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부시대의 사회사 - 조선의 계급·의식·정치·경제구조
유승원 지음 / 역사비평사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머리말


"조선시대의 지배계급인 사대부계급은 '중소규모의 토지·노비 소유를 표준적인 경제적 토대로 하고, 자신들이 정치의 주체라는 자의식을 강하게 가진 지식계급'이었다." "사대부에 대한 기존의 이해가 가진 문제점을 살펴보면, 첫째, 사대부계급의 일차적인 특성에 대한 이해이다. 즉 물질적 기반과 지식-인문학적 교양 중 어느 것이 일차적인 특성이냐 하는 문제이다. 양자는 비중상의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것이지만 굳이 하나를 선택한다면 지식-인문학적 교양이 더 중요하다고 해야 한다. 지주가 아니어도 사대부로 대접받을 수 있지만 지식-인문학적 교양이 없으면 사대부로 대접받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둘째, 사대부의 경제적 기반에 대한 이해이다. 사대부의 표준이 중소지주라는 것은 반드시 중소지주의 수가 가장 많다는 산술적인 의미만은 아니다. 중소지주의 이해가 대지주의 이해보다 우선적으로 관철된다는 뜻이다. 이 점에서 부의 크기와 사회적 지위가 직결되었던 서구 중세의 영주계급과 명료히 대조된다."(7-8)


"셋째, 사대부의 시기별 역사적 역할에 대한 이해이다. 여말선초에는 사대부가 문벌사회에서 사대부사회로 역사를 한 단계 진전시키는 진보적 역할을 연출했다면, 사대부사회 해체기에 접어들기 시작한 조선 후기에는 사대부가 보수·반동적 역할을 연출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조선 후기 사대부의 모습으로 조선사회의 사대부계급을 평가하고 전체 조선시대상을 묘사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넷째, 사대부와 성리학의 관계이다." "문제는 사대부계급의 성향을 비롯한 조선사회의 여러 특징을 지나치게 성리학의 일방적인 영향의 결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딱 잘라서 말한다면 성리학이 조선사회를 만든 것이 아니라, 조선의 사대부가 조선시대 성리학의 사회적 성격을 결정하였다. 사회를 운영하는 데, 그리고 자신의 계급적 이해를 충족시키는 데 성리학을 적극 활용하였고, 마침내 조선 고유의 특징을 가진 '조선성리학'을 만들어 내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제까지의 설명은 주객이 전도되었던 셈이다."(8-9)


1부 조선시대에 대한 기존의 통념과 연구의 반성


"명치유신 이래 서구 배우기에 전력을 기울였던 일본은 그 과정에서 서구중심주의사관에 빠지게 되었다. 서구중심주의사관의 수용은 일본으로 하여금 서구에 대한 열등감을 갖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자신들도 서구와 마찬가지로 세계사의 단계적인 발전을 밟아나갔다는 것으로 자위했고, 그 점에서 일본은 아시아에서 예외적 존재라 주장하며 과거 문화적 선진국이었던 중국과 한국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려 하였다. 일본의 중세는 서구의 중세와 같은 '봉건사회'였다는 것이 일본사의 세계사적 발전 단계 이행론의 핵심적 논거였다. 이에 따라 한국사의 정체성론의 핵심적 논거도 한국의 '봉건사회결여론'에 두어졌으니 20세기 초 후쿠다 도쿠조는 당시의 한국사회의 수준을 일본의 고대에 해당하는 후지와라 시대─AD 894년 이후 약 3세기에 걸친─비정하기까지 하였다. 즉, 서구중심주의사관 자체가 서구가 비서구 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식민사관이라 할 수 있다."(27-8)


"자기 부정을 기반으로 하는 '(민족) 정체성론'에 맞서 등장한 '내재적 발전론'은 고대 노예제사회·중세 봉건제(농노제)사회·근대 자본주의사회라는 '사회구성체에 입각한 서구 삼구분이 시대구분법을 한국사에 적용하여, 민족 내부의 역량으로 우리의 역사가 단계적으로 발전해 왔음을 입증하려는 노력이다." "내재적 발전론의 핵심은 조선 후기 자생적 '근대화'의 가능성,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 맹아'를 입증하는 데 있다. 내재적 발전론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조선 후기의 농업생산력의 발전이나 상공업의 발달이 제시되고, 실학은 근대 사상의 여러 요소를 담고 있는 것으로 상정되었다." "그러나 점차 치명적인 문제점도 노출되었다. 조선 후기 농민층의 양극 분해나 '경영형 부농'의 존재 입증과 같은 실증상의 문제도 제기되었지만, 설사 자본주의 맹아가 인정된다 하더라도 왜 우리는 싹만 틔운 채 자본주의를 개화시키는 데는 실패했는가 하는 의문은 다시 제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32)


"1960~70년대까지의 개설서들은 조선사회의 신분제가 유례없이 엄격하고 폐쇄적임을 단호한 어조로 묘사하고 있었다." "이러한 통설은 시각뿐만 아니라 실증 면에서나 방법론 면에서도 치명적인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실증 면에서 신분간의 차등에 대한 설명은 사실에 반하거나 사실의 뒷받침을 받지 못하는 주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과거나 관직을 독점한다는 양반의 특권 주장이다. 둘째, 방법 면에서 신분과 계급이나 계층 같은 집단 범주 사이의 차이를 간과하고 모두를 같은 차원에서 다루는 결함을 갖고 있다. 계급으로 간주해야 할 양반을 신분으로 간주하는 것이 단적인 예이다. 그 때문에 조선시대에 나타난 모든 사회적인 구분이나 차별은 곧 신분적인 구분이나 차별로 간주하게 된다. 의미가 다른 '양인'과 '양민'을 구별하지 않고 사용한다든가, '평민'이나 '상인' 대신 아주 드물게 사용되던 '상민'을 조선시대 평민의 대표적 명칭으로 내세우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할 수 있다."(50-2)


"〈소수의 지배계급이 모든 사회적 특권을 사실상 독점한다〉는 명제 자체는 지극히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명제가 어느 시대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명제라는 데 있다. 고대든 중세든, 그리고 근대 이전이든 근대 이후이든 모든 시대에 적용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몰역사적인 인식을 초래하는 비역사적이 명제라는 점이다. 이 명제를 도식적으로 적용하게 되면 신라의 진골·고려의 문벌·조선의 양반의 동질성만이 부각되고 이질성은 사상捨象된다. 신라의 골품귀족과 함께 고려의 문벌은 물론 조선의 양반마저 거리낌 없이 귀족으로 지칭되고, 시대에 따른 지배계급 간의 차이나 지배계급을 교체시킨 사회적 변화, 역사발전의 흐름은 묻히고 마는 것이다." "〈민중의 지위와 생활의 실질적 향상〉으로 발전이나 개혁의 의의를 검증하려는 것도 적절한 평가 기준이라 할 수 없다. 문제는 이러한 발전이나 개혁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는 데 있다. 세계 어느 지역의 역사에서도 그러하다."(58-9)


2부 조선시대의 신분·계급구조


"조선시대의 신분은 양인과 천인 두 가지로 나뉘어 있었다. 천인에는 노비만 소속되었고 모든 비노비자非奴婢者는 양인으로 간주되었다." "양인에는 모든 비노비자가 포괄되었으므로 사대부·평민 할 것 없이 모두 양인 신분소유자였다. 통설에서 곧잘 백정白丁·무격巫覡·사당社堂·창기娼妓 등을 노비와 함께 천민 신분을 형성하는 부류로 설명했지만, 이들은 양·천 출신이 모두 섞여 있는 일종의 직업집단일 뿐 양인과 구분되는 독립된 신분 범주가 아니었다." "'사士'는 특정한 혈통이나 가문의 후예가 아니다. 사의 핵심이 되는 관원은 어디까지나 군주의 정치를 보필하기 위해 군주에 의해 인민 중에서 발탁된 자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인민은 원초적으로 대등한 위치에 서있으며, 그가 지닌 현능賢能으로 군주에게 발탁될 가능성을 지닌 자이다. 따라서 천인을 제외한 모든 인민 즉 양인에게는 자연히 동일한 신분적 자격과 권리·의무가 부여된다. (이하 '양인의 신분적 제일성齊一性'이라 지칭)"(69-70)


"천인은 본래 양인이었다가 천인으로 전락된 자로 상정되었다. 인민 중에 범죄로 말미암아 신민의 자격을 인정받지 못하게 된 자가 천인 즉 노비였다. 조선시대에 양인이 노비가 되는 대표적인 경우는 반역에 연루된 경우이다. 반역을 저지른 반국가사범 당자는 처형되지만 가족들이 연좌되어 노비가 되는 것이다." "노비 중에는 애당초 범죄와 무관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빈곤이나 부채로 인하여 노비가 된 자들이다. 그러나 위정자들은 그들을 원칙적으로 '압량위천壓良爲賤(양인을 억눌러서 천인으로 만듦)'의 희생자로 간주하며, 현실에 존재하는 노비 중의 비범죄자의 존재는 통상 체제 정당화를 위한 논리 체계에서 배제하였다. 모든 노비는 일단 범죄자(또는 그 후예)로 간주하였으며 그들에 대한 차별도 그것으로 정당화하였다. 노비에 관한 사항이 법전 가운데 형전에 실린 것도 그들이 죄인이라는 관념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노비는 '선량한 인민'인 '양인'과 구별되어 '천인'으로 불리게 되는 것이다."(71)


# 양천제론에 대한 비판적 주장 검토

1. 양천제는 노비제에 불과하다 → 양천제는 귀족과 같은 특권신분의 존재를 부인하고 노비 아닌 자를 하나로 묶어 보편적 권리·의무를 부여하는 제도이다.

2. 양천제는 국역동원체제에 불과하다 → 양천제는 의무체계가 아니라 권리체계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에도 양인의 사환권(관직진출권)은 보장되었다.

3. 양천제는 조선 초기라는 과도기의 신분제에 불과하다 → 이 주장의 논거는 조선 후기 양반이 '면역의 특권'을 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반의 군역 면제를 규정한 법령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한 번도 제정된 일이 없다.

4. 평민은 명목상의 부거권(과거응시권)만 가질 뿐이었으므로 양천제는 허구적인 제도에 불과하다 → 법적 권리를 원천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귀족사회)와 적어도 법적 권리를 인정하는 사회, 그래서 제한적이나마 권리의식 발휘가 가능한 사회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5. '법제적 신분'으로서의 양인·천인 이외에 양반·중인이라는 '사회적 신분'이 있었다. → 이른바 사회통념상의 '사회적 지위 내지 위신'을 가리키는 '사회적 신분'은 모호한 기준을 적용한 초시대적 구분이자, 양반을 하나의 신분으로 취급하는 기존의 통설을 답습하고 있다.


"조선시대 지배계급의 명칭으로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용어인 '양반'은 여말선초를 포함한 조선시대 전체의 지배계급의 명칭으로는 적절하지 않다. 반면 사대부라는 명칭은 몇 가지 이점을 갖고 있다. 조선 전 시기를 걸쳐 일관된 의미를 표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조선시대 지배계급의 성격을 잘 담아낼 수 있는 명칭이다. 즉 그 핵심 성원인 관원을 나타내는 동시에, 이 시대 지배계급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지식인·교양인의 의미를 잘 담고 있다. 비교사적 연구를 위한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편리한 용어이다. 중국사의 경우에도 사대부계급·사대부시대가 논의되므로 양 지역의 지배계급을 비교하는 데도 유용하다. '사대부'라는 명칭은 당대 지식인들에게도 '양반'보다 선호되었다.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은 관직이 없는 자도 '양반'이라 칭한다 하여 그 호칭을 지탄한 반면, 〈천하에 아름답고 좋은 것이 사대부라는 이름이다.〉(『택리지』. 「사민총론」)라고 말하였던 것이다."(118-9)


"조선 초기에는 16세기 이후처럼 '양반'이나 '사족'은 사대부계급의 집단적 호칭으로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양반'을 비롯하여 사대부·사류士流·사류士類·의관衣冠·진신搢紳 등이 거의 모두 관원을 가리켜 사용되었다." "16세기가 되면 양반과 사족은 관직의 유무와 관계없이 지배계급을 범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관직을 가지지 않은 자라도 양반이나 사족으로 지칭되는 사람이 많아지게 되었고, 관원의 부녀도 아예 '사족'이라 약칭되었다. 초기에 문무관원을 가리키던 양반과 사족은 다함께 사대부계급의 사람을 범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고 서로 혼용할 수 있는 동의어가 되었다. 양반이라는 사회계급이 확립되어 양반과 양반 아닌 자의 구분이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자 사회적 호칭 전반에 변화가 일어났다. 관직이 없는 자를 가리키는 서인은 일반 사람을 가리키거나 서얼을 가리키게 되었다. 보통 사람을 가리키는 '상인常人'도 의미가 바뀌어 양반 아닌 자를 범칭하는 용어로 종종 쓰이게 되었다."(131)


"16세기 이후에는 사대부로서의 자격을 관직의 관직의 취득 여부보다는 학식이나 덕망의 여부로 판정하려 하였다. 이러한 변화를 선도한 것은 사림파였다. 성종 대에 대두한 사림파는 재야사족, 특히 재지사족의 정서와 이해를 대변하는 성리학 근본주의자이자 보수적 개혁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대대적인 정치적 물갈이를 시도하는 한편, 도덕성이나 품행을 위주로 한 평가 기준을 확립하려 애썼다. 관직의 고하나 유무 외에 도덕과 품행이라는 별도의 기준이 중시됨으로써 정계에 진출하지 못한 대다수의 재야사족들도 자신들이 치자 계급에 속하는 자임을 당당히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어차피 모든 사족이 관직을 차지할 수 없는 이상, 앞으로 무수히 배출된 관인의 자손들이 관직 없이도 자신의 존재이유와 긍지를 느끼고 살아갈 수 있는 어떤 방안을 마련해야 했는데, 사림파가 이러한 방안까지도 분명하게 제공한 셈이었다. 결국 사림파는 재야사족의 정치적 선도자이자 계급 이데올로기의 주창자였다."(132)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평민계급의 대표 명칭으로는 여러 동의어 가운데 '평민'이 단연 좋다. 그 다음은 '평인'이다. '상인'·'상민'은 대표 명칭으로서 각기 문제가 있다. '평민'은 문자 그대로 '보통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상인'은 평민계급의 사람을 가리켜서도 곧잘 사용되었지만 '양반'(또는 '사족')과 대조되는 일체의 사람을 통칭해서도 사용되어 상인 안에는 평민말고도 서얼에서 공사천에 이르는 일체의 비양반자가 포함될 수 있었다. '상민'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극히 드물게밖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양인'·'양민'은 평민과 동의어가 아닌 이의어라서 애당초 적합하지 않다. 양인은 본래 일체의 비노비자를 가리키는 법제적 용어로서 평민 이외의 사람들도 포함하므로 적절치 않다." "'양민'은 주로 평민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사회적 범주를 가리키는 용어라기보다는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 할 '선량한 인민'임을 강조하는 문맥에서 잘 사용되는 용어여서 계급의 명칭으로는 적절하지 않다."(139-41)


"조선시대 평민 가운데에는 적극적으로 사로의 진출을 모색하는 자들이 많았으며 그중에 사환에 성공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평민의 가장 대종이 되는 사환로는 조선 전기에는 직업군사, 조선 후기에는 무과라 할 수 있다." "16세기 평민의 주된 입사로는 직업군사인 갑사·별시위였다. 갑사·별시위는 당시의 평민에게 아주 매력 있는 자리가 될 수 있었다. 과거나 이서를 통한 사환보다 손쉬웠을 뿐 아니라, 복무 후 '무예武藝' 취재를 거쳐 만호나 첨절제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호나 첨절제사는 군직軍職이 아닌 정식 무관으로서 확실한 양반의 반열에 오르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갑사·별사위와 같은 직업군사를 없애는 대신, 복무 중의 군사에게 군직을 수여하거나 무관으로 발탁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한꺼번에 많은 합격자를 뽑아 흔히 '만과萬科'라 불리었던 조선 후기의 무과에는 많은 수의 평민이 합격하고 있었다. 그들은 '출신出身'이라 자처했고 조정에서는 사대부로 대우했다."(155-7)


"종래의 4신분론에서는 양반-중인-상민과 함께 최하 신분으로 천민을 내세웠다. 천민을 구성하는 집단으로는 노비와 함께 광대·사당·창기·무격 등을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신분집단이 아니라 양·천이 모두 포함된 직업집단일 뿐이었다. 그들은 천민 '신분'이 아닐 뿐 아니라, 노비와 함께 천민이라는 '계급'을 구성하지도 않았다. 첫째, 그들은 계급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회관계를 토대로 성립한 집단도 아니고 공통의 사회적 역할도 없다. 각기 직업이나 존재 양태가 매우 이질적이어서 그들 사이에 같은 계급이라는 정체성이나 연대감이 있을 수 없었다. 둘째, 조선시대에 그들을 노비와 함께 포괄하여 다른 계급이나 부류와 대조하는 사회적 구분 자체가 없었다. 동시대의 사람들이 그들의 직업을 미천하게 보기는 했지만, 그들을 노비와 같은 위치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결국 조선시대의 최하 계급은 노비로만 구성된 단일한 계급으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160-1)


"노비는 사대부와 지배-피지배, 착취-피착취의 대립관계를 가지지만 보호-피보호, 부양-피부양의 의존관계도 가지고 있다. 노비계급의 주류는 사노비였다. 조선시대의 계급구조는 평민과 노비가 피지배계급을 형성한 상태에서 사대부-평민, 사대부-노비라는 두 관계가 병립하고 있는 형태이다. 평민이 국가의 기본 토대였다면 노비는 사대부의 기본 토대였고, 평민의 일부인 소작농이 사대부의 부차적 토대였다면 노비의 일부인 공노비가 국가의 부차적 토대였다." "범죄인이라는 노비 차별의 정당화 논리는 공노비에게나 해당되지 사노비에게는 거의 해당되지 않았다. 더구나 자자손손 노비의 신분을 계승하게 하는 것은 죄를 줄 때 처자는 연루시키지 않는다는 '죄인불노'의 유교 정신에도 위배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대부들은 노비제를 유지하는 명분으로 노-주관계가 상하·존비라는 사회질서를 지탱하는 바탕이며(『인조실록』 4년 11월 22일) 노비제로 말미암아 조선이 예의의 나라가 되었다고 강변했다."(166-7)


# 조선시대 노비와 노예·농노와의 차이점

1. 매매 : 노비의 매매는 노예와 달리 비교적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정부는 토지보다 노비의 매매에 더 까다롭게 대처하여 공증과 증빙을 요구했다. 노비와 주인이 복종과 배려라는 상호 의리로 결합되어 있다는 인식은 매매를 억제하는 윤리적 조건이었다.

2. 재산권 : 노비의 재산은 법으로 보호되었다. 노비는 자신의 재산을 매매·상속·증여·양도할 수 있었고, 국가로부터 그 사실을 공증받을 수 있었다. 주인이 부당하게 노비의 재산권을 침탈할 가능성이 상존했지만 노비도 주인과 법적 다툼을 벌일 수 있었다.

3. 인권 : 노비는 생명과 신체에 대한 제3자의 침해로부터 양인과 똑같이 국가의 보호를 받았다. 비록 주인의 사형권私刑權이 인정되었지만, 주인에게 생사여탈권을 내맡긴 노예와 같은 처지는 아니었다. 노비는 자신의 배우자나 동거자를 선택할 수 있었다. 

4. 인격 : 노비도 다른 사회 구성원과 마찬가지로 하늘이 내린 인민('천민天民')이요, 나라의 인민('국민國民')으로 지칭되었다. 노비도 법률행위의 주체로서, 주인이 아니라면 그 누구라도 고소·고발할 수 있었다. 재산 문제라면 주인과 권익을 다툴 수 있었다.


"노비는 엄연히 공동체의 한 구성원이었다. 올랜도 패터슨이 노예상태는 자유의 부재라기보다는 '사회적 죽음'이라 한 것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 점에서도 노비는 노예와 달랐다." "조선사회의 노비는 다른 공동체원과 분리된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적어도 평민과 어울려 살 수 있었다는 점도 노예와 달랐다." "조선시대의 노비는 세계사에서 노예도 농노도 아닌, 예속인의 독특한 한 유형을 보여준다. 첫째, 매매의 공인이라는 노예의 특성을 가지면서도 물성보다 인성이 월등히 강하였다. 다음으로 같은 노비라도 자유인에 가까운 존재로부터 노예에 가까운 존재에 이르기까지 존재 양태의 편차가 아주 크다는 것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외부에서 공급되지 않고 공동체 내부에서 충당되면서도 인구 구성의 수적 비중이 크다는 점에서도 아주 독특한 모습을 보인다. 조선시대 노비의 이러한 특징은 궁극적으로 두터운 층으로 이루어진 사대부계급의 존재 양태에 대응하여 이루어진 것이다."(184-5)


"단순하게 사회적 위계상의 등급으로만 본다면 전문인·서얼·향리는 그보다 상위계층인 양반과 그보다 하위계층인 평민 사이에 위치하는 중간계층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만, 등급적 계층으로서의 사회적 이동성을 갖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누대적으로 종사하는 국가 전문직이라는 가업, 서자라는 특수한 혈통상의 조건, 향역이라는 세습적인 특수 신역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전문인·서얼·향리를 '중간계층'이 아닌 '중간계급'으로 취급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 사회관계를 토대로 성립한 집단도 아니고 그들 사이에 공통된 사회적 역할도 없기 때문이다. 각 집단의 속성이 너무 이질적이며 그들 사이에 동일한 계급이라는 계급 정체성이나 연대감도 없다. 더구나 그들이 한 무리로 묶여 인식된 시기는 후기라는 조선시대의 한 시기에 불과하다는 점도 문제가 된다. 조선 전시기에 존재한 사대부·평민·노비계급과 나란히 하나의 계급을 구성하는 것으로 파악하기에는 시기적인 불균형이 크기 때문이다."(186-7)


"양반계급 이전에도 문지에 대한 의식은 있었고, 중간계층으로 파악할 수 있는 부류들도 존재했다. 그러나 양반계급 성립 이전과 이후는 중간계층의 성격이나 양상이 크게 달랐다. 조선 초기에도 중앙의 이서나 직업군사는 그 사회적 위계가 표준적인 사대부와 평민 사이에 위치하는 중간계층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특별히 중간계층으로 분류해서 인식하지 않았다." "'중인中人'이나 '중서中庶'와 같이 중간계층을 가리키는 용어는 조선 후기에 비로소 나타났다. 어느 시기에도 중간계층은 있기 마련인데 유독 조선 후기의 사람들이 중간계층에 주목하게 된 것은 후기에 와서 사회적 위계에 대한 사회적 감수성이 높아진 탓이다. 그 배경으로는 대자적 계급으로서의 양반계급의 확립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문자의 우열로 반·상을 가리고 문지로 위세를 떨치는 양반계급의 행태가 노골화되자, 문지와 같은 사회적 위계를 중시하는 의식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까지 파급된 것이다."(189)


# 중간집단별 특성

1. 전문인 : 양인 내의 독립된 신분집단이었던 서얼·향리와 달리 성취적 지위였으므로 적어도 전기까지는 다양한 성분의 사람들이 진출하였다. 16세기 말부터 전문업을 가업으로 하는 가계가 형성되면서 성취적 지위에서 귀속적 지위로 변모한다.

2. 서얼 : 집단성원 사이의 지위의 분화가 매우 크다. 사족의 길을 꿈꾸거나, 문·무과에 진출하려는 상층 지향적인 이들과 상업이나 전문직, 직업군사·서리로 진출하는 현실 수용적인 이들이 있었다. 조선 후기에 차별과 신분적 세습성이 완화되었다.

3. 향리 : 고려 이래로 향역을 세습해왔으며 조선에서도 정부의 특별 취급을 받았다. 한 지역에 대대로 정착해온 토착민으로서 지방 군현에서 권력과 지위가 자못 높았다. 이에 따라 수령과 지방사족·향리 사이에는 제휴와 견제의 관계가 작동했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계급적 특성은 그들이 지닌 계급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회에 계급은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계급의 소속은 개개인의 능력과 성취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고, 계급 간 사회이동의 장벽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대부는 양인들 사이에 신분이 나누어져서는 안 되지만 계급은 나누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주장한 '사'와 '농·공·상'의 구분은 어디까지나 계급적 구분일 뿐 신분적 구분과는 무관하였다. 사·농·공·상이라는 생업은 자손에게 세전되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당대에 생업의 전환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을 엄격히 구분하면서도, 지배신분과 피지배신분을 나누거나 사회이동의 법제적 장벽을 세우려 하지 않은 것은 근대 이전의 지배계급 가운데 사대부가 보여준 중요한 계급적 특성이다." "그러나 사대부는 하자 없는 양인의 사회이동 기회만 제도적으로 열어 놓았을 뿐 실제적으로 그 기회를 활용할 수 있는 여건의 조성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209-13)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지배하는 수단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뛰어난 혈통-가문의 위세이고, 둘째 커다란 부이며, 셋째 강력한 물리적 강제력이다." "그런데 사대부계급은 다른 시대, 다른 지역의 지배계급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 세 가지 요건 모두가 미약했다." "사대부에게 지배계급으로서의 기반이 미약하게 나타나는 것은 기본적으로 다른 시대, 다른 지역의 지배계급에 비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수적 비중이 훨씬 큰 데서 유래한다. 사대부의 수적 비중이 높은 까닭은 항상 새로운 가문이 두각을 나타내게 되는 유동적인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관원이 되는 데 성공한 집안은 물론 생원·진사 정도를 배출한 가문의 후예라도 당당히 사대부를 자처하는 까닭에 자칭·타칭의 사대부는 막대한 수에 이르게 된다. 사대부는 지배계급으로서의 개별적 기반이 미약한 반면 지배계급의 수는 방대한 편이어서 다른 시대, 다른 지역의 지배계급과는 다른 지배방식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213-5)


# 사대부계급의 지배방식

1. 간접적 지배 : 국가·군주라는 통일 권력 또는 국가의 위임을 받은 지방관을 매개로 피지배계급을 다스린다. 그렇다고 국가·군주가 무턱대고 사대부의 역성을 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법치'가 지배의 기본 방식이 된다.

2. 비물리적 지배 : 이념적으로 위민정치나 덕치를 표방한다. 학식·덕성 같은 지적·인격적 우위를 앞세우고 예절·의리 같은 덕목을 강조하여 복종과 순응을 유도한다. 과거제와 같은 공개경쟁 제도의 성공도 한 요인이었다.

3. 집단적 지배 : 15세기 후반 이후 정치의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의식하고 재지사족의 이해를 대변하는 사림파가 등장한 이후에 사대부계급의 집단적 지배가 본 궤도에 올라섰다. 향촌사회의 핵심 지배기제였다.

4. 분할 지배 : 피지배계급을 공통의 이해관계나 동질감을 느끼기 어려운 양·천 두 개의 신분으로 분할·지배했다. 기본적으로 천인에게는 지배계급을 봉양하는 역할을, 양인에게는 국가를 지탱하는 역할을 나누어 맡겼다.


3부 조선시대의 의식구조: 이데올로기


"사대부들이 신봉하는 유교 이데올로기의 초석을 놓은 사람은 맹자였다. 맹자에게 왕도王道란 참다운 왕이 행할 법도로서, 왕도정치란 인정仁政이요, 인정을 토대로 인민의 교화를 이루는 정치이다. 맹자가 말하는 인정이나 왕도정치란 인민의 불행을 좌시하지 않고 근본적이고도 적극적으로 민생의 기반을 마련하는 정치이다. 그 전제가 되는 것은 민본주의 내지 위민사상이다." "인정이란 무엇인가. 맹자는 확실한 정의를 내렸다. 〈남(의 불행)을 차마 보고만 있지 않는 마음(不忍人之心)을 가지고 남(의 불행)을 차마 보고만 있지 않는 정치(不忍人之政)를 행〉하는 것이 인정이라는 것이다. 맹자에게 차마 할 수 없다는 것은 인민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것과 같은 차마 가해하지 못하는 소극적인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불행에 빠진 인민을 팔을 걷어붙이고 구제하는 적극적인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군주가 된 자의 참된 임무라는 것이다. 맹자의 왕도정치론은 여기서 그 빛을 발한다."(238-9, 242)


"백가쟁명이 벌어지던 당시 '농가農家'는 천하의 정의를 세우려는 자들은 남에게 기생하여 살려 하지 말고 자신이 직접 농사에 종사하여 먹고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맹자는 사회적 분업의 논리를 이용하여 농가의 주장을 반박했다. 농민이 공장工匠에게 자신이 생산한 곡식을 주고 그로부터 밥을 지어먹을 그릇이나 농사짓는 도구를 사오는 것은 농민이나 공장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라는 것이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농민이 정치까지 담당한다면 농사에 방해가 되고 정치인이 농사까지 지으면 정치하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맹자는 농민이 안심하고 정치를 맡길 수 있는 '치인자治人者'의 자격요건을 갖춘 자를 '사士'라 상정했다. 사는 기본 생활을 보장할 만한 일정한 자산(恒産)이 없어도 오륜을 지킬 수 있는 변치 않는 마음(恒心)을 지닌 자를 가리킨다. 따라서 사가 정치의 주체가 되고 농과 같은 인민들은 객체가 되어, 사는 인민을 다스리고 인민은 사를 먹여 살리는 것이 천하에 통용되는 대의라는 것이다."(246-8)


"'사'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맹자의 논의는 성리학에서 그대로 수용되었다. 다만 성리학에서는 치인자에 관련한 새로운 논의가 추가되었다. 바로 '현능'이라는 치인자 자질의 형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논의이다. 성리학에서는 맹자의 성선설을 따르면서, 성선의 근거를 이理를 부여받은 데서 찾음으로써 인성에 대한 구체적인 형이상학적 설명을 전개했다." "이러한 설명에 내포되어 있는 이데올로기의 핵심은 무엇일까. 사람은 똑같이 인의예지라는 '이'(본연지성)를 받고 태어나지만 사람이 탄생할 때 맑고 깨끗한 '기'를 받았는지, 무겁고 탁한 기를 받았는지 등의 차이(기질의 성)에 따라 인의예지를 발현하는 정도에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게 된다. 이 논리는 사람들 사이에 태어날 때부터의 자질에 따라 군자와 소인, 치자와 피치자가 어느 정도 구분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덕성과 재능에서 불평등한 존재라는 논리로 현실의 계급적 구분을 어느 정도 정당화는 기능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255-7)


"그러나 주의할 것은 성리학이 출생에 의한 신분을 결코 정당화하거나 절대시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기질의 성'은 사람이 태어날 때 부여되는 기의 우연적인 상태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지,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혈통에 따른 차이나 유전적인 차이를 부정하는 것이다." "태어날 때의 인간의 차이란 기질의 성에 비롯된 것이어서 본연의 성을 잘 발현시키면 기질의 성의 제약을 벗어날 수 있다. 따라서 범상한 사람이라도 잘 수양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수한 기질의 성을 가져도 수양을 게을리 하면 성인이 될 수 없다. 〈성인도 배워서 이르러야 할 것이다〉라고 하여 성리학은 후천적인 성취를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능력주의 원칙에 입각한 사대부사회에서 성리학이 유행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또한 이와 같이 치인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모든 양인에게 열어두고 있었기 때문에 사대부 지배의 정당성은 더욱 합리화되고 공고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257-8)


"세습군주제를 정당화하는 맹자의 논리는 성리학에 그대로 계승되었지만, 성리학에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군신 사이의 규범이 부자 사이의 규범과 대등함을 강조하고 이를 인간 사이의 윤리라는 차원이 아니라 우주적 진리의 차원인 '천리天理'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사대부는 군주가 정치를 잘못한다거나 자신들을 잘 대해주지 않는다 하여 군주와 정면으로 대립할 수 없었다. 군주가 왕도정치를 수행하지 않아도 군주를 폐할 수 없고 간언諫言하거나 군주를 떠나는 것(去君)으로 그쳐야 한다는 기존의 자세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이것은 바로 자신들을 조정에 발탁할 구심점이며 피지배계급에 대한 간접적 지배의 실행자로서 군주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사대부계급의 이해가 적나라하게 반영된 것이다. 자신들의 정치적 소극성을 정당화해주는 것이 바로 군신의 의리는 천리라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최선의 방안은 훌륭한 군주를 만들기 위해 군주를 끊임없이 계도하는 것이었다."(258-9)


# 조선시대 사대부계급의 왕도정치론

1. 수기주의修己主義 : 선정을 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치인자의 수양이 선행되어야 한다(공자의 무위이치無爲而治).

2. 민생주의民生主義 : 민생 기반의 확충을 위한 제도·정책 마련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맹자의 유위이치有爲而治).


"조선시대 공론이 지니는 결정적인 한계는 그것이 사회전체의 여론을 반영한 것이라기보다는 주로 사대부계급의 여론을 반영했다는 점이다. 공론의 참여 범위가 재야의 사대부까지 확대되었지만, 도리어 사대부의 계급적 이해를 한층 강하게 반영할 여지를 남겼다. 이를테면 조선 후기에 이르러 가난한 사대부들이 대량 배출된 상황에서 재야의 사대부들이 공론의 이름으로 반상의 명분을 내세우며 평민들과 다른 대접을 줄기차게 요구한 것이 그것이다. 사대부계급 내에서도 공론의 일치를 보기 어렵다는 것도 뚜렷한 한계다. 16세기 이후 성리학 근본주의 풍조가 사상계를 지배하게 되자 사대부계급은 저마다 자신이 속한 붕당의 당론을 공론이라 주장하기 십상이었다. 상대 붕당 인사에 대한 끊임없는 비난과 고발이 일어나고 정쟁이 유발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대부계급 양산의 여파로 사대부 사이의 경쟁과 반목은 심화되고 성리학 근본주의는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286-7)


4부 조선시대의 정치구조


"조선시대의 군주는 명분상·형식상 전제권을 가졌다. 이는 고려시대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국가조직 자체가 군주로 하여금 국가의 주요 행정기관을 직접 통할할 수 있도록 짜여 있었다는 점에서 고려시대와 차이가 있었다. 조선의 군주는 재상을 거치지 않고 직접 국정을 챙기기 용이하도록 편성되었던 것이다. 물론 군주가 모든 국가기관을 일일이 통할할 수는 없다. 자문-심의기관이나 언론-감찰기구 및 예우기관들은 그 수가 많지 않으므로 군주와 직접 연결될 수 있었다. 이와 달리 행정기관은 그 수가 아주 많았다. 그래서 채택된 방식은 군주가 행정의 중추기관인 이·호·예·병·형·공의 6조를 직접 통할하고, 여타의 기관은 6조로 하여금 통할하도록 하는 군주-육조-속아문 방식이었다. 대부분의 중앙기관은 6조 어느 하나의 속아문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와서 승정원과 같은 비서기구가 독립하여 존재하기 되고 그 기능도 대폭 강화된 것은 크게 늘어난 군주의 과중한 업무를 돕기 위해서였다."(298-9)


"중앙집권체제의 두 번째 요소는 군주의 일원적 지방통치이다. 다시 말하면 조선시대에는 지방분권이 인정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방분권이 법제적으로 인정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중앙권력에 도전할 만한 지방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군현의 행정은 철저히 중앙의 지시에 따라 중앙에서 파견된 관원에 의해 이루어졌다." "군주-관찰사-수령으로 이어지는 일사불란한 체계가 마련된 것이다. 도의 장관으로 파견된 관찰사는 지방세력으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임기를 1년으로 제한하였다. 군사지휘관으로는 2년 임기의 전임의 병마절도사(=병사兵使)와 수군절도사(=수사水使)가 파견되었다. 그러나 민정 담당의 관찰사로 하여금 해당 도의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를 예겸例兼하게 하여 전임의 병사·수사를 견제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문반 우위의 원칙을 살렸다. 도 아래의 부·대도호부·주·도호부·군·현에는 5년 임기의 수령이 파견되어 민정과 군정을 함께 담당했다."(301-2)


"6조를 중심으로 국가업무가 수행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의 일이었다. 첫째, 고려의 6부는 상서성에 소속되어 있었던 반면, 조선의 6조는 다른 기관에 부속되지 않는 독립 기관이었다. 둘째, 고려시대에는 6부의 장관인 상서尙書가 정3품으로 재상 축에 끼지 못했으나, 조선시대 6조의 판서는 재상에 해당하는 정2품으로 승격되어 있었다. 셋째, 고려시대의 중앙행정기관들이 6부와 비교적 독립적으로 운영된 데 반해, 조선시대에는 모든 중앙행정기관들이 6조의 속아문으로 규정되고 6조의 직접적인 통할을 받았던 것 등이다." "각조를 살펴보면, 이조는 문반의 인사와 공훈자에 대한 예우가 주 업무였고, 호조는 호구관리와 재정·세무를 관장하였다. 예조는 외교·의례 및 시험·교육을 담당하였고, 병조는 무반의 인사와 국방·경비 업무를, 형조는 사법과 노비 업무를, 그리고 공조는 공역工役이나 물자의 생산·관리를 맡았다. 6조는 그 휘하에 각조의 업무와 연계되거나 특화 업무를 취급하는 속아문들을 두고 통할하였다."(320-1)


"비행정기관은 행정기관에 비해 숫자가 아주 적지만 위상이나 기능은 자못 컸다. 재상으로 구성된 조선시대 최고의 기관인 의정부는 기본적으로 심의·자문기관에 해당한다." "대간으로 불리는 사헌부·사간원이 바로 언론-검찰기관이었다. 사헌부는 백관의 규찰을 담당하는 반면 사간원은 군주에 대한 간쟁을 맡도록 되어있다." "대간과 함께 삼사三司로 칭해졌던 홍문관은 본래 학문 진흥과 인재 양성을 위해 세워진 집현전의 후신으로서 경연經筵을 주관하는 것을 주된 임무로 삼고 있었다. 홍문관이 언론기관이 된 것은 경연이 단순히 군신이 경사를 함께 공부하는 곳에 그치지 않고 시정을 논하는 장소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군주에 대한 보고·건의·청원 등은 원칙적으로 모두 승정원을 경유하게 되어 있었다. 승정원은 이를 기계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선별하는 권능까지 행사하여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승정원은 군주의 자문에 응하고 중요한 사안에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했다."(322-3)


"천명의 수임자라는 조선 군주의 위상에는 한 가지 껄끄러운 부분이 있었다. 조선의 군주는 중국의 황제로부터 분봉分封을 받은 제후諸候라는 또 다른 위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책봉冊封체제하에 놓여 있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비단 관료들만이 아니라 때로는 군주 역시 사대관계 즉 중국의 황제와 조선의 군주 사이의 책봉체제를 중국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단순한 외교상의 양보를 넘어서, 군신상호관계로서 성의를 다해서 그 의리를 지켜야 할 것으로 주장하기 일쑤였다." "책봉과 천명 사이의 괴리를 메울 방도가 하나 있었다. 바로 조선은 중국의 '번국藩國' 즉 울타리 나라라는 논리였다. 울타리는 집안과 집밖을 나누는 경계선이다. 집안임을 강조할 수도 있고 집밖임을 강조할 수도 있다. 중국과의 문화적 동질성을 주장할 때는 조선은 중국과 같은 천하의 영역에 소속되고, 핏줄을 논할 때는 중국과 다른 외국이 된다. 조선의 군주는 조선 역내에서는 천명을 받은 유일한 주권자였다."(335-7)


"국교인 성리학은 군주의 자의적 국정운영을 막을 수 있는 중요한 억제력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군주의 결정에 대한 반대나 관원 탄핵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바로 위민·민본정치의 배치 여부였다. 군주를 위해서 인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을 위해 군주가 존재한다는 민본 이념은 관념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정운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군주도 국교에 충실하고 국익을 추구하며 국법을 따라야 한다는 논리는 기본적으로 군주와 국가의 구분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인민은 존귀하고 사직은 다음이며 군주는 가볍다는 맹자 식의 사고는 조선시대 위정자들에게 철저히 각인되어 있었다." "제한군주적인 면모를 거론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법치주의 원칙에 따른 법의 운용이다. 군주의 자의적인 권력행사를 제어하는 근본적인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법치주의를 소박하게 〈미리 제정된 법에 의거하여 국가가 통치한다는 원칙〉이라 규정한다면 조선시대의 법치주의 원칙은 확고부동했다고 할 수 있다."(340-1)


5부 조선시대의 경제구조


"조선사회의 소유제는 기본적으로 오늘날처럼 사유재산제를 기초로 하고 있었다. 왕토사상이 하나의 이념으로 존재했고 실제의 토지정책에도 영향을 미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왕토사상은 군주의 토지소유권이나 토지국유제와는 거의 관계가 없었다. 왕토사상의 존재 의의는 어디까지나 토지 공공성의 강조에 있었다." "토지국유론자들도 조선시대에 토지가 매매되고 상속되고 있었던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들은 〈하늘 아래 모두 왕의 토지가 아닌 것이 없다〉라는 관념적 표방이 당시의 국법이었던 것으로 상정하고, 현실에서 나타난 매매·상속의 사유 행태는 법을 벗어난 불법적인 행위로 간주하였다. 왕토사상이 토지국유제와 직접 관련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충분히 해명되어 있다. 왕토나 공전으로 지칭된 땅의 상당수는 엄연히 사유지로 존재했다. 자유롭게 매매·상속되고 있었고 공증제도까지 운용하며 국가가 법으로 보장하고 있었으니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다."(382-3)


"그렇다면 왕토사상의 존재 의의는 무엇일까. 왕토사상은 군주나 위정자가 지향하는 이념이 아니라, 개혁사상가들이 자신들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활용 도구였다. 농민에게 토지를 고루 나누어 주고자 할 때 국가의 모든 토지가 왕토임을 내세움으로써 사유지 타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정전제를 중시하는 민생주의 왕도정치론은 왕도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밑으로부터의 혁명을 추구하지 않는 이상, 개혁사상가는 토지개혁의 주체를 군주 또는 국가에 설정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군주를 개혁의 주체로 설정하고 군주의 권력을 빌어서야 토지개혁을 정당화하고 그 실현을 기대할 수 있었다." "한 가지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될 사항은 소유권과 공공성은 반드시 배치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소유권의 보호 그 자체도 공공성을 가질 수 있다. 농지에 대한 사유권 보호는 일차적으로 지주인 지배계급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자작 농민의 토지소유권도 보호하기 때문이다."(386-7)


"왕토사상이 내포한 토지의 공공성은 특히 비농지 정책에서 명료히 드러난다. 농지에는 사유권을 철저히 보장한 반면 비농지는 개인의 사유를 허락하지 않고 만인에게 개방하여 누구나 이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비농지란 농지 외에 자연의 자원을 채취하거나 농림수산물을 산출할 수 있는 모든 공간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산림천택山林川澤'이라 통칭되었다. 여기에는 산지·황무지·개펄 등 토지만이 아니라 내·못·강·해안까지도 포괄되었다. 국가는 산림천택에 대한 사유권을 일체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산림천택은 굳이 소유자를 따지자면 국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가 직접 사용하는 곳 외에는 원칙적으로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방된 공간이었으므로 국가의 소유지라기보다는 무주지 또는 국가가 관리·처분권을 갖고 있는 토지라고 말할 수 있다." "산림천택의 사적 이용을 허락하는 경우는 농지로 개간하는 경우가 해당된다. 비농지는 개간한 사람에게 국가가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고 그 소유권을 내주었다."(392-3)


"조선시대에 국가가 자유로운 산림천택 이용권을 억제한 대표적인 부문은 광물 채취의 경우였다. 종래 민간의 광물 채취 금지는 국가의 광업 독점경영과 상공업의 억압책과 관련되었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유의할 점이 있다. 하나는 다른 자연물의 채취처럼 광물 역시 몇몇 종류를 빼고는 원칙적으로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었다고 보이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광물 채취의 금지가 상공업의 억압책과 직접 연관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사적인 채굴을 막고 국가가 독점적으로 이용하려 한 대표적 광물은 금·은·옥과 같은 보물이었다." "같은 광물이라도 철이나 구리의 경우는 보물과 달랐다. 정도전은 금·은·주옥과 달리 철이나 구리는 생활용구나 농기구로 쓰인다는 점을 강조하여 철 생산지에서 민정을 동원해서 철을 생산하면서도 민간의 제련에 과세하지 않았던 고려의 정책을 지지한 바 있다. 조선시대에도 철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하되 민간의 제련에 대해서는 수세하였다."(396-7)


"토지소유권의 일정한 제한, 즉 간혹 농지의 소유권을 실질적 이용과 결부시키는 조선시대의 관행을 사회적 미발달과 연결시키는 사고방식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러한 인식은 다분히 서구중심적 선입견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 "조선시대 농지에 대한 소유권 정책은 〈정당한 소유라면 적극적으로 보호한다〉로 간추릴 수 있다. '정당한 소유'란 무엇인가. 농지 취득의 적법성이 전제 조건이 된다. 매매나 상속, 그리고 무주지의 개간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했다. 소유를 위한 소유, 공공성에 위배되는 소유가 아닐 것이 요구되었다. 소유의 목적에 합당한 소유 즉 이용을 위한 소유가 그것이다. 이용은 반드시 직접 경작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대부는 수기치인에 전념하기 위해 경작에는 타인의 노동력을 비는 것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소유 자체를 위해 소유하는 것을 넘어서 이용하지 않으면서도 타인의 농지에 대한 접근을 방해하여 '진지리'를 구현하지 못하게 하는 행위는 용납하지 않았다."(405-6)


# 진지리盡地利 : 땅이 제공하는 이익을 모두 거두자는 정책 목표


"조선시대의 재정 운영 원칙은 오늘날과 크게 다르다. 조선시대 국가재정 운영의 대원칙은 절검의 원칙과 고정의 원칙이다. 절약과 검소에 최대 역점을 두는 것이다. '손상익하損上益下'와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사납다(苛政猛於虎)'의 정신에서 온다. 왕도정치를 부르짖는 정부가 과중한 수취로 민생을 파탄시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과중한 수취를 막기 위해서 관원들은 군주의 절검을 부단히 강조했다. 군주 스스로도 자신의 사유재산을 포기하거나 공납물을 감축하는 등 솔선수범을 보여주는 사례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절검의 원칙은 재정을 고정불변하게 유지하자는 두 번째 원칙으로 이어졌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가 늘 재정 부족을 느끼는 것이 항례이다. 재정을 고정시키는 것은 바로 수취나 소비를 억제하여 절검의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수취할 양을 고정시켜 놓고 수입의 한도 내에서만 지출한다는 '양입위출量入爲出'의 원칙은 바로 재정 고정의 원칙에서 파생된 원칙이다."(412-3)


# 손상익하損上益下 : 윗사람에게 해를 끼쳐서 나온 것으로 아랫사람에게 이롭게 함


# 부세의 종류(조租·용庸·조調)

1. 조세 : 농지에 부과되는 세금(조租 또는 전조田租), 수조권收租權자가 경작자에게 받은 '조' 중의 일부를 내는 세금(세稅 또는 전세田稅)을 합친 것

2. 공납 : 지역 단위로 왕에게 봉헌하는 토산물(공물), 각 도의 지방관들(관찰사와 병·수사)이 개인 자격으로 왕에게 봉헌하는 물품인 진상을 합친 것

3. 요역 : 관아·성곽 구축과 도로 건설 같은 공공시설 축조, 관원들을 영접하고 환송하는 '영송迎送'과 뒷바라지하는 '지대支待'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

4. 잡세 : 농업 이외의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부과되는 부세


6부 종합과 전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이정철 지음 / 역사비평사 / 201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롤로그


"종래 적지 않은 대동법 관련 연구들은 이 법의 상업적 효과에 관심을 집중했다. 즉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형성이라는 맥락에서 대동법을 검토한 것이다. 조선 후기에 상업이 발전했고, 그것이 이전 시기와 대비되는 사회 변화의 중요한 측면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 그런 경향은 대동법과 관계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또 하나의 분명한 사실은 대동법을 기획하고 추진했던 사람들이 당시 조선의 상업을 발전시키려고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대동법 자체는 국가재정과 민생 안정, 국가 운영의 관점에서 논의되고 집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상인과 관련된 내용은 여러 조건 가운데 하나로 검토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대동법을 상업의 범주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적절하지 않다. 이 책에서 주목하는 것은 대동법 실시에 따른 결과보다는 오히려 그 원인과 추진 과정이다. 다시 말해 사회적·정치적으로 대동법과 같은 거대한 재정개혁을 필요로 했고, 또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요소들이 무엇이었는가에 주목했다."(24-5)


제1부 대동법의 계보


"조선 초기의 조租·용庸·조調 체제는 왕조의 지속과 함께 천천히 변했다. 가장 핵심적 현상은 정부 수입에서 전조가 차지하는 비중이 차츰 줄고, 공물(진상)이 차지하는 비율이 늘어난 것이다. 장기간의 변화였기에 그 현상이 금방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추세는 명백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원인들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지주들의 지속적 저항이었다. 양반이 곧 지주는 아니었지만 지주들이 속한 가장 큰 사회계층은 역시 조선의 지배층인 양반이었다. 그들의 저항은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초래했다. 균등과세를 위한 장치를 갖춘 쪽에서의 정부수입이 줄고, 그렇지 못한 쪽에서의 수입이 늘어났던 것이다. 이는 정부의 수취가 전체적으로 균등과세의 원칙에서 이탈해갔던 것을 뜻한다. 바로 이것이 공물변통貢物變通, 즉 공물 수취의 방식을 개혁해야 한다는 문제제기의 배경이다. 그 목소리는 16세기 초부터 등장했지만, 그 문제가 집중적이고 폭발적으로 나타났던 것은 임진왜란 때부터이다."(42-3)


1장 관행이 변하기 시작하다


"조선 초 공물의 분정分定, 즉 각 고을에 공물을 얼마나 부과할 것인가에 관한 규정은 불확실했다. 점차 요역이 그러했듯이 공물도 역민식役民式으로 규정되어 8결 단위로 순환조발循環調發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각관에 공물이 부과될 때마다 8결 단위로, 그 안에서 차례로 돌아가면서 거두어졌다." "공정한 수취라면 8결씩 나뉜 단위 토지 안에서 고르게 돌아가며 공물이 부과되어야 했다. 각관에 공물이 부과될 때마다 토지 소유자의 위세와 무관하게 8결을 단위로 하여 순서대로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우선 세력 있는 측의 비호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의 토지는 공물의 부과 대상에서 빠졌다. 누락된 공물의 몫은 다른 사람들 소유의 전결에 더해졌다. 그뿐 아니라 공물의 부과 대상이 되는 전결 안에서조차 그 부담이 고르게 나눠지지 않았다. 권세가의 토지에는 공물 부담이 면제되거나, 적게 부과되었다. 역시 그들이 부담해야 할 공물은 8결 안의 다른 토지에 전가되었다."(46-8)


"각관에 공물의 분정이 고르게 되려면 반드시 각관의 전결 규모에 비례해야 한다. 전결 규모야말로 각관이 공물을 부담할 수 있는 능력의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앙에서 공물을 부과할 때 각 고을 전결 규모의 상대적 차이는 별로 고려되지 않았다. 고을의 크기에 관계없이, 공물이 부과되었던 것이다. 당연히 작은 고을이 큰 고을에 비해 단위전결당 부담이 무거워지고, 윤회의 횟수도 늘어났다." "이후원은 인조 말에서 효종대(1649~1659)에 활약한 고위 재정관료였다. 그에 따르면, 인조 말년쯤에는 공물가를 '별도로 거두는 곳'이 거의 없었다. 대신, 각 고을이 1년에 바치는 전체 공물가를 〈아울러(井)〉 마련하고, 그것을 '대동'이라고 한다고 설명했다. 이 말은, 개별 공물을 특정한 8결에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총 공물가를 고을 전체의 전결에 분할헤서 함께 거둔다는 뜻이다. 여기서 '대동'은 이전까지의 윤회분정을 대체하는 개념이다. 대동이라는 말 자체가 공물의 수취 방식이라는 측면이 있다."(49-50)


"공물작미貢物作米, 즉 공물을 현물이 아닌 그 값에 해당하는 미·포로 바꾸어 내는 것은 이미 조선 전기의 어느 시점부터 일반화된 일이었다. 공물작미의 진정한 사회적 의미는 글자 그대로의 뜻이 아니다. 그 의미는 중앙정부가 현물이 아닌 미·포를 공물 수취 수단의 최종적 형태로 인정한다는 결정을 뜻한다. 중앙정부의 이런 결정에는 중요한 함의가 있다. 이런 결정 자체가 공물 수취 과정에서 자행된 점퇴點退를 불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미 공물의 납부 방식이 현물납이 아니었기에, 점퇴는 그것의 최초 설립 취지인 공물로서 적합한가에 대한 품질 검사 과정이 아니라, 공물을 받는 측이 높은 방납가를 실현하기 위한 빌미였을 뿐이다. 점퇴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는 정부가 미·포를 공물 수취 수단의 최종 형태로 인정하고, 그것을 법으로 규정해야 했다. 즉 '작미作米'를 공물로 받아들이는 물품의 종류와 질이 단일화되면 점퇴의 근거 자체가 사라질 수밖에 없다."(55)


# 점퇴點退 : 각관이 납부한 공물에 대해 경각사가 그 품질을 검사해서 퇴자를 놓고 받지 않는 것


2장 대동법의 원형이 만들어지다


"삼도대동법三道大同法 논의는 인조 즉위 직후 시작되어, 이 법을 제안했던 이원익이 법의 폐지를 요청하면서 인조 3년 2월 7일 종결되었다. 만 2년이 채 안 되는 기간이다. 하지만 삼도대동법은 본격적이며 전국적인 곡물변통의 첫 경험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로 길게 이어지는 대동법 논의의 진정한 출발점이었다." "인조는 대동법의 취지에 원칙적으로 동의하면서도, 그 법이 흉년에 제대로 작동하여 효과를 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확신을 갖지 못했다. 바로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조익이다." "조익은 대동법이 정당할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실시 가능한 정책임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는 당시 경작지의 평균 곡물 생산량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대동법을 실시해도 전결에 부과되는 전조田租·대동미大同米·삼수미三手米의 총액은 소출의 1/10에 미치지 못했다. 이것은 대동법이 백성들의 담세 능력 범위 안에 있음을 뜻했다. 또 그는 각종 반론을 다섯 가지로 정리해서 하나하나 반박했다."(63, 73-4)


# 대동법에 반대하는 주장에 대한 조익의 반론

1. 일시에 결당 8두를 거두면 백성들이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 여러 번 거두면 그때마다 발생하는 부대비용 때문에 결과적으로 더 많은 양을 내야 한다.

2. 부자들은 내야 할 쌀이 많아서 일시에 내기 어렵다. → 가난하고 일손 없는 사람들도 감당할 수 있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3. 방납의 폐단은 오래된 것이어서 갑자기 꺾을 수 없다. → 궁핍한 백성들과 국가재정을 고려하면 호세가와 방납자들의 사욕을 제어하는 것이 마땅하다.

4. 쌀을 한 곳에 쌓아놓으면 화재 위험이 있다. → 쌀창고는 집들과 달리 붙어 있지 않아 오히려 화재 위험이 적으며, 진짜 걱정은 그런 축적이 없는 것이다.

5. 서울까지 쌀을 운반할 때 배가 침몰할 우려가 있다. → 기강을 세우고, 과적을 금지하고, 겨울 전에는 태안 이북의, 봄에는 태안 이남의 곡식을 운반한다.


"경대동 또는 반대동半大同이란 각 고을이 경각사에 내는 공물만 미·포로 거두고, 각관 자체의 수요는 이전의 방식대로 수취하는 것을 뜻한다. 이 당시에 경대동으로 백성들로부터 걷기로 한 양은 매해 결당 9두였다. 경대동 안은 얼핏 보면 설득력이 있었다. 흉년에 공·역가 전부를 한 번에 걷거나, 서울까지 먼 거리를 옮기는 것은 백성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이 되었다. 삼도대동청이 말했듯이, 민결民結에 부과되는 역 중에서 가장 무거운 것은 공물이었고, 현상적으로 공납의 폐단은 방납으로 나타났다. 경대동을 통해 경각사의 방납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대부분의 백성들이 혜택을 입으리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공납 폐단을 다양한 차원의 불균등 문제로 보면, 그것의 본질은 방납으로 볼 때와는 크게 달라진다. 다시 말해, 불균등의 틀로 보면 공납의 폐단은 일부 방납인들만의 문제가 아닌, 사회 전체의 구조적인 문제였다. 이때 경대동은 전혀 공납 폐단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없다."(89-90)


# 방납防納 : 조선 시대 상인이나 아전이 농민으로부터 대가를 받고 공물을 대신 납부해 주는 것. 관리와 결탁한 상인들은 공물을 납부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이익을 챙기기 위해 백성들이 정상적으로 납부할 수 있는 것마저 막아 가며 방납의 대가를 터무니없이 비싸게 징수하였다.


"삼도대동청이 경대동의 내용을 보완해나갔던 것과는 별도로, 경대동에 대한 부정적 여론도 빠르게 확산되었다. 사주인, 지방 큰 고을들의 호강층, 경각사의 하급 실무 담당 직원, 각관 수령 들 중에는 대동법에 호의적인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치명적이었던 것은 경대동의 실패로 대동법 자체에 대한 정책 신뢰성이 크게 손상되었다는 점이다." "조익이 말했듯이 대동법에 대한 지역의 여론은 지역 호강들의 세력에 달린 것이었다. 가난한 백성들과 작은 고을들은 원래의 대동법 규정대로라면 가장 큰 이익을 볼 수 있는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대동법을 중앙에서 정한 규정대로 엄격히 집행했을 때만 가능했다. 삼도대동법이 경대동으로 혼란스럽게 진행될 때, 가난한 백성들과 작은 고을들은 오히려 기존의 납부액에 경대동 몫의 첩징이나 가징이 덧붙여진 것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들의 생각은 토호들과 큰 고을들에 의해서 가려지고 왜곡되는 경우가 많았다."(97-8)


# 사주인私主人 : 중앙의 각사에 소속되어 외방 각 고을의 공리貢吏나 번상番上 군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세공물을 일시 보관하며 그것의 방납을 맡아 하던 특수 상인


"인조 원년 가을에 실시된 대동법은 시행 초기부터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게다가 법 시행과 동시에 극심한 흉년까지 겹쳤다. 흉년으로 인해 조선 조정은 중국에서 곡물을 수입해야만 했다. 극심한 흉년은 공물가의 가을 수취분인 결당 쌀 8두의 수취를 어렵게 했다. 그러자 정부는 8두 중에서 서울에서의 수요를 위한 몫으로 절반만 거두고, 각관의 수요는 종전의 관행을 따르도록 했다. 가뭄과 그로 인한 쌀값 상승 때문에 백성들에게 시혜적으로 내려진 조치였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 처음부터 대동법을 혼란으로 몰아간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삼도대동법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실로 강력했다. 탐관오리, 호강품관 등이 이들 세력의 중심이었다. 인조 초 삼도대동법을 좌초시키는 데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했던 세력은 지방의 호강품관들이었다." "대동법의 불편함에 대한 여론이 확산되고, 중앙정부의 정책적 확신이 약해지자, 삼도대동법은 인조 원년 가을부터 인조 2년 가을까지만 유지되고 단명하고 말았다."(106-7)


"그러나 정책 실패의 진정한 원인은 대동법을 추진했던 세력의 주체적 측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 시기 대동법 실패의 원인으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양입위출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점이다. 양입위출量入爲出이란 백성들로부터 미리 정해진 몫만큼만 거두고, 어떤 일이 있어도 거둔 것 안에서 지출하는 것을 뜻한다. 다른 하나는 이 법의 추진 주체가 형성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정책담당자들은 경대동과 대동법의 정책적 함의의 차이를 명백히 이해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경대동으로는 양입위출을 핵심으로 하는 대동법을 성립시킬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결국 삼도대동청의 실패는 경대동의 실패였다. 이렇듯 정책담당자들이 공납 문제를 철저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흉년에 대처하면서 정책적으로 양보해도 좋을 내용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지 못했다. 이 당시에는 사실상 대동법의 추진 주체라고 할 수 있는 집단이 존재하지 않았다."(108)


3장 두 가지 공물변통 방법론이 성장하다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 사이 10년간, 조정에서 공물변통과 대동법에 관련된 논의는 두 가지 경로로 제기되었다. 하나는 임진왜란과 그 후의 계속된 혼란으로 빚어진 양안과 공안의 손상·왜곡을 원상태로 회복시키자는 주장이다. 양안과 공안의 왜곡은 조정이 전쟁 물자를 긴급하게 마련하는 과정에서 지역별 전결의 분포를 무시하고 공물을 부과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또 하나의 경로는 정묘호란 후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군사적 긴장이 한층 더 높아지자, 군비 마련 방법 중 하나로 공물변통을 검토한 것이다." "병자호란에서 비록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기는 했지만, 조선은 그 후 군비를 마련해야 하는 상황에서 벗어났다. 이것은 공물변통을 둘러싸고 상충했던 한쪽 힘이 사라진 것을 뜻함과 동시에 본격적인 공물변통 논의가 시작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었음을 의미했다. 그에 따라 조정에서는 공물변통을 위한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이때 조성된 논의는 결국 효종대의 호서대동법으로 귀결된다."(113-4)


# 양안量案 : 일종의 토지대장, 공안貢案 : 공물의 세입 장부, 어공御供 : 조선시대 왕과 왕실 구성원에게 의식주 관련 물건을 바치는 일 또는 그 물건, 제향祭享 : 나라에서 지내는 각종 제사 의식


"호조 판서 김기종에 따르면, 민역民役을 고르게 하면서도 국가수입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양전量田뿐이었다. 지역별로 전품田品을 고르게 하려면, 전품이 낮게 평가된 지역의 토지 등급을 끌어올리거나, 높게 평가된 지역의 토지 등급을 낮추어야 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조정은 후자의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전자의 방법은 백성들에게 더 많은 전세와 공물 부담을 지우는 것을 뜻했기에 민의 불만과 소요을 불러올 것이 불 보듯 확실했기 때문이다. 후자의 방법을 쓰면 자연히 국가수입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민의 저항과 국가수입 저하를 모두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기존 결수의 등급 인하에 따라 줄어드는 전결수를 양전을 통해 새로 보충하는 방법뿐이었다. 양전을 하면 신기결新起結(새로 개간된 땅)과 은결隱結(숨겨져 있는 땅)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땅으로 줄어드는 총 전결수를 그전처럼 유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인조 12년 말에서 13년 초에 걸쳐 삼남에서 양전이 실시되었다."(119)


"병자호란 이전 공물변통 논의의 두 가지 맥락은 상충했다. 하나는 백성들의 역 부담을 줄이고 균등히 하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백성들에게서 재원을 마련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련되기 어려웠다. 병자호란 후에 조정에서 공물변통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기까지는 또다시 시간이 걸렸다." "병자호란 직후 조정의 공물변통 논의에는 세 가지 입장이 있었다. 첫째는 어떠한 공물변통에도 반대하는 입장이고, 둘째는 대동법을 실시하자는 입장이며, 셋째는 절용을 위주로 공안을 개정하자는 입장이었다. 첫째 입장은 병자호란 이후의 국내외적 불확실성에 기초한 것으로, 인조 자신의 생각이자 조정의 공식적 입장이었다. 둘째 입장은 지지자들이 꾸준히 늘면서, 인조 22년 이후에는 가장 이상적인 공물변통책으로 받아들여졌다. 셋째는 공물변통에 대한 조선의 전통적인 입장으로서, 여전히 다수 논자들의 견해를 대표했다. 군자 마련을 위한 주장은 그 급박한 필요가 사라지자, 논의 의제에서 자취를 감추었다."(136-8)


"청은 병자호란 후 조선에 세공歲貢(매년 바쳐야 하는 조공물)을 요구했다. 경제적 측면에서 보자면, 정묘호란도 청이 명나라와의 전쟁으로 발생한 자신들의 경제적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 일으킨 것이었다. 당시 청나라는 명나라와의 무역이 중단되어 생필품 부족에 시달렸다. 여기에 더해 당시 만주 지역을 강타한 기근 때문에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자 명나라를 대신하여 물자를 공급해줄 수 있는 대안으로써 조선이 지니는 경제적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었다." "인조 21, 22년에는 전염병으로, 23년에는 극심한 가뭄으로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때 사간원 헌납에 재직하던 조익의 아들 조복양이 국정 전반에 걸친 문제점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 현실 상황은 미봉책이 아닌, 근본적 대책을 요구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의 상소를 계기로 재생청이 만들어졌고, 이 재생청의 경험이 몇 년 후 대동법 성립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145-9)


"인조 23년 9월에 성립된 재생청 활동의 이론적 틀은 이이의 공물변통론이었다. 이이의 공물변통론은 재생청 성립 이전까지 수없이 등장했던 여러 공물변통론들의 원형이었다. 지방재정을 배제한 경대동의 실시, 사주인의 배제와 관에 의한 직접적 공물 운송 및 경각사 납부, 공물가 인하의 세 가지가 그 이론의 핵심이다. 그런데 재생청은 임시기관이었으므로, 그 경험을 국가정책의 수준에서 일반화시킬 것이 요청되었다. 재생청의 정책 결과가 대단히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에 대한 요청이 있었던 것이다. 또 흉년으로 인해 각 고을로부터 공물 수취가 어렵게 되자, 일시적으로 호조가 각 고을 대신 경각사에 공물가를 지급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앙정부 차원의 진휼 실시와 공물 운용이 서로 접근했다. 공물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가 강화되었고, 진휼을 위한 기구가 선혜청 안에 흡수되어 상설화되었다. 이 모두가 대동법 실시라는 종착점에 이르는 각각의 이정표와 같은 의미를 가졌다."(167-8)


제2부 대동법의 정치


4장 효종 시대: 드디어 대동법이 성립되다


"효종 원년, 청나라 사신이 거듭해서 조선에 파견되었다. 이 때문에 산림 인사들과 김상헌을 포함한 대청 강경론자들이 조정에서 일제히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동법의 실시와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 사이에는 미묘한 관계가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대동법에 대해서 소극적이거나 반대에 가까운 의견을 표명했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청나라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대청 강경론자들의 대부분은 당시 조선에서 재정개혁보다 정치개혁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각론보다는 총론에, 실무보다는 원칙에 충실했던 사람들이 국내적으로는 정치개혁을, 대외적으로는 대청 강경론의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아마도 이는 그런 입장을 취했던 사람들의 개인적 삶의 경험과 학문적 경향성이 초래한 불가피한 결과였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효종 초 조선과 청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그들 중 다수가 조정을 떠나야 했던 상황은 호서대동법의 성립에 의미 있는 영향을 주었다."(180-3)


"호서대동법 성립 과정에서 김육의 역할은 이 법의 반대자들로부터 정치적으로 대동법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원두표는 이 당시 몇 남지 않은 인조반정의 정사공신靖社功臣이었다. 그런 원두표와 역시 정사공신이자 호서대동법의 실무 책임자인 이시방의 관계는 매우 좋지 않았다." "이시방이 호서대동법 추진 과정에서 중추적 역할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김육의 정치적 보호 때문에 가능했다. 당시 대동법을 실시하자는 주장은 김육만 했던 것이 아니고, 조정에서의 호서대동법 논의도 그가 홀로 이끌어낸 것은 아니다. 나아가 대동법에 대한 이해에서도 김육이 가장 정통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호서대동법 실시가 결정된 후, 조정에서 그 진행을 정치적으로 보호했던 것은 김육 혼자의 힘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홍욱은 본래 공안개정론자였지만, 대동법을 실시할 수 있는 정치적 환경이 조성되자 흔들리지 않는 대동법 지지자로 바뀌었다. 그가 충청 감사에 임명된 것도 김육이 힘쓴 결과였다."(200-5)


"효종 7년 8월, 전남 우수사가 수군을 조련하는 과정에서 큰 사고가 발생했다. 금성·영암·무장·함평·강진·부안·진도 등 고을의 전선 13척과 병선·협선 등이 침몰 또는 파손되었고, 죽은 수졸이 1,000명이 넘었다. 호남에서 연속적으로 대동법 실시를 요구하는 상소가 도달하고 큰 사고까지 겹치자, 김육은 호남에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다시 한 번 요청했다. 대동법의 원래 이름이 선혜법宣惠法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동법은 국가가 실질적으로 백성을 위로할 수 있는 법이었기 때문이다." "효종 9년 9월, 향년 79세를 일기로 사망한 김육이 마지막으로 한 일은 호남의 대동법 실시를 위해 적절한 인물을 감사로 보내는 것이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호남대동법이 중단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런 이유로 김육은 서필원을 호남 감사로 임명하도록 왕에게 간곡히 요청했다. 마침내 효종 9년(1658) 말에 호남 연해 27개 고을의 대동법이 마련되고, 추등秋等의 대동미로 결당 7두를 걷는다는 결정이 내려졌다."(217, 223-4)


5장 현종 시대: 대동법이 튼튼히 뿌리내리다


"현종대(1659~1674)는 효종대로부터 공물변통의 의제들을 넘겨받았다. 그렇다고 현종대의 논의와 대동법 실시 과정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일례로, 조정에서 호남 산군 대동법을 실시하기로 결정된 것이 두 번이나 번복되었다가 세 번째 시도에서야 성공할 수 있었다. 더구나 현종대는 즉위년부터 연속해서 큰 흉년이 이어졌고, 현종 11년(1670)과 12년에는 그 유명한 '경신대기근'을 겪었다. 그 사이에도 전염병과 우역牛疫이 끊이지 않았다. 흉년에는 각종 개혁정책이 미뤄지는 것이 조선의 관행이었다." "조정의 상황인식이나 의도와는 무관하게, 호남 산군의 대동법이 폐지되자 곧바로 방납이 되살아났다. 현종 7년 후반 전라도 암행어사 신명규는, 조정에서 전라도대동법을 폐지하자는 의견이 나왔을 때의 상황과는 반대의 소식을 전해왔다. 즉 큰 고을의 잘 사는 집들은 대동법을 혁파한 것을 편리하게 여기지만, 작은 고을의 가난한 집들은 모두 이 법을 다시 시행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235, 244)


"며칠 후 좌의정 홍명하는 호남 산군에서 당초 대동법을 혁파하기를 원했던 곳은 서너 개 고을에 지나지 않았고, 나머지는 이 법의 혁파를 원하지 않았었다고 말했다." "그뿐 아니라 인정人情이나 점퇴는 대동법을 실시할 때는 없었는데, 지금은 되살아났다고 말했다. 어쩔 수 없이 조정은 호남 산군지역에서 대동법을 다시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현종 7년에 충청도와 전라도 전체에 대동법이 실시되었다. 호남 산군의 대동법 성립 과정을 살펴보면 공물변통에는 전결에 기초한 작미·작포의 방식, 즉 대동법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것을 거부할 경우 그에 상응하는 현실의 폐단들이 지체 없이 되살아났다. 또 대동법과 임토작공을 어중간하게 섞는 방식은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도 명백해졌다. 이처럼 일시적으로 대동법이 폐지되어도, 그에 따른 폐단이 곧 나타났기 때문에 대동법 실시 요구는 끊임없이 되살아날 수밖에 없었다. 공납 문제의 제도적 해법은 대동법이 유일했던 것이다."(245-6)


# 임토작공任土作貢 : 각 고을에서 비치는 공물은 산지를 따라야 하며, 현물로 납부해야 한다는 원칙, 인정人情 :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뇌물과 수수료를 합한 개념


"경기선혜법(1608)은 선조 36년(1603)의 양전을 기초로 했다. 경기선혜법이나 그것이 기초한 양안은 이미 60년이 지난 것이어서 현종대에 이르러 정비가 불가피했다. 경기 각관의 관수는 공식적으로 크게 축소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첩징과 가징을 통해 과도하게 늘어난 상태였다." "각관의 자체 수요를 위해 백성들로부터 과외로 추가 징수한 항목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추가로 거두는 공물은 대부분 국가적으로 중요시되는 어공·진상·칙수 같은 것들이었다. 또 광해군에서 효종 때까지 경기는 특히 다른 도보다 외교·군사적 측면에서 무거운 부담을 지고 있었다. 수도를 둘러싸고 있는 지리적 환경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호서대동법이 성립된 직후부터 경기선혜법의 재정립을 위한 양전 요구가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현종 4년 경기 양전이 완결되었고, 그 결과 정부는 효종 말에 비해서 세 배 가까운 실결을 확보했다. 이것을 기초로, 다음 해에 경기선혜법은 호서대동법의 틀에 맞춰 재정립되었다."(279-80)


"대동법이 도별로 실시됨에 따라 마지막으로 제기된 문제는 불균등한 도별 결당 공물가를 균일하게 맞추는 것이었다. 대동법의 근본 취지가 균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도별 공물가 차이를 균일화하는 것은 공물변통의 긴 여정에서 마지막 작업에 해당했다. 결당 12두로 조정된 최초의 도는 경기였다. 조정에서의 논의 과정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경기에서 결당 12두로 공물가가 정해지는 과정은 비교적 순탄했다. 우선 기존보다 공물가를 더 걷는 것이 아니라 줄이는 것이기 때문에 현지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 또 새로 양전을 해서 종전보다 세 배 가까운 실결을 확보했기 때문에 결당 수취액을 줄여서 받아도 재정이 줄어들지 않으리라고 예측되었다." "호남 연해 각관의 공물가는 처음에 결당 13두로 정해졌지만, 현종 초반에 매년 흉년이 들었고, 중앙정부는 그때마다 공물가를 결당 2, 3두씩 줄여서 받았다. 마침내 현종 7년 봄 호남 연해 각관의 공물가는 전보다 결당 1두가 줄어든 12두로 정해졌다."(273-4)


"경신대기근(1670~1671)은 말 그대로 재앙이었다. 다른 지역이라고 이 재앙에서 무사했던 것은 아니지만, 특히 호서지역은 대동법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곤란을 겪었다. 그에 따라 이 지역의 결당 공물가를 올려야 할 필요가 절실해졌다. 호서는 다른 곳보다 결당 공물가가 낮아, 여기서 공물가를 지급받는 경각사는 다른 경각사에서 경비를 계속 빌려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정의 정책 논의 과정이나 여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원칙에 비춰보면, 호서의 결당 공물가를 올리는 것은 쉽지 않았어야 했다. 경기나 호남처럼 공물가를 낮추는 것도 아니고, 새로 양전을 해서 과세 대상인 실결이 증가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서의 공물가 인상은 실제로 전혀 소란스럽거나 어렵지 않게 시행되었다. 대동법 실시로 공물가가 법 실시 이전에 비해 대략 1/5~1/6 정도로 줄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대동법은 경기와 양호에 실시되고, 그 수취액까지 결당 12두로 맞춰졌다."(275-6)


제3부 대동법의 해부


6장 대동법은 어떻게 운영되었는가


"대동법의 실행 규정을 담고 있는 것이 대동절목大同節目 또는 대동사목大同事目이다. 종래에는 대동미를 막연히 상공常貢과 별공別貢으로 나누거나, 서울로 올려 보내는 몫인 상납분과 지방 각관에 남겨두기로 한 몫인 각관 유치분으로 나누어 세부 항목들을 설명했다. 대동미를 선혜청이 주관하는 상납미와 영營·읍邑이 주관하는 유치미의 틀로 나누는 것은 대동미를 누가 운용하는가에 따른 분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대동미 분류 방식은 이제까지의 논지와 거리가 있다. 특히 상공과 별공의 분류 방식은 대동법의 기본 의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상공이든 별공이든, 이것은 모두 중앙의 수요를 중심으로 한 이해이기 때문이다. 이런 분류 방식에 따른다면, 대동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각관의 수요를 이전의 현물공납제처럼 계속 국가재정체계의 밖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대동법의 큰 의의 중 하나는 각관 수요를 국가재정의 틀 안으로 통합시켰다는 점이다."(288-9)


"대동사목에 따르면, 백성들에게 걷은 대동미(포)는 크게 세 부분─중앙 경각사로 올라가는 것, 각관의 관수로 쓰이는 것, 예비비인 여미餘米─으로 나뉘어 처리된다. 여미는 불시에 일어나는 수요를 대비하는 데 쓰였다. 흉년이 들어 민에게 그 해의 대동미 납부를 면제해줄 때, 선혜청은 미리 비축한 여미로 경각사에 지급하게 했다." "17세기 중반에 적법하지는 않지만 각관에서 예비비 역할을 했던 것은 은결隱結이다. 은결이 수령의 사적 치부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각관에서 공적 경비의 예비비로 쓰였던 것을 조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중앙정부가 재정 및 민생과 직결된 문제를 계속 비공식적이고 변칙적 영역에 방치할 수는 없었다. 이 당시 은결은 연이은 전쟁 때문에 줄어들었던 전결이 전후에 회복되는 과정 중 양안의 등재에서 조직적으로 이탈되어 발생했다. 이것은 중앙정부가 전정田政을 정상적으로 운영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대동법 실시와 더불어 각종 은결의 정리 역시 불가피했다."(293-5)


"조선시대 공물 수취에서 현물납이 언제 대부분 사라졌는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그 시기를 아무리 늦춰 잡아도 임진왜란 이전에 현물납은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이런 환경에서는 현물납으로 인한 방납의 폐단을 없애는 것이 불가능했다. 사주인을 거치지 않고는 각관이 공물로 바칠 현물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방납 금지의 법령은 오히려 민이 부담해야 할 방납가를 인상시킬 뿐이었다. 민은 공·역가로 대개 미·포만을 납부하고, 대부분의 공물은 사주인을 통해 시장에서 구매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경각사 입장에서도 자신들에게 필요한 많은 종류의 물품들을 자체적으로 구매 조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더구나 경각사의 운영에는 많은 운영비와 노동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정부는 그것들을 지급하지 않았다. 이런 운영비와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도 역시 사주인이었다. 따라서 병자호란 이후가 되면 사주인에 대한 인식은 비판의 대상에서 현실적으로 긍정할 수밖에 없는 대상으로 전환되었다."(321)


"대동법은 기존 현물납의 극심한 폐단을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위험의 재발을 영구히 종식시킨 법은 아니었다. 민에게서 수취하는 모든 공물과 노동력 동원이 대동법 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부 공물과 노동력 동원은 대동법 이전처럼 호역戶役으로 조달되었다. 또 모든 물품들이 공물주인을 통해 서울에서 마련된 것도 아니다. 일부는 여전히 각관이 직접 납부 책임을 졌다. 그에 따라 크게 줄어들기는 했지만 방납의 위험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말하자면 대동법은 중앙정부가 늘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관리해야만 했던 법이다." "대동사목의 근본 취지는 단순히 공물 조달에 따른 폐단의 방지나 안정적인 공물 확보가 아니라, 공물의 수취를 어떻게 공정하게 민결 위에 정립시킬 것인가에 있었다." "대동법은 종래에 대가 없이 수취하던 각종 항목들을 대동미로 흡수함으로써, 이 항목들에 대한 중앙정부 차원의 관리 근거와 기준을 마련했다."(327)


7장 조선시대 경세론의 핵심을 대동법에서 보다


"17세기의 여러 변통론이 기반하고 있는 공통의 문제 틀을 제시한 것은 이이李珥였다. 17세기의 공물변통론들은 이이가 제시한 해법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제기된 것들이다." "유형원은 국내외 요인들로 인한 오랫동안의 국정 혼란을 끝낼 수 있는 제도개혁의 기초를 토지에서 찾았다. 이 당시 수많은 관료와 지식인들이 작성한 시무책의 제1조를 장식했던 내용은 '군주의 바르게 다스리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유형원이 제도개혁의 기초를 토지에 둔 것은 이 시기 지식인과 관료들의 움직일 수 없는 국가 통치의 제1원리를 상대화한 것이었다. 이것은 곧 유형원이 자기가 살던 사회의 대다수 지식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상식을 넘어, 그 사회 자체의 존립 근거를 예리하고 파악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이것은 또한 기존의 익숙한 주류적 담론이 만들어놓은 준거 틀을 넘어선 것이었으며, 유형원이 생각하는 개혁의 대상이 단순히 제도 운영에서 발생하는 부수적 폐단들이 아닌, 제도 그 자체였음을 의미한다."(332-3)


"유형원은 공물의 부과 기준을 명확히 설명했다. 국가재정의 재건을 둘러싸고 대동법과 함께 제기된 대안들 중 하나는 호구 정비와 호패법의 실시였다. 유형원은 여기에 단호히 반대했다. 그는 인정人丁과 호구戶口를 토지의 종속변수로 생각했다." "유형원이 인정과 호로 수취제도의 기초를 삼은 것을 비판한 현실적인 이유는 당시 만연해 있는 인징과 족징 때문이었다. 인징·족징은 수많은 유망과 피역층避役層을 양산해냈으며, 이 시기 조선에서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였다. 조租·용庸·조調 제도에서도 토지가 없는 사람에게는 전조田租가 부과되지 않았다. 전조의 부과 대상이 토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용과 조를 피할 수는 없었다. 이 두 가지는 인정과 호에 부과되었기 때문이다." "유형원은 인징·족징을 일으킨 제도적 원인이 인정을 기초로 운영되는 부세제도 자체에 있음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사회제도 자체의 뿌리에서 사회의 핵심적인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그에 따른 해법을 추적했던 것이다."(335-7)


"현물의 작미·작포를 공식적으로 입법화하는 데 가장 큰 장애는 임토작공의 원칙이었다. 이 원칙은 공물에 대한 당시의 상식적 믿음이었다." "대부분의 현물 공물들은 납부 과정에서 각 읍, 각 도, 경사京司를 거치다보니, 그 품질이 일정하게 유지되기 어려웠다. 각 단계마다 공물의 품질을 확인하는 담당 관리가 그 품질에 일부러 트집을 잡지 않는다 해도, 장기간의 이동은 공물의 품질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공물이 전달되는 각 단계마다 다음 단계의 점퇴에 대비하기 위해서 원래 부과된 양보다 훨씬 많은 공물을 준비해야 했다. 공물의 품질을 유지해야 하는 문제와 여러 단계를 계속 거쳐 상급기관으로 올라가면서 점퇴에 대비해야 하는 문제는 서로 결합하여 백성에 대한 첩징과 가징을 심화시켰다. 이것은 공물 수취를 담당하는 관리가 탐욕스럽고 부패했는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그리고 임토작공의 법규정 아래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제도적 문제였다."(340-1)


"공물의 작미·작포를 반대하는 가장 중요한 논거는 임토작공이 천자에 대한 제후의 봉헌奉獻이므로 시장에서 사서 바칠 수 없다는 것이다. 임토작공은 경제적 논리가 아니었다. 본질적으로 정치적 논리이며, 통치체제의 정체성과 관련되었다. 작미·작포는 단지 현실적 편의 때문에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졌을 뿐이다." "유형원은 수취제도로서의 작미·작포 제도의 정당성을 확립하기 위해 구차하게 현실론에 기대지 않고 고전을 연구했다. 그는 전결세로서의 대동법이야말로 고법이며, 현재 고법이라고 불리는 임토작공은 오히려 고법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유형원이 보기에, 옛날 임토작공은 천자와 제후 사이의 예를 표현한 수단일 뿐 수취제도가 아니었다. 예물에 흠이 있어도 그것을 바친 제후가 책망을 받을 뿐, 점퇴로써 백성들에게 부담을 지우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임토작공은 이름만 같을 뿐, 옛날의 그것과는 전연 다른 제도이다. 즉 이미 예가 아닌 수취제도에 불과한 무거운 부세인 것이다."(342-4)


"대동법의 핵심 내용으로, 공물을 부과하는 기준이 전결화된 것과 수취수단이 미·포로 바뀐 것을 드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역사적 측면에서 볼 때, 양자를 대동법의 본질적 요소라고 볼 수는 없다. 양자는 이미 대동법이 성립되기 오래전부터 실제로 각 지방에 광범위하게 정착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대동법의 진정한 의미는 이 두 가지가 법으로 규정됨으로써 양입위출을 위한 객관적 지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거듭 말하지만 대동법의 핵심은 위의 두 가지가 법적 강제성을 띠게 되었다는 것에 있다. 전결세화 및 작미·작포화는 양입위출과 연결됨으로써 대동법의 진정한 구성요소가 되었다. 양입위출의 제도적 성립이야말로 대동법의 핵심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대동법 실시론자들은 민에게서 공물가를 한 번 거둔 후 다시 거두지 않는다는 수취 액수의 고정에 강조점을 두었다. 반면 공안개정론은 공물수요자들의 자발적 절약을 강조하는 것 이외에 그것을 강제할 수 있는 별도의 방법은 제시하지 못했다."(350-1)


에필로그


"종래 대동법의 변통론적 의의에 대해서는 국가재조론國家再造論에서 검토되었다. 이 학설은 17세기 전반의 변통론을 둘로 나누었다. 즉 정통 주자학과 수양론의 철학적 기반 위에서 지주의 입장을 옹호하며 부세제도 개혁을 주장하는 쪽과, 반주자학의 사상적 기반 위에서 소농적 입장을 옹호하며 토지제도 개혁을 주장하는 쪽으로 나뉘었다. 이런 구분을 통해 전자는 후자보다 보수적이며, 역사적으로도 진정한 개혁은 후자에서 찾아야 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공적 공간, 정책 논의의 장에서 제기되었던 것은 언제나 과세를 어떻게 민의 담세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실시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언제나 과제는 불합리한 과세로 인한 피역避役·유망流亡과 그로 인한 담세층 감소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였다. 사실 토지제도 개혁은 국가체제 자체가 붕괴되거나 정지된 상태에서 가능했다. 현존하는 체제 안에서 소유 문제를 둘러싼 토지제도 개혁 논의는 있을 수 없다."(398-9)


"대동법은 조선 건국 이래의 재정 원칙인 양입위출을 지키려 했다는 점에서 전통적 입장을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변화된 현실에서 그것을 지키기 위한 새로운 방법이라는 측면에서 변통의 모습을 취했다. 대동법 실시론자들과 공안개정론자들이 양입위출을 이해하는 차이는 재정 차원을 넘어, 제도개혁 자체에 대한 입장으로 확장되었다. 공안개정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개인적 차원에서 문제를 해석하고 행정적 엄벌주의로 대처했다. 이에 비해 대동법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관료들의 도덕적 기준을 높여야 한다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폐습이 빚어진 것이 '사私'에서 비롯되었어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제도'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이 당시에 문제의 해결을 제도의 관점에서 시도하려는 태도는 오래도록 잊혔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태도가 성리학적 원리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조선 건국기의 인물들이 가지고 있던 원칙이었다."(40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의 세계사 - 부와 권력을 향한 인류 문명의 투쟁
스티븐 솔로몬 지음, 주경철 외 옮김 / 민음사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부 문명 탄생의 필수 자원


"물은 가장 보편적인 용해제이다. 물은 다른 분자를 포화, 용해, 융합할 수 있어 핵심적인 화학반응의 촉매작용을 하는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지구의 가장 중요한 변화 요인이다. 작물과 나무 끝부분, 인간의 혈관 등에서 중력을 거슬러 영양분과 미네랄이라는 생명력을 위로 올리는 것도 물이다. 초기 생명체의 진화를 도와서 산소가 풍부한 지구의 대기 환경을 창조한 것도 물의 힘이었다. 얼면 밀도가 낮아지고 부피가 팽창하는 물의 이례적인 성질은 암석을 쪼개서 지질학적 변화를 일으키며, 호수나 강의 표면을 얼음층으로 덮어 격리함으로써 그 아래의 수중 생물들을 보호하는 기능도 한다. 온도가 오르는 동안 엄청난 양의 열을 흡수하는 예외적인 능력은 계절적인 표면 온도 상승을 완화하며, 그 결과 지구가 금성처럼 항상 수증기 넘치는 온실이 되거나 화성처럼 얼어붙은 사막이 되지 않게 해 준다. 물의 움직임은 지구의 피부층에 해당하는 지표면의 비옥한 토양층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재분배한다."(19-20)


"정말로 중요한 물의 특징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자체 재생산이 가능한 핵심 자원이라는 점이다. 증발한 물은 염분이 제거되어 정화된 형태로 비가 되어 지구 전역에 내린다. 지구의 지속적인 물 순환 시스템 덕분에 자연적인 생태계가 회복되고 문명이 지속될 수 있다." "건조하거나 습하다는 기본 조건, 계절적인 강수량과 그에 대한 예측 가능성 패턴, 강물 흐름의 특징과 운항 가능한 거리 등은 사람이 거주하는 세계 모든 지역의 핵심 요소들이다. 대양의 조류에 의한 열 분산 효과 혹은 대기 중의 온난한 증기층이 제공하는 열 보존 효과 때문에 지구는 적도부터 냉대까지 인간이 거주하기에 적합한 곳이 되었다." "변화하는 물 조건의 도전에 사회가 당대의 기술과 조직을 동원해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곧 역사를 결정짓는 핵심 동력이다. 주도적인 문명이란 자연적인 물의 방해를 이겨내고, 이 필수불가결한 자원에 숨겨진 이익을 얻어 그것을 지렛대로 사용하는 데 성공한 문명이다."(20-1, 25)


"초기의 관개농업 문명들은 모두 범람을 일으키고 토사를 운반하는 큰 강 주변의 반건조 지역에서 발전했는데, 대개 강우 농경을 하기에는 비가 너무 적게 오는 곳이었다. 최초로 문명이 발전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산지의 농부들이 페르시아 만 입구 근처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있는 수메르 지방의 돌 없고 진흙땅인 범람원이나 늪지로 이주했다. 비가 적게 오고 치명적인 수인성 질병들이 창궐하는 험악한 말라리아 지방인 데다가 극심한 홍수와 가뭄이 맹위를 떨치는 곳으로 농부들이 이주해 가는 현상은 우리의 직관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이 강들에는 모든 결점을 보상하고도 남는 두 가지 탁월한 자산이 있다. 하나는 연중 계속 대량으로 흘러오는 안정적인 물 공급이고, 다른 하나는 범람과 함께 경지로 밀려와서 쌓이는 충적토이다. 관개시설을 건설하고 유지만 잘한다면 안정적인 물 공급과 충적토는 강우에 의존하는 산지의 농업에 비해 몇 배 더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는 조건이 된다."(31-2)


"농업이 부의 근원이던 시대 전체를 통해, 물이 풍부하고 관개를 하는 국가들과 물이 부족하고 인구가 희박하며 상대적으로 가난하고 규모가 작은 강우 의존형 국가들 사이에 인류 문명을 가르는 핵심 구분선이 그어진다. 또 다른 두 가지 구분선 역시 물 사용과 관련이 있다. 하나는 고대 관개 제국들의 주변 지역에서 해상 활동을 하는 문명들이 서서히 등장했다는 점이다. 이곳들은 국내의 농업 생산성이 낮아서 주로 이웃 국가들과 교역을 통해 소득을 얻었다. 해상 교역은 물의 부력을 이용한 빠르고 값싼 항해 가능성을 이용하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잔잔하고 닫힌 바다인 지중해에서는 그 조건에 맞게 돛과 노로 동력을 얻는 화물선이 등장한 후 이것이 점차 발전을 거듭해서 기원전 2000년 대에는 엄청난 역사적 힘이 되었다." "다른 물 관련 구분선은 '야만인'과의 구분이다. 이는 원시적인 수렵채집인들의 후손인 유목민들과 점차 확대되는 문명화된 농경 거주민들 사이의 실존적 충돌이라 할 만하다."(34-5)


"나일 강은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이집트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제공한다. 그러나 나일 강의 혜택은 파라오의 통제를 넘어서는 예측 불가능한 변수, 곧 강의 연례적인 홍수에 좌우되었다. 지나친 홍수는 모든 마을을 물에 잠기게 하고 경지를 쓸어가 버렸다. 수면이 낮아지는 해는 그보다 훨씬 더 나빠서, 물과 토사가 부족해 기근과 절망의 카오스를 가져왔다. 이집트의 장구한 역사 내내 왕조의 흥망성쇠는 놀라울 정도로 나일 강 범람의 순화고 일치했다. 범람이 적절하게 이루어진 시기에는 잉여 식량이 생기고 나일 강 유역의 상이집트와 늪지 삼각주 지역의 하이집트가 통합되었으며, 급수시설의 팽창, 이집트 문명의 영광을 드러내는 신전과 기념물, 그리고 왕조의 회복이 가능했다. 이에 비해 저수위가 계속되면 결핍과 분열, 왕조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되면 파라오 왕국은 강 유역과 삼각주 지역으로 분열되었으며, 종종 군벌들이 지배하고 도적떼의 위협을 받는 서로 경쟁하는 구역들로 갈라졌다."(40-1)


"나일 강과 달리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의 특징은 강의 범람과 후퇴가 예측하기 힘들며 흔히 아주 격렬하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농업 주기와 맞지 않아 문제였다. 물이 가장 필요한 시기는 파종과 경작을 하는 가을인데, 이때 수위가 가장 낮았다. 늦봄에는 천둥번개와 함께 쏟아져 내리는 강한 비 때문에 갑자기 물이 불어나 거의 다 자란 작물들을 망칠 위험이 있었다." "그러므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핵심은 거대한 수리사업을 통해 쌍둥이 강을 일 년 내내 기술적으로 통제하는 데 있었다. 큰 저수 댐에 물을 가두어 두었다가 작물이 자라는 기간에 방류하고, 경작용 고랑을 만든 경지에 물을 대기 위해 고지대로 물을 길어 올렸으며, 물이 넘치는 것을 막기 위해 튼튼한 방재 둑을 설치했다." "간단히 말해 이집트는 자연적인 물 자원을 제공하는 나일 강이 준 선물이었지만 메소포타미아는 정교한 물 공학과 의도적인 사회 조직을 통해 자연을 거슬러 가며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문명이었다."(54-5)


"집약적인 관개농업은 시간이 지나면서 환경에 부작용을 미쳐 지속가능성을 무너뜨린다. 우선 지하수의 수위가 높아지면서 토양이 물에 잠기고 동시에 모세관 현상 때문에 치명적인 염분기가 작물 뿌리에 달라붙는다. 덥고 메마른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일어나는 증발 현상으로 인해 한때 비옥했던 지표면에 눈에 보일 정도로 완연하게 소금 덩어리가 만들어진다. 수확은 점차 감소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기원전 18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한 석판에는 〈검은 땅이 하얗게 변했다〉라고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농업 위기를 심화시킨 두 번째 인공적인 환경 악화 요소는 숲의 남벌이다. 주변의 지중해 연안 지역을 포함하여 세계 어느 곳에서나 그렇듯이 현재는 황량하기 그지없는 메소포타미아 지역도 한때는 숲이 우거진 곳이었다. 숲을 개간하면 그 지역은 더 메마르고 덜 비옥해진다. 이 때문에 강수량도 줄어들고 토양이 빗물을 머금는 능력도 떨어지는 것이다."(60-1)


"모든 면에서 인더스 문명은 고전적인 수리사회였다. 중앙집중화와 재분배 성격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내부에 밀과 보리를 저장하는 거대한 곡물 창고의 존재에서 짐작할 수 있다. 발굴된 유해에서 발견된 풍토병 말라리아의 흔적은 이 병을 옮기는 모기의 존재를 증언해 준다. 관개용 수로의 고인 물에서 번식하는 모기는 수리사회라면 어느 곳이든 존재한다. 우기에 물을 보관하였다가 건기에 방류하는 것은 몬순 지역 거주지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1700년경 갑자기 역사에서 사라졌다. 대개 북서쪽에서 흰 피부와 옅은 색 머리카락을 지닌 인도유럽 어족 아리안 계 기마민족이 침입해 와서 붕괴되었다고 생각해 왔다. 이들은 게르만 족, 켈트 족 혹은 고대 그리스 민족의 사촌뻘로서, 그 후손들이 나중에 갠지스 강과 인더스 강에서 베다 힌두문명을 건설한다. 그러나 아리안 족이 침입해 왔을 때 인더스 문명은 이미 심각한 쇠퇴를 겪고 있었다. 그 원인으로 지목된 것이 취약한 수리환경이다."(72-4)


"진정 위대한 지중해 해양문명으로 우뚝 선 세력은 일찍이 조심스럽게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는 데 그쳤던 이집트 인이 아니라 바다에서 태어난 것이나 다름없는 크레타 섬의 미노아 인들이었다. 260킬로미터에 걸친 이 날렵한 섬의 가장 중요한 자연적인 자산은 다름 아닌 전략적 위치로서, 레반트, 소아시아, 이집트라는 수익성 좋은 시장과 서지중해의 원재료 공급지들을 중개하는 곳이었다. 미노아 인들이 특히 청동기 시대에 큰 이익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청동 재료들을 쉽게 크레타에 집결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늘어나는 부를 이용해서 미노아 인들은 화려한 다층 궁전('미노스' 왕의 궁전)과 큰 도시들을 건설했으며 예술에 전념했다. 특히 성채의 시대였음에도 그들의 최대 도시인 크노소스만은 성벽을 두르지 않았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것은 미노아의 해군이 얼마나 우월한지 말해 줄 뿐 아니라, 범선의 시대 내내 공해(公海)가 방어에 유리하다는 점을 보여 주는 역사상 최초의 증거들이다."(84-5)


"살라미스 해전 이후 아테네는 동지중해의 해군 및 해상 교역의 초강대국이 되었다. 해양문화에서는 대의제적 자유시장 민주주의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 모델이 더욱 발전했다. 관개사업과 대지 중심의 수리국가 민중들로서는 중앙집권화된 정부의 정책 지시와 중과세에 따르는 일 외에는 실제적으로 다른 경제적 대안이 거의 없었던 데 비해, 사적인 해양상인들은 저렴한 세금을 내고 양질의 서비스를 받으며 안전이 확보된 항구에서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역사상 많은 중요한 해양무역 국가들이 대개 중요한 대의제 시장 민주주의 국가들이며, 이들이 모두 아테네에서 탄생한 정치경제의 계보를 따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테네의 흥기와 함께, 상품과 인력을 동원하는 두 가지 상이한 방식들 사이에 문명의 거대한 이원적 긴장이 결합되었다. 하나는 권위적인 정부의 지시이고 다른 하나는 시장가격이라는 기준과 사적 이윤의 동기로서, 이 두 가지는 21세기까지 여러 형태로 우위를 다퉜다."(93-4)


"로마는 지중해 전역을 지배한 첫 번째 세력이다. 지중해 중앙에 위치한 로마는 지중해 서쪽의 자연 자원과 지중해 동쪽 선진 문명의 역동적인 시장 및 노하우, 양쪽 모두에서 부를 얻을 수 있는 전략적인 위치에 있었다. 로마는 물론 육군으로 유명하지만 진정 강대국으로 성장한 것은 기원전 3세기에 서부 지중해의 해로들을 장악한 이후이다. 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8~201년) 당시 한니발이 위험을 무릅쓰고 육로로 이탈리아에 침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로마의 해상 우위 때문이었다. 로마는 실제적이고 잘 조직된 대규모 토목 기술과 군사력을 결합함으로써 문명사회로서의 독특한 천재성을 드러냈다. 특히 물을 잘 다스리고 이용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수리 기술을 통해 로마는 해군을 위한 조선업과 항해 기반시설을, 육군을 위한 제국 도로를, 그리고 거대한 메트로폴리스라는 새로운 문명 요소를 창안하는 데 필수적인 대규모 수로와 수리체계를 완수했다."(99, 103)


"중국의 물의 역사에서 결정적 전환점이 되는 사건은 7세기 초에 대운하가 완성된 일이다. 대운하가 성공적이었던 이유는 수리적인 단층선을 연결했기 때문이다. 남북 사이에 존재하는 물과 토양 사이의 불일치는 반복되는 기술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였다. 대운하는 중국 북부의 고질적인 물 부족 사태를 해결하여 지극히 풍부한 양질의 토양에 신선한 물을 공급해서 식량생산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이끌었고, 동시에 남부에서는 상대적으로 지력이 약한 데 비해 물이 과도하게 많은 반대 성격의 문제를 해결했다. 나일 강이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통일한 것처럼, 운하는 중국 광대한 지역의 다양한 생산 자원들을 통제하는 강력한 중앙 정부와 자체 군사방어 능력을 갖춘 민족국가를 통합했다. 대운하는 중국이 중세에 세계에서 가장 조숙한 문명이 되는 데 공헌했을 뿐 아니라, 15세기에 중국이 세계에 등을 돌리는 운명적인 결정을 함으로써 장기적으로 서서히 쇠퇴하도록 만든 원인이 되기도 했다."(125-6)


"명이 1403년에 베이징으로 수도를 다시 옮겼을 때 대운하 전체의 준설, 보수, 확대 사업은 국가의 최대 관심사였다. 북쪽 변경 지역에 식량과 군수품을 운반하는 통로인 대운하는 이 나라 전체 방어 체계의 근간이 되었다. 기존의 해상 수송 체계는 해적들과 자연적인 해상 위험 요소들 때문에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그렇지만 베이징 너머까지 확대된 대륙 운하를 통해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대혁신이 필요했다. 원대의 기술자들은 이 문제로 좌절하곤 했는데, 건기에도 고산지대의 최고점에 달하도록 충분한 물을 대서 연중 운항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대형 화물선은 우기가 돌아올 때까지 통상 6개월은 묶여 있었다. 이 문제는 1411년 천급갑문을 건설하면서 해결되었다. 새로운 갑문은 섞여서 흐르는 두 강물을 나누었으며, 관리인들은 15개의 갑문 체계를 이용해서 계절별로 물 흐름을 조정했다. 천급갑문이 건설되면서 이제 대운하는 단번에 믿을 수 있는 사계절 내륙 수송로가 되었다."(154-5)


"새 대운하의 완성은 중국이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서 나머지 세계와 단절하게 된 정책적 전환의 계기였다. 더구나 대운하는 더 자족적이고 통제적인 수리환경을 인위적으로 조성함으로써 명의 중앙집권화된 권위를 높여주었다. 황제와 그 주변의 보수적인 신유교 관료들은 지주 계급과 결탁하여 아직 잔존한 상인층을 힘으로 억눌렀다. 바로 이 계층이 활기찬 송대 황금기를 만들어 낸 사람들이었다. 이 점에서 중국은 당시 유럽과 대조를 보인다. 유럽은 전체를 통합하는 내륙 수상 수송 체계가 없고 그 대신 해상 수송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에 더 작은 국가 단위가 만들어졌고, 이런 체제가 완성되면서 통제받지 않은 교역과 자유시장 기업들이 확대되었다." "중국의 해상 수송로는 불필요하게 중복되어 곧 폐쇄되었다. 1419년부터 모든 원양항해용 선박 건조가 중단되었다. 1433년 이후 정화의 원정을 중단하고 중국 내부의 자원에만 전적으로 의존하게 된 것은 내향적 정책 결정의 또 다른 단계일 뿐이었다."(155-6-5)


"이슬람권의 핵심 지역은 지중해와 인도양이라는 두 해상 변경으로 둘러싸인 사막이었다. 이 지역에는 운항이 가능한 강이라든지 중국의 대운하 같은 수로가 없어서 희귀한 수자원 사이에 메마른 공지가 광대하게 펼쳐져 있으므로, 이슬람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적 중심지들을 통합하고 중앙집권화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이슬람은 물에 취약한 문명이 되었다. 이 문명은 자연적이든 인공적이든 수리조건의 변화에 극도로 취약했다. 이슬람 문명에서 풍요의 시기는 잠깐이었고, '충만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수 세기 동안 아라비아 인들은 물 부족 때문에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만 사용하는 생활 방식에 묶여 있었다. 그러면서도 덥고 메마른 사막과 바다로 막힌 변경이라는 장애를 오히려 상업 교역로의 준독점으로 바꾼 아랍의 천재성 덕분에 동과 서 사이의 장거리 이동로와 경유지를 통제하는 위대한 문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는 동시에 12세기 이후의 급속한 쇠퇴의 원인 역시 설명해 준다."(160)


"이슬람권 사람들이 구세계 문명권의 여러 교차로 근처의 영토를 정복해서 상업 활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것은 결국 농업용수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물 조건 때문에 식량생산이 제한되고 그에 따라 유지 가능한 인구가 정해졌다. 평온한 시대에도 이슬람은 3000만~5000만 명의 인구만 유지할 수 있었다. 당시 중국 인구는 그 세 배이고 세계 인구는 열 배였다. 그 결과 이슬람은 항시적으로 인력이 부족했고 따라서 종교적 개종이나 정복을 통해 팽창할 수밖에 없었다. 이슬람의 종교적 보편주의, 그리고 아랍 지도자들이 늘 비아랍 개종자들을 수용하는 것 역시 이런 인구 부족에서 기인한다. 피정복민, 용병, 심지어 수많은 노예들까지 이 사회 내로 흡수되는 데 그토록 관대했던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또한 물 부족 문제로 물이 나는 지역에 이슬람 인구가 고도로 집중되었다. 그래서 바그다드, 카이로, 코르도바처럼 예외적으로 큰 인구 과밀 도시들이 생겨났다."(167-8)


"이슬람 문명의 또 다른 물 관련 약점은 작은 강들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이슬람의 '유량 부족'은 단순히 빠르고 안전하고 광범위한 내부 수송 네트워크의 발전을 저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중세에 중요한 자원으로 떠오르고 있던 수력의 이용 또한 막았다. 무슬림의 수리공학이 유럽보다 더 발전해 있었으면서도 물레방아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던 이유는 물살이 빠른 강이 원래 없었기 때문이다. 유럽이 수많은 작은 강들의 수력과 수송 잠재력을 활용해 초기 산업을 발전시킴으로써 역사적 상승기를 타는 동안 이슬람 시대의 스페인은 물레방아를 단지 곡물 제분과 양수에만 사용했다." "되돌아 보건대 첫 번째 치명적인 실패는 718년에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여 지중해를 이슬람의 호수로 만들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유럽의 해양국가들이 해상력을 건설하도록 만든 계기가 되었다. 지중해 무역에서 점차 축출되어 중요한 부의 원천에서 배제되자 이슬람 문명은 사막 자원에 더욱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185)


2부 물과 유럽의 번영


"카리브 해에서 흘러오는 따뜻한 멕시코 만류 덕택에 북유럽은 아(亞)북극에 해당하는 위도에도 불구하고 거의 연중 농사가 가능한 온대 기후를 유지했다. 이 지역은 물을 비롯한 천연자원이 많고, 강수량이 풍부했으며, 끝없이 긴 톱니모양의 해안선과 함께 운송과 무역에 적합한 좋은 자연 항구들이 많았다. 또한 지중해 지역의 강들에 비해 훨씬 먼 곳까지 이르는 북유럽의 강들은 대부분 북쪽으로 흘렀으며, 길고 항행이 가능하여 광대한 교통 네트워크의 잠재적인 근간이 되었다. 하지만 로마 시대 내내 북유럽 지역은 농업 확대에 있어 극복하기 어려운 물 관련 장애물에 직면해 있었다. 강수량이 지나치게 많았고, 무거운 진흙질의 토양은 자연적으로는 배수가 잘 되지 않았다. 평평하고 종종 침수되는 북유럽의 평지 대부분은 빽빽한 삼림과 늪지였다. 지중해 지역과 중동의 가볍고 건조한 토양에 사용했던 경작 기술들(특히 황소가 끄는, 나무로 된 얕고 단순한 쟁기)은 북부 지역의 토양에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200)


"북유럽의 경제적 각성을 자극한 농업혁명의 중요한 돌파구는 바퀴 달린 몰드보드 중쟁기와 함께 찾아왔다. 4~8마리의 황소가 끄는 몰드보드 쟁기에는 크고 굴곡진 철제 날 또는 철판이 덮인 목재 날이 달려 있었다. 이 판은 깊은 고랑을 파내는 동시에 높은 진흙 두둑을 만들어서, 넓은 공간에 걸쳐 진흙질 땅의 생산성을 높였다." "몰드보드 쟁기 덕분에 질척거리는 토지의 제약에서 벗어남으로써 얻어진 농업 발전과 인구 팽창은 곧 지역 내의 수자원 개발을 활성화해 경제 팽창을 더욱 자극했다. 1000년 이후, 유럽 내륙의 긴 강들과 북부 해안에는 종종 중무장한 상선들이 활기차게 왕래했다. 이 상선들은 곡물과 목재, 금속, 밀랍, 모피 같은 원재료, 그리고 나중에는 염장 청어 같은 상품을 싣고 부상하는 자유 상업 도시들과 계절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교역 시장들을 오갔다. 북부 해역에서 활동하는 이런 초기 상인들 중 많은 이들은 긴 배를 타고 노략질을 일삼았던 노르만 족의 후손들이었다."(202-4)


"기원전 1세기에 있었던 물레방아의 발명은 문명사의 분수령 중 하나로 기록된다. 주로 경지 관개용 물을 끌어 올리려는 목적으로 동물의 힘으로 움직이던 고대의 노리아(물동이들의 연쇄)가 물레방아의 오래된 사촌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외륜의 물갈퀴 판이 설치된 물레방아는 끊임없이 흐르는 물 속에 들어 있는 물의 에너지를 생산적인 작업을 하기 위한 에너지로 자동으로 전환시켰다. 말하자면 물레방아는 역사상 최초의 기계식 엔진이었다." "11세기 이후 물레방아는 기계 전동장치, 플라이 휠, 캠축, 컨베이어 벨트, 도르래, 이동장치 그리고 피스톤 등의 실험을 자극했고, 이는 산업 생산의 핵심적인 노하우를 개발하는 발단이 되었다." "물레방아는 또한 중세 유럽에서 철을 용해하는 용광로는 개발하는 데에도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철이 동시대에 확산된 화약과 결합하여 대포와 화기를 만들어 내자 유럽의 함선과 군인들은 향상된 무기로 무장했고, 이것은 대항해 시대의 정복 원정을 이끌었다."(208-10, 214)


"유럽 내부의 권력 중심지는 16세기 중에 지중해에서 대서양 북서쪽의 해상 열강들로 이동했다. 유럽의 해양 팽창 세력이 지구의 대양을 빠르게 정복해 가는 과정에서 보충적인 역할을 했던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물의 혁신이 일어났다. 배에서 마실 물을 신선하게 유지하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일이었지만, 장거리 원양 항해에서는 가장 힘든 문제였다.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선상에서 신선한 물을 장기간 보존할 방도는 없었다. 미지의 해안에 상륙할 때 탐험가들은 가장 먼저 물 공급지를 찾아내야 했다. 그 시대에는 문명 지역의 항구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언제나 신선한 물을 얻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때는 변색된 물, 소금물, 세균 투성이의 물, 그리고 오염된 물을 마시는 일이 흔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알코올로 살균한 맥주나 포도주, 또는 뜨겁게 끓인 물로 수분 섭취를 제한했다. 그러던 중 15세기에 물을 장기간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도록 물통을 개선하면서 선원들의 상황은 어느 정도 나아졌다."(243)


"장거리 항해와 대포의 시대에 나폴레옹 전쟁의 결과는 다음의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이때까지는 공해의 자연적 힘을 동원하는 해상 강국의 이점은 월등한 육군에 대항해 힘의 우위를 회복하는 세 번째 축으로 작동하는 정도였으나, 이제 그 장점이 더욱 발전해서 작고 민주적인 해상 국가들이 글로벌 지배를 둘러싼 충돌에서 오히려 우세를 점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섬나라 영국이 대륙의 경쟁국 네덜란드를 능가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는 육상 침공에 대항해 견고한 방비를 갖추어야 하는 추가 부담을 아예 지지 않고, 모든 자원을 해군력에 집중할 수 있었다는 데 있었다. 이것은 네덜란드가 쇠퇴한 최종 근인(近因)이기도 했는데, 흥미롭게도 고대 페니키아 인들이 이웃의 대륙 제국이었던 메소포타미아에 의해 몰락한 까닭과 유사하다. 항해 시대를 통틀어 무적함대와 나폴레옹에 이르기까지 영국을 침공하려던 모든 시도는 실패했다. 영국은 1차 세계대전까지 1세기 동안 심각한 도전을 받지 않았다."(262-3)


"물은 지구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질 가운데 온도 범위에 따라 액체, 고체, 기체의 모든 상태로 존재하는 유일한 물질이지만, 지금까지 각 문명은 주로 액체 상태의 물을 이용해 왔다. 물을 가열해 가스 상태가 된 증기의 팽창력에 대해서는 고대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17세기 말에 가서야 런던에서 물리학자 로버트 보일과 함께 일했던 프랑스 출신 물리학자 드니 파팽이 기압에 대해 새로운 과학 지식에 따라 실용적 증기 압력 밥솥을 발명했고, 최초의 증기기관들의 이론적 기초가 될 일부 기본 설계들에 대한 개념적인 사항들을 적어 놓았다. 1698년 영국의 군사 엔지니어인 토머스 세이버리는 비록 매우 불안정하고 폭발하기 쉬웠지만, 처음으로 콘월 주석 광산에서 물을 제거하는 데 쓰이는 증기펌프를 설치했다." "와트의 증기기관은 처음 사용되자마자 17미터 높이의 물이 채워져 있던 수직 갱도에서 물을 비워 냈다. 동시에 와트의 증기기관은 용광로에 바람을 불어넣는 송풍기에도 이용되었다."(272-3)


"용광로를 가열하는 송풍기에 증기력이 이용되면서, 저렴한 고품질 주철의 대량 생산이 촉진되었고, 주철은 곧 산업시대의 가장 중요한 건축자재가 되었다. 그때까지는 한정된 양의 단조 철이 공급되어 주로 영국 해군의 대포와 다른 주요 장비 제조에만 쓰였다. 증기력과 철이 만들어 낸 역동적인 시너지 효과는 자체 강화되는 경제 팽창의 선순환을 일으켰으며, 산업혁명의 두 번째 국면을 이끈 핵심 기술 클러스터가 되었다. 증기력은 더 많은 철을 주조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더 많은 철은 증기력이 활용될 수 있는 튼튼한 장비들과 응용물들을 생산해 냈다. …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초기에 증기기관을 이용한 중요한 사례 중 하나는 전통적인 물레방아의 회전율을 높이기 위해 물을 끌어 올리는 것이었다. 증기력으로 물을 끌어 올려서 물 흐름을 보충해 거대한 철제 바퀴를 돌리자 물레방아의 힘은 엄청나게 증대되었다." "수력과 증기력은 나란히 성장을 계속했다. 증기력이 수력을 앞지른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였다."(281-3)


"사람들은 증기력 덕분에 이전에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멀리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1830년에서 1920년까지 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등지로 5500만 명에서 7000만 명의 유럽인들이 이주했던 것은 이러한 발전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이들이 이주한 결과 미국의 서부 팽창을 제한하던 만성적인 노동력 부족 현상이 줄어들고, 동시에 유럽에서는 1848년의 사건같이 혁명적 분란의 위협을 가하는 유럽 내 실업인구의 과잉이 완화되었다." "이전의 수상 운송 혁신들과 마찬가지로,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는 증기력 역시 세계의 지정학적인 균형을 재조정했다. 증기력은 지구상의 모든 사회를 잠재적인 원료 공급지이자 동시에 빠르게 성장하는 유럽 산업을 위한 잠재적 시장으로 만들었다. 식민지 위성국들과 그들의 유럽 식민모국들 사이에는 종속적인 상호관계가 형성되었다." "새롭게 태어난 세계의 경제적 질서에서 제조업을 장악한 서구의 '중심부'는 더 지배적이고 부유해졌다."(286-9)


"수력발전은 그 자체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혁명을 만들어 냈다. 전기는 송전이 용이했고, 수력발전소가 위치한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와 공장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었다. 증기력에 필요했던 석탄은 부족했지만 산악 지역에 수량이 풍부한, 즉 '백색 석탄'이 많은 국가들은 갑작스럽게 에너지 자원을 얻어서 산업시대에 돌입할 수 있었다. 산악지형인 이탈리아가 극적인 사례이다." "수력 전기의 확산은 유럽과 미국을 넘어 전세계로 산업혁명이 퍼져 나가는 데 도움을 주었다. 수력발전소에 적합한 물 공급지가 부족해지고 증기 터빈이 개선됨에 따라, 화석 연료나 핵연료를 사용하는 대형 화력 발전소에서 더 많은 전기를 얻게 되었다. 이러한 발전소들은 물을 증기 터빈에 사용했을 뿐 아니라 냉각제로도 사용했다. 석유를 사용하는 내연기관의 중요한 혁신 과정에서도 물은 중요한 냉각제로 쓰였다." "20세기의 특출한 산업 팽창에 힘을 공급하는 핵심 과정에서 물과 에너지는 상호 공생적으로 연결된 파트너였다."(305-7)


3부 물과 현대 산업 사회의 형성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물은 역사적으로 항상 칼의 양날과 같은 의미를 띠고 있었다. 먼저 사람은 생존을 위해 매일 2~3.5리터의 물을 마셔야 한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음식을 만드는 데 수 리터, 그리고 최소한의 위생을 유지하는 데에도 40~75리터의 물이 필요하다. 그런데 오염된 물을 마시거나 병균이 서식하고 있는 고인 물에 노출되면 질병 감염, 수명 단축, 각종 신체적 고통의 주요 원인이 된다. 모든 시대를 망라해 가장 강력한 수인성 질병은 이질과 일반적인 설사 증상이었다. 인류 문명이 수렵, 채취 단계에서 관개농업 단계로 넘어가면서, 인간은 말라리아, 황열병, 뎅기열 등을 옮기는 모기, 주혈흡충, 기니 벌레 등이 살고 있는 관개수로의 고인 물 웅덩이에 노출되는 일이 잦아졌다. 급속한 도시화와 산업화는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확산되는 치명적인 수인성 질병들의 위험을 증대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콜레라와 장티푸스라는 유행병이다."(314)


"대항해 시대 이후 처음으로 차와 커피, 초콜릿이 각각 중국, 이슬람권, 멕시코에서 유럽으로 도입되었을 당시 이 식품들은 의학적 효과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아마도 그것들을 뜨거운 상태로 마셨기 때문일 것이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다른 형태의 무균 음료인 곡물 증류주가 대중화되었다. 그리스 인과 로마 인은 고대부터 초기 형태의 증류주를 제작했고, 유럽에서는 9세기 이후로 증류기를 사용했다. 근대에 들어서 증류주는 의학적 효과 때문에 의사나 약사들이 권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2세기가 지난 후 증류주가 대중화되자 공공장소에서 술에 취한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오염 가능성이 있는 물을 정화하려 할 때, 더 나은 방법이 없는 경우에는 임시 민간요법에 따라 식초 몇 방울을 물에 넣기도 했다. 포도주를 마시는 것 역시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건조한 지중해 연안 주민들 사이에서 애용되는 방법이었다. 깨끗한 물을 안전하게 섭취하는 일반적인 방법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바로 맥주였다."(315-6)


"19세기 중반 위생의 위기는 산업화된 시장경제 고유의 딜레마를 드러내는 초기적 현상이었다. 이 체제는, 지속가능한 생태계가 지속적인 생산 증가의 필요조건이라고 할지라도, 원치 않는 성장의 부산물로 오염된 자연 생태계를 건강한 균형 상태로 되돌려 놓을 자동적이고 내재적인 장치를 갖추고 있지 않았다. 영국에서 위생 개혁을 이끌어낸 최후의 기폭제가 된 사건은 바로 1858년에 발생한 템스 강의 '대악취'였다." "위생 관념이 등장하고 세균 이론을 수용하게 되자, 영국인들은 이제 런던에 깨끗한 물을 풍부하게 공급하기 위해 추가 조치들을 취했다. 주요 원칙은 가능한 한 가장 깨끗한 곳에서 물을 끌어와야 하고 그 물을 제대로 정화해야 하며 공급되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오염을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하수 처리 시설도 개선되었다." "위생혁명은 깨끗한 물의 공급량을 엄청나게 증가시킴으로써 현대 산업 도시의 생태계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325-30)


"영국 정부의 정책은 식민지인들을 애팔래치아 산맥 동쪽에 묶어 두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국의 해상 제국과 보다 긴밀하게 연결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 지도자들은, 유혹적인 미시시피 강 유역의 농지와 산맥 너머의 서로 교차하며 흐르는 가항(可航) 하천들이 자신들만의 풍족한 서부 제국을 만들어 줄 핵심 열쇠임을 알아차렸다." "미시시피 강은 간선 하천인 동시에 범람 하천이며 관개가 가능한 하천이었다. 이 강의 가항성으로 인해 자연적인 내륙 수로 교통망이 가능해졌고, 그 덕분에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광활한 지역에 걸쳐 띄엄띄엄 분포해 있는 국민들을 곧바로 통합할 수 있었다. 육로였다면 그런 일은 실제 불가능했을 것이다. '빅머디(Big Muddy, 미시시피 강의 별칭)'는 특히 서쪽에서 흘러드는 지류 덕분에 세계에서 7번째로 많은 양의 진흙을 운반한다. 그리고 수차례 범람하면서 중서부의 농지에 두툼하고 비옥한 잔여물을 남긴다."(341-3)


"전기는 저장과 장거리 전송이 모두 용이한 유일한 에너지이다. 그리하여 전기는 인간 생활의 거의 모든 측면을 변화시켰다. 도시는 밝아졌고 가정에는 세탁기, 전화, 라디오가 설치되었다. 냉장 보관 덕분에 음식을 오래 저장하고 먼 곳까지 운송할 수 있게 되었다. 생산성 향상을 위해 모든 종류의 제품에 소형 전기 엔진이 장착되었다. 완전히 새로운 산업 분야도 등장했다. 예를 들어 알루미늄은 풍부한 양의 전기만 있다면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원석에서 추출하고 정제할 수 있는 재료이다. 미국, 캐나다, 노르웨이 같은 수력 전기가 풍부한 나라들은 중요한 알루미늄 생산국이 되었다. 그리고 싼값에 알루미늄을 확보하면 항공기, 선박, 자동차 등을 생산하는 데 유리해진다. 강철, 석유, 내연기관과 더불어 전기는 증기와 철의 시대를 대체한, 2차 대량 생산 산업혁명의 역동적 토대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도약을 위해서는 전력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다. 수력터빈이 그 중요한 사례다."(356-7)


"수력발전은 새로운 산업 시대에 미국이 전 세계적으로 선도적인 위치에 오르는 데 일조했다. 미국 역사에서 수력발전이 더욱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건조한 서부의 프론티어에 묻혀 있던 부를 끌어내는 데 기여한 핵심 기술이기 때문이다. 이리 호수와 온타리오 호수 사이에 위치한 나이아가라 폭포는 낙차가 크고 연중 일정한 수량을 유지하기 때문에 수력발전에 적합하지만, 미국 내에 이러한 환경을 가진 곳은 몇 군데 되지 않는다. 그러나 세기 전환기 즈음 여러 가지 산업 기술들을 조합하여 인공적인 대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콘크리트 댐이 그것이다. 미국 남서부 콜로라도 강에 만들어진 후버 댐은 이런 면에서 선구적이다. 1936년에 완성된 이 거대한 다목적 댐은 홍수를 통제하고 관개용수를 공급했으며, 10만 마력급 프랜시스 터빈을 통해 막대한 수력 전기를 생산해 냈다. 후버 댐과 그것을 모델로 삼아 이후에 만들어진 거대 댐들은 미국 극서부 지방 개발을 위한 핵심 기반 시설이 되었다."(357-8)


"서부 하천에서 기선 사업이 호황을 맞은 것은 한편으로 오랫동안 넘어설 수 없었던 장애물, 즉 애팔래치아 산맥을 가로지르는 물길이 없는 상황을 극복했기에 가능했다. 그런 길을 확보할 수 없다면 서부의 하천들은 동부의 활기찬 산업 지대와 농경지 그리고 시장에서 동떨어진 채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동부는 여전히 대부분의 미국인이 거주하고 있고 해안을 따라 교역이 이루어지는 곳으로서, 서부에서 보면 사실상 애팔래치아 산맥으로 둘러싸인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을 무대로 하는 증기선의 시대가 개막되면서 미국을 하나로 통합하고 미시시피 유역에 묻혀 있는 부의 원천들을 끌어내며 또한 전통적인 남북으로의 팽창 대신 서부로의 확장을 추동할 수 있는 엄청난 기술적 토대가 마련되었다." "1825년 10월 완공된 이리 운하는 경이로운 업적이었다. 총길이 585킬로미터의 운하는 수문 83개, 송수교 18개를 포함하고 있었고, 이곳을 오르내리는 화물선은 약 50톤 정도의 물량을 수송할 수 있었다."(360-5)


"1869년 수에즈 운하의 개통이 증기와 철의 시대에 영제국이 지니고 있던 패권을 명시적으로 보여 주었듯이, 1914년 파나마 운하의 개통은 기술에 기댄 대량 생산 시대에 선두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던 미국에게 유리하도록 세계의 역학 구도가 재조정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파나마 지협 운하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가 되었고,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과 동아시아 지역을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긴밀하게 통합된 세계 규모의 네트워크로 연결했다." "두 개의 대양을 잇는 빠르고 저렴한 수로는 미국에게 광범위한 해양 환경의 이점을 온전히 선사했다. 미국은 막다른 길이었던 카리브 해를 대륙을 가로지르는 수송의 지름길로 변화시켰고, 이를 통해 극서부 지역에 묻혀 있는 광물과 농업 자원을 미시시피 유역, 오대호, 동부 해안의 번창한 산업 및 시장과 연결할 수 있었다. 게다가 운하를 통해 대서양과 태평양의 해군력을 하나로 통합해 외해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379-80)


"파나마 운하는 미국 해양 역사의 세 단계 중 첫 번째 시기에서 두 번째 시기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미 해군이 자국의 국경과 물길을 방어하고 자유 무역을 보호하며 해상무역상들의 시장 접근성을 확보하는 일에 몰두하면서, 적당한 기회를 노려 대륙 내에서 팽창을 도모하던 긴 시대는 이제 끝났다. 파나마 운하 완공 이후 미 해군은 미국이 군사적인 면에서나 상업적인 면에서 전 세계에 걸쳐 팽창하는 한편, 미국의 국력이 밖으로 뻗어 나가 유럽과 아시아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중재할 수 있도록 기획했다. 독일 잠수함들이 영국의 해상 장악과 항구 봉쇄를 무너뜨리려고 분투하던 중 미국을 비롯한 공식적 중립 국가의 상선과 여객선을 침몰시키자,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공언했듯이, 미국은 세계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1차 세계대전에 참가했다. 2차 세계대전부터 시작되는 세 번째 시기 내내, 막강한 미 해군은 자유세계의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전 세계 바다와 전략적으로 중요한 항로를 순찰하고 다녔다."(402-3)


"전후 초기 거대 댐 건설의 시대 동안 수백 개의 댐들이 미국 전역에 세워졌다. 미국 역사를 통틀어 약 7만 5000개의 댐이 만들어졌다. 조지 워싱턴의 대통령 재임 기간이 끝나고 약 200년 후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까지 하루에 하나 꼴로 댐이 들어선 셈이다. 6600개에 달하는 높이 15미터 이상의 거대 댐은 모두 다목적 용도로 지어졌고, 후버 댐 이후에 세워진 것들이다." "극서부 건조 지역의 농업은 시작하자마자, 세계 역사상 최고의 관개농업 지대 가운데 하나로 발전했다. 1978년을 기준으로 17개의 서부 주에는 18만 제곱킬로미터의 관개 농지가 운영되고 있었는데, 이는 전 세계 관개 농지의 10퍼센트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전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건강하며, 최초로 완전한 전기화를 이루고, 최고의 산업 생산력을 달성했으며, 가장 높은 수준의 도시화를 경험한 일등 국가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은 미국이 앞장서서 물 사용의 혁신적인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434-5)


"20세기 말부터 댐의 시대가 허락한 전세계적인 물의 풍요는 한계에 도달했고, 그 정점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대형 하천들은 더 이상 바다에 제때에 도달하지 못하게 되었다. 또는 바다에 닿더라도 삼각주와 해양 생태계에 상당히 줄어든 양의 유량과 퇴적물을 운반해 주었다. 장기간 계속된 집중적인 관개농업과 염류 축적, 침수, 토사 침식으로 황폐해진 토양에 부적합한 배수 시설이 설치된 결과 발생한 유해한 부작용은 어디에서나 점점 더 분명하게 나타났다. 관개 농지는 세계적으로 식량 대량 증산을 가능하게 만들었지만, 기존의 농토는 새로운 농토가 개발되는 것과 같은 속도로 쓸모없게 되어 버렸고 그 결과 역사적인 관개 농지의 순 증가 추세도 끝이 났다.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지표수가 바닥을 드러내자, 점점 더 많은 지역에서 자연적인 물의 순환이 메울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지하수를 끌어다 관개용수로 사용했다. 세계 농업의 약 10퍼센트는 결국에는 지속 불가능한 것이다."(457)


4부 결핍의 시대


"지구상에 존재하는 물의 총량 가운데 0.001퍼센트에 해당하는 한정된 물이 증발산과 강수 작용으로 대기를 통해 끊임없이 순환하는데, 이 현상이 역사가 시작된 이래 현재까지 존재한 모든 문명들을 지탱해 왔다. 인간은 실질적으로 이 재생가능한 물 공급량의 최대 3분의 1까지만 이용하며, 다른 3분의 2는 강이나 지하로 급속히 사라져 지표면과 지하수의 생태계를 충전하고 궁극적으로는 바다로 되돌아간다." "가장 다루기 힘든 수리 환경은 아주 건조하거나 습한 환경이 아니라, 계절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물의 양이 크게 변하거나 홍수 같은 예측할 수 없는 물난리, 산사태, 가뭄 등 급작스럽고 극단적인 이상 기후에 쉽게 노출되어 있는 환경이다. 계졀적 변화는 수자원공학의 복잡성과 비용을 증가시키고, 그로 인한 예측불가능성은 꼭 필요한 급수시설의 건설마저도 어렵게 할 만큼 개발을 좌절시킨다. 역사상 가장 가난한 사회들이 종종 가장 다루기 힘든 수리 환경에 처한 사회였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470-1)


"아스완 댐은 나일 강의 흐름을 완벽히 통제한다는 지난 5000년 동안 계속된 이집트 지도자들의 꿈을 실현시켰으며, 주기적으로 극단적인 가뭄과 홍수를 몰고왔던 강에 대한 끔찍한 외상으로부터 이집트 인들을 보호해 주었다. 그러나 아스완 댐은 그 엄청난 위력에도 불구하고 나일 강의 또 다른 역사적 특징을 바꿀 수는 없었다. 즉 이집트 사회의 행복은 나일 강 분지의 물을 엄청난 비율로 소비하는 데 달려 있지만, 나일 강은 거의 전적으로 이집트 국경 밖에서 발원한다는 것이다. 수단과 더 상류에 있는 적도 동아프리카의 대호수 평원의 국가들이 백나일 강의 수원을 이룬다. 에티오피아 고원지대는 단연 이집트로 흘러들어 가는 물의 최대 공급지로, 청나일 강과 앗바라 강 그리고 소바트 강은 도합 85퍼센의 물을 공급하며, 매년 6월 아스완 댐에 도달하는 모든 토사를 실어 보낸다. 역사적으로 곤궁한 에티오피아와 백나일 강 주변국들은 계속되는 빈곤을 막기 위해 이제 더 많은 양의 나일 강물을 사용하고 있다."(484-6)


"상류 국가들, 특히 에티오피아에 의해 나일 강 물 공급이 중단될지 모른다는 거의 편집증적인 두려움은 수 세기 동안 이집트 인들의 정신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고 종종 과열되곤 했다. 베르디는 오페라 「아이다」에서 비극적인 연인을 통해 이 불안감을 표현했다. 베르디의 이야기는 1875년과 1876년에 이집트 군이 몇 차례 에티오피아 영토에 대한 제국주의적 공격을 가한 끝에 6만 명의 에티오피아 군에 의해 전멸한 유혈사건에서 부분적으로 끌어온 것이다. 아스완 댐을 성공적으로 건설하고 이집트 인들은 역설적으로 국가 안보에 대한 불안감이 더욱 가중되었는데, 그러한 성취가 이웃한 상류의 빈국들을 자극해서 댐을 건설하여 나일 강의 물을 더 많이 이용하고자 하는 의욕을 고취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다수의 다른 나라들이 수에즈 운하와 아랍-이스라엘 전쟁이라는 시각으로 이집트의 정책을 바라보는 데 반해, 이집트 지도자들은 명확히 자국의 최우선적인 국가 안보 목표인 물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486)


"3차 중동전쟁(1967)의 충격적인 결과는 중동의 지정학을 바꾸어 놓았다. 이스라엘의 영토는 갑자기 네 배로 늘어났다. 똑같이 중요하지만 세간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과 주변국들 사이의 수리적 힘의 균형이 결정적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전쟁 전, 이스라엘은 요르단 강 수계의 10퍼센트 미만을 통제했다. 전쟁이 끝난 후 이스라엘은 요르단 강 유역의 지배적인 물 통제국가가 되었다. 서안에서 가장 큰 대수층을 포함하는 이 지하수층은 녹지대 부근의 산등성이를 따라 남북으로 흐르다가 이스라엘과 지중해를 향해 서쪽으로 향하는데, 이곳에서 점령된 팔레스타인 영토 아래 주로 존재한다. 2000년대 초, 요르단 강 서안의 대수층은 이스라엘 물 공급지의 3분의 1을 담당했다. 1981년 병합되었으며 전략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기도 한 골란 고원은 이스라엘 물 사용량의 3분의 1을 공급하는 갈릴리 해의 재생가능한 수원지를 확보해 주었다."(506)


"이스라엘은 갑작스럽게 얻은 풍부한 물을 경제성장과 근대화의 활력소로 활용했다. 1982년에는 요르단 강 서안의 물 공급을 '전국수로망'에 통합했다. 동시에 이스라엘은 물을 국내의 정치적 도구로 활용했다. 즉 요르단 강 서안의 팔레스타인 인들이 새로 우물을 파거나 기존의 우물을 더 깊이 파는 것 그리고 물을 관개에 이용하는 것을 가혹하게 제한함으로써, 그들에게 공급되는 물의 양을 불균형적으로 줄였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 지역은 전 세계적으로 물을 둘러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차이가 가장 극면하게 벌어진 곳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팔레스타인 인들은 그들과 나란히 거주하는 이스라엘 정착민들이 사용하는 물의 양의 4분의 1밖에 사용할 수 없다. 요르단 강 서안의 팔레스타인 관개농지는 전체 경작지의 4분의 1에서 20분의 1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물 기근과 아랍의 물이 도둑맞고 있다는 분노는 1987년에 일어난 반이스라엘 운동(제1차 인티파다)을 크게 악화시켰다."(506-7)


"지난 천 년간 인도인의 삶은 단 수 개월 동안 연간 강우량과 유거수의 80퍼센트에 집중되는 폭우성 몬순 기후 때문에 생겨나는 예측할 수 없는 풍년과 흉년의 주기 사이에서 매년 심하게 요동쳤다. 너무 늦게 찾아오는 적은 양의 몬순은 끔찍한 기근을 낳고, 반면 일찍 시작되는 대규모 몬순은 엄청난 홍수와 산사태를 일으켜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수많은 이재민을 양산한다. 이와 달리 적절한 때에 불어오는 적당한 규모의 몬순은 작물에 물을 공급하고 강과 지하수를 충전하며 소박한 풍요를 가져온다. 오늘날까지도 인도 경제에서 몬순의 시작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21세기에 들어서 인도는 관개용수의 절반 이상을 지하수에 의존하고 있다. 세계 어느 국가도 그렇게 많은 양의 지하수를 뽑아내지 않는다. 일부 추산에 따르면 인도는 자연적으로 충전되는 속도보다 두 배나 빠르게 지하수를 끌어다 쓴다고 한다. 고갈되고 있는 지하수로 재배한 식량은 지속가능하지 못한 거품과 다를 바 없다."(529-31)


"파키스탄의 물 부족 문제가 심각해짐에 따라, 인더스 강은 다시 한 번 인도와의 충돌을 유발할 수 있는 잠재적인 원천으로 부상하고 있다. 전후 인더스 강이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과 힌두교 국가인 인도를 나누는 국경선으로 책정되었지만, 이는 인더스 강 유역이 하나의 유기적인 수리적 통일체라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조치였다. 이는 유럽의 식민 통치를 겪은 국제 수역권의 공통된 문제이다. 즉각적으로 강의 지류의 통제권을 둘러싼 분쟁이 발발했다. 1948년 양국은 전쟁 일보직전까지 갔다." "1960년 세계은행이 주도하여 인더스강수자원협정을 이끌어냈지만, 이 조약은 양측이 6개의 인더스 강 지류들 가운데 각각 3개의 지류들에 대해서 특권적 권리를 갖는다는 최소한의 타협이었다. 1999년에는 다시 양국이 전쟁 발발 직전 상태에까지 이르렀고 카슈미르에서 폭력사태가 계속되었다. 조약은 반세기 동안 유지되었지만 인더스 강은 여전히 언제든 점화될 수 있는 분쟁의 도화선으로 남아 있다."(537)


"임박한 중국의 물 부족 위기는 훨씬 빨리 시작될 수도 있다. 황허 강 유역 토목 사업의 예기치 못한 부작용으로 북중국의 미세환경이 심각하게 건조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 회복되는 하천유량의 상실(댐과 관개수로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광범위한 습지 배수, 산림 벌채, 농지조성을 위한 초지 개간, 1990년대부터 시작된 노천탄광 급증, 그리고 탐욕스러운 지하수 채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토양 침식위기가 일어났다. 이것은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 자체로 물과 관련된 가장 심각한 21세기 환경문제들이다. 티베트 고원의 황허 강 발원지를 둘러싸고 있던 호수의 절반과 초지의 3분의 1이 사라졌다. 심각한 산림 벌채가 이루어진 황허 강 중류에서는 비옥한 고원 황토의 70퍼센트가 침식되어 버렸다. 사막화가 북중국을 잠식하고 있다. 북중국을 포위하는 사막의 모래는 옛 야만족 유목민들을 대신해 만리장성 주변에서 최대의 위협으로 부상하고 있다."(546)


"콜로라도 강 유량의 두 배반~세 배이고 리비아 지하대수로 유량의 스물다섯 배에 달하는 남북대수로 공사가 성공한다면, 물 부족 위기로 인한 당면한 위협을 극복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 위기를 해결하지는 못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양쯔 강 자체가 이미 초과 이용되고 있으며, 중국의 급격한 현대화에 장기간 보조를 맞출 수 있을 만큼 북으로 보낼 충분한 잉여 수자원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지구 온난화가 중국 전체의 물 공급 문제에 대한 환경상의 히로시마 원자폭탄으로 등장했다. 주요 강들의 발원지인 티베트 고원의 빙하는 히말라야 산지에서 급격히 녹아내리고 있다. 만약 빙하가 사라져서 중국의 수리 시설들이 완전히 새롭고 극단적인 계절적 기후 유형에 잘 들어맞지 않게 된다면, 중국의 모든 대규모 댐과 수로들이 하룻밤 사이에 역사적 헛수고로 전락할 수 있다. 중국이 대규모 댐과 수로공사의 성공에 거는 기대 수준을 놓고 볼 때, 많은 것이 걸려 있음을 알 수 있다."(558-9)


# 부족을 기회로, 새로운 물 정책

1. 하수와 폐수를 대규모로 집중 처리·정화하고, 자연 여과작용을 한 번 더 거친 후 상수원에 재공급한다.

2. 해수담수화 기술의 효율성을 높인다(열담수화 공정 → 역삼투압법 → 에너지 회복 및 삼투막 기술).

3. 수원지 상류 근처의 숲과 토양 오염을 개선해서 더 많은 물을 보존하고 오염물질도 더 많이 여과한다.

4. 상하수도 요금 인상, 물 절약형 화장실 변기 공급 등을 통해 도시의 일인당 물 사용량을 크게 낮춘다.

5. 산업용수의 재활용 비중을 확대하고 절수 공정을 도입한다. 농업용수의 가격을 올리고 미세관개농업 같은 첨단 기술을 적용한다.

6. 물 정책은 식량 부족, 에너지 부족, 그리고 기후변화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국가 내·국가 간 정치적 타협을 적극적으로 모색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버치문서와 해방정국 - 미군정 중위의 눈에 비친 1945~1948년의 한반도
박태균 지음 / 역사비평사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미군정은 왜 실패했는가─〈맥아더는 완고〉했고, 〈하지는 순진〉했다


"버치는 1948년 38선 이남에서만 총선거가 실시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서울을 떠났다. 그가 추진했던 좌우합작위원회를 통한 통합 한국 정부의 수립이 실패한 직후였다. 1973년 버치는 한 연구자로부터 미군정 시기를 전체적으로 평가해 달라는 편지를 받았다." "그는 답장에서 2년 반 동안 스스로의 활동이 실패했던 원인은 맥아더가 이끄는 도쿄의 연합군 최고 사령부가 갖고 있었던 이승만에 대한 잘못된 판단 때문이었다고 결론 내렸다." "맥아더는 이승만이 귀국할 때 하지 장군을 도쿄로 불러 이승만을 영접하도록 했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 미국을 대표해서 참여했다. 1973년의 편지에서 태평양 사령부의 잘못된 정책을 지적한 다음, 버치는 한국 내 정치적 문제의 핵심으로 이승만의 문제를 지적했다. 〈이승만은 그에 대한 우리의 혐오를 알고 있다. 그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써서 '한국에서 가장 위험한 두 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는데 하지 장군과 버치 중위〉라고 했다."(18-9)


2 여운형에 대한 미군정의 구애─〈잘 도망다니고 있지만, 여전히 중요하다.〉


"미군정은 왜 여운형이 암살당하는 순간까지 그를 미군정이 주도하는 정국 구상에 끌어들이려 했을까? 쉽게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의 대중적 영향력이었다. 여운형은 사회주의 좌파 계열에서 가장 높은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었다. 이미 일제강점기부터 그는 청년들의 영웅이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안에 따라 소련군과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도 여운형은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소련으로서는 남한의 지도자로 이승만과 김구는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여운형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 또 하나의 이슈는 한국 내 좌파를 분열시키는 것이었다. 해방된 한국에서 조선공산당은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정당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온건하고 미군정뿐만 아니라 일본 총독부와 소통이 가능했던 여운형을 통해 좌파를 분열시키고 강경한 입장의 공산주의자들을 고립시킬 수 있다면, 이는 러시아에 우호적인 좌파 전체의 힘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조선공산당의 영향력을 축소하는 방안이 될 수 있었다."(28-9)


"여운형에게 타격을 입히는 공작은 이승만의 정치 고문이었던 굿펠로에서 시작되었다. CIA의 전신인 OSS(전략사무국)의 대령 출신인 굿펠로는 이승만이 귀국할 때부터 이승만을 옆에서 도왔던 '좋은 친구'였다. 미 국무성에서 해방 직후 이승만의 귀국 비자 발급을 거부하자, 굿펠로는 비자 발급을 도왔다. 준장 진급에 실패한 굿펠로는 이승만의 요청으로 1945년 12월 25일 방한했고, 하지 사령관의 특별 정치 고문으로 1946년 5월 26일까지 한국에서 근무했다." "미군정은 정치공작을 통해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이 조선인민당에서 탈당하여 사회민주당을 창당하도록 지원했지만, 그를 따라나간 정치인은 많지 않았다. 이러한 공작이 여운형에게 정치적으로 큰 타격이 되지 않았고, 미군정의 지시에 대해서도 제대로 응하지 않자, 미군정은 여운형의 정치적 영향력을 축소하기 위한 2단계 작업에 들어갔다. 여운형의 비리(친일행위를 찾는 작업에서 시작된)를 찾아서 그의 대중적 영향력에 타격을 입히는 것이었다."(29-31)


3 여운형의 친일 행적을 찾아라


"1946년 8월 2일 버치는 「여운형의 관계에 대해 제안된 조사」라는 제목의 문건을 작성했다. 여운형이 전쟁 기간 동안 일본의 고위층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정보가 있어서 조사에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주한 미군정에서 파견된 조사관들이 행한 질문의 첫 번째 범주는 여운형과 일본 총독부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었다. 〈여운형과 친한 일본인이 있었는가? 여운형은 일본의 이익을 위해 일했는가? 여운형이 총독부의 돈을 받았는가? 그는 반일 활동을 했는데 왜 체포하지 않았는가?〉 두 번째 범주는 그가 공산당과 연결되어 있는가의 문제였다. 〈그가 스탈린의 친구였다는 것을 아는가? 그가 모스크바의 지시를 받아서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것을 아는가?〉 마지막으로 여운형이 어떤 인물이었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는 민족주의자인가, 기회주의자인가? 그는 중국과 러시아의 꼭두각시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러나 조사관들이 얻은 정보 중 여운형의 명성에 금이 갈 만한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32, 36, 39)


4 여운형의 친일 행위에 대한 최종 조사 보고서


"여운형은 일제강점기를 통해 무력으로 저항한 사례가 없었다. 스포츠를 통해, 그리고 언론을 통해 일본에 저항하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는 스포츠와 언론을 통해 젊은이들을 불러 세워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일본 총독부의 눈에는 여운형이 암살을 통해 독립운동을 하고자 했던 임시정부나 의열단과는 다른 인물로 비추어졌다. 사실 여운형은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었고, 의열단 지도자들과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질 무렵 비밀결사로 '건국동맹'을 만든 것 외에 그가 다른 정치조직을 만들지 않았다는 점 역시 총독부가 여운형에게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조건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운형이 친일의 혐의를 받는다면, 그가 총독과 대화하면서 '자치'를 주장했다는 점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여운형이 주장했던 자치는 소위 친일파들이 주장했던 자치와 다른 맥락이었다. 그의 주장은 완전한 독립으로 가는 하나의 단계였기 때문에 총독부가 수용할 수 없는 방안이었다."(43-4, 49)


5 〈내가 테러리스트들의 애국적 행위를 중지시켜야 하는가?〉


"귀국 초기 이승만의 독촉중협에는 우익뿐만 아니라 좌익의 주요 정당들이 모두 참여했다. 미군정과 마찬가지로 국내의 정치인들은 이승만이 분열되어 있는 정치 세력들을 통합하는 구심점이 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문제는 이승만이 '친일파'들의 참여에 대해서도 문호를 열었다는 점이었다. '친일파'는 일본과 친했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나라를 팔아먹고 일본의 불의의 전쟁에 협력하면서 한국인들을 수탈하고 괴롭히면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던 전쟁범죄자들이었기 때문에 새로 수립될 국가에 참여하면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이 지점에서 이승만이 내놓은 구호가 〈덮어놓고 뭉치자〉였다. 통일된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친일 부역자를 비롯한 모든 정치 세력들이 뭉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좌파 정당들은 이러한 무원칙한 이승만의 원칙에 반발하면서 독촉중협에서 탈퇴했다." "결국 〈덮어놓고 뭉치자〉라는 구호는 그 앞에 〈공산주의자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을 빼고〉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했다."(56)


"이승만 대통령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축은 일제강점기에 많은 돈을 벌었던 친일 부역자들이었고, 다른 한 축은 물리력을 갖고 있었던 경찰과 청년단이었다. 그런데 후자는 미군정에게 가장 큰 고민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불법적인 활동을 자행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보수 우익의 정치 세력들을 뒷받침한다는 점에서 미군정의 정책에 부합될 수 있었지만, 미군정으로서는 불법적인 테러를 자행하고 사람들을 납치하고 고문하는 것까지 용인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 점에 대해 이승만은 청년단이 다치게 한 사람들은 좌파 정치인들이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고, 오히려 '애국자'로 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버치에게 〈당신은 내가 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그들의 애국적 행위를 중지시켜야 하는가? 그들이 죽인 사람들은 좌파들이다〉라고 주장했다. 좌파는 인간적으로 대우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보수적인 미국의 가치관에 충실했던 버치로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었다."(57-8)


6 이승만의 귀국을 막아라


"정치적 승부수를 던지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 이승만이 귀국할 즈음인 1947년 4월 19일 버치 문서의 제목은 「이승만의 외교적 성공」이다. 이승만이 국내외적으로 '실패'했던 4.19혁명으로부터 정확히 13년 전이다." "이승만은 워싱턴 방문을 통해서 미국의 대규모 대한 원조를 얻어냈으며, 모스크바 삼상 협정의 틀은 그대로 유지하되, 남한에서만 임시조선정부가 먼저 수립되는 것으로 미국의 대한정책이 바뀌었다고 선전했다. 또한 남한만의 임시조선정부가 들어서면 그 수장은 이승만이 될 것이라는 소문도 파다하게 퍼졌다. 모두 '가짜 뉴스'였다. 그 당시 TV는 아예 없고 라디오도 몇 대 없었던 상황에서 '팩트 체크'를 통해 대중에게 사실을 알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버치 문서에 있는 이승만 관련 문건들에서 1945년 이전 그와 함께 하와이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은 이미 이승만의 배신과 거짓, 그리고 이승만에 대한 교포들의 분노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쩌다 미군정과 이승만은 이렇게 견원지간이 되었는가?"(68-70)


7 이승만과 김구─문제는 돈이었다


"버치는 1948년 1월 13일 작성한 문서 「이승만과 김구」에서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두 사람 사이의 증오는 부분적으로는 개인적인 질투, 허영심, 그리고 극단적으로 다른 그들의 배경과 현재의 지지로부터 나온다. 노여움이 나오는 가장 분명한 이슈는 돈 문제다. (···) 1945년 가을 한국에 돌아왔을 때 이승만은 현금이 없었다. 반면에 김구에게는 1억 8백만 엔을 포함하여 의지할 수 있는 돈이 있었다. 이것은 중국국민당의 선물이었다. (···) 돈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는 두 사람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며,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돈에 대한 이승만의 욕심은 권력의 수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권력 그 자체는 돈을 획득하는 수단으로서 작동한다. (···) 반면에 김구는 집단의 수장으로 적절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돈을 추구한다. 돈이 많았을 때 그는 북한으로부터 월남한 난민을 위해 사용했고, 극빈자를 구호하는 데 썼으며, 그에게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모두 기부했다.〉"(78-9)


8 내조의 여왕인가, 국정농단의 기원인가─프란체스카 여사


"버치의 문서에는 프란체스카 여사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다. 이승만이 1946년 말 미국으로 날아가 마지막 승부수를 띄우고 있을 때였다." "편지 내용의 대부분은 이승만에게 국내 상황을 알리는 내용이다. 또 다른 편지에서는 보수 우익의 지도자인 김구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조언을 했다. 하지 사령관과 김구의 좋지 않은 관계와, 김구와 김규식의 관계에 대해서 주목했다. 김규식이 반탁운동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고, 이에 따라 김구는 김규식을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공산주의자로 선전할 것이라고 전했다. 그리고 편지의 마지막에서 〈분홍색은 없고 빨갱이라고 하는 것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달했다." "프란체스카는 1946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를 정상화시키기 위해 발표한 공동성명 5호에 대해서도 강하게 자신의 입장을 표명했다." "프란체스카가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녀는 비서이면서 정치적 조언자였다. 그러나 단순한 조언자를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86-90)


9 강용흘을 아시나요


"1946년 강용흘은 미군정청의 출판부장에 임명되었다. 1947~48년에는 주한미군 제24군단 정치 분석관 겸 자문관을 역임했다. 미군정에게는 영어를 잘하는 한국인들이 필요했고, 강용흘은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친일파들이 군정청과 연결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테러리스트들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지금 상황이 식민지보다 나아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이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이승만과 김구는 〈그들의 정당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공산주의자로 낙인찍고 있〉으며, 이것이 테러리스트들을 정당화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보았다." "강용흘은 또한 미군정 아래 한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경찰을 꼽았다." "강용흘이 보기에 해방 정국에서의 암살 사건에 경찰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경찰의 비호를 받고 있는 이승만과 김구가 연관되어 있을 것이며, 이들은 모두 배후에 있었다는 혐의로 감옥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92-6)


10 현직 경찰은 왜 장덕수를 죽였을까


"1947년 12월 2일 미군정을 당혹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민주당의 수석 총무였던 장덕수가 암살당한 것이다. 미군정이 미소공동위원회가 더 이상 한국 문제 해결을 위한 해법이 될 수 없다고 선언하고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이관한 직후의 시기였다. 미군정이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를 하지는 않았지만, 유엔 결의에 따라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을 구성하고, 그 감시하에 38선 이남에서의 총선거를 통해 미국에 우호적인 분단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것이 미국의 구상이었다. 1947년 여운형이 암살되었고, 소련군과의 협조가 폐기된 상황에서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좌우합작위원회는 더 이상 대안이 될 수 없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1947년 내내 미군정과 대립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정에게는 보수 세력 중 가장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던 장덕수를 중심으로 한 한국민주당만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런데 핵심 브레인 장덕수가 현역 경찰이 포함된 2인의 암살범들에게 살해된 것이다."(102)


11 김구의 권위를 떨어뜨려라─1년 전에 이미 계획되어 있었던 김구 암살


"암살자들은 지시하는 사람이 시키면 필요에 따라 김구의 추종자가 되기도 했고, 이승만의 추종자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두려움이 없었다. 이들은 미군정이 해체되고 38선 이남에서 정부가 수립되면, 자신들의 배후에 있는 사람과 친분이 있는 지도자가 대통령이 될 것이고, 곧 풀려날 뿐만 아니라 경제적 보상도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실제로 정치가들의 암살범들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에 출옥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안두희는 출옥 이후에도 호의호식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장덕수의 암살범은 현역 경찰이면서도 자신의 얼굴을 가리지도 않은 채 암살을 저지를 수 있었다. 〈나(버치)는 김성수에 대한 암살 시도와 장덕수의 암살이 11월 30일 이승만의 늦은 동의의 결과였다고 보며, 김성수의 정당이 이승만으로부터 떠난다는 사실을 이승만이 알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장덕수가 이승만의 정책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따라가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는 사실을 그가 몰랐을 리가 없다.〉"(114)


"장덕수가 사라진 상황에서 이제 남은 지도자는 이승만과 김구밖에 없다." "그런데 김구가 친일경찰과 관료, 그리고 자산가들을 보호해줄 수 있었을까? 1948년 1월 22일 문서를 보면 (장덕수 암살 배후로 지목된) 김구가 수신인으로 되어 있는 김석황의 편지를 〈이승만을 위하여〉 신문사에 공객한 것은 경기도 경찰청장 장택상이었다. 피의자의 유죄가 확정되기도 전에 수사 기밀을 언론에 유출하는 기술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이승만은) 김구의 정치적 권위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희망 섞인 말을 했고, 더 이상 잠재적 중요성을 갖는 인물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김구가 자유로운 시민으로 계속 남아 있는 사실에 대한 실망을 숨기지 못했다. 이승만은 아직도 김구의 영향력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다. 이승만의 고귀한 지위에 위협이 되는 김구를 제거하기 위한 행동이 실행되기를 원하는 것 같다.〉" "안두희의 범행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미 1년 전부터 철저하게 준비되었을 가능성이 크다."(120-1)


12 미군정이 믿는 구석은 경찰, 경찰이 믿는 구석은 이승만


"친일경찰들의 문제는 크게 몇 가지로 나뉘었다. 첫째로 중도파나 좌파 정치인들에 대한 탄압 문제였다. 여운형의 경호원들은 수시로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여운형을 경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운형이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를 심문하는 것 같았다." "김규식 역시 공정한 시스템이 보장되지 않는 한 그에게 (최고 지도자가 될) 기회가 없다는 현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고, 그 핵심에는 경찰 문제가 있었다." "둘째로 경찰들의 불법적인 행위였다. 특히 경찰의 힘을 이용한 (민간인들의 재산) 강탈이 문제가 되었다." "그래도 최소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 문제는 세 번째 특징이었다. 바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경찰이 극우 테러 청년단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문제가 불거져도 미군정은 친일 경찰들을 버리지 않았다. 〈반탁운동 세력의 쿠데타 시도는 경찰이 군정에 충성하는 쪽으로 남음으로써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 경찰만이 유일하게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125, 127, 131)


13 '한민당 코트'라는 말은 왜 나왔을까


"미군정은 정치적 사안에 관계없이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경찰밖에 없다고 믿었다. 1945년 12월 30일 군정청을 마비시켰던 반탁운동 세력의 총파업에 경찰만이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가장 충성심이 강한 경찰이 있기에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제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부 운영도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경찰에게는 이승만밖에 없었다. 송진우도, 여운형도, 장덕수도 모두 암살되었지만, 이들이 암살되기 전부터 경찰의 희망은 이승만이었다. 1952년과 1953년 유엔군 사령부가 부산에서 한국군을 동원한 쿠데타를 통해 이승만을 제거하고자 하는 작전을 세울 때도 이승만은 이를 알고 있었다. 군 내에도 이승만에게 충성하는 세력이 없지 않았지만, 유엔군 사령관이 작전 통제권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이승만이 군을 100% 신뢰할 수는 없었다. 이승만이 믿을 수 있는 물리력은 경찰밖에 없었으며,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있는 기간 동안 진정한 의미의 '경찰국가'가 가능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132)


"1948년 5월 10일 선거에 한국민주당은 유일하게 정당으로서 참여했다. 해방 정국을 호령했던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조선독립당, 국민당 등은 개인적인 참여를 제외하고 정당 차원에서는 모두 불참했다. 한국민주당이 이 선거에서 프리미엄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미군정 역시 이를 기대했다. 1947년 12월의 장덕수 암살 사건을 미군정이 뼈아파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미군정 시기 여당이었던 한국민주당이 다수당이 되면 미국에 우호적인 의원내각제 정부가 들어서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과는 한국민주당의 참패였다. 득표율은 12.17%에 그쳤으며 전체 200석 가운데 29석을 얻는 데 그쳤다. 정당도 아니었던 독촉국민회가 55석, 무소속이 85석을 얻었다. 한민당은 유일한 정당이었고 다수당이었지만, 전체 의석에 20%에도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국회를 주도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한국인들이 한민당은 일제에 협력했으며, 동시에 자산가들이 그 중심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136-8)


# 한국민주당 코트 : 좋은 털을 목에 두른 코트를 말한다. 즉 부자들은 일반 사람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의 재산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14 이승만으로 기울어진 운동장─경찰과 청년단


"최근 많은 연구자들이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그것이 왜곡되었든, 아니면 강제적으로 주입되었든 간에 그 결과가 '근대'와 '자본주의 시장'이라는 모습으로 현대 한국 사회의 기원을 형성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제국의 한 모퉁이에서나마 식민지적 근대의 단맛을 느낄 수 있었던 대도시, 그리고 전통 시대의 모습으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한 지방 사이의 차이가 해방 후 한국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구조에 미친 영향은 전혀 주목하지 않고 있다. 식민지 시기를 통해 근대 엘리트 교육을 받은 사람들과 과거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시장에 편입되었던 자본가와 상인들이 한편에 있었다면, 다른 한편에는 조선시대 이래로 계속되고 있었던 지주와 소작인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서로 다른 수준의 교육을 받았고, 사회경제적 지위와 살고 있는 지역이 달랐던 사람들이 원하고 있었던 사회는 같을 수 없었고, 이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 역시 다를 수밖에 없었다."(141)


"당시 전체 인구의 80% 이상이 대도시가 아닌 농촌에 살고 있는 사회구조하에서 서구식 민주주의와 보통선거제도를 적용한다면, 결정적인 키를 쥐는 것은 비도시 지역이 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당시 제헌헌법에서는 대통령중심제임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원들의 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특이한 형태의 정부 구조를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은 수의 국회의원 선출을 좌우할 비도시 지역의 중요성은 그만큼 더 큰 것이었다." "미군정의 지방 정세 보고에 의하면 1947년 가을이 되면 비도시 지역은 거의 이승만 지지 세력에게 장악되었다. 이승만을 중심으로 기울어져가고 있던 한국의 운동장은 미군정에게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우방국 중 신생독립국가에 대해서 내용에 관계없이 민주주의라는 형식을 강조하고 있었던 미국이었기에 이승만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었던 지방의 상황은 보통선거 실시라는 조건 하에서 미군정 역시 손쓸 수 없는 결정적 조건이었다."(142, 146-7)


15 서북청년단이 못마땅했던 미군정


"서북지역 자산가 계층과 기독교인들은 1946년 토지개혁을 기점으로 해서 남쪽으로 대거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 일부가 공산주의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반공 청년단을 조직했고, 자신들의 출신 지역을 조직의 이름에 넣었다. 주목되는 점은 서북청년단에 적극적으로 활동한 사람들은 지주가 아니라 아무런 물적, 지적 재산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1946년부터 1957년까지 이승만의 양아들로 불리울 정도로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니콜스는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는 첩보 부대를 오류동에서 창설했다. 니콜스의 부대는 한국전쟁 이전부터 공산주의 조직들을 파괴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1947년 이후 남조선노동당 지도자들의 체포와 심문 그리고 고문, 1949년 한국군 내 공산주의자들의 숙청과 처형, 그리고 북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을 스파이로 훈련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러한 니콜스의 활동이 청년단과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150, 155-6)


16 친일파의 악행을 고발한다


"1947년 9월 버치에게 건의서를 올린 권태석은, (충청도에서 벌어진) 테러는 좌익이 아니라 우익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우익이나 중립적인 사람들 그리고 기독교 장로까지도 테러의 대상이 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친일 지주가 청년단을 통해 테러를 자행하는 것에 대하여 경찰의 지원 혹은 묵인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좌익 척결이라는 명분하에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체포하고 박해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농민들이 좌익을 옹호하도록 만드는 상황을 초래했다. 아마도 해방 직후 대부분 지역에서 이런 갈등과 테러가 발생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일제에 부역했던 사람들이 다시 권력을 잡았다. 훗날 한국전쟁을 통해 강화된 '반공' 권력은 '부역자 청산'이라는 미명하에서 이들의 영향력을 공고히 만들었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지역 사회는 재편되었고, 이는 결국 이승만이 1948년부터 1960년까지 12년간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었던 가장 기본적인 동력이 되었다."(167)


17 우익의 정치자금은 어디에서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우익 세력들은 어떻게 자금을 마련했을까? 1차적인 자금의 재원은 미군정이었다. 특히 해방 직후 강력한 좌익 세력으로 기울어져 있었던 운동장의 기울기를 우익 측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일정한 지원이 필요했다." "두 번째 자금 조달 방식은 반半강제로 이루어지는 모금이었다. 이는 특히 1946년 말 이승만의 미국 방문 시 이루어졌다. 1947년 2월에 작성된 「이승만 펀드」 를 조사한 미군정의 결론은 모금이 광범위하게 불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경찰이나 청년단과의 협력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셋째로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자산(적산)을 이용하는 방식이었다. 적산은 1948년 미군정으로부터 한국 정부로 이양되었다." "새롭게 수립되는 정부의 재정과 재건에 필요한 자산들은 이렇게 정치자금으로 전환되었고 불법 정치자금의 부담은 모두 일반 국민들에게 전가되었다. 일반 국민들은 그만큼 비싼 가격에 물품을 사야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국민들은 봉이었다."(169, 173-5)


18 어떻게 음식을 확보할 것인가


"미군정은 1947년 지방을 조사하면서 일반인들에게 여론조사를 했다. 〈요즘 관심사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일반인들이 가장 많이 답변한 것은 〈가족을 위해 어떻게 음식을 확보할 것인가?〉(65명)였다." "절대적으로 쌀 생산량이 부족하고, 일본으로부터 수입되던 비료와 석탄이 끊긴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음식의 확보'가 가장 큰 관심사였다는 것은 과연 해방이 한국인들에게 가져다 준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도록 한다." "이런 상황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한 북한에 대한 부러움과 두려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토지개혁 이후에 곡물 세금이 70%에 달한다는 것, 반탁운동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소문, 김일성의 암살 등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소문과 관련된 관심도 있었지만, 38선 이남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은 토지개혁이었다. 일제강점기와는 다른 무엇을 희망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구체적 내용을 떠나 북한의 개혁에 대한 소식은 마음을 들뜨게 했을 것이다."(178-9)


19 미군정이 발간한 『당신과 한국』


"미군정에서 발간한 짧은 한국 소개 책자인 『당신과 한국』은 미군정의 고민을 잘 보여준다. 이 책자에 콜레라나 홍수 등이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보면 1946년 7월 이후에 발간되었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 만약 한국에서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면 미군정의 통치가 실패한 것을 자인하게 되기 때문에 모두 언급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제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책임이 미군정에 있는 것은 아니다. 식민지 시기부터 계속되어 온 조선 자체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미 본토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의 소개말은 한국인들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표시한 것이었다. 일부 오리엔탈리즘적 인식도 보이지만, 미군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감정에 대한 그의 평가 역시 솔직한 것이었다. 해방된 공간에서 다시 외국군의 지배를 받고 살면서 고단한 삶을 살고 있던 한국인들. 그러나 그들에게도 하나의 빛이 날아들었다. 서윤복의 보스턴 마라톤 우승 소식이었다."(191)


20 해방 후 최초의 복권, 올림픽 복권


"한국인들의 마음을 설레이게 한 또 하나의 이벤트는 1948년의 런던 올림픽이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이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두 차례나 올림픽이 열리지 못했다. 게다가 한국인들에게는 처음으로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올림픽에 나갈 수 있는 기회였다. 몇 종목에 참가하고 몇 등을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었다. 아직 독립 정부가 수립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다는 낭보가 1946년 12월 미국으로부터 날아들었고, 다음해 6월에는 국제올림픽위원회에서 조선체육회를 승인했다. 반면 1940년 올림픽을 개최하고자 했던 일본은 독일과 함께 1948년 런던 올림픽에는 초대받지 못했다. 오히려 일본이 1940년 올림픽에 사용하려고 마련했던 차를 한국의 올림픽 선수단이 해방 이후 사용하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런던 올림픽을 소개하는 기사에는 '후원권'이라는 이름으로 발간된 복권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1등 당첨금 1백만 엔은 당시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더라도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192-7)


21 장군의 아들인가, 테러리스트인가


"버치가 김두한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던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한국에서 근무하는 동안 버치가 받은, 김두한의 활동과 관련된 보고서는 모두 부정적인 것이었다. 버치는 김두한과 그의 그룹들이 러치 군정장관뿐만 아니라 한국의 사법부와 경찰에 의해 비호받고 있다고 느꼈으며, 이에 대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버치는 김두한을 체포함으로써 미국이 법과 질서를 지키는 나라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지 사령관에게 미군정이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를 제거해서 정부로서의 권위를 세우기를 희망한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번번이 물거품이 되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김두한은 풀려났다." "버치가 김두한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었던 또다른 이유는 김두한이 여운형 암살 사건에도 관련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여운형이 암살된 직후 만들어진 「경찰과 여운형」이라는 문서에 김두한 관련 내용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203, 207-8)


22 여운형의 죽음과 친일 경찰


"여운형이 암살된 직후 버치는 암살 배후에 김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메모 중에는 김구를 왜 체포하지 않는가라는 메모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버치는 수사가 진행되면서 곧 생각을 바꾸었다. 배후는 김구가 아니었다. 경찰은 암살이 발생할 때마다 김구가 배후라고 주장했지만, 실상 문제는 당시의 경찰이었다. 그들은 모든 혐의의 화살을 김구에게 향하도록 했다." "일부 연구자들은 미소공동위원회나 좌우합작위원회가 모두 미군정의 〈쇼〉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찍부터 소련과의 타협보다 미국에 우호적인 세력을 중심으로 분단 정부를 세우려고 한 것이 미국의 정책이요, 미군정의 계획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버치의 문서 속에 나타나는,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한 미군정의 대처는 생각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단지 하나의 쇼가 아니라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안에 있는 조선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해 구체적으로 추진해 나가는 중이었고, 그 와중에 여운형이 암살되면서 미군정의 계획이 무산된 것이다."(214, 217)


23 미군정이 만들려고 했던 정부─해방 직후 최초의 헌법 초안


"1947년 6월 조선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조치가 미군과 소련군 사이에 거의 합의에 다다랐다. 조선임시정부에 참여해야 할 정당과 사회단체에 대한 합의도 이루어냈으며,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조선임시정부의 구성을 위한 법령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1947년에 미군정이 만든 임시조선정부의 '헌장(charter)' 초안에는 비록 신탁통치 또는 후견 제도와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민주적 통합 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합리적 방안을 담고 있었다. 게다가 헌장의 초안에는 1948년 제정된 제헌헌법 내용의 기초가 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입법부에 의한 행정부의 권한 견제, 사법권의 독립, 지방자치제도 등 민주적 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이후 진행된 반탁운동과 정치 공작, 그리고 수많은 테러 행위들과 여운형의 암살은 한국인들 스스로가 자기들에게 다가온 기회를 차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219, 227-8)


24 농지개혁으로 혁명을 막아라


"미군정이 농지개혁을 위한 방안을 마련한 것은 1947년 12월이다. 그것도 전체 농지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일본인 소유 토지에 국한되었다. 버치는 이러한 농지개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제 원칙을 제시했다. 하나는 농지개혁의 원칙은 '국가의 권력 및 적절한 법적 절차에 대한 영국과 미국의 개념'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다. 토지문제로 인한 광범위한 빈곤이 국가의 안정성을 위협할 경우 국가는 사적 소유권의 원칙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배상금을 지급하면서 농지를 수용하고 재분배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농민들이 농지를 소유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적 요소이며, 한국 사회에서의 농지개혁을 위한 노력은 미국의 '의무'라고 못 박았다. 미군정 통치하의 남한을 안정화하고, 미군정이 떠나더라도 공산주의 혁명을 막기 위해서는 농지개혁이 필수적이라는 것이 버치의 생각이었고, 이 생각은 결국 1950년 농지개혁을 통해 실현되었다."(233-4)


25 버치와 한국민주당의 갈등, 그리고 내각책임제의 실패


"미군정 통치 과정은 '통역 정치'라는 말이 나타날 정도로 통역관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또한 미군정의 중요한 보직에 임명된 한국인들은 대부분 영어권 국가의 대학에 유학한 경험을 갖고 있는 인사들이었다. 그들만이 미군정의 중요 인사와 통역없이 직접적인 대화가 가능했다. 초기 군정청에서 중요한 문제를 통역했던 이묘묵은 절대 권력자로 보였으며, 조병욱의 경무부장 임명도 이묘묵이 선교사 설립 학교 출신이자 컬럼비아대학에서 수학했던 경험이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보수 우익 내에서 라이벌이었던 이승만과 김구의 갈등은 시작부터 게임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의 아이비리그 대학에서 유학한 이후 1945년까지 미국에서 살았고, 김구는 그나마 정규 과정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말 그대로 조선의 독립만을 위해서 살았던 인물이었다. 버치가 김규식이나 여운형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이들의 영어 실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239)


26 버치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 김규식


"미군정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사실은 김규식이 임시정부 소속으로 보수 우익 인사들과 가까운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반탁운동에 참여하지 않았고 여운형과 같은 온건 좌파 정치인들과도 소통이 가능했기 때문에 소련군도 용납할 수 있는 정치인이었다는 점이었다. 또한 그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찬성하면서도 주로 좌익 계열의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참여한 민주주의민족전선(이하 '민전'으로 약칭)에 참여하지 않았다. 김규식은 반탁운동에 반대하면서도 오히려 반탁운동의 리더들이 참여하고 있는 민주의원의 부의장이었다. 민주의원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에 대비하여 미군정이 만든 기관이었고, 민전은 좌익이 이에 대응해서 만든 기관이었다. 1946년 여름 이후 김규식은 미군정이 민주의원의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좌우합작위원회와 입법의원을 주도하기도 했다.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했던 여운형이 입법의원 참가를 거부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247)


"일찍이 그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좌우 합작을 위해 민족유일당 운동에 참여했고, 1942년 임시정부에 합류하면서 온건 우파의 핵심 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 1946년 6월 하지 사령관은 이승만과 김구, 그리고 김규식이 모인 자리에서 이승만과 김구에게 뒤로 물러서서 김규식을 지원할 것을 직접 요청했다." "문제는 김규식이 임시정부 내에서 부주석으로서 일정한 지분을 갖고 있었지만, 반탁운동에 개입하지 않았고 임시정부 내에서 그와 함께했던 정치인들 중 일부가 민전에 참여했기 때문에 보수 우익 내에서 그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정은 45명의 관선 입법의원에 김규식을 지지할 수 있는 정치인들을 선출하여 김규식의 지도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버치의 문서를 보면 미군정 정치고문단이 온건하고 합리적인 인물들을 선택하기 위해 고심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문제는 나머지 45명의 민선의원 중 대부분이 이승만을 지지하는 사람들에 의해 채워졌다는 점이었다."(248-9)


27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실질적인 권력인 미군정과 대립했지만, 이승만은 미군정이 한반도에 영원히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내내 미국에 있었던 이승만은 미국의 정책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정부가 수립될 경우 자신이 권력에서 밀려날 것이라는 점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미국까지 날아가 미소공동위원회와 좌우합작위원회를 중심으로 조선임시정부를 수립하려고 했던 미군정을 비난하는 데 열을 올렸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규식이 1948년이 선거에 참여했다고 하더라도 대통령직은 이승만에게 돌아갈 가능성이 컸다. 만약 김규식이 나섰다면 그는 전쟁이 발발하기도 전에 암살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규식에게 남북협상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1948년 남북 지도자회담이 이승만처럼 북진통일을 추진했던 사람에게는 마지막 시도가 되겠지만, 김규식처럼 평화통일을 희구했던 사람들에게는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는 출발점이었다."(258-9, 264)


28 버치가 평가한 미군정과 해방 한국


"전체적으로 보면 버치가 소장하고 있었던 문서들, 그리고 한국을 떠난 이후 버치에 의해 작성된 편지들을 통해 보면, 미국 본국의 소극적 지원과 한국의 상황을 고려하지 못한 미군정의 정책, 한국인들의 태도, 특히 미국을 지지할 것으로 예상했던 보수 우익 정치인들의 비협조, 그리고 러시아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과 선동이 미군정 실패의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한국의 중도파 정치인들에게 그는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언덕이었다. 버치는 그들에게 사무실과 집을 제공해주었고, 경찰과의 분쟁이 발생하면 해결사 역할을 했다. 그리고 친일 문제와 극우 세력의 테러에 대해 함께 분노해주었다. 그러나 그런 버치도 좌우합작위원회가 실패하고 이승만이 정권을 잡자 결국 이승만에게 항복했다. 버치는 한국을 떠나기 직전 이승만을 만났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초보 정치 전문가로서 더 이상 공산주의자들을 지원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 이승만은 그러한 버치의 태도에 만족해했다.〉"(269, 274-5)


29 현재 한국 사회의 기원을 찾아서─미군정기의 역사


"한국 현대사의 전 과정에서 가짜 뉴스는 계속되어 왔다. 해방 후 한국 사회는 독립운동을 한 진영과 친일 세력 간의 대립 구도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신탁통치안으로 왜곡한 가짜 뉴스들은 이 구도를 좌우 간의 대립 구도로 만들었다. 한국의 식민지화와 일본의 불의한 전쟁에 협력했던 사람들은 반탁운동을 하는 애국적 우익으로 꾸며졌다. 삼상회의 결정을 찬성한 세력은 소련의 속국이 되기를 원하는 매국좌파로 규정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왜곡된 구도 속에서 반독립 세력은 처벌을 받기는커녕 우익으로서 한반도의 남쪽에서 주류 기득권 세력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합리적인 정치인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기득권 주류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스스로가 기득권자인 언론은 합리적인 정치인들을 빨갱이는 아니지만 그에 가까운 '핑크'로 묘사했다. 아니면 철저하게 그들을 외면함으로써 대중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기회 자체를 박탈했다. 이도 저도 안 되면 결국 테러라는 최후의 수단이 등장했다."(28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45년 해방 직후사 - 현대 한국의 원형
정병준 지음 / 돌베개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문


"한국 현대사에서 반탁운동을 주도한 것은 귀국한 임시정부 계열로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미군정 초기(1945년 9월~12월)에 진정한 의미의 반탁운동을 주도한 것은 미군정과 이승만·한민당 계열이었다. 이들은 루스벨트가 1943년 이래 국제적으로 합의하고, 국내적으로 공식화한 대한정책(다자간 국제 신탁통치)을 무산시키는 한편, 그 대안으로 미군정 예하의 과도정부 형태를 출범시키려 했다. 이는 미국 자료에는 정무위원회, 전한국국민집행부, 통합고문회의로 표현되었고, 한국 현실정치에서는 독촉중협으로 구체화되었다. 즉 정무위원회 계획의 현실정치 구현이 독촉중협의 건설이었다. 한국 현대사의 운명을 좌우한 실질적인 동력과 모멘텀은 1945년 말 반탁운동이 아니라 미군정 초기 미군정 주도의 반탁운동이었다는 점이 이 책의 주요한 결론에 해당한다." "각 시대는 그 시대의 주인공들에 의해 운명과 경로가 결정된다. 해방직후사 역시 우리가 개입할 수 없는 곳에서 중대한 결정이 이뤄진 것이다."(23-4)


1장 폭풍: 건국준비위원회, 조선총독부의 종전 대책과 이중권력의 창출


"여운형에게 일제의 패망은 수년 전부터 예견된 대사변이었고, 기다리고 준비했던 해방의 순간이었다." "여운형은 1943년 8월 10일 조선민족해방연맹이라는 비밀조직을 만들었고, 1년간의 준비 끝에 1944년 8월 조선건국동맹을 발족시켰다. 건국동맹은 두 가지 특징을 지녔는데, 하나는 명칭이고, 다른 하나는 조직 활동이었다." "건국동맹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일제 패망 뒤 건국을 준비하는 작업이었다. 건국동맹은 일제의 패망과 한국의 해방, 그 이후에 다가올 건국이라는 민족적·시대적 과제를 고민하고 준비했다. 국내에서 이러한 정세관을 갖고 전국적 규모로 투쟁하고 건국을 준비한 곳은 건국동맹뿐이었다. 일제의 패망과 한국의 해방이라는 대사변을 맞이하기 위한 대책과 준비가 있었으므로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가 바로 조직되고 운영될 수 있었다. 즉 건준은 누군가의 선물이나 우연으로 급조된 것이 아니라 주체들의 선구적 정세관과 투쟁의 결과 해방과 동시에 발족한 기구였다."(39-40)


"해방 이후 여운형과 건준이 주도하는 정국이 확연해지고, 총독부를 매개로 한 치안유지회 참가가 무산되자, 송진우 등 한민당 계열은 여운형을 친일파이자 공산주의자라고 무고하기 시작했다. 송진우 측은 여운형과 건준이 향유하고 있던 해방정국의 권력을 자신들이 차지할 수도 있었던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송진우 측은 해방 직후 여운형의 반복적인 협력 및 합작 제안도 거부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로 해방정국에 임했다. 해방 후 한민당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활동은 여운형이 〈친일정권 수립을 음모한 공산주의자〉라고 끊임없이 공격하는 것이었고, 그 중심인물은 바로 송진우와 총독부의 사전교섭설을 가장 크게 선전한 김준연이었다." "해방 후 한민당의 세가지 길은 여운형을 친일파이자 공산주의라고 공격하는 것, 자신들이 중경임시정부를 절대 지지한다고 주장하는 것, 그리고 미군정의 신뢰를 얻어 고위 관직을 차지하는 것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다."(53-4)


"여운형과 건국동맹 측의 입장은 총독부로부터 치안유지 협력을 요청받았지만, 주체적 입장에서 타협한 후 정권 수립 및 건국 준비의 길로 나아갔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사실상 건준이 해방 공간에서 기여한 최대의 공로는 한국인이 해방을 절감할 수 있는 집회·결사·언론의 자유, 해방의 공간을 물리적으로 보장했다는 것이다. 즉 8월 16일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한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서 정치범 2만여 명이 풀려나 거리를 활보하며, 수많은 한국인이 이 대열에 합류해 '조선 해방 만세'를 외치는 대규모 시위 행진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경찰이나 헌병이 제지하거나 개입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한국인에게 진정한 해방의 날은 8월 16일이었다. 여운형과 건준의 공로는 한국인이 일제의 패망이 한국의 해방임을 실감할 수 있는 직관적 광경을 만들고, 한국인들의 정치·경제·사회적 요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시공간을 마련한 데 있었다. 그것이 바로 해방의 공간이었다."(55)


# 여운형과 총독부가 협의한 5개 사항

1. 정치범 및 경제범을 석방한다.

2. 서울의 3개월치 식량을 확보한다.

3. 건준의 치안유지와 건설사업에 간섭하지 않는다.

4. 학생 훈련 및 청년 조직을 허용한다.

5. 각 사업장의 노동자 협력을 허용한다.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은 건준이 네 세력으로 구성되었다고 회고했는데 공산당원인 극좌파, 비공산주의적인 좌익, 즉 온건한 사회주의자들, 안재홍·이규갑 등의 우익, 여운형을 무조건 지지하는 장권·송규환 등이었다. 송남헌은 건준이 여운형의 건국동맹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세력, 안재홍을 중심으로 하는 우익 세력, 이영·최익한·정백 등을 중심으로 하는 장안파 공산주의 세력, 박헌영·이강국·최용달 등을 중심으로 하는 재건파 공산주의 세력이 연합한 정치단체였다고 보았다. 즉, 제2차 건준은 여운형 중심의 비공산주의적 좌파 혹은 사회주의적·좌파적 원로 세력(건국동맹), 장안파 및 재건파 공산주의 세력, 안재홍과 한민당 중심의 우익 세력의 결합이었다. 크게 보면 세 가지 세력이고, 공산주의 세력을 장안파와 재건파로 나누고, 우익 세력을 안재홍 등 중도우파 세력과 한민당 등 우파 세력으로 구분하면 다섯 가지 세력이 연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여운형 개인의 추종자들이 포함된 것이다."(107)


# 건준 발족 직후(8.18~25) 벌어진 상황

1. 건준이 실질적인 행정권 이양의 주체로 부상하자 총독부 측은 교섭을 빙자한 공작을 펼쳐, 건준에 대한 개입과 개편, 방해와 폐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했다.

2. 송진우 등 우익 측은 유지들을 동원한 수적 우세를 통해 건준의 실권을 차지하려는 의도를 드러냈으며, 이는 건준을 무력화하려 했던 총독부와 이해가 일치했다.

3. 엘리트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된 재건파 조선공산당원들은 해방 후 학생, 근로 대중의 큰 지지를 받았으며, 우익 계열의 건준 잠식을 방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 이 와중에 여운형은 테러를 당해 와병 중이었다.


"해방 후 중망(衆望)을 모으던 건준은 왜 방향을 갑자기 전환해서 인민공화국을 급조(9월 6일 창건)하게 되었을까? 첫째, 미군 진주에 대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공을 창립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여운형 등 건준 지도부는 (인공을 창립하면서) 미군 진주에 대비해 미국에 있는 이승만을 1번으로 인민위원에 지명했으며, 인공 조직을 구성할 때도 이승만을 주석에 선임했다." "즉 인공의 창립은 해방 직후 건준 및 좌파세력이 갖고 있던 정국의 주도권을 연장하는 동시에 〈연합군과 절충할 만한 인민 총의의 집결체〉를 조직함으로써 미군과 갈등 없이 정권을 인수받고, 정식 정부 수립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안으로 구상되었다. 부정확한 정보가 범람하는 상황 속에서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이 취한 확실한 선례를 따라서 남한에 진주할 미군에게 인민위원회·인민공화국을 인정받고자 한 시도였다. 해방 직후의 상황에서 생각해봄직한 방안이었으나, 결과적으로 너무 낙관적이고 주관적인 정세관에 입각한 판단이었다."(155-6)


"둘째, 우익의 중경임시정부 절대 지지에 맞대응하기 위한 방안이었을 가능성이다. 건준은 해방 직후부터 중경임시정부 절대 지지를 내세우는 한민당 계열 및 안재홍과 대립하고 있었다. 건준 장악에 실패하자 우익의 대부분은 9월 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환국환영회를 조직했으며, 인공 창립 이후에는 국민대회준비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중경임시정부 지지를 전면에 내세워 정당성을 확보한 후 한국민주당을 결성했다. 이런 맥락에서 인공의 급조는 우익의 임정 봉대(奉戴)노선을 부정하고, 정부에는 정부로 맞서기 위한 노선이었다. 특히 여운형 자신은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운동의 주역이자 임시정부 창립 구성원(1927년 상해에서 체포됨)이었지만, 명실상부하지 않은 임시정부 형태보다는 독립운동가 정당 형태를 주장한 바 있다." "여운형은 임시정부, 연안독립동맹, 김일성 빨치산 그룹 등 다양한 해외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접촉면을 확보함으로써 현실적 접근을 강조한 것이다."(156-7)


"셋째 이유는 건준 자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자연사적 자기발전 과정이란 건준 주체 측의 설명이었다. 1946년 『조선해방연보』는 건준이 갖고 있던 민족통일전선으로서의 자기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해 인공을 창립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건준의 지도부가 지닌 유약성, 투쟁적 전진성의 미흡으로 정견과 행동이 통일되지 못했기에, 〈인민에게 주권을 두는 인민정부 수립을 위한 비상방법으로 임시인민대표대회를 건준의 지정·추천으로 소집하여 중앙인민위원회를 구성〉했다는 것이다. 〈중앙인민위원회는 본질상 건준을 계승한 것이므로 건준의 역사적 사명은 그 종언을 고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즉 좌익계에서는 인공의 수립이 민족통일전선의 자기강화 과정이었다고 설명한 것이다." "인공의 수립으로 건준 내부에서 갈등하며 길항하던 좌우익의 정권 수립 방략이 대외적으로 폭발하며 중경임시정부 지지 진영과 인공 진영이라는 진영 대결, 정부 대결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158-9, 163)


"9월 14일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부서 책임자가 결정되었다. 여운형은 인민의 지도자라는 칭송을 받았지만, 조직적 결정은 재건파 조선공산당의 수중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20개의 정부 직위는 주석, 부주석, 국무총리, 14부, 3국으로 구성되었는데, 임시정부 인사 5명(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원봉, 신익희), 한민당 인사 2명(김병로, 김성수), 재북 인사 1명(조만식) 등은 모두 본인의 동의를 받지 않은 선임이었으며, 이름만 걸고 대리자가 직을 대신하는 방식이었다. 당사자들은 명의를 도용당하고 실권을 빼앗기는 모양새였다. 이미 인민위원, 후보, 고문 등의 발표에서도 동일한 방식이 적용되었고, 강력한 비판이 제기되었지만, 인공을 주도한 재건파 조선공산당 측은 무모하게 일을 밀어붙였다. 결국 건준이 인공으로 재편된 후, 인공은 거의 사면초가였다. 창립 직후부터 인공은 미군정과 우익은 물론, 공산주의자들과 북한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비판받고 거부당했다."(164-7)


"이로써 인민공화국은 물론 이를 주도한 재건파는 남한 정계에서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우익 인사들의 명의를 도용했다는 즉각적 항의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으며, 모든 정파가 인공 수립 자체를 공박하며 비판했다. 해방 공간에서 건준이 가졌던 능동적이고 주도적인 입장은 방어적이고 수세적인 입장으로 역전되었다. 인공 측은 미군정에 승인을 요청하고 '국' 자 삭제 요청을 거부하는 한편, 귀국한 이승만 등을 찾아가 주석에 취임해줄 것을 애원하는 처지가 되었다. 미군정의 승인을 받아야 정통성과 합법성을 획득할 수 있고, 누군가가 취임해야 명실상부해지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었다. 인공 스스로 권위와 정통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승인과 협력이 있어야 성립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1945년 12월 12일 하지는 인공과 인민위원회 해체를 명령하는 공식 지령을 내렸다. 미군정은 하지의 지령에 따라 부여, 유성, 옥구, 남원 등지에서 인민위원회 해체 작업에 들어갔다."(173-5)


"12월 12일에는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이 민족통일전선의 진전과 임시정부에 관한 담화를 발표했는데 임시정부가 인공의 간부직을 거부한 것을 지적하면서 임시정부를 왕가적·전제적·군주적이라고 비난하는 한편 좌우가 반반씩 세력균형을 이루어 합작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조선인민당 역시 이 시점에서 인공과 임시정부를 동시에 해체·합작하여 좌우연립정권으로 과도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1945년 말에 이르러 인공은 최초의 목표였던 민족통일전선으로서 임시혁명정권이라는 스스로의 규정과는 다른 지점에서 표류하게 되었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인공의 전신인 건준에 대해서도 한민당 등 우익 진영의 부정적인 평가와 비난이 고조되었다. 김종범·김동운은 당시 여항(閭巷)의 설을 인용해 건준이 지방은 물론 재경 선배 및 동지들과의 제휴·협동을 기피하여 통일전선에 일대 지장을 초래하고 수많은 당파의 족생(族生)과 난립을 초래했다고 비판했다."(177-8)


2장 미군의 남한 진주와 알려지지 않은 막후의 영향력: 일본군·통역·윌리엄스의 역할


"남한은 태평양전구에서 진정한 의미의 군정이 실시된 유일한 지역이자, 사전 준비 없어 점령한 지역이었다. 구체적인 정책지침을 확보하지 못한 24군단과 10군의 G-2는 8월 내내 류큐에서 생포한 한국인 전쟁포로 700여명에 대해 강력한 심문을 진행했지만, 서울-인천-부산에 대한 지리적 정보와 한국 정치 문제에 대한 '질 낮은 정보' 외에는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상황을 악화시킨 것은 1945년 8월 19일 태평양전구사령부가 하달한 「작전명령 4호의 부록 8」이었다." "합법적 주권 정부가 있던 일본과 식민권력이 붕괴한 한국의 상황은 전적으로 달랐지만, 고위급 정책은 두 지역을 동일하게 취급했다. 이미 기능이 정지되었고, 건준과 인공이 총독부 권력을 대체하고 있던 상황에서 총독부 관리의 유입은 한국인들이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남한에 진주한 미군의 첫 번째 조치가 식민권력의 유지와 온존이라고 공표한 것은 주한미군에 가해진 최초의 신뢰 타격이었다."(201-4)


# 「작전명령 4호의 부록 8」

1. 군정이 모든 사태를 장악하거나 한국인으로의 대체가 확보될 때까지 일본 정부기구와 관리는 필요할 때까지 이용될 것.

2. 개인의 권리와 재산에 대한 문제는 국제법 원칙을 준수할 것.

3. 모든 한국인은 명백히 그들이 적국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민으로 취급할 것.

4. 카이로선언에 기초해 '적절한 시기에' 한국인들은 완전 독립하게 될 것.


"최초에 한반도 점령 임무를 맡은 것은 미 10군이었는데, 8월 11일 갑작스레 하지 주장 예하의 24군단으로 변경되었다. 24군단과 조선 주둔 일본군 17방면군은 8월 29일부터 9월 4일까지 적어도 40회 이상의 메시지를 계속 주고받았다. 이 메시지 교환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일본군 17방면군이 제공한 정보는 남한에 상륙하는 하지에게 현지 상황에 대한 생생한 초기 정보를 제공했고, 그가 한국·한국인·한국 상황을 바라보는 최초의 시각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이때 일본군이 제공하는 정보는 크게 두 가지에 초점이 맞춰졌다. 첫째, 소련군의 38선 이남 점령 가능성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둘째, 소련의 지시를 받은 공산주의자, 독립운동가, 폭도들에 의한 유혈 사태·무질서·폭동·파업 등의 혼란 상황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17방면군이 강조한 〈공산주의자, 독립운동가, 폭도〉는 총독부가 소련군 진주를 전제로 여운형·안재홍과 타협한 결과 만들어진 건준의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었다."(206-7, 210)


"오다 야스마는 영어에 능통하고, 선교사의 추천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총독부·17방면군의 공식 통역이었으므로, 미24군단 수뇌부와 접촉면이 넓었고, 초기 몇 달 동안 신뢰를 받으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다 야스마는 『주한미군사』에 열다섯 차례나 인용된 유일한 일본인이다. 미24군단은 오다 야스마를 통해 많은 통역사를 확보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24군단 사령관 하지 중장의 통역으로 이묘묵을 추천한 일이었다." "오다 야스마가 연희전문학교 이사로 재임하던 시기, 이묘묵은 1934년 연희전문 교수가 되었고, 이후 학감과 도서관장 등을 역임했으며, 1941년 이후 연희전문학교 학감·학교장으로 이사회에 관계했다. 이묘묵은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속되어 사상전향을 한 후 적극적으로 친일활동에 나섰다. 이묘묵의 친일행적은 연희전문학교 동료 교수인 갈홍기와 함께 1938년 미나미 지로 총독을 면담하는 사진이 『경성일보』에 실릴 정도로 유명했다."(213-6)


"미군은 9월 8일 제물포에 상륙했고, 9월 9일 일본군 항복식이 개최되었다. 상륙 사흘째인 9월 10일 오후 5시 30분 연합군 기자단 환영회가 명월관에서 개최되었다." "하지 중장을 비롯한 24군단 고위 장교들과 군사실 요원 등이 참석한 자리에서 이묘묵은 『코리아 타임스』 편집장 자격으로 참석해서 〈여운형은 친일파이자 공산주의자로, 조선총독부의 돈을 먹고 친일정부를 수립했다〉는 그 유명한 악의적 연설을 했다." "명월관 연설 이후 이묘묵은 하지 중장의 개인 통역이자 '비서실장'이 되었으며, 미군정기의 대표적인 문고리 권력이 되었다." "『코리아 타임스』는 한민당, 연희전문학교, 기독교계 인사들이 미군정의 요직으로 등용되는 출발점이었다." "이들을 필두로 미군정을 통한 일제 권력의 불하가 시작되었다. 누군가에게는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과 같은 권력 획득의 순간이었으나, 해방 한국을 기대했던 한국인의 희망과 염원이 근저에서부터 붕괴되는 순간이기도 했다."(218-21)


"해군 군의관이었던 조지 윌리엄스는 1907년 4월 7일 인천에서 태어나 (감리교 선교사인) 부친 프랭크 윌리엄스를 따라 충남 공주 등에서 15년 동안 거주한 적이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한국 주둔 미군과 동행한 후, 하지의 개인 고문으로 3개월간 일하면서 윌리엄스가 한국 현대사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게 되는 상황과 구조는 미군 진주 이후 한국 현대사가 당면한 총체적 모순과 위기를 설명하는 열쇠다." "윌리엄스에 따르면 하지가 '정치고문'으로 배치된 그에게 부여한 임무는 세 가지였다. 첫째,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하지의 자문에 응하는 것, 둘째, 하지를 대신해 한국인 지도자들에게 미군정이 하는 일을 전달하는 것, 셋째, 미군정 고위직에 적합한 한국인을 수배하는 것 등이었다." "하가(Kai Yin Allison Haga)는 윌리엄스에 의해 초기 미군정이 한국 내 기독교 그룹, 교육받은 엘리트, 선교사 사회의 의견과 필요에 경도되었으며, 한국의 우익, 특히 기독교 엘리트들이 미군정을 지배하도록 만들었다고 평가했다."(227-31)


"윌리엄스는 진주 직후 한국 정치를 한민당과 인공의 대립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한민당이 보수적이고, 평화를 애호하며, 미국이 한국 정부를 건립하는 데 협력하길 원하는 사람들이라고 칭찬하면서 그들의 당 강령의 첫 항에 일본으로부터 한국을 해방시켜준 미국에 감사를 표현하는 항목이 있다고 밝혔다." "윌리엄스가 해방 직후 한국의 정치 상황을 독해하는 기본적인 문맥은 한민당의 주장을 그대로 복제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는 친일 문제에 대해 매우 관대한 태도를 취했다.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한국인은 충분히 친일적이며 충분히 친생존적이어서 그만큼 전쟁 노력에 협력해야만 했다〉고 발언했다. 그의 발언은 해방 직후 악질 친일파들이 주장하던 국민공범론, 식민지 환경론 등과 동일한 것이다. 조병옥이 친일경찰을 두둔하며 입에 달고 살았던 친일(pro-Jap)이 아니라 목구멍이 포도청(pro-Job)이었다는 주장과 동일한 것이다."(234-7)


3장 미군정의 총독부·인공·임시정부 정책과 권력의 불하


"미군정 진주 이후 가장 중요했던 양지의 정치적 결정은 총독부 관리 유임과 해임, 인민공화국 부정과 해체, 임시정부 지지 및 주요 인사 입국의 추진이었다. 보다 중요했으나 알려지지 않은 음지의 정치적 결정은 주요 직책에 대한 정실 인사(권력 불하)였다." "미군정 초기의 가장 중요한 인선의 통로는 고문회의의 조직이었다. 고문회의라는 조직 형태는 한민당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한민당 중앙집행위원회는 1945년 9월 22일 〈명망과 식견을 구비한 인사로써 중앙위원회를 조직하여 행정과 인사에 자문케 할 것〉을 건의했고, 이것이 수용되었다." "고문회의는 일제 시기 어용기관이었던 중추원의 재판이었는데, 좌파는 인민공화국의 약화를 우려했고, 우파는 임시정부의 약화를 우려했다. 한국인들의 열광적 환호도 없었다. 고문회의는 조직되자마자 실패임이 분명히 드러났고, 미군정도 이를 자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문회의 방식은 미군정 초기 권력으로 향하는 중심적인 통로가 되었다."(318-20)


"『주한미군사』의 설명에 따르면 1945년 10월부터 12월까지 약 7만 5,000명의 한국인 관리들이 임명되었는데, 이전 직을 유임시키거나 신규 임용한 것으로 대부분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1945년 말까지 이뤄진 7만 5,000명의 신속한 임명은 친일 관리만으로도 충원될 수 없는 규모였는데, 적절한 자격시험이나 배경이 검토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구잡이 충원과 추천이 이뤄졌음을 의미한다. 최소한 5만 명 내외가 어느 날 갑자기 관리로 임용되었으며, 어떠한 자격심사나 배경 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중앙과 지방에서 이뤄진 유일한 절차는 고문회의 및 각 부서별 고문회의의 추천과 투표를 통한 결정 과정이었다." "따라서 구조적으로 고위 공직과 하위 공직을 막론하고 친일파 출신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행정 경험이 있는 총독부 출신 친일관리와 행정 경험이 없는 그 밖의 친일파와 무자격자들이 공직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유일한 자격 요건은 한민당의 추천과 미군정의 승인 절차 뿐이었다."(325-6)


"특히 미군정은 (질서 유지 명목으로) 공권력의 핵심인 경찰 및 내부행정 인력을 급속하게 수직적으로 강화했다." "일제하의 경찰이 억압적인 국가 물리력으로 잔인하고 효율적이고 조직적이었다는 게 중론인데, 미군정하에서는 1946년에 2배, 1948년에 3.4배로 규모가 확대되었다. 한국전쟁 전후 이승만 정부에 쏟아진 '경찰국가'라는 비난은 공정하지 못한 측면이 있는데, 이승만 정부가 새로 만든 정책이라기보다는 미군정으로부터 비롯된 유산이자 관성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경찰 간부 중 친일파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는데, 1946년 말 경위급 이상 간부 1,157명 중 82퍼센트인 949명이 총독부 경찰 출신이었다. 1948년에 이르면 경찰 관련 3만여 명을 제외한 관리 수는 14만 9,549명으로 폭증했다. 친일 관료들은 일제 식민정책에 봉사한 경력 때문에 친일파 처단과 식민지 잔재 청산에 반대하는 공동의 이해로 통합되었고, 해방정국의 혁명적 요구에 맞섰다."(326-8)


"미군정기 한민당, 기독교 계열, 서북·흥사단 계열은 동일한 지향을 가진 집단을 다양한 측면에서 다른 이름으로 호명하는 것일 뿐 내용적으로는 동일성을 유지했다. 일제시대 기호와 서북의 대결, 이승만과 안창호의 대립, 동지회와 흥사단의 대립, 흥업구락부와 동우회의 대결 구도는 유명했는데, 미군정이 들어서자 상황이 달라졌다. 서북·흥사단·동우회의 지도자 안창호가 사망한 이후 서북 계열은 지도자를 상실한 상황이었고, (노년의 외로운 우익 지도자로 그려진) 이승만은 귀국 후 국내 지지 기반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양자는 대결보다는 협력을 선택했고 인공·여운형·좌파에 반대하고 친미·반공 노선을 추구하며, 미군정의 권력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지도자 안창호를 잃은 서북·흥사단 계열은 미군정기 이승만을 구심점이자 정치적 지도자로 삼았다. 결과적으로 서북·흥사단 계열은 미군정기 권력을 추구하면서, 사실상 이승만 중심의 한국 정치구도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347-8)


"나아가 한민당의 핵심 인물이자 한국 우파의 중심인물인 김성수, 송진우 등은 1910년대 이래 이승만과의 관계에서 일종의 수직 관계를 형성했으며, 이는 해방 후에도 동일하게 작동했다." "한민당과 흥사단 계열은 연로한 이승만이 곧 종이호랑이나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서 권력이 자신들에게 이양될 것으로 생각했다. 이들은 이승만을 '국부'로 추대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신들의 권력을 포장하고 대표하는 일종의 정치적 대리인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즘의 총아였던 이승만은 자신을 뒷방 노인네 취급하려 했던 한민당과 서북·흥사단 계열에 대한 원한을 잊지 않았고, 대통령이 되자마자 이들을 배척했다. 이런 측면에서 미군정기 행정권력을 향유했던 한민당과 흥사단 계열은 이승만의 정치적 승리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지만,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자 원치 않는 야당으로 배척되었다. 이들은 권력의지라는 측면에서 이승만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348)


4장 알려지지 않은 진정한 반탁운동과 그 귀결


"정치적 경험이나 판단 능력이 부재했던 하지는 〈좋은 교육을 받은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라 미군정 통제하에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일종의 과도정부를 수립한다면 모든 한국인이 격렬히 반대하는 신탁통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45년 10월 이래 주한미군사령부 정책문서들은 이 구상을 '전한국국민집행부' 혹은 '정무위원회' 등으로 호명했으며, 그 실체는 이승만 중심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약칭 독촉중협)였다." "그러나 남한의 좌익과 중도파를 이승만 아래로 끌어들이고, 귀국하는 임시정부까지 여기에 통합시킨다는 정치공학적 구상은 주체들의 정치적 욕망과 이질적 지향을 고려한다면 실현 가능성이 없는 유치한 공상 수준이었다. 또한 이를 전시 회담에서 각국 수뇌부가 이룬 국제적 합의를 파기하고 대안으로 제시하기에는 설득력이 전혀 없는 사무관급의 탁상공론이었다. 나아가 이 구상은 강경하고 공격적인 반소·반공 노선에 입각한 발상이었기에 국제회담에 내놓을 수도 없었다."(355-7)


"역사의 진실은 아이러니한데, 임시정부가 귀국한 직후 미군정이 심혈을 기울였던 정무위원회(=독촉중협)는 실패로 귀결되었고, 하지의 일급 참모 송진우는 암살되었으며, 반탁운동 과정에서 임시정부 세력은 미군정을 접수하기 위한 '쿠데타'를 시도했다. 하지 등 미군 수뇌부는 한민당을 신뢰하면서, 비현실적인 임시정부 지지·귀국·활용 정책을 추진했는데, 막상 귀국한 임시정부는 미군정의 기대를 저버렸다. 임시정부는 미군정이 운용하는 장기판의 말이 되기보다는 독자적 행보를 선택했던 것이다. 임시정부는 미군정의 지지 기반이 아니라 가장 뼈아픈 배신의 비수가 되었으며, 몇 개월 동안 미국 정부의 공식 대한정책을 부정하고 대안으로 구상했던 정무위원회는 실패했다. 모스크바회담에서 합의된 한국에 대한 결정은 원래 예상했던 신탁통치 계획이라기보다는 '임시 정부 수립' 후 '신탁통치'라는 복잡한 함수로 구성되어 있었고, 하지는 반탁을 고무하다가 미군정 자체를 전복시킬 뻔했다."(378)


"태평양전쟁기 이승만은 한국에서 이미 잊힌 존재였다. 그가 명성을 떨친 것은 사반세기 전인 1919년 3·1운동과 상해임시정부 시기였다." "3·1운동기에 독립운동을 열렬히 지지했던 재미 한인들은 이미 노령이 되었으며, 새로 태어난 2세들은 한국의 독립운동이나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었고, 새로 등장한 재미 한인사회의 지도부는 사업적 성공을 바탕으로 한 실용적·합리적 인물들이었다. 직업적 독립운동가의 시대는 이미 저물었다. 1943~44년 이승만 중심의 주미외교위원부 개조 논쟁은 이러한 시대 변화를 반영한 것이었다. 중경에서 임시정부 내 한독당과 민혁당의 대결, 워싱턴에서 이승만과 한길수, 이승만과 재미한족연합회의 대립은 태평양전쟁기 미 국무부와 전쟁부의 한국 문제 인식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한국은 오랜 식민지였던 탓에 자치 능력이 없는 데다 중경과 워싱턴의 독립운동 진영이 분열되어 있는 것도 분명했기 때문에 한국 독립이나 임시정부 승인은 불가능하다는 게 그들의 인식이었다."(380-1)


"이승만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시정부를 승인받기 위해 백악관, 국무부, 전쟁부, 국회의원 등에게 수십 통의 편지를 쓰고 청원을 벌였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이미 1차 세계대전 때 사용했던 것처럼, 임시정부 승인을 촉구하면서 자신의 개인적 명성을 추구한 방식이었다. 미 행정부를 향한 이승만의 노력이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미 군부와 공작기관인 COI와 OSS는 이승만을 주목했다." "1941~42년 시점에 OSS가 김구-이승만 간의 무선연락을 중개하자, 임시정부는 이승만이 미 군부 및 공작기관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미국 내 위상이 높다고 과대평가했다. 이는 1943~44년 재미 한인사회에서 이승만의 독단적인 외교 행태를 비판하며 주미외교위원부 개조 논쟁이 벌어졌을 때 김구와 임시정부가 국민회 등 재미한족연합회의 의견을 배척하고 이승만을 재미 한인사회의 중심인물로 여기는 계기가 되었다. 미 군부 및 공작기관들은 해방 후 이승만의 조기 귀국에 결정적인 도움을 제공했다."(381-2)


"이승만의 귀국 과정, 귀국 직후 '민족 지도자'로서의 명성을 확립하고 독촉중협을 중심으로 정치적 지지 기반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하지의 태도와 후원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1945년 11월 독촉중협 조직, 1946년 2월 민주의원 조직, 1946년 중반 이승만의 남선순행, 1946년 11월 이승만의 도미 외교는 모두 하지 등 미군정 수뇌의 전폭적인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승만의 명성, 독촉중협·독촉국민회·민주의원 등의 조직, 정치자금의 조성 및 운용 등에서 미군정의 도움이 미치지 않은 게 없었다. 특히 미군정은 대한경제보국회의 불법정치자금을 이승만에게 제공했으며, 도미 외교자금의 불법적 강제모금과 불법적 환전 및 사용을 묵인했다." "1946년 말 이승만이 도미 외교 과정에서 하지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한 후에야 양자의 관계는 파열되었고, 하지는 배신의 쓴맛을 보았다. 이승만은 자신이 미군정의 탄압과 반대에 맞서 싸운 반공의 십자군인 것처럼 선전했지만, 역사적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9386-7)


"(미군정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은) 이승만은 눈가림으로라도 외국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독촉중협을 결성해야 한다며 나라의 운명이 우리 손에 있지 않고 외국의 손에 있으니, 일치단결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신탁 문제를 방어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승만과 송진우 등은 모스크바회담에서 미국 주도의 한반도 신탁통치 계획이 상정되고 결정될 것임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며, 이에 반대하는 미군정 계획의 적극적인 실행자이자 협력자였다. 역시 가장 큰 문제는 임시정부의 참여 여부였다. 이승만은 임시정부를 조직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독촉중협에 흡수한다는 계산이었다. 즉 임시정부 절대 지지를 내세우며 시작한 독촉중협이 이승만의 정치적 기반이 될 가능성이 농후해진 순간, 이승만은 군정이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를 내세우며, 민의 대표기관인 독촉중협에 임시정부 인사들이 개별적으로 참여하고 임시정부는 해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01)


"모스크바회담에서 신탁통치안이 논의되고 결정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이승만과 한민당 두 세력은 모스크바회담의 결정문이 공개되기 직전에 일련의 반탁 성명과 소련 일국 신탁통치 주장을 펼쳤다." "12월 27일 한민당 기관지인 『동아일보』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한 반면 소련은 소련1국에 의한 단독 신탁통치를 주장했다고 1면에 보도했다. 모스크바 공동성명서가 한국 시각으로 12월 28일에 워싱턴, 런던, 모스크바에서 발표되기 만 하루 전에 나온 이 보도에는 인명과 지명을 제외하고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도 12월 29일 오후에야 워싱턴과 도쿄를 거쳐 서울에 도착한 모스크바 결정서 원문을 볼 수 있었다. 주한미군사령관 하지보다 이틀 앞서 모스크바 결정서를 볼 수 있는 한국인은 없었다. 허위, 왜곡, 날조로 점철된 이 기사는 곧 한반도를 (아이러니하게도, 김구와 임시정부 세력이 주도하는) 반탁운동의 거센 소용돌이로 이끌었다."(406-7)


남은 말: 1946년 5월의 대분기


"1946년 5월은 미군정기 한국 현대사를 재편하는 중요한 대분기였다. 정치적으로 이 시점에서 미군정은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에 대한 집중적인 공격, 여운형에 대한 회유와 공작, 김규식에 대한 점증하는 신임과 좌우합작운동 지지 등을 분명히 드러냈다. 정판사 위폐사건을 필두로 조선공산당 지도자인 이강국, 이관술, 박헌영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고, 정판사가 입주한 조선공산당 본부는 몰수되었으며, 조선공산당의 기관지 『해방일보』는 정간되었다. 1945년 진주 직후 상황을 살피고 현상 유지에 집중하던 때와 달리 진심이 담긴 미군정의 총공세였고, 조선공산당에 대한 적대감과 분쇄 의지를 명백하게 표출한 상황이었다." "미군정은 중도파 여운형을 박헌영 및 조선공산당과 분리시키기 위한 정치공작도 병행했다. 1945년 하반기 이래 이미 정치적 난관에 처했던 여운형은 38선을 넘어 평양의 김일성, 김두봉과 소련군 사령부를 방문함으로써 돌파구를 열고자 했다. 좌우합작·남북연합 노선의 출발이었다."(412-3)


"한편 이승만-한민당-미군정의 기축적 동맹은 탄탄하게 유지되었다. 이승만은 1946년 4월부터 6월까지 한민당이 중심이 된 경찰, 행정관료, 우익 청년단체 등의 열광적 지지를 받으며 남한을 순행했다." "이승만이 남한 각 지역을 방문하는, 소위 남선순행에 발맞춰 우익 청년단은 좌익 정당과 사회단체를 폭력적으로 공격했고, 경찰의 방관 속에 지방 사회에서 좌우 세력 균형은 역전되었다. 이승만의 남선순행 전후에 벌어진 이러한 전국적 현상을 통해 대중은 미군정과 경찰·공권력이 누구를 지지하는지, 누그를 배격하고 있는지를 직관적이고 물리적으로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여세를 몰아 이승만은 1946년 6월 남한의 최대 우파 대중조직이던 독촉국민회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1946년 초반 반탁운동으로 고조되었던 김구와 임시정부 계열에 대한 지지를 떠올려본다면 믿기 힘든 승리였다. 김구는 자신이 이승만 다음의 제2인자임을 인정함으로써, 우익 진영의 서열이 분명하게 정리되었다."(413-4)


"1946년 말이 되자 모든 것이 명징해졌다. 미군정하의 행정권력은 한민당의 수중에 들어갔고, 정치적 지배력은 이승만이 행사하고 있었다." "38선 이북에서는 1946년 2월 이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조직되어 민주개혁을 앞세우면서 실질적인 단독정부로 성큼 다가서고 있었다. 1946년 말에 이르러 남한은 대혼란, 북한은 대건설의 현장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거울처럼 상대방을 비추고 있었다.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 남북에서 각각 자국에게 우호적인 정부를 세우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었다. 한반도에는 좌우, 남북, 미소라는 세 층위의 갈등과 압력이 중층적으로 쌓이고 있었다. 언제, 어디에서, 누가, 무슨 일을 벌일지는 예견할 수 없었지만, 폭풍우가 몰려오고 있다는 점은 분명했다. 누구에게는 이제 끝이 보이려는 참이었고, 누구에게는 끝이 보이지 않는 혼돈 그 자체였고, 누구에게는 막다른 골목이었다. 행위 주체들에 따라 시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하기 시작했다."(42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