초로 1930년대에는 선진적인 항공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더욱이 1930년부터는 일본산 비행기 시대를 열었고, 미쯔비시중공업 등에서 생산된 각종 신형 폭격기들은 1937년 중일전쟁에서 가공할 위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 발발 시점부터 다음 해 10월 27일 우한(武漢) 점령에 이르기까지 16개월 동안 일본 해군항공대(육군항공대 제외)만 무려 1만대의 비행기를 참전시켰고, 약 3만 5000발의 폭탄과 32만발의 지상 총격용 총탄을 소비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그 이전 시기 동서양을 통틀어 어떤 공중폭격 양상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 공군력의 발현이었다.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는 「전전긍긍한 남경시민, 공습 후 침묵의 일야(一夜)」 「비행대는 적 후방시설 폭격, 상해전선 공육군 활약」 같은 화려한 제목의 신문기사들이 단 하루의 예외도 없이 일본의 공군력을 찬양하고 있었다."(48-9)


3장 냉전과 공중폭격


"(전후 수립된) 합동참모본부의 비상전쟁계획은 유럽지역 적극공세와 극동지역 전략방어라는 큰 틀 속에서 '공군력'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여 소련에 대응하고자 했다. 미군은 이러한 전쟁계획하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제어할 수 있는 소련 주변부 공군기지 확보 문제에 당면하게 되었다. 1945~46년 중국 서부지방과 이탈리아의 공군기지들이 미국의 전쟁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국공내전 상황과 중공군의 진격으로 인해 중국의 공군기지는 고려대상에서 제외되었고, 이탈리아 또한 소련 공격에 대한 취약성 때문에 합참의 계획에서 빠지게 되자 합참은 새로운 지역들을 미군 전쟁계획의 주요 거점으로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1947년 합참은 일본과 류큐열도를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제어하기 위한 주요 공군기지로 선정했다. 더불어 미국의 여러 주요 인사들은 류큐열도에 위치한 오키나와를 극동지역 전략방어의 거점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71-2)


1948년 6월 8일 벌어진 독도폭격사건에서 한국전쟁과 관련한 사실들을 짚어보면 "우선 냉전 초기 독도폭격훈련은 소련과 북한을 향한 미군의 '위력과시용'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적시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독도폭격사건이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의미심장하게 읽히는 대목 중 하나는 대규모의 민간인 희생에 관한 부분이다."(78-9) "2차대전기 일본인 혹은 아시아인에 대한 미국의 인종주의적 편견은 현재 학계에서도 통용되는 역사적 사실이다. 독도폭격사건이 2차대전 종료 후 불과 3년 뒤에 발생했다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처럼, 독도폭격사건 2년 후에 발발했던 한국전쟁 중에도 아시아인을 향한 미군의 인종주의적 편견은 결코 현격하게 줄어들지 않았다." "우리는 한국전쟁 발발 불과 5년 전 극동지역에서 무차별 대량폭격을 수행했던 주체들이 자신의 무대를 고스란히 한반도로 옮겼을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82)


제2부 북폭


"1950년 7월 7일 전선에서 북한군의 전황은 겉보기에 상당히 낙관적이었다. 7월 5일 북한군은 오산에서 미 지상군과 최초로 교전하여 그 병력의 3분의 1을 몰살시키는 커다란 승리를 거두기까지 했다. 기존 학계의 한국전쟁 서술에 따르면, 당시 북한지도부는 승리의 축배를 들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어야 했다. 그러나 당대 소련 문서에서 보듯, 김일성을 포함한 북한지도부는 소련대사 앞에서 자신의 불안과 당혹감, 좌절감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당대 소련 문서를 통해 알 수 있는 전쟁 초기 북한지도부의 불안과 좌절의 표면적 원인은 전쟁 초기부터 본격화된 미공군의 북한지역 대량 폭격 때문이었지만, 좀더 근본적으로는 그들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고 전면적으로 전쟁에 개입한 미국의 결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역사적으로는 그들의 식민지기(期) 경험을 통해 획득한 다양한 공중폭격 관련 지식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86-7)


4장 정밀폭격


북한지역 공중폭격을 수행하기 위해 1950년 7월 8일 창설된 "극동공군 폭격기사령부의 전쟁 초기 주요 임무는 북한군의 전투력에 기여하는 북한지역 산업시설과 군수창고, 유류저장소, 한강-삼척 라인 북쪽의 도로·철도·항만과 항공시설 등을 파괴하는 일이었다. 즉 한강에서 압록강 사이에 있는 북한군 수송망을 차단하고, 북한군 병참보급에 도움을 주는 산업시설을 파괴하는 것이 폭격기사령부의 주임무였다." "한국전쟁 초기 극동공군 폭격기사령부의 북한지역 폭격 목표는 거의 모두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었다. 폭격기사령부는 북한지역 출격 이전에 목표물을 구체적으로 배정했는데, 대부분은 평양, 원산, 흥남, 함흥, 청진, 나진, 성진 등 북한의 대도시에 위치하고 있었다. 한국전쟁 초기 미공군의 북한지역 폭격이 대도시지역에 국한된 이유는 폭격사령부의 작전 자체가 '차단작전'과 '전략폭격'이라는 2가지 작전개념하에 전개되었기 때문이다."(104)


# 차단작전(interdiction) : 적의 병력과 물자가 전선으로 이동하지 못하도록 적 후방의 교통중심지, 도로, 철로, 병력이동로, 이동병력의 숙소 등을 폭격하는 항공작전


5장 북폭, 그리고 논쟁의 시작


"전쟁 초기 양측의 목표물 인식은 극단적으로 판이했다. 미 극동공군은 군사목표 정밀폭격이라는 폭격정책에 따라, 원산의 조선정유공장·조차장·선착장 등의 목표물을 공격했다. 그러나 북한은 미군 폭격기의 타깃이 5년 전 일본 본토 폭격 당시처럼 도심의 민간지역을 향한다고 주장했다."(117) "원산은 1950년 7월 초부터 약 한달가량 지속된 폭격에 의해 핵심 산업시설과 교통시설의 상당부분을 상실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원산지역 민간인 주택 수백채와 북한주민 수천명이 함께 희생되었다. 미공군은 전쟁 발발시점의 폭격정책에 따라 군사목표 정밀폭격을 모색했으나, B-29기를 이용한 고공폭격은 필연적으로 대규모의 민간인 희생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초기 군사목표만을 정밀폭격했다는 미공군 측 주장과, 도시지역 전반에 무차별 폭격피해를 입었다는 북한 측의 주장은 모두 나름의 근거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119-20)


# 그 외의 폭격 지역 : 흥남·평양·청진·나진·함흥·겸이포·성진


"한국전쟁 초기 B-29기의 폭격양상에서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조종사의 시야가 완전히 가려진 상태에서 진행된 맹목포격이 매우 빈번히 수행되었다는 사실이다. B-29기 조종사들은 기상악화로 인해 목표물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1만피트 이상의 고공에서 대량의 파괴폭탄을 도심 목표물을 향해 투하하곤 했다. 이런 경우 조종사와 폭격수는 매우 세밀한 목표물 판단근거를 지녀야 했는데, 실상 그들은 지극히 초보적 수준의 레이더장치만을 유일한 목표인식의 근거로 갖추고 있었다. 조종사들은 이러한 맹목폭격 방법을 레이더폭격이라 불렀고, 원산과 평양 등의 목표물을 향한 대량폭격에서 이 방식을 빈번히 활요했다. 실상 B-29기는 굳이 레이더폭격이 아닌 주간육안폭격을 수행한다할지라도 필연적으로 주변지역 상당부분을 동시에 파괴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B-29기의 높은 '오폭률' 때문이었다."(144)


"B-29기 정밀폭격의 수행절차와 위력 및 한계는 한국전쟁 초기 미공군 공중폭격의 역사적 실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본 전제들이다. 미공군은 군사목표 정밀폭격을 정책적으로 분명히 했다. 하지만 이 정책은 사실상 실행 불가능한 목표나 다름없었다. 폭격목표물들이 대부분 도시 인구밀집지역 부근에 위치한 반면에, 폭격을 수행할 B-29기들의 목표물 적중률은 터무니없이 낮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기 미국은 자신의 폭격기들이 군사목표만을 정밀폭격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상 현실과 거리가 먼 수사에 불과했다. 한국전쟁기 북폭에 동원된 수많은 폭격기 조종사들은 대량의 폭탄을 한꺼번에 쏟아부어 타깃 인근의 민간지역 전반을 완전히 괴멸시키는 방식으로 폭격을 진행해야만 자신의 군사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 그러한 방식으로 폭격을 수행했다."(146-7)


6장 북한의 피해와 대응


"1939년 일본군의 충칭폭격을 목격하고 에드거 스노우가 표현한 "완전히 개인적인 증오"는 당대 북한의 사진과 문헌들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1950년 9월 9일 9일 『로동신문』은 미공군의 평양폭격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사를 게재했다. "높이 솟았던 선암리 교회당과 고아원 및 기타 문화시설들도 완전히 파괴되었다. 폭연 속에서는 잃어버린 가족들을 부르는 비통한 목메인 목소리들이 들려오고 있었으며, 구호대원들은 이곳저곳에서 무너진 벽돌을 헤치고 어린이와 늙은이들의 시체를 끌어내고 있었다." 폭격 현장에서 아내와 아이를 잃은 김리익은 다음과 같이 미국을 향한 증오를 표현했다. "우리는 원쑤들의 이 만행을 영원이 잊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다하여 골수에 사무친 이 원한을 갚고야 말 것이다." 미공군의 공중폭격은 한국전쟁 초기부터 "누구도 진실로 이해할 수 없는 완전히 개인적인 증오"를 북한 곳곳에서 만들어내고 있었다."(152-3)


제3부 평범한 임무


7장 폭격의 구조


"한국전쟁기 제5공군의 전술항공작전은 기본적으로 미공군의 일반적 전술항공작전 개념 속에서 작동했지만, 한국전쟁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일정한 차별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요컨대 공군의 보편적인 전술항공작전은 크게 제공권 장악, 전선지역 차단, 지상병력 화력지원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중에서 미공군은 일반적으로 제공권 장악을 가장 중시했고, 다음으로 병력과 물자의 이동을 막는 차단작전을 중시했으며, 지상군에 대한 화력지원은 이상의 작전이 완수된 후에 이행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1950년 남한에서는 이러한 단계설정이 상당정도 와해되었다. 북한 공군력이 열악했기 때문에 미공군은 가장 중요한 목표였던 제공권 장악을 단기일 내에 완수할 수 있었다. 또한 지상전황이 급박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에, 차단작전보다 전선의 지상군에게 직접적인 화력지원을 제공하는 근접지원작전(Close Air Support)이 중시되기 일쑤였다."(170)


"한국전쟁 초기 매우 불안정했던 전술항공통제시스템 속에서 속출했던 미공군의 유엔지상군 공격 사례들은 명백히 '오폭'으로 분류 가능한 사건들이지만, 당시 미공군 전폭기들의 임무보고서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남한지역 도시와 농촌에 대한 폭격은 대부분이 이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수많은 임무보고서들은 미공군 전폭기들이 전술항공작전에서 전선 인근의 촌락들을 애초부터 타깃으로 설정했음을 생생히 보여준다." "노근리사건조사반은 노근리사건 발생을 전후한 시점의 미공군 전폭기 임무보고서들을 전반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에서 나름의 적잖은 당혹감과 충격 속에 해당 결론에 도달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당대 미공군 전폭기들의 임무보고서들 대부분이 남한의 도시와 농촌, 혹은 흰옷을 입은 피난민 행렬을 향한 전폭기의 무차별적 공격이 일상적인 임무인 듯 너무도 태연하게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180-1)


"기초교육과 훈련과정에서 기능주의적인 전쟁기계로 육성된 미공군 조종사들의 전시 행동양식은 폭격의 구조와 양상을 살피는 데 중요한 분석대상이다. 과거 2차대전기 상당수의 미군 조종사들이 자신들의 전쟁을 인종우월주의, 군국주의, 광신적 민족주의, 팽창주의에 맞서는 숭고한 성전(聖戰)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한국전쟁에 지원한 공군 조종사들은 달랐다. 조종사 선발, 교육, 임무브리핑, 작전 과정에서 정치적 요소들은 오히려 탈색되었다. 조종사들에게 강조되는 제일의 덕목은 오로지 유능한 비행술과 폭격술뿐이었다. 조종사 개개인의 전투 동기부여도 마찬가지였다. 2차대전 당시 나치의 인종주의와 일본군의 진주만공격, 미군포로 학대 등은 비행기 조종사들에게 커다란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한국전쟁에 참전한 조종사들은 개인적 출세와 성공과 같은 원인들에 이끌려 매일 조종간을 잡고 있던 셈이다."(188-9)


"개인적 성공이라는 목표 외에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중요했던 비행 동기부여 요소는 '동료들의 압력'이었다. 조종사들은 일단 공격을 위한 진입대열에 서면 동료들에게 창피한 꼴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전투공격을 회피할 수 없었다. 공격을 중단시킬 권한은 대개 전투경험이 풍부한 편대장만이 갖고 있었다. 편대원들은 용맹한 편대장들의 통솔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 출세나 동료들의 압력은 모두 지극히 개인적인 동기부여였다. 2차대전기 조종사들에게 강조된 파시즘의 축출 같은 정치적 구호들은 한국전쟁 과정에서는 완전히 논외였다." "전폭기 조종사들은 그저 정찰병의 지시를 기계적으로 따르거나, 무감각하게 임무 구역 내에 폭탄을 소진하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한정했다. 그들은 자신의 타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자신의 작전이 어떤 성격의 군사작전이며, 왜 그 같은 공격을 수행해야만 하는지 되묻는 경우가 없었다."(190-1)


"조종사들은 기계로 양성되었지만 결코 완전한 기계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신의 인격과 개성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무차별적인 민간지역 폭격이나 민간인 공격을 정당화시켜야만 했다." "한국전쟁기 민간인 살상이나 민간지역 폭격과 관련하여 조종사들이 제시한 가장 상투적이고 전형적인 자기정당화 논리는 크게 2가지다. 첫째는 북한군 점령지역의 모든 민간인이 궁극적으로 북한군의 군사활동을 돕는 세력으로서 사실상 적과 동일시될 수 있다는 논리고, 둘째는 군인으로서의 직업정신을 강조하는 논리로, 자신의 민간인 공격을 부대 상관이나 정찰병의 지시에 의한 직업적 업무수행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셔우드의 인터뷰 분석결과에 따르면, 조종사들은 살인으로 이어지는 자신의 공격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전투원과 민간인 사이의 구분을 흐리게 만드는 경향이 강했다고 한다."(192-3)


8장 흰옷을 입은 적들


"전술항공통제반(Tactical Aircraft Control Parties, TACP)이나 모스키토 정찰병의 유도에 의한 공중폭격은 전폭기의 전술항공작전 수행에서 가장 원칙적·보편적으로 활용되는 폭격절차다. 전선지역에 배치된 통제관의 유도에 의한 폭격은 목표물 발견이 힘든 전폭기 입장에서는 매우 효율적인 공격방법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기 전술항공작전의 성격 규명에서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정찰병의 유도에 의해 공중폭격을 실시하는 경우, 일단 공격지시가 하달되기만 하면 모든 전폭기 조종사는 공격지점의 적 병력이나 민간인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진행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기 미공군이 직접 작성한 수많은 임무보고서와) 전쟁 중 실시된 조종사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실제 전폭기 조종사들은 연료부족에 따른 심리적 압박감 때문에 전술항공통제반이나 모스키토 정찰병의 공격지시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여 '반문하지 않고' 공격을 실시했다."(198)


적 병력이나 보급품의 존재를 전혀 확인할 수 없는 민간지역에 대한 무차별적 '시험폭격'에 대해 증언한 "전폭기 조종사들은 대낮에 전선 인근의 북한군 병력을 찾아내는 데 많은 곤란을 겪었다. 빠르게 비행하는 전폭기 내에서 산속에 은신한 적을 찾는 일은 어려웠다. 이런 까닭에 미공군 조종사들은 점차 적 병력이 거주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특정지역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폭탄을 투하하는 것을 점차 당연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같은 '의심지역 시험폭격'에서 민간인 거주지역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다수의 조종사들은 오로지 자신의 '육감'(hunch)에 의존해 남한의 도시와 농촌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폭탄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조종사들에게 중요한 것은 빠른 시간 내에 적 병력을 찾아내 살상하는 것뿐이었다. 이들은 네이팜탄 투하나 기총소사로 인한 시험적 공격으로 인해 해당 지역의 민간인이 다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205-7)


9장 남한지역 대량폭격


"미 극동공군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는 B-29기를 북한지역 전략폭격과 차단작전에만 활용할 예정이었으나, 지상전의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자 B-29기를 남한의 지상군 '교전지역'까지 불러들였다. 유엔군사령관 맥아더는 지상군의 수세상황에 맞서 공군의 근접지원작전을 매우 강조했다. 특히 파병시기가 가장 빨랐던 미 제24사단이 위험에 직면하자 7월 9일 맥아더는 B-29 중폭격기 전부를 출동시켜 악전고투하는 지상군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폭격기사령부 B-29기들의 근접지원작전이 절정에 이른 시점은 1950년 8월 중순이었다. 8월 중순 북한군은 낙동강전선을 돌파하여 부산을 점령할 목적으로 낙동간 북안의 경북 칠곡군 왜관읍 주변에 병력을 결집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8월 13일 극동공군사령관을 자기 사무실로 불러 적의 대병력이 집결하고 있는 지역을 B-29기 '전부'를 동원하여 융단폭격하라고 지시했다."(229-30)


"극동공군은 1950년 7월 한강 남안을 따라 최초로 폭격선을 설정했는데, 이 폭격선이 유엔군 후퇴와 함께 결국 낙동강 인근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스트레이트마이어는 조종사들에게 폭격선 남쪽의 목표물 공격시에는 공격 이전에 적극적으로 목표물을 확인할 것을 요구했지만, 폭격선 북쪽의 목표물에 대해서는 제한없는 공격을 허락했다. 폭격선은 전선의 남하와 함께 남쪽으로 이동했고, 제한없는 공격의 범위는 남한지역 전반에 걸쳐 점차 확장되었다." "(열차, 차량, 탱크, 병력의 이동을 막기 위한) 남한지역 교량 공중공격은 필연적으로 많은 민간인 희생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의 포화를 피해 길을 떠난 민간인들이 피난행로의 병목과도 같은 교량에 대거 운집한 상황에서 북한군의 전선 진입을 차단하고자 했던 유엔 지상군과 공군은 피난민들에게 사전 경고 없이 교량을 폭파하곤 했다."(238-40)


제4부 초토화정책


"(중국군의 참전 가능성 여부를 묻는 질문에) 맥아더의 대답은 단호했다. "거의 없습니다. (···) 우리는 한반도에 우리의 공군기지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만약 중국이 평양으로 밀고 내려오려 한다면 최악의 대량학살(greatest slaughter)이 벌어질 것입니다." 트루먼은 "대량학살"이 벌어질 것이라는 맥아더의 발언에 특별히 토를 달지 않았다." "중국군이 참전할 경우 최악의 대량학살을 벌이겠다는 맥아더의 발언은 실제 1950년 11월 초 중국군의 한국전쟁 참전이 공식화되면서 구체적인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1950년 11월 5일 맥아더는 북한의 모든 도시와 마을을 군사목표로 간주하는 '초토화정책' (Scorched Earth Policy)을 명령했다. 이후 한국전쟁 발발 이래 워싱턴의 정밀폭격정책에 따라 금지되어오던 B-29기의 소이탄 투하가 한반도 상공에서 현실화되었다. 1950년 겨울, 유난히 추웠던 북한 도시와 농촌의 눈밭 위에 불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268-9)


10장 초토화정책의 결정


"중국인민지원군의 본대는 한국군이 평양을 탈환했던 바로 그날, 10월 19일 저녁부터 안둥(지금의 단둥), 장전하구, 지안을 통해 압록강을 건너 각각 신의주, 삭주, 만포진에 도달하기 시작했다. 최초로 한반도에 진입한 중국인민지원군은 제13병단 예하 4개 군 12개 사단을 포함해 총 병력 26만명에 달했다. 애초 이들은 예상방어지역을 확보하여 일정기간 방어 후 공세로 전환한다는 작전방침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작전방침은 유엔군의 북한지역 전진 방식에 조응하여 급속히 변경되었다." "모든 유엔군 부대들은 성과달성을 위해 마치 국경선까지 경주대회라도 하듯 정신없이 전진하면서 적에게 자신의 취약점을 고스란히 노출시켰다. 중국군은 이렇듯 고립된 상태로 접근해오는 유엔군 부대들을 개별적으로 철저히 "각개격파"해나갔다. 1950년 10월 말부터 11월 초까지 중국군을 만난 미군과 한국군은 여지없이 그 병력의 상당수를 잃었다."(282)


"(초토화정책을 결정한) 맥아더는 (만주 국경 8킬로미터 이내 지역을 폭격에서 제외한) 합참의 지시에 즉각적으로 반발했다. 그는 만주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인력과 물자가 유엔군에 "엄청난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고 위협하며, 합참 명령의 즉각적인 재검토를 요구했다. 같은 날 맥아더는 합참에게 보내는 다른 전문을 통해 병력 증원을 요청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궁지에 몰리거나 여태까지 얻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다시 한번 협박했다. 결국 합참은 "기존에 계획했던 신의주 표적과 압록강 철교 끝부분을 포함하는 국경 인근 북한지역 폭격을 허용한다"고 맥아더에게 전문을 보냈다. 합참은 국경지역 폭격을 허용하는 전문에거 "미국의 국익 차원에서 볼 때 한반도 분쟁을 국지화하는 게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표현을 추가했다. 그러나 해당 전문에서 '한국인들을 위해' 민간지역 폭격에 신중해야 한다는 표현은 어디에도 없었다."(290)


11장 불타는 눈밭


"(2차대전기 일본 도시지역에 투하된) M-69는 석유를 기본으로 하는 소이탄인 반면, (한국전쟁기 도시지역에 주로 투하된) M-76은 석유와 금속의 장점이 넓은 방사성(放射性)과 분말금속 소이탄 매개체의 화력상승효과가 합해진 강력한 무기다. M-76 내에는 '굽'(goop)이라는 마그네슘과 원유의 화합물이 들어갔다. 분말 마그네슘과 만난 석유는 진한 농도의 반죽 덩어리로 변한다. 불타는 마그네슘은 으레 강철도 녹일 수 있는 섭씨 1980도까지 온도가 상승하기 때문에, 굽은 목조건물뿐만 아니라 차량·열차·철로·공장 등의 파괴에도 유용한 폭탄원료였다. 마그네슘은 물과 융합되면 폭발성이 있는 수소 등의 가스를 형성시키기 때문에 진화도 어렵다. 불타는 마그네슘은 밝은 불꽃을 내며 인체에 해로운 흰색의 산화마그네슘 연기까지 형성시킨다. 신의주폭격 사진에서 유난히 하얗던 연기는 산화마그네슘의 존재를 증명한다."(303-4)


"미공군은 극도로 인화성이 강한 소이탄을 도시지역에 투하한 후, 화염이 수일 동안 불탈 수 있도록 (도시주민들을 목표로 삼은) 기총소사를 쏟아부으면서 진화작업을 방해했다. 진화작업의 방해를 위한 또다른 활동은 소이탄 투하 직후의 도시 전지역에 대한 시한폭탄 투하였다. 국제연맹 조사단은 미공군 폭격기들이 주로 소이탄 투하 후에 시한폭탄을 투하했다고 주장한다. 조사단의 보고서에 따르면, 시한폭탄은 다양한 시간대에 폭발했는데, 낙하 후 20일 이후에 폭파하는 것들도 있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1950년 8월과 11월 극동공군은 남북한 도시의 민간인을 대상으로 비인도적인 시한폭탄을 무차별적으로 투하했던 것이다. 작전은 민간인을 희생시키고 그들 사이에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주요한 목적으로 했다. 북한주민들은 기총소사 및 시한폭탄이 두려워 소이탄의 화염을 감히 끌 엄두를 못 냈다."(307-8)


"제12전폭대대 F-51 전폭기편대들의 임무보고서는 중국군 개입 이후 미공군 전폭기들의 작전양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폭기 편대들은 적 병력이나 보급품을 찾아내기 위해 각별히 애쓸 필요가 없었다. 이들 대부분은 임무구역에서 적 병력이나 보급품을 수색하다가, 적절한 목표물을 발견하지 못하면 해당 구역 내의 마을과 도시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적 병력이나 보급품의 존재 유무는 중요하지 않았다. 민간인 거주지역은 그 자체로 훌륭한 공격목표였다. 기지로 돌아오는 길에 마주친 마을은 탑재한 무기를 모두 "소진"할 수 있는 좋은 목표물로 인식되었다. 실제 대부분의 전폭기 임무보고는 회항 직전의 마을 폭격에 대한 묘사에서 "공격"(attack)이나 "폭격"(bomb)이라는 표현 대신 "소진"(expend)이라는 표현을 빈번히 사용했다. 전폭기들은 탑재한 무기들을 마을에 모두 쏟아붓고 난 후에야 기지로 돌아왔다."(312)


제5부 협상하며 죽이기


"1953년에 접어들며 미공군은 더이상 값어치 있는 목표물을 찾아낼 수 없는 북한의 도시와 농촌 지역을 향해 폭격의 강도를 한층 더 높이기로 공식적으로 결정했다. 민간지역을 향한 대량폭격을 통해 정전회담장에 정치적 압력을 행사한다는 소위 '항공압력전략'이 더욱더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같은 결정은 대부분 토굴생활로 어렵사리 살아가던 북한 도시와 농촌의 무고한 민중들에게는 또다시 커다란 재앙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폐허 아래 지하 토굴마저도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주지 못하게 된 것이다. 전쟁이 끝나는 시점까지 생존은 모든 북한주민들의 최대 당면 과제가 되었다. 정전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은 양측 대표들은 공히 인도주의적 원칙을 내세우며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강력히 호소하고 있었지만, 협상기간 내내 폭격을 견뎌내야 했던 북한주민들에게 2년의 협상 기간은 그저 비인도적인, 생존을 위한 투쟁의 기간에 불과했다."(336)


12장 기계와 인간의 전쟁


"한국전쟁기 미공군 작전사를 다룬 기존의 연구들은 정전협상이 시작된 후 1년여의 기간(1951년 6월~52년 6월)을 철도차단작전의 시기로 정리한다. 실제 이 시기 북한지역 철도차단은 미공군의 가장 중요한 군사목표 중 하나였다. 38선 인근의 전선에서 싸우는 공산군은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식량과 무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여 전투를 수행하고 있었기에 열차는 가장 중요한 보급품 이동수단이었다." "북한이 화물과 여객 수송에서 (각각 90퍼센트와 62퍼센트를) 철도에 절대적으로 의지하게 된 역사적 배경에는 과거 일제의 대륙침략정책에 따른 대대적인 철도부설정책이 자리잡고 있었다." "일제는 철도건설에서 군사적 측면을 중요하게 고려하여 항만집중적이고 남북종단적 성격을 띤 철로를 건설했다. 물론 이 같은 특징은 일본의 전쟁수행뿐만 아니라 북한의 한국전쟁 수행과정에서도 주효하게 활용될 수 있는 것이었다."(339-40)


북한지도부는 말 그대로 철도 및 교량 복구사업에 전쟁의 사활을 걸었다. "1951년 8월부터 12월까지의 스트랭글작전과 1952년 3월부터 5월까지의 쌔처레이트작전으로 대표되는 미공군의 집중적 차단작전은 사실상 '기계와 인간의 전투'에 다름없었다. 전선이 고착되고 전투 자체가 1차대전기의 참호전처럼 치열하게 전개되는 상황 속에서 후방으로부터의 원활한 보급은 전쟁의 사활을 가르는 문제가 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유엔군은 일본과 남한의 후방지역으로부터 보충병력, 물자, 무기를 어려움 없이 공급받을 수 있었지만, 중국군과 북한군은 미공군의 북한지역 폭격으로 인해 후방에서 또다른 치열한 전투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후방의 북한주민들도 미공군의 폭격으로 인해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는데, 특히 야간 철도복구와 노무활동에 종사하기 위해 상당수가 밤낮을 바꿔 살아야 했다."(347)


13장 항공압력전략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북한지역 폭격피해에 대해 직접 보고했던 1952년 7월은 극동공군작전사에서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7월의 북한지역 공습은 기존의 차단작전과는 상이한 목적하에 수행되었다. 극동공군은 차단작전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기존의 폭격전략에 큰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소위 '항공압력전략'(air pressure strategy)이라는 전략개념이 이 시기부터 적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항공압력전략은 공군력에 가해진 기존의 정치적·군사적 제한요소를 해제시키고, 오히려 공군력을 '정치적 압력수단'으로 직접 활용하는 새로운 개념의 공군전략이었다."(359) "(랜돌프와 메이오는 '항공압력전략'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철도와 노반을 가장 낮은 수위에 배치했다. 동시에 중요 목표물 리스트를 새로 작성했는데, 그 첫번째는 "보급품"(supplies)이 제시되었고, "후방의 병력과 인력"(rear area troops and manpower)과 "도시와 마을의 건물들"이 주요 타깃으로 추가되었다."(361)


"극동공군은 항공압력전략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공산측 지도부와 주민들에게 심리적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첫번째 타깃으로서 북한지역의 수력발전소에 주목했다. 수풍·부전·장진·허천·부영·금강산 등의 수력발전소들은 일본 최고 기술자들이 20년 이상의 공사기간을 통해 수립한 당대 최고 수준의 시설들이었다. 이들은 한반도 전력의 90퍼센트 이상을 생산해냈다." "1952년부터 미공군 정보보고서들은 북한의 산업시설들이 전국적으로 분산된 지하시설을 통해 재건되고 있다는 분석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극동공군은 지하갱도를 따라 재건된 북한 산업시설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동시에 산업시설 직접 파괴가 아닌 동력원 파괴가 좀더 효율적인 작전으로 부상했다. 동력이 없는 암흑 속에서 북한의 생산시설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었다. 수력발전소의 파괴는 어느새 극동공군의 시급한 해결과제로 부상하고 있었다."(363-4)


"1950년대 미공군 역사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미 제24사단장 윌리엄 딘의 묘사를 인용했다. "공산군의 마을 보급품 집적소(supply dumps)와 '예전에 건물들이 존재했던 흔적만이 남아 있는 눈 덮인 공터'에 대한 딘 장군의 묘사는 이 같은 보급품(supply), 병력(personnel), 통신센터(communication centers) 파괴의 실질적 영향력을 잘 보여준다." 딘은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폭격피해의 대상을 그저 "소도시"(towns)와 "마을주민"(villagers)이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에 작성된 수많은 미 극동공군의 문서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전후 미공군은 여전히 북한의 도시와 농촌 폭격을 보급품 집적소, 병력, 통신센터에 대한 공격으로 묘사했다. 전쟁기에도 적극적으로 정당화되었던 미공군의 비인도적 군사작전에 대한 묘사가 전후 미군의 공식 역사에서 더욱 치밀하게 합리화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였다."(382-3)


맺음말 극단의 기억을 넘어 평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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